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지주 부역 경제에서 자본주의 경제

 

3-1. 농노 경제 및 자본주의 경제 체제 수용

 

코로베 경제의 특징

 

다음으로는 지주 경제 체제를 검토하고자, 농노제 시대의 경제 체제를 살펴보자. 경제 체제의 핵심은 주어진 농업 경제 단위로부터, 주어진 영지에 따른 전체 토지가 영주 토지, 농민 토지로 나뉘었다는 점이다. 농민 토지는 농민들에게 할당되어, 분배됐다. 농민들은 목재, 가축 등과 같은 다른 생산 수단을 제공받아서, 자신들의 노동 도구를 경작해서 생계를 유지했다. 정치경제학적으로는 농민에게 노동 산물이란 필수적인 생산물이었다. 농민에게는 생계 수단을 제공하고, 지주에게는 노동력을 필수적으로 제공했다. 자본 가치에 따른 가변 부분을 대체하는 생산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필수적인 생산물이다. 농민들의 초과 노동도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지주들의 토지를 경작했다. 따라서 노동 생산물은 지주에게로 돌아갔다. 초과 노동에서 필요한 노동과 공간적으로는 분리됐으며, 지주를 위해서 농민들은 지주들의 토지를 경작하기도 했고, 자신들에게 해당하는 할당량을 받았다. 현물 임금, 지주에게 일손을 제공하는 수단으로부터 할당량은 기능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할당량을 자신들의 경작지로부터 경작한다는 건, 지주 경제에서도 조건이었고, 농민들에게는 생계 수단의 제공이 아닌, 지주들에게 일손을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코르베(Barshchina) 경제란 바로 이와 같은 경제 제도이다. 코로베 경제 체제에서는 자연 경제가 우세했으며, 봉건적인 영지에 따라 외부 접촉이 없는 자급자족 '실체' 생활을 영위했다. 특히 농노제 후기에서 발전한 지주들의 곡물 판매 생산은 구체제 붕괴의 전조였다. 코르베 경제 제도는 직접적인 생산자들에게 생산 수단, 전반에서 특히 토지를 할당해야만 했다. 지주는 토지에 묶였으며, 일손이 보장되지 않았다. 코르베 경제와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초과 생산물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은 정반대였다. 코르베 경제에서는 생산자에게 토지를 제공하는 기반을 두어,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생산자가 토지를 박탈하는 기반을 둔다. 그러한 경제 체제에서는 경제적 조건이 농민이 지주에게 개인적으로 의존하게 됐다. 지주는 농민 인신에 대한 직접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토지를 소유한다거나, 자신의 농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을 강제로 일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경제 체제를 말하면서, 경제적 압력 이외에도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를 노동 지대라고 불렀다. 그리고 노동 지대 범주가 할당된다고 지적했다. 강제적인 형태에 따른 정도로는 농민들이 농노 지위에서 사회적인 신분으로 부상하기까지 권리 부족에 이르며, 매우 넓고 많이 분포한다는 점이다. 코르베 경제와 자본주의 경제 조건과 결과로는 기술이 극도로 낮으며, 정체된 상태이다. 농업은 빈곤에 짓눌렸고, 개인적인 의존과 무지로부터 타락한 소농의 수중에만 머물렀다.

 

A. 엥겔하르트는 시골에서 온 편지에서도 당시에 경제 체제를 생생하게 묘사했는데, 엥겔하르트는 봉건 경제가 명확하고, 규칙적이고, 완전했으며, 지주들로부터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많은 직업들을 배정한 체제였다고 지적했다. 헨리 조지가 인구 대량 수탈이 빈곤과 억압에 따른 보편적인 원리라는 견해에 대해 엥겔스는 반대했다. 1887, 영국 노동 계급 상태에서 '역사적으로 완전하게 옳지 않다. 중세 시대에는 사람들이 토지에서 수탈당한 게 아니라, 토지를 차지했던 봉건적인 억압이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토지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농노는 그 당시 영주 아래에서만, 토지에 붙어 살 수 있었으며, 노동과 생산을 영주에게 조공으로 받칠 의무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코르베와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결합

 

코르베 경제 체계는 농노제 폐지 때문에 악화됐다. 체계에 따른 모든 주요한 기반, 자연 경제, 토지 소유지에 따른 자급자족적인 성격, 많은 구성 요소 간 긴밀한 연계, 농민들에 대한 지주 권력은 약화됐다. 농민 농장은 지주 농장과 분리됐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토지를 매입하여 완전한 소유자가 됐다. 지주는 자본주의 농업 체계를 채택했으며, 앞서 정반대로 기반을 가졌다그러나 완전히 다른 체계 전환는 동시에 이뤄질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인 생산에서 필요한 조건들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고용 노동층이 여기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따라서 농민 농기구는 지주 농기구로 대체됐다. 농업은 영주 사업이 아닌 다른 상업 및 산업 기업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조직됐다. 따라서 모든 조건들도 점진적으로 형성됐으며, 개혁 직후로는 일부 지주들이 해외로부터 기계와 노동자들까지 수입하려는 시도는 실패했었다. 자본주의적인 경영 방식 전환을 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로는 구 코르베 경제 체계가 약화되긴 했었지만, 완전하게 파괴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농민 농장에서는 지주 농장과 완전하게 분리되지는 않았으며, 지주는 농민 할당지로부터 매우 필수적인 부분으로, 분할 토지, , 초원, 수경 시설, 목초지 등을 소유했다. 토지 또는 지상권 없이는 농민들이 자립적인 농업을 영위할 수가 없었으며, 지주는 노동이자, 봉사로부터 낡은 경제 체제를 지속할 수밖에는 없었다. 경제적인 압력 이외에도, 강제력에 따른 압력 혹은 외압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농민들에게 일시적인 구속 상태와 집단적인 책임, 신체적인 처벌, 공공 사업에 대한 강제 노역 등으로 남았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가 한꺼번에 출현할 수는 없었고, 코르베 경제는 한 번에 사라질 수는 없었다. 따라서 유일한 경체 체제는 코르베 체계와 자본주의 체제를 결합한 과도기적인 체계였다. 실제로는 지주들이 실행한 개혁 뒤로는 농업 체계에서도 같은 특징을 지녔다. 과도기적인 시대에는 비교적 무궁무진하고, 많은 형태를 보이던, 현대 지주 농업으로부터 경제적인 조직들이 많았으며 결합된 노동 용역 체계와 자본주의 체제를 갖추게 됐다. 노동 용역 체계에서는 지주들의 토지가 이웃 농민들의 도구로부터 경작됐으며, 지불 형태는 체계의 본질을 쉽게 변경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진다. 일자리 고용과 같이 화페로 지불하든, 반모작과 같이 생산물로 지불하든, 노동 용역과 같이 토지로 지불하든지, 코르베 경제의 잔재로 남았으며, 전적으로 노동 용역 체계에서도 적용됐다. 유일한 예외로는 노동 용역 체계 가운데 하나로부터 코르베 경제의 조건 가운데 하나가 사라졌다. 노동이 현물로 지불되는 대신에 돈으로 지불되는 고용 노동 방식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농업 체제는 토지를 경작하는 노동자들, 연간직, 계절직, 일용직 등의 고용으로 나타났다. 자본주의 농업 체제에서는 실제로도 그 수가 매우 많았고, 신기루와 같이 얽혀있었다. 많은 지주 영지에서는 두 체계가 결합됐다. 또한 서로 다른 농업 운영에도 적용됐다. 상이하고, 반대되는 경체 체계의 결합들은 실제로 매우 심오하거나, 복잡한 갈등과 모순을 초래했으며, 이러한 경제적 압력으로 인해 많은 농부들이 파산하는 등, 여러 결과를 자연스럽게 초래했다


이것이 모든 과도기에 일어난 특징적인 현상이었다. 두 체제로부터 상대적인 발생율을 제기하자면, 과도기적인 문제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없었고, 수집할 수도 없었다. 모든 재산 뿐만이 아니라, 모든 재산으로부터 수행되는 모든 경제적인 활동을 등록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개별 지역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으로부터 대략적인 통계만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었고, 특정 체계에 우세함에 대해서도, 해당 통계는 농업부, 고용 노동부 등에서 간행된 간행물들로부터, 러시아 전체에 대한 요약본일 뿐이었다. 통계를 기반으로 안네스키(Annensky)는 체계에서 일어나는 발생률을 표로 구성했었다. 해당 통계를 도표로 요약했으며러시아 제국 통계, 1883-1887, 5년 간 유럽 러시아에서 평균 수확량(상트페테르부르크, 1888)에서는 1883-1887년 개인 소유지 토지에 따른 경제 면적에 대한 수치를 추가했다.

 

- 따라서 순수 러시아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노동 용역 제도가 우세했으며, 유럽 러시아 전체로 보자면, 자본주의적인 지주 농업 제도가 우세했다. 게다가 도표로는 우세함에 대한 완전한 그림을 제공하지는 못했다. 특히 구베르니아 I 유형 집단에서는 노동 용역 제도가 전혀 적용될 수 없는 발트해 구베르니아가 포함되지만, III 유형에서는 단 하나의 구베르니아도 포함되지 않았고, 자본주의적인 제도에 따라 부분적으로는 적용되지 않는 농지가 단 하나도 없었다. 젬스트보 통계에 따른 러시아 사유지 농업표도 있다.

 

- 노동 용역 제도는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되어 '융합'됐다. 따라서 둘을 구분할 수 없었다. 농민들은 토지를 임대한 대가로부터 일정 기간 노동을 약속하는 관행이 만연했다. 그러한 농민들과 일정 기간 동안에 노동을 약속했으므로, 토지를 부여받은 서유럽 또는 동유럽, 농장 노동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었을까. 점진적인 경제 체제로부터 서로 결합하여, 정반대의 형태를 지닌 경제 체제를 생산했다. 따라서 노동 용역은 어디에서 끝나거나, 자본주의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됐는지는 말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 현대 지주 농업에 따른 많은 형태들은 노동 용역 제도와 자본주의 체제라는 두 가지 체제로부터 두 체제에 대한 경제적인 설명을 제공했으며, 경제 발전에 따른 진화 과정에서도어떠한 영향력으로부터 어느 체계가 다른 체계를 제거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 코르베라는 용어는 노동 용역으로 대체된다. 노동 용역은 개혁 이후 관계에서도 부합하기 때문에 문헌에서도 통용된다.

 

- 한 농무부 특파원은 오렐 구베르니아 시에서, 옐레츠 군(위예즈드) 남부 대지주 농장에서 일용직 노동자의 도움을 받아서 경작하는 상당 부분의 토지를 농민들로부터 임대받은 토지와 교환해서 경작했었다. 전직 농노들은 이전 지주에게서 계속해서 토지를 빌렸으며, 빌린 대가로 토지를 경작했다. 이와 같은 마을들은 지주들로부터 '부르베'라는 이름을 가졌다. S.A.코롤렌코, 고용된 노동에 따르면, 칼루가 지역에서 또 다른 지주는 자신의 농장에서 모든 일을 이전 농민들이 했었다. 8개 마을에서는 약 600명이었다. 대가로는 2,000-2,500마리 가축을 위한 목초지로 이용했었다. 계절 노동자들은 파종기(씨앗 드릴)로부터 첫 쟁기질과 파종을 했다.

 

- 대부분의 영지는 토지 일부에 따른 소유주가 자신들의 농기구와 연간 고용된 노동자 및 기타 노동자들의 도움을 받아 경작했었지만, 반작물 기준으로, 토지와 교환하거나, 돈을 받아서 경작했다. 농장에 인력을 제공하는 방법(1893)에 따르면, 대부분 영지에서는 거의 모든 대다수 형태로 같은 시기에 고용이 이뤄졌다.

 

- 유럽 러시아에서는 50개 구베르니아 시 가운데 다음 지역은 제외됐다. 아르항겔스크, 블로그다, 올로네츠, 뱌트카, 페름, 오렌부르크, 아스트라한이었다. 1883-1887년 구베르니아 시에서 경작된 면적으로는 유럽 러시아 전체로부터 해당하는 토지에서 경작된 총 16,472,000데시 가운데 개인 소유주 영지로는 562,000데시에 달했다. I 유형 집단에서는 발트해 구베르니아 3, 서부 구베르니아 4개 지역(코브노, 빌나, 그로드노, 민스크), 남서부 구베르니아 5(헤르손, 타우리다, 베사라비아, 예카 테리노슬라프, ), 남동부 구베르니아 1(사라토프) 다음으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야로슬라블 구베르니아였다. II 유형 집단으로는 비체브스크, 모길료프, 스몰렌스크, 칼루가, 보로네시, 폴타바, 하루키우가 포함됐다. III 유형 집단에서는 나머지 구베르니아가 포함됐다.

 

- 하지만 사유지 총 경작 면적에서는 소작농이 소유한 경작 면적을 차감해야 했지만, 그런 통계는 없었다. 이와 같은 '수정'으로 인해 자본주의 체제가 우세하다는 결론을 거의 바꾼다거나, 고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흑토 지대에서 지주 경작지 상당 부분은 임대됐고, 지대로부터 구베르니아 단위로는 노동 용역 제도가 지배적이었다.

 

- 차단된 토지(Otrezki)에서 지주들은 농노제가 폐지됐을 때, 농민들로부터 목초지, 숲 등을 빼앗아갔다.

 

- 일시적인 구속 상태에서도 농민들은 1861년 농노제 폐지 뒤로는 지주를 위해서 특정 용역, 부역 제공, 지대 지불을 수행해야만 했었던 농노였으며, 일시적인 구속 상태에 따라 농민들은 지주와 합의해서 상환금을 지불했고, 할댱량을 획득할 때까지 노동을 지속했다. 지주는 1881년 칙령 뒤에서야, 상환금을 받을 의무가 생겼으며, 따라서 농민과 지주 간 의무 관계는 188311일부로 종료됐다.

 

- 레닌은 1897년 슈셴스코예 마을에서 수확과 곡물 가격이 러시아 국민 경제 면에서 미치는 영향두 권을 접했었다.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를 집필할 때도, 해당 저작을 주의 깊게 연구했으며, 두 권에는 수 많은 논평들도 담겼다. 인민주의자들이 농민의 차별화를 모호하게 만든 '평균 통계'가 실제로는 왜곡됐다는 점을 폭로했으며, 구체적인 자료와 통계를 주의 깊게 검토하고, 또 활용했다. 덕분에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여러 구베르니아에서 자본주의, 노동 용역, 혼합 분포들에 따른 많은 경제 형태를 체계적으로 보여 준 표를 작성했다.

 

3-2. 노동 용역 제도

 

노동 용역 제도의 설명

 

농민들은 임금을 받고, 자신들의 도구로부터 지주들의 밭을 경작했다. 이는 '일자리 고용', 데시아틴 고용', '주기적인 경작' 등으로 불렸다. 농민들은 곡물이나, 돈을 빌려서 전체 대출금이나, 이자를 갚았다. 노동 용역 제도에서는 고유한 특징이다. 노동 고용으로부터 속박되거나, 고리대금업적인 성격이 있었다. 가축지 불법 침입 때문에 법적인 벌금을 갚고자 노역한다.

엥겔하르트에 따르면, 단순히 '존경심' 때문에 무상으로 일해서, 술 한 잔 벌어마신다거나, 지주들로부터 다른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토지를 대가로 노동은 반경작, 임대 토지, 사용 토지 등으로부터 직접적인 노동 형태가 퍼졌다. 임대 토지 지불도 매우 많은 형태를 띠거나, 결합했으며, 임대료와 현물 임대료, 노동 용역도 엄연히 존재했다. 카리셰프는 <임대>에서 데시아틴에 경작하는 11/2 데시아틴 + 계란 10 + 1 마리 + 여성 노동 1, 봄 작물 토지 43데시아틴에 대해 데시아틴 당 12루블, 겨울 작물 토지 51데시아틴를 계산했으며, 데시아틴 당 16루블로, 현금+귀리 7, 메밀 20, 호밀 20단 타작+임대 토지 최소 5데시아틴에 대한 거금, 자체적인 가축 분뇨를 데시아틴 당 300수레 짐의 비율로 지급했다고 한다.

 

농민들의 분뇨조차도, 사유지 소유주 농장에서는 구성 요소로 전환된다. 노동 용역에 따른 폭 넓고, 많은 성격으로는 오트라보키(Otrabotki), 오부치(Otbuchi), 오부키(Otbutki), 바리키나(Barshchina), 바사링카(Basarinka), 포소브카(Posobka), 판시키나(Panshchina), 포슈포크(Postupok), 비옌카(Viyemka) 등이 있다. 농민들은 소유주들이 명령하는 모든 노역들을 수행한다거나, 주인들의 말에 복종한다. 노동 용역은 농촌 생활에 필요한 모든 직업 순환들을 포괄한다. 밭 경작, 곡물 및 건초 수확과 관련된 모든 작업들은 노동 용역으로부터 장작으 비축하고, 짐을 싣거나, 지붕과 굴뚝을 수리한다거나, 가금류와 계란을 배달하는 일 등도 모두 노동 용역으로부터 이뤄졌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구베르니아 시의 그도프 지역 조사원은 노동 용역이 개혁 이전에 부역의 성격을 지닌다고 지적했었다.

 

이와 같은 토지에 대한 노동 용역은 노동 서비스 임대와 현물 임대료 지불로 이뤄졌다. 코르베 경제와 자본주의적인 관계에 앞선 '잔재'로부터 임대를 볼 수 있었다. 농업 노동자들에게는 토지를 할당하여, 영지에 제공하는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된다. 젬스트보 통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사유지 소유주들의 영지에서는 자체적으로 농업이 발전함에 따라서 소유주는 필요한 시기에 노동자를 공급하기로 '보장'했었다. 따라서 많은 곳에서는 농민들에게 노동 용역을 기반으로 토지를 분배한다거나, 노동 용역과 더불어 작물 일부를 분배하는 경향들 생겨났다. 당시에는 농업 체계도 널리 퍼졌다. 임대인들은 자신들의 농사를 자주 할수록 임대할 수 있는 토지 양이 적다거나, 토지 수요가 클수록 토지 임대는 더욱 널리 발전했다. 특수한 임대가 생겨났으며, 토지 소유자는 자신들의 농장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며, 사유지 소유자 경작들의 발전으로부터, 소유 면적에 따른 확장 및 농민 농장 통합이 아닌, 농민들을 농업 노동자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농민 농장은 토지 임대로부터 모순적이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농장 수익의 확대였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박한 필요에 따른 거래였기 때문이다.


지주 농장에서도 마찬가지로, 토지 임대는 모순적이다. 지대를 지불하고자, 다른 사람들에게 농장을 양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농장을 운영하는 방법이기도 했으며, 자신들의 영지로부터 인력을 제공하는 방법이었다. 노동 용역에서 노동 지불로 넘어가서, 많은 출처의 통계들은 노동 용역과 담보를 기반으로, 고용된 노동에 대한 지불이 늘상 자본주의에서 자유 고용보다 낮다는 점이었다. 현물 지대에 따른 노동 용역과 반작물에 기초한 단순 노동 용역, 담보 임대료는 일반적으로는 어디에서나 금전적인 지대보다도 더 값비싸거나, 훨씬 더 비싸며, 트베르 구베르니아 시 르제프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배나 더 비쌌다. 현물 지대는 매우 가난한 농민 집단에서 매우 빈번하게 발생했다. 절박한 필요에 따라서도 임대했으며, 농업 임금 노동자로 전환하는 것에 맞설 수 없는 농민들로부터 임대됐다. 부농들은 돈을 위해 토지를 임대하고자, 모든 일을 다했다. 소작인들은 돈으로 임대료를 지불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이용해서라도, 타인들의 토지 사용 비용을 줄이고자 했다. 토지 임대 비용을 줄일 뿐만이 아니라, 담보 임대료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로스토보 돈 지방 군(Rostovon Don Uyezd)에서는 농민들의 수확물 몫은 감소했음에도, 임대료가 상승하면서, 돈 지역 임대료는 다른 지역인 스코프시나(Skopshchina)로 대체된 일도 있었다. 농민들을 완전하게 파멸시키거나, 농장 노동자로 전락시키는 현물 임대료로 분명하게 설명된다.

 

노동 용역 고용에서는 노동 가격과 자본주의적인 자유 고용으로부터 자본주의적인 노동 가격이 훨씬 더 크다. 농무부에 따르면, 고용 노동간행물에서도 겨울 곡물을 부유한 1데시아틴의 토지를 농민 자신의 농기구로 완전하게 경작하는 데는 평균 임금, 6루블이 계산된다. 1883-1891, 8년 간 중부 흑토 지역 통계에 따라서도 그러나 고용 노동을 기준으로 동일한 양으로부터 노동 비용을 계산했을 때, 가축 노동을 제외하고는 노동자의 노동만으로는 6루블 19코펙이 나온다. 가축 노동에 대한 임금, 4루블 50쿠펙보다는 적어도 낮을 수 없었기 때문에, 농무부 편찬자는 절대적, 비정상적이라고, 정당하게 간주했었지만, 자본주의적인 고용 아래에서는 노동에 대한 지불이란 모든 형태의 속박이나, 다른 이전의 자본주의적인 관계 아래에서 보다 높다는 점은 농업 뿐만이 아니라, 산업 사회에서도 러시아뿐만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에서도 확립됐다. 고리대금업과 결합된 채권 임대 부분에서도 노동 용역은 노동에 대해 지불된 가격으로는 자본주의적인 임대에서 지불된 가격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었다. 노동 용역은 지역 농민만이 수행했으며, 할당을 제공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임금이 엄청나게 하락했고현물 임금에서도 할당은 중요했따. 할당이란, 지주들에게 저렴한 노동력을 공급하는 보장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자유 노동, 반자유 노동에 따른 차이는 임금 차이만으로 완전하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임금 노동에 따른 형태로는 늘 고용된 사람들이 고용한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의존하는 상태들이 생겨나며, 경제적인 압력 이외에도 다른 압력들이 더욱 크거나, 적게 유지되는 일도 매우 중요했다. 엥겔하르트는 노동 용역으로부터 상환하고자, 돈을 빌려주는 것을 부채의 더 큰 안정성이라고 언급했었다. 압류 명령에 따라서도 농민들로부터 지불을 받아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당국은 자신들의 곡식이 수확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농민이 맡은 일을 수행하도록 강요한다. 오직 오랜 세월 노예 생활, 영주를 위한 농노 노동만이 농부가 자신들의 곡식을 비에 젖게 두거나, 다른 사람들의 곡식단을 수레에 실어 갈 수 있는 무관심을 초래했다. 인구를 거주지, 공동체 묶는 어떤 형태가 없다거나, 시민권이 어느 정도 부족하지 않는다면 노동 용역 제도를 시행할 수 없었다.

 

노동 용역 제도로부터 노동 생산력은 낮아질 수밖에는 없었다. 노동 용역에 기반한 농업 방법은 매우 고정 관념적인 방법이었다. 속박된 농민 노동에서는 질적으로 농노 노동과 비슷했다. 노동 용역과 자본주의 체제의 결합은 현재 지주 농업 체제를 경제 조직 면에서 대규모 기계 산업이 발전하기 이전에 섬유 산업 체제와도 매우 비슷했다. 상인들은 자신들의 도구와 임금 노동자를 사용해서 작업 일부를 수행했었으며, 상인을 위해 일하는 농민, 수공업자 도구로부터, 그러한 재료를 사용해서 작업했다. 임금 노동자는 고용주 도구를 사용해서 작업 일부를 수행한다거나, 타인의 토지에서 일하는 농민 노동과 도구로부터 작업했다. 산업 자본과 결합된 상인 자본은 엄연히 존재했으며, 수공업자는 자본에 짓눌렸고, 하청업체와 노예 운영, 화물차 체계 등으로부터 부담을 져야만 했다. 산업 자본과 결합된 상인, 고리대금업 자본은 온갖 형태로 임금 인하, 생산자들의 개인적인 종속 강화를 동반했다. 과도기적인 체계로는 원시적인 수작업 기술에 기반을 뒀고, 수 세기 동안 지속된 대규모 기계 산업으로부터 30년 만에 파괴됐다. 노동 용역은 루스 부상 뒤로 이어져서, 지주들은 루스카야 프라우다 시대부터 꾸준하게 농민들을 속박해갔다. 실생활 기술들을 영속화시켰고, 개혁 뒤 시대에 이르러서야, 자본주의로 빠르게 자리를 내줬다. 낡은 체계는 단지 생산 형태와 결과적으로는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정체가 일어났으며, 아시아적인 삶의 방식에서도 지배를 뜻했다. 모두 새로운 자본주의적인 경제 형태에 따라서 내재된 모든 모순과 함께 발전해갔다.

 

- 모스크바, 구베르니아 통계 수익률, 농민과 사유지 소유주 농업에 대한 모든 문헌에서도 비슷한 자료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 노동 용역 형태와 온갖 보충 지불 등을 수반한 토지 임대 형태에서 많은 분화 요인들은, 마르크스 자본347장에서도, 농업에서 전자본주의적 관계에서 주요한 형태에 따라 완전하게 포괄된다.

노동 지대, 현물 지대, 화폐 지대에 따라 마르크스는 지대 문제를 다뤘던 부분부터 러시아 자료를 참고하기도 했다.

 

- 젬스트보 통계 조사 자료에 따르면, 농민들이 임대받은 모든 토지에서 76%가 현금으로 지불됐고, 3-7%는 노동 용역으로, 13-17%는 생산물 일부로, 2-3%는 여러 방법으로 결합되어 지불됐다.

 

- 부역 경제에 따른 지주는 농민이 자신들을 위해 일하도록 농민들에게 토지를 줬다. 토지가 노동 용역으로부터 임대될 때도, 동일한 경제적 문제는 부각됐다.

 

- 카리셰프, 수확의 영향력에서도 농민들은 반작물, 노동 용역을 기준으로 토지를 임대하도록 강요하는 까닭은 빈곤 때문이었으며, 부농들은 현금으로부터 토지 임대를 더 선호했다.


현물 임대료는 농민에게 현금 임대료보다도 훨신 값비쌌다. 그러나 빈농들은 자신들의 작물 면적을 반작물 기준으로 타인들의 토지를 확장시켜, 식량에 대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상태를 막지는 못했었다. 카리셰프와 같이 자연 경제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터무니 없는 생각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물 임대료 지불은 현금 지불보다도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갔으며, 농업에서는 화물 체계를 구성했고, 농민들은 완전하게 파산해서, 농장 노동자로 전락해버렸다. 그런데도 경제학자들은 식량을 개선한다고만 말해왔다. 반작물 임대료 지불은 농촌 인구로부터 궁핍한 농민층들로부터, 농민들이 농장 노동자로 전락하는 조건 아래에서 최악의 조건으로부터 토지를 얻을 수 있으며 돕는다고 말해왔다. 그렇다면 인민주의자와 농업 계급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들은 늘 농업 인구에서 빈곤층들에게 같은 종류의 도움을 줄 준비를 마쳤다고만 말해왔다. 평균 일당이 60코펙이고, 여름철 일용직 노동자는 30-50코펙으로 추산된다. 반농부와 반경작자들의 수입은 농장 노동자들의 임금보다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농장 노동자와 달리 반농부와 반경작자는 농사 비용이 있지 않는가. 베사라비아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여름철 평균 일당은 44-77코펙(1883-1887, 1888-1892)였지만, 말과 마구를 갖춘 노동자 평균 임금이란, 124-180 코펙(1883-1887, 1888-1892)이었다. 농장 노동자는 반농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1882-1891년 베사라비아 구베르니아 시에서 가축 없는 노동자들의 1년 평균 일당은 69코펙이었다.

 

- 바실리코프와 같은 인민주의자가 자본주의를 비판한다는 것은 반동적이다. '고용'을 모순이라고만 외친다. 고용이란 비독립성을 전제하고, 비독립성은 자유를 배제시킨다. 인민주의적인 사고 방식만으로는 지주는 자본주의가 구속된 비독립성을 자유로운 비독립성으로 대체해버렸다.

 

- 카리셰프에게 반작물 임대는 반자유 노동으로부터, 노동 생존에 유익하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던 건 유감이다.

 

- 순환 경작에 따른 개혁 뒤로는 농민들이 지주에게 토지를 임대해서, 제공한 노예화 형태에 따라, 노동 용역으로, 현금 또는 현물로 대체했으며, 농민들은 자신들의 농기구와 가축을 이용하고, '순환'해서 경작했다. 봄 작물을 한 데시아틴과 겨울 작물을 한 데시아틴을 경작했으며,

가끔 한 데시아틴 작물을 수확했다.

 

- 스코프시나, 러시아 남부 지역에서는 토지 임대료를 현물로 지불하는 말이나, 노에로부터 지불하거나, 소작인들은 토지 소유자에게 수확물 일부만을 스코프니(Kopny)로 지불하고, 이외에도 많은 노동 용역을 제공했다.

 

- 빌랭(Villeins), 고대 루스(9-13세기), 봉건적인 종속 농민으로부터, 군주와 다른 세속 및 성직자 영주들을 위해 부역했으며, 현물로부터 지대를 지불하기도 했었다. 봉건 영주들은 빌랭 토지를 빼앗고는 봉건 영지에서 강제로 노역하게 만들었다.

 

- 루스카야 프라우다 러시아 법률에서는 최초로 법률 및 군주령 성문화(11-12세기), 루스카야 프라우다 법령은 봉건 영주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했으며, 봉건적인 속박에 시달리는 농민들과 착취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격렬한 계급 투쟁으로 보여줬다.

 

노동 용역 제도 쇠퇴

 

상품 경제 성장은 노동 용역 체제와 상충한다. 노동 용역 체제에서는 자연 경제, 불변 기술, 지주와 농민 사이에서 불가분 관계에 기반한다. 따라서 노동 용역 제도는 완전한 형태로 설명할 수는 없으며, 상품 경제와 상업 농업 발전은 그 실행을 훼손시킨다. 지주 농업에서도 행해지는 노동 용역은 가축과 농기구를 소유한 소작농만이 수행하는 '순환 경작'(사이클 데시아틴)으로 불리우며, 쟁기질 등에 다른 노동 용역과 농기구가 없는 농촌 무산층만이 수행할 수 있는 수확, 풀 베기, 탈곡 등과 같은 노동 용역이 있다. 소작농과 지주 농업 모두에서, 두 유형의 노동 용역은 서로 상반되며, 농촌 무산층들이 수행하는 노동 용역은 자본주의로부터 직접적인 이행을 구성하며, 눈에 띄지 않고자 자본주의와 '융합'한다. 노동 용역은 이러한 여러 이행 과정을 지칭하며, 심지어 구분도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노동 용역을 없애는 동안에도, 중심을 소작농 노동 용역으로부터 농촌 무산층 노동 용여긍로 옮긴다는 건 매우 중요해진다. 모스크바 구베르니아 시 통계 수익에 따르면 대부분 영지에서는 밭과 작물 경작, 수확을 좌우하는 작업들은 정규직 노동자가 담당하지만, 수확과도 같은 신속하거나, 속도가 붙어야만 하는 작업 같은 경우로는 이웃 농민들에게 맡긴다거나, 돈을 빌리거나, 목초지와 다른 토지를 사용한 대가로부터 수행된다. 그러한 농장에서는 대부분 일손들이 노동 용역으로부터 고용되지만, 자본주의 체제가 우세하기 때문에 이웃농들은 독일에서 계약직, 일용직 노동자와 비슷한 농촌 노동자로 전락한다. 이 사람들은 땅을 소유하면서도, 일년 중에 특정 기간 동안에만 고용된다. 1890년대에는 흉작이 일어났으며, 농민들이 소유한 가축 수는 엄청나게 감소했으며, 가축 없는 가구가 증가한 건,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노동 용역을 제거하고, 가속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노동 용역 제도 쇠퇴에서 매우 중요한 원인으로는 농민층 분화를 꼽을 수 있다. 소작농 노동 용역과 농민층/중산층 간 관련은 앞서 명확하고, 선험적인지라, 젬스트보 통계로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보로네시 주 자돈스크 지역의 요약본은 많은 농민층에서도, 일용직 농장 수에 대한 결과를 백분율로 나타냈다. 따라서 두 극단 집단에서도 일자리 참가가 덜 '일반적'이다. 일자리 가구 가운데 큰 비중은 중농이다. 젬스트보 통계 초록에서도 '일자리''고용' 범주에도 포함되기 때문에, 중농들의 전형적인 고용이라는 점이다. 최하위 및 상위 농민 집단에서도, '전형적인' 고용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검토된 고용 유형으로는 자본주의 발전으로부터 비롯된 상업 및 산업 시설과 노동력 판매를 나타내지만, 여기서 고용 유형이란 반대로 후진적인 자본주의와 노동 용역 우세를 나타낸다. 일자리 총합에서 직업이 소작농, 노동 용역으로부터 할당한 것과 같다고 가정하는 경우이다.

 

자연경제와 중농 쇠퇴가 심화될수록, 자본주의는 노동 용역을 더욱 강력하게 근절한다. 부농들은, 당연하게도 노동 용역 제도에서도 기반을 마련한다. 농민이 최저 임금으로 일자리, 자신들의 농장을 파멸시키는 일자리를 떠맡는다는 건, 절박한 궁핌이 있기 때문이다. 농촌 무산층들도, 역시나 노동 용역 제도에 적합하지는 않았다. 다른 이유로는 자신들의 농장이 아예 없거나, 비참한 토지만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농촌 무산층들은 중농만큼 농장에서 얽매이지 않으며, 결과적으로는 다른 곳에서 보다 '자유로운' 조건 아래에서 더 높은 임금과 아무런 예속이나 구속 없이도, 쉽게 고용될 수 있었다. 따라서 농민들이 도시로부터 떠난다거나, '외부 고용'에서 떠나는 것에 전반적으로 불만을 품거나, 농민들은 애착이 없다고 불평한다. 자본주의적인 임금 노동의 발전은 노동 용역 체계에서 그 뿌리를 약화시킨다. 농민 분리와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용역 폐지 사이에서 불가분한 관계로는 이론적으로도 매우 명백하며, 지주 영지로부터 많은 농업 방식을 관찰한, 농업 저술가들로부터 오랫동안 지속됐다. 1857-1882년 사이에 대해 스테부트 교수는 러시아 농업에 대해 지적하면서, 지역 사회에서 농민 농업은 농부 산업가가 농장 노동자와 차별화된다고 말했었다. 대규모 경작자가 되는 농부 산업가는 농장 노동자를 고용하면서부터 농작물 면적을 다소 늘린다거나, 대부분 일자리를 취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목초지를 얻고자, 절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에서, 일자리를 취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농장 노동자는 가축이 부족해서, 취할 수조차 없다. 따라서 임금 노동에 기반한 농업 전환, 신속한 전환이 필요해지게 된다. 여전히 데시아틴에 따른 일자리를 취한 농민들은 허약한 가축 상태와 맡은 일들도 많기 때문에 품질과 신속환 완료 요구로 인해, 모두 나쁜 작업만을 벌이고 만다.

