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 세트 - 전2권
말런 제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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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냉전은 그 어느 국가도 피해갈 수 없는 폭력을 야기했다. 이십세기를 살아내야 한다는 것은 불화와 충돌과 대치와 분열의 틈바구니들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걸 말했다. 80년대 민주화 항쟁의 거센 파도 속에서 대학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은 독재타도의 구호와 거리 투쟁과 의식화와 이념화와 허세의 틈바구니들을 견디며 그 속에서 고뇌하고 그 속에서 삶을 설계하고 그 속에서 절망하며 그 속에서 청춘을 찾아야 한다는 걸 말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오늘날의 평화적 촛불 집회는 확립된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의 힘을 보여주는 감회가 새로운 장면이지만, 추운 겨울 주말마다 휴일을 반납하고 거리로 나가야 하는 일은 청산되지 않은 냉전의 잔재, 유신의 잔재, 일제의 잔재가 좀비처럼 계속해서 살아 기어 나오는 이유와 이 책에서 70년대와 90년대 사이 자메이카 벌어지고 있는 폭력적 일상과 만나는 지점이 생긴다. 

냉전시대에 세계는 반으로 갈렸다.  파란색과 빨간색, 좋은 놈과 나쁜 놈, 우리편과 남의 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구소련편과 미국편.  어떤 주의를 표방하건 옳은 편은 그가 속한 편일 뿐이었다. 그가 속한 장소는 그의 이념을 결정했고 선택권은 없었다.  대부분의 나라(nation)는 이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골랐다. 나라가 결정한 이념은 애국과 동의어가 되었다.  자유의 이름이든 해방의 이름이든 그가 속한 사회가 내건 문패로 사용된 그 무슨무슨 주의를 지키기 위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었고 또 목숨을 잃었다. 폭력의 승리는 이념의 승리가 되었다. 남미의 작은 섬나라 자메이카도 그 중 하나였다.

별로 가진 것 없는 이 작은 섬나라에도 냉전은 삼켜버릴 듯한 기세의 파도처럼 밀려 오고, 통제를 잃은 자메이카 킹스톤인들의 삶을 갈가리 찢어 놓는다. 인구의 90%가 흑인인 이 나라에 무슨무슨주의는 두개의 거대 폭력조직에게도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다. 킹스턴 양대 폭력 조직인 코펜하겐시티와 에이트레인즈는 각각 자메이카의 양당 노동당(자본주의)과 인민국가당(사회주의)과 협력하는 세력이다. 코펜하겐시티의 수장은 파파-로와 그 밑에 조시 웨일즈, 에이트레인즈의 수장은 쇼타 셰리프다.

열세 명의 각기 다른 인물이 각자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 두 세력간의 오랜 반목을 깨고 평화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던 밥말리의 평화 콘서트를 둘러싼 밥 말리 암설 기도사건을 다룬다. 이야기는 두 세력이 부딪히면 반드시 한쪽이 죽어야 했던 그 포악했던 두 갱단 두목이 어떻게 낯선 '평화'를 지지하기 시작하는지, 왜 누구에게 평화는 두려운 것이 되었는지로부터 시작하여 암살기도사건의 핵심 인물인 조시 웨일즈가 죽기까지 거의 20년간 지속된 학살, 파괴, 반목, 대립, 그 사건의 영향과 마약 밀매와 폭력의 그늘을 그 일과 직간접으로 연루된 여러 사람의 관점에서 각기 독특한 목소리로 전달한다.   

1976년 12월 밥 말리 암살 기도사건을 다루는 1권에서는 CIA 지부장과 잡지사 기자, 코펜하겐시티 보스와 행동대장, 소년 갱단들, 밥말리의 소녀 팬, 그리고 사망한 전직 정치인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이후 미국의 마약 밀매 조직의 집단 살인 사건을 다루는 2권에서는 갱단과 협력 혹은 대치 관계에 있고, 상호 라이벌 관계에 있는 두 개의 자메이카 마약 밀매 조직원들과 청부업자들의 목소리가 추가된다.  그들은 모두 직간접으로 암살 사건과 연결되어 있거나, 사건이 끝나고 냉전이 저물던 무렵까지도 보이지 않는 사건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다.

냉전이 종식된 시대에,  이 책을 통해 냉전을 이해하는 코드는 이념간의 대립 그 이상의 것이다.  이 시대의 정치적 맥락은 냉전의 시대에 횡행했던 불의와 폭력이 냉전이 종식된 후에도 계속해서 냉전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화력을 얻는 방법과 그 동기의 깊이를 공유한다. 이 점이야 말로 우리나라가 처한 질문,  자본의 논리가 시장을 지배하고 그 누구도 아무도 자본의 힘을 부정하지 않고 자본이 지상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지 오래된 우리 사회에서 왜 도대체 왜 냉전시대에나 유효했을 종북이니 좌파 단어들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애초에 처음이 어디부터였는지, 발려 먹을 건 쥐꼬리만큼도 없는 가난한  작은 나라에서조차 폭력조직이 최초로 필요했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야만적 국가의 폭력 조직이 어떻게 세를 확장하고 사회를 무법지대로 만들고 통제 불능 상태로 만드는지는 이 책을 통해 합리적 일반화가 가능하다.  애초 그저 가난한 마을에서 삥뜻기나 하며 살아가던 깡패들은 이념이나 종교로 분열된 상황의 정치인들과 협력하며 세력을 키운다. 냉전은 정치 조직에게 더욱 큰 지원군을 얻는다. 냉전의 두 대표자 미국과 구소련은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괴뢰 정권의 수립을 지원하고, 비밀 경찰들을 통해 정치 조직 뿐만 아니라 갱들을 직접 지휘한다.

