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대 정부는 기득권 유지를 위한 명분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암암리에 정당화했다. 그들은 순방과 협약이라는 단기적인 정책적 제도의 부실한 법적 결함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집권을 창출한 수단들을 비공개적으로, 때로는 노골적으로 드러내왔다. 특히 민주 공화국의 불완전한 체제적 이행기에도 이러한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러한 물결에 휩싸이고 만 한국의 역대 정부의 역사는 '부르주아지' 정부라는 대통령제와 지역 발전이라는 허황된 단일한 대표 선거로 점칠되었다. 언론은 기자들을 정부의 하수인으로 쉽게 부역하게 하였으며, '국가'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가짜' 정부가 언뜻 노골적으로 사법부의 해체에도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다. 


언론의 유포는 특히 '정상 회담'의 성과나 무의미한 회담의 결과로 지금까지 이러한 모함들을 우리에 대한 비난을 포함하여 색안경을 쓴 채 정부의 공격으로 가시화되었다는 점이다. 노동 인민에 대한 이러한 가시화된 반동 정부의 성격이 짙어짐에 따라, 물가 전반을 비롯한, 여전히 정책마저 내세울 것이 없는 정부가 어떠한 뚜렷한 성과를 내지도 못하고 '개혁주의'나 정부의 본질적 실체를 고발하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 기득권 유지를 위한 명분을 지금까지 충분히 맛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초기에는 사회주의를 약속하는 듯 보였으나, 이러한 외양은 실질적으로, 기존 사법적 유지의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도 않는 기존의 주장을 변주하여 되풀이한 낡은 유산임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조희대 장관이 보여준 사법적·기득권의 옹호 역시 자본주의 국가의 질서에 종속된 국민들에게 어떠한 상실을 안겼는지도 뚜렷해졌다. 당 대 당, 그것은 소수의 독점에 맞서 대다수의 공동 투쟁에 임한다는 선언과도 같다. 이러한 '가짜' 정부의 실체에, 그리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탈을 쉽게 쓴 가면처럼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들의 기만성과, 노후화된 자본주의 체제에 갇혀있는 계급 투쟁의 씨앗이 무르익고 있음을 증명할 뿐이다. 


당의 노선에 있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보다 참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가짜 정부의 모함에 갇힌 '의회주의'라는 형식적 제도의 강제된 선택에 부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여 억압받는 인민이 원하는 진정한 요구를 표출하는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지도자를 추대하기 이전에도, 그것은 단순히 한 사람을 위해 부역하기 위함이 아니라, 전 인민의 단결과 '민주주의'를 가장한 가짜 정부가 지금까지 헌정의 질서를 위탁받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란, 바로 체제 간 전쟁과 안보를 벗삼아 제국주의 질서에 쉽게 편승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희화화된 공산당의 주역들이 공화국의 노골적인 비난의 대상이 될지라도, 이에 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들은 모두 사실상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 


'여의도'라는 도시를 더욱 암울하게 만든 국회 장본인들과, 그것에 부역했던 관련 종사자들이 이제는 역사의 '배신자'가 되는 것은 이처럼 한 순간이다. 그들은 '찬란했던 진보'를 말하며 더욱 보수화된 입지를 유지하기 급급해졌고, 가난한 민중을 거주지로 쫓아내는 데 동의하면서, 노동자들을 경제적으로 '탄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에 부역한 '적들의 유산'은 국내에 있다. 인터내셔널의 유산을 위협하고, 자신들의 상속을 내세우고 있는 '권리'에 불과한 종이에 기대고 있다. 대형 은행의 '대출' 장려와 자본 기업의 이윤 추구가 자본의 순환에 쉽게 결탁할 수 있을 때 그것은 인민 전반의 '생계'를 더욱 압박시키는 데 일조했을 뿐이다.


구식의 정치적 언어와, 이를 부추기는 정부의 모함이야말로 가장 큰 위선이자 기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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