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시간급

 

임금에서 두 가지 기본 형태는 시간 임금과 성과 임금이다. 시간 임금은 노동의 지속 시간을, 성과 임금은 생산된 제품의 수량을 임금의 크기를 결정하는 직접적인 기준으로 삼는다. 이 방식들은 노동력의 가치를 보상하는 가장 기본적 형태이며, 서로 보완적으로 사용되거나, 특수한 조건에 따라 상호 번형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일급은 곧 노동력의 일일 차기를 노동일의 전형적 길이로 환산한 형태이다. 따라서 시간 임금은 그 자체가 하루 노동력의 가치를 노동 시간으로 나눈 몫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가는 이 일급을 불변으로 두고, 노동 시간을 연장하는 데서 직접적 이익을 얻으며, 이는 시간 임금을 하락시켜 연장된 노동 시간에 상응하는 잉여 가치의 증대를 실현하는 가장 명료한 수단이다.

 

시간 임금의 형태는 노동력의 가치를 노동 시간의 길이와 독립된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 노동일의 연장은 노동력의 시간당 가격, 곧 시간급을 감소시키지 않는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그러나 노동일이 길어질수록, 노동자는 더 적은 임금으로 더 많은 노동 시간을 제공하게 되며, 이는 하루 일당이 불변일 때도, 시간급은 하락함을 의미한다. 결국, 시간 임금은 노동일의 길이에 대한 자본가의 무제한적 착취 여지를 은폐하는 기본 형태이다. 시간 임금이 노동일의 길이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형태는, 노동자가 일정한 노동량에 대해 실제 받는 노동의 가격을 모호하게 한다. 노동자는 노동일의 길이에 관계없이 동일한 일급을 받더라도, 이 일급이 실제로는 노동력의 가치를 노동 시간으로 나눈 몫, 곧 시간당 노동 가격을 나타낸다는 점이 중요하다. 자본가는 이 측정 단위를 활용하여, 노동력의 가치 자체를 변경하지 않으면서도 노동일의 연장으로부터 잉여 가치를 증대시킨다. 따라서 시간 임금의 분석은 명목 임금과 실질 임금, 그리고 임금 총액과 노동 가격을 구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분석은 명목 임금이 불변일지라도, 실질적인 노동 가격은 하락할 수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노동일이 연장될 경우, 일급은 그대로 유지되더라도, 시간당 노동 가격은 분모인 노동 시간의 증가로 인해 필연적으로 감소한다. 반대로, 노동의 내포적 또는 외연적 크기가 증대하면, 노동의 가격에는 변도이 없거나 하락하더라도, 일급은 오히려 상승할 수 있다. 이처럼 명목적인 일급 또는 주급의 움직임은 노동의 가격, 곧 노동력의 가치를 지불하는 실제 비율과는 독립적이거나 역행하는 현상을 보일 수 있으며, 이는 임금 지불 형태가 잉여 가치 창출을 은폐하는 기제로 작용함을 입증한다. 결론적으로, 일급이나 주급의 총액은 두 가지 변수로부터 결정된다.

 

1. 노동 가격 자체, 곧 노동력의 가치 변동이나 그로부터 편차에 따른 시간당 지불액이다.

 

2. 노동의 가격이 고정되어 있다면, 실제로 노동자가 제공한 하루 또는 일주일의 노동량에 의존한다.

 

결국, 임금의 현상 형태인 일급은 노동 가격과 노동 시간이라는 두 가지 요소의 결합된 결과이며, 이 둘 중 어느 하나의 변화도 임금 총액의 변동을 초래한다.

 

시간 임금 방식은 노동일의 평균 길이에서 노동력의 가치를 보상하고자 필요한 필수 노동 시간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노동자에게 불완전 취업의 고통을 야기한다. 노동력의 하루 가치가 6시간의 노동 생산물로 정해지고, 시간당 노동 가격이 1/4원으로 계산되더라도, 노동자가 12시간 미만을 일하게 되면, 그는 노동력의 가치에 상응하는 임금을 벌지 못한다. , 그는 필수 노동 시간인 6시간의 가치 생산물(3)을 완전히 취득하지 못하게 되어, 노동의 과도 연장이 낳는 파괴적 결과와 더불어, 불완전 취업이 초래하는 생계 곤란의 또 다른 원인이 된다.

 

시간 임금이 정해지면 자본가는 일정한 일급이나 주급을 지급할 의무 없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노동자를 임의의 시간만큼만 고용하고 해당 시간만큼만 지불하게 된다. 이 경우, 본래 시간 임금의 측정 단위였던 [노동력의 하루 가치] / [평균 노동일의 시간 수]의 비율은 노동일의 표준이 사라지면서 그 의미를 상실한다. 이로 인해, 지불받는 노동과 지불받지 않는 노동 사이의 관계는 단절되며, 자본가는 노동자의 생존 유지에 필요한 노동 시간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잉여 노동을 착취할 수 있다.

 

자본가는 고용의 규칙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의 순간적 이익에 따라 혹독한 과도 노동과 상대적 · 절대적 작업 중단을 교대로 강요하며, ‘표준적인 노동 가격을 지급한다는 구실로 노동일의 무분별한 연장을 정당화한다. 따라서 런던의 건설 노동자들이 이러한 형태의 시간 임금 도입에 반대하여 봉기(1860)한 일은 노동일의 무제한적 착취를 막으려는 정당한 조치였다. 노동일의 법적 제한은 고용 감소 자체를 막지는 못하지만, 이러한 해로운 초과 노동 관행에 종지부를 찍는다.

 

일급이나 주급은 상승하더라도, 노동의 시간당 가격은 명목상 불변이거나 오히려 하락할 수 있으며, 이는 노동일이 관습적인 길이를 초과하여 연장될 때 발생한다. 분수 [노동력의 하루 가치] / [노동일]에서,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 시간의 증가에 비례하여 증가하나, 노동력 소모의 심화로 인해, 그 증가 속도는 노동 시간의 증가보다 더 빠르다. 그럼에도, 시간 임금이 지배하는 산업 부문에서는 노동일의 법적 제한이 없을 때, 10시간과 같은 특정 시점까지만을 표준 노동일로 간주하는 관습이 자생적으로 형성되었다. 이 표준 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은 추가 임금을 요구하는 근거가 되며, 이는 장시간 노동에 따른 노동력의 급격한 가치 상승에 대한 자연스러운 대응이다.

 

표준 한계를 넘어서는 노동 시간은 시간외 노동으로 간주되어, 흔히 그 크기가 미미할지라도 초과 임금이라는 더 나은 시간 임금을 받게 된다. 이 경우, 표준 노동일은 현실적 노동일의 한 부분으로만 존재하며, 현실적 노동일은 연간으로 볼 때, 표준 노동일보다 긴 경우가 빈번하다. 노동일의 연장에 따른 노동 가격의 증대는 영국 일부 산업 부문에서 노동자가 표준 시간 내의 낮은 임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초과 임금을 받기 위한 시간외 노동에 강제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노동일의 법적 제한은 이러한 기만적이고, 착취적인 특별 임금 관행을 근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장시간 노동이 일반적인 산업 부문일수록 임금 수준이 더 낮다는 사실은 널리 인정된다. 공장 감독관 레드그레이브의 20년간(1839-1859)의 비교 연구는 이를 입증하는데, 10시간 공장법의 적용을 받는 공장들에서는 임금이 상승한 반면, 하루 14시간에서 15시간 작업하는 공장들에서는 임금이 오히려 저하했다. 이는 노동일의 무제한적 연장이 노동력의 시간당 가격을 떨어뜨리고, 노동자에게 과도한 노동 시간을 강요하여 생계 유지를 위해 더 낮은 임금을 수용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적 착취 기제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노동의 가격이 낮을수록, 노동자는 비참한 수준의 평균 임금이라도 얻고자 더 큰 노동량을 투입해야 하며, 이는 곧 노동일의 연장을 의미한다. 이 조건에서 노동의 낮은 가격은 노동 시간을 연장시키는 직접적인 동기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 시간의 연장은 오히려 노동력의 소모를 심화시켜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결과적으로, 노동 가격을 더욱 하락시켜 일급이나 주급의 추가적인 저하를 초래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노동 가격은 [노동력의 하루 가치] / [주어진 시간 수의 노동일]로 결정되므로, 노동일의 연장은 그 자체로 노동 가격을 하락시킨다. 장기적으로, 자본가가 노동일을 연장할 수 있는 동일한 조건은 그가 증대된 노동 시간의 총 가격, 곧 일급이나 주급이 저하될 때까지 노동 가격을 낮출 수 있게 하며, 실제로 그렇게 실행된다.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발생하는데, 한 노동자가 1.5명 또는 2명분의 노동을 수행하면, 시장에서 노동력의 공급은 일정하더라도 노동의 공급은 증가한다. 이는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심화시켜 자본가로 하여금 노동 가격을 저하시킬 수 있게 만들고, 이 노동 가격의 저하는 다시 노동 시간을 더욱 연장하는 원인이 된다. 더 나아가, 이처럼 비정상적이고 지불받지 않는 노동량(사회적 평균을 초과하는 잉여 노동)을 임의로 이용할 수 있는 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본가 자신들 사이의 경쟁의 원천으로 된다.

