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자본의 축적 과정

 

23장. 단순 재생산

 

생산 과정의 사회적 형태와 관계없이, 생산 연속적인 흐름이며 주기적으로 동일한 국면들을 끊임없이 관통한다. 사회가 소비를 중단할 수 없듯, 생산 역시 중단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사회적 생산 과정을 연속된 전체, 곧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흐름으로 고찰할 때, 이는 동시에 재생산 과정이다.

 

생산의 조건은 곧 재생산의 조건이다. 어떤 사회든 생산물의 일정 부분을 지속적으로 생산 수단이나 새로운 생산 요소로 재전환하지 않고서는 생산을 지속할 수 없다. 다른 사정의 변화가 없다면, 사회가 자기 부를 기존 규모로 유지하거나 재생산하기 위해 연간 소비된 생산 수단(노동 수단, 원료, 보조 재료)은 같은 양의 신품으로 보충되어야 한다. 이에 해당하는 양은 연간 생산량에서 분리되어 다시 생산 과정으로 투입된다. 따라서 연간 생산물의 특정량은 생산 자체를 위한 것이다. 처음부터 생산적 소비로 예정된 이 부분은 생산물 성질상 개인적 소비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은 현물 형태로 존재한다.

 

생산이 자본주의적 형태를 취하면, 재생산 또한 같은 형태를 취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서 노동 과정이 가치 증식 과정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듯, 재생산 역시 투하된 가치를 자본, 곧 가치 증식하는 가치로 재생산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이가 자본가라는 경제적 임무를 맡는 것은 오직 그가 가진 화폐가 끊임없이 자본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00원의 화폐액이 금년에 자본으로 전환되어 20원의 잉여 가치를 생산했다면, 이는 내년에도, 그 후년에도 동일한 활동을 반복해야 한다. 자본 가치의 주기적 증가분이거나 과정 진행 중인 자본의 주기적 열매인 잉여 가치는 자본에서 생기는 수입의 형태를 취한다. 이 수입이 자본가에게 소비 재원으로만 이용되어 손에 들어오는 대로 주기적으로 소비된다면, 다른 조건이 같은 경우 단순 재생산이 일어난다. 단순 재생산은 이전과 같은 규모에서 생산 과정이 반복되는 것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단순한 반복성 또는 연속성은 생산 과정에 새로운 특징을 부여하거나, 고립된 과정인 듯 보이던 외관상의 일부 특징을 소멸시킨다.

 

일정한 기간의 노동력 구매는 생산 과정에서 준비 행위이며, 이는 노동력을 구매한 기간, 곧 일정한 생산 기간(: 한 주나 한 달)이 지나면 끊임없이 갱신된다. 그러나 노동자는 노동력을 지출해 노동력 가치와 잉여 가치를 상품 형태로 실현한 뒤에야 임금을 지급받는다. 따라서 노동자는 잉여 가치(일단 자본가의 개인적 소비 재원으로 간주)뿐 아니라 가변 자본(노동자 임금 재원)까지도, 그것이 임금 형태로 자신에게 돌아오기 전에 생산하고 있다. 그는 그 가변 자본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동안에만 고용된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노동자의 임금을 생산물 자체의 한 몫으로 보는 경제학자들의 공식(잉여 가치/생산물 가치)이 도출된다. 노동자에게 임금 형태로 되돌아오는 것은 그가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생산물의 일부이다. 자본가는 이 상품 가치를 화폐로 지급하지만, 이 화폐는 노동자 노동 생산물의 전환된 모습에 불과하다. 노동자가 생산 수단의 일부를 생산물로 전환하는 동안, 그의 이전 생산물 일부는 화폐로 전환된다. , 노동자의 이번 주 또는 금년 노동력에 대한 지급은 그의 지난 주 또는 작년의 노동인 셈이다.

 

화폐 형태 때문에 생기는 이러한 환상은, 개별 자본가와 노동자 대신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을 전체적으로 고찰하면 곧 사라진다. 자본가 계급은 노동자 계급이 생산하고 자신들이 취득하는 생산물의 일정 부분에 대한 청구서를 화폐 형태로 끊임없이 노동자 계급에게 제공한다.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은 이 청구서를 끊임없이 자본가 계급에게 되돌려 주고, 그 대가로 자신들의 생산물 중 자기 몫으로 되는 부분을 받는다. 거래의 이러한 진정한 성격은 생산물의 상품 형태와 상품의 화폐 형태로부터 은폐되고 있다.