 

농민 몰락은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용역 폐지로 이어진다. 젬스트보 통계 자료에서도 언급된다. 오렐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곡물 가격 하락으로 인해 많은 소작농들이 파산했으며, 토지 소유주들은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계속해서 경작지를 늘려갔따. 지주가 경작하는 면적이 확대되면서부터 어디서나 농장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로만 일자리를 대체하다가, 농민들의 농기구 사용을 폐지하는 경향들도 생겨났다. 최신 농기구를 도입해서, 토양 경작을 개선하고, 농업 체계를 바꾼다거나, 풀 작물을 도입하거나, 가축 농업을 확장하거나, 개선해서 수익을 만들려는 경향들도 생겨났다. P. 스트루베의 비판적 논평에 따른 오렐 구베르니아 농업 조사에서도 1890년 폴타바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곡물 가격이 낮았을 때, 구베르니아 시 전역에서는 농민 토지 임대가 감소했다. 따라서 많은 곳에서 곡물 가격은 크게 떨어졌음에도, 정규직 노동력을 고용한 지주가 경작하는 면적은 증가했다. 탐보프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가축이 한 일에 대한 가격도 상당히 상승했다. 1892-18943년 동안에 가격은 1889-18913년보다도 25-30% 더 높았다. (Novoye Slavo, 1895), 가축 노동 비용이 상승한다는 건, 농가에서 가축 수가 감소하는 데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노동 용역 축출을 수반한다.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용역이 소멸됨을 증명하고자, 개별적인 참고 자료를 사용하기 위한 의도는 아니었으며, 온전한 통계 자료는 없다. 단지 농민 분화와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용역 소멸 사이에서도 관련 있음을 보여주고자 참고 자료를 사용했다. 소멸이 진행됨을 반박 없이 증명하는 '일반적'이고 '대규모적'인 통계는 농업에서도 기계 사용과 자유 고용된 노동력 사용과 관련된다. 통계로 넘어가기 전에, 사유지 소유주로부터 현대 농업에 대한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자.

 

1893-189448개 구베르니아 시에서 실시한 가축 수에 따른 인구 조사에서는 모든 가축 소유주가 소유한 가축 수가 9.6% 감소했으며, 말 소유자는 28,321명 감소했다. 탐보프, 보로네시, 쿠르스크, 랴잔, 오렐, 툴라, 니즈니노브고로드 구베르니아에서는 1888-1893년 사이에만 가축 수가 21.2% 감소했다. 흑토 지대에서는 다른 7개 구베르니아 시에서 1891-1893년 사이에만 17% 감소했다. 1888-1891년 유럽 러시아에서 38개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7,922가구가 있었고, 5,736,436가구가 말을 소유했다. 1893-1894년에는 구베르니아 시에서 8,288,987가구가 있었으며, 5,647,233가구글 소유했다. 따라서 말을 소유한 가구 수는 89,000가구 감소했지만, 말이 없는 가구 수는 456,000가구 증가했다. 러시아 제국 통계(상트페테르부르크, 1896)에 따르면 말이 없는 가구 비율은 27.6%-31.9%로 증가했다. 유럽 러시아 48개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말이 없는 가구 수로는 1888-1891280만 가구에서 1896-1900, 320만 가구로 증가했다. 27.3%-29.2%로 증가했다. 남부 4개 구베르니아, 베사라비아, 예카테리노슬라프, 타우리다, 헤르손 지역에서 말 없는 가구 수로는 1896305,800건에서, 1904341,600건으로 34.7%-36.4%로 증가했다.

 

- S.A 크롤렌코, 고용된 노동도 참조하자. 1882, 1888년 말 인구 조사를 기초로, 농민 소유한 가축 수가 감소하면, 사유지 소유자가 소유한 가축 수는 증가한다는 사례가 있다.

 

- 젬스트보 통계학자들은 예카테리노슬라프 구베르니아 시 바흐무트 지역의 여러 지역에서 현금 임대, 현물 임대를 상대적 발생률로 설명했다.

 

- 돈을 빌리는 일은 석탄과 소금 광산 지역 퍼졌으며, 대초원과 순수 농업 지역에서는 적게 퍼졌다. 농민들은 타인을 위해 노동하기를 꺼리거나, 특히 사유지에서 지루하거나, 낮은 임금 노동을 꺼려했다. 석탄 광산, 광석 채굴, 야금업에서도 힘든 노동은 노동자들의 건강을 해롭게 하더라도, 더 많은 임금, 월급과 주급을 현금으로 받을 수 있다는 전망으로, 노동자를 끌어들인다. 지주의 영지에서 노동할 때는 돈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노동자는 임대 받은 토지를 조금씩이나마 빌린 짚으로, 곡물에 대한 대가로부터 노동하거나, 생활에 필요를 충당하고자, 마디 임금을 받는다.

 

- 모든 게 노동자로부터 영지에서 노동하기를 꺼리도록 만들며, 특히 지주 영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더욱 그렇다. 주로 광산에서 기회가 많으며, 노동자들에게 '괜찮은' 임금을 지급하는 곳에서 특히 발생한다. 농민은 광산에서 번 '울타리'(펜스)로부터 영지에서 일하겠다고 서약하지 않고도, 토지를 임대할 수 있었으며, 돈을 받아서 토지를 임대하면서부터 지배력을 확립해갔다. 반면에, 대평원 비산업 지역에서는 스코프시나(Skopshchina)와 노동 용역 형태로부터 토지를 임대하면서 지배력을 확립해갔다. 따라서 농민들은 노동 용역을 피하고자, 광산으로 피신했다. 현금으로 즉시 지불받거나, 비인격적인 고용 형태, 정규 노동 시간은 노동자들을 매혹시켰으며, 인민주의자들이 목가적으로 찬가하는 농업보다도 지하 광산을 더욱 선호하도록 만들었다. 농민이 농업인과 인민주의자들로부터 이상화하는 노동 용역의 참된 가치를 쓰라린 경험으로부터도 잘 알고 있었고, 자본주의적인 '순수한' 관계에서도 얼마나 더 나은지도 더욱 알고 있었다.

 

인민주의자들의 태도

 

노동 용역 제도는 코르베 경제 잔재이지만, 인민주의자들은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모양새다.

인민주의자, V.V. 보론초프도 일반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일부만 인정해버렸다. 인민주의자들은 사유지 농업 제도로부터 노동 용역 제도, 자본주의 제도의 결합이었으며, 노동 용역 제도가 발전할수록 자본주의 제도는 약해졌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인민주의자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각 체계로부터, 노동 생산력, 노동력 지불, 러시아 개혁 이후로는 경제 분석에 따른 기본적인 특징과 관계를 피해버렸다. 실질적인 변화로부터 자본주의에서 생겨나는 노동 용역 제거는 불가피하다고, 질문을 제기할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인민주의자들은 노동 용역 제도를 이상화했었다. 지주 경제의 발전에 따른 이상화는 인민주의자들의 견해일 뿐이다. 인민주의자들은 코르베와 노동 용역 경제 아래에서 농민들에게 토지를 할당하는 과정에서도, 생산자와 생산 수단 간의 원칙을 간파했었지만, 토지 할당제는 지주들에게 노동력 공급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기에만 이르렀다. 마르크스도 이전의 자본주의적인 농업 체계를 설명했으며, 러시아에서도 일어나는 모든 형태의 경제 관계를 분석했었고, 소규모 생산, 노동 지대, 현물 지대, 화폐 지대 모두 농민과 토지 간 관계를 강조했다. 종속 농민에게 토지를 할당한다는 건, 생산자와 생산 수단 간 '영원한 연계'라는 원칙으로 격상시킨다는 걸 관념적으로 상기했던가. 생산자와 생산 수단 간 중세적인 착취의 원천이자 조건으로부터 기술적, 사회적인 침체 기반 아래에서도 필연적으로 경제적인 압력 외에도 과연 더욱 무게를 짓눌렀어야만 했을까.

 

오를로프, 카블루코프는 모스크바 젬스트보에서 포돌스크 지역에 있는 코스틴스카야 부인의 농장을 예시로 들었다. 노동 용역과 노예 제도에 대한 비슷한 이상화를 보여줬다. 카블루코프는 농장에서 지주와 농민 간 적대 관계를 배제하고는 농민, 농업, 사농 모두를 번영시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가정했었다. 노동 번영이란, 노동 용역과 노예 제도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작 농민에게는 목초지와 가축 방목작은 없었음에도 말이다. 인민주의자들은 농민들을 '건전한' 농민들로부터 간주한다. 토지를 임대하고, 여주인에게도 일당을 지불해서, 그녀의 영지에서도, 철저하고, 시간을 엄수하거나, 신속하게 임무를 수행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코르베 제도 아래에서 직접적인 생존을 위한 경제 체계를 이상화한 대가이자, 한계였다. 인민주의자들의 추론에는 농민에게 토지를 할당한다는 건, 코르베 또는 노동 용역 경제 조건 가운데 하나이며, 독립적인 경작자일수록, 노동 지대, 현물 지대, 화폐 지대를 지불해야만 했다. 따라서 생산자와 생산 수단 개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전자본주의적인 착취 형태에서 실제 관계는 조금도 변하지는 않았다.

 

카블루코프는 노동 용역을 이상화했고, 모스크바 구베르니아 시에서 자본주의적인 농장을 왜곡되게 묘사했으며, 러시아 농업에서 자본주의적인 발전 본질을 증명했다는 점이다. 모스크바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고용된 노동력을 고용하는 오래된 농장 유형 외에도, 모든 기존의 전통과 결별해서 소득원이 될 수 있는 모든 산업을 단순한 사물로 대하는 농장이라는 점이다. 농업은 한정된 직업이며, 특수한 지식과 생산 조직에 따른 계산 기준들은 다른 모든 생산 형태와 동일하다. 카블루코프는 1870년대에서야, 새로운 농장 농업이 자본주의적인 발전의 본질을 증명했다는 점을 간과했다. 농업을 단지 영주의 취미에서 산업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던 건, 자본주의였으며, 단순한 사물, 단절된 전통, 전문 지식만을 갖추도록 자본주의적인 산업은 강요했다. 자본주의가 들어서기 이전에는 불필요했으며, 할 수조차 없었다. 많은 영지, 마을 공동체, 소작농 가축 농장은 자급자족이었고, 다른 농장에 의존하지도 않았으며, 어떠한 권력도 오랜 침체기에서 함부로 끌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시장이라는 매개체로부터 개별 생산자로부터 생산량에 대한 사회적인 회계를 생산했고, 사회적인 발전을 요구한 힘이 있었다. 모든 유럽 국가에서 농업은 자본주의로부터 점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카블루코프는 노동력이 자연 경제에서 작용하는 필수 요소로, 지주 재산 조직의 성과라 말했었다. 그는 농노제 시절에, 재산 수익 기초로부터 노동 산물이 아닌 노동 획득으로 적용되어 직접적인 목적으로부터, 더욱 가치 있는 노동 생산물 생산 결과를 누리는 노력이 아니라, 노동자가 생산물 몫을 줄이려는 노력에서, 주인들의 노동 비용을 ‘0’에 가깝게 수렵하도록 줄이려는 욕구나 독립적인 소득원으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벌채된 토지 사용 대가로부터 노동에 기반한 농업이 언급된다. 농장 수익을 내고자, 소유주는 지식, 특별한 자질도 필요 없었다. 단지 노동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든 건, 소유주에게 명확한 소득으로 나타내거나, 순환 자본을 거의 지출하지 않고 얻는 소득이었다. 따라서 농업은 잘 운영될 수 없었다. 모든 목초지와 기타 토지 임대를 농업이라 부를 수도 없었다. 여기에는 어떠한 경제적인 조직도 없었다. 노동 봉사를 대가로부터 벌목지를 임대하면서, 농업 경제에서는 토양으로부터 소득을 추출하는 방법은 물질적인 힘보다는 노동자에게 영향력을 형성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잘못된 논리였다. 카블루코프는 생산과 사회적인 생산 체계를 혼동했었다. 모든 사회적인 체계에서 생산은 물질적인 힘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다름 아니다. 모든 사회적인 체계에서는 초과 생산물만이 토지 소유자의 소득 원리가 된다. 따라서 노동 용역 체계는 자본주의 제도와 동일하다. 단지 노동 용역은 필연적으로 매우 낮은 노동 생산력을 전제한다. 따라서 초과 생산물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가시킬 수는 없다. 오직 '용역'을 활용할 때만 증가시킬 수 있다. 반대로 자본주의적인 경제에서는 고정된 용역은 무시된다. 토지에 묶이지 않은 무산 계급들은 노예의 대상으로도 쓸모조차 없기 때문이다. 노동 생산력을 높이는 건 소득 증대라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카블리코프는 노동 용역을 이상화했으며, 자본주의적인 농장은 러시아 자본주의가 농업을 합리화하거나, 노예 제도 폐지를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사회적인 조건을 조성했지만, 노동 용역은 농업 합리화를 배제시켰으며, 기술적인 정체와 생산자의 노예 상태를 촉진시켜 더욱 영속화했다. 농업에서 자본주의는 취약하고, 인민주의자들은 관례적으로 경솔하게 환호했다. 자본주의가 취약하다면 더욱 심각하게 생산자에게는 큰 부담을 주는 이전의 자본주의적인 착취 형태로부터 더욱 강력해질 뿐이다.

 

- 노동 용역에 따른 임대에서 '상권 임대'(라페 임대)를 대체한 확산은 퇴보적이다. 바람직하다거나, 유익하다고 말하지만, 발전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츄프로브(Chuprov)수확의 영향력에서도 노동 용역은 농촌 인구를 충분히 도울 수 있다고 내세웠지만, 노동 용역 이상화라는 절대적인 모순이 나타났다. T. 바라노프스키(T. Barananovsky), 스트루베(Struve)는 낮은 곡물 가격의 중요도를 1897년에 올바르게 제시했었다. 낮은 곡물 가격 시기에는 이전의 높은 곡물 가격에서 역사적인 시기보다도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용역을 더욱 가속화시키며, 제거하는 게 '개연적'이다.

 

엥겔하르트 농장

 

엥겔하르트도 인민주의적인 시각에서 농장을 분석했다. 엥겔하르트는 농장에서 전통적인 노동 용역와 속박에 기반을 뒀으며, 적절한 농업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노동 용역은 가축 사육으로부터 열악한 조건, 토지 경작 불량, 쓸모조차 없는 밭 경작 제도를 단조롭게 만든 원인이었다. 예전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는 없었으며, 대평원 지역에서 벌어진 곡물 경쟁은 가격을 더욱 떨어뜨렸으며, 수익성이 없는 농업을 만들었다. 따라서 노동 용역 제도와 더불어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농장에서 특수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임금 노동자 숫자는 매우 적었고, 소몰이꾼과 같은 예전의 방식으로 운영됐다. 엥겔하르트는 할당지를 소유한 농민들 가운데 농장 노동자의 임금이 매우 낮았다고 지적했다. 가축 사육이 어려워서 더 많이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 생산력도 낮아서, 임금을 인상할 수조차 없었따. 따라서 엥겔하르트 농장은 친숙한 모든 러시아 농장에서도, 노동 용역, 노예, 최저 수준으로의 노동 생산력과 매우 낮은 노동 임금으로 이뤄진 농사였을 뿐이었다.

 

엥겔하르트는 대규모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상업 및 산업 작물이던 가마를 파종했다. 아마 재배로부터 상업적이고, 자본주의 성격은 강해졌다. 노동력을 확보하고자, 상업적인 경작에서 노동 용역이라는 오래된 제도를 도입했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데시아틴 단위는 농민들의 힘을 넘어섰으며, 농민들은 집단 노동, 구속된 노동 조건들 속에서도 온 힘을 다해 맞섰다. 제도는 반드시 바뀌어야만 했다. 엥겔하르트는 말, 마구, 수레, 쟁기, 써레 등과 같은 농기구를 구입했으며, 정규직 노동자들과 농장을 운영했었다. 특정 직업에서도 노동자들을 고용해서 일용직으로 아마를 생산했다. 새로운 농업 체계와 상업적인 경작 제도의 전환으로부터 노동 용역에 자본주의를 도입해서 대체해갔다. 노동 생산력을 높이고자, 자본주의적인 생산에 따른 성과급 제도에 의존했다. 여성들도 더미(Pood) 단위로 노동했다. 엥겔하르트는 제도 정착이 성공적이었다고 말했었지만, 경작비는 1일 당 25루블-35루블, 이윤 또한 10-20루블로 증가했다. 여성들에게 노동 생산력은 노예 노동으로부터 고용 노동으로 전환됐으며, 하룻 밤 사이에 반 푸드에서 한 푸드로 늘어났고, 여성들의 수입도 하루 30-50코펙으로 증가해갔다. 지역 직물 상인들도 엥겔하르트를 극찬했다. 아마 장사가 시장에서도 큰 활력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상업용 작물 재배에서 적용된 고용 노동은 다른 농업 활동으로 확대해갔다. 자본이 농업 용역 제도를 철한 첫 작업으로는 탈곡이 이뤄졌다. 사유지 소유자는 운영하는 모든 농장에서 대부분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수행됐다. 엥겔하르트는 토지 일부를 농민에게 임대해서 순환하며, 경작하도록 했다. 그렇지 않으면 호밀 수호가에 어려움이 뒷따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 용역은 농부에게 매우 바쁜 시기임에도, 일용직 노동자를 공급했고, 자본주의로 직접적인 전환 역할을 했다. 초창기 순환 경작은 탈곡도 포함됐지만, 작업 질은 낮아서 농부는 고용 노동에 주로 의존했다. 탈곡 없이 순환 경작을 위해 토지를 임대했다. 탈곡은 부분적으로는 농장 노동자로부터, 계약직으로부터 임금 노동자 집단으로부터 시간 당 임금으로 이뤄졌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노동 용역을 대체한 결과도 나타났다. 노동 생산력 증가, 수확량 증가, 탈곡 시간 단축, 노동자 소득 증가, 농부 이윤 증가로부터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경작 작업도 수용했다. 낡은 나무 쟁기 대신 철제 쟁기를 도입했고, 노동은 속박된 농민으로부터 농장 노동자에게도 넘어갔다. 엥겔하르트는 혁신의 성공으로, 노동자들의 근면을 전했었고, 노동자를 게으르고, 부정직하다고 관습적으로 비난하는 농노라는 낙인, 영주를 위한 노예 노동에서 기인했다. 또한 농업 조직 또한 농부에게 요구하는 게 많았다. 진취적인 사람들에 대한 지식, 그들을 다루는 능력, 작업 범위에 대한 지식, 농업적인 기술 및 상업적인 지식, 봉건적인, 노예적인 농촌에 대해 '오블로모프'도 도저히 가질 수 없었던 자질이었다. 농업 기술 변화는 불가분한 관계이며, 필연적으로 경제적인 변혁으로 이어졌다. 아마, 클로버 재배에서도, 수 많은 변화로부터 사업을 순조롭게 진행시켰다. 따라서 쟁기 도구, 나무 쟁기에서 철제 쟁기로, 나무 써레는 철제 써레로, 대체되는 식이었고, 가축, 노동자와 고용과 관련된 다른 농업 제도 등을 더욱 요구했다.

 

농업 기술 발전은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용역 제도의 소멸과도 불가분하다. 점진적인 소멸이며, 농업 제도는 노동 용역과 자본주의를 결합했지만, 점차적으로는 자본주의로 옮겨갔다.


엥겔하르트는 농업 체계를 완전하게 바꿔놨으며, 상당 부분 정규직과 일용직 노동자들이 했다는 점이다. 농사를 짓고자 덤불을 제거하거나, 나무 뿌리를 뽑거나, 드네프르 강벽 목초지를 빌려 클로버, 호밀, 아마를 심었다. 인력도 많이 들었고, 준비도 해야만 했다. 바쁜 시기에는 다른 농장에서도 일했다. 노동력 모집은 돈, 곡물을 선불로 제공했다. 하지만 운영되는 농장에서도 노동 용역과 노예 제도는 그대로였다. 단지 무상 고용에 비하면 종속적인 위치에서, 노동 용역 자체도 변화를 겪었다. 노동 용역은 농민 노동이 아닌, 정규직 노동자, 농업에 종사하는 일용직 노동자 노동으로 유지됐다. 엥겔하르트 농장은 인민주의자들을 반박할 때도 우월했다. '합리적'으로 농사를 지었지만, 주어진 사회 경제적인 조건 아래에서는 농장 노동자를 고용하는 식으로, 농장을 조직할 수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농업 기술 향상,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용역 대체는 러시아에서 모든 사유지 농장에서도 병행됐다. 따라서 러시아 농업에서도 기계 활용은 두드러졌다. 저렴한 곡물을 둘러싼 경쟁은 기술 발전의 동기였기 때문에, 무상 고용으로 대체한 기여도를 특수하게 주목할 수 있다. 대평원 지역에서 벌어진 당시에 곡물 경쟁은 곡물 가격이 높았던 시기에도 생겨났다. 가격이 비교적 낮았던 시기에는 경쟁에서 특수한 힘을 부여했다.

 

- 여기서 오블리모프란 의지력도 없고, 극도로 게으른 지주를 말한다.


3-3. 농업 분야에서 기계 사용과 임금 노동

 

농업에서 기계 활용

 

개혁 이후에는 농업 기계 생산 발전과 농업에서 기계 사용은 네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로는 농민 개혁 직전과 직후이다. 처음에 지주들은 농노 무급 노동 없이 살아갔으며, 자유 노동자 고용과 관련된 어려움은 피하고자, 외국 기계를 구입하고자 서둘렀다.

물론 실패했다. 1863-1864년부터 외국 기계에 대한 수요가 떨어졌다.

 

1870년대 말에는 두 번째 시기가 찾아와서, 1885년까지 계속됐다.

두 번째 시기에는 해외에서 기계 수입이 매우 꾸준하고, 빠르게 증가했지만,

수입보다 작업 속도가 느렸다.

 

1881-1884년 사이에는 농기계 수입이 특히 빠르게 증가했다.

부분적으로는 1881년 농기계를 생산하는 공장 요구에 따른 쇠철, 주철 면세 수입이 폐지됐기 때문이다.

 

세 번째 기간은 1885-1890년대 초까지였다. 면세로만 수입되던 농기계는 수입 관세가 부과됐다. 높은 과세로부터 기계 수입은 매우 감소했으면, 농업 위기로부터 러시아 생산은 느리게 발전했다는 점이다.

 

1890년대 초에는 네 번째 시기로, 농기계 수입은 다시 증가했으며, 러시아 내 생산은 특히 빠르게 증가했다.

 

농기계 연평균 수입량에 따르면, 공장 및 작업장 통계에서 미흡한 상태로, 일반 기계 생산, 특정 농업 기계 생산의 혼동, 공장 생산, 수공예 생산을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이 부재하는 등 농기계 생산 발전에서는 걸림돌이었다. 원시적인 농기구는 개량된 농기구로 옮겨가는 활력을 보여준다. 18년 동안 농기계 사용은 3.5배로 증가했는데, 왜냐하면 가내 생산 확대가 4배나 증가했기 때문이다. 생산의 주요한 중심지는 비스툴라 강과 발트해 지역에서 남러시아 대평원으로 옮겨갔다. 1970년대 러시아 농업 자본주의에서 주요한 중심지는 서부 외곽 지역이었지만, 1890년대에는 러시아 지역에서도 두드러진 농업 자본주의 지역들이 형성됐다. 1876-1879년에는 1882년 박람회를 위해 특수하게 수집되거나, 반환됐다. 포괄적으로 농업 도구에 따른 공장 뿐만이 아니라, 수공예 생산도 해당된다. 1876-1879년에 유럽 러시아와 폴란드 왕국에서는 평균 340개 시설이 있었고, 공장 통계 따르면, 1879년에는 유럽 러시아에서도 농업 기계 및 도구를 생산하는 공장은 66개를 넘지 않았다. 1879년에는 오롤로브(Orlov) 공장 및 작업장 목록 계산이다. 수치의 큰 차이로부터 340개 시설 가운데 236개 시설은 자체적인 주조소가 없었으며, 외부에서 주물을 제작했다. 1890-1894년 통계에서는 러시아 공장 상업 통계 모음집(상무부)에서 가져왔다. 해당 통계에서는 농업 기계 및 도구에 따른 공장 생산조차 완전하지가 않다. 1890년 통계에 따르면 유럽 러시아에서는 산업에 종사하는 회사가 149개 있었지만, 오롤로브 분류집에서는 농업 기계 및 도구를 생산하는 회사는 163개 이상이었다.


1894년에는 유럽 러시아에서도 공장이 164개 있었다. 그러나 공장 및 작업장 목록에 따르면, 1894-1895년에는 농업 기계와 도구를 생산하는 공장은 173개가 넘었다. 농업 기계와 도구에 따른 소규모 수공예 생산은 해당 통계에 전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1890-1894년 통계는 실제보다 크게 과소평가됐다. 1890년대 초 러시아에서는 농업 기계 도구가 약 1,000만 루블(농업 및 임업)으로, 1895년에는 약 2천만 루블에 달하는 금액이 지급됐다. 러시아에서 생산된 농기계 및 농기구 종류와 수량으로는 1876년에는 25,835대의 농기구가 생산됐고, 1877년에는 29,590, 1878년에는 35,226, 1879년에는 47,892대가 생산됐다. 수치가 얼마나 초과됐는지는, 1879년 약 14,500대 철제 쟁기가 생산됐고, 1894년에는 75,500대가 생산됐다.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농민 농장에서 철제 쟁기를 더 널리 사용하기 위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었지만, 저절로 해결됐다. 그만큼 농민들은 철제 쟁기를 사는 일이 드물지가 않았다. 농민들은 매년 구입하는 철제 쟁기 수도 늘어났다. 러시아에서 사용된 원시적인 농업 도구 양은 여전히 철제 쟁기에 따른 생산 및 판매에 넓은 여지를 남긴다.

철제 쟁기 사용의 진전 때문에 <상업 및 산업 기사문>에 따르면 전기 사용 문제까지 제기됐다. 2회 전기 기술자 대회에서 V.A 라즈혜브스키(V.A Rzhevsky), 농업에서 전기 사용에 대한 논문이 관심을 끌었다. 독일에서 전기 쟁기를 이용한 밭 경작을 설명했었고, 남부 3개 주 가운데 한 곳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 대한 토지 소유자 요청에 따라 작성된 계획, 견적에서 경작 방법의 경제력을 보여준 수치를 인용했다. 계획에 따르면 매년 5-40데시를 경작했으며, 일부를 1년에 두 번 경작하고자 제안됐다. 고량 깊이로는 41/2에서 5베르쇼크(Vershoks)였다. 쟁기 외에도 계획에는 다른 밭 작업용 가계류, 탈곡기, 연간 2,000시간을 가동할 수 있는 25마력의 제분기가 있었다. 50mm 두께로 된 가공 전선(케이블) 6베르스트도 있었고, 부지 전체를 장비하는 비용은 41,000루블이었다. 제분기를 설치한다면, 1데시아틴을 경작하는데 드는 비용으로는 7루블 40코펙이었고, 제분기가 설치되지 않는다면, 8루블 70코펙이었다. 인건비, 가축 등의 현지 비용을 고려했을 때도, 전기 장비를 사용하면, 1.93루블을 절약했고, 제분기 없이 전략 사용량을 줄인다면, 966루블을 절약했다.

 

탈곡 및 풍차 기계 생산량은 급격한 변화가 없었다. 왜냐하면 생산은 오래 전에 확립됐기 때문이다. 기계로부터 수공예 생산을 위한 특수한 중심지(센터)에는 랴잔 구베르니아 시에서 사포조즈 시와 주변 마을로부터 설립됐고, 농민 부르주아들의 지역 구성원들은 산업에서 많은 이득을 얻었다. 특히 수확 기계 생산에 따른 빠른 확장을 볼 수 있었다. 1879년에는 기계가 약 780대가 생산됐고, 1893년에는 연간 7,000-8,000, 1894-1895년에는 약 27,000대가 판매됐다. 1895, 타우리다 구베르니아 베르댠스크 시에서는, J. 그리브스(J. Greaves) 공장에서 생산열(생산 라인)은 그 당시에 유럽에서 가장 큰 공장이었다. 수확기 생산 부문에서 4,464대의 수확기를 생산했다. 타우리다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농민들 사이에서 수확기가 널리 보급되어, 다른 사람들의 곡물을 기계로 수확하는 특수한 직업들도 생겨났다. 비교적 덜 널리 보급된 농기구에 대해서도 '산파기' 수십 대가 작업장에서 생산됐으며, 1893년에는 두 작업장에서만 생산됐던 파종기는 현재 7개 작업장에서도 생산됐다. 농업과 임업에 따르면, 작업장 생산량은 러시아 남부 지역에서도 특히 널리 판매됐다. 기계는 모든 농업 분야와 일부 농산물 생산과 관련된 모든 작업에서 사용됐다. 특수한 후기로는 선별기, 종자 분류기, 종자 세척기(Trieurs), 종자 건조기, 건초 압착기, 탈곡기(아마) 등의 사용이 확대됐다.

 

프스코프 주 젬스트보 행정부에서는 1898농업 보고서 부록(1899)(Serverny Kurier)에서 가장용 아마 생산에서 상업용 아마 생산 전환에 따른 기계 특히 아마 탈곡기 사용이 증가했다. 철제 쟁기 수도 증가했다. 이로부터 농업 기계 수를 늘리고, 임금 인상에 미치는 영향을 언급했다. 스타브로폴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구베르니아로부터 이민이 증가하면서 농업 기계 사용도 확대됐다.

 

1882년에는 908대 농업 기계에서, 1891-1893년에는 평균 29,275, 1894-1896년에는 평균 54,874, 1895년에는 최대 64,000대 농기구와 기계가 사용됐다. 기계 사용이 증가하면서부터 발전기(엔진)에 대한 수요도 발생했다. 증기 발전기와 더불어 석유 발전기는 농장에서도 빠르게 퍼져갔다. 첫 발전기가 해외에서 등장한지는 불과 7년 전이었지만, 1870년대 헤르손 구메르니아 시에서는 농업에 등록된 증기 발전기로는 134개에 불과했다. 러시아 제국에서 증기 엔진 통계 자료(상트페테르부르크, 1882), 1881년에는 약 500개가 등록됐다. 역사 통계 조사, 농기구 부문, 1884-1886,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6개 군 가운데 3개 군에서 증기 탈곡기 435대가 등록됐다. 1895년에는 적어도 두 배가 더 많았다. 테자코프, 농업 노동자, 위생 감독 조직,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 1896에서는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에서도 증기 탈곡기는 약 1,150대였고, 쿠반 지역에서도 그 수가 비슷하다고 했다.

 

증기 탈곡기 구입은 산업적인 성격을 띠었다. 2-3년 풍년기에 증기 발전기에 장착된 5,000루블짜리 탈곡기를 구입해서 비용을 전액 충당하고, 소유주가 동일한 조건에서 다른 기계를 즉시 구입하기도 했다. 쿠반 지역에서는 소규모 농장에서 기계를 5, 10대까지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조직된 모든 농장에서도 필수적인 부속품이었다. 남부에서는 농업 목적만으로 1만 대 이상의 증기 발전기가 사용됐다. 1875-1878년까지 유럽 러시아 전역에서는 농업에서 사용된 증기 기관 수가 불과 1,351대였다. 1903년 공장 검사관 보고서의 불완전한 보고에 따르면 1901년에는 12,091, 1902년에는 14,609, 1903년에는 16,021, 1904년에는 17,287대였다. 지난 20-30년 동안 자본주의는 농업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나도록 만들었다. 젬스트보는 가속화시켰다. 1897년 초, 젬스트보 농기계 및 창고는 11개 구베르니아 시와 203개 군 젬스트보 위원회 관리 아래에서 운영됐고, 총 운영 자본은 약 100만 루블이었다. 재정지(1897), 폴타바 구베르니아 시에서 젬스트보 창고 매출액은 189022,600루블에서, 189294,900루블, 1895210,100루블로 증가했다. 6년 동안 철제 쟁기 12,600, 키질기 및 종자 선별기 500, 수확기 300, 말 탈곡기 200대가 판매됐다. 젬스트보 창고에서는 농기구 판매를 하던 사람은 코사크 족과 농민으로, 철제 쟁기와 말 탈곡기 판매 다수에서 70%를 차지했다. 파종기와 추수기를 구매하는 사람들은 주로 지주들이었으며, 100데시아틴 이상을 소유한 대지주들이었다.

 

- 1895년 예카테리노슬라프 구베르니아 시 젬스트보 위원회에 따르면, 구베르니아에서 개량된 농기구 사용은 매우 빠르게 확산됐다. 베르흐네, 드네프르 지역에서 특히 그랬다. 모스크바 구베르니아 젬스트보 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1895년 모스크바 구베르니아 시 농민들은 41,210대의 철제 쟁기를 소유했으며, 전체 세대 주에서 20.2%가 소유했다. 트베리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1896년에 작성된 특수 기록에 따르면 총 세대 주 16.5%51,255대 철제 쟁기를 소유했다. 트베리 군(위예즈드)에서는 1890년에 철제 쟁기 290, 1896년에는 5,581대에 불과했다. 따라서 농민 부르주아 농장은 빠르게 통합됐고, 개선됐다.

 

- 농업 도구와 기계기사만이 정치 경제적 기반에서 문제를 제기했고, 이전의 모든 글들은 농업 전문가들이 썼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앙통계위원회에서 작성한 러시아 연감 표(1906), 1900-1903년 자료에서, 러시아 제국의 농업 기계 생산량은 12,058,000루블, 1902년에는 15,240,000루블, 1903년에는 20,615,000루블로 수입량이 증가했다. 농기구 제조 및 수리에 종사하는 작업장 총 수는 186464, 1871112, 1874203, 1879340, 1885435, 1892400, 1895년 약 400개로 기록됐지만, 집계로는 1888-1894년 공장은 157개에서 217개로 7년 평균 183개에 불과했다. 농기계 공장 생산과 수공예 생산 비율을 보여주는 예시로는, 1894년 페름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총 생산량이 28천 루블인 공장이 불과 4개였지만, 1894-1895년 인구 조사에서는 산업 분야에 따른 수공예 시설은 94개로, 총 생산량은 50,000루블에 달했다. 게다가 수공예 시설에서는 임금 노동자 6명을 고용했고, 페름 구베르니아 시 수공예 산업 현황 개요(1896)에 따르면, 생산량이 8,000루블 넘는 시설도 있었다. 수공예 산업 보고서에 따르면, 농민 쟁기 생산은 감소했으며, 공장 생산에서도 밀려났다. 1879년에는 약 4,500대 탈곡기가 생산됐고, 1894-1895년에는 약 3,500대가 생산됐다. 1894-1895 수치에는 생산량이 미포함됐다.

