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임금의 국민적 차이

 

17장에서 우리는 노동력 가치의 절대적 크기 또는 (잉여 가치에 대비한) 상대적 크기의 변동을 일으킬 수 있는 다양한 조합들을 고찰했으며, 또한 노동력의 가격이 구매하는 생활 수단의 양은 이 가격의 변동과는 독립적으로, 또는 이 가격의 변동과는 다르게 운동할 수 있다는 점을 알았다.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노동력의 가치(또는 가격)를 단순히 임금이라는 통속적인 형태로 해석해 버리면, 거기에서 지적된 모든 법칙들은 임금 변동의 법칙으로 전환된다. 임금 변동을 연구할 때, 일련의 상이한 조합으로 등장하던 것이 각국의 임금 수준을 비교할 때는 한 묶음으로 동시에 존재하는 차이로 나타난다. 따라서 서로 다른 나라들의 임금을 비교할 때는 노동력 가치의 크기 변동을 규정하는 모든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 (자연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발달한) 주요 생활 필수품의 범위와 가격, 노동자의 육성비, 여성 노동과 아동 노동의 역할, 노동 생산성, 노동의 외연적 · 내포적 크기 등이 그것이다. 가장 피상적인 비교를 위해서도 먼저 각국의 동일한 산업의 하루 평균 임금을 같은 길이의 노동일에 대해서 환원할 필요가 있으며, 하루의 임금을 조정한 다음, 시간급을 성과급으로 환산해야 한다. 성과급만이 노동 생산성이나 노동 강도에 대한 척도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과급으로의 환산 과정에도 불구하고, 임금 수준의 비교는 여전히 피상적 고찰에 머무를 위험이 따른다. 성과급이 노동 강도와 생산성의 척도일 수는 있어도, 이는 단지 노동력 가치의 표현 형태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진정한 비교는 각국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가치, 곧 생활 수단의 양과 가격으로부터 형성되는 노동력 가치의 절대적 크기와, 이로부터 도출되는 잉여 가치율의 차이를 근본적으로 파악해야 비로소 완성된다. 결국, 임금의 외연적 차이는 각국 자본주의 발전 단계의 특수성을 나타내는 동시에, 노동 착취의 일반 법칙이 관철되는 방식을 드러내는 하나의 지표이다.

 

개별 국가에서는 평균 강도보다 낮은 노동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시간을 초과하여 가치 측정을 변경하지 못하며, 오직 국민적 평균을 초과하는 강도만이 이를 초래한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세계 시장에서는 조건이 달라진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국민적 평균 노동 강도가 세계 노동 전체의 평균 강도를 기준으로 하는 하나의 등급을 형성한다. 그 결과, 강도가 더 높은 국민 노동은 동일한 노동 시간 내에 더 큰 가치를 창출하며, 이는 더 많은 화폐량으로 표출된다. 더욱이, 가치 법칙은 세계적 적용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사정으로 인해 수정된다. , 세계 시장 경쟁이 해당 국민의 상품 판매 가격을 그 가치 수준으로 하락시키도록 강제하지 않는 한, 노동 생산성이 높은 국민 노동 또한 강도가 높은 노동으로 간주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할수록, 특정 국가의 국민적 노동 강도와 생산성은 세계적 수준 이상으로 높아진다. 그 결과, 상이한 국가에서 동일한 노동 시간에 산출된 동종 상품은 서로 다른 세계 가치를 가지며, 이는 상이한 가격, 곧 세계 가치 차이에 따른 화폐액으로 표현된다. 다시 말해, 국민적 노동 강도와 생산성이 더 높은 나라의 한 시간 노동은 낮은 나라의 그것에 비해 더 큰 세계 가치를 가지며, 그 생산물은 더 많은 세계 화폐와 교환된다.

 

개별 상품의 교환 여부는 불명확하다. 이로 인해, 화폐의 상대적 가치, 화폐가 구매할 수 있는 노동 시간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발전한 나라가 덜 발전한 나라보다 더 작다. 이는 명목 임금, 화폐로 표현된 노동력의 등가는 전자 경우가 후자보다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는 곧 실질 임금, 곧 노동자가 실제로 처분할 수 있는 생활 수단의 양까지 더 크다는 의미는 아니다. 상이한 국가 간 화폐 가치의 상대적 차이를 도외시하더라도, 하루 또는 주 임금과 같은 명목 임금은 발전국이 저발전국보다 높다. 그럼에도, 노동의 상대적 가격, 잉여 가치나 생산물 가치에 대비한 노동의 가격은 저발전국이 발전국보다 더 높은 현상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1833, 공장 조사 위원회 위원인 카우엘이 방적업을 정밀 조사한 후, 내린 결론과 일치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잉글랜드의 임금은 유럽 대륙에 비해,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더 높을지 모르지만, 공장주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더욱 낮다.’

 

[유어,공장 철학: 314]

 

영국 공장 감독관 레드그레이브의 18661031일자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 대륙 국가들의 노동은 영국에 비해 임금이 낮고, 노동일이 훨씬 길지만, 생산물 대비 가격은 오히려 영국보다 비싼 것으로 나타난다. 올덴부르크의 한 면방적 공장 영국인 경영자는 토요일을 포함하여 매일 아침 530분부터 저녁 8시까지 노동 시간이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영국인 감독관 감시 하의 생산량조차 영국 노동자의 10시간 생산량에 미치지 못하며, 독일인 감시관 하에서는 그 양이 훨씬 적다고 단언한다. 임금은 영국보다 50%까지도 훨씬 낮지만, 기계 설비 대비 노동자 수는 현저히 많아 일부 부문에서는 5:3 비율에 달한다.

 

레드그레이브는 또한 러시아 면방적 공장들에 대한 영국인 경영자의 상세 자료를 인용한다. 온갖 그릇된 행위가 만연한, 러시아에서는 영국 공장 제도의 유년기적 폐해가 전성기를 맞고 있으며, 현지 자본가가 공장 사업을 관리할 수 없어, 경영자들은 모두 영국인이다. 철야 작업 등 과도 노동에 보잘것없는 임금이 지급되지만, 러시아 제품은 외국 제품의 수입 금지로부터만 겨우 유지된다.

 

끝으로, 레드그레이브의 공장당 및 방적공 1인당 평균 방추 수에 대한 유럽 여러 나라 비교표는 비교의 의의를 지닌다. 이 수치는 수년 전 수집된 것이며, 이후, 영국 공장 규모와 노동자 1인당 방추 수는 증가했겠지만, 대륙 국가들에서도 대체로 같은 정도의 발전이 있었으리라는 가정 하에, 그 비교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

 

1공장당 평균 방추수 (단위: )

 

영국: 12,600

스위스: 8,000

오스트리아: 7,000

작센: 4,500

벨기에: 4,000

프랑스: 1,500

프러시아: 1,500

 

노동자 1인당 평균 방추수 (단위: )

 

프랑스: 14

러시아: 28

프러시아: 37

바이에른: 46

오스트리아: 49

벨기에: 50

작센: 50

독일의 작은 나라들: 55

스위스: 55

영국: 74

 

이 표에 대해 레드그레이브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 비교는 영국에 더욱 불리하다. 그 이유는, 영국에는 방적과 직조가 결합된 공장이 많아 직조공들이 표에서 제외되지 않았지만, 외국 공장은 주로 방적만을 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동일한 조건으로 비교한다면, 자신의 관할 구역에서 단 한 명의 노동자가 보조 노동자 2명을 데리고 2,200개의 방추를 가진 뮬 방적기를 조작하며, 매일 400마일 길이의 220파운드 방사를 생산하는 면방적 공장들을 수없이 제시할 수 있다.’

