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 법칙을 증명하는 예들

 

. 1846-1866년의 잉글랜드

 

근대 자본주의적 축적 연구에서 이 20년간(1846-1866)만큼 유리한 시기는 없다. 이는 곧 포르투나투스의 보물 주머니 발견에 비견될 만하다 (‘인명해설참조). 그중 잉글랜드는 다시 고전적 사례를 제시한다. 잉글랜드는 세계 시장에서 독보적 지위를 유지하며 자본주의적 생산이 온전히 발달한 유일한 곳이다.

 

더욱이, 1846년 곡물법 폐지로부터 자유 무역의 도래는 속류 경제학의 마지막 도피로를 차단했다 (속류 경제학은 자유 무역만으로 노동자 계급의 상태가 급격히 개선되리라 선전한 바 있다). 20년 중 후반 10년간의 생산 발전 속도가 전반 10년을 압도적으로 능가했음은 이미 제4편에서 충분히 논한 바 있다.

 

최근 반세기 동안, 잉글랜드 인구의 절대적 증가는 현저했지만, 그 상대적 증가, 곧 연평균 증가율은 공식 인구 조사의 다음 표에서 보듯, 지속적인 하락세를 나타낸다.

 

잉글랜드와 웨일즈 인구의 10년 단위 연평균 증가율

 

1811-1821: 1.533%

1821-1831: 1.446%

1831-1841: 1.326%

1841-1851: 1.216%

1851-1861: 1.141%

 

이와 대조적으로, 부의 증대를 고찰한다. 여기서 가장 신뢰할 만한 근거는 소득세 부과 대상인 이윤 및 지대의 변동이다. 1853-1864년 사이 영국의 과세 대상 이윤(차지 농업가와 일부 범주는 제외) 증가는 50.47%에 달했다 (연평균 4.58%). 이는 같은 기간 인구 증가율 약 12%와 크게 대비된다. 과세 대상 지대(가옥, 철도, 광산, 어장 등 포함)의 증가는 1853-1864년 사이 38%였으며 (연평균 3.45%), 특히 다음 항목들의 증가 폭이 두드러진다.

 

1853년에 대비한 1864년의 연간 지대 소득

 

· 가옥: 총증가율(%): 38.60, 연평균 증가율(%): 3.50

· 채석장: 총증가율: 84.76, 연평균 증가율: 7.70

· 광산: 총증가율: 68.85, 연평균 증가율: 6.26

· 제철소: 총증가율: 39.92, 연평균 증가율: 3.63

· 어장: 총증가율: 57.37, 연평균 증가율: 5.21

· 가스공장: 총증가율: 126.02, 연평균 증가율: 11.45

· 철도: 총증가율: 83.29, 연평균 증가율: 7.57

 

1853년부터 1864년까지의 기간을 4년 단위 세 구간으로 구분해 보면, 소득 증가율의 지속적인 증대가 확인된다. 예를 들어, 이윤 발생 소득의 증가율은 1853-1857년 연 1.73%, 1857-1861년 연 2.74%, 그리고 1861-1864년 연 9.30%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잉글랜드의 소득세 부과 대상 총소득은 다음과 같다.

 

잉글랜드의 소득세 부과 대상 총소득

 

1856: 307,068,898파운드

1859: 328,127,416파운드

1862: 351,745,241파운드

1863: 359,142,897파운드

1864: 362,462,279파운드

1865: 385,530,020파운드

 

자본의 축적은 집적과 집중을 동시에 수반했다. 공식 농업 통계가 없는 잉글랜드와 달리 아일랜드에는 존재하지만, 잉글랜드의 10개 주가 자발적으로 제공한 통계에 따르면, 1851년에서 1861년 사이 100에이커 미만 차지 농장 수가 31,583개에서 26,567개로 감소했다. 이는 5,016개의 차지 농장이 대규모 농장으로 합병되었음을 의미한다.

 

상속세 부과 동산의 경우, 1815-1825년에는 100만 파운드 이상이 한 건도 없었으나, 1825-1855년에는 8, 1855년에서 18596월까지 4년 반 동안은 4건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자본의 집중 경향은 1864년과 1865년의 소득세표 D항 분석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난다 (D항은 차지 농업가 등을 제외한 이윤을 다룬다). 우선 D항 소득세는 해당 원천 소득 중 60파운드 이상인 모든 소득에 부과된다.

 

잉글랜드, 웨일즈 및 스코틀랜드의 과세 대상 소득은 186495,844,222파운드에서 1865105,435,787파운드로 증가했다. 납세자 수는 1864년 총인구 23,891,009명 중 308,416명이었고, 1865년에는 총인구 24,127,003명 중 332,431명으로 늘었다. 다음 표는 이 2년간의 소득 분포 상태를 제시한다.

 

이윤 소득 분포

 

186445일 마감

 

· 납세자의 누적: 308,416, 이윤소득의 누적(단위: 파운드): 95,844,222

· 납세자의 누적: 22,334, 이윤소득의 누적: 57,028,290

· 납세자의 누적: 3,619, 이윤소득의 누적: 36,415,225

· 납세자의 누적: 832, 이윤소득의 누적: 22,809,781

· 납세자의 누적: 91, 이윤소득의 누적: 8,744,762

 

186545일 마감

 

· 납세자의 누적: 332,431, 이윤 소득의 누적(단위: 파운드): 105,435,787

· 납세자의 누적: 24,075, 이윤 소득의 누적(단위: 파운드): 64,554,197

· 납세자의 누적: 4,021, 이윤 소득의 누적(단위: 파운드): 42,535,576

· 납세자의 누적: 973, 이윤 소득의 누적(단위: 파운드): 27,555,313

· 납세자의 누적: 107, 이윤 소득의 누적(단위: 파운드): 11,077,238

 

영국에서 생산된 석탄

 

1855: 61,453,079, 16,113,267파운드

1864: 92,787,873, 23,197,968파운드

 

선철 생산

 

1855: 3,218,154, 8,045,385파운드

1864: 4,767,951, 11,919,877파운드

 

철도

 

1854

 

· 연장(延長): 8,054마일

· 불입 자본: 286,068,794파운드

 

1864

 

· 연장 12,789마일

· 불입 자본: 425,719,613파운드

 

영국 수출입 총액

 

1854: 268,210,145파운드

1865: 489,923,285파운드

 

수출 증가 표

 

1847: 58,842,377파운드

1849: 63,596,052파운드

1856: 115,826,948파운드

1860: 135,842,817파운드

1865: 165,862,402파운드

1866: 188,917,536파운드

 

이상의 통계는 영국 호적청장의 다음 승리의 환호성을 납득하게 한다.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공업과 부의 발전에는 따라가지 못했다.’

 

이제 이 공업의 직접적인 담당자, 곧 이 부의 생산자인 노동자 계급의 상태를 고찰한다. 글래드스턴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현재 국민의 소비력은 줄고, (노동자 계급의) 궁핍과 빈곤은 커지고 있는데, 이와 동시에, 상층 계급의 부는 끊임없이 축적되고 그들의 사치 풍조와 향락 수단은 증가하고, (자본은 끊임없이 증대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은 이 나라 사회 상태의 가장 암울한 현상들 중의 하나이다.’

 

감동한 듯한 이 장관은 1843213일 하원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20년 후인 1863416, 그는 예산안 제안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1842년부터 1852년까지 이 나라의 과세 대상 소득은 6% 증가했다. 1853년부터 1861년까지 8년간은 1853년 대비 20% 증가해 그 증가 폭은 놀라움을 넘어 거의 믿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 압도적인 부와 권력의 증대는 전적으로 재산 소유자 계급에 국한되지만, 일반 소비재 가격 하락으로부터 노동 인구에게 간접적 이익을 가져옴은 분명하다. 부유한 자는 더욱 부유해졌고, 가난한 자는 덜 가난해진 상태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빈곤이 실제로 감소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감히 단언하기 어렵다.’

 

이 결과는 용두사미격이다! 노동자 계급이 여전히 가난하며, 재산 소유자 계급을 위해 실신할 정도의 부와 권력의 증대를 생산해냈음에도, ‘덜 가난해진 데 불과하다면, 그들은 상대적으로 종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가난하다. 극단의 빈곤이 감소하지 않았다면, 극단의 부가 증대했으므로, 그것은 오히려 증대한 것이다.

 

(결국 이는 상대적 빈곤의 심화를 의미한다.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과 자본의 축적 증대가 노동자 계급의 실질적 해방이나 현저한 물질적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계급 간 부의 격차만을 더욱 벌려놓았다는 사실을 글래드스턴의 고백은 역설적으로 확증한다.)

 

생활 수단 가격 하락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공식 통계, 예를 들어, 런던 고아원의 자료를 보면, 1860-18623년간의 평균 가격은 1851-18533년간 대비 20% 등귀했다. 그 다음 3(1863-1865) 동안에도 육류, 버터, 우유, 설탕, 소금, 석탄, 기타 다수의 생활 필수품 가격은 점진적으로 상승했다. 그럼에도, 186447일 글래드스턴의 예산안 제안 연설은 잉여 가치 착취의 진전과 빈곤으로부터 경감된국민의 행복에 대한 핀다로스풍의 열렬한 찬가였다. 그는 구호 대상 극빈자로 될 지경에 있는대중과, ‘임금이 오르지 않은생산 부문들을 언급하면서도, 결국 노동자 계급의 행복을, ‘인생이란 십중팔구는 생존 투쟁에 불과하다.’는 말로 요약했다.

 

글래드스턴과 달리 공적 입장에서 자유로운 포세트 교수는 노골적으로 실상을 토로한다.

 

나는 물론 자본의 증대, (최근 10년간)에 따라 화폐 임금도 올랐음을 부인하지 않으나, 이 외견상의 이득은 대부분 상실되고 있다. 왜냐하면, 많은 생활 필수품의 값이 비싸지기 때문이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이는 귀금속의 가치 하락에 기인한다.) 부자들은 급속하게 더 부유해지는 반면, 근로 계급의 생활에는 눈에 띄는 개선이 조금도 없다.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소매상들의 노예에 가깝게 되고 있다.’

 

영국 노동자 계급이 재산 소유자 계급을 위해 실신할 정도의 부와 권력의 증대를 창출한 구체적인 조건은 이미 노동일기계장에서 다루었다. 그러나 그 논의는 주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노동자에 초점을 맞춘다. 자본주의적 축적 법칙을 완전히 규명하기 위해서는 작업장 밖의 노동자의 실태, 곧 이들의 식생활과 주거 조건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제한된 범위 내에서, 여기서는 노동자 계급의 대다수를 이루는 공업 프롤레타리아트와 최저 임금을 받는 농업 노동자에 한정하여 논의를 진행한다.

 

먼저, 공인된 극빈자, 곧 노동자 판매라는 생존 조건을 박탈당하고, 사회적 구호금에 의존하는 계급을 먼저 논의한다.

 

잉글랜드의 공인된 극빈자 수는 1855851,369, 1856877,767, 1865971,433명을 기록했다. 면화 기근의 여파로 이 수는 18631,079,382명과 18641,014,978명으로 증가했다. 특히, 런던에 가장 심각한 타격을 준 1866년 공황은 (스코틀랜드보다 주민이 많고, 세계 시장의 중심지인) 런던에서 극빈자 수를 1866년에 1865년 대비 19.5%, 1864년 대비 24.4% 증가시켰으며, 1867년 첫 몇 개월 동안 그 증가세는 더욱 가속화했다. 이러한 극빈자 통계 분석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핵심 사항이 부각된다.

 

, 한편으로, 극빈자 수의 증감은 산업 순환의 주기적 변동을 나타낸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 축적과 더불어 계급 투쟁 및 노동자 계급 의식이 발전하면서, 공식 통계는 극빈자의 실제 규모를 점차 왜곡한다. 가령, 최근 2년간 영국 신문들(더 타임즈,팔말 가제트)이 크게 떠들어댄 극빈자 처우의 야만성은 이미 오래된 현상이다. 엥겔스는 1844년에도 동일한 잔혹 행위와 선동적인 출판물의 일시적이며 위선적인 비난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럼에도, 최근 10년간 런던에서 굶어 죽은 사람 수가 소름 끼치게 증가한 일은 노동자들이 구빈원, 빈민 형무소의 노예 상태를 극도로 공포하여 수용되느니 차라리 굶어 죽는 일을 택하는 현실을 명백히 증명한다.

 

. 저임금 공업 노동자 실태

 

이제 공업 노동자 계급 중 최저 임금층으로 논의를 전환한다. 1862-1863년 면화 기근 당시, 추밀원은 E. 스미스에게 랭커셔와 체셔의 궁핍한 면공업 노동자들의 영양 상태 조사를 위임했다.

 

스미스는 다년간의 관찰로부터, ‘굶주림으로 인한 질병 예방을 위한 최소 영양 기준을 이미 설정했다. 이 기준은 여성 노동자의 1일 식사에 최소 3,900그레인(253g)의 탄소와 180그레인(12g)의 질소를 요구하며, 남성 노동장에게는 최소 4,300그레인(279g)의 탄소와 200그레인(13g)의 질소를 필요로 한다. 이는 여성에게 질 좋은 밀가루 빵 2파운드(907g)에 해당하는 영양분과 같고, 남성은 그보다 1/9이 더 요구됨을 의미한다. 성인 남녀의 주당 평균 최소 필요량은 28,600그레인(1,853g)의 탄소와 1,330그레인(86g)의 질소이다.

 

이 계산된 수치는 빈궁으로 인해 소비가 저하된 면공업 노동자들의 실제 식사량과 정확히 일치했다. 186212, 그들은 주당 29,211그레인(1,893g)의 탄소와 1,295그레인(84g)의 질소를 섭취하고 있었으며, 이는 그의 계산을 사실로 확증한다.

 

1863, 추밀원은 영국 노동 계급 중 영양 상태가 가장 취약한 층의 비참한 실태에 대한 조사를 명령했다. 추밀원 의무관 사이먼은 이 임무에, 앞서 언급된 E. 스미스를 선임했다. 스미스의 조사는, 한편으로는 농업 노동자를, 다른 한편으로는 견직공, 여성 재봉공, 가죽장갑공, 양말공, 장갑 편직공, 제화공을 포괄했다. 후자 집단은 양말공을 제외하면 전적으로 도시 거주자들이다. 이 조사의 기준으로 삼은 대상은 각 부류에서 가장 건강하고, 상대적으로 형편이 나은 가족들이었다. 이 조사의 전체적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조사된 도시 노동자 부류 중, 질소 섭취량이 굶주림으로 인한 질병 발생의 절대적 최저 한도를 다소 초과하는 집단은 단 한 부류에 불과했다. 또 다른 한 부류는 겨우 최저 한도에 도달했으며, 나머지 두 부류는 질소성 및 탄소성 식사 모두 부족했고, 그중 한 부류는 대단히 부족했다. 농업 인구의 경우, 1/5 이상이 필요량 이하의 탄소성 식사, 1/3 이상이 필요량 이하의 질소성 식사를 하고 있었다. 특히 버크셔, 옥스퍼드셔, 서머셋셔 세 개 주에서는 질소성 식사의 최저량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태가 일반적 현상이었다.’

 

농업 노동자 중 영국 내 가장 부유한 지역인 잉글랜드의 노동자 영양 상태가 가장 불량했다. 농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영양 부족은 주로 부인과 아이들에게 집중되었는데, 이는 성인 남자는 노동을 위해 반드시 섭취해야 했기때문이다. 조사 대상 도시 노동자 부류에서는 결핍의 정도가 더욱 심각했다.

 

그들의 영양은 대단히 불량하여 다수의 경우, 비참하고, 건강을 해치는 궁핍 상태에 놓여 있음이 분명하다.’ (이 모든 것은 자본가의 절욕’, 곧 노동자들이 겨우 연명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활 수단 지급마저 회피하는 데서 기인한다.)

 

상기 표는 순수 도시 노동자 부류(남녀 모두)의 영양 상태를, 스미스가 인정한 최저 한도 및 면공업 노동자들의 최빈곤기 영양 상태와 대비해 제시한다.

 

주당 평균 탄소 섭취량(단위: 그레인)

 

· 5부문의 도시 노동자: 28,876

· 랭커셔의 실업 노동자: 29,211

· 랭커셔 노동자의 최저 필요량: 28,600

 

주당 평균 질소 섭취량(단위: 그레인)

 

· 5부문의 도시 노동자: 1,192

· 랭커셔의 실업 노동자: 1,295

· 랭커셔 노동자의 최저 필요량: 1,330

 

조사된 공업 노동자 부류의 절반, 60/125이 맥주를 전혀 섭취하지 않으며, 28%는 우유를 전혀 마시지 않았다. 가족 단위 액체 영양물의 주당 평균 소비량은, 여성 재봉공의 7온스에서 양말공의 24.75온스에 이르기까지 편차를 보였다. 우유를 전혀 마시지 않는 다수는 런던의 여성 재봉공들이다. 매주 소비되는 빵의 양은 여성 재봉공의 7.75파운드부터 제화공의 11.25파운드까지 다양했으며, 성인의 총 평균 소비량은 주당 9.9파운드를 기록했다.

 

설탕(당밀 등) 소비량은 가죽 장갑공의 주당 4온스에서 양말공의 11온스까지 다양했으며, 모든 부류의 총 평균은 성인 1명당 매주 8온스를 기록했다. 버터류(지방 등)의 매주 총 평균량은 성인 1명당 5온스였다. 육류(베이컨 등)의 매주 평균량은 성인 1명당 견직공의 7.25온스부터 가죽 장갑공의 18.25온스까지 폭넓게 분포했으며, 각종 부류들의 총 평균량은 13.6온스였다.

 

성인 1명당 매주 평균 식사비용

 

· 견직공: 2실링 2.5펜스

· 여성 재봉공: 2실링 7펜스

· 가죽 장갑공: 2실링 9.5펜스

· 제화공: 2실링 7.75펜스

· 양말공: 2실링 6.25펜스

 

매클즈필드의 견직공의 평균 비용은 주당 불과 1실링 8.5펜스에 그쳤다.

 

영양이 가장 불량했던 부류는 여성 재봉공, 견직공, 가죽 장갑공이었다. 사이먼은 이러한 영향 사태에 대해 그의보건에 관한 종합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영양 부족이 질병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키는 경우가 매우 많다는 사실은 구빈법의 의료 사업이나 병원 환자의 사정(입원 환자든 외래 환자든)을 아는 이라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요소인 위생의 관점이 추가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음식물 궁핍은 의복, 연료 부족과 같은 온갖 다른 궁핍이 먼저 나타난 뒤에야 뒤따른다. 그러므로 음식물 결핍을 감수하는 일은 최후의 궁핍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영양 부족이 건강에 영향을 미치기 훨씬 전, 그리고 생리학자가 삶과 굶어 죽음의 경계선이 되는 질소와 탄소의 소비량을 계산해야겠다고 생각하기 훨씬 전에 이미 살림살이의 모든 물질적 위안은 소멸한다. 의복과 연료는 음식물보다 더 부족하여 혹한을 충분히 막아낼 수 없다. 거주 면적은 질병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킬 정도로 협소하며, 가구는 거의 남지 않고, 청소하는 일조차 사치이거나 어려운 일이 된다. 비록 자존심으로 깨끗함을 유지하려 해도, 그 모든 시도는 굶주림의 고통만 더욱 심하게 할 뿐이다. 주택은 가장 값싸게 얻을 수 있는 곳에 자리한다. 이 구역들은 위생 단속이 거의 무력하며, 하수도가 불량하고, 교통이 불편하며, 오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급수 상태가 아주 나쁘거나 거의 급수되지 않는 곳이다. 도시 주택이라면 햇빛과 공기가 극히 부족한 구역에 위치한다. 음식물이 부족할 정도의 빈궁은 필연적으로 이러한 위생상의 위험을 동반한다. 이러한 모든 요소가 생명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지만, 영양 부족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심각한 문제이다. 이런 빈궁이 게으름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은 가슴 아픈 현실이다. 모든 경우, 이는 노동 인구 전체의 빈궁이다. 사실, 도시 노동자들이 얼마 안 되는 음식물을 얻기 위해 하는 노동은 대체로 지나치게 장시간에 걸친다. 노동으로 자활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극히 제한된 의미에서만 성립한다. 대체로 이 명목상의 자활은 길든 짧든 구호 빈민 상태에 이르는 우회로일 따름이다.’

 

근면한 노동자층의 굶주림 고통과 자본주의적 축적에 토대를 둔 부자들의 조잡하거나 세련된 낭비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은 오직 경제 법칙으로부터만 해명된다. 빈민들의 주택 문제는 그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공정한 관찰자라면 누구나 인정하듯, 생산 수단의 집중이 심화될수록, 노동자들은 일정한 공간에 더욱 밀집되고, 자본주의적 축적 속도가 빠를수록, 노동자들의 주택 사정은 그만큼 더 비참해진다.

 

부의 증대에 수반되는 도시의 개량’, 곧 불량 주택 지역 철거, 궁전 같은 은행과 백화점 건설, 영업용 운송 수단 및 사치 마차·전차 도입을 위한 도로 확장은 빈민들을 더욱 불결하고 비좁은 빈민굴로 내쫓는다. 다른 한편으로, 주택 투기꾼들은 집세를 그 질에 반비례해 비싸게 책정하며, 빈곤이라는 광산을 포토시의 은 광산 채굴보다 더 많은 이윤과 적은 비용으로 채굴한다. 자본주의적 축적, 나아가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 일반의 적대적 성격은 이 문제에서 아주 명백하게 드러난다. 심지어 주택 사정에 관한 영국의 공식 보고서들조차 소유와 소유권에 대한 비판적 공격으로 가득 차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폐해는 공업 발전, 자본 축적, 도시의 발달 및 개량과 더불어 폭넓게 확산되었다. 그 결과, ‘상류 사회에까지 예외 없이 전파되는 전염병에 대한 단순한 공포심이 1847년에서 1864년 사이 10개 이상의 위생 법규를 의회에서 탄생시켰다.

 

리버풀, 글래스고 등 일부 도시의 공포에 질린 중간 계급은 시 당국에 강력한 조치를 촉구했다. 하지만 사이먼은 1865년 보고에서, ‘일반적으로 말해, 이 폐해는 영국에서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추밀원의 명령에 따라, 1864년에는 농촌 노동자, 1865년에는 도시 하층 빈민 계급의 주택 사정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공중 보건에 관한 제7(1865)와 제8차 보고(1866)에는 헌터의 탁월한 연구 성과가 담겨 있다. 농촌 노동자 문제는 후술하고, 도시의 주택 사정에 대해 필자는 사이먼의 다음 일반적 의견을 먼저 인용한다. 그의 발언은 이렇다.

 

본인의 공적 견해는 오로지 의사로서의 것이지만, 보통 사람으로서도 이 죄악의 다른 측면을 외면할 수 없다. 집이 사람으로 초만원이 되는 정도가 심화되면, 이는 거의 필연적으로 인간이라기보다는 짐승과 같은 상태를 초래한다. 예의범절은 무시되고, 육체와 육체적 기능은 불결하게 뒤섞이며, 발가벗겨져 치부(恥部)까지 드러난다. 이러한 영향 자체가 타락이며, 타락한 상태가 오래 지속될수록 그 정도도 더욱 심화된다. 이 저주스러운 상태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그 타락은 곧 그릇된 행위를 위한 세례와 다름없다. 또한 이러한 환경에 처한 인간이 육체적·도덕적 순결을 본질로 하는 문명의 분위기를 다른 측면에서 열망하기란 도저히 가망이 없는 일이다.’

 

인간이 살아가기에 절대적으로 부적합한 초만원 상태의 주거라는 점에서 런던이 단연 제1위를 차지한다. 헌터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명확히 밝힌다.

 

첫째, 런던에는 각각 약 10,000여 명의 주민을 수용하는 약 20개의 대규모 주거 지역이 존재하며, 그 참담한 상태는 잉글랜드 내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상태는 거의 전적으로 가옥 설비의 불량에서 기인한다. 둘째, 이 주거 지역들의 가옥이 초만원이 되고 낡아버린 상태는 20년 전보다도 훨씬 더 악화되었다. 런던과 뉴캐슬의 일부 지역 생활은 지옥과 같다고 단언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런던에서는 개량이 진행되고, 낡은 거리와 가옥들이 철거됨에 따라, 그리고 공장들이 신설되고, 인구 유입이 증가함에 따라, 끝으로, 도시 지대 상승으로 집세가 인상됨에 따라, 노동자 계급 중 비교적 처지가 나은 부분조차 소매상과 하층 중간 계급과 함께 이 불결한 주택 사정의 재앙 속으로 점차 편입되고 있다.

