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지주 부역 경제에서 자본주의 경제
3-1. 농노 경제 및 자본주의 경제 체제 수용
코로베 경제의 특징
다음으로는 지주 경제 체제를 검토하고자, 농노제 시대의 경제 체제를 살펴보자. 경제 체제의 핵심은 주어진 농업 경제 단위로부터, 주어진 영지에 따른 전체 토지가 영주 토지, 농민 토지로 나뉘었다는 점이다. 농민 토지는 농민들에게 할당되어, 분배됐다. 농민들은 목재, 가축 등과 같은 다른 생산 수단을 제공받아서, 자신들의 노동 도구를 경작해서 생계를 유지했다. 정치경제학적으로는 농민에게 노동 산물이란 필수적인 생산물이었다. 농민에게는 생계 수단을 제공하고, 지주에게는 노동력을 필수적으로 제공했다. 자본 가치에 따른 가변 부분을 대체하는 생산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필수적인 생산물이다. 농민들의 초과 노동도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지주들의 토지를 경작했다. 따라서 노동 생산물은 지주에게로 돌아갔다. 초과 노동에서 필요한 노동과 공간적으로는 분리됐으며, 지주를 위해서 농민들은 지주들의 토지를 경작하기도 했고, 자신들에게 해당하는 할당량을 받았다. 현물 임금, 지주에게 일손을 제공하는 수단으로부터 할당량은 기능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할당량을 자신들의 경작지로부터 경작한다는 건, 지주 경제에서도 조건이었고, 농민들에게는 생계 수단의 제공이 아닌, 지주들에게 일손을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코르베(Barshchina) 경제란 바로 이와 같은 경제 제도이다. 코로베 경제 체제에서는 자연 경제가 우세했으며, 봉건적인 영지에 따라 외부 접촉이 없는 자급자족 '실체' 생활을 영위했다. 특히 농노제 후기에서 발전한 지주들의 곡물 판매 생산은 구체제 붕괴의 전조였다. 코르베 경제 제도는 직접적인 생산자들에게 생산 수단, 전반에서 특히 토지를 할당해야만 했다. 지주는 토지에 묶였으며, 일손이 보장되지 않았다. 코르베 경제와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초과 생산물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은 정반대였다. 코르베 경제에서는 생산자에게 토지를 제공하는 기반을 두어,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생산자가 토지를 박탈하는 기반을 둔다. 그러한 경제 체제에서는 경제적 조건이 농민이 지주에게 개인적으로 의존하게 됐다. 지주는 농민 인신에 대한 직접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토지를 소유한다거나, 자신의 농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을 강제로 일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경제 체제를 말하면서, 경제적 압력 이외에도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 노동 지대라고 불렀다. 그리고 노동 지대 범주가 할당된다고 지적했다. 강제적인 형태에 따른 정도로는 농민들이 농노 지위에서 사회적인 신분으로 부상하기까지 권리 부족에 이르며, 매우 넓고 많이 분포한다는 점이다. 코르베 경제와 자본주의 경제 조건과 결과로는 기술이 극도로 낮으며, 정체된 상태이다. 농업은 빈곤에 짓눌렸고, 개인적인 의존과 무지로부터 타락한 소농의 수중에만 머물렀다.
A. 엥겔하르트는 「시골에서 온 편지」에서도 당시에 경제 체제를 생생하게 묘사했는데, 엥겔하르트는 봉건 경제가 명확하고, 규칙적이고, 완전했으며, 지주들로부터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많은 직업들을 배정한 체제였다고 지적했다. 헨리 조지가 인구 대량 수탈이 빈곤과 억압에 따른 보편적인 원리라는 견해에 대해 엥겔스는 반대했다. 1887년, 『영국 노동 계급 상태』에서 '역사적으로 완전하게 옳지 않다. 중세 시대에는 사람들이 토지에서 수탈당한 게 아니라, 토지를 차지했던 봉건적인 억압이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토지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농노는 그 당시 영주 아래에서만, 토지에 붙어 살 수 있었으며, 노동과 생산을 영주에게 조공으로 받칠 의무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코르베와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결합
코르베 경제 체계는 농노제 폐지 때문에 악화됐다. 체계에 따른 모든 주요한 기반, 자연 경제, 토지 소유지에 따른 자급자족적인 성격, 많은 구성 요소 간 긴밀한 연계, 농민들에 대한 지주 권력은 약화됐다. 농민 농장은 지주 농장과 분리됐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토지를 매입하여 완전한 소유자가 됐다. 지주는 자본주의 농업 체계를 채택했으며, 앞서 정반대로 기반을 가졌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체계 전환는 동시에 이뤄질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인 생산에서 필요한 조건들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고용 노동층이 여기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따라서 농민 농기구는 지주 농기구로 대체됐다. 농업은 영주 사업이 아닌 다른 상업 및 산업 기업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조직됐다. 따라서 모든 조건들도 점진적으로 형성됐으며, 개혁 직후로는 일부 지주들이 해외로부터 기계와 노동자들까지 수입하려는 시도는 실패했었다. 자본주의적인 경영 방식 전환을 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로는 구 코르베 경제 체계가 약화되긴 했었지만, 완전하게 파괴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농민 농장에서는 지주 농장과 완전하게 분리되지는 않았으며, 지주는 농민 할당지로부터 매우 필수적인 부분으로, 분할 토지, 숲, 초원, 수경 시설, 목초지 등을 소유했다. 토지 또는 지상권 없이는 농민들이 자립적인 농업을 영위할 수가 없었으며, 지주는 노동이자, 봉사로부터 낡은 경제 체제를 지속할 수밖에는 없었다. 경제적인 압력 이외에도, 강제력에 따른 압력 혹은 외압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농민들에게 일시적인 구속 상태와 집단적인 책임, 신체적인 처벌, 공공 사업에 대한 강제 노역 등으로 남았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가 한꺼번에 출현할 수는 없었고, 코르베 경제는 한 번에 사라질 수는 없었다. 따라서 유일한 경체 체제는 코르베 체계와 자본주의 체제를 결합한 과도기적인 체계였다. 실제로는 지주들이 실행한 개혁 뒤로는 농업 체계에서도 같은 특징을 지녔다. 과도기적인 시대에는 비교적 무궁무진하고, 많은 형태를 보이던, 현대 지주 농업으로부터 경제적인 조직들이 많았으며 결합된 노동 용역 체계와 자본주의 체제를 갖추게 됐다. 노동 용역 체계에서는 지주들의 토지가 이웃 농민들의 도구로부터 경작됐으며, 지불 형태는 체계의 본질을 쉽게 변경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진다. 일자리 고용과 같이 화페로 지불하든, 반모작과 같이 생산물로 지불하든, 노동 용역과 같이 토지로 지불하든지, 코르베 경제의 잔재로 남았으며, 전적으로 노동 용역 체계에서도 적용됐다. 유일한 예외로는 노동 용역 체계 가운데 하나로부터 코르베 경제의 조건 가운데 하나가 사라졌다. 노동이 현물로 지불되는 대신에 돈으로 지불되는 고용 노동 방식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농업 체제는 토지를 경작하는 노동자들, 연간직, 계절직, 일용직 등의 고용으로 나타났다. 자본주의 농업 체제에서는 실제로도 그 수가 매우 많았고, 신기루와 같이 얽혀있었다. 많은 지주 영지에서는 두 체계가 결합됐다. 또한 서로 다른 농업 운영에도 적용됐다. 상이하고, 반대되는 경체 체계의 결합들은 실제로 매우 심오하거나, 복잡한 갈등과 모순을 초래했으며, 이러한 경제적 압력으로 인해 많은 농부들이 파산하는 등, 여러 결과를 자연스럽게 초래했다.
이것이 모든 과도기에 일어난 특징적인 현상이었다. 두 체제로부터 상대적인 발생율을 제기하자면, 과도기적인 문제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없었고, 수집할 수도 없었다. 모든 재산 뿐만이 아니라, 모든 재산으로부터 수행되는 모든 경제적인 활동을 등록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개별 지역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으로부터 대략적인 통계만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었고, 특정 체계에 우세함에 대해서도, 해당 통계는 농업부, 고용 노동부 등에서 간행된 간행물들로부터, 러시아 전체에 대한 요약본일 뿐이었다. 통계를 기반으로 안네스키(Annensky)는 체계에서 일어나는 발생률을 표로 구성했었다. 해당 통계를 도표로 요약했으며, 「러시아 제국 통계, 1883-1887, 5년 간 유럽 러시아에서 평균 수확량」(상트페테르부르크, 1888)에서는 1883-1887년 개인 소유지 토지에 따른 경제 면적에 대한 수치를 추가했다.
- 따라서 순수 러시아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노동 용역 제도가 우세했으며, 유럽 러시아 전체로 보자면, 자본주의적인 지주 농업 제도가 우세했다. 게다가 도표로는 우세함에 대한 완전한 그림을 제공하지는 못했다. 특히 구베르니아 I 유형 집단에서는 노동 용역 제도가 전혀 적용될 수 없는 발트해 구베르니아가 포함되지만, III 유형에서는 단 하나의 구베르니아도 포함되지 않았고, 자본주의적인 제도에 따라 부분적으로는 적용되지 않는 농지가 단 하나도 없었다. 「젬스트보 통계에 따른 러시아 사유지 농업」 표도 있다.
- 노동 용역 제도는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되어 '융합'됐다. 따라서 둘을 구분할 수 없었다. 농민들은 토지를 임대한 대가로부터 일정 기간 노동을 약속하는 관행이 만연했다. 그러한 농민들과 일정 기간 동안에 노동을 약속했으므로, 토지를 부여받은 서유럽 또는 동유럽, 농장 노동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었을까. 점진적인 경제 체제로부터 서로 결합하여, 정반대의 형태를 지닌 경제 체제를 생산했다. 따라서 노동 용역은 어디에서 끝나거나, 자본주의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됐는지는 말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 현대 지주 농업에 따른 많은 형태들은 노동 용역 제도와 자본주의 체제라는 두 가지 체제로부터 두 체제에 대한 경제적인 설명을 제공했으며, 경제 발전에 따른 진화 과정에서도, 어떠한 영향력으로부터 어느 체계가 다른 체계를 제거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 코르베라는 용어는 노동 용역으로 대체된다. 노동 용역은 개혁 이후 관계에서도 부합하기 때문에 문헌에서도 통용된다.
- 한 농무부 특파원은 오렐 구베르니아 시에서, 옐레츠 군(위예즈드) 남부 대지주 농장에서 일용직 노동자의 도움을 받아서 경작하는 상당 부분의 토지를 농민들로부터 임대받은 토지와 교환해서 경작했었다. 전직 농노들은 이전 지주에게서 계속해서 토지를 빌렸으며, 빌린 대가로 토지를 경작했다. 이와 같은 마을들은 지주들로부터 '부르베'라는 이름을 가졌다. S.A.코롤렌코, 『고용된 노동』에 따르면, 칼루가 지역에서 또 다른 지주는 자신의 농장에서 모든 일을 이전 농민들이 했었다. 8개 마을에서는 약 600명이었다. 대가로는 2,000-2,500마리 가축을 위한 목초지로 이용했었다. 계절 노동자들은 파종기(씨앗 드릴)로부터 첫 쟁기질과 파종을 했다.
- 대부분의 영지는 토지 일부에 따른 소유주가 자신들의 농기구와 연간 고용된 노동자 및 기타 노동자들의 도움을 받아 경작했었지만, 반작물 기준으로, 토지와 교환하거나, 돈을 받아서 경작했다. 『농장에 인력을 제공하는 방법』(1893)에 따르면, 대부분 영지에서는 거의 모든 대다수 형태로 같은 시기에 고용이 이뤄졌다.
- 유럽 러시아에서는 50개 구베르니아 시 가운데 다음 지역은 제외됐다. 아르항겔스크, 블로그다, 올로네츠, 뱌트카, 페름, 오렌부르크, 아스트라한이었다. 1883-1887년 구베르니아 시에서 경작된 면적으로는 유럽 러시아 전체로부터 해당하는 토지에서 경작된 총 16,472,000데시 가운데 개인 소유주 영지로는 562,000데시에 달했다. I 유형 집단에서는 발트해 구베르니아 3개, 서부 구베르니아 4개 지역(코브노, 빌나, 그로드노, 민스크), 남서부 구베르니아 5개(헤르손, 타우리다, 베사라비아, 예카 테리노슬라프, 돈), 남동부 구베르니아 1개(사라토프) 다음으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야로슬라블 구베르니아였다. II 유형 집단으로는 비체브스크, 모길료프, 스몰렌스크, 칼루가, 보로네시, 폴타바, 하루키우가 포함됐다. III 유형 집단에서는 나머지 구베르니아가 포함됐다.
- 하지만 사유지 총 경작 면적에서는 소작농이 소유한 경작 면적을 차감해야 했지만, 그런 통계는 없었다. 이와 같은 '수정'으로 인해 자본주의 체제가 우세하다는 결론을 거의 바꾼다거나, 고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흑토 지대에서 지주 경작지 상당 부분은 임대됐고, 지대로부터 구베르니아 단위로는 노동 용역 제도가 지배적이었다.
- 차단된 토지(Otrezki)에서 지주들은 농노제가 폐지됐을 때, 농민들로부터 목초지, 숲 등을 빼앗아갔다.
- 일시적인 구속 상태에서도 농민들은 1861년 농노제 폐지 뒤로는 지주를 위해서 특정 용역, 부역 제공, 지대 지불을 수행해야만 했었던 농노였으며, 일시적인 구속 상태에 따라 농민들은 지주와 합의해서 상환금을 지불했고, 할댱량을 획득할 때까지 노동을 지속했다. 지주는 1881년 칙령 뒤에서야, 상환금을 받을 의무가 생겼으며, 따라서 농민과 지주 간 의무 관계는 1883년 1월 1일부로 종료됐다.
- 레닌은 1897년 슈셴스코예 마을에서 『수확과 곡물 가격이 러시아 국민 경제 면에서 미치는 영향』 두 권을 접했었다.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를 집필할 때도, 해당 저작을 주의 깊게 연구했으며, 두 권에는 수 많은 논평들도 담겼다. 인민주의자들이 농민의 차별화를 모호하게 만든 '평균 통계'가 실제로는 왜곡됐다는 점을 폭로했으며, 구체적인 자료와 통계를 주의 깊게 검토하고, 또 활용했다. 덕분에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여러 구베르니아에서 자본주의, 노동 용역, 혼합 분포들에 따른 많은 경제 형태를 체계적으로 보여 준 표를 작성했다.
