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상대적 과잉 인구 또는 산업 예비군의 누진적 증대

 

자본 축적은 최초 양적 확대로 나타나지만, 이는 자본 구성의 누진적 질적 변화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이는 가변 자본을 희생하며, 불변 자본을 끊임없이 증대시키는 경향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발전, 그에 조응하는 노동 생산성의 향상, 그리고 이로 인한 자본의 유기적 구성 변동은 단순한 사회적 부의 증대와 보조를 맞추지 않고, 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이는 단순 축적(사회적 총자본의 절대적 증가)이 총자본의 개별 요소들의 집중을 수반하고, 나아가, 추가 자본의 기술적 구성 변혁이 최초 자본의 기술적 구성 변혁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축적의 진전과 함께 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의 비율은 지속적으로 변동한다.

 

자본 구성 비율은 초기 1:1에서 2:1, 3:1, 4:1, 5:1, 7:1 등으로 지속적으로 변동한다. 이에 따라 총자본 가치에서 노동력으로 전환되는 몫은 1/3, 1/4, 1/5, 1/6, 1/8 등으로 감소하고, 생산 수단으로 전환되는 몫은 2/3, 3/4, 4/5, 5/6, 7/8 등으로 증가한다. 노동에 대한 수요는 총자본량 자체가 아닌 총자본의 가변적 구성 부분으로부터 결정된다. 따라서 그 수요는 총자본 증가에 비례하여 증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진적으로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수요는 총자본 규모 대비 상대적으로 감소하며, 총자본 증가와 더불어 그 상대적 감소는 더욱 가속화한다. 총자본이 증가할 때, 가변적 구성 부분(총자본에 결합되는 노동력) 또한 절대적으로는 증가하지만, 그 구성비는 끊임없이 하락한다. 축적이 일정한 기술적 토대 위에서 단순 생산 확대로 작용하는 중간 기간은 단축된다.

 

가속적인 총자본 축적은 추가 노동자 흡수나 기존 노동자의 고용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증가하는 축적과 집중은 역설적으로 자본 구성의 새로운 변동의 원천이 된다. 이는 불변 자본 대비 가변 자본의 가속적인 감소를 의미한다. 가변 자본의 상대적 감소는 총자본의 증가에 따라 촉진되고, 그 증가 속도보다 더 빠르다. 이는 외견상 노동 인구의 절대적 증가라는 역전된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 노동 인구의 증가는 가변 자본 또는 고용 수단의 증가보다 언제나 급속하게 증가한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적 축적 자체가 자신의 자기 증식 욕구에 필요한 노동 인구를 초과하는 노동 인구(상대적 과잉 인구)를 자신의 정력과 규모에 비례하여 끊임없이 생산해낸다.

 

사회적 총자본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축적 운동은 주기적으로 상이한 국면들을 통과하거나, 때로는 그 국면들을 각 생산 부문에 동시에 분배하는 양상을 보인다. 일부 부문에서는 자본의 절대적 증가 없이 단순한 집중의 결과로, 자본 구성의 변동이 일어난다. 다른 부문에서는 자본의 절대적 증가가 가변적 구성 부분(흡수하는 노동력)의 절대적 감소와 결부된다. 또 다른 부문에서는 자본이 일정한 기술적 토대 위에서 계속 증가하며 그에 비례해 추가 노동력을 흡수하다가도, 다른 시기에는 유기적 변동을 겪어 가변적 구성 부분이 수축된다. 모든 부문에서 가변 자본 부분의 증가, 나아가, 그것이 고용하는 노동자 수의 증가는 언제나 격심한 동요와 일시적인 과잉 인구의 생산을 수반한다.

 

이 과잉 인구 생산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이미 취업 중인 노동자들을 축출하는 더욱 가시적인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추가 노동 인구를 통상적인 경로로 흡수하는 것이 곤란해지는(덜 가시적이나 효과는 못지않은) 형태이다. 기능하는 사회적 자본의 규모와 증가율, 생산 규모와 노동자 수의 확장, 노동 생산성의 발전, 그리고 부의 모든 원천의 확대 및 증가에 비례하여, 자본이 노동자를 흡수하거나 축출하는 규모는 증대한다. 또한 자본의 유기적 및 기술적 구성 변동 속도가 빨라지고, 이러한 변동을 겪는 생산 부문들의 수 역시 증가한다. 이 변동은 때로는 동시적으로, 때로는 교대적으로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노동 인구는 자신들이 생산하는 자본 축적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상대적으로 불필요하게 만드는(상대적 과잉 인구로 만드는) 수단을 점점 더 큰 규모로 생산한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특유한 인구 법칙이다. 사실 모든 특수한 역사적 생산 양식은 그 자신만의 특수한 인구 법칙(자신의 한계 내에서만 역사적으로 타당한)을 가진다. 추상적 인구 법칙은 인간의 간섭이 없는 한에서, 식물과 동물에 대해서만 존재한다.

