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광복70주년이 오기까지, 광복기(1945~1949)의 대표 출판인을 소개하는 연재의 3화 주인공은 삼중당을 설립한 서재수 대표님입니다. 4, 50대 분들이 《삼중당문고》를 통해 가장 많이 기억하는 출판사이기도 합니다.^^

혹 옛날 생각이 나신다면 《삼중당문고》를 펴낸 출판사 삼중당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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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출판의 개척자, 광복기(1945~1959)의 출판인들

 

3화

대중출판의 대표주자 서재수(《삼중당문고》)

서재수(1907~1978)는 도서출판과 잡지, 서적 도매상과 소매업에서 선두를 개척한 출판인이다. 그는 1931년 3월에 관훈동에 있던 지신당이란 고서점을 인수하면서 출판계에 '정식'으로 투족했다. 그의 나의 스물다섯이 되던 해다. '정식'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비록 잠깐씩이지만 그 이전에 근화당 서점과 동양서원에서 일한 경험도 있었고, 책을 자전거에 싣고 행상도 하면서 출판업의 요령을 익힌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지신당은 크기 4평이 될까 말까 한 아주 작은 규모였다. '딱지본' 판매로는 성이 차지 않은 구암(서재수의 호)은 지신당을 시작한지 3개월이 지난 5월 1일, '삼중당(三中堂)'이란 이름으로 《하얼빈 역두의 총성》을 처녀출판한다.

이 책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이 일본 잡지 《중앙공론》에 희곡작품으로 게재된 것을 번역한 것인데, 2,000부를 찍었다. 이 책을 첫 출판물로 삼은 것을 보면 서재수의 출판정신을 짐작할 수 있다.

시국은 푹풍전야의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을 때였다.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기 불과 반 년 전의 일이다. 다시 말하면 일제가 전시체제에 돌입해 더욱 폭압적인 식민통치를 강화하려는 때였기에, 이 책을 출판하고는 한참 동안 경찰서에 끌려다니며 혹독한 시달림을 당하게 되고 끝내 '활자 방해'란 모호한 이유로 발행금지 처분을 받아야만 했다. 출발부터 갖은 고통과 핍박의 출판역사를 이어간 것이다.

이 책은 출판사적으로도 귀중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저자 겸 발행인으로 서재수가 아닌 이태호로 표시되어 있고, 삼중당은 발행소 및 총판매소로만 판권에 표기(삼중당이란 이름을 표시하지 않고 회사 주소와 판매처만 표시)하고 있어서 그 배​경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태호는 행림서원을 경영하면서 한의학 서적을 주로 출판하면서 구암(서재수)의 출판사 창업을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판자금은 전액 구암(서재수)이 출자해 출판했다. 그런데도 발행인의 이름을 그렇게 밝힌 이유가 분명치 않다. 앞으로 더 조사가 필요한 부분이다.

또 이 책의 총판매소로는 삼중당과 함께 자서당 서점과 문산당 서점이 나란히 기재되어 있고, 책 뒷면에는 발매소로 경문서점에서부터 활문사까지 서울의 20개 서점의 주소, 대체구좌 번호가 가나다순으로 실려 있어 이들 명단을 통해 당시 경성의 유수한 서점들의 실태와 거래방식의 일단을 살필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삼중당은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이광수의 《춘원서간문범》, 육당(최남선)의 《조선역사》​와 《고사통》, 김동환의 《조선명작집》과 기행문집 《반도산하》, 노춘성의 《나의 화환》, 《흑장미 필 때》, 이기영의 《처녀지》 등 히트작을 연달아 펴낸다. 이 책들은 출판되자마자 선풍을 일으키고 전국서점에서는 연일 주문이 빗발쳤다. 1939년경에는 종로 2가 화신백화점 건너편에 지점도 개설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삼중당은 40년대 초,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출판활동을 중단당하고 한동한 침잠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춘원서간문범》(좌) 《안중근사기》(우)

8·15광복은 그에게 다시 한번 출판인으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해 대업을 이룩하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해방과 더불어 대중출판을 지표로 새롭게 출발한 삼중당은 첫 작품으로 김춘광의 희곡집 《안중근사기》를 이듬해 1월에 출판한다. 그는 출판의 시기를 살필 줄 아는 출판기획자였다. 수십년 전 발행금지 당했던 육당(최남선)의 《조선역사》에다 긴습히 '해방독립운동의 유래' 1장을 추가하고 서문을 새로 붙여 《신판 조선역사》를 꾸며내는 기민함을 발휘한다. 초판 10만부가 몇 달 만에 매진될 정도로 잘 팔려나갔다. 용지 구하기가 말할 수 없이 힘든 때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중판을 거듭했으니, 육당의 아들이 경영하던 동명사는 거액의 인세수입으로 재기 제1호 출판물인 《조선독립운동사》의 실패로 생긴 차용금을 갚고 다음 출판물인 《조선상식문답》의 출판비용으로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최한웅은 그때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오래도록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술회한 바 있다.

