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 이야기 비룡소 클래식 58
루머 고든 지음, 폴린 베인스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비룡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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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92 바라는 대로



《인형 이야기》

루머 고든

햇살과 나무꾼 옮김

비룡소

2023.9.28.



인형은 사람하고 달라요.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살아 있지만, 인형은 누군가 같이 놀아주기 전에는 정말로 살아 있는 게 아니랍니다. (65쪽)


여름에 《인형 이야기》를 장만하고서, 대구에서 시골로 오갈 적마다 꾸러미에 담고 다녔다. 으레 책상 한쪽에 두었다. 두고두고 읽은 느낌을 글로 적어 보는데, 깜빡 잊고 갈무리를 안 한 탓에 그만 글이 날아갔다. 어째 글도 갈무리를 안 해 놓고서 날린담 하고 혼잣말을 하다가 생각한다. 아마 처음부터 새로 쓰라는 뜻이지 않을까.


《인형 이야기》는 여러 ‘인형’하고 아이들이 마음을 나눈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형끼리 주고받는 마음을 마치 누가 옆에서 귀담아들은 듯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바라고 싶은 마음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짚는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은 인형을 가슴에 폭 안고서 스스로 바라는 말을 끝없이 속삭이곤 한다. 아이들한테 ‘인형’이란 꿈을 비는 속마음을 말로 털어놓는 알뜰한 동무라고 할 수 있다.


어느덧 크리스마스를 앞둔다. 여섯 달 동안 《인형 이야기》를 책상맡에 놓고서 들여다보았다고 깨닫는다. 나도 우리 집 세 아이도 이제는 어린이가 아니다. 우리 집 막내도 머잖아 서른 살로 다가가는 나이에 이른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적에 어떤 인형을 아이들한테 베풀었는지 돌아본다. 우리 아이들은 인형을 품을 적에 무슨 속마음을 빌었을까? 나는 의성 멧골마을에서 어린 나날을 보낼 적에 인형을 구경할 수 없었는데, 내가 어릴 적에 인형을 품어 볼 수 있었다면 어떤 속마음을 빌었을까?


고등학교 다닐 적에 뒤에 앉은 아이가 보육원에서 다녔다. 이 아이는 다른 아이하고 어울리지 않았고, 다른 아이들도 보육원 애들하고는 어울리지 않으려고 했다. 보육원에서 오던 두 아이는 늘 같이 다녔는데 한 아이는 또래보다 작았다. 보육원에 사는 아이들은 어딘가 모르게 티가 났다. 못생기기도 하고 다른 나라 사람 같기도 한 겉모습이기도 하지만 늘 풀이 죽었다. 말도 적고 눈치를 살핀다. 보육원 얘기는 밖에서 못하게 하는지 거의 하지 않았다. 이 아이는 남한테 기대지 않으려는 마음이 셌다. 도움받는데 익숙한 얘들과 달리, 안 받고 바라지도 기대지도 않았다. 예전에는 이 아이하고 가끔 글월을 주고받으며 지냈는데,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로 끊겼다. 이제 이 아이는 어떤 얼굴일까. 어디에서 잘 살까. 집은 어디일까. 짝은 맺었을까. 아이가 있다면 밝게 키웠겠지. 


아이들이 있어 인형이 살아간다. 바람은 씨앗 같아서, 바람으로 훅 날려 주는 말씨도 마음씨도 함부로 뿌리지는 안 되겠지.


크리스마스에 인형을 받는 오늘날 여러 아이들은 어떻게 마주할까? 인형한테도 마음이 있는 줄을, 인형도 서로 말을 주고받는 줄을, 인형이 우리 꿈을 가만히 귀담아듣고서 살며시 빛을 뿌려서 잘 이룰 수 있도록 이어 주는 줄을,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 보는 아이들은 얼마나 있을까?



2024.12.25.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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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최종규 지음 / 스토리닷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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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91 숲내음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최종규

스토리닷

2024.11.9.



