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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우상과 이성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막 읽으려는 즈음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시대의 큰 별 하나가 떨어졌다는 비보였다. 한국 지성계의 사고체계를 뿌리째 흔들어놓았던 리영희 선생이 타계한 것이다. 의식화의 원흉이란 소리를 들어가며 도그마가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신선한 바람을, 이성의 논리를 주입하려 필생의 노력을 기울였던 스승이고 나또한 [전환 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등의 저작을 통해 열렬히 사숙했던 터라 한참동안 먹먹한 기운이 가시질 않았다. 선생이 이루고자 했던 허위의식 타파와 의식의 합리화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도도한 물길을 이뤄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형을 바꿔놓았다 하겠다.
마음을 추스르고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다시 잡았는데 어느 순간 벽에 부딪힌 듯 막막해지고 말았다. 오늘 여기, 21세기 대명천지에도 여전히 리영희 교수가 몰아내고자 애썼던 우상이 횡행하고 있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독선과 아집으로 점철된 자유 시장 주의라는 유령 말이다. 장하준 교수도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통해 우상과 이성에 대해 발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여전히 공고한 아성을 구축하고 있는 자유 시장 주의라는 우상의 실체를 또렷이 드러낸 다음 이성적 논리로써 하나하나 매스를 가하고 있었다. 씁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실상이라 읽는 내내 감마파가 뇌 속에서 어지럽게 산란하는 듯했다. 그의 주장은 일견 무모해 보인다. 시지포스의 돌처럼 애써 굴려 올려도 다시 떨어져버릴 것 같은 벼랑에 몰려있는 듯하다. 주류 경제학계에서 이단시당하는 감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 귀 기울여 보면 의식 있는 지성계에서부터 조금씩 끓어오르는 게 감지된다. 어쩜 조만간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다. 논의가 확장되고 뜨거운 쟁점으로 부상하게 되면 아마 학계가 혼란스럽게 요동치지 않을까?
그런데 읽어나갈수록 의외인 건 장하준 교수의 주장이 너무 당연한 얘기라는 점이다. 이런 상식적인 주장이 역설로 들리고 파격적이라 폄하되고 있다는 사실이 한국 지성계, 아니 인류의 지적 풍토가 얼마나 전근대적 허위의식에 감염되어 있는지 짐작케 해준다. 이데올로기적 세뇌가 어찌나 강렬하고 치밀하게 이루어졌으면 우리의 무의식에까지 똬리를 틀고 있을 정도일까? 그러니 이렇게 이성적인 논리에도 불편해지는 게 아닐까?
자유 시장 주의자들이 구축한 신화
장하준 교수는 자유 시장 주의자들이 터무니없는 신화를 구축한 다음 이를 우상처럼 신봉하고 있다고 일관되게 말한다. 오로지 시장 일색으로 모든 경제 문제를 바라보고 있는 그들의 색맹적 안목에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 시장 주의자들은 대뜸 이렇게 윽박지른다.
시장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시장의 흐름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12쪽)
참여 정부 시절에 벌어졌던 재벌 그룹과 일부 메이저 언론의 행태가 오버랩 되었다. 좌파 정부의 불필요한 간섭과 정책적 개입이 반기업 정서를 부추겨 국민들과 기업을 갈라놓았고 이로 말미암아 기업은 투자를 기피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시장의 효율성이 떨어졌다고 몰아붙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니 말이다. 시장의 효율성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맡겨두면 모든 것이 자동 조절된다는 발상이다.
자유 시장 주의자들은 시장의 자동 조절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빈곤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것도 빈자들이 게으른 탓으로 돌리고 있다. 국가 전체적으로도 가난한 이들에게 발목이 잡혀 국부가 늘어나지 않는다고 강변한다. 가난한 이들이 오히려 궁핍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 하에 혁신적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건 싹 무시하고서 말이다.
그들은 국제 경제 분야에 있어서도 자유 무역 정책을 추진해야 경제 성장에 유익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니 정부의 유치산업 지원정책 같은 보호무역적 발상에는 기겁을 할밖에.
그들이 쌓아 놓은 또 다른 신화 가운데 인플레이션에 대한 과도한 공포심이 있다. 이는 다분히 정부의 양적 완화 정책에 대한 예방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개발한 논리이다. 그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경제학적 소양이 부족한 정부 당국자들은 시장에 관여하지 말고 전문 경제학자들에게 맡기라고 말이다.
