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수용소 - 내 이름은 르네 타르디 슈탈라크ⅡB 수용소의 전쟁 포로였다
자크 타르디 지음, 박홍진 옮김 / 길찾기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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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이렇게 비뚤어질 수 있다니

 

암울한 톤 일색이다. 음산한 벌판에 비는 사선으로 긋고 감시초소 주변엔 억센 철조망이 위압적으로 가로막는다. 곳곳에 처참하게 파괴된 전차와 군마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이를 배경으로 불쑥 튀어나온 불만투성이 얼굴의 주인공은 시종일관 시니컬하다. 심경을 묻는 아들의 질문에 타박하며 핀잔을 주거나 버럭 화까지 내는 모습이라니. 원망과 비난, 증오로 똘똘 뭉친 그는 실제보다 더 늙고 지쳐 보인다. 한 가닥 희망의 끈도 보이지 않는 듯 신경질적으로 울분을 토로한다.

 

“난 군대와 신부와 선생과 공무원을 저주했다. 특히 공무원들을. 그리고 정부기관을. 히틀러는 물론! 인간 전체를 저주했단다. 이 세상이 멸망해버리길 바랐어!”(80쪽)

 

이 깊은 상처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시대의 광풍에 휩싸여 역사의 희생양이 된 때문이라고 간단히 치부해도 될까? 그러나 무형의 관념인 역사를 탓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오로지 실존하는 것은 소위 역사라는 것을 만들어나가는, 어쩜 역사적 사건인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편의에 따라 함부로 정책 결정을 내리는 지배세력의 행태뿐인데 말이다. 더구나 그들은 공리공론에 빠져있기 십상이어서 판단과 실행이 현실과 유리되기 일쑤고 이로 말미암아 빚어질 민중들의 고통과 희생은 아랑곳하지 않게 마련이다. 그들에게 치이고 짓밟히다보니 시립연주단 클라리넷 주자이며 시적인 감성이 풍부했던 낭만주의자 아빠가 이렇게 메마르게 비뚤어져버린 건 아닐까? 연유를 슬몃 알 것 같다.

 

2. 독일군보다 더 미웠던 조국 프랑스

 

수용소에서 프랑스 포로들은 육체적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극한의 고통에 시달렸다. 슈탈라크에서의 4년 8개월 동안 늘 굶주렸고 폭력과 강제노역에 내몰렸다. 나치들은 섬세하고도 잔인하게 그들을 겁박했다. 인간을 괴롭히는 별의별 기기묘묘한 방법을 다 동원하여 포로들을 갖고 놀았던 것이다. 천부적인 가학증 환자들 같으니라고. 심지어 사소한 일에도 밸이 꼬이면 약식 사형을 밥 먹듯 했다.

 

그러나 이런 물리적 폭력보다 그들을 더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것은 조국 프랑스의 태도였다. 포로가 된 연유부터 납득할 수 없었다. 정부는 어떤 대응 전략도 수립하지 않은 채 독일군에게 국토를 오롯이 내주었고 군 지휘부에서는 아무런 의미 있는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그러니 부득불 각개 전투에 임할 수밖에. 이런 오합지졸이니 독일군의 먹잇감이 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달까. 조국 프랑스가 그들을 사지로 밀어 넣은 셈이다.

 

“조직은 형편없고 명령은 개판이고! 프랑스, 정말 우연히 태어나 나의 조국이 되어버린 이 나라에 염증이 나! 프랑스 국가라도 들으면 토하고 싶을 지경이야. 난 싸웠어. 명령에 복종했고. 하지만 제대로 된 명령이나 보급은 못 받았어. 장난도 아니고!”(68쪽)

 