 

[공장 감독관 보고서, 18661030: 31-37 ]

 

동유럽과 아시아에서 철도 부설을 맡은 영국 회사들은 현지인과 함께 영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면서, 실무적 필요성에 따라 일급 지급에서 노동 강도의 국민적 차이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영국 회사는 전혀 손실을 입지 않았다. 그들의 경험이 입증하듯이, 임금 수준의 차이가 평균적 노동 강도의 차이와 대체로 일치할지라도, 노동의 상대적 가격, 생산물에 대비 노동 가격은 일반적으로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 노동 강도가 높으면 노동의 상대적 가격이 낮고, 노동 강도가 낮으면 노동의 상대적 가격이 높아진다.

 

캐리(미국의 보호무역론자)는 자신의 최초 경제학 저술인임금률에 관한 연구에서, 각국 임금 수준의 차이가 노동일 생산성의 정도에 정비례함을 증명하고, 이로부터, 임금이 일반적으로 노동 생산성에 비례하여 등락한다는 결론을 도출하려 한다. 그가 무비판적이고 피상적으로 통계 자료를 뒤섞지 않고, 자기 전제들을 증명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결론이 엉터리라는 점은 잉여 가치의 생산에 관한 우리의 분석 전체가 증명한다. 주목할 만하게도, 그는 현실이 자기 이론대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으며, 국가 간섭이 이 자연적 경제 관계를 왜곡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국민적 임금을 계산할 때, 임금 중 세금 형태로 국가 수중으로 들어가는 부분도, 노동자 자신이 받은 것이라고 가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캐리는 더 나아가, 국가 지출이 또한 자본주의 발전의 자연적 결과인지 아닌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그의 논리는 다음 부류의 사람에게 적합하다. , 먼저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를 자연과 이성의 영원한 법칙이라 선언하고, 이 법칙의 자유롭고 조화로운 작용은 국가 간섭으로부터만 저해된다고 단정한다, 그런 뒤, 세계 시장에 대한 영국의 사악한 영향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연 법칙에서 비롯되는 것 같지 않다) 때문에 국가 간섭, 곧 보호 무역 제도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의 논리다. 나아가, 캐리는 (현존하는 사회적 적대와 모순들이 정식화한) 리카도 등의 이론이 현실적 경제 운동의 산물이 아니며, 오히려 영국과 기타 국가의 자본주의적 생산이 낳은 현실적 적대 관계가 리카도 이론의 결과임을 발견한다. 그가 최종적으로 발견한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고유한 매력과 조화를 파괴하는 것이 결국 상업(또는 무역)이라는 점이다. 이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면, 그는 아마도 자본주의적 생산의 유일한 악이 자본 그 자체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다. 이처럼 놀라울 만큼 무비판적이고 가짜 학식을 가진 인물만이, 그의 보호무역주의적 이단에도 불구하고, 바스티아나 기타 모든 현대 자유무역주의적 낙관론자들의 조화론적 지혜의 은밀한 원천이 될 자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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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성과급

 

시간급이 노동력 가치(또는 가격)의 전환된 형태이듯, 성과급(개수 임금)은 시간급의 전환된 형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생산량 1단위당 임금 = [노동력의 하루 가치] / [평균적인 노동자의 하루 생산량] 성과급 제도는 자본가가 노동자에게서 구매하는 사용 가치가 노동력의 기능인 산 노동이 아니라 이미 생산물에 대상화된 노동인 것처럼 외양을 띤다. 나아가, 이 노동 가격은 시간급의 결정 공식 [노동력의 하루 가치] / [주어진 시간 수의 노동일]이 아닌, 오로지 생산자의 작업 능력으로부터 결정되는 것처럼 오인하게 한다.

 

이러한 겉모습을 진실로 확신하는 믿음은, 동일한 산업 부문 내에서 두 임금 형태가 동시에 병존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런던의 식자공들은 주로 성과급을 받으며 시간급은 예외적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방의 식자공들은 시간급이 보통이고, 성과급은 예외다. 마찬가지로, 런던 항구의 선대 목공들은 성과급을 받는 반면, 영국의 다른 모든 항구에서는 시간급을 받는다.’

 

런던의 동일한 마구(馬具) 제조 공장에서도, 같은 노동에 대해 프랑스인에게는 성과급이, 영국인에게는 시간급이 지급되는 경우가 흔하다. 성과급이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진정한 공장들조차도, 일부 특수한 작업은 기술적 이유로 성과급 계산에 부적합하여 시간급으로 지급된다. 따라서 임금 지급의 형태상의 차이는, 비록 한 형태가 다른 형태보다 자본주의적 생산 발전에 더 유리할지라도, 임금의 본질을 전혀 바꾸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보통 12시간 노동일 중, 6시간은 지불되고, 나머지 6시간은 지불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이 노동일의 가치 생산물은 6원이므로, 1시간 노동의 가치 생산물은 1/2원이다. 또한 평균적인 노동자가 12시간 동안 24개의 생산물을 만든다고 경험적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생산물은 개별 단위이든, 연속적 생산물의 계량된 부분이든 상관없다.) 이러한 조건에서 24개 생산물의 가치는, 불변 자본 부분을 제외하면 6원이며, 한 개의 가치는 1/4원이다. 노동자는 한 개당 1/8원을 받아, 12시간에 3원을 번다. 이는 시간급에서 노동자가 6시간은 자신을 위해, 6시간은 자본가를 위해 일하든, 또는 매시간 절반은 자신을 위해, 나머지 절반은 자본가를 위해 일하든 상관없는 것과 같다. 이 경우에도, 생산물 한 개당 절반은 지불되고, 절반은 지불되지 않는다고 말하든, 또는 12개의 가격은 노동력의 가치만을 대체하고, 나머지 12개의 가격에는 잉여 가치가 체화되어 있다고 말하든 본질적 차이는 없다.

 

성과급 형태는 시간급 형태와 마찬가지로 불합리하다. 우리의 예시를 보면, 상품 두 개는 1시간 노동의 생산물이며, 소비된 생산 수단 가치를 제외하면 1/2원의 가치를 갖는다. 하지만 노동자는 그 대가로 1/4원만을 받는다. 성과급은 사실상 어떤 가치 관계도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상품 한 개의 가치를 그 속에 체현된 노동 시간으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노동자가 수행한 노동을 그가 생산한 개수로 측정한다는 점이다. 시간급에서 노동은 직접적인 지속 시간으로 측정되지만, 성과급에서는 생산물의 양(일정한 지속 시간의 노동이 응결된 형태)으로 측정된다. 결국 노동 시간 자체의 가격은 하루 노동의 가치 = 노동력의 하루 가치라는 방정식으로부터 결정된다. 그러므로 성과급은 시간급의 변형된 형태에 불과하다. 성과급의 특징을 자세히 고찰하면, 노동의 질은 제품 자체로 통제된다. 노동자가 각 제품에 대해 완전한 보수를 받기 위해서는 해당 제품이 평균적 품질을 충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는 성과급이 자본가에게 임금 삭감과 속임수를 위한 가장 풍부한 원천이 되게 한다.

