작년 11월부터 올해 2월까지 약 3개월 반 동안 [혁명]을 주제로 독서 모임을 했었습니다.

그때 리스트업된 책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빽빽하네요. 권 수로 놓고 보면 11권이나 되지만, 작품 편 수로 보면 7편. 역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혁명'들을 고루 맛 볼 수 있게 작품 선택에 신경을 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맛 보기'에만 그친 감이 있습니다. 왜 이게 '혁명'이냐라는 질문도 심심찮게 받았죠. 특히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안나 카레니나>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혁명'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입니다. 관련 문화 상품, 예술 작품도 많죠. 하지만 기존에 널리 알려지고 고착된 혁명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깊이'를 포기하고 '폭'과 '다양함'을 택했습니다. 당시 제가 썼던 소개글(작품 선정의 변)은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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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북 막독 프로젝트 7기 :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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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과 한 단어의 진정한 만남에 기회가 필요할 때도 있다.
- 위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서


여러분 각자에게 ‘혁명’이란 무엇인가요? 어떤 의미인가요?

혁명에 대한 정의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각자의 입장에 따라, 삶의 경험과 감정의 결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혁명하면 덮어놓고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입만 열었다 하면 혁명을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을, 체 게바라나 레닌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폭력 사태나 쿠데타를 혁명이라 우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혀 다른 관점에서 스마트폰의 등장을 혁명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쇄술의 등장, 증기기관의 발명에도 역시 혁명이란 이름이 따라 붙곤 합니다.

다르게 풀자면 ‘혁명’이란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급격한 변화’ 또는 ‘밀어닥치는 흐름(물결)’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혁명은 우리들 각자에게 혁명에 동참할 거냐고 의사를 묻지 않습니다. 혁명은 폭력적이며 무차별적이며 비가역적입니다. 그것은 규모와 속도, 영향력의 측면에서 개인을 압도하며, 정치•경제 제도는 물론 일상의 관습을, 생각과 행동의 방식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바꿔놓습니다. 그 결과 개인의 정신과 신체에 무한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강렬한 충격과 상처를 남겨놓기도 합니다. 이러한 변화와 충격 앞에서 우리들 각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걸까요. 적극적으로 물타기를 하는 것, 속절없이 휩쓸리는 것, 포기하고 체념하는 것, 혹은 좋았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요.

혁명의 시대를 살아간 개인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려 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역사의 소용돌이에 속절없이 휩쓸리고 갈팡질팡했는지, 그런 가운데서도 어떻게 저항의 거점을 구성했으며 희망의 실마리를 찾았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막독 7기 ‘혁명’>이 저 크고 무거워 보이는 단어인 ‘혁명’과 진정한 만남을 가질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 프랑스 혁명

슈테판 츠바이크, <마리 앙투아네트> 청미래
- 프랑스 혁명

에밀 졸라,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시공사
- 19세기 파리 소비 혁명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문학동네; 펭귄클래식; 민음사
- 러시아 농촌운동

미야베 미유키, <가모우 저택 사건> 북스피어
- 일본 2.26 사건

위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문학동네; <인생> 푸른숲
- 중국 문화대혁명 등

 

작품 선정 작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혁명'이라는 단어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게 되더군요. 소개글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개인의 힘으로는 맞설 수 없는 '거대한 물결' 내지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 바로 '혁명'이라고 나름의 정의를 내렸습니다. 혁명이라고 하면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정치적 차원만을 떠올리는데 여기서 벗어나게 된 게 고민의 결실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거대한 물결',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란 정의가 모호하고 포괄적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게 보자면 오늘날도 얼마든지 '혁명기'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보 혁명, 스마트 혁명, 신자유주의 혁명(?), 노동(유연화) 혁명(?), 자기계발 혁명 등. 이런 식으로 얼마든지 같다 붙일 수가 있는데, 이게 또 나름 대로 설득력이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들 자신이 매일 매일의 삶에서 '돌이킬 수 없는 흐름'에 휩쓸려 있다는 점을 피부로 느끼기고 있기도 합니다.

 

당시 [혁명] 최종 리스트에서 결국 빠지게 됐지만 아쉬움이 남는 책

코바야시 타끼지 <게 가공선>

 

 

 

 

 

 

 

 

 

 

 

리스트가 한없이 늘어나는 건 막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일곱 편의 작품만을 선정했습니다만, 아쉬움도 많이 남았습니다. 특히 '프랑스 혁명'은 개인적으로 관련 책을 좀 더 읽고 싶었는데 일단은 '프랑스 혁명' 관련 책을 두 권을 선정했다는 걸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노명식,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책과함께, 2011). 따로 프랑스 혁명에 대해 공부를 좀 해보고 싶어서 구입해둔 책인데, 거의 못 읽었습니다. 사실 이 책은 예전(1997)에 나온 책을 개정판으로 낸 것인데, 그래서 그런지 서술 방식이나 문장이 좀 전형적이고 구태의연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서술이 '객관적' 역사 서술일 터인데, 로버트 단턴 류의 재기발랄한 착상과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요소들을 연결시키는 흥미진진한 서술 방식이 더 익숙해져서인지 잘 읽히질 않았습니다.  

 

최근(2013년 6월)에 출간된 <오늘 만나는 프랑스 혁명>도 눈여겨보고 있는데, 노명식 교수의 책과 더불어 읽어보려 합니다. 이번에는 느린 호흡으로 재도전!

 

 

그런데 바로 어제 (정말이지) '신기한' 책을 하나 발견, 프랑스 혁명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생겨났습니다. 바로 아래의 책입니다.

 

 

 

 

 

 

 

 

 

 

 

 

 

 

(로베스피에르를 다뤘다는 점에서) 제목부터 끌리는데, 역사가도 아닌, 프랑스 작가도 아닌 한국 소설가가 '로베스피에르'를 소재로 글을 썼다는 게 무척 흥미롭습니다. 혹시 알레고리가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정말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이라고 합니다. 덧붙여 출판사 책소개에 따르면, 한국에서 프랑스 혁명을 소재로 쓴 소설을 최초라고 합니다. (뭐 이상하진 않네요.)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읽어볼만한 다른 책들은 다음의 것들이 있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두 도시 이야기>나 <마리 앙투아네트>와 같은 책을 읽을 땐 그 존재감을 잘 느낄 수 없었던 인물입니다만, 어쨌든 프랑스 혁명의 '주역' 중의 '주역'이라고 하겠습니다. (<두 도시 이야기>는 픽션이라 역사적 실존 인물이 거의 등장을 하지 않고, <마리 앙투아네트>에서는 미라보 백작이 가장 존재감이 있는 편입니다.)

 

한편, 아무리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 혁명의 '주역'이라고는 하나 이건 교과서에서 주입받은 지식에 불과합니다. 적극적 관심을 갖게 되려면 아무래도 다른 계기가 필요한데, 저에게는 그 다른 계기가 일본 TV 애니메이션 <베르사유의 장미>였습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만화가 원작인데, 만화가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전을 많이 참조했다고 합니다. 물론 오스칼, 앙드레는 가상인물이지요.