3-2. 노동 용역 제도
노동 용역 제도의 설명
농민들은 임금을 받고, 자신들의 도구로부터 지주들의 밭을 경작했다. 이는 '일자리 고용', 데시아틴 고용', '주기적인 경작' 등으로 불렸다. 농민들은 곡물이나, 돈을 빌려서 전체 대출금이나, 이자를 갚았다. 노동 용역 제도에서는 고유한 특징이다. 노동 고용으로부터 속박되거나, 고리대금업적인 성격이 있었다. 가축지 불법 침입 때문에 법적인 벌금을 갚고자 노역한다.
엥겔하르트에 따르면, 단순히 '존경심' 때문에 무상으로 일해서, 술 한 잔 벌어마신다거나, 지주들로부터 다른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토지를 대가로 노동은 반경작, 임대 토지, 사용 토지 등으로부터 직접적인 노동 형태가 퍼졌다. 임대 토지 지불도 매우 많은 형태를 띠거나, 결합했으며, 임대료와 현물 임대료, 노동 용역도 엄연히 존재했다. 카리셰프는 <임대>에서 데시아틴에 경작하는 1과 1/2 데시아틴 + 계란 10 개 + 닭 1 마리 + 여성 노동 1일, 봄 작물 토지 43데시아틴에 대해 데시아틴 당 12루블, 겨울 작물 토지 51데시아틴를 계산했으며, 데시아틴 당 16루블로, 현금+귀리 7단, 메밀 20단, 호밀 20단 타작+임대 토지 최소 5데시아틴에 대한 거금, 자체적인 가축 분뇨를 데시아틴 당 300수레 짐의 비율로 지급했다고 한다.
농민들의 분뇨조차도, 사유지 소유주 농장에서는 구성 요소로 전환된다. 노동 용역에 따른 폭 넓고, 많은 성격으로는 오트라보키(Otrabotki), 오부치(Otbuchi), 오부키(Otbutki), 바리키나(Barshchina), 바사링카(Basarinka), 포소브카(Posobka), 판시키나(Panshchina), 포슈포크(Postupok), 비옌카(Viyemka) 등이 있다. 농민들은 소유주들이 명령하는 모든 노역들을 수행한다거나, 주인들의 말에 복종한다. 노동 용역은 농촌 생활에 필요한 모든 직업 순환들을 포괄한다. 밭 경작, 곡물 및 건초 수확과 관련된 모든 작업들은 노동 용역으로부터 장작으 비축하고, 짐을 싣거나, 지붕과 굴뚝을 수리한다거나, 가금류와 계란을 배달하는 일 등도 모두 노동 용역으로부터 이뤄졌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구베르니아 시의 그도프 지역 조사원은 노동 용역이 개혁 이전에 부역의 성격을 지닌다고 지적했었다.
이와 같은 토지에 대한 노동 용역은 노동 서비스 임대와 현물 임대료 지불로 이뤄졌다. 코르베 경제와 자본주의적인 관계에 앞선 '잔재'로부터 임대를 볼 수 있었다. 농업 노동자들에게는 토지를 할당하여, 영지에 제공하는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된다. 젬스트보 통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사유지 소유주들의 영지에서는 자체적으로 농업이 발전함에 따라서 소유주는 필요한 시기에 노동자를 공급하기로 '보장'했었다. 따라서 많은 곳에서는 농민들에게 노동 용역을 기반으로 토지를 분배한다거나, 노동 용역과 더불어 작물 일부를 분배하는 경향들 생겨났다. 당시에는 농업 체계도 널리 퍼졌다. 임대인들은 자신들의 농사를 자주 할수록 임대할 수 있는 토지 양이 적다거나, 토지 수요가 클수록 토지 임대는 더욱 널리 발전했다. 특수한 임대가 생겨났으며, 토지 소유자는 자신들의 농장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며, 사유지 소유자 경작들의 발전으로부터, 소유 면적에 따른 확장 및 농민 농장 통합이 아닌, 농민들을 농업 노동자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농민 농장은 토지 임대로부터 모순적이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농장 수익의 확대였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박한 필요에 따른 거래였기 때문이다.
지주 농장에서도 마찬가지로, 토지 임대는 모순적이다. 지대를 지불하고자, 다른 사람들에게 농장을 양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농장을 운영하는 방법이기도 했으며, 자신들의 영지로부터 인력을 제공하는 방법이었다. 노동 용역에서 노동 지불로 넘어가서, 많은 출처의 통계들은 노동 용역과 담보를 기반으로, 고용된 노동에 대한 지불이 늘상 자본주의에서 자유 고용보다 낮다는 점이었다. 현물 지대에 따른 노동 용역과 반작물에 기초한 단순 노동 용역, 담보 임대료는 일반적으로는 어디에서나 금전적인 지대보다도 더 값비싸거나, 훨씬 더 비싸며, 트베르 구베르니아 시 르제프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배나 더 비쌌다. 현물 지대는 매우 가난한 농민 집단에서 매우 빈번하게 발생했다. 절박한 필요에 따라서도 임대했으며, 농업 임금 노동자로 전환하는 것에 맞설 수 없는 농민들로부터 임대됐다. 부농들은 돈을 위해 토지를 임대하고자, 모든 일을 다했다. 소작인들은 돈으로 임대료를 지불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이용해서라도, 타인들의 토지 사용 비용을 줄이고자 했다. 토지 임대 비용을 줄일 뿐만이 아니라, 담보 임대료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로스토보 돈 지방 군(Rostovon Don Uyezd)에서는 농민들의 수확물 몫은 감소했음에도, 임대료가 상승하면서, 돈 지역 임대료는 다른 지역인 스코프시나(Skopshchina)로 대체된 일도 있었다. 농민들을 완전하게 파멸시키거나, 농장 노동자로 전락시키는 현물 임대료로 분명하게 설명된다.
노동 용역 고용에서는 노동 가격과 자본주의적인 자유 고용으로부터 자본주의적인 노동 가격이 훨씬 더 크다. 농무부에 따르면, 「고용 노동」 간행물에서도 겨울 곡물을 부유한 1데시아틴의 토지를 농민 자신의 농기구로 완전하게 경작하는 데는 평균 임금, 6루블이 계산된다. 1883-1891년, 8년 간 중부 흑토 지역 통계에 따라서도 그러나 고용 노동을 기준으로 동일한 양으로부터 노동 비용을 계산했을 때, 가축 노동을 제외하고는 노동자의 노동만으로는 6루블 19코펙이 나온다. 가축 노동에 대한 임금, 4루블 50쿠펙보다는 적어도 낮을 수 없었기 때문에, 농무부 편찬자는 절대적, 비정상적이라고, 정당하게 간주했었지만, 자본주의적인 고용 아래에서는 노동에 대한 지불이란 모든 형태의 속박이나, 다른 이전의 자본주의적인 관계 아래에서 보다 높다는 점은 농업 뿐만이 아니라, 산업 사회에서도 러시아뿐만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에서도 확립됐다. 고리대금업과 결합된 채권 임대 부분에서도 노동 용역은 노동에 대해 지불된 가격으로는 자본주의적인 임대에서 지불된 가격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었다. 노동 용역은 지역 농민만이 수행했으며, 할당을 제공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임금이 엄청나게 하락했고, 현물 임금에서도 할당은 중요했따. 할당이란, 지주들에게 저렴한 노동력을 공급하는 보장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자유 노동, 반자유 노동에 따른 차이는 임금 차이만으로 완전하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임금 노동에 따른 형태로는 늘 고용된 사람들이 고용한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의존하는 상태들이 생겨나며, 경제적인 압력 이외에도 다른 압력들이 더욱 크거나, 적게 유지되는 일도 매우 중요했다. 엥겔하르트는 노동 용역으로부터 상환하고자, 돈을 빌려주는 것을 부채의 더 큰 안정성이라고 언급했었다. 압류 명령에 따라서도 농민들로부터 지불을 받아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당국은 자신들의 곡식이 수확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농민이 맡은 일을 수행하도록 강요한다. 오직 오랜 세월 노예 생활, 영주를 위한 농노 노동만이 농부가 자신들의 곡식을 비에 젖게 두거나, 다른 사람들의 곡식단을 수레에 실어 갈 수 있는 무관심을 초래했다. 인구를 거주지, 공동체 묶는 어떤 형태가 없다거나, 시민권이 어느 정도 부족하지 않는다면 노동 용역 제도를 시행할 수 없었다.
노동 용역 제도로부터 노동 생산력은 낮아질 수밖에는 없었다. 노동 용역에 기반한 농업 방법은 매우 고정 관념적인 방법이었다. 속박된 농민 노동에서는 질적으로 농노 노동과 비슷했다. 노동 용역과 자본주의 체제의 결합은 현재 지주 농업 체제를 경제 조직 면에서 대규모 기계 산업이 발전하기 이전에 섬유 산업 체제와도 매우 비슷했다. 상인들은 자신들의 도구와 임금 노동자를 사용해서 작업 일부를 수행했었으며, 상인을 위해 일하는 농민, 수공업자 도구로부터, 그러한 재료를 사용해서 작업했다. 임금 노동자는 고용주 도구를 사용해서 작업 일부를 수행한다거나, 타인의 토지에서 일하는 농민 노동과 도구로부터 작업했다. 산업 자본과 결합된 상인 자본은 엄연히 존재했으며, 수공업자는 자본에 짓눌렸고, 하청업체와 노예 운영, 화물차 체계 등으로부터 부담을 져야만 했다. 산업 자본과 결합된 상인, 고리대금업 자본은 온갖 형태로 임금 인하, 생산자들의 개인적인 종속 강화를 동반했다. 과도기적인 체계로는 원시적인 수작업 기술에 기반을 뒀고, 수 세기 동안 지속된 대규모 기계 산업으로부터 30년 만에 파괴됐다. 노동 용역은 루스 부상 뒤로 이어져서, 지주들은 루스카야 프라우다 시대부터 꾸준하게 농민들을 속박해갔다. 실생활 기술들을 영속화시켰고, 개혁 뒤 시대에 이르러서야, 자본주의로 빠르게 자리를 내줬다. 낡은 체계는 단지 생산 형태와 결과적으로는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정체가 일어났으며, 아시아적인 삶의 방식에서도 지배를 뜻했다. 모두 새로운 자본주의적인 경제 형태에 따라서 내재된 모든 모순과 함께 발전해갔다.
- 「모스크바, 구베르니아 통계 수익률」, 농민과 사유지 소유주 농업에 대한 모든 문헌에서도 비슷한 자료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 노동 용역 형태와 온갖 보충 지불 등을 수반한 토지 임대 형태에서 많은 분화 요인들은, 마르크스 『자본』 제 3권 47장에서도, 농업에서 전자본주의적 관계에서 주요한 형태에 따라 완전하게 포괄된다.
노동 지대, 현물 지대, 화폐 지대에 따라 마르크스는 지대 문제를 다뤘던 부분부터 러시아 자료를 참고하기도 했다.
- 젬스트보 통계 조사 자료에 따르면, 농민들이 임대받은 모든 토지에서 76%가 현금으로 지불됐고, 3-7%는 노동 용역으로, 13-17%는 생산물 일부로, 2-3%는 여러 방법으로 결합되어 지불됐다.
- 부역 경제에 따른 지주는 농민이 자신들을 위해 일하도록 농민들에게 토지를 줬다. 토지가 노동 용역으로부터 임대될 때도, 동일한 경제적 문제는 부각됐다.
- 카리셰프, 『수확의 영향력』에서도 농민들은 반작물, 노동 용역을 기준으로 토지를 임대하도록 강요하는 까닭은 빈곤 때문이었으며, 부농들은 현금으로부터 토지 임대를 더 선호했다.
현물 임대료는 농민에게 현금 임대료보다도 훨신 값비쌌다. 그러나 빈농들은 자신들의 작물 면적을 반작물 기준으로 타인들의 토지를 확장시켜, 식량에 대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상태를 막지는 못했었다. 카리셰프와 같이 자연 경제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터무니 없는 생각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물 임대료 지불은 현금 지불보다도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갔으며, 농업에서는 화물 체계를 구성했고, 농민들은 완전하게 파산해서, 농장 노동자로 전락해버렸다. 그런데도 경제학자들은 식량을 개선한다고만 말해왔다. 반작물 임대료 지불은 농촌 인구로부터 궁핍한 농민층들로부터, 농민들이 농장 노동자로 전락하는 조건 아래에서 최악의 조건으로부터 토지를 얻을 수 있으며 돕는다고 말해왔다. 그렇다면 인민주의자와 농업 계급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들은 늘 농업 인구에서 빈곤층들에게 같은 종류의 도움을 줄 준비를 마쳤다고만 말해왔다. 평균 일당이 60코펙이고, 여름철 일용직 노동자는 30-50코펙으로 추산된다. 반농부와 반경작자들의 수입은 농장 노동자들의 임금보다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농장 노동자와 달리 반농부와 반경작자는 농사 비용이 있지 않는가. 베사라비아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여름철 평균 일당은 44-77코펙(1883-1887, 1888-1892)였지만, 말과 마구를 갖춘 노동자 평균 임금이란, 124-180 코펙(1883-1887, 1888-1892년)이었다. 농장 노동자는 반농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1882-1891년 베사라비아 구베르니아 시에서 가축 없는 노동자들의 1년 평균 일당은 69코펙이었다.
- 바실리코프와 같은 인민주의자가 자본주의를 비판한다는 것은 반동적이다. '고용'을 모순이라고만 외친다. 고용이란 비독립성을 전제하고, 비독립성은 자유를 배제시킨다. 인민주의적인 사고 방식만으로는 지주는 자본주의가 구속된 비독립성을 자유로운 비독립성으로 대체해버렸다.
- 카리셰프에게 반작물 임대는 반자유 노동으로부터, 노동 생존에 유익하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던 건 유감이다.
- 순환 경작에 따른 개혁 뒤로는 농민들이 지주에게 토지를 임대해서, 제공한 노예화 형태에 따라, 노동 용역으로, 현금 또는 현물로 대체했으며, 농민들은 자신들의 농기구와 가축을 이용하고, '순환'해서 경작했다. 봄 작물을 한 데시아틴과 겨울 작물을 한 데시아틴을 경작했으며,
가끔 한 데시아틴 작물을 수확했다.
- 스코프시나, 러시아 남부 지역에서는 토지 임대료를 현물로 지불하는 말이나, 노에로부터 지불하거나, 소작인들은 토지 소유자에게 수확물 일부만을 스코프니(Kopny)로 지불하고, 이외에도 많은 노동 용역을 제공했다.