 

상품 가격의 일부는 노동 가격으로 구성되지만, 지불되지 않는 노동(잉여 노동)의 가격은 상품 가격 계산에서 제외될 수 있으며, 자본가는 이를 구매자에게 일종의 선물로 제공한다. 이것이 경쟁이 촉발하는 첫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 경쟁은 노동일 연장으로 창출된 초과된 잉여 가치의 적어도 일부를 상품 판매 가격에서 제외하도록 만든다. 결과적으로, 초과적으로 낮아진 상품 판매 가격이 형성되는데, 이는 처음에는 간헐적으로 발생하다가 점차 고착화된다. 이 낮은 판매 가격은 이제 거꾸로 과도한 노동 시간에 대한 비참한 임금을 확립하는 토대가 된다. 경쟁의 역동성에 대한 상세 분석은 여기서 다루지 않으나, 이러한 운동의 존재를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잠시 자본가 자신의 논리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버밍엄 공장주들의 말은, 극심한 경쟁으로 인해 고용주로 수치스러운 행동을 감행할 수밖에 없으며, 그럼에도 수익은 증가하지 않고 오직 대중들만이 이득을 본다는 현실을 시사한다.’

 

이는 과도한 노동 시간으로부터 잉여 가치 창출이 상품 가격 인하를 초래하고, 결국 경쟁이라는 이름 아래 모두에게 불리한 조건을 만든다는 점을 명백히 한다. 이와 관련하여, 런던의 빵 제조업자 중 표준 가격을 고수하는 이들은, 헐값에 빵을 파는 경쟁자들을 의회 조사 위원회 앞에서 다음과 같이 고발한다.

 

헐값 판매자들은 첫째, 상품의 불량화로부터 대중을 기만하고, 둘째, 노동자들에게 12시간 임금을 지불하면서 18시간의 노동을 착취하면서 생존한다. 이는 지불받지 않는 노동을 기반으로 경쟁을 수행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빵 제조업자들 사이의 경쟁은 야간 노동의 폐지를 어렵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밀가루 가격 변동에 따른 생산비 이하의 헐값 판매자는 직공들로부터 더 많은 노동량을 짜내어 자신의 손실을 보상한다. 경쟁자가 18시간 또는 20시간을 착취한다면, 12시간 노동만을 시키는 판매자는 상품의 판매 가격에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이 과도 노동에 대한 정당한 지급을 요구할 수 있다면, 이러한 문제들은 해결될 것지만, 헐값 판매자에게 고용된 대다수의 노동자는 외국인이나 아동들로, 이들은 어떤 임금이든 수용할 수밖에 없는 취약한 처지에 놓여 있다.’

 

이러한 자본가의 탄식은 생산 관계의 피상적인 모습만이 그의 의식에 반영됨을 보여준다. 자본가는 표준적인 노동 가격조차도 이미 일정한 양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을 포함하고 있으며, 바로 이 잉여 노동이 표준적인 이윤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표준 노동일에 대해 일급을 완전히 지급했다고 여기기 때문에, 잉여 노동 시간이라는 범주 자체가 그에게는 부재하다. 다만, 일반적인 노동 가격에 알맞은 한계를 넘는 노동일의 연장, 곧 시간외 노동만이 그에게 의미를 갖는다. 그는 심지어 헐값으로 파는 경쟁자들에게 시간외 노동에 대한 추가 임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하면서도, 이 추가 임금 역시 보통의 노동 시간 가격과 마찬가지로 지불받지 않는 노동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12시간 노동일에서 1시간 가격이 1/4원이고, 시간외 노동 1시간의 가격이 1/3원이라고 할 때, 자본가는 첫 번째 경우, 1시간 노동 중 절반(1/2), 두 번째 경우에도 여전히 1/3을 무상으로 취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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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임금

 

19. 노동력의 가치(가격)가 임금으로 전환

 

부르주아 사회의 표면에서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 가격, 곧 일정한 양의 노동에 대한 대가로 지불되는 일정한 양의 화폐로 나타난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노동의 가치를 언급하며, 그 화폐적 표현을 노동의 필요 가격 또는 자연 가격이라고 부른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의 시장 가격은 이러한 필요 가격 상하로 움직인다고 논한다.

 

상품 가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상품 생산에 투입된 사회적 노동의 객관적 형태다. 이 가치 크기의 측정은 상품에 포함된 노동량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12시간 노동일의 가치를 12시간 노동에 포함된 12시간 노동으로 결정한다면 순전한 동어 반복이다. 노동의 가치 자체를 노동량으로 측정하려는 시도는 순환 논리에 빠지게 된다.

 

노동이 상품으로 시장에서 판매되려면, 판매되기 전에 반드시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에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현실적 존재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는 노동을 파는 것이 아니라 그 상품 자체를 팔게 된다. 이 논리는 노동 그 자체가 아닌 노동력만이 상품으로 거래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 모순을 무시하더라도, 화폐(대상화된 노동)와 살아있는 노동의 직접적 교환은 가치 법칙을 폐지하거나 (자본주의적 생산 토대 위에서 비로소 자유롭게 전개되는), 또는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를 폐지한다 (바로 임금 노동에 기반을 두는). 예를 들어, 12시간 노동일이 6원의 화폐 가치로 대상화된다고 가정하자. 두 가지 경우가 발생한다.

 

1. 등가물 교환: 노동자가 자신의 12시간 노동 대가로 6원을 받는다. 그의 노동 가격은 그의 노동 생산물 가격과 동일하다. 이 경우, 그는 노동의 구매자에게 잉여 가치를 전혀 생산하지 않는다. 6원은 자본으로 전환될 수 없으며, 이는 곧 자본 자본주의적 생산 토대 자체의 소멸로 이어진다. 그런데 바로 이 토대 위에서 노동자는 자기 노동을 판매하고, 그의 노동은 임금 노동이 된다.

 

2. 부등가물 교환: 노동자가 12시간 노동에 대해 6원보다 적게, 12시간 노동보다 적은 양의 노동을 받는다. 이 경우, 12시간 노동이 10시간, 6시간 등 동일하지 않은 크기들과 교환된다. 이처럼 동일하지 않은 크기들을 같다고 간주하는 것은 가치 규정을 폐기하는 결과를 낳는다. 스스로를 폐기하는 이러한 모순은 아예 법칙으로 표명되거나 공식화될 수조차 없다.

 

더 많은 양의 노동과 더 적은 양의 노동 사이의 교환을 대상화된 노동과 살아있는 노동이라는 형태상의 차이에서 끌어내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이러한 해결책은 상품 가치가 거기에 실제로 대상화된 노동량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생산에 필요한 살아있는 노동량으로 결정된다는 점에서 더욱 불합리하다.

 

예를 들어, 한 상품이 6시간의 노동을 대표한다고 하자. 3시간 만에 그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발명이 이루어진다면, 그 상품의 가치는 (심지어 이미 생산된 상품의 가치까지도) 절반으로 떨어진다. 이제 그 상품은 이전의 6시간 대신 3시간의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만을 대표하게 된다. 따라서 상품 가치의 크기는 대상화된 노동량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품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으로 결정된다.

 

상품 시장에서 화폐 소유자와 직접 마주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자다. 후자가 판매하는 상품은 바로 그의 노동력이다. 노동이 현실적으로 시작될 때, 노동력은 이미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시점부터는 더 이상 판매될 수 없다. 노동은 가치 실체이자 내재적 척도이지만, 그 자체는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노동 가치라는 표현은 가치 개념을 완전히 소멸시킬 뿐 아니라, 역으로 그 반대물로 만든다. 이것은 토지 가치와 같은 환상적 표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적 표현은 생산 관계 자체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본질적 관계의 현상 형태를 나타내는 범주이다. 현상에서는 사물이 흔히 거꾸로 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정치경제학을 제외한 모든 과학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은 노동 가격이라는 범주를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비판 없이 빌려와, 단지 이 가격이 어떻게 결정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데 그쳤다. 고전파는 수요와 공급 사이의 관계 변동이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노동 가격 변동 그 자체, 곧 시장 가격이 일정한 평균 수준의 상하로 움직인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음을 곧 인식했다.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고, 기타 조건이 불변할 때, 가격 진동은 멈춘다. 이때 수요와 공급은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게 되며, 상품 가격(노동 가격)은 수요와 공급 관계와 무관하게 결정되는 노동의 자연 가격이 된다. 따라서 이 자연 가격이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밝히는 것이 주요 연구 대상으로 전환되었다. 또는 시장 가격의 변동을 일정 기간(: 1) 동안 고찰하여, 그 변동들이 서로 상쇄되어 평균적인 불변 크기를 낳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 불변 크기는 (상호 상쇄되는 편차와는 달리) 결정되어야만 했다. 노동의 우연적인 시장 가격들을 지배하고 조절하는 가격, 곧 중농주의자들의 노동의 필요 가격또는 애덤 스미스의 자연 가격은 다른 상품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화폐로 표현된 노동 가치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와 같이, 정치경제학은 노동의 우연적인 가격들을 파헤쳐 그 가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가치는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더 깊이 들어가 생산비로부터 규정되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생산비, 곧 노동자 자신을 생산 또는 재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 질문이 정치경제학에서 은연중에 최초의 질문(노동 가치)을 대체하게 되었다. 이는 정치경제학이 노동 그 자체의 생산비를 문제 삼으면서 악순환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이 노동 가치라고 부른 것은 사실상 (노동자라는 인물 속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노동력 가치이다.