 

TV 애니메이션에서는 오스칼이 로베스피에르와 조우하는 장면이 짤막하게(하지만 인상 깊게) 나옵니다. 그리고 생쥐스트가 무분별한 폭력의 화신으로 역시 짤막하게 등장하죠. 츠바이크의 원작에서는 로베스피에리나 생쥐스트는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츠바이크의 원작에서 꽤 비중 있게 다뤄지는 미라보 백작이 TV 애니메이션에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프랑스 혁명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중요 인물은 당통입니다. 거기에 서준환 소설 제목이 <로베스 피에르의 죽음>이어서 곧바로 떠오르는 소설은 게오르크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입니다.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중 한 권으로 올 초에 출간이 됐습니다. 게오르크 뷔히너는 독일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게오르크 뷔히너 상'이 있어서 익숙한 이름인데, 생각해보면 신기하게도 이런 경우 대체로 수상자가 더 유명하고 정작 상이 이름을 따온 당사자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듯...... 프랑스의 '공쿠르 상'이 또 다른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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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에 이어 <위대한 개츠비>가 열풍입니다만, 이러한 '대대적인' 열풍은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뭔가 객쩍기도 한 게 사실입니다. 남들 다 읽는 걸 마치 휩쓸리듯 읽는 건 싫다며 상기 작품들의 인기에 대해 (저처럼) 묘한 반감을 가진 독자들도 꽤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해서 최근의 대대적인 열풍과는 다소 무관한, 그렇지만 나름 대로 '핫'한,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주목할 만한' 세계문학들을 꼽아봤습니다.

 

'우왓, 드디어 이 책이 나왔구나!' 내지 '어머, 이건 사야해!'라는 반응을 반자동적으로 이끌어내는, 출간 사실 자체가 반가운, 욕심 같아서는 앞뒤 잴 것 없이 바로 지르고 싶은 책들이지만, 주머니 사정이나 개인적으로 정리해둔 '읽어야 할 책' 리스트의 빽빽함을 고려해서 구매를 미뤄둔 것들이 많습니다... (뭐 몇 권은 어쩔 수 없이 질러버렸습니다만...) 말하자면 저 나름 안간힘을 써 가며 '지름신 강림'을 막고 있는 책들입니다.

 

 

 

 

 

 

 

 

 

 

 

 

 

 

 

 

지난 4월, 독일 작가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1.2>가 북인더갭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이 작품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더불어 '20세기 모더니즘 3대 걸작'으로 꼽힌다고 합니다. 이런 작품이 아직까지 국내에서 완간이 안 됐다는 사실--뭐 알고 보면 그런 경우가 꽤 많기도 합니다만--이 우선 놀랍습니다. 덧붙여, 누군지는 몰라도 이 세 작품을 '3대 걸작'이라는 이름으로 묶은 이는 참 심한 악취미의 소유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묶어 두면, 독자는 알게 모르게 한 작품을 읽으면 다른 두 작품도 읽어야 한다--적어도 구매는 같이 해두어야 한다--는 심적 압박을 받게 되니 말입니다... 좋은 마케팅 수단이라 하겠습니다.

 

<특성 없는 남자>는 카프카의 <소송>,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엮이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역시 마케팅의 한 수단이기도 하겠습니다만) 출판사 책 소개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지난 1999년 독일의 『차이트』(Die Zeit)지에는 놀라운 발표가 실렸다. 독일의 대표적 지성 99명에게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독일어 소설을 설문한 결과, 카프카의 『소송』(2위), 토마스 만의 『마의 산』(3위)을 제치고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 『특성 없는 남자』가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렇게 엮더라도 막막하기는 매한가지긴 합니다... 그렇지만 분량이나 난이도 면에서 따진다면 [프루스트-조이스-무질] 조합 보다는 [만-카프카-무질] 조합이 훨씬 덜 막막합니다. 시기나 장소적으로도 "'20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독일 작가' 3인방의 대표작이"라는 식으로 한정이 되니 좀더 집중해서 읽을 수도 있겠고, 집중해서 읽고 나면 뭔가 남는 것도 많을 것이라는 기대도 가져볼 수 있겠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마침 토마스 만의 <마의 산 1.2>(을유문화사)과 카프카의 <소송>(펭귄클래식)을 소장하고 있으니 올 여름은 독일 작가 3인과 함께 보내볼까... 생각을 해봅니다만, <특성 없는 남자>가 출간된 두 권으로 완간이 아니라는 게 함정.

 

뭐 작품 자체가 미완이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완간을 기대해봅니다.

 

이번에 출간된 『특성 없는 남자』 1, 2권은 1932년 베를린 로볼트사에서 출간된 소설 1권의 83장까지를 번역한 1차분이다. 옮긴이는 1천여페이지에 이르는 생전의 출간분을 앞으로 순차적으로 출간할 계획이라며 “유럽의 짧은 자유주의 이후에 발생한 파시즘을 예견한 이 소설이 신자유주의 이후의 암울한 시대를 헤쳐나가는 우리 독자들에게 뜻깊은 작품으로 다가가길 바란다”고 밝혔다.

 

 

 

 

 

 

 

 

 

 

 

 

 

 

 

 

 

 

4월에는 제가 좋아하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초조한 마음>(문학과지성사)도 나왔습니다. 몇 번 언급했었습니다만 한국에서 츠바이크의 작품은 (생각해보면 이상하게도) 이른바 '메이저급' 출판사에서 출간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온 <체스이야기, 낯선 여인의 편지>는 유일한 예외라 하겠습니다.) 메이저급 출판사의 노하우가 책 만듦새에 반영이 안 돼서 그런지 딱 보기에 구매욕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번역의 질이나 가독성을 고려한 깔끔한 편집 등의 측면에서 안심을 할 수 없다는 점 등이 한국에서 츠바이크의 상대적으로 '낮은 인기'의 원인이라 생각됩니다. 

 

<초조한 마음>은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내고 있는 [대산세계문학 총서] 중 한 권으로 나왔습니다. 대산세계문학 총서는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품, 알려지긴 했으나 아직 번역되고 있지 않은 작품 위주로 그 목록이 꾸려지고 있습니다(국내 초역의 비중이 70퍼센트 정도라고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작품성이나 문학사적 의의는 충분하되 대중성은 좀 떨어지는 작품들인 거죠. <초조한 마음>도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지 못했더라면 이런 좋은 만듦새, 디자인으로는 나오지 못했겠죠... (번역은 아직 확인을 못했습니다.)

 

 

한편, 만듦새와 디자인 면에서는 좀 '구린' 느낌이 들지만, 제가 아주 재밌게 읽었던, 그래서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번역도 나름 괜찮습니다) 츠바이크의 작품은 다음의 두 작품입니다.