 

집세는 엄청나게 비싸서, 방 한 칸 이상을 빌릴 수 있는 노동자는 거의 없다.’

 

런던에 있는 주택 중 다수의 중개인들의 손을 거치지 않은 집은 거의 없다. 런던의 토지 가격은 언제나 그 연간 수입 대비 매우 높게 책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토지 구매자들은 구입한 토지를 감정 가격’(토지 수용 시 감정관이 매기는 가격)으로 되팔기 위한 투기를 하거나, 또는 인근에 대기업이 들어설 때 발생하는 토지 가격의 투기적 상승을 노리고 투기를 감행한다. 그 결과, 만기가 얼마 남지 않은 임대 계약을 사들이는 일이 정규적인 거래 형태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거래에 종사하는 이들(투기꾼)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현재 하고 있는 방식을 앞으로도 지속하리라는 것이다. , 집을 소유하는 동안, 세든 사람들에게서 최대한 많이 짜내고, 다음 세입자들을 위해서는 (가구 등을) 최대한 적게 남겨두는 형태가 반복된다.’

 

집세는 매주 지불되므로, 이들 신사들에게는 전혀 위험 부담이 없다. 런던의 시티(금융 중심지)에 철도가 부설한 결과, (다음과 같은 비참한 실상이 목격되었다.)

 

최근 어느 토요일 저녁, 런던의 동부에서 여러 가족들이 자기들의 보잘것없는 세간살이들을 등에 짊어진 채, 구빈원 이외에는 아무데도 갈 곳이 없어 방황하고 있는 일을 볼 수 있었다.’

 

구빈원들은 이미 만원 상태였으며, 의회가 승인한 개량작업은 겨우 착수 단계에 불과했다. 노동자들은 거주하던 옛집이 철거되어 쫓겨나더라도 자신들의 교구를 포기하지 않거나, 멀리 이사하더라도, 그 가장 가까운 교구로 이동한다.

 

이들은 당연히 최대한 일터와 가까운 곳으로 거처를 옮기려 노력한다. 그들은 두 칸짜리 셋방을 포기하고, 한 칸짜리 셋방에 들면서, 더욱 비좁게 살지라도, 같은 교구나 이웃 교구를 벗어나지 않는다. 더 많은 집세를 지불해도, 그전의 초라한 셋방만큼의 공간조차 얻을 수 없는 실정이다. 스트랜드에 거주하는 노동자들의 50%는 이제 작업장까지 2마일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외국인들에게 런던 부의 강렬한 인상을 주는 주요 거리인 스트랜드는 런던의 인구 밀집 현상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 공중 위생 관리의 계산에 따르면, 스트랜드의 한 교구 인구는 템즈 강폭의 절반이 교구에 포함됨에도, 에이커당 581명이었다. 지금까지 런던에서 채택된 공중 위생 개선 조치들은 살기에 부적당한 집들을 철거하면서, 노동자들을 한 구역에서 쫓아내고, 그 결과, 다른 구역을 그만큼 더 조밀하게 했을 뿐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헌터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이 모든 조치는 불합리한 것이므로, 반드시 중지되어야 한다. 또는 이제 과장 없이 국민적 의무라고 부를 수 있는 의무, 곧 자금 부족으로 자기 힘으로 집을 살 수는 없으나 정기적으로 집세는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집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에 대해 사회적 동정심(!)이 반드시 환기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경탄할 만한 자본주의적 정의이다! 토지 소유자, 집 주인, 사업가는 철도 부설, 도로 신설 등 개량으로 인해 수용될 때, 충분한 보상을 받을 뿐 아니라, 그들의 의무적인 절욕에 대해 신과 인간의 법으로부터 엄청난 이윤으로 위안받아야만 한다. 반면, 노동자들은 처자와 소지품과 함께 거리로 내쫓기며, 그들이 (지방 자치 당국이 예의를 강조하는) 특정 지역으로 큰 무리를 지어 몰려 들어가면, 공중 위생의 이름 아래 기소당한다!

 

19세기 초, 잉글랜드에서 주민 100,000명 이상 도시는 런던 한 곳뿐이었고, 50,000명 이상 도시는 다섯에 불과했으나, 현재는 그 수가 28개에 달한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 도시 인구는 급증했을 뿐 아니라, 이전의 조밀했던 소도시들 역시 사방에 건물이 가득 들어차 신선한 공기가 통할 수 없는 중심지로 변모했다. 이 도시들은 이제 부유층에게 쾌적한 생활 환경을 제공하지 못하며, 그들은 이곳을 버리고 더욱 상쾌한 교외로 이주한다. 부유층이 떠난 자리는 빈곤층이 차지하며, 그들은 크기는 하지만 자신들에게 적합하지 않은 집에서 한 가족이 한 방씩 사용하고, 흔히 가족 외에 두세 명의 하숙인을 더 들인다. 그들을 위해 건축되지도, 적합하지도 않은 주택으로 사람들이 밀려들면서, 그 환경은 성인에게는 타락으로, 아동에게는 파멸로 인도한다.’

 

어떤 공업 도시나 상업 도시에서 자본이 급속히 축적될수록, 착취할 인간 재료는 그만큼 더 빠르게 밀려들어오며, 갑자기 세워진 노동자들의 주택은 그만큼 더 비참해진다. 생산이 점진적으로 증대하는 석탄·제철 지방의 중심지인 뉴캐슬--타인은 주택 지옥이라는 점에서 런던 다음으로 제2위를 차지한다. 그곳에서는 단칸방 살림을 하는 사람이 34,000명 이상이다.

 

최근 뉴캐슬과 게이츠헤드에서는 공공의 안녕과 질서에 절대적으로 위험하다는 이유로, 많은 가옥이 당국으로부터 철거되었다. 가옥의 신축은 매우 완만하게 진행되지만, 공업은 매우 빠르게 발전한다. 그 때문에, 이 도시는 1865년에 종전 어느 때보다 인구가 조밀해졌고, 방 한 칸조차 빌릴 수 없었다. 뉴캐슬 열병 병원의 의사인 엠블턴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티푸스가 지속적으로 만연하는 주된 원인은 사람들의 밀집과 주택의 불결함에 있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노동자들이 일반적으로 거주하는 가옥은 비좁고 불결한 뒷골목이나 울타리 안에 있으며, 햇빛, 공기, 청결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불충분하고 비위생적인 것의 표본이며, 문명 사회의 치욕이다. 거기에서는 밤에 남녀와 아동 모두가 뒤섞여 잠을 잔다. 남자들의 경우, 주간 교대 근무자와 야간 교대 근무자가 끊임없이 서로 교대하기 때문에 침대가 식을 사이가 없다. 그 가옥은 급수가 잘 안 되며, 변소는 더욱 불결하고, 환기가 되지 않아 전염병이 발생하기 쉬운 상태이다.’

 

이처럼 열악한 주택의 집세는 주 8펜스에서 3실링에 달한다. 헌터는 이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뉴캐슬 언 타인은 우리 동포 중 가장 우량한 종족의 하나가 주택이나 거리와 같은 외부적 사정으로 인해 거의 야만 상태에까지 타락하고 있는 하나의 실례를 보여준다.’

 

자본이 급속히 축적되는 공업·상업 도시에서는 착취할 인간 재료가 그만큼 빠르게 유입되며, 급조된 노동자 주택은 그만크 비참해진다. 자본과 노동의 유출입으로 인해 공업 도시의 주택 환경은, 오늘은 견딜 만해도 내일은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시 당국이 최악의 폐해를 제거하려 노력할지라도, 곧 누더기를 걸친 아일랜드인이나 몰락한 잉글랜드 농업 노동자들이 메뚜기 떼처럼 몰려든다. 이들은 지하실이나 다락으로 들어가거나, 기존 노동자 가옥을 여인숙으로 변질시키는데, 거주자 교체 속도는 30년 전쟁 당시 민간 막사의 병사 교대만큼이나 급속하다.

 

요크셔 브래드퍼드가 한 예이다. 시 당국의 속물들이 도시 개량에 몰두했음에도, 1861년에는 아직 1,751채의 빈집이 존재했다. 그러나 온건파 자유당원이자 흑인 노예의 벗인 포스터가 감격해 마지않던 호경기가 도래하자, 끊임없이 유입되는 예비군상대적 과잉 인구물결로 홍수를 맞았다. 헌터가 보험 회사 대리인으로부터 입수한 표에 등록된 소름 끼치는 지하실과 방들은 대개 고임금 노동자들이 차지했다. 이들은 더 나은 집이 있다면 기꺼이 빌리겠다고 했으나, 그 와중에 이 노동자들은 예외 없이 타락하고 병들어갔다. 다른 한편에서는, 국회 의원인 온건파 자유당원 포스터가 자유 무역의 축복과 브래드퍼드 명사들이 양모업에서 얻는 이윤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186595일자 보고서에서 브래드퍼드의 구빈 의사인 벨은 담당 구역의 열병 환자 무서운 사망률이 주택 사정에 기인한다고 지적한다.

 

‘1,500입방피트의 좁은 지하실에서 10명이 거주한다. 빈센트 스트리트, 그린 에어 프레이스, 리즈에는 1,450명의 주민이 435개의 침대와 36개의 변소를 가진 223채의 집에 밀집되어 있다. 침대 하나(더러운 누더기나 대패 밥 포함)에 평균 3.3, 때로는 5-6명이 잠을 자며, 심지어 침대가 없는 이들도 있다. 젊은 남녀들이 기혼이든 미혼이든 상관없이 옷을 입은 채 방바닥에 한데 겹쳐 잠자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 주택들이 대개 컴컴하고, 습기 차고, 더럽고, 냄새나는, 사람 살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누추한 구멍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필요가 있겠는가. 병과 죽음은 바로 이 집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훨씬 나은 환경의 부유층에게까지 전파되는데, 이는 부유층이 이런 폐해가 우리 도시 한가운데서 곪아 터지도록 방치했기 때문이다.’

 

주택 사정이 비참하다는 면에서, 런던 다음으로 제3위를 차지하는 곳은 브리스틀이다.

 

유럽의 가장 부유한 도시인 브리스틀에 극심한 빈곤과 비참한 주택 사정이 너무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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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상대적 과잉 인구 또는 산업 예비군의 누진적 증대

 

자본 축적은 최초 양적 확대로 나타나지만, 이는 자본 구성의 누진적 질적 변화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이는 가변 자본을 희생하며, 불변 자본을 끊임없이 증대시키는 경향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발전, 그에 조응하는 노동 생산성의 향상, 그리고 이로 인한 자본의 유기적 구성 변동은 단순한 사회적 부의 증대와 보조를 맞추지 않고, 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이는 단순 축적(사회적 총자본의 절대적 증가)이 총자본의 개별 요소들의 집중을 수반하고, 나아가, 추가 자본의 기술적 구성 변혁이 최초 자본의 기술적 구성 변혁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축적의 진전과 함께 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의 비율은 지속적으로 변동한다.

 

자본 구성 비율은 초기 1:1에서 2:1, 3:1, 4:1, 5:1, 7:1 등으로 지속적으로 변동한다. 이에 따라 총자본 가치에서 노동력으로 전환되는 몫은 1/3, 1/4, 1/5, 1/6, 1/8 등으로 감소하고, 생산 수단으로 전환되는 몫은 2/3, 3/4, 4/5, 5/6, 7/8 등으로 증가한다. 노동에 대한 수요는 총자본량 자체가 아닌 총자본의 가변적 구성 부분으로부터 결정된다. 따라서 그 수요는 총자본 증가에 비례하여 증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진적으로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수요는 총자본 규모 대비 상대적으로 감소하며, 총자본 증가와 더불어 그 상대적 감소는 더욱 가속화한다. 총자본이 증가할 때, 가변적 구성 부분(총자본에 결합되는 노동력) 또한 절대적으로는 증가하지만, 그 구성비는 끊임없이 하락한다. 축적이 일정한 기술적 토대 위에서 단순 생산 확대로 작용하는 중간 기간은 단축된다.

 

가속적인 총자본 축적은 추가 노동자 흡수나 기존 노동자의 고용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증가하는 축적과 집중은 역설적으로 자본 구성의 새로운 변동의 원천이 된다. 이는 불변 자본 대비 가변 자본의 가속적인 감소를 의미한다. 가변 자본의 상대적 감소는 총자본의 증가에 따라 촉진되고, 그 증가 속도보다 더 빠르다. 이는 외견상 노동 인구의 절대적 증가라는 역전된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 노동 인구의 증가는 가변 자본 또는 고용 수단의 증가보다 언제나 급속하게 증가한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적 축적 자체가 자신의 자기 증식 욕구에 필요한 노동 인구를 초과하는 노동 인구(상대적 과잉 인구)를 자신의 정력과 규모에 비례하여 끊임없이 생산해낸다.

 

사회적 총자본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축적 운동은 주기적으로 상이한 국면들을 통과하거나, 때로는 그 국면들을 각 생산 부문에 동시에 분배하는 양상을 보인다. 일부 부문에서는 자본의 절대적 증가 없이 단순한 집중의 결과로, 자본 구성의 변동이 일어난다. 다른 부문에서는 자본의 절대적 증가가 가변적 구성 부분(흡수하는 노동력)의 절대적 감소와 결부된다. 또 다른 부문에서는 자본이 일정한 기술적 토대 위에서 계속 증가하며 그에 비례해 추가 노동력을 흡수하다가도, 다른 시기에는 유기적 변동을 겪어 가변적 구성 부분이 수축된다. 모든 부문에서 가변 자본 부분의 증가, 나아가, 그것이 고용하는 노동자 수의 증가는 언제나 격심한 동요와 일시적인 과잉 인구의 생산을 수반한다.

 

이 과잉 인구 생산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이미 취업 중인 노동자들을 축출하는 더욱 가시적인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추가 노동 인구를 통상적인 경로로 흡수하는 것이 곤란해지는(덜 가시적이나 효과는 못지않은) 형태이다. 기능하는 사회적 자본의 규모와 증가율, 생산 규모와 노동자 수의 확장, 노동 생산성의 발전, 그리고 부의 모든 원천의 확대 및 증가에 비례하여, 자본이 노동자를 흡수하거나 축출하는 규모는 증대한다. 또한 자본의 유기적 및 기술적 구성 변동 속도가 빨라지고, 이러한 변동을 겪는 생산 부문들의 수 역시 증가한다. 이 변동은 때로는 동시적으로, 때로는 교대적으로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노동 인구는 자신들이 생산하는 자본 축적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상대적으로 불필요하게 만드는(상대적 과잉 인구로 만드는) 수단을 점점 더 큰 규모로 생산한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특유한 인구 법칙이다. 사실 모든 특수한 역사적 생산 양식은 그 자신만의 특수한 인구 법칙(자신의 한계 내에서만 역사적으로 타당한)을 가진다. 추상적 인구 법칙은 인간의 간섭이 없는 한에서, 식물과 동물에 대해서만 존재한다.

 

과잉 노동 인구는 축적의 필연적 산물이자 자본주의적 토대 위에서 부의 발전이 낳은 결과이다. 동시에 이 과잉 인구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지렛대이며, 나아가, 이 생산 양식의 생존 조건이 된다. 이 과잉 노동 인구는 자본이 자신의 비용으로 육성하고 절대적으로 처분할 수 있는 산업 예비군을 형성한다. 이 산업 예비군은 현실적 인구 증가의 한계와 무관하게, 자본의 변동하는 가치 증식 욕구를 위해 언제나 착취할 수 있게 준비된 인간 재료를 이룬다.

 

축적과 그에 따른 노동 생산성의 발전에 따라 자본의 급작스러운 확장력 또한 증대한다. 이는 기능하는 자본의 신축성이 증가하고, 사회의 절대적 부가 증대하기 때문이다. 특히 신용 제도가 자극받을 때마다, 이 부의 상당 부분이 추가 자본 형태로 생산에 즉시 투입될 수 있다. 또한 생산 과정의 기술적 조건(기계, 운송 수단 등)으로부터의 잉여 생산물이 추가적 생산 수단으로 매우 급속히 전환될 수 있다. 사회적 부(축적의 진전에 따라 팽창되어 추가 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는)는 시장이 갑자기 확대되는 종래의 생산 부문으로 밀려들거나, 종래 부문의 발전에 따라 이제 필요해진 새로 형성된 부문(: 철도)으로 맹렬하게 유입된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다른 부문의 생산 규모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결정적인 부문에 많은 노동력을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어야 함을 요구하며, 과잉 인구가 이 인력을 제공한다.

 

근대 산업의 특징적 진행 과정, 곧 호황, 활황, 공황, 침체로 이루어지는 10년 주기 순환은 (더 작은 규모의 변동으로 중단되기도 하지만) 산업 예비군(과잉 인구)의 끊임없는 형성, 흡수, 재형성에 의존한다. 반대로, 이러한 산업 순환의 국면 교체는 과잉 인구를 보충하고, 그 재생산을 위한 가장 강력한 요인들 중 하나가 된다. 인류 역사의 이전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근대 산업의 이 독특한 순환 과정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유년기에도 없었다. 당시에는, 자본의 구성이 매우 천천히 변동했을 뿐이다. 따라서 자본의 축적에 따라 노동에 대한 수요 또한 대체로 그에 상응하여 뒤따랐다. 자본 축적의 진전이 지금보다 완만했음에도, 착취하는 노동 인구의 자연적 한계에 부딪혔고, 이 한계는 폭력적 수단으로만 제거될 수 있었다.

 

생산 규모의 돌발적 · 비약적 확대는 돌발적 축소의 전제 조건이다. 이 축소는 다시 확대를 야기하지만,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인간 재료(인구의 절대적 증가에 의존하지 않는 노동자 수의 증대) 없이는, 확대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러한 노동자 수의 증대는 노동자 일부를 끊임없이 풀려나게 하는단순 과정, 곧 생산 증가 대비 취업 노동자의 수를 감소시키는 방법으로부터 달성된다. 따라서 근대 산업의 모든 운동 형태는 노동 인구의 일부를 끊임없이 실업자 또는 반()취업자로 전환시키는 것에 의존한다.

 

정치경제학의 천박성은 신용의 확대와 축소(산업 순환에서 주기적 변동의 징조에 불과한 것)를 그 순환 자체의 원인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천체가 특정한 운동에 들어가면 끊임없이 그것을 반복하듯, 사회적 생산 역시 일단 확대와 축소가 교체되는 이 운동에 진입하면 끊임없이 이를 되풀이한다. 결과가 이번에는 원인으로 작용하며, 이로부터 전체 과정의 교체되는 국면들이 주기성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 주기성이 일단 확고해지면, 정치경제학조차도 상대적 과잉 인구(자본의 평균적 증식 욕구 대비 과잉인 인구)의 생산을 근대 산업의 필요 조건으로 이해한다.

 

옥스퍼드 대학의 정치경제학 교수였고, 영국 식민성의 관리였던 메리베일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공황기에 국민이 궐기하여 수십만 명의 과잉 노동자를 국외로 이민시키려 한다고 가정하자. 그 결과는 노동 수요가 회복되자마자 노동 부족을 초래할 것이다. 인간의 재생산이 아무리 빨라도 성인 노동자를 보충하는 데는 한 세대의 기간이 필요하다. 공장주들의 이윤은 수요가 왕성한 호경기를 이용하여 불황기의 손실을 보상하는 능력에 주로 달려 있다. 이 능력은 기계와 육체 노동에 대한 지배력으로부터 보장된다. 그들은 시장 상황에 따라 노동자들의 작업 활동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킬 수 있도록,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노동자들을 항상 구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장주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이 나라의 부가 달려 있는) 우위를 결코 유지할 수 없다.’

 

맬더스조차 과잉 인구를 근대 산업의 필요 조건으로 인정한다. 다만, 그는 과잉 인구를 노동 인구 일부의 상대적 과잉으로 보지 않고, 노동 인구의 절대적 번식 과잉이라는 편협한 시각으로 설명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업과 상업에 주로 의존하는 나라에서 노동자 계급 사이의 결혼 억제가 상당한 정도로 실시된다면, 이는 그 나라에 해로울 수 있다. 특수한 수요 증대에 대응해 노동자를 시장에 제공할 수 있도록 인구의 성질이 갖춰지려면 16-18년이 지나야 한다. 그러나 수입이 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은 저축으로부터 그보다 훨씬 빠르게 행해질 수 있다. 한 나라는 언제나 노동 기금이 인구보다 급속히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정치경제학은 이처럼 상대적으로 과잉인 노동 인구의 끊임없는 생산을 자본주의적 축적의 필요 조건이라 선언한다. 이어서, 정치경제학은 곧바로 자본가의 시녀가 되어, 자본가로 하여금 (노동자들 자신의 생산물인 추가 자본으로부터 길거리로 내던져진) ‘과잉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하도록 한다.

 

우리 공장주들은 그대들의 생존에 필요한 자본을 증가시키면서 그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다. 그러니 그대들은 그대들의 수를 생존 수단에 맞추면서 나머지 일을 해야만 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연적 인구 증가가 제공하는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는 노동력의 양에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기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이 자연적 제한에서

해방된 산업 예비군을 요구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가변 자본의 증감이 취업 노동자 수의 증감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가정했다. 가변 자본이 증가하더라도, 자본의 지배 아래 있는 노동자 수는 불변이거나 심지어 감소할 수 있다. 이는 개별 노동자가 더 많은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이 증가할 때 발생한다. 노동 가격(시간당 보수)이 불변이거나 허락하더라도, 그 인하 속도가 노동량 증대 속도보다 느리기만 하면 임금은 상승한다. 따라서 이 경우, 가변 자본의 증대는 더 많은 노동량의 지표일 뿐, 더 많은 취업 노동자 수의 지표가 아니다.

 

일정한 노동량을 더 많은 노동자가 아닌 더 적은 노동자에게서 짜내는 것이, 비용이 대략 같다면 모든 자본가에게 절대적 우위를 제공한다. 이는 전자의 경우, 불변 자본(공장 건물, 기계 등) 지출이 노동자 수에 비례하여 증가하나, 후자의 경우, 그 증가 폭이 훨씬 작기 때문이다. 생산 규모가 커질수록 이 동기(불변 자본 절약)는 더욱 결정적인 의의를 갖게 되며, 자본 축적과 함께 증가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발전과 노동 생산성의 발전(이는 축적의 원인인 동시에 결과)에 따라, 자본가는 개별 노동력의 착취(외연적 또는 내포적)를 증대시킨다. 이로부터 종전과 동일한 양의 가변 자본 지출로 더 많은 노동량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또한, 앞에서 확인했듯이, 자본가는 숙련 노동자를 미숙련 노동자로, 성숙 노동자를 미성숙 노동자로, 남성 노동자를 여성 노동자로, 성인 노동자를 미성년자나 아동으로 교체한다. 이로부터 동일한 자본 가치로 더 많은 양의 노동력을 구매한다.

 

축적이 진행됨에 따라, 다음 세 가지 현상이 드러난다.

 

1. 더 큰 가변 자본이 노동자 수 증가 없이 더 많은 노동량을 동원한다.

 

2. 동일한 크기의 가변 자본이 같은 양의 노동력으로 더 많은 노동량을 가동시킨다.

 

3. 더 숙련된 노동력 대신 질이 낮은 다수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귀결된다.

 

상대적 과잉 인구의 생산(또는 노동자들의 풀려남)은 생산 과정의 기술적 변혁보다 더욱 급속히 진행된다. 이는 불변 자본 부분 대비 가변 자본 부분의 상대적 감소보다도 더욱 급속히 진행되는 현상이다. 생산 수단은 규모와 작용력이 증대함에 따라, 노동자들의 취업 수단이 되는 정도가 현저히 감소한다. 이러한 관계는 노동 생산성 증대에 따라, 자본이 노동자에 대한 수요보다 노동의 공급(노동자의 더 많은 노동)을 더 빠르게 증가시킨다는 사실로 인해 다시 수정된다. 따라서 취업 노동자들의 과도 노동은 예비군을 증가시킨다. 반대로, 예비군이 경쟁으로부터 취업자들에게 가하는 압박이 강화되면서, 취업자는 과도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자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 계급의 일부에게 과도 노동을 시키고, 나머지 부분을 강요된 나태에 빠지게 하는 것, 그리고 산업 예비군 때문에 취업자가 과도 노동을 피할 수 없는 것은, 개별 자본가들의 치부 수단이 된다. 동시에 이는 사회적 축적의 진전에 상응하는 규모로 산업 예비군의 생산을 촉진한다. 이러한 상대적 과잉 인구 형성의 중요성은 영국의 사례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영국에는 노동 절약을 위한 기술적 수단이 매우 많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노동을 전반적으로 합리적인 양으로 제한하고, 이를 노동자 계급 각층에게 나이와 성별에 알맞게 배정한다면, 현재의 국민적 생산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현재의 노동 인구는 절대로 부족하다. 현재의 비생산적노동자 대다수가 생산적노동자로 전환되어야만 한다.

