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 법칙
25-1. 자본 구성 불변 시 노동력 수요 증가
본 장은 자본 증대가 노동자 계급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한다. 이 고찰의 핵심 요소는 자본의 구성과, 축적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구성의 변화에 집중한다.
자본의 구성은 가치 측면과 소재 측면의 두 관점에서 고찰된다. 가치 구성은 자본이 불변 자본 (생산 수단의 가치)과 가변 자본 (노동력의 가치, 곧 임금 총액)으로 분할되는 비율로부터 결정된다. 반면, 기술적 구성은 생산 과정에서 기능하는 소재의 측면을 다루며, 이는 사용되는 생산 수단의 양과 이의 활용에 필요한 노동량 사이의 관계로 규정된다. 전자를 자본의 가치 구성이라 칭하며, 후자를 자본의 기술적 구성이라 부른다. 양자는 긴밀히 상호 관계를 형성하는데, 자본의 가치 구성이 기술적 구성으로부터 결정되고 그 변화를 나타낼 때, 이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라 한다.
본 글에서 자본의 구성이라 간략히 지칭하면 언제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의미한다. 일정한 생산 부문에 투하된 개별 자본들은 각기 상이한 구성을 지닌다. 이 개별 구성의 평균은 해당 생산 부문 총자본의 구성을 도출하게 한다. 궁극적으로, 각 생산 부문 평균 구성의 총평균은 한 나라에서 사회적 총자본의 구성을 규명하며, 이하 논의는 오로지 이 사회적 총자본의 구성을 대상으로 한다.
자본 증대는 그 가변적 구성 부분 (노동력으로 전환되는 부분)의 증가를 수반한다. 추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잉여 가치의 일부는 필연적으로 가변 자본 (추가적 노동 기금)으로 계속 재전환되어야 한다. 다른 사정들이 불변이며, 자본의 (유기적) 구성 또한 불변이라 가정할 경우 (곧, 일정한 양의 생산 수단을 운용하는 데 언제나 동일한 양의 노동력이 요구된다고 가정할 경우), 노동력에 대한 수요와 노동자의 생활을 위한 재원은 자본에 비례하여 증가하며, 자본의 증가 속도가 빠를수록, 이들 요소 또한 더욱 빠르게 증가하는 결과가 초래한다.
자본은 매년 잉여 가치를 생산하며, 그 일부는 최초 자본에 지속적으로 편입된다. 이 편입분 자체는 이미 기능하는 자본 규모의 증대에 비례하여 매년 증가한다. 나아가, 치부욕에 대한 특별한 자극 (예: 새로운 시장 개척, 새로운 사회적 욕구 발전에 따른 신규 투자 영역 창출)이 발생할 경우, 잉여 가치 또는 잉여 생산물이 자본의 수입으로 분할되는 것의 변동만으로도, 축적의 규모는 급격히 확대될 수 있다. 따라서 자본의 축적욕이 노동력 (또는 노동자 수)의 증가를 능가할 여지가 생기며, 노동자들에 대한 수요가 그 공급을 초과하여 임금 등귀가 유발될 수 있다. 앞서 설정한 전제 (자본 구성 불변)가 유지된다면, 이러한 결과는 필연적이다. 매년 전년보다 더 많은 노동자가 고용되면서, 축적에 필요한 노동력이 평상시의 노동 공급을 상회하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조만간 임금 등귀가 발생하는 시점이 도래할 수밖에 없다.
영국에서 15세기 전체와 18세기 전반기에 걸쳐 이러한 상황을 한탄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임금 노동자들이 다소 유리한 조건 아래에서 생계를 유지하고 번식한다 하더라도,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근본적 성격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는다. 단순 재생산이 자본 관계 자체, 곧 한편으로 자본가를, 다른 한편으로 임금 노동자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대된 규모의 재생산 (곧 축적) 역시 자본 관계를 확대된 규모로 재생산한다. 이는 한쪽 끝에 더 많은 자본가 또는 더 큰 자본가를, 다른 쪽 끝에 더 많은 임금 노동자를 재생산하는 결과를 낳는다. 노동력은 자본의 가치 증식 수단으로 끊임없이 자본에 다시 결합되어야 하며, 자본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노동력의 재생산은 사실상 자본 자체의 재생산을 위한 하나의 요소이다. 노동력의 자본에 대한 예속은 단지 노동력을 개별 자본가에게 팔 수 있다는 사실로 은폐될 뿐이다. 결론적으로, 자본의 축적은 곧 프롤레타리아트의 증식이다.