 

- 1893년에는 700명의 농민인 200,000데시아틴을 소유한 팔츠 페인, 우스펜스키 영지에서 기계를 가지고서 봉사를 제안했었지만, 절반은 빈손으로 돌아갔고, 거의 350명만 고용됐다. 그러나 다른 대평원 구베르니아, 특히 트란스볼가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아직 수확기가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해당 구베르니아 시들 역시 노보로시야를 추월하고자 노력했다. 따라서 시즈란 뱌지마 철도는 1890년에 75,000푸드, 1891년에는 62,000푸드, 1892년에는 88,000푸드, 1893년에는 120,000푸드, 1894년에는 212,000푸드에 달하는 농기계, 견인 발전기(엔진) 및 부품을 운송했다. 5년 만에 운송량은 세 배로 증가했다. 우홀로브 철도역에서는 1893년에 약 30,000푸드로, 1894년에는 약 82,000푸드에 달하는 국내산 농기계를 운송했지만, 1892년까지는 연간 운송량이 10,000푸드에 미치지 못했다. 우호로브 역은 주로 카니노(Kanino)와 싱코보(Symkovo) 마을에서 생산된 탈곡기를 배송했고, 부분적으로는 랴잔 구베르니아 시(Ryazan Gubernia) 사포츠호크 군 도시에서 배송했다. 카니노 마을에서는 야마코브(Yermakov), 카례브(Karev), 골리코브(Golikov)에 속하는 세 개의 주조소가 있었으며, 주로 농업 기계 부품을 생산했다. 기계 마무리 및 조립 작업으로는 카니노, 심코브에서 수행됐고, 모든 주민들이 고용됐다. 흥미로운 점으로는, 곡물 가격이 낮은 해였던 몇 년 동안은 곡물 생산량이 매우 증가했고, 공장과 수공예 생산 사이에서 수공예 생산은 미미했다. 농부들 사이에서도 수확기, 증기 탈곡기, 말 탈곡기가 널리 보급됐고, 밭 작업이 빠르게 진행됐다. 굴림대(롤러)를 이용한 구식 탈곡 방식이 아니라, 크림 반도 농부들은 매년 농작물 면적을 늘려왔기 때문에 개량된 농기구와 기계를 사용했다. 굴림대만으로는 하루 150-200 푸드 이상 곡물을 탈곡할 수는 없었지만, 10마력 증기 탈곡기는 2,000-2,500 푸드, 말 탈곡기는 700-800푸드를 탈곡했다. 따라서 농기구, 수확기, 탈곡기에 대한 수요가 해마다 급증해서, 농기구를 생산하는 공장과 작업장에서는 재고 부족이 발생하는 해가 있기도 했다. 농부들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고, 곡물 가격 하락은 농부들이 생산 비용을 줄이도록 강요하면서, 개량된 농기구 사용이 증가한 주된 원인이었다.

 

농업에서 기계의 중요성

 

러시아 개혁 이후로는 농업에서 농 기계 생산과 기계 활용은 매우 빠르게 발전해갔다. 사회적, 경제적으로는 앞서 소농 및 지주 농업에서 경제학을 거론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농업에서도 기계 사용을 확대시킨 요인이었고, 농업에서 기계를 적용한다는 건 자본주의적인 성격을 띤다. 자본주의 관계에서 확립과 발전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노동 용역 경제 제도와 가부장적인 농민 경제는 불가분하며, 생활 기술, 낡은 생활의 보존에 기반한다. 경제 제도에서도 내부 구조는 기술 변혁을 촉진할 요소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경제 제도에서 고립된 성격과 종속된 농민들의 빈곤, 억압을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배제시킨다. 노동 용역 제도 아래에서는 노동 임금은 고용 노동보다도 훨씬 낮다. 저임금은 기계 도입에서도 중요한 장애물이었다. 농업 기술 변혁에서도, 폭 넓은 운동은 상품 경제와 자본주의 발전에서도 개혁 이후에서야 시작됐다. 자본주의 산물인 경쟁과 세계 시장에 대한 재배자 의존은 기술 전환을 필수로부터, 곡물 가격 하락은 재배자 의존도를 더욱 시급하게 만들었다. 지주 농업과 농민 농업을 별도로, 지주가 기계나 개량된 농기구를 도입하면, 농민의 농기구를 자신들의 농기구로 대체하게 된다. 따라서 노동 용역에서 자본주의 농업 체계로 전환한다. 농업 기계 보급은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용역의 소멸을 뜻한다. 토지 임대 조건으로는 추수기, 탈곡기 등에서 일용직 노동의 수행이 제시될 수는 있었지만, 두 번째 유형에 따른 노동 용역, 농민을 일용직 노동자로 전환시키는 노동 용역이다. 따라서 '예외'란 사유지 소유주 농장에서 개량된 농기구를 도입해서, 인민주의자들의 용어로는 속박 농민을 임금 노동자로 전환시킨다는 일반적인 규칙만을 증명할 뿐이다. 집에서 할 일을 제공하는 매수자가 자신의 생산 도구를 취득하는 게 속박된 수공예인을 임금 노동자로 전환시킨다는 말과 같다. 지주 농장에서 자체 농기구를 취득한다는 건, 필연적으로는 노동 용역에 참가해서, 생계 수단을 얻는 중농 약화로 이어지게 된다. 이미 노동 용역에서는 중농에게 특수한 산업이며, 그들의 농기구는 농민 농업 뿐만이 아니라, 지주 농업에서도 구성 요소이다. 따라서 농업 기계와 개량된 농기구 보급은 동일한 뜻을 지닌다.

 

농업에서 기계의 체계적인 사용은 증기 동력 직기가 수공업 직조공을 몰아내듯, 가부장적인 중간 농민을 무자비하게 몰아낸다. 농업에서 기계 사용 결과는 앞선 내용을 뒷받침해서, 자본주의적인 발전에서도 모든 전형적인 특징과 내재적인 모순을 드러낸다. 기계는 농업에서 노동 생산성을 크게 증가시키며, 현 시대 이전에는 사회 발전에서 영향력을 거의 받지는 않는다. 따라서 농업에서 기계 사용이 증가한다는 점만으로도, 곡물 생산에서 '절대적인 정체'가 있으며, 농업 노동에서도 생산력 감소가 있다는 인민주의자들의 주장에는 너무나 터무니가 없다는 점이다. 모순된 인민주의자들의 주장에는 이전의 자본주의 질서를 이상화하는 데 필요했을 뿐이다. 기계는 생산 집중과 농업에서 자본주의적인 협력으로 이어진다. 기계 도입은 대규모 자본을 요구하며, 대농장주들만이 감당한다. 기계는 처리해야 할 농산물 양이 많을 때에만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계 도입과 더불어 생산 확대는 필연적이다. 수확기, 증기 탈곡기 등 폭 넓은 사용은 농업 생산의 집중을 나타낸다. 나중에는 기계 사용이 널리 퍼진 러시아 농업 지역(노보로시아)에서 상당한 규모로 농장을 가지게 됐다. 농업의 집중을 인민주의자들과 같이 경작지의 폭 넓은 확대라는 형태로만 생각하는 건 오류이다. 농업 생산 집중은 상업 농업 형태에 따라서 매우 많은 형태로 나타난다. 생산 집중은 농장 노동자들의 폭 넓은 협력과 불가분하다. 수백 대의 수확기를 가동하여, 곡물을 수확하는 대규모 농장에서는, 4-8마리 말이 끄는 탈곡기는 14-23, 심지어 이상의 노동자를 필요로 하며, 절반 이상은 12-17세 소년, 소녀 노동자들이다. 각 농장에서는 500-1000명 노동자가 모여 있는 대규모 농장에서는 산업 시설로 봐도 무방하다.

 

인민주의자들은 마을 공동체가 농업에서 쉽게 협동을 도입할 수 있었다고 내세웠지만, 나름대로 계속됐으며, 자본주의는 마을 공동체를 반대하는 이익을 가진 경제적인 집단으로 분할해서 임금 노동자들의 폭 넓은 협동을 기반으로 대규모 농장을 만들어갔다. 따라서 기계는 자본주의에 따른 국내 시장을 창출한다. 기계 제작, 광업 등에서 생산물에 따른 생산 수단 시장이며, 노동력 시장이다. 기계 도입은 노동 용역을 고용 노동으로 대체하고, 노동자를 고용하는 소농장을 창출한다. 농업 기계의 대량 사용은 대량 농업 임금 노동자를 전제한다. 농업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지역에서는 기계 도입과 더불어 임금 노동의 도입과 기계로부터 임금 노동자 축출과 교차한다. 농민 부르주아지 형성과 지주 노동 용역에서 자본주의로 전환은 임금 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창출시킨다. 농업은 오랫동안 임금 노동에 기반을 두었던 곳에서 기계가 임금 노동자를 축출해간다. 러시아 전체에서도 미치는 영향력으로부터, 농업 임금 노동자 수가 증가하는지, 감소하는지를 보여주는 정확하고, 폭 넓은 통계는 없다. 그러나 그 수는 증가하고 있다. 기계로부터 농업에 따른 임금 노동자 축출에 대한 통계는 노보러시아에서만 사용할 수도 있지만, 자본주의 농업에 따른 다른 지역들, 발트해, 서부 지역, 동부 외곽 지역, 일부 산업 주에서는 아직 대규모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노동 용역이 우세한 폭 넓은 지역이 남아 있으며, 지역에서는 기계 도입으로부터 임금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발생하게 된다.


뿌리 작물 도입으로부터 집약적인 농업 발전으로는 임금 노동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킨다. 산업에 비해 농업은 임금 노동자의 절대적인 수가 감소한다는 말은, 물론 자본주의 발전에서는 특정 단계에 따라, 전국적인 농업이 자본주의적인 노선에 따라서도 완전하게 조직되고, 매우 많은 농업 작업에서도 기계 사용이 일반화되는 단계에서 일어나게 된다.

 

노보로시아에서 지역 조사자들은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로부터 일반적인 결과를 지적했다. 기계가 임금 노동자를 몰아내고, 농업에서 자본주의 예비군을 만들었다.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에서도, 매우 높은 가격의 노동력 시대는 지나갔다. 농기구 확산 및 기타 원인으로부터 노동력 가격은 꾸준히 하락했으며, 농기구 분배는 대규모 농장을 노동자로부터 독립시키고, 노동력 감소를 감소시키면서, 노동자들을 곤경의 처지에 빠뜨린다고, 테자코프는 지적했다.


다른 젬스트보 의료 장교, 쿠드랴브체프는 1895년 카프코카 동네, 타우리다 구베르니아 시에서 니콜라예프 박람회에 참석한 이주 농업 노동자들과 그들의 위생감독, 헤르손, 1896에서도 언급했었는데, 노동자 가격은 계속해서 떨어지게 되고, 상당 수 이주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무엇도 벌 수 없었다. 따라서 노동 예비군, 인위적인 초과 인구가 생겨났다. 예비군으로부터 노동 가격 하락은 때로 너무 커지기도 해서, 기계를 소유한 많은 농부들이 기계보다는 손으로 수확하기를 선호했다. 이러한 점은 자본주의적인 기계 사용으로부터 내재된 모순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기계 사용에 따른 여성과 아동 노동에서도 고용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자본주의 농업 체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공장 노동자 사이에서 위계와 매우 비슷한 특정 노동자 위계가 생겨나도록 만들었다. 남부 러시아 영지에서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성인 남성인 정규직 노동자, 20세까지 소아 노동자는 12, 13-15, 16세까지 소아 노동자는 엄격한 영지에서 '3/4 노동자'로 불리우며, 16-20세 사이로는 잔디 깎기를 제외하고는, 정규직 노동자가 하는 모든 일을 맡는다. 거의 도움도 없는 8세 미만도 아니고, 14세가 되지 않은 어린이이다. 가축을 치거나, 제초를 한다거나, 쟁기질을 한다. 단지 식량과 의복을 위해 노동한다. 농기구 도입에 따라 전반적인 노동자의 노동 가격을 낮추고, 더 저렴한 여성과 청소년 노동으로 대체된다. 이주 노동 통계로는 남성 노동은 여성 노동으로 대체된다. 1890년 카홉카 동네와 헤르손 시에 등록된 총 노동자 수의 12.7%는 여성이었다. 1884년에는 주베르니아 전체에서 여성은 56,464명 가운데 10,239명으로, 18.2%였고, 1895년에는 48,753명 가운데 13,474명으로, 25.6%를 차지했다. 189310-14세 아동은 0.7%였고, 1895년에는 7-14세 아동은 1.69%였다.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에서, 엘리자베트그라드 지역 영지에서 일하는 지역 노동자 가운데 아동은 10.6%를 차지했다.

 

기계는 노동자, 노동 강도를 높인다. 수확기는 노보그레야카(Lobogreyka), 추보그레야카(Chubogreyka)라는 명칭을 얻었다. 기계를 사용하면 노동자는 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전달 장치를 대신한다. 탈곡기를 사용하면, 노동 강도가 높아진다. 기계를 사용하는 자본주의적인 방식은 노동일을 늘리기 때문이다. 야간 작업은 농업에서도 등장했다. '풍수해 지역'에서는 일부 영지와 많은 농촌 농장에서도 야간 작업이 이뤄진다. 인공 조명으로는 횃불이 사용한다. 기계의 체계적인 사용에 따라 농업 노동자들에게도 정신병(트라우마)를 초래한다. 젊은 여성과 아동을 기계에 고용해서 많은 부상을 일으킨다.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젬스트보 병원과 진료소에서는 농사철에 외상 환자로 가득찼으며, 농기계와 농기구로부터 무자비한 파괴 작업으로 인해 끊임없이 장애를 겪는 수 많은 농업 노동자들을 치료하는 야전 병원이었다. 농업 기계로 인한 부상을 다루는 특수한 의학 문헌도 출간됐다. 농업 기계 사용을 규제하자고 강제하는 규정을 도입하자는 제안도 나왔었다. 기계의 대량 생산으로부터 농업과 산업 모두에서 필연적으로 공동 통제와 생산 규제를 요구한다. 농업 기계 사용에 대한 인민주의자들의 극도로 모순된 태도로는 기계 사용과 발전적인 성격을 인정하고, 촉진시킬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옹호하면서도, 러시아 농업에서 기계는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부터 사용된다는 점을 무시한다는 건 소규모 및 대규모 농업인으로 전락한다는 걸 말한다. 그러나 인민주의자들은 농업 기계와 개량된 농기구 사용이 자본주의적인 성격을 무시하고, 어떤 농민 및 지주 농장에서 기계를 도입하는지조차 분석하지 않는다. V.VV.체르냐예프를 자본주의 기술의 대표자라고, '발전 추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계 사용이 자본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된 건, V. 체르나예프, 농업부의 다른 관리들 때문이다.

 

인민주의자는 사실에 기반하겠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농업에서 기계 사용 발전이 자본주의라는 점을 무시했었고, 교환으로부터 농업 노동 생산력을 감소시킨다고까지 말했었다. 분석도 업시 주장만 난무하는 이론을 비판하는 것도 불필요한 일이다. 인민주의자들의 추론에서는 한 국가의 노동 생산력이 두 배라면, 밀 한 체트버트(6부셸), 12루블이 아니라, 6루블에 구매해야 할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러시아에서 상품 경제가 있는 모든 사회에서 그렇듯이 기술 향상은 개별적인 농부들로부터 이뤄지고, 나머지는 점진적으로 따라갈 뿐이다. 러시아에서는 크고 작은 농촌 기업가들의 발전은 농민층 몰락과 농촌 무산층 형성과도 불가분하다. 따라서 농촌 기업가들의 농장에서 사용되는 개선된 기술이란 사회적으로 가격이 절반으로 떨어지는 조건 아래에서만 사회적으로 필요하며, 농업에서도 자본가들의 수중으로 넘어감을 말한다. 수백만 농민층에서 완전한 '무산화'를 말하고, 비농업 인구 증가와 공장 수 증가를 뜻한다. 러시아 농업에서 노동 생산력이 두 배로 증가하려면, 기계 제작 산업, 광업, 증기 운송, 새로운 유형에서 농장 건물, 상점, 창고, 운하 등이 대량으로 건설되어야만 한다. 인민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발전에서 필요한 단계를 곧바로 건너뛰고는, 수반되는 복잡한 사회적, 경제적인 변화들도 건너뛰었고, 자본주의의 위험만을 두고 통곡했을 뿐이며, 사소한 추론 오류를 반복했었다.

 

- 지난 2년 동안이나 곡물 가격 하락과 어떻게든 농업 일자리를 저렴하게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수확기가 널리 사용됐고, 창고에서는 수요를 제때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농업 위기는 자본주의적인 위기이다. 모든 자본주의 위기와 마찬가지로 농업 위기는 한 지역, 한 국가, 한 농업 분야에서 자본주의 농부와 농민을 파멸시키고, 다른 지역, 다른 국가, 다른 농업 분야에서 자본주의 발전에도 큰 자극을 준다. 인민주의자, 카블류코프(Kablukov) 등의 추론에서도 큰 오류는 현재 위기와 경제적인 본질의 근본적인 특징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V.V. 보론초프는 중농으로 인해 지주들 사이에서도 농업 노동 용역 제도가 크게 조건된다는 점을, 소유자로 말하자면, 자신의 농민 도구를 유지하는 비용을 공유했다. 사닌(Sanin)은 노동자가 지주를 위해 노동하는 게 아니라, 지주가 노동자를 위해 노동한다고 말했었다. 농민이 대량으로 거주하는 국가에서 농업 임금 노동자 수에 따른 절대적인 증가는 농촌 인구에서 상대적인 감소뿐만이 아니라, 절대적인 감소와도 양립한다.

 

- 포노마료프는 기계가 수확 가격을 조절해서, 노동자들을 훈련시킬 수 있다고 기대했었다. 앤드류 우레 박사도 기계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질서''규율'을 생산할 것이라 내다봤다. '자본주의 공장의 핀다로스', 러시아 농업 자본주의는 이미 농업 공장 뿐만이 아니라, 공장의 '핀다로스'를 만들었다.

 

농업에서 임금 노동

 

개혁 이후 경제로는 남유럽 및 동유럽 러시아 외곽 지역에서 두드러졌다. 농업 이주로 알려진 농업 임금 노동자에 따른 대규모 이동이었다. 따라서 러시아 농업 자본주의에서 주요한 지역과 자료를 검토해보자. 고용 일자리를 찾아나선 농민들은 오래된 문헌에도 기록됐다. 플레로프스키, 러시아 노동계급 상태(상트페테르부르크, 1869)를 출판했었으며, 많은 구베르니아 시에서 농민들의 상대적인 발생률을 파악하고자 했다. 차슬라브스키는 농부 외부 고용(1875)에서 실질적으로 언급했다. 라스포핀(Raspopin)1887년 젬스트보 통게를 모아 일반 농민 고용이 아닌, 농업에서 임금 노동 계급이 형성되는 과정으로 간주했었다. 1890년대에는 S.콜로렌코, 루드네프, 테자코프, 쿠드랴브체프, 샤호프스코 저작이 출판됐고, 훨씬 더 완전한 연구가 이뤄졌다. 농업 임금 노동자들이 이주하는 주요한 지역에서는 베사라비아, 헤르손, 타우리다, 예카테리노슬라프, , 사마라, 사라토프(남부), 오렌부르크 주이다. 유럽 러시아에 국한하지만, 이동은 멀리 퍼져 나갔으며, 북코카서스와 우랄 지역 등을 포괄한다. 상업적인 곡물 농업 지역에서 자본주의 농업에 대한 자료도 있었다.

 

농업 노동자들은 이주하는 다른 지역들도 언급할 수 있다. 농업 노동자들이 이주하는 주요 지역으로는 카잔, 심비르스크, 펜자, 탐보프, 랴잔, 툴라, 오렐, 쿠르스크, 보로네시, 하르키우, 폴타바, 체르니코프, 키예프, 포돌리야, 볼히니아 등 중앙 흑토 주였다. 따라서 노동자들으 이동은 인구가 매우 밀집된 지역에서 희박한 지역으로, 식민지로부터 진행됐다. 농노제가 매우 발달한 지역에서는 덜 발달한 지역으로, 노동 용역이 매우 발달한 지역에서 덜 발달하고,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지역으로 진행됐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반자유 노동에서 자유 노동이 있는 곳으로 이주하게 된다. 인구가 밀집한 지역에서는 인구가 희박한 지역으로 이동한다고 간주한다면 오류이다. 노동자 이동에 대한 연구는 노동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큰 수로 이주했기 때문에, 해당 지역에서는 일손 부족을 초래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이 도착하면서부터, 일손 부족 현상을 메우고 있다는 특이한 점도 밝혀냈다.

 

따라서 노동자 이탈 현상은 주어진 영토로부터 인구가 더 균등하게 퍼지는 경향을 나타낼 뿐만이 아니라, 노동자 조건을 더 나은 지역으로 이동하는 경향도 나타낸다. 따라서 노동 용역 영역을 시작점으로, 농업 노동자 임금은 특히 낮지만, '매력적인' 자본주의 영역에서 임금이 훨신 높다는 점도 분명해진다. 농업 이주 범위에 대한 통계에서 S.코롤렌코(S.Korolenko)는 유럽 러시아 전체 노동자 초과 현지 수요 대비 6,360,000명으로 계산했고, 15개 농업 이후 구베르니아 시에서 2,137,000명이 포함됐고, 8개 이주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노동자 가족은 2,173,000명으로 추산된다. 크렐렌코의 계산법도 만족스럽진 않지만, 대략적으로는 정확하다고 간주하며, 이주 노동자 수는 과장이 아니라, 과소평가했다. 남부로 오는 200만 명 노동자 가운데 일부는 비농업 노동자들이다. 그러나 샤호프스코는 산업 노동자가 수치 절반을 차지한다고 자의적으로 추정했었다. 해당 지역으로 이주하는 노동자들은 농업 노동자들이었고, 농업 노동자들은 구베르니아 시 뿐만이 아니라, 샤호프스코는 S.코렐렌코 게산을 뒷받침했다. 샤호프스코는 189111개 흑토 구베르니아 시에서 총 2,000,703장의 여권과 신분증을 발급했다. 반면에, S. 코렐렌코에 따르면, 구베르니아 시를 떠난 노동자 수는 1,745,913명에 불과했다. 따라서 S.코렐렌코 수치는 과장된 건 아니고, 러시아 농촌 이주 노동자 총 수는 200만 명이 분명 넘었다. 거주지와 토지를 버리는 대량 농민, 소규모 경작자는 농촌 무산층으로 전환되면서, 농업 자본주의로부터 임금 노동에 대한 큰 수요를 차지했다.

 

그렇다면 유럽 러시아에서 농촌 임금 노동자 총 수와 이주민, 거주민을 모두 포함할 때 얼마일까. 루드네브(Rudnev), 유럽 러시아 농민 산업에서는 유럽 러시아에서 19개 구베르니아 시에 있는 148 (위예즈드)에 대한 젬스트보 통계를 알 수 있었다. 산업가들은 총 5,129,863명으로, 노동 남성(18-60) 가운데 2,798,122명이었으며, 노동 농민 총 수에서 55%였다. 농업 산업에서 루드네브는 고용된 농업 노동자,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목축업자, 가축장 노동자의 노동만을 계산했다. 러시아에서는 많은 주와 지구에서 취업하려는 연령대의 남성 총 수에 대한 농업 노동자 비율을 추산해보면, 저자는 흑토 지대에서 모든 취업 남성에서 약 25%가 고용된 농업 노동에 종사하며, 비흑토 지대에서는 약 10%였다. 유럽 러시아 농업 노동자 수로는 3,395,000명으로, 대략 350만 명이었다. 해당 수치는 취업하려는 남성 총 수에서 약 20%였다. 루드네브는 일용직 노동과 농업 일자리는 통계학자들로부터, 해당 개인이나, 가족의 주된 직업일 때에만 산업 범주로 포함시켰다. 따라서 루드네프 수치는 최솟값이다. 젬스트보 인구 조사 결과는 1870, 1880년대 자료가 비슷했으며, 농업 노동자 비율을 산정할 때도 농업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했던 발트해 연안 및 서부 구베르니아 시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으며, 자료 부족으로 인해 350만 명이라는 수치를 사용했다. 농민의 약 1/5는 이미 주된 직업들이 부농과 지주를 위한 임금 노동에 도달했다. 여기서 농촌 무산층의 노동력을 요구하는 기업 진단을 볼 수 있다. 농민 하위 집단에서 약 절반을 고용하는 농촌 기업가들이다. 따라서 농촌 기업 계급 형성과 농민 하위 집단의 확장, 농촌 무산층 수 증가 사이에서 완전한 상호 의존도를 보게 된다. 농촌 기업가 가운데 농민 부르주아지는 두드러진 역할을 담당했다. 보로네시 구베르니아 시 9개 군에서는 농장 노동자 43.4%가 농민에게 고용됐었고, 비율로는 모든 농촌 노동자와 러시아 전체 기준으로, 농민 부르주아 계급은 약 150만 명이 농업 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보였다. 바로 농민들은 고용주를 찾아 수백만 명 노동자를 시장에다 내놓았으며, 임금 노동자에 대한 큰 수요를 보였다는 점이다.

 

러시아에서 임금 노동자 이동을 검토하면서, 많은 지역에서도 이주 성격과 방향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차슬라브스키는 당시에 노동자들이 도착한 지역에서 농노가 전체 4-15%를 차지했고, 노동자들이 떠난 지역에서는 40-60%를 차지했다. S.코롤렌코 수치에서는 테자코프, 쿠드랴브체프의 저서에서는 일자리를 찾고자, 철도를 최소한 부분적으로 이용하는 농업 노동자 수가 전체 노동자에서 약 1/10이었다. 두 수치를 합하면, 심문 받은 노동자 72,635명 가운데 7,827명만이 여정 일부라도 철도로 이동했다. 그러나 1891년에 조사된 보고서에서는 3대 주요한 철도 수송 노동자 수로는 샤코프스코이가 지적한대로, 170,000-189,000명으로 200,000명을 넘지는 않았다. 따라서 남부로 떠나는 노동자 총 수로는 약 200,000명을 넘지 않았었다. 철도로 이동하는 농업 노동자 비율이 매우 낮다는 말은, 인민주의자들이 철도 승객 수송이 농업 노동자 수송이라 가정할 때도 잘못된 견해였다. 인민주의자들에 따르면, 비농업 노동자가 더 높은 임금을 받았으며, 철도를 더 많이 이용했고, 건축업자, 인부, 하역 노동자 등과 같은 비농업 노동자들의 이주 시기는 봄과 여름이었다는 점이었다. 루드네프도 산업에서는 농민이 자가 경작, 매입 또는 임대 토지 경작을 제외한 모든 직업에서도, 산업가 대다수는 농업과 산업 임금 노동자들이었다. 해당 수치로는 농촌 무산층 추정치와 비슷했는데, 농촌 무산층 농민은 약 40%였고, 산업가는 55%를 구성했으며, 40% 이상이 모든 종류로 고용 노동에 조상했었다. 따라서 고용된 농업 노동만이 주된 직업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농장과 동등한 일반 농민은 해당 수치에 포함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농업에서 고용 노동

 

대규모로 남부로 오는 농업 노동자들은 농민들 가운데에서도 매우 가난하다.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로 오는 노동자들 가운데 10명 중 7명은 기차표를 구매할 돈이 없어, 도보로 이동한다철도 선로와 강둑을 따라 수백, 수천 베르스트를 걷는다고 테자코프는 보고했었따. 평균적으로 노동자들은 약 2루블을 가지고 갔다. 여권을 구매할 돈도 없어 10코펙으로 월별 신분증을 받는다. 여행은 10-12일이 걸리며, 발이 부어올라 굳어진다거나, 멍이 든다. 노동자의 약 1/1050-80명을 태울 수 있는 거친 판자로 만든 대형 보트를 타고 떠난다. '공식적인' 즈베긴체프 위원회 보고서에서는 이런 여행이 매우 위험하다고 보고했다. 과밀한 두비로부터 승객과 바닥으로 떠내려가는 일도 1년도 채 되지 않게 잦았으며, 압도적으로 다수 노동자는 배정을 받더라도, 규모 면에서 미미한 수준이었다. 특히 테자코프는 수천 명의 농업 노동자는 모두 토지가 없는 마을 무산층이며, 외부 고용이 유일한 생계 수단이다. 토지가 없는 상태에서 급속하게 확대되며, 농촌 무산층 대열이 떠오르고 있다. 신입 노동자, 신규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의 수가 급속도록 늘어나고 있따. 신입 농업인도 30%에 달했다. 덧붙여, 정규직 농업 노동자 집단을 형성하는 과정도 매우 빨랐다.

 

노동자 대량 이주는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에 따른 특수한 고용 형태가 생겨났다. 남부와 남동부 지역에서는 수천 명의 노동자와 고용주가 모이는 수 많은 노동 시장들이 생겨났다. 시장에서는 도시, 산업 중심지, 무역 마을, 박람회에서 개최됐다. 중심에서 산업적 특성으로는 비농업 일자리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노동자들에게는 매력적이었다. 키이우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슈폴라의 사탕무 산업(스멜라), 벨라야 체르코프 시에서 노동 시장이 열렸다.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일요일에만 9,000명 이상의 노동자가 모이는 노보우크라민카, 비르즐라, 모스토보예 등 여러 산업 마을과 즈나멘카, 돌린스카야 등 기차역, 엘리자베트그리드, 보브리네츠, 보즈네센스크, 오데사 등 도시에서 노동 시장이 열렸다. 여름에는 오데사에서 온 마을 사람들, 노동자, 부랑자(카데트)도 농업을 위해 고용됐다. 오데사에서는 농촌 노동자들이 세레딘스카야 광장(모어 시장)에서 고용됐다. 노동자들은 다른 시장을 피해 오데사로 와서 더 나은 수입을 얻고자 했다. 크리보이 로그 마을 동네(타운십)에서는 농업과 광업에서 노동자를 고용하는 중심지였다. 타우리다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카호브카 마을 동네는 특히 노동 시장으로 유명했으며, 예전에는 4만 명의 노동자가 모여들었다. 1890년대에는 2만 명-3만 명이 모였으며, 특정 자료에 따르면, 수가 훨씬 줄어들었다. 베사라비아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아케르만 마을을 언급할 수 있었다. 예카테리노슬라프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예카테리노슬라프 마을과 고조바야 역, 로스토프, 온 돈에서, 돈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매년 최대 15만 명의 노동자가 찾는 곳이었다. 북코카서스에서는 예카테리노다르 시와 노보로시스크 마을, 티호레츠카야, 발라코보 마을 등이 있었다. 사라토프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흐발린스크, 볼스크 마을, 심비르스크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시즈란 마을이 있었다. 자본주의는 외곽 지역에서도 농업과 산업을 결합시켰으며, 농업 및 비농업 고용 노동을 결합시켰다. 자본주의에 따른 최종적이고, 매우 높은 단계인 대규모 기계 산업 시기에만 폭 넓게 수작업 기술을 약화시켰으며, 한 직업에서 다른 직업 전환을 용이하게끔 만들어서, 고용 형태를 평준화시켰다. 실제로 해당 지역에서는 고용 형태가 매우 독특하고, 자본주의에 따른 농업 특징을 잘 보여줬다. 중부 흑토 지대에서는 반가부장적, 반구속적 고용 노동 형태가 모두 사라졌다. 고용자와 고용인 사이의 관계만이 유일하게 남았다. 곧 노동력을 사고파는 상업적인 거래만이 유일하게 남았다. 곧 노동력을 사고파는 상업적인 거래뿐이다. 언제나 저개발 된 자본주의적인 관계에 따라 노동자들은 일당, 주당 고용을 선호했으며, 임금을 노동 수요에 정확하게 맞췄다. 40베르스트 반경 내에서 각 시장 지역의 가격은 수학적인 정밀도로 고정됐으며, 고용주가 가격을 낮추기란 어려웠다.

 

시장에서 나온 농민들은 더 낮은 임금으로 일하기보다는 그저 뒹굴거나, 다른 곳으로 가기를 선호했다. 노동에 대한 가격 변동으로 인해 수 많은 계약 위반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고용주가 '일반적으로' 주장하는대로 한 쪽만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서 발생했다. 양 쪽은 일치된 조치를 취했으며, 노동자들은 서로 더 많은 걸 요구하기로 합의하고는, 고용주들은 더 적게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계급 간 관계에서는 '무정한' 현금 지불이 공공연하게 지배되고 있었고, 비교적 경험이 풍부했던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이 식량 재고를 다 먹어 치우고 나서야 '굴복'한다는 걸 알았다. 한 농부는 시장에서 일꾼들을 고용하러 가면, 일꾼들 사이를 걸으며, 막대기로 일꾼들의 배낭을 찔러댔다고 한다. 빵이 남으면, 그들에게 말조차 걸지 않았으며, 시장을 떠나 시장 배낭이 빌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저개발 자본주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노동자는 소규모 자본으로부터 억압받았다. 대규모 고용주는 순전히 상업적인 고려 사항 때문에 사소한 억압을 삼갔으며, 이익은 거의 없었고,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상당한 손실을 초래했다. 300-8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대규모 고용주들은 주말에도 노동자들이 퇴근하지 못하도록 노동 수요에 따라 가격을 책정했다. 일부 해당 지역에서는 노동 가격이 오르면, 임금 인상 제도를 채택했다. 모든 증거로는 임금 인상이 더 나은 작업과 분쟁 부재로 충분히 보상됐다. 반대로 소규모 고용주는 무엇도 고수하지 않았다. 농장주들과 독일 식민지 개척자들은 노동자들을 신중하게 선택하고는 15-20%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하지만, 착취하는 일의 양은 50%가 더 많았다. 그러한 고용주를 위해 노동하는 '신입'들은 낮밤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 제초기를 고용하는 식민지 개척자들은 자신들의 자녀들까지도 노동자들의 속도를 더욱 높이고자, 교대로 따라오게 시킨다. 그래서 하루에도 세 번씩이나 속도를 높이는 사람들은 노동자를 이끄는 힘을 얻게된다. 당시에 독일 식민지 개척자들을 위해 노동하는 사람들은 초췌한 외모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농장주들과 독일인들은 이전에 지주들의 영지에서 노동했던 사람들을 고용하지 않았다. "너희는 우리와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대규모 기계 산업은 대량 노동자를 집중시키고, 생산 방식을 변형시켜, 계급 관계를 은폐한다. 모든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인 가면의 장막을 파괴시키고, 대중들의 관심을 분산시킨 관계에 집중시키고는 공적인 통제와 규제를 시도한다. 특히 공장 감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러시아 자본주의 농업, 특히 자본주의 농업이 매우 발달한 지역에서도 보였다. 노동자 위생 환경 문제로는 1875년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에서 열린 제2차 헤르손 젬스트보 의사회, 구베르니아 시 대회에서도 제기됐다. 이후로는 1888년에 다시 논의됐다. 1889년에는 노동자 위생 환경 연구 계획이 수립됐다. 1889-1890년 사이에 적절하지는 않은 규모로 실시된 위생 환경 조사에서는 외딴 마을에서 노동 환경을 은폐시켰다는 점을 조금은 벗겨냈다. 대부분 노동자들은 거주할 공간이 없더라도, 막사가 제공되더라도, 당시에도 위생적인 측면은 매우 형편 없었다. 움막들도 매우 많았으며, 습기, 과밀, 추위, 어둠, 숨 막히는 분위기로부터 괴로워하는 양치기들도 거주했다. 제공되는 음식들도 불만족스러웠다. 노동 시간은 12시간 30-15시간으로, 대규모 산업에서 11-12시간보다 훨씬 더 길었다. 여름에는 하루 중 매우 더운 시간대 휴식은 '예외적'이었고, 뇌 질환 사례도 빈번했다. 기계 작업은 직업적인 분업과 ''을 통(드럼)에 넣는 노동자와 그것을 들어올리는 노동자들도 있었으며, 위험한 일을 한 두 시간마다 교대하는 노동을 한다거나, 여성들도 짚을 실어 모으거나, 소년들은 짚을 치웠고, 3-5명 일꾼들은 짚을 바구니(곤돌라)에다 쌓아뒀다. 구베르니아 시 전체로는 탈곡에 종사하는 사람 수가 20만 명이 넘었다. 테자코프는 농업 작업에서 위생 조건에 대해 농부 노동이 즐겁고, 건강한 직업이라는 고대인식의 의견으로, 자본주의가 농업을 지배하던 시대에도 타당하지 않았으며, 농업에 기계가 도입되면서부터, 농업 노동에 따른 위생 조건은 개선되지도 않았고, 더욱 악화됐다. 기계는 이전에 알려지지 않던 노동 전문화를 농업 분야에서도 도입해서, 농촌 인구 사이에서 직업병과 수 많은 심각한 부상들을 초래했다. 기근과 쥐통(콜레라)과 같은 위생 조건에 대한 조사에 따라 노동자들을 등록하거나, 위생 감독을 받으며, 저렴한 저녁 식사를 제공하는 의료 및 식량 창고를 조직하려는 시도들도 있었다.