 

임금의 일반적 변동은, 전체적으로 산업 순환의 국면 교체에 조응하는 산업 예비군의 팽창과 수축으로부터 전적으로 규제된다. 따라서 임금 변동은 노동 인구의 절대 수 변동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이 현역군과 예비군으로 분할되는 비율의 변동, 과잉 인구의 상대적 규모 증감, 그리고 과잉 인구가 흡수되거나 축출되는 정도로부터 결정된다. 10년 주기의 순환과 그 상이한 국면들을 통과하는 근대 산업(축적의 진행에 따라 국면들이 더욱 빠르게 서로를 뒤따르는 불규칙적 진동으로 복잡해지는)에 대해서, 다음 법칙이 적용된다. 자본 확장과 수축 교체(자본의 증식 욕구 크기)가 노동의 수요와 공급을 규제한다. , 자본이 팽창하여 노동 시장이 일시적으로 상대적 공급 부족이 되고, 자본이 수축하여 노동 시장이 일시적으로 상대적 공급 과잉이 된다. 이러한 자본의 운동이 단순히 인구의 운동에 종속하고 있는 것처럼 꾸미는 법칙은 명백히 엉터리 법칙이다.

 

이것이 바로 경제학자들의 교리이다. 이 교리에 따르면, 자본 축적의 결과로, 임금은 인상되고, 이 임금 인상은 노동 인구로 하여금 더 급속하게 번식하도록 자극한다. 이 상황은 노동 시장이 공급 과잉으로 될 때까지(자본이 노동자 공급에 비해 불충분해질 때까지) 계속된다. 이제 임금이 인하되고 상황은 역전된다. 임금 인하의 결과로, 노동 인구는 점차 감소하며, 이로부터 노동 인구 대비 자본이 다시 과잉으로 된다. 또는 다른 설명에 따르면, 임금 인하와 착취 강화는 다시 축적을 촉진하고, 동시에 임금의 낮은 수준이 노동자 계급의 증식을 억제한다. 결국 노동자의 공급이 수요보다 적어지고 임금이 인상되는 시기가 다시 찾아온다.

 

참으로 이것은 발전된 자본주의적 생산의 아주 훌륭한 운동 방식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임금 상승이 (실제로 노동할 수 있는) 인구의 적극적인 증가를 낳기 이전에 (새로 태어난 아이가 성년이 되기 전에), 산업 전쟁(노동자 부족을 해결하려는 고용주들의 조직적 활동)이 진행되고, 전투가 벌어지고 승패가 결정되어야 할 여러 기간이 이미 경과했다. 1849년에서 1859년 사이 영국의 농업 지방에서는 미미한 임금 인상이 있었다(동반된 곡물 가격 하락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윌트셔에서는 주급이 7실링에서 8실링으로, 도싯셔에서는 7-8실링에서 9실링으로 인상되었다. 이는 전쟁을 위한 노동 수요, 철도 부설, 공장 및 광산의 대확장으로 인해 과잉 농업 인구가 예외적으로 대규모로 빠져나간 결과이다.

 

임금이 낮을수록, 미미한 인상액도 높은 인상률을 표현한다. 주급이 20실링에서 22실링으로 오르면 10% 인상이지만, 7실링에서 9실링으로 오르면, 0.285714 인상되어 매우 큰 폭의 인상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차지 농업가들은 아우성쳤고, 런던이코노미스트지조차 이 기아 수준의 임금에 대해 전반적이며 대단한 임금 인상이라고 진지하게 호도했다. 그러자 차지 농업가들은 교조적인 경제학자들의 생각대로, 임금 인상의 결과로 농업 노동자들이 증식하여 임금이 하락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은 더 많은 기계를 도입했고,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순식간에 차지 농업가들도 만족할 정도로 다시 과잉 상태가 되었다. 이제 농업에는 종전보다 더 많은 자본, 그것도 더욱 생산적인 형태로 투하되었다. 이 결과, 노동에 대한 수요는 상대적으로뿐 아니라 절대적으로도 감소했다.

 

이처럼 경제학적 허구(임금 상승 인구 증가 임금 하락)는 임금의 일반적 운동을 규제하는 법칙, 곧 노동자 계급(총 노동력)과 사회적 총자본 사이의 비율 관계를 규제하는 법칙과 노동 인구를 상이한 생산 부문들에 배분하는 법칙을 혼동한다. 예를 들어, 호경기의 결과 특정 생산 부문에서 축적이 특히 활발하고, 이윤이 평균보다 높아 추가 자본이 이 부문으로 밀려들면, 노동에 대한 수요는 증가하고, 임금은 인상된다. 더 높은 임금은 노동 인구의 더 많은 부분을 경기가 좋은 이 부문으로 끌어들이고, 마침내 이 부문은 노동력으로 포화 상태가 된다. 결국 임금은 다시 종전의 평균 수준으로 떨어지거나, 노동력이 과도하게 유입된 경우에는 그 이하로 하락한다. 이 시점에서는, 이 산업 부문으로의 노동자 유입이 정지될 뿐 아니라 유출까지 발생한다. 이 경우, 정치경제학자는 임금 상승에 따라 노동자 수의 절대적 증가가 일어나고, 그 증가에 따라 임금 인하가 일어난다고 오해한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목격하는 것은 특수한 생산 부문에서 노동 시장의 부분적 움직임이며, 이는 자본의 필요 변화에 따라 상이한 자본 투하 부문으로 노동 인구가 분배되는 현상에 불과하다.

 

산업 예비군(상대적 과잉 인구)은 침체기와 평균 정도의 호황기에는 현역 노동자 군대에 압력을 가한다. 또한 과잉 생산과 열광적인 확장기에는 현역군의 요구(임금 인상)를 억제한다. 따라서 상대적 과잉 인구는 노동의 수요와 공급 법칙이 작용하는 배경이 되며, 이 법칙의 작용 범위를 자본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욕과 지배욕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한계 안에 국한시킨다.

 

경제학적 변호론의 탁월한 업적 중 하나를 다시 논하자. 그들은 새로운 기계 도입이나 낡은 기계 확장으로 가변 자본 일부가 불변 자본으로 전환될 때, 이 행위(자본을 기계에 묶어 놓고노동자들을 풀려나게하는)를 정반대로 노동자들을 위해 자본을 풀려나게 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제야 우리는 변호론자들이 얼마나 파렴치한가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 풀려나는 것은 기계로부터 직접 쫓겨나는 노동자들만이 아니다. 장래에 그들을 대체할 자라나는 세대의 보충 인원도, 그리고 사업이 종전 토대 위에서 일반적으로 확장될 때, 규칙적으로 흡수되었을 추가 인원도 풀려난다. 이제 그들은 모두가 풀려났으며’, 따라서 투자할 곳을 찾는 새로운 자본은 그들을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다.

 

 

이처럼 자본이 흡수하는 것이 그들이든 다른 사람이든, 이 자본이 (기계가 시장에 내던진 노동자들과) 동일한 수의 노동자를 노동 시장에서 끌어낸다면(취업시킨다면), 전반적인 노동 수요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 자본이 더 적은 노동자를 취업시킨다면 과잉 노동자의 수는 증가한다. 더 많은 노동자를 취업시킨다면, 전반적인 노동 수요는 (취업자의 수가 풀려난수를 초과하는 만큼) 증가한다. 따라서 투자할 곳을 찾는 추가 자본이 전반적인 노동 수요를 촉진하는 성과는, 기계로부터 길에 내던져진 노동자들이 모두 흡수될 때까지는 아무 것도 없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 기구(메커니즘)는 자본의 절대적 증가가 전반적인 노동 수요의 상응하는 증대를 수반하지 않도록 조치한다. 그런데 변호론자는 바로 이것(추가 자본이 실직자를 다시 고용하는 것)을 노동자들이 쫓겨나서 산업 예비군으로 있는 과도기에 겪는 빈궁, 고난, (있을 수 있는) 사망에 대한 보상이라고 부른다!

 

노동에 대한 수요는 자본의 증가와 동일하지 않으며, 노동의 공급은 노동자 계급의 증가와 동일하지 않다. 여기서는 서로 독립된 두 개의 힘(자본과 노동)이 상호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은 한쪽이 무겁게 된 주사위처럼, 두 측면 모두에서 동시에 작용한다. 자본의 축적이 한편으로 노동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를 풀려나게하여 노동자의 공급을 증대시킨다. 동시에 실업자들의 압력은 취업자들로 하여금 더 많은 노동을 수행하도록 강제하며, 이로부터 노동의 공급을 일정한 정도까지 노동자의 공급과 무관한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행해지는 노동의 수요·공급 법칙의 작용은 자본의 독재를 완성한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많이 일할수록, 타인의 부가 그만큼 더 많아지며, 그들의 노동 생산성이 증가할수록, 자본의 가치 증식 수단으로 자기 기능조차 그만큼 더 위태롭게 된다는 비밀을 알게 되자마자, 또한 그들이 자기들 사이의 경쟁 강도가 전적으로 상대적 과잉 인구의 압력에 달려 있음을 알게 되자마자, 그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이 자연 법칙이 자기들 계급에 미치는 파멸적 영향을 제거하거나 약화시키기 위해 노동 조합의 설립 등으로부터 취업자와 실업자 사이의 계획된 협력을 조직하려고 노력하자마자, 자본과 그의 아첨꾼인 정치경제학은 이를 영원한그리고 이른바 신성한수요·공급 법칙에 대한 침해라고 소리친다. 취업자와 실업자 사이의 단결이 이 법칙의 조화로운작용을 교란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식민지 등에서) 불리한 사정들이 산업 예비군의 형성과 이에 따른 자본가 계급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절대적 종속을 방해하자마자, 자본은 그의 세속적인 산초 판사(아첨하는 경제학자)와 함께 수요·공급의 신성한법칙에 반기를 들고 강제 수단과 국가 개입으로부터 그 법칙의 작용을 저지하려고 한다.

 

25-4. 상대적 과잉 인구의 상이한 형태

 

상대적 과잉 인구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각 노동자는 부분적으로 취업하거나 완전히 실업 상태인 기간에는 상대적 과잉 인구에 포함된다. 산업 순환의 국면 교체로부터 주기적으로 대규모로 나타나는 형태들(공황기의 급성적 형태, 불황기의 만성의 형태)를 제외하면, 과잉 인구는 언제나 세 가지 형태, 곧 유동적, 잠재적, 정체적 형태를 띠고 있다.

 

근대 산업의 중심지인 공장, 공장제 수공업, 제철소, 광산 등에서는 노동자들이 때로는 대규모로 축출되고, 때로는 대규모로 재흡수되어, 취업자의 수는 비록 생산 규모 대비 끊임없이 감소하는 비율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증대한다. 이 경우, 과잉 인구는 유동적 형태로 존재한다. (기계가 하나의 요소로 사용되거나 근대적 분업만이 실시되는) 대작업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자동화된 공장에서는 수많은 소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고용되고 있다.

 

일단 성인이 되면 동일 사업 부문에 계속 남아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대다수는 으레 해고된다. 이들은 유동적 과잉 인구의 한 요소를 이루며, 해당 사업 부문의 확대에 따라 증가한다. 그들 중 일부는 국외로 이주하는데, 이는 실질적으로 국외로 나간 자본을 뒤따라가는 것에 불과하다. 다른 결과로는, 여성 노동 인구가 남성에 비해 더욱 급속히 증가하는 현상이 있는데, 그 예는 영국에서 나타난다.

 

노동자 수의 자연적 증가가 자본의 축적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동시에 그 욕구를 초과한다는 사실은 자본의 운동 자체가 지닌 모순이다. 이는 자본이 연소한 노동자를 더 많이 요구하고, 성인 노동자는 더 적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수천 명이 실직하고 있는 바로 그때, ‘일손이 부족하다고 한탄이 들려오는 것 역시 모순이다. 이는 분업의 결과로, 실업자는 일정한 생산 부문 이외에는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자본으로부터 노동력의 소모가 너무나 급격하여, 중년의 노동자는 이미 다소간 노쇠하게 된다. 그는 과잉 인구의 대열로 낙오되거나, 높은 등급에서 낮은 등급으로 밀려 내려온다. 노동자들의 수명이 가장 짧은 곳은 바로 대공업이다. 맨체스터 보건 관리 리의 말에 따르면,

 

맨체스터의 평균 수명은 상층 중간 계급이 38세인 반면, 노동자 계급은 17세에 불과하다. 리버풀에서는 전자는 35, 후자는 15세이다. 따라서 부유층의 수명은 더 불리한 조건에 있는 시민들의 수명에 비해 2배 이상 길다.’

 

대공업 노동자의 절대적 증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그 개별 구성 요소들의 급속한 소멸에도, 그 수가 팽창하는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노동자 세대의 급속한 교체가 요구된다 (이 법칙은 인구 중 다른 계급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는 조혼(대공업 노동자들의 생활 환경의 필연적 결과)과 장려금(아동 노동 착취가 아동 생산에 제공하는, 곧 아동이 벌어오는 임금 때문에 아이들을 많이 가지려는 것)으로부터 충족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농업을 장악하고, 그것을 장악한 정도에 비례하여, 농업에 투하된 자본의 축적이 진전되는 동안, 농촌 노동 인구에 대한 수요는 절대적으로 감소한다. 여기서는 (다른 비농업 산업에서와는 달리) 노동자의 축출이 더 큰 흡수로 보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농촌 인구의 일부는 끊임없이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나 비농업 프롤레타리아트로 전환되는 상태에 놓이며, 이 전환에 유리한 조건을 기다린다. 이처럼 상대적 과잉 인구의 원천으로부터 끊임없는 이동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들이 도시로 끊임없이 이동한다는 것은 농촌 자체 안에 항상적인 잠재적 과잉 인구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며, 이 잠재적 과잉 인구의 규모는 그 출구가 예외적으로 넓게 열릴 때에만 눈에 띈다. 결국, 농촌 노동자는 최저 한도의 임금 수준으로 밀려 떨어며, 그들의 한쪽 다리는 이미 극빈자의 늪 속에 빠져 있다.

 

상대적 과잉 인구의 제3 범주인 정체적 과잉 인구는, 취업이 매우 불규칙한 현역 노동자 집단의 일부를 구성한다. 따라서 이 정체적 과잉 인구는 자본에게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노동력의 한없이 큰 저수지를 제공한다. 그들의 생활 형편은 노동자 계급의 표준적인 평균 수준 이하로 떨어지며, 바로 이 사실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본주의적 착취의 특수 부문들을 위한 폭넓은 기초가 된다. 그들의 특징은 최대 한도의 노동 시간과 최소 한도의 임금이다. 우리는 그들의 주요 형태를 이미 가내 공업 항목에서 확인했다. 이 정체적 과잉 인구는 대공업과 농업의 과잉 노동자로부터 끊임없이 보충된다. 또한 특히 몰락하고 있는 공업 부문(수공업적 생산이 공장제 수공업적 생산에, 공장제 수공업적 생산이 기계제 생산에 정복당하는 경우)으로부터도 보충된다. 그들의 규모는 축적의 규모, 활력의 증대와 함께 과잉 인구의 창출이 진전됨에 따라 증대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노동자 계급 중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고 영구화하는 요소이며, 노동자 계급의 총 증가 중에서 다른 요소들보다 상대적으로 큰 비율을 차지하는 요소이다.

  

출생자 수와 사망자 수뿐 아니라 가족의 절대적 크기까지도 임금의 크기(노동자들이 처분할 수 있는 생활 수단의 양)에 반비례한다. 이는 곧 임금이 낮을수록 출생자와 사망자의 수가 그만큼 더 커지고, 가족의 구성원 수도 그만큼 더 커진다는 의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이 법칙은 야만인이나 심지어 문명화된 식민지 사람들에게도 괴상하게 들린다. 이 현상은 개별적으로는 힘이 없어 항상 쫓겨 다니는 동물류의 거대한 종족 번식을 연상시킨다.

 

최종적으로, 상대적 과잉 인구의 최하층은 구호 빈민 상태에 놓인다. 부랑자, 죄인, 매춘부 등 본래의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를 제외하면, 이 사회층은 세 가지 범주로 구성된다. 첫째, 노동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영국의 구호 빈민 통계에 따르면, 그 수는 공황기에 언제나 증가하고, 회복기에는 언제나 감소한다. 둘째, 고아와 구호 빈민의 아이들이다. 이들 세 번째 범주는 타락한 사람들, 지친 사람들, 노동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특히 분업으로 인해 직업을 바꿀 능력을 상실하여 몰락한 사람들이다. 또한 위험한 기계, 광산, 화학 공장 따위의 증가에 따라, 그 수가 점점 늘어나는 산업 재해자인 불구자, 병자, 과부 등이다. 구호 빈민은 현역 노동자군의 폐인 수용소이자 산업 예비군의 고정 구성원이다.

 

구호 빈민의 생산은 상대적 과잉 인구의 생산에 포함되며, 전자의 필연성은 후자의 필연성에 포섭된다. 구호 빈민은 상대적 과잉 인구와 더불어 부의 자본주의적 생산과 발전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이룬다. 구호 빈민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공비(생산에 직접 공헌하지 않는 비용)의 일부를 구성한다. 그러나 자본은 그 비용 부담의 대부분을 자기 자신의 어깨로부터 노동자 계급과 하층 중간 계급의 어깨로 전가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사회적 부, 기능하는 자본, 기능 자본 증대의 규모와 활력,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절대 수와 그들 노동의 생산력이 클수록, 산업 예비군은 그만큼 더 커진다. 자본의 확장력을 발전시키는 바로 그 원인들이 또한 자본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노동력을 증가시킨다. 다시 말해, 산업 예비군의 상대적 크기는 부의 잠재적 활력과 함께 증대한다. 그런데 이 산업 예비군이 노동자 현역군에 비해 클수록, 고통스러운 노동을 하지 않으면 더욱 빈곤해지는, 고정적 과잉 인구는 그만큼 더 많아진다.

 

노동자 계급의 극빈층과 산업 예비군이 클수록, 공식적인 구호 빈민은 그만큼 더 증가한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축적의 절대적 일반 법칙이다. 다른 법칙과 마찬가지로, 이 법칙 역시 실현 과정에서 여러 사정으로 수정되나, 그 분석은 여기의 관심사가 아니다.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수를 자본의 증식 욕구에 적응시키라 설교하는 경제학적 지혜의 어리석음은 이제 명백하다.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과 축적의 원리가 이 수를 끊임없이 자본의 증식 욕구에 적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적응의 첫 번째 결과는 상대적 과잉 인구 또는 산업 예비군의 창출이며, 마지막 결과는, 노동자 현역군 중 끊임없이 증대하는 부분의 빈곤과 구호 빈민이다.

 

점점 더 증가하는 양의 생산 수단이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 증가로 인해 더욱더 적은 인간 힘의 지출로 가동된다는 법칙은, 노동자가 생산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 수단이 노동자를 사용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완전히 전도되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 노동 생산력이 높을수록, 노동자들이 취업 수단(일자리)에 가하는 압력은 그만큼 더 커지며, 따라서 그들의 생존 조건(타인의 치부, 곧 자본의 가치 증식을 위해 그들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것)은 그만큼 더 불확실하게 된다. 따라서 생산 수단과 노동 생산력이 생산적 인구보다 더 빨리 증가한다는 사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거꾸로 노동 인구는 언제나 자본의 가치 증식 욕구보다 더 빨리 증가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4편에서 분석했듯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모든 방법은 개별 노동자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다. 생산을 발전시키는 모든 수단들은 생산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수단으로 전환된다. 이는 노동자를 부분 인간으로 불구화하고, 기계의 부속물로 격하시키며, 그의 노동의 고유한 가치를 파괴하면서, 노동을 혐오스러운 고통으로 바꾼다. 또한 과학이 독립적인 힘으로 노동 과정에 도입되는 정도에 비례하여 노동 과정의 지적 잠재력을 노동자로부터 소외시킨다. 더 나아가, 노동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모든 방법과 수단은 노동자의 노동 조건을 악화시킨다. 이들은 노동자를 노동 과정에서 비열하기 때문에 더욱 혐오스러운 자본의 독재에 굴복시키고, 노동자의 전체 생활 시간을 노동 시간으로 전환시키며, 그의 처자를 자본이라는 저거노트의 수레바퀴 밑으로, (자본을 위해 희생시키려고) 질질 끌고 간다.

 

잉여 가치 생산의 모든 방법은 곧 축적의 방법이며, 축적의 모든 확대는 다시 이 방법을 발전시키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자본이 축적됨에 따라 노동자가 받는 임금 수준과 무관하게, 그의 상태는 악화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궁극적으로, 상대적 과잉 인구(산업 예비군)를 축적의 규모와 활력에 상응하도록 유지하는 법칙은, 헤파이스토스의 쐐기보다 더 단단하게 노동자를 자본에 결박시킨다. 이 법칙은 자본 축적에 상응하는 빈곤의 축적을 필연화한다. 결과적으로, 한쪽 끝에서 부의 축적은 동시에 반대편 끝, 곧 자신의 생산물을 자본으로 생산하는 노동자 계급 측의 빈곤, 노동 고통, 노예 상태, 무지, 잔인, 도덕적 타락의 축적이다.

 

자본주의적 축적의 적대적 성격은 정치경제학자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전()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 아래의 현상(부분적으로 비슷하나, 본질적으로 다른)과 혼동한다.

 

18세기 위대한 경제학 저술가 중 한 명인, 베니스의 수도승 오르테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적대 관계를 사회적 부의 일반적 자연 법칙으로 보았다.

 

경제적 선과 경제적 악은 한 나라 안에서는 항상 균형을 이룬다. , 일부 사람들의 부의 풍족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부의 결핍과 크기가 동일하며, 소수의 거대한 부는 항상 다수 생활 필수품의 절대적 박탈을 수반한다. 한 국민의 부는 그 인구에, 그 빈곤은 그 부에 대응한다. 이는 부지런한 사람과 부자의 필연적 결과가, 게으른 사람과 가난한 사람임을 의미한다.’

 

오르테스보다 약 10년 후, 영국 국교의 목사 타운센드는 매우 난폭하게 빈곤을 부의 필요 조건이라고 찬양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법으로부터 노동의 강제는 너무나 큰 분쟁, 폭력, 물의를 수반한다. 반면, 굶주림은 근면과 노동에 대한 평화적이고, 조용하며, 끊임없는 압력일 뿐 아니라, 가장 자연적인 동기를 주어 최대의 노력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모든 것은 노동자 계급의 굶주림을 영구화하는 데 달려 있으며, 타운센드의 의견에 따르면, 이는 특히 빈민들 사이에 적용되는 인구 법칙으로부터 제공된다.

 

빈민은 어느 정도 선경지명이 없고(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날 만한 선견지명이 없고), 그래서 사회의 가장 천하고, 가장 더럽고, 가장 열등한 직능을 행하는 사람이 항상 있다는 것은 하나의 자연 법칙이라고 생각된다. 이로 말미암아 인류의 행복 총량은 매우 증가하며, 더 점잖은 사람들은 고역에서 해방되어, 아무런 지장도 받지 않고, 더 고상한 직업에 종사할 수 있다. 구빈법은 신과 자연이 세상에 세우신 이 체제의 조화와 아름다움, 균형과 질서를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베니스의 수도승이 빈궁의 영구화라는 운명 속에서 기독교적 자선, 독신, 수도원, 성당의 존재 이유를 찾았다면, 신교 목사는 반대로 거기에서 영국의 구빈법(빈민들에게 쥐꼬리만한 공적 구호 권리를 부여한 법)을 비난할 구실을 발견했다. 슈토르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회적 부의 발전은 이 유용한 사회 계급을 창출한다. 이 계급은 가장 무미건조하고, 천하며, 싫증나는 일들을 하며, 한마디로 생활에서 불쾌하고 비굴할 일을 모두 짊어진다. 바로 그렇게 하면서 다른 계급들에게 여가, 정신의 안정, 관습적인 품위를 보장해 준다.’

 

슈토르히는 대중의 빈곤과 타락을 수반하는 자본주의적 문명이 야만보다 우월한 점이 무엇인지 자문한다. 그가 발견한 유일한 대답은 안전 보장이다! 시스몽디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산업과 과학의 발전으로 모든 노동자는 매일 자신의 소비에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노동이 부를 생산하지만, 그 자신이 그것을 소비하게 된다면, 그 부는 그를 노동에 부적합하게 만들 것이다. 사람들(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이 예술 작품이나 향락품을 얻기 위해 노동자들처럼 끊임없이 노동해야만 한다면, 그들은 그 모든 것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는 편을 택할 것이다. 오늘날에는 노동이 그 보상과 분리되어 있다. 동일한 사람이 먼저 일하고 다음에 휴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일을 하기 때문에 비로소 다른 사람이 휴식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노동 생산력의 무한한 증가는 놀고먹는 부자들의 사치와 향락의 증가 외의 다른 어떤 결과도 가져올 수 없다.’

