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 철학 - 씨앗에서 삶으로
변현단 지음 / 들녘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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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87 씨앗에서 삶으로



《씨앗철학》

변현단

들녘

2020.3.13.



뒷산을 내려오다가 나팔꽃씨를 네 알 따서 주머니에 넣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 창가 흙에 바로 놓았다. 흙을 살살 뿌려서 씨앗을 덮었다. 앞으로 나팔꽃씨는 어떻게 자랄는지 궁금하다. 싹이 트는 모습부터 지켜보고 싶다.


《씨앗철학》을 읽었다. 이 책은 뿌리기, 자람기, 맺기, 이렇게 세 갈래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올봄 개구리가 깨어나던 무렵에 한멧줄기(백두대간)에 간 적이 있다. 문학답사를 하는 모임에서 갔는데, 이때 나는 ‘씨앗집(씨드볼트)’라는 데를 멀리서나마 보고 싶었다. 볼 수 있을지 모임 분들한테 여쭈니, 다들 이곳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듯싶다.


날마다 먹는 밥을 돌아본다. 예전에는 밥을 버리기가 아깝다고 여겼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밥알도 씨앗 한 톨이라는 대목을 떠올린다. 어릴 적에 엄마아빠가 논밭을 지을 적에는 미처 느끼지 못 하다가, 요즈음 들어서야 새삼스레 되새긴다. 씨앗으로 깨어나서 나한테 밥이 되어 주는 쌀알을 고맙게 여기면서 박박 긁어서 한 톨도 안 남기고 먹는다.


《씨앗철학》은, 씨앗이나 사람이나 다르지 않다고 들려준다. 씨앗이나 내 몸이 다르지 않다고 한다. 씨앗이 살아가려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뿌리를 내리지 못 하거나 싹을 틔우지 못한 일도, 사람살이하고 마찬가지인 길이라고 한다. 우리가 옛마을(고향)을 품고 살듯이 씨앗도 처음 자라던 때를 품는다고 한다. 씨앗을 받아서 건사하는 할머니는 맛 때문에 씨앗을 이었다고 하는데, 곰곰이 보면 모든 시골집은 다 다른 씨앗을 품으면서 살림을 한 셈이다.


파프리카를 손질하다 보면 씨앗이 참 많이 나온다. 그동안 파프리카씨는 그냥 버렸지만, 어쩌면 싹틀는지 모르기에 흙에 묻어 보기로 한다. 싹이 터 줄까?


나팔꽃씨도 묻고, 파프리카씨도 묻고서 생각한다. 이 작은 씨앗처럼, 나는 우리 집 세 아이한테 어떤 마음씨하고 꿈씨를 심었는지 돌아본다. 그리고, 나는 어릴 적에 내 마음에 어떤 말씨하고 꿈씨를 심었을까?


씨앗에서 말이 태어난다. 씨앗이 흙을 비집고 나와서 바람을 마시고 해를 받아들이듯, 내가 마음에 심는 말도 바로 아이들하고 나한테 스며서 싹트는 기운이지 싶다.


집에서 짝꿍하고 말을 섞다 보면 으레 엇갈리거나 다툰다. 즐겁게 하자는 마음보다는 자꾸 토를 달거나 퉁을 치면서 힘이 빠진다. 짝꿍한테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이 있다고 들려주어도 안 달라진다. 스스로 안 즐겁게 자르거나 쳐내는 말씨를 마음에 심으면, 될 일도 안 되지 않을까. 일이 답답해서 아무 말이나 나올 수 있지만, 일이 답답할수록 더 마음을 기울여서 말 한 마디를 할 노릇이라고 본다.


요새는 살림집이나 비닐집 모두 철을 잃어간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니, 철을 알 턱이 없다. 씨앗도 사람도 삶과 마음을 잃어버리고 잊어가니, 말도 흔들리거나 엇갈릴 수 있겠다. 책을 덮고서 다시 생각한다. 짝꿍이든 누구이든, 아무렇게나 문득 읊는 말이 있어도, 나부터 씨앗말을 가다듬어서 들려주자고. 나부터 스스로 풀꽃나무로 살자고.




2023.11.26.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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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유교수의 생활 5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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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86 입만 아팠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 5》

아마시타 카즈미

소년 매거진 찬스 옮김

학산문화사

1997.3.15.



