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다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시간에 씻긴 과거의 흔적은 황폐한 기억의 바다 깊이 잠겨 있다. 바다는 말이 없다. 그날, 이후로 맥스는 다시는 수영할 수 없었다. 유폐된 여름 날의 묻힌 기억 어둔 시간의 장막을 여는 시점은 아내 애나가 세상을 떠난 바로 이 시점이다. 그렇다. 기억을 찾는 단서는 아내의 죽음, 아내와의 이별, 이 고통의 시간이다. 어린 시절 설레던 어느 짧은 여름날의 바닷가 그림같은 풍경과 예정된 죽음을 받아들이던 아내. 오십년이라는 긴 시간적 차이를 두고, 무관해 보이는 이 두 개의 전혀 다른 사건들은 어떤 이유로 인해 뇌신경의 동일 지점, 혹은 동일 시냅스 경로를 공유했다.
불완전하고 파편화된 기억들이 들추어내는 시간은 세 개의 축을 중심으로 병치된다. 진단과 함께 시작되어 죽음으로 끝난 아내와의 마지막 시간, 열두살의 여름을 함께했던 그레이스 가족들과의 바닷가에서의 시간, 그리고 그레이스 가족이 묵었던 여름별장 시더스로 돌아와 그 두개의 사간 뭉치 속 과거가 비추는 거울 앞에 선 현재의 시간.
기억은 순서를 구분하지 못하고 둘쑥날쑥 제멋대로 섞였고, 일관성도 없으며, 그 연속적인 장면들을 하나의 이미지로 구겨 흐릿하게 촛점 잃은 이미지를 한 순간의 찰라적 순간의 이미지로 왜곡시키지만 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미지와 냄새는 감각과 이상 사이에서 현재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들과 함께 그들이 묻혔던 과거의 시간 속에는 신들이 있고, 예정된 아내와의 이별의 시간에는 그녀만의 방식으로 걸어가던 특별한 죽음의 여정이 있다.
긴 일생의 시간 중 하나의 짧은 여름을 함께한 그레이스의 가족들의 신화가 잠든 시더스에서의 현재는 아내와의 이별에 어떤 상징이 될까. 위로보다 애도를 더 원했다면 둘 만의 추억의 장소를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천천히 다가왔고, 그 죽음 가까이에 맥스 모던은 이제껏 함께 있었다. 애도는 예정된 죽음 앞에서 충분히 했으리라. 이제 벗어나고 싶을 지도 모른다. 아내의 죽음과 가장 멀리 떨어진 시간으로 여행할 차례다. 시간 이동이 불가능한 현재, 그가 선택한 방법은 과거의 시간을 과거의 공간으로 치환한 시더스라는 장소다. 오십년 만에 찾은 시더스는 아내가 없는 집에 홀로 남겨지는 상황을 피해 선택한 여행인 것처럼 보인다.
자연은 공평하다. 바다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누리는 방식, 그것 근처에 와서 머무르는 방식에 바다의 원칙이 닿지는 못한다. 여름바다를 찾는 사람들의 계급은 숙소를 결정하고 숙소는 계급을 말해준다. 맥스가족은 샬레라고 부르는 작은 목조 주택을 세 내었다. 여름바다를 가장 저렴하게 이용하는 그룹이다. 샬레 위에 시더스와 같은 여름별장에 하숙하는 가족들이 있고, 더 위에는 호텔, 가장 꼭대기에는 골프 호텔이 있다. 그는 샬레에 살면서 시더스를 동경한다. 시더스를 동경해서 시더스를 세 낸 그레이스 부인을 연모하고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 쌍동이 남매 클레이와 마일스의 친구가 되고, 미숙한 사랑의 감정은 부인에서 클레이로 자연스럽게 옮겨간다.
"아이었던 과거의 내가 상상하는 모습과 다시 현재로 와서 불완전한 기억이 환기하는 과거의 상상 속의 미래는 어떤 닮음꼴이 있을까. 그는 동네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에게서 성공의 소도구들을 미래의 이미지에 배치했고, 그레이스가의 사람들의 낯선 삶 속으로 편입해 한 단계 높은 계급으로 진입하는 경험을 이미 맛보고 추구했다. 그렇게 과거와 가능한 미래와 불가능한 현재가 계속 뛰기 시작했다.(p94)"
맥스의 회상에서 그레이스 가족은 신적인 존재다. 그것은 불완전하고 선택된 기억의 파편 속에서만 박재되고 잊혀진 채 결코 생생하게 살아 나올 수 없는 신화적 모호성 때문만은 아니다. 궁색한 샬레와 비교되는 시더스라는 품격있는 여름 별장, 외동 아들인 자신은 경험해보지 못한 쌍동이 남매의 기이한 동질성, 그레이스 부인을 향한 연정, 그리고 그들이 소멸해간 방식 역시 신처럼 근접할 수 없는 신비감을 간직한다.
