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는 특히 책 얘기가 많이 나와요. 고3 아이의 성장소설인데, 배경은 70년대말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고3이 공부는 않고 작가가 되겠다고 매일 책만 읽어요. 그런데도 당시 특기생 수시모집 같은 제도가 있었는지 대학 공모전 같은 곳에 글을 써서 당선이 되어 대학에 들어갑니다. 화두처럼 던져진 책은 권터 그라스의 양철북과 헤르만헷세의 데미안입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싶지 않아 자라기를 포기한 난장이가 양철북을 그렇게 두드리는 것, 알에서 깨고 나오는 것의 의미를 되짚습니다. 

















작품의 내용은 성장소설이면서, 로드무비같은 느낌을 주는데, 묵언정진을 했던 스님이랑 같이 다녀요. 이 스님은 고무신 대신 백구두를 신고 다닙니다. 주인공 양철북이 방학 때마다 글쓰고 책읽고 하면서 머물던 암자에 도보고행성이 들어왔다가 인연을 맺고 함께 다니게 된 거죠. 둘은 죽이 잘 맞는 한 쌍입니다. 책을 많이 읽은 철북이가 책에서 주워섬긴 말들을 늘어놓으면, 무슨 책이든 더 잘 알고 있는 스님은 매번 철북의 뒤통수를 칩니다. 걸쭉한 부산 사투리를 구사하는 그 둘은 말도 거칠고 술과 고기를 먹는 등 행동도 거칠어요. 


두 사람이 맨 처음 만나는 장면에는 최인호의 소설《광장》이 있어요. 철북의 이름을 모르는 스님이 《광장》을 읽고 있는 철북을 보자, 어이 까까머리 광장 하고 소리칩니다. 험한 말도 잘 받아치는 철북이에게 스님은 니가 서북청년단이냐고 묻는데, 이 때 철북은 서북청년단을 어디서 봤더라 라며 곰곰히 생각하다가 아 맞다 관촌수필과 순이삼촌에서 봤다는 걸 기억해냅니다. 


























광장을 다 읽은 철북이는 가장 인상 깊은 구절 하나를 메모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인민의 적이며 자본가의 개이며, 제국주의의 스파이다."

 


《광장》을 읽은 후 철북이 읽은 책은 샤르트르의 《구토》와 카뮈의《이방인》입니다. 동시대를 살아간 사상가이자 문필가였죠. 그러나 알제리 독립을 두고 두 사람의 행보는 달랐습니다. 샤르트르는 알제리 독립을 지원했고, 카뮈는 반대했습니다. 철북은 두 소설의 주인공을 바꿔봅니다. 구토의 주인공인 로캉텡을 뫼르쏘로 억지로 바꾸어본다는 거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우연히 《씨알의 잡지》라는 잡지책을 뒤지다가 뫼르쏘의 총알이 '피압박 민족에 대한 제국주의의 무의식적 횡포'라는 요지의 백기완 선생 해설을 보고 놀랍니다. 






















스님을 따라다니며 시다바리라고 불리다가 문득 철북은 중학교 3학년 시절을 회상합니다. 가세가 기울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가구 공장에서 일했던 고단하고 어두운 시절입니다. 추운 겨울 마른풀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안톤 체홉스의 단편소설들을 떠올립니다. 그의 소설은 "그리고 죽었다"로 끝나는 것이 많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춥고 어두운 시절과 고별하기 위해 사모은 세코날을 공장에서 친동생처럼 아껴주든 도색작업반 아저씨가 훔쳐 먹고 자살한 사건을 겪습니다. 






 















일행은 섬진강과 화개장터를 지납니다. 철북은 김동리의 《역마》와 박경리의《토지》를 떠올립니다. 월선이 평생 운명적인 불륜의 사랑을 나누던 이용의 품에 안겨 죽어가던 가슴 저미는 장면을 회상하죠. '불륜도 섬진강의 여울처럼 격렬하고 애절할수록 눈부시고 찬란해 지는지 몰랐다'는 생각을 하지요. 열아홉살 소년의 운명적 사랑에 대한 환상은 이런 비련한 것들로 포장되어 있기 쉽지요.


















백운동 계곡에서 스님과 철북은 또 티격태격합니다. 공비와 빨치산에 대한 용어. 같은 대상에 대해 정부에선 공비로  일반 국민들은 빨치산으로 불렸고, 그걸 어찌 알았냐는 질문에 이병주의 《지리산》을 들이대지요. 열아홉 소년이 지리산을 읽은 느낌은 '이놈 피하니 저놈 나타나고, 저놈 피하니 또다른 나타나는게 인간사라지만, 막상 당하는 처지에서는 얼마나 징글징글하겠는가'였어요. 지리산에서 보광당을 만들어 일본과 죽도록 싸우며 독립운동을 하고 나니 8.15 해방이 되었는데도 해방이 안됐다고 이번엔 미국과 이승만을 대상으로 또 죽도록 싸워야 했던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지리산 암자에서 만난 두 스님의 이야기 속에  시인 김지하가 나오자, 그는 다시 헌책방을 드나들던 과거를 회상합니다. 그는 헌책방에서 만난 점원이, 자신이 추천하는 '사회과학'서적들을 읽으면 원하는 책 2권을 공짜로 빌려주겠다는 제안을 받습니다. 이렇게 해서 헌책방 점원과의 인연으로 많은 '불온'서적들을 보게 되고, 학교 사서 선생님을 10년형을 살 수도 있는 불온서적 소지죄로 걸릴 아슬아슬한 위기로 몰기도 하지요. 이렇게 해서 폭풍 책소개가 나오는 대목이 있는데, 찾아보니 절판 된 것이 많습니다. 학교 다닐 때 돌 좀 던지던 분들은 눈에 많이 익은 책들일 거에요. 




첫날은 철북이가 보고 싶은 김수영의 시집 《거대한 뿌리》와 조세희의 소설《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그리고 황세용 점원의 추천서인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빌려왔다. 며칠 뒤에는 정현종의 시집《고통의 축제》와 카프카의 소설《변신》, 그리고 유동우의《어느 돌멩이의 외침》, 그 다음에는 고은의 시집 《문의마을에 가서》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율리시즈》, 그리고 장준하의《죽으면 산다》, 또 그 다음에는 보를레르의《악의 꽃》과 에밀 아자르의 콩쿠르상 수상 소설 《자기앞의 생》 그리고 송건호의《해방전후사의 인식》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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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미 2015-10-16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놓기만 하고 못읽었는데, 당장 책을 펼쳐야겠어요^^

CREBBP 2015-10-16 23:13   좋아요 0 | URL
로드무비 식이라.. 큰 사건 없이 그냥 덤덤한 편이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