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지음, 송필용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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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이 된 후 교과서에 실린 시인의 시에 딴지 거려는 이들이 있었다. 물론 정치적 함의보다 시 자체의 아름다움이 우선이라는 여론이 압도적이어서 계속 실릴 수 있게 되었지만 씁쓸한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 가슴 아팠다. 한편으론 도종환 시인의 시가 교과서에 게재될 정도로 시적 완성도와 대중적 공감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 이 책은 교과서에 실린 시들을 비롯하여 도종환 시인의 대표작을 총망라하고 있다. 시인의 한 시대를 정리하는 기념비적인 시선집이어서 소장 가치가 충분히 있다 하겠다. 시에 어울리는 그림도 곁들였는데 송필용 화백은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며 도종환 시인의 내면과 시가 지니고 있는 심상을 잘 살리고 있다. 여러 편을 두루 읽다 보니 하나 같이 빼어난 작품들이어서 몇 편만 가려서 추천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해인으로 가는 길]에 실렸던 시 몇 편에 더 각별하게 눈길이 간다고나 할까. 산경, 산벚나무 같은 작품들 말이다. 시인의 바뀐 세계관이 담겨있고 인생을 관조하는 원숙미도 배어 있어 그윽하게 읽을 수 있다. 또 노래가 된 시들도 흥얼거리며 읽어보았다. 흔들리며 피는 꽃 외에도 꽃씨를 거두며 등 그의 시에는 이미 아름다운 선율과 가락이 어려 있는 듯하다. 누구든 아름답고 깊은 시와 눈 시린 그림을 읽고 보면 흔들리던 마음결 차분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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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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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희와의 뜨겁고 아찔했던 사랑에 눈이 멀어 사제의 길을 내려놓고 사랑이 이끄는 대로 나아가려 했던 요한, 그러나 선택의 기로에서 요한은 끝내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게 된다. 우여곡절 가운데서도 요한을 이끈 것은 군데군데 놓여 있던 여러 겹 인연의 고리였다. 언제나 그 손길이 요한을 감싸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인연은 어쩜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 하겠다. 하나님의 높고 큰 뜻, 인간을 향한 섭리에 의한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그런데 요한은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을 그토록 듬뿍 받게 된 것일까? 요한 주변의 사람들뿐 아니라 하나님까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연유를 몇 가지 짚어본다.

 

1. 요한이라는 이름

 

정요한 신부, 그에겐 많은 이들이 배경이 되고 후원자가 되려 했으며 인도자를 자청했다. 심지어 별 상관없어 보이는 이들까지 요한 신부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정을 나누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런데 그들이 끌린 데에는 이름도 한 몫 했다 하겠다. 요한이라는 이름과 관련된 인연이 그를 한결 정겹게 봤던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장미가 다른 이름으로 불리어도 향기는 여전하다고 이름의 헛됨을 꼬집기도 했지만 한 인간을 대할 때 그의 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는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는 법이다. 이 책에는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평생을 담아두고 있던 이야기를 요한에게만 들려준 이들이 여럿 나온다. 그 중 죽음을 앞둔 독일인 토마스 수사의 눈물겨운 고백은 압권이라 하겠다. 그런데 토마스 수사가 요한에게 꼭 얘기를 들려주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깊은 영성과 인간적인 매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요한이라는 이름에 끌린 면이 더 강했다. 토마스 수사도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각별한 정을 느꼈음을 고백한다. 함경남도 덕원 소재 수도원이 있을 때 함께 했던 친구 수도사 요한 루드비히 신부에 대한 애틋한 기억 때문이었다. 그런 요한 신부의 그림자가 새내기 수사 수련생이던 정요한에게서 어른거렸던 것이다. 이 책엔 또 한 명의 요한이 등장하는데 소희와의 결별로 아파하며 성직을 포기하려던 시점에 생을 버리려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수도원을 찾아왔던 모니카의 아들이다. 그녀는 완고한 부모에게 미혼모가 된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죽음을 택하기 직전 요한에게서 위로를 얻고 마음을 돌이킨다. 요한의 일상적인 몇 마디 말이 그녀에겐 구원의 음성이었을까? 금세 평정을 찾은 모니카는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며 태어날 아기에게 요한이라는 이름을 붙이겠다고 약속한다. 요한의 사역이 같은 이름을 지닌 아이에 의해 면면히 이어지게 된 것이다.