 

노동력은 (기계가 수행하는 작업과 다르듯이) 자기 자신의 기능인 노동과는 구별된다. 정치경제학자들은 노동의 시장 가격과 이른바 노동 가치 사이의 차이, 노동 가치와 이윤율 사이의 관계, 상품 가치 중 노동 수단으로부터 생산되는 부분과 노동 가치 사이의 관계 따위에 집착한 나머지, 분석 과정에서 노동의 시장 가격으로부터 가정된 노동의 가치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이 노동 가치 자체를 다시 노동력의 가치로 해소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은 자기 분석의 이러한 성과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고, 문제가 되는 가치 관계의 최종적이고 적절한 표현으로 노동의 가치’, ‘노동의 자연 가격등의 범주를 무비판적으로 채용했다. 그 결과, (잉여가치학설사에서 볼 수 있듯이) 해결할 수 없는 혼란과 모순에 빠졌으며, 동시에 (원칙적으로 현상의 겉모습에만 충실한) 속류 경제학에 활동할 튼튼한 무대를 제공하게 된다.

 

다음으로 노동력의 가치(그리고 가격)가 어떻게 임금이라는 전환된 형태로 표현되는가를 살펴본다. 알려진 바와 같이, 노동력의 하루 가치는 노동자의 일정한 수명을 기준으로 계산되며, 이 수명에는 노동일의 특정한 길이가 대응한다. 관습적인 1노동일은 12시간이고, 노동력의 하루 가치가 3(6시간의 노동이 대상화된 가치의 화폐적 표현)이라고 가정한다. 노동자가 3원을 받는다면, 그는 (12시간 기능하는) 자신의 노동력 가치를 받는다. 이제 노동력의 이러한 하루 가치가 하루 노동 그 자체의 가치로 표현되기 때문에, 12시간의 노동은 3원의 가치를 갖는다는 (엉터리) 공식이 도출된다. 이에 따라, 노동력의 가치가 노동의 가치를 결정하며, 또는 화폐적 표현으로 노동의 필요 가격을 결정하듯이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력의 가격이 노동력의 가치와 다르다면, 노동의 가격 역시 노동의 가치와 달라진다.

 

노동의 가치라는 것은 노동력의 가치를 나타내는 불합리한 표현에 지나지 않으므로, 노동의 가치가 노동의 가치 생산물보다 언제나 적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이유는, 자본가는 항상 노동력이 자기 자신의 가치를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더 오래 기능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인용한 예에서, 12시간 기능하는 노동력의 가치는 3원이며, 이 가치를 재생산하는 데는 6시간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 노동력이 새로 생산된 가치는 6원이다. 이는 노동력이 사실상 12시간 기능했으며, 노동력으로부터 새로 생산된 가치는 노동력 자체의 가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기능하는 시간의 길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결국, 6원의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 그 자체가 3원의 가치를 갖는다는 얼핏 보아 불합리한 결과에 도달한다. 또한, 우리는 노동일의 지불받는 부분 (6시간 노동)을 대표하는 3원의 가치가 (지불받지 않는 6시간을 포함하는) 전체 12시간 노동일의 가치 또는 가격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임금 형태는 노동일이 필요 노동과 잉여 노동으로, 또 지불받는 노동과 지불받지 않는 노동으로 분할된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전체 노동이 지불받는 노동으로 나타난다.

 

부역 노동에서는 사정이 달라, 농노가 자신을 위해 하는 노동과 영주를 위해 하는 강제 노동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매우 명확하게 구별된다. 노예 노동에서는 노동일 중 노예가 자기 자신의 생활 수단 가치를 대체하는 부분 (사실상 자기 자신을 위해 노동하는 부분)조차도 주인을 위한 노동으로 나타난다. 노예의 전체 노동은 지불받지 않는 노동으로 보인다. 이와 반대로, 임금 노동에서는 잉여 노동 (지불받지 않는 노동)까지도 지불받는 노동으로 보인다. 노예 노동에서는 소유 관계가 노예의 자기 자신을 위한 노동을 은폐하지만, 임금 노동에서는 화폐 관계가 임금 노동자의 무상 노동을 은폐한다.

 

이로부터 노동력의 가치와 가격이 임금 형태로 (노동 그 자체의 가치와 가격으로) 전환되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 의의를 가지는가를 알 수 있다. 현실적 관계를 은폐하고 그와 정반대되는 관계를 보여주는 이 현상 형태야말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모든 정의 관념,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모든 신비화, 자유에 대한 자본주의의 모든 환상, 속류 경제학의 모든 변호론적 속임수 등의 토대가 된다.

 

임금의 비밀을 폭로하는 데 세계 역사는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러나 이 현상 형태의 필연성과 존재 이유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은 없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교환은 최초에는 다른 모든 상품의 구매·판매와 똑같은 형태로 우리의 지각에 나타난다. 구매자는 일정한 화폐액을 주며, 판매자는 화폐와는 다른 물건을 준다. 법률 의식은 이 경우, 기껏해야 법률적으로 동등한 공식들, 네가 주기 때문에 나는 준다. 네가 하기 때문에 나는 준다. 네가 주기 때문에 나는 한다. 네가 하기 때문에 나는 한다.”에서 표현되는 내용의 차이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교환 가치와 사용 가치는 그 자체로 서로 같은 단위로 잴 수 없는 크기이므로, ‘노동의 가치’, ‘노동의 가격이라는 표현이 면화의 가치’, ‘면화의 가격보다 더 불합리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에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제공한 뒤에야 대가를 받는다는 사정이 더해진다. 지불 수단으로 화폐는 제공된 물건의 가치 또는 가격, 따라서 이 경우에는 제공된 노동의 가치 또는 가격을 추후에 실현하듯이 보인다.

 

마지막으로,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제공하는 사용 가치는 실제로는 그의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력의 기능, 곧 재봉 노동, 제화 노동, 방적 노동 등 일정한 형태의 유용 노동이다. 바로 이 노동이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를 생산하는 일반적 요소라는 것, 그래서 이 속성으로 노동은 다른 모든 상품과 구별된다는 것은 일상적인 의식으로는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12시간 노동의 대가로 6시간의 가치 생산물 (3)을 받는 노동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에게는 사실상 12시간 노동이 3원을 구매하는 수단일 따름이다. 그의 노동력 가치는 그의 일상적 생활 수단의 가치 변동에 따라 3원에서 4원으로, 또는 2원으로 변동할 수 있다. 또한 노동력 가치가 불변인 경우에도, 그 가격은 수요·공급 관계의 변동 결과로 4원으로 등귀하거나 2원으로 저하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는 언제나 12시간 노동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그가 받는 등가물의 모든 양적 변동은 그에게 필연적으로, 그의 12시간 노동의 가치 또는 가격의 변동으로 나타난다. 이 사정은 노동일을 불변의 크기로 본 애덤 스미스로 하여금, 비록 생활 수단의 가치가 변동하여 같은 노동일이 노동자에게 더 많거나 더 적은 양의 화폐로 표시된다 하더라도, 노동의 가치는 불변이라는 그릇된 주장을 하게 했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가를 보자. 그는 될수록 적은 양의 화폐로 될수록 많은 노동을 얻으려 한다. 따라서 실제로 그의 관심사는 오직 노동력의 가격과 이것의 기능이 생산해 내는 가치 사이의 차이뿐이다. 그런데 그는 모든 상품을 최대한 싸게 사려 하며, 자신의 이윤 원천을 언제나 가치 이하로 구매하고 가치 이상으로 판매하는 뛰어난 상술로만 설명한다. 그러므로 노동의 가치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그가 이 가치를 실제로 지불한다면, 자본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도 없을 것이며, 그의 화폐는 자본으로 전환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더욱이, 임금의 현실적 운동은 노동력의 가치가 아닌 그 기능, 곧 노동 그 자체의 가치에 대해 지불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듯한 현상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들은 두 개의 큰 부류로 분류한다.

 

1. 노동일의 길이 변동에 따라 임금이 변동하는 경우다.

 

기계를 일주일 빌리는 비용이 하루 빌리는 비용보다 더 들기 때문에, 지불하는 것은 기계의 가치가 아니라 기계가 행한 작업의 가치에 대해서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2.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상이한 노동자들의 임금 차이 (격차)이다.

 

이러한 개인적 차이는 노예 제도에서도 확인되는데, 노예 제도에서는 노동력 자체가 아무런 가림 없이 공공연하게 판매되므로, 매매되는 것이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이라는 환상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다만 구별점은 임금 노동 제도에서는 노동력이 노동자 자신으로부터 판매되지만, 노예 제도에서는 제3자로부터 판매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평균 이상의 노동력에서 나오는 이득과 평균 이하의 노동력에서 나오는 손실은 노예 제도에서는 노예 소유자의 몫이 되지만, 임금 노동 제도에서는 노동자 자신의 몫이 된다는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어쨌든, ‘노동의 가치와 가격또는 임금이라는 현상 형태는 그것이 나타내는 본질적 관계, 곧 노동력의 가치와 가격과는 구별된다. 따라서 모든 현상 형태들과 그것들 배후에 숨어 있는 실체로부터 타당한 원칙은 여기에서도 적용된다. 현상 형태는 통속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직접 자연 발생적으로 재생산되지만, 그 배후에 숨어 있는 본질적 관계는 과학으로부터 먼저 규명되어야 한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은 사물의 참된 모습에 접근하고 있지만, 그것을 의식적으로 정식화하지 못하고 있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이 그 부르주아적 겉껍질을 벗어 던지지 않는 한 그렇게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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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잉여 가치율을 표시하는 여러 가지 공식

 

이미 본 바와 같이, 잉여 가치율은 다음과 같은 공식들로 표시된다.

