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영화는 상상력이 궁핍한 사람들에게는 이야기 전달 방법이자, 엔터테이닝이다. 또한 말로 쓴 세상을 머리속에 그릴 수 있을만큼 체험이 축적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둘러보게 한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며 상상으로 펼쳤던 세계를 영화에서 만나면 실망하는 경우도 많다.  읽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는 무한한 상상력과 유한한 스크린만큼이나 크다. 시각과 청각을 통해 바로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로 보는 것은 책을 읽는 것보다 즉각적이고 감각적이다.  모든 보이는 것은 시각적 감각을 동반한다. 


보는 것이 감각으로만 끝날까? 화면 속의 다양한 풍경들이 보이는 즉시 감각적 울림을 주기도 하지만, 풍경 앞에 선 사람들의 관계와 사건과 동기와 눈동자와 유머가 빚어내는 이야기는 관객들에게 보는 것 너머에 있는 읽을 것을 제공한다.  때로 묵직한 정치적 메시지인 것도 있고 달콤한 대리 사랑의 경험의 끝에서 도달한 연애지침일 수도, 인간 본성에 대한 깨달음일 수도 있다. 스크린 속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작은 움직임과 화면 속 배경이 되는 사물로 이루어진 풍경은 우리의 환경이 우연히 만들어 내는 일상을 흉내내고 있지만 사실은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치밀하게 계산되고 정교하게 짜여진 가짜 현실이다. 거기서 우리는 보고, 느낀 것 뒤의 보이지 않는 글씨들을 찾아 읽어낸다. 주인공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붉어지는 순간 사랑이 끝났음을 혹은 사랑이 시작됨을 읽어내는 것처럼, 볼거리들만으로도 이미 차고 넘쳐서 서사가 부족하다는 블록버스터들 속에서조차 우리는 우뢰 같은 사운드와 함께 쉴 새 없이 바뀌는 장면 장면을 보고,  그 속에서 우리가 우리의 지식과 경험과 의식의 작용과 연상의 꼬리들로 이루어진 어떤 메시지를 읽으며  또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또다른 자신과 만난다.  


망명정부의 라디오 채널같은 존재로 살았다는 소설가 김영하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사회에 탐침을 꽂기로 결심했고, 그 결심의 일환으로 산문을 쓰게 되었다고 작가의 말에 적고 있다.  작가가 '주기적으로' 산문을 쓰기 위해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에 대해 숙고하고 글을 쓰는 행위는, 독자로서의 내가 책을 읽고, 그 책속에서 받은 강렬한 느낌을 기록하고 익명의 누리꾼들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다시 글쓰기를 하고 있는 지금의 내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글모음 중 첫번째가 이 책 <보다>다.  시리즈로 계속 책을 출판을 계획하고 있으며 다음엔 <읽다>가 될 것이다. 그 다음은 <듣다>가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은 그가 본 것들에 더 집중한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평론은 아니다. 그가 본 것들은 영화 뿐만 아니라, 세상이다. 그 세상 속에, 세상을 풍자하고 흉내내고 비판하는 영화가 포함되어 있다. 


독자가 소설가 김영하가 본 것에 대해 적은 글을 읽는 이유는 그가 보는 행위를 통해 느낀 똑같은 감각을 느끼려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각자가 느낀 것은 각자의 정체성의 일부로 흡수하면 그만이다. 작가가 본 것을 읽기 위해서다. 독자는 작가가 본 것을 읽음으로서 장면 장면에서 스스로 읽어냈던 사유와 작가의 생각이 조우하는 순간을 경험한다.  <건축학개론>에서 작가처럼 여자의 욕망의 삼각 꼭지점을 읽어내지 못했더라도 서연의 흔들리는 욕망이 아버지의 서연에 대한 욕망으로 치환됨으로써 건축이라는 행위를 드라마의 메인스트림으로 끌고 간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모든 욕망의 방향이 단순히 직선적이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그 복잡한 인간의 심리와 내제된 욕망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읽고 나서야, 잠시나마 영화에 투영한 나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작가의 시각과 만나 객관적일 수 있다.  철학이 예술일 필요는 없다. 팝콘을 들고 앉아 팝콘처럼 가볍게 두시간 가량의 러닝타임과 시시한 감정을 소비한 후 개운한 기분으로 문을 나서면 되는 종류의 영화들이다.누구나 가볍게 보았던 영화, 많은 사람들이 보았던 <설국열차>, <건축학 개론>, <시저는 죽어야 산다>, <변호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영화들을 리얼 세계에 투영하여 해석하고, 성찰한다.  전문가 눈에는 '그저그런' 영화를 선택한 관객의 안목이 한줄평 속에 마구 구겨져 버리지도 않고, 미학적 혹은 전문적인 용어도 없다. 읽으면서 끊임없이 영화 속에서 내가 읽은 것과 작가가 읽은 것들이 함께 만났다 헤어짐을 반복한다. 작가의 문학적 감수성과 통찰력으로 읽어낸 것들을 공유하는 소소한 즐거움은 해당 영화를 본 영화팬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연극적 본성이라는 말이 나온다. 최근 읽은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은 자신이 경험했던 필명으로 추리소설 쓰기 체험이 소설 속에 녹아 있다. 필명의 이름 윌리엄 윌슨은 주인공 퀸이 아내와 아들이 죽은 후 창조해 낸 가짜 인물로, 실제 인물인 퀸과는 다른 독자적인 삶을 영위한다. 퀸은 자기 대신 가짜 정체성을 만들고, 그가 되어 그 이름으로 책을 발표하고 퀸이 썼던 책과는 다른 종류의 책을 쓴다. 자신과는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이 이제까지 하루하루를 살아오면서 보고 느끼고 만들어간 자기 중 가장 자기 자신이라고 규정한 자신을 연기할 필요 없이, 자기가 되고 싶은 하나의 인물, 단순한 하나의 정체성에만 충실하면 된다는 것을 뜻한다. 김영하 작가는 <시저는 죽어야 산다>에서 자신을 연기할 때 가장 어색하고 서툴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이를 통해, 우리가 가장 연기하기 어려운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인 이유는 우리는 여러가지 모습으로 끝없이 변화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게 무엇인지 영원히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뉴욕3부작을 읽어면서 그 가짜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국 아내와 자식이 죽은 후의 퀸은 그 죽음으로 인한 자신의 정체성의 변화에 적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정체성, 아내와 자식이 죽지 않고 아무런 인간관계도 갖지 않은 정체성을 만들어 그 캄캄한 굴 속에 자신을 감금시키는 방법으로 상실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보는 것과 읽는 것을 통한 작가와의 조우는 이렇게 순간적인 번뜩임을 준다. 생각이 합해지고 더해지고 변화해서 아주 작은 진실 하나를 넘어선 것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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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micah 2014-11-21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핫!!!! 축하드려요ㅎ 나름 심혈을 기울여 써서 응모했는데 저는 똑! 떨어졌네요. 기네스님 수상에 대리만족 했네요ㅎ 이분 참 잘 쓰신단 말야ㅎ 축하드려요

CREBBP 2014-11-22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인이 더 잘쓰면서 말이야.. ㅎㅎ
저도 심혈을 기울여서 썼어요. 쓰다가 길어지는 것도 몰랐나봐요. 근데 수상작은 이거 말고 검은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