 

성과급은 자본가들에게 노동 강도를 측정할 가장 확실한 척도를 제공한다. 경험으로부터 고정되며 자본가가 미리 정한 일정한 양의 상품에 체현된 노동 시간만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으로 인정되며, 그만큼만 지급된다. 예를 들어, 런던의 비교적 큰 재봉 공장에서는 한 개의 조끼 같은 특정 제품을 한 시간’, ‘반 시간등으로 부르며, 한 시간1/2원으로 계산된다. 경험적으로 한 시간의 평균적인 생산물 개수가 결정된다. 새로운 유행 상품이나 수선 작업 등의 경우에는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에 특수 작업에 해당하는 시간 분쟁이 발생하지만, 이 또한 결국 경험으로부터 결정된다. 런던의 가구 공장 등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노동자가 평균적인 작업 능력을 갖추지 못해 하루에 일정한 최소 한도 제품을 제공하지 못하면 해고된다. 여기서는 노동의 질과 강도가 임금 형태 자체로 통제되므로, 대부분의 경우, 노동에 대한 감독이 필요 없게 된다. 결과적으로, 성과급은 이전에 서술된 근대적 가내 노동의 토대를 이루며, 나아가, 착취와 억압의 계급 체계의 토대가 된다. 이 체계에는 두 가지 기본 형태가 나타난다.

 

1. 성과급은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 사이에 기생충이 개입하는 일을 용이하게 하여 노동의 하청을 발생시킨다. 이 중개인(기생충)의 이득은 자본가가 지불하는 노동 가격과 그가 실제로 노동자에게 넘겨주는 부분 사이의 차액에서 전적으로 비롯된다. 영국에서는 이 제도를 그 특색을 살려 하청 제도(고한 제도)’라고 부른다.

 

2. 성과급은 자본가로 하여금 두목 노동자(공장제 수공업에서는 작업 조장, 광산에서는 채탄부, 공장에서는 실제 기계 취급 노동자 등)와 개당 얼마라는 계약을 체결하게 만든다. 이 가격으로, 두목 노동자는 자신의 보조 노동자들을 모집하고, 그들에게 임금을 지급한다. 결국 자본으로부터 노동자의 착취가, 여기에서는 노동자로부터 노동자의 착취로 실현된다.

 

성과급이 실시될 때, 노동자가 노동력을 최대한 집약적으로 발휘하는 것이 개인적 이익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자본가로 하여금 노동의 표준 강도를 더욱 쉽게 올릴 수 있게 만든다. 더욱이 노동일 연장 역시 노동자의 개인적 이익이 된다. 그로부터 일급 또는 주급이 증대하기 때문이다. 다만, 노동일의 연장은 성과급의 수준(단위당 지급액)이 불변인 경우조차도 노동 가격의 저하를 필연적으로 내포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는 시간급 고찰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저항을 일으킨다.

 

시간급의 경우, 예외를 제외하면 같은 종류의 작업에는 같은 임금이 지급된다. 그러나 성과급의 경우, 비록 1시간 노동의 가격이 생산물의 일정한 양으로 측정될지라도, 일급 또는 주급은 노동자들의 개인적 차이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노동자는 일정한 시간에 최소 한도를 생산하고, 다른 노동자는 평균량을, 또 다른 노동자는 평균량 이상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의 실제 소득은 개별 노동자들의 숙련, 체력, 정력, 지구력 등에 따라 큰 차이가 발생한다. 물론 이것이 자본과 임금 노동 사이의 일반적 관계를 바꾸지는 않는다.

 

1. 작업장 전체 보면, 이러한 개인적 차이는 상쇄된다. 그 결과, 전체 작업장은 일정한 노동 시간에 평균량의 생산물을 공급하며, 지급된 총임금은 해당 생산 부문의 평균 임금이 된다.

 

2. 임금과 잉여 가치의 비율은 변하지 않는다. 개별 노동자가 개인적으로 제공하는 잉여 가치량이 그의 개인적 임금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과급은 개성에 더 큰 활동의 여지를 제공하면서,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개성, 나아가, 그들의 자유감, 독립심, 자제심 등을 발달시킨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 상호 간에 경쟁심을 발달시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성과급은 개인적 임금을 평균 수준 이상으로 높이는 동시에, 이 평균 수준 자체를 저하시키는 경향을 가진다. 다만, 일정한 성과급 수준이 오랜 전통으로 고정되어 저하시키기 매우 곤란한 예외적인 경우에는, 고용주들은 때때로 성과급을 강제로 시간급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예를 들어, 1860년 코벤트리 리본 제조공들의 대파업이 바로 이 문제로 인해 발생했다. 결론적으로, 성과급은 앞에서 서술된 시간급 제도의 주요 버팀목들 중 하나다.

 

지금까지의 논의로, 성과급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임금 형태라는 것은 분명해진다. 성과급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시간급과 함께 14세기 프랑스와 영국의 노동 법령에 공식 규정), 이것이 폭넓은 부문에 처음 적용된 것은 진정한 공장제 수공업 시대의 일이다. 대공업의 격변기, 특히 1797년부터 1815년 사이에는 성과급이 노동일 연장과 임금 인하를 위한 지렛대로 이용되었다. 이 시기 임금 변동에 관한 매우 중요한 자료는 두 개의 정부 문서,곡물법 관계의 청원에 대한 특별조사위원회의 보고와 증언(1858) 곡물과 곡물법에 관한 보고(1814)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반()자코뱅 전쟁 개시 이래 노동 가격이 끊임없이 저하되었다는 문서상의 증거를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방적업에서는 성과급 수준이 크게 하락하여 노동일이 대폭 연장되었음에도, 하루 임금은 도리어 이전보다 낮아진 정도였다.

 

직조공의 실제 소득은 이전보다 훨씬 적다. 과거에는 직조공들 사이에서 노동자 소득 차이가 상당히 컸으나, 이제 그 차이는 거의 사라졌다. 실제로 숙련 노동과 보통 노동 사이의 임금 격차는 과거 어느 시기보다 훨씬 적다.’

 

성과급으로 인한 노동 강도 강화와 노동 시간 증가가 농촌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거의 이득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은 지주 및 차지 농업가 편의 저술에서 인용한 다음 구절에서도 드러난다.

 

농사일 대부분은 일급 또는 성과급제로 고용된 사람들이 수행한다. 이들의 주급은 대략 12실링이다. 성과급제로 일하는 노동자는 더 큰 노동 자극으로 인해 주급 노동자보다 1실링 또는 2실링 더 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총소득을 계산하면, 이렇게 더 번 금액보다 연중 일이 없어 생기는 손실이 훨씬 크다. 나아가, 일반적으로 이 (주급) 노동자들의 임금은 교구의 구호 없이 2명의 아동을 포함한 가족을 부양할 수도 있도록 필요한 생활 수단의 가격과 일정한 비례 관계를 가지도록 설정되어 있다.’

 

당시 맬더스는 의회로부터 공표된 사실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는 성과급의 관행이 폭넓게 보급되는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을 고백한다. 하루에 12-14시간 또는 그보다 더 긴 시간의 고된 노동은 사실 어떤 사람에게나 지나친 것이다.’

 

공장법의 적용을 받는 작업장에서는 자본이 노동일을 단지 내포적으로만 확대할 수 있기 때문에, 성과급이 통례로 자리 잡았다.

 

노동 생산성의 변동에 따라 동일한 생산물량이 표현하는 노동 시간도 달라지므로, 성과급의 수준 역시 달라진다. 성과급이 (생산물 한 개당 생산에 소요되는) 노동 시간의 가격 표현이기 때문이다. 앞선 예시에서, 24개의 생산물이 12시간에 생산되었고, 12시간 가치 생산물은 6, 노동력의 하루 가치는 3, 1시간 노동 가격은 1/4, 한 개당 임금은 1/8원이었다. 생산물 한 개 속에는 1/2시간의 노동이 체화되어 있었다. 이제 노동 생산성이 2배로 증가하여 동일한 노동일에 24개가 아닌 48개의 생산물이 제공되고, 다른 모든 조건은 불변이라면, 성과급의 수준은 1/8원에서 1/16원으로 하락한다. 이제 한 개의 생산물이 1/2시간이 아닌 단지 1/4시간의 노동만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계산: 1/8× 24= 3원이고, 1/16 × 48= 3원이다.)

