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것들의 기록』은 죽은 자의 흔적을 정리하는 유품 정리사의 책이다. 책을 읽다가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해본다.
돌이켜보면, 인간은 자연 상태를 벗어나 사회를 이루면서 자연이 알아서 할 일을 인간이 도맡아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꺼름칙한 일들, 불쾌한 일들, 혐오스러운 일들은 사람들의 입에 잘 오르내리지 않고, 눈에도 잘 띄지 않는다. 분명 이 사회를 이루는 한 부분인데도! 그 대표적인 사례가 누군가의 죽음 이후 남은 사람들이 맡는 일일 것이다.
그 사례를 들어보자. 일본의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표 감독 하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다. 작년에는 하야오 감독의 최신작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가 개봉했다. 그런데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도 첫 장면은 주인공 마히토의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하며 장면으로 시작된다.
다만 여기서 묘사되는 그녀의 죽음은 많은 이야기에서 다뤄지는 '낭만화된' 죽음에 가깝다. 그녀의 시신은 나오지 않는다. 죽은 후의 모습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만 기억에 남는다. 하야오 감독의 이전 작(무려 11년 전) 〈바람이 분다〉도 보면 비슷하게 '낭만화된' 죽음이 나온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사라지듯이 세상을 떠나고,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죽은 이를 마지막으로 본 순간만 기억한다.
비슷한 사례는 많다. 어느 신화든 간에 누군가가 죽고 그 시신을 수습했다는 식의 이야기보다는 누군가가 '승천'했다거나, '실종'되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죽음을 신비롭게 표현하고 동시에 죽은 이의 시신을 처리한다거나 같은 현실적인 일은 대개 생략된다. 예를 들어 헤라클레스는 불 속으로 사라지고 그의 영혼은 올림푸스로 승천한다. 물론 그 반대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지브리 이야기로 돌아가서, 지금은 세상을 떠난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 역시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표 감독이었다.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마지막 작품은 다케토리 이야기를 각색한 〈가구야공주 이야기〉였다. 썸네일은 아쉽게도 블루레이가 없어서 아트북으로 대체했다. 이 영화에는 하늘에서 아미타와 함께 천인들이 음악을 연주하며 내려오는 장면이 나온다. 해당 장면에 깔리는 배경음악은 신나고, 생동감이 넘치고, 흥겹다.
해당 OST의 영상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가장 슬픈 장면에 가장 행복한 음악이 깔린다' 라거나, '어떻게 행복한 음악이 슬픔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라는 식으로 이 이 행복한 음악에 대한 감상을 알 수 있다.
하늘에서 천인들이 내려오는 장면이 인상적이어서, 그 후로도 뇌리에 남아있었다. 그 덕분에 우연히 다른 책을 읽을 때 '아! 그 장면이었구나'하는 부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일본의 정토종 예술에 있어서 선호 받는 테마는 '내영(來迎)', 즉 죽음의 순간에 있는 신도에게 구세주 아미타가 몸소 강림하는 것이었다.
코야산[高野山]에 있는 세 폭의 내영도(來迎圖)에서 나타난 것처럼 초기 '내영'의 방향은 마치 관찰자가 임종을 맞은 것처럼 관찰자를 향해 있었다. 여기서 커다란 아미타를 구름 위를 떠다니는 스물다섯 명의 보살이 수행하고 있는데, 그들은 관찰자를 바라보며 관찰자를 향해 오고 있다. 그들은 가운데 그림의 왼쪽과 꼭대기 뒤쪽에 자리 잡고 구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들의 아래로는 자연풍경이 펼쳐지는데, 왼쪽 아래의 자연 풍경은 분명하게 드러나는 반면 오른쪽 자연풍경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연풍경은 그림 전체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며, 조심스럽게 한쪽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상상 속의 장면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이기라기보다는 도상학적 효과를 더 크게 지닌다. 각 인물의 세부묘사는 장식적인 디테일과 색감과 사실성의 뚜렷한 발전을 보여준다. 특히 음악을 연주하는 천사들이 흥미롭다. 그들은 자연 속에서 관찰하는 포즈로, 춤을 추거나 악기를 연주하고, 관악기를 부느라 뺨을 잔뜩 부풀리고 있다.......
내영(來迎)은 아마도 일본 예술에서 1053년, 교토에 있는 뵤도인[平等院] 사원의 본당인 봉황당(鳳凰堂)의 문에 처음으로 나타난 주제일 것이다. 내영도가 일본의 공헌이자 창조품이며, 어떤 믿음에 의해서라도 획득된 신격의 가장 시적인 장면들 중 하나를 나타내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밀교(密敎) 도상들의 비밀스럽고 금기적인 성격과는 대조적으로 내영도의 핵심적인 부분은 밀종의 태도를 역전시키며 붓다가 그를 보는 자에게 바로 온다는 것이다. 아미타는 단지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 자신이 보는 자에게 다가온다. 이 그림은 죽어가는 신도가 보게 되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그 신도의 영혼은 붓다에 의해서 서방 정토로 받아들여지고 환영받는다. pp.278-279.
조지프 캠벨, 『신화의 이미지』
간단히 말해, 과거 일본인들이 상상한 죽음의 순간이었다. 구세주 아미타가 죽어가는 우리에게 다가오리라. 아미타가 그대를 응시할 것이니.
어떻게 보면 '사람이 죽으면 먼저 가 있던 반려동물이 마중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다'와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맞이하러 오는 대상이 아미타와 천인들에서 반려동물이 되었을 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남은 사람들은 떠난 사람의 자리를 정리 해야 한다. 그게 가족의 손을 거치든, 아무런 연고 없는 타인의 손을 거치든 간에. 그렇지 않은 사회가 있다면, 아마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와는 거리가 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