 

. 잉여가치(s) / 가변 자본(v) = 잉여 가치 / 노동력의 가치 = 잉여 노동 / 필요 노동

잉여 가치율의 또 다른 파생 공식은 잉여 가치(s) / 노동력의 가치 총합으로 표시되는데, 이는 잉여 가치와 가변 자본(v)의 관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 관계는 잉여 노동 시간 / 필요 노동 시간이라는 시간의 비율로도 표현한다. , 가치 비율과 시간 비율은 동일한 실체를 상이한 측정 단위로 나타낼 뿐이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은 이 공식들을 명시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이미 그 내용적 기반을 확립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공식들은 잉여 가치와 노동력의 본질적 관계를 밝히는 데 있어 가장 엄밀하고 전문적이다.

 

. 잉여 노동 / 노동일 = 잉여 가치 / 생산물의 가치 = 잉여 생산물 / 총 생산물

 

불변 부분의 제외는 이 공식들이 오직 노동력으로부터 새로이 생산된 가치 생산물(v+s)만을 전체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 비율은 노동일 전체에 대한 잉여 노동 시간의 비율이며, 동시에 새로운 가치 중 잉여 가치가 점유하는 비중을 나타낸다. 이 점은 오로지 가변 자본(v)에 대해서만 잉여 가치를 측정하여 착취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제1의 공식과 개념적으로 구별된다. 여기서는 잉여 가치와 생산된 가치 총량 사이의 관계가 시간, 가치, 생산물이라는 세 가지 모습으로 동일하게 표현된다.

 

2의 공식들에서 잉여 가치율이 잘못 표현되는 이유는 그 분모가 노동일 전체, 새로 생산된 가치 총합, 또는 총 생산물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 잉여 가치율을 6시간의 잉여 노동 / 12시간의 노동일을 표시하면 50%가 되며, 3원의 가치 / 6원의 생산물 가치로 표시해도 50%가 된다. 50%라는 수치는 자본가가 노동력에 지출한 가변 자본에 대비하여 잉여 가치를 얼마나 착취했는지, 다시 말해, 필요 노동 대비 잉여 노동의 비율을 100%로 보여주는 본래의 착취도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이 파생 공식들(.)은 착취도를 감추거나 축소하는 효과를 낳는다.

 

6시간의 잉여 노동 / 6시간의 필요 노동 = 3원의 잉여 가치 / 3원의 가변 자본 = 100%

 

그런데 공식 .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된다.

 

6시간의 잉여 노동 / 12시간의 노동일 = 3원의 잉여 가치 / 6원의 가치 생산물 = 50%

 

이러한 100% 상한이라는 그릇된 법칙은 자본의 착취도를 필연적으로 은폐한다. 잉여 가치(s)는 가변 자본(v)을 얼마든지 초과하여 증가할 수 있으며, 이로부터 잉여 가치율(s/v)100% 이상으로 상승한다. 그러므로 노동일 또는 가치 생산물의 분할 비율(s / [v+s])을 자본의 자기 증식도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윤 창출의 본질적 동력을 왜곡하는 행위이다. 오직 제1의 공식(s/v)만이 가변 자본에 대한 잉여 가치의 비율로부터 자본의 노동 지배 정도를 정확하고 엄밀하게 나타낸다.

 

그러므로 잉여 가치율(s/v)만이 자본의 착취율을 100%를 넘어 300%(3:1)까지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공식이다. 잉여 노동/노동일 공식(s/[v+s])은 잉여 노동이 필연적으로 노동일 전체의 부분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적 한계에 갇히게 된다. 잉여 노동이 노동일과 같아지려면 필요 노동이 영(0)이 되어야 하지만, 잉여 노동 자체가 필요 노동을 전제로 성립하는 기능이기에 필요 노동의 소멸은 곧 잉여 노동의 소멸을 의미한다. 따라서 제2의 공식은 100%를 초과할 수 없으며, 자본의 자기 증식도를 은폐하는 분할 비율의 표현에 불과하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이 노동일을 불변의 크기로 전제하는 방법은 공식 .의 사용에서 비롯되었다. 이 공식은 잉여 노동을 언제나 고정된 길이의 노동일이라는 전체 크기에 대비시키기 때문이다. 가치 생산물의 분할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에도, 그 대상인 가치 생산물은 이미 일정한 길이를 가진 노동일의 대상화된 형태이므로, 착취도가 가변 자본에 대한 잉여 가치의 비율(s/v)이 아닌, 노동일 총량에 대한 잉여 노동의 비율(s/[v+s]로 오인되는 결과가 발생한다. 이는 노동일을 분배해야 할 고정된 것으로 간주하게 하여, 자본의 자기 증식이라는 본질적 성격을 은폐하고, 착취도를 축소하여 표현한다.

 

이처럼 잉여 가치(s)와 노동력의 가치(v)를 가치 생산물(v+s)의 부분들로 표현하는 방식은 가변 자본이 살아 있는 노동력과 교환되는 자본 관계의 본질적인 특성을 은폐한다. 이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를 생산물 형성에 기여한 몫을 상호 분배하는 협력적 연합인 것처럼 잘못된 외관을 씌운다. 결과적으로, 잉여 가치가 가변 자본의 착취로부터 생선된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대신, 생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단순한 분배 문제로 위장하며, 노동자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라는 독특한 자본 관계를 흐리게 한다.

 

이와 같이, 공식 (s/v) 또한 공식 (s/(v+s)로 다시 전환될 수 있다.

 

6시간의 잉여 노동 / 12시간의 노동일

 

필요 노동 시간은 12시간의 노동일에서 6시간의 잉여 노동을 뺀 것이므로,

 

6시간의 잉여 노동 / 6시간의 필요 노동 = 100 / 100

 

곧 잉여 가치 / 가변 자본이라는 비율은 분모에 잉여 가치를 더하여 잉여 가치 / 가치 생산물이라는 비율로 표현된다. 다만, 이러한 수학적 전환에도, 잉여 가치율의 개념적 엄밀성은 오직 가변 자본에 대한 잉여 가치의 비율로부터 노동력의 착취도를 직접 폭로하는 공식 (s/v)에 있다. 공식 (s/(v+s)는 단지 가치 생산물의 분할 비율을 나타낼 뿐이며, 착취율을 100% 미만으로 왜곡하여 자본의 자기 증식도를 은폐하는 한계를 지닌다.

 

세 번째의 공식들은 필자가 이미 보였듯이, 다음과 같이 표시된다.

 

. 잉여 가치(s) / 노동력 가치(v) = 잉여 노동 / 필요 노동 = 지불받지 않는 노동 / 지불받는 노동

 

세 번째 공식 지불받지 않는 노동 / 지불받는 노동은 잉여 노동 / 필요 노동의 일반적 표현임에도, 자본가가 노동력이 아닌 노동 자체에 대해 임금을 지불한다는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다. 그러나 이 오해는 자본가가 노동력의 가치에 상응하는 가변 자본을 지불하면서 살아 있는 노동력에 대한 처분권을 획득한다는 사실로부터 제거된다. 자본가는 이 노동력을 필요 노동 시간에는 노동력의 등가 가치를 생산하는 데 사용하며, 이는 시장에서 상품을 제값 주고 구입하는 일에 다름없다. 반면, 잉여 노동 시간에는 대가 없이 노동력의 사용을 획득하여 자신을 위한 잉여 가치를 생산한다. 이처럼 잉여 노동은 무상으로 획득된 노동력의 지출이라는 점에서 지출받지 않는 노동(무산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이러한 잉여 노동에 대한 처분권은 자본의 자기 증식을 하는 유일한 원천이다. 자본가가 노동력의 가치에 상응하는 가변 자본을 지불하는 행위는 살아 있는 노동력이라는 사용 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 획득된 노동력은 필요 노동 시간을 넘어 잉여 노동 시간에까지 연장되어 자본가를 위해 가치를 생산한다. 그러므로 잉여 가치는 시장에서 교환이나 단순한 분배 문제가 아니며, 생산 과정에서 타인의 노동 시간을 대가 없이 착취하는 본질적 원리로 귀결된다. 이로부터 자본과 노동 관계는 생산물을 분배하는 협력이 아닌, 지불받지 않는 노동을 둘러싼 근본적인 착취 관계로 명확히 정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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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노동력의 가격과 잉여 가치의 양적 변동

 

노동력의 가치는 그 가치량을 표현하는 노동 시간으로 측정한다. 이 노동 시간은 노동자가 자신과 가족의 생존에 필요한 생활 수단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과 같다. 노동일 전체는 이 필요 노동 시간(필요 노동), 자본가에게 무상으로 제공되는 잉여 시간(잉여 노동)으로 구성된다. 이 잉여 노동 시간이 바로 자본가의 소득인 잉여 가치의 물질적 근거다. 그러므로 노동력 가치의 변동은 잉여 노동의 양, 곧 잉여 가치의 크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노동력 가격과 잉여 가치의 상대적 크기는 세 가지 핵심적 요인으로 규정된다.

 

1. 노동일의 길이(외연적 크기)

 

2. 노동의 강도(내포적 크기)

 

3. 노동 생산력

 

이 세 요인의 변동은 노동일의 길이 변화에 따른 절대적 잉여 가치의 생산, 또는 노동 강도나 노동 생산성의 변화에 따른 상대적 잉여 가치의 생산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이제 이 요인들 사이의 상이한 조합들이 노동력의 가치와 잉여 가치의 크기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체계적으로 고찰한다.

 

17-1. 노동일의 길이와 노동 강도는 변하지 않는데, 노동 생산성이 변하는 경우

 

1. 노동 생산성이 증대하면, 생활 수단의 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 시간이 감소하게 되며, 이는 곧 노동력의 가치 하락을 의미한다.