《천재 유 교수의 생활 5》을 새해 첫날에 펼쳤다가 덮고서 다시 펼친다. 유교수는 딱히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늘 마음을 열고서 생각을 펼친다. 스스로 곰곰 생각하고 스스로 눈을 뜨고 알아가는 그림을 보여주는데 대단한 끌린다. 가끔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답답할 때 이 책을 펼쳐놓는다. 유교수라면 내가 부딪히는 일을 어떻게 맞설까 하는 생각으로 바라본다.


유교수는 뉴스를 보다가 아나운서가 한 말을 따진다. 시나 삶글이라면, 주어를 바로 쓰면 꼬이지 않는다. 신문글은 주어를 흐리거나 조사를 빼서 큰 글씨로 눈에 띄게 올린다. 궁금해서 눌러 보도록 하는 미끼나 덫인 셈이다. 엉터리로 올리고 뼈대로 제목에 쓴 말을 하고 또 하면서 칸을 가득 채우는데 알맹이는 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이 여섯을 가장 잘 드러내야 할 신문이 아닌가 싶다. 나도 고쳐야 하고.  


딸아이 남자친구는 말도 불쑥불쑥 뱉고, 사내여도 머리를 기르고(요새는 사내도 누구나 머리를 기른다지만, 이 만화책이 나오던 때를 생각하면 보기 드문), 코걸이 귀걸이를 하고, 튀는 옷을 입지만, 유교수는 막내딸 남자친구를 겉모습으로 가누지 않는다.


막내딸 남자친구는, 이이가 사랑하는 아가씨네 아버지인 유교수가 걸림돌인 줄 알았는데, 막상 유교수네 집까지 찾아가서 마주하는 동안, 걸림돌은 유교수가 아닐 수 있다고 느낀다. 가만히 보면, 유교수 걸음걸이를 네 딸이 고스란히 따라한다. 걸음걸이뿐 아니라 마음도 매무새도 똑 닮았다. 반듯하게 걷고 깊이 생각하는 아버지처럼, 네 딸이 반듯하게 걷고 깊이 생각한다.


어느 날 유교수는 고양이한테 전갱이를 건네면서 뼈를 발라 주는데, 유교수 짝꿍은 ‘고양이한테 전갱이구이를 그대로 주면 소금을 많이 먹어서 죽는다’고 나무란다. 유교수는 이 말을 처음 듣는다. 여태껏 모르던 일을 처음 마주하는 유교수는 걱정에 휩싸인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한 끝에, 전쟁이를 삶아서 소금을 빼내면 되겠거니 여기고, 한참 품을 들여서 고양이한테 전갱이구이를 전갱이삶이로 바꾸어서 내준다.


늘 같은 시간에 담 너머로 지나가는 유교수를 보는 마을 할머니가 있단다. 이 할머니는 창밖으로 보이는 그림에 함께 들어가고 싶다. 집에만 있다가 밖으로 나와 보는데, 유교수하고 문득 말 한 마디를 섞고 나서 할머니네 집을 다시 바라볼 적에 이 집도 참 좋은 줄 비로소 알아차린다. 유교수는 유교수대로 마을 할머니 한 분을 알아보고 말을 섞은 뒤로는, 이 집 앞을 지날 적에 단출히 마주하고서 지나간다. 할머니는 유교수하고 이런 토막틈을 나눌 수 있는 삶이 기쁘다.


학교에서 학생이 가장 많이 듣는 교수가 강의하는데 한 학생이 재미없다고 말했다고 달뜬 말투로 털어놓았다. 유교수는 “적어도 그 학생만은 수업을 들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어째서 그 학생에게 화를 낼 필요가 있습니까?” 하면서 ‘학생은 훌륭한 연구자료’라고 말한다. 그날 그 교수는 처음으로 한 학생을 새롭게 알아보았다. 


유교수는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한결같이 사람 사이를 ‘경제’로 생각한다. 유교수는 경제학과 교수이다. 어떤 길이 살림 밑천이 되고 나아지는 길인지 술술 풀어 간다. 이제 만화책을 덮는다. 뭔가 북받쳐서 어느 곳에 전화를 한다. 우리한테 돌려줄 돈이 있는데 마흔 날이 지나도록 감감한 곳에 따따부따 쏘아붙이는 말을 한다.


전화를 끊고서 아차 싶다. 그들이 제때에 돈을 돌려주지 않을 듯하고, 이자를 붙여 주지도 않을 듯한데, 입만 아픈 말을 굳이 했구나. 뭔가 유교수처럼 어질게 한마디 해줄 수 있을까 싶었으나, 나는 유교수가 아니네.



