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악마가 돼버렸어."
그러자 아예샤가 대답했다.
"난 아무것도 아니야. 다만 신의 심부름꾼일 뿐이야."
오스만은 분개했다.
"그렇다면 너의 신은 왜 하필 죄없는 것들만 열심히 죽이는지 말 좀해봐. 도대체 뭐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자신감이 부족해서 우리가 죽음으로 사랑을 증명해주길 바라는 거야?"
이 불경스러운 발언에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 아예샤는 더욱 엄격한 규율을 요구했다. - P284

참차는 눈을 감고 생각을 아버지에게 집중했다. 무엇보다 슬픈 것은 평생에 단 하루라도 아버지 창게즈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날을 기억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쁜 것은 한 사람의 아버지라는 용서할 수 없는 죄도 막판에 가서는 결국 용서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 P323

그러나 비록 감추고 있었지만 살라딘은 시간이 갈수록 일찍 거부했던 예전의 자기 모습으로, 즉 수많은 살라딘 — 아니, 살라후딘 — 으로 점점 돌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자아들은 그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선택을 할 때마다 하나둘씩 떨어져나갔지만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 P339

죽음은 사람들에게서 가장 훌륭한 부분들을 이끌어냈다. 인간에게 그런 일면도 있음을 목격하는 것은 — 살라후딘은 느꼈다 — 참으로 멋진 일이었다: 사려깊고 다정하고 고귀하기까지 한 모습들. 우리는 아직도 숭고해질 수 있는 존재다, 하고 생각하면서 그는 축제 기분에 빠져들었다. 온갖 잘못을 저질러도 우리는 아직도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존재다. - P345

누군가 이렇게 썼다: 이 세상은 우리가 죽을 때 비로소 현실임을 알 수 있는 곳이라고. - P354

그렇다,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국면의 시작인 것 같았다. 이제부터는 세상도 확고 부동한 현실일 테고, 이제는 자신과 저 피할 수 없는 무덤 사이에 우뚝 서 있는 든든한 아버지도 없었다. 고아의 삶, 무하마드가 그랬듯이, 누구나 그렇듯이 기이하게 찬란한 죽음에 의해 비로소 훤히 밝혀진 삶이었다. 이 죽음은 그의 마음속에서 마술 램프처럼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 P356

그는 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지브릴은 자기 내면의 악마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이제 보니 살라딘 자신이 생각했던 것들은 모두 순진한 착각이었다: 그는 지브릴이 자기 목숨을 구해주었던 브릭홀 화재 당시의 일로 두 사람이 깨끗이 정화되었다고 믿었고, 그렇게 쫓겨난 악마들은 불길에 휩싸여 타버렸다고 믿었고, 그리하여 사랑도 증오 못지않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큰 힘을 가졌으며 미덕도 악덕 못지않게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고 믿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 완벽한 치유는 불가능한 모양이다. -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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