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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부터 헬로라이프 스토리콜렉터 29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 / 북로드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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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실린 5편의 중편은 일본에서 은퇴에 접어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일본의 쇠퇴는 먼 땅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곧 닥칠 혹은 이미 겪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난 한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성장만 했지, 쇠퇴에 익숙하지 않다. 저 앞에 멀찌감치 앞선 길을 걷고 있는 일본을 따라 잡기 위해 한 때, 버리고, 따라 하고, 급하게 내달았던 그리 오래지 않은 우리의 과거가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오랜 침체와 쇠퇴라는 선례를 따라 미래를 예고하는 듯 두려운 길을 따라 걷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 은퇴할 시기가 되었을 때 그것을 겪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시간과 노력을 알뜰하게 모아서 가치로 환산하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쓰고 남은 시간을 위해 준비하는 일은 막막하다. 언제나 그렇듯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투자해온 시간과,  그 꿈을 이루었건 못 이루었건 이제 모두 끝나 내려놓고 기다려야 하는 시간과의 질적 차이에 대해서는 교육받지 못했다. 준비되었다 하더라도, 조금씩 남겨 축적해온 가치를 소모해야 하는 일이란 게 어떤 것인지 상상해보지 못했다.  상상했다 하더라도 실제 경험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한 때 기세 등등 세계 무대의 주역이 되어 선두에서 횃불을 선 채 전진하던 일본이지만 결국은 길고 긴 불황의 긴 잠에서 깨어날 것 같지 않은 시대를 만난다.  이 침체기를 지나면서 은퇴를 함께 겪는 세대들이 있다. 성장만 하던 시기에 젊은 시절을 보내고, 구조조정과 혁신의 자리에서 갈 곳 잃은 장년층은 사회의 이슈로 주목받지도 못한 채 낙오자가 된다. 젊은 한 때 잘나가던 나라에서 잘나가던 일꾼이었던 시간을 기억하는 이들은 밀려나는 자리에 익숙하지 못하다. 불안과 두려움이 동행하는 초라한 노년의 길…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희망 없이 주저 앉아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불행에 익숙해지는 것이 불행이냐 행복이냐를 물을 수는 없다. 불행이 왔다면, 그것이 내가 처한 환경임을 자각하고 그 환경에 익숙해지면 된다. 극복할 수 없는 환경이라면, 늙는 것의 당면한 수순처럼 경제적인 어려움이 찾아왔다면, 이제까지 누리던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먹거리에서 얻어온 행복 말고 다른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힘들 꺼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쓸모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게 아니다.  이제껏 알지 못했던 소중한 무언가를 받아들이게 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무라카미 류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어하는 메시지는 같다. 이 책의 모든 작품 들 속에 들어있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주인공들이 좋은 물, 신선한 커피, 하늘을 나는 꿈, 얼그레이 향의 홍차와 같은 사소한 어떤 것들을 소중히 하고 의미를 둔다는 점이다.  맑고 시원하고 깨끗한 물, 아무리 가난해도, 아무리 삶이 고달파도 그 물 한 컵을 마시면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다. 힘겹고 고단한 노후가 덩그마니 남아있지만 남편과 재혼하지 않아도 혼자서 살 수 있을 용기를 얻었기에 공원의 반대쪽에서 절망에 가득찬 아기 엄마에게 따스한 얼그레이티를 권할 수 있다. 

<결혼상담소>의 나카고메 시즈코는 퇴직한 남편과 이혼한 후,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재혼을 생각하고, 알선 업체에 등록을 하지만, 선을 볼 때마다 상처와 모멸감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자각한다. 이 때 그녀를 위로해주는 것이 얼그레이 차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청춘에도 맘에 쏙 드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데, 경제적 기반도 없는 이혼녀에게 좋은 사람이 나타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세상은 반이 남자, 반이 여자지만 이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내 필요만을 충족시켜주는 사람은 없을 거다. 이혼을 통해 그녀는 삼십 평생을 함께 살아온 남편과의 사이에 그리 즐거운 일도 사무치게 그리운 일도 없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그녀는 우연히 호텔 로비에서 만나, 하루밤을 함께 한 후, 1년동안 무시했던 헤어진 남편의 만나자는 제안을 수락한다. 외로움도 재혼을 고려한 이유 중 하나였기에, 그녀는 진심을 다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진심을 다한다는 것이란, 어렴풋이 남아 있던 미련을 토해내는 것이다.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서 생을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은, 혼자 지내는 것이 외롭기는 하지만, 아무리 외로워도 이 남자와는 두 번 다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남편을 만나는 것이다.  절망이나 실의가 지나간 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다른 삶의 방식을 발견했다고 해서 단순히 제자리로 돌아(p76)’갈 수 있을까. 그녀는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 순간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돈과 건강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살지만,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후회이지 고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은 출판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후 일용직을 전전하는 쉰네살의 남자와 우연히 만난 초등학교 동창의 이야기를 다루었고, <캠핑카>는 퇴직 후, 캠핑카를 하나 구입해서 아내와 함께 여행을 하며 살기를 꿈꾼 남자가 막상 캠핑카를 사려고 했을 때, 아내의 반응에 실망한 후, 재취업을 하려고 방향을 바꾸었다가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을 통한 자기인식을 다루었고, <펫로스>는 키우던 개의 죽음으로 발견하게 되는 어떤 오래된 부부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고, <여행도우미>는 트럭 운전사로 한평생을 살아온 한 남자에게 찾아온 순애보 같은 사랑을 다룬다. 

모두 전후 세대 태어나서 은퇴를 맞은 사람들, 어려운 시간들을 겪어냈지만, 남은 것 하나 없는 사람들, 불안과 두려움이 앞길에 놓여있지만, 한 갈래 희망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리 드라마틱하지는 않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을 현실을 자각하고 삶의 진실 같은 걸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완벽하고 훈훈한 결말을 가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허무하게 끝나는 것도 아니다. 삶에는 자신이 선 자리에서, 그 각도에서의 진실들이 있기 마련이다. 돈도 없이, 사랑도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이 나이들고 은퇴한다는 것의 전부가 아니다. 돈도 없고, 사랑도 지나갔지만 커다란 가능성을 품었던 그 청춘이 지녔던 자아가 버텨야 할 여전히 변함없이 많은 날들을 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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