신화 속 상실이 현실 속의 상실을 상쇄시킬수 있을까. 파도와 파도가 만나면 더 큰 파도가 될까. 서로를 부딪혀서 깨뜨려 없앨까.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한탄했던 어느 시인을 떠올려봤다.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욕을 하고 나는 얼마나 작으냐'던 시인의 작은 분노의 이유는 슬픔이라는 감정에도 대입 가능할까. 시인은, 아내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슬픔을 위안받기 위해 오십년 전의 슬픔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맥스의 행동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질까. 평생 무의식 속에서 트라우마로 남았든 혹은 애써 덮어 잊고 살았든 생애 처음 상실을 가르쳐주었던 기억 조각을 모으는 일은 분노해야 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어쩌면 반대일 지도 모른다. 투병의 고통과 예정된 죽음이라는 남루한 기억 대신 아름답고 모호한 신화 속에서 자신을 위로받으려 했던 걸 수도 있다. 두서없이 재생되는, 멀리 떨어져 결코 만날 수 없을 기억의 파편들은 서로 부딪혀 서로 공명하며 서로는 서로를 부른다. 클로이의 신비한 이미지들을 떠올릴 때 생존과 소멸을 함께했던 아내의 투병 생활이 떠오르고, 그것은 다시 시더스의 풍경과 기이한 이미지로 각인된 그레이스 가족의 풍경, 그레이스 부인을 향한 뜨거운 감각적 환상을 회상시키고 의식의 흐름은 그들의 부모와 비교되는 자신의 부모, 또 자신의 부모와 나을 것도 없어 보이는 아내의 부모를 거쳐 갈등중인 딸에게 이르고, 딸이라는 현실은 다시 시더스의 현재와 시더스가 품고 있는 과거인 그레이스 가족에게로 그렇게 생각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
어쨌든 그가 사랑했던 여자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신화속의 연인도, 현실속의 아내도 그를 떠났고, 그 둘은 작당한 듯이 그를 사랑했으면서 동시에 그를 소외시켰다. 둘 다 모두 자신을 한 단계 높은 경제적 계급을 경험하게 한다. 클로이 남매를 통한 상류 사회로의 진입은 신화로 막을 내렸고, 애나를 통한 부는 그를 가볍게 들어올려 위쪽 계단에 올려놓았다. 신화속의 경험은 소멸되고 사라져 이미지가 되었지만 현실의 아내를 통한 신분 상승이 그의 기억 속에 그가 꿈꾸었던 그를 실현주었는지 그가 살았던 현실이 그가 진짜로 원했던 미래였는지 여전히 모호하다.
이 소설 속에서 여성들은 예쁘다거나 매력적이다거나 하는 모호한 단어에 갇혀있지 않다. 환상적이거나 대상화되어 있지도 않다. 그에게 그들은 자신의 존재감으로 그들의 존재감을 덮을 수 없는 강한 자아를 내뿜는다. 신화 속의 사람도 현실 속의 아내도, 생생하게 살아 꿈틀거리는 생물이며, 그 살아있음의 증거로 그들을 떠올릴 때면 몸 구석구석에서 나는 악취들이 기억속의 이미지와 함께 재생된다. 그가 클로이를 떠올릴 때에도, 애나를 떠올릴 때에도 늘상 부딪히는 것은 이해불가의 벽과 고집이다. 사진작가가 되기를 원했던 애나는 호스피스 병동의 사람들을 돌아다니며 병의 가장 추악한 이면을 담아내곤 했다. 보호자들의 불만을 처리해야 했던 애나의 보호자로서의 난처했던 처지를 생각하더라도 생애 마지막 시간을 생애 마지막에 덮친 동료 환자들을 덮친 질병의 추악한 모습을 담는데 할애하고자 했던 아내의 행동을 난해하고 단단한 그녀만의 벽으로 느끼는 맥스를 보며, 나는 슬펐다. 때로 죽음보다 때로 상실보다 더 큰 실존적 슬픔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몰이해의 벽이다.