고전파 경제학은 이 명제 (자본 축적 = 프롤레타리아트 증식)를 명확히 이해했기에, 애덤 스미스나 리카도 등은 축적을, 잉여 생산물 중 자본으로 전환되는 부분 전체가 생산적 노동자로부터 소비되는 것, 또는 그 부분이 추가적 임금 노동자로 전환되는 것으로 잘못 동일시했다. 이미 1696년, 벨러즈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어떤 사람이 100,000에이커의 토지와 100,000파운드의 화폐, 100,000마리의 가축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노동자를 한 명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 부자는 노동자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노동자가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기 때문에 노동자가 많을수록, 부자도 그만큼 더 많아진다. 빈민 (노동자)의 노동은 부자의 보물 창고이다.’
맨더빌 역시 18세기 초에 다음과 같은 주장을 피력한다:
‘소유권이 잘 보호되고 곳에서는 빈민 없이 생활하기보다 화폐 없이 생활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사실, 누가 노동을 하겠는가. 그들 (빈민들)은 굶어 죽지 않도록 보호되어야 하지만, 저축할 만큼은 받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최하층 계급 중 누군가가 매우 근면하고, 검소한 덕분에 태어난 지위보다 높아질 때, 아무도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개인과 가정을 위해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빈민이 놀고 지내지 않으며, 그들이 자신의 수입을 계속 지출하는 것은 모든 부유한 국민들에게 유익하다. 그날의 노동으로부터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에게 일을 하도록 자극을 주는 것은 오직 가난 뿐이다. 그 가난을 완화시키는 것은 현명하지만, 완전히 제거해 버리는 것은 어리석다. 노동하는 사람을 근면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적당한 임금이다. 너무 낮은 임금은 그의 성격에 따라 낙담시키거나 절망하게 만들며, 너무 많은 임금은 불손하고 나태하게 한다. 결론적으로, 노예가 허용되지 않는 자유로운 나라에서 가장 확실한 부는 다수의 근면한 빈민에게 있다. 그들은 육해군을 위한 무진장한 공급 원천일 뿐만 아니라, 그들 없이는 어떤 향략도 있을 수 없으며, 어떤 나라의 생산물도 가치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사회 (물론 노동자들이 아닌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를 행복하게 하고, 국민을 비참한 상태에서도 만족하게 하려면, 대다수를 무지하고 가난한 상태에 묶어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지식은 우리의 욕구를 확대하고 다양하게 만들기 때문이며, 사람이 적게 바랄수록, 그의 욕구는 그만큼 더 쉽게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직하고 명석한 두뇌를 가진 맨더빌조차 미처 파악하지 못한 지점은, 축적 과정 그 자체가 자본의 크기뿐 아니라 ‘노동 빈민’의 수 또한 증가시킨다는 사실이다. 이 노동 빈민, 곧 임금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증대하는 자본의) 가치 증식을 확장하는 힘으로 전환시키며, 바로 그렇게 하면서 자기 자신의 생산물 (이것은 자본가로 인격화된다)에 대한 자기 자신의 종속 관계를 영구화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종속 관계에 관해 이든은 그의 저서,『빈민의 상태』(1797)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든이 승인하는 시민적 제도는 부자와 노동자를 구별하는 기준이 토지와 화폐의 소유가 아닌 노동에 대한 지배력임을 명확히 한다.
‘우리 토지의 자연적 산물만으로는 생활에 분명히 충분하지 못하다. 어느 정도 이전 노동의 결과 없이는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의 일부는 쉬지 않고 일해야 한다. 일부 사람들이 노동하지 않으면서도, 노동의 생산물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문명과 질서의 덕택이며, 이들은 전적으로 시민적 제도의 창조물이다. 왜냐하면, 시민적 제도는 개인이 노동 이외의 각종 수단으로부터 재산을 취득하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독립적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그 재산을 얻게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노동 덕택이지, 자기 자신들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 아니다. 부자를 노동자들과 구별하는 것은 토지와 화폐의 소유가 아니라 노동에 대한 지배력이다. 이 제도 (시민적 제도)는 유산자들에게 (자신들을 위해 노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충분한 세력과 권위를 부여하며, 또한 노동자들을 비참하거나 노예적 상태가 아닌 편안하고 자유로운 종속의 상태에 둔다. 이런 종속 상태는 인간성과 그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듯이, 노동자 자신의 안락을 위해 필요하다.’