 

과잉 노동 인구는 축적의 필연적 산물이자 자본주의적 토대 위에서 부의 발전이 낳은 결과이다. 동시에 이 과잉 인구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지렛대이며, 나아가, 이 생산 양식의 생존 조건이 된다. 이 과잉 노동 인구는 자본이 자신의 비용으로 육성하고 절대적으로 처분할 수 있는 산업 예비군을 형성한다. 이 산업 예비군은 현실적 인구 증가의 한계와 무관하게, 자본의 변동하는 가치 증식 욕구를 위해 언제나 착취할 수 있게 준비된 인간 재료를 이룬다.

 

축적과 그에 따른 노동 생산성의 발전에 따라 자본의 급작스러운 확장력 또한 증대한다. 이는 기능하는 자본의 신축성이 증가하고, 사회의 절대적 부가 증대하기 때문이다. 특히 신용 제도가 자극받을 때마다, 이 부의 상당 부분이 추가 자본 형태로 생산에 즉시 투입될 수 있다. 또한 생산 과정의 기술적 조건(기계, 운송 수단 등)으로부터의 잉여 생산물이 추가적 생산 수단으로 매우 급속히 전환될 수 있다. 사회적 부(축적의 진전에 따라 팽창되어 추가 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는)는 시장이 갑자기 확대되는 종래의 생산 부문으로 밀려들거나, 종래 부문의 발전에 따라 이제 필요해진 새로 형성된 부문(: 철도)으로 맹렬하게 유입된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다른 부문의 생산 규모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결정적인 부문에 많은 노동력을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어야 함을 요구하며, 과잉 인구가 이 인력을 제공한다.

 

근대 산업의 특징적 진행 과정, 곧 호황, 활황, 공황, 침체로 이루어지는 10년 주기 순환은 (더 작은 규모의 변동으로 중단되기도 하지만) 산업 예비군(과잉 인구)의 끊임없는 형성, 흡수, 재형성에 의존한다. 반대로, 이러한 산업 순환의 국면 교체는 과잉 인구를 보충하고, 그 재생산을 위한 가장 강력한 요인들 중 하나가 된다. 인류 역사의 이전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근대 산업의 이 독특한 순환 과정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유년기에도 없었다. 당시에는, 자본의 구성이 매우 천천히 변동했을 뿐이다. 따라서 자본의 축적에 따라 노동에 대한 수요 또한 대체로 그에 상응하여 뒤따랐다. 자본 축적의 진전이 지금보다 완만했음에도, 착취하는 노동 인구의 자연적 한계에 부딪혔고, 이 한계는 폭력적 수단으로만 제거될 수 있었다.

 

생산 규모의 돌발적 · 비약적 확대는 돌발적 축소의 전제 조건이다. 이 축소는 다시 확대를 야기하지만,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인간 재료(인구의 절대적 증가에 의존하지 않는 노동자 수의 증대) 없이는, 확대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러한 노동자 수의 증대는 노동자 일부를 끊임없이 풀려나게 하는단순 과정, 곧 생산 증가 대비 취업 노동자의 수를 감소시키는 방법으로부터 달성된다. 따라서 근대 산업의 모든 운동 형태는 노동 인구의 일부를 끊임없이 실업자 또는 반()취업자로 전환시키는 것에 의존한다.

 

정치경제학의 천박성은 신용의 확대와 축소(산업 순환에서 주기적 변동의 징조에 불과한 것)를 그 순환 자체의 원인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천체가 특정한 운동에 들어가면 끊임없이 그것을 반복하듯, 사회적 생산 역시 일단 확대와 축소가 교체되는 이 운동에 진입하면 끊임없이 이를 되풀이한다. 결과가 이번에는 원인으로 작용하며, 이로부터 전체 과정의 교체되는 국면들이 주기성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 주기성이 일단 확고해지면, 정치경제학조차도 상대적 과잉 인구(자본의 평균적 증식 욕구 대비 과잉인 인구)의 생산을 근대 산업의 필요 조건으로 이해한다.

 

옥스퍼드 대학의 정치경제학 교수였고, 영국 식민성의 관리였던 메리베일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공황기에 국민이 궐기하여 수십만 명의 과잉 노동자를 국외로 이민시키려 한다고 가정하자. 그 결과는 노동 수요가 회복되자마자 노동 부족을 초래할 것이다. 인간의 재생산이 아무리 빨라도 성인 노동자를 보충하는 데는 한 세대의 기간이 필요하다. 공장주들의 이윤은 수요가 왕성한 호경기를 이용하여 불황기의 손실을 보상하는 능력에 주로 달려 있다. 이 능력은 기계와 육체 노동에 대한 지배력으로부터 보장된다. 그들은 시장 상황에 따라 노동자들의 작업 활동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킬 수 있도록,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노동자들을 항상 구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장주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이 나라의 부가 달려 있는) 우위를 결코 유지할 수 없다.’