 

 

 

 

 

 

 

 

 

 

 

 

 

 

 

 

2013년 상반기에는 왠지 파란색 표지의 세계문학 작품들을 자주 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초조한 마음>이 그렇고, 다음에 소개하는 작품이 그렇습니다. 가장 최근에 세계문학 전집 시장에 뛰어든 창비에서 가장 최근에 펴낸 (최근 이래 봤자 벌써 2월의 일입니다만...) <미하엘 콜하스>입니다. 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카프카가 좋아한 작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창비에서 <미하엘 콜하스>라는 제목으로 펴낸 이 작품집은 이미 책세상에서 2005년에 <버려진 아이>라는 다른 단편을 표제작으로 해서 출간된 적이 있습니다. 즉 표제작이 다를 뿐 두 책은 같은 책의 번역본입니다. 다만 번역을 비교해보니 창비에서 새 번역본을 내면서 번역에 무척 신경을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책세상 판이 평이한 산문체인데 반해, 창비 판은 작가 특유의 문체를 살리기 위해 '민담체'라 부를 만한 독특한 문체를 사용하고 있고 번역어 선택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습니다.

 

두 번역본을 비교해서 읽어본다면 소설에서 '문체'가 갖는 중요성을 자연히 알게 되리란 생각입니다.

  

 

 

 

 

 

오늘날 독일문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독일이 낳은 가장 위대하고 대담하고 야심 찬 문학가 (…) 둘도 없는 희곡작가였으며―둘도 없는 산문작가이자 소설가”(토마스 만)로 손꼽히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leist, 1777~1811)의 중단편소설집 『미하엘 콜하스』가 창비세계문학 14번으로 출간됐다. 이 작품집은 표제작 「미하엘 콜하스」 외에 「O. 후작 부인」 「칠레의 지진」 「싼또도밍고 섬의 약혼」 「로까르노의 거지 노파」 「주워온 자식」 「성 체칠리아 또는 음악의 힘」 「결투」 등 클라이스트 중단편 여덟편 전체를 완역하여 묶어 냈다.


클라이스트 특유의 문체를 그대로 살리고자 문단 구분, 간접화법과 직접화법 등을 충실히 따라 옮기되, 잘 읽힐 수 있도록 세심하고 적확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한 것이 이번 번역본의 특징이다. 방대한 분량의 중편소설 「미하엘 콜하스」의 경우, 등장인물 및 사건전개를 설명해주는 부록을 실어 작품의 이해를 도왔으며, 본문 뒤에는 50여 페이지에 이르는 작가의 생애 및 수록작 각각에 대한 깊이있는 해설을 덧붙였다.

 

 

 

5월에는 톨스토이의 <부활 1.2>이 문학동네에서 나왔습니다. <부활>의 판본은 (<안나 카레니나> 만큼은 아니지만) 다양합니다. 열린책들에서 2010년에 나온 게 있고, 민음사에서는 일찍이 2003년에 출간된 바 있네요.

 

참고로, 민음사 판의 역자인 박형규 교수는 '톨스토이 전문 번역가'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톨스토이 작품들을 번역해내고 있습니다.

 

 

 

 

 

 

 

 

 

 

 

 

 

 

 

 

 

 

 

 

 

 

 

 

 

 

 

 

 

 

 

 

 

박형규 교수는 현재 뿌쉬낀하우스라는 출판사에서 '똘스또이 전집'을 펴내고 있기도 합니다... 만, 현재 출간된 것은 <안나 카레니나> 한 권 뿐... 이 책이 출간된 게 올 4월의 일인데, 현재(6월)까지 아직 다른 작품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네요. 기대하고 있는 것은 역시 <전쟁과 평화>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뿌쉬낀하우스 판은 단 권이라 책 부피와 무게가 들고 다니며 읽기엔 곤란할 정도라는 점에 유의하시길...

 

 

 

 

 

 

 

 

 

 

 

 

 

 

 

러시아 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역자 '박형규'로 검색해서 책을 살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안나 카레니나> 번역으로 미루어 보건대) 박형규 교수의 번역은 문장이 다소 긴 편이고 단어 선택이나 대화 번역이 옛스럽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믿고 읽을 만한 번역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전쟁과 평화>가 새로 번역돼서 나오는 게 늦어지고 있는데 (소문에 따르면 펭귄클래식에서 조만간 출간 예정이라고 합니다...) 박형규 교수가 번역한 범우사 판은 구해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책 만듦새, 디자인, 편집 등 외형적 측면에서 요즘의 '세련된' 독자들의 눈높이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

 

 

 

 

 

 

 

 

 

 

 

 

 

 

 

하지만 뿌쉬낀하우스에서 <전쟁과 평화>가 출간된다 하더라도 박형규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될 것이 거의 100퍼센트 확실하니 당장에 읽어보고 싶은 분은 범우사 판으로 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펭귄클래식에서 '조만간' 번역본이 출간된다고는 하나, 이 '조만간'이 과연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르니 말이지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신간은 항상 유의해서 보게 됩니다. 모르긴 몰라도 현재 세계문학전집을 펴내고 있는 출판사들 중에서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가장 '공격적인' 출판사가 문학동네가 아닌가 싶습니다. 작품 출간 페이스가 빠르다는 점이 그렇고, 전집 구성의 측면에서도 기존 '세계문학'의 리스트 안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세계문학'들을 발굴해서 펴내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테오도어 폰타네의 <에피 브리스트>, 라파예트 부인의 <클레브 공작 부인>, 닥터로우의 <래그 타임>, 존 더스패소스의 <맨하탄 트랜스퍼> 등이 그런 느낌을 들게 하는 작품들이었죠.

 

그러던 문학동네가 100권을 찍고 난 후에는 톨스토이, 헤세, 나보코프, 포크너 등 기존 '세계문학' 카테고리로 돌아가는 듯해서 좀 아쉬웠는데(그 와중에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 출간은 반가웠습니다만), 최근에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 <모래그릇 1.2>을 세계문학전집의 108번째 권으로 펴냄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마쓰모토 세이초라고 하면, 아직까지는 국내 독자들에게 낯선 이름이겠지만 일본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 사카모토 료마 등과 더불어 '국민 작가'의 반열에 올라선 작가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으로 불리기도 하죠. 미스터리(추리소설)란 본래 기발한 범죄의 트릭과 탐정의 개성에 의존하는 등 오락물의 성격이 강한 편인데, 마쓰모토 세이초는 뭣보다 '동기'의 묘사에 중점을 두면서 추리소설에 '사회성'을 추가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미스터리'의 새로운 경향으로서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흐름을 만들어내고 주도한 작가인 것이죠.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들은 이전에도 간헐적으로 번역 출간이 됐었는데, 주로 추리 소설을 펴내는 동서문화사에서 몇 편 출간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세이초 월드]라는 이름 아래, 체계를 갖춰 시리즈로 출간되기 시작한 게 불과 작년(2012년)의 일입니다. 미야베 미유키, S.S. 반 다인 등의 추리 소설을 전문적으로 펴내고 있던 북스피어 출판사와 역사비평사의 임프린트(?)인 모비딕 출판사가 의기투합, 번갈아가며 세이초 작품을 펴내고 있고, 현재까지 <짐승의 길>, <일본의 밤과 안개> 등 총 6편의 작품(권 수로는 8권)이 출간되었습니다. 세이초 작품 세계를 체계적으로 소개한다는 나름 야심찬 기획입니다만, 아직까지 판매량은 그리 높지 않은 듯.

