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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쭙잖게도 나는 노동조합 조합원이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인가 싶겠지만 메이저 언론으로부터 의식화의 원흉으로 지목받고 있는 교원 노조 소속이니 조금 색다른 게 아닐까 한다. 어떤 이들은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조합원 신분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독립운동 하는 셈이라고 말할 지경이니 말이다. 그러나 돌아볼 때마다 뾰족한 수도 없고 두드러진 활동도 하지 않는 듯하여 이건 뭐, 영 신통찮네 하는 자괴감에 고개를 들지 못하곤 한다.
그런데 오늘 더욱 자괴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일그러진 내 모습이 고스란히 비치는 또렷한 거울을 만난 것이다. [생각의 좌표]에 드러난 홍세화 님의 내면은 맑고 고요한 그러나 유장함이 감도는 명경지수 같았다. 잡스런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명예와 권력에 대해 초연하다는 걸 단박에 느끼기에 누구나 그 앞에선 스스로 무장해제해버릴 정도로.
우선 자신의 내면, 스스로의 삶에 대한 자아비판부터 가하는 그의 이야기는 순도가 높을밖에. 어린 날의 미성숙했던 의식의 흐름을 솔직히 드러내고 진정어린 반성을 가하고 있었다. 그런 다음 시선을 우리 사회로 돌려 허위의식에 빠져있는 적나라한 실상과 그에 이르게 된 원인을 꼼꼼히 짚고 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반화된 논거로 우리 사회 정신세계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얘기엔 비정하고 냉혹한 감이 배어있지 않아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비판은 하되 우리 사회를 향한 따뜻한 충정으로 발언하는 게 읽혔기에 말이다.
나는 노동자로서의 의식을 지니고 있는가?
나는 노조원이다. 그런데 내가 노조원이 맞기는 한가 자문할 때가 많다. 우선 교사가 웬 노동자냐며 백안시하는 이들을 대하면 시각을 교정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보단 피곤하게 뭔 잔소리람 하며 외면하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선과 총선 때에도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진보 정당에 투표하기 보단 개량적 성향의 야당 후보를 선택하곤 했다. 홍세화 님의 지적대로 존재를 배반하는 행태를 보인 것이다. 홍세화 님은 노동자답지 못한 이런 의식을 지니게 된 게 노동자로서의 익힘, 즉 習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알기는 아는데 몸에 배어있지 않으니 의식적인 작위가 아니라면 불쑥 반노동자적 정서가 솟구친다는 것이다. 이런 습의 부족, 아니 배제는 우리 사회 전 영역에 걸쳐 만연하고 있다. 심지어 교육 분야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나 또한 머리로만 다가갈 뿐 가슴으로, 아니 온 몸으로 체득하는 것에는 젬병이다. 그러니 지식으로 안 것이 나의 행동을 지배하는 붙박이 의식으로 온전히 바뀌지 못한 것이다.
‘지적 인종주의’를 내면화하여 경쟁과 차별을 부추기는 교육 환경에서 우리 학생들은 좋은 가치에 관해서는 어쩌다 ‘배울(學)’뿐이고 일상 속에서는 그 반대를 ‘익힌다(習).’ 우리 학생들은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 연대의식을 어쩌다 배우지만 일상에서는 남을 누르고 혼자 이기는 것을 익힌다. (중략) 억압과 차별을 몸에 익힌다.(29쪽)
나는 교육자로서의 의식을 지니고 있는가?
나는 교육자다. 의식화를 통해 바람직한 변화를 유도해야 할 직분을 맡고 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땅의 근대식 학교는 애당초 조선 사람의 정체성을 스스로 배반하고 일본 사람이 되도록 하는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의 장이었다.(23쪽)
곰곰 따져보니 그런 미친 교육의 하수인이 바로 나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학교에서 허구한 날 가르치는 게 민주주의, 자유, 평등, 정의, 공정성 같은 인간과 사회를 위한 가치가 아니라 질서와 국익, 경쟁이라는 홍세화 님의 지적이 딱 맞게끔 현장에서 실천하고 있는 장본인이 나인 것이다. 하여 세상이 이 지경이 되는 데 내 책임도 크다 하겠다. 방관자, 아니 가해자로서 말이다. 미친 교육 현장 수행가로 아이들의 의식을 왜곡시키는데 일조, 아니 단단히 한 몫을 했으니.
한국사회구성원의 의식이 존재의 요구에 귀 기울이기 어려웠던 것은 분단 상황 아래 안보의식화, 질서의식화, 숭미사대 의식화, 물신숭배 의식화, 지역주의 의식화가 강력하게 관철돼왔기 때문이다.(74쪽)
나는 교양인으로서의 의식을 지니고 있는가?
나는 한국 사회에서 비교적 교양 있는 지성인의 부류로 분류되는 직업군에 속해 있다. 그런데 교양인이라면 마땅히 이성적인 사고와 그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보자면 나 역시 지역에 대한 편견, 소수자에 대한 몰이해, 교육에 대한 권위주의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 다수자의 편에서 강자의 논리에 젖어있는 것이다. 그러니 교양인으로서의 내면을 키우지 못한 면이 많다 할밖에.
