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임금
19. 노동력의 가치(가격)가 임금으로 전환
부르주아 사회의 표면에서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 가격, 곧 일정한 양의 노동에 대한 대가로 지불되는 일정한 양의 화폐로 나타난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노동의 가치를 언급하며, 그 화폐적 표현을 노동의 필요 가격 또는 자연 가격이라고 부른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의 시장 가격은 이러한 필요 가격 상하로 움직인다고 논한다.
상품 가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상품 생산에 투입된 사회적 노동의 객관적 형태다. 이 가치 크기의 측정은 상품에 포함된 노동량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12시간 노동일의 가치를 12시간 노동에 포함된 12시간 노동으로 결정한다면 순전한 동어 반복이다. 노동의 가치 자체를 노동량으로 측정하려는 시도는 순환 논리에 빠지게 된다.
노동이 상품으로 시장에서 판매되려면, 판매되기 전에 반드시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에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현실적 존재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는 노동을 파는 것이 아니라 그 상품 자체를 팔게 된다. 이 논리는 노동 그 자체가 아닌 노동력만이 상품으로 거래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 모순을 무시하더라도, 화폐(대상화된 노동)와 살아있는 노동의 직접적 교환은 가치 법칙을 폐지하거나 (자본주의적 생산 토대 위에서 비로소 자유롭게 전개되는), 또는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를 폐지한다 (바로 임금 노동에 기반을 두는). 예를 들어, 12시간 노동일이 6원의 화폐 가치로 대상화된다고 가정하자. 두 가지 경우가 발생한다.
1. 등가물 교환: 노동자가 자신의 12시간 노동 대가로 6원을 받는다. 그의 노동 가격은 그의 노동 생산물 가격과 동일하다. 이 경우, 그는 노동의 구매자에게 잉여 가치를 전혀 생산하지 않는다. 이 6원은 자본으로 전환될 수 없으며, 이는 곧 자본 자본주의적 생산 토대 자체의 소멸로 이어진다. 그런데 바로 이 토대 위에서 노동자는 자기 노동을 판매하고, 그의 노동은 임금 노동이 된다.
2. 부등가물 교환: 노동자가 12시간 노동에 대해 6원보다 적게, 곧 12시간 노동보다 적은 양의 노동을 받는다. 이 경우, 12시간 노동이 10시간, 6시간 등 동일하지 않은 크기들과 교환된다. 이처럼 동일하지 않은 크기들을 같다고 간주하는 것은 가치 규정을 폐기하는 결과를 낳는다. 스스로를 폐기하는 이러한 모순은 아예 법칙으로 표명되거나 공식화될 수조차 없다.
더 많은 양의 노동과 더 적은 양의 노동 사이의 교환을 대상화된 노동과 살아있는 노동이라는 형태상의 차이에서 끌어내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이러한 해결책은 상품 가치가 거기에 실제로 대상화된 노동량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생산에 필요한 살아있는 노동량으로 결정된다는 점에서 더욱 불합리하다.
예를 들어, 한 상품이 6시간의 노동을 대표한다고 하자. 3시간 만에 그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발명이 이루어진다면, 그 상품의 가치는 (심지어 이미 생산된 상품의 가치까지도) 절반으로 떨어진다. 이제 그 상품은 이전의 6시간 대신 3시간의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만을 대표하게 된다. 따라서 상품 가치의 크기는 대상화된 노동량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품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으로 결정된다.