덧붙여, 이든은 18세기 애덤 스미스의 제자들 중 유일하게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지금까지 가정한 축적 조건, 곧 노동자들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 하에서는, 자본에 대한 노동자들의 종속 관계는 견딜 만한, 또는 이든의 표현대로, ‘편안하고 자유로운’ 형태를 띤다. 이 종속 관계는 자본의 증대에 따라 내포적으로 심화되지 않고, 오직 외연적으로 확대될 뿐이다. 자본의 착취와 지배 영역이 자본 자체의 크기와 이에 종속되는 사람들의 수에 비례하여 확장된다. 노동자들 자신의 잉여 생산물 (지속적으로 증대하며 끊임없이 추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부분) 중 더 많은 몫이 지불 수단 (임금)의 형태로 이들에게 환원된다. 이 덕택에, 노동자들은 자신의 소비 범위를 확대하고, 의복, 가구 등의 소비 재원을 소폭 증대시키며, 심지어는 약간의 준비금까지 형성할 수 있게 된다.
노예의 경우, 의식주 및 대우가 개선되고, 페쿨리움 (고대 로마 노예의 일부 재산)이 증가하더라도, 노예의 종속 관계와 착취가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임금 노동자의 종속 관계와 착취 역시 소멸하지 않는다. 자본 축적의 결과로, 노동의 가격이 상승하는 것은, 사실상 임금 노동자 자신이 이미 만들어낸 금 사슬 (자본)의 길이와 무게로 말미암아 그 사슬의 긴장이 약간 완화됨을 의미할 따름이다. 이 문제에 관한 논쟁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특징적 차이가 흔히 간과되었다. 노동력은 구매자 자신의 개인적 욕구 충족을 위해 구매되는 것이 아니다. 구매자의 목적은 자기 자본의 가치 증식이며, 이는 그가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이 포함된 상품 (따라서 그가 지불하지 않은 가치 부분이 포함된 상품)의 생산으로부터 실현된다. 잉여 가치의 생산 또는 이윤의 획득이 이 생산 양식의 절대적 법칙이다. 노동력은 생산 수단을 자본으로 유지시키고, 자기 자신의 가치를 자본으로 재생산하며, 지불받지 않는 노동으로 추가 자본의 원천을 제공하는 한에서만 판매될 수 있다. 따라서 노동력 판매 조건은, 노동자들에게 유리하든 불리하든, 노동력의 끊임없는 재판매의 필연성과 자본의 형태로 부를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는 것을 내포한다.
임금은, 그 성격상, 항상 노동자 측에서 일정한 양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을 제공하는 것을 수반한다. (노동일 연장에 따라) 노동의 가격 (시간당 또는 개수당 임금)이 하락하는데도 임금이 증가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임금의 증가는 기껏해야 노동자가 제공해야 할 지불받지 않는 노동의 양적 감소만을 의미할 따름이다. 이 감소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점까지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임금률을 둘러싼 폭력적 충돌 (애덤 스미스가 지적했듯이, 고용주가 대체로 승리하는)을 도외로 할 때, 자본 축적의 결과, 노동의 가격이 등귀하는 일은 다음 두 경우 중 하나를 의미한다.
첫째, 노동의 가격이 등귀하더라도, 축적의 진행이 방해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경우이다. 이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스미스가 지적하듯이,
‘자본 이윤이 감소한 이후에도, 자본은 계속 증가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이전보다 더욱 빠르게 증가할 수 있다. 이윤율이 낮은 거대 자본은 이윤율이 높은 소규모 자본보다 일반적으로 더 신속하게 증식한다.’