2024.3.20.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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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독 - 세계문화예술기행 1
박완서 지음 / 학고재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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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85 써주는 글보다는


《모독》

박완서 글

민병일 사진

학고재

1997.1.25.



《모독》은 2018년에 처음 장만했다. 그때 나는 일에 묶여 살았다. 일기도 쓰지 못했다. 집밖이며 나라밖이며 아무튼 바깥이 몹시 궁금할 때 장만했다. 박완서 님은 유럽과 아시아를 가리지 않고 찾아다닌 듯하다. 다 다른 곳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서 꽃을 피운 아름다운 이야기를 쓴다. 빼앗고 빼앗기며 싸우던 숱한 슬픔이 깃든 여러 나라를 기웃기웃하는 이야기를 쓴다.


그런데 이 책을 쓴 박완서 님은 ‘여행을 다녀와서 글을 써주기로 하고 따라가’는 나들이였다고 한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여러 나라를 다녀온 셈이다. 게다가 사진사가 붙으니 굳이 품을 들일 일도 없고, 짐도 가벼웠겠지.


티베트는 어떤 나라일까. 글과 사진으로 보자면, 풀이 없고 먼지가 자꾸 일고 높직한 땅이라는데, 한때 집짐승을 키우며 떠돌다 머문 사람들이 불교에 몸을 담고서 마음을 닦는 사람들이 거쳐 가는 곳이라는데, 그곳은 언제부터 사람들이 바닥에 온몸을 엎드려 절을 하면서 나아가는 곳이 되었을까? 이제 티베트라는 나라는 없이 중국이 집어삼켰는데,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무척 궁금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책으로는 이 궁금한 곳을 하나도 풀지 못한다.


《모독》에 나오는 티베트 사람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본다. 티벳사람이랑 우리랑 그리 다르지 않다. 그리 멀잖은 우리 할매 할배에, 예전 사람들 모습을 닮았다. 꾸미지 않는 얼굴에 차림새이다. 햇볕을 고스란히 받아 그을렸다. 


보고 자란 탓일까. 큰 나라에 가려져 나라 밖으로 나아 가지 못하고 억눌린 삶이 시간을 멈추어 놓았을까. 총칼에 쉽게 무너져 내렸을까. 풀꽃나무보다 광물이 넘치는 나라 못잖게 번쩍번쩍 번쩍하는 불상 이야기가 흐른다. 


《모독》에서 205쪽을 가득 채운 사진에 빨려든다. 옷이나 귀걸이나 목걸이나 구슬이 아닌, 얼굴빛에 빨려든다.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이 웃는다. 웃는 밭고랑에서 빛이 나온다. 온통 하얗게 바르며 꽃처럼 꾸미는 아가씨나 여왕한테서는 도무지 볼 수 없는 웃음빛이다. 사람으로서 살아오면서 해와 바람과 비를 맞아들여온, 살림하는 사람이 뿜어내는 빛이다.


책이 나온 지 스무 해 남짓이라지만, 글이나 사진이나 줄거리가 묵었다기보다는, 어쩐지 속은 듯한 글과 사진이지만, 돈 한 푼 안 들이고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고서 “써 주는 글”이라지만, 주름살을 녹여내는 웃음 하나가 마음으로 스민다. 어쩌면 이 모습을 먼발치에서 사진으로 만나려고 이 책이 나한테 왔을 수 있다.


나도 언젠가 여러 나라를 돌아보고 싶다. 나는 스스로 번 돈으로 찾아가고 싶다. 무겁더라도 사진기도 손수 챙겨서 찍고 싶다. 내 발로 딛고, 내 어깨에 지고, 내 눈으로 보고, 내 마음으로 느낄 적에, 비로소 나다운 글이 태어나리라 본다.


집도 삶도 숲을 살피면서 살아가기에 웃음빛이 태어난다면, 내가 볼 곳과 나아갈 곳은 아주 환하다. 이 봄날에 봄볕을 듬뿍 머금자. 마을을 걷고, 마을 둘레부터 느껴 보자.




2024. 3. 22.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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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유교수의 생활 4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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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84 책을 보듯이



《천재 유교수의 생활 4》

야마시타 카즈미

신현숙 옮김

학산문화사

1997.2.25.



《천재 유교수의 생활 4》은 아줌마와 학생과 애인과 노인과 고양이를 바라보는 눈길을 다룬다. 유교수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사람을 만나면서 생각을 얻는다. 달려가는 학생을 앞지르면서 ‘앞의 풍경’을 보는 기쁨을 얻고, ‘뜨거워진 손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앞에 펼쳐진 모습을 만나는 책읽기’를 하자고 다짐을 한다. 나이든 분을 만나 말동무가 되어 주면서 ‘오늘 이곳에서 배우고 즐기’는 하루를 살자고 여긴다.


