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을 때만 해도 리뷰를 쓸 때 썰전 연상작용으로 노회찬 의원이 생각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관련없는 일들이 서로 보이지 않는 영향을 주고 받으며 흘러가는 것. 우아하게 미끄러지듯 물 위를 떠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백조나 오리가 보이지 않는 물 속에서 끊임없이 발차기를 하고 있음을 종종 간과하듯 역사서에 등장하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그 사건을 그러니까 역사를 가능하게 했던 보이지 않는 발차기는 자주 생략된다.
기무사 문건을 통해 드러나는 사실은 지금은 추억처럼 회상할 수 있게 촛불 정국 중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우리를 뒤로 회전하는 역사의 바퀴 위에 태워 놓을 수도 있었을 흉괴와 반역의 음모가 숨어 있었을 수도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리 춥지 않던 12월 첫째 주 주말 혜화에서 광화문을 향하던 느슨한 대열과 간간히 외치던 구호 틈새에 한 꼬마 아이가 엄마에게 묻던 질문이 기억난다. ‘엄마 그럼 우리 역사책에 나오는거야?’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 개개인들의 하나 같은 바람이 한 장소에서 우리라는 동질감을 형성하던 순간은 분명 역사의 흐름에서 물결의 방향과 속도를 결정했고, 그 작디 작은 아이의 소망까지도 민주주의를 지키며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흐름을 따라 유유히 흘러가던 역사 속 발차기의 일부였음을 우리는 안다.
역사는 무엇일까. 영웅과 왕들 혹은 정권의 핵심에 섰던 인물들이 만들어낸 굵직굵직한 변화를 적은 사실들이 바로 역사 라고 말하는 것의 전부는 아니다. 바로 이 말을 하고자 저자 유시민은 2천5백년 전 헤로도토스부터 투키디데스, 사마천, 이둔 할븐, 랑케, 마르크스,신채호,백남운,김부식,에드워드 카, 슈팽글러,토인비,헌팅턴, 다이아몬드와 하라리까지 인류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와 역사 학자들을 소환하고 그들이 남긴 역사를 살펴본다.
이 중, 서양서에서는 자주 등장하지 않는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이 낯선데, 원전은 규모면에서도 방대해서, <성찰의 책>이라 불리는 7권짜리 31부작 역사서다. 국내에는 영어으로 된 영역 축약본<역사서설>과 원전 번역의 무깟디야 1, 2권(소명출판) 두 권이 나와있다. 서양에서는 20세기 중반에서야 알려진 이 책은 14세기에 집필된 책이다. 어떤 분야의 역사를 접해도 서양사에서는 중세의 약 1천여년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뭉텅이로 빠져있는데, 14세기라는 캄캄한 암흑만 연상되는 시대적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상한 경외감도 생긴다. 여기서 저자는 14세기 이슬람 문명은 중국 문명과 만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윤리 규범을 만들어 냈음을 주목한다.
14세기 이슬람 문명과 중국 문명은 만나지 않았다.언어 문화 종교 정치 체계가 완전히 달랐다 그런데도 국가권력의 존재 의미 군주와 백성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서 거의 동일한 윤리 규범을 만들어냈다. (p113)
작가 유시민이 소개하는 역사서들은 여기 저기서 이름을 많이 들어본,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언젠가는 한 번쯤 원전을 읽어보고자 하는 소망을 품어볼 듯한 아주 유명한 역사서들이다. 어떤 건 2500년 되었고, 그에 비해 어떤 건 갓 출간된 신간에 해당하는 2~3년 전 혜성같이 나타난 책이다. 인류 문명은 시간과 공간의 어디쯤에서 한번씩 역사가의 시선에 잡혀 텍스트로 변환되었고, 우리는 살아남은 역사가의 눈을 통해 역사를 본다. 이 들 중 어떤 역사가(랑케)는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이 역사가의 일이라고 한다. 유시민이 랑케를 이 책에 소개한 것은 랑케의 주장과는 달리 역사가의 일은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며, 역사가의 시각을 남기는 것이라는 걸 반면교사를 통해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팩트를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기록하였다고 한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망각의 철칙이 지배하는 시간의 왕국에서 팩트는 상상의 영역에 조금씩 먹혀버린다. 어떤 기록이라 하더라도 그 기록 속의 팩트와 팩트 속에서는 시대와 공간이 부여하는, 당연해서 기록에 빠진, 생략된 디테일이 있기 마련이다. 넘쳐나는 팩트들과 조화롭게 하나되어 온 배경과 디테일은 시간과 공간 이동을 하면서 다른 맥락 속에 놓이게 된다. 역사가는 이것들을 당대의 독자가 이해하는 시점에서 현대의 가치관과 배경 속에 배열하여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통합을 시도하는 것이다.