포로가 된 이후에도 정부는 그들을 기억하지 않았다. 제네바 협약에 따라 정당한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은 것은 물론 어떤 구명 의사도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최악의 일은 독일군 패퇴 이후 벌어졌다. 조국을 위해 싸우다 적군의 포로가 되어 생사를 넘나드는 고초를 겪은 후 간신히 귀환했는데도 아무도 그들의 상태와 심경을 헤아리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자유 프랑스 정부는 그들을 항독 레지스탕스처럼 영웅 대접은 못 해주더라도 최소한 일반인 수준의 환영 제스추어 정도는 취해야 했는데 그런 성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없는 사람마냥 소리 소문 없이 스며들밖에. 작가 타르디의 장인이 직면한 상황도 황당 그 자체였다. 그는 의사 지망생으로 교수직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귀환한 후 살펴보니 포로생활로 이미 임용 적정연령을 초과한 상태였고 뿌리 깊은 족벌체제가 여전한 의료계의 생리 탓에 교수의 꿈은 언감생심이었던 것이다. 청춘의 도약은 거기서 멈췄고 미래의 계획은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아빠와 장인, 그리고 수용소 동료들은 순식간에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 잊힌 자가 되었다. 젊은 시절의 고통을 언급조차 못하고 상처만 간직한 채 굴욕적인 생을 이어갈 도리밖에 없었다. 그들의 아픔을 얘기할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고, 고통을 언급할 권리는 법전에나 존재할 따름이었다. 자유 프랑스에서의 삶은 결국 허울뿐이었다. 수용소 포로 생활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루저(loser)로서의 침묵만 강요당하는 지경이었으니 그들은 더욱 음지로 들어가 비뚤어질 수밖에.

 

3. 유난히 안쓰러웠던 이유

 

그런데 아빠 타르디와 동료들이 겪은 고통이 왠지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그들의 아픔이 깊은 울림이 되어 사무치는 듯했다. 왜일까 곰곰 짚어보니 우리 민족의 지난한 삶이 자연스레 오버랩 되었다. 늘 외세에 치이고 독재 권력의 질곡에 시달렸으니 수용소에서의 포로들의 삶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지배세력은 당파 싸움으로 이전투구를 일삼다 제 잇속을 위해 나라를 송두리째 팔아넘기고도 언제나 승승장구했고 이름 없는 민초들은 엄동설한에 거친 들판으로 내몰린 신세로 숨죽이며 살아왔던 것이다. 자유 대한민국은 또 어땠을까? 오십보백보랄까.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하고 해방 이후에도 모멸과 질시를 견디며 혼자서만 끙끙 앓던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처럼 평생 국가를 원망하며 지낸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어쩜 일제 식민치하보다 해방된 대한민국에서 당한 설움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야속했을까, 속으로 눈물은 또 얼마나 삼켰을까? 이런 뼈아픈 모습이 겹쳐져 그들의 시련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4. 그들도 레지스탕스였다

 

그러나 아빠 타르디와 동료들을 루저(loser)라고 매도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무기력하게 눌러앉아 있었던 게 아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포로 신세였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적국 독일에 맞선 것이다. 조국 프랑스를 위해, 아니 그들을 내친 사실조차 잊어버렸거나 알고도 짐짓 모른 체 하는 프랑스를 위해서 그런 건 아닐 테다. 눈앞의 적, 독일을 싫어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적개심이 발동된 것이리라. 그들은 교묘하게 수용소 관리에 훼방을 놓는다. 레지스탕스 활동이 따로 없었다. 아빠 타르디는 문서 변조와 허위 공문서 작성으로 제3제국의 시스템에 오류를 일으키려 했고 일반 수용자들은 점호 시 인원 파악 방해를 꾀하며 점령군을 끝끝내 괴롭혔다. 이로 인해 독일 정부에서는 많은 인원과 물자를 투입해야 했으며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붇고도 수용소 운영을 겨우겨우 해나갈 수 있었다. 또 아빠와 동료들은 엄혹한 수용소 생활 와중에도 나무를 깎아 예술 작품을 만들고 국경을 넘어 우정을 쌓았으며 탈출 모의도 꾀하는 등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을 지키려고 발버둥쳤다. 인간성까지 피폐해져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길 바랐던 점령국 통치 전략에 결코 순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적국 독일에 협력하며 일신의 안녕을 꾀했던 이들에 비해 그들은 거의 영웅적으로 저항한 셈이다.

 

5. 언성 히어로(unsung hero), 칭송받지 못한 영웅들을 복권하라!