[『국부론』(상): 121]
둘째, 노동 가격의 등귀로 인해 이윤이라는 자극이 감소하여 축적이 약화되는 경우이다. 이로 인해, 축적률 (잉여 가치 중 자본으로 재전환되는 부분의 비율)은 감소한다. 그러나 이 감소와 더불어, 그 원인이었던 자본과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 사이의 불균형 (곧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의 양을 초과하는 자본의 양) 역시 해소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의 기구는 생산 과정 자체가 만들어낸 일시적인 장애물을 스스로 제거하는 원리를 갖춘다.
노동 가격은 다시 자본의 자기 증식욕에 적합한 수준 (이 수준이 임금 등귀 시작 전의 평균적 수준보다 낮거나, 같거나, 높든지 관계없이)으로 하락한다. 따라서 첫째 경우, 노동력 (또는 노동 인구)의 절대적 또는 상대적 증가율이 감소했기 때문에 자본이 과잉이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본의 증가가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을 부족하게 만든다. 둘째 경우에도, 노동력 (또는 노동 인구)의 절대적 또는 상대적 증가율이 커졌기 때문에 자본이 부족하게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본이 상대적으로 감소했기 때문에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 (또는 그 가격)이 지나치게 큰 것으로 간주된다.
바로 이러한 자본 축적의 절대적 운동이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의 양적 상대 변동을 나타낼 뿐임에도, 노동력 양 자체의 독립적인 운동이 축적을 야기하는 것처럼 오인된다. 수학적 표현을 빌리자면, 축적률이 독립 변수이고, 임금률은 종속 변수이며,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산업 순환의 공황 국면에서 상품 가격의 일반적 저하가 화폐 가치의 등귀로 나타나고, 번영 국면에서 상품 가격의 일반적 등귀가 화폐 가치의 저하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이 사실로부터 이른바 통화주의는 가격이 높을 때는 과도한 화폐가, 낮을 때는 부족한 화폐가 유통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러한 통화주의자들의 무지와 사실의 완전한 오인은, 위의 축적 현상을 첫째 경우에는 임금 노동자가 너무 적기 때문이고, 둘째 경우에는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경제학자들의 오류와 매우 흡사하다.
이른바 ‘자연적 인구 법칙’의 근간을 이루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법칙은 간단히 말해, 자본 축적과 임금률 사이의 관계는 (자본으로 전환된) 지불받지 않는 노동과 (추가 자본의 운동에 필요한) 추가적 지불받는 노동 사이의 관계로 환원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은 결코 두 개의 서로 독립적인 양 (자본 크기와 노동 인구 수)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결국 동일한 노동 인구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과 지불받는 노동 사이의 관계에 불과하다.
노동자 계급이 제공하고, 자본가 계급이 축적하는 지불받지 않는 노동의 양이 급속히 증가하여, 그것이 자본으로 전환되기 위해 지불받는 노동의 비상한 추가가 필요한 경우, 임금은 등귀한다. 그리고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지불받지 않는 노동은 임금 등귀에 비례하여 감소한다. 그러나 이 감소가 자본을 길러내는 잉여 노동이 더 이상 요구되는 양으로 제공되지 않는 지점에 도달하면, 반작용이 즉시 시작된다. 곧 수입 (잉여 가치) 중 자본화되는 부분은 감소하고, 축적은 쇠퇴하며, 임금의 등귀 운동은 장애에 직면한다. 결국 임금의 등귀는 자본주의 체제의 토대를 침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점차 확대되는 규모의 재생산을 보장하는 한계 내에 머문다. 따라서 (경제학자들로부터 자연 법칙으로 신비화된) 자본주의적 축적 법칙이 실제로 표현하는 바는, 노동 착취도의 어떤 감소와 노동 가격의 어떤 등귀도 (자본 관계의 끊임없는 확대 재생산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성격 자체로부터 배제된다는 점이다. 이는 물질적 부가 노동자의 자기 발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노동자가 현존 가치의 증식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존재하는 생산 양식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종교에서 인간 자신의 두뇌의 산물이 인간을 지배하듯이,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인간 자신의 손의 산물이 인간을 지배한다.