1946년 6월에는 주식회사 체제로 개편하고 일제강점기에 공전의 인기를 불러일으켰던 책들을 고쳐서 다시 출판할 뿐만 아니라 《현대교육학》(권혁풍), 《논리학》(김기석) 등 학술서적에서부터 문학, 역사, 경찰실무에 이르는 일반도서는 말할 것도 없고, 《중등 조선역사》, 《초등 모범전과》 같은 교과서 및 학습참고서부터 《삼중당 대중문고》에 이르기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정열적으로 출판을 이어간다. 그리하여 광복기 5년 동안 대단히 많은 출판 실적을 쌓았다.

그 기간에 발행된 출판종수를 집계한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현재까지 실물을 통해 확인 가능한 목록만도 60종에 이르고 있다. 전란을 격는 동안에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휴전 이후에는 《이광수전집》(전 20권, 1963년 완간) 등 우리 출판사에 기록될 대표적인 출판물들을 연달아 출판, 더욱 승승장구했다. 《이광수전집》은 개인전집 간행의 신기원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최요한의 KBS 라디오 방송원고를 묶은 세계의 명언집 《마음의 샘터》(1964)는 출판사상 최초의 밀리언셀러로 기록되고 있다. 또한 월간 《수험연구》(1953년 창간)를 시작으로, 온 국민의 오락잡지로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월간 《아리랑》(1955년 창간)의 여세를 몰아 《소설계》(1958), 《주간춘추》(1959), 《지성》(1962), 《문학춘추》(1964) 등을 잇달아 창간해 한때는 한국 잡지계의 왕자로 군림한다. 특히 시인 김규동 주간, 임진수 편집장의 이름으로 발행된 《아리랑》은 건전한 대중문화 향상과 전쟁으로 상처입은 독자들을 위로하는 데 크게 기여한 건국 후 최초의 대중오락지란 평가를 받았다.

 

《이광수 전집》

 

월간 《아리랑》​ 창간호

1973년 1월, 삼중당은 2대 사장으로 서건석(1934~1985)이 취임해 제2의 도약을 이룩한다. 서건석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자 1957년부터 후계자 수업을 받아왔다. 그의 옆에는 항상 고교동창이자 대학동창인 노양환이 편집책임자로 콤비를 이루며 대형 전집물과 염가판 도서를 골고루 펴내어 출판계를 평정하려는 야망을 불태웠다.

 

서건석은 "정의롭고 통찰력이 남달랐을 뿐 아니라 현실감각도 뛰어난 이"로 "틀도 통도 큰 데다 성품이 소탈하고 출판자로서 갖춰야 할 자질이 빼어난 사람"이었다. 그가 출판한 많은 출판물들 가운데서도 《삼중당문고》(1975년 2월에 100권을 한꺼번에 출간하고 매달 10권씩 1990년까지 500종 간행) 발간에 특히 힘을 쏟았다. 문고출판은 우리나라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시도되었다. 그러나 오래 지속해서 출판한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불모지나 다름없었는데 유독 이 문고만은 지금 40~50대 사람들 중에서 중고교생 시절에 애독자가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오랜 기간에 걸쳐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삼중당 대중문고》(좌)《삼중당문고》(우)

그는 출판계 전체를 위한 일에도 발 벗고 뛰어다녔다. 그의 힘이 아니었더라면 지금까지 어엿한 출판문화회관(대한출판문화협회)을 마련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출협의 총무상무이사를 맡고 있던 그는 자신이 제일 먼저 500만원이나 되는 거금을 건립기금으로 쾌척해 주의를 놀라게 했다. 500만원이면 당시 대지 90㎡짜리 주택 한 채 값이었다. 그리고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모금하는 데 열과 성을 다했던 일은 아름다운 미담으로 지금도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는 한창 일할 나이에 갑작스레 세상을 등지고 만다. 52세 되던 1985년의 일이다. 삼중당은 창업자 구암(서재수)이 향년 73세로 별세한 지 겨우 7년 만에 2대 사장까지 잃은 것이다. 서건석이 이렇게 허망하게 가버리자 60년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온 삼중당은 5년을 버티지 못하고 경영난으로 결국 1990년 말에 인쇄업자의 손에 넘어가면서 사실상 막을 내리고 만다.

