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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우울 -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 우울의 모든 것
앤드류 솔로몬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한낮의 우울이라니. 원제는 Noonday Demon - 한낮의 악마 - 는 4세기 신비주의자 에바그리우스가 수행자를 괴롭히는 우울증을 칭한 말이다. 대부분의 악마(고뇌)들이 밤의 어둠을 틈타서 찾아들며 그것들을 분명하게 "보는"것만으로 쳐부술 수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눈부신 햇살아래 당당하게 서 있으며 똑바로 마주해도 끄떡도 하지 않고 우리를 더욱 무력하게 만드는 우울증에 대한 명쾌한 묘사다. 우울증처럼 지독하게 사람을 괴롭히면서ㅡ 좀처럼 잡히지 않는 병이 또 있을까.
우울증이 천재나 예술가들의 당연한 특성/일종의 특권처럼 여겨지던 때도 있었지만ㅡ 정신의학자나 우울증환자에게 그것은 분명 치유해야 할 "병(그것도 매우 끔찍한!)"이다. '몸'의 병과 달리 '마음'의 병이라 인식되는 경우가 많지만 대개 우울증은 현저한 뇌손상을 수반한다. (초기에는 뇌의 특정 영역이 비활성화되기 시작해서, 장기간 지속되면 그 부분이 점점 수축하는 비가역적 뇌손상이 일어난다.) "우울증에 반대한다"의 저자 피터 크레이머는 여러 항우울제의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중증 우울증환자는 최대한 빨리 치료(대개 항우울제 복용)해서 영구적 뇌손상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여러번에 걸쳐 심각한 우울증삽화를 겪었고 현재도 늘 재발의 위험때문에 몇가지 우울증약에 의존하지만 약들의 부작용보다 우울증 재발이 더욱 끔찍하다며 약 복용을 정당화한다. 마치 고혈압 환자가 혈압약을 꾸준히 복용하는 것처럼
완전한 신체의 병도 없고, 완전한 마음의 병도 없다. 잠시 기분이 가라앉는건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고 딱히 문제될것도 없지만 몇달 혹은 몇년간 저조한 기분이 계속되는 우울증은 거의 몇 가지 신체증상 - 피로, 불면, 메스꺼움, 면역력 저하 - 등을 수반한다. (우울증 상담을 주로 하시는 선생님말씀이, 우울증환자는 특유의 '체취'가 있댄다.) 뇌의 화학물질 변화는 호르몬 분비도 교란시켜 전신이 망가지는데, 거기다 우울증에 적지않게 나타나는 '자해'까지 이루어진다면 그야말로 몸 전체가 '만신창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울증은 사회적으로 다른 '병'처럼 당당하지 못하다. 심장병이나 암에 걸린 사람이 치료받는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우울증 치료를 받는것은 무언가 비정상적인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점점 나아지고는 있지만)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말이 종종 공포영화에나 나옴직한 싸이코나 광기로 가득한 (속된말로 '미친') 기피대상 1호라는 말처럼 들릴까봐 환자는 더욱 움츠러든다.
저자도 지적하고 있지만 현재 우울증치료는 거의 약물치료위주다. 의사들이 주로 제약회사를 통해 최신 뉴스를 접하기 때문에 (제약회사의 의도대로)신약에 대한 접근성은 매우 높지만 비약물치료에는 취약하다. 다른 만성병 약들과 마찬가지로 항우울제는 한번 먹기시작하면 계속 먹어야하는 경우가 많고 그에 따르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원칙적으로 모든 '약'은 일종의 '독'이므로 급할때 쓰고 장기적인 치료로는 다른방법 - 상담, 운동, 명상, 영양섭취 등 - 위주로 가야하겠지만, 츄잉껌처럼 모든 사람들이 먹는 약을 만드는것이 목표인 제약회사에게는 별로 반갑지 않은 일이다. (사실 우울증을 두고 마음이 아니라 '뇌'에 문제가 있는것으로 몰고가는것도 약을 팔기위한 제약회사의 전략이다. 이에 대해선 '질병판매학' 참조) 적절한 운동이나 일정시간 빛을 쬐는 것, 균형잡힌 식사를 통해서도 기분변화는 물론 신체불균형도 어느정도 조절할수 있지만 생활습관 개선이라는 '근본적인 치료'는 상품가치가 없기에 약 몇알을 먹는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인식을 만들어낸다. 이런 방법을 권장하는 의사는 '대체의학'이라며 주류의학계에서 무시당하기 일쑤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이 해보았던 온갖 치료방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대체의학도 많고 심지어 수평아리와 숫양을 제물로 바치는 신앙의식까지 나온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러고 보니 몇년 전 한 신문에서 절반 이상의 한국 여성들이 우울증이라고 느낄때 정신과의사보다는 점집을 찾는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그 중 EMDR(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요법. 부정적인 기억이 주로 우뇌에 맺히기 때문에 한쪽으로 편향된 뇌를 좌우안구의 교차자극을 통해 균형을 맞춰준다는 원리)을 이용한 우울증치료는 외상에 의한 우울증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며 적극 추천한다. 정신분석 등이 외상을 초래한 사건들을 파고들어 마주하게 한다면 EMDR은 특정 사건에 사로잡힌 사람을, 그 기억에 무뎌지도록 '떨어뜨려'주기 때문에 빠르고 직접적인 반응을 촉진시킨다. 얼마전 EMDR에 관한 입문서가 한국에도 번역되었다.(EMDR. 문이당. 2008) 한국의 우울증치료 역시 약물치료 위주고 상담은 대개 형식적인 수준(대학병원에서, 15분 상담에 10만원선인데, 그나마도 7~8분밖에 안한다나)에 그친다. 저명한 정신과의사의 말로는 한국에서 제대로 된 상담치료가 가능한 의사는 10명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의료 역시 '수익성 높은 상품'이 된지 오래다.