 

마지막으로, 냉담한 부르주아 공리 공론가인 데스튀드 드 트라시는 다음과 같이 난폭하게 진술한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대중들이 편안하게 살아가고, 부유한 나라에서는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가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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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 법칙

 

25-1. 자본 구성 불변 시 노동력 수요 증가

 

본 장은 자본 증대가 노동자 계급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한다. 이 고찰의 핵심 요소는 자본의 구성과, 축적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구성의 변화에 집중한다.

 

자본의 구성은 가치 측면과 소재 측면의 두 관점에서 고찰된다. 가치 구성은 자본이 불변 자본 (생산 수단의 가치)과 가변 자본 (노동력의 가치, 곧 임금 총액)으로 분할되는 비율로부터 결정된다. 반면, 기술적 구성은 생산 과정에서 기능하는 소재의 측면을 다루며, 이는 사용되는 생산 수단의 양과 이의 활용에 필요한 노동량 사이의 관계로 규정된다. 전자를 자본의 가치 구성이라 칭하며, 후자를 자본의 기술적 구성이라 부른다. 양자는 긴밀히 상호 관계를 형성하는데, 자본의 가치 구성이 기술적 구성으로부터 결정되고 그 변화를 나타낼 때, 이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라 한다.

 

본 글에서 자본의 구성이라 간략히 지칭하면 언제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의미한다. 일정한 생산 부문에 투하된 개별 자본들은 각기 상이한 구성을 지닌다. 이 개별 구성의 평균은 해당 생산 부문 총자본의 구성을 도출하게 한다. 궁극적으로, 각 생산 부문 평균 구성의 총평균은 한 나라에서 사회적 총자본의 구성을 규명하며, 이하 논의는 오로지 이 사회적 총자본의 구성을 대상으로 한다.

 

자본 증대는 그 가변적 구성 부분 (노동력으로 전환되는 부분)의 증가를 수반한다. 추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잉여 가치의 일부는 필연적으로 가변 자본 (추가적 노동 기금)으로 계속 재전환되어야 한다. 다른 사정들이 불변이며, 자본의 (유기적) 구성 또한 불변이라 가정할 경우 (, 일정한 양의 생산 수단을 운용하는 데 언제나 동일한 양의 노동력이 요구된다고 가정할 경우), 노동력에 대한 수요와 노동자의 생활을 위한 재원은 자본에 비례하여 증가하며, 자본의 증가 속도가 빠를수록, 이들 요소 또한 더욱 빠르게 증가하는 결과가 초래한다.

 

자본은 매년 잉여 가치를 생산하며, 그 일부는 최초 자본에 지속적으로 편입된다. 이 편입분 자체는 이미 기능하는 자본 규모의 증대에 비례하여 매년 증가한다. 나아가, 치부욕에 대한 특별한 자극 (: 새로운 시장 개척, 새로운 사회적 욕구 발전에 따른 신규 투자 영역 창출)이 발생할 경우, 잉여 가치 또는 잉여 생산물이 자본의 수입으로 분할되는 것의 변동만으로도, 축적의 규모는 급격히 확대될 수 있다. 따라서 자본의 축적욕이 노동력 (또는 노동자 수)의 증가를 능가할 여지가 생기며, 노동자들에 대한 수요가 그 공급을 초과하여 임금 등귀가 유발될 수 있다. 앞서 설정한 전제 (자본 구성 불변)가 유지된다면, 이러한 결과는 필연적이다. 매년 전년보다 더 많은 노동자가 고용되면서, 축적에 필요한 노동력이 평상시의 노동 공급을 상회하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조만간 임금 등귀가 발생하는 시점이 도래할 수밖에 없다.

 

영국에서 15세기 전체와 18세기 전반기에 걸쳐 이러한 상황을 한탄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임금 노동자들이 다소 유리한 조건 아래에서 생계를 유지하고 번식한다 하더라도,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근본적 성격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는다. 단순 재생산이 자본 관계 자체, 곧 한편으로 자본가를, 다른 한편으로 임금 노동자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대된 규모의 재생산 (곧 축적) 역시 자본 관계를 확대된 규모로 재생산한다. 이는 한쪽 끝에 더 많은 자본가 또는 더 큰 자본가를, 다른 쪽 끝에 더 많은 임금 노동자를 재생산하는 결과를 낳는다. 노동력은 자본의 가치 증식 수단으로 끊임없이 자본에 다시 결합되어야 하며, 자본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노동력의 재생산은 사실상 자본 자체의 재생산을 위한 하나의 요소이다. 노동력의 자본에 대한 예속은 단지 노동력을 개별 자본가에게 팔 수 있다는 사실로 은폐될 뿐이다. 결론적으로, 자본의 축적은 곧 프롤레타리아트의 증식이다.

 

고전파 경제학은 이 명제 (자본 축적 = 프롤레타리아트 증식)를 명확히 이해했기에, 애덤 스미스나 리카도 등은 축적을, 잉여 생산물 중 자본으로 전환되는 부분 전체가 생산적 노동자로부터 소비되는 것, 또는 그 부분이 추가적 임금 노동자로 전환되는 것으로 잘못 동일시했다. 이미 1696, 벨러즈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어떤 사람이 100,000에이커의 토지와 100,000파운드의 화폐, 100,000마리의 가축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노동자를 한 명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 부자는 노동자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노동자가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기 때문에 노동자가 많을수록, 부자도 그만큼 더 많아진다. 빈민 (노동자)의 노동은 부자의 보물 창고이다.’

 

맨더빌 역시 18세기 초에 다음과 같은 주장을 피력한다:

 

소유권이 잘 보호되고 곳에서는 빈민 없이 생활하기보다 화폐 없이 생활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사실, 누가 노동을 하겠는가. 그들 (빈민들)은 굶어 죽지 않도록 보호되어야 하지만, 저축할 만큼은 받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최하층 계급 중 누군가가 매우 근면하고, 검소한 덕분에 태어난 지위보다 높아질 때, 아무도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개인과 가정을 위해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빈민이 놀고 지내지 않으며, 그들이 자신의 수입을 계속 지출하는 것은 모든 부유한 국민들에게 유익하다. 그날의 노동으로부터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에게 일을 하도록 자극을 주는 것은 오직 가난 뿐이다. 그 가난을 완화시키는 것은 현명하지만, 완전히 제거해 버리는 것은 어리석다. 노동하는 사람을 근면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적당한 임금이다. 너무 낮은 임금은 그의 성격에 따라 낙담시키거나 절망하게 만들며, 너무 많은 임금은 불손하고 나태하게 한다. 결론적으로, 노예가 허용되지 않는 자유로운 나라에서 가장 확실한 부는 다수의 근면한 빈민에게 있다. 그들은 육해군을 위한 무진장한 공급 원천일 뿐만 아니라, 그들 없이는 어떤 향략도 있을 수 없으며, 어떤 나라의 생산물도 가치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사회 (물론 노동자들이 아닌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를 행복하게 하고, 국민을 비참한 상태에서도 만족하게 하려면, 대다수를 무지하고 가난한 상태에 묶어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지식은 우리의 욕구를 확대하고 다양하게 만들기 때문이며, 사람이 적게 바랄수록, 그의 욕구는 그만큼 더 쉽게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직하고 명석한 두뇌를 가진 맨더빌조차 미처 파악하지 못한 지점은, 축적 과정 그 자체가 자본의 크기뿐 아니라 노동 빈민의 수 또한 증가시킨다는 사실이다. 이 노동 빈민, 곧 임금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증대하는 자본의) 가치 증식을 확장하는 힘으로 전환시키며, 바로 그렇게 하면서 자기 자신의 생산물 (이것은 자본가로 인격화된다)에 대한 자기 자신의 종속 관계를 영구화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종속 관계에 관해 이든은 그의 저서,빈민의 상태(1797)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든이 승인하는 시민적 제도는 부자와 노동자를 구별하는 기준이 토지와 화폐의 소유가 아닌 노동에 대한 지배력임을 명확히 한다.

 

우리 토지의 자연적 산물만으로는 생활에 분명히 충분하지 못하다. 어느 정도 이전 노동의 결과 없이는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의 일부는 쉬지 않고 일해야 한다. 일부 사람들이 노동하지 않으면서도, 노동의 생산물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문명과 질서의 덕택이며, 이들은 전적으로 시민적 제도의 창조물이다. 왜냐하면, 시민적 제도는 개인이 노동 이외의 각종 수단으로부터 재산을 취득하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독립적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그 재산을 얻게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노동 덕택이지, 자기 자신들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 아니다. 부자를 노동자들과 구별하는 것은 토지와 화폐의 소유가 아니라 노동에 대한 지배력이다. 이 제도 (시민적 제도)는 유산자들에게 (자신들을 위해 노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충분한 세력과 권위를 부여하며, 또한 노동자들을 비참하거나 노예적 상태가 아닌 편안하고 자유로운 종속의 상태에 둔다. 이런 종속 상태는 인간성과 그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듯이, 노동자 자신의 안락을 위해 필요하다.’

 

덧붙여, 이든은 18세기 애덤 스미스의 제자들 중 유일하게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지금까지 가정한 축적 조건, 곧 노동자들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 하에서는, 자본에 대한 노동자들의 종속 관계는 견딜 만한, 또는 이든의 표현대로, ‘편안하고 자유로운형태를 띤다. 이 종속 관계는 자본의 증대에 따라 내포적으로 심화되지 않고, 오직 외연적으로 확대될 뿐이다. 자본의 착취와 지배 영역이 자본 자체의 크기와 이에 종속되는 사람들의 수에 비례하여 확장된다. 노동자들 자신의 잉여 생산물 (지속적으로 증대하며 끊임없이 추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부분) 중 더 많은 몫이 지불 수단 (임금)의 형태로 이들에게 환원된다. 이 덕택에, 노동자들은 자신의 소비 범위를 확대하고, 의복, 가구 등의 소비 재원을 소폭 증대시키며, 심지어는 약간의 준비금까지 형성할 수 있게 된다.

 

노예의 경우, 의식주 및 대우가 개선되고, 페쿨리움 (고대 로마 노예의 일부 재산)이 증가하더라도, 노예의 종속 관계와 착취가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임금 노동자의 종속 관계와 착취 역시 소멸하지 않는다. 자본 축적의 결과로, 노동의 가격이 상승하는 것은, 사실상 임금 노동자 자신이 이미 만들어낸 금 사슬 (자본)의 길이와 무게로 말미암아 그 사슬의 긴장이 약간 완화됨을 의미할 따름이다. 이 문제에 관한 논쟁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특징적 차이가 흔히 간과되었다. 노동력은 구매자 자신의 개인적 욕구 충족을 위해 구매되는 것이 아니다. 구매자의 목적은 자기 자본의 가치 증식이며, 이는 그가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이 포함된 상품 (따라서 그가 지불하지 않은 가치 부분이 포함된 상품)의 생산으로부터 실현된다. 잉여 가치의 생산 또는 이윤의 획득이 이 생산 양식의 절대적 법칙이다. 노동력은 생산 수단을 자본으로 유지시키고, 자기 자신의 가치를 자본으로 재생산하며, 지불받지 않는 노동으로 추가 자본의 원천을 제공하는 한에서만 판매될 수 있다. 따라서 노동력 판매 조건은, 노동자들에게 유리하든 불리하든, 노동력의 끊임없는 재판매의 필연성과 자본의 형태로 부를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는 것을 내포한다.

 

임금은, 그 성격상, 항상 노동자 측에서 일정한 양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을 제공하는 것을 수반한다. (노동일 연장에 따라) 노동의 가격 (시간당 또는 개수당 임금)이 하락하는데도 임금이 증가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임금의 증가는 기껏해야 노동자가 제공해야 할 지불받지 않는 노동의 양적 감소만을 의미할 따름이다. 이 감소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점까지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임금률을 둘러싼 폭력적 충돌 (애덤 스미스가 지적했듯이, 고용주가 대체로 승리하는)을 도외로 할 때, 자본 축적의 결과, 노동의 가격이 등귀하는 일은 다음 두 경우 중 하나를 의미한다.

 

첫째, 노동의 가격이 등귀하더라도, 축적의 진행이 방해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경우이다. 이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스미스가 지적하듯이,

 

자본 이윤이 감소한 이후에도, 자본은 계속 증가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이전보다 더욱 빠르게 증가할 수 있다. 이윤율이 낮은 거대 자본은 이윤율이 높은 소규모 자본보다 일반적으로 더 신속하게 증식한다.’

 

[국부론(): 121]

 

둘째, 노동 가격의 등귀로 인해 이윤이라는 자극이 감소하여 축적이 약화되는 경우이다. 이로 인해, 축적률 (잉여 가치 중 자본으로 재전환되는 부분의 비율)은 감소한다. 그러나 이 감소와 더불어, 그 원인이었던 자본과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 사이의 불균형 (곧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의 양을 초과하는 자본의 양) 역시 해소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의 기구는 생산 과정 자체가 만들어낸 일시적인 장애물을 스스로 제거하는 원리를 갖춘다.

 

노동 가격은 다시 자본의 자기 증식욕에 적합한 수준 (이 수준이 임금 등귀 시작 전의 평균적 수준보다 낮거나, 같거나, 높든지 관계없이)으로 하락한다. 따라서 첫째 경우, 노동력 (또는 노동 인구)의 절대적 또는 상대적 증가율이 감소했기 때문에 자본이 과잉이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본의 증가가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을 부족하게 만든다. 둘째 경우에도, 노동력 (또는 노동 인구)의 절대적 또는 상대적 증가율이 커졌기 때문에 자본이 부족하게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본이 상대적으로 감소했기 때문에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 (또는 그 가격)이 지나치게 큰 것으로 간주된다.

 

바로 이러한 자본 축적의 절대적 운동이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의 양적 상대 변동을 나타낼 뿐임에도, 노동력 양 자체의 독립적인 운동이 축적을 야기하는 것처럼 오인된다. 수학적 표현을 빌리자면, 축적률이 독립 변수이고, 임금률은 종속 변수이며,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산업 순환의 공황 국면에서 상품 가격의 일반적 저하가 화폐 가치의 등귀로 나타나고, 번영 국면에서 상품 가격의 일반적 등귀가 화폐 가치의 저하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이 사실로부터 이른바 통화주의는 가격이 높을 때는 과도한 화폐가, 낮을 때는 부족한 화폐가 유통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러한 통화주의자들의 무지와 사실의 완전한 오인은, 위의 축적 현상을 첫째 경우에는 임금 노동자가 너무 적기 때문이고, 둘째 경우에는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경제학자들의 오류와 매우 흡사하다.

 

이른바 자연적 인구 법칙의 근간을 이루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법칙은 간단히 말해, 자본 축적과 임금률 사이의 관계는 (자본으로 전환된) 지불받지 않는 노동과 (추가 자본의 운동에 필요한) 추가적 지불받는 노동 사이의 관계로 환원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은 결코 두 개의 서로 독립적인 양 (자본 크기와 노동 인구 수)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결국 동일한 노동 인구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과 지불받는 노동 사이의 관계에 불과하다.

 

노동자 계급이 제공하고, 자본가 계급이 축적하는 지불받지 않는 노동의 양이 급속히 증가하여, 그것이 자본으로 전환되기 위해 지불받는 노동의 비상한 추가가 필요한 경우, 임금은 등귀한다. 그리고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지불받지 않는 노동은 임금 등귀에 비례하여 감소한다. 그러나 이 감소가 자본을 길러내는 잉여 노동이 더 이상 요구되는 양으로 제공되지 않는 지점에 도달하면, 반작용이 즉시 시작된다. 곧 수입 (잉여 가치) 중 자본화되는 부분은 감소하고, 축적은 쇠퇴하며, 임금의 등귀 운동은 장애에 직면한다. 결국 임금의 등귀는 자본주의 체제의 토대를 침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점차 확대되는 규모의 재생산을 보장하는 한계 내에 머문다. 따라서 (경제학자들로부터 자연 법칙으로 신비화된) 자본주의적 축적 법칙이 실제로 표현하는 바는, 노동 착취도의 어떤 감소와 노동 가격의 어떤 등귀도 (자본 관계의 끊임없는 확대 재생산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성격 자체로부터 배제된다는 점이다. 이는 물질적 부가 노동자의 자기 발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노동자가 현존 가치의 증식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존재하는 생산 양식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종교에서 인간 자신의 두뇌의 산물이 인간을 지배하듯이,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인간 자신의 손의 산물이 인간을 지배한다.

   

25-2. 자본 축적·집중과 유기적 구성 변화

 

경제학자들 자신의 의견에 따르면, 임금를 야기하는 것은 사회적 부의 현실적 규모나 기존 자본의 크기가 아니다. 오로지 축적의 끊임없는 증대와 그 증대 속도일 뿐이다 (스미스, 국부론, 1, 8). 지금까지의 고찰은 자본의 기술적 구성이 불변인 채 증대가 발생하는 축적 과정의 특수 국면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축적 과정은 이 국면을 넘어 다음 단계로 진행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일반적 토대가 일단 확립되면, 축적 과정에서 사회적 노동의 생산성 발전이 축적의 가장 강력한 지렛대가 되는 시기가 도래한다.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동 임금을 상승시킨 바로 그 원인, 곧 자본의 증가는 노동 생산력을 증가시켜 더 적은 노동량으로 더 많은 생산물을 만들게 하는 경향이 있다.’ 


[국부론(): 113-114]

 

자연 조건 (토지의 비옥도 등)과 독립적 생산자들의 기능 (생산물에 질적으로 나타남)을 제외하면,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 수준은 동일한 노동 강도로 일정한 시간에 노동자가 생산물로 전환시키는 생산 수단의 상대적 규모로 표현된다. 이처럼 노동자가 전환시키는 생산 수단의 양은 그의 노동 생산성에 비례하여 증대한다. 이 생산 수단들은 이중의 역할을 한다. 어떤 생산 수단의 증가는 노동 생산성이 증대한 결과이며, 동시에 어떤 생산 수단의 증가는 노동 생산성을 증대시키기 위한 조건이 된다. 예를 들어, 공장제 수공업적 분업과 기계의 사용은 동일 시간에 더 많은 원료와 보조 재료를 노동 과정에 투입하게 하는데. 이는 생산성 향상의 결과이다. 다른 한편, 사용되는 기계, 광물성 비료, 배수관 등은 생산성을 향상을 위한 조건이 된다. 그러나 (생산 수단에 결합되는) 노동력에 대비한 생산 수단의 양적 증대는 (조건이든 결과이든) 노동 생산성 향상의 표현이다. 따라서 노동 생산성의 향상은 노동이 움직이는 생산 수단의 양에 대비한 노동량의 감소로, 곧 노동 과정의 객체적 요소에 대비한 주체적 요소의 양적 감소로 나타난다.

 

자본의 기술적 구성의 이러한 변화 (곧 생산 수단에 활력을 주는 노동력의 양에 대비한 생산 수단의 양적 증대)는 이번에는 자본의 가치 구성 (곧 자본 가치의 가변적 구성 부분을 희생하는 불변적 구성 부분의 증대)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어떤 자본이 시초에 50%가 생산 수단에, 50%가 노동력에 투하되었으나, 이후 노동 생산성의 증대에 따라 80%가 생산 수단에, 20%가 노동력에 투하되는 경우와 같다. 자본의 가변 부분에 비한 불변 부분의 점진적 증대라는 이 법칙은, (상이한 경제적 시기를 비교하든, 동일 시기의 상이한 나라들을 비교하든) 상품 가격의 비교 분석으로부터 모든 단계에서 확인된다. 가격 중 소비된 생산 수단의 가치를 대표하는 부분 (곧 불변 자본 부분)의 상대적 크기는 축적의 진전에 정비례하며, 노동에 대한 지급을 대표하는 부분 (곧 가변 자본 부분)의 상대적 크기는 축적의 진전에 반비례한다.

 

자본 기술적 구성의 이러한 변화 (곧 생산 수단에 활력을 부여하는 노동력 대비 생산 수단의 양적 증대)는 자본 가치 구성 (가변적 구성 부분을 희생하는 불변적 구성 부분의 증대)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방적업에 투하된 자본 가치 구성은 18세기 초 불변 자본 1/2, 가변 자본 1/2에서 현재 불변 자본 7/8, 가변 자본 1/8로 변화하였다. 현재 일정한 방적 노동이 소비하는 원료 및 노동 수단 등의 양은 18세기 초 대비 수백 배에 달한다. 이는 노동 생산성 향상에 따라 노동이 소비하는 생산 수단의 양은 증가하지만, 그 양에 비례하여 가치는 감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 수단의 가치는 절대적으로는 증가하나, 그 양의 증가에 비례해 증가하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 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 사이의 차이 (가치 구성)는 생산 수단의 양과 노동력의 양 사이의 차이 (기술적 구성)보다 훨씬 완만하게 증대한다. 전자의 차이는 후자의 차이와 함께 증가하지만, 그 증가 정도는 현저히 낮다.

 

축적의 진전이 가변 자본 부분의 상대적 크기를 감소시킬지라도, 이는 가변 자본 부분의 절대적 크기의 증대를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자본 가치가 초기 불변 자본 50%와 가변 자본 50%로 분할되었으나, 이후 불변 자본 80%와 가변 자본 20%로 변화한 상황을 가정한다. 이 기간에 최초 자본이 6,000원에서 18,000원으로 3배 증대했다면, 가변적 구성 부분 또한 1/5만큼 증대한다. 이는 종전의 가변 자본 3,000원이 이제 3,600원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에 대한 수요를 20%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종전에는 20%의 자본 증대로 충분했지만, 이제는 최초 자본의 3(18,000)가 요구된다.

 

4편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 발전은 대규모 협업을 전제하며, 이 전제 하에서만 노동의 분할과 결합이 조직될 수 있고, 생산 수단은 대규모 집적으로부터 절약될 수 있다. 또한, 물질적 성질상 공동으로만 사용하는 노동 수단 (: 기계 체계 등)이 출현할 수 있으며, 방대한 자연력이 생산에 이용되고, 생산 과정이 과학의 기술 공학적 응용으로 전환될 수 있다. 상품 생산이 지배적인 제도라면, 곧 생산 수단이 개인의 소유여서 수공업자가 고립적으로 자립 생산을 하거나, 또는 자립 생산 수단이 없어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상황이라면, 앞에서 언급된 전제인 대규모 협업은 개별 자본의 증대로부터만, 또는 사회적 생산 수단과 생활 수단이 자본의 사적 소유로 전환되는 정도에 따라서만 실현된다. 상품 생산의 토대 위에서는 대규모 생산은 자본주의적 형태로만 발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별 상품 생산자들의 수중에 일정한 자본이 축적되는 것이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전제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수공업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이행하는 동안, 이러한 축적이 발생했다고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축적을 시초 축적이라 부를 수 있다. 이는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적 결과가 아니라 그 역사적 토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초 축적 자체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연구할 필요는 아직 없다. 그것이 단지 출발점을 이룬다는 것만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토대 위에서 발달하는 사회적 노동 생산성의 향상 방법은 어느 것이나 동시에 잉여 가치 (또는 잉여 생산물)의 생산을 증대시키는 방법인데, 이 잉여 가치는 다시 축적의 형성 요소가 된다. 따라서 그 방법들은 또한 자본으로부터 자본의 생산 방법 (곧 자본의 축적을 촉진하는 방법)이 된다.

 

잉여 가치가 자본으로 끊임없이 재전환되는 것은 생산 과정에 투입되는 자본의 크기 증대로 나타난다. 이 증대는 곧 생산 규모 확대의 기초가 되며, 이는 노동 생산성 증진 방법의 기초, 나아가, 잉여 가치 생산을 촉진하는 기초로 작용한다. 따라서 일정한 자본 축적이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전제 조건이라면, 이제 역으로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은 자본의 가속적 축적의 원인이 된다. 결과적으로, 자본 축적에 따라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발전하고, 생산 방식에 따라 자본 축적이 발전한다. 이 두 경제적 요인들은 (서로 주고받는 자극에 비례하여) 자본의 기술적 구성에 변화를 일으키며, 이 변화로 인해 가변적 구성 부분은 불변적 구성 부분에 비해 점점 더 축소된다.