 

2. 북한에서의 고초

 

이 책에는 유독 요한에게만 평생 묵이고 삭힌 얘기를 털어놓는 이들이 많다. 토마스 수사부터 소희와의 아릿한 사랑으로 성직을 포기하려던 시기에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며 하나님의 길을 넌지시 일러주던 할머니, 그리고 미국 뉴저지 뉴튼 수도원의 마리너스수사까지 다들 왜 요한에게 입을 열었을까? 그것은 요한의 인간적인 매력에 끌린 면도 있겠지만 이보다 더 큰 차원의 초월적 섭리가 작용했다 하겠다. 마리너스수사가 어떻게 요한의 인간미를 알았겠는가? 이 모든 일들은 인간의 역사를 주재하는 전지전능한 분의 섭리 말고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리고 그 섭리는 하나로 꿰어진다. 그들 얘기에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하나같이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시기까지 북한에서 당한 말할 수 없는 고초와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체험한 하나님의 현존이다. 이런 인연, 아니 하나님의 섭리가 그들을 하나로 잇는다.

 

토마스 수사는 함남 덕원에 있던 베네딕도 수도원에 근무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북한을 장악한 공산군은 그들을 자강도 옥사덕 수용소로 몰아놓고 강제노역을 시키는 등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그때 토마스 수사의 친구였던 요한 루드비히신부가 거름더미 위에서 순교하기도 했다. 북한 감옥에 갇혀 있던 토마스 수사는 독일 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귀국했다가 다시 남한에 베네딕도 수도원을 재건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땅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고난 가운데서도 끝끝내 이곳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 얘기를 들려주며 요한에게 용기를 북돋우던 토마스 수사님의 기도와 간구가 정요한을 일으키는 힘이 되었다.

 

평생 여장부로 약한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억척같이 사업을 일구던 할머니도 헤매는 손자를 보고선 여리디 여린 모습으로 돌아간다. 한국전쟁 시 흥남부두 철수 현장을 생생하게 들려주며 하나님의 섭리를 들려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죽고 못 살던 애틋한 부부. 그런데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피난민들의 빅토리아 메러디스호 승선을 돕던 할아버지는 어린애를 살리려다 자신은 배에 오르지 못하게 되고 만다. 평생 할아버지를 마음에 담고 살던 할머니가 들려주던 두 분의 곡절 많은 인생과 우리 민족의 고초를 전해 듣고 정요한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한다.

 

그런데 뉴튼 수도원 인수 차 들렀던 미국에서 마리너스 수사를 만나고 정요한은 하나님의 계획 앞에 전율한다. 마리너스 수사가 바로 빅토리아 메러디스호 선장으로 흥남부두 철수 작전을 이끌었던 것이다. 더구나 마리너스 수사가 성직을 택하게 된 계기가 젊은 엄마와의 약속 때문이었다는데 그때 아기를 업고 있던 이가 바로 할머니라니.

 

3. 모두가 사랑한 요한

 

그런데 이 모든 인연의 중심축엔 정요한이 놓여 있다. 그를 통해 얽히고설킨 인연이 하나님의 섭리가 되고 결국 은총으로 다가오게 된다. 요한에게 모두들 마음 깊숙이 담아두었던 얘기를 꺼냈는데, 거기엔 요한의 영성과 인간적인 매력이 작용하고 있다.