정부 개입을 정당화하는 이론이 아무리 그럴싸해도 정부 정책의 성공 여부는 많은 부분 그것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사람의 능력에 달렸다. 다른 나라들도 간혹 그렇지만 특히 개발도상국의 정부 관료들은 경제학 훈련이 잘 되어 있지 않다. 좋은 경제 정책을 실행에 옮기려면 경제학 지식이 필수적인데도 말이다. 그런 관료들은 자기의 한계를 깨닫고 선별적인 산업 정책 등 ‘어려운’ 정책에 손대지 말고, 정부 역할을 최소화하는 ‘쉬운’ 자유 시장 정책을 고수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자유 시장 정책은 일거양득이다. 가장 좋은 정책일 뿐 아니라 관료의 자질에 그다지 좌우되지 않기 때문이다.(316쪽)
이렇듯 자유 시장 주의자들이 공고한 아성을 쌓아 자신들의 독점적 사익 추구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으며, 이를 대중들이 우상처럼 내면화하도록 만드는 데 모든 역량을 동원하고 있음을 조목조목 밝히고 있다.
우상의 실상을 이성적으로 드러내다
장하준 교수는 자본주의 자체를 불신하는 게 아니다. 자유 시장 자본주의의 문제점과 폐해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유 시장 주의가 유일무이한 방식이 아니라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 물론 그게 최선의 체제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를 간과하고 자유 시장 주의를 강변하는 이들에게 장 교수는 우선 자유 시장이란 것 자체가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개념이라고 못을 박는다.
자유 시장이란 없다. 단지 그 시장을 지탱하고 있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여러 규제를 당연시하기 때문인 것이다. (23쪽)
실은 무수히 많은 규제들이 존재함에도 이에 대한 감각이 없기 때문에 정부 개입의 진공 상태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는 자유 시장 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유 시장 개념이 그들의 정치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조작한 이데올로기로 보고 있다.
규제의 도입을 반대하는 것은, 그 규제를 통해 보호될 권리들을 부정한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 표명에 불과하다.(30쪽)
일례로 출범 초부터 비즈니스 프랜들리(business friendly)라 공언하며 친기업적 지향을 밝힌 현 정부 하에서 오히려 간섭이 늘어났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그것도 납득할만한 근거 제시도 없이 하향식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말이다. 시장 자율을 예사로 침해하면서 겉으론 자유 시장을 부르짖는 이율배반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규제 완화 등 자유 시장 주의적 주장이 모두 기득권층의 정치 경제적 이익을 위한 구호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장하준 교수는 자유 시장 주의자들이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이들을 모두 이기적인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만 보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은 면이 더 많다. 피도 눈물도 없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현실에선 찾아보기 힘드니까 말이다.
도덕성은 착시 현상이 아니다. 고객을 속이지 않는 상인,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 쥐꼬리 월급에도 불구하고 뇌물을 받지 않는 공무원 등 사람들이 이기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은 대부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보상과 제재 장치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우리가 하는 이기적이지 않은 행동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없다.(79-80쪽)
국제 무역에 있어서도 자유 시장 주의들이 주장한대로 자유 무역정책을 추진한 나라보다 보호무역 정책으로 자국의 유치 산업보호에 힘쓴 나라들이 결과적으로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더 많이 이루었음을 장하준은 실증해보이고 있다. 자유 시장론자들의 주장에 대한 통렬한 반박인 셈이다.
자유 무역, 자유 시장 정책은 제대로 작동한 적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부자 나라들은 자신이 개발도상국이었을 때에는 그런 정책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지난 30년 동안 이 정책을 도입한 개발도상국들은 성장률 둔화와 수입 불균형 등의 부작용을 떠안아야 했다. 자유 무역, 자유 시장 정책을 사용해서 부자가 된 나라는 과거에도 거의 없었고, 앞으로도 거의 없을 것이다.(107쪽)
장하준 교수는 또 인플레이션에 대한 강박관념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인플레이션 공포심은 자유 시장론자들이 주입한 것으로 장기적 안정과 경제 성장, 그리고 인류의 행복을 희생해서라도 금융 자산 보유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추진하려는 사람들이 대중을 겁주기 위해 사용해 온 ‘무서운 망태 할아범’ 같은 것에 불과(93쪽)하기 때문이라고 본 때문이다.
게다가 어려운 정책을 잘 이해하고 정부에 정확한 경제 정책을 제공한다고 여겼던 경제학자들이 실은 경제 위기를 초래한 주범이었다는 사실도 뼈저리게 짚고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경제학자들은 2008년 위기를 불러올 환경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사실 그들은 1982년 제3세계 채무 위기, 1995년 멕시코 페소 위기, l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1998년 러시아 위기 등 1980년대 초 이후 크고 작은 수십 개의 금융 위기에도 책임이 있다. 금융 규제 철폐와 무제한적 단기 이윤 추구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해 준 것이 바로 그들이다. 더 넓게 생각하면 그들은 경제 성장의 둔화, 고용 불안과 불평등 악화, 그리고 지난 30년간 전 세계를 괴롭혀 온 잦은 금융 위기를 불러온 정책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주장해 왔다. (322쪽)
97년 아시아 외환 위기와 2008년 세계 동반 금융 위기를 초래한 주범이 바로 자유 시장 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권고대로 정책을 편 결과가 그런 극단적 파국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하니 이들의 과오가 역사적으로 명확히 입증된 셈이다. 아찔한 것은 이런 비극적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우상에 목매달고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장하준 교수는 이렇게 자유 시장 주의자들이 쌓아놓은 신화, 그들이 숭배하는 우상을 하나하나 허물고 있다.