 

모든 개별 자본은 그 규모와 관계없이 생산 수단의 집적이며, 이에 상응하여 노동자 집단을 지휘한다. 모든 축적은 새로운 축적의 수단이 된다. 자본으로 기능하는 부의 양이 증대함에 따라, 축적은 개별 자본가들의 수중으로 부의 집적을 증대시키며, 이로부터 대규모 생산의 토대와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토대를 확대시킨다. 사회적 자본의 증대는 다수의 개별 자본의 증대로부터 이루어진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각 개별 자본은 사회적 총자본에서 차지하는 몫에 비례하여 증대하며, 그 증대와 함께 생산 수단의 집적도 증대한다. 동시에 가지들이 최초 자본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독립적 자본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특히 자본가 가족들 사이의 재산 분할이 큰 기능을 하며, 이로 인해 축적과 함께 자본가의 수 또한 대체로 늘어난다. 축적 그 자체와 동일한 이 유형의 집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특징지어진다.

 

첫째, 다른 조건이 같다면, 사회적 생산 수단이 개별 자본가들의 수중으로 더욱 집적되는 것은, 사회적 부의 증대 정도로부터 제한된다. 둘째, 각 특정 생산 부문에서 활동하는 사회적 자본은 (서로 경쟁하는 독립적 상품 생산자로 대립하는) 다수 자본가들 사이에서 분할되어 있다. 그러므로 축적과 그에 수반되는 집적은 다수의 지점으로 분산될 뿐 아니라, 개별 기능 자본의 증대는 새로운 자본 형성과 기존 자본의 분열로부터 방해를 받는다. 최종적으로, 축적은 한편으로 생산 수단 및 노동 지휘의 집적 증가로 나타나며, 다른 한편으로 다수 개별 자본가들 상호간의 배척이라는 양면성을 보인다.

 

사회적 총자본이 수많은 개별 자본으로 분열되거나 그 분열된 조각들이 상호 배척하는 현상은 그들 사이의 흡수로부터 상쇄된다. 이 자본들의 흡수는 생산 수단과 노동 지휘의 단순한 집적 (축적과 동일한 의미의 집적)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형성되어 기능하는 자본들의 집적이며, 그 개별적 독립성의 파괴, 자본가로부터 자본가의 수탈, 그리고 다수 소자본을 소수 대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이다. 이 흡수 과정이 앞선 집적 과정과 구별되는 지점은, 흡수 과정은 이미 존재하고 기능하는 자본들의 분배 변화만을 전제하며, 따라서 그 적용 범위는 사회적 부의 절대적 증대나 축적의 절대적 한계로부터 제한받지 않는다는 점이다한 곳에서 어떤 한 사람의 수중에 자본이 대량으로 증대하는 것은, 다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본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축적·집적과 구별되는 진정한 집중이다. 이 자본 집중의 법칙 또는 자본이 자본을 흡수하는 법칙을 여기서 자세히 전개할 수는 없다. 몇 가지 사실만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경쟁전은 상품 값을 싸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상품 값이 싸지는 것은,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노동 생산성에 의존하며, 노동 생산성은 생산 규모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대자본은 소자본을 격파한다.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발전에 따라 일반적인 조건에서 사업을 경영하는 데 필요한 개별 자본의 최소 금액이 증대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따라서 비교적 작은 자본은 대공업이 산발적으로나 불완전하게 장악하고 있는 생산 부문으로 몰려든다이곳의 경쟁은 적대적인 자본들의 수에 정비례하고, 그 크기에 반비례해 격렬해진다. 경쟁은 언제나 다수 소자본가의 멸망으로 끝나며, 그들의 자본은 부분적으로는 승리자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부분적으로는 사라진다. 그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과 함께 전혀 새로운 힘인 신용 제도가 등장한다.

 

[엥겔스: (이하는 마르크스가 불어판에 넣은 내용을 바탕으로 엥겔스가 제4독어판에 추가한 것이다. CW35 (Progress Publishers, 1996)에는 이 추가분 전체가 CW 편집자의 실수로 빠져 있다.)]

 

이 신용 제도는 처음에는 축적의 겸손한 조수로 은밀히 등장하여, 사회 표면에 거액 또는 소액으로 흩어져 있는 화폐 재원을 보이지 않는 실로 개별 자본가 또는 연합한 자본가들 (: 주식 회사)의 수중으로 끌어모은다. 그러나 신용 제도는 곧 경쟁전에서 새로운 무서운 무기로 변모하며, 결국에는, 자본 집중을 위한 거대한 사회적 기구로 전환된다.

 

자본주의적 생산과 축적의 발전에 비례하여 집중의 가장 강력한 두 지렛대인 경쟁과 신용 또한 발전한다. 이와 함께, 축적의 진전은 집중될 소재, 곧 개별 자본을 증대시킨다. 동시에 자본주의적 생산의 확대는, 한편으로는 거대한 사업 (이 실현을 위해 선행된 자본 집중이 필요하다)에 대한 사회적 욕구를 창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 필요한 기술적 수단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오늘날 개별 자본들을 끌어모으는 흡수력과 집중의 경향은 과거 어느 때보다 강하다. 집중 운동의 상대적 크기와 힘이 어느 정도는 이미 달성한 자본주의적 부의 크기와 경제 기구의 우월성으로부터 결정된다 하더라도, 집중의 진전은 결코 사회적 자본 규모의 적극적 증대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다음은 집중과 집적의 차이점이다. 집적은 확대 재생산의 다른 명칭에 불과하지만, 집중은 단순히 기존 자본의 분배를 변화시키면서, 곧 사회적 자본의 구성 부분들의 양적 편성을 단순히 변경시키면서 일어날 수 있다. 한 곳에서 한 사람의 수중에 자본이 거대한 양으로 증대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의 수중에서 자본이 강제로 빼앗겼기 때문이다. 어떤 일정한 산업 부문에서, 거기에 투하된 모든 개별 자본이 단 하나의 자본으로 합병한다면 집중은 극한에 도달한다. 일정한 사회에서는 사회적 자본 전체가 한 사람의 자본가 또는 하나의 자본주의적 기업의 수중으로 통합될 때에만 이러한 극한에 도달한다.

 

 

집중은 산업 자본가들에게 그들의 사업 규모를 확대할 수 있게 하면서 축적을 보완한다. 이 사업 규모의 확대가 축적의 결과이든 집중의 결과이든, 또는 집중이 합병이라는 폭력적 방법으로 수행되든 (이 경우, 어떤 자본이 다른 자본들을 흡수하는 주도적인 중심이 되어 개별적 응집력을 파괴하고, 그 파편들을 끌어 모은다), 아니면 이미 형성되었거나 형성 과정에 있는 다수 자본들의 융합이 주식 회사 설립이라는 더 부드러운 방법으로 진행되든, 그 경제적 효과는 동일하다.

 

어디에서나 기업체들의 규모 확장은 많은 사람들의 집단 노동을 더 포괄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출발점이 되며, 또한 그들의 물질적 추진력을 더 폭넓게 발전시키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 곧 관습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는 고립적인 생산 과정을, 사회적으로 결합되고 과학적으로 설계되는 생산 과정으로, 점차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

 

축적 (재생산이 원형에서 나선형 운동으로 이행하며, 자본을 점진적으로 증대시키는 것)은 집중 (사회적 자본 구성 부분들의 양적 편성만을 변경시키는 것)에 비해 분명히 매우 느린 과정이다. 약간의 개별 자본들이 축적으로부터 증대되어 철도를 부설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면, 세계에는 아직도 철도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집중은 주식 회사로부터 이를 순식간에 수행하였다. 집중은 이와 같이 축적의 작용을 강화하고 촉진함과 동시에, 자본의 기술적 구성 변혁 (가변 자본을 희생하며 불변 부분을 증대시키고, 이에 따라 노동 수요를 상대적으로 감소시키는 것)을 확대하고 촉진한다. 집중으로부터 하룻밤 사이에 융합되는 자본량은, 다른 자본량과 마찬가지로 (물론 더 급속하게) 재생산되고 증대하며, 이리하여 사회적 축적의 강력한 새로운 지렛대가 된다. 따라서 사회적 축적의 진전에 관해 논할 경우, 우리는 오늘날 거기에 집중의 작용을 암암리에 포함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일반적 축적 과정에서 형성된 추가 자본 (24장 제1절 참조)은 특히 새로운 발견과 발명, 그리고 산업적 개량 일반의 이용을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기존 자본 역시 언젠가는 완전히 갱신되어야 할 시기에 도달하며, 그때에는 종래의 형태를 벗고 기술적으로 완성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렇게 되면, 더 많은 기계와 원료를 운용하는 데 더 적은 노동만으로 충분하게 된다. 이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노동에 대한 수요의 절대적 감소는, 이 갱신 과정을 통과하는 자본이 자본의 집중 운동으로부터 이미 집중되어 있을수록, 분명히 그만큼 더 심화된다. 따라서 축적 과정에서 형성된 추가 자본은 그 규모에 비해 더욱더 소수의 노동자를 흡수한다.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구성으로 주기적으로 재생산되는 기존 자본은 종전에 고용했던 노동자들을 더욱더 많이 축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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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잉여 가치가 자본으로 전환

 

24-1. 확대 재생산과 소유 법칙에서 자본주의적 취득 법칙으로의 전환

 

잉여 가치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연구했다면, 이제는 자본이 잉여 가치로부터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고찰한다. 잉여 가치를 자본으로 사용하는 것, 곧 잉여 가치를 자본으로 재전환하는 것이 바로 자본 축적이다. 이 과정을 먼저 개별 자본가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예를 들어, 어떤 방적업자가 10,000원의 자본을 투하하는데, 이 중 4/5(8,000)는 면화나 기계 등 불변 자본으로, 나머지 1/5(2,000)는 임금 등 가변 자본으로 사용했다고 가정한다. 이 투하로, 매년 12,000원의 가치를 지닌 240,000파운드의 실을 생산한다. 잉여 가치율이 100%이므로, 잉여 가치는 총생산물의 1/6을 차지하는 40,000파운드의 실, 곧 잉여 생산물에 포함되며, 이는 판매 시 2,000원의 가치를 실현한다. 2,000원은 화폐액 그 자체이므로, 겉으로 보아서는 그것이 잉여 가치인지 알 수 없다. 그 가치가 잉여 가치라는 사실은 그 가치가 소유자의 수중에 들어간 경로를 알기 때문일 뿐, 그 사실 자체가 가치나 화폐의 성질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새로 취득한 2,000원의 금액을 자본으로 전환하려면, 방적업자는 다른 조건이 불변일 경우, 이 중 4/5(1,600)를 면화 등의 구입에, 그리고 1/5(400)를 새로운 방적공 고용에 투하해야 한다. 이 추가 노동자는 방적업자로부터 지급받은 가치에 상응하는 생활 수단을 시장에서 확보하게 된다. 이렇게 전환된 2,000원의 새로운 자본은 방적 공장에서 작동하여 다시 400원의 잉여 가치를 창출한다.

 

자본 가치는 최초에 화폐 형태로 투하된다. 그러나 잉여 가치는 처음부터 총생산물의 일정 부분의 가치로 존재한다. 이 총생산물이 판매되어 화폐로 전환되면, 자본 가치는 다시 최초의 형태를 되찾으며 (잉여 가치 역시 상품 형태에서 화폐 형태로 전환됨), 이 시점부터 자본 가치와 잉여 가치는 모두 화폐액이 된다. 이들의 자본으로의 재전환은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자본가는 이 모든 화폐액을 상품(생산 수단과 노동력) 구매에 지출하며, 이는 자본가로 하여금 자신의 생산물 생산을 확대된 규모로 재개할 수 있도록 한다. 다만, 이러한 상품을 구매하려면 그것이 이미 시장에 존재해야 한다. 자신의 실이 유통하는 것은 (다른 자본가들이 각자의 상품을 시장에 내놓듯) 그 역시 자신의 연간 생산물을 시장에 내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상품들은 시장에 진입하기 전에 이미 연간 총생산물의 일부였으며, 이는 개별 자본들의 총액, 곧 사회적 총자본이 1년 동안 생산한 각종 상품의 총량이다.

 

시장의 모든 거래는 이 연간 총생산물의 개별 구성 부분들의 상호 교환을 실현시켜 그것들을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옮길 뿐, 연간 총생산물을 증가시키거나 생산된 상품의 성질을 변경시키지는 못한다. 따라서 연간 총생산물의 사용 방식은 그 유통이 아니라, 연간 총생산물 자체의 구성에 의존한다. 연간 생산물은 먼저 1년 동안 소비된 자본의 물적 구성 부분을 대체할 수 있는 모든 물건(사용 가치)을 제공해야 한다. 이것을 공제하고 남은 부분이 잉여 가치가 포함된 순생산물, 곧 잉여 생산물이다. 그렇다면 이 잉여 생산물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이것이 전적으로 자본가 계급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물건, 곧 그들의 소비재원에 속하는 물건들로만 이루어진다면, 잉여 가치는 남김없이 탕진된다. 이 경우, 오직 단순 재생산만이 진행된다.

 

축적을 위해서는 잉여 생산물의 일부를 자본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적 없이 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 과정에 사용될 수 있는 물건들, 곧 생산 수단과 노동자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물건들, 곧 생활 수단뿐이다. 따라서 연간 잉여 노동의 일부는 투하된 자본의 대체를 넘어서는 추가적 생산 수단과 추가적 생활 수단의 생산에 충당되어야 한다. 요컨대, 잉여 가치가 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잉여 생산물(이것의 가치가 잉여 가치임)이 새로운 자본의 물적 요소로 이미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구성 요소들이 실제로 자본으로 기능하려면 자본가 계급은 추가적 노동을 필요로 한다. 기존 노동자들의 착취를 외연적, 내포적으로 더는 증대시킬 수 없다면, 추가 노동력을 고용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기구는 이미 노동자 계급을 임금에 의존하는 계급으로 재생산하며, 이들의 평상시 임금은 계급 자체의 유지뿐 아니라 그 증가(차세대)까지 보장한다.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각종 연령의 추가 노동력이 매년 공급되므로, 자본은 단순히 이것을 연간 생산물에 이미 포함된 추가적 생산 수단과 결합시키기만 하면 된다. 이로부터, 잉여 가치의 자본으로 전환이 완성된다. 구체적으로 고찰하면, 자본의 축적은 누진적으로 증가하는 규모로 자본이 재생산된다. 단순 재생산의 순환은 그 형태를 바꾸어 시스몽디의 표현대로, 하나의 나사선으로 전환된다.

 

이제 우리의 예로 다시 돌아간다. 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는 식의 계보와 같다. 최초 자본 10,000원은 2,000원의 잉여 가치를 산출하고, 이 잉여 가치는 자본화된다. 2,000원의 새로운 자본은 다시 400원의 잉여 가치를 가져오며, 이 잉여 가치는 또다시 자본화되어 제2의 추가 자본으로 전환된다. 이것은 다시 80원의 새로운 잉여 가치를 낳는다는 식으로, 이 과정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는 잉여 가치 중 자본가 자신이 소비하는 부분은 무시한다. 또한 추가 자본이 최초 자본과 결합하는지, 또는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기능하는지, 축적된 추가 자본을 자본가가 직접 이용하는지 아니면 타인의 수중으로 넘어가는지 등의 문제 역시 지금은 고찰 대상이 아니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새로 형성된 자본과 함께 최초 자본도 자신의 재생산과 잉여 가치의 생산을 지속한다는 사실이며, 이는 축적된 모든 자본과 그것으로부터 형성된 추가 자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최초 자본 10,000원은 투하로부터 형성되었다. 그 소유자는 이 자본을 어떻게 회득했는가. 정치경제학의 대변자들은 한결같이 자기 자신의 노동과 자기 선조들의 노동으로부터다.”라고 대답한다. 실제로 그들의 이러한 가정은 상품 생산의 법칙과 일치하는 유일한 가정으로 보인다. 추가 자본 2,000원에 관해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그 발생 과정은 아주 정확하게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자본화된 잉여 가치, 곧 잉여 가치가 자본으로 전환된 것이다. 여기에는 처음부터 남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에서 나오지 않는 가치라고는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추가 노동력이 결합되는 생산 수단도, 추가 노동력이 유지되기 위한 생활 수단도, 잉여 생산물, 곧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에게서 매년 빼앗은 공물의 구성 부분에 불과하다. 자본가 계급이 이 공물의 일부로 추가 노동력을 사들일 경우, 그것이 비록 완전한 가격으로부터고, 따라서 등가물과 등가물끼리의 교환일지라도, 이는 결국 (피정복장에게서 약탈한 화폐로 피정복자 자신의 상품을 구매하는) 정복자의 낡은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추가 자본이 자신을 낳은 동일한 노동자를 고용한다면, 이 노동자는 최초 자본을 계속 가치 증식시켜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이 바친 이전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의 생산물(추가 자본)에 대해서도 노동을 추가해야만 한다. 이것을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의 거래로 보더라도, 이전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으로 추가 노동자들이 고용된다 해도, 문제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 자본가는 추가 자본을 기계로 전환시켜, 이 기계가 추가 자본의 생산자를 거리로 내쫓고, 그 대신 몇 명의 아동을 고용할 수도 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노동자 계급은 금년의 자기 잉여 노동으로 다음 해에 추가 노동을 고용한 자본을 생산한다. 이것이 이른바 자본으로 자본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1의 추가 자본 2,000원의 축적은 (자본가의 시초 노동으로부터 자기 것이 된, 그리고 그로부터 투하된) 10,000원의 가치액을 전제한다. 반면, 2의 추가 자본 400원은 오직 이전의 축적 2,000원만을 전제할 뿐이며, 이것이 낳은 잉여 가치가 자본으로 전환된 것이 바로 제2의 추가 자본 400원이다. 과거 지불받지 않은 노동의 소유가 이제는 끊임없이 증대되는 규모의 살아 있는 지불받지 않는 노동의 취득을 위한 유일한 조건이 된다. 자본가가 이미 축적한 것이 많을수록, 그만큼 그는 더 많이 축적할 수 있다. 1의 추가 자본을 이루는 잉여 가치가, 최초 자본의 일부가 노동력을 구매한 결과이며, 이 구매가 상품 교환의 법칙에 순응하는 한, 그리고 법률적 관점에서 이 구매가 노동자 측에서는 자기 노동력에 대한, 화폐 또는 상품 소유자 측에서는 자기가 가진 가치에 대한 자유로운 처분권을 전제할 따름인 한, 또 제2, 3 등의 추가 자본이 제1의 추가 자본의 단순한 결과이며, 최초 관계의 결과인 한, 더욱이 각 개별 거래가 상품 교환의 법칙에 따라 진행되어, 자본가는 항상 노동력을 구매하고, 노동자는 항상 그것을 판매하며, 이 매매가 노동력의 진정한 가치대로 이루어지는 한, 상품 생산과 상품 유통에 기초를 둔 취득의 법칙, 곧 사적 소유의 법칙은 자기 자체의 내부적인 불가피한 변증법으로부터 그 정반대로 전환된다는 점은 명백하다.

 

우리가 시작했던 최초의 작업인 등가물과 등가물 사이의 교환은 완전히 달라져 오직 외관상의 교환으로 변질되었다. 첫째, 교환으로부터 노동력을 얻는 자본 그 자체가 등가물 없이 취득한 타인 노동의 생산물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 자본을 노동자가 대체해야 할 뿐 아니라 잉여물을 첨가하여 대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교환 관계는 유통 과정에 속하는 단순한 겉모습일 따름이며, 거래 자체의 내용과는 관계가 없고 도리어 그것을 모호하게 할 뿐인 단순한 형태에 불과하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노동력의 매매는 단순한 형태이며, 그 내용은 자본가가 이미 대상화된 타인 노동의 일부를 아무런 등가물도 지불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취득하고, 그것을 더 많은 양의 살아 있는 타인 노동과 끊임없이 교환한다는 점이다.

 

최초에는 소유권이 한 인간 자신의 노동에 토대를 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이와 같이 가정해야 했다. 시장에서는 오로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상품 소유자들이 서로 마주하며, 남의 상품을 취득하는 수단은 오직 자기 자신의 상품을 양도하는 것뿐이고, 이 자기 자신의 상품을 얻는 유일한 길은 노동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유는 이제 자본가 측에서는 타인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 또는 그 생산물을 취득하는 권리로 변모하며, 노동자 측에서는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취득하지 못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로부터 노동과 소유의 분리는 노동과 소유의 동일성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는 법칙의 필연적 결과가 된다.

 

[엥겔스: 이하는 마르크스가 불어판에 넣은 내용을 바탕으로 엥겔스가 제4독어판에 추가한 내용이다. CW 35(Progress Publishers, 1996)에는 이 추가분 전체가 CW 편집자의 실수로 빠져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취득 방식은 아무리 상품 생산의 최초 법칙들과 모순되는 듯 보이더라도, 이 취득 방식은 결코 이 법칙들을 위반한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들을 적용한 데서 나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축적을 중점으로 하는 운동의 순차적 국면들을 간단히 돌이켜보면서 이 점을 다시 한번 명백하게 한다. 처음에 우리가 보았듯이, 일정한 가치액이 자본으로 최초로 전환한 것은 교환 법칙에 따라 완전히 수행되었다. 한쪽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다른 쪽은 그것을 구매한다. 전자는 자기 상품의 가치를 받으며 그 상품의 사용 가치, 곧 노동을 후자에게 양도한다. 그러면 후자는 이미 자신이 소유하던 생산 수단을 (역시 그의 소유 하에 있는) 이 노동으로부터 새로운 생산물로 전환시키는데, 이 새로운 생산물도 역시 법적으로 그의 것이다.

 

이 생산물의 가치는 첫째로, 소모된 생산 수단의 가치를 포함한다. 유용 노동은 이 생산 수단의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하지 않고서는 이 생산 수단을 소모할 수 없다. 그런데 노동력이 판매되려면 그것을 사용하게 될 공업 부문에 유용 노동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새로운 생산물의 가치는 노동력 가치의 등가와 잉여 가치를 포함한다. 그 이유는 일정한 기간(하루, 한 주 등) 판매된 노동력의 가치는 그 기간에 이 노동력의 사용으로부터 생산된 가치보다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력의 교환 가치를 지불받았고, 그에 따라 그 사용 가치를 양도했는데, 이 점은 다른 모든 매매에서와 마찬가지이다.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이 (노동을 제공하며 따라서 가치를 생산하는) 독특한 사용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은 상품 생산의 일반 법칙에 결코 저촉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임금으로 투하된 가치액이 생산물에 단순히 재현될 뿐 아니라 잉여 가치만큼 증식되어 나타난다면, 이것은 판매자가 사기를 당했다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판매자는 자기 상품의 가치를 실제로 받았음), 오로지 구매자로부터 이 상품이 소비되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교환 법칙은 서로 교환되는 상품들의 교환 가치의 평등만을 요구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것들의 사용 가치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며, 그것들의 소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소비는 거래가 완전히 끝나고 집행된 뒤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따라서 화폐가 자본으로 최초로 전환하는 일은 상품 생산의 경제 법칙 및 이 법칙에서 나오는 소유권과 가장 정확하게 일치하여 수행된다. 그럼에도, 그 전환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1. 생산물은 노동자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에게 속한다.

 

2. 이 생산물의 가치에는 투하 자본의 가치 외에 잉여 가치가 포함되는데, 이 잉여 가치의 생산을 위해 노동자는 노동을 했으나 자본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잉여 가치는 자본가의 합법적 소유가 된다.

 

3.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유지했으므로, 구매자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을 다시 판매할 수 있다.

 

단순 재생산은 이 첫 번째 활동의 주기적 반복에 불과하며, 그때마다 화폐는 새로이 자본으로 전환된다. 그래서 여기서는 법칙이 위반되지 않고 도리어 계속 작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시스몽디가 언급한대로,

 

몇 번의 순차적인 교환 행위들은 최후의 교환이 최초의 교환을 표현하도록 했을 따름이다.’

 

또 그럼에도, 단순 재생산은 이 첫 번째 활동을 고립된 과정으로 고찰하지 않는 한, 그것에 전혀 다른 성격을 충분히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본 바 있다.

 

국민 소득의 분배에 참여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한쪽(노동자들)은 매년 새로운 노동을 수행하면서 자기들 몫에 대한 새로운 권리를 얻으며, 다른 한쪽(자본가들)은 시초의 노동으로부터 자기들 몫에 대한 영원한 권리를 이미 획득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노동의 영역은 예수가 이 기적을 행하는 유일한 영역은 아니다.

 

단순 재생산이 확대된 규모의 재생산, 곧 축적으로 교체되어도 사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전자의 경우, 자본가는 잉여 가치 전부를 탕진하지만, 후자의 경우, 잉여 가치의 일부만을 소비하고, 나머지는 화폐로 전환시키면서(보유하면서) 자신의 부르주아적 미덕을 입증한다.