상품 시장에서 화폐 소유자와 직접 마주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자다. 후자가 판매하는 상품은 바로 그의 노동력이다. 노동이 현실적으로 시작될 때, 노동력은 이미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시점부터는 더 이상 판매될 수 없다. 노동은 가치 실체이자 내재적 척도이지만, 그 자체는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노동 가치’라는 표현은 가치 개념을 완전히 소멸시킬 뿐 아니라, 역으로 그 반대물로 만든다. 이것은 ‘토지 가치’와 같은 환상적 표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적 표현은 생산 관계 자체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본질적 관계의 현상 형태를 나타내는 범주이다. 현상에서는 사물이 흔히 거꾸로 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정치경제학을 제외한 모든 과학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은 ‘노동 가격’이라는 범주를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비판 없이 빌려와, 단지 이 가격이 어떻게 결정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데 그쳤다. 고전파는 수요와 공급 사이의 관계 변동이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노동 가격 변동 그 자체, 곧 시장 가격이 일정한 평균 수준의 상하로 움직인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음을 곧 인식했다.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고, 기타 조건이 불변할 때, 가격 진동은 멈춘다. 이때 수요와 공급은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게 되며, 상품 가격(노동 가격)은 수요와 공급 관계와 무관하게 결정되는 노동의 자연 가격이 된다. 따라서 이 자연 가격이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밝히는 것이 주요 연구 대상으로 전환되었다. 또는 시장 가격의 변동을 일정 기간(예: 1년) 동안 고찰하여, 그 변동들이 서로 상쇄되어 평균적인 불변 크기를 낳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 불변 크기는 (상호 상쇄되는 편차와는 달리) 결정되어야만 했다. 노동의 우연적인 시장 가격들을 지배하고 조절하는 가격, 곧 중농주의자들의 ‘노동의 필요 가격’ 또는 애덤 스미스의 ‘자연 가격’은 다른 상품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화폐로 표현된 노동 가치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와 같이, 정치경제학은 노동의 우연적인 가격들을 파헤쳐 그 가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가치는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더 깊이 들어가 생산비로부터 규정되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생산비, 곧 노동자 자신을 생산 또는 재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 질문이 정치경제학에서 은연중에 최초의 질문(노동 가치)을 대체하게 되었다. 이는 정치경제학이 노동 그 자체의 생산비를 문제 삼으면서 악순환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이 ‘노동 가치’라고 부른 것은 사실상 (노동자라는 인물 속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노동력 가치이다.
노동력은 (기계가 수행하는 작업과 다르듯이) 자기 자신의 기능인 노동과는 구별된다. 정치경제학자들은 노동의 시장 가격과 이른바 노동 가치 사이의 차이, 노동 가치와 이윤율 사이의 관계, 상품 가치 중 노동 수단으로부터 생산되는 부분과 노동 가치 사이의 관계 따위에 집착한 나머지, 분석 과정에서 노동의 시장 가격으로부터 가정된 노동의 가치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이 노동 가치 자체를 다시 노동력의 가치로 해소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은 자기 분석의 이러한 성과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고, 문제가 되는 가치 관계의 최종적이고 적절한 표현으로 ‘노동의 가치’, ‘노동의 자연 가격’ 등의 범주를 무비판적으로 채용했다. 그 결과, (잉여가치학설사에서 볼 수 있듯이) 해결할 수 없는 혼란과 모순에 빠졌으며, 동시에 (원칙적으로 현상의 겉모습에만 충실한) 속류 경제학에 활동할 튼튼한 무대를 제공하게 된다.
다음으로 노동력의 가치(그리고 가격)가 어떻게 임금이라는 전환된 형태로 표현되는가를 살펴본다. 알려진 바와 같이, 노동력의 하루 가치는 노동자의 일정한 수명을 기준으로 계산되며, 이 수명에는 노동일의 특정한 길이가 대응한다. 관습적인 1노동일은 12시간이고, 노동력의 하루 가치가 3원 (6시간의 노동이 대상화된 가치의 화폐적 표현)이라고 가정한다. 노동자가 3원을 받는다면, 그는 (12시간 기능하는) 자신의 노동력 가치를 받는다. 이제 노동력의 이러한 하루 가치가 하루 노동 그 자체의 가치로 표현되기 때문에, 12시간의 노동은 3원의 가치를 갖는다는 (엉터리) 공식이 도출된다. 이에 따라, 노동력의 가치가 노동의 가치를 결정하며, 또는 화폐적 표현으로 노동의 필요 가격을 결정하듯이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력의 가격이 노동력의 가치와 다르다면, 노동의 가격 역시 노동의 가치와 달라진다.