- 빌랭(Villeins), 고대 루스(9-13세기), 봉건적인 종속 농민으로부터, 군주와 다른 세속 및 성직자 영주들을 위해 부역했으며, 현물로부터 지대를 지불하기도 했었다. 봉건 영주들은 빌랭 토지를 빼앗고는 봉건 영지에서 강제로 노역하게 만들었다.
- 루스카야 프라우다 『러시아 법률』에서는 최초로 법률 및 군주령 성문화(11-12세기), 루스카야 프라우다 법령은 봉건 영주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했으며, 봉건적인 속박에 시달리는 농민들과 착취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격렬한 계급 투쟁으로 보여줬다.
노동 용역 제도 쇠퇴
상품 경제 성장은 노동 용역 체제와 상충한다. 노동 용역 체제에서는 자연 경제, 불변 기술, 지주와 농민 사이에서 불가분 관계에 기반한다. 따라서 노동 용역 제도는 완전한 형태로 설명할 수는 없으며, 상품 경제와 상업 농업 발전은 그 실행을 훼손시킨다. 지주 농업에서도 행해지는 노동 용역은 가축과 농기구를 소유한 소작농만이 수행하는 '순환 경작'(사이클 데시아틴)으로 불리우며, 쟁기질 등에 다른 노동 용역과 농기구가 없는 농촌 무산층만이 수행할 수 있는 수확, 풀 베기, 탈곡 등과 같은 노동 용역이 있다. 소작농과 지주 농업 모두에서, 두 유형의 노동 용역은 서로 상반되며, 농촌 무산층들이 수행하는 노동 용역은 자본주의로부터 직접적인 이행을 구성하며, 눈에 띄지 않고자 자본주의와 '융합'한다. 노동 용역은 이러한 여러 이행 과정을 지칭하며, 심지어 구분도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노동 용역을 없애는 동안에도, 중심을 소작농 노동 용역으로부터 농촌 무산층 노동 용여긍로 옮긴다는 건 매우 중요해진다. 「모스크바 구베르니아 시 통계 수익」에 따르면 대부분 영지에서는 밭과 작물 경작, 수확을 좌우하는 작업들은 정규직 노동자가 담당하지만, 수확과도 같은 신속하거나, 속도가 붙어야만 하는 작업 같은 경우로는 이웃 농민들에게 맡긴다거나, 돈을 빌리거나, 목초지와 다른 토지를 사용한 대가로부터 수행된다. 그러한 농장에서는 대부분 일손들이 노동 용역으로부터 고용되지만, 자본주의 체제가 우세하기 때문에 이웃농들은 독일에서 계약직, 일용직 노동자와 비슷한 농촌 노동자로 전락한다. 이 사람들은 땅을 소유하면서도, 일년 중에 특정 기간 동안에만 고용된다. 1890년대에는 흉작이 일어났으며, 농민들이 소유한 가축 수는 엄청나게 감소했으며, 가축 없는 가구가 증가한 건,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노동 용역을 제거하고, 가속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노동 용역 제도 쇠퇴에서 매우 중요한 원인으로는 농민층 분화를 꼽을 수 있다. 소작농 노동 용역과 농민층/중산층 간 관련은 앞서 명확하고, 선험적인지라, 젬스트보 통계로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보로네시 주 자돈스크 지역의 요약본은 많은 농민층에서도, 일용직 농장 수에 대한 결과를 백분율로 나타냈다. 따라서 두 극단 집단에서도 일자리 참가가 덜 '일반적'이다. 일자리 가구 가운데 큰 비중은 중농이다. 젬스트보 통계 초록에서도 '일자리'는 '고용' 범주에도 포함되기 때문에, 중농들의 전형적인 고용이라는 점이다. 최하위 및 상위 농민 집단에서도, '전형적인' 고용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검토된 고용 유형으로는 자본주의 발전으로부터 비롯된 상업 및 산업 시설과 노동력 판매를 나타내지만, 여기서 고용 유형이란 반대로 후진적인 자본주의와 노동 용역 우세를 나타낸다. 일자리 총합에서 직업이 소작농, 노동 용역으로부터 할당한 것과 같다고 가정하는 경우이다.
자연경제와 중농 쇠퇴가 심화될수록, 자본주의는 노동 용역을 더욱 강력하게 근절한다. 부농들은, 당연하게도 노동 용역 제도에서도 기반을 마련한다. 농민이 최저 임금으로 일자리, 자신들의 농장을 파멸시키는 일자리를 떠맡는다는 건, 절박한 궁핌이 있기 때문이다. 농촌 무산층들도, 역시나 노동 용역 제도에 적합하지는 않았다. 다른 이유로는 자신들의 농장이 아예 없거나, 비참한 토지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농촌 무산층들은 중농만큼 농장에서 얽매이지 않으며, 결과적으로는 다른 곳에서 보다 '자유로운' 조건 아래에서 더 높은 임금과 아무런 예속이나 구속 없이도, 쉽게 고용될 수 있었다. 따라서 농민들이 도시로부터 떠난다거나, '외부 고용'에서 떠나는 것에 전반적으로 불만을 품거나, 농민들은 애착이 없다고 불평한다. 자본주의적인 임금 노동의 발전은 노동 용역 체계에서 그 뿌리를 약화시킨다. 농민 분리와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용역 폐지 사이에서 불가분한 관계로는 이론적으로도 매우 명백하며, 지주 영지로부터 많은 농업 방식을 관찰한, 농업 저술가들로부터 오랫동안 지속됐다. 1857-1882년 사이에 대해 스테부트 교수는 러시아 농업에 대해 지적하면서, 지역 사회에서 농민 농업은 농부 산업가가 농장 노동자와 차별화된다고 말했었다. 대규모 경작자가 되는 농부 산업가는 농장 노동자를 고용하면서부터 농작물 면적을 다소 늘린다거나, 대부분 일자리를 취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목초지를 얻고자, 절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에서, 일자리를 취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농장 노동자는 가축이 부족해서, 취할 수조차 없다. 따라서 임금 노동에 기반한 농업 전환, 신속한 전환이 필요해지게 된다. 여전히 데시아틴에 따른 일자리를 취한 농민들은 허약한 가축 상태와 맡은 일들도 많기 때문에 품질과 신속환 완료 요구로 인해, 모두 나쁜 작업만을 벌이고 만다.
농민 몰락은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용역 폐지로 이어진다. 젬스트보 통계 자료에서도 언급된다. 오렐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곡물 가격 하락으로 인해 많은 소작농들이 파산했으며, 토지 소유주들은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계속해서 경작지를 늘려갔따. 지주가 경작하는 면적이 확대되면서부터 어디서나 농장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로만 일자리를 대체하다가, 농민들의 농기구 사용을 폐지하는 경향들도 생겨났다. 최신 농기구를 도입해서, 토양 경작을 개선하고, 농업 체계를 바꾼다거나, 풀 작물을 도입하거나, 가축 농업을 확장하거나, 개선해서 수익을 만들려는 경향들도 생겨났다. P. 스트루베의 비판적 논평에 따른 「오렐 구베르니아 농업 조사」에서도 1890년 폴타바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곡물 가격이 낮았을 때, 구베르니아 시 전역에서는 농민 토지 임대가 감소했다. 따라서 많은 곳에서 곡물 가격은 크게 떨어졌음에도, 정규직 노동력을 고용한 지주가 경작하는 면적은 증가했다. 탐보프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가축이 한 일에 대한 가격도 상당히 상승했다. 1892-1894년 3년 동안에 가격은 1889-1891년 3년보다도 25-30% 더 높았다. (Novoye Slavo, 1895), 가축 노동 비용이 상승한다는 건, 농가에서 가축 수가 감소하는 데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노동 용역 축출을 수반한다.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용역이 소멸됨을 증명하고자, 개별적인 참고 자료를 사용하기 위한 의도는 아니었으며, 온전한 통계 자료는 없다. 단지 농민 분화와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용역 소멸 사이에서도 관련 있음을 보여주고자 참고 자료를 사용했다. 소멸이 진행됨을 반박 없이 증명하는 '일반적'이고 '대규모적'인 통계는 농업에서도 기계 사용과 자유 고용된 노동력 사용과 관련된다. 통계로 넘어가기 전에, 사유지 소유주로부터 현대 농업에 대한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자.
1893-1894년 48개 구베르니아 시에서 실시한 가축 수에 따른 인구 조사에서는 모든 가축 소유주가 소유한 가축 수가 9.6% 감소했으며, 말 소유자는 28,321명 감소했다. 탐보프, 보로네시, 쿠르스크, 랴잔, 오렐, 툴라, 니즈니노브고로드 구베르니아에서는 1888-1893년 사이에만 가축 수가 21.2% 감소했다. 흑토 지대에서는 다른 7개 구베르니아 시에서 1891년-1893년 사이에만 17% 감소했다. 1888-1891년 유럽 러시아에서 38개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7,922가구가 있었고, 5,736,436가구가 말을 소유했다. 1893-1894년에는 구베르니아 시에서 8,288,987가구가 있었으며, 5,647,233가구글 소유했다. 따라서 말을 소유한 가구 수는 89,000가구 감소했지만, 말이 없는 가구 수는 456,000가구 증가했다. 「러시아 제국 통계」(상트페테르부르크, 1896)에 따르면 말이 없는 가구 비율은 27.6%-31.9%로 증가했다. 유럽 러시아 48개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말이 없는 가구 수로는 1888-1891년 280만 가구에서 1896-1900년, 320만 가구로 증가했다. 27.3%-29.2%로 증가했다. 남부 4개 구베르니아, 베사라비아, 예카테리노슬라프, 타우리다, 헤르손 지역에서 말 없는 가구 수로는 1896년 305,800건에서, 1904년 341,600건으로 34.7%-36.4%로 증가했다.
- S.A 크롤렌코, 『고용된 노동』도 참조하자. 1882, 1888년 말 인구 조사를 기초로, 농민 소유한 가축 수가 감소하면, 사유지 소유자가 소유한 가축 수는 증가한다는 사례가 있다.
- 젬스트보 통계학자들은 예카테리노슬라프 구베르니아 시 바흐무트 지역의 여러 지역에서 현금 임대, 현물 임대를 상대적 발생률로 설명했다.
- 돈을 빌리는 일은 석탄과 소금 광산 지역 퍼졌으며, 대초원과 순수 농업 지역에서는 적게 퍼졌다. 농민들은 타인을 위해 노동하기를 꺼리거나, 특히 사유지에서 지루하거나, 낮은 임금 노동을 꺼려했다. 석탄 광산, 광석 채굴, 야금업에서도 힘든 노동은 노동자들의 건강을 해롭게 하더라도, 더 많은 임금, 월급과 주급을 현금으로 받을 수 있다는 전망으로, 노동자를 끌어들인다. 지주의 영지에서 노동할 때는 돈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노동자는 임대 받은 토지를 조금씩이나마 빌린 짚으로, 곡물에 대한 대가로부터 노동하거나, 생활에 필요를 충당하고자, 마디 임금을 받는다.
- 모든 게 노동자로부터 영지에서 노동하기를 꺼리도록 만들며, 특히 지주 영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더욱 그렇다. 주로 광산에서 기회가 많으며, 노동자들에게 '괜찮은' 임금을 지급하는 곳에서 특히 발생한다. 농민은 광산에서 번 '울타리'(펜스)로부터 영지에서 일하겠다고 서약하지 않고도, 토지를 임대할 수 있었으며, 돈을 받아서 토지를 임대하면서부터 지배력을 확립해갔다. 반면에, 대평원 비산업 지역에서는 스코프시나(Skopshchina)와 노동 용역 형태로부터 토지를 임대하면서 지배력을 확립해갔다. 따라서 농민들은 노동 용역을 피하고자, 광산으로 피신했다. 현금으로 즉시 지불받거나, 비인격적인 고용 형태, 정규 노동 시간은 노동자들을 매혹시켰으며, 인민주의자들이 목가적으로 찬가하는 농업보다도 지하 광산을 더욱 선호하도록 만들었다. 농민이 농업인과 인민주의자들로부터 이상화하는 노동 용역의 참된 가치를 쓰라린 경험으로부터도 잘 알고 있었고, 자본주의적인 '순수한' 관계에서도 얼마나 더 나은지도 더욱 알고 있었다.
인민주의자들의 태도
노동 용역 제도는 코르베 경제 잔재이지만, 인민주의자들은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모양새다.
인민주의자, V.V. 보론초프도 일반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일부만 인정해버렸다. 인민주의자들은 사유지 농업 제도로부터 노동 용역 제도, 자본주의 제도의 결합이었으며, 노동 용역 제도가 발전할수록 자본주의 제도는 약해졌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인민주의자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각 체계로부터, 노동 생산력, 노동력 지불, 러시아 개혁 이후로는 경제 분석에 따른 기본적인 특징과 관계를 피해버렸다. 실질적인 변화로부터 자본주의에서 생겨나는 노동 용역 제거는 불가피하다고, 질문을 제기할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인민주의자들은 노동 용역 제도를 이상화했었다. 지주 경제의 발전에 따른 이상화는 인민주의자들의 견해일 뿐이다. 인민주의자들은 코르베와 노동 용역 경제 아래에서 농민들에게 토지를 할당하는 과정에서도, 생산자와 생산 수단 간의 원칙을 간파했었지만, 토지 할당제는 지주들에게 노동력 공급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기에만 이르렀다. 마르크스도 이전의 자본주의적인 농업 체계를 설명했으며, 러시아에서도 일어나는 모든 형태의 경제 관계를 분석했었고, 소규모 생산, 노동 지대, 현물 지대, 화폐 지대 모두 농민과 토지 간 관계를 강조했다. 종속 농민에게 토지를 할당한다는 건, 생산자와 생산 수단 간 '영원한 연계'라는 원칙으로 격상시킨다는 걸 관념적으로 상기했던가. 생산자와 생산 수단 간 중세적인 착취의 원천이자 조건으로부터 기술적, 사회적인 침체 기반 아래에서도 필연적으로 경제적인 압력 외에도 과연 더욱 무게를 짓눌렀어야만 했을까.
