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밖에 없어 짧은데다가 구정과 졸업식 등등 여러가지 일들이 겹쳐, 책을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 여행중에는 내내 이북을 끼고 다녔지만, 막상 쪼가리 시간이라도 내어 책을 읽을만한 여유가 없었구요. 생각해보니 최근 제 독서 경향이 문학 쪽으로 치우치는 겁니다. 제가 에세이와 시를 잘 안읽는 편이라 문학이라고 하면 주로 소설인데 소설을 많이 읽는 것은 제 독서 패턴에 약간의 우려를 낳습니다. 몇일 전 모 블로그 이웃님을 만나서도 그런 얘기를 했는데, 소설은 읽고 나서 얼마간 숙성 기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 그 스토리와 문체 등 그것 자체만을 이해하고 따라가는 데 급급한 나머지, 그 소설이 남기는 어떤 여운 같은 것을 바로 포착하기 어렵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의 삶을 곱씹고, 의문을 제기하고, 이해하고, 통찰하고, 하는 일련의 시간들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런 종류의 사유들은 낯선 어떤 허구적 삶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비추는 과정과 같습니다. 그것은 책을 읽는 동안보다는, 그 책을 읽고 나서, 아쉬움에 빠져 책을 덮고 난 후, 걷거나 운전하거나 잠자기 전이나 혹은 때로 설겆이를 할 때처럼 느닷없이 갑작스레 두뇌를 강타하기도 합니다. 스쳐지나가는 많은 생각들, 백일몽들 속에서 소설의 어떤 장면들과 연결되는 암시와 생각 뭉치들을 통해 사유의 세계는 넓어집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소설이 독자에게 주는 것은, 훔치고 싶은 작가의 매력적인 문체들과 복잡한 서사 뿐만이 아니다 라고. 각자 그 소설이 글자 밖으로 나와서 내 삶의 언저리들을 배회하면서 희미하게 자신을 변화시키는 작은 관계성에 주목하면, 더 나은 독서가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게 제가 이제껏 소설과 비소설류를 구분해서 읽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위에 언급한 모 이웃님은 저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약 1달간) 책을 소화시킨 후 리뷰를 쓰신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요즘 제가 왜 리뷰쓰기가 점점 싫어지고 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이유는 너무 많이 읽는다는 거죠. 소설을...하나의 소설을 읽고 나서 그것을 소화하기도 전에 다른 소설을 시작하면, 먼저 읽은 소설은, 기억의 모퉁이에서 빠르게 사라져버립니다. 그것의 여운이 생기기도 전에 얼렁 리뷰를 써야지 라는 생각으로 부랴부랴 리뷰를 쓰게 되면 소설이 품고 있는, 어쩌면 조금 더 마음에 가두고 두었다면 포착했을 지도 모를 통찰을 얻을 기회를 잃습니다.


이렇게 옆길로 흐르니, 돌아설 길이 막막한데, 그럴 때는 그냥 돌아가는 길을 못찾아 헤매는 것 보다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낫겠습니다. 흠 원래 하려던 이야기는 책을 많이 읽지 못했다. 소설을 주로 읽었다. 리뷰 쓰기도 점점 게을리하게 되더라. 그것입니다. 그래도 정리해봄니다. 


읽은 소설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단눈치오의 <쾌락>, 엘리너 캐넌의 <루미너리스 1,2>, 주제 사라마구의 <카인>, 조이스 캐럴 오츠의 <그들>입니다. 1월과 2월 사이에 <적과 흑>도 읽었군요.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앨리너 캐넌 <루미너리스>                     ★★★★☆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인생에 남을 최고의 책입니다. <루미너리스>는 초반에 너무 많은 등장인물이 제각기 스토리를 가지고 나와서, 좀 힘겹게 보기 시작했는데, 중반 이후로는 고속도로처럼 쌩쌩 달릴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추리소설의 형식을 띠는데, 미스터리가 풀리는 과정이, 기존의 장르 소설과는 매우 다르게 풀렸습니다.


