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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코의 지름길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3
나가시마 유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그림이든 음악이든, 책이든 영화든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을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다. 이런 경향은 해가 지날수록 점점 심해지는 것 같다. 깜짝 이벤트로 순간적인 즐거움을 맛보는 것 보다 일상에 숨어 있는 작은 기쁨을 더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나이가 가르쳐 준 것도 같다. [유코의 지름길]은 자칫 무료할 정도로 평범한 이야기를 그리는 연작소설이다. 특별한 주제나 돌발적인 사건사고도 없고 갈등 구조도 없이 어제 같은 오늘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책을 읽노라면 마치 미풍에 실려오는 풋풋한 봄내음을 맡는 느낌이다. 자극적이지 않은 순수한 자연의 냄새는 읽는이에게 편안함과 여유를 선물한다.
[유코의 지름길]은 일본에서 두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극찬한 작품으로 제 1회 오에 겐자로부상 수상작이다. 우리에게는 행동하는 지성인, 양심 있는 학자로 알려진 오에 겐자부로가 뽑은 책이라는 기대와 호기심으로 책을 열었다. 책은 후라코코라는 서양 앤티크 전문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웃들의 소소한 일상사를 섬세한 필체로 그리고 있다. 나이나 과거를 도통 알 수 없고, 이름까지도 알 수 없는 정체 불명의 '나'는 골동품 전문점 후라코코에서 일하면서 2층의 창고 대용 방에서 생활한다. 이 연작 단편집은 정체 불명의 '나'가 반 년 남짓한 동안 후라코코에서 보낸 일상과 '나'와 관계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책의 도입 부분은 아무 맛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담백해서 사실 지루하다. 소설 속 화자 '나'는 이야기가 한참 진행될 때까지도 성별이 애매모호 하기도 하다. 주인공'나'와 관계된 사람들은 동문서답 잘하는 점장 미키오, 물건은 사지도 않으면서 골동품점을방문하며 머물다 가는 별거 중인 미즈에씨, 건물주의 딸인 미대생 아사코, 표지에 실린 발랄한 고등학생 유코, 점장의 옛 애인 프랑수아즈가 등장한다. 후라코코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 중 시선을 끄는 일은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나'에게 고백한 유코가 어느 날 임신한 사건이다.
반면 나에게는 이 책이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독서를 통해 유익함을 찾고 교훈을 찾아 밑줄을 그어야만 뿌듯해하는 나에게 밋밋한 이 책은 진정한 독서의 즐거움과 느림의 미학을 가르쳐준다. 소설 속에서도 명확한 교훈을 찾아내기에 급급한 책읽기 대신 소소한 일상을 좇는 기쁨과 작가의 섬세한 표현을 느긋하게 즐기며 여유롭게 읽었다. 반전도, 미스테리도,갈등도 없는 맹물 같은 이야기를 가지고도 마치 눈 앞의 그림을 보듯 선명하고 섬세하게 그려내는 작가의 노련함이 놀랍다. 건조한 일상을 간결한 문체에 담아 특별함으로 풀어내는 작가의 능력이 오에 겐자부로상을 거머쥐게 한 것 같고, 자자 나가시마 유의 가장 큰 특징이다.
<아사히 신문>이 저자를 가리켜 "문학의 새로운 문이 조용히 열리려고 한다.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기발한 문체도, 근미래적인 리얼리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담담한 일상을 경쾌하게 그리면서 그는 새로운 시대의 공기를 열어가고 있다."고 말한 것은 나가시마 유의 문체를 단적으로 표현한 평이다. [유코의 지름길]은 심심한 소설이나 느림이 주는 편안함과 안락함이 있는 행복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한 박자 쉬어가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