 

 

 

 

 

 

 

 

 

 

 

 

 

 

 

 

 

 

 

 

 

 

 

 

 

 

 

 

 

 

 

 

 

한데, 같은 작가의 같은 작품이라도 어떤 맥락에서 읽게 되느냐의 문제는 나름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이초의 작품을 [동서문화사 미스터리 걸작선] 중 한 권으로 읽는 것은 [세이초 월드] 시리즈 중 한 권으로 읽는 것과 다르고, [문학동네 세계문학 전집] 중 한 권으로 읽는 것과 또 다른 느낌일 수가 있는 거죠.

 

추리소설은 SF와 더불어 장르 소설의 양대 산맥이랄 수 있겠는데, 세계문학전집 리스트에는 거의 오른 적이 없었죠. (출판사 이름처럼 '세계문학'이란 범주에 대해 가장 '열린' 태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열린책들에서 셜록 홈스 시리즈 중 한 권이라든지, S.S. 반 다인의 <비숍 살인 사건>이라든지,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 등을 세계문학 시리즈로 출간한 적은 있었습니다만.

 

마쓰모토 세이초의 <모래그릇> 출간을 신선한 사건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세이초가 '고전 작가'라 부르기엔 가까운 시기에 활동한--2차 대전 이후 시기에 활동한--'현대' 작가라는 점, 그리고 노벨상 내지는 (순문학에 주어지는 상인) 아쿠타가와상을 받지 않은 '일본 작가'라는 점. (물론 세이초는 초기작 <어느 고쿠라 일기 전>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습니다만, 전반적으로 순문학 작가로 여겨지는 작가는 아닙니다.) 

 

이런 작품이 세계문학전집 리스트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굉장히 신선한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각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 리스트를 잘 살펴보면 일본 작가의 작품이 있는 경우는 (2차 대전 이전의) 근대 작가이거나 노벨상을 수상했거나 한 작가들(나쓰메 소세키, 가와바타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 다자이 오사무 등)로 한정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학동네만이 이런 경향에서 벗어나 이즈미 교카나 이노우에 야스시, 메도루마 슌 등 다수의 일본 작가들을 전집 목록에 넣은 바 있습니다. 하지만 '순문학 작가'로 간주되는 이들에 비해 '대체로 대중 작가로 간주되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을 리스트에 넣은 건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일본 소설을 전집 리스트에 많이 넣고 있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행보와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2009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가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어 히트했다는 사실입니다. <1Q84>는 '1억엔'이라는 기록적인 선인세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었는데요, 어쨌든 <1Q84>는 결과적으로 손익분기점을 훌쩍 넘는 판매고를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2009년 12월부터 문학동네가 세계문학전집을 펴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출판사 내에서는 "하루키 팔아 세계문학전집 낸다"는 말이 나돌았다고도 합니다...

 

뭐 확실한 증거는 없고 소문과 정황 증거뿐입니다만, 실제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구성에서 일본 소설 비중이 상당히 높다는 사실을 고려하면--그리고 최근의 <모래그릇> 출간을 고려하더라도--이러한 뒷얘기는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리기도 합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세이초의 작품이 '세계문학 전집' 리스트에 올라감으로써 '세계문학' 범주의 외연이 크게 확장된 셈입니다. 어쩌면 조만간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작이나 대표작을 전집 리스트에서 보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세이초 이야기를 했으니 세이초의 '장녀'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미야베 미유키(팬들은 '미미 여사'라고도 부르죠)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마침 신작이 두 권이나 나왔습니다. 앞서 (모비딕과 함께) [세이초월드]를 발간하고 있다고 소개한 북스피어에서 <진상 1.2>이란 작품이 출간되었고, <솔로몬의 위증>(문학동네) 역시 곧 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 역시 '사회파 추리소설가'로 알려져 있지요. 이런 점에서 세이초의 후계자란 평가를 듣고 있습니다.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도 영화화되어 꽤 인기를 끈 <화차>(문학동네, 2012), 90년대 일본의 부동산 버블 문제를 다룬 나오키 문학상 수상작 <이유>(청어람미디어, 2005)가 제가 읽어본 이른바 '사회파 추리소설'에 해당하는 작품입니다. 그 외에 <모방범>(문학동네, 2012) 등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분량이 많아 좀 부담이 됩니다. 뭐... 미미 여사든 세이초든 워낙에 다작을 한 작가들인지라 주요 작품만 찾아 읽는다고 해도 ㅎㄷㄷ...

 

ㅎㄷㄷ 하는 와중에 재밌게 읽은 미미 여사의 소설로는 1930년대 중반 2.26 사건을 다룬 역사 SF 소설 <가모우 저택 사건 1.2>(북스피어, 2008)이 있습니다.

 

 

 

 

 

 

 

 

 

 

 

 

 

 

 

 

 

 

 

 

 

 

 

 

 

 

 

 

 

 

 

미미 여사는 한국에서도 나름 탄탄한 팬층을 거느리고 있고 <모방범> <화차> 등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스승' 격인 마쓰모토 세이초는 그닥 알려지지 않은, 뭐랄까 좀 불균형한 모양새입니다. 

 

마쓰모토 세이초와 미미 여사의 연결 고리가 확연히 드러난 책으로는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북스피어, 2009)가 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가 책임 편집을 맡아 수록 작품을 골랐고, 작품들을 주제별로 묶었으며, 친절하고 간단한 해설/감상까지 곁들였습니다. 만듦새도 괜찮고 수록된 작품들이 하나 같이 재미 있어서, 상중하 세 권을 갖추고 있으면, 뭐랄까, 한 달 치 식량을 쌓아놓은 듯, 꽤 든든한 느낌을 주는 컬렉션입니다.

 

 

 

 

 

 

 

 

 

 

 

 

 

 

 

 

처음에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와 함께 '3대 모더니즘 걸작'으로 꼽힌다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언급했었는데요, 작년에 민음사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2 : 스완네 집 쪽으로>가 나온 이후, 올해 5월 펭귄클래식에서도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 스완 댁 쪽으로>란 제목으로 출간이 됐습니다. 덕분에 '골라 볼 수 있는' 재미/사치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완간은 아닌지라 마음 먹고 통독을 하려면 조금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펭귄에서 나온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는 페이퍼백이 아닌 하드 커버로 나왔고, 북커버도 블랙 펭귄 디자인이 아닌 새로운 디자인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가격이 다소 '쎈' 편이지만 <스완네 집 쪽으로>(펭귄 판에서는 <스완 댁 쪽으로>로 번역)를 1, 2로 분권하지 않고 한 권 합본으로 냈다는 점에서 그렇게 '쎈' 편은 아니라 하겠습니다. 뭐 이렇게 생각해야 치미는 소장 욕구/강림하는 지름신을 영접할 수 있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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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13-06-07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몰랐던 작품 알고 갑니다. 찜해둬야겠어요^^

시로군 2013-06-07 19:55   좋아요 0 | URL
지름신 강림에 유의하시길.. ^^;;

천사 2016-09-17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식으로 서평을 쓴다면 한 편 쓸 때마다 보양식을 드셔야 할 거 같은데... 거저 먹는 거 같아 가책이 드네요... 감사합니다.