책이름이 긴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를 다시 읽는다. 도시에 있는 책집에 들꽃내음이 있을까? 무슨 소리인가 갸웃거리며 읽다 보니, ‘들꽃내음’은 글쓴이가 일본 도쿄 책거리에 갔을 적에 겪은 일이다. 북적이는 곳도 아니고 큰길도 아닌 마을 안쪽, 골목이 이은 작은집이 잇달은 곳에 핀 들꽃을 보았고, 이 들꽃 곁에 서서 꽃내음을 맡고서 고개를 드니 바로 앞에 조그마한 책집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은 바둑 전문책집이었고, 이 바둑 전문책집에서 뜻밖에도 우리나라 책을 여럿 만나서 놀랐다고 한다.


글쓴이는 ‘1벌 읽을 책’이 아닌 ‘적어도 100벌 되읽을 책’을 고른다고 한다. 아니, ‘100벌’을 넘어서 ‘300벌이나 1000벌 되읽을 책’이기를 바라면서 고른다고 한다. 그런데 책을 좋아하는 아이라고 해도 같은 책을 100벌이나 되읽을 수 있을까? 우리 집 셋째 아이는 만화책을 좋아해서 만화책에 나온 말을 외우면서 보고 또 보았는데, 스무 벌쯤 되읽지 않았나 싶다.


글쓴이가 출판사에서 일하며 국제도서전에서 만난 아이가 ‘읽고 또 읽어 너덜너덜한 그림책’을 가지고 온 적이 있다고 한다. 아이 어머니는 아이가 아주 사랑하는 그림책을 다시 사주고 또 사주었다는데, 마침 국제도서전을 한다고 해서 다시 새 그림책을 사주려고 나왔다고 한다. 그림책이 너덜너덜하도록 되읽는데, 또 사주고 다시 사주었다면, 그 아이는 1000벌을 훌쩍 넘어 3000벌도 더 읽었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이 곁에서 어머니도 아이 못지않게 같은 책을 자꾸자꾸 되읽으면서 마음으로 깊이 스미는 이야기가 있을 만하다.


어제는 예천에 다녀왔는데, 아는 언니하고 간 어느 모임자리가 꽤 시큰둥했다. 둥근 책상에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서 수다를 나누는데, 나는 밖으로 살포시 빠져나왔다. 혼자 조용히 시를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를 읽으면, 글쓴이도 따분한 모임자리에 어쩔 수 없이 껴야 하면,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슬그머니 빠져나와서 책방에서 한 시간쯤 책을 읽고서 다시 슬그머니 자리에 낀다고 적는다. 그래서 나는 늘 책을 챙겨서 다닌다. 빠져나올 수 있으면 빠져나오지만, 못 빠져나온다 싶으면 얌전히 말없이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글쓴이는 한창 책사랑으로 살다가 군대에 들어가느라 여섯 달 동안 책도 볼펜도 만질 수 없었다고 한다. 군대에서 여섯 달 만에 처음 책과 볼펜을 잡고서 눈물이 났다고 한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내 예전 일을 떠올린다. 나는 일기쓰기를 오래오래 이어오는데, 가게일을 한다며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그만 다섯 해나 일기쓰기를 못 한 적이 있다. 이동안 괴로워서 발버둥을 쳤다. 이제는 예전처럼 바쁘고 힘들게 매이지 않기에, 도서관에도 책집에도 갈 수 있고, 숨을 돌릴 수 있다.


내가 스스로 알아보려는 눈이 없다면 누가 가르쳐도 알 턱이 없다. 내가 스스로 찾아보려는 마음이 없다면 누가 알려주어도 그저 못 알아 들이거나 못 알아듣는다. (44쪽)


나는 무엇을 알아보려는 삶일까. 나는 무엇을 읽고서 배우려는 하루일까. 내가 나한테 붙인 이름인 ‘숲하루’처럼, 하루하루 숲을 배우고 알아보려는 길인가. 아직 숲을 하루하루 곁에 두지 않고서 잊는 길이지는 않은가.


