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절대적 · 상대적 잉여 가치의 생산
16. 절대적 · 상대적 잉여 가치
단순한 노동 과정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은 가치 증식, 곧 자본의 증식을 본질적인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의미에서 생산적 노동은 오직 자본을 위해 고용되어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에 한정된다. 유용한 물건(사용 가치)을 생산하는 일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생산된 상품의 가치에 더하여 자본가에게 이윤의 원천인 잉여 가치를 산출해야만 생산적 노동으로 규정한다. 노동 과정이 개인에게 국한될 때는, 이후에 분리될 모든 기능이 동일 노동자에게 통합되어 자기 활동을 스스로 감독한다. 그러나 노동이 사회화하면서, 개인은 타인의 감독을 받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두뇌와 근육을 이용해 자연을 활용하므로, 노동 과정에서는 정신적 노동과 육체적 노동이 본래 결합되어 있으나, 점차 분리되며 심지어는 적대적으로 대립한다. 생산물은 개인적 생산물에서 노동 대상 처리에 직·간접적으로 참가하는 집단적 노동자의 공동 생산물, 곧 사회적 생산물로 전환된다.
협업적 성격이 강화됨에 따라, 생산적 노동의 개념과 그 담당자인 생산적 노동자의 개념도 필연적으로 확장된다. 이제 생산적 노동자가 되려면 직접 노동 대상에 손을 댈 필요는 없으며, 집단적 노동자의 일원으로, 그 부분 기능 중 하나를 수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질적 생산 자체의 성질에서 도출된 생산적 노동에 대한 최초 규정은 전체로의 집단적 노동자에게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개별 구성원에게는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그러나 다른 한편, 생산적 노동의 개념은 더욱 협소해진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단순히 상품생산을 넘어 잉여 가치 생산을 본질로 한다. 노동자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자본을 위해 생산한다. 따라서 유용한 물건을 생산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반드시 잉여 가치를 산출해야 한다. 자본의 가치 증식에 기여해 자본가를 위한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만이 생산적이다.
물질적 생산 분야 밖의 예를 들어, 학교 교사는 학생들의 두뇌를 훈련시킬 뿐 아니라, 학교 소유자의 치부, 곧 자본 증식을 위해 헌신할 때에만 생산적 노동자가 된다. 학교 소유자가 자본을 소시지 공장이 아닌 교육 공장에 투하했다는 사실은 본질적으로 중요치 않다. 따라서 생산적 노동자의 개념은 노동 활동의 유용 효과(노동자와 생산물 간 관계)뿐 아니라, 노동자를 자본의 직접적 가치 증식 수단으로 만드는 특수한 사회적·역사적 생산 관계를 내포한다. 이 때문에 생산적 노동자가 되는 일은 행운이 아니라 불운이다.
이 책의 제4권(잉여 가치 학설사)에서 상세히 다루겠지만,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잉여 가치 생산을 생산적 노동자의 결정적인 특성으로 늘 삼았다. 잉여 가치 본질에 대한 견해 변화에 따라 생산적 노동자에 대한 정의도 달라졌다. 예를 들어, 중농주의자들은 오직 농업 노동만이 잉여 가치(그들에게는 지대의 형태)를 생산하므로, 농업 노동만을 생산적으로 간주했다.
노동자가 노동력 가치의 등가를 초과하여 노동하고, 자본이 이 잉여 노동을 취득하는 것이 곧 절대적 잉여 가치의 생산이다. 절대적 잉여 가치 생산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반적 토대이자, 상대적 잉여 가치 생산의 출발점이다. 상대적 잉여 가치 생산에서는 노동일이 필요 노동과 잉여 노동의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잉여 노동을 연장하려면, 노동력 가치 등가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단축되는 방식, 곧 필요 노동이 줄어들어야 한다. 절대적 잉여 가치 생산이 노동일의 길이에만 집중하는 반면, 상대적 잉여 가치 생산은 노동의 기술적 과정과 사회적 편성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킨다. 이로 인해, 상대적 잉여 가치 생산은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을 요구하게 되며, 이는 자본에 대한 노동의 형식적 종속이라는 토대 위에서 자기만의 방법·수단·조건을 만들어내며 자연 발생적으로 발전한다. 이 발전 과정에서 형식적 종속은 실질적 종속으로 대체된다.