 

조직 규모가 아무리 미미하고, 위태롭더라도, 농업에 자본주의 추세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도 있었다.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 의사 대회에서는 실무자들이 수집한 통계를 기반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제안됐다. 의료 및 식량 창고의 중요성과 위생 조건을 개선하고, 활동을 확대하여, 노동 가격과 가격 변동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는 노동 교환소 특성을 부여했다. 상당한 노동자를 고용하는 모든 대규모 농장에서는 위생 검사를 확대했다. 산업 시설과 마찬가지로, 농업 기계 사용과 사고 등록을 규제하는 엄격한 규정을 발행했다. 노동자들의 보상 권리와 더 질 좋고 저렴한 증기 운송 수단 제공 문제를 제기하고자, 5차 러시아 의사회에서는 젬스트모, 헤르손 젬스토보 의료 및 위생 조직 활동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은 노동 용역을 이상화했었고, 자본주의 발전은 외면했었다. 인민주의자들은 노동자 이주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가졌으며, 지역 고용을 더 선호했다. 그렇다면 인민주의자 관점에서는 어떻게 기록됐을까. 그리고 농민들은 일자리를 찾아떠났지만,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과연 유익했을까. 각 농민 개인에게 유익했던 게 아니라, 국가 경제적으로 농민 전체에게는 얼마나 유익했을까. 순전히 관념적인 체류가 가지고 있던 경제적인 불리함 때문에, 일자리는 겉보기에 충분해 보였다. 인민주의자들의 이론과 별개로 노동자들의 '체류'란 노동자들에게 경제적인 이점만이 아니라, '발전'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내세웠다. 그러나 대중 관심을 모으려면 외부 일자리를 가까운 지역의 직업으로 대체하기 보다는, 이주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거나, 이주를 모든 면에서 간편하게 하고는, 노동자들의 이동에도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개선한다거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도록 집중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보다 '순수한 경제적 이점''순수한 경제적인 방식'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구직자들은 임금이 더 높거나, 더 유리한 곳으로 이동한다. 더 높은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국가 경제적인 관점을 지닌 사람들은 정작 다음과 같은 주장을 너무나 자주 잊었었다. 이와 같은 '체류'는 구속된 고용 형태와 노동 용역을 파괴시킨다. 예전에는 이주가 거의 발달하지 않았을 때, 남부지에서는 노동자 고용 제도를 쉽게 이용했었다. 북부 지방에다 농촌 관리들로부터 대리인을 파견했거나, 세금 체납자들을 북부 지방 대리인들에게 매우 불리한 조건으로 고용했다. 따라서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자유 경쟁에 따른 이점을 누렸었지만, 일자리를 구하려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었다. 농민들은 노동과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광산으로 피신할 사례들도 있었다. 따라서 '체류'에 따라 농업인들은 인민주의자들과 손을 맞잡았다.

 

S. 코롤렌코는 노동자 이주에 반대하던 지주들의 의견만을 인용하고는, 외부 고용에 반대하는 숱한 주장들만 제시했을 뿐이었다.'방탕하고', '무절제하며', '취기어린', '부정직하며', '가족을 떠난 부모의 감독을 피하려는 노력'과 같이 '즐겁고, 밝은 삶에 대한 갈망'만이 남아버렸다. 러시아 속담에서는 '한 곳에 머무른 돌에는 이끼가 쌓이지만, 한 곳에 머무르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재산을 축적하고, 이를 소중히 여긴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한 곳에 얽매여 오랫동안 거주한 사람에게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매우 현저하게 보여준다. S.코롤렌코는 특정 구베르니아 시를 떠나는 너무 많은 노동자들이 있었으며, 발생하는 노동자 부족 현상은 다른 구베르니아 시에서 온 노동자들의 유입 때문에 메워진다는 현상에 특히 불만만 품어댔다.

 

보로네시 구베르니아 시에 대해 S.코롤렌코는 많은 수의 농민들도 증여 토지 할당을 소유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비교적 물질적으로 열악하거나, 너무나 빈약한 재산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그러한 농민들은 맡은 의무마저 이행하지도 않거나, 자택에서 많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때조차도 다른 구베르니아 시로 더 쉽게 떠난다. 이와 같은 농민들은 부족한 할당에 대한 애착도 없고, 농기구조차 없어서, 더 쉽게 집을 버리고, 고향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재산을 찾는다. 지역 일자리에 대해 걱정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강제할 수 있는 게 무엇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류'(Peregrination)와 가까운 지역적인 직업적 선호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야만 한다. '체류'는 인구 이동성을 창출한다. 체류에 따른 농민들이 모아진 '이끼'를 막을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자, 역사적으로도 농민들에게는 이미 충분히 많은 이끼가 씌워져 있었따. 인구가 이동하지 않고는 발전할 수 없다거나, 마을 학교가 남북부 농업과 산업, 수도와 오지라는 서로 다른 관계와 질서에 대한 독립적인 지식으로부터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다는 건 지극히 '순진한' 생각이다. 체류 비용은 재산, 가재 도구 판매, 토지 저당, 물건이나 의류를 맡기거나, 사제, 지주, 지역 쿨라크 등에게 노동으로 갚을 돈을 빌릴 방법으로 조달된다. 샤호프스코이는 농업 노동/비농업 노동 형태에 대해 언급했었다. 수천 척 뗏목이 드네프르 강을 따라 하류 마을로 떠내려갔다. 각 뗏목에는 15-20명 정도 뗏목꾼 노동자들이 타고 있었다. 대부분은 오렐 구베르니아 출신 벨라루스인과 대러시아인이었다. 항해 기간 동안에 무엇도 얻지는 못한다. 주로 추수와 탈곡에 종사하는 데 기대를 건다. 풍년이 들 때만 결실을 맺는 기대였다. 농장 직원 보고에 따르면, 풍년 수확철에는 일꾼들이 노동력에 대한 가격을 제시하더라도, '내가 요구하는 대로 하라.'라는 말만 반복한다. 자신들의 수확철에는 높은 노동력에 따른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작물이 나쁘고, 노동 가격이 떨어지면, 쿨라크 고용주는 계약이 만료되기 전에, 노동자를 해고하고, 노동자는 같은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는다거나, 시골을 떠돌아 다니며, 계절감을 잃어간다.

 

쿠반 지방에서 '카자크'도 동일하다. 카자크는 개인적으로든, 공동체로든, 노동 가격을 강제로 낮추고자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쿠반 지방, 이주 노동자들은 식량을 줄이고, 작업 할당량을 늘리고,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자 여권을 보관하고, 특정 농부가 노동자를 고용하기를 금지하는 공개 결의안을 채태가고, 벌금이나 특정 비율 이상으로 고용하는 등이다. 탈곡은 대부분 고용된 노동자들로부터 이뤄지게 되며, 러시아 전역에서도 탈곡 작업에 투입된 노동자들 수가 많다. 테자코프는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에서 6개 지방자치 단체 의회 가운데 4개는 노동자 감독 조직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혔으며, 4군데에서는 해당 제도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혔었다. 지역 지주들은 지방자치 단체 이사회가 노동자들을 완전하게 게으른 사람으로 만든다고 비난했다.

 

마을 공동체와 농민을 유리한 조건으로 고용하고자, 서기와 마을 원로들에게 지불할 인두세, 수수료 목록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인민주의자들의 편견은 테자코프에서는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에서 타우리다 구베르니아 시로 많은 지역 노동자들이 이주해왔었지만, 이전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심각한 노동력 부족이 있었다. 고용주들에게도 고향 일자리를 버리고, 타우리다에서 일자리를 찾는 위험을 감수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자신들에게 무엇이 유익한지를 몰랐기 때문일까, 매우 유익한 고용 조건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이 없었기 때문일까. 타우리라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농업 노동자 임금이 헤르손 구베르니아 시보다 높았으며, 농민이 등록되어, 할당 받은 곳에서 일하고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지벤세브(Zveginstev) 위원회에서는 1894년 내무부 젬스트보 부서 후원이 설립되어, 마을 외부 고용으로부터 질서를 도입했으며, 농업 노동자 이동을 규제하기 위한 조치를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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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젬스트보 통계 및 군마 인구 조사 결과

 


농민들의 상·하층 관계는 농촌 부르주아와 농촌 프롤레타리아와 관계된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많은 지역과 많은 조건을 가진 지역에서도 비슷하다. 심지어 전체 작물 재배 면적에 따른 해당 농민층엣도 차지하는 비율, 가축 수 등과 같은 수치들조차도 비교적 작은 범위 내에서 변동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많은 지역에서 농민층 간 관계 통계를 사용해서, 전반적으로, 당시에 러시아 농민층들이 어떻게 나뉘었는지를 얼마나 파악하거나, 활용할 수 있을까. 또한 어떤 결과로부터, 전체 러시아 농민층에서 상층과 하층 구성과 상호 관계를 판단하는가. 당시에 러시아에서는 전국에서 모든 작물 재배 농장을 등록하는 농업 인구 조사를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고가 거의 없었다. 농민들이 어떤 경제 집단으로부터 나뉘었는지를 판단하는 유일한 자료가, 젬스트보 통계와 군마 인구 조사 보고였다. 보고서에서는 농가 내 짐을 나르던 가축 분포도를 볼 수 있다. 물론 매우 부족한 자료로부터, 대략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는 없었다. 특히 가축을 많이 소유한 농민과 적게 소유한 농민 간 비율은 이미 분석됐고, 많은 지역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블라고베셴스키, 잼스트보 주택 별 인구 조사 경제 수익(1893)에 따르면, 젬스트보 인구 조사는 22개 구베르니아에서, 12개 군 단위 지역(위예즈드)를 대상으로 삼아, 2,983,733가구 농민과 남녀 인구를 합친 17,996,317명의 인구를 기록했다. 그러나 가계 분포도에 따른 자료만으로는 모든 구베르니아에서 동일하지는 않았으므로, 3개 구베르니아에서, 4개 집단 가구가 아닌, 3개 집단으로 분류된 11개 군을 제외해야만 했었다. 따라서 21개 시(구베르니아)로부터, 나머지 112개 군에 대한 인구 1,500만명, 250만 가구를 포함한 통합 수치를 얻을 수 있었다.

 

해당 자료만으로는 유럽 러시아에서 총 농민 가구 수에 따른 1/4보다도 적은 양을 포괄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 각료 위원회 총리실에서 발행했었떤, 유럽 러시아 농촌 인구에서 경제적 지위에 대한 종합 통계 자료(1894)는 유럽, 러시아에서만 50개 구베르니아에서, 11,223,962가구가 볼로스트 구역에 있었고, 10,589,967가구는 농민 가구였다. 러시아 전체 통계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실시했었던 러시아 제국 통계, 1888년 군마 인구 조사(1891)1891, 군마 인구 조사(1894)가 있다. 두 보고서에서는 농민 사이에서 가축 분포도 가운데, 말에 대한 통계를 보유했다. 러시아 제국 통계, 1888, 군마 인구 조사에서는 1888년에 수집된 41개 구베르니아 시에서, 당시에 폴란드 왕국이었던, 10개 구베르니아를 합해서, 통계 분석을 실시했었으며, 러시아 제국 통계, 1891년 군마 인구 조사에서는 유럽 러시아에서 18개 구베르니아 시, 코카서스, 칼미크 대초원, 돈 군사 지역에 대한 통계 분석을 포함했다. 유럽 러시아에서는 49개 구베르니아를 골라내더라도, 돈 지역 통계는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1888, 1891년 통계를 결합했을 때, 마을 공동체에서 농민들이 소유한 가축 총 수에 따른 분포도를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전역에서 농민들 사이에서 마차마 분포도로는 평균 분화 정도에 해당한다. 실제로는 분열이 훨씬 심각했었다. 전체 가구 1,020만 가구 가운데 220만 가구에 해당한 22%1,700만 마리의 가축 가운데에서도 950만 마리, 그러니까 전체 가축 수에서 56.3%를 소유했었다. 정작 280만 가구라는 엄청난 규모 면에서는 가축을 소유하고 있지도 않았으며, 290만 가구에서는 전체 가구 수의 17.2%만을 소유했었다. 따라서 확립된 집단 간 관계에서도 규칙을 바탕으로, 자료를 파악했다. 가구에서 1/5은 전체 가축 가운데에서도 절반을 소유했었다면, 전체 농업 농민 생산량으로는 절반 이상이 농촌 부르주아지들의 수중에 있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었다. 생산 집중도에 따른, 부농들은 매입 토지, 농민들의 임대 토지(할당, 비할당 토지 모두 포함했을 때), 그리고 지역 마을 공동체에 따른 부농의 형성 과정을 고려해봤을 때, 대부분을 수중에 쥐고 있었다.

 

토지 매매에서는 특히 부유한 소수 집단에게는 할당 토지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하물며 매우 '좋은' 시기에도, '평균적인' 농민들은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평균보다 상당히 나은 형편에서 부유한 소수 집단은 자영농업으로 모든 지출들을 충당시킬 수 있었으며, 더군다나 초과분에 따른 '잉여금'을 회득했다. 그리고 상품 생산자가 되어, 판매를 위해 농산물 재배에 더욱 종사했다. 더 나아가, 비교적 대규모로 형성된 농작물 농장, 상업 및 산업() 기업들을 결합시켜서, 농촌 사회에서도 충분히 부르주아지들로 변모해갔다. 따라서 여기서 산업이란 당시 러시아에서도, 제아무리 진취적인 농민들일지라도, 전형적일 수밖에는 없었다. 설령 가족 규모가 매우 크거나, 많은 가족 노동자들을 보유했으므로, 당시로는 부농들의 특징이었고, 전체 가구에서 1/5은 인구의 큰 비중으로 둘 때도 대략 3/10을 차지했다. 그러므로 부유한 소수는 정규직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를 더 많이 고용할 수밖에는 없었다. 왜냐하면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는 러시아 농촌 사회에서도 총 수 대비 가운데 상당 수가 부유한 소수들로부터 농장이기 때문이다. 앞선 분석에서도, 부유한 소수들로부터 대표하는 인구 비율, 농업 전반에서도, 일어난 총 역축(사역 가축) 가구 수, 경작 면적에 따라 차지하는 비율을 비교할 때만 결론이 도출된다. 부유한 소수 집단들은 또한 농업 농민에서 발전 추세에서도 꾸준하게 참가해서 관여하고, 개입할 수 있었다. 소수 집단들에 따른, 나머지 농민 간 관계 면에서도 농업 조건, 제도 체계, 상업적인 농업이라는 형태의 차이에 따라서도, 다른 형태와 방식이 나타났다. 농민층 분화 요인에서 주요한 추세는 하나였고, 지역적인 조건에 따라서는 형태가 또 다르게 변형되거나, 변경될 수 밖에는 없었다.

 

무마 농민, 일마 농민의 상태는 정반대였다. 앞서 젬스트보 통계학자들은 계산을 산정했을 때, 농촌 무산층 범주도 포함시켰었다. 따라서 대략적인 계산마저, 농촌 무산층 비율 범주에 속했었던 모든 무마 농민과 일마 농민의 최대 전체 가구로 보자면, 약 절반 가량, 3/4을 과장해서 포함시켰다. 토지 할당으로는 매우 열악한 농민일수록, 농기구, 종자 등 물자가 부족해서,

가끔 자신들의 토지를 임대했기 때문이다. 농민이 임대한다거나, 매입한 토지 가운데 정작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는 척박했다. 왜냐하면 농장에서 생계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을만큼의 수확량을 내지도 못했으며, 하물며 주요한 생계 수단들이 기껏해야 노동력 판매에 따른 '산업 고용'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토지 할당제로부터 부여 받았었던, 모든 임금 노동자,

정규직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비숙련 노동자, 건설 노동자 등이 이뤄졌다.

 

- 사라토프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5개 지역으로, 사마라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5, 베사라비아 구베르니아에서는 1개였다.

 

- 농민들 사이에서는 가축 분포는 <러시아 제국 통계, 1893-1894>에서도 판단할 수 있었다. 1893-1894, 유럽 러시아에서는 39개 구베르니아 시에서 8,288,987가구가 있었고, 이 가운데 무마 가구로는 2,641,754가구로 31.9%였다. 일마 가구는 31.4%, 이마 가구는 20.2%, 삼마 가구는 8.7%, 사마 가구는 7.8%였다. 농민들이 소유한 말은 총 11,560,358가구였으며, 그 가운데 22.5%가 일마 농민이었으며, 28.9%는 이마 농민들이었다. 삼마 농민들은 18.8%였으며, 다마 농민들은 29.8%였다. 따라서 농민들의 16.5%는 곧 부유층에서 전체 말로 볼 때, 48.6%를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낙농업 지역에서는 말의 수가 아니라, 소의 수에 따라 분류하는 게 훨씬 더 정확했다. 시장형 농경이 우세한 곳에서는 두 지표 모두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군마 인구 조사에 따름녀, 동원 시 군 복무에 적합한 가축 수를 등록을 차르 러시아에서는 6년마다 실시했었다.

 

첫 번째 인구 조사로는 1876, 러시아 서부에서 33개 구베르니아 시를 대상으로 실시했었다. 두 번째 인구 조사는 1882년에 실시했으며, 유럽 러시아 전체를 대상으로, <1882년 말 인구 조사>(1884)로 출판됐다. 1888년에는 41개 구베르니아 시를 대상으로 인구 조사를 실시했었으며, 1891년에는 나머지 18개 구베르니아 시와 코커서스 구역를 대상으로 인구 조사를 실시했었다. 수집된 통계는 중앙 통계 위원회에서 수행했었고, 초록으로도 출판됐다.

 

<러시아 제국 통계, 1888년 군마 인구 조사>(상트페테르부르크, 1894), <러시아 제국 통계, 1891년 군마 인구 조사>(상트페테르부르크, 1894), 다음 인구 조사로는 1893-1894년 사이에 실시했었으며, 유럽 러시아에서는 38개 구베르니아를 대상으로, <러시아 제국 통계>로 출판됐다. <1893-1894년 군마 인구 조사>(상트페테르부르크, 1896)<1899-1901년 군마 인구 조사> 자료로는, 유럽 러시아에서 43개 구베르니아, 1개 코카서스 구역, 구베르니아 시, 특히 아스트라한 구베르니아에서 칼미크 초원을 대상으로 실시했었다. 군마 인구 조사는 모든 농촌을 포괄한 조사였으며, 농민층 분화 과정에서도, 인구 조사 자료로 검토해서 활용했다.

 

2-2-1. 1888-1891, 1896-1900년 군마 인구 조사 비교

 

5개 남부 구베르니아(1896)과 나머지 43개 구베르니아(1899-1900)을 결합했을 때, 유럽 러시아에서는 49개 구베르니아에 대한 통계를 얻을 수 있다. 1888-1891년까지는 49개의 구베르니아에 대한 통계를 인용했다. 그러나 구베르니아 시 하나만으로는 부족했다. 1888-1891년까지 동일한 48개 구베르니아를 얻을 수 있었다. 1888-1891년과, 1896-1900년을 비교해봤을 때, 농민들에 대한 수탈은 심화됐다. 가구 수도 거의 백만 가구나 증가했었다. 가축 수는 비록 미미했었지만 감소했다. 가축이 없던 가구 수로는 특히 빠르게 증가하면서 비율로는 27.3%-29.2%로 상승했다. 빈농들은 560만 가구에서 660만 가구로 늘어났다. 가구 수 증가는 모두 빈농 수를 늘리는 데 사용됐다. 가축을 많이 소유한 가구 비율은 감소했었다. 가축을 많이 소유한 가구는 220만 가구에서 200만 가구로 줄어들었다. 중산층과 부유층 가구에서는 거의 변동이 없었다. 1888-1891년 사이에는 4,465,000가구, 1896-1900년에는 4,508,000가구였다. 따라서 농민 빈곤과 수탈은 심화됐다.

 

농민 상층과 하층 관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가구에서 50%를 차지하는 하층 가구에서 20%를 차지하는 상층을 이뤘을 때, 1888-1891년 가구에서 50%를 차지하는 빈곤층은 가축의 13.7%를 소유했다. 가구에서 20%를 차지하는 부유층은 가축의 56.2%를 소유했다. 1896-1900년에는 가구 50%를 차지하는 빈곤층은 농민 소유 가축에서 13.7%를 소유했었지만, 가구에서 20%를 차지하는 부유층은 가구에서 53.2%를 소유했었다. 따라서 두 층 간의 관계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농민 전체로는 가축 사육이 더욱 어려워졌다. 여러 가축들을 키우는 가구 수와 비율들도 모두 감소했었다. 유럽 러시아에서는 전반적으로, 소농들이 쇠퇴했따. 러시아에서는 농업에 종사하는 가축 수가 경작 면적에 비하면,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비록 소규모 농민 국가에서는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가축 수 감소가 어느 정도인지는 농민 부유층 계급 사이에서, 짐승 가축 수와 경작지 면적 사이에서 '정상적인 비율''회복', V.V. 보론초프는 진단했었다. 비힐라예프, 러시아 농업 현실 묘사(스케치), 농부(Khozyain)지와 체르넨코프, 농업 농민 특성화도 참조해보자. 그들 모두 농민들 사이에서 가축 분포에 대한 수치가 많다는 점에 매료된 나머지, 경제적 분석을 통계적인 작업으로 바꿔놨다. 또한 농민 농장 유형에서 일용직 노동자, 중농, 기업가 등을 연구하는 대신에, 산술적 열정만으로 수치 열만 셀 줄 아는 초보자와 같이 연구했다. 특히 체르넨코프는 오로지 그런 수치 조작 덕분에 차별화에 대해 어떤 낡지 않고, 새로운 현상으로 보았으며, 완전히 자본주의적인 현상으로 해석하는 편견이 있다고 반박했었다. 그러나 체르넨코프는 경제학을 잊었으며, 그저 통계로부터 결론을 도출했었고, 가축 수 분포가 단순한 변화만을 증명한다고 지적했었지만, 정작 농민층 분화 요인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토지 임대, 토지 매수, 기계, 외부 고용, 상업 농업의 성장, 임금 노동 등 전체적인 그림을 살펴볼 줄 알아아만 하지만, 체르넨코프는 이마저도 낡지 않고 그저 새롭다고만 한다거나, 자본주의적인 현상도 아니라고 오히려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2-2-2. 농민 예산에 관한 젬스트보 통계

 

젬랸스크, 자돈스크, 코로토야크, 니즈네데비츠 지역를 대상으로 한 1889, 보로네시, 농민 토지 소유권에 대한 평가 수익에는 전형적인 농장 구성 및 예산 통계 유형이 있었다.


67개 예산 가운데에서, 14번 코로토야크 지역을 제외하고는 가축 별 6개 집단으로 나눌 수 있었다.

 

a: 무마농

b: 일마농

c: 이마농

d: 삼마농

e: 사마농

f: 오마농 이상

 

그러나 이와 같은 분류로는 해당 지역에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상하층 모두 경제에서 산업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고려해봤을 때, 예산 통계를 검토하는 호별 인구 통계 조사와 비교하고분류했기 때문이었다. 비교하자면, 농민 집단으로 나눌 수 있었지만, '일반적이고', '전체적인' 평균은 순전히 '허구'였다. 여기서 평균 예산 수치는 늘 평균 이상의 유형 농장을 특징지었다예산으로는 최소 한도 내에서 균형 잡힌 농장들만 전제로 삼았었다. 이전 농장들은 빈곤층에서도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가금류를 기준으로, 가구 예산 및 기타 통계를 분류하고, 비교해봤을 때, 예산 수치로는 먼저 각 농민 집단에서 평균값을 구해야만 했다. (A)에서는 일반 예산, (B) 작물 재배, (C) 생활 수준으로, 세 가지 항목이었따. 지출과 수입 규모 면에서는 많은 집단에서 예산 규모가 매우 다를 수밖에는 없었다. 극단적인 집단을 제외하더라도, (E)의 예산은 (B)보다 5배가 넘었지만, (E)에서 가족 규모는 (B)보다 3배 미만이었다.

 

지출 분포도에서는 각 집단에 따른 총 지출과 비교한 농장 지출로는 무산층과 지주 모두 있었다. a 집단에서 농장 지출은 14%에 불과했었지만, f집단에서는 61%였다. 농장 지출에서 절대 수치도 마찬가지였다. 지출 면에서는 무마 농민뿐만이 아니라, 한 마리 가축을 모는 농민에게도 해당했으며, 한 마리 가축을 모는 농민들은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일반적인' 유형이었으며, 농장 노동자와 일용직 노동자에 더 가까웠다. 식량에 대한 지출 비율 면에서는 a 집단보다 두 배 정도로,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높은 비율로 낮은 생활 수준이 드러났으며, 지주, 노동자 예산을 극명하게 구분했다. 소득 항목에서 지출에 따른 상업 소득은 두 극단 집단인 무마농, 농촌 기업가로 인해 농업 총소득을 초과했다. 최하층 농민 집단에서 개인 산업이란 주로 고용 노동이었으며, 토지 임대 소득은 잡소득에 해당하는 항목이었다. 자영농 집단에서는 토지 임대 소득이 농업 총소득보다 미미한 수준의 사람들을 포함했다.

 

무마농은 농업 총소득이 당시로는 61.9루블이었으며, 토지 임대 소득은 40루블이었다. 다른 무마농에게도 농업 총소득은 31.9루블이었으며, 토지 임대 소득은 40루블이었다. 토지 임대 소득, 농장 노동 소득은 농민들에게는 개인적인 필요만을 충족시켰다. 농업 총소득에서 농장 운영에 대한 지출을 공제해야만 했다. 추론으로 미뤄봤을 때, 무마농들에게 농업 순소득은 41.99루블로, 산업 순소득은 59.04루블이었고, 한 마리 가축을 소유한 농민 순소득은 69.37루블, 49.22루블로 나란하게 비교하자면, 생계비 일부를 충당하는 임금으로 줄어든 몫을 가진 농업 노동자 유형들이 있었다. 농민을 지주 산업과 혼동한다는 건, 과학적인 연구를 무시하는 짓이었다.

 

시골 반대쪽에서는 자영농, 상업 및 산업 활동을 병행하는 자영농들은 상당한 수입을 올렸었고, 수입은 수백 루블에 달했다. 개인 사업이 명확하게 정의되지도 않았으며, 상하층 간 차이를 은폐했으며, 개인 사업에서 발생하는 소득 규모 자체가 드러났다. 참고로 보로네시 통계에서는 개인 사업으로는 구걸, 농업 노동, 집사, 관리 등이 있었다. 순소득 규모로는 무마농, 일마 농민들이 두드러졌으며, 1-2루블에 해당하는 비참한 잔액, 화폐 적자까지 기록했었다. 농민들의 자원은 임금 노동자들의 자원과 비슷했다. 이마농은 적어도 몇십 루블에 달하는 순소득과 잔액을 보유했었다. 부농들의 순소득은 120-170루블에 달했으며, 당시에 러시아 노동 계급 수준보다도 훨씬 상회했다.

 

노동자와 고용주를 하나로 통합해서, 평균 예산을 편성한다는 건, 적당한 자립과 순소득만을 보여줄 뿐이다. 수입에서 491로블, 지출 443루블, 잔액 48루블과 (C) 현금 18루블을 포함했을 때, 이러한 평균은 완전한 허구였다. 하위층으로는 a, b에서 66개 예산 가운데 30개 예산에 속하는 농민들에게는 극심한 빈곤을 은폐했다. 가구 당 총소득 120-180이라는 적은 루블 수입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어려워서, 정기적으로 농장 노동, 일용직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따라서 현금 및 현물 수입, 지출들을 정확하게 계산한다면 농민, 시장 간 차별화 관계를 파악하며, 문제되는 현금 수입 지출에서 각 부문 별 예산 가운데 현금 지출이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파악했다. 현금 소득, 지출 비율은 중간 집단에서 지출이 특히 규칙적으로 증가해서, 극단적인 집단으로 볼 수 있었다. 농업에서는 가축을 보유하느냐, 보유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뚜렷한 상업적인 성격을 띠어갔다. 두 경우 모두 상품을 판매해서 생활하더라도, 상품은 노동력이고, 다른 경우로는 상품은 판매를 위해 생산된 재화이므로, 상당한 임금 노동과 자본 형태를 취하는 생산물이 사용됐다. 예산 면에서는 농민들의 차별화는 농민들을 농장 노동자로, 소규모 상품 생산자, 소부르주아지들로 전환하면서 자본주의를 위한 국내 시장을 창출해갔다.

 

중요한 추론으로는 모든 농민 집단에서는 농업이 매우 폭 넓게 상업화됐고, 시장에 의존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소득이나 지출 면에서는 현금 부분이 40%미만으로 감소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비율 면에서도 높았다. 이렇듯 소작농 총 소득에서는 짚이나 겨 등과 같은 가축 유지비도 포함됐었다. 중아 흑토 지대에서 농민들은 화폐 경제가 전반적으로는 산업 지대 외곽 대평원보다 미약하게 발달한 곳조차, 매매 없이는 존재할 수는 없었고, 시장에서는 화폐 힘에 이미 의존해갔다. 인민주의자들은 자연 경제에 대한 동정만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일수록, 판매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으며, 상품 생산에서 발전을 지연시킨다면, 생산자 조건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 마르크스는 농민에 대해서도 자본주의 생산 양식으로는 불완전한 발전에서 생겨난 흠점들과 일치할 수밖에는 없으며, 농민들에게도 자신들의 제품을 상품으로 생산하는 조건 없이 상인이자, 산업가가 된다는 점을 지적했었다. 예산 자료가 세금에서 상품 생산 발전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견해를 반박했으며, 지대와 세금은 교환 발전에서는 중요했었지만, 상품 경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세금은 부차적으로 전락했다. 농민들에게는 총 현금 지출, 세금 및 관세 지출을 비교한 비율로는 15.8%에 달했다.

 

a: 24.8%

b: 21.9%

c: 19.3%

d: 18.8%

e: 15.4%

f: 9%

 

따라서 세금 지출에서 최대치는 사회 경제로부터 농민들이 불가피하게 부담한 나머지 현금 지출로는 1/3이었다. 그러나 교환 발전에서는 세금 역할을 고려하지도 않았으며, 소득 대비로 보자면, 비율이 지나치게 높았다. 개혁 이전 시대에서는 농민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했으며, 소농 토지를 소유한 농장 노동자들에게는 총 지출에서 1/7을 차지하는 세금의 존재가 두드러졌다. 더군다나 마을 공동체 내 세금 분배는 불균등했다. 농민들의 형편이 좋을수록, 총 지출에서 세금으로 들어가는 비중이 줄어들게 됐다. 가축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농민들은 소득에 비례해서, 가축들을 많이 보유한 농민들보다 세 배나 많은 세금을 납부했다. 마을 공동체 내 세금 분배에 대해서라면, 토지에서 데시아틴 당 세금, 공과금을 계산했을 때, 균일하게 나타났다. 불균형한 마을 공동체가 의무적, 봉건적인 성격에서는 불가피했다. 농민들은 소유 토지에 따라 모든 세금들을 공유했었다. 세금 몫, 토지 몫이 결합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농민층 분리는 현대 농촌 사회에서도 양극으로부터 할당지 역할들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보유한 할당지에 따른 세금 배분은 부농에서 빈농으로, 세금 부담을 전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마을 공동체 내에서 빈농들에게는 더욱 해로운 결과가 생겨났다. 농촌 농업에서 농장은 토지 임대 및 임차, 가구 규모 및 경작 면적, 농장 노동자 고용 등, 각 집단 간 관계로는 예산 자료 및 대량 자료를 검토한 관계에서도 동일했다. 이 뿐만이 아니라, 각 집단에서 경제적인 절대 수치 또한 전체 군 단위(위예즈드) 통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가구에 따라서는 무마농과 일마농들은 동일했으며, 예산 통계에서도 충분히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농민 농장에 따른 재산과 농기구에 대한 자료에서도, 많은 집단에서 도구, 가축을 제공받는 정도 차이를 통계표로 볼 수 있었다. 앞서 대량 통계를 기반으로 언급하자면, 여기서 많은 집단들에서는 재산을 소유한 정도가 완전하게 달랐다. 빈농 가축보다도, 부농 가축과 매우 달랐다. 가축의 1/4가 아니라, 가축의 5/27이었기 때문이다. 가축이 아예 하나도 없거나, 적어도 한 마리만 기르는 농민들의 농장은 비참하고, 또 열악했다. 농민들은 농장에다 수백 루블을 쓰면서, 농기구를 개량하고,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대규모로 토지를 매수하고는 연간 50,100,200루블의 임대료를 받는 소수의 농민들과 묶어낸 방식은 매우 잘못됐다. 그런데도 가축 하나 없는 농민들은 일용직 노동에서 높은 지출을 차지한다는 말은, 통계학자들이 다음과 같은 항목에서 완전하게 다른 두 가지를 하나로 포함시켰기 때문이었다. 첫째로는, 고용주로부터 농기구로 일하는 노동자를 고용해서,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한다거나, 둘째로는 자신들의 농기구로부터 고용주 토지들을 경작해야만 하는 이웃 농민들을 고용하는 경우였다. 따라서 여기서 고용이란 정반대로, 서로 엄격하게 구분됐다. V. 올로브(V.Orlov), 구베르니아 시 통계 수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농업 소득과 관련해서는 통계가 매우 부족했다수확량 문제가 검토되지도 않았고, 각 특정 구역에 따른 농산물 판매 현황, 판매 조건에 대한 통계마저 기입되지 않았다. 상위 집단에서는 농업 현금 소득 비율이 매우 감소했고농업에서는 매우 넓은 면작들을 경작했다. 따라서 매우 큰 규모로 농업은 매우 큰 자연 경제였다.