목숨이 목숨을 낳는다. 목숨이 목숨을 읽는다. 목숨이 목숨을 아낀다. 목숨이 목숨으로 살아간다. (162쪽)


나무한테서 받은 종이에 이야기를 얹은 책을 읽고 쓴다. (246쪽)


글쓴이는 두 아이를 손수 돌보면서 살아간다고 한다. 시골에서 살림을 짓는 글쓴이 곁에서 아이들은 시골빛을 머금고 살림빛을 나란히 배우겠지. 내가 다가가는 곳에 들꽃내음이 있는지 돌아본다. 내가 찾아가는 작은책집에서 어떤 책을 손에 쥐는지 돌아본다. 숲내음을 맡으면서, 숲내음을 글로 쓰면서, 숲내음으로 살아가려고 붙인 ‘숲하루’라는 내 이름을 사랑하는 길을 새삼스레 돌아본다.




2024.12.13.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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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에센셜 한강 (무선 보급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디 에센셜 The essential 1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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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90 흉내



《한강》

한강

문학동네

2023.6.1.



올해 늦가을에 제주도에 다녀오면서 《한강》을 장만했다. 제주에서 보름살기를 하는 동안 제주 마을책집을 돌아보았고, 이때에 눈여겨보았다. 《한강》이라는 책에는 한강 씨가 쓴 소설과 시와 산문을 싣는다. 그런데 〈희랍어 시간〉을 읽으며 자꾸 흐름이 끊긴다.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 이야기가 너무 길다. 뭔가 낱낱이 그리는 듯하지만 오히려 말만 너무 긴 듯해서 답답하다. 어제를 돌아보며 오늘을 빗대는 듯하지만 잘 모르겠다.


〈종이 피아노〉로 넘어간다. 어릴 적에 피아노를 하고 싶은데 집안살림이 안 되어서 종이 피아노를 놓고서 치던 이야기를 그린다. 그런데 한강 씨 아버지는 소설가이고 집에 책이 많았다. 피아노를 만질 수 없어서 종이 피아노를 눌렀다지만, 책이 잔뜩 있던 한강 씨네 살림이 오히려 부럽다. 나는 어릴 적에 교과서를 뺀 다른 책을 만지지도 보지도 못 했다. 우리 아버지는 나한테 내가 배우고 싶으면 배워 보라고 피아노학원이라든지 다른 어느 곳도 보낼 수 없었다. 아마 보내려는 엄두조차 못 내었으리라. 의성 멧골마을에 무슨 학원이 있겠으며 무슨 책집이 있겠는가.


나는 세 아이를 낳아 돌보면서 아이들을 학원에 보낼 수 있었다. 의성을 떠나 대구에서 살았으니, 도시에는 학원을 쉽게 찾을 수 있고, 쉽게 보낼 수 있다. 나는 내가 못 배웠다는 마음에 아이들을 학원에 밀어대듯 보냈다. 그러나 거꾸로 우리 아이들을 괴롭힌 셈이더라. 내가 못 배웠으면 내가 다니면 그만 아닌가.


한강 씨는 스웨덴으로 날아가서 노벨상을 받는다. 스웨덴에서 했다는 강연을 아침에 들어 보았다. 한강 씨가 말을 마치자마자 손뼉소리가 우렁차다. 손뼉소리에, 멋쩍어하며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한강 씨 얼굴에, 나도 모르게 북받친다. 요즘 온나라는 계엄령 탓에 시끄러운데, 저 먼 나라에서는 글꽃으로 잔치이네.


〈기억의 바깥〉을 읽고 〈출간 후에〉를 읽는다. 토막토막 짧은 글이다. 한강 씨는 날마다 시집과 소설을 한 권씩 읽는다고 한다. 아마 아침이든 저녁이든 어느 때에 이르면 꾸준히 글을 쓸 테지. 나도 날마다 책을 한두 권씩 읽고, 나도 날마다 어느 때에 꼬박꼬박 글을 쓰면 내 눈길과 글길이 나아갈까.