 

가변 자본은 노동자가 자신의 유지 및 재생산을 위해 필요로 하며, 어떤 사회적 생산 체제에서든 항상 생산하고 재생산해야만 하는 생활 수단 재원, 곧 노동 기금이 취하는 특수한 역사적 현상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 기금이 화폐(노동의 대가) 형태로 끊임없이 노동자의 수중으로 유입되는 것은, 노동자 자신의 생산물이 자본의 형태로 끊임없이 그로부터 이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 기금의 현상 형태는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것이 노동자 자신의 대상화된 노동이라는 근본 사실을 전혀 바꾸지 않는다.

 

자기 영주에게 강제로 부역하는 농민을 보자. 그는 자신의 생산 수단으로 자기 경작지에서 예를 들어, 1주일에 3일간 일한다. 나머지 3일은 영주의 토지에서 부역 노동을 한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노동 기금을 재생산하지만, 이 노동 기금은 노동에 대한 대가로 타인이 제공하는 화폐적 지불 형태를 취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영주를 위한 지불받지 않는 강제 노동도 결코 자발적인 지불받는 노동이라는 성격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영주가 어느 날 농민의 경지, 역축, 종자, 곧 생산 수단을 빼앗는다면, 농민은 자신의 노동력을 영주에게 판매할 수밖에 없게 된다. 기타 조건이 같다면, 그는 여전히 1주에 6일간, 곧 자신을 위해 3일간, 그리고 이제 임금을 지불하는 자본가로 변한 영주를 위해 3일간 노동하게 된다. 종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는 생산 수단을 생산 수단으로 소비하며 그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한다. 생산물의 일정한 부분은 여전히 재생산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부역 노동이 임금 노동의 형태로 변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농민 자신으로부터 여전히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노동 기금은 영주가 임금 형태로 농민에게 지급하는 자본 형태를 취하게 된다. (현상 형태와 그 속의 실체를 구별하지 못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는 오늘날에도 노동 기금이 지구상에서 예외적으로만 자본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을 그 끊임없는 갱신의 흐름 속에서 고찰하는 순간, 가변 자본이 자본가 자신의 재원에서 투하되는 가치라는 성격은 상실된다. 물론 이 과정은 어떤 종류의 시초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우리의 지금까지의 관점에서 볼 때, 자본가는 옛날 타인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진 어떤 형태의 시초 축적(본원적 축적)으로부터 화폐를 소유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노동력의 구매자로 시장에 나타날 수 있었다는 것이 개연성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찌 되었든,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의 단순한 연속, 곧 단순 재생산은 가변 자본뿐 아니라 총자본에 대한 관념까지도 뚜렷이 변화시킨다.

 

자본 1,000원의 사용으로부터 매년 200원의 잉여 가치가 생산되고, 이 잉여 가치가 매년 소비된다고 가정하자. 5년 동안 소비된 잉여 가치액은 200 × 5, 곧 최초 투하된 1,000원과 같아진다. 연간 잉여 가치의 일부(예를 들어 절반)만 소비된다면, 10년 뒤에는 100 × 10 = 1,000원으로 동일한 결과가 얻어진다. 일반 공식은, 투하된 자본 가치를 매년 소비되는 잉여 가치로 나누면, 최초 투하된 자본이 자본가로부터 소비되어 없어지는 데 걸리는 연수(또는 재생산 기간의 수)가 나온다. 자본가가 타인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의 생산물(잉여 가치)만을 소비하고, 최초의 자본 가치에는 손대지 않는다고 생각하더라도, 그의 생각은 이 사실을 조금도 변경시킬 수 없다. 일정한 연수가 경과하면, 그가 소유한 자본 가치는 그 동일한 연수 동안 대가 없이 취득한 잉여 가치액과 같아지며, 그가 소비한 가치 총액은 최초의 자본 가치와 같게 된다. 그의 수중에 있는 자본이 그 크기가 변하지 않았고, 이 자본의 일부(건물, 기계 등)가 사업 착수 당시에 이미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자본의 가치이지 물질적 구성 부분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전체 재산 가치와 같은 액수의 채무를 지면서 그 재산을 모두 소비해 버린다면, 그의 전체 재산은 그의 채무 총액을 나타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가가 자신의 최초 자본과 동일한 가치를 소비했다면,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자본의 가치는 그가 무상으로 취득한 잉여 가치 총액만을 대표할 따름이며, 거기에는 그의 최초 자본의 가치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축적을 완전히 무시하더라도, 생산 과정의 단순한 연속(단순 재생산)은 조만간 필연적으로 모든 자본을 축적된 자본, 곧 자본으로 된 잉여 가치로 전환시킨다. 그 자본이 (생산 과정에 투입될 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개인 재산이었고, 스스로 노동해서 번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는 조만간 어떤 등가도 없이 취득한 가치, 곧 타인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이 대상화된 것(화폐 형태든 다른 형태든)이 된다.