 

하여 그들은 루저도, 잊힐 존재도 결코 아니었다. 조국 프랑스 공직자들의 어이없는 처신으로 사지에 내몰려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와중에도 인간의 자존을 지켰으며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끝까지 저항한 이름 없는 영웅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자들이 있었다. 교묘한 논리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지배적 위치를 고수한 이들 말이다. 자유 프랑스 정부의 주축으로 참여하기도 한 이들에게 타르디 아빠와 동료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들이 죽은 체 눌러있어야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어떤 칭송의 헌사도, 꽃도 십자가도 없을 수밖에. 고립무원의 벌판으로 다시 내쳐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신은 길게 호흡을 고르다가 언젠가는 일어나 심판의 칼날을 들이댈 것이다. 아니 들이대곤 했다. 그간의 인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그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뒷전으로 밀렸던 자들이 복권되어 양지로 나오게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작가 타르디는 아빠와 그 동료들, 영웅적으로 저항한 이들에게 헌사를 바치며 그들의 복권을 청원하고 있다. 역사의 신이 재림하도록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꽃과 십자가를 준비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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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 해파랑길 - 걷는 자의 행복
이영철 지음 / 예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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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은 부산 시민들에게 친숙한 이름이다. 어디서든 조금만 나가면 바로 다가오는 바다, 그 푸른 물결을 굽어보며 해안선을 따라 산보하듯 걷는 길이니 말이다. 늘 쉽게 접할 수 있어 어쩜 소중함을 잊고 사는지 모르겠다. 쉬엄쉬엄 걷다보니 나도 어느새 부산구간 4개 코스를 다 뗐고 이제 울산구간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우는 중이다. 공식적으로 해파랑길은 동해와 남해의 분기점인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고성군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770km의 트래킹 길을 일컫는다. 분단된 상황인지라 지금은 거기까지지만 통일 후에는 한반도 최북단 함경북도 서수라까지 2000km 트레일로 이어질 수 있는 잠재력과 상징성도 지니고 있는 길이라 하겠다.

 

자는 이 길에 흠뻑 빠져 있다. 앞서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 782km보다 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얘기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있는 지점에 이르는 게 목적이라면 해파랑길은 단순히 고성 통일전망대에 도착하는 것보다 걸어가는 과정 자체가 행복하고 의미 있는 여정이라고 속살거린다.

 

이 책에는 해파랑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로 빼곡하다. 부산에서 고성까지 10개 구간, 50개 코스별로 걷는 여정, 코스 지도, 길 찾기 팁, 특히 눈여겨볼 포인트, 맛 집, 숙박 및 교통편 등 여행자가 챙겨야 할 거의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다.

 

그런데 관광안내 지도나 코스별 소개보다 오히려 더 눈길을 끄는 게 있다. 개인적 성향 때문인지 군데군데 놓여 있는 필자의 인문학적 성찰에서 우러난 상념들에 더 오래 시선이 머물렀다. 필자의 이런 글쓰기 방식은 실은 해파랑길이 담고 있는 역사와 문화적 배경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길 자체가 스토리텔링 요소를 한껏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경주 감포에 있는 문무왕 수중릉,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의 배경이 된 포항 영일만, 영덕의 목은 사색의 길, 삼척과 강릉의 헌화가와 수로부인길, 강릉 허균허난설헌 생가 등 곳곳에 산재한 유적과 문학적 모태가 된 장소는 절로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배경 요인들을 차치하고 순수하게 저자의 안목과 지혜를 담고 있는 대목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압권이라 꼽고 싶은 43코스 양양 속초 구간 부분이 그것이다. 하조대 해변에서 수산항까지 거의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길을 걷는 동안 자신의 머리와 마음의 상태를 네 가지 유형으로 정리한 것은 그 백미라 하겠다.

 

첫 번째는 무념무상의 경우다. 이때는 시선은 절로 발걸음 앞에만 머물고 온몸은 붕 뜬 채로 앞으로 밀려가는 듯하다. 팔다리는 몸에 달랑 붙어 따라올 뿐이다. 머리는 멍하니 비었는데 축지법을 쓴 것인지 어느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면 목표 지점에 와 있다. 두 번째는 주변 경관에 취해 넋을 잃는 경우다...(중략)...세 번째는 꿈을 꾸는지 걷고 있는지 분간이 안 되는 경우다. 과거, 현재, 미래가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중략)...네 번째는 온몸의 세포가 한 가지 생각에 집중되는 경우다. 걷는 중의 사색이 가끔씩 대단한 집중력을 보여줄 때가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한 가지 생각에만 몰두하다 보면 상상의 힘은 무한히 확대된다. 이때는 한 가지 골치 아픈 사안이 깊은 사색 끝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경우도 많다. 이전까지 내내 앞을 가로막던 뿌연 안개가 걷혀 시야가 뚜렷해지고 머리는 맑아지는 것이다.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도 꽁꽁 얽혀있던 일상의 문제가 풀리는 것도 휴식의 결과다. 일단은 움직여야 풀리는 듯하다. 몸이건 머리건 온몸의 근육세포와 뇌세포들이 열심히 움직여줘야 결국은 휴식이 되는 것이다. 걷기라는 좋은 휴식 수단을 갖게 되어 감사하고 행복하다. (318~319쪽)