 

잉여 가치는 자본가의 소유이며 다른 누구에게도 속한 일이 없다. 그가 그것을 생산에 투하한다면, 그는 (시장에 처음 나타난 날에 한 바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재원에서 투하한다. 이 경우, 그의 재원이 노동자들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사태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노동자 A가 생산한 잉여 가치로 노동자 B에게 지불하더라도, 첫째로, A는 자기 상품의 정당한 가격을 한푼도 에누리 없이 전부 받고 이 잉여 가치를 제공했기 때문이며, 둘째로, 이 사실은 노동자 B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B가 요구하는 것은, 또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은, 오직 자본가가 자기에게 노동력의 가치를 지불해야 한다는 점뿐이다.

 

그래도 이 둘은 이익을 보았다. 노동자가 이익을 본 것은 자기의 노동이 수행되기 전, 곧 열매를 맺기 전에 자기의 노동 (다른 노동자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의 열매가 자기에게 지불되었기 때문이고, 고용주가 이익을 본 것은 이 노동자의 노동이 그의 임금보다도 더 값어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의 가치보다도 더 많은 가치를 생산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을 그 갱신의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고찰하고, 개별 자본가와 개별 노동자 대신 그들의 총체, 곧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서로 마주한다고 고찰한다면, 사태가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우리는 상품 생산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기준을 적용하는 셈이 된다.

 

상품 생산에서는 상호 독립적인 판매자와 구매자가 서로 마주한다. 그들 간의 모든 관계는 그들이 체결한 계약의 만기일이 되면 중단된다. 거래가 반복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전의 계약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새로운 계약으로부터 반복되며, 그 새로운 계약에서 동일한 구매자와 동일한 판매자가 다시 만나는 일은 우연에 불과하다. 상품 생산 또는 이에 속하는 과정을 자체적인 경제 법칙에 따라 판단하려면, 개별 교환 행위를 전후 교환 행위들과의 모든 관련을 제외하고 개별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매매는 오직 특정 개인들 사이에서만 진행되므로, 거기에서 전체 사회 계급들 사이의 관계를 찾는 일은 허용될 수 없다.

 

현재 기능하고 있는 자본이 통과해 온 주기적 재생산과 그것에 선행하는 축적의 계열들이 아무리 길다 하더라도, 이 자본은 언제나 자기 시초의 순수성을 보존한다. 교환 법칙이 (개별적으로 본) 각각의 교환 행위에서 준수되는 한, 취득 방식은 상품 생산에 상응하는 소유권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고 완전히 변혁될 수 있다. 이 동일한 소유권은 시초에도 그리고 자본주의 시대에도 효력을 보존하는데, 시초에는 생산물이 생산자에게 속하며, 생산자는 등가물과 등가물을 교환하고 자기 자신의 노동으로부터만 부유해질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대에는 점점 더 많은 사회적 부가 (타인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을 끊임없이 새로 취득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소유로 된다. 이러한 결과는 노동자 자신이 노동력을 상품으로 자유로이 판매하게 되자마자 불가피하게 된다. 바로 이 순간부터 비로소, 상품 생산은 보편화되며 전형적인 생산 형태로 자리 잡는다. , 이때부터 모든 생산물은 처음부터 판매를 위해 생산되며, 생산되는 부 전체가 유통 영역을 통과한다. 임금 노동이 상품 생산의 토대로 될 때에야 비로소, 상품 생산은 자신을 전체 사회에 강요하며, 그때에 비로소 자기의 잠재력을 전부 발휘한다.

 

임금 노동의 개입이 상품 생산을 불순하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상품 생산이 불순하게 되지 않으려면 발전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상품 생산이 그 자체의 내재적 법칙으로부터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전환되는 정도에 따라, 상품 생산의 소유 법칙은 변증법적 역전을 겪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자본주의적 취득 법칙으로 전환된다. 단순 재생산의 경우에도, 모든 자본은 그 최초 기원과 무관하게 축적된 자본 (곧 자본화한 잉여 가치)으로 전환된다는 점을 보았다. 그러나 생산의 홍수 속에서 최초의 총 투하 자본은 직접적으로 축적된 자본 (곧 자본으로 재전환된 잉여 가치 또는 잉여 생산물)과 비교하면 극소량이다. 이것은 최초 투하 자본이 그 축적자의 수중에서 기능하든 타인의 수중에서 기능하든 마찬가지다. 따라서 정치경제학은 자본 일반을 가리켜 잉여 가치의 생산을 위해 다시 사용될 축적된 부’ (전환된 잉여 가치 또는 수입)라고 말하며, 자본가를 잉여 가치의 소유자라고 말한다. 현존하는 자본 전체를 축적된 또는 자본화된 이자라고 보는 견해는 동일한 견해를 다른 형식으로 표현할 뿐이다. 이자는 잉여 가치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4-2. 확대 재생산에 관한 정치경제학의 잘못된 견해

 

축적(곧 잉여 가치가 자본으로 재전환하는 것)에 관한 더 깊은 연구에 앞서, 고전파 경제학이 도입한 하나의 모호한 점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자본가가 잉여 가치의 일부로 자기 자신의 소비를 위해 구매하는 상품이 자신의 생산 수단이나 가치 증식 수단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천성적·사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구매하는 노동도 생산적 노동이 아니다. 자본가는 그런 상품과 노동을 구매하면서 잉여 가치를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잉여 가치를 수입으로 소비하거나 지출한다. (헤겔이 적절하게 말했듯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소비해 버리는’, 특히 몸종 고용의 사치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옛 봉건 귀족들의 일상적 생활 방식에 반대하여, 부르주아 경제학이 자본의 축적을 시민의 첫째 의무라고 선포하고, 추가적인 생산적 노동자들 (이들은 투입 비용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을 고용하는 데 수입의 상당 부분을 지출하지 않고 자기 수입을 전부 소비하는 사람은 축적할 수 없다고 끈기 있게 설교한 일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다른 한편으로, 부르주아 경제학은 자본주의적 생산을 퇴장 화폐의 형성과 혼동하는, 따라서 축적된 부를 현재의 현물 형태가 파괴되지 않은 부(곧 소비되지 않은 부) 또는 유통에 들어가지 않은 부라고 여기는 세속적인 편견과 투쟁해야 했다. 화폐를 유통에서 배제하는 일은 화폐가 자본으로 가치 증식하는 일을 배제하며, 상품을 퇴장시켜 축적하는 일은 완전히 무의미한 일이다. 사실상 대량의 상품 축적은 유통의 정체 또는 과잉 생산의 결과이다.

 

위와 같은 세속적 편견은 한편으로, 부자들이 점차적으로 소비하기 위해 쌓아 둔 재화의 양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생산 양식에 공통적인 재고의 형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이에 관해서는, 유통 과정을 분석할 때 다시 언급한다. 따라서 고전파 경제학이 비생산적 노동자가 아니라 생산적 노동자가 잉여 생산물을 소비하는 일을 축적 과정에서 특징적 계기로 강조하는 것은 매우 정당하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오류도 시작된다. 애덤 스미스는 축적을 단순히 잉여 생산물을 비생산적 소비 대신 생산적 노동자 고용에 사용하는 과정으로 묘사한다. 곧 이러한 관점은 잉여 가치의 자본화를, 단순히 잉여 가치를 노동력으로 전환하는 행위와 동일시하여 설명한다. 예를 들어, 리카도,정치경제학 및 과세 원리의 말을 들어보자.

 

한 나라의 모든 생산물들은 소비된다. 하지만 그 생산물이 추가적 가치를 재생산하는 주체로부터 소비되는지, 아니면 가치 재생산에 전혀 기여하지 않는 주체로부터 소모되는지가 가장 중대한 결과를 결정한다. 수입이 저축되어 자본에 추가된다는 것은, 해당 수입 부분이 비생산적 노동자가 아닌 생산적 노동자로부터 소비된다는 의미다. 자본이 소비하지 않음으로 증가한다는 가정보다 더 큰 오류는 없다.’

 

리카도와 그 뒤의 모든 정치경제학자들이 애덤 스미스를 따라 되풀이하는 주장, 수입 중 자본에 추가되는 부분은 생산적 노동자로부터 소비된다.’는 주장보다 더 큰 오류는 없다. 이 관념에 따르면, 자본으로 전환되는 전체 잉여 가치는 가변 자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 역시 시초에 투하된 가치와 마찬가지로 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 곧 생산 수단과 노동력으로 분할된다.

 

노동력은 가변 자본이 생산 과정에서 취하는 형태이다. 이 생산 과정에서 노동력 자체는 자본가로부터 소비되며, 생산 수단은 노동력의 기능(곧 노동)으로부터 소비된다. 동시에 노동력의 구매에 지출된 화폐는 생활 수단으로 전환되는데, 이 생활 수단은 생산적 노동이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 노동자가 소비한다.

 

애덤 스미스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자신의 분석으로부터, 각 개별 자본은 불변적 구성 부분과 가변적 구성 부분으로 분할되지만, 사회의 자본(전체)은 전적으로 가변 자본으로만 분해될 수 있으며, 따라서 사회의 자본은 전부 임금으로만 지출된다는 엉터리 결론에 이른다. 예를 들어, 직물 공장주가 2,000원을 자본으로 전환시킨다고 가정한다. 그는 이 화폐의 일부를 직조공의 고용에 지출하고, 나머지를 실, 기계 등의 구입에 지출한다. 그런데 그에게 실과 기계를 판매한 사람도 판매 대금의 일부를 다시 노동에 지불한다. 이렇게 소급해 가면, 결국 2,000원 전부가 임금으로만 지출된다. 2,000원이 대표하는 생산물 전부가 생산적 노동자로부터 소비된다. 보는 바와 같이, 이 논증의 핵심은, “이렇게 소급해 가면이라는 말 한 마디에 있는데, 이 말은 논리가 순환한다. 사실 애덤 스미스는 연구가 곤란하게 되기 시작한 바로 그 곳에서 연구를 중단한다.

 

연간 총생산물만 고찰할 경우, 연간 재생산 과정은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연간 생산물의 모든 구성 부분이 상품으로 시장에 나와야 하며, 난점은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개별 자본이나 개인 수입의 운동은 하나의 일반적 위치 교대 (곧 사회적 부의 유통) 속에서 교차되고 뒤섞여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사람들을 혼동시키고, 해결해야 할 매우 복잡한 문제를 연구 과제로 제기한다. 필자는 제2권 제3편에서 전체 체계가 실제로 어떻게 상호 관련을 맺는지를 분석한다. 중농주의자들이 그들의경제표에서 연간 생산을 (유통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 처음 묘사하려고 시도한 일은 그들의 큰 공적이다. 또한 정치경제학이, 순생산물 중 자본으로 전환되는 부분은 전부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소비된다는 애덤 스미스의 명제를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위해 활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24-3. 잉여 가치 분할과 절욕설

 

기존 논의는 잉여 가치 또는 잉여 생산물을 자본가의 개인적 소비 재원 또는 축적 재원 중 어느 한 측면에서만 다루었다. 그러나 잉여 가치는 이 두 측면을 동시에 포괄하는 개념이다. 잉여 가치의 특정 부분은 자본가의 수입으로 전환되어 소비되며, 잔여 부분은 자본으로 투입되어 축적된다. 이 두 부분 중 하나가 적을수록, 다른 부분은 그만큼 더 커진다. 이는 잉여 가치의 양이 일정할 때 성립하는 관계다.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이 분할의 비율이 축적의 크기를 결정한다. 이 분할은 잉여 가치 소유자, 곧 자본가의 의지 행위로 이루어진다. 그가 거두어들인 공물(잉여 가치) 중 축적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가 그것을 소비하지 않고 자본가로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며 스스로 부를 늘려가기에 절약한다고 표현한다.

 

자본가는 인격화된 자본으로만 역사적 가치와, 리히노브스키의 실언(‘인명해설참조)을 빌려 유효 기간이 없는 것은 아닌역사적 생존권을 지닌다. 오직 이러한 측면에서만, 그의 일시적 존재의 필연성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더 높은 사회로 이행할 필연성에 포함된다. 자본이 인격화된 존재인 한, 그의 활동 동기는 사용 가치의 획득과 향락이 아니라 교환 가치의 획득과 증식이다. 그는 가치 증식을 열광적으로 추구하며, 인류에게 무자비하게 생산을 위한 생산을 강요한다. 따라서 자본가는 사회 생산력의 발전과, (각 개인에게 최대한의 자유로운 발달을 기본 원칙으로 삼는) 더 높은 사회 형태의 유일한 현실적 토대로 될 수 있는, 물질적 생산 조건의 생산에 박차를 가한다. 자본의 인격화로만 자본가는 존경받으며, 이로 인해 절대적 치부욕을 수전노와 일치한다.

 

수전노의 경우는, 개인적 열광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자본가의 경우는 사회적 기구(여기서 자본가는 하나의 나사에 불과)의 작용으로 발현한다. 더욱이, 자본주의적 생산 발전은 개별 사업에 투하되는 자본액을 끊임없이 증대시키도록 강제하며, 경쟁은 이 생산 양식의 내재적 법칙을 각 자본가에게 외적인 강제 법칙으로 강요한다. 경쟁은 자본가로 하여금 자본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확대하도록 압박하며, 이는 오직 누진적 축적으로부터만 달성된다.

 

자본가의 모든 행동은 (그에게 의지와 의식을 부여받은) 자본의 기능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자신의 개인적 소비는 자기 자본 축적에 대한 약탈로 간주된다. 이는 복식부기에서 자본가의 사적 지출이 자본의 반대편(차변)에 기입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축적은 사회적 부의 세계를 정복하고, 착취당하는 인간의 수를 확대하며, 동시에 자본가의 직접적·간접적 지배를 확장하는 행위다. 그러나 원죄는 도처에서 작용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발전하고 축적과 부가 증대함에 따라, 자본가는 자본의 단순한 화신이 아니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아담(욕망)에 대해 인간적 공감을 느끼기 시작하며, 교육으로부터 금욕주의에 대한 이전의 열정을 고루한 수전노의 편견으로 치부할 수 있게 된다. 고전적 자본가는 개인적 소비를 신성한 직분에 어긋나는 죄악이자 축적을 끊는 것으로 낙인찍지만, 근대적 자본가는 축적을 향락의 절제로 여길 수 있다.

 

아아. 그대의 가슴에는,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그런데 그들은 항상 떨어지려 하고 있구나.’

 

[ 괴테,파우스트]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역사적 새벽, 벼락부자가 된 개별 자본가는 이 단계를 개별적으로 통과하는 동안 치부욕과 탐욕이 지배적인 열정이 된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향락의 세계를 창조할 뿐 아니라, 투기와 신용 제도의 형태의 많은 벼락부자 원천을 개발한다. 일정한 수준의 발전에 이르면, 어느 정도의 낭비는 부의 과시와 신용 획득 수단이 되며, ‘운이 나쁜자본가에게는 사업상의 필요로까지 변한다. 사치는 자본의 교제비에 포함된다. 더욱이 자본가는 수전노처럼 자신의 개인적 노동이나 소비 삭감에 비례해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노동력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짜내는지, 그리고 노동자에게 생활상의 모든 쾌락 포기를 얼마나 강요하는지에 비례해 부유해진다. 따라서 자본가의 낭비는 호탕한 봉건 영주의 낭비가 지닌 솔직한 성격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그 이면에는 언제나 가장 더러운 탐욕과 세심한 타산이 숨어 있다. 그럼에도, 자본가의 낭비는 그의 축적을 방해하지 않고, 축적의 증대와 더불어 증대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자본가의 심중에는 축적욕과 향락욕 사이의 파우스트적 갈등이 전개된다.

 

1795년 애이킨이 발표한 저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맨체스터의 공업은 네 시기로 구분한다. 1기에 공장주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노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주로 도제의 부모(공장주에게 자기 아동들을 맡기며 큰 금액의 수업료를 지불한)를 강탈해 치부했으며, 물론 도제들은 굶주렸다. 다른 한편으로, 평균 이윤이 낮았기 때문에 축적하려면 대단한 절약이 필수였다. 그들은 수전노와 마찬가지로 생활했으며, 심지어 자기 자본에 대한 이자까지도 소비하지 않았다.

 

2기에는 그들이 약간의 재산을 얻기 시작했으나, 이전처럼 열심히 노동했으며 (이는 노예 감시자들이 아는 것처럼 노동을 직접 착취하는 데 노고가 들기 때문), 이전처럼 검소하게 생활했다. 3기에는 사치가 시작되었고, 사업은 영국 내 모든 상업 도시로 주문을 받기 위해 말을 탄 사람을 파견하며 확대되었다. 1690년 이전에는 공업에서 획득한 자본이 3,000파운드 내지 4,000파운드에 달한 적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대략 이 시기 또는 이보다 조금 늦게, 공장주들은 이미 화폐를 축적했고, 목조 가옥이나 토담집 대신 근대적 벽돌집을 짓기 시작했다.’

 

18세기 초에도 맨체스터의 한 공장주는 손님들에게 1파인트(0.57리터)의 외국제 포도주를 대접했다는 이유로, 모든 이웃에게 혹평과 비난을 받았다. 기계제 생산 출현 이전, 공장주들이 저녁에 만나는 술집에서 지출하는 비용은 펀치주 한 잔 값인 6펜스, 잎담배 한 봉지 값인 1페니를 넘지 않았다. 획기적인 해인 175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실제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 중 자기 자신의 마차를 가진 사람이 단 한 명 목격되었다. 18세기 마지막 30년인 4기는 유럽 전체에 걸친 사업 확장으로 인한 대단한 사치와 낭비의 시기였다.’ 선량한 애이킨이 다시 살아나 오늘날의 맨체스터를 본다면, 그는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이며, 예언자들이다! (가장 중요한 계율이다!) ‘근면은 재료를 제공하고, 절약은 그것을 축적한다.’ 그러므로 절약하라, 절약하라! 다시 말해, 잉여 가치 또는 잉여 생산물 중 최대한의 부분을 자본으로 재전환하라! 축적을 위한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 이 공식으로, 고전파 경제학은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표현했다.

 

고전파 경제학은 부의 출산 진통이 무엇인지 한 순간도 잘못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필연성이기에, 한탄한들 소용없다. 고전파 경제학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기계의 의의밖에 없다면, 자본가 또한 이 잉여 가치를 추가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기계의 의의밖에 없다. 고전파 경제학은 자본가의 역사적 기능을 진지하게 취급한다.

 

자본가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향락욕과 치부욕 사이의 불행한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1820년경 맬더스는, 축적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생산에 종사하는 자본가가 담당하고, 낭비하는 일은 잉여 가치 분배에 참여하는 기타 사람들, 곧 토지 귀족이나 관리, 목사 등이 담당하는 분업을 제창했다. 그는 지출욕과 축적욕을 분리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미 오래전에 향락가이자 사교가가 되어버린 자본가들은 불평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대변자인 리카도 학파의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맬더스가 높은 지대, 높은 세금 등을 설교하는 것은 근면한 사람들에 대한 비생산적 소비자들의 압력으로부터 그들의 근면을 계속 자극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생산, 끊임없이 확대된 규모의 생산을 구호로 내걸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방식으로는 생산이 촉진되기는커녕 오히려 저해된다. 또한 다른 이들을 자극하기 위해, 상당수의 사람들, 그들의 성격상 일을 잘 해낼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일단의 사람들을 무위도식하게 만드는 일은 전혀 공정하지 못하다.’

 

그러나 그는 산업 자본가들의 빵에서 버터를 빼내면서 그들에게 축적에 대한 자극을 주는 일은 불공정하다고 보면서도, ‘노동자를 근면하게 만들기 위해임금을 최저 한도까지 억누르는 일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또한 이윤 획득의 비밀이 지불받지 못한 노동의 취득에 있다는 것을 조금도 감추지 않는다.

 

노동자 측의 수요가 증가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들이 자신들의 생산물 중 자신들을 위해서는 더 적은 몫을, 고용주에게는 더 큰 몫을 제공하려는 의향 이외의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경우, 노동자들의 소비 감소로부터 공급 과잉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공급 과잉은 높은 이윤과 동의어일 뿐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노동자들에게 탈취한 획득물을 산업 자본가와 무위도식하는 토지 소유자 사이에 어떻게 분배해야 축적에 유익할지 논하는 학문적 다툼은 7월 혁명(1830)에 직면해 잠잠해졌다. 그 직후, 리옹의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의 경종을 울렸고, 영국의 농촌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장과 곡식 더미에 불을 질렀다.

 

해협 이편에서는 오언주의가, 저편에서는 생시몽주의·푸리에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속류 경제학의 시기가 도래했다. 맨체스터에서 시니어가 자본에 대한 이윤(이자를 포함)‘12시간 노동 중 최후의 한 시간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을 발견한 바로 1년 전, 그는 또 다른 발견을 세상에 공표했다. 그는 거만하게,

 

나는 (생산 도구로 여겨지는) 자본이라는 말을 절욕이라는 말로 바꾼다.’

 

고 말했다. 이야말로, 속류 경제학 발견의 기막힌 견본이다!

 

속류 경제학은 경제학적 범주를 아첨꾼의 문구로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시니어는,

 

야만인이 활을 만든다면, 그는 하나의 근로에 종사하는 것이지 절욕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한다. 이는 초기 사회 상태에서 노동 수단이 자본가의 절욕 없이어떻게 그리고 왜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하려는 시도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사회는 그만큼 더 절욕을 요구한다.’는 그의 주장은, 곧 타인의 근로와 생산물을 취득하는 것이 본업인 사람들의 절욕을 그만큼 더 요구한다는 의미다. 이로부터 노동 과정을 위한 모든 조건들은 그때부터 자본가의 그만한 수의 절욕 행위로 전환된다. 곡물이 식량으로 모두 소비되지 않고 일부가 종자로 파종될 수 있는 것조차 자본가의 절욕 때문이라는 것이다.

 

포도주가 발효를 위해 일정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 역시 자본가의 절욕 때문이다. 자본가가 생산 도구를 노동자에게 대부할 때(!), 다시 말해, 증기 기관, 면화, 철도, 비료, 역축 등을 소비해 버리지 않고 (또는 속류 경제학자의 유치한 표현대로, ‘그것들의 가치를 사치품 등의 소비재에 탕진하지 않고), 그것들을 노동력과 결합시켜 자본으로 그 가치를 증식시킬 때, 자본가는 자기 자신을 수탈한다는 것이다. 자본가 계급이 이 과정을 어떻게 실현하는지는 이제까지 속류 경제학이 해명하기를 완강히 거부한 수수께끼다. 여하튼, 세계는 오직 비슈누 신의 현대적 속죄자인 자본가의 자기 고행으로부터 굴러가고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축적뿐 아니라 단순한 자본의 유지조차도 그것을 소비하려는 유혹에 저항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인간의 도리가 명령하는 것은 자본가를 이러한 희생과 유혹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조지아 주의 노예 소유자가 노예제 폐지로부터, 흑인 노예에게 채찍으로 짜낸 잉여 생산물 전부를 샴페인으로 마셔버릴 것인지, 아니면 그 일부를 더 많은 흑인와 토지로 재전환시킬 것인지에 대한 고통스러운 고뇌로부터 해방된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가 된다.

 

사회의 경제적 구성이 아무리 다르더라도, 단순 재생산뿐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확대 재생산은 발생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 많이 생산되고, 더 많이 소비되며, 따라서 더 많은 생산물이 생산 수단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노동자의 생산 수단, 그의 생산물, 그의 생활 수단이 자본의 형태로 그와 대립하지 않는 한, 자본의 축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따라서 자본가의 기능으로도 나타나지 않는다. 헤일리베리 대학 (인도 파견 관리를 양성하는 대학) 정치경제학 교수직에서 맬더스의 후계자였던 수년 전에 세상을 떠난 리처드 존스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에 비추어 이 점을 명확히 설명한다.

 

인도 국민의 대다수는 자작농이므로, 그들의 생산물, 노동 수단, 생활 수단은 결코 타인의 수입으로부터 절약된 재원, 따라서 축적이라는 선행 과정을 통과한 재원의 형태를 띠지 않는다. 다른 한편, 영국의 지배가 낡은 제도를 가장 적게 해체시킨 지방들에서는, ()농업 노동자들이 농업 잉여 생산물의 일부를 공물 또는 지대 형태로 거두어들이는 대영주들에게 직접 고용된다. 이 생산물 일부는 현물 형태로 대영주들이 소비하고, 다른 일부는 노동자들로부터 영주들을 위한 사치품과 기타 소비재로 전환되며, 나머지 부분은 (자기 노동 도구를 소유한) 노동자들의 임금을 이룬다. 이처럼 인도에서는 생산과 확대된 규모의 재생산이 그 기묘한 성인이며, 근심에 잠긴 기사인 절욕하는자본가에게 아무런 개입 없이 진행된다.

