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밤에서 노동자의 밤으로

 

8시간 노동 법안은 체결되었지만, 정작 노동자들은 여전히 노동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란 열심히 ‘근로’함에도 부족한 보상을 채울 수 없는 이유가, 단순히 임금 조정의 여파나 여하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노동의 제한적인 여가 역시 취약한 채 이중 노동의 부과에 현대 노동자들이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단순히 노동 시간의 쟁취에 머물러 있는 노동법과 협상, 또는 극적인 타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대기업들의 야간 노동의 강제에도 있는 것이다. 2022년 10월, SPC 계열 빵 공장에서 20대 여성 노동자가 새벽 야간 근무 중 샌드위치 소스 혼합기에 끼여 숨진 사고는 2인 1조 수칙조차 무시된 채 밤샘 노동으로 내몰린 현대 직장의 적나라한 현주소를 보여준 사례이다.

 

자본의 이윤 추구는 이러한 자본주의 내적 모순이 강화됨에도, 끝까지 기생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이를 제도적으로 보완하면서 야간 노동을 요구하는 직종의 경우에도 노동자의 밤은 노동이 아니라 여가의 보장에 중점을 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야간 노동의 사고율은 오전 시간대 노동보다 훨씬 심대한 압박을 가할 수 있으며, 수면과의 관계와 불규칙적인 생활 습관 등으로 인한 건강 악화는, 마르크스, 『자본』만이 아니라 엥겔스, 『영국 노동계급 상태』에서도 체계적으로 증명된 바 있다.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가 2007년 심야 교대 근무를 ‘2A군 발암물질’로 지정한 것이나, 미국 노동통계국 등 각종 연구에서 야간 근무자의 작업장 사고 위험이 주간 대비 최대 30~50% 이상 급증한다고 보고하는 현실은 이러한 비판이 결코 과거의 유물이 아님을 입증한다.

 

그것은 현대에도 유효한 전근대적 8시간 노동법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일괄적으로, 또는 ‘자유롭게’ 자본의 임금 노동과 잉여 가치 창출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계형 압박이 고도화되었음을 의미할 뿐이다.

 

특히 한국의 8시간 노동법은 타국의 노동법에 비해서도 노동자의 결속을 제한하고, 훨씬 더 탄압적인 ‘야간 노동’으로 작동할 뿐이다. 이 점에서 최근 발휘된 ‘노란봉투법’의 여파 역시 순진한 법조계의 임시방편형 구시대적 정책일 뿐임이 증명된다. 야간 노동과 8시간 법안은, 줄여도 모자란 여가의 보장 없는, 사무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각 계급 및 세부적인 층위의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현대사의 현실인 것이다.

 

야간 노동의 폐지는, 첫째로, 자본주의 노동의 현실을 파악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수익을 따라잡을 수 없는 막대한 수익 창출의 복합적인 현대 구조를 해체하고, 그 실상이 전근대적인 노동법에서 비롯되었음을 법의 지배하에서 보호받지 못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생산 현장에서 표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에도 버젓이 진행되고 있는 순환제 근무 노동자들에게도 장기적으로 건강 악화를 초래할 뿐이며, 이러한 불상사에 대한 대처가 미흡함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물류센터에서 주간·야간을 오가며 일하던 노동자들이 잇따라 수면 장애와 뇌심혈관 질환(과로사)으로 사경을 헤매거나 목숨을 잃은 사례는, 변칙적인 교대 체제 아래 노출된 인체가 어떻게 서서히 파괴되는지를 생생히 증명한다. 체제적 모순은 야간 노동을 비롯한 전 인민의 ‘무상한 세월’을 잊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것이어서 그들은 단순히 ‘근로’함이 국가를 위해 성실하게 힘을 쓰고, 기업을 위해 복무할 수 있다고 간주해 온 오래된 까닭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노동자들에게 이러한 노동법에 대한 요구들이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 관습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실감하는 계기가 된다. 잠들 수 없는 고도의 압박이 초래한 결과가 불의의 사고로 이어질 때, 그것은 단순히 노동자 한 개인의 희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악순환의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심야 시간대 철도 관제나 장거리 화물 운송, 또는 고위험 화학 공장 등에서 피로 누적과 수면 부족으로 인한 주의력 저하로 발생한 대형 산업 재해들이 증명하듯, 야간 노동이 초래하는 불의의 사고는 한 개인의 희생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전반의 계급적 악순환으로 비화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한국의 역대 정부는 기득권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사익을 암암리에 정당화해 왔다. 그들은 해외 순방과 조약 체결이라는 단기적 정책의 법적 허점을 이용해 집권 수단을 비공개로, 때로는 노골적으로 활용해 왔다. 특히 민주공화국의 불완전한 체제 이행기 속에서 변화에 대응하기는커녕 거대한 기득권의 물결에 휩쓸려간 한국 정부의 역사는 ‘부르주아지’ 정부라는 대통령제와 지역 발전이라는 허황된 선거 제도로 점칠되었다. 언론은 기자를 정부의 하수인으로 전락시켰으며, ‘국가’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가짜 정부는 사법부의 해체 앞에서도 우왕좌왕하고 있다.

