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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논에서 고요히

[푸른하루 10] 왜가리 



  들녘에 벼가 누렇게 익어갑니다. 오월에는 모가 물에 잠겨 살아날까 싶더니, 어느새 진흙을 잡고 무럭무럭 자라고는 벼꽃이 여물어 고개를 숙입니다. 이제는 논바닥에 물이 없습니다. 손으로 논바닥을 눌러 봅니다. 말랑말랑합니다. 밟으면 빨려들거나 쭉 미끄러질 듯하지만, 꾸덕꾸덕 마릅니다. 볏잎과 논바닥은 가을볕에 마르고, 벼는 가을볕에 익습니다.


  논삶이를 할 무렵부터 논을 찾아오는 새가 있습니다. 깃이 온통 하얀 새가 있고, 얼룩이 진 듯 무늬가 있는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눈이 덜 녹은 겨울에도 빈논에 앉곤 합니다. 으레 혼자 있습니다. 봄을 지나고 여름이 와서 논에 물을 댈 때부터는 아주 논에 삽니다.


  논에 모를 옮겨심는 일이며, 모가 자라는 날이며, 이제 벼가 익고 논바닥이 말라가는 모습이며, 하얀새와 왜가리는 고스란히 지켜봅니다. 논에 농약을 뿌려도 아직 개구리는 살아갑니다. 하얀새와 왜가리는 논에서 살며 개구리를 잡습니다. 냇가나 물가에서 살아갈 새일 텐데, 이 멧골에도 논이 있다 보니, 하얀새와 왜가리는 이곳까지 찾아오는구나 싶습니다.


  새여름에 파릇하게 한 뼘쯤 자란 무논에 하얀새나 왜가리가 내려앉거나 선 모습을 보면, 꼭 한 폭 그림과 같습니다. 겨울에도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한결같이 그림으로 서는 새를 지켜봅니다. 새는 논을 지켜보고, 나는 새를 지켜봅니다.


  하얀새와 왜가리는 낚시꾼 같습니다. 오래 기다리고 서고 걷다가 해질녘에서야 훨훨 날아서 저희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얀새와 왜가리는 고요히 기다리는 듯합니다. 문득문득 보아도, 창밖으로 한참 바라보아도, 늘 몸짓이 반듯합니다. 바닥이 온통 흙빛인 논에서 살아가더라도 깃털은 늘 하얗습니다. 긴다리로 사뿐히 다니는 걸음걸이는 멋있기까지 합니다.


  함께 다니는 모습도 드물게 보지만, 어쩐지 하얀새와 왜가리는 혼자 다니는 듯합니다. 하나가 다니면 하나는 둥지를 지킬까요? 하나가 개구리를 사냥하고서 둥지로 돌아가면, 다른 하나가 개구리를 찾으러 논으로 날아올까요?


  나는 오며가며 하얀새와 왜가리를 지켜보는데, 마을에 계신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새를 못 느끼는 듯합니다. 아니, 새가 무슨 이름인지 모를 수 있습니다. 논일을 하며 으레 만났을 테지만, 무슨 새이름인지 모를 수 있어요.


  새를 보려고 하면 새가 언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논을 짓고 논을 돌보면 벼에 언제 꽃이 피고, 벼를 언제 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살며 자가용을 몰면, 고속도로 나들목을 하나하나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는 것이 많지만, 아직도 잘 모르는 것이 많기에, 더 알고 싶습니다. 하얀새와 왜가리가 혼자 다니는 듯한 뜻도 알고 싶고, 겨울에는 어떻게 추위를 견디는지 알고 싶습니다. 개구리가 다 겨울잠에 들면 겨우내 어떻게 지내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말없이 논에 고요히 선 듯한 새입니다. 한참 지켜보아도 우는 소리 하나 없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서면서도 말 한 마디가 없는 새인데, 조용히 논과 하나가 되는 새인데, 나는 어디에서 무엇과 살아가는지, 무슨 말을 떠드는지 모르겠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를 잡으려고 이렇게 오래 말없이 서서 기다리는 새인데, 나는 글 하나가 잘 나오지 않는 날에는 너무 투정을 부리는 듯합니다.