 

노동일의 길이가 불변인 조건에서는, 필요 노동 시간의 이러한 단축이 잉여 노동 시간의 상대적 확대를 가져오며, 그 결과, 잉여 가치의 양은 증대한다. 역으로 노동 생산성이 하락할 경우에는, 이 과정은 반대 방향으로 작용한다.

 

2. 노동력의 가치와 잉여 가치는 노동 생산성의 변화에 따라 서로 역방향으로 변동한다.

 

노동 생산성이 증가하여 노동력 가치가 하락하면 잉여 가치는 증가하고, 노동 생산성이 감소하여 노동력 가치가 상승하면 잉여 가치는 감소한다. 이는 불변하는 노동일이 생산하는 총 가치량이 이 두 요소의 합계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한 요소의 상대적 크기 변화 없이는 다른 요소의 절대적 크기 변화도 성립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노동 생산성의 향상만이 노동력의 가치는 저하시키고, 그 결과, 잉여 가치를 증가시키는 유일한 수단이다. 반대로, 노동 생산성의 저하는 노동력의 가치를 상승시키고 잉여 가치를 감소시킨다. 이 관계는 불변하는 총 가치량 내에서 필요 노동과 잉여 노동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배분될 수밖에 없는 노동일의 내재적 제약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된다. 이 법칙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리카도는 잉여 가치와 노동력의 가치가 절대량 면에서는 동일한 크기만큼 증가하지만, 그 변동 비율은 다름을 간과했다. 노동 생산성 변화로 인해 창조된 총 가치 내에서 한쪽(가령 노동력의 가치)이 감소하고, 다른 쪽(잉여 가치)이 증가할 때, 각 부분이 변화하는 비율은 변동 전 각 부분의 크기에 의존한다. 잉여 가치의 초기 크기가 작을수록 동일한 노동 생산성 변화에 따른 증가 비율은 더욱 커지며, 초기 크기가 클수록 증가 비율은 작아진다. 이는 불변하는 총 가치 내에서 상대적 크기가 조정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비율적 차이의 핵심이다.

 

3. 잉여 가치의 증감은 항상 노동력 가치가 반대 방향으로 증감한 결과이며, 그 자체로 원인이 될 수 없다.

 

이는 노동일의 총 가치량이 불변하고, 잉여 가치의 크기 변동 시 노동력의 가치는 반드시 역방향으로 변동하기 때문이다.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 생산성의 변동으로부터만 변화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잉여 가치 크기의 모든 변동은 필연적으로 노동력 가치의 반대 방향 변동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노동력의 가치(필요 노동)의 절대적 크기 변동 없이는, 잉여 가치와 노동력 가치의 상대적 크기 변동 또한 성립될 수 없다.

 

3법칙은 잉여 가치 변동의 한계가 노동력의 새로운 가치로부터 규정됨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노동 생산성 향상으로 노동력 가치가 하락해도(가령 4원에서 3원으로), 노동력 가격은 이 새로운 최저 한도까지 완전히 떨어지지 않고 그 이상의 수준에 머물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잉여 가치의 증가량 또한 제한된다. 노동력 가격 하락의 실질적인 정도는 오직 자본의 압력과 노동자들의 저항이라는 상대적 힘에 의존한다.

 

노동 생산성이 증가할 경우, 노동력의 가치와 잉여 가치를 불변하게 유지하면서도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 더 많은 생활 수단을 획득할 수 있다. 이 경우, 노동력의 가격은 변함이 없더라도, 실질적으로는 더 많은 사용 가치를 표현하게 되므로, 그 가치 이상으로 상승한다고 간주될 수 있다. 또한 노동력 가격이 새로운 최저 가치(하락 한도)까지 떨어지지 않고, 부분적으로 하락하는 경우에도, 노동력 가격은 노동자 생활 수단의 수량적 증가를 수반하며 끊임없이 하락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잉여 가치에 대한 노동력 가치의 비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며, 이는 노동자의 생활 수준과 자본가의 생활 수준 사이의 격차를 끊임없이 심화시킨다.

 

리카도는 노동력 가치와 잉여 가치 변동의 법칙들을 엄밀하게 정립했으나, 두 가지 중대한 결함을 보였다.

 

1. 그는 이 법칙들이 적용되는 특수한 조건들(노동일 길이 및 강도 불변, 노동 생산성만이 변동하는 경우)을 자본주의적 생산의 유일하고, 일반적인 조건으로 오인했다.

 

2. 그는 다른 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잉여 가치 그 자체를 이윤이나 지대와 같은 특수한 형태들로부터 분리하여 연구하지 못했다.

 

이 두 번째 결함은 특히 치명적이어서, 그는 잉여 가치율에 관한 법칙들을 이윤율에 관한 법칙들과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윤 가치율(s/v)은 오직 가변 자본(v, 임금)에 대한 잉여 가치(s)의 비율인 반면, 이윤율(s/C)은 총투하 자본(C=c+v, 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의 합)에 대한 잉여 가치의 비율이다. 이윤율은 불변 자본(c)의 크기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이는 잉여 가치율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동일한 잉여 가치율이 서로 다른 이윤율로 표현될 수 있고, 역으로 서로 다른 잉여 가치율이 하나의 이윤율로 표현될 수도 있다. 이 두 율(s/vs/C) 사이의 관계는 단순 비례를 넘어서는 복잡한 상호 작용을 포함한다.

 

참조. 이윤율 = s / [c+v] = [s/v] / [c/v + 1]

 

17-2. 노동일의 길이와 노동 생산성은 변하지 않는데, 노동 강도가 변하는 경우

 

노동 강도의 증대는 노동일의 길이가 불변인 조건에서, 주어진 시간에 지출되는 노동력의 양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노동 생산성의 상승과 달리, 개별 생산물에 투입되는 노동량을 감소시키지 않으므로, 생산물의 가치는 불변으로 유지된다. 따라서 노동 강도가 증가하면 생산되는 생산물의 수량은 개별 생산물의 가치 하락 없이 증가하며, 결과적으로, 생산물 전체의 가격 총액 또한 증대한다. 이처럼 노동 강도가 높아진 하루의 노동은 노동일의 길이가 같음에도, 증가된 가치량과 더 많은 화폐로 표현된다.

 

노동 강도가 사회적 표준을 초과하여 증가하면, 1노동일에 생산되는 가치량 역시 증가하여 이제 불변이 아닌 가변적 크기를 생산한다. 이 증가된 가치(: 6원에서 8원으로)는 노동력의 가격과 잉여 가치 두 부분으로 분배되며, 두 부분 모두 동시에 증가할 수 있다. 이 경우, 노동력 가격의 상승은 반드시 그 가치 이상으로의 상승을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증가된 노동력 소모를 충분히 보상하지 못할 때는 가치 이하로의 하락을 수반할 수도 있다. 이는 노동 강도의 증대로 인해 노동력 자체의 재생산에 드는 비용, 곧 노동력 가치 또한 상승하기 때문이다.

 

노동 강도의 변동은 노동일의 길이 변동과 마찬가지로, 잉여 가치와 노동력의 가치 크기에 영향을 미치는 데 있어, 해당 부문의 생산물이 노동자들의 일상 소비품인지 여부에 제한받지 않는다. 노동 생산성의 변동이 오직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과 관련된 부분에서만 작용하는 일과 달리, 노동일의 길이 또는 강도로부터 지출된 노동량에 변화가 생기면, 그 노동이 체화된 물품의 성질과 관계없이 생산된 가치량 자체가 변동하기 때문이다. 노동 강도가 모든 산업 부문에서 동시에 그리고 균등하게 상승하면, 이 새로운 강도는 곧 사회적 표준 강도가 되므로, 더 이상 더 큰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국가별 노동의 평균 강도는 서로 다를 수 있다. 따라서 강도가 더 높은 나라에서 노동일은 강도가 더 낮은 다른 나라의 노동일에 비해 더 큰 화폐액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가치 법칙의 적용은 세계적으로 수정된다.

 

17-3. 노동 생산성과 노동 강도는 변하지 않는데, 노동일의 길이가 변하는 경우

 

1. 노동일의 길이가 변동하는 경우, 노동 생산성과 노동 강도가 불변이라면, 그 길이에 비례하여 더 많거나 더 적은 양의 가치를 생산하며, 이는 곧 가변적인 크기의 가치량을 의미한다.

 

2. 잉여 가치와 노동력의 가치 사이의 모든 양적 변화는 잉여 노동(잉여 가치)의 절대적 크기 변화로부터 발생한다.

 

3. 노동력의 절대적 가치는 잉여 노동의 연장이 노동력의 소모에 미치는 영향으로만 변동할 수 있으며, 이는 잉여 가치의 크기 변동이 원인이지 그 결과가 아님을 시사한다.

 

이제 노동일이 단축되는 경우부터 고찰을 시작한다.

 

1). 노동 생산성과 노동 강도가 불변인 경우에 노동일을 단축하면, 노동력의 가치(필요 노동 시간)에는 변화를 주지 않으면서 잉여 노동과 잉여 가치를 감소시킨다. 이로 인해, 잉여 가치의 절대적 크기와 더불어 상대적 크기(불변인 노동력 가치에 대한 비율) 역시 감소한다. 따라서 자본가는 잉여 가치의 절대적·상대적 감소를 보상받기 위해 노동력의 가격을 그 가치 이하로 하락시키려 한다. 그러나 노동일 단축을 반대하는 논리는 이러한 전제(노동 생산성이나 노동 강도의 변동이 없다는 가정) 하에서만 타당하지만, 실제로는 노동 생산성이나 노동 강도의 변동이 노동일 단축에 선행하거나 곧 뒤따라 발생한다.

