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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 풍경 1 - 보나르 풍의 그림에 담긴 ㅣ 서정적 풍경 1
복거일 지음, 조이스 진 그림 / 북마크 / 2009년 3월
평점 :
사회평론가 복거일의 눈은 냉철하고 날카롭지만 그의 산문(散文)은 운치 있고 부드럽다. 그의 글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나기는 처음이다. [서정적 풍경, 보나르 풍의 그림에 담긴]은 사회평론가라는 작가에 대한 선입견을 산산히 부순 책이다. 나에게 복거일은 소설가라는 이미지보다 평론가라는 이미지가 더 강하다. 작가에 대한 강한 이미지를 새롭게 해준 이 책은 수필 속에서 시를 음미할 수 있고 시를 통해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책이다. 작가의 손에 붙들린 시는 명쾌하게 해석되고 신비의 베일을 벗는다. 머리를 갸우뚱 거려보아도 알 수 없던 아득한 시의 세계를 수필 속에서 알기 쉽게 녹여내고 있다. 어렵던 시들이 작가의 능숙한 솜씨에 의해 따뜻한 시로 살아나기도 하고 아련한 향수를 불러오기도 한다. [서정적 풍경, 보나르 풍의 그림에 담긴]은 간결한 문체로 작가의 속 깊은 내면과 세상을 향한 나직한 물음을 던지며 시와 수필의 사이를 한 땀 한 땀 바느질 하듯 간격을 좁혀간다.
[서정적 풍경, 보나르 풍에 담긴 그림]은 제목 그대로 서정적인 시와 냉철한 사고가 보나르 풍의 그림으로 한데 어우러져 부드러움을 더해준다. 보나르 풍의 그림은 저자의 딸이 맡았는데 차분하고 따스한 분위기의 그림이 서정적인 글을 돋보이게 하고, 글은 그림을 한껏 살려주고 있어서 책에 실린 시는 더욱 빛을 발한다. 서정주, 이육사, 박목월, 윤동주, 마종기, 박성룡, 김소월, 노천명, 김광섭, 김춘수, 조지훈, 황동규, 황인숙, 김수영, 변영노, 이수복 등의 국내 시인들과 멀리는 송나라 시인 육유(遊)에서부터 윌리엄 워즈워스, 휘트먼의 시들이 소개된다. 대부분 교과서에서 만난 시인들, 혹은 이미 고인이 된 시인들이 주를 이루어서 읽는 동안 아련한 향수에 젖었다.
특히 어려운 시절을 살다 쓸쓸하게 죽은 노천명의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는 오래된 흑백사진을 보는 듯한 감상에 젖게 했다. 시어 자체도 어릴적 외가의 시골집을 연상하게 하지만 시에 얽힌 나의 빛바랜 추억이 되살아나서 손때묻은 사진첩을 넘기는 기분이었다. 오래 전 노천명 시인의 이 시를 외우며 나도 시인처럼 어지러운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어줍잖은 마음을 품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마음 뿐이었고 나는 도시를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어린 날 치기어린 마음과 그날의 감흥이 되살아나 살며시 눈을 감고 시를 외우다 말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금 내가 산골에 들어와서 텃밭에 오이랑 호박을 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산골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풋내기때 가졌던 그 마음이 이루어진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분명한건 어지러운 세상을 떠나고 싶어했던 쪽은 내가 아닌 남편이라는 것이다.
직업의식을 지닌 사람에게는 어떤 직업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글은 감동을 준다. 나이가 들수록 담백한 시들에 끌린다는 내용과 여행에 대한 생각에서는 '다 그렇구나'하는 닮은꼴을 발견했다. 시를 읽는 저자의 마음이 참 맑고 깊다, 같은 시를 읽어도 시의 참맛을 모르는 나에겐 더없이 친절한 책이나 저자의 시를 읽는 능력은 질투날 정도로 그윽하다. 그의 간결하고 정갈한 문체도 베끼고 싶을 정도로 탐난다. 얼굴을 간지르는 따사로운 봄바람을 받으며 읽기에 제격인 책을 만나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