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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심장부에서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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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대체 어디까지가 실제 벌어진 일이고, 또 무엇이 극단적 고립에서 비롯된 환상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심지어 주인공인 마그다조차 자신이 풀어내고 있는 얘기의 리얼리티를 신뢰하지 못할 정도이니.

그것은 진짜 이야기인지 모른다. 혹은 어쩌면 나는 내내 착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아버지는 결국 죽지 않았는지 모른다.(234)

하지만 현실이든 착각이 빚어낸 가상적 픽션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나 싶다. 이 모든 일들은 마그다의 내면이 오롯이 투영된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굳이 분별할 필요가 없을 듯 하기에 말이다. 그녀의 심경을 읽는데 환상이면 어떻고 실상이면 또 무슨 소용이 있으랴.

마그다는 철저하게 고립된 외톨이였다. 외견상 여럿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으로 교감하며 의사와 감정을 긴밀하게 나눌 만큼 정서적 동질감을 느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이글거리는 내면을 지니고 있었다. 본원적인 성향이 자존감을 느끼며 타인과 의미 있게 소통할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사회적 자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충족되지 않는 현실에 갈급해 할밖에. 하여 그 목마름을 해소하려고 신분을 넘어 헨드릭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또 아버지라는 권위를 제거해고자 나서는 등 일탈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고. 아니 그런 것들을 꿈꾸었을 수도 있었고.

결국 나는 혼자 살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만약 내게 미지의 곳 한복판에 있는 펠트 한 가운데에서 허리까지 묻혀 살라는 운명이 주어졌다면, 나는 그렇게 살 수 없었을 것이다.(228)

밤이면 밤마다 생겨나는 감정들을 고갈될 때까지 세도록 한 기계도 아니다. 내게는 자리를 바꿔 넣을 조약돌, 청소할 방, 이리저리 옮길 가구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내게는 얘기할 수 있는 형제나 아버지, 어머니가 필요하다. 역사와 문화가 필요하다. 희망과 포부가 필요하다. 행복해지기 전에 도덕의식과 목적론이 필요하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나 혼자다. 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다시 혼자다. 역사적 현재 속에서 혼자다. 헨드릭도 갔고 안나도 그를 따라갔다.(229)

생래적으로 혼자임을 못 견뎌하던 마그다는 결국 자신의 처지가 밀폐된 공간에 옭죄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는 그 질곡에 저항하게 된다.

내가 스스로의 역사를 만든 것은 진정한 억압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내 아버지를 섬기고 하녀들에게 명령을 하고 집안일을 꾸려가며 세월을 보내는 삶의 무료함에 대한 반발이다.(245)

집행관에게 철사통을 들려 이곳으로 보내 농장 문들을 봉해버리게 한 다음 나를 그들의 마음에서 몰아내버렸는지 모른다. 사람은 좁은 공간과 마찬가지로 넓은 공간에도 갇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는 이미 끝나버렸고(233)

그리고 소통을, 대화를 나눌 상대를 그녀는 간절히 원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이다.(240)

그러나 현실에선 도무지 이룰 수 없다는 걸 안 그녀는 결국 하늘을 올려다보고 만다. 결국 마지막엔 환청까지 들리고, 그 환청을 불러일으킨 가상적인 이들과 소통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와 교감하는 가운데 마그다는 자신의 내면을 고요히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행한 극단적 행동의 원인을 서서히 파악하게도 되었고.

목소리들이 말한다. 외부의 적과 저항이 전혀 없고 숨 막히는 협소함과 규칙에 갇히면 사람은 결국 모험으로 돌아서는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내가 그들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면 그들은 내가 무료해서 나의 삶을 허구로 만들었으며 나를 비난한다. 그들은 내가 전략적으로 스스로를 실제 나보다 더 폭력적이고 더 변화가 많고, 더 고통스러워하는 존재로 만들었다며 나를 비난한다. 마치 내가 책을 읽듯 나 자신을 읽다가 재미없어지자 옆으로 밀치고 스스로를 만들어내기라도 한 것처럼.(244)

모험적으로 돌아선 선택이 자신을 옭죄는 구조적 질곡, 가상적인 적의 대명사격인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길 외에 다른 대안이라곤 없는 궁벽한 상황이 마그다의 고뇌와 분노, 그리고 일탈을 낳은 근원이었던 것이다.

예스라는 말밖에 하지 못하던 노예에게 노라는 말 외엔 하지 않았고 그것이 내 모든 고뇌의 출발점이었다.(245)

그녀는 결국 하늘과라도 소통하고자 하는 간절한 몸짓으로 주변의 돌을 쌓아 스페인어로 자신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대상에게 얘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녀만의 언어로 자신의 울분을, 진솔한 속마음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나는 세상에 정의가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하늘에서 온 말들은 답보다는 질문이 더 많아지게 한다. 나는 보편적인 것에 질렸다. 나는 진실에 이르기 전에 죽을 것이다. 나는 분명히, 진실을 원한다. 하지만 결말을 훨씬 더 원한다.(249) 

돌을 12피트 높이로 쌓아 퀴에로 운 오트르(다른 사람이 필요해요.) 라고 썼으며 다시 손 이솔라도(나는 외로워요)라고 썼다.(253)

아버지에게, 헨드릭에게 아니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것 아니었을까? 

현실과 환상이 일관성 없게 교차되고 내러티브의 시점도 과거인지 현재인지 애매하기만 한 이 난해한 작품을 쓴 쿳시는 결국 마그다의 얘기를 통해 궁벽한 사막, 고립된 외톨이의 지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인간미가 넘치는 이들이 자존감을 느끼며 아름답게 소통하는 곳을 지향하지 않았나 싶다. 그곳은 신분의 벽도 없고 아버지와 딸의 수직적 권위 같은 것도 사라져 누구나 존중받는 사랑의 공동체이기에 좌절하고 절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마그다처럼 정서적 불안정으로 인해 일탈을 꿈꾸거나 실행하는 극단적인 선택은 시도조차 않게 될 것이고. 그런 세계를 그려보이고자 쿳시는 착각 속에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마그다의 얘기를 빌어온 게 아닐까.

헨드릭과 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 때문에 망가진 걸까? 혹은 이야기가 어딘가에서 잘못됐고, 만약 내가 더 부드러운 형태의 친밀감을 향해 차츰차츰 나아가는 길을 찾았더라면, 우리는 모두 행복해지는 법을 배울 수 있었을까? 혹은 불과 얼음의 사막은 우유와 꿀의 나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연옥일까?(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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