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거구의 술고래한테서, 세상과 단절하고 사는 냉소적인 사내의 입에서 사물의 궁극적인 실체니, 신과의 합일에서 오는 행복이니 하는 얘기들이 나오는 걸 듣고 있으니 정말 묘한 기분이었어요. 전부 처음 듣는 얘기들이라 흥분도 되고 어리둥절하기도 했죠. 뭐랄까, 칠흑처럼 깜깜한 방에서 홀로 잠이 깨어 누워 있는데 갑자기 커튼 사이로 가느다란 빛이 들어온 기분이 들었어요. 그 커튼만 열어젖히면 찬란한 새벽의 넓은 벌판이 눈앞에 펼쳐질 것만 같은………. - P176

그는 무(無)에서 무가 나올 수는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은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고, 이 세상은 영원성의 현사(顯示)라고 말했어요. 게다가 이런 말도 했어요. 선(善)뿐만 아니라 악(惡) (p. 177) 역시 신의 직접적인 현현이라고. - P176

그날, 그때 걷던 시간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제 발자국 소리와 이따금 농가에서 들리는 수탉 울음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어스레한 회색빛이 대기에 맴돌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먼동이 트고 해가 솟아오르자,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하고 싱싱한 푸른색이 넘치는 들판과 숲들과 밀밭이 상쾌한 아침 햇빛 속에서 빛났어요. - P192

이사벨의 오빠들은 둘 다 멀리 외국에서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엘리엇은 아무리 지루한 여행이 되더라도 결혼식에서 조카딸의 손을 잡고 입장하기 위해 시카고로 가야만 했다. 그는 프랑스 귀족들이 단두대에 오를 때도 화려하게 차려입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일부러 런던까지 가서 새 모닝코트와 보랏빛이 도는회색 더블 조끼와 실크해트를 장만했다. 그리고 파리에 돌아간 얼마 후에 나를 초대해 그것들을 보여 주었다. - P194

"그 녀석은 지저분하고 옹졸한 속물일 뿐입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혐오하고 경멸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속물근성이에요. 나 아니었으면 지금쯤 형편없이 빌빌거리고 있을 높이 원! 그 녀석 아버지가 뭐 하는 줄 아세요? 사무실 가구 따위나 만드는 가구장이래요, 가구장이." - P203

그때부터 엘리엇 생애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최고급 요리사를 불러왔고, 얼마 후 그의 집에가면 리비에라 지방에서 가장 훌륭한 요리를 맛볼 수 있다는 평판이 자자해졌다. 집사와 하인에게는 어깨에 금줄 장식이 달린 흰색 제복을 입혔다. 그는 최대한 후하고 성대하게 손님들을 대접하되, 고상한 품위를 지키기 위한 한계선은 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 P207

내가 엘리엇을 보면서 무엇보다도 감탄한 점은, 그가 신분 높은 인사들을 대할 때 우아함과 예의를 한껏 갖추면서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난다고 가르치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독립적이고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P208

그래서 그레이 본인도 걱정스러운가 봐요. 일을 하고 싶어하고, 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아직 오라는 데가 없으니까 괴로운 모양이에요. 남자라면 당연히 사회에서 일을 해야 하고, 일을 하지 않으면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마치 팔리지 않는 상품이 된 것 같은 기분이 (p. 233) 든다고 괴로워하거든요. - P232

성적인 열정 없이 사랑이 존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지. 간혹 열정이 죽은 후에도 사랑이 지속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사랑이 아닌 다른 무엇, 일테면 애정이나 온정, 혹은 취향이나 관심사의 공유, 아니면 습관 등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거야. 그중에서도 습관일 가능성이 높지. 평소에 밥 먹던 시간이 되면 배가 고파지듯이 성관계도 습관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어. 물론, 사랑이 없어도 욕망은 있을 수 있지. 하지만 욕망하고 열정은 엄연히 다른 거야. 욕망은 성적 본능에 따른 자연적인 결과라구. 인간이라는 동물이 가진 다른 기능과 똑같은 거지.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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