2026.10.18.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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쇳소리 아닌 새소리

[푸른하루 9] 꿩



  귀뚜라미 울음이 여리게 퍼지는 사이로 앓는 소리처럼 쇳소리가 들립니다. 창문을 열고 소리나는 벼랑을 훑어봅니다. 이쪽이 아닙니다. 소리는 건너에서 들립니다. 건너숲에서 짧게 한마디로 울고 울며 또 웁니다. 누구일까. 무슨 뜻일까. 아침에 아이들을 모아서 함께 밥을 먹는가요. 이제 쇳소리는 사라지고 새소리만 맑게 들려옵니다.


  지난봄에 마당에 둘러앉아 떡을 먹는데, 이때에도 건너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습니다. 가랑잎이 부스럭거리고 후다닥 떠밀리듯 내려오는 소리가 크더군요. 소리가 나는 밭둑으로 얼른 가 보았습니다. 그때는 감자싹이 한창 오르던 무렵입니다. 밭고랑에 고개를 숙이고 쪼그려앉습니다. 이쪽부터 저쪽까지 고랑을 살핍니다. 한 고랑 두 고랑 세 고랑 네 고랑까지 살피자, 끝에 누가 웅크렸군요. 그쪽은 머리를 숨겼다고 다 숨은 줄 여기는 듯하지만, 나한테는 다 보입니다.


  살짝 웃었습니다. 꽤 크게 울리는 소리라서 큰짐승인가 싶어 처음에는 덜컥 무서웠습니다. 그렇지만 이 멧골에 큰짐승은 없을 텐데 싶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까투리입니다. 조금씩 다가가는데, 내 발소리에 놀랐는지 어느새 솟아오릅니다. 날갯짓하는 까투리 소리에 외려 더 놀랐습니다. 힘차게 쏜살같이 날아오른 까투리는 소나무가 있는 숲 어디쯤에 내려앉은 듯합니다. 


  쇳소리를 닮은 듯한 꿩울음인데, 겨울에도 곧잘 듣습니다. 어느 때에는 꼭 앓는 소리 같습니다. 어디가 아프려나, 숲에서 아프면 어떡하려나, 한참 생각해 봅니다. 설마 겨울에 알을 낳지는 않을 테지만, 아무쪼록 그만 울고 잘 지내기를 바랄 뿐입니다.


  철마다 어떤 소리가 이 숲에 흐르는지 돌아봅니다. 봄이면 새소리가 노랫가락마냥 멧골에 아름다이 울려요. 이다음에는 개구리가 멧골이 떠나가도록 울고요. 뻐꾸기가 이어서 울어요. 그리고 꿩이 내 때가 되었다는 듯이 아침마다 쇳소리마냥 꽁꽁 껑껑 크게 소리내며 모습도 드러냅니다. 꿩은 언제나 혼자 우는 듯해요. 


  어릴때에는 꿩깃을 주워서 글씨를 적으며 놀았어요. 장끼 깃털은 아주 예쁘거든요. 의성 멧골에서는 장끼도 까투리도 곧잘 만났는데, 안동 멧골에서는 좀처럼 장끼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렁찬 목소리는 장끼 소리가 틀림없습니다. 장끼는 우리집 앞에 사는 듯합니다. 그저 우리 눈에 띄지 않게 살며시 다니며 까투리를 부르는 듯합니다. 


  나는 쇳소리라고 느끼지만, 꿩은 ‘쇠’가 아니라고, 서로 사랑으로 주고받는 소리라고 말할 테지요. 그래요, 새는 늘 ‘새소리’입니다. ‘쇠소리’가 아니지요. 새는 숲에 우거진 나무가 심심하지 말라면서 이 나무 저 나무로 찾아갑니다. 숲에서 살아가는 우리 같은 사람한테도 철따라 ‘새노래’를 들려줍니다. 새가 들려주니 새로운 노래입니다.


  쇳소리라기보다 그냥 새소리인 꿩을 다시 곱씹습니다. 어린날 우리집에서 가까워 곧잘 놀러다닌 금성산 숲자락이 떠오릅니다. 그곳에 있던 옹달샘도 떠오릅니다. 안개가 끼면 뿌옇게 잠기는 멧골이었는데, 엄마아빠 밭일을 도우러 멧밭을 걸어다니던 일이 떠오릅니다.