 

 

 

 

 

 

 

 

 

 

 

 

 

 

스탕달 <적과흑> ★★★★

단눈치오 <쾌락> ★★★★

주제 사라마구 <카인> ★★★★

 

오래전부터 미뤄두고 읽지 못했던 <적과흑>은 기대를 충족시켜주었고, 무엇보다도 열린책들 판본의 선택이 후회스럽지 않았습니다. 데카당스적 분위기의 <쾌락>은 귀족들의 호화롭고 쾌락적 삶과 사랑과 가치관들을 돋보기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카인>은 신에 대한 도발적인 질문들이 매우 유쾌하게 읽히는 책입니다. 세 개의 책 중 가장 잘 읽히고 짧고 또 재미있었습니다.

 

<그들>은 작품으로서의 가치 자체보다는 읽기가 힘겨웠다는 평을 남기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현대 소설의 난해함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요. 작가가 그들, 지금은 완전히 망해버린 도시 디트로이트에서 한 때 번성기를 지나는 동안 세대를 교체하면서 겪은 교육받지 못한 서민들의 쓰레기같은 삶을 여과없이 보여주고자 했던 면에 대해, 교육받고, 늘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습관화된 우리로서는 너무나도 생각의 갭이 커서 이해불가한 면들이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작품적으로 볼 때는 큰 의미가 있겠으나, 일반적인 독자 입장에서는 그리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디트로이트의 하층민의 삶을 경험해보고 싶지 않은 이상은 말이지요.  


 

 

 

이언 스튜어트 <교양인을 위한 수학사 강의>★★★★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

아담 로저스 <PROOF> ★★★★

라파엘 오몽 <부엌의 화학자> ★★★★


 

 

 

 

 

 

 

 

 

 

 

비소설류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은 술꾼들의 책 <PROOF>, 그리고 <부엌의 화학자>입니다.   <리 컬렉션> <스페이스 크로니클> <셜록홈즈, 기호학자를 만나다> <눕기의 기술> <교양인을 위한 수학사 강의> <우주의 여행자>도 읽었는데, 이 중 리뷰를 아직 못쓴 것과 썼는데 못올린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도 드디어 읽었습니다. 그가 전하던 메시지 못지 않게 우아하고 유려한 문체가 아직까지 길게 여운으로 남는군요. 리뷰를 아직 안올려놓았지만 제가 이해를 제대로 못해서 그렇지 <교양인의 수학사 강의>가 그 중 가장 좋은 책이라고 여겨져서 별 만점을 주었습니다. 이제까지 몇 개의 수학사 책을 읽어보았는데, 구성과 내용면에서 가장 알차다고 느껴졌습니다. 생각보다 약간 별로인 책은  <셜록홈즈, 기호학자를 만나다>와 <눕기의 기술>이었는데, 전자는 관련된 분야를 연구한 학자들의 논문을 묶은 것이라 내용이 학술적이고 딱딱하고 물론 관점의 차이는 있긴 하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어서였고, 후자의 경우 눕기 보다는 잠자기에 치중되어 있고, 온갖 잡다한 눕기에 관한 자료들을 성찰 없이 나열한 듯한 인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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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 2016-03-02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기네스님 정말 책 많이 읽으셔요. 고속도로처럼 쌩쌩달릴 수 있는 <루미너리스>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CREBBP 2016-03-03 00:03   좋아요 0 | URL
제 경우 앞부분이 좀 막혔어요. 서울 수도권 빠져나갈때처럼 말에요. 고속도로에서도 과속 주의해야 된다는 ㅎ.

비의딸 2016-03-03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을 밀고계시다는 댓글을 따라 여기 왔어요.. 인생에 남을 최고의 책이라고 추천하신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을 얻어갑니다~

CREBBP 2016-03-03 15:43   좋아요 0 | URL
뭔가 새로운 형식이고, 재미있을 것 같아요.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은 완전 강추에요~

에이바 2016-03-04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한 권을 오래 두고 숙성시켜 내 것을 만드는 시간이란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필요성은 아는데 실천에 옮기기는 쉽지 않은게 안타까울 뿐... ㅜㅜ

CREBBP 2016-03-04 16:42   좋아요 0 | URL
책을 너무 많이 겹쳐 읽어도 깊이있게 내용을 생각할 기회를 잃게 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