잉여 노동이 생산자에게 직접적 강제로 부과되지 않고, 생산자 자신이 자본에 형식적으로도 종속되지 않는 중간 형태들에 대해서는 그저 언급으로 족하다. 이런 형태에서는, 자본이 노동 과정을 아직 직접적으로 정복하지 못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수공업이나 농업에 종사하는 독립적 생산자들과 나란히, 이들을 기생충처럼 착취하는 고리대 자본이나 상인 자본을 가진 고리대금업자나 상인이 등장한다. 사회에서 이러한 착취 형태가 우위를 점하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은 정착하기 어렵지만, 중세 후기처럼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를 형성할 수도 있다. 끝으로, ‘가내 공업’과 같은 일부 중간 형태들은 외관이 완전히 변했음에도, 대공업을 배경으로 여러 곳에서 재생산되고 있다.
절대적 잉여 가치의 생산에는 자본에 대한 노동의 형식적 종속만으로 충분하다. 예를 들어, 이전에 독립적으로 작업했던 수공업자가 이제 임금 노동자로 자본가의 직접적 통제 아래 들어오는 경우이다. 우리는 상대적 잉여 가치의 생산 방법이 동시에 또한, 절대적 잉여 가치의 생산 방법임을 확인했다. 실제로 노동일의 무제한 연장은 대공업의 고유한 산물임이 드러났다. 일반적으로,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특정 생산 부문 전체를 정복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상대적 잉여 가치 생산을 위한 단순한 수단에 머물지 않으며, 주요 생산 부문들 전체를 정복할 때 더욱 강력해진다. 이때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은 생산 과정에서 일반적인,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형태가 된다. 이 생산 방식이 계속해서 상대적 잉여 가치 생산의 특수한 방식이 될 수 있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생산 방식이 종전에는 자본에 형식적으로만 종속되었던 산업 부문들을 장악하며 보급되어 가는 경우이다. 둘째, 이렇게 장악된 산업 부문들이 생산 방법의 변화로부터 끊임없이 변혁되는 경우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절대적 잉여 가치와 상대적 잉여 가치 사이의 구별은 환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상대적 잉여 가치는 노동자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노동 시간을 넘는 노동일의 절대적 연장을 요구하므로, 절대적 잉여 가치이기도 하다. 반대로, 절대적 잉여 가치는 필요 노동 시간을 노동일의 일부로 제한할 수 있게 하는 노동 생산성의 발전을 조건으로 하기에 상대적 잉여 가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잉여 가치의 변동에 주목하면, 이 외관상의 동일성은 사라진다.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일단 확립되어 일반적 생산 방식으로 자리 잡으면, 잉여 가치율을 높이는 문제가 대두할 때마다, 절대적 잉여 가치와 상대적 잉여 가치 사이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노동력이 그 가치대로 지급된다고 전제할 경우, 우리는 다음의 양자택일 문제에 직면한다.
1. 노동의 생산성과 표준 강도가 주어져 있을 때, 잉여 가치율은 오직 노동일의 절대적 연장으로부터만 높일 수 있다.
2. 노동일의 길이가 주어져 있을 때, 잉여 가치율은 오직 노동일 구성 부분인 필요 노동과 잉여 노동의 상대적 크기 변동으로만 높일 수 있다. 이 변동은 임금이 노동력 가치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노동 생산성 또는 노동 강도의 변동을 전제해야 한다.
노동자가 자신과 가족의 유지에 필요한 생활 수단을 생산하는 데, 자기 시간 전부를 소진해야 한다면, 제삼자를 위해 무상으로 노동할 시간은 전혀 남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 생산성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지 않는 한, 노동자에게는 처분할 수 있는 나머지 시간이 조금도 없으며, 이 나머지 시간 없이는 잉여 노동도 있을 수 없다. 잉여 노동이 없다면 자본가는 물론, 노예 소유자나 봉건 귀족(대규모 토지 소유자 계급)도 존재할 수 없다.
잉여 가치가 자연적 기반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는 극히 일반적인 의미에서만 허용한다. 자연에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노동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을 막는 절대적 장애물이 없다는 의미이며, 이는 자연에 식인 행위를 막는 절대적 장애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자연 발생적으로 발달한 노동 생산성을 신비스러운 관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이다.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시초의 동물 상태에서 벗어나고, 노동이 이미 어느 정도 사회적 성격을 띤 뒤에야 비로소, 어떤 사람의 잉여 노동이 다른 사람의 생존 조건이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문명 초기에는 노동 생산성이 미약했고, 욕구(충족 수단과 함께 발전하는) 또한 보잘것 없었다. 더욱이 이 초기에는 타인의 노동으로부터 생존하는 사회 구성원은 다수의 직접적 생산자에 비해 매우 적다. 사회적 노동 생산성이 향상하면서, 그 적은 사회 구성원은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 증대한다. 그리고 이 오랜 발전 과정의 산물이 경제적 토대로부터 자본 관계가 발생시킨다. 결론적으로, 자본 관계의 토대이자 출발점인 현재의 노동 생산성은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수천 세기를 포괄하는) 역사의 산물이다.