 

다시 말해, 성과급의 수준은 동일한 시간에 생산되는 개수가 증가하는 것과 같은 비율로, 따라서 같은 한 개에 드는 노동 시간이 감소하는 것과 같은 비율로 저하한다. 이러한 성과급 수준 변동은, 그 자체로는 순전히 명목적이지만,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끊임없는 투쟁을 야기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본가가 노동 가격을 실제로 인하하기 위한 구실로 성과급 수준을 인하하기 때문이다. 노동 생산성 증대가 노동 강도의 증대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성과급의 겉모습(노동력이 아닌 생산물에 대해 지급받는다는 외양)을 진실이라 믿고, 상품 판매 가격 인하가 수반되지 않는 임금 인하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원료 가격과 제품 가격을 주의 깊게 파악하여, 고용주들의 이윤을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다.’

 

자본이 이러한 저항을 임금 노동의 성질에 대한 매우 그릇된 생각이라고 배격하는 일은 당연하다. 자본은 산업의 발전에 과세하려는 이런 건방진 시도에 대해 분노를 표하며, 노동 생산성은 노동자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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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시간급

 

임금에서 두 가지 기본 형태는 시간 임금과 성과 임금이다. 시간 임금은 노동의 지속 시간을, 성과 임금은 생산된 제품의 수량을 임금의 크기를 결정하는 직접적인 기준으로 삼는다. 이 방식들은 노동력의 가치를 보상하는 가장 기본적 형태이며, 서로 보완적으로 사용되거나, 특수한 조건에 따라 상호 번형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일급은 곧 노동력의 일일 차기를 노동일의 전형적 길이로 환산한 형태이다. 따라서 시간 임금은 그 자체가 하루 노동력의 가치를 노동 시간으로 나눈 몫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가는 이 일급을 불변으로 두고, 노동 시간을 연장하는 데서 직접적 이익을 얻으며, 이는 시간 임금을 하락시켜 연장된 노동 시간에 상응하는 잉여 가치의 증대를 실현하는 가장 명료한 수단이다.

 

시간 임금의 형태는 노동력의 가치를 노동 시간의 길이와 독립된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 노동일의 연장은 노동력의 시간당 가격, 곧 시간급을 감소시키지 않는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그러나 노동일이 길어질수록, 노동자는 더 적은 임금으로 더 많은 노동 시간을 제공하게 되며, 이는 하루 일당이 불변일 때도, 시간급은 하락함을 의미한다. 결국, 시간 임금은 노동일의 길이에 대한 자본가의 무제한적 착취 여지를 은폐하는 기본 형태이다. 시간 임금이 노동일의 길이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형태는, 노동자가 일정한 노동량에 대해 실제 받는 노동의 가격을 모호하게 한다. 노동자는 노동일의 길이에 관계없이 동일한 일급을 받더라도, 이 일급이 실제로는 노동력의 가치를 노동 시간으로 나눈 몫, 곧 시간당 노동 가격을 나타낸다는 점이 중요하다. 자본가는 이 측정 단위를 활용하여, 노동력의 가치 자체를 변경하지 않으면서도 노동일의 연장으로부터 잉여 가치를 증대시킨다. 따라서 시간 임금의 분석은 명목 임금과 실질 임금, 그리고 임금 총액과 노동 가격을 구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분석은 명목 임금이 불변일지라도, 실질적인 노동 가격은 하락할 수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노동일이 연장될 경우, 일급은 그대로 유지되더라도, 시간당 노동 가격은 분모인 노동 시간의 증가로 인해 필연적으로 감소한다. 반대로, 노동의 내포적 또는 외연적 크기가 증대하면, 노동의 가격에는 변도이 없거나 하락하더라도, 일급은 오히려 상승할 수 있다. 이처럼 명목적인 일급 또는 주급의 움직임은 노동의 가격, 곧 노동력의 가치를 지불하는 실제 비율과는 독립적이거나 역행하는 현상을 보일 수 있으며, 이는 임금 지불 형태가 잉여 가치 창출을 은폐하는 기제로 작용함을 입증한다. 결론적으로, 일급이나 주급의 총액은 두 가지 변수로부터 결정된다.

 

1. 노동 가격 자체, 곧 노동력의 가치 변동이나 그로부터 편차에 따른 시간당 지불액이다.

 

2. 노동의 가격이 고정되어 있다면, 실제로 노동자가 제공한 하루 또는 일주일의 노동량에 의존한다.

 

결국, 임금의 현상 형태인 일급은 노동 가격과 노동 시간이라는 두 가지 요소의 결합된 결과이며, 이 둘 중 어느 하나의 변화도 임금 총액의 변동을 초래한다.

 

시간 임금 방식은 노동일의 평균 길이에서 노동력의 가치를 보상하고자 필요한 필수 노동 시간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노동자에게 불완전 취업의 고통을 야기한다. 노동력의 하루 가치가 6시간의 노동 생산물로 정해지고, 시간당 노동 가격이 1/4원으로 계산되더라도, 노동자가 12시간 미만을 일하게 되면, 그는 노동력의 가치에 상응하는 임금을 벌지 못한다. , 그는 필수 노동 시간인 6시간의 가치 생산물(3)을 완전히 취득하지 못하게 되어, 노동의 과도 연장이 낳는 파괴적 결과와 더불어, 불완전 취업이 초래하는 생계 곤란의 또 다른 원인이 된다.

 

시간 임금이 정해지면 자본가는 일정한 일급이나 주급을 지급할 의무 없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노동자를 임의의 시간만큼만 고용하고 해당 시간만큼만 지불하게 된다. 이 경우, 본래 시간 임금의 측정 단위였던 [노동력의 하루 가치] / [평균 노동일의 시간 수]의 비율은 노동일의 표준이 사라지면서 그 의미를 상실한다. 이로 인해, 지불받는 노동과 지불받지 않는 노동 사이의 관계는 단절되며, 자본가는 노동자의 생존 유지에 필요한 노동 시간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잉여 노동을 착취할 수 있다.

 

자본가는 고용의 규칙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의 순간적 이익에 따라 혹독한 과도 노동과 상대적 · 절대적 작업 중단을 교대로 강요하며, ‘표준적인 노동 가격을 지급한다는 구실로 노동일의 무분별한 연장을 정당화한다. 따라서 런던의 건설 노동자들이 이러한 형태의 시간 임금 도입에 반대하여 봉기(1860)한 일은 노동일의 무제한적 착취를 막으려는 정당한 조치였다. 노동일의 법적 제한은 고용 감소 자체를 막지는 못하지만, 이러한 해로운 초과 노동 관행에 종지부를 찍는다.

 

일급이나 주급은 상승하더라도, 노동의 시간당 가격은 명목상 불변이거나 오히려 하락할 수 있으며, 이는 노동일이 관습적인 길이를 초과하여 연장될 때 발생한다. 분수 [노동력의 하루 가치] / [노동일]에서,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 시간의 증가에 비례하여 증가하나, 노동력 소모의 심화로 인해, 그 증가 속도는 노동 시간의 증가보다 더 빠르다. 그럼에도, 시간 임금이 지배하는 산업 부문에서는 노동일의 법적 제한이 없을 때, 10시간과 같은 특정 시점까지만을 표준 노동일로 간주하는 관습이 자생적으로 형성되었다. 이 표준 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은 추가 임금을 요구하는 근거가 되며, 이는 장시간 노동에 따른 노동력의 급격한 가치 상승에 대한 자연스러운 대응이다.

