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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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출판사들의 <파수꾼> 판권 확보 경쟁과 선인세, 세계동시출간, 출간 전 치밀한 보안, 그리고 그에 잇따른 하퍼 리 여사의 출판 의지에 대한 관련 논란에 불붙은 와중 읽은 <앵무새죽이기>는 책의 내용보다 그 책이 영미권 문화에 미친 역사적 가치와 의의들을 먼저 생각하게 한다. '성서 다음으로'라는 수식어에는 많은 명사가 뒤따른다. 성서 다음으로 영향력 있는 책.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최근 10~20년 사이에도 <앵무새죽이기>는 지역별 도서관과 학교 등지에서 가장 많이 추천되고 읽히는 책으로, 많은 사람들의 의식 변화에 꾸준하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종문제가 의식의 뿌리까지 척결된 것은 아니지만,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정권을 잡은 오늘날 차별 문제를 바라볼 때 그 범위는 인종 뿐 아니라 ‘나와 다른 남’ 혹은 ‘소수’라는 차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흑인을 짐승 취급하던 노예제에서 벗어난 지 반세기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흑인은 헌법에 명시된 ‘인간’으로의 존엄성과 가치를 부여받지 못했고, 법적으로 보호되지 못했던 1930년대 앨리버마 주의 한 도시에서 일어난 흑인 강간 사건이 이 소설의 표면적인 한 축이라면, 그 앞의 1부는 균질된 집단 내에서 미친 개 마냥 숱한 의혹과 두려움의 대상이 된 채, 음산하고 오래된 집에 갇힌 채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 부 래들리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편견과 이를 바라보고 어린 소녀의 시각을 담는다.

 

그러기 전에 이 소설의 시점에 대해서 먼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소녀가 보고 경험한 1인칭 관찰자 시점이자, 성장 소설이다. 따라서 아이 스카웃의 행동은 매우 아이스럽다. 똑똑하고, 자기 할 말을 다 할 줄 알고, 떼로 친구를 패고 오빠와 싸우고 쫓아다니며, 말썽을 피우고 아빠에게 매달리는 아이다운 천진함과 사랑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한 아이이다. 그런 한편 그 아이를 기술하는 시점은 이제 다 자라 성인이 된 진 루이스로, 자신이 스카웃으로 불리던 그 아련한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는 지성과 판단력을 갖춘 성인의 시각에서 그 때의 일을 기술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매우 철없고 단순하고 순진한 어린아이의 행동이 그대로 그려지면서도 문장이 어린아이들의 문법처럼 단순한 시점을 고수한 것이 아닌, 성인으로서의 통찰력과 어휘들이 문장 내에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독자들을 끌고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시점 때문에 독자는 어린아이의 생생한 천진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으면서도 동화 같은 단순함이 아닌 현실적인 깊은 성찰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스카웃의 아버지는 과연 이 세상이 그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할 수 있을만큼 아이들을 민주적으로 대하고 세상의 편견과 맞선다. 흑인 강간범을 변호한다는 소문이 마을에 돌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자신과 아버지를 향한 세상의 따가운 시선과 맞선다. 아버지는 사람에게 아무 해를 끼치지 않는 앵무새를 쏘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이 명사수였다는 사실을 숨기지만, 마을에 미친개가 돌아다니자 마을 보안관 대신 총을 쏘아 명중시킨다. 아버지는 앵무새는 쏘지 않지만, 미친개는 쏜다.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총구는 인간 미친개를 향한다. 흑인을 변호한다는 온갖 차가운 눈총을 무릅쓰고 죄 없는 톰 로빈슨을 변호하지만, 그는 이미 그것이 바위로 계란치기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다.

 

아빠 우리가 이길까요

아니

그렇다면 왜

수백년 동안 졌다고 해서 시작하기도 전에 이기려는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할까?

 

399

핀치는 이길 수 없어, 그럴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는 그런 사건에서 배심원들을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들 수 있는 이 지역에서 유일한 변호사야...우리는 지금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 거야. 아기 걸음마 같은 것이지만 그래도 진일보임에는 틀림없어.

 