사회적 생산의 발전 정도가 높든 낮든, 노동 생산성은 자연적 조건으로부터 제약을 받는다. 이 자연적 조건은 모두 인간 자체의 특성(인종 등)과 인간을 둘러싼 자연으로 환원된다. 외부적 자연 조건은 경제적으로 두 개의 큰 부류로 나누어진다.
1. 생활 수단을 풍부하게 하는 자연의 부: 비옥한 토지, 물고기가 많은 하천 등.
2. 노동 수단을 풍부하게 하는 자연의 부: 폭포, 항해할 수 있는 하천, 산림, 금속, 석탄 등.
문명의 초기에 결정적 의의를 가진 것은 첫 번째 부류(생활 수단을 풍부하게 하는 자연의 부)이고, 더 높은 발전 단계에서 결정적 의의를 가진 것은 두 번째 부류(노동 수단을 풍부하게 하는 자연의 부)이다. 예를 들어, 영국과 인도를 비교하거나, 고대 아테네와 코린트를 흑해 연안 지방들과 비교해 보라. 어떻게든 충족해야 할 자연적 욕구의 수가 적을수록, 토지의 자연적 비옥도가 높을수록, 기후 조건이 유리할수록, 생산자의 유지 및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 시간의 크기는 그만큼 더 적어진다. 따라서 생산자가 자신을 위해 하는 노동을 초과해 타인을 위해 하는 나머지 노동은 그만큼 더 커질 수 있다. 그래서 디오도루스는 이미 오래전에 고대 이집트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그들이 자식을 양육하는 데 드는 노고와 비용은 믿기 어려울 만큼 적다. 그들은 자식에게 닥치는 대로 간단한 식사를 만들어 주는데, 불을 구울 수 있는 파피루스의 뿌리나, 늪에서 자라는 식물의 뿌리나 줄기를 날것으로 또는 찌거나 구워서 먹이기도 한다. 기후가 매우 온화하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은 신발도, 옷도 없이 다닌다. 그러므로 아이 1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가 들이는 비용은 대체로 20드라크마를 넘지 않는다. 이처럼 이집트에서 인구가 많았고 따라서 많은 대공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의 거대한 건축물들은 인구가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전체 인구 가운데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부분이 컸기 때문이다. 개별 노동자의 필요 노동 시간이 적을수록, 더 많은 잉여 노동을 제공할 수 있듯이, 노동 인구 중 필요한 생활 수단 생산에 요구되는 부분이 작을수록, 다른 일에 투입할 수 있는 부분은 그만큼 더 커진다. 자본주의적 생산을 전제로 하고, 다른 모든 조건과 노동일의 길이가 주어져 있는 경우, 잉여 노동의 크기는 노동의 자연적 조건, 특히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변동한다. 그러나 이로부터 가장 비옥한 토지가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 발전에 가장 적합하다는 역전된 명제는 결코 나오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전제로 한다. 지나치게 풍요로운 자연은 ‘지나치게 보호받는 어린아이처럼 인간을 자연의 손안에서 놓아주지 않는다.’ 이 자연은 인간에게 스스로를 개발할 필요성을 주지 않는다. 자본의 모국은 무위도식할 정도로 먹을 것이 풍부한 열대 지방이 아니라 온대 지방이다. 토지의 단순한 절대적 비옥도가 아니라 토양의 차이, 천연 산물의 다양성, 계절의 변화야말로, 사회적 분업의 자연적 기초를 이루며, 인간을 둘러싼 자연 환경의 변화로부터 인간을 자극해, 인간 자신의 욕구·능력·노동 수단·노동 방식을 다양하게 만든다.
산업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일은 자연력을 사회적으로 통제할 필요성, 그것을 절약할 필요성, 인간의 손으로 그것을 대규모로 이용하거나 복종시킬 필요성이다. 예로, 이집트, 롬바르디아, 네덜란드의 치수 사업을 들 수 있고. 인도, 페르시아 등의 관개 사업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인공 운하는 토지에 필수적인 물을 공급할 뿐 아니라, 흙탕물과 함께 광물성 비료를 산으로부터 운반해 온다. 아라비아 사람이 지배하던 스페인과 시실리에서 산업 번영의 비밀은 관개 사업에 있었다.