 

그렇지만 삼중당의 진면목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삼중당은 광복이 되던 해 11월 서적도매상을 시작했다. 현대 출판의 역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도매상이었다. 각종 팸플릿들은 대부분 가두판매로 ​이루어졌지만, 다소 무게 있는 서적들은 서점을 통해야 했는데 마땅한 공급기구가 없을 때였다. 그는 6·25전쟁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서적 공동판매기구 설립을 제창해 업계여론을 창도한다.

 

1973년에는 일본에 '한국서적센터'라는 이름의 도쿄 지사를 설치해 국내도서의 해외 진출 교두보를 마련한 것도 획기적인 역사적 업적에 속한다. 우리 출판사상 정식으로 정부의 승인을 받아 해외에 지사를 설치한 것은 지금까지 전무후무한 일이다.

 

삼중당이란 상호는 구암이 평소에 생각해온 신념의 표현이나 마찬가지다. 첫째는 그에게 맞아야 하고, 둘째는 우리 민족에게 맞아야 하며, 셋째는 온 인류에게 맞아야 한다는 출판철학을 지향했다. 또한 중용의 동양철학에도 심지를 두었다. 삼중당이 60여 년 동안 쉬지 않고 열심히 펴낸 수많은 책들이 이러한 그의 출판철학과 꿈을 얼마나 달성했는가는 새삼 따질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서재수는 1968년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감회 어린 말을 남겼다.

 

"1931년 삼중당 간판을 내 손으로 걸고, 일제의 핍박과 고초를 겪으면서 출판할 때의 장쾌함이 이제는 모두가 추억이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해방 후 20년도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주·월간 잡지에서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분야와 형태를 가리지 않고 활자로 성책될 수 있는 책이란 책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중략) 출판은 자전거처럼 멈추면 쓰러지는 곡예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출판은 국민계몽과 민족문화 향상에 보탬이 되고, 내 나라 내 민족에 이바지함이 없이는 책을 펴내는 큰 뜻이 없는 것입니다. 이 길에 들어서 벌써 40년 세월은 흘러 사람도 낯설어지고, 저마다 출판의 걸어가는 길목도 펄이나 달라지고 있습니다. (중략) 이제 우리 출판계도 여명기를 지나 점차 자리를 굳혀가고 있습니다. 확실히 기틀이 잡혀가는 진통의 소리가 귀에 들립니다. 기업으로서의 출판의 터전이 마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도 험난한 길을 헤매다 보니 얻은 것은 나이뿐이요, 지나온 길은 아득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이러한 소회를 한 편의 시로 읊은 것도 그즈음의 일이다.

 

60 평생 일이관지(一以貫之,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것을 꿰뚫는다는 뜻)

출판보국(出版報國) 어려워라

가시덤불 헤매다가​

서산낙일(西山落日) 저물었네.

이후란 물결 따라​

분수(分數)대로 늙으리라.

1화. 정음사 최영해 : http://goo.gl/YL2oCW

2화. 을유문화사 정진숙  : http://goo.gl/Ot4QgH

3화. 삼중당 서재수  : http://goo.gl/jeccyF

 

​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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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현대한국출판사》서점가기

알라딘 : http://goo.gl/676N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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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15-08-11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고등학교 시절, 삼중당 문고를 읽고 성장한 <삼중당 문고 키드>입니다.
서점에 가면 더욱 심해지는 정신적 허기를
삼중당 문고를 한권 한권 사서 읽으며 채우곤 했지요.
문고판으로 나오던 철학자 김형석씨의 수필집을 포함한 10권짜리 전집을
큰맘먹고 사들이던 날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생애 최초로 소장한 전집이었으니까요.

그 시절, 미국으로 이민가는 여자친구에게 선물한 것도
옛 서울공대 캠퍼스에서 주워 책갈피로 넣은 은행잎과 함께한 삼중당 문고 책이었구요.
삼중당, 잊지 못할 내 마음의 출판사입니다.

yamoo 2015-08-11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아직까지 삼중당 문고본 30여권 갖고 있어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