오를로프, 카블루코프는 「모스크바 젬스트보」에서 포돌스크 지역에 있는 코스틴스카야 부인의 농장을 예시로 들었다. 노동 용역과 노예 제도에 대한 비슷한 이상화를 보여줬다. 카블루코프는 농장에서 지주와 농민 간 적대 관계를 배제하고는 농민, 농업, 사농 모두를 번영시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가정했었다. 노동 번영이란, 노동 용역과 노예 제도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작 농민에게는 목초지와 가축 방목작은 없었음에도 말이다. 인민주의자들은 농민들을 '건전한' 농민들로부터 간주한다. 토지를 임대하고, 여주인에게도 일당을 지불해서, 그녀의 영지에서도, 철저하고, 시간을 엄수하거나, 신속하게 임무를 수행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코르베 제도 아래에서 직접적인 생존을 위한 경제 체계를 이상화한 대가이자, 한계였다. 인민주의자들의 추론에는 농민에게 토지를 할당한다는 건, 코르베 또는 노동 용역 경제 조건 가운데 하나이며, 독립적인 경작자일수록, 노동 지대, 현물 지대, 화폐 지대를 지불해야만 했다. 따라서 생산자와 생산 수단 개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전자본주의적인 착취 형태에서 실제 관계는 조금도 변하지는 않았다.
카블루코프는 노동 용역을 이상화했고, 모스크바 구베르니아 시에서 자본주의적인 농장을 왜곡되게 묘사했으며, 러시아 농업에서 자본주의적인 발전 본질을 증명했다는 점이다. 모스크바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고용된 노동력을 고용하는 오래된 농장 유형 외에도, 모든 기존의 전통과 결별해서 소득원이 될 수 있는 모든 산업을 단순한 사물로 대하는 농장이라는 점이다. 농업은 한정된 직업이며, 특수한 지식과 생산 조직에 따른 계산 기준들은 다른 모든 생산 형태와 동일하다. 카블루코프는 1870년대에서야, 새로운 농장 농업이 자본주의적인 발전의 본질을 증명했다는 점을 간과했다. 농업을 단지 영주의 취미에서 산업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던 건, 자본주의였으며, 단순한 사물, 단절된 전통, 전문 지식만을 갖추도록 자본주의적인 산업은 강요했다. 자본주의가 들어서기 이전에는 불필요했으며, 할 수조차 없었다. 많은 영지, 마을 공동체, 소작농 가축 농장은 자급자족이었고, 다른 농장에 의존하지도 않았으며, 어떠한 권력도 오랜 침체기에서 함부로 끌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시장이라는 매개체로부터 개별 생산자로부터 생산량에 대한 사회적인 회계를 생산했고, 사회적인 발전을 요구한 힘이 있었다. 모든 유럽 국가에서 농업은 자본주의로부터 점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카블루코프는 노동력이 자연 경제에서 작용하는 필수 요소로, 지주 재산 조직의 성과라 말했었다. 그는 농노제 시절에, 재산 수익 기초로부터 노동 산물이 아닌 노동 획득으로 적용되어 직접적인 목적으로부터, 더욱 가치 있는 노동 생산물 생산 결과를 누리는 노력이 아니라, 노동자가 생산물 몫을 줄이려는 노력에서, 주인들의 노동 비용을 ‘0’에 가깝게 수렵하도록 줄이려는 욕구나 독립적인 소득원으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벌채된 토지 사용 대가로부터 노동에 기반한 농업이 언급된다. 농장 수익을 내고자, 소유주는 지식, 특별한 자질도 필요 없었다. 단지 노동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든 건, 소유주에게 명확한 소득으로 나타내거나, 순환 자본을 거의 지출하지 않고 얻는 소득이었다. 따라서 농업은 잘 운영될 수 없었다. 모든 목초지와 기타 토지 임대를 농업이라 부를 수도 없었다. 여기에는 어떠한 경제적인 조직도 없었다. 노동 봉사를 대가로부터 벌목지를 임대하면서, 농업 경제에서는 토양으로부터 소득을 추출하는 방법은 물질적인 힘보다는 노동자에게 영향력을 형성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잘못된 논리였다. 카블루코프는 생산과 사회적인 생산 체계를 혼동했었다. 모든 사회적인 체계에서 생산은 물질적인 힘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다름 아니다. 모든 사회적인 체계에서는 초과 생산물만이 토지 소유자의 소득 원리가 된다. 따라서 노동 용역 체계는 자본주의 제도와 동일하다. 단지 노동 용역은 필연적으로 매우 낮은 노동 생산력을 전제한다. 따라서 초과 생산물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가시킬 수는 없다. 오직 '용역'을 활용할 때만 증가시킬 수 있다. 반대로 자본주의적인 경제에서는 고정된 용역은 무시된다. 토지에 묶이지 않은 무산 계급들은 노예의 대상으로도 쓸모조차 없기 때문이다. 노동 생산력을 높이는 건 소득 증대라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카블리코프는 노동 용역을 이상화했으며, 자본주의적인 농장은 러시아 자본주의가 농업을 합리화하거나, 노예 제도 폐지를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사회적인 조건을 조성했지만, 노동 용역은 농업 합리화를 배제시켰으며, 기술적인 정체와 생산자의 노예 상태를 촉진시켜 더욱 영속화했다. 농업에서 자본주의는 취약하고, 인민주의자들은 관례적으로 경솔하게 환호했다. 자본주의가 취약하다면 더욱 심각하게 생산자에게는 큰 부담을 주는 이전의 자본주의적인 착취 형태로부터 더욱 강력해질 뿐이다.
- 노동 용역에 따른 임대에서 '상권 임대'(라페 임대)를 대체한 확산은 퇴보적이다. 바람직하다거나, 유익하다고 말하지만, 발전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츄프로브(Chuprov)는 『수확의 영향력』에서도 노동 용역은 농촌 인구를 충분히 도울 수 있다고 내세웠지만, 노동 용역 이상화라는 절대적인 모순이 나타났다. T. 바라노프스키(T. Barananovsky), 스트루베(Struve)는 낮은 곡물 가격의 중요도를 1897년에 올바르게 제시했었다. 낮은 곡물 가격 시기에는 이전의 높은 곡물 가격에서 역사적인 시기보다도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용역을 더욱 가속화시키며, 제거하는 게 '개연적'이다.
엥겔하르트 농장
엥겔하르트도 인민주의적인 시각에서 농장을 분석했다. 엥겔하르트는 농장에서 전통적인 노동 용역와 속박에 기반을 뒀으며, 적절한 농업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노동 용역은 가축 사육으로부터 열악한 조건, 토지 경작 불량, 쓸모조차 없는 밭 경작 제도를 단조롭게 만든 원인이었다. 예전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는 없었으며, 대평원 지역에서 벌어진 곡물 경쟁은 가격을 더욱 떨어뜨렸으며, 수익성이 없는 농업을 만들었다. 따라서 노동 용역 제도와 더불어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농장에서 특수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임금 노동자 숫자는 매우 적었고, 소몰이꾼과 같은 예전의 방식으로 운영됐다. 엥겔하르트는 할당지를 소유한 농민들 가운데 농장 노동자의 임금이 매우 낮았다고 지적했다. 가축 사육이 어려워서 더 많이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 생산력도 낮아서, 임금을 인상할 수조차 없었따. 따라서 엥겔하르트 농장은 친숙한 모든 러시아 농장에서도, 노동 용역, 노예, 최저 수준으로의 노동 생산력과 매우 낮은 노동 임금으로 이뤄진 농사였을 뿐이었다.
엥겔하르트는 대규모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상업 및 산업 작물이던 가마를 파종했다. 아마 재배로부터 상업적이고, 자본주의 성격은 강해졌다. 노동력을 확보하고자, 상업적인 경작에서 노동 용역이라는 오래된 제도를 도입했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데시아틴 단위는 농민들의 힘을 넘어섰으며, 농민들은 집단 노동, 구속된 노동 조건들 속에서도 온 힘을 다해 맞섰다. 제도는 반드시 바뀌어야만 했다. 엥겔하르트는 말, 마구, 수레, 쟁기, 써레 등과 같은 농기구를 구입했으며, 정규직 노동자들과 농장을 운영했었다. 특정 직업에서도 노동자들을 고용해서 일용직으로 아마를 생산했다. 새로운 농업 체계와 상업적인 경작 제도의 전환으로부터 노동 용역에 자본주의를 도입해서 대체해갔다. 노동 생산력을 높이고자, 자본주의적인 생산에 따른 성과급 제도에 의존했다. 여성들도 더미(Pood) 단위로 노동했다. 엥겔하르트는 제도 정착이 성공적이었다고 말했었지만, 경작비는 1일 당 25루블-35루블, 이윤 또한 10-20루블로 증가했다. 여성들에게 노동 생산력은 노예 노동으로부터 고용 노동으로 전환됐으며, 하룻 밤 사이에 반 푸드에서 한 푸드로 늘어났고, 여성들의 수입도 하루 30-50코펙으로 증가해갔다. 지역 직물 상인들도 엥겔하르트를 극찬했다. 아마 장사가 시장에서도 큰 활력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상업용 작물 재배에서 적용된 고용 노동은 다른 농업 활동으로 확대해갔다. 자본이 농업 용역 제도를 철한 첫 작업으로는 탈곡이 이뤄졌다. 사유지 소유자는 운영하는 모든 농장에서 대부분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수행됐다. 엥겔하르트는 토지 일부를 농민에게 임대해서 순환하며, 경작하도록 했다. 그렇지 않으면 호밀 수호가에 어려움이 뒷따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 용역은 농부에게 매우 바쁜 시기임에도, 일용직 노동자를 공급했고, 자본주의로 직접적인 전환 역할을 했다. 초창기 순환 경작은 탈곡도 포함됐지만, 작업 질은 낮아서 농부는 고용 노동에 주로 의존했다. 탈곡 없이 순환 경작을 위해 토지를 임대했다. 탈곡은 부분적으로는 농장 노동자로부터, 계약직으로부터 임금 노동자 집단으로부터 시간 당 임금으로 이뤄졌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노동 용역을 대체한 결과도 나타났다. 노동 생산력 증가, 수확량 증가, 탈곡 시간 단축, 노동자 소득 증가, 농부 이윤 증가로부터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경작 작업도 수용했다. 낡은 나무 쟁기 대신 철제 쟁기를 도입했고, 노동은 속박된 농민으로부터 농장 노동자에게도 넘어갔다. 엥겔하르트는 혁신의 성공으로, 노동자들의 근면을 전했었고, 노동자를 게으르고, 부정직하다고 관습적으로 비난하는 농노라는 낙인, 영주를 위한 노예 노동에서 기인했다. 또한 농업 조직 또한 농부에게 요구하는 게 많았다. 진취적인 사람들에 대한 지식, 그들을 다루는 능력, 작업 범위에 대한 지식, 농업적인 기술 및 상업적인 지식, 봉건적인, 노예적인 농촌에 대해 '오블로모프'도 도저히 가질 수 없었던 자질이었다. 농업 기술 변화는 불가분한 관계이며, 필연적으로 경제적인 변혁으로 이어졌다. 아마, 클로버 재배에서도, 수 많은 변화로부터 사업을 순조롭게 진행시켰다. 따라서 쟁기 도구, 나무 쟁기에서 철제 쟁기로, 나무 써레는 철제 써레로, 대체되는 식이었고, 가축, 노동자와 고용과 관련된 다른 농업 제도 등을 더욱 요구했다.
농업 기술 발전은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용역 제도의 소멸과도 불가분하다. 점진적인 소멸이며, 농업 제도는 노동 용역과 자본주의를 결합했지만, 점차적으로는 자본주의로 옮겨갔다.
엥겔하르트는 농업 체계를 완전하게 바꿔놨으며, 상당 부분 정규직과 일용직 노동자들이 했다는 점이다. 농사를 짓고자 덤불을 제거하거나, 나무 뿌리를 뽑거나, 드네프르 강벽 목초지를 빌려 클로버, 호밀, 아마를 심었다. 인력도 많이 들었고, 준비도 해야만 했다. 바쁜 시기에는 다른 농장에서도 일했다. 노동력 모집은 돈, 곡물을 선불로 제공했다. 하지만 운영되는 농장에서도 노동 용역과 노예 제도는 그대로였다. 단지 무상 고용에 비하면 종속적인 위치에서, 노동 용역 자체도 변화를 겪었다. 노동 용역은 농민 노동이 아닌, 정규직 노동자, 농업에 종사하는 일용직 노동자 노동으로 유지됐다. 엥겔하르트 농장은 인민주의자들을 반박할 때도 우월했다. '합리적'으로 농사를 지었지만, 주어진 사회 경제적인 조건 아래에서는 농장 노동자를 고용하는 식으로, 농장을 조직할 수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농업 기술 향상,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용역 대체는 러시아에서 모든 사유지 농장에서도 병행됐다. 따라서 러시아 농업에서도 기계 활용은 두드러졌다. 저렴한 곡물을 둘러싼 경쟁은 기술 발전의 동기였기 때문에, 무상 고용으로 대체한 기여도를 특수하게 주목할 수 있다. 대평원 지역에서 벌어진 당시에 곡물 경쟁은 곡물 가격이 높았던 시기에도 생겨났다. 가격이 비교적 낮았던 시기에는 경쟁에서 특수한 힘을 부여했다.
- 여기서 오블리모프란 의지력도 없고, 극도로 게으른 지주를 말한다.
3-3. 농업 분야에서 기계 사용과 임금 노동
농업에서 기계 활용
개혁 이후에는 농업 기계 생산 발전과 농업에서 기계 사용은 네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로는 농민 개혁 직전과 직후이다. 처음에 지주들은 농노 무급 노동 없이 살아갔으며, 자유 노동자 고용과 관련된 어려움은 피하고자, 외국 기계를 구입하고자 서둘렀다.
물론 실패했다. 1863-1864년부터 외국 기계에 대한 수요가 떨어졌다.
1870년대 말에는 두 번째 시기가 찾아와서, 1885년까지 계속됐다.
두 번째 시기에는 해외에서 기계 수입이 매우 꾸준하고, 빠르게 증가했지만,
수입보다 작업 속도가 느렸다.
1881-1884년 사이에는 농기계 수입이 특히 빠르게 증가했다.
부분적으로는 1881년 농기계를 생산하는 공장 요구에 따른 쇠철, 주철 면세 수입이 폐지됐기 때문이다.
세 번째 기간은 1885-1890년대 초까지였다. 면세로만 수입되던 농기계는 수입 관세가 부과됐다. 높은 과세로부터 기계 수입은 매우 감소했으면, 농업 위기로부터 러시아 생산은 느리게 발전했다는 점이다.
1890년대 초에는 네 번째 시기로, 농기계 수입은 다시 증가했으며, 러시아 내 생산은 특히 빠르게 증가했다.