유리한 자연 조건은 그 자체로는 오직 잉여 노동(따라서 잉여 가치 또는 잉여 생산물)의 여지만을 제공할 뿐, 결코 그 현실성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노동의 자연적 조건이 서로 다른 결과는, 동일한 노동량이 나라에 따라 서로 다른 양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따라서 기타 사정이 비슷한 경우, 필요 노동 시간이 서로 달라진다는 점이다. 자연적 조건은 잉여 노동에 대해 자연적 한계로만 작용하며, 타인을 위한 노동이 시작될 수 있는 지점을 결정할 따름이다.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이 자연적 한계의 의미는 점차 약화된다. 노동자가 오직 타인에게 잉여 노동을 제공해야만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한 노동을 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서유럽 사회에서는, 잉여 생산물을 제공하는 것이 인간 노동에 고유한 성질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예를 들어, 사고(sago) 야자 나무가 숲 속에 야생하는 동인도 여러 섬들의 주민을 살펴보자.
‘주민들은 나무에 구멍을 뚫어보고, 속이 익었음을 확인하면, 나무 줄기를 베어 넘어뜨리고 토막을 내어, 속을 긁어낸다. 여기에 물을 타서 거르면, 훌륭한 사고 가루가 된다. 한 나무에서 대개 300파운드, 많게는 500-600파운드까지 얻는다. 그러므로 거기에서는 우리가 땔나무를 하러 숲으로 가듯이, 빵을 채취하고자 숲으로 간다.’
예를 들어, 이 동인도의 빵 채취자 한 사람이 자기의 모든 욕구를 충족하는 데, 매주 12시간이 필요하다고 가정하자. 유리한 자연 조건이 그에게 주는 직접적 선물은 많은 여가 시간이다. 그가 이 여가 시간을 자기 자신을 위해 생산적으로 소비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역사적 조건이 필요하며, 이 여가 시간을 타인을 위한 잉여 노동으로 지출하려면 외적 강제가 필요하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도입된다면, 이 성실한 인간이 1노동일의 생산물(1주일의 빵)을 얻고자 아마 매주 6노동일을 노동해야 한다. 그가 이제 와서 매주 6일씩 노동하게 되는 이유, 곧 5일간의 잉여 노동을 제공해야 하는 이유는 자연의 풍요로움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자연의 풍요로움은 단지 그의 필요 노동 시간이 매주 1일밖에 되지 않는 이유만을 설명해 줄 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의 잉여 생산물은 인간 노동에 고유한 어떤 신비로운 속성들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발전한 사회적 노동 생산성과 마찬가지로, 자연으로부터 규제되는 노동 생산성 또한 노동을 결합한 자본의 생산성이라는 외관을 띠게 된다.
리카도는 잉여 가치의 기원에 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잉여 가치를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 자체에 내재하는 것(그에게는 사회적 생산의 자연적 형태)로 취급한다. 그가 노동 생산성을 논할 때에도, 그가 찾는 것은 잉여 가치의 존재 원인이 아니라 크기를 규정하는 원인일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의 학파는 노동 생산력이 이윤(잉여 가치) 발생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중상주의자들에 비하면 하나의 발전이다. 중상주의자들은 생산물의 가격 중 생산비를 넘는 초과분을 교환 행위, 곧 생산물을 자기 가치 이상으로 비싸게 판매하는 일에서 도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카도 학파 역시 문제를 회피했을 뿐 해결하지는 못했다. 사실 이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잉여 가치의 기원이라는 절실한 문제를 깊이 탐구하는 일이 매우 위험하다는 점을 본능적으로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리카도를 가장 먼저 속류화시킨 사람들의 보잘것없는 궤변들을 (리카도보다 50년 뒤에) 서투르게 되풀이하면서, 중상주의자들에 대한 우월성을 엄숙히 주장하는 존 스튜어트 밀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윤의 원인은 노동이 노동의 유지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생산하는 데 있다.’
여기까지는 기존 논의를 되풀이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밀은 여기에 자기만의 내용을 추가하고자 한다.
‘또는 명제의 형태를 바꾸어 말하면, 자본이 이윤을 낳는 이유는 음식·의복·원료·도구가 그것들의 생산에 드는 시간보다 더 오래 지속한다는 데 있다.’