가게에 가서 품을 들여 무를 고르면 곧잘 다른 아줌마가 끼어들어 낚아채곤 한다. 모든 아줌마가 이러지는 않을 텐데, 이렇게 밀치는 아줌마가 하는 짓을 보면, 이분은 둘레도 안 쳐다보지만 그분 마음속부터 안 들여다본다고 느낀다. 그런데 값싸게 뭘 사더라도 다른 데에서 흥청망청 쓴다면, 무 한 뿌리를 싸게 산들 무슨 이바지를 할까.


큰가게에 가 보면 줄을 길게 서서 더 싸게 사려는 사람들이 물결친다. 나는 이런 긴줄을 보면 돌아나온다. 왜 줄까지 서면서 더 싸게 사야 하는지 모르겠다. 기다리는 품이 아깝고, 기다려서 싸게 살 바에야 다른 것을 장만해서 일찍 집으로 가는 길이 낫다고 여긴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 4》에 나오는 아줌마는 돈도 품도 나와 다르다. 만화책에 나오는 아줌마는 남이 사려는 걸 빼앗듯이 산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도 스스로 어떤 걸 골라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옷집에서 더 그렇다. 주머니가 넉넉하지 않으니 값싸게 사고 싶다. 아이 옷을 고를 적에는 일꾼한테 골라 달라고 여쭈었다. 어떤 가게에서는 남들이 무얼 사서 먹는지 살펴보다가 덩달아 살 적도 있다. 


열 해 남짓 작은가게를 꾸리는 동안 싸게 팔지 못했다. 가게를 차릴 적에 처음에는 크게 알리려고 ‘에누리’를 하지만, 일꾼한테 치르는 품삯부터 만만찮고, 또 잔뜩 떼어와서 잔뜩 팔지 않으면 남지 않을 테니 잔뜩 들일 수 없는 살림이라서, 큰가게처럼 싸게 팔 수 없었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 4》에서 유교수가 기차에서 책을 읽는 모습을 둘러싼 이야기가 재미있다. 유교수는 그저 느긋이 책을 빌려읽으려고 기차를 탔을 뿐인데, 한 사람은 유교수를 물끄러미 보면서 ‘내가 책이고 저렇게 날 봐주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그사람을 이렇게 사랑스레 바라보았던 때가 있었던가?’ 하고 돌아본다. 이렇게 속으로 다르게 생각하던 두 사람은 기차에서 내리면서 마음을 고쳐먹는다. 남이 뭘 해주기를 바라기 앞서, 스스로 눈빛부터 바꾸기로 한다.


유교수는 ‘책을 넘길 적마다 내 인생 앞에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기에 책을 계속 읽을 것이다.(38쪽)’ 하고 말한다. 나도 책을 펼 적마다 내 앞에 새모습과 새빛이 반짝반짝 드리울 수 있는 오늘을 살아가고 싶다. 나도 내 둘레 모두를 따스하고 깊고 사랑스레 바라보는 눈빛이고 싶다.



2024. 3. 4.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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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말이 들리나요? - 숲으로 떠나는 작은 발견 여행 지식은 내 친구 18
페터 볼레벤 지음, 장혜경 옮김 / 논장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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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83 서로 들려주는 말


《나무의 말이 들리나요?》

페터 볼레벤

장혜경 옮김

논장

2020.6.15.



《나무의 말이 들리나요?》는 숲이 집인 나무가 살아가는 이야기가 흐른다. 숲에 몸을 숨기며 먹고사는 짐승과 벌레 이야기가 나온다. 나무가 뿌리내린 바닥에서 버섯이 하는 일을 다루고, 나무에 깃드는 새 이야기를 두루 다룬다.


짐승과 새도 말을 하고 짝을 찾는다. 사람들은 새가 하는 말을 울음으로 여긴다. 나무는 나뭇잎으로 냄새를 퍼뜨리고, 나무냄새는 바람을 타고서 먼 이웃나무한테 스민다. 땅밑에서는 뿌리끼리 서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뭇잎이나 나무뿌리가 주고받는 말을 알아듣지 못 하기 일쑤이다.


