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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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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세기 그리스 작가 헤시오도스에 의하면, 네메시스는 태초 카오스로부터 생겨난 밤의 여신 닉스가 혼자 힘으로 낳은 여신이다. 그것은 신의 분노와 복수를 상징한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와 잠, 죽음, 꿈,파멸, 고뇌, 비난, 불행, 비참, 사기, 노쇠 등이 밤이 낳은 자식들이라는 신화적 설명은 태고적 칠흑같은 어둠이 상징했던 바를 잘 알려준다. 그것들은 인간이 두려워하는 존재들이다. 그것들의 존재는 두려움을 환기시킨다.


신들이 인간을 두려워하는 존재들을 낳는 이유는 간단하다. 신들도 다 먹고 살아야 겠기에 그런 개념들이 필요했다. 인간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고, 그래서 두려움과 불행을 알지 못한다면 인간은 신들을 숭배할 이유가 없어지지 않는가. 태초 선악의 기준이,  무엇이 공공에 이로운가, 무엇이 자비롭고 의로운 행동인가보다는 무엇이 신들의 의지에 복종하게 만드는가에 의해 좌우된 까닭은 이토록 간단하게 설명된다.


폴리오 바이러스는 소아마비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오는 전염병이었다. 1950년대에 백신이 개발되면서 전세계적으로 급격히 발병률이 낮아졌지만, 그 한참 이후에 태어난 내 세대의 친구 아이에게도 찾아왔었다. 소아마비로 다리를 전혀 쓰지 못하는 그 친구를 매일 업고 등교하는 믿어지지 않는 반아이도 있었다. 가정환경도 좋고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 아이였다. 장래 의사가 된다고 하던 아이였는데,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하다. 


사고나, 질병으로 생긴 후천적 장애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강한 의지와 끝없는 절망이라는 양 극단 사이의 멀고 먼 거리를 갖는다. 신체의 훼손이라는 불행은 저주 혹은 운명의 장난처럼 갑작스레 인생의 옆구리를 치고 들어오기 때문에 손 쓸 새가 없다. 신체의 마비에 대해 인간의 의지는 무기력할 뿐이다. 감정이입이 쉬운 이유는 누구도 그것을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메르스가 나돌기 시작했을 때 감돌던 사회적 공포는, 바로 그게 나일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삼성병원 의사가 음식점에서 먹었던 그 테이블 틈새에 조용히 내려앉은 메르스 바이러스가 손을 통해, 숟가락을 통해, 입을 통해 언제 나에게로 침입할 지 모른다는 공포는 사회를 두 편으로 찢었다. 정부는 왜 식당을 공개하지 않는거지, 정부의 무분별한 공개 때문에 이 식당은 망해버렸어 라고 박원순을 향해 울부짓던 식당 주인의 표정이, 그리고 그 식당주인을 향했던 나의 분노가 아직 가라앉지 않는다. 메르스가 거기를  지나갔었고, 어느 틈에 조용히 누구를 노리고 있을 지 모른다는 공포가 우리를 깨우치게 한 게 있다면 이기심이다. 다행히 진정되었지만 메르스는 메르스의 파급력 이상으로 사회를 강타하고 여기저기를 찢었다.


내 중학교 때 친구도 이 책의 화자처럼 비교적 긍정적인 마인드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고, 공부도 잘하고 아이들에게 인기도 있었고 자기 의지도 강했으니,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고, 성공한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책의 1인칭 화자가 따로 있다는 사실은 비교적 늦게 깨달았다. 소설은 우리의 정의의 사자 버키가, 폴리오가 유대인 마을을 휩쓸던  그 때 또 다른 폴리오의 희생자이자 몸의 일부가 마비된 그의 학생 중 한 명을 뒤늦게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한 내용이다. 그는 버키와는 다른 종류의 인생을 살아왔으며 다른 폴리오 희생자와 기숙사 방을 함께 쓴 적이 있다는 점을 통해 폴리오가 통과한 맞닥뜨린 마비가 어떤 유형의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대응하게 했는지 몇 가지 유형을 제시했다.  화자가 기숙사에서 만난 또다른 소아마비 친구는 극심한 절망을 온몸으로 통채로 안고 그 에너지를 추진력으로 삼아 의대에 진학하지만, 끝내 자살한다. 버키는 그 모든 폴리오를 자신이 아이들에게 옮겼다는 피해망상적인 죄책감으로 사랑도 끝내고 사랑하는 약혼녀도 보내고 비참하게 살아간다. 


이제 그는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이 달리 될 수 없었던 것은 하느님 때문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느님이 아니었다면 하느님의 본성에 달랐다면 상황도 달라질 것이다 129


놀이터에 달려 가고, 애들 가족을 만나러 뛰어가고, 일요일에는 장례식이 뛰어가고, 저녁에는 나를 도우러 집으로 뛰어오고. 이번 주말에는 이 더위 속에 그만 좀 뛰어 다니고 기차를 타고 해변에 내려가 주말을 보낼 잠자리를 찾아 보는게 좋겠구나 131



유대인인 버키는 폴리오가 유대인 마을을 강타할 때, 그리고 아이들이 하나 둘 씩 폴리오로 죽어갈 때 유대인이 믿는 신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그가 믿은 신은 의롭고 평화로운 신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전쟁과 폴리오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한 신의 행위에서 배신감을 느낀다. 태초의 신화에서 시작된 종교가, 어둠이 잉태한 네메시스 여신과 같은 신들이 점차로 유일신의 형태로 흡수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우리가 숭배하고 있는 신이 무자비하고 잔인하고 포악한 성격을 함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점 역시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과학 기술로 설 자리가 조금씩 위태로와지더라도 숭배를 지탱하는 힘은 신 속에 이미 태고적 어둠의 신들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계속 그 어둠이 잉태한 것들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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