25-2. 자본 축적·집중과 유기적 구성 변화
경제학자들 자신의 의견에 따르면, 임금를 야기하는 것은 사회적 부의 현실적 규모나 기존 자본의 크기가 아니다. 오로지 축적의 끊임없는 증대와 그 증대 속도일 뿐이다 (스미스, 『국부론』, 제1편, 제8장). 지금까지의 고찰은 자본의 기술적 구성이 불변인 채 증대가 발생하는 축적 과정의 특수 국면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축적 과정은 이 국면을 넘어 다음 단계로 진행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일반적 토대가 일단 확립되면, 축적 과정에서 사회적 노동의 생산성 발전이 축적의 가장 강력한 지렛대가 되는 시기가 도래한다.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동 임금을 상승시킨 바로 그 원인, 곧 자본의 증가는 노동 생산력을 증가시켜 더 적은 노동량으로 더 많은 생산물을 만들게 하는 경향이 있다.’
[『국부론』(상): 113-114]
자연 조건 (토지의 비옥도 등)과 독립적 생산자들의 기능 (생산물에 질적으로 나타남)을 제외하면,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 수준은 동일한 노동 강도로 일정한 시간에 노동자가 생산물로 전환시키는 생산 수단의 상대적 규모로 표현된다. 이처럼 노동자가 전환시키는 생산 수단의 양은 그의 노동 생산성에 비례하여 증대한다. 이 생산 수단들은 이중의 역할을 한다. 어떤 생산 수단의 증가는 노동 생산성이 증대한 결과이며, 동시에 어떤 생산 수단의 증가는 노동 생산성을 증대시키기 위한 조건이 된다. 예를 들어, 공장제 수공업적 분업과 기계의 사용은 동일 시간에 더 많은 원료와 보조 재료를 노동 과정에 투입하게 하는데. 이는 생산성 향상의 결과이다. 다른 한편, 사용되는 기계, 광물성 비료, 배수관 등은 생산성을 향상을 위한 조건이 된다. 그러나 (생산 수단에 결합되는) 노동력에 대비한 생산 수단의 양적 증대는 (조건이든 결과이든) 노동 생산성 향상의 표현이다. 따라서 노동 생산성의 향상은 노동이 움직이는 생산 수단의 양에 대비한 노동량의 감소로, 곧 노동 과정의 객체적 요소에 대비한 주체적 요소의 양적 감소로 나타난다.
자본의 기술적 구성의 이러한 변화 (곧 생산 수단에 활력을 주는 노동력의 양에 대비한 생산 수단의 양적 증대)는 이번에는 자본의 가치 구성 (곧 자본 가치의 가변적 구성 부분을 희생하는 불변적 구성 부분의 증대)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어떤 자본이 시초에 50%가 생산 수단에, 50%가 노동력에 투하되었으나, 이후 노동 생산성의 증대에 따라 80%가 생산 수단에, 20%가 노동력에 투하되는 경우와 같다. 자본의 가변 부분에 비한 불변 부분의 점진적 증대라는 이 법칙은, (상이한 경제적 시기를 비교하든, 동일 시기의 상이한 나라들을 비교하든) 상품 가격의 비교 분석으로부터 모든 단계에서 확인된다. 가격 중 소비된 생산 수단의 가치를 대표하는 부분 (곧 불변 자본 부분)의 상대적 크기는 축적의 진전에 정비례하며, 노동에 대한 지급을 대표하는 부분 (곧 가변 자본 부분)의 상대적 크기는 축적의 진전에 반비례한다.
자본 기술적 구성의 이러한 변화 (곧 생산 수단에 활력을 부여하는 노동력 대비 생산 수단의 양적 증대)는 자본 가치 구성 (가변적 구성 부분을 희생하는 불변적 구성 부분의 증대)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방적업에 투하된 자본 가치 구성은 18세기 초 불변 자본 1/2, 가변 자본 1/2에서 현재 불변 자본 7/8, 가변 자본 1/8로 변화하였다. 현재 일정한 방적 노동이 소비하는 원료 및 노동 수단 등의 양은 18세기 초 대비 수백 배에 달한다. 이는 노동 생산성 향상에 따라 노동이 소비하는 생산 수단의 양은 증가하지만, 그 양에 비례하여 가치는 감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 수단의 가치는 절대적으로는 증가하나, 그 양의 증가에 비례해 증가하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 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 사이의 차이 (가치 구성)는 생산 수단의 양과 노동력의 양 사이의 차이 (기술적 구성)보다 훨씬 완만하게 증대한다. 전자의 차이는 후자의 차이와 함께 증가하지만, 그 증가 정도는 현저히 낮다.