   

24-4. 잉여 가치율, 생산성, 자본 구조 및 규모

 

잉여 가치의 자본 및 수입으로 분할 비율이 주어질 경우, 축적 자본의 규모는 잉여 가치 절대량에 명백하게 의존한다. 가령 80%가 자본화되고, 20%가 소비된다고 가정한다면, 잉여 가치 총액이 3,000원인지 1,500원인지에 따라, 축적 자본은 각각 2,400원 또는 1,200원이 된다. 따라서 잉여 가치량을 결정하는 모든 요인은 축적 크기를 결정하는 데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본 장에서는 이 요인들이 축적에 대하여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범위 내에서만 재차 총괄하고자 한다.

 

우리가 상기하듯, 잉여 가치율은 무엇보다 노동력의 착취도에 의존한다. 정치경제학은 이 사실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흔히 노동 생산성 향상으로부터 축적 촉진과 노동자 착취 강화로부터 축적 촉진을 동일시한다. 잉여 가치 생산에 관한 논의에서 우리는 항상 임금이 최소한 노동력의 가치와 같다고 전제해왔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가치 이하로 임금을 강제 삭감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므로, 이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필수적이다. 일정한 한계 내에서 이러한 임금 삭감은 실제로 노동자의 필요 소비 재원을 자본 축적 재원으로 전환시킨다. 존 스튜어트 밀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임금은 어떤 생산력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생산력에 대한 가격일 뿐이다. 임금이 노동 자체와 더불어 상품 생산에 기여하지 못하는 것은, 기계 가격이 기계 자체와 더불어 생산에 기여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동이 구매될 필요 없이 획득될 수 있다면, 임금은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공기만으로 생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어떤 가격으로도 그들을 고용할 수는 없다. (이는 그들이 자본가의 지배를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 비용이 0이라는 점은 수학적 의미에서 극한이며, 끊임없이 접근할 수는 있으나 결코 도달할 수는 없는 지점이다. 자본의 끊임없는 경향은 이 노동 비용을 0의 수준까지 하락시킨다.

 

필자가 자주 인용하는 18세기 저술가인상공업에 관한 논문의 저자는, 영국의 역사적 사명이 영국 노동자들의 임금을 프랑스나 네덜란드 수준까지 떨어뜨리는 것이라 선언하면서, 영국 자본의 내밀한 비밀을 폭로한다. 그는 특히 순진하게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빈민들 (노동자들을 지칭하는 용어)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려 한다면, 그들의 노동 가치는 필연적으로 높게 책정될 수밖에 없다. 제조업 노동자들이 소비하는 브랜디, , , 사탕, 외국산 과일, 강한 맥주, 날염 직물, 담배 등과 같은 그 막대한 사치품들은 주목할 만하다.’

 

이어서 저자는 노샘프턴셔의 한 공장주가 경건한 태도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개탄하는 글을 인용 제시한다.

 

프랑스의 노동 가치가 영국보다 1/3이나 낮은 이유는, 프랑스 빈민들이 열심히 노동하면서도 음식과 의복에서 검소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된 식량은 빵, 과일, 야채, 풀뿌리, 건어 등이다. 그들이 고기를 먹는 일은 매우 드물며, 밀 값이 비쌀 때는 빵마저도 아주 적게 먹는다.’

 

이 공장주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마시는 것은 물 또는 소량의 술에 불과하며, 결과적으로, 지출이 매우 적다. 물론 이러한 상황을 조성하기란 쉽지는 않으나,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므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20년 후, 미국의 사기꾼이자 작위를 수여받은 미국 출신 벤자민 톰슨 (통칭 럼포드 백작)은 동일한 박애주의적 노선을 따르며, 신과 인간에게 큰 만족감을 주었다. 그의평론집은 노동자들의 값비싼 통상적인 음식물을 값싼 대용품으로 대체하는 각종 요리법으로 가득 찬 요리 책이다. 이 경탄할 만한 철학자의 특히 뛰어난 요리법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7.5펜스의 보리 5파운드, 6.25펜스의 옥수수 5파운드, 3펜스의 청어, 1페니의 소금, 1페니의 식초, 2펜스의 후추와 양념을 합산한 총 20.75펜스로, 64명분의 수프를 만들 수 있다. 보리와 옥수수의 평균 가격을 적용할 경우, 1인당 비용은 20온스, 수프 한 그릇당 0.25페니로 낮아진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하면서 식품의 불량화가 심화되었고, 결국 톰슨이 제안했던 이러한 이상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첫 십 년 동안, 잉글랜드의 차지 농업가와 지주들은 농업 노동자들에게 생계 최저 한도 이하의 임금을 지급하고, 그 부족분을 교구의 구호금 형태로 보충하며 절대적인 최저 임금 수준을 실행했다. 당시 잉글랜드의 독베리들 (오만한 상류층)이 임금 수준을 합법적으로제정했을 때 발생한 조롱거리의 한 예는 다음과 같다.

 

‘1795년 버크셔의 지주들이 스핀햄랜드에서 임금 수준을 정하고 있을 때, 그들이 점심 식사를 하는 중이었음에도, 노동자들에게는 점심 같은 것이 필요 없다고 판단했음이 명백하다. 그들은 8파운드 11온스짜리 빵 한 덩어리 값이 1실링일 때, 성인 1인당 주급은 3실링이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후 빵 한 덩어리 값이 1실링 5펜스에 달할 때까지는 임금 수준을 규칙적으로 높일 것이며, 빵 값이 그 이상으로 올라 2실링이 될 때까지는 임금 수준을 규칙적으로 감소시켜, 노동자들의 빵 소비가 종전보다 1/5 감소되도록 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큰 차지 농업가이자 치안 판사, 구빈원 관리자, 그리고 임금 조정 위원인 베네트는 1814년 상원 조사 위원회 앞에서 심문을 받았다.

 

노동자의 하루 노동 가치와 교구의 구호금 사이에 어떤 비율이 준수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렇다. 각 가족의 주당 소득은 1인당 1갤론의 빵 (8파운드 11온스)3펜스에 도달하도록 되어 있다. (명목 임금이 이에 미달하면 그 차액은 교구가 보충한다.) 1갤론의 빵은 1주일 동안 생활을 유지하기에 충분하다고 우리는 판단한다. 3펜스는 의복용으로 지급되며, 교구가 직접 의복을 제공하는 경우에는 이 3펜스를 제외한다. 이러한 관행은 윌트셔 서부 일대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듯하다. 당대의 어떤 부르주아 저술가는 다음과 같이 부르짖는다. “몇 년간 차지 농업가들은 존경할 만한 농촌 사람들이 구빈원을 찾을 수밖에 없게 만들면서 그들을 타락시키고 있다. 차지 농업가는 자신의 이득을 증대시키면서, 노동자에게는 그 어떤 (소비 재원의) 축적도 하지 못하게끔 방해했다.’

 

노동자의 필수 소비 재원을 직접적으로 약탈하는 일이 오늘날 잉여 가치 형성 및 자본 축적 재원 형성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예를 들어, 이른바 가내 공업을 고찰할 때 이미 확인한 바와 같다 (15, 8, 를 참조). 더 많은 사실들은 이후에 논의된다.

 

어느 산업 부문에서든 불변 자본 중 노동 수단으로 구성된 부분은 일정 수의 취업 노동자들에게 충분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취업 노동자 수에 비례하여 증대할 필요는 없다. 가령 어떤 공장에서 100명의 노동자가 하루 8시간 노동하여 800시간의 노동을 제공한다고 가정하자. 자본가가 총 노동 시간을 1.5배 증대시키고자 한다면, 50명의 노동자를 추가로 고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그는 임금 지급뿐만 아니라 노동 수단 구입을 위해서도 더 많은 자본을 투하해야 한다. 이와 달리, 그는 기존의 100명 노동자를 8시간이 아닌 12시간 노동시킬 수 있으며, 이때에는 기존의 노동 수단만으로도 충분하다. 물론 노동 수단이 더 빨리 마모되겠지만, 노동력의 더 큰 발휘로부터 얻어진 추가 노동은 불변 자본의 상응하는 증대 없이도 축적의 실체인 잉여 생산물과 잉여 가치를 증대시킬 수 있다.

 

채취 산업 (: 광업)의 경우, 원료 (노동 대상)는 투하 자본의 구성 부분이 아니다. 이 노동 대상은 과거 노동의 생산물이 아닌 자연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금속 광석, 광물, 석탄, 석재 등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 불변 자본은 거의 전적으로 노동 수단으로 구성되며, 이 노동 수단은 증대된 양의 노동 (: 노동자의 주야 교대제 도입)을 매우 효과적으로 흡수할 수 있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생산물의 양과 가치는 지출된 노동량에 정비례하여 증가한다. 이 산업에서는 생산이 시작된 때와 마찬가지로, 생산물을 생산하는 본원적 두 요인인, 인간과 자연이 자본의 물질적 요소들을 생산하는 요인으로 함께 협력한다. 노동력의 신축성 덕분에, 축적 크기는 불변 자본 규모의 사전적 확대 없이도 확장될 수 있다.

 

농업에서는 종자와 비료의 추가 투하가 없으면 경작지를 확대할 수 없다. 그러나 일단 이들의 투하가 이루어지면, 토지는 순전히 내재적 기능만으로도 생산량을 놀라울 만큼 증대시킨다. 따라서 종전과 같은 수의 노동자가 수행하는 더 많은 양의 노동은 (노동 수단에 대한 새로운 투하 없이도) 토지의 산출량을 증가시킨다. 이것 역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직접적 작용이며, 어떠한 새로운 자본의 개입 없이도 축적을 증대시키는 직접적 원천이 된다. 최종적으로, 진정한 제조업에서는 추가적인 노동이 이에 상응하는 원료에 대한 추가 지출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노동 수단에 대한 추가 지출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채취 산업과 농업이 제조업에 원료와 노동 수단의 원료를 공급하므로, (자본의 추가 지출 없이) 생산된 채취 산업과 농업의 추가적 생산물은 제조업에도 유리하게 작용한다. 일반적 결론은 다음과 같이 도출된다.

 

자본은 부의 두 본원적 생산 요소인 노동력과 토지를 자기와 결합하면서 팽창력을 획득한다. 이 팽창력은 외관상 자본 자신의 크기, 곧 이미 생산된 생산 수단의 가치량으로부터 설정된 한계를 넘어서도록 한다. 결과적으로, 자본은 자신의 축적 요소들을 증대시킨다. 자본 축적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사회적 노동의 생산성 수준이다. 노동 생산성의 상승에 따라 일정한 가치 (곧 일정한 크기의 잉여 가치)를 체화하는 생산물의 양은 증가한다. 잉여 가치율이 불변일 때 (또는 노동 생산성의 상승 속도보다 완만하게 하락할 때조차도), 잉여 생산물의 양은 증대한다. 따라서 잉여 생산물이 수입과 추가 자본으로 분할되는 비율이 불변이라면, 자본가의 소비는 축적 기금의 감소 없이도 증가할 수 있다.

 

자본가에게 있어 축적 재원의 상대적 크기는 소비 재원의 희생 위에서 증대될 수 있으며, 상품 가격 하락 덕분에 종전과 동일하거나 더 많은 양의 소비품을 향유하게 된다. 이미 확인했듯이, 노동 생산성 향상은 노동자의 가치를 하락시키고, 결과적으로, 잉여 가치율을 상승시킨다. 이는 실질 임금이 높아지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실질 임금은 결코 노동 생산성에 비례하여 증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동일한 가변 자본 가치는 더 많은 노동력을, 따라서 더 많은 노동을 착취한다. 동시에 동일한 불변 자본 가치는 더 많은 양의 생산 수단 (노동 수단, 노동 재료, 보조 재료)으로 표현되며, 이는 노동을 흡수하는 요소들을 더 풍부하게 제공한다. 그러므로 추가 자본의 가치가 불변이거나 감소하는 경우에도 축적은 촉진된다. 재생산 규모가 물질적으로 확대될 뿐 아니라, 잉여 가치의 생산은 추가 자본의 가치보다 더욱 급속하게 증대한다.

 

노동 생산성의 증가는 이미 생산 과정에 투입된 최초 자본에도 영향을 미친다. 기능하는 불변 자본의 일부는 기계 등 노동 수단으로 이루어지며, 이는 장기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완전히 소비되거나 대체된다. 그러나 이 노동 수단의 일부는 매년 마멸하여 생산적 기능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매년 주기적 재생산 단계 또는 동종의 신품으로 대체해야 할 단계에 놓인다. 이 노동 수단을 생산하는 부분에서 노동 생산성이 증가한다면 (과학과 기술 발전에 따라 생산성은 끊임없이 증가함), 낡은 기계, 공구, 장치 따위 대신에 더 효율적이면서 (그 증가한 효율성에 비해) 더 값싼 새로운 것들이 도입된다. 현재 사용되는 노동 수단에 대한 끊임없는 세부 개량을 제외하더라도, 낡은 자본은 더 생산적인 형태로 대체된다. 불변 자본의 다른 부분, 곧 원료와 보조 재료는 일 년 중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농업에서 생산되는 재료들은 대부분 일 년에 한 번씩 재생산된다. 따라서 개량된 방법의 도입은 추가 자본과 이미 기능하는 자본에 거의 동시적으로 작용한다.

 

화학의 발전은 유용 물질의 수와 이미 알려진 물질의 유용한 응용을 다양하게 하며, 자본의 증대와 함께 그 투하 분야를 확장시킬 뿐 아니라, 생산 및 소비 과정의 배설물을 재생산 과정 속으로 재투입하면서 자본의 사전 지출 없이 새로운 소재를 창출한다. 노동력의 발휘 강화만으로 자연적 부의 개발이 증대되듯이, 과학과 기술은 자본가에게 (현재 기능하는 자본의 크기와는 관계없이) 확대 능력을 부여한다. 과학과 기술은 또한 갱신 단계에 들어선 최초 자본의 부분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 자본 부분은 새로운 형태를 취하면서 (그 옛 형태가 마모되던 동안 진행된) 사회적 발전을 무상으로 이용한다. 물론 생산성이 이렇게 발전하면, 기능하는 자본의 가치는 부분적으로 감소한다. 경쟁에서 이 가치 감소를 절실히 느끼게 될 경우, 그 주요한 부담은 노동자에게 전가되는데, 이는 자본가가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면서 자신의 손실을 메우려 하기 때문이다.

 

노동은 소비된 생산 수단의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일정한 노동량이 사용하는 생산 수단의 가치와 양은 노동 생산성의 증대에 따라 증가한다. 따라서 동일한 노동량이 그 생산물에 언제나 동일 금액의 새로운 가치만을 첨가하더라도, 생산물에 이전되는 옛 자본 가치는 노동 생산성의 증대에 따라 증가한다. 예를 들어, 영국인 방적공과 중국인 방적공이 동일한 강도로 동일한 시간 노동한다면, 그들은 일주일에 동일한 가치를 생산한다. 그러나 이러한 동등성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자동 장치를 사용하는 영국인의 주 생산물 가치와 물레만을 가진 중국인의 주 생산물 가치 사이에는 막대한 차이가 존재한다. 중국인이 면화 1파운드를 방적하는 동일한 시간에, 영국인은 수백 파운드를 방적한다. 수백 배나 큰 액수의 옛 자본 가치가 영국인 생산물의 가치를 팽창시키는데, 이 옛 자본 가치는 이 생산물에서 새로운 유용한 형태로 재생산되어 자본으로 새롭게 기능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영국 노동 계급의 상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1782년에는 그전 3년 동안 거두어들였던 양모가 (영국에서) 노동자 부족으로 모두 그냥 쌓여 있었는데, 마침 새로 발명된 기계가 그 양모를 처리하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그대로 쌓여 있었을 것이다.’

 

기계 형태로 대상화된 노동은 물론 단 한 명의 새로운 노동자도 직접 생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는 더 적은 수의 노동자로 하여금, 비교적 더 적은 추가적 노동으로 양모를 생산적으로 소비하여 양모에 새로운 가치를 첨가했을 뿐 아니라, 털실 등의 형태로 양모의 옛 가치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결과적으로, 기계는 양모의 확대 재생산을 유도하고 자극했다. 새로운 가치를 첨가하면서 옛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살아 있는 노동의 자연적 속성이다. 따라서 생산 수단의 효율성, 규모, 가치의 증대에 따라, 곧 노동 생산성의 발전과 함께하는 축적에 따라, 노동은 끊임없이 증대되는 자본 가치를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로 유지하고 영원한 것으로 만든다.

 

노동의 이 자연적 능력은 (노동이 결합되어 있는) 자본의 자기 보존 능력으로 비친다. 이는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이 자본의 내재적 속성으로 보이고, 자본가가 잉여 노동을 끊임없이 취득하는 것이, 자본의 끊임없는 자기 증식으로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상품의 모든 가치 형태가 화폐 형태로 외부에 나타나듯, 노동의 모든 힘은 자본의 힘으로 외부에 나타난다. 자본의 증대에 따라, 사용되는 자본과 소비되는 자본 사이의 차액이 커진다. 이는 건물, 기계, 배수관, , 각종 장치와 같은 노동 수단 (장기간에 걸쳐 반복되는 생산 과정에서 기능하거나 특정한 유용 효과를 얻는 데 봉사하는 것들)의 가치량 및 소재량이 증가함을 의미한다. 이 노동 수단들은 점진적으로 마멸되고, 가치를 조금씩 상실하며, 그 가치를 조금씩 생산물로 이전하게 된다. 이 노동 수단들이 생산물에 가치를 첨가하지 않으면서 생산물 형성에 참여하는 정도, 곧 그것들이 전체적으로 사용되면서도, 부분적으로만 소비되는 정도에 따라, 이들은 물, 증기, 공기 등 자연력과 마찬가지로 무료로 봉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살아 있는 노동이 장악하여 활기를 띠게 만든 과거 노동의 이 무료 봉사는 축적의 규모가 증대됨에 따라 증대한다.

 

과거 노동은 언제나 자본으로 변장하며, 예를 들어, 노동자 A, B, C 등의 노동에 대한 부재가 비()노동자 X의 자산으로 변장한다. 이 때문에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과거의 죽은 노동의 봉사를 온갖 말로 찬양하며, 스코틀랜드의 천재 매컬록은 과거 노동에 이자, 이윤 등의 형태로 일정한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결국 생산 수단의 형태로 과거 노동이 살아 있는 노동 과정에 제공하는 끊임없이 증대하는 지원은, 노동자 자신으로부터 착취한 과거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이 취한 형태, 곧 과거 노동의 자본주의적 형태 그 자체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실무자들과 그들의 사상적 대변인들은, 노예 소유자가 노동자 그것을 노예라는 그 성격과 분리시켜 생각할 능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산 수단을 그것이 오늘날 쓰고 있는 적대적인 사회적 가면과 분리시켜 생각할 능력이 없다.

 

노동력의 착취도가 일정하다면, 잉여 가치량은 동시에 착취당하는 노동장의 수로부터 결정되며, 이 노동자 수는 (완전한 정비례 관계는 아니나) 자본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지속적인 축적으로 자본이 증대할수록 (소비 재원과 축적 재원으로 분할되는) 가치량 역시 증대한다. 그러므로 자본가는 더 사치스럽게 소비하면서도 동시에 더 절욕할 수 있다. 결국, 투하 자본량에 따라 생산 규모가 확대될수록, 생산의 모든 추진력은 그만큼 더욱 탄력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24-5. 노동 기금

 

이 연구 과정에서 명확히 되었듯, 자본은 고정적 크기가 아닌, 잉여 가치가 수입 및 추가 자본으로 어떻게 분할되는지에 따라 끊임없이 변동하는 사회적 부의 탄력적인 일부이다. 나아가, 기능하는 자본 규모가 일정할지라도, 자본에 결합된 노동력, 과학, 토지 (토지는 자연이 인간 개입 없이 제공하는 모든 노동 대상을 의미)는 자본의 탄력적 힘을 형성하여, 일정한 한계 내에서 자본 자체의 크기와 무관하게 그 작용 범위를 확대한다. 다만, 동일한 자본량을 상이한 정도로 작용시키는 유통 과정의 제반 사정(: 자본 회전 시간의 단축)은 논의에서 제외하였다. 더불어, 순전히 자연 발생적으로 발달·발전한 사회적 생산 과정인 자본주의적 생산의 한계성을 전제하면서, 현존하는 생산 수단과 노동력을 가지고 직접적·계획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보다 합리적인 온갖 결합 또한 논의에서 제외하였다.

 

고전파 경제학은 항상 사회적 자본을 고정된 능률을 지닌 고정적 크기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편견은 19세기 천박한 부르주아적 지성, 곧 무미건조하고, 현학적이며, 수다스러운 철학자 제레미 벤담으로부터 비로소 하나의 교리로 확립되었다. 벤담이 철학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마틴 터퍼가 시인들 사이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같으며, 두 인물 모두 영국에서만 배출될 수 있었다. 벤담의 교리로는 생산 과정의 갑작스러운 확장과 수축, 그리고 축적과 같은 가장 평범한 현상들조차 전혀 설명할 수 없다. 이 교리는 벤담 자신을 비롯하여, 맬더스, 제임스 밀, 매컬록 등이 변호론적 목적, 특히 가변 자본(노동력으로 전환될 수 있는 자본)을 자본의 일부인 동시에 고정된 크기로 묘사하기 위해 악용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교리로부터, 가변 자본의 소재적 존재(, 가변 자본이 노동자들을 위해 나타내는 생활 수단의 양) 또는 이른바 노동 기금은 사회적 부 중 자연 법칙으로부터 고정되어 변경될 수 없는 특수 부분으로 격상되었다.

 

불변 자본(소재적 형태로는 생산 수단)으로 기능해야 할 사회적 부의 일부분을 가동시키기 위해서는 생산 기술로부터 규정되는 일정량의 살아 있는 노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노동량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노동자의 수는 개별 노동력에 대한 착취도의 변화에 따라 변동하므로 일정하지 않다. 또한 이 노동력의 가격 역시 대단히 탄력적인 최저 한도만 정해져 있을 뿐 일정하지 않다. 따라서 그 교리가 의거하는 사실들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한편으로, 노동자들은 사회적 부를 (비노동자들을 위한) 향락 수단과 생산 수단으로 분할하는 과정에 개입할 권리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는 운수가 좋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부자들의 수입을 희생하여 이른바 노동 기금을 확대할 수 있다. 노동 기금의 자본주의적 한계를 그것의 성질에 따른 사회적 한계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무의미한 동어 반복에 불과한지 포세트의 예는 명확히 보여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한 나라의 유동 자본은 그 나라의 노동 기금이다. 따라서 각 개별 노동자가 받는 평균 화폐 임금을 계산하려면, 이 자본을 노동자의 수로 나누기만 하면 된다.’

 

먼저 실제로 지급된 모든 개별 임금액을 합산하고, 그 합계가 신과 자연의 은총으로 허락된 노동 기금의 총가치라고 주장하며, 최종적으로, 이 총액을 노동자 수로 나누어 개별 노동자에게 평균적으로 지급될 수 있는 금액을 재차 산출한다. 이것은 매우 교활한 수법이지만, 포세트는 서슴없이 논지를 계속한다.

 

영국에서 매년 저축되는 전체 부는 두 부분, 곧 공업 유지를 위한 자본과 외국으로 수출되는 부분으로 나뉘며, 이 나라에서 저축되는 부 중 극히 일부만이 우리 자신의 공업에 투자될 뿐이다.’

 

결과적으로, 영국 노동자들로부터 등가물의 지급 없이 착복되는 매년 증가하는 잉여 생산물의 대부분은 영국이 아닌 외국에서 자본으로 활용된다. 이와 같이 수출된 추가 자본과 더불어, 신과 벤담이 발명한 노동 기금의 일부 역시 외국으로 유출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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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자본의 축적 과정

 

23장. 단순 재생산

 

생산 과정의 사회적 형태와 관계없이, 생산 연속적인 흐름이며 주기적으로 동일한 국면들을 끊임없이 관통한다. 사회가 소비를 중단할 수 없듯, 생산 역시 중단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사회적 생산 과정을 연속된 전체, 곧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흐름으로 고찰할 때, 이는 동시에 재생산 과정이다.