 

4-6장에서 보았듯이, 화폐를 자본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상품의 생산과 유통 그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곧 한편에는 가치 또는 화폐의 소유자가, 다른 한편에는 가치를 생산하는 실체의 소유자(노동력만의 소유자)가 서로 구매자와 판매자로 마주하는 것이 필요했다. 따라서 노동의 생산물과 노동 그 자체 사이의 분리, 객체적 노동 조건과 주체적 노동력 사이의 분리가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의 현실적 토대이자 출발점이었다. 최초에는 출발점에 불과했던 것이, 과정의 단순한 연속(곧 단순 재생산)으로부터 자본주의적 생산의 특징적인 결과, 끊임없이 갱신되고 영구화되는 결과로 된다. 한편으로, 생산 과정은 물질적 부를 자본으로, 그리고 자본가를 위한 가치 증식 수단과 향락 수단으로 끊임없이 전환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는 생산 과정에 들어갈 때와 언제나 같은 모습, 곧 부의 인적 원천이기는 하나 이 부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 모든 수단을 빼앗긴 모습으로 그 과정에서 나온다.

 

노동자가 생산 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자신의 노동이 노동력의 판매로부터 자신에게서 소외되고 자본가에게 취득되어 자본에 합체되었기 때문에, 그의 노동은 생산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타인의 생산물에 대상화된다. 생산 과정은 또한 자본가가 노동력을 소비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생산물은 끊임없이 상품으로 전환될 뿐 아니라 자본으로, 곧 노동자의 가치 생산력을 빨아먹는 가치로, 인간을 실제로 구매하는 생활 수단으로, 그리고 생산자를 사용하는 생산 수단으로 전환된다. 결국 노동자 자신은 객체적인 부를 자본(곧 자기를 지배하며 착취하는 외부의 힘)의 형태로 끊임없이 생산하며, 자본가는 노동력을 부의 주체적 원천의 특수한 형태(노동자의 신체 속에 있을 뿐이며, 자신을 대상화하고 실현할 모든 수단에서 분리되어 있는 추상적인 원천)로 끊임없이 생산한다. 간단히 말해, 자본가는 노동자를 임금 노동자로 생산한다. 노동자의 이러한 끊임없는 재생산 또는 영구화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필수 조건이다.

 

노동자는 두 가지 방법으로 소비한다.

 

1. 생산하는 동안, 그는 자기 노동으로부터 생산 수단을 소비하여, 그것을 투하 자본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 생산물로 전환시킨다. 이것이 그의 생산적 소비이며, 동시에 그의 노동력을 구매한 자본가가 노동력을 소비하는 것이다.

 

2. 노동자는 자기 노동력의 대가로 지급 받은 화폐를 생활 수단의 구매에 지출한다. 이것이 그의 개인적 소비다.

 

따라서 노동자의 생산적 소비와 개인적 소비는 완전히 분리된다. 전자의 과정에서 그는 자본의 동력으로 기능하며 자본가에게 속한다. 그러나 후자의 과정에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속하며 생산 과정 밖에서 생활상의 기능을 수행한다. 생산적 소비의 결과는 자본가의 생존이고, 개인적 소비의 결과는 노동자 자신의 생존이다.