많은 역사책을 다 읽으면 좋겠으나 역사가와 역사학자이거나 역사에 푹 빠진 독자가 아닌 맥락 파악이 어려운 고전 역사서들을 두루두루 섭렵하기란 쉽지 않다. 시간도 이해 능력도 좋은 역사서를 고르고 읽고 해석하는 안목도 모든 것에서 부족함을 느끼는데, 유시민의 이 책은 나같은 비전공자와 역사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지 못한 일반인이 그 대상이다. 이 책을 통해 유시민은 역사가의 역할을 탐구한다. ‘역사는 사실 넘어 문학적 상상력과 역사가의 해석이 결합된 컨텐츠’라고 하는 것이 여러 역사서들을 탐구하면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 contemporary history 라고 선언한 크로체를 인용하며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대의 눈으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 ‘역사가의 임무는 기록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 (역사란 무엇인가 36쪽 이 책 232 재인용) 에서 더욱 뚜렷이 역사란 현재를 해석하는 하나의 방법임을 동의하게 된다.
역사가는 과거 사실의 일부만 알 뿐이며, 기록한 사람이 알았고 중요하다고 여긴 일부 사실만 보여준다.. 역사적 사실은 평가와 해석이라는 주관적 요소의 세례를 받고서야 무언가 말할 수 있다 (p231 요약)
망각의 철칙이 지배하는 시간을 왕국에서 장수의 축복을 누리는 쪽은 역사학자가 아니라 역사가였다 불공평 하지만 어쩔 수 없다 219
역사가도 사회적 현상이며 자신이 속한 사회의 산물인 동시에 그 사회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대변한다. 역사가는 이런 자격으로 역사적 과거의 사실을 연구한다 역사란 무엇인가 57
그러니 역사를 연구하려면 먼저 역사가를 연구하라 역사를 연구하기 전에 그 역사가 살았던 역사적 사회적 환경을 살펴보라 역사란 무엇인가 71
인류가 추구하는 구체적인 목표는 역사 외부에 있는게 아니라 역사의 과정에서 생겨난다. 나는 인간이 완전하다거나 지상천국이 오리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도전하고 성취해 냄으로써 만 그 정체를 밝히고 타당성을 증명할 수 있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진보, 우리가 상상할 수 있거나 상상할 필요가 있는 한계에 굴복하지 않는 진보일 가능성에 나는 찬성한다. 그러한 진보의 개념이 없이 어떻게 사회가 생존할 수 있겠는가 역사란 무엇인가 179쪽
이중 주차의 안쪽에 유배되어 있는 오래된 토인비에 대한 내용을 보니 반가왔다. 한발 더 나아가 ‘사실을 토대로 문명의 흥망성쇠를 지배하는 일반 법칙을 찾아 흥미로운 드라마를 만드는 방식으로 문맥의 역사를 서술했다(p257)’고 한다. 그는 역사를 하나의 창작의 영역으로 보았다.
사실의 선택 배열 표현 그 자체가 창작의 영역에 속하는 작업이다. (역사의 연구 토인비 70~71쪽, 재인용).
내가 살아간 시대의 무엇이 역사에 남을까. 촛불을 들던 아이는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아이 개인의 이름과 사진 아무 기록도 남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촛불을 들던 작디 작은 마음들은 합쳐져서 힘이 되고 역사 속에 스몄다. 역사를 움직였음을 동력, 아이가 커서 훗날 자신의 이름과 얼굴은 역사속에 나오지 않지만, 후퇴하고 있던 민주주의가 방향을 틀던 작은 순간 속에 자신이 있었던 기억을 간직할 것이다.
명복을 빈다. 이웃집 아저씨처럼 친근했던 이미지가 그토록 비극적인 마감으로 충격을 던질 줄 누가 알았을까. 나라를 거덜내고 양민을 학살했던 인간들은 대대손손 천수를 누릴 듯이 당당한데..훗날 역사는 무엇을 말할까. 다만 그가 추구했던 정의의 가치가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빛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