 

표준 한계를 넘어서는 노동 시간은 시간외 노동으로 간주되어, 흔히 그 크기가 미미할지라도 초과 임금이라는 더 나은 시간 임금을 받게 된다. 이 경우, 표준 노동일은 현실적 노동일의 한 부분으로만 존재하며, 현실적 노동일은 연간으로 볼 때, 표준 노동일보다 긴 경우가 빈번하다. 노동일의 연장에 따른 노동 가격의 증대는 영국 일부 산업 부문에서 노동자가 표준 시간 내의 낮은 임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초과 임금을 받기 위한 시간외 노동에 강제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노동일의 법적 제한은 이러한 기만적이고, 착취적인 특별 임금 관행을 근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장시간 노동이 일반적인 산업 부문일수록 임금 수준이 더 낮다는 사실은 널리 인정된다. 공장 감독관 레드그레이브의 20년간(1839-1859)의 비교 연구는 이를 입증하는데, 10시간 공장법의 적용을 받는 공장들에서는 임금이 상승한 반면, 하루 14시간에서 15시간 작업하는 공장들에서는 임금이 오히려 저하했다. 이는 노동일의 무제한적 연장이 노동력의 시간당 가격을 떨어뜨리고, 노동자에게 과도한 노동 시간을 강요하여 생계 유지를 위해 더 낮은 임금을 수용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적 착취 기제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노동의 가격이 낮을수록, 노동자는 비참한 수준의 평균 임금이라도 얻고자 더 큰 노동량을 투입해야 하며, 이는 곧 노동일의 연장을 의미한다. 이 조건에서 노동의 낮은 가격은 노동 시간을 연장시키는 직접적인 동기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 시간의 연장은 오히려 노동력의 소모를 심화시켜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결과적으로, 노동 가격을 더욱 하락시켜 일급이나 주급의 추가적인 저하를 초래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노동 가격은 [노동력의 하루 가치] / [주어진 시간 수의 노동일]로 결정되므로, 노동일의 연장은 그 자체로 노동 가격을 하락시킨다. 장기적으로, 자본가가 노동일을 연장할 수 있는 동일한 조건은 그가 증대된 노동 시간의 총 가격, 곧 일급이나 주급이 저하될 때까지 노동 가격을 낮출 수 있게 하며, 실제로 그렇게 실행된다.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발생하는데, 한 노동자가 1.5명 또는 2명분의 노동을 수행하면, 시장에서 노동력의 공급은 일정하더라도 노동의 공급은 증가한다. 이는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심화시켜 자본가로 하여금 노동 가격을 저하시킬 수 있게 만들고, 이 노동 가격의 저하는 다시 노동 시간을 더욱 연장하는 원인이 된다. 더 나아가, 이처럼 비정상적이고 지불받지 않는 노동량(사회적 평균을 초과하는 잉여 노동)을 임의로 이용할 수 있는 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본가 자신들 사이의 경쟁의 원천으로 된다.

 

상품 가격의 일부는 노동 가격으로 구성되지만, 지불되지 않는 노동(잉여 노동)의 가격은 상품 가격 계산에서 제외될 수 있으며, 자본가는 이를 구매자에게 일종의 선물로 제공한다. 이것이 경쟁이 촉발하는 첫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 경쟁은 노동일 연장으로 창출된 초과된 잉여 가치의 적어도 일부를 상품 판매 가격에서 제외하도록 만든다. 결과적으로, 초과적으로 낮아진 상품 판매 가격이 형성되는데, 이는 처음에는 간헐적으로 발생하다가 점차 고착화된다. 이 낮은 판매 가격은 이제 거꾸로 과도한 노동 시간에 대한 비참한 임금을 확립하는 토대가 된다. 경쟁의 역동성에 대한 상세 분석은 여기서 다루지 않으나, 이러한 운동의 존재를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잠시 자본가 자신의 논리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버밍엄 공장주들의 말은, 극심한 경쟁으로 인해 고용주로 수치스러운 행동을 감행할 수밖에 없으며, 그럼에도 수익은 증가하지 않고 오직 대중들만이 이득을 본다는 현실을 시사한다.’

 

이는 과도한 노동 시간으로부터 잉여 가치 창출이 상품 가격 인하를 초래하고, 결국 경쟁이라는 이름 아래 모두에게 불리한 조건을 만든다는 점을 명백히 한다. 이와 관련하여, 런던의 빵 제조업자 중 표준 가격을 고수하는 이들은, 헐값에 빵을 파는 경쟁자들을 의회 조사 위원회 앞에서 다음과 같이 고발한다.

 

헐값 판매자들은 첫째, 상품의 불량화로부터 대중을 기만하고, 둘째, 노동자들에게 12시간 임금을 지불하면서 18시간의 노동을 착취하면서 생존한다. 이는 지불받지 않는 노동을 기반으로 경쟁을 수행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빵 제조업자들 사이의 경쟁은 야간 노동의 폐지를 어렵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밀가루 가격 변동에 따른 생산비 이하의 헐값 판매자는 직공들로부터 더 많은 노동량을 짜내어 자신의 손실을 보상한다. 경쟁자가 18시간 또는 20시간을 착취한다면, 12시간 노동만을 시키는 판매자는 상품의 판매 가격에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이 과도 노동에 대한 정당한 지급을 요구할 수 있다면, 이러한 문제들은 해결될 것지만, 헐값 판매자에게 고용된 대다수의 노동자는 외국인이나 아동들로, 이들은 어떤 임금이든 수용할 수밖에 없는 취약한 처지에 놓여 있다.’

 

이러한 자본가의 탄식은 생산 관계의 피상적인 모습만이 그의 의식에 반영됨을 보여준다. 자본가는 표준적인 노동 가격조차도 이미 일정한 양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을 포함하고 있으며, 바로 이 잉여 노동이 표준적인 이윤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표준 노동일에 대해 일급을 완전히 지급했다고 여기기 때문에, 잉여 노동 시간이라는 범주 자체가 그에게는 부재하다. 다만, 일반적인 노동 가격에 알맞은 한계를 넘는 노동일의 연장, 곧 시간외 노동만이 그에게 의미를 갖는다. 그는 심지어 헐값으로 파는 경쟁자들에게 시간외 노동에 대한 추가 임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하면서도, 이 추가 임금 역시 보통의 노동 시간 가격과 마찬가지로 지불받지 않는 노동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12시간 노동일에서 1시간 가격이 1/4원이고, 시간외 노동 1시간의 가격이 1/3원이라고 할 때, 자본가는 첫 번째 경우, 1시간 노동 중 절반(1/2), 두 번째 경우에도 여전히 1/3을 무상으로 취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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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임금

 

19. 노동력의 가치(가격)가 임금으로 전환

 

부르주아 사회의 표면에서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 가격, 곧 일정한 양의 노동에 대한 대가로 지불되는 일정한 양의 화폐로 나타난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노동의 가치를 언급하며, 그 화폐적 표현을 노동의 필요 가격 또는 자연 가격이라고 부른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의 시장 가격은 이러한 필요 가격 상하로 움직인다고 논한다.

 

상품 가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상품 생산에 투입된 사회적 노동의 객관적 형태다. 이 가치 크기의 측정은 상품에 포함된 노동량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12시간 노동일의 가치를 12시간 노동에 포함된 12시간 노동으로 결정한다면 순전한 동어 반복이다. 노동의 가치 자체를 노동량으로 측정하려는 시도는 순환 논리에 빠지게 된다.