  예나 이제나 멧골이 마을을 먹여살립니다. 우리는 멧골에서 나물도 열매도 얻고, 땅을 일구어 논도 밭도 짓습니다. 공장이 없어도 우리가 손수 지어서 누리고 나눕니다. 땔감도 베푸는 멧숲이고, 쌀도 콩도 고구마도 딸기도 머루도 고루 베푸는 멧숲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멧숲 어디에서나 토끼가 흔했지만, 이 시골에 고양이가 늘면서 토끼는 거의 자취를 감춥니다.


  멧골은 겨울이 더 일찍 옵니다. 곧 서리가 내릴 텐데, 꿩은 겨우내 어떻게 지내려나요. 부디 겨우내 포근히 지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쇳소리라고 여기지 말고, 우리 밭자락 귀퉁이에라도, 멧짐승과 멧새가 겨우살이를 할 밥을 조금은 둬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나무에는 까치밥을, 밭에는 새밥을, 조금조금 두려고 합니다. 오래오래 우렁찬 새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2026.10.12.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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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손 작은몸, 큰몸 작은손

[푸른하루 8] 두더지



  밭둑에 대추나무 세 그루가 있습니다. 지난해는 가지가 늘어지게 대추가 열렸습니다. 올해는 지난해보다는 조금 적게 열립니다. 벌레먹은 떨어진 대추가 더 많습니다. 사다리를 놓고서 대추를 따다가 구멍에 빠질 뻔합니다. 나무 언저리에 난 구멍을 메우자고 여기면서도 아직 손길이 미치지 못 합니다. 이동안 구멍이 물길처럼 바뀌고,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밭과 길을 갈라놓을 듯합니다. 


  지난여름 끝에 큰비가 왔습니다. 어마어마하구나 싶은 빗물이 우리집 마당을 휘돌아서 흘러갔습니다. 그때 뽕나무 둘레 흙을 쓸면서 구멍이 났고, 밭둑으로 가는 길이 막혔습니다. 손바닥만 한 부추밭 흙도 빗물에 휩쓸려 갔습니다.


  대추는 그만 따고서 구멍을 들여다봅니다. 구멍이 난 자리는 처음에는 조그마했습니다. 두더지가 판 구멍 같았습니다. 뱀도 나온 자리입니다. 이러다 큰비가 오면서 두더지길을 뚫은 듯싶고, 우리 밭이 깊이 패기까지 했습니다. 그나저나 이 구멍을 메워야 할 텐데, 아직 손을 못 대었으니, 또 큰비가 오면 이 구멍은 더 패겠지요.


  우리집 꽃밭에 두더지가 곧잘 지나가는 듯합니다. 여느때는 멀쩡한 밭흙인데, 문득 보면 살이 부슬부슬 갈라지듯 흙이 일어나곤 합니다. 처음에는 꽃밭을 지나갈 적마다 발로 땅을 밟아서 다졌습니다. 그렇지만 꽃밭에 새로 구멍이 생기고 흙이 일어납니다. 두더지가 그만 지나가기를 바라며 젓가락을 꽂아 보기도 하지만, 두더지는 젓가락쯤 아랑곳하지 않는 듯합니다.


  어떡할까 한참 헤아리다가 두더지길을 안 밟기로, 젓가락도 안 꽂기로 합니다. 그냥 나는 나대로 두더지는 두더지대로 다니면 되려나 어림합니다. 두더지가 늘 다니는 길로만 다니면서, 맨드라미 뿌리를 안 건드리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저 지나가기만 하고 꽃은 안 건드리기를 바라고요.


  두더지를 보면 손이 참 큽니다. 두더지 손(앞발)을 보면 땅을 참 잘 파겠구나 싶습니다. 몸은 작아도 손이 야무집니다. 땅밖에서, 땅을 발바닥으로 디디면서 살아가는 나는, 사람은, 우리는 손이 두더지처럼 크지는 않습니다. 작은 몸에 커다란 손인 두더지이고, 커다란 몸에 자그마한 손인 사람입니다. 두더지는 땅밑에서 조용히 굴을 파면서 고요히 지냅니다. 사람은 땅밖에서 손으로 뚝딱뚝딱 만지고 지으면서 시끌벅적하게 삽니다.