 

맬더스조차 과잉 인구를 근대 산업의 필요 조건으로 인정한다. 다만, 그는 과잉 인구를 노동 인구 일부의 상대적 과잉으로 보지 않고, 노동 인구의 절대적 번식 과잉이라는 편협한 시각으로 설명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업과 상업에 주로 의존하는 나라에서 노동자 계급 사이의 결혼 억제가 상당한 정도로 실시된다면, 이는 그 나라에 해로울 수 있다. 특수한 수요 증대에 대응해 노동자를 시장에 제공할 수 있도록 인구의 성질이 갖춰지려면 16-18년이 지나야 한다. 그러나 수입이 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은 저축으로부터 그보다 훨씬 빠르게 행해질 수 있다. 한 나라는 언제나 노동 기금이 인구보다 급속히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정치경제학은 이처럼 상대적으로 과잉인 노동 인구의 끊임없는 생산을 자본주의적 축적의 필요 조건이라 선언한다. 이어서, 정치경제학은 곧바로 자본가의 시녀가 되어, 자본가로 하여금 (노동자들 자신의 생산물인 추가 자본으로부터 길거리로 내던져진) ‘과잉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하도록 한다.

 

우리 공장주들은 그대들의 생존에 필요한 자본을 증가시키면서 그대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다. 그러니 그대들은 그대들의 수를 생존 수단에 맞추면서 나머지 일을 해야만 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연적 인구 증가가 제공하는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는 노동력의 양에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기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이 자연적 제한에서

해방된 산업 예비군을 요구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가변 자본의 증감이 취업 노동자 수의 증감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가정했다. 가변 자본이 증가하더라도, 자본의 지배 아래 있는 노동자 수는 불변이거나 심지어 감소할 수 있다. 이는 개별 노동자가 더 많은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이 증가할 때 발생한다. 노동 가격(시간당 보수)이 불변이거나 허락하더라도, 그 인하 속도가 노동량 증대 속도보다 느리기만 하면 임금은 상승한다. 따라서 이 경우, 가변 자본의 증대는 더 많은 노동량의 지표일 뿐, 더 많은 취업 노동자 수의 지표가 아니다.

 

일정한 노동량을 더 많은 노동자가 아닌 더 적은 노동자에게서 짜내는 것이, 비용이 대략 같다면 모든 자본가에게 절대적 우위를 제공한다. 이는 전자의 경우, 불변 자본(공장 건물, 기계 등) 지출이 노동자 수에 비례하여 증가하나, 후자의 경우, 그 증가 폭이 훨씬 작기 때문이다. 생산 규모가 커질수록 이 동기(불변 자본 절약)는 더욱 결정적인 의의를 갖게 되며, 자본 축적과 함께 증가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발전과 노동 생산성의 발전(이는 축적의 원인인 동시에 결과)에 따라, 자본가는 개별 노동력의 착취(외연적 또는 내포적)를 증대시킨다. 이로부터 종전과 동일한 양의 가변 자본 지출로 더 많은 노동량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또한, 앞에서 확인했듯이, 자본가는 숙련 노동자를 미숙련 노동자로, 성숙 노동자를 미성숙 노동자로, 남성 노동자를 여성 노동자로, 성인 노동자를 미성년자나 아동으로 교체한다. 이로부터 동일한 자본 가치로 더 많은 양의 노동력을 구매한다.

 

축적이 진행됨에 따라, 다음 세 가지 현상이 드러난다.

 

1. 더 큰 가변 자본이 노동자 수 증가 없이 더 많은 노동량을 동원한다.

 

2. 동일한 크기의 가변 자본이 같은 양의 노동력으로 더 많은 노동량을 가동시킨다.

 

3. 더 숙련된 노동력 대신 질이 낮은 다수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귀결된다.

 

상대적 과잉 인구의 생산(또는 노동자들의 풀려남)은 생산 과정의 기술적 변혁보다 더욱 급속히 진행된다. 이는 불변 자본 부분 대비 가변 자본 부분의 상대적 감소보다도 더욱 급속히 진행되는 현상이다. 생산 수단은 규모와 작용력이 증대함에 따라, 노동자들의 취업 수단이 되는 정도가 현저히 감소한다. 이러한 관계는 노동 생산성 증대에 따라, 자본이 노동자에 대한 수요보다 노동의 공급(노동자의 더 많은 노동)을 더 빠르게 증가시킨다는 사실로 인해 다시 수정된다. 따라서 취업 노동자들의 과도 노동은 예비군을 증가시킨다. 반대로, 예비군이 경쟁으로부터 취업자들에게 가하는 압박이 강화되면서, 취업자는 과도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자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 계급의 일부에게 과도 노동을 시키고, 나머지 부분을 강요된 나태에 빠지게 하는 것, 그리고 산업 예비군 때문에 취업자가 과도 노동을 피할 수 없는 것은, 개별 자본가들의 치부 수단이 된다. 동시에 이는 사회적 축적의 진전에 상응하는 규모로 산업 예비군의 생산을 촉진한다. 이러한 상대적 과잉 인구 형성의 중요성은 영국의 사례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영국에는 노동 절약을 위한 기술적 수단이 매우 많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노동을 전반적으로 합리적인 양으로 제한하고, 이를 노동자 계급 각층에게 나이와 성별에 알맞게 배정한다면, 현재의 국민적 생산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현재의 노동 인구는 절대로 부족하다. 현재의 비생산적노동자 대다수가 생산적노동자로 전환되어야만 한다.