 

노동이 상품으로 시장에서 판매되려면, 판매되기 전에 반드시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에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현실적 존재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는 노동을 파는 것이 아니라 그 상품 자체를 팔게 된다. 이 논리는 노동 그 자체가 아닌 노동력만이 상품으로 거래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 모순을 무시하더라도, 화폐(대상화된 노동)와 살아있는 노동의 직접적 교환은 가치 법칙을 폐지하거나 (자본주의적 생산 토대 위에서 비로소 자유롭게 전개되는), 또는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를 폐지한다 (바로 임금 노동에 기반을 두는). 예를 들어, 12시간 노동일이 6원의 화폐 가치로 대상화된다고 가정하자. 두 가지 경우가 발생한다.

 

1. 등가물 교환: 노동자가 자신의 12시간 노동 대가로 6원을 받는다. 그의 노동 가격은 그의 노동 생산물 가격과 동일하다. 이 경우, 그는 노동의 구매자에게 잉여 가치를 전혀 생산하지 않는다. 6원은 자본으로 전환될 수 없으며, 이는 곧 자본 자본주의적 생산 토대 자체의 소멸로 이어진다. 그런데 바로 이 토대 위에서 노동자는 자기 노동을 판매하고, 그의 노동은 임금 노동이 된다.

 

2. 부등가물 교환: 노동자가 12시간 노동에 대해 6원보다 적게, 12시간 노동보다 적은 양의 노동을 받는다. 이 경우, 12시간 노동이 10시간, 6시간 등 동일하지 않은 크기들과 교환된다. 이처럼 동일하지 않은 크기들을 같다고 간주하는 것은 가치 규정을 폐기하는 결과를 낳는다. 스스로를 폐기하는 이러한 모순은 아예 법칙으로 표명되거나 공식화될 수조차 없다.

 

더 많은 양의 노동과 더 적은 양의 노동 사이의 교환을 대상화된 노동과 살아있는 노동이라는 형태상의 차이에서 끌어내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이러한 해결책은 상품 가치가 거기에 실제로 대상화된 노동량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생산에 필요한 살아있는 노동량으로 결정된다는 점에서 더욱 불합리하다.

 

예를 들어, 한 상품이 6시간의 노동을 대표한다고 하자. 3시간 만에 그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발명이 이루어진다면, 그 상품의 가치는 (심지어 이미 생산된 상품의 가치까지도) 절반으로 떨어진다. 이제 그 상품은 이전의 6시간 대신 3시간의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만을 대표하게 된다. 따라서 상품 가치의 크기는 대상화된 노동량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품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으로 결정된다.

 

상품 시장에서 화폐 소유자와 직접 마주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자다. 후자가 판매하는 상품은 바로 그의 노동력이다. 노동이 현실적으로 시작될 때, 노동력은 이미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시점부터는 더 이상 판매될 수 없다. 노동은 가치 실체이자 내재적 척도이지만, 그 자체는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노동 가치라는 표현은 가치 개념을 완전히 소멸시킬 뿐 아니라, 역으로 그 반대물로 만든다. 이것은 토지 가치와 같은 환상적 표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적 표현은 생산 관계 자체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본질적 관계의 현상 형태를 나타내는 범주이다. 현상에서는 사물이 흔히 거꾸로 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정치경제학을 제외한 모든 과학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은 노동 가격이라는 범주를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비판 없이 빌려와, 단지 이 가격이 어떻게 결정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데 그쳤다. 고전파는 수요와 공급 사이의 관계 변동이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노동 가격 변동 그 자체, 곧 시장 가격이 일정한 평균 수준의 상하로 움직인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음을 곧 인식했다.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고, 기타 조건이 불변할 때, 가격 진동은 멈춘다. 이때 수요와 공급은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게 되며, 상품 가격(노동 가격)은 수요와 공급 관계와 무관하게 결정되는 노동의 자연 가격이 된다. 따라서 이 자연 가격이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밝히는 것이 주요 연구 대상으로 전환되었다. 또는 시장 가격의 변동을 일정 기간(: 1) 동안 고찰하여, 그 변동들이 서로 상쇄되어 평균적인 불변 크기를 낳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 불변 크기는 (상호 상쇄되는 편차와는 달리) 결정되어야만 했다. 노동의 우연적인 시장 가격들을 지배하고 조절하는 가격, 곧 중농주의자들의 노동의 필요 가격또는 애덤 스미스의 자연 가격은 다른 상품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화폐로 표현된 노동 가치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와 같이, 정치경제학은 노동의 우연적인 가격들을 파헤쳐 그 가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가치는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더 깊이 들어가 생산비로부터 규정되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생산비, 곧 노동자 자신을 생산 또는 재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 질문이 정치경제학에서 은연중에 최초의 질문(노동 가치)을 대체하게 되었다. 이는 정치경제학이 노동 그 자체의 생산비를 문제 삼으면서 악순환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이 노동 가치라고 부른 것은 사실상 (노동자라는 인물 속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노동력 가치이다.

 

노동력은 (기계가 수행하는 작업과 다르듯이) 자기 자신의 기능인 노동과는 구별된다. 정치경제학자들은 노동의 시장 가격과 이른바 노동 가치 사이의 차이, 노동 가치와 이윤율 사이의 관계, 상품 가치 중 노동 수단으로부터 생산되는 부분과 노동 가치 사이의 관계 따위에 집착한 나머지, 분석 과정에서 노동의 시장 가격으로부터 가정된 노동의 가치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이 노동 가치 자체를 다시 노동력의 가치로 해소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은 자기 분석의 이러한 성과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고, 문제가 되는 가치 관계의 최종적이고 적절한 표현으로 노동의 가치’, ‘노동의 자연 가격등의 범주를 무비판적으로 채용했다. 그 결과, (잉여가치학설사에서 볼 수 있듯이) 해결할 수 없는 혼란과 모순에 빠졌으며, 동시에 (원칙적으로 현상의 겉모습에만 충실한) 속류 경제학에 활동할 튼튼한 무대를 제공하게 된다.

 

다음으로 노동력의 가치(그리고 가격)가 어떻게 임금이라는 전환된 형태로 표현되는가를 살펴본다. 알려진 바와 같이, 노동력의 하루 가치는 노동자의 일정한 수명을 기준으로 계산되며, 이 수명에는 노동일의 특정한 길이가 대응한다. 관습적인 1노동일은 12시간이고, 노동력의 하루 가치가 3(6시간의 노동이 대상화된 가치의 화폐적 표현)이라고 가정한다. 노동자가 3원을 받는다면, 그는 (12시간 기능하는) 자신의 노동력 가치를 받는다. 이제 노동력의 이러한 하루 가치가 하루 노동 그 자체의 가치로 표현되기 때문에, 12시간의 노동은 3원의 가치를 갖는다는 (엉터리) 공식이 도출된다. 이에 따라, 노동력의 가치가 노동의 가치를 결정하며, 또는 화폐적 표현으로 노동의 필요 가격을 결정하듯이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력의 가격이 노동력의 가치와 다르다면, 노동의 가격 역시 노동의 가치와 달라진다.

 

노동의 가치라는 것은 노동력의 가치를 나타내는 불합리한 표현에 지나지 않으므로, 노동의 가치가 노동의 가치 생산물보다 언제나 적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이유는, 자본가는 항상 노동력이 자기 자신의 가치를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더 오래 기능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인용한 예에서, 12시간 기능하는 노동력의 가치는 3원이며, 이 가치를 재생산하는 데는 6시간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 노동력이 새로 생산된 가치는 6원이다. 이는 노동력이 사실상 12시간 기능했으며, 노동력으로부터 새로 생산된 가치는 노동력 자체의 가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기능하는 시간의 길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결국, 6원의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 그 자체가 3원의 가치를 갖는다는 얼핏 보아 불합리한 결과에 도달한다. 또한, 우리는 노동일의 지불받는 부분 (6시간 노동)을 대표하는 3원의 가치가 (지불받지 않는 6시간을 포함하는) 전체 12시간 노동일의 가치 또는 가격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임금 형태는 노동일이 필요 노동과 잉여 노동으로, 또 지불받는 노동과 지불받지 않는 노동으로 분할된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전체 노동이 지불받는 노동으로 나타난다.