 

노동 고찰할 때, 노동자가 자신의 개인적 소비를 생산 과정의 단순한 부수적 요소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사례(: 작업 중 식사)가 빈번하게 드러난다. 이때 노동자는 노동력을 활동 형태로 유지하고자 스스로 생활 수단을 공급하며, 이는 증기 기관에 석탄과 물을, 물레 방아에 기름을 공급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결과적으로, 노동자의 소비 수단은 생산 수단의 소비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그의 개인적 소비는 곧 직접적인 생산적 소비이다. 다만,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의 본질과는 무관한 악습인 양 표면적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개별 자본가나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을, 그리고 고립된 과정이 아닌 완전히 발달한 자본주의적 생산을 그 실제 사회적 규모에서 고찰하면, 사태의 면모는 달라진다. 자본가는 자기 자본의 일부를 노동력으로 전환하면서 총자본의 가치를 증식시킨다. 그는 하나의 돌로 두 마리의 새를 잡는다. 그는 노동자로부터 받는 것뿐 아니라 노동자에게 주는 것으로부터도 이익을 본다. 노동력과 교환으로 지출된 자본은 생활 수단으로 전환되고, 이것의 소비로부터 현존 노동자들의 근육, 신경, 골격, 뇌수가 재생산되며 새로운 노동자들이 탄생한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범위의 개인적 소비에 관해 말한다면, 노동자 계급의 개인적 소비는 노동력과 교환으로 자본이 넘겨준 생활 수단을 (자본이 다시 취득할 수 있는) 새로운 노동력으로 재전환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본가의 가장 필요 불가결한 생산 수단인 노동자 자신의 생산 및 재생산이다. 결국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는 작업장 내부에서 이루어지든 외부에서 이루어지든,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의 한 요소를 이룬다. 이는 기계의 청소가 (기계가 돌아가든 쉬고 있든)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의 한 요소인 것과 같다.

 

노동자가 개인적 소비 행위를 자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한다고 해서 사태가 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하는 가축(역축)이 사료를 소비하는 것도, 역축이 그것을 즐긴다고 해서 생산 과정에 필요한 요소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노동자 계급의 유지와 재생산은 언제나 자본의 재생산에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이 조건의 충족을 자본가는 안심하고 노동자의 자기 유지 본능과 생식 본능에 맡길 수 있다. 자본가가 마음을 쓰는 것은 오직 노동자들의 개인적 소비를 필요한 최소 한도로 축소하는 것뿐이다. 이 점에서 자본가의 태도는 (노동자들에게 영양분이 적은 음식물 대신 영양분이 많은 음식물을 먹도록 강요하는) 남아메리카 광산주들의 거친 태도와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자본가와 그의 이론적 대변자인 경제학자들은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 중 노동자 계급의 영구화에 필요한 부분, 따라서 자본가가 소비할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데 필요한 부분만을 생산적 소비로 본다. 그리고 노동자가 그 이상으로 자기 자신의 쾌락을 위해 소비하는 것은 모두 비생산적 소비로 간주한다. 자본의 축적이 자본으로부터 노동력 소비의 증대를 동반하지 않은 채, 단지 임금 인상과 소비 증대만을 일으킨다면, 추가 자본은 비생산적으로 소비되는 셈이다. 사실상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는 노동자 자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비생산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궁핍한 개인을 재생산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가와 국가에게는 생산적이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는 그들의 부를 생산하는 힘을 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자 계급은 심지어 직접적 노동 과정 밖에서까지도 (생명 없는 노동 도구와 마찬가지로) 자본의 부속물이다.

 

노동자들의 개인적 소비까지도 일정한 한계 안에서는 자본의 재생산 과정의 한 계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재생산 과정은 노동자들의 생산물을 끊임없이 노동자 쪽으로부터 그 반대되는 자본 쪽으로 옮겨 놓으면서, (의식을 가진 생산 도구인) 노동자들이 자본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못하도록 한다. 노동자들의 개인적 소비는, 한편으로는, 그들의 유지와 재생산을 보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활 수단을 끊임없이 없애버리면서 그들을 노동 시장에 계속 다시 나타나도록 만든다. 로마의 노예는 쇠사슬로 얽매여 있었지만, 임금 노동자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부터 그 소유자에게 얽매여 있다. 임금 노동자가 독립적 존재인 것처럼 보이는 겉모습은, 개별 고용주들이 끊임없이 바뀐다는 것과 계약이라는 법적 허구로부터 유지되고 있다.