  두더지 이야기를 남깁니다만, 나는 두더지가 썩 반갑지 않습니다. 밭을 할퀴듯 헤집고, 남새를 갉으니까요. 꽃밭도 어지럽히는 듯하고, 아무래도 안 반갑습니다. 그러나 두더지 눈으로 보자면, 조용하던 멧골에 난데없이 이것저것 때려짓고 올려세우고 시끄러운 사람이 못마땅할 만합니다. 제발 조용히 살자면서 슬그머니 흙을 포슬포슬 뒤집어서 티를 낼는지 몰라요. 좀만 조용하면 안 되겠느냐고, 좀만 파헤치면 안 되겠느냐고, 좀만 같이 살면 안 되겠느냐면서 말없이 흙으로 몸짓말을 할는지 몰라요.


  사람은 이제 거의 모두 스마트폰을 들고 다닙니다. 어른이 되면 웬만한 사람들은 커다란 쇳덩이인 자가용을 굴리고, 트럭을 더 굴린다든지, 포크레인도 갖춥니다. 시골이라면 경운기에 트랙터에 콤바인처럼 커다랗고 무겁고 시끄러운 농기계를 갖추기도 합니다.


  두더지는 오직 맨손으로 땅을 조금 팝니다. 사람은 갖은 큰쇳덩이로 온갖 곳을 파헤치고 밀고 무너뜨립니다. 우리는 공장이나 체육관이나 아파트나 고속도로를 내면서 “두더지도 같이 지낼 땅뙈기 조금” 남겨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추를 따다가 한참 딴생각을 했습니다. 소쿠리를 챙겨서 집으로 갑니다. 올해 대추알은 몇 건사하지 못 하지만, 벌레먹어서 땅에 떨어진 대추쯤이면, 두더지도 밤에 살그머니 나와서 맛을 보려나요. 어쩐지 미안해서 두더지길 귀퉁이에 벌레먹은 대추를 몇 내려놓습니다. 




2026.10.9. 숲하루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며 기다리는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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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26-10-09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더지와 사람이
살갑게 사귈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을과 숲과 나라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숲하루 2026-10-09 13:24   좋아요 0 | URL
두더지가 땅을 파서 말썽꾸러기라 여겼는데
되려 사람이 기계를 부리며 땅을 시끄럽게 한 듯해요.
두더지가 큰 손으로 말하고 있는 줄도 새삼 느낍니다.
고맙습니다.
 

굴에서 살던 작은날개

[푸른하루 7] 박쥐



  우리 집은 이백 살이 넘는다. 오두막 같은 방 세 칸을 헐어서 하나로 쓴다. 천장은 둥그스름하다. 아래채에는 마루와 방과 부엌이 있다. 부엌은 새카맣게 그을린 모습이다. 빗장문과 벽에는 삼발이가 있고, 113이라는 글씨도 남았다. 흙과 나무로 지은 집이다. 여기에 시멘트를 덧발라 놓았다.


  우리 집에는 담이 따로 없고, 멧자락이 둘러싼다. 아래채 맞은켠에는 동굴이 있다. 마당에서 보면 위채와 아래채 사이 물길 너머로 굴이 보인다. 처음 이 집에 들어올 적을 떠올린다. 그때 굴은 2/3쯤 막혔다. 큰 통을 엎어 놓은 듯했다. 이따금 굴을 들여다보곤 했다. 이제 칡덩굴이 퍼지고 마르면서 굴 어귀를 가린다. 흙도 흘러내려서 실눈처럼 틈을 조금 남긴 채 다 가린다.


  마을 어른한테 얼핏 들으니, 일흔 해쯤 앞서 한창 전쟁이 나던 때에, 사람들이 이 굴에서 몸을 숨겼다고 한다. 먹을거리를 넣어두기도 했고, 우리가 오기 앞서도 이럭저럭 썼다고 한다.