 

임금의 일반적 변동은, 전체적으로 산업 순환의 국면 교체에 조응하는 산업 예비군의 팽창과 수축으로부터 전적으로 규제된다. 따라서 임금 변동은 노동 인구의 절대 수 변동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이 현역군과 예비군으로 분할되는 비율의 변동, 과잉 인구의 상대적 규모 증감, 그리고 과잉 인구가 흡수되거나 축출되는 정도로부터 결정된다. 10년 주기의 순환과 그 상이한 국면들을 통과하는 근대 산업(축적의 진행에 따라 국면들이 더욱 빠르게 서로를 뒤따르는 불규칙적 진동으로 복잡해지는)에 대해서, 다음 법칙이 적용된다. 자본 확장과 수축 교체(자본의 증식 욕구 크기)가 노동의 수요와 공급을 규제한다. , 자본이 팽창하여 노동 시장이 일시적으로 상대적 공급 부족이 되고, 자본이 수축하여 노동 시장이 일시적으로 상대적 공급 과잉이 된다. 이러한 자본의 운동이 단순히 인구의 운동에 종속하고 있는 것처럼 꾸미는 법칙은 명백히 엉터리 법칙이다.

 

이것이 바로 경제학자들의 교리이다. 이 교리에 따르면, 자본 축적의 결과로, 임금은 인상되고, 이 임금 인상은 노동 인구로 하여금 더 급속하게 번식하도록 자극한다. 이 상황은 노동 시장이 공급 과잉으로 될 때까지(자본이 노동자 공급에 비해 불충분해질 때까지) 계속된다. 이제 임금이 인하되고 상황은 역전된다. 임금 인하의 결과로, 노동 인구는 점차 감소하며, 이로부터 노동 인구 대비 자본이 다시 과잉으로 된다. 또는 다른 설명에 따르면, 임금 인하와 착취 강화는 다시 축적을 촉진하고, 동시에 임금의 낮은 수준이 노동자 계급의 증식을 억제한다. 결국 노동자의 공급이 수요보다 적어지고 임금이 인상되는 시기가 다시 찾아온다.

 

참으로 이것은 발전된 자본주의적 생산의 아주 훌륭한 운동 방식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임금 상승이 (실제로 노동할 수 있는) 인구의 적극적인 증가를 낳기 이전에 (새로 태어난 아이가 성년이 되기 전에), 산업 전쟁(노동자 부족을 해결하려는 고용주들의 조직적 활동)이 진행되고, 전투가 벌어지고 승패가 결정되어야 할 여러 기간이 이미 경과했다. 1849년에서 1859년 사이 영국의 농업 지방에서는 미미한 임금 인상이 있었다(동반된 곡물 가격 하락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윌트셔에서는 주급이 7실링에서 8실링으로, 도싯셔에서는 7-8실링에서 9실링으로 인상되었다. 이는 전쟁을 위한 노동 수요, 철도 부설, 공장 및 광산의 대확장으로 인해 과잉 농업 인구가 예외적으로 대규모로 빠져나간 결과이다.

 

임금이 낮을수록, 미미한 인상액도 높은 인상률을 표현한다. 주급이 20실링에서 22실링으로 오르면 10% 인상이지만, 7실링에서 9실링으로 오르면, 0.285714 인상되어 매우 큰 폭의 인상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차지 농업가들은 아우성쳤고, 런던이코노미스트지조차 이 기아 수준의 임금에 대해 전반적이며 대단한 임금 인상이라고 진지하게 호도했다. 그러자 차지 농업가들은 교조적인 경제학자들의 생각대로, 임금 인상의 결과로 농업 노동자들이 증식하여 임금이 하락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은 더 많은 기계를 도입했고,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순식간에 차지 농업가들도 만족할 정도로 다시 과잉 상태가 되었다. 이제 농업에는 종전보다 더 많은 자본, 그것도 더욱 생산적인 형태로 투하되었다. 이 결과, 노동에 대한 수요는 상대적으로뿐 아니라 절대적으로도 감소했다.

 

이처럼 경제학적 허구(임금 상승 인구 증가 임금 하락)는 임금의 일반적 운동을 규제하는 법칙, 곧 노동자 계급(총 노동력)과 사회적 총자본 사이의 비율 관계를 규제하는 법칙과 노동 인구를 상이한 생산 부문들에 배분하는 법칙을 혼동한다. 예를 들어, 호경기의 결과 특정 생산 부문에서 축적이 특히 활발하고, 이윤이 평균보다 높아 추가 자본이 이 부문으로 밀려들면, 노동에 대한 수요는 증가하고, 임금은 인상된다. 더 높은 임금은 노동 인구의 더 많은 부분을 경기가 좋은 이 부문으로 끌어들이고, 마침내 이 부문은 노동력으로 포화 상태가 된다. 결국 임금은 다시 종전의 평균 수준으로 떨어지거나, 노동력이 과도하게 유입된 경우에는 그 이하로 하락한다. 이 시점에서는, 이 산업 부문으로의 노동자 유입이 정지될 뿐 아니라 유출까지 발생한다. 이 경우, 정치경제학자는 임금 상승에 따라 노동자 수의 절대적 증가가 일어나고, 그 증가에 따라 임금 인하가 일어난다고 오해한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목격하는 것은 특수한 생산 부문에서 노동 시장의 부분적 움직임이며, 이는 자본의 필요 변화에 따라 상이한 자본 투하 부문으로 노동 인구가 분배되는 현상에 불과하다.