농기계 연평균 수입량에 따르면, 공장 및 작업장 통계에서 미흡한 상태로, 일반 기계 생산, 특정 농업 기계 생산의 혼동, 공장 생산, 수공예 생산을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이 부재하는 등 농기계 생산 발전에서는 걸림돌이었다. 원시적인 농기구는 개량된 농기구로 옮겨가는 활력을 보여준다. 18년 동안 농기계 사용은 3.5배로 증가했는데, 왜냐하면 가내 생산 확대가 4배나 증가했기 때문이다. 생산의 주요한 중심지는 비스툴라 강과 발트해 지역에서 남러시아 대평원으로 옮겨갔다. 1970년대 러시아 농업 자본주의에서 주요한 중심지는 서부 외곽 지역이었지만, 1890년대에는 러시아 지역에서도 두드러진 농업 자본주의 지역들이 형성됐다. 1876-1879년에는 1882년 박람회를 위해 특수하게 수집되거나, 반환됐다. 포괄적으로 농업 도구에 따른 공장 뿐만이 아니라, 수공예 생산도 해당된다. 1876-1879년에 유럽 러시아와 폴란드 왕국에서는 평균 340개 시설이 있었고, 공장 통계 따르면, 1879년에는 유럽 러시아에서도 농업 기계 및 도구를 생산하는 공장은 66개를 넘지 않았다. 1879년에는 오롤로브(Orlov) 공장 및 작업장 목록 계산이다. 수치의 큰 차이로부터 340개 시설 가운데 236개 시설은 자체적인 주조소가 없었으며, 외부에서 주물을 제작했다. 1890-1894년 통계에서는 「러시아 공장 상업 통계 모음집」(상무부)에서 가져왔다. 해당 통계에서는 농업 기계 및 도구에 따른 공장 생산조차 완전하지가 않다. 1890년 통계에 따르면 유럽 러시아에서는 산업에 종사하는 회사가 149개 있었지만, 오롤로브 분류집에서는 농업 기계 및 도구를 생산하는 회사는 163개 이상이었다.
1894년에는 유럽 러시아에서도 공장이 164개 있었다. 그러나 「공장 및 작업장 목록」에 따르면, 1894-1895년에는 농업 기계와 도구를 생산하는 공장은 173개가 넘었다. 농업 기계와 도구에 따른 소규모 수공예 생산은 해당 통계에 전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1890-1894년 통계는 실제보다 크게 과소평가됐다. 1890년대 초 러시아에서는 농업 기계 도구가 약 1,000만 루블(농업 및 임업)으로, 1895년에는 약 2천만 루블에 달하는 금액이 지급됐다. 러시아에서 생산된 농기계 및 농기구 종류와 수량으로는 1876년에는 25,835대의 농기구가 생산됐고, 1877년에는 29,590대, 1878년에는 35,226대, 1879년에는 47,892대가 생산됐다. 수치가 얼마나 초과됐는지는, 1879년 약 14,500대 철제 쟁기가 생산됐고, 1894년에는 75,500대가 생산됐다.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농민 농장에서 철제 쟁기를 더 널리 사용하기 위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었지만, 저절로 해결됐다. 그만큼 농민들은 철제 쟁기를 사는 일이 드물지가 않았다. 농민들은 매년 구입하는 철제 쟁기 수도 늘어났다. 러시아에서 사용된 원시적인 농업 도구 양은 여전히 철제 쟁기에 따른 생산 및 판매에 넓은 여지를 남긴다.
철제 쟁기 사용의 진전 때문에 <상업 및 산업 기사문>에 따르면 전기 사용 문제까지 제기됐다. 제 2회 전기 기술자 대회에서 V.A 라즈혜브스키(V.A Rzhevsky), 『농업에서 전기 사용』에 대한 논문이 관심을 끌었다. 독일에서 전기 쟁기를 이용한 밭 경작을 설명했었고, 남부 3개 주 가운데 한 곳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 대한 토지 소유자 요청에 따라 작성된 계획, 견적에서 경작 방법의 경제력을 보여준 수치를 인용했다. 계획에 따르면 매년 5-40데시를 경작했으며, 일부를 1년에 두 번 경작하고자 제안됐다. 고량 깊이로는 4와 1/2에서 5베르쇼크(Vershoks)였다. 쟁기 외에도 계획에는 다른 밭 작업용 가계류, 탈곡기, 연간 2,000시간을 가동할 수 있는 25마력의 제분기가 있었다. 50mm 두께로 된 가공 전선(케이블) 6베르스트도 있었고, 부지 전체를 장비하는 비용은 41,000루블이었다. 제분기를 설치한다면, 1데시아틴을 경작하는데 드는 비용으로는 7루블 40코펙이었고, 제분기가 설치되지 않는다면, 8루블 70코펙이었다. 인건비, 가축 등의 현지 비용을 고려했을 때도, 전기 장비를 사용하면, 1.93루블을 절약했고, 제분기 없이 전략 사용량을 줄인다면, 966루블을 절약했다.
탈곡 및 풍차 기계 생산량은 급격한 변화가 없었다. 왜냐하면 생산은 오래 전에 확립됐기 때문이다. 기계로부터 수공예 생산을 위한 특수한 중심지(센터)에는 랴잔 구베르니아 시에서 사포조즈 시와 주변 마을로부터 설립됐고, 농민 부르주아들의 지역 구성원들은 산업에서 많은 이득을 얻었다. 특히 수확 기계 생산에 따른 빠른 확장을 볼 수 있었다. 1879년에는 기계가 약 780대가 생산됐고, 1893년에는 연간 7,000-8,000대, 1894-1895년에는 약 27,000대가 판매됐다. 1895년, 타우리다 구베르니아 베르댠스크 시에서는, J. 그리브스(J. Greaves) 공장에서 생산열(생산 라인)은 그 당시에 유럽에서 가장 큰 공장이었다. 수확기 생산 부문에서 4,464대의 수확기를 생산했다. 타우리다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농민들 사이에서 수확기가 널리 보급되어, 다른 사람들의 곡물을 기계로 수확하는 특수한 직업들도 생겨났다. 비교적 덜 널리 보급된 농기구에 대해서도 '산파기' 수십 대가 작업장에서 생산됐으며, 1893년에는 두 작업장에서만 생산됐던 파종기는 현재 7개 작업장에서도 생산됐다. 『농업과 임업』에 따르면, 작업장 생산량은 러시아 남부 지역에서도 특히 널리 판매됐다. 기계는 모든 농업 분야와 일부 농산물 생산과 관련된 모든 작업에서 사용됐다. 특수한 후기로는 선별기, 종자 분류기, 종자 세척기(Trieurs), 종자 건조기, 건초 압착기, 탈곡기(아마) 등의 사용이 확대됐다.
프스코프 주 젬스트보 행정부에서는 1898년 「농업 보고서 부록」(1899)(Serverny Kurier)에서 가장용 아마 생산에서 상업용 아마 생산 전환에 따른 기계 특히 아마 탈곡기 사용이 증가했다. 철제 쟁기 수도 증가했다. 이로부터 농업 기계 수를 늘리고, 임금 인상에 미치는 영향을 언급했다. 스타브로폴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구베르니아로부터 이민이 증가하면서 농업 기계 사용도 확대됐다.
1882년에는 908대 농업 기계에서, 1891-1893년에는 평균 29,275대, 1894-1896년에는 평균 54,874대, 1895년에는 최대 64,000대 농기구와 기계가 사용됐다. 기계 사용이 증가하면서부터 발전기(엔진)에 대한 수요도 발생했다. 증기 발전기와 더불어 석유 발전기는 농장에서도 빠르게 퍼져갔다. 첫 발전기가 해외에서 등장한지는 불과 7년 전이었지만, 1870년대 헤르손 구메르니아 시에서는 농업에 등록된 증기 발전기로는 134개에 불과했다. 「러시아 제국에서 증기 엔진 통계 자료」(상트페테르부르크, 1882), 1881년에는 약 500개가 등록됐다. 『역사 통계 조사, 농기구 부문』, 1884-1886년,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6개 군 가운데 3개 군에서 증기 탈곡기 435대가 등록됐다. 1895년에는 적어도 두 배가 더 많았다. 「테자코프, 농업 노동자, 위생 감독 조직,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 1896」에서는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에서도 증기 탈곡기는 약 1,150대였고, 쿠반 지역에서도 그 수가 비슷하다고 했다.
증기 탈곡기 구입은 산업적인 성격을 띠었다. 2-3년 풍년기에 증기 발전기에 장착된 5,000루블짜리 탈곡기를 구입해서 비용을 전액 충당하고, 소유주가 동일한 조건에서 다른 기계를 즉시 구입하기도 했다. 쿠반 지역에서는 소규모 농장에서 기계를 5대, 10대까지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조직된 모든 농장에서도 필수적인 부속품이었다. 남부에서는 농업 목적만으로 1만 대 이상의 증기 발전기가 사용됐다. 1875-1878년까지 유럽 러시아 전역에서는 농업에서 사용된 증기 기관 수가 불과 1,351대였다. 「1903년 공장 검사관 보고서」의 불완전한 보고에 따르면 1901년에는 12,091대, 1902년에는 14,609대, 1903년에는 16,021대, 1904년에는 17,287대였다. 지난 20-30년 동안 자본주의는 농업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나도록 만들었다. 젬스트보는 가속화시켰다. 1897년 초, 젬스트보 농기계 및 창고는 11개 구베르니아 시와 203개 군 젬스트보 위원회 관리 아래에서 운영됐고, 총 운영 자본은 약 100만 루블이었다. 「재정지」(1897), 폴타바 구베르니아 시에서 젬스트보 창고 매출액은 1890년 22,600루블에서, 1892년 94,900루블, 1895년 210,100루블로 증가했다. 6년 동안 철제 쟁기 12,600대, 키질기 및 종자 선별기 500대, 수확기 300대, 말 탈곡기 200대가 판매됐다. 젬스트보 창고에서는 농기구 판매를 하던 사람은 코사크 족과 농민으로, 철제 쟁기와 말 탈곡기 판매 다수에서 70%를 차지했다. 파종기와 추수기를 구매하는 사람들은 주로 지주들이었으며, 100데시아틴 이상을 소유한 대지주들이었다.
- 1895년 예카테리노슬라프 구베르니아 시 젬스트보 위원회에 따르면, 구베르니아에서 개량된 농기구 사용은 매우 빠르게 확산됐다. 베르흐네, 드네프르 지역에서 특히 그랬다. 모스크바 구베르니아 젬스트보 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1895년 모스크바 구베르니아 시 농민들은 41,210대의 철제 쟁기를 소유했으며, 전체 세대 주에서 20.2%가 소유했다. 트베리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1896년에 작성된 특수 기록에 따르면 총 세대 주 16.5%는 51,255대 철제 쟁기를 소유했다. 트베리 군(위예즈드)에서는 1890년에 철제 쟁기 290대, 1896년에는 5,581대에 불과했다. 따라서 농민 부르주아 농장은 빠르게 통합됐고, 개선됐다.
- 「농업 도구와 기계」 기사만이 정치 경제적 기반에서 문제를 제기했고, 이전의 모든 글들은 농업 전문가들이 썼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앙통계위원회에서 작성한 「러시아 연감 표」(1906), 1900-1903년 자료에서, 러시아 제국의 농업 기계 생산량은 12,058,000루블, 1902년에는 15,240,000루블, 1903년에는 20,615,000루블로 수입량이 증가했다. 농기구 제조 및 수리에 종사하는 작업장 총 수는 1864년 64개, 1871년 112개, 1874년 203개, 1879년 340개, 1885년 435개, 1892년 400개, 1895년 약 400개로 기록됐지만, 집계로는 1888-1894년 공장은 157개에서 217개로 7년 평균 183개에 불과했다. 농기계 공장 생산과 수공예 생산 비율을 보여주는 예시로는, 1894년 페름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총 생산량이 2만 8천 루블인 공장이 불과 4개였지만, 1894-1895년 인구 조사에서는 산업 분야에 따른 수공예 시설은 94개로, 총 생산량은 50,000루블에 달했다. 게다가 수공예 시설에서는 임금 노동자 6명을 고용했고, 「페름 구베르니아 시 수공예 산업 현황 개요」(1896)에 따르면, 생산량이 8,000루블 넘는 시설도 있었다. 「수공예 산업 보고서」에 따르면, 농민 쟁기 생산은 감소했으며, 공장 생산에서도 밀려났다. 1879년에는 약 4,500대 탈곡기가 생산됐고, 1894-1895년에는 약 3,500대가 생산됐다. 1894-1895 수치에는 생산량이 미포함됐다.
- 1893년에는 700명의 농민인 200,000데시아틴을 소유한 팔츠 페인, 우스펜스키 영지에서 기계를 가지고서 봉사를 제안했었지만, 절반은 빈손으로 돌아갔고, 거의 350명만 고용됐다. 그러나 다른 대평원 구베르니아, 특히 트란스볼가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아직 수확기가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해당 구베르니아 시들 역시 노보로시야를 추월하고자 노력했다. 따라서 시즈란 뱌지마 철도는 1890년에 75,000푸드, 1891년에는 62,000푸드, 1892년에는 88,000푸드, 1893년에는 120,000푸드, 1894년에는 212,000푸드에 달하는 농기계, 견인 발전기(엔진) 및 부품을 운송했다. 5년 만에 운송량은 세 배로 증가했다. 우홀로브 철도역에서는 1893년에 약 30,000푸드로, 1894년에는 약 82,000푸드에 달하는 국내산 농기계를 운송했지만, 1892년까지는 연간 운송량이 10,000푸드에 미치지 못했다. 우호로브 역은 주로 카니노(Kanino)와 싱코보(Symkovo) 마을에서 생산된 탈곡기를 배송했고, 부분적으로는 랴잔 구베르니아 시(Ryazan Gubernia) 사포츠호크 군 도시에서 배송했다. 카니노 마을에서는 야마코브(Yermakov), 카례브(Karev), 골리코브(Golikov)에 속하는 세 개의 주조소가 있었으며, 주로 농업 기계 부품을 생산했다. 기계 마무리 및 조립 작업으로는 카니노, 심코브에서 수행됐고, 모든 주민들이 고용됐다. 흥미로운 점으로는, 곡물 가격이 낮은 해였던 몇 년 동안은 곡물 생산량이 매우 증가했고, 공장과 수공예 생산 사이에서 수공예 생산은 미미했다. 농부들 사이에서도 수확기, 증기 탈곡기, 말 탈곡기가 널리 보급됐고, 밭 작업이 빠르게 진행됐다. 굴림대(롤러)를 이용한 구식 탈곡 방식이 아니라, 크림 반도 농부들은 매년 농작물 면적을 늘려왔기 때문에 개량된 농기구와 기계를 사용했다. 굴림대만으로는 하루 150-200 푸드 이상 곡물을 탈곡할 수는 없었지만, 10마력 증기 탈곡기는 2,000-2,500 푸드, 말 탈곡기는 700-800푸드를 탈곡했다. 따라서 농기구, 수확기, 탈곡기에 대한 수요가 해마다 급증해서, 농기구를 생산하는 공장과 작업장에서는 재고 부족이 발생하는 해가 있기도 했다. 농부들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고, 곡물 가격 하락은 농부들이 생산 비용을 줄이도록 강요하면서, 개량된 농기구 사용이 증가한 주된 원인이었다.