 

특히 ‘정상 회담’의 성과나 무의미한 회담 결과를 과장하여 유포하는 언론의 행태는, 체제에 대한 비판을 모함과 공격으로 되받아치는 정부의 무기가 되었다. 노동 인민에 대한 반동적 성격이 짙어짐에 따라, 물가 불안 등 정책적 대책조차 제시하지 못하는 정부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이들이 어떠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개혁주의’나 정부의 본질을 고발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득권 유지가 주는 기만책을 충분히 맛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초기에는 사회주의 약속을 내걸었으나, 이는 기존 사법적 질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낡은 주장을 변주하여 되풀이한 유산에 불과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최근 조희대 대법원장이 보여준 사법적·기득권 옹호 행태 역시 자본주의 질서에 종속된 민중에게 깊은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당 대 당의 구도는 소수의 독점에 맞서 대다수 인민이 공동 투쟁에 임한다는 선언이어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쓴 가짜 정부의 기만성은, 모순적으로 노후화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계급 투쟁의 씨앗이 무르익고 있음을 증명할 뿐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당의 노선은 더욱 참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가짜 정부가 만들어 놓은 ‘의회주의’라는 형식적 제도의 강요된 선택에 부역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거부하고 억압받는 인민의 진정한 요구를 표출하는 일이다.

 

우리가 지도자를 세우는 까닭은 한 개인에게 부역하기 위함이 아니며, 전 인민의 단결을 이루기 위함이다. 민주주의를 가장한 가짜 정부가 지금까지 헌정 질서를 위탁받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체제 간 대립과 안보를 핑계 삼아 제국주의 질서에 쉽게 편승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의 주역들이 노골적으로 희화화된 비난의 대상이 될지라도 결코 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의 위선적 위정자들은 모두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

 

‘여의도’를 암울하게 만든 국회의 당사자들과 그에 부역한 자들은 이제 역사의 배신자로 전락했다. 그들은 ‘찬란했던 진보’를 외치면서도 보수화된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했고, 가난한 민중을 삶의 터전에서 쫓아내는 데 동조하며 노동자들을 경제적으로 탄압해 왔다. 이 부역자들이 남긴 ‘적들의 유산’은 국내에 엄존한다. 그들은 인터내셔널의 유산을 위협하며, 자신들의 권리를 상속받았다고 주장하는 한 장의 종이(법적 권리)에 기대고 있다. 대형 은행의 대출 장려와 자본 기업의 이윤 추구가 결탁할 때, 그것은 인민의 생계를 더욱 압박하는 데 일조했을 뿐이다.

 

구시대의 정치적 언어와 이를 부추기는 정부의 모함이야말로 가장 큰 위선이자 기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공산당과 비공식 활동의 증진을 중심으로


인터내셔널 설립 이래 각국 공산당 간의 긴밀한 연락과 동맹은 항상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어 왔다. 매체의 발달로 기존 정보의 한계를 돌파하고 이러한 국제적 연락 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현대 공산주의 운동에서도 매우 중요한 과제다. 특히 ‘프락치’라는 용어가 러시아 혁명 당시 비밀리에 혁명가들을 모함하던 반혁명 집단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 연락 체계를 단순한 ‘간첩 활동’ 정도로 치부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코뮌테른 이후로도 국제 공산당 간의 연락 체계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녀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중국 공산당 시진핑 주석의 방한 당시 이루어진 교류는 당 대 당의 혁명적 연락이 아니라 국가 간의 정례적·단체적 협약에 불과했다. 공산당의 수장이 혁명적 공조가 아닌 부르주아적 대통령제 정부 당국과 손을 잡는 모습은 대단히 모순적이다. 언론은 단순히 그의 방한 자체에 집중했지만, 본래 공산주의 정당이라면 훨씬 정파적이고 계급적인 연락을 추구해야 한다. 국제주의적 당의 노력에 견주어 보면, 현재 당의 노력에 비하면 ‘수정주의’에 불과한 시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순과 한계는 한국 공산주의 운동 내 연락 체계의 단절이 초래한 현실이기도 하다. 분단이라는 특수성을 지닌 한국을 찾았을 때, 시진핑 주석은 임진왜란과 『난중일기』 등 한국의 역사 자료를 언급한 바 있다. 그가 현대 저작 대신 고전을 주로 소개하는 이유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이미 자국 인민들에게 『공산당 선언』의 숙독과 교육을 강조한 바 있으며, “중국은 전쟁이 아니라 문화로 성장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러한 구도에서 괴테, 『파우스트』나 일부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같은 고전은 공산주의자 간의 교류를 촉진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한국의 현실과 달리, 고전에 대한 깊은 이해는 인민의 계급적·지적 수준을 파악하고 끌어올리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각국 공산당을 연결하는 연락 체계는 ‘독서력과 지적 교류’도 있다. 인민이 수용하고 권장할 수 있는 혁명적·이론적 저작에 대한 관심이 깊어질수록, 혁명의 과정 또한 단순한 권력 유지의 명분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형성되는 고유한 토대이며, 부르주아 정부의 기대에 단순히 응해주는 외교적 이해관계와는 판도가 완전히 다르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생명의 나무만이 푸르다”는 『파우스트』의 어구처럼, 인간과 사회를 겉핥기식 회색빛으로만 그려내는 현대의 숱한 이론적 오류들은 결코 고전의 깊이에 미치지 못한다.