 

산업 예비군(상대적 과잉 인구)은 침체기와 평균 정도의 호황기에는 현역 노동자 군대에 압력을 가한다. 또한 과잉 생산과 열광적인 확장기에는 현역군의 요구(임금 인상)를 억제한다. 따라서 상대적 과잉 인구는 노동의 수요와 공급 법칙이 작용하는 배경이 되며, 이 법칙의 작용 범위를 자본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욕과 지배욕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한계 안에 국한시킨다.

 

경제학적 변호론의 탁월한 업적 중 하나를 다시 논하자. 그들은 새로운 기계 도입이나 낡은 기계 확장으로 가변 자본 일부가 불변 자본으로 전환될 때, 이 행위(자본을 기계에 묶어 놓고노동자들을 풀려나게하는)를 정반대로 노동자들을 위해 자본을 풀려나게 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제야 우리는 변호론자들이 얼마나 파렴치한가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 풀려나는 것은 기계로부터 직접 쫓겨나는 노동자들만이 아니다. 장래에 그들을 대체할 자라나는 세대의 보충 인원도, 그리고 사업이 종전 토대 위에서 일반적으로 확장될 때, 규칙적으로 흡수되었을 추가 인원도 풀려난다. 이제 그들은 모두가 풀려났으며’, 따라서 투자할 곳을 찾는 새로운 자본은 그들을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다.

 

 

이처럼 자본이 흡수하는 것이 그들이든 다른 사람이든, 이 자본이 (기계가 시장에 내던진 노동자들과) 동일한 수의 노동자를 노동 시장에서 끌어낸다면(취업시킨다면), 전반적인 노동 수요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 자본이 더 적은 노동자를 취업시킨다면 과잉 노동자의 수는 증가한다. 더 많은 노동자를 취업시킨다면, 전반적인 노동 수요는 (취업자의 수가 풀려난수를 초과하는 만큼) 증가한다. 따라서 투자할 곳을 찾는 추가 자본이 전반적인 노동 수요를 촉진하는 성과는, 기계로부터 길에 내던져진 노동자들이 모두 흡수될 때까지는 아무 것도 없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 기구(메커니즘)는 자본의 절대적 증가가 전반적인 노동 수요의 상응하는 증대를 수반하지 않도록 조치한다. 그런데 변호론자는 바로 이것(추가 자본이 실직자를 다시 고용하는 것)을 노동자들이 쫓겨나서 산업 예비군으로 있는 과도기에 겪는 빈궁, 고난, (있을 수 있는) 사망에 대한 보상이라고 부른다!

 

노동에 대한 수요는 자본의 증가와 동일하지 않으며, 노동의 공급은 노동자 계급의 증가와 동일하지 않다. 여기서는 서로 독립된 두 개의 힘(자본과 노동)이 상호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은 한쪽이 무겁게 된 주사위처럼, 두 측면 모두에서 동시에 작용한다. 자본의 축적이 한편으로 노동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를 풀려나게하여 노동자의 공급을 증대시킨다. 동시에 실업자들의 압력은 취업자들로 하여금 더 많은 노동을 수행하도록 강제하며, 이로부터 노동의 공급을 일정한 정도까지 노동자의 공급과 무관한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행해지는 노동의 수요·공급 법칙의 작용은 자본의 독재를 완성한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많이 일할수록, 타인의 부가 그만큼 더 많아지며, 그들의 노동 생산성이 증가할수록, 자본의 가치 증식 수단으로 자기 기능조차 그만큼 더 위태롭게 된다는 비밀을 알게 되자마자, 또한 그들이 자기들 사이의 경쟁 강도가 전적으로 상대적 과잉 인구의 압력에 달려 있음을 알게 되자마자, 그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이 자연 법칙이 자기들 계급에 미치는 파멸적 영향을 제거하거나 약화시키기 위해 노동 조합의 설립 등으로부터 취업자와 실업자 사이의 계획된 협력을 조직하려고 노력하자마자, 자본과 그의 아첨꾼인 정치경제학은 이를 영원한그리고 이른바 신성한수요·공급 법칙에 대한 침해라고 소리친다. 취업자와 실업자 사이의 단결이 이 법칙의 조화로운작용을 교란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식민지 등에서) 불리한 사정들이 산업 예비군의 형성과 이에 따른 자본가 계급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절대적 종속을 방해하자마자, 자본은 그의 세속적인 산초 판사(아첨하는 경제학자)와 함께 수요·공급의 신성한법칙에 반기를 들고 강제 수단과 국가 개입으로부터 그 법칙의 작용을 저지하려고 한다.

 

25-4. 상대적 과잉 인구의 상이한 형태

 

상대적 과잉 인구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각 노동자는 부분적으로 취업하거나 완전히 실업 상태인 기간에는 상대적 과잉 인구에 포함된다. 산업 순환의 국면 교체로부터 주기적으로 대규모로 나타나는 형태들(공황기의 급성적 형태, 불황기의 만성의 형태)를 제외하면, 과잉 인구는 언제나 세 가지 형태, 곧 유동적, 잠재적, 정체적 형태를 띠고 있다.

