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 - 사랑과 전쟁과 천재성에 관한 DNA 이야기
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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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서적을 읽으면서 나는 생뚱맞게도 애니미즘 사상에 기우는 것 같다. 생명이란 것을 단지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으로 한정짓지 않는다면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이 발견한 가장 작은 원소에서부터 코스모스라는 거대한 유기체조차 하나의 영혼이 있는 생명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것들이 인간과 같은 방식의 사고 체계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우주의 암흑 에너지와 암흑 물질처럼 알 수 없는 무엇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체계를 이루고 있을 지도 모른다. 발견된 사실들이, 무지의 틈을 메우면서 생명과 우주를 이루는 진실에 다가가는 거대한 스토리의 일부일 때, 우리의 감동은 벅차다. 그  알 수 없는 것들을 상상에 맡기고 거기서 허구를 만들어내는 일 못지 않게 말이다.

 

이야기의 힘을 믿는 타고난 이야기꾼 샘 킨,

로사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엄지>를 소개하는 자신의 짧막한 블로그에, 전작으로 <사라진 스푼> 한 권밖에 번역된 책이 없는 저자를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소개하는 것은 우리에게 거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전작이 한 권밖에 번역되지 않은 것은 전작이 한 권밖에 없는 작가이기 때문이고(최근 6월에 The Tale of the Dueling Neurosurgeons가 출판되긴 했다)  어떤 사람이 이야기 꾼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그의 많은 책을 읽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짧은 질적 경험이 준 임팩트 만으로도 샘 킨에게 붙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찬사는 정당해 보인다. 한 권이 아니라 한 챕터만 읽어도 된다. '타고난 이야기꾼'은 성석제처럼 상상에서 출발한 허구적 이야기를 전문으로 만들어내는 소설가에게 부여했을 때보다, 과학을 전하는 책을 지은 작가에게 더 의미있는 찬사다.


샘 킨은 냉정한 과학적 사실을 전하면서 그 속에 얽힌 인간의 이야기를 한쪽 구석으로 제껴놓지 않았다. 과학적 성취를 이루어낸 개인 개인의 시대적 환경, 집념, 그리고 샘 킨이 발견하고 각색한 독특하고 재미있는 캐릭터는 인류 역사 속 획을 그어온 커다란 과학적 성취 속에 점점이 스며있다.  한명 한명의 획기적 발견이 인류를 한걸음씩 앞으로 내딪게 하는 동력이 되었을 때 그 동력을 인간의 욕망과 탐구심이라는 구심점 속에서 융해시키는 그의 능력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우리는 스토리에 끌린다. 스토리는 자석처럼 우리를 끌어당긴다. DNA 분자 구조와 단백질 생성 암호화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도식들과 씨름하는 것은 DNA를 처음 발견한  미셔나 유전의 법칙을 알아낸 멘델의 생애에서 끄집어낸 이야기들이 과학을 발견해 나가는 드라마를 접하는 것과 비교하면 흥미와 감동면에서 게임이 안된다. 책장을 넘기는 많은 순간, 우리가 수업시간에 따분해 했던 과학 이론의 매 탄생 과정과 그 속에 담긴 드라마들에게서 감동받는다. 이야기 속에 녹아있는 과학적 발견에 감동하고 감정을 움직이면 뇌 속의 기억 회로가 그것과 연결된 팩트들을 오래도록 붙잡아 놓는다. 지루하던 유전학의 상세 동작 구조를 이토록 글자를 패며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 이야기의 힘이다.


샘 킨은, 초파리를 연구했던 모건이 당시 학자들이 유전자에 괴상하고 생소한 이름을 붙이던 관습을 깨고 의미있는 이름을 붙였던 것처럼, 책을 통과하는 모든 과학적 사실들의 이면에 있는 작은 화학물질들과 그 작용들을 인간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방식처럼 기술하고 스토리텔링을 불어 넣어 그것들의 의미릉 생생하게 포착하였다. 그의 글 속에서 유전자가 동작하는 방식은 마치 유전자들이 개별적으로 독립적으로 나름의 사고 체계를 갖춘 개체 같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단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할 뿐이다. 인간의 사고라는 것이 그렇게 유전자가 지시하는 명령들의 조합이 아닌가. 그것들은 인간의 형상으로 조합을 이루기 전 태고적 바이러스 시대 때부터 독립된 인격처럼 자신을 복제하는 화학적 메카니즘과 암호 체계를 갖추고 나름의 역사를 쓰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동화책이나 그림책에서는 사물이나 동물을 곧잘 의인화한다.  그게 아기들의 교육적인 면에서는 좋지 않다는 헛소리도 들은 적이 있지만,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기에, 개가 멍멍 짖으며 꼬리를 흔들었을때 우리가 우리의 언어로 그 뜻을 해석하고 스토리텔링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개와 교감하는 인간의 감정을 묘사할 길이 없다. 개에게는 인간과 친밀함을 유지하는 데서 자연선택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기에 긴 시간을 지나면서 나름대로의 의사 소통 방법을 발전시키는 유전자가 발전했을테니,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의 유전자 역시 개를 이용함에서 오는 잇점을 발전시켜나간 것 아닐까. 다른 언어가 없는 그들은 짖고 꼬리 흔들고 와서 부비고 하는 단순한 행동이지만 스토리 속에서 그 행위는 왜 이제 왔니 얼마나 기다렸는데 등과 같은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게 맞든 틀리든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DNA 속의 화학 구조가 이루는 유전자들의 조합이 우리의 인생과 교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생명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우리이면서 또한 우리가 아니다.

