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의 깊이는 사람의 깊이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결국 기본적 교양을 지닌 성숙한 의식의 구성원들에게서 사회의 품격이 우러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교양인들로 이루어진 깊이 있는 사회는 모든 구성원들이 집단 운영을 가능케 하는 일종의 하한선이라 할 기본적 자질, 즉 교양을 내면화하고 있는 공동체일 것이다. 집단 구성들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의 분별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타인, 다른 집단 및 이질적 문화에 대해 배척과 몰이해를 일삼을 것이며 또 이로 말미암은 대립과 갈등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관용과 이해와 통합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구성원의 의식의 역량, 곧 교양을 길러나가야만 할 것이다.교양인이라 하면 여러 덕목을 갖추어야 하겠지만 특히 고도의 자기 성찰력과 자제력을 바탕으로 한 관용의 실천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똘레랑스(관용)를 모르는 이는 교양 있는 시민으로 여기지 않는다. 또 교양인은 다양한 타문화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상대주의적 이해심을 지녀야 하며 개인간, 집단간의 분열과 갈등과 혼란을 딛고 통합을 이뤄내는데 기여할 수 있는 역량을 보유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관용과 이해와 통합의 정신은 교양에서 우러나온 덕목이라 할 수 있다.그런데 이러한 관용과 이해와 통합의 원천이 되는 교양을 어디서 얻고 어떻게 기르고 또 내면화할 수 있을 것인가? 슈바니츠의 결론은 고전적이고 지극히 당연한 수준에서 내려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언어와 문학, 역사와 철학 및 예술 등에 천착하는 독서와 사색이다. 우리 동양에서도 전통적으로 교양인이라 하면 독서인을 의미했다. 독서로 교양을 쌓아 내면 세계의 일가를 구축한 전형적 인물을 군자(君子)라 하여 최고의 지성으로 우러러보았다. 현대적 맥락으로 보자면 교육의 궁극적 실현 목표인 전인(全人)이 곧 과거의 군자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군자 혹은 전인은 자신의 전문 분야뿐 아니고 광범위한 보편적 지식을 습득한 토대 위에다 인간적 품성과 사회에 대한 사명감, 인류에 대한 봉사 정신을 자각한 교양인을 가리킨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의 풍토는 이러한 교양인을 길러내는 것 보다 한가지 분야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는 기능적 전문인을 선호하고 있다. 그들이 자본의 증식과 부가 가치 창출에 유용한 요소이자 상품이기 때문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 풍토도 교양인을 길러 내기보다는 점수 획득 기능만 발달시킨 서글픈 인간 군상을 양산하고 있는 실정이다.이런 시대 상황을 돌이킬 수 있는 역량은 타인에 대해 관용하고 다름과 차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분열과 대립과 갈등을 딛고 통합을 이뤄낼 수 있는 능력인 교양에서 비롯될 것이다. 그리고 그 교양은 너무나 소박한 결론이겠지만 독서와 사색을 통해 길러나가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 하겠다. 이러한 응답을 슈바니츠는 『교양』에서 들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