축적의 진전이 가변 자본 부분의 상대적 크기를 감소시킬지라도, 이는 가변 자본 부분의 절대적 크기의 증대를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자본 가치가 초기 불변 자본 50%와 가변 자본 50%로 분할되었으나, 이후 불변 자본 80%와 가변 자본 20%로 변화한 상황을 가정한다. 이 기간에 최초 자본이 6,000원에서 18,000원으로 3배 증대했다면, 가변적 구성 부분 또한 1/5만큼 증대한다. 이는 종전의 가변 자본 3,000원이 이제 3,600원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에 대한 수요를 20%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종전에는 20%의 자본 증대로 충분했지만, 이제는 최초 자본의 3배 (18,000원)가 요구된다.
제4편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 발전은 대규모 협업을 전제하며, 이 전제 하에서만 노동의 분할과 결합이 조직될 수 있고, 생산 수단은 대규모 집적으로부터 절약될 수 있다. 또한, 물질적 성질상 공동으로만 사용하는 노동 수단 (예: 기계 체계 등)이 출현할 수 있으며, 방대한 자연력이 생산에 이용되고, 생산 과정이 과학의 기술 공학적 응용으로 전환될 수 있다. 상품 생산이 지배적인 제도라면, 곧 생산 수단이 개인의 소유여서 수공업자가 고립적으로 자립 생산을 하거나, 또는 자립 생산 수단이 없어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상황이라면, 앞에서 언급된 전제인 대규모 협업은 개별 자본의 증대로부터만, 또는 사회적 생산 수단과 생활 수단이 자본의 사적 소유로 전환되는 정도에 따라서만 실현된다. 상품 생산의 토대 위에서는 대규모 생산은 자본주의적 형태로만 발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별 상품 생산자들의 수중에 일정한 자본이 축적되는 것이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전제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수공업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이행하는 동안, 이러한 축적이 발생했다고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축적을 시초 축적이라 부를 수 있다. 이는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적 결과가 아니라 그 역사적 토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초 축적 자체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연구할 필요는 아직 없다. 그것이 단지 출발점을 이룬다는 것만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토대 위에서 발달하는 사회적 노동 생산성의 향상 방법은 어느 것이나 동시에 잉여 가치 (또는 잉여 생산물)의 생산을 증대시키는 방법인데, 이 잉여 가치는 다시 축적의 형성 요소가 된다. 따라서 그 방법들은 또한 자본으로부터 자본의 생산 방법 (곧 자본의 축적을 촉진하는 방법)이 된다.
잉여 가치가 자본으로 끊임없이 재전환되는 것은 생산 과정에 투입되는 자본의 크기 증대로 나타난다. 이 증대는 곧 생산 규모 확대의 기초가 되며, 이는 노동 생산성 증진 방법의 기초, 나아가, 잉여 가치 생산을 촉진하는 기초로 작용한다. 따라서 일정한 자본 축적이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전제 조건이라면, 이제 역으로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은 자본의 가속적 축적의 원인이 된다. 결과적으로, 자본 축적에 따라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발전하고, 생산 방식에 따라 자본 축적이 발전한다. 이 두 경제적 요인들은 (서로 주고받는 자극에 비례하여) 자본의 기술적 구성에 변화를 일으키며, 이 변화로 인해 가변적 구성 부분은 불변적 구성 부분에 비해 점점 더 축소된다.
모든 개별 자본은 그 규모와 관계없이 생산 수단의 집적이며, 이에 상응하여 노동자 집단을 지휘한다. 모든 축적은 새로운 축적의 수단이 된다. 자본으로 기능하는 부의 양이 증대함에 따라, 축적은 개별 자본가들의 수중으로 부의 집적을 증대시키며, 이로부터 대규모 생산의 토대와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토대를 확대시킨다. 사회적 자본의 증대는 다수의 개별 자본의 증대로부터 이루어진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각 개별 자본은 사회적 총자본에서 차지하는 몫에 비례하여 증대하며, 그 증대와 함께 생산 수단의 집적도 증대한다. 동시에 가지들이 최초 자본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독립적 자본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특히 자본가 가족들 사이의 재산 분할이 큰 기능을 하며, 이로 인해 축적과 함께 자본가의 수 또한 대체로 늘어난다. 축적 그 자체와 동일한 이 유형의 집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특징지어진다.