여기에서 밀은 노동 시간의 지속과 그 생산물의 지속을 혼동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생산물이 하루밖에 지속되지 않는 빵 제조업자는 결코 생산물이 20년 또는 그 이상 지속되는 기계 제조업자와 동등한 이윤을 자기 임금 노동자로부터 끌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새 둥지가 그것을 짓는 데 드는 시간보다 더 오래가지 않는다면, 새들은 둥지 없이 살아가려 할 것은 사실이다.
이와 같은, 근본적 진리를 일단 확립하자, 밀은 중상주의자들에 대한 자신의 우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윤은 교환이라는 우연한 사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노동 생산력에서 생기는 것임을 알게 된다. 한 나라의 총이윤은 (교환이 진행되든 안 되든) 언제나 노동 생산력으로부터 생산된다. 분업이 없다면 구매도, 판매도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이윤은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밀에게는 교환(자본주의적 생산의 일반적 조건인 매매)이 순전히 우연적인 것에 불과하며, 노동력의 매매 없이도 이윤은 존재한다고 본다.
밀은 다음과 같이 계속 말한다.
‘한 나라의 전체 노동자가 그들의 임금액보다 20% 더 많이 생산한다면, 상품의 가격 상태와 무관하게 이윤은 20%로 될 것이다.’
이 주장은 한편으로, 훌륭한 동어 반복에 불과하다. 노동자가 자본가를 위해 20%의 잉여 가치를 생산한다면, 자본가의 이윤이 노동자의 임금 총액 대비 20 : 100이 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윤은 20%로 될 것이다.’라는 말은 완전히 틀린 진술이다. 이윤율은 임금액(가변 자본)이 아닌 투하 자본 총액에 대해 계산되므로, 실제 이윤율은 반드시 그보다 낮아진다. 예를 들어, 자본가가 500원(생산 수단: 400원, 임금: 100원)을 투하하고, 잉여 가치율을 가정한대로 20%라고 하면, 이윤율은 20%가 아니라 20 : 500, 곧 4%가 된다.
다음으로는, 밀이 사회적 생산의 서로 다른 역사적 형태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예가 있다.
밀은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언제나 나는 (여기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서로 독립적인 계급이다) 거의 예외 없이 어디에서나 행해지는 현재의 관례, 곧 자본가가 노동자에 대한 모든 보수를 포함한 전체 비용을 투하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는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예외적으로만 존재하는 관계를 보편적으로 간주하는 기막힌 시각상의 착오이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한 비판을 인정했음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밀은 더 나아가, ‘자본가가 그렇게 전체 비용을 투자하는 것이 절대적 필연성은 아니다.’라는 점을 마지못해 인정한다. 밀은 다음과 같이 계속 말한다.
‘노동자는 생산이 끝날 때까지 임금 총액 중 생활 필수액을 초과하는 부분의 지급을 기다릴 수 있다. 또는 (당분간 생활할 수 있는 자금을 가지고 있다면) 임금 총액 전체의 지급을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 노동자는 그 사업 운영에 필요한 자금의 일부를 제공하는 셈이므로, 그 정도까지는 사실상 자본가다.’
이와 마찬가지로, 밀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곧 자기 자신에게 생활 수단뿐 아니라 노동 수단도 투하(또는 선대)하는 노동자는 사실상 자기 자신의 임금 노동자라고. 또는 미국의 소농은 주인인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강제 노동을 하는 자기 자신의 노예라고.
밀은『정치경제학 원리』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그것이 항상 존재했을 것이라는 점을 아주 명료하게 증명하고 나서, 이번에는 반대로, 수미일관하게 자본주의적 생산이 존재하고 있는 경우에조차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한다.
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고 전자의 경우에도(곧 노동자가 자본가로부터 자기의 생활 수단 전체를 먼저 지급받는 임금 노동자인 경우에도) 노동자를 위와 똑같이 (자본가로) 여길 수 있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을 시장 가격 이하로(!) 인도하면서, 그 차액을(?) 자기의 고용주에게 대여하고, 그것을 이자 등과 함께 되돌려 받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을 자본가에게 1주일 등 기간에 걸쳐 무상으로 선대하고, 주말 등에 가서 그 시장 가격을 받는다. 밀에 따르면, 바로 이것이 노동자를 자본가로 만든다는 것이다! 낮은 평지에서는 흙을 조금만 쌓아올려도 언덕으로 보이는 법이다. 오늘날의 부르주아지가 엉터리 수준이라는 것은, 그들이 ‘위대한 지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지적 수준으로부터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