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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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가다> 이후, 이 말은 사랑을 역설하는 고전이 되었지만, 때때로 우리는 여전히 사랑의 불변성을 종교처럼 믿는다.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 이 것이 나의 사랑이다. 이렇게 각인해버린 사랑이 변해가는 모습은 때로 아름답고 때로 추하다. 사랑의 본질은 그 사랑의 모습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퇴색하는 데 있다. 가끔 천천히 옅어진 그 빛바랜 사랑은 안정과 평화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질과도 만난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설령 사랑이 변해도, 앓도록 원하고 가슴 뛰는 순간이 지나가도, 그럭저럭 웃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변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흔히 고전을 읽으려면 숨을 한 번 고르고 시작하게 되는데, 그 치밀한 묘사 때문에 책장 진도가 팍팍 안나가는 것은 고사하고, 가끔은 너무나 지루한 묘사 때문에 전개가 끝나기도 전에 미리 질려버리는 경우가 많아서다. 시작해 놓고 끝내지 못한 고전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이유다. 이 책은 반대다. 프랑수아즈 사감은 최근 인기 작가 아멜리 노통브를 떠올리게 한다. 전체 페이지 수가 160쪽으로 짧기도 하거니와 배경과 인물 묘사 뿐만 아니라 등장 인물과 공간적 배경도 최소한으로 줄이고 주로 삼각 관계에 놓인 세 사람의 짧은 동선을 왔다 갔다 하며 연극 무대 위의 제한된 공간 내에서 극을 보여주듯 그들의 생각을 들려준다.


오래 사귄다고 해서 권태의 순간이 갑자기 천둥 번개치듯 들이 닥치는 건 아니다. 숨막히는 떨림이 시간에 희석되더라도 남녀는 서로에 대한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인 존경과 친밀감, 정 같은 걸로 살아간다.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문화권에서 정식 결혼은 드문 현상이 되어 버렸지만, 1950년대라면 다르다. 5년쯤 사귀었으면서 싸우고 헤어지는 일 없었다면 이제 그만 살림을 합치거나 그만 관계를 끝내거나 해야지, 계속 찜해서 침발라 놓고 오도가도 못하게 하는 건 둘 중 한 사람을 몹시도 지치게 할 것 같다. 5년을 만났음에도 권태 때문이 아닌 혼자 있는 텅 빈 시간과 공간 때문에 몸부림쳐야 한다면 둘은 서로에게 무엇일까. 연애할 때 주말을 혼자 지내야 하는 일만큼 맥빠지는 일이 또 있을까. 폴은 외롭다. 풀의 남자친구 로제는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함께 있기를 원하는지 알면서, 그리고 그 또한 그녀를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만족스러운 교제를 하면서도, 풀의 집에 들어갈 땐 `혼자 있어?`라고 묻는 교활한 방법으로 거리를 유지한다. 서른 아홉 살의 폴은 `두 사람 사이에 하나의 규율처럼 자리 잡은 이 자유’를 ‘로제만 이용하고 있고, 그녀에게는 자유가 고독을 의미할 뿐`이라는 사실에 절망한다.


사랑은 자유의 반납이라는 대가가 필요하다. 헌신은 보상을 요구한다. 남녀간의 사랑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기에, 배타적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랑, 자유 둘 다를 가질 수는 없다. 스토리는 참으로 단순하다. 로제가 끝내 자유를 포기하지 않은 채, 새로 사귄 `창녀`들과 놀아나는 동안 폴은 15살 연하의 엄친아와 엮인다. 그는 너무 잘생겼고,직업도 변호사지만, 어쩐 일인지, 15살 연상의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고 죽기 살기로 그녀를 사랑한다. 로제의 비행을 알면서도 눈감아주고, 그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동시에 이 매력적인 어린 시몽에게 조금씩 빠져 들어간다. 꿈처럼 달콤한 폴과 시몽의 사랑을 깨는 건 언제나 그녀를 외롭게 했던 로제다.용서를 구하고 애정을 갈구하는 로제를 폴은 기다렸다는 듯 받아들임으로써, 그 반대편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헌신한 15세 연하의 시몽을 버리는 폴을 지켜보는 독자는 착잡하다. 로제의 사과 한마디에 폴이 넘어가자, 로제는 다시 습관적 약속 깨기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만을 끝없이 바라보고, 만지고, 키스하고, 기다리고, 온 시간을 다해 온 영혼으로 사랑했던 젊은 애인을 돌려보내고 난 자리에 황망하게 남아있는 로제의 약속 어김. 그것이 폴의 선택이다. 함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그녀는 그 쓰라린 그의 부재를 경험했고, 상처받았지만, 그리고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결국 그녀는 로제에게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이다.


폴은 시몽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사랑했다. 무척 사랑했다. 소설은 폴이 거울 속 주름진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시작된다. 젊은 시절부터 함께 했던 남자들을 추억하기도 한다. 시몽의 나이었을 때 함께였던 남자도 있다. 시몽의 헌신적인 사랑과 넘치는 매력은 오히려 그와의 나이차에 대한 콤플렉스를 키웠을 것 같다. 그 콤플렉스는 알게 모르게 폴의 마음에 상처와 두려움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너무나 싱그러운 어린 남자와의 완벽한 사랑에 대한 훼손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었으리라. 단순한 연애소설 같으면서도 사랑이란 것의 어쩔 수 없는 본질을 한 껍질씩 벗기어내는 사강 특유의 문장은 섬세한 내면을 잘 묘사한다.


길고 긴 결혼 생활 중 서로를 미워하며 싸우고 할퀴어온 부부라도, 만일 다른 배우자와 새롭게 다시 시작하라고 한다면 선뜻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과 살면서 사랑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결국은 사랑의 범주에 들어가게 되는 것들 사이에는 함께 지내온 시간이라는 축이 있다. 사랑을 위해, 공동의 행복을 위해 그 긴 시간 동안 `기울여 온 노력, 그 고통스런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바로 그 자존심이 시련을 양식 삼아(p139)` 둘을 함께 계속 살도록 하는 체념적 선택을 인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랑과 사람, 하나가 변하면 다른 하나도 함께 변하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긴 세월동안 그것이 함께 버무러져 둘 사이에 따로 떼어버릴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 많아졌다면, 변해버린 사랑을 변하지 않는 사람의 합체로 인정하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페이퍼로 잘못 올라가서 리뷰로 다시 올립니다. 피같은 '좋아요'가 함께 지워질까봐 페이퍼도 남겨 놓습니다.고로 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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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07-10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로 변경이 안되는 글인가봐요, 좋아요 한 번 더 할게요^^; guiness 님, 즐거운 금요일 되세요.

CREBBP 2015-07-10 20:32   좋아요 1 | URL
방법이 있을 것도 같은데 잘못 건드렸다가 지워질까봐요.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