 

부역 노동에서는 사정이 달라, 농노가 자신을 위해 하는 노동과 영주를 위해 하는 강제 노동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매우 명확하게 구별된다. 노예 노동에서는 노동일 중 노예가 자기 자신의 생활 수단 가치를 대체하는 부분 (사실상 자기 자신을 위해 노동하는 부분)조차도 주인을 위한 노동으로 나타난다. 노예의 전체 노동은 지불받지 않는 노동으로 보인다. 이와 반대로, 임금 노동에서는 잉여 노동 (지불받지 않는 노동)까지도 지불받는 노동으로 보인다. 노예 노동에서는 소유 관계가 노예의 자기 자신을 위한 노동을 은폐하지만, 임금 노동에서는 화폐 관계가 임금 노동자의 무상 노동을 은폐한다.

 

이로부터 노동력의 가치와 가격이 임금 형태로 (노동 그 자체의 가치와 가격으로) 전환되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 의의를 가지는가를 알 수 있다. 현실적 관계를 은폐하고 그와 정반대되는 관계를 보여주는 이 현상 형태야말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모든 정의 관념,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모든 신비화, 자유에 대한 자본주의의 모든 환상, 속류 경제학의 모든 변호론적 속임수 등의 토대가 된다.

 

임금의 비밀을 폭로하는 데 세계 역사는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러나 이 현상 형태의 필연성과 존재 이유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은 없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교환은 최초에는 다른 모든 상품의 구매·판매와 똑같은 형태로 우리의 지각에 나타난다. 구매자는 일정한 화폐액을 주며, 판매자는 화폐와는 다른 물건을 준다. 법률 의식은 이 경우, 기껏해야 법률적으로 동등한 공식들, 네가 주기 때문에 나는 준다. 네가 하기 때문에 나는 준다. 네가 주기 때문에 나는 한다. 네가 하기 때문에 나는 한다.”에서 표현되는 내용의 차이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교환 가치와 사용 가치는 그 자체로 서로 같은 단위로 잴 수 없는 크기이므로, ‘노동의 가치’, ‘노동의 가격이라는 표현이 면화의 가치’, ‘면화의 가격보다 더 불합리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에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제공한 뒤에야 대가를 받는다는 사정이 더해진다. 지불 수단으로 화폐는 제공된 물건의 가치 또는 가격, 따라서 이 경우에는 제공된 노동의 가치 또는 가격을 추후에 실현하듯이 보인다.

 

마지막으로,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제공하는 사용 가치는 실제로는 그의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력의 기능, 곧 재봉 노동, 제화 노동, 방적 노동 등 일정한 형태의 유용 노동이다. 바로 이 노동이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를 생산하는 일반적 요소라는 것, 그래서 이 속성으로 노동은 다른 모든 상품과 구별된다는 것은 일상적인 의식으로는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12시간 노동의 대가로 6시간의 가치 생산물 (3)을 받는 노동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에게는 사실상 12시간 노동이 3원을 구매하는 수단일 따름이다. 그의 노동력 가치는 그의 일상적 생활 수단의 가치 변동에 따라 3원에서 4원으로, 또는 2원으로 변동할 수 있다. 또한 노동력 가치가 불변인 경우에도, 그 가격은 수요·공급 관계의 변동 결과로 4원으로 등귀하거나 2원으로 저하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는 언제나 12시간 노동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그가 받는 등가물의 모든 양적 변동은 그에게 필연적으로, 그의 12시간 노동의 가치 또는 가격의 변동으로 나타난다. 이 사정은 노동일을 불변의 크기로 본 애덤 스미스로 하여금, 비록 생활 수단의 가치가 변동하여 같은 노동일이 노동자에게 더 많거나 더 적은 양의 화폐로 표시된다 하더라도, 노동의 가치는 불변이라는 그릇된 주장을 하게 했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가를 보자. 그는 될수록 적은 양의 화폐로 될수록 많은 노동을 얻으려 한다. 따라서 실제로 그의 관심사는 오직 노동력의 가격과 이것의 기능이 생산해 내는 가치 사이의 차이뿐이다. 그런데 그는 모든 상품을 최대한 싸게 사려 하며, 자신의 이윤 원천을 언제나 가치 이하로 구매하고 가치 이상으로 판매하는 뛰어난 상술로만 설명한다. 그러므로 노동의 가치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그가 이 가치를 실제로 지불한다면, 자본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도 없을 것이며, 그의 화폐는 자본으로 전환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더욱이, 임금의 현실적 운동은 노동력의 가치가 아닌 그 기능, 곧 노동 그 자체의 가치에 대해 지불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듯한 현상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들은 두 개의 큰 부류로 분류한다.

 

1. 노동일의 길이 변동에 따라 임금이 변동하는 경우다.

 

기계를 일주일 빌리는 비용이 하루 빌리는 비용보다 더 들기 때문에, 지불하는 것은 기계의 가치가 아니라 기계가 행한 작업의 가치에 대해서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2.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상이한 노동자들의 임금 차이 (격차)이다.

 

이러한 개인적 차이는 노예 제도에서도 확인되는데, 노예 제도에서는 노동력 자체가 아무런 가림 없이 공공연하게 판매되므로, 매매되는 것이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이라는 환상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다만 구별점은 임금 노동 제도에서는 노동력이 노동자 자신으로부터 판매되지만, 노예 제도에서는 제3자로부터 판매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평균 이상의 노동력에서 나오는 이득과 평균 이하의 노동력에서 나오는 손실은 노예 제도에서는 노예 소유자의 몫이 되지만, 임금 노동 제도에서는 노동자 자신의 몫이 된다는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어쨌든, ‘노동의 가치와 가격또는 임금이라는 현상 형태는 그것이 나타내는 본질적 관계, 곧 노동력의 가치와 가격과는 구별된다. 따라서 모든 현상 형태들과 그것들 배후에 숨어 있는 실체로부터 타당한 원칙은 여기에서도 적용된다. 현상 형태는 통속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직접 자연 발생적으로 재생산되지만, 그 배후에 숨어 있는 본질적 관계는 과학으로부터 먼저 규명되어야 한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은 사물의 참된 모습에 접근하고 있지만, 그것을 의식적으로 정식화하지 못하고 있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이 그 부르주아적 겉껍질을 벗어 던지지 않는 한 그렇게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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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잉여 가치율을 표시하는 여러 가지 공식

 

이미 본 바와 같이, 잉여 가치율은 다음과 같은 공식들로 표시된다.

 

. 잉여가치(s) / 가변 자본(v) = 잉여 가치 / 노동력의 가치 = 잉여 노동 / 필요 노동

잉여 가치율의 또 다른 파생 공식은 잉여 가치(s) / 노동력의 가치 총합으로 표시되는데, 이는 잉여 가치와 가변 자본(v)의 관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 관계는 잉여 노동 시간 / 필요 노동 시간이라는 시간의 비율로도 표현한다. , 가치 비율과 시간 비율은 동일한 실체를 상이한 측정 단위로 나타낼 뿐이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은 이 공식들을 명시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이미 그 내용적 기반을 확립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공식들은 잉여 가치와 노동력의 본질적 관계를 밝히는 데 있어 가장 엄밀하고 전문적이다.