 

2). 노동일이 연장되고 노동력의 가격이 불변인 경우, 잉여 노동과 잉여 가치의 절대적 크기가 증가하며, 따라서 그 상대적 크기도 증가한다. 이 조건에서 노동력의 가치는 절대적 크기에서는 변함이 없으나, 전체 노동일의 증가로 인해 상대적으로는 감소한다. 이는 잉여 가치의 절대적 크기 변화가 노동력 가치의 상대적 크기 변화를 야기한 결과이며, 노동력 가치 절대량 변화가 원인이었던 앞선 조건과는 정반대의 관계를 보여준다.

 

노동일의 연장에 따라 하루의 노동이 대상화되는 가치 생산물(노동력의 가치 + 잉여 가치)이 증가하므로, 노동력의 가격과 잉여 가치는 동시에 증가할 수 있다. 이러한 동시 증가는 노동일이 실제로 연장되는 경우와, 노동일 연장 없이 노동 강도가 강화되는 두 경우 모두에서 발생할 수 있다. 이 두 요소가 증가하는 크기는 서로 같을 수도 있고, 같지 않을 수도 있다. 노동일이 연장되면 노동력의 가격은 명목상 불변하거나 상승하더라도, 실제로는 노동력 가치 이하로 하락할 수 있다. 노동력 가치는 노동자의 표준적인 수명과 노동력 지출을 전제로 평가되는데, 노동일 연장으로 인한 노동력 소모의 증대는 일정한 수준까지는 더 높은 임금으로 보상한다. 그러나 이 한계를 넘어서면 노동력 소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노동력 재생산 조건이 충족될 수 없게 된다. 이 시점부터 노동력의 가격과 노동력의 착취도는 더 이상 같은 기준으로 측정할 수 없는 양이 된다.

 

17-4. 노동의 지속 시간, 생산성, 강도가 동시에 변하는 경우

 

노동일의 지속 시간, 노동 생산성, 노동 강도가 동시에 변동할 때, 생겨날 수 있는 조합의 수는 매우 많다. 이는 세 요인이 모두 변하거나 둘만 변할 수 있고, 변동의 정도나 방향이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복잡한 경우들에서도, 노동력의 가치와 잉여 가치의 양적 변동에 미치는 영향은 이미 논의된 제1, 2, 3절의 분석 결과를 토대로 하여 개별 요인의 변화 효과를 차례로 분해하고 결합하면서 쉽게 분석할 수 있다. 여기서는 다만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경우만을 간략히 다룬다.

 

. 노동 생산성이 저하하는 동시에 노동일이 연장되는 경우

 

노동 생산성이 저하되고 노동일이 동시에 연장되는 경우, 노동력의 가치가 증가함(: 3원에서 4원으로, 필요 노동 6시간에서 8시간으로)에 따라, 노동일이 불변이라면, 잉여 가치는 감소한다. 그러나 노동일의 연장으로부터 잉여 노동이 보상될 수 있다. 노동일이 충분히 연장된다면(: 12시간에서 16시간으로), 잉여 가치의 절대적 크기는 증대(: 3원에서 4원으로)하는 반면, 잉여 가치율(상대적 크기)은 불변으로 유지될 수 있다. 또는 노동일 연장의 정도에 따라 잉여 가치의 절대적 크기는 불변이지만 상대적 크기는 감소할 수 있으며, 노동일이 충분히 연장된다면 상대적 크기와 절대적 크기가 동시에 증대하는 것도 성립된다.

 

1799년부터 1815년까지 영국에서는 생활 수단 가격 등귀로 인해 실질 임금은 하락했으나, 명목 임금은 인상되었다. 웨스트와 리카도는 이 현상을 농업 노동 생산성 감소가 잉여 가치율의 저하를 일으켰다는 가정(실제와는 다른 환상적 결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당시의 실상은 노동 강도의 강화와 노동일의 강제적 연장으로 인해 잉여 가치는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나 증가했다. 이 시기는 노동일 무제한 연장의 권리가 확립되고, 자본과 극빈자가 급속히 증가하던 때였다.

 

. 노동의 강도와 생산성이 상승하는 동시에 노동일이 단축되는 경우

 

노동의 강도와 생산성이 동시에 상승하면, 둘 모두 주어진 시간에 생산되는 생산물의 양을 증가시키므로, 노동자가 자신의 생활 수단 생산에 필요한 필요 노동 부분을 단축시킨다. 이 단축된 필요 노동이 노동일의 최소 한계를 규정하지만, 자본의 지배 체제에서는 이 최소 한계까지 노동일이 단축되어 잉여 노동이 소멸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 형태가 폐지되면 노동일은 필요 노동만으로 국한될 수 있으나, 이 경우, 필요 노동의 범위는 확대되어 노동일의 더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이는 노동자의 생활 조건 개선과 높아진 기대뿐만 아니라, 현재의 잉여 노동 일부(: 사회적 예비 재원 및 축적 재원 형성 노동)가 필요 노동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노동 생산성 증가는 노동일의 추가적인 단축을 촉진하며, 노동일의 단축은 다시 노동 강도의 강화를 더욱 촉진할 수 있다. 사회적 수준에서 노동 생산성의 상승은 노동의 절약에 비례하는데, 이는 생산 수단의 절약뿐 아니라 모든 불필요한 노동의 제거를 포함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은 개별 기업에는 절약을 강요하면서도, 그 무정부적 경쟁 체제로 인해 사회적 생산 수단과 노동력의 가장 터무니없는 낭비를 초래하며, 본질적으로는 불필요한 수많은 기능들(예컨대 상품과 화폐를 취급기능)을 발생시킨다.

 

노동의 강도와 생산성이 주어져 있을 때, 노동이 사회의 모든 노동 동원 인구들 사이에 더욱 균등하게 분배될수록, 그리고 특수층이 자신의 노동 부담을 다른 사회층에 전가하는 권력을 더 많이 박탈당할수록, 사회적 노동일 중 물질적 생산에 할애해야 할 시간은 그만큼 더욱 짧아진다. 결과적으로, 한 사회가 개인의 자유로운 정신적·사회적 활동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그만큼 더 증가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노동일 단축의 절대적 최소 한계는 곧 노동의 보편화에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중의 모든 생활 시간을 노동 시간으로 전환시키면서 특정 계급만이 자유로운 시간을 얻는 모순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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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절대적 · 상대적 잉여 가치의 생산

 

16. 절대적 · 상대적 잉여 가치

 

단순한 노동 과정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은 가치 증식, 곧 자본의 증식을 본질적인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의미에서 생산적 노동은 오직 자본을 위해 고용되어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에 한정된다. 유용한 물건(사용 가치)을 생산하는 일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생산된 상품의 가치에 더하여 자본가에게 이윤의 원천인 잉여 가치를 산출해야만 생산적 노동으로 규정한다. 노동 과정이 개인에게 국한될 때는, 이후에 분리될 모든 기능이 동일 노동자에게 통합되어 자기 활동을 스스로 감독한다. 그러나 노동이 사회화하면서, 개인은 타인의 감독을 받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두뇌와 근육을 이용해 자연을 활용하므로, 노동 과정에서는 정신적 노동과 육체적 노동이 본래 결합되어 있으나, 점차 분리되며 심지어는 적대적으로 대립한다. 생산물은 개인적 생산물에서 노동 대상 처리에 직·간접적으로 참가하는 집단적 노동자의 공동 생산물, 곧 사회적 생산물로 전환된다.

 

협업적 성격이 강화됨에 따라, 생산적 노동의 개념과 그 담당자인 생산적 노동자의 개념도 필연적으로 확장된다. 이제 생산적 노동자가 되려면 직접 노동 대상에 손을 댈 필요는 없으며, 집단적 노동자의 일원으로, 그 부분 기능 중 하나를 수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질적 생산 자체의 성질에서 도출된 생산적 노동에 대한 최초 규정은 전체로의 집단적 노동자에게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개별 구성원에게는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그러나 다른 한편, 생산적 노동의 개념은 더욱 협소해진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단순히 상품생산을 넘어 잉여 가치 생산을 본질로 한다. 노동자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자본을 위해 생산한다. 따라서 유용한 물건을 생산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반드시 잉여 가치를 산출해야 한다. 자본의 가치 증식에 기여해 자본가를 위한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만이 생산적이다.

 

물질적 생산 분야 밖의 예를 들어, 학교 교사는 학생들의 두뇌를 훈련시킬 뿐 아니라, 학교 소유자의 치부, 곧 자본 증식을 위해 헌신할 때에만 생산적 노동자가 된다. 학교 소유자가 자본을 소시지 공장이 아닌 교육 공장에 투하했다는 사실은 본질적으로 중요치 않다. 따라서 생산적 노동자의 개념은 노동 활동의 유용 효과(노동자와 생산물 간 관계)뿐 아니라, 노동자를 자본의 직접적 가치 증식 수단으로 만드는 특수한 사회적·역사적 생산 관계를 내포한다. 이 때문에 생산적 노동자가 되는 일은 행운이 아니라 불운이다.

 

이 책의 제4(잉여 가치 학설사)에서 상세히 다루겠지만,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잉여 가치 생산을 생산적 노동자의 결정적인 특성으로 늘 삼았다. 잉여 가치 본질에 대한 견해 변화에 따라 생산적 노동자에 대한 정의도 달라졌다. 예를 들어, 중농주의자들은 오직 농업 노동만이 잉여 가치(그들에게는 지대의 형태)를 생산하므로, 농업 노동만을 생산적으로 간주했다.

