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의 백합 을유세계문학전집 4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정예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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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는 실로 어마어마한 양의 소설을 썼다. 소설을 쓴 긍국적인 이유가 빚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빚을 갚기 위해 엄청나게 써댔다. 뭘 잘 모르면서 사업을 하면 평생 고생이다. 인쇄업의 실패로 엄청난 빚을 진 그는 하루 열여섯시간동안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20년동안 100여편의 소설이라는 결과가 그의 작업을 설명한다. 


발자크의 총서 인간희극》은 자신의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종으로 횡으로 엮여 혁명의 시기에 프랑스가 거친 모든 면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하고, 거대한 역사의 한 기록으로 남긴 기획이다. 고리오 영감을 비롯해 우리에게 알려진 그의 대부분의 소설이 인간희극 총서의 한 부분이다. 낭만주의 시기에 태어나 사실주의 소설을 썼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소설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묘사, 그 중에서도 사랑에 대한 감정에 대한 묘사와 찬미가 엄청나게 많은 걸로 보아 내게는 더 낭만주의에 더 가깝게 읽혔다. 


불우했던 부모와의 관계, 불륜, 주인공의 정치적 행로 등에서 발자크 자신의 삶이 많이 투영된 것으로 보이는 이 소설은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남자의 순애보를 그린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어릴 때부터 심약한 주인공은 부모 특히 어머니의 사랑에 굶주리고, 주머니는 빈 채로 이리저리 여러 학교를 떠돌면서 가는 데마다 천덕꾸러기에 왕따가 된다. 


부르봉 왕가의 귀환이라는 반동적 루이 18세가 환영 행차 축제에서 처음 보는 귀부인에게 반해, 어깨에 키스를 퍼붓고는 따귀도 안맞고 그녀를 잊지 못해 병까지 얻어 골골하다가 시골 어느 성에 요양차 가던 중 아름다운 골짜기에서 퍼져오는 백합 냄새를 맡고 그 골짜기에 자신이 그토록 그리던 여인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불륜 모드가 전개된다.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찬미가 지나치다 싶어 읽을 때는 지루한 부분이 엄청 많았고 또한 두 사람의 관계 자체가 아이같은 상태의 젊은 남자와 남편을 둔 귀부인의 정신적인 사랑을 다룬 내용이라 지루하다 싶은 묘사가 길었다. 그렇지만 책이란 건 끝까지 읽어봐야 작품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팰릭스가 사랑하는 모르소프 백작 부인은 남편과 아이들에게 충실하는 착하고 정숙하고, 성숙한 여성이어서, 철없는 20세 청년  팰릭스가 사랑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다. 만남은 팰릭스가 클로슈구루드(백작의 집)에 매일 백작을 만나러 방문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백작이 워낙에 고집스럽고 괴팍스러워서 살살 비유를 맞춰가며 카드놀이에 져주는 형태로 친분을 쌓고, 백작이 먼저 잠이들면 백작부인과의 밀회를 즐길 수 있다. 이미 모르소프 백작 부인은 20세의 청년에겐 엄마같은, 15세나 연상인 나이다. 


그의 친모로부터 마땅히 받아야할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처절하게 외면당한 팰릭스는 결핍된 모성애를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작동했을 듯하다. 그의 끊임없는 애정 공세에 부인은 아이를 달래듯 둘 사이의 선을 확실하게 그으며, 자신의 그에 대한 사랑을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팰릭스가 그를 한 여인으로 숭배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으며 이를 끊어내기 보다는 어느 선까지를 정해놓고 그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관계를 허락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가엾은 팰릭스에게 허락된 유일한 신체적 접촉은 손등에 키스하는 일 뿐이며, 그 행위 역시 부인이 먼저 내밀어야 가능하다.요즘말로 하면 어장관리라고 할 수 있을 태도로,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계속 희망고문을 하는 것 같은 태도다. 오늘날의 가치관으로서는 일단 이성간에 케미가 흐른다는 것이 감지가 되면, 고냐 스톱이냐 두 개의 선택지만 있지 않나. 여전히 남편이 잠든 틈을 타서 둘만의 시간을 갖고, 열렬한 사랑과 숭배의 고백을 듣는 걸 즐기면서도 육체적 접촉을 허락하지 않는 그녀의 이중성과 몸만 만지지 않으면 순결하다는 종교적 도덕관은 내게는 상당히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진다.  


앞에서 <인간희극>이라는 거대한 기획을 통해 혁명기의 프랑스의 모든 부분들을 다루고자 했다고 말했는데, 발자크는 이 소설에서 귀환한 부르봉왕가와 왕당파들의 부활을 다룸으로써, 당시 그토록 거셌던 변혁의 역사 속에서 한 인간, 그리고 인간 무리들의 삶이 역사를 통해 어떻게 영향을 받으며 변화했는지에 대해 매우 생생하게 실제감을 부여해준다. 혁명의 불길에서 교수대까지 올라갔다 살아남은 사람의 후손으로 유서깊은 가문 출신의 모르소프는 변변치 못한 재산에, 망명 생활동안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졌다. 


유산을 상속받은 르농쿠르 집안의 딸과 결혼해 대규모의 영지를 소유자가 되어 클로슈구루드 저택에 살고 있지만 망명시절동안의 비행으로 떳떳치 못한 병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 병을 두 자식에게까지 전한 모르소프는 그들의 은밀한 관계를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생각도 없는 사람으로  비쳐지지만 백작 부인은 헌신적으로 두 아이와 남편의 병구환을 하면서 거의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의 목숨을 한도 끝도 없이 앗아갔던, 그토록 갈망하던 역사의 변화가 그토록 허망하게 무너져내리고 반동적인 부르봉 왕조의 귀환을, 그 혁명으로 몰락했다가 다시 일어서는 귀족의 입장에서 서술했다는 점은 시대를 다각도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귀족이라는 가문 덕에 분에 넘치는 여자를 만나, 거대한 영지를 얻게 되는 것에서도 모자라, 각종 연금과 망명 보상 등을 천천히 손에 넣으며 서서히 모르소프 가가 부활하는 모습은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의 후손이 새로운 정권마다 다른 모습으로 끝없이 부활하는 모습과도 겹쳐보였고, 정상적인 정권 교체가 되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제 아비의 시해사건을 발판으로 딛고 그게 마치 정의인듯 다시 또 유신정신을 부활시켜 나라를 이꼴로 아작을 내고야 마는 현재의  모습과도 닮아보여서 허망하기도 씁쓸하기도 하다.