노동의 가치라는 것은 노동력의 가치를 나타내는 불합리한 표현에 지나지 않으므로, 노동의 가치가 노동의 가치 생산물보다 언제나 적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이유는, 자본가는 항상 노동력이 자기 자신의 가치를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더 오래 기능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인용한 예에서, 12시간 기능하는 노동력의 가치는 3원이며, 이 가치를 재생산하는 데는 6시간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 노동력이 새로 생산된 가치는 6원이다. 이는 노동력이 사실상 12시간 기능했으며, 노동력으로부터 새로 생산된 가치는 노동력 자체의 가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기능하는 시간의 길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결국, 6원의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 그 자체가 3원의 가치를 갖는다는 얼핏 보아 불합리한 결과에 도달한다. 또한, 우리는 노동일의 지불받는 부분 (6시간 노동)을 대표하는 3원의 가치가 (지불받지 않는 6시간을 포함하는) 전체 12시간 노동일의 가치 또는 가격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임금 형태는 노동일이 필요 노동과 잉여 노동으로, 또 지불받는 노동과 지불받지 않는 노동으로 분할된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전체 노동이 지불받는 노동으로 나타난다.
부역 노동에서는 사정이 달라, 농노가 자신을 위해 하는 노동과 영주를 위해 하는 강제 노동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매우 명확하게 구별된다. 노예 노동에서는 노동일 중 노예가 자기 자신의 생활 수단 가치를 대체하는 부분 (사실상 자기 자신을 위해 노동하는 부분)조차도 주인을 위한 노동으로 나타난다. 노예의 전체 노동은 지불받지 않는 노동으로 보인다. 이와 반대로, 임금 노동에서는 잉여 노동 (지불받지 않는 노동)까지도 지불받는 노동으로 보인다. 노예 노동에서는 소유 관계가 노예의 자기 자신을 위한 노동을 은폐하지만, 임금 노동에서는 화폐 관계가 임금 노동자의 무상 노동을 은폐한다.
이로부터 노동력의 가치와 가격이 임금 형태로 (노동 그 자체의 가치와 가격으로) 전환되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 의의를 가지는가를 알 수 있다. 현실적 관계를 은폐하고 그와 정반대되는 관계를 보여주는 이 현상 형태야말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모든 정의 관념,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모든 신비화, 자유에 대한 자본주의의 모든 환상, 속류 경제학의 모든 변호론적 속임수 등의 토대가 된다.
임금의 비밀을 폭로하는 데 세계 역사는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러나 이 현상 형태의 필연성과 존재 이유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은 없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교환은 최초에는 다른 모든 상품의 구매·판매와 똑같은 형태로 우리의 지각에 나타난다. 구매자는 일정한 화폐액을 주며, 판매자는 화폐와는 다른 물건을 준다. 법률 의식은 이 경우, 기껏해야 법률적으로 동등한 공식들, 곧 “네가 주기 때문에 나는 준다. 네가 하기 때문에 나는 준다. 네가 주기 때문에 나는 한다. 네가 하기 때문에 나는 한다.”에서 표현되는 내용의 차이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교환 가치와 사용 가치는 그 자체로 서로 같은 단위로 잴 수 없는 크기이므로, ‘노동의 가치’, ‘노동의 가격’이라는 표현이 ‘면화의 가치’, ‘면화의 가격’보다 더 불합리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에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제공한 뒤에야 대가를 받는다는 사정이 더해진다. 지불 수단으로 화폐는 제공된 물건의 가치 또는 가격, 따라서 이 경우에는 제공된 노동의 가치 또는 가격을 추후에 실현하듯이 보인다.
