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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 해파랑길 - 걷는 자의 행복
이영철 지음 / 예담 / 2014년 9월
평점 :
품절
해파랑길은 부산 시민들에게 친숙한 이름이다. 어디서든 조금만 나가면
바로 다가오는 바다, 그 푸른 물결을 굽어보며 해안선을 따라 산보하듯 걷는 길이니 말이다. 늘 쉽게 접할 수 있어 어쩜 소중함을 잊고 사는지
모르겠다. 쉬엄쉬엄 걷다보니 나도 어느새 부산구간 4개 코스를 다 뗐고 이제 울산구간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우는 중이다. 공식적으로 해파랑길은
동해와 남해의 분기점인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고성군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770km의 트래킹 길을 일컫는다. 분단된 상황인지라 지금은
거기까지지만 통일 후에는 한반도 최북단 함경북도 서수라까지 2000km 트레일로 이어질 수 있는 잠재력과 상징성도 지니고 있는 길이라
하겠다.
필자는 이 길에 흠뻑 빠져 있다. 앞서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
782km보다 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얘기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있는 지점에 이르는 게 목적이라면 해파랑길은
단순히 고성 통일전망대에 도착하는 것보다 걸어가는 과정 자체가 행복하고 의미 있는 여정이라고 속살거린다.
이 책에는 해파랑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로
빼곡하다. 부산에서 고성까지 10개 구간, 50개 코스별로 걷는 여정, 코스 지도, 길 찾기 팁, 특히 눈여겨볼 포인트, 맛 집, 숙박 및
교통편 등 여행자가 챙겨야 할 거의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다.
그런데 관광안내 지도나 코스별 소개보다 오히려 더 눈길을 끄는 게
있다. 개인적 성향 때문인지 군데군데 놓여 있는 필자의 인문학적 성찰에서 우러난 상념들에 더 오래 시선이 머물렀다. 필자의 이런 글쓰기 방식은
실은 해파랑길이 담고 있는 역사와 문화적 배경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길 자체가 스토리텔링 요소를 한껏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경주
감포에 있는 문무왕 수중릉,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의 배경이 된 포항 영일만, 영덕의 목은 사색의 길, 삼척과 강릉의 헌화가와 수로부인길, 강릉
허균허난설헌 생가 등 곳곳에 산재한 유적과 문학적 모태가 된 장소는 절로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배경 요인들을 차치하고 순수하게 저자의 안목과 지혜를 담고
있는 대목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압권이라 꼽고 싶은 43코스 양양 속초 구간 부분이 그것이다. 하조대 해변에서 수산항까지 거의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길을 걷는 동안 자신의 머리와 마음의 상태를 네 가지 유형으로 정리한 것은 그 백미라 하겠다.
첫 번째는 무념무상의 경우다. 이때는 시선은 절로 발걸음 앞에만
머물고 온몸은 붕 뜬 채로 앞으로 밀려가는 듯하다. 팔다리는 몸에 달랑 붙어 따라올 뿐이다. 머리는 멍하니 비었는데 축지법을 쓴 것인지 어느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면 목표 지점에 와 있다. 두 번째는 주변 경관에 취해 넋을 잃는 경우다...(중략)...세 번째는 꿈을 꾸는지 걷고
있는지 분간이 안 되는 경우다. 과거, 현재, 미래가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중략)...네 번째는 온몸의 세포가 한 가지
생각에 집중되는 경우다. 걷는 중의 사색이 가끔씩 대단한 집중력을 보여줄 때가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한 가지 생각에만 몰두하다 보면 상상의
힘은 무한히 확대된다. 이때는 한 가지 골치 아픈 사안이 깊은 사색 끝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경우도 많다. 이전까지 내내 앞을 가로막던 뿌연
안개가 걷혀 시야가 뚜렷해지고 머리는 맑아지는 것이다.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도 꽁꽁 얽혀있던 일상의 문제가 풀리는 것도 휴식의 결과다.
일단은 움직여야 풀리는 듯하다. 몸이건 머리건 온몸의 근육세포와 뇌세포들이 열심히 움직여줘야 결국은 휴식이 되는 것이다. 걷기라는 좋은 휴식
수단을 갖게 되어 감사하고 행복하다. (318~319쪽)
평소에 길을 걸으며 누구나 한번은 느꼈을 법한 생각들인데 필자는
이를 네 가지 유형으로 명료하게 정리한 것이다. 그의 혜안에 경탄했다 할까. 공감이 팍팍 간 것은 물론이고. 그러니 이 책에선 색다른 길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는 것 못지않게 필자의 걷기 예찬과 걷는 중 끌어올린 사색의 결과물을 즐기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하겠다. 정보와 사색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셈이다.
필자가 통일 이후 북녘으로 이어진 해파랑길을 걸을 땐 또 어떤
상상, 남다른 성찰로 우리를 자극할지 살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