누군가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면 그 이해를 바탕으로 사랑하겠지만 또 누군가를 조금 이해할 수 없다면 그 불가사의함과 차이에서 기인되는 신비함이 사랑의 시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오래 함께 살아온 배우자의 행동이 갑자기 낯설다면 되풀이되는 일상적 삶의 진부함 속에서 타성적으로 알기를 거부하는, 습관적 만성적 권태 탓인지도 모른다. 신화는 권태가 지배하기 전에 지나가 신비를 남기고, 현실은 사랑으로 함께 한 긴 시간만큼 할당된 권태와 불통의 양을 고스란히 품는다. 그래서, 그렇게 아내를 잃은 현실의 상실을 신화적 상실의 치유로 대체하기 위해 무의식의 상처들을 의식 밖으로 끌어올리는 프로이트식 치유 과정을 스스로 경험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두 개의 상이한 과거 속의 시간 속에서 어떤 시간의 상처가 어떤 시간의 상처를 만져줄까. 바다는 침묵한다. 자신이 삼킨 것들에 대해 무혐의를 주장하듯 파도는 끊임없이 오고간다.
하나의 긴 산문처럼, 사건이 사건이 되지 못하고 현재는 과거에 현재였던 것의 환기로만 존재하는 이 소멸의 시간이 아름답고 매혹적인 문장 속에 정체된 듯하다가, 맥스가 술을 진땅 마시고 바닷가에 쓰러져 죽을 뻔한 급격한 절정을 맞는다. 그를 구해낸 사람은 50년 전 그레이스 가족이 여름을 보내던 시기에도 상주했던,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는 대령이다. 먼 과거와 현재 시간을 잇는 가교는 쇠락해가던 시더스와 대령 뿐이 아니다. 베버수어 양의 정체가 드러나고, 50년 전 어떠 날, 그가 본 어떤 짧은 풍경의 진실 하나가 알려지면서, 이 소설은 문장에 매혹되어 있던 독자를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놀라움과 사유 속으로 인도한다. 기억에 관한 소설이면서 애초 그 기억을 구성하는 진실이 구축되는 형태와 결과가 결합하는 형태에 대해 섬광같은 질문을 던지는 반전적 결말이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
미성숙한 여린 열병같던 사랑과 흔적을 찾아나서야 했던 때가 왜 하필이면 아내가 죽은 시점이었어야 했을까. 그에게 역사는 기억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 역시 중요하다는 것. 하지만 인간의 감정에 진실이라는 것은 우연히 포착할 수 있을만큼 쉽게 만져지는 실체가 아니며 믿고 있는 것과 정반대이면서도 영원히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글을 열심히 썼지만, 열심히 써 내려가다보면 애초 처음에 던졌던 의문이 풀릴지도 모를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아직 내가 결론을 내렸는지 못내렸는지조차 결정할 수 없다. 맥스 모든은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 혹은 무언가를 치유하기 위해 그곳에 갔던가. 두 개의 과거 하나의 현재. 뒤섞인 시간 속에서, 그 날, 조수가 이상하던 날의 바닷가에서 일어났던 신화의 후면에는 어떤 진실들이 감추어지고 어떤 진실들이 잊혀졌으며, 그렇게 빠지고 생략된 틈에서 기어이 살아남은 기억과 공백의 틈바구니에서 결정된 현재가, 무엇을 고르고 어떤 진실이 포착되어 미래에 어떠한 형태로 남겨 신화가 될까. 우리에겐 오랜 세월동안 헤어지고 바래져 맥락은 모두 잊은채 또렷하게 살아 남은 그 무엇이 있다.
이제 그 의문을 잊기로 한다 매혹적인 문장과 뉘앙스에 이끌려 소설을 구성하는 태초 신화의 사건적 구성에서 자주 길을 잃었다. 그 날 이후 커다랗게 부풀던 바다가 만들던 그 기이한 풍경이 어째서 그에게 다시 수영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는지를 잊는 대신 그가 불러오는 아스라한 과거에 간직했던 감각의 소용돌이 안쪽으로 불려가 그의 불안전한 기억의 파편들과 함께 나의 과거와 나의 현재 그 사이를 부유한다. 작가가 섬세하고도 집요하게 두 과거 사이 어떤 감정과 의문 사이를 오가며 이야기를 유예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우리가 이 소설을 읽는 방식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