 

그의 영성은 얼마나 깊게 사무치는지 모를 정도이다. 요한이 과거를 담담하게 회고하고 있는 진술 방식이어서 정작 자신의 영성에 대해선 별로 언급이 없지만 몇 가지 사건이나 등장인물들과의 관계만 봐도 요한의 영성의 폭과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수도원의 종소리가 울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요한은 하늘에서 푸른 밧줄 같은 사다리가 은은하게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을 느낀다. 야곱의 사다리를 연상하며 그는 하나님의 현존을 느낀다. 인간에게 충만하게 흩뿌려지는 하나님의 은총을 체감한 것이다. 그는 수도원 하늘을 수놓는 별을 보고도 하나님을 느낄 정도였다. 십자가상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선 인간을 향한 지극한 사랑에 눈물겨워하기도 한다. 이렇게 그의 영성은 높푸르고 깊다. 요한은 자주 하나님의 음성도 듣곤 했다. 뉴저지 뉴튼 수도원의 숲에선 참나무 사이를 꽉 채우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기도 한다. 이러니 소희도 하나님에게 사랑을 양보할 수밖에.

 

또 요한은 인간적 감성에도 충실했던, 세속적 사랑도 목마르게 간구했던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냉혈한이 결코 아니었다. 벼락 같이 다가온 사랑 앞에 고뇌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던 그의 모습은 고결한 성직자보다 인간미 넘치는 솔직한 청년의 그것이었다. 하나님께 왜 대체 내게 이러시냐고 항변하던 그는 영락없는 피 끓는 청춘이었다. 거기다 너그러운 덕성과 빼어난 지성에다 업무 추진력까지 갖추었으니 모두들 그를 좋아할 밖에.

 

4. 요한을 가장 사랑한 이는?

 

그런데 많은 이들 가운데 요한을 가장 사랑한 이는 누구였을까? 다들 끔찍이도 요한을 아꼈지만 이보다 더 할 순 없달 정도로 간절한 마음을 담은 이메일을 보낸 이가 있다. 바로 모니카였다.

 

“어느 날 신부님의 소망이 이루어질 힘이 먼지 하나의 무게만큼 딱 모자랄 때 제 기도가 신부님께 보탬이 될 거라 믿을 뿐입니다.”(307쪽)

 

그러나 모니카 보다, 할머니보다 더 요한을 사랑한 분이 있다. 다름 아닌 하나님, 바로 그분이시다. 얼마나 요한을 사랑했으면 소희와의 그 깜찍한 모습, 결국엔 갑각류 등딱지에 박힌 칼날 같은 상처로 쩔쩔매는 것을 보고도 끝내 놓아주지 않으셨을까? 하긴 다들 그럴 줄 알고 있었다. 요한은 하나님의 일을 맡아야 할 사람이었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청춘이 내뿜는 광휘에 휘둘려 그에게 남성을 갈구하던 소희도 안타까이 마음을 접었고, 주변 모든 이들도 유독 각별하게 마음을 열었던 것이리라.

 

5. 인연...섭리...은총

 

하여 [높고 푸른 사다리]는 요한과 소희의 아릿한 사랑 얘기만이 아니었다. 인간 대 인간의 뜨거운 피, 들끓는 사랑도 담고 있지만 한 차원 높은 더 큰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배후에 흐르고 있는 아름다운 인연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인연은 넓고 긴 호흡으로 보자면 정교하게 설계된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 섭리는 결국 우리를 향한 그분의 말할 수 없는 은총, 결국 사랑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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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어린이 인권 여행 어린이 인권 여행
아렌트 판 담 지음, 알렉스 데 볼프 그림, 유동익 옮김 / 별숲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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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세프는 전 세계 어린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UN이 설립한 기관이다. 유니세프는 내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 프랜차이즈 야구팀이 후원하고 있기도 한데 간혹 전용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하기도 해 어린이 뿐아니라 이 지역 어른들에게도 친숙한 기관이 되었다. 이 유니세프에서 주관하여 1989년에 발표한 어린이 권리에 대한 조약이 유엔아동권리협약이다. 이 책은 협약 본문 40개조에 관해 소개하고 있는 어린이용 그림책이다.