어쨌든 구질구질한 망명생활의 끝에서 무료하고 힘겨운 고립 생활을 할 때, 갑자기 요양차 나타난 팰릭스의 존재는 백작 뿐만 아니라, 백작 부인과 두 아이들에게도 반가운 생동력을 준다. 대부분의 불륜 소설이 정신적인 단계에서 시작해서 두 사람이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단계에 이르기 마련인데, 이 소설에서는 팰릭스와 부인의 관계가 모성애에 기반한데다가 팰릭스가 부인을 거의 숭배에 가까울 정도로 존중하기 때문에 도무지 진전이 없다. 때문에 부인이 과연 그를 사랑하기나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경우도 있는데,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여 그를 출세로 이르게 도와주고, 그를 그 시골 구석에서 떠나보내고 길고 긴 편지로 답장을 하는 등의 내용을 보면 괴팍한 남편 때문에 그에게 약간 의지를 하지만, 너무 애여서 연인적으로 그렇게 사랑하지는 않고 헌신적으로 그를 보살펴주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스무살 청춘이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면서 몸도 멀리 떨어져있고, 게다가 신체적 접촉이라고는 손등에 키스밖에 허용되지 않고, 사랑의 언어 역시 부인의 요청 때문에 마음대로 부릴 수 없어 들판에 핀 온갖 종류의 다른 향과 색과 모양을 가진 수많은 꽃을 꺾어 그 다발로 사랑의 언어를 대치하던 그로서는 젊은 여자들의 육체적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다. 결국 그는 또다른 영국 출신의 귀족 부인과 육체적 연애를 하게 되는데, 그것은 사랑이 아니며 단지 끈질긴 유혹에 대한 굴복이며, 마음만은 언제든 모르소프 백작 부인에게 있다는 것을 거듭 확인한다. 


반전은 여기부터다. 소문은 들은 모르소프 백작 부인은 그를 거부한다. 영국인과의 육체적 사랑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오매불망 모르소프 부인만을 그리던 그는 부인이 병이 나서 다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야 부랴부랴 그녀를 만나러 파리를 떠난다. 그의 도착으로 죽어가던 부인이 감쪽같이 나아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지만, 부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볼 수 있게 된다. 그토록 육체적 사랑을 거부하고 정숙했던 여인은 연인의 새로운 연인의 출연과 그 둘 사이의 뜨거운 육체적 결합이라는 계기로,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삶의 마지막이 다가오자, 그녀는 이제까지 주체할 수 없었던 욕망을 드러내지만, 그런 모습을 지켜본 팰릭스의 시선은 독자에게 또다른 반전이다. 그가 사랑하는 그녀는 욕망하지 않는 여성이었던가. 욕망을 억압하는 여성이었던가.


소설은 주인공인 나가 어떤 여인에 대해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 여인은 알고보니, 주인공의 새로운 애인이다. 주인공이 무슨 이유로 새 애인에게 자신의 과거를 구구절절 써서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결코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정신적인 사랑이었던 모르소프 부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과, 뜨거운 영국인과의 육체적인 사랑 그 두가지 모두를 갖춘 새로운 사랑에 대한 충족감으로 혹은 자신에 대한 이해를 바라는 마음으로 편지를 쓰게 되었을 것 같은데, 당연히 과거에 파묻힌 남자를 누가 좋아하나. 꺼지셈. 하자, 그의 사랑은 이도 저도 아니게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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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 세트 - 전2권
말런 제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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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냉전은 그 어느 국가도 피해갈 수 없는 폭력을 야기했다. 이십세기를 살아내야 한다는 것은 불화와 충돌과 대치와 분열의 틈바구니들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걸 말했다. 80년대 민주화 항쟁의 거센 파도 속에서 대학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은 독재타도의 구호와 거리 투쟁과 의식화와 이념화와 허세의 틈바구니들을 견디며 그 속에서 고뇌하고 그 속에서 삶을 설계하고 그 속에서 절망하며 그 속에서 청춘을 찾아야 한다는 걸 말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오늘날의 평화적 촛불 집회는 확립된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의 힘을 보여주는 감회가 새로운 장면이지만, 추운 겨울 주말마다 휴일을 반납하고 거리로 나가야 하는 일은 청산되지 않은 냉전의 잔재, 유신의 잔재, 일제의 잔재가 좀비처럼 계속해서 살아 기어 나오는 이유와 이 책에서 70년대와 90년대 사이 자메이카 벌어지고 있는 폭력적 일상과 만나는 지점이 생긴다. 

냉전시대에 세계는 반으로 갈렸다.  파란색과 빨간색, 좋은 놈과 나쁜 놈, 우리편과 남의 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구소련편과 미국편.  어떤 주의를 표방하건 옳은 편은 그가 속한 편일 뿐이었다. 그가 속한 장소는 그의 이념을 결정했고 선택권은 없었다.  대부분의 나라(nation)는 이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골랐다. 나라가 결정한 이념은 애국과 동의어가 되었다.  자유의 이름이든 해방의 이름이든 그가 속한 사회가 내건 문패로 사용된 그 무슨무슨 주의를 지키기 위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었고 또 목숨을 잃었다. 폭력의 승리는 이념의 승리가 되었다. 남미의 작은 섬나라 자메이카도 그 중 하나였다.