 

평소에 길을 걸으며 누구나 한번은 느꼈을 법한 생각들인데 필자는 이를 네 가지 유형으로 명료하게 정리한 것이다. 그의 혜안에 경탄했다 할까. 공감이 팍팍 간 것은 물론이고. 그러니 이 책에선 색다른 길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는 것 못지않게 필자의 걷기 예찬과 걷는 중 끌어올린 사색의 결과물을 즐기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하겠다. 정보와 사색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셈이다. 

 

필자가 통일 이후 북녘으로 이어진 해파랑길을 걸을 땐 또 어떤 상상, 남다른 성찰로 우리를 자극할지 살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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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공부하는 가족입니다 - 두 아이를 MIT 장학생, 최연소 행정고시 합격생으로 키운 연우네 이야기
이채원 지음 / 다산에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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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이 특이해서인지 자기계발서 부류는 멀리하는 편이다. 잘난 이들의 과시적 후일담이나 정형화된 잠언들이 어찌나 비루해 보이는지 도무지 몰입이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공부하는 가족입니다]도 처음엔 그럴 거라 지레짐작하여 한동안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슬쩍 프롤로그를 훑어보다 이게 뭐람! 하며 흠칫했다. 한눈에 예사롭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 문학적 감성이 듬뿍 배어 있는 결곡한 글이 눈길을 확 끌었던 것이다. 읽어나갈수록 젠체하는 글이 아님을 또렷이 알 수 있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겸허한 성찰로 빼곡한 문학의 향연이 거기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퍼뜩 가다듬고 작가의 이력이며 목차를 훑어보다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되었다. 등단 절차를 거친 정통 소설가가 자신의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진솔하게 발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격정과 울분, 위로와 공감이 어우러진 글에서는 선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다 읽고 나니 눈 앞에 약간의 수분이 어른거렸다 할까. 그 묘한 울렁거림은 감정이입 때문이었을 것이다. 연민과 공감, 그리고 이해와 인정의 감정이 뒤섞여 먹먹해진 마음결을 한동안 추스르기 어려웠다.

 

이렇게 만든 것은 우선 다 갖춘 이들 특유의 재수 없는 냄새를 풍기지 않기 때문이다. 차마 내뱉기 어려운 부끄러운 모습, 적나라한 인간 본성 등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채무 변제 분으로 빠져나가는 봉급을 살려 보려고 가짜 채무를 설정하여 변제 회피를 시도한 일이나 신혼 초 이웃집 연탄 두 장을 훔친 일 등 너덜너덜 남루한 실상까지 깨놓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절절한 고백 앞에 독자들은 경계심을 허물고 바짝 당겨 앉을 밖에. 이제 작가의 편이 되어 마음의 경로를 따라 함께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절망의 비탄을 토로할 땐 덩달아 울컥해지도 했다.

 

“이것도 인생인가. 이런 것도 사람의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열심히 살았는데 우리 가족의 삶이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씁쓸하고 허탈했다.”(203쪽)

 