작년에 읽은 <제르미날>에서도 노동자들의 그 아주 작은 바람을 실은 그들의 요구를 얻기 위한 투쟁은 실패한다. 주검 앞에 선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상처와 패배를 그대로 안은 채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상태에서 비참한 현실과 타협하고 되돌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숱한 실패의 부딪침들은 커다란 파동으로 울려나가 역사를 바꾸는데 기여했다. 비록 한차례의 감동적인 변론으로 평생동안 고착되어 온 배심원들의 편견의 벽을 허물수는 없었지만, 죄 없는 흑인 톰 로빈슨의 목숨을 구해내지는 못했지만, 그 오만한 의식 속에서도 그들은 안다. 미친개는 밥 유얼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아버지는 법정에서 졌지만 그 재판 과정의 불합리함을 모두 지켜본 관중들은 그들이 비록, 흑인을 경멸하고 침을 뱉는 백인들이라 하더라도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표면적으로는 앵무새가 누구인지 확실해 보인다. 한 때의 비행으로 평생을 집안에 갇혀 살게 된 부 래들리, 그리고 어이 없이 강간죄를 덮어쓴 흑인 톰 로빈슨이다. 미친 개는 누구인가. 명사수 아버지가 쏜 미친개는 내세울 것이라고는 백인이라는 것밖에 없는, 한 선량한 인간에게 강간죄를 덮어씌우고 사형당하게 만들고도, 그를 변호했다는 이유로  그 아이들을 죽이려 했던,  배우지 못하고, 무식하고, 무능하고 가난하고 폭력적인 인간 쓰레기 밥 유얼이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가 맞서야 할 편견에 대해 흑백의 노골적 편견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나와 다른 남'은 어린 소녀 스카웃이 매일 대하는 이웃들이다. 앞에서 앵무새라 생각했던 부 래들리는, 그 전 아이들을 구하기 전에는 이웃의 눈에 그리고 어린 아이들의 눈에 미친개였음에 틀림없다. 지금 당장은 건드리지 않으면 아무 해도 끼치지 않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 물릴 지 모를 미친 개. 또한 밥 유얼은 악의적인 사건이 없었다면, 그가 사는 환경 그 냄새나는 쓰레기 장 옆의 집과 땟국물의 아이들과 술주정과 배우지 못함으로 인해 쓰레기 취급을 받는 그 역시 멸시와 천대라는 총구에 타깃이 된 앵무새일 수도 있다. 메이콤의 대다수 사람들은 아주 아주 오랜동안 가문을 이어오면서 집단적 동질감을 형성하지만, 그들마저도 따로따로 남들과 구분되는 이해못할 구석을 갖는다. 선량하기 그지 없는 우리의 정의의 사도 변호사 아버지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앵무새지만 백인 우월집단의 그 단단한 편견의 눈으로 볼 때 그들 사회를 위협하는 미친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 트리거가 되면 그 어떤 사람이 앵무새가 어떤 사람은 미친개가 된다. 마지막 장면, 아이들이 구출되고 부 래들리에게 법망을 우회하기 위해 침묵하기로, 위조하기로 결탁한 결론이 과연 해피앤딩인지 생각해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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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07-20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이 과대평가되었다고 할 때 애티커스라는 캐릭터가 `너무` 모범적이고 흑인들은 `소극적`으로 그려진다고 비난하는 것 같더군요. 사실 애티커스라는 인물은 있을 수 없는, 목숨의 위협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는 인물이라 놀랍구요. 흑인도 백인과 동일한 권리를 가진다고 인정하기 보다는 흑인은 사회의 약자이지만 법 앞에서만큼은 평등하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톰을 변호했다고 봤어요. 좀 모호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약자를 위해 나선다는 장치는 완벽한데도요.. 감동적이지만.. 밥 유얼이 흔히 말하는 화이트 트래쉬가 아니었다면 얘기는 또 달라졌겠죠? 그도 어찌보면 앵무새이고 체제변화(?)를 꾀한 애티커스도 메이콤 사회의 미친개다- 기네스님의 표현이 쏙쏙 들어오네요. 핀치가 노예주 집안인데 친척들과 다른 길을 가고, 아이들 의사를 존중해주는 점도 깨쳤지만.. 소설에서 흑인 여성과 결혼한 농장주였던가요? 어떤 면에선 그 사람이 더 대단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부 래들리 관련 결론은 솔직히 해피엔딩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죠. 스카웃의 의젓함도 그렇고..

갱지 2015-07-21 07:49   좋아요 0 | URL
1960년대 나온 소설이고 작가는 그 시대의 미국 남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여성이며 평생 소설은 이 한 권만 썼다는 사실이 꽤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해요.
보편적인 정서가 있지만, 사실 미국이라는 거대하고도 특수한 나라의 이야기라는 것이 먼저겠죠.

에이바 2015-07-21 08:22   좋아요 0 | URL
네 그 부분은 저도 인지하고 있고요, 이 소설이 인종차별에서 약자에 대한 배려로 이슈를 넓혔다는게 중요하죠. 출간 후 50년대부터 시작된 차별-인권운동과 맞물려 많은 이들의 생각을 바꿨으니까요. 괜히 성서 다음으로 꼽히는게 아니지만 그럼에도 비판할 요소 역시 존재하니까요. 완벽한 작품이란 있을 수 없으니.. 하퍼 리가 여러 번 원고를 수정하고 공들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영화도 그렇고 저도 팬으로서 이 책이 명성만큼 대단하단 생각은 변함이 없답니다.