 

과거에 자본은 자유로운 노동자에 대한 자기 소유권을 행사하기 위해 필요할 때마다 입법에 호소했다. 예를 들어, 1815년까지 영국 기계 제조 노동자들의 국외 이주는 무거운 형벌로 금지되었다. 노동자 계급의 재생산은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기술이 전달되고 축적되는 것을 포함한다. 자본가가 이러한 숙련 노동자 계급의 존재를 (자기가 소유하는) 생산 조건들 중 하나로 생각하고, 이 계급을 실제로 자기 가변 자본의 현실적 존재로 보는지는 공황으로 이 계급을 잃을 위험이 생길 때 특히 분명히 드러난다. 잘 알려져 있듯, 미국 남북 전쟁과 면화 기근으로 랭커셔 등지에서 많은 면공업 노동자들이 실직했다. 노동자 계급 자체뿐 아니라 다른 사회층에서도 영국 식민지나 미국으로 과잉노동자들을 이주시키기 위한 국가 원조나 국민 기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때(1863324)더 타임즈지는 맨체스터 상업 회의소의 전() 소장 에드먼드 포터의 편지를 게재했는데, 하원에서는 이를 적절하게도 공장주들의 선언이라 불렀다. 이 편지에서 노동력을 자본의 소유물로 보는 견해가 노골적으로 표명된 몇 개의 특징적인 구절을 인용한다.

 

(면공업 실업자)가 듣는 이야기는, 면공업 노동자들의 공급이 너무 많다는 것. 아마도 그 1/3은 감소되어야 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나머지 2/3에 대해서는 건전한 수요가 보장될 것이라는 것이다. 여론은 국외 이주를 주장하고 있다. 공장주는 자기의 노동 공급이 떨어져 나가는 데 대해 자발적으로 동의할 리 없다. 그는 아마도 이것이 불공평하며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공공의 자금이 국외 이주를 지원하는 데 쓰인다면, 공장주는 자기의 의견을 진술할, 그리고 아마도 항의할 권리를 가진다.’

 