 

농업과 기업가적 성격은 산업 사이에서도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같은 유형으로 산업은 많은 가축들을 소유한 농민 예산에서도 특히 중요했다. 검토 중인 통계에서는 지역 농민 부르주아지들에게 전형적으로는 농업, 상업 및 산업 기업을 결합하는 경향이었다. 같은 유형으로는 농부를 경작자와 비교한 건 농업을 자연 경제로만 다루었기 때문에 잘못됐다. 농업에서는 농산물들의 기술적인 가공에서 제분, 착유, 감자 전분 제조, 증류 등과 결합되어, 농업에서 발생하는 금전적인 소득은 농업이 아닌 산업 시설 소득으로 귀속됐다. 실제로 농업은 더 이상 자연 경제가 아닌 상업 경제였다. 대량 농산물은 농장 노동자와 산업 기업(우편 운송)에서 고용된 가축 생계를 위해 현물로 소비된 농장에서도 같았다. 최상위 집단에 속하는 같은 유형 농장에서도, 코로토야크 지역에서 예산 1위는 가족이 18명이었고, 노동자 4, 농장 노동자 5, 가축 20마리였으며, 농업 소득은 1,294루블, 산업 기업 소득은 2,675루블이었다. 자연 경제 농촌에서도 평균을 달성하고자, 무마 농장, 한 마리 가축을 기르는 농장들과 결합됐다. 농업 활동 규모, 유형 분류에 따라 산업 활동 규모, 유형 분류를 결합하는 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농민 생활 수준에서는 현물 식량 지출은 불완전하게 제시됐다. 농산물, 육류에서도, 무마농, 한 마리 가축만을 기르는 농민을 합쳤을 때 나머지하고 대조는 옳다는 점이다. 농민 집단에서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식량이 부족해서, 품질이 낮았다. 특히 감자 생산에서 그랬다. 한 마리 가축만을 기르는 농민 식량은 무마농보다도 더 열악했다. 여기서도 평균 문제는 허구였고, 농민 대중들에게도 부족한 영향 상태는 부농들의 만족스러운 영양 상태 아래로 가려졌다. 부농들은 빈농들보다 1.5배 더 많은 농산물, 3배나 많은 육류를 소비했다. 생산량에 따라 농민 식량 통계들도 뒷받침할 수 있었다. 세 집단으로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최하위 집단, 중간 집단, 최상층 집단이었다. 특히 최상층 집단에서는 최하위 집단보다 식량 품질이 두 배나 더 우수했다. '평균'이란 두 극단 집단을 모두 압도했기 때문이다. 식량에서 현금 지출은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두 극단 집단에서 농촌 무산층과 농촌 부유층에서 매우 높았다. 농촌 무산층에서는 중농보다도 더 많이 구매했었지만, 소비는 적었다. 필수적인 농산물을 구매하더라도, 농산물은 부족했다. 농촌 부유층에서는 더 많이 소비하기 때문에, 특히 비농산물 소비가 증가해서, 더 많이 구매했다.

 

두 극단 집단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일수록, 개인 소비재에 따른 러시아 시장 형성 과정을 알 수 있었다. 나머지 지출 항목에서는 남녀 한 사람 당으로만, 계산한다는 건 부정확했다. 왜냐하면 연료비, 조명비, 가정용품 등 비용들은 가족 구성원 수에 따라 비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민 생활 수준에 따라서도 세 가지 다른 집단은 구분됐다. 모든 개인 소비 지출에서는 현금 부분들이 하위 집단에서는 매우 높게 나타났다. a 집단에서는 지출 약 절반이 현금이었다. 상위 집단에서는 현금 지출이 증가하지는 않았으며, 1/3에 불과했었다. 양 극단 집단에서는 현금 비율이 증가한다는 점은 어떻게 균형을 이뤘을까. 상위 집단에서는 현금 지출들이 주로 생산적인 소비에 따른 농장 지출로 들어갔지만, 하위 집단에서는 개인 소비로만 나타났다. 따라서 농민들은 농촌 무산층들로 변모할수록, 주로 소비재 시장을 창출했었지만, 농촌 부유층들로 변모하면, 주로 생산 수단 시장을 창출한다. 따라서 두 가지 변하는 모습에서 모두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국내 시장을 창출하는 과정으로까지 확장된다.

 

엥겔스는 1891년 기근에 대해서도 자본주의가 국내 시장을 창출한다고 말했으며, 농민 몰락을 단지 가부장적인 경제에 따른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변모가 아니라, 인민 생산에 따른 쇠퇴로만 보던 인민주의자들을 알 수는 없었다. 인민주의자들은 농민층 분화 요인에서도 국내 시장 형성을 매우 간과했었다. 국가 수입 증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Novoye Slavo, 1896), 미국 노동자 소득 표에서는 소득이 낮을수록, 식량 지출은 상대적으로 더 컸다. 따라서 식량 소비가 감소하면, 다른 생산물 소비에서도 훨씬 더 크게 감소한다고 내세웠다. 당시에 러시아에서는 빵과 보드카 소비는 감소했었다. 따라서 다른 생산물 소비도 감소했으며, 농민 부유층 소비 증가에 따른 대중 소비 감소는 상쇄됐지만, 이러한 주장은 오류를 전제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노동자로만 대체되어 노동자와 고용주가 창출되는 과정이며, 농민들을 노동자로 대체하면서부터 모든 소비를 개인적 소비로만 축소시키거나 생산적 소비에 따른 생산 수단 시장의 형성을 잊는다. 농민층에서 차별화되는 과정은 자연 경제만으로는 상품 경제를 대체하는 과정이라는 점 또한 잊었다. 따라서 시장이란 소비를 단지 늘려서 창출되는 게 아니라, 현물 소비를 현금으로, 지불 소비로부터 전환할 때만 창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무마 농민들은 중농보다 소비는 적었지만, 개인 소비재를 더 많인 구매할 수밖에는 없었으며, 더욱 가난해지고, 더 많은 돈을 벌어도, 더 많이 지출할 수 밖에는 없었다. 따라서 두 가지 모두 자본주의에서는 필수적이었다. 예산 수치 활용 면에서는 농민과 농촌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 면에서는 개인 소비 규모를 1인 당이 아닌, 성인 노동자 1인 당으로 계산했을 때, 니즈니 통계청에 근거했을 때 도표를 얻을 수 있었다.

 

농촌 노동자 생활 수준 통계에서 노동 평균 가격을 취했다. 1881-1891, 10년 사이에 보로네시 구베르니아 시에서 고용된 농장 노동자들의 연간 평균 급여는 57루블이었으며, 유지비를 포함하면 99루블이었고, 유지 비용은 42루블이었다. 농장을 소유한 농장 노동자와 일용직 노동잗르의 개인 소비 금액은 노동 평균 가격보다도 낮았다. 가족 유지 비용 총액에 따라 4인 가족에서 가축 하나 없는 농부들은 78루블이었고, 적어도 가축 한 마리를 가진 5인 가족 농부들은 98루블에 불과했으며, 농장 노동자들의 유지 비용보다도 적었다. 농장 지출, 세금 및 과세를 제외하고는 지역 토지는 세금 액수보다 낮지 않은 가격으로 임대됐따. 토지에 묶여진 노동자들의 처지는 비교적 자유로운 노동잗르의 처지보다도 더 나빴다. 농장 노동자들의 현금 지출은 가축 한마리를 보유한 농민과 무마농들의 개인 소비에 대한 현금 지출보다도 훨씬 높았다. 따라서 사람들을 하나로 토지에 묶는다는 건 국내 시장 성장을 오히려 저해할 뿐이다농장 노동자 소비에서는 젬스트보 통계를 활용할 수 있었다. 오렐 구베르니아(1892) 통계 보고서에서는 카라체프 지역 자료가 있었다. 당시에 해당 자료에서는 농업 임금 노동에 대한 158건에 대한 자료에 기반했다. 월 배급량을 1년 배급량으로 환산해볼 수 있었다.

 

호밀에 따라서는 한 가축을 보유한 농민, 무마농들의 생활 수준으로는 농장 노동자의 생활 수준보다도 높지는 않았으며, 농장 노동자들의 최저 생활 수준이었다. 농민 최하층에서는 농업에서 이들을 몰아내는 다른 집단과의 관계 면, 가족 부양에 따른 지출액을 차지하는 농업 규모 면, 노동력 판매에 따른 생계 수단 및 생활 수준 면에, 해당 집단에서 배정지를 소유한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에 속했다. 농민 예산에서 젬스트보 통계에 대해서, 수확과 곡물 가격 등의 영향력 아래에서도, 사브리나, 반품 평가 보고서(Evaluation Returns)로부터 예산 통계를 처리하고자 검토했다. 사브리나는 마르크스 이론을 사용했다고 말했으나, 정작 적극적으로 왜곡하고는 불변 자본, 가변 자본의 차이점을 고정 자본, 순환 자본의 차이점과 혼동했으며, 보다 선진적인 자본주의 용어, 범주를 농민 농업에서 무의미하고, 무분별하게 남용하고는 적용시켰다. 예산 수치를 처리했을 때 평균 규모를 남용했기 때문에, 모든 평가 보고서가 평균화 농민과 관련됐다. 4개 군(위예즈드)에 대해 계산된 토지 소득은 농장 수로도 나뉘었다. 무마농들은 소득이 가구 당 약 60루블, 부농들은 약 700루블이었다. 농장 당 불변 자본 규모에 따라, 전체 재산 가치가 결정됐다. 도구로는 평균 가치, 상업 및 산업 시설에서 평균 가치는 농장 당 15루블로 결정됐다. 사브리나는 부유한 소수로부터 사유 재산이라는 세부 사항을 무시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된다고 말했으며, 토지 임대에서도 평균 지출을 결정했다. 한 마리 가축만을 소유한 농민들은 60루블이었고, 부농들은 100-200루블이므로, 이를 모두 더해서 단지 농장 수로만 나뉘었다. 심지어 수도, 수리에 대한 평균 지출도 결정했다. 그것이 단지 도구, 가축 보충 및 수리를 말한다면, 수치는 무마농 지출로 보자면, 농장 당 8코페이카였고, 부농들은 75루블이었다. 사르비나는 오스트로고즈스크 지역 보고서에서 훌륭하게 적용했었던 '평균 수요 법칙'을 얻었다. 그리고 틀린 법칙으로부터 농민들은 최소 수요를 충족시키는 게 아니라, 평균 수준을 충족할 따름이었다. 소농업에서는 특수한 발전 유형이라는 결론을 매우 쉽게 도출했다. 농촌 무산층과 농촌 부유층을 균등화하는 이러한 교묘한 장치 속에는 익숙한 분배에 따른 분류가 더욱 강화됐다. 예산 통계를 적용했다면, 농민들을 한 집단으로 결합시켰다. 한 가족 당 15-25데시에 따른 대규모 할당을 받은 범주에 속한 농민들에게는, 23.5데시 할당을 임대해서, 1.3데시 작물을 재배했으며, 개인 산업으로부터 생계를 유지한 남녀 10명 당 190루블 소득을 확보한 사람, 코로토야크 지역 예산 10번을 추가로 14.7데시를 임대해서, 23.7데시 작물을 재배하고는 농장 노동자를 고용해서, 남녀 10명 당 1,400루블을 확보한 사람들, 자돈스크 지역에서는 예산 2번에 따라,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들의 농장에서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민, 농장을 더하고는 합계를 추가된 항목 수로 나누어 특수한 유형으로 개발이 이뤄진다고 말했으며, 농민 농업 분야에서도, '평균 통계'만이 규칙적이고, 배타적으로, 농민들에 대한 차별화를 모든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사르비나는 수확의 영향력에서 기사에 실린 방법을 대대적으로 채택했었다. 당시에 러시아 농민 전체 예산을 계산하고자 노력을 기울였지만, 똑같이 시험된 평균값을 적용시켜버렸다. 러시아 경제에서 문학적인 미래 역사가는 인민주의적인 편견으로 인해 경제 통계에서조차 기본적인 요구 사항, 임금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에서 엄격하게 구분해야만 하는 요구 사항마저 잊었으며, 그들을 묶은 토지 소유권에 따른 형태, 중개 유형들이 얼마나 많았고, 또 복잡한지에 관계 없이 이뤄져야만 했었다.

 

- 자료에서 매우 큰 결함은 많은 지표에 따른 분류가 부족했으며, 표 채택에 따른 농장 자료가 부족했다. 비농업 직종에서도 모든 종류로부터 고용 통계가 매우 부적절하게 처리됐다.

 

- 여러 구획 지역, 수공예 산업 조사 등과 같은 예산에서는 많은 농민 집단을 설명하기에는 다른 예산과 비교해본다면 유리할 수는 있다. 해당 보고서에서는 식량을 제외한 개인 및 농장 필수품 지출을 가축 유지에 대한 지출 비용에서 모두 분리했으며, 조명 및 임대료 지출 등을 나란하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따라서 명백하게 잘못됐다. 개인적 소비와 농장에 따른 생산적 소비를 분리했으며, 생산적 소비 항목에서는 타르, 밧줄, 말굽질, 건물 수리, 도구, 마구 등에 대한 지출, 노동자 및 작업 노동자, 목축업자, 토지 임대, 가축 및 가금류 유지 지출 항목도 포함됐다. 전년도에 따른 잔액 항목에서는 곡물(현물)과 현금으로부터 총 지출 수입을 다뤘으며, 현금과 현물에서도 총 수치를 제공했었다. 산업과 관련된 네 가지 열에서는 다른 자료에서 반환해서, 복사했다. 특히 e 집단에서는 분명히 산업 시설 항목 아래에 둬야한다는 점에 유의했다. 두 구성원은 각각 250루블 소득을 얻었으며, 한 명은 농장 노동자를 고용했다.

 

- 41루블에서 큰 적자를 기록했었던 e 범주를 예외로, 대출로 충당됐다. 범주에 속한 5가구 가운데, 3가구에서는 혼인 비용으로만 20루블을 썼다. 5가구의 총 적자는 206루블, 90코펙이었다. 따라서 집단 식량 외에도 개인 소비 지출은 남녀 모두 1인당 10루블 41코펙이라는 매우 높은 수치로 증가했다. f 범주에서 부유층을 제외한다면, 다른 어떤 집단에서도 지출은 6루블이 채 미치지도 못했었다. 따라서 적자는 빈농 적자와는 성격이 완전하게 달랐다. 최소 요구 사항을 충족하지 못해서 발생한 게 아니라, 해당 연도 소득에 비해 요구 사항이 과도하게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가축 유지에 대한 지출은 전적으로 현물 지출이었다. 66가구 가운데 가축 유지 항목에 지출했었던 총 6,316,21루블 가운데 1,535,2루블만이 현금으로 지출됐으며, 금액 가운데 1,102,5루블은 산업용으로 사용된 20마리 가축을 기르는 농부 기업가로부터 지출됐다. 특히 1897년에는 곡물 가격 하락 토론이 있었는데, 오류가 자주 있었다.

 

- 스톨리핀은 마을 공동체를 해체하면, 빈농들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부농들은 절대주의 절대주의를 강화시켜서, 약탈해갔기 때문이다. 독일 농업 문헌에서는 드레슬러가 쓴 여러 논문들이 있었는데, 많은 집단에서 농부들이 소유한 소의 무게에 대한 통계가 있었고, 통계는 소유 토지 면적에 따라 분류됐다. 통계로부터 당시에 러시아 젬스트보 통계보다 두드러졌던 소농이 소유한 소 품질에 비한다면, 낮은 수준이었다. 농민들의 많은 집단에서도 건물, 도구 및 가축 가치에 대한 예산 기준으로는 유럽 러시아에서 49개 군에 대한 통계를 적용하자면, 농민 가구에 따른 1/5은 나머지 농민 전체보다 많은 양의 생산 수단들을 소유했다. 가축 유지에서 지출은 대부분 현물 지출이었으며, 나머지 농장 지출은 화폐 지출이었다. 진취적인 농민들에게는 장기 임대(리스), 낮은 임대료, 개선 보상 등에 따르면 카리셰프의 '임대료론'도 얼머나 필요할까. 가축이 없는 12명 농민들 가운데 산업 시설, 사업체로부터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마농 18명 가운데, 한 명이 수입을 얻었고, 삼마농 9명 가운데, 3명이 수명을 얻었으며, 사마농 5명 가운데, 2명이 수입을 얻었고, 사마농 이상 있는 5명 가운데 4명이 수입을 얻었다.

 

- 러시아 수공예 산업 조사 위원회에서 이후에 거래 내역은 1879-1887년까지 수시로 발행된 16권 묶음이었다. 러시아 수공예 산업 조사 위원회는 1870년에 열린 제1차 전 러시아 공장 및 작업장 소유자 대회 요청에 따른 무역 및 제로 후원으로부터, 1874년에 설립됐다. 위원회에서는 재무부, 내무부, 국유 재산부, 러시아 지리학회, 자유경제학회, 모스크바 농업 학회,

러시아 기술 학회, 러시아 산업 및 무역 진흥 협의회 대표가 포함됐다. 수공예 위원회는 거래 내역에 제시한 귀중한 자료로는 주로 지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관리 작업 결과였다. 위원회에서 자세한 연구에서 거래 내역은 러시아 수공예 산업에서 자본주의적인 관계 발전들을 보여준 수 많은 사실과 수치를 도출했다. 과일 재배, 가축 사육 소득도 포함시켰다.

 

- 당시에 러시아에서는 곡물 가격 논문으로는 18973, 자유경제학회, A.I. 슈퍼로브(Chuprov)에게서 논의됐다. 당시 러시아 자유경제학회(FES)1765년 설립된, 특권적인 과학 단체였으며, 농산업에서도 유익한 정보 보급이 목적이었다. 주로 자유주의 귀족, 부르주아 계급 과학자들은 FES 회원이었다. 학회는 설문조사로부터 조사를 실시했으며, 국가 경제로부터 많은 분야와 전국 각지를 연구하고자 탐험대를 파견했다. 학회에서는 정기적으로 FES 보고서를 발행했었는데, 집단적인 책임으로는 각 마을 공동체(미르) 농민들은 국가와 지주들에게 제때에 전액을 지불하고, 각종 용역(서비스)(세금 납부, 토지 상환금 납부, 군 징집병 모집 등)을 제공할 집단적인 책임을 져야만 했었다. 같은 형태로 예속은 러시아에서 농노제가 폐지된 뒤에도 여전히 지속됐으며, 1906년에 폐지됐다.

 

- 1891년 기근은 유럽 러시아에서 동부 및 남동부 지방에서 특히 심각한 영향을 미쳤으며, 규모는 나라에 닥친 모든 비슷한 재난을 능가했다. 기근은 수 많은 농민들을 파멸시켰지만러시아 국내 시장 형성과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엥겔스도 <독일 사회주의>, (1891, 10/29), (1892, 3/15), (1892, 6/18), 니콜라이온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3. 농민층 분리화에 대한 결론.

 

 

현대 러시아 농민들이 처했었던 사회 경제적 상태는 상품 경제에서 주로 나타났다. 중부 농업 지대, 남동부 국경지, 산업 주베르니아에 비하면 낙후됐음에도, 농민들은 시장에 종속됐으며, 개인 소비 농업, 세금 납부에서도 시장에 의존했다. 농민 및 농업 및 촌락 공동체 사이에서 존재하는 사회 경제적 관리 쳬게는 모든 상품 경제와 모든 자본주의 질서로부터 내재된 모든 모순을 보여준다. 경쟁, 경제적 독립 투쟁, 토지 매매 및 임대 탈취, 소수 생산 집중 및 독점, 다수의 무산 계급화, 강제 편입 및 시도, 상인 자본과 농장 노동자 고용으로부터 경제적 소수에 의한 착취 둥이다. 농민들 사이에서는 모순적인 형태를 띠지 않는 경제적인 현상이 단 하나도 없다. 자본주의에서는 이해 관계에서부터 투쟁과 대립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유리하거나, 다른 이들에게는 불리한 상태를 뜻하지도 않는다. 토지 임대, 매수, 정반대 유형에서는 산업이고, 농업에 따른 기술적인 발전 역시나 마찬가지다. 비단 러시아의 자본주의 뿐만이 아니라, 인민주의 교리에서도 중대해진다. 같은 모순들은 공동체 마을로부터 경제 관리 체계가 특수한 인민 생산 등을 구성하는 경제 형태가 아니라, 일반적인 소부르주아적인 형태일 뿐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에도 널리 퍼진 이론임에도, 러시아 공동체 농민들은 자본주의 적대자가 아니라, 자본주의로부터 가장 깊은 경제적 토대였기 때문이다. 가장 깊은 토대였기 때문에, 인위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서, 자본주의 발전을 제한하는 제도임에도, 마을 공동체 내에서도 자본주의적인 요소들을 형성해나갈 수 있었다. 농업 전반에서는 과거 전통으로부터, 특히 가부장적인 전통 아래에서 무겁게 짓눌러졌다. 따라서 생산 관계 발전에 따른 모든 사회 관계로부터 변화 등으로 인한 자본주의 변형 효과가 점진적으로 생겨났다. 이러한 농민들 사이에서 모든 경제적 모순을 종합했을 때, 농민들에게 '농민화'라는 용어는 시의적절하다. 낡은 가부장적인 농민들의 완전한 해체, 농민 주민들의 창출을 뜻하기 때문이다. 발뤼예프 위원회(Valuyev) 작업에서 바실리코프(Vasilchikov)는 당시 러시아에서 농촌 무산층들이 형성되어, 농민 사회층에서도 차별화됐었지만, 체계적으로 연구하려는 시도는 전무했으며, 젬스트보 호별 인구 조사가 제공됐음에도, 적절한 자료들이 부족했었다. 농민 분열을 단지 재산 불평등, 인민주의 전반과 카리셰프의 용어로부터 단순하게나마 차별화로 간주하곤 했었다. 카리셰프의 임대에 관한 저작 중에는, 러시아의 재산(Russkoye Bogatstvo)(루스코예 보가츠보)에 실린 기사를 참조할 때도, 재산 불평등이 출현하는 전체 과정에서도, 재산 차별화에만 국한되지는 않았었다. 기존 농민들은 차별화됐을 뿐만이 아니라, 완전하게 해체되어, 존재할 수조차 없었으며, 새로운 유형 아래에서 농촌 주민, 상품 경제, 자본주의적인 생산이 지배하는 사회 기반 유형들로 축출됐다. 따라서 농촌 무산층, 농업에서 상품 생산자는

엄연한 계급이며, 농업 임금 노동자 계급이었다.

 

농업 자본주의 형성에서 순수한 이론적 분석이 소규모 생산자들로부터 차별화가 이뤄지는 요인임을 지적한다는 건 교훈적이고, 시사적이다. 자본3권에서도, 자본주의적인 지대 발생을 염두했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노동 지대'를 언급했다. 직접 생산자는 실제적이고, 법적으로도 자신에게 속한 노동 도구(쟁기, 소 등)을 사용하여, 일주일 가운데 일부 시간 동안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소유한 토지를 경작할 수 있었고, 나머지 시간에는 봉건 영주들의 영지로부터 아무런 보상 없이 노동했다. 다음 형태의 지대에서는 직접 생산자가 자신들이 착취한 토지로부터 전체 생산물을 생산했고, 초과 생산물 전체를 토지 소유자들에게 현물로 제공하는 현물 지대였다. 생산자들은 여기서부터 더욱 '독립적'으로, 자신들의 노동으로부터 필수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생산물의 양 외에도, 특정한 초과분(잉여분)를 획득했다. 이와 같은 형태는 지대에서도 개별적이고, 직접 생산자들로부터 경제적인 지위에서도 더 큰 차이를 초래했다. 적어도, 그러한 차별화가 존재했으며 직접 생산자들은 경제적 지위에서도 더 큰 차이를 초래해갔다. 그러한 차별화에 따라 직접적인 생산자들은 차례로 다른 노동자들을 직접 착취할 수단들을 획득해갔다. 따라서 자연 경제관이 우세할 때는 종속 농민들의 독립이 처음으로 확대되어, 차별화에 대한 맹아가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맹아는 현물 지대 형태에서는 단순한 변화를 나타낸 다음 형태 지대로는, 화폐 지대에서만 발전할 수 있다. 직접 생산자는 토지 소유자에게 생산물이 아닌, 생산물 가격을 제공하게 된다. 같은 유형에 따른 지대 기초로는 동일하며, 직접 생산자는 토지의 전통적인 소유자이면서도, 같은 유형으로는 지대의 해체로 보다 접근하게 된다.

 

화폐 지대에서는 상업, 도시 산업, 상품 생산 및 화폐 순환에 따른 발전을 전제로 한다. 종속 농민, 토지 소유자 간 전통적인 일반 법 관계는 순전히 현금 기반 계약으로 변환된다. 관계 면에서도 기존 농민들에 대한 수탈로부터, 농민들은 자신들의 토지와 자유를 매수 당한다. 현물 지대에서 화폐 지대로 전환되면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결과이며, 심지어는 돈을 위해서 고용된 무산 일용직 노동 계급을 형성한다. 새로운 계급의 발생은 산발적이지만, 지대 지불로부터 예속된 부농들 사이에서는 농업 임금 노동자를 자신들의 이익에 맞추어 착취하는 관습으로까지 발전시킨다. 그들은 점차적으로 일정량의 부를 획득하고자, 축적하며, 먼 미래에도 자본가로 변모한다. 따라서 토지의 옛 자영업자들은 자본주의적인 소작인들을 위한 유치한 노예 동물원을 만들어내고, 자본주의적인 발전은 시골을 넘어, 이와 같은 자본주의적인 생산 발전으로 조건지어진다.

 

중농을 희생시켜, 극단층을 발생하도록 만드는 농민 분화에서는 두 가지 새로운 유형으로부터, 농촌 주민들을 찍어낸다. 공통적으로는 경제적 상품화, 화폐적 성격이다. 경제적 상품화에서는 농촌 부르주아지들인, 부농들이다. 많은 형태로 상업적인 농업을 수행하는 자영농도 여기에 포함된다. 다음으로는 상업 및 산업 시설에서 실소유주, 상업 기업에 따른 기업 소유주 등이 있다. 상업적인 농업과 산업체 기업 간의 결합은 부농들에게만 특수한 농업과 산업 기업()의 결합이다. 부농들 사이에서는 자본주의적인 농민층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곡물 판매를 위한 농촌 지역에서 토지 임대는 농장에서도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며, 토지 분배보다도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부분 농장 규모로는 가족에서 소용하는 것보다도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농장 노동자 집단, 더 많은 일용직 노동자 집단은 부농 존재에게도 필요한 조건이다. 농민들이 순소득으로 얻은 여유 자금들은 농촌 지역에서도 과도하게 개발된 상업적 활동, 고리대금업을 투자하거나, 유리한 조건 아래에서 토지 구매, 농장 개선 등에 투자된 소규모 농업 종사자이다. 수적으로도 농민 부르주아지는 농민들 가운데에서도 소수이며, 총 인구 수에서 약 3/10이며, 가구 수로는 1/5를 넘지 않는다. 비율로는 지역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농민 농업 총량, 농민 소유 생산 수단 총량, 농민들이 생산한 총 생산물량에 따른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자면, 농민 부유층은 여전히 우세하며, 현대 농촌에서도 여전히 주인이라는 점이다.

 

농촌 무산층들은, 토지를 소유한 임금 노동 계급들이다. 토지를 전혀 소유하지 않은 빈농을 포함하지만, 러시아 농촌 무산층들의 전형적인 대표자는 토지를 소유한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미숙련 노동자, 건설 노동자, 기타 토지 소유 노동자들이다. 한 구획의 토지에서도 보잘 것 없는 농사를 짓거나, 황폐해진 토지 임대로 입증된 농장과 노동력 판매 없이는 도무지 생존할 수조차 없는 절박한 빈농 산업 상태를 보노라면, 극도로 낮은 생활 수준은 뚜렷해진다. 전체 농가 가운데 절반 이상 인구의 약 4/10은 농촌 무산층이고, 무마 농민, 상당 수는 일마 농민으로 분류한다. 농민층들의 상당 부분은 이미 농촌 무산층에 속하는 근거는 이미 제시됐다. 자본주의는 자유롭고, 토지가 없는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고정 관념적인 이해 역시나 자주 포함된다. 주요한 추세로도, 자본주의 농업에서는 매우 느리고, 매우 많은 형태로 농촌 사회에서도 충분히 침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촌 노동자들에게는 토지 할당이 가끔 농촌 고용주 자신들의 이익에도 부합하기 때문에, 토지를 소유한 농촌 노동자들은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국가마다 다른 형태를 띠지만, 영국 별장농은 프랑스, 라인 지방 소작농과 같지도 않으며, 오히려 라인 지방은 독일 프로이센, 크네히트와도 같지 않다. 각각 특정한 농업 체계로부터, 특정한 농업 관계사에 따른 흔적을 지니지만, 경제학자들은 모두 한 유형으로 묶어내어, 농업 무산층을 분류하기를 막지 못한다. 토지에 대한 권리에서도 법적 근거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소작농에게 토지는 온전한 재산인지, 지주, 영주권자 (Rittergutsbesitzer)로부터 사용이 허가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로는 대러시아 농민 공동체 구성원으로, 소유하는지에 대한 여부가 중요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빈농을 농촌 무산층에 할당한는 건 전혀 새롭지 않다. 인민주의 경제학자들만이 농민층을 반자본주의적이고, 농민 대중들은 이미 자본주의 생산에서도 일반적인 체계 속에서 농업 및 산업 임금 노동자로 그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을 외면할 뿐이다. 러시아 내 마을 공동체(미르)와 농민을 유지하는 농업 체계를 칭찬만 한다거나, 자본주의적인 농업 조직을 갖춘 '오스트제' 체계와도 비교하기를 긍정했을 뿐이다. 따라서 오스트제 지역에서는 농업 인구가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층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오스트제 구베르니아에서도 농민들은 별도로 25-50데시 큰 토지, 3-10데시 토지의 별장 거주자, 토지를 무소유한 농민층으로 나뉜다.

 

S. 코롤렌코도 지적했었지만, 별장 거구자는 중부 구베르니아 시에서 러시아 농민과 매우 비슷하다. 일자리를 구하고, 토지를 경작해서, 끊임없이 시간을 나눌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농장 노동자의 경제적 지위이다. 지주들은 임금 때문에 토지를 할당하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1. 오스트제 농장 노동자들에게도 소유물은 토지 2데시(lottstelledessiante로 환산했을 때, 1 Lottstelle = 1/3dess이다). 남편은 1년에만 275일을 일하고, 아내는 50일을 일해서,

하루 임금은 25코펙이다.

 

2. 22/3데스 토지에서 농장 노동자는 가축() 한 마리, 소 세마리, 양 세 마리, 돼지 두 마리를 기른다.

 

3. 쿠를란트 주 바우스카 지역의 6데스 토지의 농장 노동자는 말 한 마리, 소 세마리, 양 세마리, 돼지 여러 마리를 기른다. 일주일에 3일 일해서,

아내는 1년에 35일 일한다.

 

4. 쿠를란트 주에서는 하센포트 지역에서 8데스 토지의 농장 노동자들은 무료로 밀가루를 빻으며, 무료 의원 지원과 진료를 받으며, 자녀들은 학교에도 다닌다.

 

따라서 인민주의자들은 농장 노동자들의 소유지, 농업 규모 면으로는 농민들을 자본주의 생산에 해당하는 유럽 농업 체계와 구분되는 조건들에서 모든 예시를 결합시켰다. 10명의 농장 노동자는 평균 31.5데시 토지를 소유했으며, 노동자 한 명 당 평균값이다. 농장 노동자들은 1년 가운데 적은 기간 동안 지주를 위해서 농민들은 일하며, 남편은 1년의 절반, 아내는 35-50일과 2-3마리의 소나 한 마리의 말을 기르는 농민들도 포함한다. 그렇다면 마을 공동체(미르)와 오스트제 농장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오스트제 지방에서는 사물을 고유한 이름으로 부르지만, 러시아에서는 농장 노동자들이 부농과 결합하여, '평균적인' 사람들이 파업을 벌이고, '공동체 정신', '노동 원칙', '인민 생산', '농민과 산업의 결합' 따위의 감상적인 말만 늘어놓는다.

 

개혁 이후로는 중농들이 결합된다. 중농은 상품 생산에서도 매우 드물었다. 중농들은 '독립적인' 농업 노동만으로도 충분히 생계를 유지했으며, 매우 좋으며, 유리한 시기와 조건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대부분 중농들은 대출에 의존하며, 노동 용역(서비스)로 상환하고, 부업으로는 보조 일자리를 찾지 않고서는, 생계를 도저히 유지할 수는 없다. 일자리에서는 노동력 판매 등이 부분적으로 포함된다. 흉년 때마다 중농 대중들은 무농층으로 전락하게 된다. 사회적인 관계에 따라서도 중농층들은 상위층으로 이동할 수도 있지만, 기껏해야 운 좋은 소수만이 상위층으로 진입하며, 하위층들은 사회 발전에서도, 최하위층으로 밀려나게 된다. 농촌 사회에서도 부유층들은 농민의 최하층만이 아니라, 중농층까지 밀어낼 수 있으며, 자본주의적인 경제 특징으로 부상한다. 따라서 중산층들은 몰락하고, 극단층들은 강화된다. 농민화 과정은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

 

농민 분화는 자본주의를 위한 국내 시장들을 창출한다. 하위층들은 시장을 형성하면서도, 개인 소비 시장에서 소비재로부터 이뤄진다. 농촌 무산층들은 중농에 비해 소비량이 적으며, 품질이 떨어지는 빵 대신 감자를 더 많이 소비하며, 또 구매한다. 농민 부유층들의 형성과 발전은 이중적으로 중첩되어, 시장을 창출한다. 주로 생산적인 소비 시장에서 생산 수단으로부터 시장을 창출하며, 부농들은 곤궁한 처지에 있는 지주와 파산 직전의 농민들로부터 수집한 생산 수단들을 자본으로부터 전환시키고자 한다. 부농들의 수요 증가로부터 개인 소비에 다른 시장이 형성된다. 농민들의 분화 진행 여부와 속도에서는 비교할 수 있는 통계는 부족하다. 농민 분화 통계를 체계적으로 발생하는 형태로 나타내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촌 지역에서 경제 통계에서는 분화가 중단 없이 빠르게 증가해갔다. 농민들은 토지를 매각하고, 임대해서 가축이 아예 없는 농민 수도 늘어났으며, 농민은 도시로 이주했다. 반면에 농업에서 발전 추세마저 같은 방향으로만, 농민들은 토지를 매수한다거나, 농장을 개량하고, 철제 쟁기를 도입해서, 풀 재배와 낙농업 등을 개발한다. 빈농들도 여기에 참가하게 된다.