시로군 2016-12-12 16:41   좋아요 0 | URL
에고. 아닙니다. 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뒤늦게 댓글을 다네요..^^;;)
 

 

 

 

 

 

 

 

 

 

 

 

 

 

 

 

 

민음사. 2009.

열린책들. 2011.

 

 

 

 

 

 

 

 

 

 

 

 

 

 

 

 

 

문예출판사. 2008.

문학동네. 2011.

서울대학교출판부. 2011.

 

 

 

 

 

 

 

 

 

 

 

 

 

 

 

 

 

토마스 하디, <테스> 백석 옮김. 서정시학. 2013.

 

백석이 옮긴 <테스>가 출간됐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테스>를 한 번 읽어보려던 차에, 책이 나왔네요. 백석은 왜 하필 <테스>를 번역했나, <테스>의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번역했나, 번역어 선택에 있어 어떤 기준을 갖고 있었나 등을 체크하며 읽어봐야겠습니다.

 

 

 

 

 

 

 

 

 

 

 

 

 

 

 

 

 

근대 문인들이 번역한 세계문학 작품으로는 페이퍼하우스에서 출간한 에밀 가보리오의 <르루주 사건>, 코난 도일의 <붉은 실> 등이 있습니다.

 

 

엮은이 박진영으로 검색하면 다른 번안 소설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번역과 번안은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겠습니다. 원작에 대한 충실도는 번역이 높죠. 번안은 원작의 내용과 줄거리, 즉 뼈대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인명, 지명, 풍속 등은 시대나 장소에 맞게 바꾼 것입니다. 말하자면 '로컬라이징'을 한 것이 번안인 것인데, 원작의 의도가 당대 현실에 비추어 어떻게 변형되고 재해석되는지를 살펴보는 게 재밌습니다.

 

 

 

 

 

 

 

 

 

 

 

 

 

 

 

 

 

 

 

 

 

 

 

 

 

 

 

 

 

<애사>는 <레 미제라블>의 번안 소설이고 <해왕성>은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번안 소설입니다.

 

 

 

근대 초기 세계문학 작품의 번역, 번안에 대한 논의는 위의 책들을 엮은 박진영의 책들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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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쇼의 <카프카에서 카프카로>가 나온 김에 카프카 관련 논의들이 실린 책을 정리해둡니다.

 

 

 

 

 

 

 

 

 

 

 

 

 

 

 

 

 

 

 

 

 

 

 

 

 

 

 

 

 

 

카프카의 편지를 모은 책들도 꽤 나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플로베르 서간집도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는데, 살아 생전엔 출간이 안 될지도.

 

생각해보면 신기한 게, 어째서 한국 독자들은 카프카의 내면이나 인간 관계에 대해서는 그렇게 궁금해하면서도 여타 작가들(플로베르를 포함해서)의 사적 측면에 대해서는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 걸까요?

 

 

 

 

 

 

 

 

 

 

 

 

 

 

 

 

 

 

 

아무래도 가장 유명한 것은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일 텐데, 카프카가 쓴 이 편지들은 결코 아버지가 받아 읽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카프카는 편지를 쓰고 나서 어머니에게 먼저 보여줬는데, 어머니는 편지를 읽고 다시 카프카에게 돌려줬다고 하죠. 그러니까 명목상의 수신자와 진정한 수신자가 따로 있었던 셈인데, 이런 식의 메시지 전달 방식, 즉 발신인에서 수신인으로 곧바로 전달되는 게 아니라, 매개자를 통해 우회적으로 전달되는(사실은 전달되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라고 볼 수도 있는) 방식은 카프카 작품을 관통하는 모티프라고 하겠습니다.

 

 

 

 

 

 

 

 

 

 

 

 

 

 

 

 

 

엘리아스 카네티가 쓴 <카프카의 또 다른 소송Kafka's Other Trial>은 1980년대에 <카프카의 고독한 방황>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적이 있는데, 지금은 물론 구할 수가 없습니다. 이 책에서 카네티는 첫 번째 약혼녀인 펠리체 바우어에게 보낸 편지를 분석하는데, 제목에서 카프카가 펠리체에게 쓴 편지의 성격을 명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즉 카프카가 연인 펠리체에게 보낸 편지들은 연애 편지라기보다는 일련의 '소송'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카프카 평전은 아래의 책들을 읽어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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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말, 영화가 개봉하면서 <안나 카레니나>를 읽기 좋은 조건이 갖춰졌습니다. 일단 각 출판사들에서 가격 할인 행사를 하고 있어서' 꽤 저렴한 가격'에 3권 짜리 세트를 구비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저렴한 가격'이 유혹적이란 건 슬픈 일--뭐랄까, 우리 시대의 정신적 빈곤함을 드러내는 일이랄까요--이긴 합니다만.


책이 떨이로 팔려나가는 걸 보면 씁쓸합니다. 마트나 백화점 한 켠에 마련된 특설 할인 매대에 쌓여 있는 상품들을 이리 저리 함부로 다루는 것처럼 책을 다루고 사고 팔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도 무려 <안나 카레니나>를 말입니다. 뭐 책도 일단은 '상품'이긴 하죠.

 

옛날에 비하면 우리는 책을 엄청나게 '싸게' 그리고 '간편하게' 구해서 읽을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책을 '빨리, 간편하게' 읽는 분위기가 조장된 것 같기도 합니다. 남들에게 뒤처진다는 느낌을 받는 게 싫어서라도, 책을 재빨리 읽고, 요약, 정리, 소화하지 않으면 마치 소화불량에라도 걸린 듯 마음이 불안해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패스트푸드를 흉내 낸 패스트북도 등장했죠. 한 번 읽고 버리는 게 대놓고 컨셉인 책입니다. 이런 분위기인지라 정독을 한다거나 이미 읽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건 시간 낭비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너 시간 많은가봐?'라는 비아냥 섞인 말을 듣기도 합니다. 딱히 누가 옆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내 속의 또 다른 나'가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결국 책을 덮고 '할 일을 하기 위해' 컴퓨터를 켭니다. 그러고는 곧장 '정보의 바다'로... 그리하여 책은 너무도 쉽게 덮히고 맙니다. 정보의 바다에는 책 내용을 간명하게 요약해주고 있는 글(소화제?)도 많아서 책 읽기를 대신해주기도 합니다.

 

싸게, 간편하게가 지배적인 소비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우리는 어떤 물건이 됐든 어떻게 하면 '싸고 간편하게' 구매할 수 있는지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상품의 가격(가성비)이나 할인율을 비교하는 것이 스마트한 소비의 기본 원칙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하지만 실은 꽤 분주한, 핏발과 신경이 동시에 곤두서는 소비 방식이라 하겠습니다). 결코 소비의 대상만으로 국한될 수 없는 책을 살 때도 마찬가지여서, 가격 비교 사이트에서 할인율을 비교한다든지 경품 제공 여부를 체크한다든지 하며 보내는 시간만해도 상당합니다. 씁쓸한 건 이걸 지금 쓰고 있는 저도 예외가 아니라는 거.