 

근대 산업의 중심지인 공장, 공장제 수공업, 제철소, 광산 등에서는 노동자들이 때로는 대규모로 축출되고, 때로는 대규모로 재흡수되어, 취업자의 수는 비록 생산 규모 대비 끊임없이 감소하는 비율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증대한다. 이 경우, 과잉 인구는 유동적 형태로 존재한다. (기계가 하나의 요소로 사용되거나 근대적 분업만이 실시되는) 대작업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자동화된 공장에서는 수많은 소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고용되고 있다.

 

일단 성인이 되면 동일 사업 부문에 계속 남아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대다수는 으레 해고된다. 이들은 유동적 과잉 인구의 한 요소를 이루며, 해당 사업 부문의 확대에 따라 증가한다. 그들 중 일부는 국외로 이주하는데, 이는 실질적으로 국외로 나간 자본을 뒤따라가는 것에 불과하다. 다른 결과로는, 여성 노동 인구가 남성에 비해 더욱 급속히 증가하는 현상이 있는데, 그 예는 영국에서 나타난다.

 

노동자 수의 자연적 증가가 자본의 축적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동시에 그 욕구를 초과한다는 사실은 자본의 운동 자체가 지닌 모순이다. 이는 자본이 연소한 노동자를 더 많이 요구하고, 성인 노동자는 더 적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수천 명이 실직하고 있는 바로 그때, ‘일손이 부족하다고 한탄이 들려오는 것 역시 모순이다. 이는 분업의 결과로, 실업자는 일정한 생산 부문 이외에는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자본으로부터 노동력의 소모가 너무나 급격하여, 중년의 노동자는 이미 다소간 노쇠하게 된다. 그는 과잉 인구의 대열로 낙오되거나, 높은 등급에서 낮은 등급으로 밀려 내려온다. 노동자들의 수명이 가장 짧은 곳은 바로 대공업이다. 맨체스터 보건 관리 리의 말에 따르면,

 

맨체스터의 평균 수명은 상층 중간 계급이 38세인 반면, 노동자 계급은 17세에 불과하다. 리버풀에서는 전자는 35, 후자는 15세이다. 따라서 부유층의 수명은 더 불리한 조건에 있는 시민들의 수명에 비해 2배 이상 길다.’

 

대공업 노동자의 절대적 증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그 개별 구성 요소들의 급속한 소멸에도, 그 수가 팽창하는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노동자 세대의 급속한 교체가 요구된다 (이 법칙은 인구 중 다른 계급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는 조혼(대공업 노동자들의 생활 환경의 필연적 결과)과 장려금(아동 노동 착취가 아동 생산에 제공하는, 곧 아동이 벌어오는 임금 때문에 아이들을 많이 가지려는 것)으로부터 충족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농업을 장악하고, 그것을 장악한 정도에 비례하여, 농업에 투하된 자본의 축적이 진전되는 동안, 농촌 노동 인구에 대한 수요는 절대적으로 감소한다. 여기서는 (다른 비농업 산업에서와는 달리) 노동자의 축출이 더 큰 흡수로 보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농촌 인구의 일부는 끊임없이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나 비농업 프롤레타리아트로 전환되는 상태에 놓이며, 이 전환에 유리한 조건을 기다린다. 이처럼 상대적 과잉 인구의 원천으로부터 끊임없는 이동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들이 도시로 끊임없이 이동한다는 것은 농촌 자체 안에 항상적인 잠재적 과잉 인구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며, 이 잠재적 과잉 인구의 규모는 그 출구가 예외적으로 넓게 열릴 때에만 눈에 띈다. 결국, 농촌 노동자는 최저 한도의 임금 수준으로 밀려 떨어며, 그들의 한쪽 다리는 이미 극빈자의 늪 속에 빠져 있다.

 

상대적 과잉 인구의 제3 범주인 정체적 과잉 인구는, 취업이 매우 불규칙한 현역 노동자 집단의 일부를 구성한다. 따라서 이 정체적 과잉 인구는 자본에게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노동력의 한없이 큰 저수지를 제공한다. 그들의 생활 형편은 노동자 계급의 표준적인 평균 수준 이하로 떨어지며, 바로 이 사실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본주의적 착취의 특수 부문들을 위한 폭넓은 기초가 된다. 그들의 특징은 최대 한도의 노동 시간과 최소 한도의 임금이다. 우리는 그들의 주요 형태를 이미 가내 공업 항목에서 확인했다. 이 정체적 과잉 인구는 대공업과 농업의 과잉 노동자로부터 끊임없이 보충된다. 또한 특히 몰락하고 있는 공업 부문(수공업적 생산이 공장제 수공업적 생산에, 공장제 수공업적 생산이 기계제 생산에 정복당하는 경우)으로부터도 보충된다. 그들의 규모는 축적의 규모, 활력의 증대와 함께 과잉 인구의 창출이 진전됨에 따라 증대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노동자 계급 중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고 영구화하는 요소이며, 노동자 계급의 총 증가 중에서 다른 요소들보다 상대적으로 큰 비율을 차지하는 요소이다.