별로 가진 것 없는 이 작은 섬나라에도 냉전은 삼켜버릴 듯한 기세의 파도처럼 밀려 오고, 통제를 잃은 자메이카 킹스톤인들의 삶을 갈가리 찢어 놓는다. 인구의 90%가 흑인인 이 나라에 무슨무슨주의는 두개의 거대 폭력조직에게도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다. 킹스턴 양대 폭력 조직인 코펜하겐시티와 에이트레인즈는 각각 자메이카의 양당 노동당(자본주의)과 인민국가당(사회주의)과 협력하는 세력이다. 코펜하겐시티의 수장은 파파-로와 그 밑에 조시 웨일즈, 에이트레인즈의 수장은 쇼타 셰리프다.

열세 명의 각기 다른 인물이 각자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 두 세력간의 오랜 반목을 깨고 평화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던 밥말리의 평화 콘서트를 둘러싼 밥 말리 암설 기도사건을 다룬다. 이야기는 두 세력이 부딪히면 반드시 한쪽이 죽어야 했던 그 포악했던 두 갱단 두목이 어떻게 낯선 '평화'를 지지하기 시작하는지, 왜 누구에게 평화는 두려운 것이 되었는지로부터 시작하여 암살기도사건의 핵심 인물인 조시 웨일즈가 죽기까지 거의 20년간 지속된 학살, 파괴, 반목, 대립, 그 사건의 영향과 마약 밀매와 폭력의 그늘을 그 일과 직간접으로 연루된 여러 사람의 관점에서 각기 독특한 목소리로 전달한다.   

1976년 12월 밥 말리 암살 기도사건을 다루는 1권에서는 CIA 지부장과 잡지사 기자, 코펜하겐시티 보스와 행동대장, 소년 갱단들, 밥말리의 소녀 팬, 그리고 사망한 전직 정치인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이후 미국의 마약 밀매 조직의 집단 살인 사건을 다루는 2권에서는 갱단과 협력 혹은 대치 관계에 있고, 상호 라이벌 관계에 있는 두 개의 자메이카 마약 밀매 조직원들과 청부업자들의 목소리가 추가된다.  그들은 모두 직간접으로 암살 사건과 연결되어 있거나, 사건이 끝나고 냉전이 저물던 무렵까지도 보이지 않는 사건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다.

냉전이 종식된 시대에,  이 책을 통해 냉전을 이해하는 코드는 이념간의 대립 그 이상의 것이다.  이 시대의 정치적 맥락은 냉전의 시대에 횡행했던 불의와 폭력이 냉전이 종식된 후에도 계속해서 냉전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화력을 얻는 방법과 그 동기의 깊이를 공유한다. 이 점이야 말로 우리나라가 처한 질문,  자본의 논리가 시장을 지배하고 그 누구도 아무도 자본의 힘을 부정하지 않고 자본이 지상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지 오래된 우리 사회에서 왜 도대체 왜 냉전시대에나 유효했을 종북이니 좌파 단어들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애초에 처음이 어디부터였는지, 발려 먹을 건 쥐꼬리만큼도 없는 가난한  작은 나라에서조차 폭력조직이 최초로 필요했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야만적 국가의 폭력 조직이 어떻게 세를 확장하고 사회를 무법지대로 만들고 통제 불능 상태로 만드는지는 이 책을 통해 합리적 일반화가 가능하다.  애초 그저 가난한 마을에서 삥뜻기나 하며 살아가던 깡패들은 이념이나 종교로 분열된 상황의 정치인들과 협력하며 세력을 키운다. 냉전은 정치 조직에게 더욱 큰 지원군을 얻는다. 냉전의 두 대표자 미국과 구소련은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괴뢰 정권의 수립을 지원하고, 비밀 경찰들을 통해 정치 조직 뿐만 아니라 갱들을 직접 지휘한다.

갱들이 무기를 지니는 순간 도시는 공포로 변한다. 가난한 나라의 소년 갱단들의 손에 총을 쥐어준 사람들은 내전을 통해 반대편 이념에서 뽑힌 정치 세력의 전복을 꾀한다.  쿠바 혁명을  지켜본 미국이 남미 여러나라들의 공산화를 막기위해 친미 정권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무기를 제공하고 지역 갱단을 이용하는 것은 그동안 여러 남미 국가들을 통제해가면서 얻은 노하우에 불과했을 것이다. 사회주의 인민국가당이 정권을 잡자, 항구에 도착한 총들이 계속 게토로 실려간다. 
 
CIA가 조시 웨일즈를 통해 어린 소년들의 손에 쥐어준 총은 목적이 조금 다르다. 두 갱단의 우두머리인 파파-로와 쇼타 쉐리프 사이에 평화가 감지되고 밥 말리의 대규모 평화 콘서트가 기획되자, 갱단과 그 갱단과 편먹은 정치 세력, 그리고 그 정치 세력을 조정하는 미국의 비밀경찰 요원들까지 모두 충격을 받고 불안을 넘어 위협을 느낀다. 분열의 출발은 분명 이념의 차이에서 시작되었겠지만, 이념은 잊혀지고 이념의 차이가 부른 충돌은 격화된다. 분열을 다루는 폭력이 대다수 삶의 수단이 되어 버렸을 때, 가치는 사라지고 구호만 남는다. 

구호들은 모든 갈등의 씨앗이 사라진 후에도  메아리처럼 꺼지지 않고 울린다.  대규모 평화 콘서트를 앞둔 밥 말리가 자택에서 암살기도 사건의 피해자가 되는 이유는, 평화가 삶의 위협이 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최고 가치가 된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와 대치되는 상황을 폭력으로 다루는 것 이외에는 다른 상황을 겪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평화는 폭력보다 위험했다. 그들은, 삶이 전쟁인 사람들에게, 평화라는 새로운 주의는, 화해라는 이상한 논리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낯선 당, 한 번도 다뤄보지 못한 새로운 적, 무엇이 어떻게 삶을 골탕먹일 지 모르는 또 다른 이념이라 속단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쌈질을 하라고 깡패를 만들어놨더니, 화해를 하다니 총질을 하라고 무기를 제공해 줬더니 평화를 찾다니, 열세 명의 화자 중 다수의 눈에 파파-로의 몰락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독자의 눈에도 예고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알아주어야 했던 것은 아마도 그가 처음부터 평화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철천지 웬수처럼 두 조직의 두목이 동시에 수감되자, 파파-로는  매일 서로의 반대파 갱단들에게 찔려 죽어나가는 이 살벌한 무법지대에서 쇼타 쉐리프와 함께 공멸할 것인지 공생할 것인지 생각한다. 그에게 평화는 선택이 아니라 삶의 수단이었다. 처음으로 맛본 그 달콤한 평화가 그들을 변화시켰을까. 둘은 두 사람이 연대한다면 감옥에서 뿐만 아니라 킹스턴에서, 자메이카에서 세계에서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가수의 집을 드나들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낯선 환희를 느꼈으리라. 