 

그런데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려면 이 비교의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합니다. 제가 <안나 카레니나>를 읽자고 마음을 먹은 건 작년 가을의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어떤 <안나 카레니나>를 읽어야 하냐는 것. 문학동네, 민음사, 펭귄클래식, 작가정신 등, 새번역본을 낸 주요 출판사만도 네 군데. 넉넉지 않은 주머니 사정 때문에 <안나 카레니나> 4종 세트를 구비할 수도 없고.

 

 

 

 

 

 

 

 

 

 

 

 

 

 

 

 

 

일단은 문학동네판을 골랐습니다. 역자(박형규)가 낯익기도 했고,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 중 첫 번째 권이라는 점도 뭔가 만듦새의 충실함을 기대하게 했습니다.

 

읽어본 결과는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일단 내용에 푹 빠져서 읽느라 번역이 잘 됐는지는 거의 신경을 못 쓰고 읽었습니다. 어찌보면 이런 게 훌륭한 번역이겠지요.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자, 다른 번역본은 또 어떨까, 가 궁금해지더라구요. 그래서 가장 최근에 나온 펭귄클래식 <안나 카레니나>를 골라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펭클판도 대체로 자연스럽게 읽혔습니다. 어떤 번역으로 읽어도 빠져들어 읽게 되는 게 <안나 카레니나>의 매력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두 판본을 읽다보니 차이도 보이더군요. 일단 문동판은 문장 자체가 길고, 뭐랄까 조금 옛스러운 표현이 많습니다. 반면에 펭클판은 단문이 좀더 많이 보이는 편이고, 단어 선택에서 좀 더 현대적인 느낌이 나는 단어들을 택하거나 대화(독백)에서 문어체가 아닌 일상어, 구어체적 표현을 쓰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 대목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모스크바에서의 기억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모두 올바르고 유쾌한 일들뿐이었다. 그녀는 무도회를 떠올렸다. 브론스키와, 그의 사랑에 빠진 듯 공손한 얼굴빛을 생각해보았다. 그와 자기와의 관계를 모두 떠올렸다. 부끄러워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회상이 이 대목에 오자 갑자기 부끄러운 마음이 강해졌다. 마치 그녀가 브론스키를 회상하는 바로 그 순간 어떤 내부의 목소리가 뜨겁다, 굉장히 뜨거워, 타오르는 것 같다하고 그녀에게 얘기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 그게 어쨌다는 걸까?’ 그녀는 자리에 고쳐 앉으며 결연한 어조로 자신에게 물었다. ‘이 일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난 이 일을 똑바로 보는 게 두려운 걸까? 정말 어떻게 된 걸까? 그럼 나와 그 어린애 같은 사관 사이에 보통 친지 이상의 특별한 관계라도 있다는 것일까, 아니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녀는 비웃는 듯한 웃음을 띠고 다시 책을 들었다. 그러나 이제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어도 조금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창유리를 페이퍼나이프로 긁어보고, 이어 미끈하고 싸늘한 유리에 지그시 볼을 눌렀다. 그러자 별안간 아무런 까닭도 없이 환희에 사로잡혀 자칫 소리내어 웃을 뻔했다. 그녀는 자신의 신경이 마치 음을 조절하는 나사에 걸린 악기의 현처럼 줄곧 팽팽하게 조여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129/ 문동 1: 200-1)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되돌아봤다. 다 좋았고 즐거웠다. 무도회를 상기하자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진 그의 순종적인 얼굴이 떠올랐고 그와의 관계 역시 죄다 기억났다. 창피해할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도 창피한 감정은 더욱 강렬해졌다. 브론스키를 떠올렸을 때 마치 내면의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따뜻해, 아주 따뜻해. 뜨거워.’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그녀는 안락의자에서 고쳐 앉으며 결연히 말했다. ‘이게 뭘 뜻하지? 내가 이 일을 직시하는 걸 두려워하기라도 한다는 건가? 어째서? 정말로 나와 그 애송이 장교 사이에 뭔가 다른 관계가, 그러니까 여타 아는 사람들하고는 다른 관계가 존재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그녀는 경멸하는 웃음을 띠었고 다시금 책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는 유리창에 종이 자르는 칼을 문지르고는 칼의 매끄럽고 차가운 표면을 뺨에 대고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을 사로잡은 기쁨에 소리내어 웃을 뻔했다. 그녀는 어떤 나사에 감기는 현처럼 신경이 점점 더 팽팽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펭클 1, 210)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번역에 있어서의 차이는 뚜렷이 드러나는 편이지만, 장단을 콕 집어서 둘 중 어떤 번역이 더 낫다, 라고 확언하는 건 좀 어렵습니다. 물론 세세하게 보면 각 번역본 간의 장단점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다음의 대목은 확실히 펭클본의 번역이 낫습니다. '태엽을 감는다'라는 표현에서 '일이 풀린다'로 이어지는 스테판 내면의 의식의 흐름을 잘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가 어떤 캐릭터--농담을 좋아하고, 대책없이 낙천적인 캐릭터죠--인지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원문의 의도를 잘 살리고 있죠.

 

 

저 독일인은 한평생 시계태엽을 감도록 자기도 태엽이 감겨져 있다고 말했던 자기의 익살을 생각해내고 빙그레 웃었다. 스테판 아르카디이치는 재미있는 익살[재치 있는 농담]을 좋아했다. ‘아마 모든 일이 깨끗이 수습될 거야! 근사한 말이다, 깨끗이 수습된다는 건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 말을 어디다 써먹어야겠는걸.’ (14, 문동 1권 35면)

  

  

그래, 어쩌면, 알아서 잘 풀릴지도 몰라! 좋은 말이야. ‘알아서 잘 풀릴 거다.’ 이런 건 말해 줘야 해.’ 그가 생각했다. (펭클 1권 56면)

 

 

하지만 세세한 수준에서 본다면 문동본 번역이 펭클본보다 나은 대목도 많습니다.

 

이렇게 되면 판본 선택에서의 관건은 역시 가격이 되는 것일까요. 가격 이외의 다른 요소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가령 저의 경우엔 판형이나 표지 디자인 면에서 펭클 세계문학 전집을 선호하는 편이라 펭클본을 (할인 혜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골랐습니다.

 

하지만 할인 혜택 때문에 나중에는 결국 민음사본도 사두게 되더군요. 무려 반값 세일을 하는 걸 보고 바로 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할인 매대에서 '떨이'로 산 것 같단 느낌이 들어 좀 씁쓸하긴 했지만, 어차피 나중에 좀 시간이 지나고 민음사본으로도 다시 한 번 읽어볼까, 고민하고 있던 차여서, 다른 한 편으론 반색을 하며 바로 지른 것도 사실입니다.

 

 

 

***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나서 많은 점을 느꼈는데요... 여기서 '많은 점'이란 건 굉장히 막연하고 모호한 것이 사실입니다. 고전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어떤 느낌, 감상이 생기게 되는데요, 저는 그것을 말로 명료하게 표현할 수 없더라도, 그저 막연하고 모호한 형태 그대로 간직하는 것도 상당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막연한 느낌과 감상을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표현으로 바꿔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도 하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을까, 궁금해지기도 하고요.