나는 작가 흉내를 내는지 모른다. 내가 몇 살을 살는지 모르지만, 나무 한 그루보다 오래 못 살 수 있는데, 나보다 오래오래 살아갈 나무를 섣불리 베어낼 일을 벌어는지 모른다. 내가 쓴 글을 책으로 묶는다면 어느 곳에서 내 책을 보듬어 줄까. 앞으로 100년 뒤에도 내가 쓴 글을 묶은 책을 고이 둘 곳은 몇 곳이나 있을까. 




2024.12.13.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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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자르러 왔습니다 2
타카하시 신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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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89 보고 자라요

 

머리를 자르러 왔습니다2

타카하시 신

정은 옮김

대원씨아이

2021.9. 15.

 

머리를 자르러 왔습니다 2를 지난해 이맘때에 처음 읽었다. 시골에 가는 날이 잦아서 아예 책을 따로 꾸러미에 담아서 들고 다닌다. 움직이는 작은책집처럼 여긴다. 제주나들이에도 책꾸러미를 챙겼고, 이 책을 담는다.

 

이 책은 아빠가 아이한테 들려주기보다 보여주는 쪽이다. 혼자 살아가는 길에 익숙한 사람이 어느 날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한테도 짝한테도 서툴렀다. 아이가 제법 자라서 초등학교에 들 즈음부터 갑자기 아이를 혼자 맡아야 한다.

 

어떻게 아이를 돌봐야 하는지, 이러면서 살림과 집안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던 젊은 사내가 비로소 어버이로 선다. 처음으로 아이 곁에 씩씩하게 서려고 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어버이 마음을 만화로 담는다. 아이는 아빠가 해준 밥을 먹으면 힘이 난다. 아버지는 온마음을 담아 밥을 짓는다. 엄마도 아빠도 아이 키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는데, 으레 혼자 지내야 하면서 말이 없어진 아이인데, 아빠와 새롭게 둘이 살면서 아빠가 하는 일을 지켜보고, 섬마을에서 여러 이웃과 동무를 만나면서 천천히 마음을 연다. 이제 아이는 스스럼없이 아빠를 돕는다. 가르쳐 주지도 않아도 시키지도 않아도 스스로 두 손으로 짓는다.

 

아이나 어른이나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말로 가르치면 자꾸 엇나간다. 말에는 마음을 품는데, 말만 앞서면 어긋나기 쉽다. 이것도 못 알아듣나라든지, 어떻게 이 쉬운 일도 못 하나라든지, 자꾸 꼬집어 창피하고 부끄럽다. 어느새 잔소리로 들린다. 나를 작게 보는 일을 견디지 못한다. 하려던 일도 싫고 팽개친다. 얕잡아보는 말씨에 높고 앙칼진 목소리를 듣다 보면, 피가 거꾸로 솟구치기도 한다. 몇 마디 말만 하기보다는, 그저 말없이 보여주는 일은 더딜 테지만, 몸으로 스밀 수 있다. 스민 마음이 어느 때에 문득 우러나서 스스로 일어선다.

 

글은 어떨까. 내가 쓰는 글은 어떠한가. 낱낱이 풀어서 쓰거나 가르치듯 쓰면, 어쩐지 나로서는 마음에 그림을 그리기 어렵다. 눈은 우리 몸으로 빛을 들인다. 본다고 할 적에는 살아숨쉬는 빛이다. 보는 눈은 들은 말보다 오래 남는다. 잘 보려면 그림을 그리듯 또렷하게 그대로 말을 하듯 글을 쓰면, 읽는 사람이 쉽게 그림을 그리며 글을 읽게 마련이다. 글쓴 사람 마음대로 마구 밀어넣지 않고 따분하지도 않게,


머리를 자르러 왔습니다 2을 돌아본다. 어버이나 아버지라는 이름이 서툴지만, “웃는 얼굴을 본 것으로 아버지는 너에게 가슴을 펴고 오늘 일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83)”라는 대목에 한참 눈이 간다. 즐겁게 부푸는 아빠 마음처럼, 아이는 아침 일찍 일어나 수건을 개고 쓰레기를 버리고 쌀을 씻고 쓸고닦고 그릇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학교에 간다. 아이는 아빠 곁에서 새롭게 하루를 배우고, 스스로 돌아보는 길을 익힌다.