평화가 또다른 이념이라면, 그 평화를 폭력에서 지키고 그 평화를 가장 평화롭게 전파하는 방법이 음악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자메이카가 낳은 전설의 세계적 레게 가수 밥 말리가 거기에 있었다. 파란색도 빨간색도, 미국편도 소련편도, 인민국가당도 노동당도, 사회주의자도 자유주의자도 모두 같은 공간에 모여 같은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들을 하느라 총질을 소홀히 하는 동안 코펜하겐시티를 움직이던 노동당과 미 첩보국 비밀요원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이코패스 진정한 갱의 두목이 될 자격을 갖춘 조시 웨일즈로 갈아탄다. 


밥 말리 살해 사건을 진두 지휘하고, 목격자와 가담자들까지 말끔히 처리한 후 코펜하겐시티를 장악한 조시 웨일즈는 그 대가로 콜롬비아 메데인 카르텔에서 마약을 공급받아 마이애미와 뉴욕에 판매망을 구축한다. 냉전이 끝났어도, 가수가 암으로 죽었어도 갱원들은 여전히 총질을 하고 코펜하겐시티는 건재하다.  수없이 많은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하게 죽이고 미국의 마약 밀매 조직에 깊숙히 관여하는 사실이 알려져 있어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의 비호를 받던 조시 웨일즈가 죽을 때까지, 숨죽이며 쫓기던 사람이 있다. 신분을 세탁하며 숨어살던 암살 사건의 목격자와 사건을 취재하던 기자가 쓴 기사는 이 야만의 시대 가까스로 살아남은 목격자의 목소리다. 주위를 둘러보자. 냉전의 피해자들,  유효기간이 지나 폐기되었어야 할 냉전의 논리를 재활용하고 그 찌거기들을 삶의 수단을 삼는 잔혹한 야만인들의 목격자라는 이유만으로 아직까지 숨죽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 혹시 그들 중에는 피해의식이 역설적으로 현실을 왜곡하여 그들이 쓰다 버린 냉전의 찌꺼기마저 주워 담아 애국으로 치환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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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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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씻긴 과거의 흔적은 황폐한 기억의 바다 깊이 잠겨 있다.  바다는 말이 없다. 그날, 이후로 맥스는 다시는 수영할 수 없었다. 유폐된 여름 날의 묻힌 기억 어둔 시간의 장막을 여는 시점은 아내 애나가 세상을 떠난 바로 이 시점이다. 그렇다. 기억을 찾는 단서는 아내의 죽음, 아내와의 이별, 이 고통의 시간이다. 어린 시절 설레던 어느 짧은 여름날의 바닷가 그림같은 풍경과 예정된 죽음을 받아들이던 아내. 오십년이라는 긴 시간적 차이를 두고, 무관해 보이는 이 두 개의 전혀 다른 사건들은 어떤 이유로 인해 뇌신경의 동일 지점, 혹은 동일 시냅스 경로를 공유했다. 

불완전하고 파편화된 기억들이 들추어내는 시간은 세 개의 축을 중심으로 병치된다. 진단과 함께 시작되어 죽음으로 끝난 아내와의 마지막 시간, 열두살의 여름을 함께했던 그레이스 가족들과의 바닷가에서의 시간, 그리고 그레이스 가족이 묵었던 여름별장 시더스로 돌아와 그 두개의 사간 뭉치 속 과거가 비추는 거울 앞에 선 현재의 시간.
 
기억은 순서를 구분하지 못하고 둘쑥날쑥 제멋대로 섞였고, 일관성도 없으며, 그 연속적인 장면들을 하나의 이미지로 구겨 흐릿하게 촛점 잃은 이미지를 한 순간의 찰라적 순간의 이미지로 왜곡시키지만 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미지와 냄새는 감각과 이상 사이에서 현재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들과 함께  그들이  묻혔던 과거의 시간 속에는 신들이 있고, 예정된 아내와의 이별의 시간에는 그녀만의 방식으로 걸어가던 특별한 죽음의 여정이 있다.

긴 일생의 시간 중 하나의 짧은 여름을 함께한 그레이스의 가족들의 신화가 잠든 시더스에서의 현재는 아내와의 이별에 어떤 상징이 될까. 위로보다 애도를 더 원했다면 둘 만의 추억의 장소를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천천히 다가왔고, 그 죽음 가까이에 맥스 모던은 이제껏 함께 있었다. 애도는 예정된 죽음 앞에서 충분히 했으리라. 이제 벗어나고 싶을 지도 모른다. 아내의 죽음과 가장 멀리 떨어진 시간으로 여행할 차례다. 시간 이동이 불가능한 현재, 그가 선택한 방법은 과거의 시간을 과거의 공간으로 치환한 시더스라는 장소다. 오십년 만에 찾은 시더스는 아내가 없는 집에 홀로 남겨지는 상황을 피해 선택한 여행인 것처럼 보인다. 

자연은 공평하다. 바다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누리는 방식, 그것 근처에 와서 머무르는 방식에 바다의 원칙이 닿지는 못한다. 여름바다를 찾는 사람들의 계급은 숙소를 결정하고 숙소는 계급을 말해준다. 맥스가족은 샬레라고 부르는 작은 목조 주택을 세 내었다. 여름바다를 가장 저렴하게 이용하는 그룹이다. 샬레 위에 시더스와 같은 여름별장에 하숙하는 가족들이 있고, 더 위에는 호텔, 가장 꼭대기에는 골프 호텔이 있다. 그는 샬레에 살면서 시더스를 동경한다. 시더스를 동경해서 시더스를 세 낸 그레이스 부인을 연모하고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 쌍동이 남매 클레이와 마일스의 친구가 되고, 미숙한 사랑의 감정은 부인에서 클레이로 자연스럽게 옮겨간다.