 

과거에는 서면이나 지면 중심의 방식으로 연락을 주고받아야 했지만, 오늘날은 기술의 발전 덕분에 훨씬 유능하고 정확한 정보를 신속히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을 활용하여 국제 공산당 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평의회(소비에트)적 의의를 확장하기 위해, 현대 공산주의자들의 다각적인 비공식 활동을 지지하고 증진해야 한다. 이는 향후 혁명적 공산당의 비약적인 성장으로 이어지는 매우 유익하고 필수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수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도시 재개발이 가린 자본

 

강남 부근 계룡 마을 일대가 화염에 휩싸였다. 화재 직후 주민들 사이에서는 도시 재개발을 겨냥한 의도적 사고가 아니냐는 무성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진위여부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나, 분명한 사실은 이번 참사가 주거지를 잃은 가난한 주민들에게 가혹한 생존의 압박을 안겼으며, 부실한 정부의 지원 속에서 이들이 삶의 터전을 복구하기란 요원하다는 점이다. 그것이 자연 발화이든 의도적 방하이든, 화재가 남긴 잔해 위로 인근 토지 점유권을 둘러싼 투기적 경쟁이 불씨처럼 번져나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러한 참사를 단순한 우연적 재난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자본과 공공 권력이 주도하는 도시 재개발의 진행을 가속화하는 ‘입지 마련의 방편’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도시 재개발은 자본주의적 ‘강탈에 기반을 둔 축적’의 현대판 판본이다. 주민들에게 집과 땅은 생존을 지탱하는 ‘사용 가치’이지만, 국가와 자본가에게는 오직 시세 차익을 안겨줄 ‘교환 가치’의 상품일 뿐이다. 화재는 주민들의 삶이라는 사용 가치를 순식간에 잿더미로 소멸시켜, 자본이 토지를 완전한 교환 가치의 공간으로 전환하도록 돕는 가장 야만적인 촉매제로 작동한다.

 

발화의 원인이 자연 발화이든 투기 세력의 횡포이든, 그 결과는 언제나 토지주택공사(LH·SH)의 방관 속에 자본의 이익으로 귀속된다. 화재가 노후된 시설로 인한 자연 발화였다 하더라도, 공공 기관은 소방 기반 시설이 취약한 이 지역을 “어차피 철거할 땅”이라며 방치해 왔다는 점에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나아가 화재로 주거지가 전소되면 공공 기관은 복구를 지연하고 ‘안전’을 명목으로 철거 속도를 오히려 가속화한다. 반대로 화재가 투기 세력의 소행이라면, 이는 저항력을 지닌 세입자들의 물리적 조직력과 점유의 증거를 하룻밤 사이에 지워버리고 명도 소송과 철거 비용을 극단적으로 단축하는 잔혹한 수단이 된다.


실제로 토지주택공사(LH·SH)는 공공의 가면을 쓰고 있으나, 실상은 자본을 위해 토지를 정비하고 지대를 창출하는 ‘공공 개발자’로 기능한다. 법적 수용권을 동원해 원주민의 땅을 강제 매수하고, 용도지역 변경 (종 상향)과 인허가로 막대한 개발 지대를 창출하지만 그 이익은 공공으로 환수되지 않는다. 대기업 건설사는 ‘책임준공’과 고액의 공사비를 독식하며 ‘상표 가치 이익’을 챙기고, 지주와 투기 세력은 지분 다툼을 벌인다. 따라서 수년간의 갈등과 화재를 거쳐 완성된 신축 대단지에 다시 돌아와 살 수 있는 원주민의 재정착률은 고작 10%~20%에 불과하며, 대다수의 빈민은 도시 외곽으로 축출된다.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의 화재는 단순한 ‘사고’의 범주를 넘어선다. 위험과 주거 상실이라는 사회적 비용은 전적으로 가난한 세입자와 원주민에게 전가되는 반면, 그들이 밀려난 자리의 막대한 지대 상승분과 분양 이익은 정부의 행정적 묵인 속에서 대기업 자본과 투기 세력이 독점한다. 따라서 계룡 마을의 화재 참사는 자본주의 도시가 공간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주거 빈곤층을 지워버리는 구조적 폭력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민중’이 중심이 아닌 ‘자본의 지대’가 지배하는 도시 계획이 근본적으로 철회되지 않는 한, 개발의 그늘 속에서 터전을 잃는 비극은 반복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