CREBBP 2015-07-21 12:26   좋아요 0 | URL
아 과대평가되었다는 말이 있었군요. 저도 말씀하신 그 부분, 즉 선과 악을 너무 인위적으로 가른 것과, 또 화이트 트레쉬들에 대한 편견이 여전히 애티커스의 `감동적 변론`에 존재한다는 점 때문에 별 네개를 고려하고 망설였었어요. 제가 나름, 과대평가되거나 과대 이슈된 것들은 제가 주는 평균별점의 조정을 위해서라도 원가치보다 깎는 신념(?)이 있거든요. 그래도 그런 것들마저 치밀하게 고려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죠. 별점을 깎고 싶은 사람들은 그 곳(미국) 독자들의 얕은 감성으로 읽어냈을 흑백의 마인드와 아직까지도 흑인과 소수인종에 대한 편견과 뼛속깊은 화이트 우월의식이죠.

에이바 2015-07-28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이 늦었죠. 특수한 나라의 이야기라는 말씀에 힘이 빠져서.. 과대평가되었다는 건 조금 심한 말이다 싶고 부풀려졌다 정도로 생각해요. 신화가 되었으니까요. 비판할 점으로는 애티커스란 인물의 수동성입니다. 판사의 지명으로 톰을 변호한 건데, 지원한 게 아니란 거죠. (지명하지 않았다면 얘기는 달라졌으리라 생각해요. 애티커스의 반응도 왜 날? 이니까요)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도 새고, 확 늙는 걸 보면 본인 스스로도 고민이 많았고 결국 법에 입각한 정의에 기대어 변론을 펼치기로 했다- 결과를 보면 이 정도 짐작하고요. 아이들이 우리 아빠는 정의롭다, 고 여기는 것도 `니 아빠는 달라` 같은 주변인의 대화나 말에 영향을 많이 받아요. 화자가 어린아이다 보니, 독자의 시야도 좁아지는데요. 애티커스는 `깜둥이애인`이라지만, 흑인을 위한 활동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더군요. 의회활동을 하면서 흑인을 만난다? 시대와 공간(미국 남부)상 거의 불가능하다 보고요. 남는 건 허드렛일을 하는 인부나 가정부 캘퍼니아 정도인데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캘퍼니아는 백인/흑인 사회에 따라 말씨도 다르게 할 정도로 철저하단 말이죠. 소도시이고, 지역 유지 출신이다보니 애티커스가 마을 사람들을 모를 리는 없지요. 나이도 있고.. 톰에 대한 측은함과 화이트 트래쉬 유얼에 대한 반감이 작용하지 않았나 합니다. 그리고 유얼이라는 악역을 정해서인지 대척점에 있는 톰의 역할은 순박한 흑인 역에 그칩니다.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소모적인, 한계가 있는 캐릭터예요. 결국 흑백차별에 대한 이야기지만 철저하게 백인 사회에서 자란 백인의 단편적인 시각으로 본 이야기란 거죠.. 점수를 줄 수 있는 건, 60년대 인권운동이 활발했잖아요? 그 시기에 맞추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데 큰 역할을 했는데요. 방금 얘기한 한계- 백인의 시선은 다시 말하면, 충격은 줄지언정 거부감은 확 줄어들 수 있다 이렇게 여겨지고요. 어떤 면에서는 첫 작품이자 유일한 작품이 신화가 되었는데 굳이 후속작을 발표하여 신화를 깰 이유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파수꾼은 아직 안 읽었어요.. 어제 북토크 했다던데 후기 보고 결정하려고요.

CREBBP 2015-07-28 20:31   좋아요 0 | URL
애티커스의 수동성에 대해서. 좋은 지적이시네요. 저도 그 부분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스스로 하고 싶었던 거였나 아니면 누가 시킨 거였나. 그런데 사실 그런 마음의 소유자였기에 판사도 그에게 맡겼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또 아이가 아빠에 대한 무한신뢰와 정의라는 가치관을 심게 된 점이 파수꾼에서 (저는 아직 안읽어봤지만 풍문으로) 아이가 아버지에게 실망하는 과정과 연결시킬 때, 아이다움의 설명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살짝 들고요. 아빠가 멋있는거죠. 여자아이는 더욱 더 아빠에 대한 환상을 키우게 되어 있는데, 게다다가 또 그렇게 정의의 편에 서 있으니까, 거의 정의의 신같은 존재가 되었다가 어느 순간 <파수꾼> 에서 그 이면의 실체를 보게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저는 먼저 파수꾼을 주문했다는(예스에서 이벤트 했는데 떨어졌..).

그리고 이 소설이 백인의 시각에서 본 점이라는 것은 사실 저 역시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조금은 빼딱하게 바라봤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인종을 단순히 흑백으로 나눈다면 인종의 흑백 역사에서 백은 악의 상징이죠. 그 악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구세주가 되었으니 서구적인 시각, 백인 위주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요. 그래서 제가 좀 놀랐던 게 아직까지 이 책이 널리 권장도서로 읽히고 그토록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터치되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특수성 아직도 별로 변한 게 없는 백인우월의식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북토크도 했군요. 저도 찾아봐야징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