포터는 면공업이 매우 유익하여, ‘의심할 바 없이 아일랜드와 농업 지대로부터 과잉 인구를 흡수했다고 지적한다. 면공업은 그 규모가 방대하여 1860년 영국 총 수출액의 5/13를 차지했으며, 수년 뒤에는 시장, 특히 인도 시장이 확대되고 파운드당 6펜스의 충분한 면화가 공급되면서 다시 확장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이 산업은 유지할 만한 값어치가 있는가. 기계(살아 있는 노동 기계를 두고 말한다)는 정비해 둘 만한 값어치가 있는가. 또 그것을 내버린다는 것은 최대의 어리석은 생각이 아닌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는 노동자들이 소유물이 아니며, 랭커셔와 공장주들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랭커셔와 공장주의 힘이다. 곧 그들은 한 세대 동안에는 대체될 수 없는 지적이고 훈련받은 힘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다른 기계들은 대부분 12개월 안에 유리하게 다른 것으로 대체되거나 심지어 개선까지 이루어진다. 노동력의 국외 이주가 장려되거나 허가(!)된다면 자본가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외침은 시종장 칼프를 생각나게 한다.) 핵심적인 노동자들을 떼어낸다면 고정 자본은 크게 감가할 것이며, 유동 자본이 불충분하게 공급되는 열등한 노동으로는 경쟁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들 자신이 국외 이주를 원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다. 그들 측에서 보면, 이것은 매우 당연하다. 노동력을 빼앗김으로부터, 또 그들의 임금 지출액을 가령 1/5, 5백만 파운드만큼 감소시키면서, 면공업을 축소시키고 압박한다면, 노동자들의 바로 위에 있는 계급인 소매상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지대는 어떻게 되며, 오두막집의 집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영향을 상층 계급에까지 추적해 보면, 소규모 차지 농업가들, 더 나은 층인 가옥 소유주들과 지주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가장 우수한 공장 노동자들을 수출해 이 나라의 가장 생산적인 자본과 부의 일부 가치를 파괴하면서 이 나라를 약화시키는 이 국외 이주 안보다 모든 계급들에게 더욱 자살적인 계획이 또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대출 기간이 2-3년이 되는 (500-600만 파운드의) 대출을 권고한다. 대출을 받는 사람들의 도덕적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종류의 노동을 강요하는 특별법의 규제 아래, 이 대출은 면공업 지방의 구빈국에 부설된 특별 위원회가 관리하면 될 것이다. 가장 우수한 노동자들을 잃어버리는 것, 그리고 (인력을 고갈시키는 대규모 이민과 한 지역 전체의 자본과 가치의 파괴로부터) 남아 있는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보다 토지 소유주들이나 공장주들에게 더 나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면공업 공장주들의 선발된 대변인인 포터는 두 가지 종류의 기계를 구별한다. 모두 자본가의 소유물이나, 하나는 공장 내부에 있는 죽은 기계이고, 다른 하나는 밤과 일요일에는 공장 밖 오두막집에 있는 살아 있는 기계다. 죽은 기계는 매일 마멸되고 감가될 뿐 아니라 끊임없는 기술 발전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낡아 수개월 내에 새로운 기계로 대체하는 것이 유리할 정도다. 이와는 반대로, 살아 있는 기계는 오래 갈수록, 수세대에 걸쳐 전달된 기술이 축적되는 데 비례하여 더욱더 개선된다.더 타임즈지는 이 대공장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포터는 면공장주들의 예외적이고 거대한 중요성에 감동한 나머지, 이 계급을 유지하고 그들의 사업을 영구화하기 위해 50만의 노동자를 그들의 의사와는 반대로 거대한 정신적 구빈원(면공업 지방)에 가두어 두려고 한다. “이 산업은 유지할 만한 값어치가 있는가라고 포터는 질문한다. “물론 있다. 모든 공정한 수단으로부터라고 우리는 대답한다. “기계는 정비해 둘 만한 값어치가 있는가.”라고 포터는 다시 질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답을 주저한다. 포터가 기계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 기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공장주의 절대적 소유로 보지 않는다고 단언하기 때문이다. 인간 기계를 정비해 두는 것, 곧 필요하게 될 때까지 그것을 가두어 두고 기름칠하는 것을 우리는 값어치가 있는 일이 아니며 또는 심지어 불가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기계는 아무리 기름칠을 하고 닦는다 하더라도 쓰지 않으면 녹이 슨다. 더욱이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인간 기계는 제멋대로 화를 내면서 우리 대도시 거리에서 마구 날뛸 수 있다. 포터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노동자들의 재생산에는 상당히 오랜 기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계 기술자와 자본가만 있으면 언제든지 우리는 검소하고 열성적이고 부지런한 사람들(노동자들)을 찾아낼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수보다 더 많은 공장주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포터는 1, 2, 아마 3년 안에 이 산업이 활기를 되찾을 것이라 말하고, 노동력의 국외 이주가 장려되거나 허가(!)되는 것을 막으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노동자들이 국외 이주를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50만 명의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 70만 명을 그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면공업 지방들에 가두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런 생각의 필연적인 결과로, 그는 또한 그들의 불만을 폭력으로 억누르고, 구호금을 나누어주면서 그들의 생존이 유지되도록 할 것을 제의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은 공장주들이 다시 그들을 필요로 하는 날이 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 노동력을 철, 석탄, 면화를 취급하듯이 취급하려는 사람들로부터 노동력을 구출하기 위해 이 나라의 위대한 여론이 무엇인가를 해야 할 때가 왔다.’

 

더 타임즈지의 논설은 지성의 장난에 불과했다. 사실상 위대한 여론은 공장 노동자란 공장의 움직이는 부속물에 불과하다는 포터의 의견과 같았다. 노동자들의 국외 이주는 저지되었으며, 그들은 정신적 구빈원인 면공업 지방에 갇혔고, 여전히 랭커셔 면 공장주들의 을 이루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그 진행 과정 자체로부터 노동력과 노동 조건 사이의 분리를 재생산하며, 이로부터 노동자를 착취하기 위한 조건을 재생산하고 영구화한다. 이는 노동자로 하여금 생존을 위해 노동력을 팔도록 끊임없이 강요하고, 자본가로 하여금 부유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동력을 살 수 있게 한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상품 시장에서 구매자와 판매자로 마주하는 것은 이제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생산 과정 자체가 노동자를 자신의 노동력 판매자로 끊임없이 다시 시장에 내던지며, 노동자 자신의 생산물을 타인(자본가)이 그를 구매할 수 있는 수단으로 끊임없이 전환시킨다. 사실상 노동자는 자신을 자본가에게 팔기 전에 이미 자본에 속해 있다. 노동자의 경제적 예속은 자발적 자기 판매의 주기적 갱신, 고용주의 변경, 노동력의 시장 가격 변동 등으로 매개되거나 은폐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은 연결된 전체 과정, 곧 재생산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상품이나 잉여 가치뿐 아니라 자본 관계 자체, 한편으로는 자본가를, 다른 한편으로는 임금 노동자를 생산하고 재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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