소수자들은 일상적인 ‘자기 돌아봄’을 통해 역지사지를 쉽게 익히지만, 다수자들은 자기 돌아봄도 부족하고 역지사지 역지사지도 어렵다. 소수자에겐 자기 성숙의 긴장이 살아 있지만 다수자는 다수파에 안주함으로써 자기성숙의 긴장을 놓치기 쉽다.(136쪽)
그리고 나 역시 ‘부자 되세요’의 논리에 편승하여 세속적 명예와 이익을 탐하곤 했다.
‘교양이 밥 먹여주니?’라고 대드는 듯한 사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대신 몰상식이 막무가내로 관철되며, 이명박 정권 들어서 더욱 분명해지는, 생존하려면 스스로 뻔뻔해지든지 뻔뻔함에 굴종하라고 강요하는 사회, 여기서 계속 살아갈 만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 (198쪽)
그러니 한국 사회에서 상식과 정의가 뿌리내리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배 세력, 고릴라들의 콩고물이나 바라는 좀비가 되고 말았다 하겠다.
부도덕한 사회의 도덕적 인간에게 남는 건 낭패감과 박탈감뿐이다. 정신적 공황을 피할 수 없었고 올바른 생활은 개그가 되었다. 차차 부도덕한 사회의 비도덕적 개인들이 되었고 고릴라가 들어설 자리는 더욱 확장됐다.(218쪽)
그러니 진정한 교양인으로 자유로운 의식을 지니고 살아가려면 죽는 순간까지 자기 성숙의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홍세화 님의 권고에 움찔해질밖에.
그럼 내 생각의 좌표는 어디 쯤일까?
이쯤 되니 영 혼란스러워진다. 나의 좌표를 종잡을 수 없을 것 같기에 말이다. 좌표축에 어떤 변수를 배치하느냐에 따라 일관성 없이 흔들리곤 하기 때문이다. X축 Y축에 각각 노동자 의식과 물신숭배나 지역주의 의식을 둔다면 도무지 상관관계가 없는 분포를 보일 것이니 말이다. 이러니 나의 정체성이 정말 의심스러워진다. 내가 진보적 의식을 지닌 노동조합 조합원이자 아이들에게 인간화 교육을 담당해야 할 교사가 맞는가 하고 내면에서 분열이 일어나는 듯하다.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을 정도로. 의식적으로 짐짓 모른 척 눌러두었던 아픈 구석에 소금을 잔뜩 지른 듯 욱신거리는 듯도 하다. 겉으론 담담하던 내 의식을 들쑤셔 아릿한 통증을 유발한 원인 제공자는 당연히 홍세화 님이고. 그는 내 생각이 좌표축 어디쯤에 놓여있는지 늘 의식하며 점검하고 교정하라 권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홍세화 님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내 생각을 갖게 만든 요소로 폭넓은 독서, 열린 자세의 토론, 직접 견문 및 성찰을 들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주체적인 독서가 가장 의식의 정향을 좌우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어쭙잖지만 독서는 하는 일이 일인 만큼 나름대로 섭렵했다고 여기는 나로서는 오히려 열린 자세의 토론과 직접 견문 등 현실과 부딪치고 실제와 접하는 게 더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 험난한 단련의 과정을 밟아 나가야 지배세력이 유포한 허위의식에서 벗어나 진정한 노조원, 교육자 및 교양인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의 내면과 그들의 선택에 대해 대뜸 폄하하지 않고 다만 지향의 차이로만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도 있게 될 테고.
‘다름=틀림’의 등식은 다름의 관계를 옳고/그름, 우/열의 관계로 나아가 선/악, 정상/비정상의 관계로까지 증폭시킨다.(132쪽)
지배세력은 제도교육과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사회구성원들에게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을 갖도록 꾀한다. 그래야 원활한 지배가 가능하다. 물론 이 경우도 각자가 자신을 위한 의식이라고 굳게 믿게(207쪽)
나는 그리 안일했다. 다수자 행세를 하며 한 숨 돌리곤 했다. 모르면서 다 아는 듯 뻔뻔했다. 천박한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것이다. 홍세화 님이 나를 들여다본다면 아마 개탄, 분노보다 슬픔과 쓸쓸함을 먼저 느꼈을 것이다.
하여 이 땅에서 노조원으로, 교사로 아니 교양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내게 홍세화 님의 메시지는 뼈저리게 다가온다. 고요하던 내면을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흔들며 좌표를 점검하라, 존재를 배반하지 말라, 의식을 늘 수정하여 자기 성숙을 기하라고 권고한다. 그의 가르침이 정서적으론 못내 불편하게 다가오지만 내심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안다. 그게 내 생각의 좌표를 진정 제대로 설정하기 위한 것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