책의 구성은 먼저 특정 국가에서 실제 발생한 사례를 소개한 다음 이와 관련하여 어린이들이 누려야 할, 어른들이 당연히 보장해 주어야 할 권리 항목을 정리하는 순으로 짜여져 있다. 실명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이들 이름과 관련된 기관들을 거명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어 지루하지 않고 실감나게 와 닿는다. 간혹 관념적인 이야기도 섞여 있는데 주제와 어울리는 것이고 내용도 어렵지 않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사례에서 소개하고 있는 경우가 주로 아시아, 아프리카 및 중남미 등 인권 개념이 희박하고 사회 경제적 조건이 열악한 나라들이어서 처음엔 조마조마하며 살펴 보았다. 혹 우리나라, 북한까지 포함하여,라도 나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끝까지 읽어 보아도 우리나라의 사례는 없었다. 휴~하고 안심하려다 문득 사례들 가운데 인권 선진국의 경우도 많았던 것이 기억나 안심만 할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네덜란드의 경우에는 인권 감수성이 너무 예민하고 섬세하달 정도로 아이들의 권리를 챙겨주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와 비교해보면 네덜란드에서 소중하게 여겨 보장해주고 있는 것들 가운데 상당수는 너무 경미하고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여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개념조차 없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나라 사례가 소개되지 않은 게 결코 다행스런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삽화도 인상적이다. 때론 정밀하게 묘사한 세밀화인 듯 하다가 어떨 땐 포스터 느낌이 들기도 하면서 색채와 형상으로 권리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하여 그림만 보고도 많은 것을 연상할 수 있었다.

자칫 교훈 풀어나가듯 지루하게 이어지기 십상인 주제를 실제 사례를 도입하고 주제에 어울리는 삽화를 곁들여 친근하고 실감나게 풀어나간 이 책은 어린이 뿐 아니라 어른들도 한 번 쯤 읽어보고 우리 사회에 대해, 인류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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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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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긴 꿈을 꾼 것 같다. 그 꿈의 폭과 깊이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고 깊었다. 독거노인 살인사건을 두고 얽히고설킨 연쇄의 고리가 사뭇 종잡을 수 없게끔 꼬여 나가 사건의 윤곽이 도무지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꿈의 결에 색다른 기운이 어려 있는 게 느껴졌다. 보통 추리물에서는 사건은 비록 해결되었다 해도 느와르적인 여운이 한동안 이어지기 마련인데 [몽환화]를 읽고선 왠지 머리가 가뿐해지는 게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매끈하게 포장된 도로를 느긋하게 달리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꼬인 실타래가 겨우겨우 풀리는 힘겨운 과정을 견뎌왔으면서도 묵직하고 찝찝한 응어리가 전혀 남아있지 않는 듯했다. 미스터리물을 읽다 겪곤 하는 악몽이나 흉몽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었다. 꿈자리가 깔끔했다.

 

왜일까, 이런 의외의 느낌은 뭘까? 조금 혼란스러웠다. 현실이든 픽션이든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난 것이면 논리회로가 엉키면서 사고를 그곳에 붙박게 한다. 어쩔 수 없이 곰곰 따져보게 만든다. 왜 섬뜩한 살인사건에 대한 얘기가 이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꿈결같이 다가올까? 혹 사이코패스처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한 탓일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헤아려보니 몇 가지 짚이는 대목이 있었다.

 

1. 아름다운 인연의 연쇄를 보여주고 있다.