첫째, 다른 조건이 같다면, 사회적 생산 수단이 개별 자본가들의 수중으로 더욱 집적되는 것은, 사회적 부의 증대 정도로부터 제한된다. 둘째, 각 특정 생산 부문에서 활동하는 사회적 자본은 (서로 경쟁하는 독립적 상품 생산자로 대립하는) 다수 자본가들 사이에서 분할되어 있다. 그러므로 축적과 그에 수반되는 집적은 다수의 지점으로 분산될 뿐 아니라, 개별 기능 자본의 증대는 새로운 자본 형성과 기존 자본의 분열로부터 방해를 받는다. 최종적으로, 축적은 한편으로 생산 수단 및 노동 지휘의 집적 증가로 나타나며, 다른 한편으로 다수 개별 자본가들 상호간의 배척이라는 양면성을 보인다.
사회적 총자본이 수많은 개별 자본으로 분열되거나 그 분열된 조각들이 상호 배척하는 현상은 그들 사이의 흡수로부터 상쇄된다. 이 자본들의 흡수는 생산 수단과 노동 지휘의 단순한 집적 (축적과 동일한 의미의 집적)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형성되어 기능하는 자본들의 집적이며, 그 개별적 독립성의 파괴, 자본가로부터 자본가의 수탈, 그리고 다수 소자본을 소수 대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이다. 이 흡수 과정이 앞선 집적 과정과 구별되는 지점은, 흡수 과정은 이미 존재하고 기능하는 자본들의 분배 변화만을 전제하며, 따라서 그 적용 범위는 사회적 부의 절대적 증대나 축적의 절대적 한계로부터 제한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곳에서 어떤 한 사람의 수중에 자본이 대량으로 증대하는 것은, 다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본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축적·집적과 구별되는 진정한 집중이다. 이 자본 집중의 법칙 또는 자본이 자본을 흡수하는 법칙을 여기서 자세히 전개할 수는 없다. 몇 가지 사실만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경쟁전은 상품 값을 싸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상품 값이 싸지는 것은,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노동 생산성에 의존하며, 노동 생산성은 생산 규모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대자본은 소자본을 격파한다.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발전에 따라 일반적인 조건에서 사업을 경영하는 데 필요한 개별 자본의 최소 금액이 증대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따라서 비교적 작은 자본은 대공업이 산발적으로나 불완전하게 장악하고 있는 생산 부문으로 몰려든다. 이곳의 경쟁은 적대적인 자본들의 수에 정비례하고, 그 크기에 반비례해 격렬해진다. 경쟁은 언제나 다수 소자본가의 멸망으로 끝나며, 그들의 자본은 부분적으로는 승리자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부분적으로는 사라진다. 그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과 함께 전혀 새로운 힘인 신용 제도가 등장한다.
[엥겔스: (이하는 마르크스가 불어판에 넣은 내용을 바탕으로 엥겔스가 제4독어판에 추가한 것이다. CW35 (Progress Publishers, 1996년)에는 이 추가분 전체가 CW 편집자의 실수로 빠져 있다.)]
이 신용 제도는 처음에는 축적의 겸손한 조수로 은밀히 등장하여, 사회 표면에 거액 또는 소액으로 흩어져 있는 화폐 재원을 보이지 않는 실로 개별 자본가 또는 연합한 자본가들 (예: 주식 회사)의 수중으로 끌어모은다. 그러나 신용 제도는 곧 경쟁전에서 새로운 무서운 무기로 변모하며, 결국에는, 자본 집중을 위한 거대한 사회적 기구로 전환된다.