  지난해 여름에 한 길이 넘는 구렁이 한 짝이 서로 몸을 꼰 모습을 대문 너머 멧자락에서 보기도 했다. 구렁이가 이 굴을 드나들지는 않을까. 아무래도 집에 가까이 붙은 굴을 그냥 둘 수 없으니, 짝한테 굴을 확 트자고 했다.


  굴 어귀에 쌓인 흙이 무척 많다. 삽으로 퍼낸다. 굴을 덮던 통도 치운다. 굴 안쪽은 하얗게 말랐고, 정으로 깎은 자국이 있다. 돌처럼 보여서 만지니 흙처럼 부서진다. 이때 굴에서 주먹만 한 박쥐를 보았다. 보라색 줄이 있다. 거꾸로 매달려서 우리를 지켜본다. 날개를 손처럼 포개고 매달렸더라.


  “괜찮아, 거기 있어도 돼.”


  이제 바닥을 쓸자 박쥐가 휙 날아간다. 고개를 드니 이미 담벼락을 넘어가고 없다. 박쥐는 언제부터 이 굴에 살았을까. 우리가 이 집에 들어서기 앞서부터 살았나. 혼자 살아가나.


  우리가 이곳에서 닭을 치기에, 박쥐는 그저 조용히 머물면서 파리에 벌레를 실컷 사냥하며 함께 지냈을 만하다. 이 골짜기에는 모기가 없다시피 한데, 모두 박쥐가 사냥했기 때문일 수 있다.


  굴에 있으니 밖보다 서늘하다. 굴에 감자를 넣어둔다. 비트도 넣는다. 나중에 들여다보아도 껍질이 쪼그라들지 않는다. 굴은 어느새 우리 차지가 된다. 우리 살림을 굴에 넣은 뒤로는 박쥐를 보기 어렵다. 박쥐는 어디로 옮겼을까.


  낮에는 알록달록한 작은새가 드나들고, 밤에는 조용히 나들이하는 박쥐가 곁에 있는 멧골집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곳에서 밤에 돌아다니지 않아서 박쥐가 날아다니는 줄 몰랐을 뿐이다.


  이러고서 한참 흐른 어느 날, 어둑어둑할 무렵 머리 위로 뭐가 휙 날아간다. 빠르게 지나가는데 날개가 크다. 아니, 길던가. 참새는 아니고, 딱새도 박새도 아니다. 아마 박쥐였을까. 굴에서 살던 박쥐일 수 있고, 그냥 이 멧골에서 살아가는 박쥐일 수 있다. 



2026.9.24.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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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가을은 온통 노래

[푸른하루 6] 귀뚜라미



  해가 등성이를 넘어가자 멧그림자가 골목에 내려옵니다. 새아침처럼 귀뚜라미가 울고 나뭇잎이 바람에 사락사락 소리를 냅니다. 가을을 몰고 오는 바람이 나뭇잎 사이로 빠져나갑니다. 흔들거리는 나뭇잎이 물결소리를 냅니다. 바람소리 사이로 풀벌레가 울고요. 풀벌레노래를 듣는데 톡톡 튀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입니다. 내가 글을 쓰려고 글판을 톡톡 치는 소리와 다릅니다. 달콤하게 부르는 노랫소리와 다릅니다. 절집에는 바람새가 바람에 따라서 울리는데, 이런 소리와 다릅니다. 풀밭에서 흐르는 소리는 참으로 맑고 곱다고, 머잖아 예순 살이 될 나이인데, 새삼스레 느끼고 생각합니다.


  설거지를 하다가 살짝 멈춥니다. 서로 맞물리면서 내는 풀벌레 소리가 나는 창을 열어 봅니다. 봄에 심어서 꽃을 다 피우고서 시든 꽃이 있습니다. 흙으로 돌아가라며 줄기를 베어서 눕혔지요. 이 언저리쯤, 또는 곧 푸짐하게 올라올 산국에 돋아날 자리께, 아니면 이 모든 곳에다가 우리집을 둘러싼 멧자락 모든 곳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풀벌레는 소리로만 만나요. 풀벌레는 어디에 숨어서 우는지 시골에서도 얼굴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가까이에서 듣고 싶어서, 가까이에서 얼굴 좀 보고 싶어서 다가가거나 지나가면 어느새 울음을 그쳐요. 쉬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아이는 모두 작은 풀벌레인 듯합니다. 풀벌레는 노래를 잘 해야 사랑을 받나 봅니다. 나는 노래를 썩 못 하는데, 나처럼 노래를 못 하는 풀벌레는 없을 듯합니다.