 

 

이런 경우에 도움이 될만한 책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보코프의 책은, 제목은 <러시아 문학 강의>이지만 사실상 <안나 카레니나> 해설서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안나>에 대한 분석과 언급이 유독 많습니다.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나보코프의 각별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바꾸면, 이 글은 어디까지나 나보코프의 주관적 해석과 비평이라는 것입니다. (뭐 모든 비평이 그렇겠습니다만...) 나보코프가 소설의 구성이나 인물들에 대해 갖는 견해는 우리가 책을 읽으며 갖게 된 견해와 감상과는 다를 수 있겠습니다.

 

좀 다른 얘기이긴 한데, 예를 들어 나보코프는 이 책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 톨스토이에 대해서는 아주 많은 분량을 할애하면서 상찬을 하는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주 짧게만 다루면서 돌직구적 까대기를 하고 있는데요. 이게 도스토예프스키 팬으로선 아주 기분 나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도스토예프스키는 '끝판왕' 대접을 받았으면 받았지, 누구한테든 까인 적이 별로 없어서 매우 신선하기도 합니다... ㅋ) 뭐 도스토 선생이 나보코프에게 까대기를 당했다고 해서 일순간 무너질, 만만한 작가는 아닙니다만.

 

하지만 이 책에서 나보코프는 자신도 결코 '만만한 독자'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그냥 "내 취향이 아니야. 그래서 싫어"라는 식으로 까대고 있는 건 아닙니다. 책을 몇 십 년 간의 시차를 두고 반복적으로 읽은 후에야 비로소, "도스토..는 이런 점에서 한계가 명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식입니다. 무척 성실한 독자죠.

 

마찬가지로 <안나 카레니나>에 대해서도 취향을 앞세워서,"이런 이야기는 딱 내 취향이야."라는 식으로 상찬을 하는 건 아닙니다. 하나 하나 상세한 근거를 들면서 왜 <안나 카레니나>가 위대한 작품인지, 왜 안나라는 캐릭터가 '세계문학사상 가장 매력적인 여성 인물'인지를 설득력 있게 잘 쓰고 있습니다. 성실한 독자가 애정을 갖고 쓴 글이라는 점에서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난 후(또는 읽기 전에) 바로 읽어볼만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안톤 체호프 번역으로 친숙한 이름인, 오종우 교수의 책 <백야에서 삶을 찾다>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 이 세 작품을 다룬 책입니다. 러시아 문학의 최고 엑기스를 추출해서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의 표현에 따르면) "'자세히' 동시에 '친철하고' '편안하게' 해설해주는 책"이라고 합니다. 무척 끌리는 책 소개입니다. 하지만 최근에(2011년) 출간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절판이라는 게 함정... 도서관에서도 검색해봤지만 이 책을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조차 별로 없습니다...

 

 

 

 

 

 

 

 

 

 

 

 

 

 

 

 

 

 

 

 

 

 

석영중 교수의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도 기회가 되면 읽어볼까, 하고 있습니다. 이 책 역시 로쟈의 소개로 알게 되었습니다.

 

 

 

 

 

 

 

 

 

 

 

 

 

 

 

 

 

 

 

 

 

 

 

톨스토이 생애 전반을 다룬 글로, 제가 무척 재미있게 읽은 것은 바로 위의 책입니다.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필맥, 2005)라는 제목의 책으로, '20세기 최고의 전기 작가'로 꼽히는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평전입니다.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가 한 곳에 묶여 있다는 게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출판사에서 그냥 되는 대로 묶은 건가... 그건 아니고 원래 츠바이크가 이 세 작가를 묶어 썼습니다. 오히려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 빛과 어둠의 두 초상>(자연사랑, 2001), 이 책이 톨스토이 & 도스토예프스키 = 대표적인 러시아 작가, 라는 일반에 널리 알려진 상식에 맞춰, 인위적인 구성을 한 경우입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많은 평전들을 그저 무턱대고 써낸 것이 아니라 나름의 체계를 염두에 두고 썼습니다. 이 점이 다른 평전 작가와 그를 구분하는 점일 것입니다.

 

가령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는 [세계의 거장들/대가들(Baumeister der Welt)] 시리즈의 세 번째 권에 속합니다. 원제는 입니다. 번역하면 '삶의 세 시인' 정도가 되겠네요. 하지만 국내 번역본에서는 이 제목을 빼고, 대신 '츠바이크가 본'이란 구절을 집어 넣었습니다. 국내에서 츠바이크에 대한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음을 감안한다면, 굳이 이렇게 제목을 변형시킬 필요가 있었나 싶어요. 하긴 뭐 '삶의 세 시인'이란 제목 역시 구매욕구를 상승시킬 만한 제목은 아닙니다만...

 

참고로 [세계의 거장들] 시리즈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카사노바...> [서문]의 첫머리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권 <마신(데몬)과의 싸움(Der Kampf mit dem Damon)> : 횔덜린, 클라이스트, 니체

- 마성적인 힘에 쫓겨 자신과 현실세계를 뛰어넘어 무한의 세계로 들어선 유형


2권 <세 명의 거장들(Drei Meister)> : 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

- 현존하는 현실 곁에 소설이라는 우주를 만들어 제2의 현실을 구축, 즉 '서사적으로 세계를 재창조한 사람'의 유형


3권 <삶의 세 시인(Drei Dichter ihres Lebens)> :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 (대우주를 그리기 보다) 자아의 소우주를 세계 속에 펼쳐나간 유형. '주관주의적 예술가' 유형. 그리고 '자서전'이라는 예술 형식은 어떤 것인가를 탐색한 사람들

 

 

1권에서 다루는 인물들이 걸어간 길이 '무한 세계'로 이어진다면, 2권에서의 길은 '현실 세계'로 이어집니다. 3권에서의 길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어지게 됩니다. 어쨌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츠바이크는 3이라는 숫자를 좋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뤄지는 작가들의 면면이 화려한 가운데, 1권이 특히 끌립니다. 하지만 국내에는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습니다.

 

 

최근들어, 세창출판사라는 곳에서 [슈테판 츠바이크 평전 시리즈]를 3권까지 내놓기도 했습니다. 모두 [세계의 거장들] 시리즈에 들어간 작가들입니다. 9권까지 완간을 기대해봅니다.....

 

 

 

 

 

 

 

 

 

 

 

 

 

 

 

 

 

 

 

 

완간을 기대한다...... 라고 썼지만, 사실 위의 [슈테판 츠바이크 평전 시리즈]는 2009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같은 번역자에 의해 나온 <천재, 광기, 열정>(전2권)이라는 책을 재편집해서 내놓은 것입니다. <천재, 광기, 열정>의 1권에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니체, 클라이스트가 실려 있고, 2권에는 발자크, 디킨스, 스탕달, 카사노바가 실려 있습니다.