 

추리물은 대개 질기디 질긴 악연에서 이야기가 비롯된다. 음모와 배반과 복수의 고리가 이어지며 사건의 얼개가 짜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섬뜩한 광기와 반사회적인 이상심리가 지배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며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런데 [몽환화]는 좀 다르다. 아니 달라도 사뭇 다르다. 아름답게 얽힌 인연의 연쇄가 여러 갈레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인연의 테마도 눈물겹게 인간적이다. 아니 반(反)추리물적이라 하는 게 좋겠다. 속죄와 보은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사건 해결의 전면에 등장하여 방향타를 쥐고 있는 단짝 가모 소타와 아키야마 리노는 관계없어 보이는 인연을 한 곳으로 잇는 두 축이다. 그들은 소울 메이트처럼 닮은꼴이었다. 믿고 선택한 길로 매진해 왔는데 어느새 미아가 되어버린 외로운 이방인들이었다. 수영과 원자력발전 연구라는 외길을 달렸는데 그게 무의미한 일이란 걸 알아차린 것이다. 그들로부터 여러 인연들이 엮이게 된다.

 

리노의 할아버지 아키야마 슈지, 그는 이번 사건의 희생자였다. 독거노인인 슈지 사건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미제 사건으로 묻히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우연히 도와주었던 유타에 의해 불씨가 되살아나게 된다.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그가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이제는 관계가 멀어져버린 아버지에게 범인을 꼭 잡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사건은 해결 쪽으로 급선회하게 된다. 유타의 아버지 하야세 형사가 사건 관할 담당이었던 것이다. 유타와 할아버지는 평소 편지를 주고받으며 멘토와 멘티 관계를 이어왔다. 그 과정에서 유타는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나가며 회복된다. 아버지를 원망하며 자신을 탓하던 유타가 할아버지의 곡진한 편지에 힘을 얻어 건전한 내면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비밀스런 카드를 교환하며 결국 사건을 해결하고야 마는 하야세 형사와 소타의 배다른 형 가모 요스케. 평소엔 데면데면 아빠를 외면하던 아들 유타가 마음을 열고 간곡하게 부탁한 까닭에 동기 유발되어 혼신을 다하는 하야세 형사와 가문의 비밀을 모두 안고 은밀하게 활동하던 가모 요스케도 인연의 힘이 연결한 관계였다.

 

소타의 중학교 시절 첫사랑이었던 이바 다카미와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녀가 돌연 결별을 선언한 탓에 소타의 청소년기는 까맣게 타들어갔을 밖에. 끈질긴 인연은 우연을 필연으로 돌리는 법. 콘서트장에서 만났다가 감쪽같이 사라졌던 다카미는 마지막에 소타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간의 전말을 들려준다.

 

2. 가문의 도덕적 책무라는 고전적 의제를 제기하다.

 

아련한 추억 속의 그녀 이바 다카미가 정체를 밝혔을 때 소타는 왠지 어른스런 모습에 아득해한다. 자신과는 다른 낯선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그녀와 대화하는 가운데 다카미가 왜 중학교 시절 자신을 떠나갔는지, 또 왜 성숙해 보이는지 알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문의 숙명 때문이었다. 이바 가문과 가모 가문의 도덕적 책무가 그들을 갈라놓았던 것이다. 또 가문의 운명을 의식하고 받아들인 다카미였으니 소타같은 조무래기 철부지와는 달랐을 테고. 요즘은 가문의 전통을 잇는다는 개념이 거의 사라진 시대다. 더구나 이익을 얻는 것과는 무관한, 가문이 진 빚을 갚아야 하는 부담스런 일이라면 다들 혀를 내두르기 십상이다.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런 의제, 어쩜 케케묵은 덕목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것도 두드러지게 드러나 공치사를 받는 게 아니라 몇 대에 걸쳐 은밀하게 이어져오는 사회에 대한 속죄와 보은이라는 테마를 말이다. 마성의 씨앗을 유포하여 확산시켰다는 자책에서 비롯된 가문의 원죄를 짊어지고, 사회에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채의식을 기꺼이 받아들인 이들. 그들은 경찰관 가모 가문과 의사 이바 집안에 주어진 의무감에 오롯이 복무하였다. 이런 작가의 설정은 나이 든 독자들에게는 과거의 가치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젊은이들에겐 무감했던 아름다운 덕목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고요히 자신과 가문의 전통을 짚어보는 가운데 마음결이 정돈되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이끈다.