 

더군다나 이주 운동은 특히나 농업 농민 분화에 추진력을 제공한다. 농민 이주는 농업 구베르니아 시이지만, 공업 구베르니아 시 이주에서는 미미한 수준이며, 노동 용역이 활발하며, 농민 분화를 저해하는 인구 밀도가 높은 중부 구베르니아 시에서 주로 이뤄진다. 이주 지역을 떠나는 중농들과 거주 지역에서 남는 극빈층들이 있다. 따라서 이주는 이주 지역에 따른 농민 차별화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차별화된 요소를 새로운 장소로 가져온다. 시베리아 정착민들의 첫 시기에서, 농업 임금 노동에서도, 이주와 농민 차별화 간 연관으로는, I. 호로비치(I. Hourwich), 시베리아 농업 이주(1888)에서도 잘 나타난다. 인민주의 출판사에서 끈질기게 은폐하려고 했었던 바로 그 책이다. 농촌 지역에서는 상인 자본, 고리대금업 자본은 큰 역할을 담당한다. 그렇다면 농촌 사회에서 상인 자본, 고리대금업 자본들은 농민층 분화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많은 농민 집단 간 관계, 농민 채권자와 농민 채무자 간 관계 사이에서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고리대금업은 계급(계층)을 분화시키는 요인이자, 원동력인가. 아니면 계급 분화를 지연시키는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을 분석할 때, 상인 자본과 고리대금업자 자본에서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마르크스는 상인 자본, 고리대금업 자본, 산업 자본(투자 자본)과 같은 단일한 경제 현상을 나타내며, 일반적인 공식이 포괄된다. 이익을 내서 판매하고자, 상품을 구매하기 때문이다. 상인 자본과 고리대금업 자본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산업 자본 형성 과정에서도, 필요한 전제였다그러나 상인 자본, 고리대금업 자본 자체만으로는 자본주의적인 생산 발전에 따른 산업 자본 발상으로는 충분한 전제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언제나 낡은 생산 양식을 해체해서, 자본주의적인 생산 양식으로 대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인 생산 양식의 형성은 언제나 전적으로, 역사적인 발전 단계에 따른 그 상태에 달렸다. 상인 자본, 고리대금업 자본이 무역 자본, 금융자본으로 옮겨가는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도, 어느 정도까지 낡은 생산 양식들을 해체시킬 수 있는지는 견고도와 내부 구조에 따라 달려 있다. 해체되는 과정에서도, 새로운 생산 양식들의 부상은 낡고, 오래된 생산 양식을 대체하는지가 상업적인 성격이 아니라, 오히려 낡은 생산 양식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격에 달려 있다. 따라서 상인 자본에 따른 독자적인 발전도는 자본주의 생산 발전 정도에 따라 반비례한다. 상인 자본과 고리대금업 자본 발전이 클수록, 자본주의적인 생산 발전에 따른 산업 자본의 발전은 작아질 수밖에는 없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상인 자본과 대부(고리대금업) 자본은 산업 자본과도 연계될 때는 과연 어떤 식일까. 상업과 대부업(고리대금업)은 낡은 생산 양식을 붕괴시키면서도,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나다른 체제로 대체되는가. 러시아 국민 경제에서도 답해야만 하는 문제이다. 농민 경작에서는 '쿨락', '진취적인 농민'이 동일한 경제적 현상으로부터 두 가지 형태가 아니라, 완전히 연결되지도 않았고, 반대되는 유형의 현상일 뿐이라고, 일반적인 인민주의자들의 견해는 전혀 근거가 없었다. 아무도 정확한 경제 통계 분석으로부터 증명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계는 그 반대이다. 농민들이 생산 확대를 목적으로 노동자를 고용하든, 토지나 식료품을 거래하든, 대마, 건초, 가축 등을 거래하든, 돈을 거래하든, 단일한 경제 유형만을 나타낼 뿐이며하나의 동일한 경제 관계에 이르게 된다. 더 나아가 마을 공동체(미르)에서는 자본 역할들이 속박과 대부(고리대금)에만 국한되지는 않으며, 자본 생산으로도 투자되며, 부농들은 농장 개량, 토지 매수 및 임대, 개량 도구 취득, 노동자 고용 등에도 돈을 투자하기 때문에, 무역소와 사업에만 투자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시골에서는 자본들이 속박과 대부(고리대금) 외에는 무엇도 생산할 수 없다면, 생산 통계들로부터 농민층 분화, 농촌 부유층과 농촌 무산층을 형성하는 데 확립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농민 전체로는 가난에 시달리는 경작자들의 상당히 고른 유형들을 대표하며, 고리대금업자들만이 두드러져, 소유한 화폐 규모에 따라서만 구분될 뿐이며, 농업 생산 규모와 조직에 있어서는 구분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농촌 사회에서는 상인 자본과 대부업(고리대금업)에 따른 독립적인 발전들이 농업 생산 발전에서도 지연시킨다는 점이 중요하다. 농민층 분화에서도 상업은 더욱 발전하여, 농촌과 도시가 더 가까워지고, 원시적이던 농촌 시장은 사라지며, 마을 상인들의 독점이 약화될수록, 유럽 기준에 부합하는 신용 형태가 더욱 발전하고, 마을 대부업(고리대금업)들을 대체할수록 농민층들의 분화도 더욱 심화된다. 소상업과 대부업(고리대금업)으로부터 쫓겨난 부농 자본은 이미 생산으로 흘러들기 시작한 자본보다도 더욱 풍부하게 생산으로 다시 투입된다.

 

농촌 경제에서는 농민 분화를 저해하는 또 다른 현상으로는 부역 경제, 노동 용역의 잔존이다. 노동 용역은 현물 노동에 대한 지불에 기반을 두며, 상품 경제에서도 저조한 발전에 기반한다. 노동 용역은 중농을 전제한다. 중농은 그다지 부유하지도 또 무산층도 아니기 때문에, 노동 용역을 수행하려면 자신들의 도구가 있어야만 하며, 어느 정도는 '건전한' 농민들이기 때문이다. 농민 부유층들은 현대 농촌 사회에서도 주인일 때, 차별화를 저해하는 요인들, 예속(속박), 고리대금, 노동 용역 등을 무시했다. 현대 농촌 사회에서 진정한 주인들은 농민 부유층들이 아니라, 이들의 대표자가 아니라, 마을 대부업자(고리대금업자), 이웃 지주인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무시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농민들 사이에서는 일어나는 내부 경제 관계 체계를 연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인민주의자들은 같은 절차를 사용했었지만, 도중에 멈추고는 자신들의 추론을 논리적 결론으로 이끌어내지는 않았다. V.V. 보론초프도 자본주의 운명에서 세금 부담 등을 언급했었지만, 마을 공동체(미르)에 대해서는 자연스러운 조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만 언급했었다. 그러나 핵심은 농촌 사회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자연적인 조건이란 무엇인가. 마을 공동체 내에 경제적 관계 체계를 연구하여, 시골에서 드러난 '자연적인 조건'을 가리는 이전 시대의 잔재를 청산하고, 제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물론 V.V 보론초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을 관계 체계는 농민의 절대적인 분화로 드러났다. 속박, 대부(고리대금), 노동 용역 등이 완전하게 없어질수록, 농민층 분화는 더욱 심화된다. 젬스트보 통계에서도 볼 수 있는 분화는 기정사실이며, 농민들은 완전하게 반대 집단으로 분열됐다.

 

- 'Otrabotki', 노동 용역은 지주를 위한 종속 농민 노동을 뜻한다.

 

- 화폐 지대, 자본주의적인 지대 사이에서는 엄격한 구분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적인 지대에서는 농업에서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가 존재한다고 전제하며, 화폐 지대에서는 종속 농민들이 존재한다고 전제한다. 자본주의적인 지대에서는 고용주 이윤을 공제한 뒤에 남은 초과 가치 일부이지만, 화폐 지대에서는 농민이 지주에게 지불하는 전체 초과 생산물 가격이다. 화폐 지대에서도 농민들은 지주들에게 지불하는 지대이다. 농민들은 현재에도 지불해야만 하는 세금들은 부분적으로는 화폐 지대를 나타낸다. 농민 토지 임대는 화폐 지대를 지불하는 식이며, 농민들은 토지에 대해서 지불해야만 하는 높은 지대란 빈약한 임금에 불과할 뿐이다.

 

- 임금 노동에서는 고용으로부터 소시민 계급의 본질적인 특징이 아니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자. 사회 경제 체계가 모순을 포함한 시장에서는 모든 독립적인 생산을 포괄하며, 특히 생산자 대중들은 임금 노동자로 전환되는 경우도 있다.

 

- 빈농들은 토지를 소유한 임금 노동 계급들로 배정하는 게 옳다는 점을 증명하려면, 농민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는 어떤 종류로 노동력을 판매하는지만이 아니라, 고용주들은 어떤 식으로, 어떠한 종류로 노동력을 구매하는지를 보여줘야만 한다.

 

- 코나드(Conard) 교수는 독일에서 참 농민 기준이 한 쌍의 짐마차를 끄는 가축을 소유한다고 생각했다.(Gespann bauernguter) 당시로는, 러시아에서는 기준이 더 높았다. 여기서 농민이란 고용 노동, 부수 산업에 종사하는 개인 또는 가구 비율이다. 스테부트 교수는 1882, 농노제가 몰락한 이래로, 소규모 경제 단위를 가진 농민들은 곡물 재배에만 전념했으며, 주로 러시아 중부 흑토 지대에서 대부분은 장인,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였으며, 농업이란 단지 보조적인 직입이었을 뿐이었다. 러시아 농업, 결함 및 개선을 위한 조치(1883)에서

장인들은 건설 등 산업 시설에서 임금 노동자들을 포함했다. 용어 사용은 부정확하더라도, 경제 문학에서는 널리 퍼진 말이었다.

 

- 토지 소유권과 농업(1896)에서는 농업이 많은 유럽적인 형태로 형성된 임금 노동들을 살펴볼 수 있다. J.코나드(J.Conard)는 농민 소유물이 토지 없는 농민들이나, 시장 정원사의 토지, 소유주가 추가로 외부 직업과 고용을 찾는 부분과도 구분된다. 프랑스에서는 1881년 인구 조사에 따라 1,800만 명, 인구 절반보다 약간 적은 사람들이 농업에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다. 900만 명 토지 소유자, 500만 명 소작농과 반작물 농민들, 400만 명의 일용직 노동자, 소규모 토지 소유자, 임금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소작인 등이었다. 프랑스 농업 노동자에서 최소 75%는 자신들의 토지를 소유했었다. 독일 같은 경우로는 농촌 노동자에게는 토지를 소유한, 소작농, 별장 주인, 정원사(토지 농민)들로, 계약직과 일용직 노동자들도 토지를 소유했었고, 1년 중 특정 기간 동안에도 고용되어 노동했다. '3일 노동자'와 같은 계약직과 일용직 노동자들은 대규모 토지 재산이 지배적이었던 독일 지역에서 농업 노동자들의 대부분을 구성했다. 여기에는 임대 토지에서 농사를 짓던 농업 노동자로 포함됐다.

 

- 특히 농민층 분화로부터 국내 시장이 형성됐으며, 면직물 제조업은 개혁 이후로도 급속도로 성장했으며, 농민들의 대량 몰락까지 존재하는 국내 시장에서 큰 성장을 설명한다. 섬유 산업론에서 설명했었던 인민주의자들조차도, 모순을 전혀 설명하지는 못했었다.

 

- I 호로비츠, 러시아 마을 경제(1892)도 있다. 호로비츠는 젬스트보 통계 보고서에서 경제적 힘에 따른 농민 집단들의 결합된 표가 없었다.

 

- 이주 제한은 농민층 분화를 지연시켰다.

 

- 시베리아 이주로는 프리막(Preemak)의 그림 자료를 참고하자.

 

- V.V 보론초프는 자본주의 운명에서 상인 자본과 산업 자본 간 관계 사실을 조사하지 않았다. 정작 인민주의자들도 마르크스 이론의 충실한 추종자라고 말했었지만, 상인 자본을 모호하게만 '자본화', '소득 자본화'로만 대체해서 표기했었다. 그리고 모호한 덮개로만, 회피해갔다. 자본주의적인 생산의 전신은 러시아에서 상인 자본이 아니라, 그저 '인민 생산'일 따름이었다. V.V 보론초프는 자본주의 운명에서 저자는 정작 '자본주의 운명'은 다루지도 않았으며, 자본주의 자체도 없었고, 그저 세금을 부과하는 방법만을 다루었다. 또한 세금 부과 방식과 강제 노동 경제에서 잔재 사이에 따른 불가분한 관계를 전혀 파악하지도 못했으며, 이상화만 해댔다.

 

- 발루예프 위원회(Valuyev Commission)는 차르 장관이던 당시 P.A. 발루예프 위원장으로 활동했었던 '러시아 농업 상황 조사 위원회' 소속이었다. 1872-1873년 사이에 위원회는 개혁 이후로 러시아 농업 상황을 다루는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었다. 주지사 보고서, 지주 진술 및 증언, 귀족 원수, 젬스트보 행정부, 볼로스트 지역 위원회, 곡물 상인, 마을 사제, 쿨라크, 통계 및 농업 협회, 농업 관련 기타 기관 증언들을 포함한다해당 자료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간된 러시아 농업 상태 조사 위원회 보고서(1873)에 게재됐다.

 

- 증여 토지 농민들은 1861, 개혁 때 지주와 '합의'했으며, 상환할 필요가 없던 증여로부터 토지 분배를 받은 건 정작 지주 농민들이었다. 증여 토지 소유자들은 소위 '최상위', '법정' 분배로부터 해당 지역에 대해 법으로 정해진 분배에서 1/4에 해당하는 비참한 토지만 받았었다. 개혁 이전에는 농민 분배를 이뤘었던 나머지 모든 토지들은 지주들로부터 압류됐으며, 농노제가 폐지된 뒤에도, 증여 토지 소유자를 강제로 토지에서 몰아냈으며, 경제적인 속박 상태로 묶어뒀다.

 

- '3일 노동자'는 토지를 소유한 농업 임금 노동자이다. 빈곤선에서 소유한 토지로부터 농사를 짓는 '3일 노동자'는 곡물이나, 현금 20-30루블을 받는 대가로부터 노예 신분에 동의한다거나, 여름 내내 부지주 쿨라크 농장에서 일주일에 3일 노동해서, 빚을 갚는 일용직 노동자들이었다. 토지 소유 산업 노동자들은 제정 러시아 북서부 지역에서 특히 폭 넓게 나타났다.

 

- 오스트제 지역(Ostsee region)은 제정 러시아에서 발트해 지역이었으며, 에스틀란트, 쿠틀란트, 리플란디아 주를 포함한다. 해당 지역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연방 공화국 영토였다.

 

- 레닌은 인민주의 이론에서 '인민 생산'에 대해 '인민의 벗'이란 무엇이며,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어떻게 싸우는가에서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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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농민층 분화 요인

 

2-1. 젬스트보 통계 조사 및 분석

 

2-1-1. 노보로시아 젬스트보 통계

 

통계 도표 참조.

 

V. 포스트니코프는 남러시아 농민 농업에서 타우리다 지역, 헤르손 및 예카테리노슬라프 지역 통계를 수집했었다. 타우리다 지역에서는 젬스트보 통계학자들은 농작물 재배 면적에 따라 농민 가구를 분류했다. 조밀한 농업과 곡물 지배가 우세한 지역에서 각 집단의 경제 사정을 판단했다. 먼저 농작물 재배 면적 분포가 불균등하다는 점이다. 전체 가구 2/5 가운데 전체 인구 3/10을 구성하며, 전체 농작물 재배 면적으로는 약 1/8을 소유한다. 전체 가구 수에서 2/5를 차지하는 중농들은 농사 소득으로 평균 지출을 충당한다. 가구의 1/5은 부농들이며, 경작 면적 절반 이상을 자신들의 수중으로 집중시키고 있다. 가구 당 작물 면적은 농업의 상업적 성격이 매우 뚜렷하다는 점이다.

 

상업적 농업 범위를 계산해봤을 때, 농장의 총 작물 면적에서 식량 면적, 사료 면적, 농장 추가 제공 면적을 분리해서 생산물이 판매되는 시장 또는 상업 지역 규모에 도달한다. 당시로는 작물 재배 면적에서 11.8% 만이 시장용으로 수확량을 내는 반면에, 작물 재배 면적이 36.5% - 52% - 61%로 꾸준하게 증가하면서부터, 부농은 상업적인 경작에도 종사하며, 연간 574-1500 루블에 따른 총 수입을 확보했다.

 

자본주의 농업 아래에서 부농이 경작하는 면적은 가족 노동을 기준으로 삼아도, 초과하기 때문에 여기서도 노동자를 고용해야만 한다. 타우리다 구베르니아, 북부 3개 군에서 부농은 14,000명 이상의 농촌 노동자를 고용한다. 반면에, 빈농들은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판매한다5-10 데시아틴 정도 적은 면적을 가진 집단(그룹)에서는 토지 경작으로부터 얻은 소득이 가구 당 현금으로 약 30루블에 불과하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다뤄지는 국내 시장 창출은 상업적이고, 기업적인 농업 생산물로 상품으로 전환되며, 빈농이 판매하는 노동력에 따라서 상품으로 전환된다.

 

부농들은 배정지를 잘 제공 받을 수 있음에도, 구매한 토지와 대부분을 자신의 수중으로 쥐고 있으며, 소규모 토지 소유자와 자본주의적인 농부로 전락하게 된다. 17-44데시(1,700 - 1,600) 정도되는 토지를 임대할 때는 현지 가격으로 약 70-160루블 비용이 든다. 상업적인 거래에 따라서 곧 토지는 상품이 된다. 가축과 농기구 부문에서 부농은 빈농이나, 중농보다도 훨씬 더 나은 농기구를 갖출 수 있다. 농민에 대해 즐겨 사용하는 평균 수치마저 허구적이고, 농민 부르주아지들의 상업적인 경작은 상업적인 가축 사육, 특히 대평야(대초원) 지역에서는 거친 털을 가진 양의 사육을 수반하게 된다. 총 수확 및 제초 기계(3,061) 가운데 2,84191.8% 정도가 전체 가구 수에서 1/5은 부농층에 속한다. 부농들은 평균보다도 뛰어난 농장 규모, 풍부한 농기구를 공급받으며, 안정적인 재정 자원 등을 사용할 수 있다농장 규모가 커질수록 농산물 생산 비용은 생산 단위 당으로 감소한다. 농민 집단에서 많은 작물 면적은 고용 노동자, 가축, 농기구 등으로 계산한다. 농장 규모와 농민이 경작하는 면적이 커지면서, 농업에서는 매우 중요한 지출 항목으로는 노동력 유지에 대한 지출이 감소하거나, 넓은 면적일수록, 경작 면적율이 비교적 작은 집단 간 지출 작물 간에서도 거의 절반으로 떨어진다. 더 큰 생산력을 가질수록, 당연하지만 대농장은 안정적이며, 노보로시야 뿐만이 아니라, 러시아 중부 지방에서도 해당한다.

 

작물 재배에서도 상품 생산이 깊이 침투해서 관여하게 되며, 농업인들 사이에서도 경쟁은 심화되고, 토지 및 경제적인 자립에 대한 투쟁도 치열하다. 따라서 부농들로부터 중농 및 빈농들이 축출된다. 농업 기술 발전에 따라 농업 체계, 밭 경작 쳬계가 나타나게 되는데, 곡물 재배 및 조방적 경작 같은 경우로는 단순 경작 면적이 확대되거나, 단위 경적 면적 당 노동자, 가축 등의 수가 감소하지만, 축산 도륙, 작물 재배 산업에서는 더욱 집약적인 농업 기술을 도입해서, 단위 경작 면적 당 더 많은 노동자들이 작물 뿌리 재배, 가축 확보, 사료용 풀 재배 등으로 나타난다.

 

부농은 임금 노동을 고용하면서부터 타우리다 구베르니아에서는 세 군에 대한 자료가 존재한다. 전체 농민, 농장 수에서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 비율을 취할 때 토지 경작으로부터 고용 노동에 의존하는 농민 전체와 비교해보면 미미하다는 점이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100명 중 2-3, 최대 5명 정도만, 농민 자본주의 모습이 나타났다. 농장 고용 노동자들의 토지 수로나, 농민 농장 총 수와 비교해봐도, 차라리 러시아 산업 부문에서 자본주의를 '제거'할 수도 있다. 임금 노동자 부문에서 산업에 종사하는 가족은 러시아 산업 부문에서 종사하는 전체 가족 수 대비 (%)로 표기한다.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 수를 구하고자 한다면, 단순 노동력 판매에 의존하지 않고, 농업에만 의존하는 농장 수와 비교하는 쪽이 더 낫다. 왜냐하면 러시아에서는 소농 비중이 크게 차지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 비율로는 전체 생산량에서도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판매용 곡물을 대량 생산하는 부농층에서는 34-36% 정도의 매우 높은 수준으로 나타난다. 경작에서 나타나는 여러 특수성이 아니라, 전체 경작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농노, 정규직, 일용직 고용이 농업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소작농에 따른 경제적인 지위 간에는 큰 차이는 없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마을 농장 노동자, 외부 활동에 따른 농업에 종사하기 때문이다. '드네프르 지역(위예즈드)’에서는 소농층 가구 전체의 40%를 차지했으며, 경운기와 같은 생산 수단을 갖지 않은 기구로는 전체 가구 수에서 39%를 차지했다


농촌 지역에서 무산자들은, 노동력 판매 외에도, 할당지를 임대해서 소득을 벌 수밖에는 없었다. 1884-1886년 사이에서 타우리다 구베르니아 세 군에서는 임대 토지가 전체 농민 경작지에서 25%에 달했다. 중산층 지식인들에게 임대된 토지를 제외하고는, 1/3이 토지를 임대했으며, 농촌 무산자들의 토지는 정작 농민 부르주아 계급들이 임대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할당 토지들은 남부 러시아 농민들 사이에서도 폭 넓은 투기가 목적이다. 토지는 약속된 어음(구권) 관계로부터 대출 담보로 주로 사용하며 때로는 더 장기적이기도 했다. 농민 부유층들은 상인 자본과 고리대금업자를 대표하는 자본가들이었다. 따라서 '쿨라크'과도 같은 고리대금업자는 '진취적인' 농민이 아니었다. 농민 부유층으로부터 상인 자본, 산업 자본에 대한 실마리를 가졌었다. 자본의 모습이 이뤄지게 되면서, 주변 환경과 문화에 따라서도 달라졌다.

 

가구 당 10-25데소, 평균 16.4데소 정도에 소득을 가졌었던 중산층들을 살펴보자. 과도기적이고, 191루블 정도의 수입을 농업에서 얻었으며, 평균 타우리디안 사람들의 200-250루블이 되는 연간 지출보다는 다소 낮았다. 가계당 평균 3.2마리 정도 가축을 길렀으며, 당시로는 4마리 정도가 필요했었다. 중산층 농장은 매우 불안정하기도 해서, 멍에 인력을 고용하고 투입해서, 토지를 경작했다. 따라서 생산성이 매우 낮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116가구 정도가 쟁기 도구마저 없었고, 고용하는 일보다는 노동을 제공하는 일이 더 잦았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구베르니아에서는 배정지에 따른 분배는 매우 균등했었지만, 상층에서 하층을 몰아내는 일이 잦았다. 강제 소유 토지에서 자유 토지를 매수하거나, 임대 토지로 넘어가면 토지의 집중도는 농민이 사용하던 총 토지 분배가 배정지 분배와는 상당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충산층은 후순위로 밀려나며, 배정지(46%), 사용 토지(41%)이며, 부층은 보유 토지를 확대해서, 배정지(28%), 사용 토지(41%), 빈층들은 배정지(25%), 사용 토지(12%)로 경작에서 밀려난다.

 

소농층에서도 할당지 역할은 감소하게 된다. 토지 임대로부터 전체 농경지 면적으로는 토지 매입 및 임대가 우세하다. 토지에 발이 묶인 농민들은, 토지 소유권에 따른 세금 부과 등으로부터 자본주의가 농업에 더욱 침투하면서 파괴됐다. 토지 임대에서는 농민층 분열 문제가 두드러진다. 토지 임대에 의존하는 비율로는, 36-68%, 40-70%, 30-66%로 나타났으며, 가구 당 임대 토지는 크기가 작았다. 탐보프 통계에 따르면, 작은 구역을 소유한 농민은 큰 구역을 소유한 농민보다도 더 많은 토지를 임대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평균 수치로는 토지를 임차하는 사람들은 56%, 토지 부유층에게 집중된 임대 토지 과점 현상을 어느 정도는 해소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임대 가구 당 평균 임대 토지 면적을 계산한다는 건 터무니 없을 뿐이다. 임차 가구 당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 가구 당으로 계산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카리셰프는 비할당 토지 임대에서 농민들을 모아 15루블이라는 가격에, 2데시아틴을 받았었고, 파산 직전에서 적정 토지 면적까지 더해져서 48데시아틴을 받았으며, 데시아틴 당 3.55루블이라는 비교적 낮은 가격에 토지를 도매로부터 매수했었다. 전체 마을 공동체 수치로도, 할당 농민들로 분류해보면, 공동체 자체에 대한 보다 정확한 지적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임대 토지는 농민 부유층 계급들의 수중에서 개인 임대로만 국한됐지만, 마을 공동체에서는 임대에 적용되지 않을 거라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임대 토지 역시나 자본에 따라 분배되며, 농민 딥단 관계로는 공동체에 따른 토지 임대를 하는 곳에서도 늘 일정했다. 카리셰프는 공동체와 개인 간 '임대 갈등'을 나타냈었지만, 오히려 공동체 임대는 노동 원칙, 공동체 구성원 간 균등한 임대 토지에 따른 분배 원칙이 특징이다. 대부분의 인민주의자들도 이와 같이 주장했으며, 오류가 더 많았다. 당시에 카리셰프는 젬스트보 통계 조사 결과를 요약하라는 임무를 맡았었지만, 소규모 부유층 농민 집단의 수중으로, 임대 토지가 집중됐다는 젬스트보 통계를 신중하게 다루지는 않았었다. 마찬가지로 타우리다 구베르니아에서는 농민 공동체로부터 임대하던 국유 토지를 분배했으며, 노동 원칙, 균등 분배 원칙에 대한 청사진이었다.

 

남부 러시아 농민 농업에 따른 젬스트보 통계 자료로는 농민의 완전한 분화 요인, 농민 부르주아지들이 시골에서 완전한 지배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마을 공동체에서도 기업가 농민들은 늘 최고의 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카리셰프 뿐만이 아니라, 포스트니코프의 작업은 중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작업은 도시 지식인들이 농민 공동체를 통합적이고, 동질적인 경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이론이 전무하던 저자는 통계를 전혀 처리하거나, 평가하지도 못했으며, 그저 '조치'만으로 통계를 바라만 보거나, 농업, 수공예, 공장 공동체를 제한, 명령, 관찰 등만 하면서 계획을 지어냈다. 인민주의자들은 포스트니코프 작업에서 첫 긍정적인 점을 대놓고 무시했으며, 두 번째 부분에만 집중했다. 정작 당시에 포스티니코프는 러시아 자본주의 도입을 비난했었지만, 남부 러시아 농촌 지역에서도 자본주의 관계가 만연했었지만, 널리 퍼졌다는 자료를 피하기만 했었다.

 

노보로시아 자료에서는 주로 타우리다 구베르니아 북부 본토 3개 군, 베르됭스크, 멜리토폴, 드네프르, 또는 후자군이다. 포스티니코프는 실제 토지에서 얻을 수 있는 금전적인 수입 규모 간 차이를 해명했다. 동일한 계산으로부터, 수확량, 판매되는 곡물 간의 가격을 가정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농이 더 나은 수확량과 곡물을 확보했으며, 더 큰 이윤으로 판매했다. 그렇다면 토지를 경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상당 규모의 토지를 보유할 수 있는 까닭은 왜일까. 바로 상인, 산업 시설 소유주 등도 포함되기 때문이다.다름 아닌 멜리토폴 지역에서 발생한 통계적인 수익률을 확인해보면 된다. 젬스트보 통계로는 농민 농장 규모가 클수록, 주어진 경작지에서 사용된 도구, 노동자 및 짐을 끄는 가축 수가 줄어든다. 흑토 지대에서는 농부 말 당 경작지가 5-7-8데살이지만, 3포지 윤작 방식에 따르면 7-10데살이었다. 러시아 지역 인구 일부에서 말 소유 감소는 짐 끄는 가축 수, 경작지 사이에서 일정한 비율로 반복됐다. 따라서 농민 몰락으로 농업 발전을 일으켰다. 사회 경제적으로도, 자본주의 농업이 발전할 수 있는 까닭이다. 더불어 가금류, 경작지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정한 비율의 반복도 농기구를 취득한 지주, 대규모 농작물의 재배자, 농민 부유층들로부터 달성된다. 일례를 들자면 영국은 농업 자본주의가 전형적이다. 농부의 40.8%는 고용 노동력을 전혀 고용하지 않는다. 68.1%2명 이하의 노동자를 고용했다. 82%4명 이하의 노동자를 고용한다. 이주, 거주 노동자를 비롯한, 농업 무산층에서 대중들은 일당으로 고용된다. 자신들은 수 많은 마을 은행과 대출저축조합에 의존한다. 번영하는 농민에게는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하며, 경제적으로 취약한 농민들은 보증인을 찾을 수도 없고, 심지어 대출마저 받을 수 없었다.

 

멜리토폴 지역에서는 집단에 속한 13,789 가구 가운데 4,218 가구만이 자신의 가축으로 땅을 경작했었고, 나머지 9,201 가구는 멍에를 졌다. 드네프르 지역에서는 8,234 가구 가운데 4,029가구가 자신들의 가축으로 땅을 경작했고, 3,825가구는 멍에를 졌다. 농민층은 분열됐으며, 농민 부유층들로부터 농장 협동의 원칙들마저 정작 흔들리고 점은 은폐했다. 집단 별 토지 사용 수치로는, 할당 토지, 임대 토지, 매입 토지를 합산하고는, 임대 토지를 계산에서 제외해버렸다. 멜리토폴, 베르됭스크 지방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고, 포스트니코프는 부유층들의 상업적인 농업 및 토지 수요를 언급하면서, 불법화가 만연했던 농민 상을 지적했었다. 베르너, 타우리다 구베르니아 편람(1889)에서는 전체 농민의 할당 규모에 따라 분류했으며, 1-2명 노동자, 2-3마리 짐수레 가축을 가진 농민 집단을 주로 채택했었다. 따라서 집단 범위 안에서 할당 규모가 커질수록, 임대 가구 수도 증가했으며, 임대 토지 양이 감소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는 점이다. 같은 수의 가축을 가진 농민만을 고려하며, 극단적인 집단은 제외된다. 가축 수가 같다면 경작지 면적도 같으며, 할당량이 적을수록 임대 토지 면적도 커질 수밖에는 없다. 따라서 문제는 가축, 농기구 등 수가 다른 기구에서 임대 토지에서 어떤 식으로 분배할 수 있을지에 대한지가 관건이다. 그러나 노보러시아 지역에서는 농업, 농민 분화가 다른 지역보다 더 두드러진다는 점이 특수성 때문만은 아니다. 농촌 소부르주아지들은 대부르주아지들에게 늘 위협을 받았으며, 농업 분야에서도, 자본가들은 노동 생산력을 더욱 늘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18880년대 인구 조사를 주로 과세 목적으로 시행했으며, 젬스트보 통계학자들은 통계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이 오히려 매우 편향적이었고, 잘못 분류했었다. 수집된 세부 사항들이 있었음에도, 포스트니코프, 남부 러시아 농민 농업이라는 자료를 자세히 조사해봤을 때, 1861년에 들어서야 러시아에서는 농노제가 폐지됐고농민 공동체에서는 주기적으로 농민들에게 배정지가 재분배됐다.

 

2-1-2. 사마라 구베르니아, 젬스트보 통계

 

사마라 구베르니아, 노보우젠스크 지역, 28,276세대 토지 소유 가구, 남녀로는 모두 164,146명이다. 이곳에서 농업 생산 집중도는 높았다. 공동 자본가는 전체 가구에서 1/4, 10마리 이상 가축을 기르는 가구 수로는 농지 면적에서 36.5%를 소유한다. 빈농, 중농을 합한 75.3%와 맞먹는 수치이다. 가구 당 15.9개의 농지라는 평균 수치는 거짓이다. 빈층에서는 자영농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개량된 농기계가 빈농에게는 전무하며, 중농은 미미한 숫자만 가지고 있었다. 가축 밀도도 농지 면적 밀도보다 높다. 부농들은 대규모 자본주의적인 농경과 가축 사육을 결합시켰다. 일반 농민들은 토지를 소유한 농노이자, 일용직 노동자이며, 이들의 주요 생계 수단은 노동력 판매이다. 지주들은 가끔 노동자들을 농장에 묶어둔 채로 임금을 삭감시켜 한 두마리 가축으로 지불하기도 한다. 농민 집단은 농장 규모뿐만이 아니라, 농사 방식도 매우 다르며, 상층 농민 가운데 40-60(%)의 많은 비율로 철제 쟁기, 가축(), 증기 탈곡기, 풍차, 추구시 등과 같은 개량 농기구를 공급받는다. 상층에서는 전체 개량 농기구의 81.9%, 중층은 38.2%를 보유한다. 나머지 개량 농기구에서 17%, 빈층은 37.1%를 보유한다.

 

따라서 총 5,724개 농기구 가운데 7개 정도다. 가축을 적게 보유한 농민일수록 부농보다 전혀 다른 농업 경제 체계로 운영해야만 한다. 빈농들은 매일 쉬지 않고 밀을 파종하고자, 쟁기질도 여러 번 반복한다. 따라서 부농과 빈농 사이에는 곡물량에 따른 곡물질도 빈농들이 훨씬 떨어지며, 부농만이 비교적 수확량이 더 많다. 그렇다면 농민 부유층은 어떻게 형성될까. 집단별 소유 및 사용 토지 수치에서 제공되는데, 76가구 구역에서는 농민은 총 57.128데스의 매수 토지, 304,514데스 정도된 임대 토지를 소유한다. 이 중에서 177,789데스는 5,602가구가 임대하는 비할당 토지이다. 다른 마을 공동체에서 임대받은 할당 토지 가운데 47,494데스는 3,129가구를 소유하며, 마을 공동체로부터 임대받은 할당 토지 가운데 79,231데스는 7,092가구가 소유했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매수 및 임대 토지가 매우 집중됐다. 총 매수 토지에서 9/10은 부유한 가구 수중이 1.8%였다. 모든 임대 토지 가운데 69.7%는 농민 자본가 수중에서 86.6%는 농민 상위 계층 수중에 있었다. 할당 토지 임대 및 수치를 비교해봐도, 토지는 농민 부유층의 수중으로 전반적으로 넘어갔다.

 

토지가 상품으로 전환되면, 토지 도매 구매 가격은 비교적 저렴해지며, 임대된 비할당 토지에서도 1데시아틴 가격을 결정하면, 하위 집단에서는 상위 집단으로 일정한 수치를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인민주의자들은 임대 토지 집중도는 무시했으며, 특히 카리셰프는 <수확과 곡물 가격이 러시아 국민 경제의 특정 측면에 미치는 영향>에서 곡물 가격이 하락하며, 수확량이 증가하면 임대료가 상승하고, 기업가적인 임차인들은 수요를 줄이게 되고, 소비 경제 대표들은 임대료를 인상해야만 한다고 자의적으로 결론지었다. 왜냐하면 농민 부유층에서 곡물 가격이 하락했음에도, 임대료를 인상하려 들었기 때문이며, 수확량이 증가하면 가격 하락을 상쇄했다. 농업에서는 기계 사용에 따른 농민 부유층 수중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카리셰프 역시나, 농민 분화 연구가 아닌 평균 농민으로 산정해서 자의적이고, 부정확한 전제를 제시했었다부농들은 전체 농업 생산량에서도 약 2/3를 차지했으며, 주로 곡물 판매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판매용 곡물을 생산하지만, 이에 따른 어려운 형편의 농민들은 정작 추가 곡물을 더욱 구매하거나, 노동력을 판매한다.

 

인민주의자들의 주장과 국내 시장 형성 과정에 대한 여러 자료를 비교해보자. 농민들이 번영할수록, 공장도 번창한다는 주장에는 부의 사회적 형태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다. 여기서 말하는 부란 생산물과 생산 수단, 노동력을 상품으로 전환할 때 창출된다. 인민주의자들은 곡물 판매에서 농민 농부 그 자신이 생산한다는 생각으로, 곡물을 운송하면서도 철도 건설에서 농민들을 희생시켜야만 한다고 내세운다. 자본가들이 공동체 구성원이면서도 바로 농민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공동 토지 소유권이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자본주의 원칙에 기반한 농업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공동체적 유대감은 이전부터 벌써 무너진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자본주의 농업이 발전했으며, 그들이 말하는 공동체 유대감이란 노동자를 고용하는 대규모 작물 재배 농장에 완전히 적응했기 때문이다. 농민 집단 간 관계에서도 니콜라예프스키 지역에서도 완전히 비슷하게 나타났다.

 

인구의 13.7%의 부유한 가구에서는 10마리 이상의 가축을 소유했으며, 7.4%가 전체 가축의 27.6%와 임대 토지 42.6%를 소유했었지만, 인구의 19.7%를 차지하는 빈곤 가구와 같은 가축이 아예 없거나, 한 마리만 소유한 29%는 가축의 7.2%와 임대 토지 3%만 소유했다. <사마라 구베르니아 통합 보고서>에서도 농민 처지에 대한 설명은 잘 나타나 있다.