  

출생자 수와 사망자 수뿐 아니라 가족의 절대적 크기까지도 임금의 크기(노동자들이 처분할 수 있는 생활 수단의 양)에 반비례한다. 이는 곧 임금이 낮을수록 출생자와 사망자의 수가 그만큼 더 커지고, 가족의 구성원 수도 그만큼 더 커진다는 의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이 법칙은 야만인이나 심지어 문명화된 식민지 사람들에게도 괴상하게 들린다. 이 현상은 개별적으로는 힘이 없어 항상 쫓겨 다니는 동물류의 거대한 종족 번식을 연상시킨다.

 

최종적으로, 상대적 과잉 인구의 최하층은 구호 빈민 상태에 놓인다. 부랑자, 죄인, 매춘부 등 본래의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를 제외하면, 이 사회층은 세 가지 범주로 구성된다. 첫째, 노동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영국의 구호 빈민 통계에 따르면, 그 수는 공황기에 언제나 증가하고, 회복기에는 언제나 감소한다. 둘째, 고아와 구호 빈민의 아이들이다. 이들 세 번째 범주는 타락한 사람들, 지친 사람들, 노동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특히 분업으로 인해 직업을 바꿀 능력을 상실하여 몰락한 사람들이다. 또한 위험한 기계, 광산, 화학 공장 따위의 증가에 따라, 그 수가 점점 늘어나는 산업 재해자인 불구자, 병자, 과부 등이다. 구호 빈민은 현역 노동자군의 폐인 수용소이자 산업 예비군의 고정 구성원이다.

 

구호 빈민의 생산은 상대적 과잉 인구의 생산에 포함되며, 전자의 필연성은 후자의 필연성에 포섭된다. 구호 빈민은 상대적 과잉 인구와 더불어 부의 자본주의적 생산과 발전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이룬다. 구호 빈민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공비(생산에 직접 공헌하지 않는 비용)의 일부를 구성한다. 그러나 자본은 그 비용 부담의 대부분을 자기 자신의 어깨로부터 노동자 계급과 하층 중간 계급의 어깨로 전가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사회적 부, 기능하는 자본, 기능 자본 증대의 규모와 활력,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절대 수와 그들 노동의 생산력이 클수록, 산업 예비군은 그만큼 더 커진다. 자본의 확장력을 발전시키는 바로 그 원인들이 또한 자본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노동력을 증가시킨다. 다시 말해, 산업 예비군의 상대적 크기는 부의 잠재적 활력과 함께 증대한다. 그런데 이 산업 예비군이 노동자 현역군에 비해 클수록, 고통스러운 노동을 하지 않으면 더욱 빈곤해지는, 고정적 과잉 인구는 그만큼 더 많아진다.

 

노동자 계급의 극빈층과 산업 예비군이 클수록, 공식적인 구호 빈민은 그만큼 더 증가한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축적의 절대적 일반 법칙이다. 다른 법칙과 마찬가지로, 이 법칙 역시 실현 과정에서 여러 사정으로 수정되나, 그 분석은 여기의 관심사가 아니다.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수를 자본의 증식 욕구에 적응시키라 설교하는 경제학적 지혜의 어리석음은 이제 명백하다.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과 축적의 원리가 이 수를 끊임없이 자본의 증식 욕구에 적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적응의 첫 번째 결과는 상대적 과잉 인구 또는 산업 예비군의 창출이며, 마지막 결과는, 노동자 현역군 중 끊임없이 증대하는 부분의 빈곤과 구호 빈민이다.

 

점점 더 증가하는 양의 생산 수단이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 증가로 인해 더욱더 적은 인간 힘의 지출로 가동된다는 법칙은, 노동자가 생산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 수단이 노동자를 사용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완전히 전도되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 노동 생산력이 높을수록, 노동자들이 취업 수단(일자리)에 가하는 압력은 그만큼 더 커지며, 따라서 그들의 생존 조건(타인의 치부, 곧 자본의 가치 증식을 위해 그들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것)은 그만큼 더 불확실하게 된다. 따라서 생산 수단과 노동 생산력이 생산적 인구보다 더 빨리 증가한다는 사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거꾸로 노동 인구는 언제나 자본의 가치 증식 욕구보다 더 빨리 증가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4편에서 분석했듯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모든 방법은 개별 노동자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다. 생산을 발전시키는 모든 수단들은 생산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수단으로 전환된다. 이는 노동자를 부분 인간으로 불구화하고, 기계의 부속물로 격하시키며, 그의 노동의 고유한 가치를 파괴하면서, 노동을 혐오스러운 고통으로 바꾼다. 또한 과학이 독립적인 힘으로 노동 과정에 도입되는 정도에 비례하여 노동 과정의 지적 잠재력을 노동자로부터 소외시킨다. 더 나아가, 노동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모든 방법과 수단은 노동자의 노동 조건을 악화시킨다. 이들은 노동자를 노동 과정에서 비열하기 때문에 더욱 혐오스러운 자본의 독재에 굴복시키고, 노동자의 전체 생활 시간을 노동 시간으로 전환시키며, 그의 처자를 자본이라는 저거노트의 수레바퀴 밑으로, (자본을 위해 희생시키려고) 질질 끌고 간다.