 

3. 루저(loser)들에게도 발언권을 주는 인간미가 담겨 있다.

 

현대 사회체제는 승자 독식 시스템이다. 루저에겐 재기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몽환화]엔 루저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들은 범인 쪽, 악한들이 아니다.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선한 역을 맡은 이들 가운데 낙오자들이 포진해있는 것이다. 살인사건 관할 담당인 하야세 형사는 불륜 탓에 이혼하고 아들 양육권마저 빼앗긴 채 홀로 쓸쓸하게 맞을 정년 이후를 생각하며 하루하루 시간만 죽이던 자였다. 그런 쓸모없는 자에게도 히가시노는 핀 조명을 비춘다. 이 사건 해결 과정에서 의미 있는 발언권을 부여하여 자존감을 맛보게 한 것이다. 용기백배 분발할 수 있는 장치를 여럿 설정해두고 있다. 낮은 직급에 영향력도 별로인 그의 얘기를 상부 엘리트들이 귀 기울여 들어주게 배려한다. 주변인에서 주역으로 우뚝 서게 만든 것이다. 루저들에게 패자 부활의 기회를 제공하여 다시 치고 올라가게 만드는 작가. 이보다 더 따뜻한 얘기는 없을 듯하다.

 

밴드의 리더에서 급전직하 추락해버린 오스기 마사야. 완전 인생 막장으로 몰린 자다. 그가 어느 날 리노와 사촌동생인 도모키를 교도소로 부른다. 할아버지에 대한 일을 사과하던 그는 리노에게 의외의 말을 건넨다. 자살한 사촌 나오토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의 눈부신 재능을 일깨워준 것이다. 궁지에 몰린 자로 하여금 타인이 잠재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발언하게 자리를 마련해준 게이고의 설정에 다시 한 번 무릎을 치고 말았다. 더구나 마사야의 격려에 고무되어 얼음공주 리노의 마음이 움직이는 기적까지 연출하고 있으니 뭉클해질 수밖에.

 

4. 사회적 이슈에 대한 인간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추리물에서도 사회를 향한 메시지를 던질 경우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 범인을 악한으로 몰고 간 사회적 환경에 대한 환기 정도에 그치기 일쑤다. 이런 스테레오 타입도 [몽환화]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현재 일본 사회, 아니 온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 이후 원자력 발전 중단과 발전소 해체라는 사회적 요구에 대해 히가시노는 인간적인, 아니 지극히 합리적인 대안을 들고 나왔다. 의식 변화에 방점을 둔 그의 제안은 울림이 무척 깊다. 소타가 전공하고 있는 원자력공학은 현재 존폐위기에 처해 있다. 전공자들은 취업도 취업이지만 젊음을 바친 학문이 사회악 취급당하는 가운데 자존감 손상으로 허무에 빠져 있다. 그런 소타가 몽환화 사건을 겪으며 사회적 책무에 대해 새삼 눈뜨게 되고 이를 토대로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그게 자신이어도 괜찮지 않겠냐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어차피 대세는 탈원전 쪽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누군가는 궂은일을 기꺼이 담당해야만 깔끔하게 마무리될 테니 원자력공학의 사회적 필요성은 여전하다고 인식한 것이다. 다들 선망하는 일, 탄탄한 미래가 보장되는 분야에도 인력이 배치되어야 하겠지만 부담스럽고 구차한 쪽에도 인재가 투입되어야 사회적 엔트로피의 과도한 증가를 피할 수 있다는 작가의 소신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런 차원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탈원전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하겠다.