 

섬마을 할매나 할배는 곧잘 아이는 말이여 부모를 어른으로 만들어 주려고 태어나는 것이여(200)” 하고 이야기한다. 이런 말 한두 마디를 만화책으로 읽으면서 다시 헤아려 본다. 우리는 어버이나 어른으로서 아이한테 밥을 차려줄 수 있고, 아이도 작은손으로 기쁘게 손수 밥을 차려서 엄마아빠한테 베풀 수 있다. 아이가 품을 들여 지은 밥을 먹으며 아이가 있는 집이 어떤 곳인지 아빠도 함께 알아간다.

 

집은 작은별 같다. 태어난 아이는 어버이 곁에서 자라면서 집에서 본 대로 살아가는 바탕이 되지 않을까. 아버지가 꾸준히 배우며 다른 사람 머리를 만지는 가위질마저 마음에 스미듯이. 다함께 튼튼히 살아가는 바탕이란, 늘 곁에 있고 함께 있는 작은집에서 피어나지 싶다.

 

 


2024.12.01.숲하루

#머리를자르러왔습니다2 #타카하시신 #정은 #대원씨아이 #보고자라요#숲하루#작게삶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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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그리고 죽어 1
토요다 미노루 지음, 이은주 옮김 / 대원씨아이(만화)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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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88 즐거운 일



《이거 그리고 죽어 1》

토요다 미노루

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24.4.23



지난달 시골에 머물 때 몇 권 들고 간 책 가운데 《이거 그리고 죽어 1》는 쉽게 읽었다. 만화라서 쉽게 읽었을까. 몸을 많이 쓰는 일을 하면서 짬이 없거나 지칠 적에 조금이나마 마음을 모아서 읽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에 ‘작문’ 시간이 참 따분했다. 그렇다고 그때에 만화를 읽지도 않았다.


《이거 그리고 죽어 1》를 보면, 담임 교사가 아이한테 “만화 같은 건 그 어디에도 도움이 안 돼요!(22쪽)” 하고 말한다. 아마 나는 고등학교 때에 이렇게 여겼는지 모른다. 그때 어른들도 만화는 삶에 이바지하지 않는다고 여겼을 테고. 그렇지만 아이를 낳고 보니 달랐다. 막내는 만화책을 좋아했다. 읽고 또 읽고 외울 만큼 읽고 혼자 까르르 웃었다. 막내는 만화를 읽으면서 누나가 배우는 눈높이를 조금씩 알아갔다. 그래서 “만화는 거짓이 아니다(24쪽)” 하고 나오는 말에 고개를 끄떡끄떡한다. 


가만히 보면 이 만화책은 ‘만화’를 말하는 줄거리인데, ‘만화’를 ‘시’나 ‘글’로 바꾸어서 읽을 만하다. 사람들은, 또 이 나라는, ‘만화’뿐 아니라 ‘시’나 ‘글(문학)’도 삶에 이바지하지 못 한다고 여기는 듯하다. 작게 삶으로 나오는 책을 북돋우는 길은 없어 보인다. 방위산업이나 첨단과학이나 대규모관광단지나 대형발전소 같은 데에만 마음을 쓴다. 아이들도, 나 같은 어른들도, 틈을 내어 느긋이 책도 읽고 글도 쓰면서 삶을 돌아볼 겨를 같은 데에는 마음을 못 쓴다.


‘만화’를 좋아할 뿐 아니라 사랑하는 아이들은 ‘테즈카 오사무 선생 연역법 작법(158쪽)’을 배우기도 한다. 미리 죽 틀이나 금을 세워 놓지 않은 채, 꼬리에 꼬리를 물듯 차근차근 돌고돌면 어느새 이야기 한복판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한다. 시나 글도 이렇게 꼬리를 물듯 차근차근 돌고돌아서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다.