마지막으로,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제공하는 사용 가치는 실제로는 그의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력의 기능, 곧 재봉 노동, 제화 노동, 방적 노동 등 일정한 형태의 유용 노동이다. 바로 이 노동이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를 생산하는 일반적 요소라는 것, 그래서 이 속성으로 노동은 다른 모든 상품과 구별된다는 것은 일상적인 의식으로는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12시간 노동의 대가로 6시간의 가치 생산물 (3원)을 받는 노동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에게는 사실상 12시간 노동이 3원을 구매하는 수단일 따름이다. 그의 노동력 가치는 그의 일상적 생활 수단의 가치 변동에 따라 3원에서 4원으로, 또는 2원으로 변동할 수 있다. 또한 노동력 가치가 불변인 경우에도, 그 가격은 수요·공급 관계의 변동 결과로 4원으로 등귀하거나 2원으로 저하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는 언제나 12시간 노동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그가 받는 등가물의 모든 양적 변동은 그에게 필연적으로, 그의 12시간 노동의 가치 또는 가격의 변동으로 나타난다. 이 사정은 노동일을 불변의 크기로 본 애덤 스미스로 하여금, 비록 생활 수단의 가치가 변동하여 같은 노동일이 노동자에게 더 많거나 더 적은 양의 화폐로 표시된다 하더라도, 노동의 가치는 불변이라는 그릇된 주장을 하게 했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가를 보자. 그는 될수록 적은 양의 화폐로 될수록 많은 노동을 얻으려 한다. 따라서 실제로 그의 관심사는 오직 노동력의 가격과 이것의 기능이 생산해 내는 가치 사이의 차이뿐이다. 그런데 그는 모든 상품을 최대한 싸게 사려 하며, 자신의 이윤 원천을 언제나 가치 이하로 구매하고 가치 이상으로 판매하는 뛰어난 상술로만 설명한다. 그러므로 노동의 가치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그가 이 가치를 실제로 지불한다면, 자본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도 없을 것이며, 그의 화폐는 자본으로 전환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더욱이, 임금의 현실적 운동은 노동력의 가치가 아닌 그 기능, 곧 노동 그 자체의 가치에 대해 지불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듯한 현상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들은 두 개의 큰 부류로 분류한다.
1. 노동일의 길이 변동에 따라 임금이 변동하는 경우다.
기계를 일주일 빌리는 비용이 하루 빌리는 비용보다 더 들기 때문에, 지불하는 것은 기계의 가치가 아니라 기계가 행한 작업의 가치에 대해서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2.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상이한 노동자들의 임금 차이 (격차)이다.
이러한 개인적 차이는 노예 제도에서도 확인되는데, 노예 제도에서는 노동력 자체가 아무런 가림 없이 공공연하게 판매되므로, 매매되는 것이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이라는 환상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다만 구별점은 임금 노동 제도에서는 노동력이 노동자 자신으로부터 판매되지만, 노예 제도에서는 제3자로부터 판매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평균 이상의 노동력에서 나오는 이득과 평균 이하의 노동력에서 나오는 손실은 노예 제도에서는 노예 소유자의 몫이 되지만, 임금 노동 제도에서는 노동자 자신의 몫이 된다는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어쨌든, ‘노동의 가치와 가격’ 또는 ‘임금’이라는 현상 형태는 그것이 나타내는 본질적 관계, 곧 노동력의 가치와 가격과는 구별된다. 따라서 모든 현상 형태들과 그것들 배후에 숨어 있는 실체로부터 타당한 원칙은 여기에서도 적용된다. 현상 형태는 통속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직접 자연 발생적으로 재생산되지만, 그 배후에 숨어 있는 본질적 관계는 과학으로부터 먼저 규명되어야 한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은 사물의 참된 모습에 접근하고 있지만, 그것을 의식적으로 정식화하지 못하고 있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이 그 부르주아적 겉껍질을 벗어 던지지 않는 한 그렇게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