 

 

노동자가 노동력 가치의 등가를 초과하여 노동하고, 자본이 이 잉여 노동을 취득하는 것이 곧 절대적 잉여 가치의 생산이다. 절대적 잉여 가치 생산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반적 토대이자, 상대적 잉여 가치 생산의 출발점이다. 상대적 잉여 가치 생산에서는 노동일이 필요 노동과 잉여 노동의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잉여 노동을 연장하려면, 노동력 가치 등가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단축되는 방식, 곧 필요 노동이 줄어들어야 한다. 절대적 잉여 가치 생산이 노동일의 길이에만 집중하는 반면, 상대적 잉여 가치 생산은 노동의 기술적 과정과 사회적 편성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킨다. 이로 인해, 상대적 잉여 가치 생산은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을 요구하게 되며, 이는 자본에 대한 노동의 형식적 종속이라는 토대 위에서 자기만의 방법·수단·조건을 만들어내며 자연 발생적으로 발전한다. 이 발전 과정에서 형식적 종속은 실질적 종속으로 대체된다.

 

잉여 노동이 생산자에게 직접적 강제로 부과되지 않고, 생산자 자신이 자본에 형식적으로도 종속되지 않는 중간 형태들에 대해서는 그저 언급으로 족하다. 이런 형태에서는, 자본이 노동 과정을 아직 직접적으로 정복하지 못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수공업이나 농업에 종사하는 독립적 생산자들과 나란히, 이들을 기생충처럼 착취하는 고리대 자본이나 상인 자본을 가진 고리대금업자나 상인이 등장한다. 사회에서 이러한 착취 형태가 우위를 점하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은 정착하기 어렵지만, 중세 후기처럼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를 형성할 수도 있다. 끝으로, ‘가내 공업과 같은 일부 중간 형태들은 외관이 완전히 변했음에도, 대공업을 배경으로 여러 곳에서 재생산되고 있다.

 

절대적 잉여 가치의 생산에는 자본에 대한 노동의 형식적 종속만으로 충분하다. 예를 들어, 이전에 독립적으로 작업했던 수공업자가 이제 임금 노동자로 자본가의 직접적 통제 아래 들어오는 경우이다. 우리는 상대적 잉여 가치의 생산 방법이 동시에 또한, 절대적 잉여 가치의 생산 방법임을 확인했다. 실제로 노동일의 무제한 연장은 대공업의 고유한 산물임이 드러났다. 일반적으로,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특정 생산 부문 전체를 정복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상대적 잉여 가치 생산을 위한 단순한 수단에 머물지 않으며, 주요 생산 부문들 전체를 정복할 때 더욱 강력해진다. 이때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은 생산 과정에서 일반적인,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형태가 된다. 이 생산 방식이 계속해서 상대적 잉여 가치 생산의 특수한 방식이 될 수 있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생산 방식이 종전에는 자본에 형식적으로만 종속되었던 산업 부문들을 장악하며 보급되어 가는 경우이다. 둘째, 이렇게 장악된 산업 부문들이 생산 방법의 변화로부터 끊임없이 변혁되는 경우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절대적 잉여 가치와 상대적 잉여 가치 사이의 구별은 환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상대적 잉여 가치는 노동자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노동 시간을 넘는 노동일의 절대적 연장을 요구하므로, 절대적 잉여 가치이기도 하다. 반대로, 절대적 잉여 가치는 필요 노동 시간을 노동일의 일부로 제한할 수 있게 하는 노동 생산성의 발전을 조건으로 하기에 상대적 잉여 가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잉여 가치의 변동에 주목하면, 이 외관상의 동일성은 사라진다.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일단 확립되어 일반적 생산 방식으로 자리 잡으면, 잉여 가치율을 높이는 문제가 대두할 때마다, 절대적 잉여 가치와 상대적 잉여 가치 사이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노동력이 그 가치대로 지급된다고 전제할 경우, 우리는 다음의 양자택일 문제에 직면한다.

 

1. 노동의 생산성과 표준 강도가 주어져 있을 때, 잉여 가치율은 오직 노동일의 절대적 연장으로부터만 높일 수 있다.

 

2. 노동일의 길이가 주어져 있을 때, 잉여 가치율은 오직 노동일 구성 부분인 필요 노동과 잉여 노동의 상대적 크기 변동으로만 높일 수 있다. 이 변동은 임금이 노동력 가치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노동 생산성 또는 노동 강도의 변동을 전제해야 한다.

 

노동자가 자신과 가족의 유지에 필요한 생활 수단을 생산하는 데, 자기 시간 전부를 소진해야 한다면, 제삼자를 위해 무상으로 노동할 시간은 전혀 남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 생산성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지 않는 한, 노동자에게는 처분할 수 있는 나머지 시간이 조금도 없으며, 이 나머지 시간 없이는 잉여 노동도 있을 수 없다. 잉여 노동이 없다면 자본가는 물론, 노예 소유자나 봉건 귀족(대규모 토지 소유자 계급)도 존재할 수 없다.

 

잉여 가치가 자연적 기반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는 극히 일반적인 의미에서만 허용한다. 자연에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노동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을 막는 절대적 장애물이 없다는 의미이며, 이는 자연에 식인 행위를 막는 절대적 장애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자연 발생적으로 발달한 노동 생산성을 신비스러운 관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이다.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시초의 동물 상태에서 벗어나고, 노동이 이미 어느 정도 사회적 성격을 띤 뒤에야 비로소, 어떤 사람의 잉여 노동이 다른 사람의 생존 조건이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문명 초기에는 노동 생산성이 미약했고, 욕구(충족 수단과 함께 발전하는) 또한 보잘것 없었다. 더욱이 이 초기에는 타인의 노동으로부터 생존하는 사회 구성원은 다수의 직접적 생산자에 비해 매우 적다. 사회적 노동 생산성이 향상하면서, 그 적은 사회 구성원은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 증대한다. 그리고 이 오랜 발전 과정의 산물이 경제적 토대로부터 자본 관계가 발생시킨다. 결론적으로, 자본 관계의 토대이자 출발점인 현재의 노동 생산성은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수천 세기를 포괄하는) 역사의 산물이다.

 

사회적 생산의 발전 정도가 높든 낮든, 노동 생산성은 자연적 조건으로부터 제약을 받는다. 이 자연적 조건은 모두 인간 자체의 특성(인종 등)과 인간을 둘러싼 자연으로 환원된다. 외부적 자연 조건은 경제적으로 두 개의 큰 부류로 나누어진다.

 

1. 생활 수단을 풍부하게 하는 자연의 부: 비옥한 토지, 물고기가 많은 하천 등.

 

2. 노동 수단을 풍부하게 하는 자연의 부: 폭포, 항해할 수 있는 하천, 산림, 금속, 석탄 등.

 

문명의 초기에 결정적 의의를 가진 것은 첫 번째 부류(생활 수단을 풍부하게 하는 자연의 부)이고, 더 높은 발전 단계에서 결정적 의의를 가진 것은 두 번째 부류(노동 수단을 풍부하게 하는 자연의 부)이다. 예를 들어, 영국과 인도를 비교하거나, 고대 아테네와 코린트를 흑해 연안 지방들과 비교해 보라. 어떻게든 충족해야 할 자연적 욕구의 수가 적을수록, 토지의 자연적 비옥도가 높을수록, 기후 조건이 유리할수록, 생산자의 유지 및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 시간의 크기는 그만큼 더 적어진다. 따라서 생산자가 자신을 위해 하는 노동을 초과해 타인을 위해 하는 나머지 노동은 그만큼 더 커질 수 있다. 그래서 디오도루스는 이미 오래전에 고대 이집트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그들이 자식을 양육하는 데 드는 노고와 비용은 믿기 어려울 만큼 적다. 그들은 자식에게 닥치는 대로 간단한 식사를 만들어 주는데, 불을 구울 수 있는 파피루스의 뿌리나, 늪에서 자라는 식물의 뿌리나 줄기를 날것으로 또는 찌거나 구워서 먹이기도 한다. 기후가 매우 온화하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은 신발도, 옷도 없이 다닌다. 그러므로 아이 1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가 들이는 비용은 대체로 20드라크마를 넘지 않는다. 이처럼 이집트에서 인구가 많았고 따라서 많은 대공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의 거대한 건축물들은 인구가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전체 인구 가운데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부분이 컸기 때문이다. 개별 노동자의 필요 노동 시간이 적을수록, 더 많은 잉여 노동을 제공할 수 있듯이, 노동 인구 중 필요한 생활 수단 생산에 요구되는 부분이 작을수록, 다른 일에 투입할 수 있는 부분은 그만큼 더 커진다. 자본주의적 생산을 전제로 하고, 다른 모든 조건과 노동일의 길이가 주어져 있는 경우, 잉여 노동의 크기는 노동의 자연적 조건, 특히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변동한다. 그러나 이로부터 가장 비옥한 토지가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 발전에 가장 적합하다는 역전된 명제는 결코 나오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전제로 한다. 지나치게 풍요로운 자연은 지나치게 보호받는 어린아이처럼 인간을 자연의 손안에서 놓아주지 않는다.’ 이 자연은 인간에게 스스로를 개발할 필요성을 주지 않는다. 자본의 모국은 무위도식할 정도로 먹을 것이 풍부한 열대 지방이 아니라 온대 지방이다. 토지의 단순한 절대적 비옥도가 아니라 토양의 차이, 천연 산물의 다양성, 계절의 변화야말로, 사회적 분업의 자연적 기초를 이루며, 인간을 둘러싼 자연 환경의 변화로부터 인간을 자극해, 인간 자신의 욕구·능력·노동 수단·노동 방식을 다양하게 만든다.