 

서부 구베르니아에서는 토지가 부족한 농민들이 이주하거나, 농업 생산 분야에서도 토지에 대한 투기꾼들이 등장해서, 인구가 증가했다. 그러나 토지 형태가 해마다 복잡해지면서부터가치가 상승했으며, 토지는 상품화되어 엄청난 부와 많은 사람에게 파멸을 초래했다. 남부 상인과 농민 소유 농자, 일부 경작지에서는 3,000-6,000 데시아틴을 경작하기도 드문 일이다일부 수로만 데시아틴에 따른 국유지를 임대하고는 8-10-15,000데시아틴의 땅을 경작한다. 사마라 구베르니아 농업 무산층 존재와 성장은 비교적 최근이었으며, 판매용 곡물 생산 증가임대료 상승, 미개척지와 목초지 경작, 산림 개간 등이 있었다. 구베르니아 전체 무토지 가축 수로는 총 21,624 가구였으며, 비농업 가구로는 토지를 분배 받은 가구를 기준으로, 33,772가구였다. 무마 가구와 말 한 마리를 기르는 가구로는 모두 110,60가구였으며, 남녀 총 60만 명, 가구 당 5명과 소수 사람으로 계산된다. 법적으로는 공유지를 소유하더라도, 무산층으로 간주될 수는 있다. 실제로 일용직 노동자, 쟁기질꾼, 양치기, 추수꾼 등 대농장에서 1/2-1 데시아틴 정도를 경작하는 비슷한 노동자들도 있다. 가족들은 거처로 남아 먹을 것을 마련하고자 할당량을 정한다. 가축을 보유하지도 않거나, 가축 한 마리를 소유한 농민도 무산층에 속할 수 있다. 분류표 지적에 따라 포스트니코프도 같은 결론을 내렸었고, 농민 최하층에서는 사회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적도 있었다.

 

사마라구베르니아 통계 수익률(놀보우센스크 지역, 사마라, 1890), (니콜라예프스키 지역, 1889)에서도 비슷한 자료가 있으며, 사마라 구베르니아 종합 수익률에서는 토지 할당 규모로만 불만족스럽게 분류해놨다. 여기에서 농민 대중은 낡은 농기구를 개량된 농기구로 교체하려는 운동이 있었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이는 젬스트보 보고서에서만 총 수치를 가져왔으며, 정작 어떻게 농기구를 분배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품 곡물 생산 비용을 낮추고자, 기계를 사용하던 자본주의 농부에 따른 발전은 조사원의 펜 한 자루에서부터 농민 대중 발전으로 변환되어 표기됐을 뿐이었다. 또한 기계는 부농이 구입해서 모든 농민들이 사용하도록 분배됐다는 말도 안 되는 논평을 작성했다. 노동력 판매는 통계학자들이 농업 산업이라고 불렀으며, 산업에서 정규직 및 일용직 노동자는 사마라 구베르니아 종합 수익 목록에서 산업 목록 부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당시에 농업 산업에 종사하던 남성들은 14,063명 가운데 농노 및 일용직 노동자(목동, 쟁기질꾼)이었다. 특히 노보우젠스크 지역 종합 보고서표에 따르면 지역 공동체 60%는 토지를 재분할했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공동체의 13.8%만 그렇게 했다.

 

2-1-3. 사라토브 구베르니아

 

흑토 지대의 중심이자 기름진 토양을 가진 곳은 사라토브 구베르니아였다. 카미신 지역에서는 농민들의 가축 보유 현황을 비교적 확실하게 분류할 수 있었다. 해당 지역에서는 40,157 가구, 남녀 인구 263,135명이었으며 작물 재배 면적은 435,945 데시아틴이었다. 평균 가구 당 10.8데시아틴 정도였다. 작물 재배 멱전은 대작물 재배자들의 수중으로 집중됐으며, 가구의 1/5에 불과한 전체 인구의 1/3인 부농은 전체 작물 재배 면적에서 53.3%로 절반 이상을 보유했었으며, 농업의 상업적 성격으로는 면적의 크기에 따라 가구 당 평균 27.6데시로 나타났따. 부농은 가구 당 14.6마리 정도의 상당 수 가축을 소유하고 있었다.


해당 지역에 있었던 농민의 가축 총 수, 3/5가 농민 부르주아 수중에 집중됐다. 도시 주위로는 최하층인 농촌 무산층은 박살난 수준이었다. 대부분의 인구 1/3을 차지한 가구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지만, 전체 농경지에서 1/8에 불과했으며, 전체 가축 수로도 훨씬 적은 11.8%를 차지하는 수준이었다. 주로 텃밭 소유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산업 노동자 등이 분포했었다.

 

경작 면적의 집중과 농업에서 상업적 성격이 강화되면서부터 농업은 자본주의적인 농업으로 전환됐다. 하위층에서는 노동력을 판매했고, 상위층에서는 구매했다. P.N.스크보르초프는 젬스트보 통계에 대해 '산업고용'이라는 지나치게 폭 넓은 의미를 부여한다고 지적했었다. 농민들이 할당지 밖에서 종사하는 모든 종류의 직업 가운데에는 산업이라는 범주가 속해진다. 공장주, 노동자, 제분소, 과일 농장주, 일용직 노동자, 정규직 농장 노동자, 매수인, 상인, 비숙련 노동자, 목재상, 목재공, 건설업자, 건설 노동자, 자유업 종사자, 사무원, 거지 등도 모두 산업가들이었다. 이러한 '할당지'에 따라서 농민들의 직업과 외부 산업에 따른 무차별적으로 할당되어 기존의 전통적이면서도, 공식적인 관점들의 잔재들에만 머물렀다. 농노제 아래에서는 시대착오적인 생각도 가졌었다. 젬스트보 통계에서 나타났던 거짓된 평균 농민에 대한 말과 농민들에 대한 차별화를 조장했으며, 그것을 연구할 수 있는 여지마저 완전하게 배제해버렸기 때문에, 그러한 차별화가 잔존될 수 있었고, 유지될 수 있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외부적인 작업에 의존하는 농민들이 많은 곳에서도, 특히 카미신 지역이 사르핀카 산업으로 유명했다. 농민 농업에서 가계부에 따른 수익 처리는 농민 산업이 경제 유형으로 분류되지 않는 한, 거론된 산업가들 중에서 고용주와 임금 노동자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경제 통계마저 만족스럽지는 못했으며, 차별마저 없는 최소한의 경제적 유형이었다. 더욱 자세한 분류로는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는 자영업자, 또는 고용하지 않는 자영업자, 상인, 매수인, 가게 주인, 장인, 고객 맞춤 담당 산업가 등이었다. 더불어 산업을 노동력 판매로 간주하기 위해 농민 산업가들 대부분은 대체로 임금 노동자들이었다. 임금 노동자를 구분할 수 있다면, 상층에서 산업가의 비율도 줄어들 수 있었다.

 

하리조메노프는 임금 노동자와 관련한 자료를 제시했으며, 수확, 풀베기, 일용직 노동을 위한 단기 고용은 이미 널리 퍼졌다. 또한 농장의 강점과 약점을 판단할 수 있는 특징적인 기준과 잘못된 주장의 성격마저 드러났다. 당시에 서유럽이나, 러시아 현실을 고려해봤을 때도, 일용직 노동자 고용은 농촌 부유층들로부터 매우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임대 토지 부문에서도 농민 부유층들의 수중으로 집중됐다. 이를테면 사라토프 통계청에서 제시했었떤 통합 표에서는 토지를 임대한 농민 수가 아닌, 임대된 토지 수만을 보여줬으며, 임대 가구 당이 아니라, 기존 가구에서 임대된 토지 양으로만 파악했었다. 따라서 부농일수록 토지를 더 많이 임대했다. 할당지도 더 잘 갖춰졌으며, 부유층에서도 대부분은 중농들을 몰아내어, 농촌에서 할당지 역할은 양극단으로 감소했다. 카리셰프도 추가적으로 토지 임대를 자세하게 조사했다. 카리셰프는 토지 임대가 임차인 번영에 의존하며, 다른 조건이 동일했을 때, 임대할 수 있는 토지를 둘러싼 경쟁들은 부유층들에게 더 유리하다고 결론 내렸으며, 비교적 부유한 가구일수록, 덜 부유한 가구는 뒷전으로 밀어낸다고 지적했다. 또한 임대 토지가 할당 규모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할당 분류가 부정확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토지 임대는 토지가 제대로 공급되거나, 제공되지 않는 집단에서 더 많이 이용했다. 반대로 토지가 잘 공급되거나, 제공되는 집단에서는 더 많은 토지를 임대할 수 있도록 허가해줬었다. 경제적 힘에 따른다면, 부농들에게는 할당 토지가 더욱 잘 제공됐지만, 임대할 수 있는 토지를 차지할수록, 통계에서도 나타났다. 가계의 번용도는 토지 임대에서 결정적이었으며, 토지 할당 및 임대 조건 변화로부터 요인들도 변화했으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카리셰프는 산업적인 번영의 이와 같은 영향력을 충분히 조사했었지만, 일관된 관점을 고수하지는 않았으며, 부정확하게 기술했었다.

 

임차인에게도 토지 공급 정도는 토지 임대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었기 때문이다. 카리셰프 조사는 일방적이었으며, 부농들이 임대하던 토지 점유하는 방식을 전체적으로 평가하지 못했었다. 카리셰프는 비할당 임대 연구에서 임차인 농장을 더 이상 고려하지 않았으며, 토지 임대에 대한 젬스트보 통계를 요약하는데만 그쳤었다. 더군다나 공식적인 연구 방법으로는 토지 임대와 상업적 성격에 따른 '번영'을 문제를 바라보지도, 해결하지도 못했었다. 카미산 지역에서는 동일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토지 임대료에서 절대 수치만 재현시키고는 한 가구당 평균적인 임대 토지 면적만 계산했었다. 부농들의 수중에서 토지 임대료는 집중됐고, 토지 임대료에 따른 산업적인 특성, 최하층 농민들에 따라 상관되는 토지 임대의 성격을 모두 간과했었다. 따라서 카리셰프는 젬스트보 통계가 인민주의 토지 개념을 반박하면서도, 부농들로부터 빈농들이 추출된다고 지적했었지만, 모든 측면에서 제대로 연구하지도 못했으며, 부정확한 설명과 노동 원칙만 반복했다. 농민들 사이에서는 경제적 불화로 나타나는 갈등이 이었으며, 인민주의자들에게는 그저 이단일 뿐이었다. 카리셰프는 그들을 반박했고, 교정해갔다.


N. 카블로코프는 토지 임대에 대한 많은 형태를 논했었는데, '농민은 자신들의 경작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만큼 충분한 토지를 가지고 나서는, 어떠한 토지도 임대하지는 않는다고평가했었다. 상업 작물 재배에도 종사하는 부농들은 토지를 임대할 수 있도록 점유하는 과정 속에서 기업가적인 활동이 전무하다고 부인했었다. 인민 생산론은 단지 증명되지도 않았지만법적으로는 규정된 이론일 뿐이었으며, 흐발른스크 지역에서는 젬스트보 통계표를 발췌해서, 가축 수가 동일하다면, 할당량이 적을수록 부족분을 임대로 보충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농민들이 가축 소유에서 동일한 조건 아래 가계에서도 충분한 일꾼들이 있다면, 할당 받는 토지가 적을수록, 임대 받는 토지가 더욱 많아지게 된다. 그러나 동일한 가축을 소유한 경우로는, 가계가 소유한 토지가 적을수록 더 많은 임대료를 받는다는 건 자명한다. 왜냐하면 산업적인 번영을 평등하게 취급하기 때문이다. 충분한 토지를 가진 농민은 토지를 빌리지 않는다는 주장에는 어떤 식으로든 증명되지도 않았으며, 젬스트보 통계로부터 인용한 수치로만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농민들이 소유한 배정 토지 양을 비교했을 때, 가난한 사람들이 토지를 임대해서, 산업적인 번영으로부터 임대할 수 있는 토지를 빼앗는 역할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주로 부농들에게 임대된다. 카미신 지역에서도 임대 토지 분배는 짐 수레 가축 수에 따른 농민들을 골라내서, 일정한 배정에 따라 배분하고, 일하는 사람 수에 따라서도, 하위 구분으로 또 분배하기 때문에, 농민들이 적은 토지를 가질수록, 더 많이 임대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 부농 집단의 소멸로 이어진다는 인민주의자들의 주장은 터무니가 없다.

 

L. 마레스, 수확과 곡물가격에 따르면 가구 당 농민들이 임대받은 토지를 계산했다. 그러나 인민주의자들의 '평균'에 대한 아주 작은 사례일 뿐이었다. 다른 멜리토폴 지역에서도 임대 가구 당 임대 토지 양에 따라, 일하는 남성들이 더 이상 없는 가구에서는 1.6데시(dess), 일하는 남성 한 명이 있던 가구는, 4.4데시, 두 명이 있는 가구는 8.3데시였으며, 세 명이 있는 가구에서는 14데시라고 표기했었지만, 정작 대략 1인당 임대 토지 분포도는 거의 동일했다마레스는 V. 포스트니코프 저작과 젬스트보 초록에서, 경제적인 역량이 다른 가구 집단에 따른 임대 토지에서 실제 분배는 살펴볼 필요가 없다고 소홀하게 생각했었다. 이를테면 남성 노동자가 한 명인 가구 집단에서는 임대 가구 당 임대 토지 평균 수치로부터 4.4데시, 5-10데시를 경작했으며, 2-3마리 가축을 기르는 가구 집단에서는 4-50데시 이상의 토지를 경작했으며, 4마리 이상 가축을 기르는 가구 집단에서는 38데시를 합산했었다. 멜라토폴 지역, 빈부격차에 따른 소득 산정을 더한 합계를 추가한 항목 수로 나누면, 비교적 '균등한 분배'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작 멜리토폴 지역에서는 전체 가구 21%, 25데시 이상의 작물을 재배하는 전체 농민의 29.5%로 부유층들에 해당하는 농민들은 토지 할당과 매입 토지를 제공받았으며, 전체 임대 경작지로는 66.3%를 차지했다. 반면에 전체 가구 40%, 10데시 이하 작물을 재배하던 전체 농민의 30.1%였던 빈곤층들은 토지 할당과 매입 토지를 제공받았음에도전체 임대 경작지에 따른 토지 비율이 5.6%에 그쳤다. 1인당 균등 분배 기준이었지만 이와 같은 결과가 나타났다. 마레스는 농민 토지 임대에 대한 모든 계산을 할당 토지를 제공받는 임대 가구가 주로 열악한 두 집단에 속하며, 임대 인구 가운데 1인당 임대 토지가 균등하다고만 결론 내렸으며, 토지 임대에서 농민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비교적 좋은 환경을 누리는 집단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섣부르게 판단했다. 그러므로 마레스의 주장에는 허점과 모순이 상당하다. 경제 생활 면에서는 불평등을 다루면서도, 할당 토지가 아닌 가구 분류를 위한 경제 지표 통계만을 사용했고, 인민주의자들의 근거 없는 주장을 오히려 똑같이 지적하고 말았다.

 

카미신 지역을 예시로 들자면, 사라토프 현과 다른 지역을 비교해보자. 농민 집단 간 비율은 대부분 모든 지역에서도 동일했으며, 중산층과 부유층이 섞여있었던 볼스크, 쿠즈네츠크, 발라쇼프, 세르도프스크와 같은 자료에서도 충분히 분석할 수 있었다. 부농들이 빈농들을 몰아내는 모습은 도처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는데, 특히 카미신 지역에서는 부농들이 다른 지역보다 재산과 수가 더 많았다. 구베르니아에 따른 5개 위예즈드 지역에서 가구 비율은 가축 보유량에 따라 가축이 없는 가구는 25.3%, 가축 한 마리의 가구는 25.5%, 가축이 두 마리 있는 가구는 20%, 가축이 세 마리 있는 가구는 10.8%, 가축이 네 마리 이상인 가구로는 18.4%였다. 반면에, 카미신 지역에서는 부유층들의 비율이 더 컸고, 중산층과 합쳤을 때도, 가축 2마리 이상이 있는 가구는 카시민 지역에서는 부농들이 훨씬 더 부유했다. 해당 지역은 토지와 자원이 풍부했기 때문에, 등록된 남성 1인 당 7.1데시를 할당받았으며, 주베르니아에 따른 5.3데시와 비교해봤을 때,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따라서 농민의 토지가 많을수록 농촌 지역 사회에서도, 농민 부유층 수에 따라 부를 더 많이 가져갈 수 있었다.

 

사라토프 주 자료에서는, 농민 가구 분류를 다룰 필요가 있다. 할당에 따른 분류를 일절 거부하며, 가축, 경작 면적에 따른 경제력 분류만을 사용한다. 젬스트보 통계에서는 이미 할당 분류가 만연했었고, 이를 옹호하는 주장들도 많았다. 농업 농민들을 자세하게 연구하려면, 토지 분류가 필수다. 러시아 생활에서도 근본적인 특징으로, 할당 토지 소유권에서 비자유적인 성격, 법적인 강제력으로부터 평등주의 성격을 띠며, 할당 토지 매매는 극도로 제한되기 때문에, 농업 사회에서 농민 분화는 법적인 제약에서 벗어난다. 농민을 할당 분류로 묶게 되면, 부농과 빈농을 구분하지 못하며, 이렇게 해서 얻은 평균값은, 농촌 사회에서도 존재하는 무산층과 부유층의 차별화를 순전한 거짓말로 더욱 모호하게 만들 뿐이다. 사라토프 통계학자들은 무의미한 할당 분류를 채택했으며, 계산의 오류를 범했다. 카미신 지역에서 비배정 농민 범주를 보더라도, 작물 아래 면적을 무시하고는 빈층의 범주로 할당시켰다. 작물 아래에서 평균 면적은 가구 당 2.9데시였지만, 평균에 관한 도출로는 대규모 작물 재배자 기준으로, 5마리 이상 가축을 기르던 집단에서 가구 당 18데시로, 가구 집단으로는 전체 범주로는 약 1/8을 이뤘지만, 작물 아래 범주 면적에서는 약 절반만을 소유했으며, 가구 당 0.2데시를 가진 가난한 무마 농민과 합쳐졌다. 농장 노동자를 고용하던 가구에서도 범주는 모두 77개였으며, 2.5%였다. 그러나 77개 가운데 60개는 가구 당 경작 면적인 18데시인 최상위 집단에 속했다. 그리고 같은 집단에서, 농장 노동자를 고용하던 가구로는 24.5%를 차지하게 됐다. 따라서 농민들의 구분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면서, 재산 없는 농민마저 실제하는 현실보다 더 좋게 묘사해서는 속임수를 쓰고 만다. 여기에다 부농까지 더하고는 평균값에다 그대로 적용시키고는 반대로, 부농들은 힘이 약하다고만 묘사해버린다. 대규모 텃밭을 가진 농민 범주가 대다수 부농층 뿐만이 아니라, 빈농층까지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할당 분류에서 가축 수, 경작 면적 등에 따른 경제적 힘의 지표로는 텃밭의 규모가 증가하면서부터, 늘 규칙적이라고 주장했었지만, 텃밭은 농민층 복지에서 주요한 요인이었고, 농민들은 대규모 토지 소유주에 따른 지역에서도 늘 농민 부유층들이 대다수였으며, 결론적으로, 이렇게 합산한 통계값과 분포로는 전체 농민층에서도 토지 소유 규모에 따른 '평균값'이 의도적으로 높아진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와 같이 농촌 부유층과 농촌 무산층이 결합해서 계산한 방식으로 합당하다고 추론할 수 있는 근거는 전무하다는 점이다.

 

특히 농가 통계를 쳬계화할 때는 특정 지역 구획에 따른 분류로만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경제 통계는 반드시 농장 규모와 유형을 기준으로 측정하고, 분류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유형을 구분하는 지표로 지역적인 조건들과 농업 형태에 따라서도 현실적으로 적용해야만 한다. '' 단위로 곡물 농사를 다룰 경우로는, 작물 재배 면적이나, 가마우지 수에 따라서 분류를 제한하며, 다른 조건으로는 산업 작물 재배 면적, 농산물에 따른 기술적 가공, 뿌리 작물 재배 또는 가축 사료용 식물 재배, 낙농업, 채소 재배 등을 고려한다. 농업과 산업 활동을 대규모로 결합하는 경우로는, 농업의 규모와 유형, 산업의 규모와 유형을 따로 구분해서 결합한다. 농가 소득을 산정하는 방법은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젬스트보 통계에서도 다룰 수 있는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계()보고서의 완성도와 수집 기법은 당시로도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했었지만, 막대한 분량의 자료 정보가 불만족스럽게 요약되어, 손실되고 말았다. 조사자는 단지 젬스트보 통계 자료를, 마을 공동체(미르), 볼로스트, 농민 유형, 배정 규모 등을 다루는 평균 수치로만 활용할 제약이 뒷따른다. 따라서 농민 통계로부터 측정된 할당 분류에 따른 평균값의 결과는 완전히 거짓이다.

 

- 구베르니아에서 다른 4개 지역에서 보유한 가축 분류도 역시나 중산층과 부농들을 통합시켰다. 사라토프 구베르니아 통계수익(1888)도 참조해보면서, 농민 범주에 따른 통합 표에 따라 사라토프 통계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모든 가구 주는 배당 규모에 따른 6개 규모로 분류하고, 구분해서, 각 범주를 가축 수에 따라 6개 집단들로 다시 분류하고는각 집단에서 가족 내 일하는 사람 수에 따라 4개의 하위 부문으로 구분했었다. 요약된 통계와 자료는 범주에 대해서만 해당하여 제공하므로, 집산된 집단 자료를 직접 계산했다. 그리고 가계()를 경제적 힘(능력)이나, 농장 규모에 따라 분류할 때는 비교적 부유하고, 유복한 환경의 농민층일수록, 대가족이 많다는 점에도 유의했었다. 농민 부유층이 더 많은 토지를 할당 받았기 때문에 대가족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관 관계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비교적 부유하고, 유복한 환경의 농민층에서는 토지 분할을 미약하게 하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유층과 대가족의 상관 관계에 따른 중요도를 과장하는 건 아니다. 대부분 부유층 농민들에서는 고용 노동을 이용했다. 인민주의자들의 가족협동조합이란 다름 아닌 자본주의 협동조합의 기반이 된 다른 이름들이었기 때문에, '가공'에 따른 가가호별 인구조사 수집에서는 농민 산업자료가 당시 러시아에서 매우 포괄적이고, 자세했다. 더불어 군 단위로 임대했던 경작지 총량은 61,638데시로,

총 할당 경작지(377,305데시), 1/6이었다. 관련 자료로는 카미신 지역 통계학자들의 보고서, 사라토프 통계서사라토프에서 결합 수익률 및 평가 수익률도 참조하자.

 

- V.V. 보론초프 뿐만이 아니라, V. 포스트니코프도 1885년 이후의 잡지 기사나, 새로운 유형의 젬스트보 통계 간행물에서도, 경제적 힘에 따른 분류와 자료를 할당 분류로 계산했었으며, 많은 집단에서 농민 마을(미르)과 같은 마을 공동체 조사마저 농민 경제를 자세하게 살펴보지 않았으며, 농민층 분화 요인에 대한 사실조차, 그리고 농민의 많은 집단들에 대해서도

살펴보지를 않았었다. 이를테면 포트나토브(Fortunatov)의 젬스트보 인구 조사 기법 가운데, 사라토브 합산 신고서 및 통계 신고서, (Perm) 지역 통계자료 조사를 참조해보자.

 

- 당시에 봉건적이던 러시아에서는 특히 남성 연구 가운데 도시 중산층과 농민층에서는 인두세를 부과받았다. 또한 '특별 인구 조사'로 특수하게 기록됐고, 당시에 러시아에서는 1718년부터 이뤄졌으며, 마지막 등록은 열 번째로, 1857-1859년 사이에 이뤄졌다. 여러지역에서는 '미르' 안에서도 토지 재분배는 등록 목록에 기록된 토지를 기준으로 실시했다.

 

2-1-4. 페름(Perm) 구베르니아에 대한 젬스트보 통계

 

페름 주에서 크라스노우핌스크 지역을 사례로 들자면, 해당 지역의 분류는 농업 규모에 따라 좌우된다. 당시에, 크라스노우핌스크 지역에서는 농업 부문은 총 23,574가구(세대)였으며, 남녀 인구로는 129,439명이었다. 농경지 면적은 상당히 작았으며, 집단 간 비율은 동일했다. 소수 부유한 농민 집단으로부터 소유한 농경지와 가축 집중도는 동일했으며, 소유한 토지는 실제 경제적으로 상요되는 토지 비율로 따져보자면, 주베르니아와 동일했다. 부농들은 토지를 공급받았으며, 임대 토지를 똑같이 빼앗고는, 빈민들에게서 부농 할당지를 임대 형태로 이전시켜서, 할당지의 역할이 농촌 양극화에 따라 서로 다르게 두 가지 방향으로 축소되는 일도 일어났다. 농민들의 최상층, 임대 토지를 대부분 소유한 경우로는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의 토지 임대에 관한 반대 견해와는 달리, 매우 산업적이고, 기업적인 성격을 띠었다. 해당 지역과 관련해서는, 사라토프 통계학자들은 일용직 노동자 고용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농장의 강점과 약점을 나타낸 특징적인 지표가 아니라는 견해를 반박했었다. 오히려 농민 부르주아, 부유층들의 특징이었다.

 

모든 형태로 형성되는 일용직 고용에서는 부농들이 가족 내에서도 매우 잘 일할 수 있었음에도, 경제력이 상승하면서,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민 비율도 증가했다. 따라서 가족협동이 자본주의적인 협동에서도 기반이 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 수로는 계절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 수에서 평균 2.5배임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수확을 위한 일용직 노동자 고용일 뿐이며, 통계학자들은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의 총 수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상위 3개 집단 가운데, 7,679 가구 가운데 2,190 가구만이 농장 노동자를 고용했었지만, 부농이 대다수였던 4,017가구에서는 수확을 위해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했었다. 일용직 노동자들의 고용은 페름 지역 내에서만 국한되지는 않았으며, 부농 집단에서는 전체 소유주 2-6%, 9%가 농장 노동자를 고용했었다. 부유층 농민 가구 대다수는 어떠한 형태로든, 노동자를 고용했다. 정규직 농장 노동자와 일용직 노동자 집단을 형성한다는 건 부농이 존재하는 데 있어 필수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 수와 정규직 농장 노동자를 고용하는 수의 비율이 하위 농민 집단에서 상위 농민 집단으로 갈수록 줄어들었다당시에 러시아에서는 하위 집단에서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 수가 정규직 농장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 수보다 몇 배나 더 많았다. 반대로, 상위 집단에서는 정규직 농장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 수가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민 수보다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상위 집단 농민층에서는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 임금 노동에서 정규직 고용에 기반한 농장이 형성될 수 있었다. 임금 노동은 계절에 따라서 더욱 균등하게 분배됐으며, 더 많은 비용과 번거로운 일로 인해 일용직 노동자 고용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됐다.

 

부농과 중농이 결합된 엘라부 지역에서는 고용 노동에 대한 수익을 살펴볼 수 있었다. 빈농과 부농이 사용한 농업 체계와 방법은 근본적으로 매우 달랐다. 왜냐하면 부농들은 대부분 농민 소유 가축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으며, 농장 개선 면에서도 노동력을 투자할 기회가 더 많았다. V.V. 보론초프, 농민 농업에서 발전 추세에서도 소개된 바에 따르면, 당시 러시아에서는 대대적이던 농민 개혁 뒤로, 농민들은 가축들이 없는 가구 집단들을 알아서 만들었으며, 토양에다 거름을 주는 관행을 도입해서, 당시로는 농민들의 효율을 높일 수 있었다. 여기서 말했던 발전 추세란 단지 농촌 사회에서 부유층들의 발전만을 나타냈을 뿐이었다. 개량된 농기구 분포도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났으며, 페름 통계 표에서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페름 통계는 농업 부문 전체에서 산정한 건 아니었던지라, 23,574 가구 가운데 15,076 가구로부터 해당하는 제 3,4,5 구역에 대해서만 수집된 한계를 보였다. 개량된 농기구로는 풍로기 1,049, 종자 선별기 225, 탈곡기는 354대로, 1,628대였다. 농민들은 모두 농기구를 사용한다던 바실리 보로초프의 인민주의적인 주장을 잘 보여주는 예시일 뿐이었다.

 

다음의 산업 자료에서는 두 가지 주요한 산업 유형을 추출했다.

 

1) 농민들의 농촌 부유층으로 상업 및 산업 시설을 소유한 전환.

 

2) 농민들의 농촌 무산층으로 노동력 판매, 농업 산업 분야 진출.

 

또한 정반대되는 산업가 유형들도 따로 추출할 수 있었다.

 

농작물 재배 면적에 따른 분포도와 노동자 고용을 보여주는 통계 자료를 비교할 때는 농민층들의 차별화가 곧 자본주의를 위한 국내 시장을 창출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많은 유형의 직업들에서는 단지 산업이나, 고용이라는 이름만으로 묶고는, 농업과 산업의 결합을 획일적이고, 동일한 본질로 묘사해서는 얼마나 자본주의를 배제시키면서,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 예카테린부르크 지역 통계 자료에서도 비슷한 지역 내에서 59,709가구에서 토지가 없는 가구 수 14,601가구와, 목초지만 있는 가구 수 15,679가구, 할당량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가구 수 1,612가구를 빼고 남은 27,817가구에 자료는 다음과 같다. 토지를 경작하지 않거나, 거의 경작하지도 않는 최대 5데시 가운데 20,000가구는 총 124,000데시 가운데 41,000데시, 1/3미만이었다. 반면에, 10데시 이상 경작하는 부유층 가구 수 2,859가구는 49,751-53,000데시를 경작했다. 총 임대 농지 55,000데시 중 47,000데시를 포함했을 때, 67,000데시 가운데 임대 토지 비율이다. 예카테린부르크 지역에서도 두 가지 상반된 유형 산업으로, 농장 노동자를 고용하는 가구 분포도로는 크라스노우핌스크 지역에서 차별화 지수 분포도와 매우 비슷하게 나타났다.

 

- 페름 지역, 크라스노우핌스크 지역(카잔, 1894) 자료, 예카테리부르크 지역 자료, 카테린부르크 지역 통계 수익률, 예카테린부르크 젬스트보 통계(1891)을 참조해보자.

 

- 구베르니아 농민들로 모아진 모든 집단에서 소유한 총 할당 토지는 410,428데시로, 가구 당 평균 17.5데시이다. 다음 농민들은 경작지 53,882데시와 초원 597,180데시를 임대해서, 651,062데시이다. 경작지 임대가구로는 8,903가구, 초원 임대 가구로는 9,167가구로, 경작지 할당 토지는 50,548데시(농민 8,553), 초원 7,186데시(농민 2,180)을 임대해서, 57,734데시였다.

 

- 당시에 러시아 농업 산업은 마지막 세 지역으로 국한된다. 상업 및 산업 시설은 총 692개였으며, 물레방아 132, 기름 공장 16, 역청(아스팔트) 및 타르 공장 97, 대장간 등 283, 상점 및 주점 등 164개였다.

 

2-1-5. 오렐(Orel) 구베르니아 젬스트보 통계

 

옐츠(Yelets), 투르크셰브스크(Trubchevsk) 지역 집단 간에 일반적인 관계는 동일했다. 임대 토지는 부유층 수중으로 집중됐고, 빈농으로부터 토지가 양도되는 등, 고용 노동, 산업, 농업에서도 발전 추세와 관련한 집단 관계도 엇비슷했다. 오렐 구에서도 농민들은 두 가지 정반대 유형으로 분화됐다. 토지 포기 및 노동력 매각에 따른 농촌 무산층과 토지 매수, 상당한 규모 임대, 할당지 임대, 농업 방법 개선, 정규직 농장 노동자 및 일용직 노동자 고용, 상업 및 산업 기업과 농업의 결합 등에 따른 농촌 부유층으로 분화됐다. 농민들의 농업 규모는 훨씬 작았으며, 그 중에서 대규모 작물 지배자가 훨씬 적었으며, 위예즈드 지역으로 판단했을 때, 농민 분화는 더 미약했다. 농민층 가운데에서는 농촌 무산층으로 전환됐으며, 농촌 부르주아 집단을 생성한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이는 시골 모습에서도 훨씬 두드러진다. 농업 농민들로 한정된 차별화에 따라, 폭 넓게 가족의 40%가 산업으로 발전했다. 산업가로는 대다수 임금 노동자 외에도, 소수 상인, 매수자, 기업가, 자영주 등이 포함된다. 농민들의 차별화는 시장과 밀접하게 관련됐었지만, 지역 농업 측면에서 조사한 자료는 없었다. 상업적인 시장에서 경작은 판매용 곡물 생산을 위한 경작 면적 확장이 아닌, 대마 생산을 위해 개발됐다. 상업적인 활동들이 매우 많은 작물과 관련해서, 많은 집단 사이에서는 농업을 특정할 수 있는 측면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트르부체프스크 지역 회보>에 따르면, 금전적인 소득에 따른 대마 재배는 농민 소득에서도 주요한 원천이었으며, 마을과 다른 많은 곳에서 농민들은 주로 대마 재배에 주의를 기울였다. 모든 비료는 대마밭으로 쓰였다. 대마를 담보로 대출이 이뤄졌으며, 부채를 대마로 갚았다. 대마밭에 비료를 주고자, 부농들은 빈농들에게서 비료를 샀다. 대마밭은 마을 공동체 안팎에서도 임대됐으며, 대마 가공은 앞서 언급한 주요 산업 시설들의 일부로 채워졌다. 지역 농업에서도 주요한 상업 생산물에 대한 자료를 전혀 제공하지도 않는 차별화된 그림은 너무나 분명하지만, 불완전할 뿐이다. 트루브쳬프스크 지역에 대한 통계 자료에서는 교회 마을 공동체에 대한 자료는 포함되지 않는다. 토지 임대에 대한 공동 자료를 수집해서, 배정된 토지와 배정되지 않은 임대 토지를 합산했다. 배정된 토지 전체를 임대하는 가구 수로부터 대략적으로 제시된 임대된 토지 양으로 결정했었다.

 

따라서 얻은 수치로는 각 집단에서 사용 중이던 토지 양은배정된 토지 + 구매된 토지 + 임대된 토지 - 임대한 토지)를 결정하는 기초였다. 여기서도 부농들은 빈농들보다 가축 한 마리 당 두 배나 많은 분뇨를 얻는다고 명시했다. 가구 당 7.4마리 가축이 있는 경우에, 가축 당 391푸드, 가구 당 2.8마리 가축이 있는 경우 가축 당 208푸드였다. 같은 결론이 할당 분류로부터 도출됐으며, 실제로도 농민층들에게 차별화에 대한 깊이를 더욱 모호하게 만들었다. 빈농들은 주로 짚과 분뇨를 연료로 사용한다거나, 판매해야만 했다. 오직 농민 부르주아만이 가축 한 마리 당 일반적인 분노 양인 400푸드를 확보했다. V.V.보론초프는 말 소유 감소에 따른 가축 수, 분뇨 양 사이에서도 일반적인 비율로 충분히 회복시킬 수 있다고만 내세웠다.