 

진보를 이루게 하는 힘, 학문과 학문의 접점

DNA와 유전자는 다르다. 학문적 발견 과정도 다른 루트를 통해 발전되어 왔다. DNA는 물질이고, 유전자는 긴 DNA 가닥으로 이루어져있고, 세포액 속에 있는 염색체는 DNA로 가득한 책이다. 처음 DNA를 발견하게 된 건, 요한네스 프리드리히 미셔의 청력상실 덕이었다. 청력 손실로 청진기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자, 호페 자일러의 실험실에서 혈액 세포에 있는 화학 물질의 종류를 연구하던 끝에 단백질에는 없는 인이 3% 나오는 물질을 분리해 냈고 이를 뉴클레온으로 이름붙였다. DNA가 발견되어 미셔는 학문적 성취를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DNA는 뭘 하는 지 모르는 그냥 혈액속의 물질일 뿐이었을 것이다. 겨우 150년이 채 못된 1869년의 일이다.


1900년대 멘델의 유전학과 다윈의 자연선택설은 불꽃튀는 내전을 겪었다. 모건이 이끄는 팀은 이 둘을 합쳐 현대 유전학이라는 거대한 테피스트리의 토대를 마련했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유전의 매개물질이 DNA라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유전학자들은 DNA 대신 단백질 우물만 끝도 없이 파대고 있었는데, 왓슨과 크릭이 결정적으로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하게 된 계기는 허쉬와 체이스라는 바이러스학자의 아이디어가 결정적이었다. 그들은 바이러스가 세포속에 유전물질을 집어넣어 세포를 탈취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바이러스의 구성 정보가 DNA와 단백질로만 되어 있는데 그 중 DNA만이 세포에 침투했다는 점을 발견하고 이를 발표하지 않았더라면, 아직까지 우리는 전혀 근거 없는 낭설만을 가지고 유전적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DNA와 RNA 암호가 풀리자 드디어 미셔의 DNA와 멘델의 이론이 합쳐져 조화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조차 틀린 것이라 무시했던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획득형질 이론은 최근에서야 동안 발전한 후성유전학이라는 이론과 만났다. 학문과 학문의 접점. 그것이 진보를 이루게 하는 힘이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과학 

과학의 위대함은 모르는 부분을 인정하는 것이다. 믿음에 근거한 종교가 전체적 이해(라고 믿는 믿음) 속에 부분을 꿰어맞춘다면, 과학은 탐구 속에서 모르는 부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과학계의 이단아 벤터를 주측으로 하는 민간기업 셀러라와 미국국립보건원 컨소시엄이 1980년대부터 2003년까지 삼십년간 수천명의 과학자들이 연관되어 수십억달러의 연구비를 들여 완성한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우리에게 희망과 실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유전체를 판독하는 것과 그것을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주요 질병을 일으키는 특정 주요 유전자들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인간의 모든 DNA의 모든 염기 서열이 종교가 아니듯,  DNA는 우리를 이루는 화학 물질의 본질일 수 없다. 그것으로 알 수 있는 건 전체 중 일부,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걸 알아낼 수 있다는 희망일 뿐이다.  중요한 통찰을 쏟아내었지만 해석은 여전히 남은 과학의 몫이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겸허함을 배운 그들은 그저 쏟아져 나오는 데이터를 처다보는 것만으로 통찰력이 펑 하고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440


사유가 어떤 과학적 팩트에서 출발하고 그 팩트가 이해가능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면 순수하게 무에서 출팔한 사유보다 공감이 크다. 연역적 사고는 너무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만 스토리 기반의 경험적 사유는 흥미에서 이해를 그리고 이해에서 철학을 끌어낸다. 고대로부터 과학과 철학과 음악과 미술과 언어와 문학은 원래 하나였다. 오랜 세기에 걸쳐 종교가 탐욕스럽게 차지했던 자리에 어렵게 부활한 개별 학문과 예술이 전문화라는 갈래길에서 찢어졌지만 가만히 잘 들이다 보면 책을 통해 만나는 개별 영역들 상호간에는 무수히 많은 교차 지점이 있고 그들은 자주 만난다. 그 큰 테피스트리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가닥가닥의 실들을 통래 만나는 교차점. 그 짧은 진실과의 조우는 실로 감동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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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2014-07-03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를 알게되면, 두개의 모르는것이 따라오는 법이어서, 알면 알 수록 더 모른는게 많아지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과학이 발전할 수록 더 많이 모르게되고,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가장 많이 모르는 사람이지요. 아는게 없으면 모르는 것도 없지요. 그래서 하룻 강아지는 범무서운줄 모른다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이 DNA에 대하여 알았다고해도.. 모르는 것이 더 많이 늘어났을 뿐이지요.. 좀 더 현명해지기는 했겠지요..

CREBBP 2014-07-03 16:50   좋아요 0 | URL
방문 감사드립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조금 알면 알수록 더욱 알고 싶어지는 게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