  푸른빛 사마귀와 나무빛 사마귀가 마당에 나옵니다. 사마귀도 노래하려나? 잘 모르겠습니다. 사마귀도 풀벌레가 들려주는 노래에 춤을 출 듯합니다. 


  새가 지저귑니다. 휘파람소리에 풀피리소리를 내며 풀벌레노래에 섞입니다. 소리는 줄을 서서 흐릅니다. 겨울끝에 따사로이 볕을 쬐며 들판을 누비고 전봇대에 앉아 떼로 다니는 참새소리에 꼬리주황새에 딱새가 울고 나면, 이제 뻐꾸기가 울어요. 땅에서는 개구리떼가 울고 한여름에 매미가 목터지게 울고, 어느덧 풀벌레가 울 때입니다. 가을은 작은울음이 꽃처럼 피어납니다.  


  풀이 잘리고 또 잘려도 자라는 풀밭에는 메뚜기도 풀벌레도 매미도 곱게 울음빛을 터트립니다. 새는 귀뚜라미 소리가 어떻게 들릴까요? 나도 새가 되어 귀뚜라미 곁을 날고 싶습니다.


  첫가을인 구월은 봄여름가을겨울이 함께 깃든 듯합니다. 봄은 눈으로 보여주고, 여름은 코로, 가을은 귀로요. 한 번 보면 잊지 않는다는 말이 있죠. 눈빛이 그만큼 세니까요. 귀는 더 또렷해요. 울리니까요. 소리는 그림을 그리라고 해요. 고요히 귓가를 맴돌아요.  


  살갑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한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조용한 하늘에 대고 부르는 소리입니다. 메뚜기는 무르익는 벼논을 마당처럼 뛰어 놀아요. 귀뚜라미는 앞날개를 비비며 노래를 부르고, 메뚜기는 뒷다리를 앞날개에 대고 노래를 부른다지요. 뒷산으로 이은 벼랑 언저리 풀밭에서 귀뚜라미가 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느새 우리집 가까이 찾아왔나 봅니다. 


  짙은 보라빛 칡꽃이 핍니다. 귀뚜라미는 칡꽃한테 들려주려고 우는 듯합니다. 풀보다 나뭇잎이 많은 벼랑이 그늘도 있어 아늑한가 봅니다. 사람도 귀뚜라미처럼 노래를 해요. 노래는 마음을 달래주고요 하늘로 가장 높이 올라가는 소리를 폅니다. 봄부터 끊임없이 노래가 흘러나와요.  


  귀뚜라미는 귀가 무릎에 있다고 합니다. 메뚜기는 귀가 배에 있대요. 내 몸에 귀가 무릎에 있다고 헤아려 봅니다. 내 귀가 배에 있다고 헤아려 봅니다. 나는 이러다가는 귀는 늘 깨질 듯합니다. 반쯤 엎드러 자는 동안 귀는 납짝해질 듯합니다. 웃음이 납니다. 저마다 다른 자리에 귀가 있고 소리를 냅니다. 철따라 나왔다가 떠나는 숨결은, 알고 보면 뜨겁습니다. 그래서 귓가에 맴돕니다. 



2026.9.17.


'생물다양성 증가'의 함정, 흔한 종 조용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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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강하면 좋은 거 아니었나? 태양광의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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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사이 나타난 버섯, 정말 하루 만에 자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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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속 또 다른 재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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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동안 썩지 않은 ‘펭귄 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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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26-09-17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이라는 철은
그야말로
노래가 노래로 잇고 피어나는 길목이지 싶습니다.

푸른노래를 들으면서
사람노래도 하나하나
맞아들일 만하구나 싶고요.

숲하루 2026-10-14 10:45   좋아요 0 | URL
시월 가을 추위에
귀뚜라미 소리가 막바지에 이르는 듯해요.
밤이면 꽤 추운데
노래를 멈추지 않은 작은 몸이 대견스럽습니다.
고맙습니다. 파란놀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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