시를 배우고 글을 처음 써 볼 적에 으레 ‘필사(베껴쓰기)’를 시키더라. 잘 쓴 글을 베껴 보라고 한다. 그런데 잘 쓴 글을 베끼는(필사) 일을 자꾸 하다 보면, 내 글을 잊고 내 삶도 잊은 채, 잘 쓴 글을 흉내내거나 따라하는 틀에 갇히지 않을까? ‘창작(짓기)’이란 내 손으로 내 삶을 옮기거나 담는 길일 텐데, ‘필사(베끼기)’에 길들면, ‘필사 같은 창작’, 그러니까 흉내내는 겉멋만 나온다고 느낀다.


내가 시나 글을 쓸 깜냥이 안 되니까, 잘 쓴 시나 글을 베끼면서 배워야 하는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잘 쓴 시나 글을 자꾸 보고 외우고 베끼다 보면, 내 삶이 초라해 보이고 내 시와 글도 나란히 초라해 보인다고 느낀다. 이러면서 요 몇 달 동안 책도 제대로 읽지 못 했고, 책글도 아예 못 썼다. 시도 도무지 못 쓰겠더라.


못 쓴 시나 글이어도 내 목소리를 담아야 한다고 본다. 《이거 그리고 죽어 1》에 나오는 아이도 그림을 되게 못 그린다. 그렇지만 이 아이는 그림만 못 그릴 뿐,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모두를 웃긴다. 이야기에 마음이 담겨서 모두를 울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나도 못 쓰는 시나 글을 창피하게 여기지 말아야겠다. 잘 쓴 글을 흉내내는 필사는 멈춰야겠다. 남이 내 글을 안 좋게 보면 어떡하나 하고 눈치나 걱정을 내려놓아야겠다.


《이거 그리고 죽어》를 그린 분은, 그야말로 떨어지고 또 떨어진 ‘퇴짜 맞은’ 이야기를 엮었다고 한다.  만화책에 나오는 담임 교사는 학생한테 만화가인 줄 숨기며 스스로 움츠린다. 그렇지만 담임으로 맡은 학생이 담임 교사 만화를 사랑한다. 학생은 담임 교사가 그 만화를 그린 사람인 줄 아직 모르지만, 담임 교사는 학생이 만화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서 조금씩 마음이 움직인다.


책을 써내고 나면, 잘 팔리거나 이름을 알리기를 바라면서 꿈에 부푼다. 그나마 꿈꿀 때에는 힘을 조금 얻는다. 이러다가 막상 부딪쳐서 깨지면 꿈도 사라진다. 요즘 나는 마음이 바닥을 친다. 심부름을 하기 싫은 아이처럼 글쓰기도 그만두고 싶고, 글을 쓰는 길도 내려놓고 싶다는 마음이 문득문득 든다. 그래서 스스로 되물어 본다. 나는 뭘 하고 싶은가? 나는 뭘 쓰고 싶은가? 나는 글로 무슨 삶을 남기고 싶은가?


날마다 들여다보는 누리길(SNS)에는 온통 책과 작가를 알리는 사진이 넘친다. 그런데 책과 작가를 알리는 듯하지만, 제대로 작품을 바라보거나 읽거나 적는 글은 아닌 듯하다. 좀 아닌데 싶은 책조차 방방 띄우는 사진이 넘쳐난다.


이제 가을로 접어들고, 또 여러 문화재단에서 공모를 낼 텐데, 내 글을 다시 보내려고 생각해 본다. 뽑힐는지 안 뽑힐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꼭 보내어서 심사를 기다리고 싶다. 이곳에서는 나를 알아보려 하지 않을 수 있으니, 저곳으로 글을 보낼 수 있다. 이 만화책에서도 말하지 않는가. 떨어지고 또 떨어져도 다시 그리고 또 그려서 보낸다고. 떨어졌으니 주눅이 들거나 울기보다는, 붙을 때까지 다시 그리고 또 그려서, “이거 그리고 죽”도록 그린다고.




2024.09.23.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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