 

생산의 조건은 곧 재생산의 조건이다. 어떤 사회든 생산물의 일정 부분을 지속적으로 생산 수단이나 새로운 생산 요소로 재전환하지 않고서는 생산을 지속할 수 없다. 다른 사정의 변화가 없다면, 사회가 자기 부를 기존 규모로 유지하거나 재생산하기 위해 연간 소비된 생산 수단(노동 수단, 원료, 보조 재료)은 같은 양의 신품으로 보충되어야 한다. 이에 해당하는 양은 연간 생산량에서 분리되어 다시 생산 과정으로 투입된다. 따라서 연간 생산물의 특정량은 생산 자체를 위한 것이다. 처음부터 생산적 소비로 예정된 이 부분은 생산물 성질상 개인적 소비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은 현물 형태로 존재한다.

 

생산이 자본주의적 형태를 취하면, 재생산 또한 같은 형태를 취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서 노동 과정이 가치 증식 과정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듯, 재생산 역시 투하된 가치를 자본, 곧 가치 증식하는 가치로 재생산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이가 자본가라는 경제적 임무를 맡는 것은 오직 그가 가진 화폐가 끊임없이 자본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00원의 화폐액이 금년에 자본으로 전환되어 20원의 잉여 가치를 생산했다면, 이는 내년에도, 그 후년에도 동일한 활동을 반복해야 한다. 자본 가치의 주기적 증가분이거나 과정 진행 중인 자본의 주기적 열매인 잉여 가치는 자본에서 생기는 수입의 형태를 취한다. 이 수입이 자본가에게 소비 재원으로만 이용되어 손에 들어오는 대로 주기적으로 소비된다면, 다른 조건이 같은 경우 단순 재생산이 일어난다. 단순 재생산은 이전과 같은 규모에서 생산 과정이 반복되는 것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단순한 반복성 또는 연속성은 생산 과정에 새로운 특징을 부여하거나, 고립된 과정인 듯 보이던 외관상의 일부 특징을 소멸시킨다.

 

일정한 기간의 노동력 구매는 생산 과정에서 준비 행위이며, 이는 노동력을 구매한 기간, 곧 일정한 생산 기간(: 한 주나 한 달)이 지나면 끊임없이 갱신된다. 그러나 노동자는 노동력을 지출해 노동력 가치와 잉여 가치를 상품 형태로 실현한 뒤에야 임금을 지급받는다. 따라서 노동자는 잉여 가치(일단 자본가의 개인적 소비 재원으로 간주)뿐 아니라 가변 자본(노동자 임금 재원)까지도, 그것이 임금 형태로 자신에게 돌아오기 전에 생산하고 있다. 그는 그 가변 자본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동안에만 고용된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노동자의 임금을 생산물 자체의 한 몫으로 보는 경제학자들의 공식(잉여 가치/생산물 가치)이 도출된다. 노동자에게 임금 형태로 되돌아오는 것은 그가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생산물의 일부이다. 자본가는 이 상품 가치를 화폐로 지급하지만, 이 화폐는 노동자 노동 생산물의 전환된 모습에 불과하다. 노동자가 생산 수단의 일부를 생산물로 전환하는 동안, 그의 이전 생산물 일부는 화폐로 전환된다. , 노동자의 이번 주 또는 금년 노동력에 대한 지급은 그의 지난 주 또는 작년의 노동인 셈이다.

 

화폐 형태 때문에 생기는 이러한 환상은, 개별 자본가와 노동자 대신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을 전체적으로 고찰하면 곧 사라진다. 자본가 계급은 노동자 계급이 생산하고 자신들이 취득하는 생산물의 일정 부분에 대한 청구서를 화폐 형태로 끊임없이 노동자 계급에게 제공한다.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은 이 청구서를 끊임없이 자본가 계급에게 되돌려 주고, 그 대가로 자신들의 생산물 중 자기 몫으로 되는 부분을 받는다. 거래의 이러한 진정한 성격은 생산물의 상품 형태와 상품의 화폐 형태로부터 은폐되고 있다.

 

가변 자본은 노동자가 자신의 유지 및 재생산을 위해 필요로 하며, 어떤 사회적 생산 체제에서든 항상 생산하고 재생산해야만 하는 생활 수단 재원, 곧 노동 기금이 취하는 특수한 역사적 현상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 기금이 화폐(노동의 대가) 형태로 끊임없이 노동자의 수중으로 유입되는 것은, 노동자 자신의 생산물이 자본의 형태로 끊임없이 그로부터 이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 기금의 현상 형태는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것이 노동자 자신의 대상화된 노동이라는 근본 사실을 전혀 바꾸지 않는다.

 

자기 영주에게 강제로 부역하는 농민을 보자. 그는 자신의 생산 수단으로 자기 경작지에서 예를 들어, 1주일에 3일간 일한다. 나머지 3일은 영주의 토지에서 부역 노동을 한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노동 기금을 재생산하지만, 이 노동 기금은 노동에 대한 대가로 타인이 제공하는 화폐적 지불 형태를 취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영주를 위한 지불받지 않는 강제 노동도 결코 자발적인 지불받는 노동이라는 성격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영주가 어느 날 농민의 경지, 역축, 종자, 곧 생산 수단을 빼앗는다면, 농민은 자신의 노동력을 영주에게 판매할 수밖에 없게 된다. 기타 조건이 같다면, 그는 여전히 1주에 6일간, 곧 자신을 위해 3일간, 그리고 이제 임금을 지불하는 자본가로 변한 영주를 위해 3일간 노동하게 된다. 종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는 생산 수단을 생산 수단으로 소비하며 그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한다. 생산물의 일정한 부분은 여전히 재생산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부역 노동이 임금 노동의 형태로 변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농민 자신으로부터 여전히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노동 기금은 영주가 임금 형태로 농민에게 지급하는 자본 형태를 취하게 된다. (현상 형태와 그 속의 실체를 구별하지 못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는 오늘날에도 노동 기금이 지구상에서 예외적으로만 자본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을 그 끊임없는 갱신의 흐름 속에서 고찰하는 순간, 가변 자본이 자본가 자신의 재원에서 투하되는 가치라는 성격은 상실된다. 물론 이 과정은 어떤 종류의 시초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우리의 지금까지의 관점에서 볼 때, 자본가는 옛날 타인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진 어떤 형태의 시초 축적(본원적 축적)으로부터 화폐를 소유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노동력의 구매자로 시장에 나타날 수 있었다는 것이 개연성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찌 되었든,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의 단순한 연속, 곧 단순 재생산은 가변 자본뿐 아니라 총자본에 대한 관념까지도 뚜렷이 변화시킨다.

 

자본 1,000원의 사용으로부터 매년 200원의 잉여 가치가 생산되고, 이 잉여 가치가 매년 소비된다고 가정하자. 5년 동안 소비된 잉여 가치액은 200 × 5, 곧 최초 투하된 1,000원과 같아진다. 연간 잉여 가치의 일부(예를 들어 절반)만 소비된다면, 10년 뒤에는 100 × 10 = 1,000원으로 동일한 결과가 얻어진다. 일반 공식은, 투하된 자본 가치를 매년 소비되는 잉여 가치로 나누면, 최초 투하된 자본이 자본가로부터 소비되어 없어지는 데 걸리는 연수(또는 재생산 기간의 수)가 나온다. 자본가가 타인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의 생산물(잉여 가치)만을 소비하고, 최초의 자본 가치에는 손대지 않는다고 생각하더라도, 그의 생각은 이 사실을 조금도 변경시킬 수 없다. 일정한 연수가 경과하면, 그가 소유한 자본 가치는 그 동일한 연수 동안 대가 없이 취득한 잉여 가치액과 같아지며, 그가 소비한 가치 총액은 최초의 자본 가치와 같게 된다. 그의 수중에 있는 자본이 그 크기가 변하지 않았고, 이 자본의 일부(건물, 기계 등)가 사업 착수 당시에 이미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자본의 가치이지 물질적 구성 부분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전체 재산 가치와 같은 액수의 채무를 지면서 그 재산을 모두 소비해 버린다면, 그의 전체 재산은 그의 채무 총액을 나타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가가 자신의 최초 자본과 동일한 가치를 소비했다면,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자본의 가치는 그가 무상으로 취득한 잉여 가치 총액만을 대표할 따름이며, 거기에는 그의 최초 자본의 가치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축적을 완전히 무시하더라도, 생산 과정의 단순한 연속(단순 재생산)은 조만간 필연적으로 모든 자본을 축적된 자본, 곧 자본으로 된 잉여 가치로 전환시킨다. 그 자본이 (생산 과정에 투입될 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개인 재산이었고, 스스로 노동해서 번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는 조만간 어떤 등가도 없이 취득한 가치, 곧 타인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이 대상화된 것(화폐 형태든 다른 형태든)이 된다.

 

4-6장에서 보았듯이, 화폐를 자본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상품의 생산과 유통 그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곧 한편에는 가치 또는 화폐의 소유자가, 다른 한편에는 가치를 생산하는 실체의 소유자(노동력만의 소유자)가 서로 구매자와 판매자로 마주하는 것이 필요했다. 따라서 노동의 생산물과 노동 그 자체 사이의 분리, 객체적 노동 조건과 주체적 노동력 사이의 분리가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의 현실적 토대이자 출발점이었다. 최초에는 출발점에 불과했던 것이, 과정의 단순한 연속(곧 단순 재생산)으로부터 자본주의적 생산의 특징적인 결과, 끊임없이 갱신되고 영구화되는 결과로 된다. 한편으로, 생산 과정은 물질적 부를 자본으로, 그리고 자본가를 위한 가치 증식 수단과 향락 수단으로 끊임없이 전환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는 생산 과정에 들어갈 때와 언제나 같은 모습, 곧 부의 인적 원천이기는 하나 이 부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 모든 수단을 빼앗긴 모습으로 그 과정에서 나온다.

 

노동자가 생산 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자신의 노동이 노동력의 판매로부터 자신에게서 소외되고 자본가에게 취득되어 자본에 합체되었기 때문에, 그의 노동은 생산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타인의 생산물에 대상화된다. 생산 과정은 또한 자본가가 노동력을 소비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생산물은 끊임없이 상품으로 전환될 뿐 아니라 자본으로, 곧 노동자의 가치 생산력을 빨아먹는 가치로, 인간을 실제로 구매하는 생활 수단으로, 그리고 생산자를 사용하는 생산 수단으로 전환된다. 결국 노동자 자신은 객체적인 부를 자본(곧 자기를 지배하며 착취하는 외부의 힘)의 형태로 끊임없이 생산하며, 자본가는 노동력을 부의 주체적 원천의 특수한 형태(노동자의 신체 속에 있을 뿐이며, 자신을 대상화하고 실현할 모든 수단에서 분리되어 있는 추상적인 원천)로 끊임없이 생산한다. 간단히 말해, 자본가는 노동자를 임금 노동자로 생산한다. 노동자의 이러한 끊임없는 재생산 또는 영구화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필수 조건이다.

 

노동자는 두 가지 방법으로 소비한다.

 

1. 생산하는 동안, 그는 자기 노동으로부터 생산 수단을 소비하여, 그것을 투하 자본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 생산물로 전환시킨다. 이것이 그의 생산적 소비이며, 동시에 그의 노동력을 구매한 자본가가 노동력을 소비하는 것이다.

 

2. 노동자는 자기 노동력의 대가로 지급 받은 화폐를 생활 수단의 구매에 지출한다. 이것이 그의 개인적 소비다.

 

따라서 노동자의 생산적 소비와 개인적 소비는 완전히 분리된다. 전자의 과정에서 그는 자본의 동력으로 기능하며 자본가에게 속한다. 그러나 후자의 과정에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속하며 생산 과정 밖에서 생활상의 기능을 수행한다. 생산적 소비의 결과는 자본가의 생존이고, 개인적 소비의 결과는 노동자 자신의 생존이다.

 

노동 고찰할 때, 노동자가 자신의 개인적 소비를 생산 과정의 단순한 부수적 요소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사례(: 작업 중 식사)가 빈번하게 드러난다. 이때 노동자는 노동력을 활동 형태로 유지하고자 스스로 생활 수단을 공급하며, 이는 증기 기관에 석탄과 물을, 물레 방아에 기름을 공급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결과적으로, 노동자의 소비 수단은 생산 수단의 소비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그의 개인적 소비는 곧 직접적인 생산적 소비이다. 다만,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의 본질과는 무관한 악습인 양 표면적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개별 자본가나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을, 그리고 고립된 과정이 아닌 완전히 발달한 자본주의적 생산을 그 실제 사회적 규모에서 고찰하면, 사태의 면모는 달라진다. 자본가는 자기 자본의 일부를 노동력으로 전환하면서 총자본의 가치를 증식시킨다. 그는 하나의 돌로 두 마리의 새를 잡는다. 그는 노동자로부터 받는 것뿐 아니라 노동자에게 주는 것으로부터도 이익을 본다. 노동력과 교환으로 지출된 자본은 생활 수단으로 전환되고, 이것의 소비로부터 현존 노동자들의 근육, 신경, 골격, 뇌수가 재생산되며 새로운 노동자들이 탄생한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범위의 개인적 소비에 관해 말한다면, 노동자 계급의 개인적 소비는 노동력과 교환으로 자본이 넘겨준 생활 수단을 (자본이 다시 취득할 수 있는) 새로운 노동력으로 재전환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본가의 가장 필요 불가결한 생산 수단인 노동자 자신의 생산 및 재생산이다. 결국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는 작업장 내부에서 이루어지든 외부에서 이루어지든,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의 한 요소를 이룬다. 이는 기계의 청소가 (기계가 돌아가든 쉬고 있든)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의 한 요소인 것과 같다.

 

노동자가 개인적 소비 행위를 자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한다고 해서 사태가 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하는 가축(역축)이 사료를 소비하는 것도, 역축이 그것을 즐긴다고 해서 생산 과정에 필요한 요소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노동자 계급의 유지와 재생산은 언제나 자본의 재생산에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이 조건의 충족을 자본가는 안심하고 노동자의 자기 유지 본능과 생식 본능에 맡길 수 있다. 자본가가 마음을 쓰는 것은 오직 노동자들의 개인적 소비를 필요한 최소 한도로 축소하는 것뿐이다. 이 점에서 자본가의 태도는 (노동자들에게 영양분이 적은 음식물 대신 영양분이 많은 음식물을 먹도록 강요하는) 남아메리카 광산주들의 거친 태도와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자본가와 그의 이론적 대변자인 경제학자들은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 중 노동자 계급의 영구화에 필요한 부분, 따라서 자본가가 소비할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데 필요한 부분만을 생산적 소비로 본다. 그리고 노동자가 그 이상으로 자기 자신의 쾌락을 위해 소비하는 것은 모두 비생산적 소비로 간주한다. 자본의 축적이 자본으로부터 노동력 소비의 증대를 동반하지 않은 채, 단지 임금 인상과 소비 증대만을 일으킨다면, 추가 자본은 비생산적으로 소비되는 셈이다. 사실상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는 노동자 자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비생산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궁핍한 개인을 재생산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가와 국가에게는 생산적이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는 그들의 부를 생산하는 힘을 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자 계급은 심지어 직접적 노동 과정 밖에서까지도 (생명 없는 노동 도구와 마찬가지로) 자본의 부속물이다.

 

노동자들의 개인적 소비까지도 일정한 한계 안에서는 자본의 재생산 과정의 한 계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재생산 과정은 노동자들의 생산물을 끊임없이 노동자 쪽으로부터 그 반대되는 자본 쪽으로 옮겨 놓으면서, (의식을 가진 생산 도구인) 노동자들이 자본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못하도록 한다. 노동자들의 개인적 소비는, 한편으로는, 그들의 유지와 재생산을 보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활 수단을 끊임없이 없애버리면서 그들을 노동 시장에 계속 다시 나타나도록 만든다. 로마의 노예는 쇠사슬로 얽매여 있었지만, 임금 노동자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부터 그 소유자에게 얽매여 있다. 임금 노동자가 독립적 존재인 것처럼 보이는 겉모습은, 개별 고용주들이 끊임없이 바뀐다는 것과 계약이라는 법적 허구로부터 유지되고 있다.

 

과거에 자본은 자유로운 노동자에 대한 자기 소유권을 행사하기 위해 필요할 때마다 입법에 호소했다. 예를 들어, 1815년까지 영국 기계 제조 노동자들의 국외 이주는 무거운 형벌로 금지되었다. 노동자 계급의 재생산은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기술이 전달되고 축적되는 것을 포함한다. 자본가가 이러한 숙련 노동자 계급의 존재를 (자기가 소유하는) 생산 조건들 중 하나로 생각하고, 이 계급을 실제로 자기 가변 자본의 현실적 존재로 보는지는 공황으로 이 계급을 잃을 위험이 생길 때 특히 분명히 드러난다. 잘 알려져 있듯, 미국 남북 전쟁과 면화 기근으로 랭커셔 등지에서 많은 면공업 노동자들이 실직했다. 노동자 계급 자체뿐 아니라 다른 사회층에서도 영국 식민지나 미국으로 과잉노동자들을 이주시키기 위한 국가 원조나 국민 기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때(1863324)더 타임즈지는 맨체스터 상업 회의소의 전() 소장 에드먼드 포터의 편지를 게재했는데, 하원에서는 이를 적절하게도 공장주들의 선언이라 불렀다. 이 편지에서 노동력을 자본의 소유물로 보는 견해가 노골적으로 표명된 몇 개의 특징적인 구절을 인용한다.

 

(면공업 실업자)가 듣는 이야기는, 면공업 노동자들의 공급이 너무 많다는 것. 아마도 그 1/3은 감소되어야 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나머지 2/3에 대해서는 건전한 수요가 보장될 것이라는 것이다. 여론은 국외 이주를 주장하고 있다. 공장주는 자기의 노동 공급이 떨어져 나가는 데 대해 자발적으로 동의할 리 없다. 그는 아마도 이것이 불공평하며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공공의 자금이 국외 이주를 지원하는 데 쓰인다면, 공장주는 자기의 의견을 진술할, 그리고 아마도 항의할 권리를 가진다.’

 

포터는 면공업이 매우 유익하여, ‘의심할 바 없이 아일랜드와 농업 지대로부터 과잉 인구를 흡수했다고 지적한다. 면공업은 그 규모가 방대하여 1860년 영국 총 수출액의 5/13를 차지했으며, 수년 뒤에는 시장, 특히 인도 시장이 확대되고 파운드당 6펜스의 충분한 면화가 공급되면서 다시 확장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이 산업은 유지할 만한 값어치가 있는가. 기계(살아 있는 노동 기계를 두고 말한다)는 정비해 둘 만한 값어치가 있는가. 또 그것을 내버린다는 것은 최대의 어리석은 생각이 아닌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는 노동자들이 소유물이 아니며, 랭커셔와 공장주들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랭커셔와 공장주의 힘이다. 곧 그들은 한 세대 동안에는 대체될 수 없는 지적이고 훈련받은 힘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다른 기계들은 대부분 12개월 안에 유리하게 다른 것으로 대체되거나 심지어 개선까지 이루어진다. 노동력의 국외 이주가 장려되거나 허가(!)된다면 자본가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외침은 시종장 칼프를 생각나게 한다.) 핵심적인 노동자들을 떼어낸다면 고정 자본은 크게 감가할 것이며, 유동 자본이 불충분하게 공급되는 열등한 노동으로는 경쟁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들 자신이 국외 이주를 원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다. 그들 측에서 보면, 이것은 매우 당연하다. 노동력을 빼앗김으로부터, 또 그들의 임금 지출액을 가령 1/5, 5백만 파운드만큼 감소시키면서, 면공업을 축소시키고 압박한다면, 노동자들의 바로 위에 있는 계급인 소매상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지대는 어떻게 되며, 오두막집의 집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영향을 상층 계급에까지 추적해 보면, 소규모 차지 농업가들, 더 나은 층인 가옥 소유주들과 지주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가장 우수한 공장 노동자들을 수출해 이 나라의 가장 생산적인 자본과 부의 일부 가치를 파괴하면서 이 나라를 약화시키는 이 국외 이주 안보다 모든 계급들에게 더욱 자살적인 계획이 또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대출 기간이 2-3년이 되는 (500-600만 파운드의) 대출을 권고한다. 대출을 받는 사람들의 도덕적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종류의 노동을 강요하는 특별법의 규제 아래, 이 대출은 면공업 지방의 구빈국에 부설된 특별 위원회가 관리하면 될 것이다. 가장 우수한 노동자들을 잃어버리는 것, 그리고 (인력을 고갈시키는 대규모 이민과 한 지역 전체의 자본과 가치의 파괴로부터) 남아 있는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보다 토지 소유주들이나 공장주들에게 더 나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면공업 공장주들의 선발된 대변인인 포터는 두 가지 종류의 기계를 구별한다. 모두 자본가의 소유물이나, 하나는 공장 내부에 있는 죽은 기계이고, 다른 하나는 밤과 일요일에는 공장 밖 오두막집에 있는 살아 있는 기계다. 죽은 기계는 매일 마멸되고 감가될 뿐 아니라 끊임없는 기술 발전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낡아 수개월 내에 새로운 기계로 대체하는 것이 유리할 정도다. 이와는 반대로, 살아 있는 기계는 오래 갈수록, 수세대에 걸쳐 전달된 기술이 축적되는 데 비례하여 더욱더 개선된다.더 타임즈지는 이 대공장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포터는 면공장주들의 예외적이고 거대한 중요성에 감동한 나머지, 이 계급을 유지하고 그들의 사업을 영구화하기 위해 50만의 노동자를 그들의 의사와는 반대로 거대한 정신적 구빈원(면공업 지방)에 가두어 두려고 한다. “이 산업은 유지할 만한 값어치가 있는가라고 포터는 질문한다. “물론 있다. 모든 공정한 수단으로부터라고 우리는 대답한다. “기계는 정비해 둘 만한 값어치가 있는가.”라고 포터는 다시 질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답을 주저한다. 포터가 기계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 기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공장주의 절대적 소유로 보지 않는다고 단언하기 때문이다. 인간 기계를 정비해 두는 것, 곧 필요하게 될 때까지 그것을 가두어 두고 기름칠하는 것을 우리는 값어치가 있는 일이 아니며 또는 심지어 불가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기계는 아무리 기름칠을 하고 닦는다 하더라도 쓰지 않으면 녹이 슨다. 더욱이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인간 기계는 제멋대로 화를 내면서 우리 대도시 거리에서 마구 날뛸 수 있다. 포터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노동자들의 재생산에는 상당히 오랜 기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계 기술자와 자본가만 있으면 언제든지 우리는 검소하고 열성적이고 부지런한 사람들(노동자들)을 찾아낼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수보다 더 많은 공장주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포터는 1, 2, 아마 3년 안에 이 산업이 활기를 되찾을 것이라 말하고, 노동력의 국외 이주가 장려되거나 허가(!)되는 것을 막으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노동자들이 국외 이주를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50만 명의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 70만 명을 그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면공업 지방들에 가두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런 생각의 필연적인 결과로, 그는 또한 그들의 불만을 폭력으로 억누르고, 구호금을 나누어주면서 그들의 생존이 유지되도록 할 것을 제의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은 공장주들이 다시 그들을 필요로 하는 날이 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 노동력을 철, 석탄, 면화를 취급하듯이 취급하려는 사람들로부터 노동력을 구출하기 위해 이 나라의 위대한 여론이 무엇인가를 해야 할 때가 왔다.’

 

더 타임즈지의 논설은 지성의 장난에 불과했다. 사실상 위대한 여론은 공장 노동자란 공장의 움직이는 부속물에 불과하다는 포터의 의견과 같았다. 노동자들의 국외 이주는 저지되었으며, 그들은 정신적 구빈원인 면공업 지방에 갇혔고, 여전히 랭커셔 면 공장주들의 을 이루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그 진행 과정 자체로부터 노동력과 노동 조건 사이의 분리를 재생산하며, 이로부터 노동자를 착취하기 위한 조건을 재생산하고 영구화한다. 이는 노동자로 하여금 생존을 위해 노동력을 팔도록 끊임없이 강요하고, 자본가로 하여금 부유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동력을 살 수 있게 한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상품 시장에서 구매자와 판매자로 마주하는 것은 이제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생산 과정 자체가 노동자를 자신의 노동력 판매자로 끊임없이 다시 시장에 내던지며, 노동자 자신의 생산물을 타인(자본가)이 그를 구매할 수 있는 수단으로 끊임없이 전환시킨다. 사실상 노동자는 자신을 자본가에게 팔기 전에 이미 자본에 속해 있다. 노동자의 경제적 예속은 자발적 자기 판매의 주기적 갱신, 고용주의 변경, 노동력의 시장 가격 변동 등으로 매개되거나 은폐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은 연결된 전체 과정, 곧 재생산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상품이나 잉여 가치뿐 아니라 자본 관계 자체, 한편으로는 자본가를, 다른 한편으로는 임금 노동자를 생산하고 재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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