갱들이 무기를 지니는 순간 도시는 공포로 변한다. 가난한 나라의 소년 갱단들의 손에 총을 쥐어준 사람들은 내전을 통해 반대편 이념에서 뽑힌 정치 세력의 전복을 꾀한다.  쿠바 혁명을  지켜본 미국이 남미 여러나라들의 공산화를 막기위해 친미 정권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무기를 제공하고 지역 갱단을 이용하는 것은 그동안 여러 남미 국가들을 통제해가면서 얻은 노하우에 불과했을 것이다. 사회주의 인민국가당이 정권을 잡자, 항구에 도착한 총들이 계속 게토로 실려간다. 
 
CIA가 조시 웨일즈를 통해 어린 소년들의 손에 쥐어준 총은 목적이 조금 다르다. 두 갱단의 우두머리인 파파-로와 쇼타 쉐리프 사이에 평화가 감지되고 밥 말리의 대규모 평화 콘서트가 기획되자, 갱단과 그 갱단과 편먹은 정치 세력, 그리고 그 정치 세력을 조정하는 미국의 비밀경찰 요원들까지 모두 충격을 받고 불안을 넘어 위협을 느낀다. 분열의 출발은 분명 이념의 차이에서 시작되었겠지만, 이념은 잊혀지고 이념의 차이가 부른 충돌은 격화된다. 분열을 다루는 폭력이 대다수 삶의 수단이 되어 버렸을 때, 가치는 사라지고 구호만 남는다. 

구호들은 모든 갈등의 씨앗이 사라진 후에도  메아리처럼 꺼지지 않고 울린다.  대규모 평화 콘서트를 앞둔 밥 말리가 자택에서 암살기도 사건의 피해자가 되는 이유는, 평화가 삶의 위협이 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최고 가치가 된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와 대치되는 상황을 폭력으로 다루는 것 이외에는 다른 상황을 겪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평화는 폭력보다 위험했다. 그들은, 삶이 전쟁인 사람들에게, 평화라는 새로운 주의는, 화해라는 이상한 논리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낯선 당, 한 번도 다뤄보지 못한 새로운 적, 무엇이 어떻게 삶을 골탕먹일 지 모르는 또 다른 이념이라 속단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쌈질을 하라고 깡패를 만들어놨더니, 화해를 하다니 총질을 하라고 무기를 제공해 줬더니 평화를 찾다니, 열세 명의 화자 중 다수의 눈에 파파-로의 몰락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독자의 눈에도 예고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알아주어야 했던 것은 아마도 그가 처음부터 평화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철천지 웬수처럼 두 조직의 두목이 동시에 수감되자, 파파-로는  매일 서로의 반대파 갱단들에게 찔려 죽어나가는 이 살벌한 무법지대에서 쇼타 쉐리프와 함께 공멸할 것인지 공생할 것인지 생각한다. 그에게 평화는 선택이 아니라 삶의 수단이었다. 처음으로 맛본 그 달콤한 평화가 그들을 변화시켰을까. 둘은 두 사람이 연대한다면 감옥에서 뿐만 아니라 킹스턴에서, 자메이카에서 세계에서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가수의 집을 드나들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낯선 환희를 느꼈으리라. 

평화가 또다른 이념이라면, 그 평화를 폭력에서 지키고 그 평화를 가장 평화롭게 전파하는 방법이 음악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자메이카가 낳은 전설의 세계적 레게 가수 밥 말리가 거기에 있었다. 파란색도 빨간색도, 미국편도 소련편도, 인민국가당도 노동당도, 사회주의자도 자유주의자도 모두 같은 공간에 모여 같은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들을 하느라 총질을 소홀히 하는 동안 코펜하겐시티를 움직이던 노동당과 미 첩보국 비밀요원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이코패스 진정한 갱의 두목이 될 자격을 갖춘 조시 웨일즈로 갈아탄다. 


밥 말리 살해 사건을 진두 지휘하고, 목격자와 가담자들까지 말끔히 처리한 후 코펜하겐시티를 장악한 조시 웨일즈는 그 대가로 콜롬비아 메데인 카르텔에서 마약을 공급받아 마이애미와 뉴욕에 판매망을 구축한다. 냉전이 끝났어도, 가수가 암으로 죽었어도 갱원들은 여전히 총질을 하고 코펜하겐시티는 건재하다.  수없이 많은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하게 죽이고 미국의 마약 밀매 조직에 깊숙히 관여하는 사실이 알려져 있어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의 비호를 받던 조시 웨일즈가 죽을 때까지, 숨죽이며 쫓기던 사람이 있다. 신분을 세탁하며 숨어살던 암살 사건의 목격자와 사건을 취재하던 기자가 쓴 기사는 이 야만의 시대 가까스로 살아남은 목격자의 목소리다. 주위를 둘러보자. 냉전의 피해자들,  유효기간이 지나 폐기되었어야 할 냉전의 논리를 재활용하고 그 찌거기들을 삶의 수단을 삼는 잔혹한 야만인들의 목격자라는 이유만으로 아직까지 숨죽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 혹시 그들 중에는 피해의식이 역설적으로 현실을 왜곡하여 그들이 쓰다 버린 냉전의 찌꺼기마저 주워 담아 애국으로 치환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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