 

산업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일은 자연력을 사회적으로 통제할 필요성, 그것을 절약할 필요성, 인간의 손으로 그것을 대규모로 이용하거나 복종시킬 필요성이다. 예로, 이집트, 롬바르디아, 네덜란드의 치수 사업을 들 수 있고. 인도, 페르시아 등의 관개 사업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인공 운하는 토지에 필수적인 물을 공급할 뿐 아니라, 흙탕물과 함께 광물성 비료를 산으로부터 운반해 온다. 아라비아 사람이 지배하던 스페인과 시실리에서 산업 번영의 비밀은 관개 사업에 있었다.

 

유리한 자연 조건은 그 자체로는 오직 잉여 노동(따라서 잉여 가치 또는 잉여 생산물)의 여지만을 제공할 뿐, 결코 그 현실성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노동의 자연적 조건이 서로 다른 결과는, 동일한 노동량이 나라에 따라 서로 다른 양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따라서 기타 사정이 비슷한 경우, 필요 노동 시간이 서로 달라진다는 점이다. 자연적 조건은 잉여 노동에 대해 자연적 한계로만 작용하며, 타인을 위한 노동이 시작될 수 있는 지점을 결정할 따름이다.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이 자연적 한계의 의미는 점차 약화된다. 노동자가 오직 타인에게 잉여 노동을 제공해야만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한 노동을 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서유럽 사회에서는, 잉여 생산물을 제공하는 것이 인간 노동에 고유한 성질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예를 들어, 사고(sago) 야자 나무가 숲 속에 야생하는 동인도 여러 섬들의 주민을 살펴보자.

 

주민들은 나무에 구멍을 뚫어보고, 속이 익었음을 확인하면, 나무 줄기를 베어 넘어뜨리고 토막을 내어, 속을 긁어낸다. 여기에 물을 타서 거르면, 훌륭한 사고 가루가 된다. 한 나무에서 대개 300파운드, 많게는 500-600파운드까지 얻는다. 그러므로 거기에서는 우리가 땔나무를 하러 숲으로 가듯이, 빵을 채취하고자 숲으로 간다.’

   

예를 들어, 이 동인도의 빵 채취자 한 사람이 자기의 모든 욕구를 충족하는 데, 매주 12시간이 필요하다고 가정하자. 유리한 자연 조건이 그에게 주는 직접적 선물은 많은 여가 시간이다. 그가 이 여가 시간을 자기 자신을 위해 생산적으로 소비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역사적 조건이 필요하며, 이 여가 시간을 타인을 위한 잉여 노동으로 지출하려면 외적 강제가 필요하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도입된다면, 이 성실한 인간이 1노동일의 생산물(1주일의 빵)을 얻고자 아마 매주 6노동일을 노동해야 한다. 그가 이제 와서 매주 6일씩 노동하게 되는 이유, 5일간의 잉여 노동을 제공해야 하는 이유는 자연의 풍요로움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자연의 풍요로움은 단지 그의 필요 노동 시간이 매주 1일밖에 되지 않는 이유만을 설명해 줄 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의 잉여 생산물은 인간 노동에 고유한 어떤 신비로운 속성들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발전한 사회적 노동 생산성과 마찬가지로, 자연으로부터 규제되는 노동 생산성 또한 노동을 결합한 자본의 생산성이라는 외관을 띠게 된다.

 

리카도는 잉여 가치의 기원에 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잉여 가치를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 자체에 내재하는 것(그에게는 사회적 생산의 자연적 형태)로 취급한다. 그가 노동 생산성을 논할 때에도, 그가 찾는 것은 잉여 가치의 존재 원인이 아니라 크기를 규정하는 원인일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학파는 노동 생산력이 이윤(잉여 가치) 발생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중상주의자들에 비하면 하나의 발전이다. 중상주의자들은 생산물의 가격 중 생산비를 넘는 초과분을 교환 행위, 곧 생산물을 자기 가치 이상으로 비싸게 판매하는 일에서 도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카도 학파 역시 문제를 회피했을 뿐 해결하지는 못했다. 사실 이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잉여 가치의 기원이라는 절실한 문제를 깊이 탐구하는 일이 매우 위험하다는 점을 본능적으로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리카도를 가장 먼저 속류화시킨 사람들의 보잘것없는 궤변들을 (리카도보다 50년 뒤에) 서투르게 되풀이하면서, 중상주의자들에 대한 우월성을 엄숙히 주장하는 존 스튜어트 밀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윤의 원인은 노동이 노동의 유지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생산하는 데 있다.’

 

여기까지는 기존 논의를 되풀이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밀은 여기에 자기만의 내용을 추가하고자 한다.

 

또는 명제의 형태를 바꾸어 말하면, 자본이 이윤을 낳는 이유는 음식·의복·원료·도구가 그것들의 생산에 드는 시간보다 더 오래 지속한다는 데 있다.’

 

여기에서 밀은 노동 시간의 지속과 그 생산물의 지속을 혼동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생산물이 하루밖에 지속되지 않는 빵 제조업자는 결코 생산물이 20년 또는 그 이상 지속되는 기계 제조업자와 동등한 이윤을 자기 임금 노동자로부터 끌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새 둥지가 그것을 짓는 데 드는 시간보다 더 오래가지 않는다면, 새들은 둥지 없이 살아가려 할 것은 사실이다.

 

이와 같은, 근본적 진리를 일단 확립하자, 밀은 중상주의자들에 대한 자신의 우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윤은 교환이라는 우연한 사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노동 생산력에서 생기는 것임을 알게 된다. 한 나라의 총이윤은 (교환이 진행되든 안 되든) 언제나 노동 생산력으로부터 생산된다. 분업이 없다면 구매도, 판매도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이윤은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밀에게는 교환(자본주의적 생산의 일반적 조건인 매매)이 순전히 우연적인 것에 불과하며, 노동력의 매매 없이도 이윤은 존재한다고 본다.

 

밀은 다음과 같이 계속 말한다.

   

한 나라의 전체 노동자가 그들의 임금액보다 20% 더 많이 생산한다면, 상품의 가격 상태와 무관하게 이윤은 20%로 될 것이다.’

 

이 주장은 한편으로, 훌륭한 동어 반복에 불과하다. 노동자가 자본가를 위해 20%의 잉여 가치를 생산한다면, 자본가의 이윤이 노동자의 임금 총액 대비 20 : 100이 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윤은 20%로 될 것이다.’라는 말은 완전히 틀린 진술이다. 이윤율은 임금액(가변 자본)이 아닌 투하 자본 총액에 대해 계산되므로, 실제 이윤율은 반드시 그보다 낮아진다. 예를 들어, 자본가가 500(생산 수단: 400, 임금: 100)을 투하하고, 잉여 가치율을 가정한대로 20%라고 하면, 이윤율은 20%가 아니라 20 : 500, 4%가 된다.

 

다음으로는, 밀이 사회적 생산의 서로 다른 역사적 형태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예가 있다.

 

밀은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언제나 나는 (여기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서로 독립적인 계급이다) 거의 예외 없이 어디에서나 행해지는 현재의 관례, 곧 자본가가 노동자에 대한 모든 보수를 포함한 전체 비용을 투하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는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예외적으로만 존재하는 관계를 보편적으로 간주하는 기막힌 시각상의 착오이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한 비판을 인정했음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밀은 더 나아가, ‘자본가가 그렇게 전체 비용을 투자하는 것이 절대적 필연성은 아니다.’라는 점을 마지못해 인정한다. 밀은 다음과 같이 계속 말한다.

 

노동자는 생산이 끝날 때까지 임금 총액 중 생활 필수액을 초과하는 부분의 지급을 기다릴 수 있다. 또는 (당분간 생활할 수 있는 자금을 가지고 있다면) 임금 총액 전체의 지급을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 노동자는 그 사업 운영에 필요한 자금의 일부를 제공하는 셈이므로, 그 정도까지는 사실상 자본가다.’

 

이와 마찬가지로, 밀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곧 자기 자신에게 생활 수단뿐 아니라 노동 수단도 투하(또는 선대)하는 노동자는 사실상 자기 자신의 임금 노동자라고. 또는 미국의 소농은 주인인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강제 노동을 하는 자기 자신의 노예라고.

 

밀은정치경제학 원리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그것이 항상 존재했을 것이라는 점을 아주 명료하게 증명하고 나서, 이번에는 반대로, 수미일관하게 자본주의적 생산이 존재하고 있는 경우에조차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한다.

 

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고 전자의 경우에도(곧 노동자가 자본가로부터 자기의 생활 수단 전체를 먼저 지급받는 임금 노동자인 경우에도) 노동자를 위와 똑같이 (자본가로) 여길 수 있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을 시장 가격 이하로(!) 인도하면서, 그 차액을(?) 자기의 고용주에게 대여하고, 그것을 이자 등과 함께 되돌려 받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을 자본가에게 1주일 등 기간에 걸쳐 무상으로 선대하고, 주말 등에 가서 그 시장 가격을 받는다. 밀에 따르면, 바로 이것이 노동자를 자본가로 만든다는 것이다! 낮은 평지에서는 흙을 조금만 쌓아올려도 언덕으로 보이는 법이다. 오늘날의 부르주아지가 엉터리 수준이라는 것은, 그들이 위대한 지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지적 수준으로부터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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