또 하나 빨려들게 만든 건 어쩜 미련하달 정도로 꿈을 향해 우직하게 나아가는 모습 때문이다. 약삭빠르게 요령을 부려 뜻한 바를 이루려는 모사가 판치는 세상에 이렇게 우공이산으로 뚜벅뚜벅 나가서 되겠는가 하는 걱정이 앞설 정도였다. 그러니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들을 응원할 밖에. 빚에 시달리며 겨우겨우 공부를 이어가는 와중에도 인간공학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에 도전하고 참여한다든가, 쩔쩔매게 만드는 엄혹한 현실과 불혹의 나이도 잊고 장편소설 집필에 매달리는 등 그들의 시도는 작은 물방울로 바위를 뚫으려는 무모함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몰입과 천착, 매사 적당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이 늘‘나름대로’와 ‘이 정도면’이라는 말을 빼고 생각하자며 간절한 열정으로 매진한 끝에 그들은 그예 절망이라는 산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매 순간 나 자신에게 물었다. 지금 치열한가. 무슨 일이든 진심으로 이루고자 한다면 거짓 노력은 던져 버려야 한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전력투구해야 한다.”(214쪽)

 

그들도 인간이었기에 흔들리기 마련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때론 도피처를 찾기도 했다. 유학길에 오른 미국, 공부와 마라톤이라는 몰입 대상도 어쩜 그들이 피할 바위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약한 모습에서 오히려 인간미를 느꼈다 할까. 연민과 공감을 뭉클 불러일으켰으니. 그들의 공부 몰입, 특히 미국 유학기는 어쩜 도피 행각처럼 보였다. 물론 예정된 유학 코스였지만 번잡하고 발목 잡는 일밖에 없던 한국이라는 카오스를 벗어나 약간이나마 마음의 여유와 평안을 되찾게 되었으니 말이다.

 

“공부를 하다 보면 앞날에 대한 두려움도, 빚을 짊어진 설움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62쪽)

 

또 하나, 그들이 기댈 언덕은 마라톤이었다. 가족의 화합을 위해 시도된 마라톤을 통해 그들은 치유의 경험을 맛본다. 견딜 수 없는 극한의 고통 앞에 무릎 꿇지 않고 그마저 이겨내면 절정의 평안에 이르게 된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체득한 것이다. 이런 육체적 고통 해소의 경험은 일상에서의 팍팍한 삶을 견디는 데도 적용되어 의욕을 돋우는 활력소가 되었다.

 

그런데 실은 이 책에도 약간 재수 없는 게 있다. 아이들 말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 하는데 엄마의 눈에 비친 아이들의 모습이라 실제보다 미화된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들은 남달랐다. 세상에 이런 애들이 다 있을까 싶게 아이들은 영특하면서도 착했다. 그렇게 적응력이 뛰어나고 도덕심과 배려심을 갖춘 공부 잘 하는 범생이는 세상에 거의 없는데 말이다.

 

똑소리 나게 지혜로운 엄마의 모습도 살짝 재수 없었달까. 내가 못 가진 것을 오롯이 갖추고 있는 이에 대한 질투심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이들에게 말로 지시하기보단 함께 공부하고 함께 행동하는 엄마, 끝까지 참고 기다려주는 엄마, 경험을 자극하고 작은 성취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 엄마, 이런 걸 어떻게 다 생각해 내었을까? 따로 배운 건 아닐 텐데 어찌 깨우쳤을까? 화룡점정은 아이들에게 집안 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해와 공감을 유발한 일이라 하겠다. 아이들을 마냥 철모르는 어린애로 여기지 않고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해 준 셈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동지요, 상호 성장을 돕고 자극하는 동반자 관계로 발전할 밖에.

 

“나와 두 아이는 각자의 꿈을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었다. 나란히 죽림서실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우리는 엄마와 자식이 아닌 동지가 되었다. 서로에게서 자극과 용기를 얻었다.”(144쪽)

 

어쩜 이런 재수 없는 미덕까지 갖추고 있었기에 그 지난한 과정을 뚫고 오늘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시기심이 발동된 탓에 재수 없다고 했지만 실은 정말 좋아 보였다.