쏟아지는 심리학 서적들을 보면, 부정적인 면에 초점을 두지 말고 사물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라는 조언이 많다. 이것은 반은 유효하고 반은 헛소리다. 어느 누구에게도 좋은일만 일어나진 않는다. 오히려 삶이 슬픔이 존재하는것ㅡ 슬프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것이 현실적이다. 일상에서 작은 즐거움들을 발견하는것은 분명 의미있지만 외면한다고 슬픔이 없어지는것은 아니다. 슬픔/고통에서 벗어날수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어떤 슬픔/고통이라도 그 자체로 인간을 죽이지는 못한다. 이 책의 많은 주인공들이 상상 이상의 고통을 겪고도 어찌어찌 빠져나올수 있었던 힘은 희망찬 낙관이나 조작된 희망이 아니다. 그들 대부분은 우울증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속을 지나간다는 것임을 겪어왔고 언젠가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것 역시 알고있지만 그 덕택에 인생의 다른 부분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은 내용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참고문헌을 포함해 700페이지가 넘는다. 그만큼 우울증과 관련되는 거의 모든 주제를 다룬다. 저자가 의사는 아니지만 여러번 우울증 삽화를 겪으며 스스로 공부했는지 (꽤 무게있는) 의학적 내용들도 많고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 환자들의 생생한 사례들이 가득해 가히 '우울증에 대한 미니 백과사전'이라 할만하다. 개인적인 경험들이 다수지만 이를 사회구조/정치와 연결시킨 9, 10장이 특히 마음에 든다. 9장은 삶의 고뇌때문에 우울증에 더 취약하고, 역시 경제적 문제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저소득층의 악순환을 짚고10장은 제때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찾아가는 의료서비스에 관한 정책/관련단체들의 로비/우울증 예방치료정책의 효용성등을 다룬다. 미국이 사회보장제도가 미비하다고는 하지만 그나마도 제대로 되지 않는 한국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경제적 논리를 이유로 우울증 예방에 소극적인 의회를 겨냥해 우울증 예방에 들어가는 예산보다, 우울증으로 인한 사회적 손실이 크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때로는 인권존중 운운하는것보다 실질적인 이익/손해로 접근하는것이 더 효과적이니까.
우울증은, 전염되기도 한다. 이 책을 처음 잡은게 3월 중순께였는데ㅡ 책을 펼칠때마다 마주하는 당혹스러움에 한동안 덮어두고 있었다. 실제로 얼마동안 책의 주인공들처럼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지기도 하고ㅡ 이 책이 우울증환자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런 고통을 안고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서 위안을 받을것이다. 정신과 의사나 상담가가 쓴 책은 어쩔수 없이 환자를 '관찰'하고 '처방'을 내리지만 이 책은 철저하게 환자중심이다. 우울증을 '보는'것이 아니라 우울증에게 귀를 기울인다. (하여 쉽게 감정이입/전이가 된다.) 물론 이런 중증 우울증환자는 흔하지 않고, 그것을 이겨내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지만ㅡ 주변에 우울한 친구가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할 것이다. 더욱 깊은 나락에 빠져서ㅡ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터득하라고.
책 끝머리에서 저자는 말한다. "나는 타인들에게 닿을 수 없는 것이 싫다" 우울증때문에 생의 밑바닥까지 가보았지만 그로 인해 (우울증이 아니었으면 받지 못했을) 엄청난 관심과 사랑을 받았고 다른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터득했다고 말하며 고통받고 있는 다른사람을 돕고자 애쓰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은가? 끔찍한 우울증 삽화 뒤에 자기와 비슷한 고통을 겪고있는 사람들을 돕고있는 많은 사람들의 예는 우울증이라는 경험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고통이 인간을 성숙하게 한다면, 고통없는 세상을 바라는 인간의 욕망은 어쩌면 지극히 위험한 것일지도 모른다. 삶의 고통은 상당수가 선택의 범주를 벗어나 있지만 그를 받아들이는 스스로의 반응은 선택할 수 있다. 망가질대로 망가진 현 사회의 모습은 인간의 선택이 빚어낸 참혹한 결과지만 아직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