 

5. 꿈을 꾼 후에

 

이렇듯 히가시노 게이고의 묵이고 삭힌 내공이 배어 있는 [몽환화]는 추리물의 정형을 무색하게 만들며 여러 모로 새로운 지향을 열어 보이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사건 현장, 복수와 음모가 난무하는 허무한 느와르가 아니라 공감과 위로와 회복의 과정을 꿈결처럼 엮어나가고 있다. 아름다운 인연들이 선하게 이어지면서 끌어주고 밀어주어 다들 슬기롭게 자신과 가문의 미궁에서 빠져나오게 이끈다. 개인들이 그러하듯 우리 사회의 난마처럼 얽힌 문제도 지혜를 모으면 해결하지 못할 게 없다는 것도 일깨우고 있다. 그래서 읽는 내내 어쩜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먼 곳으로 혹은 어린 시절로 여행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리라. 정말 몽환적이었다. 그러니 좋은 꿈을 꾸고 난 다음 느껴지는 가뿐한 여운에 잠겨 있을 밖에. [몽환화]에서 비롯된 깊은 울림에 취해 한동안 그 자장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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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원시적이라고? 천만에 복수는 사고하는 인간의 반사작용이야. 행동과 일관성의 복잡한 혼합물로, 지금까지 인간 외의 다른 종은 도달하지 못한 영역이라고. 진화론적으로 말하자면, 복수의 실행은 그 자체로 너무 효과적이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가장 복수심이 넘치는 사람만이 살아남았지. 복수 아니면 죽음. 서부 영화 제목 같지? -(중략)-복수는 문명의 기초야.(456쪽)

 

이런 현학적인 내용의 이메일을 보낸 S²MN는 누구일까? 모든 과정을 정교하게 세팅해 두고 마치 전지적 관찰자 시점에서 빤히 내려다보듯 군림하던 복수의 화신은 대체 누구였을까? 그리고 정체를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던 그(혹은 그녀?)는 왜 어이없게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을까? 그게 자신을 모욕했던 세 사람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복수라고 생각해서였을까? [네메시스]는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투성이로 점철된 스릴러이다.

 

복수는 다층적으로 얽히고설켜 도무지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보통 스릴러물의 전형은 두드러진 악한이 한 명으로 수렴되기 마련인데 [네메시스]에서는 이런 스테레오타입도 적용되지 않는다. 처절한 복수의 다른 한 축을 이루는 이는 사실 눈이 좀 먼 상태이다. 그러니 자칫하면 감정에 휘둘려 증거를 남기기 십상인데 그(혹은 그녀)는 의외로 담담하다. 이글거리는 복수의 감정을 냉정하게 통제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교묘한 속임수로 선량한 이웃에게 회복 불능의 장애를 안겼던 악동이자 위장술과 연기의 대가인 그(혹은 그녀)는 은행 강도로 위장하여 사적인 복수를 실행한다. 사랑이 미움으로, 미움이 다시 짙은 증오로, 마침내 처참한 복수로 귀결되는 과정에서 울렁거릴 만도 한데,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치밀하게 구성한 로드맵대로 결행했던 것이다. 더구나 희생자들은 그와 가장 가까웠던 둘이었으니.

 

이런 냉혈한들의 속내는 어떨까? 그, 혹은 그녀의 심리를 들여다 본 에우네 박사의 견해가 무척 흥미롭다.

 

“자신이 독창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너무 과장된 나머지 자신은 끝없이 성공해야만 한다는 꿈에 집착하는 사람을 말하지. 이런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모욕한 사람에게 복수하고픈 욕구가 다른 욕구보다 강한 경우가 많아. 이걸 ‘나르시시스트의 분노’라고 부르네. 미국의 정신분석가인 하인즈 코헛은 이런 사람이 무슨 수를 써서든 자신이 당한 모욕(사실 이 모욕이란 것도 보통 사람에게는 별거 아닐 수 있어)을 갚아주려는 과정을 설명했지. 예를 들어, 표면적으로는 그냥 평범한 거절을 당했을 뿐인데도 이런 나르시시스트는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끊임없이, 강박적일 정도로 단호하게 노력한다는 거야. 필요하다면 죽음까지도 불사하면서.”(592쪽)

 