농업에서 기계의 중요성
러시아 개혁 이후로는 농업에서 농 기계 생산과 기계 활용은 매우 빠르게 발전해갔다. 사회적, 경제적으로는 앞서 소농 및 지주 농업에서 경제학을 거론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농업에서도 기계 사용을 확대시킨 요인이었고, 농업에서 기계를 적용한다는 건 자본주의적인 성격을 띤다. 자본주의 관계에서 확립과 발전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노동 용역 경제 제도와 가부장적인 농민 경제는 불가분하며, 생활 기술, 낡은 생활의 보존에 기반한다. 경제 제도에서도 내부 구조는 기술 변혁을 촉진할 요소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경제 제도에서 고립된 성격과 종속된 농민들의 빈곤, 억압을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배제시킨다. 노동 용역 제도 아래에서는 노동 임금은 고용 노동보다도 훨씬 낮다. 저임금은 기계 도입에서도 중요한 장애물이었다. 농업 기술 변혁에서도, 폭 넓은 운동은 상품 경제와 자본주의 발전에서도 개혁 이후에서야 시작됐다. 자본주의 산물인 경쟁과 세계 시장에 대한 재배자 의존은 기술 전환을 필수로부터, 곡물 가격 하락은 재배자 의존도를 더욱 시급하게 만들었다. 지주 농업과 농민 농업을 별도로, 지주가 기계나 개량된 농기구를 도입하면, 농민의 농기구를 자신들의 농기구로 대체하게 된다. 따라서 노동 용역에서 자본주의 농업 체계로 전환한다. 농업 기계 보급은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용역의 소멸을 뜻한다. 토지 임대 조건으로는 추수기, 탈곡기 등에서 일용직 노동의 수행이 제시될 수는 있었지만, 두 번째 유형에 따른 노동 용역, 농민을 일용직 노동자로 전환시키는 노동 용역이다. 따라서 '예외'란 사유지 소유주 농장에서 개량된 농기구를 도입해서, 인민주의자들의 용어로는 속박 농민을 임금 노동자로 전환시킨다는 일반적인 규칙만을 증명할 뿐이다. 집에서 할 일을 제공하는 매수자가 자신의 생산 도구를 취득하는 게 속박된 수공예인을 임금 노동자로 전환시킨다는 말과 같다. 지주 농장에서 자체 농기구를 취득한다는 건, 필연적으로는 노동 용역에 참가해서, 생계 수단을 얻는 중농 약화로 이어지게 된다. 이미 노동 용역에서는 중농에게 특수한 산업이며, 그들의 농기구는 농민 농업 뿐만이 아니라, 지주 농업에서도 구성 요소이다. 따라서 농업 기계와 개량된 농기구 보급은 동일한 뜻을 지닌다.
농업에서 기계의 체계적인 사용은 증기 동력 직기가 수공업 직조공을 몰아내듯, 가부장적인 중간 농민을 무자비하게 몰아낸다. 농업에서 기계 사용 결과는 앞선 내용을 뒷받침해서, 자본주의적인 발전에서도 모든 전형적인 특징과 내재적인 모순을 드러낸다. 기계는 농업에서 노동 생산성을 크게 증가시키며, 현 시대 이전에는 사회 발전에서 영향력을 거의 받지는 않는다. 따라서 농업에서 기계 사용이 증가한다는 점만으로도, 곡물 생산에서 '절대적인 정체'가 있으며, 농업 노동에서도 생산력 감소가 있다는 인민주의자들의 주장에는 너무나 터무니가 없다는 점이다. 모순된 인민주의자들의 주장에는 이전의 자본주의 질서를 이상화하는 데 필요했을 뿐이다. 기계는 생산 집중과 농업에서 자본주의적인 협력으로 이어진다. 기계 도입은 대규모 자본을 요구하며, 대농장주들만이 감당한다. 기계는 처리해야 할 농산물 양이 많을 때에만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계 도입과 더불어 생산 확대는 필연적이다. 수확기, 증기 탈곡기 등 폭 넓은 사용은 농업 생산의 집중을 나타낸다. 나중에는 기계 사용이 널리 퍼진 러시아 농업 지역(노보로시아)에서 상당한 규모로 농장을 가지게 됐다. 농업의 집중을 인민주의자들과 같이 경작지의 폭 넓은 확대라는 형태로만 생각하는 건 오류이다. 농업 생산 집중은 상업 농업 형태에 따라서 매우 많은 형태로 나타난다. 생산 집중은 농장 노동자들의 폭 넓은 협력과 불가분하다. 수백 대의 수확기를 가동하여, 곡물을 수확하는 대규모 농장에서는, 4-8마리 말이 끄는 탈곡기는 14-23명, 심지어 이상의 노동자를 필요로 하며, 절반 이상은 12-17세 소년, 소녀 노동자들이다. 각 농장에서는 500-1000명 노동자가 모여 있는 대규모 농장에서는 산업 시설로 봐도 무방하다.
인민주의자들은 마을 공동체가 농업에서 쉽게 협동을 도입할 수 있었다고 내세웠지만, 나름대로 계속됐으며, 자본주의는 마을 공동체를 반대하는 이익을 가진 경제적인 집단으로 분할해서 임금 노동자들의 폭 넓은 협동을 기반으로 대규모 농장을 만들어갔다. 따라서 기계는 자본주의에 따른 국내 시장을 창출한다. 기계 제작, 광업 등에서 생산물에 따른 생산 수단 시장이며, 노동력 시장이다. 기계 도입은 노동 용역을 고용 노동으로 대체하고, 노동자를 고용하는 소농장을 창출한다. 농업 기계의 대량 사용은 대량 농업 임금 노동자를 전제한다. 농업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지역에서는 기계 도입과 더불어 임금 노동의 도입과 기계로부터 임금 노동자 축출과 교차한다. 농민 부르주아지 형성과 지주 노동 용역에서 자본주의로 전환은 임금 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창출시킨다. 농업은 오랫동안 임금 노동에 기반을 두었던 곳에서 기계가 임금 노동자를 축출해간다. 러시아 전체에서도 미치는 영향력으로부터, 농업 임금 노동자 수가 증가하는지, 감소하는지를 보여주는 정확하고, 폭 넓은 통계는 없다. 그러나 그 수는 증가하고 있다. 기계로부터 농업에 따른 임금 노동자 축출에 대한 통계는 노보러시아에서만 사용할 수도 있지만, 자본주의 농업에 따른 다른 지역들, 발트해, 서부 지역, 동부 외곽 지역, 일부 산업 주에서는 아직 대규모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노동 용역이 우세한 폭 넓은 지역이 남아 있으며, 지역에서는 기계 도입으로부터 임금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발생하게 된다.
뿌리 작물 도입으로부터 집약적인 농업 발전으로는 임금 노동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킨다. 산업에 비해 농업은 임금 노동자의 절대적인 수가 감소한다는 말은, 물론 자본주의 발전에서는 특정 단계에 따라, 전국적인 농업이 자본주의적인 노선에 따라서도 완전하게 조직되고, 매우 많은 농업 작업에서도 기계 사용이 일반화되는 단계에서 일어나게 된다.
노보로시아에서 지역 조사자들은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로부터 일반적인 결과를 지적했다. 기계가 임금 노동자를 몰아내고, 농업에서 자본주의 예비군을 만들었다.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에서도, 매우 높은 가격의 노동력 시대는 지나갔다. 농기구 확산 및 기타 원인으로부터 노동력 가격은 꾸준히 하락했으며, 농기구 분배는 대규모 농장을 노동자로부터 독립시키고, 노동력 감소를 감소시키면서, 노동자들을 곤경의 처지에 빠뜨린다고, 테자코프는 지적했다.
다른 젬스트보 의료 장교, 쿠드랴브체프는 「1895년 카프코카 동네, 타우리다 구베르니아 시에서 니콜라예프 박람회에 참석한 이주 농업 노동자들과 그들의 위생감독, 헤르손, 1896」에서도 언급했었는데, 노동자 가격은 계속해서 떨어지게 되고, 상당 수 이주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무엇도 벌 수 없었다. 따라서 노동 예비군, 인위적인 초과 인구가 생겨났다. 예비군으로부터 노동 가격 하락은 때로 너무 커지기도 해서, 기계를 소유한 많은 농부들이 기계보다는 손으로 수확하기를 선호했다. 이러한 점은 자본주의적인 기계 사용으로부터 내재된 모순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기계 사용에 따른 여성과 아동 노동에서도 고용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자본주의 농업 체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공장 노동자 사이에서 위계와 매우 비슷한 특정 노동자 위계가 생겨나도록 만들었다. 남부 러시아 영지에서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성인 남성인 정규직 노동자, 20세까지 소아 노동자는 12, 13-15, 16세까지 소아 노동자는 엄격한 영지에서 '3/4 노동자'로 불리우며, 16-20세 사이로는 잔디 깎기를 제외하고는, 정규직 노동자가 하는 모든 일을 맡는다. 거의 도움도 없는 8세 미만도 아니고, 채 14세가 되지 않은 어린이이다. 가축을 치거나, 제초를 한다거나, 쟁기질을 한다. 단지 식량과 의복을 위해 노동한다. 농기구 도입에 따라 전반적인 노동자의 노동 가격을 낮추고, 더 저렴한 여성과 청소년 노동으로 대체된다. 이주 노동 통계로는 남성 노동은 여성 노동으로 대체된다. 1890년 카홉카 동네와 헤르손 시에 등록된 총 노동자 수의 12.7%는 여성이었다. 1884년에는 주베르니아 전체에서 여성은 56,464명 가운데 10,239명으로, 18.2%였고, 1895년에는 48,753명 가운데 13,474명으로, 25.6%를 차지했다. 1893년 10-14세 아동은 0.7%였고, 1895년에는 7-14세 아동은 1.69%였다.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에서, 엘리자베트그라드 지역 영지에서 일하는 지역 노동자 가운데 아동은 10.6%를 차지했다.
기계는 노동자, 노동 강도를 높인다. 수확기는 노보그레야카(Lobogreyka), 추보그레야카(Chubogreyka)라는 명칭을 얻었다. 기계를 사용하면 노동자는 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전달 장치를 대신한다. 탈곡기를 사용하면, 노동 강도가 높아진다. 기계를 사용하는 자본주의적인 방식은 노동일을 늘리기 때문이다. 야간 작업은 농업에서도 등장했다. '풍수해 지역'에서는 일부 영지와 많은 농촌 농장에서도 야간 작업이 이뤄진다. 인공 조명으로는 횃불이 사용한다. 기계의 체계적인 사용에 따라 농업 노동자들에게도 정신병(트라우마)를 초래한다. 젊은 여성과 아동을 기계에 고용해서 많은 부상을 일으킨다.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젬스트보 병원과 진료소에서는 농사철에 외상 환자로 가득찼으며, 농기계와 농기구로부터 무자비한 파괴 작업으로 인해 끊임없이 장애를 겪는 수 많은 농업 노동자들을 치료하는 야전 병원이었다. 농업 기계로 인한 부상을 다루는 특수한 의학 문헌도 출간됐다. 농업 기계 사용을 규제하자고 강제하는 규정을 도입하자는 제안도 나왔었다. 기계의 대량 생산으로부터 농업과 산업 모두에서 필연적으로 공동 통제와 생산 규제를 요구한다. 농업 기계 사용에 대한 인민주의자들의 극도로 모순된 태도로는 기계 사용과 발전적인 성격을 인정하고, 촉진시킬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옹호하면서도, 러시아 농업에서 기계는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부터 사용된다는 점을 무시한다는 건 소규모 및 대규모 농업인으로 전락한다는 걸 말한다. 그러나 인민주의자들은 농업 기계와 개량된 농기구 사용이 자본주의적인 성격을 무시하고, 어떤 농민 및 지주 농장에서 기계를 도입하는지조차 분석하지 않는다. V.V는 V.체르냐예프를 자본주의 기술의 대표자라고, '발전 추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계 사용이 자본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된 건, V. 체르나예프, 농업부의 다른 관리들 때문이다.
인민주의자는 사실에 기반하겠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농업에서 기계 사용 발전이 자본주의라는 점을 무시했었고, 교환으로부터 농업 노동 생산력을 감소시킨다고까지 말했었다. 분석도 업시 주장만 난무하는 이론을 비판하는 것도 불필요한 일이다. 인민주의자들의 추론에서는 한 국가의 노동 생산력이 두 배라면, 밀 한 체트버트(약 6부셸)를, 12루블이 아니라, 6루블에 구매해야 할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러시아에서 상품 경제가 있는 모든 사회에서 그렇듯이 기술 향상은 개별적인 농부들로부터 이뤄지고, 나머지는 점진적으로 따라갈 뿐이다. 러시아에서는 크고 작은 농촌 기업가들의 발전은 농민층 몰락과 농촌 무산층 형성과도 불가분하다. 따라서 농촌 기업가들의 농장에서 사용되는 개선된 기술이란 사회적으로 가격이 절반으로 떨어지는 조건 아래에서만 사회적으로 필요하며, 농업에서도 자본가들의 수중으로 넘어감을 말한다. 수백만 농민층에서 완전한 '무산화'를 말하고, 비농업 인구 증가와 공장 수 증가를 뜻한다. 러시아 농업에서 노동 생산력이 두 배로 증가하려면, 기계 제작 산업, 광업, 증기 운송, 새로운 유형에서 농장 건물, 상점, 창고, 운하 등이 대량으로 건설되어야만 한다. 인민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발전에서 필요한 단계를 곧바로 건너뛰고는, 수반되는 복잡한 사회적, 경제적인 변화들도 건너뛰었고, 자본주의의 위험만을 두고 통곡했을 뿐이며, 사소한 추론 오류를 반복했었다.