시장 하나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면 소금만 먹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275쪽)
그럼 도대체 어떤 자본주의여야 한다는 말인가?
자유 시장 주의자들의 우상을 이성적으로 허문 다음, 장하준 교수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 사회를 제안하고 있다. 비판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천 가능한 대안을 형상화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틀 내에서 말이다.
그는 우선 자본주의를 운영하는 여러 방식 가운데 가장 걸맞은 모델을 선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자신은 개인적으로 스웨덴 식 대안을 선호한다는 취향까지 내비치며 말이다. 둘째로 인간의 합리성에 한계가 있다는 인식 하에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정보처리능력 범위 내에서 경제를 운영하게끔 말이다. 그러면 예측 불가능한 파국을 낳을 파생금융 상품 같은 건 만들지 않을 테니. 또 인간성을 신뢰하고 공익 추구를 보상하는 네트워크를 결성하여 공정한 보수를 지급하고 실패자들에 대한 재기의 기회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라고 권고한다. 거기다 정보산업에 밀려 퇴물 취급을 받고 있는 제조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금융 부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왜소해진 실물 부문의 확대를 도모해야 하며 더 크고 적극적인 정부 활동이 요구되고 이에 대한 거시적 안목의 공부도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특히 세계 경제 시스템이 개발도상국을 불공평하달 정도로 우대해야 한다고까지 나아가고 있다. 그래야 세계 경제 시스템의 안정성과 지속 가능한 성장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자유 시장 주의 일변도에서 벗어난 대안적 자본주의 체제를 제안하고 있다.
이제 불편해질 때가 왔다.
그의 제안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메시지처럼 자못 비장하게 들린다. 그는 대안적 자본주의를 구축하기 위해 시민 각자는 경제주체로서의 권리를 기꺼이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 시장 주의자들의 허구적 주장에 맹목적으로 동조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하며 이와 관련된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참여하자고 호소한다. 이는 개인적으로 번거롭고 사회 전체적으로도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불편함이 뒤따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대가를 기꺼이 치를 때에야 비로소 우상의 신화가 허물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권익을 제대로 지켜내는 것은 물론 경제 사회 전반에도 이바지할 수 있을 테고. 하여 더 큰 평화를 위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와의 불화를 감수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의 상황 인식이, 고고한 외침이 일견 메아리 없이 공허하게 보이나 조금씩 울림이 살아나고 있으니 너무 낙심할 일은 아닌 듯싶다.
다시 우상과 이성
장하준 교수의 많은 논증과 제안도 결국 우상과 이성에 대한 분별로 수렴된다 하겠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통해 주류 경제학계가 구축한 지배 이데올로기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자유 시장 주의자들이 쌓아올린 도그마에 딴지를 건 장하준 교수는 결국 우상을 파괴하려 한 셈이다. 그런데 그 작업이 결코 거칠어 보이지 않고 미세하고 정교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게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찬찬히 논리적으로 설득하여 누구도 부인 못하게끔 공감 쪽으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그는 자유 시장 이론가들이 진실이라고 팔아 온 사실들에 대해 Communist manifesto나 Una-bomber 방식의 과격한 배제와 무시가 아닌 이성적 근거에 따른 논박을 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다른 지향을 보이는 이들까지 숙연하게 경청할 밖에. 더 바라기는 양식 있는 자라면 우상의 미몽에서 벗어나 이성의 논리에 자연스레 수긍하게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장하준 교수의 저작을 꼼꼼하게 읽는다면 분명 그런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 믿는다.
사족 : 오세훈 시장에게 이 책을 권한다.
최근 생뚱맞은 뉴스에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렸던 기억이 난다. 초등생 무상급식 조례안이 서울시 의회에서 통과되자 망국적 포퓰리즘 정책으로 대한민국이 무너질 거라며 개탄한 이가 있었다는 소식 말이다. 차세대 대권주자로 부상하고자 막 등용문을 오르려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벌인 해프닝이다. 그는 무상급식 실시와 같은 정부의 대중 영합주의 정책이 성장 잠재력을 갉아먹어 결국 대한민국호가 난파하고 만다고 강변하였다. 장하준 교수가 통렬하게 논박했던 자유 시장 주의자들의 생각과 어쩜 그리 닮았는지. 내심으로 정말 그런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 이슈 메이커로 부상하기 위해 벌인 노이즈 마케팅인지 분별은 되지 않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본다면 그의 천박하고 냉혹한 머리와 가슴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사회 전체를 아우르겠다고 도전장을 내민 지도자의 의식이 저 정도인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고. 하여 오세훈 시장이 이성적인 분별력을 지닐 수 있게끔 이 책을 슬몃 건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