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덴탈 유니버스 - 우리가 몰랐던, 삶을 움직이는 모든 순간의 우주
앨런 라이트먼 지음, 김성훈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과학이 필요한 이유는 모르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서다. 증명된 것, 확실한 것, 세상에 존재하는데 우리가 감각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는 알아내지 못하는 것들을 알아내는 것이다. 그 앎이 확실하다면 그 앎을 통해 새로운 것들을 꾸준히 만들어낼 수가 았다. 컴퓨터와 우주선과 유전자 조작 농산물 등 우리 생활에 이제는 필수불가결한 거의 모든 물건들이 그 자연의 규칙을 알아낸 덕분에 존재하게 되었고 해가 뜨고 별이 빛나는 아름다움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대략이나마 알게 되었다. 밤하늘 가득 빛나는 별들의 실체가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르다고 해서 별들이 우리에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과학은 과학인 채로 과학 이외의 것들과 섞어 희석시킬 이유가 없다. 아는 데까지 현재 인류가 가진 기술 문명이 증명하고 있는 것꺼지는 적어도 종교가 개입할 이유가 없다. 종교적 이유로 증명된 과학적 사실을 왜곡시키지 말아야 한다.


영적인 것을 알아내려는 노력은 부질없다. 믿음은 주관적 경험에서 비롯된다. 신념이란 개인적인 것이다. 그런 걸 평가할 기준은 없다.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변하기 쉽다. 그 무엇보다도 믿음이란 개인의 문제다. 무슨 생각을 하건 그 생각을 누구에게 노출할 의무도 없으며, 반대로 남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거나 주입받을 까닭도 없다. 믿음도 신념도, 그라고 영적이라고 말하는 것들 모두 변하지 않는 어떤 진리라는 가공된 이름으로 함께 엮고 꼬을 이유가 없다. 진리는 진리고 진리가 아닌 것들은 각자 자신의 신념과 믿음과 그 밖의  개인적인 차원에서 존중받을 이유가 있지만 개인적인 영역에 머무를 때 그렇다.

 

도킨스가 9.11 을 겨냥해 종교를 비판했다면, 내가 도킨스처럼 강한 불신론자도 아니라 하더라도 911 테러를 종교적 영역 내에서 합리화시킨 그 종교의 잔혹성에 대해 같은 생각이다. 만일 테러가 믿음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면 근원적인 믿음 그 자체가 아무리 신의 뜻이고 성적인 것이고 이런 저런 긍정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그릇된 믿음에 대한 비난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같이 많은 생명을 앗아간 이유가 만일 종교적 이유에서라면 말이다.

 

도킨스가 신념에 대해 그리고 사람에 대해 아주 편협한 관점을 갖고 있는 듯하다 77

 

작가는 도킨스가 짜증난다며 이렇게 썼다. 이런 공개적인 비판을 보면 작가가 어떠한 논리로 그 편협성을 설명하는지 구체적 근거를  기대하게 된다. 설명은 허술하다. 과학적으로 단순하게 환원시킬 수도 없는 믿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과학자의 눈에 과학이 단순할 지 모르지만, 과학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오히려 반대다. 독자로서 과학은 너무 복잡해서 아무리 기를 쓰고 이 책 저책을 옮겨다니며 읽어도 이해하기도 어렵다. '단순하게 환원'시킬 수 없는 '믿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저자는 설명이 없다.  그러니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독자를 납득시킬 수 없고, '단순하게 환원시킬 수 없는',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저자 자신은 그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뭘 주장하려는 건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그 초월에 대한 열정은 아름다운 창작물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처음엔 이 책이 과학 도서인줄 알았는데 에세이에 가까웠고, 그렇다면 생각의 흐름을 따라 짜임새 없이 생각나는대로 이말 저말 적을 수도 있는 글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는 있는데 나는 당췌 과학이 아닌 초월적 존재에 대한 열정이 아름다운 창작물의 원동력이 돈다는 것과 도킨스의 편협성이 어떤 관계가 있다는 건지 알 수 없다. 저자는 거의 같은 어조로 신념이란 믿음이며 상상의 나래라고 알맹이 없는 동어반복을 반복하는데 설득력이 없고 양비론에 대한 저자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해주지도 못한다.