- 지난 2년 동안이나 곡물 가격 하락과 어떻게든 농업 일자리를 저렴하게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수확기가 널리 사용됐고, 창고에서는 수요를 제때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농업 위기는 자본주의적인 위기이다. 모든 자본주의 위기와 마찬가지로 농업 위기는 한 지역, 한 국가, 한 농업 분야에서 자본주의 농부와 농민을 파멸시키고, 다른 지역, 다른 국가, 다른 농업 분야에서 자본주의 발전에도 큰 자극을 준다. 인민주의자, 카블류코프(Kablukov) 등의 추론에서도 큰 오류는 현재 위기와 경제적인 본질의 근본적인 특징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V.V. 보론초프는 중농으로 인해 지주들 사이에서도 농업 노동 용역 제도가 크게 조건된다는 점을, 소유자로 말하자면, 자신의 농민 도구를 유지하는 비용을 공유했다. 사닌(Sanin)은 노동자가 지주를 위해 노동하는 게 아니라, 지주가 노동자를 위해 노동한다고 말했었다. 농민이 대량으로 거주하는 국가에서 농업 임금 노동자 수에 따른 절대적인 증가는 농촌 인구에서 상대적인 감소뿐만이 아니라, 절대적인 감소와도 양립한다.
- 포노마료프는 기계가 수확 가격을 조절해서, 노동자들을 훈련시킬 수 있다고 기대했었다. 앤드류 우레 박사도 기계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질서'와 '규율'을 생산할 것이라 내다봤다. '자본주의 공장의 핀다로스'로, 러시아 농업 자본주의는 이미 농업 공장 뿐만이 아니라, 공장의 '핀다로스'를 만들었다.
농업에서 임금 노동
개혁 이후 경제로는 남유럽 및 동유럽 러시아 외곽 지역에서 두드러졌다. 농업 이주로 알려진 농업 임금 노동자에 따른 대규모 이동이었다. 따라서 러시아 농업 자본주의에서 주요한 지역과 자료를 검토해보자. 고용 일자리를 찾아나선 농민들은 오래된 문헌에도 기록됐다. 플레로프스키, 『러시아 노동계급 상태』(상트페테르부르크, 1869)를 출판했었으며, 많은 구베르니아 시에서 농민들의 상대적인 발생률을 파악하고자 했다. 차슬라브스키는 『농부 외부 고용』(1875)에서 실질적으로 언급했다. 라스포핀(Raspopin)도 1887년 젬스트보 통게를 모아 일반 농민 고용이 아닌, 농업에서 임금 노동 계급이 형성되는 과정으로 간주했었다. 1890년대에는 S.콜로렌코, 루드네프, 테자코프, 쿠드랴브체프, 샤호프스코 저작이 출판됐고, 훨씬 더 완전한 연구가 이뤄졌다. 농업 임금 노동자들이 이주하는 주요한 지역에서는 베사라비아, 헤르손, 타우리다, 예카테리노슬라프, 돈, 사마라, 사라토프(남부), 오렌부르크 주이다. 유럽 러시아에 국한하지만, 이동은 멀리 퍼져 나갔으며, 북코카서스와 우랄 지역 등을 포괄한다. 상업적인 곡물 농업 지역에서 자본주의 농업에 대한 자료도 있었다.
농업 노동자들은 이주하는 다른 지역들도 언급할 수 있다. 농업 노동자들이 이주하는 주요 지역으로는 카잔, 심비르스크, 펜자, 탐보프, 랴잔, 툴라, 오렐, 쿠르스크, 보로네시, 하르키우, 폴타바, 체르니코프, 키예프, 포돌리야, 볼히니아 등 중앙 흑토 주였다. 따라서 노동자들으 이동은 인구가 매우 밀집된 지역에서 희박한 지역으로, 식민지로부터 진행됐다. 농노제가 매우 발달한 지역에서는 덜 발달한 지역으로, 노동 용역이 매우 발달한 지역에서 덜 발달하고,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지역으로 진행됐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반자유 노동에서 자유 노동이 있는 곳으로 이주하게 된다. 인구가 밀집한 지역에서는 인구가 희박한 지역으로 이동한다고 간주한다면 오류이다. 노동자 이동에 대한 연구는 노동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큰 수로 이주했기 때문에, 해당 지역에서는 일손 부족을 초래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이 도착하면서부터, 일손 부족 현상을 메우고 있다는 특이한 점도 밝혀냈다.
따라서 노동자 이탈 현상은 주어진 영토로부터 인구가 더 균등하게 퍼지는 경향을 나타낼 뿐만이 아니라, 노동자 조건을 더 나은 지역으로 이동하는 경향도 나타낸다. 따라서 노동 용역 영역을 시작점으로, 농업 노동자 임금은 특히 낮지만, '매력적인' 자본주의 영역에서 임금이 훨신 높다는 점도 분명해진다. 농업 이주 범위에 대한 통계에서 S.코롤렌코(S.Korolenko)는 유럽 러시아 전체 노동자 초과 현지 수요 대비 6,360,000명으로 계산했고, 15개 농업 이후 구베르니아 시에서 2,137,000명이 포함됐고, 8개 이주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노동자 가족은 2,173,000명으로 추산된다. 크렐렌코의 계산법도 만족스럽진 않지만, 대략적으로는 정확하다고 간주하며, 이주 노동자 수는 과장이 아니라, 과소평가했다. 남부로 오는 200만 명 노동자 가운데 일부는 비농업 노동자들이다. 그러나 샤호프스코는 산업 노동자가 수치 절반을 차지한다고 자의적으로 추정했었다. 해당 지역으로 이주하는 노동자들은 농업 노동자들이었고, 농업 노동자들은 구베르니아 시 뿐만이 아니라, 샤호프스코는 S.코렐렌코 게산을 뒷받침했다. 샤호프스코는 1891년 11개 흑토 구베르니아 시에서 총 2,000,703장의 여권과 신분증을 발급했다. 반면에, S. 코렐렌코에 따르면, 구베르니아 시를 떠난 노동자 수는 1,745,913명에 불과했다. 따라서 S.코렐렌코 수치는 과장된 건 아니고, 러시아 농촌 이주 노동자 총 수는 200만 명이 분명 넘었다. 거주지와 토지를 버리는 대량 농민, 소규모 경작자는 농촌 무산층으로 전환되면서, 농업 자본주의로부터 임금 노동에 대한 큰 수요를 차지했다.
그렇다면 유럽 러시아에서 농촌 임금 노동자 총 수와 이주민, 거주민을 모두 포함할 때 얼마일까. 루드네브(Rudnev), 「유럽 러시아 농민 산업」에서는 유럽 러시아에서 19개 구베르니아 시에 있는 148 군(위예즈드)에 대한 젬스트보 통계를 알 수 있었다. 산업가들은 총 5,129,863명으로, 노동 남성(18-60세) 가운데 2,798,122명이었으며, 노동 농민 총 수에서 55%였다. 농업 산업에서 루드네브는 고용된 농업 노동자,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목축업자, 가축장 노동자의 노동만을 계산했다. 러시아에서는 많은 주와 지구에서 취업하려는 연령대의 남성 총 수에 대한 농업 노동자 비율을 추산해보면, 저자는 흑토 지대에서 모든 취업 남성에서 약 25%가 고용된 농업 노동에 종사하며, 비흑토 지대에서는 약 10%였다. 유럽 러시아 농업 노동자 수로는 3,395,000명으로, 대략 350만 명이었다. 해당 수치는 취업하려는 남성 총 수에서 약 20%였다. 루드네브는 일용직 노동과 농업 일자리는 통계학자들로부터, 해당 개인이나, 가족의 주된 직업일 때에만 산업 범주로 포함시켰다. 따라서 루드네프 수치는 최솟값이다. 젬스트보 인구 조사 결과는 1870, 1880년대 자료가 비슷했으며, 농업 노동자 비율을 산정할 때도 농업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했던 발트해 연안 및 서부 구베르니아 시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으며, 자료 부족으로 인해 350만 명이라는 수치를 사용했다. 농민의 약 1/5는 이미 주된 직업들이 부농과 지주를 위한 임금 노동에 도달했다. 여기서 농촌 무산층의 노동력을 요구하는 기업 진단을 볼 수 있다. 농민 하위 집단에서 약 절반을 고용하는 농촌 기업가들이다. 따라서 농촌 기업 계급 형성과 농민 하위 집단의 확장, 농촌 무산층 수 증가 사이에서 완전한 상호 의존도를 보게 된다. 농촌 기업가 가운데 농민 부르주아지는 두드러진 역할을 담당했다. 보로네시 구베르니아 시 9개 군에서는 농장 노동자 43.4%가 농민에게 고용됐었고, 비율로는 모든 농촌 노동자와 러시아 전체 기준으로, 농민 부르주아 계급은 약 150만 명이 농업 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보였다. 바로 농민들은 고용주를 찾아 수백만 명 노동자를 시장에다 내놓았으며, 임금 노동자에 대한 큰 수요를 보였다는 점이다.
러시아에서 임금 노동자 이동을 검토하면서, 많은 지역에서도 이주 성격과 방향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차슬라브스키는 당시에 노동자들이 도착한 지역에서 농노가 전체 4-15%를 차지했고, 노동자들이 떠난 지역에서는 40-60%를 차지했다. S.코롤렌코 수치에서는 테자코프, 쿠드랴브체프의 저서에서는 일자리를 찾고자, 철도를 최소한 부분적으로 이용하는 농업 노동자 수가 전체 노동자에서 약 1/10이었다. 두 수치를 합하면, 심문 받은 노동자 72,635명 가운데 7,827명만이 여정 일부라도 철도로 이동했다. 그러나 1891년에 조사된 보고서에서는 3대 주요한 철도 수송 노동자 수로는 샤코프스코이가 지적한대로, 170,000-189,000명으로 200,000명을 넘지는 않았다. 따라서 남부로 떠나는 노동자 총 수로는 약 200,000명을 넘지 않았었다. 철도로 이동하는 농업 노동자 비율이 매우 낮다는 말은, 인민주의자들이 철도 승객 수송이 농업 노동자 수송이라 가정할 때도 잘못된 견해였다. 인민주의자들에 따르면, 비농업 노동자가 더 높은 임금을 받았으며, 철도를 더 많이 이용했고, 건축업자, 인부, 하역 노동자 등과 같은 비농업 노동자들의 이주 시기는 봄과 여름이었다는 점이었다. 루드네프도 산업에서는 농민이 자가 경작, 매입 또는 임대 토지 경작을 제외한 모든 직업에서도, 산업가 대다수는 농업과 산업 임금 노동자들이었다. 해당 수치로는 농촌 무산층 추정치와 비슷했는데, 농촌 무산층 농민은 약 40%였고, 산업가는 55%를 구성했으며, 40% 이상이 모든 종류로 고용 노동에 조상했었다. 따라서 고용된 농업 노동만이 주된 직업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농장과 동등한 일반 농민은 해당 수치에 포함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농업에서 고용 노동
대규모로 남부로 오는 농업 노동자들은 농민들 가운데에서도 매우 가난하다.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로 오는 노동자들 가운데 10명 중 7명은 기차표를 구매할 돈이 없어, 도보로 이동한다. 철도 선로와 강둑을 따라 수백, 수천 베르스트를 걷는다고 테자코프는 보고했었따. 평균적으로 노동자들은 약 2루블을 가지고 갔다. 여권을 구매할 돈도 없어 10코펙으로 월별 신분증을 받는다. 여행은 10-12일이 걸리며, 발이 부어올라 굳어진다거나, 멍이 든다. 노동자의 약 1/10은 50-80명을 태울 수 있는 거친 판자로 만든 대형 보트를 타고 떠난다. '공식적인' 즈베긴체프 위원회 보고서에서는 이런 여행이 매우 위험하다고 보고했다. 과밀한 두비로부터 승객과 바닥으로 떠내려가는 일도 1년도 채 되지 않게 잦았으며, 압도적으로 다수 노동자는 배정을 받더라도, 규모 면에서 미미한 수준이었다. 특히 테자코프는 수천 명의 농업 노동자는 모두 토지가 없는 마을 무산층이며, 외부 고용이 유일한 생계 수단이다. 토지가 없는 상태에서 급속하게 확대되며, 농촌 무산층 대열이 떠오르고 있다. 신입 노동자, 신규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의 수가 급속도록 늘어나고 있따. 신입 농업인도 30%에 달했다. 덧붙여, 정규직 농업 노동자 집단을 형성하는 과정도 매우 빨랐다.
노동자 대량 이주는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에 따른 특수한 고용 형태가 생겨났다. 남부와 남동부 지역에서는 수천 명의 노동자와 고용주가 모이는 수 많은 노동 시장들이 생겨났다. 시장에서는 도시, 산업 중심지, 무역 마을, 박람회에서 개최됐다. 중심에서 산업적 특성으로는 비농업 일자리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노동자들에게는 매력적이었다. 키이우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슈폴라의 사탕무 산업(스멜라), 벨라야 체르코프 시에서 노동 시장이 열렸다.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일요일에만 9,000명 이상의 노동자가 모이는 노보우크라민카, 비르즐라, 모스토보예 등 여러 산업 마을과 즈나멘카, 돌린스카야 등 기차역, 엘리자베트그리드, 보브리네츠, 보즈네센스크, 오데사 등 도시에서 노동 시장이 열렸다. 여름에는 오데사에서 온 마을 사람들, 노동자, 부랑자(카데트)도 농업을 위해 고용됐다. 오데사에서는 농촌 노동자들이 세레딘스카야 광장(모어 시장)에서 고용됐다. 노동자들은 다른 시장을 피해 오데사로 와서 더 나은 수입을 얻고자 했다. 크리보이 로그 마을 동네(타운십)에서는 농업과 광업에서 노동자를 고용하는 중심지였다. 타우리다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카호브카 마을 동네는 특히 노동 시장으로 유명했으며, 예전에는 4만 명의 노동자가 모여들었다. 1890년대에는 2만 명-3만 명이 모였으며, 특정 자료에 따르면, 수가 훨씬 줄어들었다. 베사라비아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아케르만 마을을 언급할 수 있었다. 예카테리노슬라프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예카테리노슬라프 마을과 고조바야 역, 로스토프, 온 돈에서, 돈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매년 최대 15만 명의 노동자가 찾는 곳이었다. 북코카서스에서는 예카테리노다르 시와 노보로시스크 마을, 티호레츠카야, 발라코보 마을 등이 있었다. 사라토프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흐발린스크, 볼스크 마을, 심비르스크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시즈란 마을이 있었다. 자본주의는 외곽 지역에서도 농업과 산업을 결합시켰으며, 농업 및 비농업 고용 노동을 결합시켰다. 자본주의에 따른 최종적이고, 매우 높은 단계인 대규모 기계 산업 시기에만 폭 넓게 수작업 기술을 약화시켰으며, 한 직업에서 다른 직업 전환을 용이하게끔 만들어서, 고용 형태를 평준화시켰다. 실제로 해당 지역에서는 고용 형태가 매우 독특하고, 자본주의에 따른 농업 특징을 잘 보여줬다. 중부 흑토 지대에서는 반가부장적, 반구속적 고용 노동 형태가 모두 사라졌다. 고용자와 고용인 사이의 관계만이 유일하게 남았다. 곧 노동력을 사고파는 상업적인 거래만이 유일하게 남았다. 곧 노동력을 사고파는 상업적인 거래뿐이다. 언제나 저개발 된 자본주의적인 관계에 따라 노동자들은 일당, 주당 고용을 선호했으며, 임금을 노동 수요에 정확하게 맞췄다. 약 40베르스트 반경 내에서 각 시장 지역의 가격은 수학적인 정밀도로 고정됐으며, 고용주가 가격을 낮추기란 어려웠다.