에우네 박사는 둘의 내면을 고스란히 짚고 있다. 자존감 과잉, 혹은 오기로 똘똘 뭉쳐진 이들의 과욕, 또는 왜곡된 소신이 복수로 나타난 것이라는 얘기다. 죽음도 불사할 정도로 몰입한 그들이니 모든 일에 완벽을 기할 밖에. 하여 그, 혹은 그녀의 정체는 끝내 오리무중이었다. 단서는 거의 없거나 변형되고 위장된 상태여서 증거라고 할 것도 없는 지경이다. 집요한 복수광들은 해리의 두뇌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늘 한발 앞서간다. 그래서 그들은 일견 승자인 듯 보인다. 노여움과 아픔에 치를 떨며 범인을 좁혀가던 해리 반장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변죽만 울리다 스러져버리는 꼴이라니.

 

“사랑과 미움 모두 전쟁에서 이긴다고. 그 두 가지는 샴쌍둥이처럼 떼어놓을 수 없어. 전쟁에서 지는 건 분노와 연민이야.”

“그럼 우리 둘 다 지겠군요.” 해리가 신음했다.(586쪽)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복수의 아이콘은 해리 반장이다. 끈질긴 집착도 그의 트레이드마크라 하겠다. 그는 불쑥불쑥 돋아나는 사적 복수 감정을 공적인 임무로 치환할 줄도 안다. 그리고 알콜 중독과 금단 증상을 오가면서도 초인적인 오기 하나로 버텨낸다.

 

“우리 경찰이야말로 차갑고 이성적인 응징으로 위장한 이 사회의 불타오르는 복수 아니겠어? 그게 우리 직업이라고.”(257쪽)

 

치밀한 두뇌와 창의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 해리는 점점 사건의 실상에 다가가게 된다. 해리의 통찰력은 전지적 시점에서 메일을 보내던 이의 그것과 닮아 보인다. 홀레 반장의 눈에 자살과 은행 강도 사건의 본질이 빤히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해리는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걸 직감한다. 더구나 자신을 안나 베트센의 살인범으로 몰아가려는 음모에 직면하면서 이런 의구심은 한층 구체화된다. 결국 해리는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악의 축을 발견하고 만다.

 

카타르시스를 거쳐 서서히 결말로 향해가던 이야기는 여기서 급반전이 이루어진다. 여러 형식을 오가며 변주를 거듭하던 교향곡에 새로운 유형의 갈등구조가 덧보태지며 전혀 다른 유형의 악장이 전개되듯 말이다. 하지만 그 악의 축은 곧 발각될 것으로 보인다. 그(혹은 그녀)의 본심은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냉정한 복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잘 나가는 동료에 대한 질투심의 발로이자 사적 이윤 추구라는 목적을 위해 악행을 세팅한 자들이니. 결국 감정이 잔뜩 개입돼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데 눈이 먼 경우는 얼마 가지 않아 꼬리가 잡히는 법이다. 그런데 빤히 보이는 그(혹은 그녀)를 체포하고 응징하지 못한 채 이 책은 끝을 맺는다.

 

한 편의 복잡다기한 교향곡이 끝내 미완성인 채 막을 내린 셈이다. 치밀한 플롯에 경탄하며 무릎을 친 게 몇 번인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던 요 네스뵈의 필력으로 미뤄 볼 때 결말을 이렇게 허술하게 놓아둘 리 없을 텐데…. 못내 아쉬운 감에 휩싸여 허무하기까지 한 마음을 추스르고 헤아려보니 작가의 의도가 읽혀지는 듯했다. S²MN, 곧 NeMeSiS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하여 해리가 악의 축을 일망타진하고 마침내 복수의 고리를 끊는 것은 다음에나 기대해야 할듯하다. 복수의 여신이 들고 있던 채찍이 국가 공권력을 상징하는 칼로 슬몃 바뀌며 정의의 여신으로 화하는 장면 말이다. 아니 이게 어쩜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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