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 - 카타 우파니샤드 - P7
지금껏 이렇게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소설을 시작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이 글을 소설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단지 마땅히 붙일 다른 이름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줄거리다운 줄거리도 별로 없고 결말이 죽음이나 결혼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죽음은 모든 것을 끝내며 따라서 포괄적인 결론이다. 결혼 역시 꽤 괜찮은 마무리 방식이지만, 고상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해피엔딩이라 부르는 것을 비웃어야 한다고 경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결혼으로써 이제 필요한 이야기는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정상적인 본능이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면 그들은 생물학적 임무를 완수한 셈이고 이제 관심은 그 다음 세대로 넘어간다. - P9
이 책은 내가 이따금 만나서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한 남자를 회상한 내용이다. 나는 그가 나와 만나지 않았던 기간에는 어떤 일을 경험했는지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나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 기간에 있었을 법한 일을 그럴듯하게 꾸며 내 좀 더 조리 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다. 단지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이야기를 쓰고 싶다. - P10
오래전에 나는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을 썼다. 그 책에서 나는 유명한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삼았다. 그리고 내가 창조한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서, 소설가의 특권을 이용해, 그 프랑스 화가에 대해 아는 빈약한 정보들이 주는 암시를 토대로 많은 사건을 만들어 냈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허구로 꾸며 내지 않았다. - P10
조금 아까 나는 아무것도 허구로 꾸며 내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약간 수정해야겠다. 나는 헤로도토스 시대 이후 역사가들이 그래 온 것처럼 내가 직접 듣지 못한 말들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표현했다. 그렇게 한 것은 역사가들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일 그저 서술했다면 제대로 느낌을 살리지 못했을 장면에 생동감과 사실감을 더하기 위해서다. 나는 재미있는 책을 쓰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 그 정도의 융통성은 발휘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 P11
래리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저 얘기를 다 믿지는 마세요. 이사벨은 나쁜 여자는 아니지만 거짓말을 잘해요." - P39
어느새 우리는 미술관에 도착했기 때문에 자연히 관심도 그림으로 옮겨 갔다. 나는 엘리엇의 박학다식함과 예술적 안목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마치 관광객이라도 안내하듯 나를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데리고 다녔다. 그 어떤 미술교수라도 엘리엇만큼 훌륭하게 그림을 설명해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 P41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전 시행착오 따위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막다른 골목에도 들어가 봐야 제 목표를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자네 목표는 뭔가?" 그는 잠시 망설였다. "바로 그게 문젭니다. 아직 목표를 모르겠어요." 나는 마땅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잠자코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온 나로서는 몹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꾹 참았다. 나는 순간, 직감이랄까, 이 청년의 내면에서 어떤 혼란스러운 갈등이 요동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 P58
"난 증권 같은 걸 만지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어." "알았어. 그럼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거나 의학 공부를 하는 건 어때?" "아니, 그런 건 싫어." "그럼 뭘 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 P80
"말로 표현하기가 참 힘들어. 표현하려고 하면 혼란스럽기만 하고, 어떤 땐 이런 생각이 들어. ‘이런 것 저런 것을 고민하는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내가 거만하고 몹쓸 인간이라서 그런 걸지도 몰라. 나도 남들 가는 길을 가면서, 그럭저럭 세상사에 순응하면서 사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 말이야. 하지만 한시간 전까지만 해도 쌩쌩하던 녀석이 죽은 모습으로 누워 있던 게 떠올라. 그러면 모든 게 얼마나 잔인하고, 얼마나 무의미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인가, 산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삶이란 눈 먼 운명의 신이 만들어 내는 비극적인 실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 P84
이사벨은 특정한 방식으로 교육받으며 자랐고, 또 그러면서 배운 원칙들을 받아들이고 지키며 사는 여자였다. 부족함 없이 원하는 것은 늘 가지며 살았으므로 돈에 목을 매지는 않았지만, 돈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돈은 곧 힘과 영향력을 의미했고 사회적 지위도 의미했다. 남자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남자의 필생의 과업이었다. - P87
그리고 언젠가 한 번은 전투가 끝난 뒤에 프랑스 병사들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장면을 본 적이 있어. 그런데 마치 극단이 망한 후라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져서 먼지 가득한 구석에 쌓여 있는 꼭두각시 인형들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거야. - P89
"어쨌든 지금은 돌아갈 수 없어. 이제 막 뭔가 조금씩 보이려고 하니까.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정신세계가 나를 부르고 있어. 난 그 세계를 여행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해." "거기서 뭘 찾고 싶은데?" "내 의문에 대한 대답들." - P116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그런 질문을 던져 왔다는 것은 그런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해. 게다가 답을 찾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야. 다양한 대답들이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만족스러워하는 대답을 찾아냈어. - P117
"당신은 정말 너무 현실감각이 없어. 내가 뭘 원하는지 전혀 모른다구. 나는 아직 젊고, 인생을 즐기고 싶어. 남들이 하는 것들을 하고 싶단 말이야. 파티에도 가고, 춤추러도 가고 싶고, 골프도 치고 승마도 하고 싶어. 예쁜 옷도 마음껏 입고 싶고, 친구들처럼 멋진 옷을 못 입는 게 여자한테는 얼마나 속상한 일인지 알아? - P121
"한마디로, 시카고에 자리를 잡고 헨리 매튜린 씨의 회사에 들어가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거지? 거기서 일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주식을 사도록 만드는 것이 사회에 커다란 기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증권 브로커는 사회에 필요한 존재야.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직업이고."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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