 

원래 츠바이크의 구성과 비교하면 목차가 뭔가 혼돈의 카오스엉망이고, 횔덜린이 빠져 있습니다.... 굳이 이렇게 원래의 구성을 깨고, 순서를 뒤섞은 이유, 횔덜린만 왕따시킨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편집자나 출판사 측 나름의 의도가 있는 걸까요? 전설의 레전드에 해당하는 작가들을 다루느라 그런 건가... 어디까지나 제 짐작에 불과하지만, 이렇게 구성을 바꾼다한들 판매고가 올라갈 것 같지도 않은데 말입니다...

 

 

 

 

 

 

 

 

 

 

 

 

 

 

 

 

 

 

<안나 카레니나>를 넘어 톨스토이에 관심이 생겼다면, 더 나아가 19세기 러시아 문학에 관심이 생겼다면, 다음의 책을 읽어볼만 합니다. <러시아 사상가>(생각의 나무, 2008)는 이사야 벌린의 저서로 유명한 글, <고슴도치와 여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여우는 잡다한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굵직한 것 하나를 안다"라는 어떤 그리스 시인의 단장에서 출발하는 이 글에서 이사야 벌린은, 도스토옙스키가 고슴도치라면 톨스토이는 "천성은 여우지만 스스로를 고슴도치라고 믿은 작가"라고 주장합니다.

 

고슴도치 유형은 하나의 중심적 비전, 때로는 광적인 내적 비전에 모든 것을 연결시키려드는 유형이고, 여우 유형은 폭넓은 체험과 다양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려는 유형인데, 플라톤, 파스칼, 헤겔, 니체, 입센, 프루스트, 그리고 도스토옙스키가 고슴도치라면 아리스토텔레스, 몽테뉴, 에라스무스, 괴테, 푸시킨, 발자크, 제임스 조이스는 여우 유형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통해 투르게네프를 재발견하게 되어 신선했습니다. 아무래도 투르게네프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에 비해 유명세나 중요도에서 밀리는 작가인데, 이사야 벌린은 '아버지와 아들' '투르게네프와 자유의 곤경'이란 글을 책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투르게네프에게 어떤 중요성을 부여하려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사야 벌린이 보수적 자유주의자의 입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문학에서 투르게네프가 갖는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신선합니다. 특히 흥미를 끄는 것은 톨스토이가 예술-종교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후자로 넘어가려 할 때, 투르게네프가 예술로 돌아오라고 진심으로 충고하는 대목입니다. 더불어 '비사리온 벨린스키' 장에서 다루고 있는 (19세기 초중반 러시아 최고의 비평가였던) 벨린스키-도스토예프스키 라인도 신선합니다. (벨린스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초기작 <가난한 사람들>을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후에는 서로 대립각을 세웠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죠.)

 

 

마지막으로 두께나 가격(아마 난이도도 그럴 듯...)이 좀 엄두는 안 납니다만, 빅토르 쉬클롭스키라는 저명한 학자가 쓴 <레프 톨스토이>(전2권)(나남, 2009)도 있습니다. 저 역시 구매할 엄두도, 읽을 엄두도 안 나서 그냥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침만 흘리고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는 톨스토이를 (카사노바, 스탕달과 더불어) '삶의 세 시인' 중 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이 말은 톨스토이가 어느 정도 자기중심적인 인물임을, 즉 세계보다는 자기 자신의 일에 더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중심적'이란 표현은 대개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만, 이러한 삶의 태도에 담긴 긍정적 측면을 볼 필요도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나보다 남을, 이 세상을 먼저 생각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선 쉽게 위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톨스토이의 자기중심성은 자기 자신의 어리석은 면, 나아가 수치스러운 면까지를 '단순하고 정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과도 연관이 됩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죠?” // “언제나 한 가지 일뿐예요.” 그녀는 생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 그녀는 진실을 말했던 것이다. 어떠한 순간에도,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느냐는 물음을 받는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오직 한 가지, 자신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라고. 그래서 그가 찾아온 지금도 그녀는 어째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이를테면 벳시한테는 이런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자기에게는 왜 이렇게 괴로울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2부 22장 / 문동 1권 368면)

 

“난 말입니다” 하고 콘스탄틴 레빈은 말했다. “어떤 활동이라도 개인적인 이익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면 공고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진리, 철학적인 진리입니다.” 그는 단호한 어조로 자기한테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철학을 논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철학적’이라는 말에 특히 힘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3부 3장, 문동 2권 27면)

 

“어째서 나리께선 그렇게까지 농부들을 걱정하시는 거예요?”

“난 그자들을 걱정하고 있는 게 아냐. 모두 나 자신을 위해 하고 있는 거야.” (3부 30장 / 문동 2권 214면)

 

 

그렇다고 톨스토이가 자기라는 협소한 틀에 갇혀버린 작가인 건 아닙니다. 그는 세계의 혁명, 인간의 구원, 인류애를 이야기합니다. 말년에 이르러 이러한 경향은 점점 더 강해집니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작가, 현실의 삶을 그 자체로 사랑한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그 절정에 위치한 작품입니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쓴 직후, 정신적 위기를 겪고 신과 구원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에게 '자기 자신'과 '현실의 삶'은 단단한 기반이 됩니다. 그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톨스토이는 혁명과 구원, 인류애를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그가 작가(예술가)이기를 그만두고 설교가가 되었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하지만, 설교가로서의 톨스토이 역시 웬만한 설교가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제 생각에 <안나 카레니나>를 읽을 때 독자가 기억해야 할 점은 톨스토이가 '삶을 사랑한 작가'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명제는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7명에게 모두 적용이 됩니다. 모두들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사랑하려 노력합니다. '삶을 사랑한다'고 표현했을 때, 이 표현에 가장 잘 들어맞는 듯한 인물은 레빈-키티입니다만, 안나-카레닌-브론스키, 스테판-돌리 역시 각자의 삶을 사랑할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노력이 꼭 좋은 결실을 맺는 건 아닙니다. 안나-카레닌-브론스키의 관계는 불행과 파국으로 치닫고, 스테판-돌리는 위선적 관계를 유지하지요. 레빈 역시 삶의 본질적 허무에 대한 고뇌를 끝까지 떨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바로 이러한 불행과 파국, 위선과 허무가 현실의 삶이 갖는 양상임을 보여줍니다. 단지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삶의 양상 자체로 사랑할만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즉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어떤 삶이든 충분히 사랑할 만하다"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지 선언이나 주장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는 데 이 소설의 매력과 미덕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많은 인물들은 제 나름의 고민을 하는데(작가는 안나와 레빈뿐만 아니라 카레닌, 키티, 돌리, 스테판, 브론스키의 내적 고민을 모두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고민은 무척 섬세하고 다층적이긴 하지만, 어려운 말로 포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독자는 인물들이 무엇 때문에 고민을 하며 괴로워하는지를 자연스럽게 포착하고 그들의 고민에 깊이 공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독자는 인물들에게서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인물들의 어리석음, 위선, 수치, 두려움을 발견하지만 그것이 제거하거나 극복해야 할 부정적 속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한 속성을 지닌 인물이라도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자연스레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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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정 2013-05-20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