시장에서 나온 농민들은 더 낮은 임금으로 일하기보다는 그저 뒹굴거나, 다른 곳으로 가기를 선호했다. 노동에 대한 가격 변동으로 인해 수 많은 계약 위반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고용주가 '일반적으로' 주장하는대로 한 쪽만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서 발생했다. 양 쪽은 일치된 조치를 취했으며, 노동자들은 서로 더 많은 걸 요구하기로 합의하고는, 고용주들은 더 적게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계급 간 관계에서는 '무정한' 현금 지불이 공공연하게 지배되고 있었고, 비교적 경험이 풍부했던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이 식량 재고를 다 먹어 치우고 나서야 '굴복'한다는 걸 알았다. 한 농부는 시장에서 일꾼들을 고용하러 가면, 일꾼들 사이를 걸으며, 막대기로 일꾼들의 배낭을 찔러댔다고 한다. 빵이 남으면, 그들에게 말조차 걸지 않았으며, 시장을 떠나 시장 배낭이 빌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저개발 자본주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노동자는 소규모 자본으로부터 억압받았다. 대규모 고용주는 순전히 상업적인 고려 사항 때문에 사소한 억압을 삼갔으며, 이익은 거의 없었고,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상당한 손실을 초래했다. 300-8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대규모 고용주들은 주말에도 노동자들이 퇴근하지 못하도록 노동 수요에 따라 가격을 책정했다. 일부 해당 지역에서는 노동 가격이 오르면, 임금 인상 제도를 채택했다. 모든 증거로는 임금 인상이 더 나은 작업과 분쟁 부재로 충분히 보상됐다. 반대로 소규모 고용주는 무엇도 고수하지 않았다. 농장주들과 독일 식민지 개척자들은 노동자들을 신중하게 선택하고는 15-20%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하지만, 착취하는 일의 양은 50%가 더 많았다. 그러한 고용주를 위해 노동하는 '신입'들은 낮밤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 제초기를 고용하는 식민지 개척자들은 자신들의 자녀들까지도 노동자들의 속도를 더욱 높이고자, 교대로 따라오게 시킨다. 그래서 하루에도 세 번씩이나 속도를 높이는 사람들은 노동자를 이끄는 힘을 얻게된다. 당시에 독일 식민지 개척자들을 위해 노동하는 사람들은 초췌한 외모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농장주들과 독일인들은 이전에 지주들의 영지에서 노동했던 사람들을 고용하지 않았다. "너희는 우리와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대규모 기계 산업은 대량 노동자를 집중시키고, 생산 방식을 변형시켜, 계급 관계를 은폐한다. 모든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인 가면의 장막을 파괴시키고, 대중들의 관심을 분산시킨 관계에 집중시키고는 공적인 통제와 규제를 시도한다. 특히 공장 감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러시아 자본주의 농업, 특히 자본주의 농업이 매우 발달한 지역에서도 보였다. 노동자 위생 환경 문제로는 1875년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에서 열린 제2차 헤르손 젬스트보 의사회, 구베르니아 시 대회에서도 제기됐다. 이후로는 1888년에 다시 논의됐다. 1889년에는 노동자 위생 환경 연구 계획이 수립됐다. 1889-1890년 사이에 적절하지는 않은 규모로 실시된 위생 환경 조사에서는 외딴 마을에서 노동 환경을 은폐시켰다는 점을 조금은 벗겨냈다. 대부분 노동자들은 거주할 공간이 없더라도, 막사가 제공되더라도, 당시에도 위생적인 측면은 매우 형편 없었다. 움막들도 매우 많았으며, 습기, 과밀, 추위, 어둠, 숨 막히는 분위기로부터 괴로워하는 양치기들도 거주했다. 제공되는 음식들도 불만족스러웠다. 노동 시간은 12시간 30분-15시간으로, 대규모 산업에서 11-12시간보다 훨씬 더 길었다. 여름에는 하루 중 매우 더운 시간대 휴식은 '예외적'이었고, 뇌 질환 사례도 빈번했다. 기계 작업은 직업적인 분업과 '단'을 통(드럼)에 넣는 노동자와 그것을 들어올리는 노동자들도 있었으며, 위험한 일을 한 두 시간마다 교대하는 노동을 한다거나, 여성들도 짚을 실어 모으거나, 소년들은 짚을 치웠고, 3-5명 일꾼들은 짚을 바구니(곤돌라)에다 쌓아뒀다. 구베르니아 시 전체로는 탈곡에 종사하는 사람 수가 20만 명이 넘었다. 테자코프는 농업 작업에서 위생 조건에 대해 농부 노동이 즐겁고, 건강한 직업이라는 고대인식의 의견으로, 자본주의가 농업을 지배하던 시대에도 타당하지 않았으며, 농업에 기계가 도입되면서부터, 농업 노동에 따른 위생 조건은 개선되지도 않았고, 더욱 악화됐다. 기계는 이전에 알려지지 않던 노동 전문화를 농업 분야에서도 도입해서, 농촌 인구 사이에서 직업병과 수 많은 심각한 부상들을 초래했다. 기근과 쥐통(콜레라)과 같은 위생 조건에 대한 조사에 따라 노동자들을 등록하거나, 위생 감독을 받으며, 저렴한 저녁 식사를 제공하는 의료 및 식량 창고를 조직하려는 시도들도 있었다.
조직 규모가 아무리 미미하고, 위태롭더라도, 농업에 자본주의 추세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도 있었다.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 의사 대회에서는 실무자들이 수집한 통계를 기반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제안됐다. 의료 및 식량 창고의 중요성과 위생 조건을 개선하고, 활동을 확대하여, 노동 가격과 가격 변동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는 노동 교환소 특성을 부여했다. 상당한 노동자를 고용하는 모든 대규모 농장에서는 위생 검사를 확대했다. 산업 시설과 마찬가지로, 농업 기계 사용과 사고 등록을 규제하는 엄격한 규정을 발행했다. 노동자들의 보상 권리와 더 질 좋고 저렴한 증기 운송 수단 제공 문제를 제기하고자, 제5차 러시아 의사회에서는 젬스트모, 헤르손 젬스토보 의료 및 위생 조직 활동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은 노동 용역을 이상화했었고, 자본주의 발전은 외면했었다. 인민주의자들은 노동자 이주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가졌으며, 지역 고용을 더 선호했다. 그렇다면 인민주의자 관점에서는 어떻게 기록됐을까. 그리고 농민들은 일자리를 찾아떠났지만,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과연 유익했을까. 각 농민 개인에게 유익했던 게 아니라, 국가 경제적으로 농민 전체에게는 얼마나 유익했을까. 순전히 관념적인 체류가 가지고 있던 경제적인 불리함 때문에, 일자리는 겉보기에 충분해 보였다. 인민주의자들의 이론과 별개로 노동자들의 '체류'란 노동자들에게 경제적인 이점만이 아니라, '발전'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내세웠다. 그러나 대중 관심을 모으려면 외부 일자리를 가까운 지역의 직업으로 대체하기 보다는, 이주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거나, 이주를 모든 면에서 간편하게 하고는, 노동자들의 이동에도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개선한다거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도록 집중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보다 '순수한 경제적 이점'과 '순수한 경제적인 방식'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구직자들은 임금이 더 높거나, 더 유리한 곳으로 이동한다. 더 높은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국가 경제적인 관점을 지닌 사람들은 정작 다음과 같은 주장을 너무나 자주 잊었었다. 이와 같은 '체류'는 구속된 고용 형태와 노동 용역을 파괴시킨다. 예전에는 이주가 거의 발달하지 않았을 때, 남부지에서는 노동자 고용 제도를 쉽게 이용했었다. 북부 지방에다 농촌 관리들로부터 대리인을 파견했거나, 세금 체납자들을 북부 지방 대리인들에게 매우 불리한 조건으로 고용했다. 따라서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자유 경쟁에 따른 이점을 누렸었지만, 일자리를 구하려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었다. 농민들은 노동과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광산으로 피신할 사례들도 있었다. 따라서 '체류'에 따라 농업인들은 인민주의자들과 손을 맞잡았다.
S. 코롤렌코는 노동자 이주에 반대하던 지주들의 의견만을 인용하고는, 외부 고용에 반대하는 숱한 주장들만 제시했을 뿐이었다.'방탕하고', '무절제하며', '취기어린', '부정직하며', '가족을 떠난 부모의 감독을 피하려는 노력'과 같이 '즐겁고, 밝은 삶에 대한 갈망'만이 남아버렸다. 러시아 속담에서는 '한 곳에 머무른 돌에는 이끼가 쌓이지만, 한 곳에 머무르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재산을 축적하고, 이를 소중히 여긴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한 곳에 얽매여 오랫동안 거주한 사람에게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매우 현저하게 보여준다. S.코롤렌코는 특정 구베르니아 시를 떠나는 너무 많은 노동자들이 있었으며, 발생하는 노동자 부족 현상은 다른 구베르니아 시에서 온 노동자들의 유입 때문에 메워진다는 현상에 특히 불만만 품어댔다.
보로네시 구베르니아 시에 대해 S.코롤렌코는 많은 수의 농민들도 증여 토지 할당을 소유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비교적 물질적으로 열악하거나, 너무나 빈약한 재산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그러한 농민들은 맡은 의무마저 이행하지도 않거나, 자택에서 많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때조차도 다른 구베르니아 시로 더 쉽게 떠난다. 이와 같은 농민들은 부족한 할당에 대한 애착도 없고, 농기구조차 없어서, 더 쉽게 집을 버리고, 고향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재산을 찾는다. 지역 일자리에 대해 걱정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강제할 수 있는 게 무엇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류'(Peregrination)와 가까운 지역적인 직업적 선호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야만 한다. '체류'는 인구 이동성을 창출한다. 체류에 따른 농민들이 모아진 '이끼'를 막을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자, 역사적으로도 농민들에게는 이미 충분히 많은 이끼가 씌워져 있었따. 인구가 이동하지 않고는 발전할 수 없다거나, 마을 학교가 남북부 농업과 산업, 수도와 오지라는 서로 다른 관계와 질서에 대한 독립적인 지식으로부터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다는 건 지극히 '순진한' 생각이다. 체류 비용은 재산, 가재 도구 판매, 토지 저당, 물건이나 의류를 맡기거나, 사제, 지주, 지역 쿨라크 등에게 노동으로 갚을 돈을 빌릴 방법으로 조달된다. 샤호프스코이는 농업 노동/비농업 노동 형태에 대해 언급했었다. 수천 척 뗏목이 드네프르 강을 따라 하류 마을로 떠내려갔다. 각 뗏목에는 15-20명 정도 뗏목꾼 노동자들이 타고 있었다. 대부분은 오렐 구베르니아 출신 벨라루스인과 대러시아인이었다. 항해 기간 동안에 무엇도 얻지는 못한다. 주로 추수와 탈곡에 종사하는 데 기대를 건다. 풍년이 들 때만 결실을 맺는 기대였다. 농장 직원 보고에 따르면, 풍년 수확철에는 일꾼들이 노동력에 대한 가격을 제시하더라도, '내가 요구하는 대로 하라.'라는 말만 반복한다. 자신들의 수확철에는 높은 노동력에 따른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작물이 나쁘고, 노동 가격이 떨어지면, 쿨라크 고용주는 계약이 만료되기 전에, 노동자를 해고하고, 노동자는 같은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는다거나, 시골을 떠돌아 다니며, 계절감을 잃어간다.
쿠반 지방에서 '카자크'도 동일하다. 카자크는 개인적으로든, 공동체로든, 노동 가격을 강제로 낮추고자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쿠반 지방, 이주 노동자들은 식량을 줄이고, 작업 할당량을 늘리고,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자 여권을 보관하고, 특정 농부가 노동자를 고용하기를 금지하는 공개 결의안을 채태가고, 벌금이나 특정 비율 이상으로 고용하는 등이다. 탈곡은 대부분 고용된 노동자들로부터 이뤄지게 되며, 러시아 전역에서도 탈곡 작업에 투입된 노동자들 수가 많다. 테자코프는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에서 6개 지방자치 단체 의회 가운데 4개는 노동자 감독 조직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혔으며, 4군데에서는 해당 제도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혔었다. 지역 지주들은 지방자치 단체 이사회가 노동자들을 완전하게 게으른 사람으로 만든다고 비난했다.
마을 공동체와 농민을 유리한 조건으로 고용하고자, 서기와 마을 원로들에게 지불할 인두세, 수수료 목록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인민주의자들의 편견은 테자코프에서는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에서 타우리다 구베르니아 시로 많은 지역 노동자들이 이주해왔었지만, 이전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심각한 노동력 부족이 있었다. 고용주들에게도 고향 일자리를 버리고, 타우리다에서 일자리를 찾는 위험을 감수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자신들에게 무엇이 유익한지를 몰랐기 때문일까, 매우 유익한 고용 조건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이 없었기 때문일까. 타우리라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농업 노동자 임금이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보다 높았으며, 농민이 등록되어, 할당 받은 곳에서 일하고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지벤세브(Zveginstev) 위원회에서는 1894년 내무부 젬스트보 부서 후원이 설립되어, 마을 외부 고용으로부터 질서를 도입했으며, 농업 노동자 이동을 규제하기 위한 조치를 수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