 

. 잉여 노동 / 노동일 = 잉여 가치 / 생산물의 가치 = 잉여 생산물 / 총 생산물

 

불변 부분의 제외는 이 공식들이 오직 노동력으로부터 새로이 생산된 가치 생산물(v+s)만을 전체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 비율은 노동일 전체에 대한 잉여 노동 시간의 비율이며, 동시에 새로운 가치 중 잉여 가치가 점유하는 비중을 나타낸다. 이 점은 오로지 가변 자본(v)에 대해서만 잉여 가치를 측정하여 착취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제1의 공식과 개념적으로 구별된다. 여기서는 잉여 가치와 생산된 가치 총량 사이의 관계가 시간, 가치, 생산물이라는 세 가지 모습으로 동일하게 표현된다.

 

2의 공식들에서 잉여 가치율이 잘못 표현되는 이유는 그 분모가 노동일 전체, 새로 생산된 가치 총합, 또는 총 생산물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 잉여 가치율을 6시간의 잉여 노동 / 12시간의 노동일을 표시하면 50%가 되며, 3원의 가치 / 6원의 생산물 가치로 표시해도 50%가 된다. 50%라는 수치는 자본가가 노동력에 지출한 가변 자본에 대비하여 잉여 가치를 얼마나 착취했는지, 다시 말해, 필요 노동 대비 잉여 노동의 비율을 100%로 보여주는 본래의 착취도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이 파생 공식들(.)은 착취도를 감추거나 축소하는 효과를 낳는다.

 

6시간의 잉여 노동 / 6시간의 필요 노동 = 3원의 잉여 가치 / 3원의 가변 자본 = 100%

 

그런데 공식 .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된다.

 

6시간의 잉여 노동 / 12시간의 노동일 = 3원의 잉여 가치 / 6원의 가치 생산물 = 50%

 

이러한 100% 상한이라는 그릇된 법칙은 자본의 착취도를 필연적으로 은폐한다. 잉여 가치(s)는 가변 자본(v)을 얼마든지 초과하여 증가할 수 있으며, 이로부터 잉여 가치율(s/v)100% 이상으로 상승한다. 그러므로 노동일 또는 가치 생산물의 분할 비율(s / [v+s])을 자본의 자기 증식도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윤 창출의 본질적 동력을 왜곡하는 행위이다. 오직 제1의 공식(s/v)만이 가변 자본에 대한 잉여 가치의 비율로부터 자본의 노동 지배 정도를 정확하고 엄밀하게 나타낸다.

 

그러므로 잉여 가치율(s/v)만이 자본의 착취율을 100%를 넘어 300%(3:1)까지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공식이다. 잉여 노동/노동일 공식(s/[v+s])은 잉여 노동이 필연적으로 노동일 전체의 부분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적 한계에 갇히게 된다. 잉여 노동이 노동일과 같아지려면 필요 노동이 영(0)이 되어야 하지만, 잉여 노동 자체가 필요 노동을 전제로 성립하는 기능이기에 필요 노동의 소멸은 곧 잉여 노동의 소멸을 의미한다. 따라서 제2의 공식은 100%를 초과할 수 없으며, 자본의 자기 증식도를 은폐하는 분할 비율의 표현에 불과하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이 노동일을 불변의 크기로 전제하는 방법은 공식 .의 사용에서 비롯되었다. 이 공식은 잉여 노동을 언제나 고정된 길이의 노동일이라는 전체 크기에 대비시키기 때문이다. 가치 생산물의 분할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에도, 그 대상인 가치 생산물은 이미 일정한 길이를 가진 노동일의 대상화된 형태이므로, 착취도가 가변 자본에 대한 잉여 가치의 비율(s/v)이 아닌, 노동일 총량에 대한 잉여 노동의 비율(s/[v+s]로 오인되는 결과가 발생한다. 이는 노동일을 분배해야 할 고정된 것으로 간주하게 하여, 자본의 자기 증식이라는 본질적 성격을 은폐하고, 착취도를 축소하여 표현한다.

 

이처럼 잉여 가치(s)와 노동력의 가치(v)를 가치 생산물(v+s)의 부분들로 표현하는 방식은 가변 자본이 살아 있는 노동력과 교환되는 자본 관계의 본질적인 특성을 은폐한다. 이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를 생산물 형성에 기여한 몫을 상호 분배하는 협력적 연합인 것처럼 잘못된 외관을 씌운다. 결과적으로, 잉여 가치가 가변 자본의 착취로부터 생선된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대신, 생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단순한 분배 문제로 위장하며, 노동자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라는 독특한 자본 관계를 흐리게 한다.

 

이와 같이, 공식 (s/v) 또한 공식 (s/(v+s)로 다시 전환될 수 있다.

 

6시간의 잉여 노동 / 12시간의 노동일

 

필요 노동 시간은 12시간의 노동일에서 6시간의 잉여 노동을 뺀 것이므로,

 

6시간의 잉여 노동 / 6시간의 필요 노동 = 100 / 100

 

곧 잉여 가치 / 가변 자본이라는 비율은 분모에 잉여 가치를 더하여 잉여 가치 / 가치 생산물이라는 비율로 표현된다. 다만, 이러한 수학적 전환에도, 잉여 가치율의 개념적 엄밀성은 오직 가변 자본에 대한 잉여 가치의 비율로부터 노동력의 착취도를 직접 폭로하는 공식 (s/v)에 있다. 공식 (s/(v+s)는 단지 가치 생산물의 분할 비율을 나타낼 뿐이며, 착취율을 100% 미만으로 왜곡하여 자본의 자기 증식도를 은폐하는 한계를 지닌다.

 

세 번째의 공식들은 필자가 이미 보였듯이, 다음과 같이 표시된다.

 

. 잉여 가치(s) / 노동력 가치(v) = 잉여 노동 / 필요 노동 = 지불받지 않는 노동 / 지불받는 노동

 

세 번째 공식 지불받지 않는 노동 / 지불받는 노동은 잉여 노동 / 필요 노동의 일반적 표현임에도, 자본가가 노동력이 아닌 노동 자체에 대해 임금을 지불한다는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다. 그러나 이 오해는 자본가가 노동력의 가치에 상응하는 가변 자본을 지불하면서 살아 있는 노동력에 대한 처분권을 획득한다는 사실로부터 제거된다. 자본가는 이 노동력을 필요 노동 시간에는 노동력의 등가 가치를 생산하는 데 사용하며, 이는 시장에서 상품을 제값 주고 구입하는 일에 다름없다. 반면, 잉여 노동 시간에는 대가 없이 노동력의 사용을 획득하여 자신을 위한 잉여 가치를 생산한다. 이처럼 잉여 노동은 무상으로 획득된 노동력의 지출이라는 점에서 지출받지 않는 노동(무산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이러한 잉여 노동에 대한 처분권은 자본의 자기 증식을 하는 유일한 원천이다. 자본가가 노동력의 가치에 상응하는 가변 자본을 지불하는 행위는 살아 있는 노동력이라는 사용 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 획득된 노동력은 필요 노동 시간을 넘어 잉여 노동 시간에까지 연장되어 자본가를 위해 가치를 생산한다. 그러므로 잉여 가치는 시장에서 교환이나 단순한 분배 문제가 아니며, 생산 과정에서 타인의 노동 시간을 대가 없이 착취하는 본질적 원리로 귀결된다. 이로부터 자본과 노동 관계는 생산물을 분배하는 협력이 아닌, 지불받지 않는 노동을 둘러싼 근본적인 착취 관계로 명확히 정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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