"아이었던 과거의 내가 상상하는 모습과 다시 현재로 와서 불완전한 기억이 환기하는 과거의 상상 속의 미래는 어떤 닮음꼴이 있을까. 그는 동네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에게서 성공의 소도구들을 미래의 이미지에 배치했고, 그레이스가의 사람들의 낯선 삶 속으로 편입해 한 단계 높은 계급으로 진입하는 경험을 이미 맛보고 추구했다. 그렇게 과거와 가능한 미래와 불가능한 현재가 계속 뛰기 시작했다.(p94)"

맥스의 회상에서 그레이스 가족은 신적인 존재다. 그것은 불완전하고 선택된 기억의 파편 속에서만 박재되고 잊혀진 채 결코 생생하게 살아 나올 수 없는 신화적 모호성 때문만은 아니다. 궁색한 샬레와 비교되는 시더스라는 품격있는 여름 별장, 외동 아들인 자신은 경험해보지 못한 쌍동이 남매의 기이한 동질성, 그레이스 부인을 향한 연정, 그리고 그들이 소멸해간 방식 역시 신처럼 근접할 수 없는 신비감을 간직한다.  

신화 속 상실이 현실 속의 상실을 상쇄시킬수 있을까. 파도와 파도가 만나면 더 큰 파도가 될까. 서로를 부딪혀서 깨뜨려 없앨까.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한탄했던 어느 시인을 떠올려봤다.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욕을 하고 나는 얼마나 작으냐'던 시인의 작은 분노의 이유는 슬픔이라는 감정에도 대입 가능할까. 시인은, 아내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슬픔을 위안받기 위해 오십년 전의 슬픔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맥스의 행동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질까.  평생 무의식 속에서 트라우마로 남았든 혹은 애써 덮어 잊고 살았든 생애 처음 상실을 가르쳐주었던 기억 조각을 모으는 일은 분노해야 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어쩌면 반대일 지도 모른다. 투병의 고통과  예정된 죽음이라는 남루한 기억 대신 아름답고 모호한 신화 속에서 자신을 위로받으려 했던 걸 수도 있다. 두서없이 재생되는, 멀리 떨어져 결코 만날 수 없을 기억의 파편들은 서로 부딪혀 서로 공명하며 서로는 서로를 부른다. 클로이의 신비한 이미지들을 떠올릴 때 생존과 소멸을 함께했던 아내의 투병 생활이 떠오르고, 그것은 다시 시더스의 풍경과 기이한 이미지로 각인된 그레이스 가족의 풍경,  그레이스 부인을 향한 뜨거운 감각적 환상을 회상시키고 의식의 흐름은 그들의 부모와 비교되는 자신의 부모, 또 자신의 부모와 나을 것도 없어 보이는 아내의 부모를 거쳐 갈등중인 딸에게 이르고, 딸이라는 현실은 다시 시더스의 현재와 시더스가 품고 있는 과거인 그레이스 가족에게로 그렇게 생각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

어쨌든 그가 사랑했던 여자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신화속의 연인도, 현실속의 아내도 그를 떠났고, 그 둘은 작당한 듯이 그를 사랑했으면서 동시에 그를 소외시켰다. 둘 다 모두 자신을 한 단계 높은 경제적 계급을 경험하게 한다. 클로이 남매를 통한 상류 사회로의 진입은 신화로 막을 내렸고, 애나를 통한 부는 그를 가볍게 들어올려 위쪽 계단에 올려놓았다. 신화속의 경험은 소멸되고 사라져 이미지가 되었지만 현실의 아내를 통한 신분 상승이 그의 기억 속에 그가 꿈꾸었던 그를 실현주었는지 그가 살았던 현실이 그가 진짜로 원했던 미래였는지 여전히 모호하다. 

이 소설 속에서 여성들은 예쁘다거나 매력적이다거나 하는 모호한 단어에 갇혀있지 않다. 환상적이거나 대상화되어 있지도 않다. 그에게 그들은 자신의 존재감으로 그들의 존재감을 덮을 수 없는 강한 자아를 내뿜는다. 신화 속의 사람도 현실 속의 아내도, 생생하게 살아 꿈틀거리는 생물이며, 그 살아있음의 증거로 그들을 떠올릴 때면 몸 구석구석에서 나는 악취들이 기억속의 이미지와 함께 재생된다. 그가 클로이를 떠올릴 때에도, 애나를 떠올릴 때에도 늘상 부딪히는 것은 이해불가의 벽과 고집이다. 사진작가가 되기를 원했던 애나는 호스피스 병동의 사람들을 돌아다니며 병의 가장 추악한 이면을 담아내곤 했다. 보호자들의 불만을 처리해야 했던 애나의 보호자로서의 난처했던 처지를 생각하더라도 생애 마지막 시간을 생애 마지막에 덮친 동료 환자들을 덮친 질병의 추악한 모습을 담는데 할애하고자 했던 아내의 행동을 난해하고 단단한 그녀만의 벽으로 느끼는 맥스를 보며, 나는 슬펐다.  때로 죽음보다 때로 상실보다 더 큰 실존적 슬픔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몰이해의 벽이다.  