 

이 책에는 유용한 팁을 곳곳에 숨겨 놓고 있다. 공부 방법이나 외국 생활 적응에 필요한 노하우 등 실용적인 것은 물론이고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완성도 높은 글 여러 편을 보여주고 있어서 인상적이다. 딸아이가 장학생 지원 서류로 제출한 자기소개서, 아들이 가족들에게 갈등을 극복하자는 간곡한 마음을 담아 보낸 편지, 엄마가 아들의 수험 과정을 지켜보며 쓴 수험 뒷바라지 일기 등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지혜로 가득한 글이 실려 있다. 하나 같이 겉멋으로 허투루 쓴 글이 아니다. 헤어나기 어려운 난처한 상황,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한 듯 리얼한 글은 몰입도를 높이고 있다. 아울러 이 글들은 입학이나 취업 등 실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문장의 전범으로 손색이 없다 하겠다. 진솔한 마음을 결곡하게 담은 글은 상대방의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리며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수험생이나 입사준비생, 또는 그 후견인들에게 무척 유용한 지침이 될 것이다. 책 말미에 실린 딸이 엄마에게 쓴 편지, 늘 고마워하며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는 연우의 마지막 편지는 이 책을 고요하며 의미 있게, 또 따뜻하게 마무리하는 글이다. 나도 누군가에게서 이런 진심을 담은 편지를 받을 수 있었으면...

 

하여 이 책은 잘난 이의 자기과시가 결코 아니었다. 낮은 자의 자기고백이자 그 지난한 과정에도 정신줄 놓지 않고 어떻게든 지혜롭게 헤쳐 나가고자 발버둥친 이의 진솔한 모습이라 하겠다. 그러니 읽는 동안 위압감이나 경외심 등 권위주의적인 감정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어떨 땐 읽고 있는 내가 오히려 위로의 말을 건네며 어깨를 토닥거려 주고 싶기도 했다. 저자와 독자, 빼어난 자와 뒤쳐진 자의 역학관계나 거리감 같은 건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눈높이를 맞추며 조근조근 발언하는 감성적인 글에서 위로와 공감과 평화를 듬뿍 맛보았다 할까. 더불어 그간 축적한 소중한 자료까지 기꺼이 내어 놓는 재능 기부까지 하고 있다. 이런 미덕을 두루 갖춘 책이니 더욱 널리 회자되길 소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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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의 문장들 - 마음이 어지러울 때 읽는, 2500년 동양 사상의 정수들
사토 잇사이 지음, 노만수 엮고 옮김 / 알렙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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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넘치되 지혜의 원천이 메마른 시대상을 반영하듯 삶의 근본 원리를 결곡한 몇 마디로 함축한 잠언서 출간이 붐을 이루고 있다. 이 책도 그런 부류, 수신서 내지는 처세술 관련 서적이다. 그런데 이 책은 최근에 처음 나온 게 아니고 일본 지성계에서 몇 백년 동안 읽어오던 것이어서 약간 특이하다 하겠다. 유학자 사토 잇사이가 쓴 글인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잇사이는 잠언을 마음에 놓는 침이라고 보았다.

 

훌륭한 말은 마음의 침이다.

잠언이라는 것은 마음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찌르는 침과 같다. 마음에 사념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곧바로 잠언의 침을 찌르는 것이 좋다. 사념이 점차로 심해지면 침으로 찔러도 효과는 적을 것이다. 나는 침을 좋아해 몸 상태가 조금이라도 좋지 않을 때에는 조속히 가슴 아래에 수십 개의 침을 놓는다. 병이 들기 전에 낫고 만다. 이것으로 잠언이라는 침의 효능을 알 수 있다. (16쪽)

 

잡스런 생각으로 마음이 출렁거리고 그것에 휘둘릴 때면 지혜로운 잠언으로 침을 맞고 지침을 얻어 사념에서 벗어난다는 얘기다. 그는 사념이 깊어지기 전에 예방주사를 맞으라고 권한다. 물론 주사 약물은 고전이다.

 

이 책에는 짧고 함축적으로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를 담은 주사약이 233개나 들어 있다. 그것들은 주로 동양 고전을 텍스트로 삼아 잇사이의 견해를 곁들인 것인데 단순히 인용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견해로 완전 녹여내고 있다. 그래서 때론 단호하고 격렬하게 발언하고 있다. 이를테면 뚜렷한 뜻을 세울 때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말라고 권한다. 과거지향적이고 권위에 얽메어 있기 십상인 스승에게서 벗어나 과감하게 자신의 뜻을 세우고 세상을 향해 펼쳐나가라고 말이다. 짧지만 울림이 깊달까. 하여 세상 탓에 소신이 흔들리고 있는 이는 이 잠언에서 지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뜻대로 나가라고 말이다.