 

잉여 가치 생산의 모든 방법은 곧 축적의 방법이며, 축적의 모든 확대는 다시 이 방법을 발전시키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자본이 축적됨에 따라 노동자가 받는 임금 수준과 무관하게, 그의 상태는 악화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궁극적으로, 상대적 과잉 인구(산업 예비군)를 축적의 규모와 활력에 상응하도록 유지하는 법칙은, 헤파이스토스의 쐐기보다 더 단단하게 노동자를 자본에 결박시킨다. 이 법칙은 자본 축적에 상응하는 빈곤의 축적을 필연화한다. 결과적으로, 한쪽 끝에서 부의 축적은 동시에 반대편 끝, 곧 자신의 생산물을 자본으로 생산하는 노동자 계급 측의 빈곤, 노동 고통, 노예 상태, 무지, 잔인, 도덕적 타락의 축적이다.

 

자본주의적 축적의 적대적 성격은 정치경제학자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전()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 아래의 현상(부분적으로 비슷하나, 본질적으로 다른)과 혼동한다.

 

18세기 위대한 경제학 저술가 중 한 명인, 베니스의 수도승 오르테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적대 관계를 사회적 부의 일반적 자연 법칙으로 보았다.

 

경제적 선과 경제적 악은 한 나라 안에서는 항상 균형을 이룬다. , 일부 사람들의 부의 풍족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부의 결핍과 크기가 동일하며, 소수의 거대한 부는 항상 다수 생활 필수품의 절대적 박탈을 수반한다. 한 국민의 부는 그 인구에, 그 빈곤은 그 부에 대응한다. 이는 부지런한 사람과 부자의 필연적 결과가, 게으른 사람과 가난한 사람임을 의미한다.’

 

오르테스보다 약 10년 후, 영국 국교의 목사 타운센드는 매우 난폭하게 빈곤을 부의 필요 조건이라고 찬양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법으로부터 노동의 강제는 너무나 큰 분쟁, 폭력, 물의를 수반한다. 반면, 굶주림은 근면과 노동에 대한 평화적이고, 조용하며, 끊임없는 압력일 뿐 아니라, 가장 자연적인 동기를 주어 최대의 노력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모든 것은 노동자 계급의 굶주림을 영구화하는 데 달려 있으며, 타운센드의 의견에 따르면, 이는 특히 빈민들 사이에 적용되는 인구 법칙으로부터 제공된다.

 

빈민은 어느 정도 선경지명이 없고(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날 만한 선견지명이 없고), 그래서 사회의 가장 천하고, 가장 더럽고, 가장 열등한 직능을 행하는 사람이 항상 있다는 것은 하나의 자연 법칙이라고 생각된다. 이로 말미암아 인류의 행복 총량은 매우 증가하며, 더 점잖은 사람들은 고역에서 해방되어, 아무런 지장도 받지 않고, 더 고상한 직업에 종사할 수 있다. 구빈법은 신과 자연이 세상에 세우신 이 체제의 조화와 아름다움, 균형과 질서를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베니스의 수도승이 빈궁의 영구화라는 운명 속에서 기독교적 자선, 독신, 수도원, 성당의 존재 이유를 찾았다면, 신교 목사는 반대로 거기에서 영국의 구빈법(빈민들에게 쥐꼬리만한 공적 구호 권리를 부여한 법)을 비난할 구실을 발견했다. 슈토르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회적 부의 발전은 이 유용한 사회 계급을 창출한다. 이 계급은 가장 무미건조하고, 천하며, 싫증나는 일들을 하며, 한마디로 생활에서 불쾌하고 비굴할 일을 모두 짊어진다. 바로 그렇게 하면서 다른 계급들에게 여가, 정신의 안정, 관습적인 품위를 보장해 준다.’

 

슈토르히는 대중의 빈곤과 타락을 수반하는 자본주의적 문명이 야만보다 우월한 점이 무엇인지 자문한다. 그가 발견한 유일한 대답은 안전 보장이다! 시스몽디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산업과 과학의 발전으로 모든 노동자는 매일 자신의 소비에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노동이 부를 생산하지만, 그 자신이 그것을 소비하게 된다면, 그 부는 그를 노동에 부적합하게 만들 것이다. 사람들(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이 예술 작품이나 향락품을 얻기 위해 노동자들처럼 끊임없이 노동해야만 한다면, 그들은 그 모든 것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는 편을 택할 것이다. 오늘날에는 노동이 그 보상과 분리되어 있다. 동일한 사람이 먼저 일하고 다음에 휴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일을 하기 때문에 비로소 다른 사람이 휴식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노동 생산력의 무한한 증가는 놀고먹는 부자들의 사치와 향락의 증가 외의 다른 어떤 결과도 가져올 수 없다.’

 

마지막으로, 냉담한 부르주아 공리 공론가인 데스튀드 드 트라시는 다음과 같이 난폭하게 진술한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대중들이 편안하게 살아가고, 부유한 나라에서는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가난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