누군가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면 그 이해를 바탕으로 사랑하겠지만 또 누군가를 조금 이해할 수 없다면 그 불가사의함과 차이에서 기인되는 신비함이 사랑의 시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오래 함께 살아온 배우자의 행동이 갑자기 낯설다면 되풀이되는 일상적 삶의 진부함 속에서 타성적으로 알기를 거부하는, 습관적 만성적 권태 탓인지도 모른다. 신화는 권태가 지배하기 전에 지나가 신비를 남기고, 현실은 사랑으로 함께 한 긴 시간만큼 할당된 권태와 불통의 양을 고스란히 품는다. 그래서, 그렇게 아내를 잃은 현실의 상실을 신화적 상실의 치유로 대체하기 위해 무의식의 상처들을 의식 밖으로 끌어올리는 프로이트식 치유 과정을 스스로 경험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두 개의 상이한 과거 속의 시간 속에서 어떤 시간의 상처가 어떤 시간의 상처를 만져줄까. 바다는 침묵한다. 자신이 삼킨 것들에 대해 무혐의를 주장하듯 파도는 끊임없이 오고간다.  

하나의 긴 산문처럼, 사건이 사건이 되지 못하고 현재는 과거에 현재였던 것의 환기로만 존재하는 이 소멸의 시간이 아름답고 매혹적인 문장 속에 정체된 듯하다가,  맥스가 술을 진땅 마시고 바닷가에 쓰러져 죽을 뻔한 급격한 절정을 맞는다. 그를 구해낸 사람은 50년 전 그레이스 가족이 여름을 보내던 시기에도 상주했던,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는 대령이다.  먼 과거와 현재 시간을 잇는 가교는 쇠락해가던 시더스와 대령 뿐이 아니다. 베버수어 양의 정체가 드러나고, 50년 전 어떠 날, 그가 본 어떤 짧은 풍경의 진실 하나가 알려지면서,  이 소설은 문장에 매혹되어 있던 독자를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놀라움과 사유 속으로 인도한다. 기억에 관한 소설이면서 애초 그 기억을 구성하는 진실이 구축되는 형태와 결과가 결합하는 형태에 대해 섬광같은 질문을 던지는 반전적 결말이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

미성숙한 여린 열병같던 사랑과 흔적을 찾아나서야 했던 때가 왜 하필이면 아내가 죽은 시점이었어야 했을까. 그에게 역사는 기억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 역시 중요하다는 것. 하지만 인간의 감정에 진실이라는 것은  우연히 포착할 수 있을만큼 쉽게 만져지는 실체가 아니며 믿고 있는 것과 정반대이면서도 영원히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글을 열심히 썼지만, 열심히 써 내려가다보면 애초 처음에 던졌던 의문이 풀릴지도 모를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아직 내가 결론을 내렸는지 못내렸는지조차 결정할 수 없다. 맥스 모든은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 혹은 무언가를 치유하기 위해 그곳에 갔던가.  두 개의 과거 하나의 현재. 뒤섞인 시간 속에서, 그 날, 조수가 이상하던 날의 바닷가에서 일어났던 신화의 후면에는 어떤 진실들이 감추어지고 어떤 진실들이 잊혀졌으며,  그렇게 빠지고 생략된 틈에서 기어이 살아남은 기억과 공백의 틈바구니에서 결정된 현재가, 무엇을 고르고 어떤 진실이 포착되어 미래에 어떠한 형태로 남겨 신화가 될까. 우리에겐 오랜 세월동안 헤어지고 바래져 맥락은 모두 잊은채 또렷하게 살아 남은 그 무엇이 있다. 

이제 그 의문을 잊기로 한다  매혹적인 문장과 뉘앙스에 이끌려 소설을 구성하는 태초 신화의 사건적 구성에서 자주 길을 잃었다. 그 날 이후 커다랗게 부풀던 바다가 만들던 그 기이한 풍경이 어째서 그에게 다시 수영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는지를 잊는 대신 그가 불러오는 아스라한 과거에 간직했던 감각의 소용돌이 안쪽으로 불려가 그의 불안전한 기억의 파편들과 함께 나의 과거와 나의 현재 그 사이를 부유한다. 작가가 섬세하고도 집요하게 두 과거 사이 어떤 감정과 의문 사이를 오가며 이야기를 유예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우리가 이 소설을 읽는 방식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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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군분투 2016-12-26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등 축하 축하. 잘 발걸음 않는 알라딘까지 몸소 와서 축하하네요. ^^

CREBBP 2016-12-26 16:58   좋아요 0 | URL
친히 납셔주셔서 캄사캄사~. 1~30권이 겹쳐서(그것 역시 상품으로 받은 것) 행복한 고민에 빠졌어요. 진짜 완전 좋아요~~ 작년에 100만원 받은 거만큼 좋아요~ 심사평도 정영목님이 써주셔서 영광이라는.(제가 정영목님 번역을 좋아해서리)
 
페스트 열린책들 세계문학 229
알베르 카뮈 지음, 최윤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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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더모트도 아닌데, 차마 그 이름을 말할 수 없었던 페스트가 결국 시당국에 의해 공식화되면서 도시는 폐쇄된다. 이제 도시에는 산 자와, 죽은자, 그리고 살아남을 자와 곧 죽을 자들이 남았다. 도시 밖에 있는 사람과 도시 안에 있는 사람은 언제 재회하게 될 지 모른다. 죽음의 도시가 주검을 처리하는 방식은 아우슈비츠를 연상시킨다. 관이 모자르자 관을 생략하고, 묘지가 모자르자 거대한 구더기가 더 많은 주검을 담기 위해 남녀혼탕체계로 전환되고 바람이 불면 시체처리 냄새를 맡는다. 페스트는 시민들을 도시 안에 유폐시키지만, 비극의 본질은 유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계속된다는 거다. 성곽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편지 한 통 보낼 수 없고 전화 통화도 가능하지 않는 시대다. 떨어져 있는 연인에게, 가족에게 허락된 건 짧디 짧은 전보 메시지가 전부다. 그 짧은 메시지에 사람들이 담을 수 있는 말은 진부함 밖에 없다. 사랑한다. 잘있다. 보고싶다. 계속된다는 건 끝나지 않는다는 것, 답보 상태의 질병이 계속해서, 이웃의 가족의 친구의 생명을 앗아하고 있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헌신적으로 사람들을 '돌보는' 의사와 민간 보건대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페스트임을 확인시켜주고 격리수용시키는 서류에 사인을 하고, 행정적인 도움을 주는 일 뿐이다. 그 도시가 계속된다는 것은 시민들의 삶이 먹고 마시고 떠들고 즐기는 모든 인간의 삶이 나름대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며 계속된다는 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야말로 피가 철철 흐르듯이 우리의 가슴으로부터 솟구쳐 나왔던 그 말들은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당시 우리 시민들은 생명력을 잃은 구절들을 가지고 우리의 고달픈 삶의 징표들을 전달하고자 애를 쓰며 편지들을 기계적으로 베끼고 있었다. 85