도시에 집이 잔뜩 들어서고 찻길을 닦느라, 숲이 야금야금 잘리고 사라진다. 숲에 사는 나무를 도시 한쪽에 옮겨심고서 공원을 꾸민다. 찻길을 따라서 한 그루씩 드문드문 심은 나무는 외로워 보인다. 잿빛이 가득한 높다른 마을에는 나무를 조금 심어서, 사람도 쉬고 새도 깃든다.


겨울이 떠나고 봄이 찾아오는 3월에, 나라 곳곳에 꽃구경 이야기가 올라온다. 오늘 수목원에 가 보았다. 잎을 떨군 가지에 갓 새싹이 눈을 틔우는 나무가 몇 있다. 며칠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 왔는데, 이 찬바람에 움츠리는데, 손이 시린 추위인데, 매화는 꽃망울을 맺는다. 더 따뜻할 때 피워도 좋겠다고 여기지만, 매화는 해마다 이런 찬바람 부는 날을 골라서 꽃을 내놓는다.


땅바닥에서도 풀꽃이 오른다. 누가 먼저 깨어나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나란히 올라오리라. 풀꽃이 피고, 나무꽃이 핀다. 나무꽃이 피고, 풀꽃이 핀다.


털옷을 입은 할미꽃이 나온다. 노랗게 복수초가 나온다. 풀꽃이 돋는 봄이면, 맨흙을 밟을 수 없다. 자칫 내 발바닥에 새싹이 뭉개질까 걱정스럽다. 멧길을 거닐더라도 바닥에 어떤 풀꽃이 있는지 살핀다.


"나무는 누가 나뭇잎을 뜯어 먹는지 알고 껍질이나 가지에 물린 자리에 쓴맛을 내거나 독을 흘려 보낸다. 다친 나무는 이웃나무한테 "딱정벌레야, 조심해"라고 소리지는데 말을 냄새로 한다.(30쪽)" 같은 대목을 돌아본다. "같은 나무가 아니면 이야기를 주고받지 못한다.(31쪽)" 같은 대목도 되새긴다. 《나무의 말이 들리나요?》에서 짚기도 하지만, 참말로 나무도 다 알리라 본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무도 풀꽃도 냄새가 말이지 싶다. 바람은 나무가 하는 말을 태워서 나누어 준다. 아니, 베푼다. 바람은 풀꽃말도 실어서 퍼뜨린다. 아니 베풀어 준다.


대구 시내를 걸을 적마다 길거리에 있는 나무를 보면, 나무가 아파서 끙끙 앓는 소리를 듣는다. 멧골집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그런지, 숲나무를 보거나 길나무를 볼 적에, 어쩐지 마음으로 나무말이 스며든다.


나무를 가만히 보면, 줄기와 껍질과 가지로 말을 건넨다. 잎과 꽃으로도 말을 들려준다. 버즘나무도 벚나무도 다 다르게 말을 건넨다. 사람들이 나무에 건 걸개천으로 앓는 말을 들려주고, 거리에서 나무에 매단 쇳덩어리 탓에 아프다는 말을 뱉는다. 뿌리를 뻗을 틈이 없는 길바닥 때문에 고달프다는 말도 한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작 손바닥을 펴서 나무줄기를 쓰다듬는다. 손바닥으로 줄기나 가지를 가만히 어루만지면서 속으로 말을 건넨다. 기운을 내라고, 해를 보라고, 속말을 들려준다.


숲에 가면, 나무가 지르는 소리를 곧잘 듣는다. 삑삑거리는 소리에 놀라서 두리번거리면, 나무끼리 붙어서 바람에 흔들려 부딪치는 소리 같지만, 천천히 쓰러지면서 내는 앓는 소리 같다. 어느 나무는 마치 엄마나무처럼 작은나무를 받친다. 어느 나무는 마치 엄마한테 안기듯 살살 감거나 기댄다.


《나무의 말이 들리나요?》는 "한 그루 나무가 너도밤나무에 에워싸여 있다면 참나무는 겁에 질러 벌벌 떤다.(40쪽)" 하고도 들려준다. 홀로 자라는 나무는 두렵거나 무서울 수 있다. 그러나 나도 나무도 굳이 둘레에 휘둘릴 까닭은 없다. 숱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힘들게 일을 마친 저녁에도, 그저 나를 바라보면 될 노릇이라고 본다.


나무는 온몸으로 말을 한다. 바람이 거들고 비가 돕는다. 우리가 잘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나무는 말을 한다. 나도 나무한테 말을 한다. 나무가 부디 기운을 차리기를 바라면서 손바닥으로 입술로 마음으로 말을 들려준다.



2024. 3. 4.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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