 

그동안 종교의 이름으로 행한 엄청난 파괴에 대해서 과학도 파과적인 무기를 만들어냈으므로 마찬가지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도킨스의 어떤 주장을 비판하는 건지 모르겠다.  종교가 행한 파괴는 신의 이름으로 필연성을 부여하고 정당성을 획득했지만 과학이 파괴에 기여한 건 단지 수단이었을 뿐 과학 그 자체의 목적이 아니지 않은가. 도킨스의 주장은 인간과 인간 혹은 인간과 동물간의 교감이나 정서적이고 정산적인 모든 활동을 부정한 것이라는 건가?

 

표지와 띠지를 통해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소설가라는 저자의 독특한 이력이 홍보에 쓰이는데, 이례적으로 대학에서 과학과 인문학(문예 창작)을 함께 가르치는 교수로 임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책은 전반적으로 저자의 박식함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하지만 저자가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과학과 함께 신의 영역을 함께 남겨놓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을 믿는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숫자로 보여준다. 하지만 저자가 책을 가득 채우는 과학적 지식들은 파편화된 지식들이고 저자가 주장하는 영적인 부분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아 억지스럽게 보인다. 


모래알처럼 과학적 지식고 주장이 별개로 따로따로 굴러다닌다는 느낌이 들었다. 리처드 도킨스가 '짜증'스럽다는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고, 분명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은 신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한다는 생각을 분명히 하였음에도 저자는 생기론자과 기계론자들을 분류하여, 한 발 물러나 그들의 주장을 소개하는데, 전자는 생명에는 특별한 속성이 존재하며, 뒤죽박죽 섞인 조직과 화학물을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만들어 주는 어떤 비물질적 영적 초월적 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초월척 힘은 물리적 설명을 뛰어 넘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이러한 생기론자들과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기계론자들은 궁극적으로 물리학, 화학의 법칙을 통해 살아 있는 동물의 모든 작용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론자들의 생각에 힘을 싣는 건 아니다. 다만 과학이라는 틀로 세계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몸을 여러 개의 코일 스프링, 움직이는 공, 추, 지렛대 등이 모여 있는 집합체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159)'하는 기계론자라 칭하는 점을 주목할만 하다.

 

그럼 우리의 정신은? 우리의 정신은 그저 쿨롱의 법칙이나 명령에 따라 화물과 전기신호의 형태로 정보를 전달하고 저장하는 끈적거리는 신경세포들의 집합체인 뇌에 불과하단 말인가? 기계론자들은 우리를 둘러싼 자연법칙을 고려하고 세계가 물리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고성능 컴퓨터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60


정신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두 밝혀지지 않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자유이다. 과학자로서의 저자는 독자에게 책을 통해 올바를 정보를 줄 책임이 있고, 인문학자(소설가)로서의 저자는 독자에게 책을 통해 감동과 교감을 줄 필요가 있다. 저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두서없이 마구 나열하여 과학적 정보를 전달하는 데 실패했고, 또한 논리적이거나 자신의 생각을 잘 전달해 감동을 주는 일에도 그리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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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7-03-14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REBBP 님의 생각과 관점에 동의합니다. 이 책의 저자가 과학을 가르친다니 약간 우려가 됩니다. 과학은 확실하게 아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류하는 사고체계이자 방법론이라 생각합니다. 과학이 아직 모르는 것이 있다고 해서 과학을 비판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CREBBP 2017-03-15 08:14   좋아요 0 | URL
앗 어제 휴대폰에서 댓글을 달다보니 이 댓글을 못보았군요. 사실 저자가 과학을 전공했으므로 과학을 가리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과학과 비과학적인 것을 마구 섞어대는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 둘을 섞다보면 과학이 사이비 과학이 되어 자신의 ‘증명되지 않은‘ 가치나 종교적 신념 같은 걸 옹호하는 데 쓰일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과학자나 종교학 등등의 교수들은 자기가 전공한 분야나 가르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