페스트의 발생에서부터 물러가기까지의 기간동안 도시의 모습을 서술자에 의해 객관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이 소설에는 도시 풍경 외에, 네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해서, 서술자와의 대화하며 그들의 과거 삶의 궤적과 함께 현재, 그 병든 도시가 그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준다. 후에 밝혀지는 서술자는 실제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임에도 가장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주인공 베르나르 리유다. 페스트의 전조 증상인 죽은 쥐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올 때, 그의 아내는 다른 병으로 인해 도시 밖의 어느 '산'에 있는 요양원으로 떠나고, 대신 어머니가 살림을 맡아주러 와있다. 그는 자신을 돌보지 않으며 헌신적으로 일하지만 농부처럼 과묵하고 주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다. 따라서 떠난 아내에 대한 애틋함과 페스트에 대한 자신의 불안이 독자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데, 그 때문에 페스트가 물러나고 도시가 제자리를 찾을 즈음 듣는 아내에 소식은 더욱 애닯고 마음아프다. 아내를 위해 마지막으로 베풀었던 기차 침대칸과 다시 볼 수 없음을 짐작하고 맺혀있던 그 아내의 눈물이 그를 그토록 한 의사를 무기력한 상황으로 몰고가는 페스트 국면에서 그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을 묵묵히 해 나가고, 아이들의 죽음을 견딜 수 없이 슬퍼하고, 랑베르의 탈출에 행운을 빌고, 페스트가 죄지은 인간에 대한 벌이라는 신부에게 참고 참았던 감정을 폭발하고, 떠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채울 형용사들에 대해 고민하는 그랑의 말을 들어주고, 보건대를 조직한 장 타루에게서 우정을 느낀다. 


그렇다고 항상 죽음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휴가 중인 셈이었다. 타루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하지만 가장 나쁜 것은 그들이 잊힌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296


우연히 취재차 왔다가 떠나지 못하고 도시에 갇혀버린 랑베르는 자신은 오랑 시민이 아니며, 어떻게 해서든 도시를 빠져나가는 게 새로운 삶의 목적이 되어 버렸다. 서류를 작성하고, 사인을 받으러 다니고, 거절되고, 또다른 사람을 만나서 설명을 하고, 서류를 작성하고 또 거절당하고 그렇게 매일 매일을 도시 탈출에 온 에너지를 쏟느라 막상 나가야 하는 이유였던 연인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지만, 결국 성문을 지키는 사람들과 인연이 닿아 몰래 빠져나갈 기회를 찾게 된다. 위험을 무릎쓰고 도전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페스트 때문에 도시 사정은 한치 앞을 알 수가 없고, 문지기들을 만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서, 이 비공식적 탈출 계획 역시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나가려고 했을 때만큼 번번히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뭔가 쿨하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연상시키는 장 타루는 오랑 시민도 아니고, 호텔에서 묵고 있는 이방인에 불과하지만, 랑베르와는 달리 도시의 자원봉사대가 필요하리라 생각하고 보건대를 조직하여 앞장선다. 그 일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었고, 살아남을 가능성은 1/3밖에 안된다고 리유는 타루가 보건대를 조직하겠다고 했을 때, 사실을 알려주지만 타루는 개의치 않고 민간보건대를 조직한다. 타루가 이끄는 보건대의 활약은 짐작하건데 도시의 질서 유지에 큰 도움을 주고 페스트로 마음마저 황폐해졌을 시민들에게 희망을 주었을테지만, 이 소설에서 그런 감상적 개입을 원치 않은 서술자는 보건대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며, 그 의미마저 축소시킨다. 그의 과거 역시 리유에게 자신을 설명함으로써 알게 되는데, 그의 약간은 냉소적이면서도 초월적인 면은 그의 어릴 때의 환경과 그것이 심어놓은 개인적인 가치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가 발견되는 모순을 통해 이해 가능하다. 


평생 말단 임시직 서기인 그랑은 자신의 건물에 함께 사는 코타루가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하는 것을 구해내 의사를 불렀을 때 리유와 알게되는데, 이후 리유에게 자신이 쓰는 글에 대해 계속해서 언급한다.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했지만, '만사에 무심해졌고, 점점 더 과묵해진 데다, 자신의 젊은 아내에게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한 그랑은 떠난 아내가 남긴 편지를 끌어안고 남은 평생을 살아간다. '제 때 그녀를 붙잡아둘 말들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주기 위해 편지를 쓰기 시작했으나, 적합한 말을 고르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의사 리유에게 계속 형용사를 바꾸며 의견을 묻고, 또 바꾸고를 되풀이하지만, 편지는 완성되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빈틈없는 평등이 남아있기는 했으나' 공연을 왔다가 페스트 공포에 유페된 극단은 연일 매진 사례를 이루며 공연을 하고, 사람들은 술집으로 몰려다니며 죽음을 나눈다. 재난 영화의 전형처럼 보이는 방화, 약탈, 폭동, 강탈, 반란 등의 사건이 일어나 총격전도 발생하지만, 그것들은 짧은 뉴스 정도로 다룬다. 당연히 기회를 만난 사람도 생긴다. 바로 목을 매 자살을 시도했던 코타르인데, 사형이나 무기징역형을 받을만한 중범죄를 저질러 쫓기고 있던 그는, 모든 공권력이 페스트로 쏠린 덕에 경찰의 주목을 받지 않았고, 여기저기 벌인 자잘한 투기와 불법적인 거래로 호황을 누린다. 소설에서 악인을 뽑아야 한다면 주인공이 될 수도 있을 코타르지만, 여기 나온 모든 등장인물들과 관계를 맺는 그는 그들에게 그냥 이웃일 뿐이며, 랑베르에게 탈출을 주선하기도 한다.