 

마음의 침이 필요한 이들에게 이 책은 여전히 의미 있는 지침을 제공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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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꿈이 당신에게 말하는 것 - 우리 내면에 숨은 무의식의 정체
김현철 지음 / 나무의철학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꿈속에서 제가 남편이 되어 있었습니다. 회사 일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문을 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제 부인이 배우 박근형 씨와 함께 다정하게 소파에 앉아 과일을 먹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다른 건 몰라도 서로 이성문제로 속 썩인 일은 없었기에, 사랑하는 부인(그러니까 접니다.)이 외간 남자와 있는 걸 본 순간 전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박근형 씨한테 분노를 폭발시키며 당장 나가라고 했죠. (278쪽)

 

어쩜 불륜 냄새가 살짝 나고 그게 남의 얘기니까 재미도 있네요. 사연을 보낸 이들의 얘기는 정말 기상천외한 것뿐입니다. 낙타 공주와 입맞춤을 했다거나 아무리 먹어도 끊임없이 불어나는 자장면, 또 자신은 아직 처녀인데 아기에게 젖을 물리다가 젖꼭지를 물어 뜯겨 기겁한 것 하며 하루 종일 머리만 감고 있는 모습 등 실로 구구절절 기기묘묘한 얘기로 빼곡합니다. 이를 김현철 원장이 해석하여 의미를 풀어주고 나아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처신했으면 좋겠다는 코멘트를 붙이는 방식으로 이 책은 진행됩니다.

 

사례로 든 꿈의 경우는 출산 직후 우울증에 빠진 아내가 자상한 아버지상으로 각인돼 있는 박근형 씨 같은 이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다는 무의식적 갈망이 나타난 것으로 필자는 풉니다. 그러면서 이런 바람이 남편과의 신의를 저버리는 부도덕한 행위이므로 죄책감을 동반하기 마련인데 이를 남편으로 변신한 자신이 꾸짖어 정신 차리고 균형을 회복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충고합니다. 여기서 필자는 꿈을 통한 투사와 해리 등 심리학 이론을 살짝 양념으로 곁들이며 맛깔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 의뢰자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론 깔깔거리며 더러는 심각하게 감정이입이 되곤 하며 정신없이 읽어나갔습니다. 새롭고 신기한 얘기에 넋을 놓고 말입니다. 한참 재미를 붙여 읽어나가다 어느 순간 이건 단순히 흥미진진한 얘기만은 아니란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필자의 한 마디씩 살짝 살짝 덧붙인 얘기는 재미를 넘어 독자를 향한, 아니 바로 나를 향한 간곡한 충고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대목에선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놀란 게 아니라 깊은 깨달음 말입니다.

 

실은 꿈의 첫 장면에 이미 답이 있어요. 빈 수레를 끌고 언덕을 올라가고 계셨다는 장면이 바로 그 대목입니다. 왜 꼭 카트에 뭔가를 담아야 하죠? 왜 꼭 굳이 끌고 가야 되죠? 그저 지팡이 용도로 의지하고 걸어가도 되고 그것도 귀찮으면 내버려 두고 산보 가셔도 되요. 카트는 그냥 두고 가시면 점원이 알아서 챙기잖아요. 비우고 그래도 가셔요. 굳이 멈추지 않아도 보이고 천 번 안 흔들려도 됩니다. (179쪽)

 

멈춰야 비로소 보이고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이 시대의 멘토들의 조언에 아직 멀었구나 하는 무력감에 빠져 있었는데 먹구름을 말끔하게 걷어내는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을 만난 듯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던 것입니다. 필자는 진중한 의미에 매달리고, 짐짓 심각하고 진지한 체하는 무거움보단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가볍고 발랄한 삶의 자세를 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떤 멘토들의 의미심장한 얘기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 위로가 되었다 할까요? 연령대별로 반드시 해야 할 몇 가지 과업 등등, 타인이 설정한 기준에 못 미친다고 안달할 필요가 없겠다는, 나만 못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뭉클 치솟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재미로 읽다가 서서히 힐링이 되었다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내 무의식의 지형도도 어렴풋 그려지고 현재 정서도 어느 정도 읽혔습니다. 하여 심란하게 꼬일 때마다 두고두고 꺼내보며 마음결 다스리려 합니다. 제 무의식의 좋은 벗 하나 생긴 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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