자본주의적 생산과 축적의 발전에 비례하여 집중의 가장 강력한 두 지렛대인 경쟁과 신용 또한 발전한다. 이와 함께, 축적의 진전은 집중될 소재, 곧 개별 자본을 증대시킨다. 동시에 자본주의적 생산의 확대는, 한편으로는 거대한 사업 (이 실현을 위해 선행된 자본 집중이 필요하다)에 대한 사회적 욕구를 창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 필요한 기술적 수단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오늘날 개별 자본들을 끌어모으는 흡수력과 집중의 경향은 과거 어느 때보다 강하다. 집중 운동의 상대적 크기와 힘이 어느 정도는 이미 달성한 자본주의적 부의 크기와 경제 기구의 우월성으로부터 결정된다 하더라도, 집중의 진전은 결코 사회적 자본 규모의 적극적 증대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다음은 집중과 집적의 차이점이다. 집적은 확대 재생산의 다른 명칭에 불과하지만, 집중은 단순히 기존 자본의 분배를 변화시키면서, 곧 사회적 자본의 구성 부분들의 양적 편성을 단순히 변경시키면서 일어날 수 있다. 한 곳에서 한 사람의 수중에 자본이 거대한 양으로 증대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의 수중에서 자본이 강제로 빼앗겼기 때문이다. 어떤 일정한 산업 부문에서, 거기에 투하된 모든 개별 자본이 단 하나의 자본으로 합병한다면 집중은 극한에 도달한다. 일정한 사회에서는 사회적 자본 전체가 한 사람의 자본가 또는 하나의 자본주의적 기업의 수중으로 통합될 때에만 이러한 극한에 도달한다.
집중은 산업 자본가들에게 그들의 사업 규모를 확대할 수 있게 하면서 축적을 보완한다. 이 사업 규모의 확대가 축적의 결과이든 집중의 결과이든, 또는 집중이 합병이라는 폭력적 방법으로 수행되든 (이 경우, 어떤 자본이 다른 자본들을 흡수하는 주도적인 중심이 되어 개별적 응집력을 파괴하고, 그 파편들을 끌어 모은다), 아니면 이미 형성되었거나 형성 과정에 있는 다수 자본들의 융합이 주식 회사 설립이라는 더 부드러운 방법으로 진행되든, 그 경제적 효과는 동일하다.
어디에서나 기업체들의 규모 확장은 많은 사람들의 집단 노동을 더 포괄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출발점이 되며, 또한 그들의 물질적 추진력을 더 폭넓게 발전시키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 곧 관습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는 고립적인 생산 과정을, 사회적으로 결합되고 과학적으로 설계되는 생산 과정으로, 점차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
축적 (재생산이 원형에서 나선형 운동으로 이행하며, 자본을 점진적으로 증대시키는 것)은 집중 (사회적 자본 구성 부분들의 양적 편성만을 변경시키는 것)에 비해 분명히 매우 느린 과정이다. 약간의 개별 자본들이 축적으로부터 증대되어 철도를 부설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면, 세계에는 아직도 철도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집중은 주식 회사로부터 이를 순식간에 수행하였다. 집중은 이와 같이 축적의 작용을 강화하고 촉진함과 동시에, 자본의 기술적 구성 변혁 (가변 자본을 희생하며 불변 부분을 증대시키고, 이에 따라 노동 수요를 상대적으로 감소시키는 것)을 확대하고 촉진한다. 집중으로부터 하룻밤 사이에 융합되는 자본량은, 다른 자본량과 마찬가지로 (물론 더 급속하게) 재생산되고 증대하며, 이리하여 사회적 축적의 강력한 새로운 지렛대가 된다. 따라서 사회적 축적의 진전에 관해 논할 경우, 우리는 오늘날 거기에 집중의 작용을 암암리에 포함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일반적 축적 과정에서 형성된 추가 자본 (제24장 제1절 참조)은 특히 새로운 발견과 발명, 그리고 산업적 개량 일반의 이용을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기존 자본 역시 언젠가는 완전히 갱신되어야 할 시기에 도달하며, 그때에는 종래의 형태를 벗고 기술적으로 완성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렇게 되면, 더 많은 기계와 원료를 운용하는 데 더 적은 노동만으로 충분하게 된다. 이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노동에 대한 수요의 절대적 감소는, 이 갱신 과정을 통과하는 자본이 자본의 집중 운동으로부터 이미 집중되어 있을수록, 분명히 그만큼 더 심화된다. 따라서 축적 과정에서 형성된 추가 자본은 그 규모에 비해 더욱더 소수의 노동자를 흡수한다.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구성으로 주기적으로 재생산되는 기존 자본은 종전에 고용했던 노동자들을 더욱더 많이 축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