감정을 잘 추스리고 맡은 바 임무에만 집중하는 리유가 딱 한 번 감정이 격해지는 적이 있는데,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오통 판사의 아들을 신부 파눌루와 함께 지켜본 후의 일이다. 파눌루의 열정적인 설교를 기억하는 리유는 그 어린 아이가 어째서 그렇게도 고통스럽게 죽었어야 했는지를 절규하듯 묻는다. 이에 충격을 받은 파눌루는 다소 불안하고 극단에 치닫는 길고 지루한 설교를 하는데, 이후 페스트가 아닌 다른 병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내용이 뭔가 심오해보인다. 


카뮈 자신은 이 소설을 2차대전때 독일에게 함락된 파리에 대한 은유이며 페스트는 나치 전제주의를 상징한다고 하고, 또한 본문 중에도 페스트는 어떤 무언가를 상징하는 듯한 내용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재난 소설로서만 보아도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잘 계산된 인물의 배치와 그들의 역할은 촘촘하게 다양한 인간의 군상과 의미를 전달하고, 리유라는 인물이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보여준 헌신적인 행동과 특히 의미마저 축소시켜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었던 민간보건대의 역할은 훗날 랑베르와 그랑을 모든 인물과 엮으면서 삶의 무엇이 중요한가를 생각하게 하는 천재적인 구성이다. 랑베르의 결정이 있은 후, 잠시 숨을 고르느라 책을 덮어야 했다. 그리고 리유가 만났던, 리유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던 이들 중 허망하게 죽은 자와 죽음에서 살아나온 자들에 대해 한명 한명 모두 감정이입이 되고 특히 리유의 이미지가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읽은 책을 읽자 마자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드문데, 이 책이 그 케이스였다. 비록 알베르의 독립을 반대했던 그의 정치관에는 그다지 찬성하지 않지만 카뮈는 진즉 읽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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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리 잭슨의 The Lottery는 영문학 교과서에 자주 실리기 때문에 영미권 환경에서는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소설이라고 한다.  국내에 셜리 잭슨의 책이 3권 나와 있는데, 이 단편이 실린 책은 제비뽑기라고 되어 있어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번역된 제목 제비뽑기는 무작위로 누군가를 뽑는 것이라 그런 느낌이 없는데 원제 The Lottery》는 국내에서는 복권 로또 당첨 같은 선입견이 자리 잡아서 그런지, 행운을 연상시킨다.  이 로또 맞았다고 할 때의 행운의 느낌때문에  제비뽑기라는 번역이 원제 The Lottery가 주는 반전적 충격을 희석시키는건 아닌가 싶다. 결론은 어마어마하게 충격적이라는 거다. 


전건우의 《밤의 이야기꾼들》에 실린 이야기 중의 하나인 《눈의여왕》을 읽으면서 셜리잭슨의 The Lottery가 생각났다. 오밤중에 캄캄한 폐가에 모여 앉아 자신들을 기묘한 이야기들을 차례로 전하는 것을 취재하는 형태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전건우의 《밤의 이야기꾼들》중 마지막 노인이 이야기한 《눈의 여왕》은 The Lottery에서 마을 사람들이 행했던 방법과 비슷한 방법으로 인간의 본질적 야만성과 악을 폭로한다. 


《The Lottery》는 지금은 사라졌다고 판단되는 관습과 주술적 믿음을 다루기도 하는데, 알 수 없는 먼 미래를 상상한 커트 보니것의 《2BR02B》와도 상통하는 데가 있다. 궁극적으로 어떤 집단의 관습은 그 집단의 믿음에 기초하는데, 그 믿음이 무엇을 위해서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선택한 가치가 과연 무엇을 희생시키는가를 어떻게 교묘하게 숨기고 있는지를 생각나게 한다는 면에서 그렇다. 그러니까 《2BR02B》는 집단이 어떤 희생을 치르고 구축한 시스템이 무엇을 파괴시키고 있는가를 다루는데, 그렇게 해서 구축된 시스템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 그것이 혹은 어떤 시스템이 옳은가 그른가의 문제가 아니고, 세상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오히려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문제는 읽을 때는 단순히 충격적인 미스터리 소설이다 라고만 생각했던 스토리의 파편들이 두뇌에서 여기저기 튕겨가며 이 거대한 시스템에 대한 은유로 치환된다는 거다.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 모호한 이 소설은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마을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들고 약간의 축제분위기마저 감돌면서 목가적 분위기로 시작한다. 사람들은 농담을 해가며 칠십칠년 이상 오래된 이 관습이 어떤 마을에서는 없어졌다며, 그런 젋고 어리석은 인간들이라며 쯧쯧하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는 이런 저런 잡담이 이어진다. 약간 늦게 도착한 테시 허치슨 부인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 깜빡 잊어버렸었다고 하고, 사람들은 그녀가 없는 채로 시작할 뻔 했다고 그렇게 가볍게 시작된다. 진행자는 한명씩 마을 사람들의 성을 호출하고 종이를 뽑아 들고 순서대로 한명씩 가장이 먼저 종이를 뽑아 어떤 집안이 당첨되는지가 먼저 결정되는데, 빌 허친슨이다. 


소설을 내고, 독자들의 사과하라는 압력까지 들었다는 하는데, 애초 처음에 그 독자들을 화나게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소설 속에 있다. 우리 인간을 어떻게 취급하는 거야? 혹은 인간을 뭘로 아는 거야? 라는 반격이 가능할만한 소설이다. 마지막 문단에 가서는 선명하게 시각적인 장면이 연상되어서 더욱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지켜져왔던 것들 남겨진 것들 중에는 희생양을 기반으로 한 것을 찾자면 못찾을 것도 없을 것이다. 당첨자가 밝혀지자, 빨리빨리 끝내고 일하러 가자는 마을 사람들의 그 무심함이 더욱 소름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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