 

 

2-1-6. 보로네즈(Voronezh) 구베르니아 젬스트보 통계

 

보로네즈 주는 매우 완전한 자료와 풍부한 분류를 명시했다. 여러 군에서도 가축, 가족 노동자, 산업 노동자, 농장 노동자에 따른 세부적인 부류가 있었다. (위예즈드)에 따른 많은 분류가 제시됐었지만, 농장 노동자를 제공하는 농장 집단에서는 농산 무산층 전체를 포괄하지 않았다. 일용직 노동자, 미숙련 노동자, 공장 노동자, 건설 노동자, 하인 등 노동력을 제공하는 농장은 포함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농장 노동자는 농민들이 제공하는 임금 노동자의 일부일 뿐이었다. 농장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을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불완전했다. 중립 집단에서는 각 지역에 따른 수만 가지를 묶어내서, 가축을 소유하지 않은 수 천 명의 농민, 가축을 많이 소유한 농민들, 토지를 임대하는 농민, 경작자와 비경작자, 임금 노동자, 소수 고용주 등을 합산해서 계산했다. 전체 중립 집단에서도 일반적인 평균값으로는 토지 없는 가구 수, 3-4데시를 소유한 가구를 합산해서 얻어냈다. 가구 당 배정지와 구입한 토지 전체 및 25-50데시아틴 이상의 배정지를 소유하거나, 몇 십-백 데시아틴의 토지를 추가로 구매하는 가구 수에 따른 가족 당 0.8-2.7마리 가축을 보유한 가구, 12-21마리 가축을 보유한 가구를 합산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합산된 평균값만으로는 농민들의 차별화 요인을 설명할 수는 없었으며, 농경 규모에 따른 근접한 분로로는 역마차를 채택했다. 관련된 네 가지 보고서에서 젬랸스크, 자돈스크, 니즈네데비츠크, 코로토야크 군이 있었으며, 주로 자돈스크를 채택했다. 다른 군들에 대해서는 매매 토지 및 임대에 대한 별도의 보고서가 아예 없었다. 따로 조사한 자돈스크 지역에서는 15,704가구, 남녀 인구는 106,288, 배정 토지는 135,656데시, 매수 토지는 2,882데시, 임대된 토지는 24,046데시, 임대한 토지는 6.482였다. 집단 간 관계로는 시내권(구베르니아), 군 단위(위예즈드) 두 곳에서 비슷하게 나타났는데, 매수 토지와 임대 토지를 집중했으며, 토지를 임대하는 빈농으로부터 임대 토지를 임대 농민, 부농에게 이전시켰지만, 정작 부농의 중요성은 훨씬 작았으며, 소작농 규모 또한 미미했기 때문에, 지역 농민들은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산업가에 속한다는 의문이 생겼다.

 

개량된 도구에 따른 반대 유형으로는 노동력 판매, 상업 및 산업 기업들의 분포도로부터 검토한 자료와 동일했다. 산업에 종사하던 가구에서 큰 비율로부터, 곡물 판매 농장보다도 곡물 구매가 우세했었으며, 산업에서 얻는 현금 소득은 농업 분야에서 얻을 수 있는 현금 소득보다도 우세했다. 이와 같은 근거에서 군 단위의 위예즈드를 농업이 아닌 산업으로 간주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젬랸스크, 자돈스크, 니즈네데비츠크, 코로토야크 군, 농민 토지 소유권에 대한 평가 수익(1899), 해당 보고서에서는 현지 및 자택을 떠나 노동하는 산업가들의 총 22개 거래 목록이 포함됐다. 할당 집단으로 분류했으며, 각 거래에 따른 수입 규모를 파악할 수는 있었다. 해당 목록에서부터, 농촌 산업에서도 압도적 다수가 고용 노동을 제공했다. 자돈스크 지역에서는 산업가 24,134명 가운데 14,135명은 농장 노동자, 짐꾼, 양치기, 비숙련 노동자였으며, 1,813명은 건설 노동자였고, 298명은 도시, 공장 및 기타 노동자로, 446명은 개인 서비스업에 종사했으며, 301명은 노숙자(거지) 등이었다.

 

산업가의 압도적 다수는 농촌 무산층이었고, 토지를 소유한 임금 노동자로는 농촌 및 산업 고용주들에게 노동력을 판매했다. 구베르니아에서는 특정 위예즈드에서, 농민 집단 간 비유로 살펴보자면, 비교적 거대한 농경지를 가진 토지는 풍부한 대초원 지역이었으며, 소규모 농민 농장만을 가진, 토지가 매우 부족한 지역에서도 차별화된 모습이 전형적으로,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농업 조건에 따른 극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농민 상위와 하위 집단 간 비율이 동일했다. 각 지역을 비교했을 때, 어떤 지역에서는 농민들 사이에서 농촌 기업가가 형성된다거나, 다른 지역에서는 농촌 무산층들이 형성됐다. 다른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러시아에서 일어난 농민층 차별화 과정에 따라 농촌 무산층이 농촌 기업가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로 소규모 경작자를 포괄하고 있었다. 수적으로 적은 상위 농민 집단에서는 정반대 양상을 보였는데, 구매보다 곡물 판매가 우세했으며, 토지에서는 현금 소득을 얻는다거나, 높은 비율로는 농민들은 농장 노동자를 고용해서, 개량된 농기구를 소유했었고, 상업 및 산업 시설을 소유했다. 농민 부유층들은 규모가 작았어도, 전형적인 특징 때문에 자본주의 상업 및 농업이 발전할 수 있었다.

 

젬스트보 통계에서 산업이라는 용어란 여섯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4개 군 총 92,889명의 산업가 가운데 59,277명이 차지하는 농업 산업, 압도적 다수로는 임금 노동자였으며, 과일 재배자, 채소 재배자, 양봉가, 마부 등과 같은 농장 소유주, 20,784명을 차지하는 장인 및 수공예 분야에서 장인들 가운데에는 매우 많은 임금 노동자, 건설 노동자 등이 8,000명 이상으로 추산됐다. 하인들은 1,737명이었으며, 상인 및 대기업 산업가는 7,104명으로 산업가 집단에서 특히 구분됐다. 2,881명의 자유업 종사와 노숙자(거지) 이외에도, 부랑자, 헌병, 매춘부, 경찰관 등 1090명과 도시, 공장 및 기타 노동자 1,106, 지역 산업가 71,112, 이주 산업가 21,77명으로 남성 85,255, 여성 7,634명이었고, 소득 분포도는 전반적으로 매우 많았다.

 

일례로 자돈스크 지역에서는 8,580명 정도의 비숙련 노동자는 234,677루블을 벌었지만, 647명의 상업 및 대기업 산업가는 71,799루블을 벌었다. 이와 같은 많은 집단들을 단지 '산업'으로 묶어버린다면, 큰 혼란을 초래하지만, 인민주의자들과, 젬스트보 통계학자들은 거리낌 없이 이를 모두 합산해버렸다.

 

 

2-1-7. 니즈니노브고로드 구베르니아 젬스트보 통계

 

니즈니노브고로드 구베르니아에서는 3개 지역, 크냐진(Knyaginin), 마카라예브(Makaryev), 바질(Vasil)에 따른 젬스트보 호별 인구 조사 결과에서 농민 농장에 따른 할당금 보유 및 자신들의 마을에서 거주하는 농민에게, 보유한 가축 가축에 따라서도 다섯 가지로 나뉘었다. 세 개의 위예즈드 지역을 합산해보면, 52,260 가구와 남녀 294,798명을 포함해서, 433,593데시의 배정지, 51,960데시의 매수 토지, 86,007데시의 임대 토지라는 모든 종류의 임대지, 배정 및 비배정지, 경작지 및 초원지를 포함한 19,274데시의 임대 토지가 있었다. 부농들은 배정지를 더 잘 갖추고 있어서, 상층의 배정지 비율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보다도 더 컸으며, 매입한 토지를 집중시키면서도, 전체 9.6%에 해당하는 부유한 가구는 매입한 토지의 46.2%를 소유했었지만, 가구의 2/3인 빈농들은 1/4도 소유하지 못했었다. 따라서 임대 토지를 집중시키서, 빈농들로부터 임대받은 배정지를 모을 수 있었다. 농민들은 사용 토지에서 실제 토지 분배는 배정지 분배와도 매우 달랐다는 점이다. 가축을 보유하지 못한 농민들은 법으로부터 보장된 배정지보다도 더 적은 토지를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두 마리를 기르던 농민들은 토지 소유량을 10-30%(8.1-9.4데시, 10.5-13.8데시)로 늘렸지만, 부농들은 토지 소유량을 1.5-2배나 가량 더 늘렸다. 두 집단에서 토지 규모 분배 차이는 미미했었지만, 실제로는 경작 규모 면에서는 큰 차이를 보였다.

 

정물(Tablishments)

 

작물이 자란 면적으로 평가해볼 때, 실제로 소유한 토지 양은 훨씬 더 컸고, 할당된 크기도 마찬가지였다. 할당 소유권에 따른 분류는 전적으로 무의미했고, 할당 소유권에 따른 평등은 법적인 허구였다. 농민들 간 농업과 산업 결합들은, 부농들이 상업 및 농노를 고용하는 가구들에서 높은 비율로 자본주의 농업을 상업 및 산업 사업과 결합시켰지만, 빈농들은 노동력 판매 및 외부 고용을 미미한 규모로부터 작물 재배와 결합했다. 이들은 토지를 소유한 농장 노동자와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했다. 외부 고용 가구 비율로는 비례적으로 감소하지 않는 건 니즈니고로브 농민들의 고용과 산업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농업 노동자, 비숙련 노동자, 건설 및 조선 노동자 등 외에도, 산업가들에는 비교적 많은 수로 수공예인, 산업 작업장 소유주상인, 매수인 등도 포함됐다. 따라서 많은 유형을 이와 같은 산업가로 묶는다면 분명하게 왜곡시킬 수밖에는 없다. 외부 소득이 있는 가구에 대한 자료에서도 많은 농민 집단에서 경작 차이에 대해 니즈니고로드 주에서 토지에 따른 비료를 할당 할 때, 쟁기질된 토지에서 생산된 정도를 결정하는 주요한 조건이다. 평균 호밀 수확량은 사용하는 분뇨량에 따라 비례해서 증가하기 때문에, 전체 배정지 4/4를 기준으로, 100데시 당 300-500 수에 따른 분량의 분뇨를 사용했을 때, 호밀 수확량은 데시당 47.1메라에 달하며, 1,500수레 분량 이상이면, 62.7메라에 달한다. 따라서 농업 생산 규모에 따른 두 집단 간 차이로는 작물 재배 면적 차이보다도 훨씬 크게 나타나며, 니즈니노브고로드 통계학자들은 일반적인 농민 밭에서 생산물을 연구했었지만, 정작 빈농들과 부농들의 밭에서 수확되는 생산물들을 따로 연구하지는 않았었다.

 

- 무마 농민 가구당 할당량은 100을 기준으로, 상위 집단 할당량은 159, 206, 259, 321과 같은 수치로 표기된다. 각 집단에서도 실제 소유한 토지 수치는 100, 214, 314, 477, 786으로,

농작물 재배 면적에 대한 각 집단 수치는 100, 231, 378, 568, 873 정도이다. 자세한 사항은 니즈니노브고로드 농민 산업은 플로토니코프, <니즈니노브고로드 수공예 산업>, 고바토브(Govatov) 및 세묘노브(Semyonov) 지역(Uyezed)에서 젬스트보 통계를 참조하자.

 

2-1-8. 기타 주별 젬스트보 통계 검토

 

농민 분화 과정을 연구할 때는 <젬스트보 호별 인구 조사 통계>를 사용했다. 해당 통계는 다소 폭 넓은 지역을 포괄했으며, 매우 중요한 분화 지표에 대한 충분하고도, 자세한 자료로 제공했으며, 경제적 역량에 따른 농민 집단들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처리했다. 7개 구베르니아 지역 조건에 부합할 수 있었던, 젬스트보 통계 자료들도 참고했다. 보다 완전하게 자료를 전달하고자, 비슷한 종류로는 호별 인구 조사를 기반으로 한 불완전한 통계 자료를 먼저 살펴보자.

 

1888년도에는 노브고로드 구베르니아에서 데미안스크 위예즈드에 대한 가축 수에 따른 집단화된 농대 농장에 대한 지표가 있다. 토지 임대 및 데시아틴 단위로 된 장기 임대(리스)에 대한 추가적인 자료는 없었지만, 다른 구베르니아와 비교해봤을 때, 부농과 빈농 사이 관계는 비슷했다. 적어도 가축을 세 마리 이상 기를 수 있는 최하위 집단 가구에서, 최상위 집단으로 갈수록 더 많은 가축을 소유한 농장들이 평균 이상의 배정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정작 토지를 매입 및 임대하는 농장 비율은 날로 증가해갔다. 세 마리 이상 가축을 소유한 가구로는 전체 가구에서 10.7%, 인구로 따져보자면 16.1%였으며, 모든 배정지에서는 18.3%, 매입지에서는 43.4%, 임대지에서는 26.2%, 임대지 호밀과 귀리와 같은 재배 면적 단위로 파악할 수 있었다. 전체 산업용 건물은 29.4%를 소유했었지만, 가축이 아예 없다거나, 적어도 한 마리의 가축만을 소유한 가구로는 전체 인구에서 40.1%, 배정지에서 33.2%, 매입지에서 13.8%, 임대지에서 20.8%, 산업용 건물로는 28.8%만을 소유했었다. 따라서 부농들은 토지를 수집하고 있었으며, 상업 및 산업에서 무역을 농업과 결합했었지만, 빈농들은 정작 토지를 버리고 살아남고자, 임금 노동자로 전락했다. 산업 종사자 비율로는 최하층에서 상층으로 오를수록 감소했다. 무마 농민들은 26.6%에서, 세 마리 이상 가축을 소유한 농민으로는 7.8%로 감소했따. 해당 자료들은 불완전했으며, 농민 분화에 대한 요약본으로는 제외할 수밖에는 없었다.

 

체르니코프 구베르니아에서 코젤레츠 지역에 대한 일부 자료를 생략했다. 왜냐하면 젬스트보 위원회, 체르니고프 통계부, <농지 평가를 위한 자료>(1882)에서 가마우지 수는 흑토 구역에 있는 지역만으로 총 8,717가구로 분류됐다. 반면에 가마우지가 없는 가구율은 36.8%와 인구 28.8%를 이루는 가구로는 자신들의 토지와 배정지 21%와 임대 토지를 7% 소유했었지만, 8,717가구는 임대하는 총 토지가 63%를 차지했다. 반면에, 네 마리 이상 가축을 소유한 가구 14.3%는 전체 인구에서 17.3%였고, 자가 및 배정 토지 33.4%, 임대 토지 32.1%를 소유했으므로, 임대 토지율은 불과 7%였다. 더불어 나머지 한-세 마리 가축을 보유한 가구로는 작은 집단으로밖에는 세분화되지 않았다.

 

이르쿠츠크, 예니세이 구베르니아 농촌 인구에서 토지 이용 및 가정 생활 조사를 위한 자료(이르쿠츠크, 1893)에서는 예니세이 구베르니아 네 지역에 있는 농민과 정착 농민들에 대한 짐마 수 분류 통계가 있다. 부유한 시베리아인들과 정착민들의 관계로는 부유한 마을 공동체 구성원과 가축이 한 마리도 없는 구성원들과도 동일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정착민과 기존의 농민들을 결합하여, 기존의 농민들을 노동력 역할을 하도록 제공했었기에, 이들이 필수적이었으며, 상류층과 하류층들의 익숙한 특징을 볼 수 있었다. 가구 가운데 39.4%는 가축이 전혀 없었으며, -두마리만 있는 하위 집단은 전체 인구에서도 24%를 구성했으며, 전체 경작지에서 6.2%와 전체 가죽에서도 7.1%만을 소유했었지만, 다섯 마리 이상을 소유한 가구는 36.4%로 전체 인구에서도, 51.2%를 이뤘으며, 경작지 73%와 전체 가축에서 74.5%를 소유했다. 가축이 다섯-열마리 이상이던 집단에서는 가구 당 15-36마리를 길렀으며, 임금 노동에서도 폭 넓게 의존했고, 농장 30-70%를 고용했다. 가구 당 아예 없거나, 네 마리 이하를 기르는 하위 3개 집단에서는 노동력을 제공했다. 농장 20-30-59%는 토지 임대 및 장기 임대(리스)에 대한 자료로부터 부유층 수중으로 임대지가 집중된다는 규칙에서 유일한 예외였으며, 규칙을 증명하는 분류에서도 예외 대상이었다. 핵심은 시베리아에서는 이와 같은 규칙을 만들어낸 조건들이 전무했다는 점이다. 토지를 강제적이고, 평등하도록 만들 수 있는 '할당지'조차 없었으며, 토지에 대해 확립할 수 없는 '사유재산'마저 없었다. 심지어 부농들은 토지를 구매하거나, 임대하지도 않았으며, 토지를 점유하고만 있었을 뿐이었다. 토지 임대 및 장기 임대로는 이웃 간 교환 성격을 띠었고, 집단 통계 자료에서도 일관되지 않았다.

 

폴타바 구베르니아에서 세 위예즈드에 대해서는 경작지 면적 분포를 대략적으로 파악했다. 통계 보고서에 따르면 데시아틴 경작에 따른 농장 수와 각 구역에서 가구 수 단위로 표시된 범위 내에서 평균 경작지 면적을 곱하면, 마을 주민들만 총 76,932가구 추산할 수 있는 통계를 얻을 수 있다. 362,298 데시아틴 경작지를 보유한 가구로는 31,001가구(40.8%), 경작지를 전혀 경작하지는 않거나, 가구 당 최대 3데시아틴까지 경작했으며, 36,040데시아틴(9.9%)가 경작지였다. 19,017(25%)는 가구 당 6데시아틴 이상을 경작했으며, 경작지는 209,195데시아틴(57.8%)였다. 폴타바 구베르니아, 콘스탄티노그라드, 호롤 및 피리아틴 지역, 경제 통계 수익률에 따르면 작물 재배 면적 분포도는 기본적으로 더 작은 면적을 가졌으며, 타우리다 구베르니아와 비슷했다. 불균형한 분포로 인해 매수 및 임대 토지는 소수의 수중으로 집중됐다.

 

통계에 따른 가계를 경제적 능력에 따라 분류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통계 자료마저 없었으며, 콘스탄티노그라드 지역에서는 자료를 제한하거나, 한정할 수 밖에는 없었다. 농촌 사회 계급에서 농업에 관한 장에서는 일반적으로 임대 토지를 세 가지 범주로 나뉠 수 있다. 임차인 당 면적으로는,

 

1.10데시 이하.

 

2. 10-30데시.

 

3. 30데시 이상이다.

 

칼루가 구베르니아에서는 8.626가구였으며, 구베르니아에서는 총 농민 가구 수에서 대략 1/20이었다. 곡물 파종에 대해서는 매우 단편적이고, 불완전했다. 가구에서 21.6%, 인구로는 30.6%를 차지하는 가구로는 전체 마필로 보자면, 36.6%, 경작지로는 45.1%, 총 농업 소득으로는 43.1%를 소유했었다. 이와 같은 수치로는 매매 토지가 부농들에게 집중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트베리 구베르니아 통계 자료가 풍부했음에도, 호별 인구 조사는 매우 미흡했었다.


왜냐하면 가구를 경제적 능력에 따라 분류하지도 않았으며, 비흘라예프는 이러한 결함으로부터 트베리 구베르니아 통계 자료(1897)에서 농민층 간 차별화를 더욱 부정했었고, 더 큰 평등을 추진력을 감지해서는 인민 생산과 자연 경제만을 찬미했었다. 비흘라예프는 농민 집단에서 정확한 자료를 인용하지도 않았으며, '계층화'에 따른 매우 위험하고도, 근거 없는 주장만을 펼쳤을 뿐, 마을 공동체 안에서도 차별화가 진행 중이라는 기본적인 진실마저 명확하게 나타나지도 않았고, 그저 계층화에 대해서만 거론하고는 마을 공동체나, 볼로츠(Volots)에 따라서 분류하는 걸 터무니 없는 일이라고 내세우기만 했다. 농지 임대와 차용에 따른 현지에 수집된 자료로는 '초보적인' 형태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특수하게 다룰 필요는 없었다. 임대와 차용에서도 고립된 사례가 발생했으며, 우연한 성격으로, 예니세이 구베르니아 경제 생활에서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예니세이 구베르니아에서는 옛 농민들이 소유한 424,624데시의 경작할 수 있는 연약지 가운데 417,086데시가 수용된 가족 토지가 있었다. 2,686데시 임대지에서는 2,639데시 임대지와 거의 같았으며, 총 수용 토지로는 1%도 미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비흘라예프는 트베리 구베르니아 농민에 대한 토지 매수가 지주 규모를 균등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봤다. 증거로는 할당 규모에 따른 마을 공동체 집단에서 살펴봤는데, 소규모 할당 공동체가 토지를 매입한 가구 배율보다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 비흘라예프는 소규모 할당 공동체에서 보유한 구성원들이 토지를 구매할 수 있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민주의자들의 같은 결론을 검토할 필요는 없었다. 카리셰프는 러시아의 부(1898)에서 비흘라예프가 국가 경제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서 아주 잘 파악하고 있다고 추켜세웠지만, 그가 너무나 낙관주의적이고, 평등을 향한 추진력으로 인해, 그러한 주장마저 설득력은 없었고, 내용과 근거마저 없었다는 점이다. 수용된 가족 토지에서도, 시베리아에서는 주로 부농들이 수용한 토지로부터, 토지를 선물로 '증여', '매각', 심지어 가족들에게 '상속'시키는 등 자신들 마음대로, 자의적으로 사용했다.

 

2-1-9. 농민 분화 요인에 대한 상기된 젬스트보 통계 요약

 

농민층 분화에 따른 통계 자료를 비교하거나, 결합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수치를 취해서 집단화시켜서, 집산할 수는 없다. 전체 지역에 따른 완전한 통계 자료와 동일하게 분류하는 방법을 요구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상위 집단과 하위 집단 간의 관계를, 토지, 가축, 도구 등 소유물과 관련해서 비교해본다거나, 병치할 수 있다는 유리한 이점이 있다. 가구에서 10%는 농경지 30%를 소유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는 관계로부터 절대적인 수치에 따른 차이를 없애므로, 모든 지역에서는 비슷한 관계를 비교할 수 있게 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가구 10%도 더 많거나, 적어서도 안 된다. 또한 다른 지역, 지방에서 구베르니아 지역 규모는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각 지역에 따라 동일한 비율 가구가 포함될 수 있도록, 이러한 집단을 구분해야만 한다. 부농 가구를 위한 가구 20%, 빈농을 위한 가구 50%를 미리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상위 집단에서 가구 20%를 차지하는 집단을 두고, 하위 집단에서는 가구의 50%를 차지하는 집단을 둔다.

 

예시로는, 5개 집단에 따른 가구 분류로부터 30%, 25%, 20%, 15%, 10%(S=100%)이다.

 

하위 집단에서는, 첫 집단과 두 번째 조직에서 4/5를 취하여 (30+(25x4)/5=50%)이고, 상위 집단에서는 마지막 집단과 마지막 두 번째 집단에서 2/3을 취해서 10+(15x2)/3 = 20%)이다. 작물, 동물, 도구 등 면적에 대한 백분율은 다음과 같인 산정되어, 결정할 수 있다. 가구 당 백분율에 해당하는 작물 면적으로는, 15%, 20%, 20%, 21% 24% 순이고, (S=100%),

 

가구에서 20%인 최상위 집단에서 작물 재배 면적은 (24+(21x2)/3=38%)를 차지하며, 가구에서 50%인 최하위 집단은 작물 재배 면적 (15+(20x4)/5=(31%) 정도를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농민에 따른 최하위층과 최상위층 간 실제 관계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으며, 수치적인 분할이 요구된다. 이와 같은 방식에 따르면, 4-5-6-7, 다른 갈래로 분산된 집단을 대신해서, 더욱 명확하게 정의된 지수가 포함된 3개로 된 보다 큰 집단을 구해낼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분포가 많은 지역과 조건 속에서 차별화된 농민들에 대한 자료를 비교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각 집단 간 상호 관계를 판단하고자, 차별화 문제에 대해서는 가구 수, 농민 인구에 따른 남녀 인원, 배정된 토지 면적, 매입 토지, 임대 토지, 집단이 소유하거나, 사용한 총 토지 수(배정지+매입지+임대한 토지-임대된 토지), 작물 재배 면적, 가축 수, 고용 가구 수, 농장 노동자 고용 가구 수, 상업 및 산업 시설 수, 개량 농업 도구 등이며, 여기서 토지 임대 및 고용은 농장 쇠퇴와 몰락을 따라, 농민이 노동자로 전환됨을 말하기 때문에, '부정적'이다. 다른 모든 자료들은 농장 확장과 농민들에게, 농촌 기업과로 전환됨을 말한다. 이와 같은 지점에서 농장 집단에 대해 구베르니아에서, 전체 배분율을 계산했으며, 상위 집단 가구 가운데 20%는 농작물, 가축 등을 지배하는 면적(%)를 차지하며, 하위 집단 가구 가운데 50%는 농작물, 가축 등을 재배하는 면적(%)를 차지하게 된다. 7개 구베르니아에서 21개 군 자료를 포괄하는 표를 제시하자면, 해당 군에서는 총 558,570개 농가가 있었으며, 남녀 인구로는 3,523,418명이었다.

 

- 타우리다 구베르니아에서는 임대 토지 수익을 베르됭스크, 드네프르 두 지역이 관련됐었다.

 

- 같은 주에서 개량된 농기구 범주로는 수확기가 포함됐다.

 

- 사마라 구베르니아에서 두 군은 임대 토지 비율 대신에, 농가가 아닌 가구로부터 임대 배정 비율을 사용했다.

 

- 오렐 구베르니아에서는 임대 토지 면적 및 총 사용 토지 면적은 대략적으로 결정됐으며, 보로네시 구베르니아 4개 군에서도 동일했다.

 

- 오렐 구베르니아에서는 개선된 장비 수익은 옐레츠 지역에서만 존재했다.

 

- 보로네시 구에서는 일자리를 가진 가구 수 대신에, 자도느크, 코로토야크, 니즈네데비츠크 3개 군에서, 농장 노동자를 제공하는 가구 수를 사용했었다.

 

- 보로네시 주에서는 개량형 장비에 대한 반환은 젬랸스크와 자돈스크 두 군에서만 해당됐다.

 

- 니즈니노브고로드 주에서는, 일반적인 산업 종사 가구 대신에, 외부 고용에 종사하는 가구를 대상으로 삼았다.

 

- 일부 군(위예즈드) 단위의 지역에서는, 상업 및 산업 시설 수를 대신해서, 상업 및 산업 시설 가구 수로 계산했었다.

 

- 통계적 반환은 여러 개, 고용 열을 제공하면서도, 고용을 위한 일, 노동력 판매를 매우 정확하게 나타낸 고용으로 골라냈다.

 

- 할 수 있는 한 모든 임대 토지를 차지했는데, 배정지와 비배정지, 경작지와 초원지 모두 차지됐다.

 

- 노보우젠스크 지역에서 농가 농민과 독일인을 제외하고, 크라스노우핌스크 지역에서는 농업 부문만 고려됐으며, 예카데린부르크 지역에서는 토지 없는 농민과 목초지 지분만 소유한 농민을 제외됐고, 크냐기닌 지역에서는 볼쇼예 무라시키나 산업 마을 역시나 제외됐다. 부분적인 판단과 자료적인 특성으로 인해 농민층 분화 요인은 표와 도표로 나타난 것보다도 실제로는 더 두드러졌다.

 

- 이러한 모든 점들을 고려해봤을 때, 결합된 표에서는 매우 많은 지역에서, 상위 농민 집단과 하위 농민 집단 관계가 완전히 비슷했으며, 표에서도 백분율로 표시했다. 전체 가구에서 백분율을 나타내는 열에서, 지주 확대, 가축 수 증가 등과 같은 경제적 힘의 지수을 타나낸 곡선도 있다. 표에서는 상단 수평선에서, 각 끊어진 곡선까지 거리는 총합에 따른 빈곤 집단의 점유율로 보여진다. 결합된 자료에서, 전반적인 특성을 평균 곡선으로 그렸다. 백분율로 산술 평균을 계산해서 도출했는데, 곡선은 붉은 색으로 표기했다. 평균 곡선은 당시 러시아 농민들의 전형적인 분화를 보여준다. 주어진 미분에 따른 열별 차트로 살펴보자면, 가구 비율에서 열은 상위 및 하위 집단에서 속하는 인구 비율이다. 부농 가족 규모는 균등했지만, 빈농들의 가족 규모는 평균 이하였다. 비교 단위로는 개인이 아닌, 가계, 가족을 취해서 잘못 계산됐기 때문이다. 부유한 가족의 지출은 가족 규모에 따라 더욱 커지면서 늘어났지만, 대가족 가구에서 지출 규모는 건물, 가정 용품, 가정 필요 사항 등에 따라서 줄어들었다. 대가족 경제적 이점으로는 특히 엥겔하르트(Engelhardt), 지역 서신(Letters From the Countryside)에서, 트리로고브(Trirogov)마을 공동체와 인두세(Poll Tax)(1882)에서도 강조했었다. 따라서 개인을 비교 단위로만 삼거나, 감소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건, 대가족과 소가족 모두에게 '개인' 상태를 오히려 인위적이고, 거짓으로 파악하게 만들었다. 덧붙여서, 부농 집단에서는 인구 1인 당 계산에서 도출된 것보다도 훨씬 더 큰 농업 생산 몫을 수중에 쥐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했다.

 

 

- 다음 열에서는 배정지를 가리키며, 배정지에서는 법적인 지위에 따라, 배정지 분배가 매우 크게 균등하다는 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빈민들은 부농들로부터 축출됐다. 어디에서나 상위층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몫보다도, 배정지에서 다소 더 많은 몫을 차지했었지만, 하층에서는 다소 적은 몫을 차지했었다. 마을 공동체에서는 농민 부르주아 이익에 봉사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토지 보유량과 비교해보자면, 배정지 분배 불평등은 미미했다. 배정지 분배는 실제 토지 및 농장 재산 분배를 전혀 보여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매수 토지 열에서는 토지가 부유층 수중에 있었으며, 가구 1/5은 농민 소유 매수 토지에서 6-7/10을 소유했었지만, 가구에서 절반을 차지하던 빈농들은 최대 15%를 차지했다. 따라서 농민들에게 많은 토지를 저렴하게 매입할 수 있다는 인민주의자들의 야단법석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임대 토지에서 가구의 1/5은 임대 토지 총량에서 1/5-8를 차지하는 부유층 수중으로 집중됐다. 게다가 더 저렴한 가격으로 토지를 임대했다. 농민 부르주아지는 임대할 수 있는 토지를 강탈하면서, 농민 임대가 생산물을 판매할 목적으로 토지를 매수하는 산업적인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토지 임대가 부족하다는 점을 전혀 부정하지는 않았다. 토지에 매달리는 가난한 사람들은 임대로부터 완전하게 다른 성격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가구 절반은 임대 토지 총량에서 1/1-2를 차지했으며, 대부분 농민들이었다. 농민 농업에서 토지 임대에 따른 모순은, 토지 임대에 대한 열, 음수 지수 가운데 비교해봤을 때, 더욱 드러났다. 정반대로도, 토지 주요 임대인들은 하층 가구에서 절반이 임대된 토지에서 7-8/10을 차지하는 사람들이었으며, 법적인 금지 및 제한에도 불구하고, 고용주 농부 수중으로 넘어간 토지를 처분하고자 애썼다. 따라서 농민들이 토지를 임대한다거나, 임대된다는 말은, 부르주아지가 임대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임대된다고 말할 수 있다. 매수, 임대, 장기 임대(리스) 토지에서 할당 관계로는 집단에서 실제로 소유한 토지 열에서 결정했다. 농민들이 처분할 수 있는 모든 경우에 따라 총 토지의 실제 분배로는 할당 평등과는 무관했으며, 가구 중 20%는 총 토지에서 30%-50%를 차지했었지만, 50%20-30%를 차지했다. 작물 재배 면적 분배로는 하위 집단들이 상위 집단으로부터 두드러지게 밀려났으며, 가난한 농민들은 토지를 경제적으로 활용할 수도 없어서 포기하고 만다. 총 소유 토지, 작물 재배 면적 모두에서 토지 매수, 임대로는 일반 경제 체계로부터 밀려났다. 특히 작물 재배 면적에서는 농민 경제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했으며, 나머지 농민 전체가 차지하는 면적과도 같은 양으로부터, 농작물 재배 면적들을 수중으로 집중시켰다.


농민들 사이에서는 가마우지, 가축 수에 따른 농경지 면적을 결정했다. 상업 및 산업 시설에서도 총 수로는 농민들에게는 많은 집단 점유율을 보여준다. 가구에 따른 비교적 유복한 집단인 1/5은 이와 같은 시설로부터 약 절반 가량을 수중으로 집중시킬 수 있었지만, 가구의 절반인 가난한 집단은 약 1/5를 차지했다. 농민들은 부르주아지로부터 전환된 산업에서도 매우 부유한 농부 수중으로 집중됐다. 따라서 부농들은 농업에서 토지 매수, 임대, 노동자 고용, 도구 개량 등, 산업 시설, 상업 및 고리 대금업에다, 자본을 투자했다. 상인 자본과 기업 자본은 밀접하게 연결됐으며, 주변 조건에 따라서도, 자본 형태 가운데 어떤 게 우세한지가 결정됐다.

 

음수 지수 가운데 고용 가구 자료에서는 산업을 특징 짓기도 했었지만, 정반대로는 농민이 무산층으로 전환됐다. 산업 분야에서는 가난한 사람들 수증으로 집중됐다. 가구로는 50%를 이뤘지만, 고용한 전체 가구로는 60-90%를 차지하는 반면에, 부유한 집단에서는 산업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미미했다. 산업가 범주에서 주인과 노동자 사이에서는 보다 정확한 구분을 그을 수는 없었다는 점에서, 고용 자료와 상업 및 산업 시설에 대한 자료를 비교해봤을 때, 두 유형에서 산업은 서로 완전하게 반대됐으며, 이와 같은 유형들마저 관습적으로 묶어내서 큰 혼란만 야기했다. 농장 노동자를 고용한 가구는 부유한 농민 집단에게 모든 경우에서도 집중됐다. 가구의 20%는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 총 수에서 5-7/10을 차지했다. 대가족이었음에도, 보충할 농업 노동층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 수를 농업 노동자 농장을 포함한 총 농민 농장 수와 터무니 없이 비교했었다. 오히려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 수를 농민 가구에서 1/5와 비교하는 게 더 정확했었다. 부유한 소수 민족들은 농장 전체에서도 약 3/5, 2/3을 차지한다. 농민 가운데에서도 기업가가 노동자를 고용하느 비율로는 필요로부터 나타난 고용, 가족 내에서 일할 사람이 부족했기 때문에, 고용 비율을 훨씬 초과했따. 가구에서 50%를 차지하던 가난하고, 소규모 가족 농민들은 노동자를 고용하는 전체 농장 수에서 약 1/10에 불과했따. 필요에 따라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고용하지 않는 상인, 산업가들은 빈곤층에 포함됐다. 개량된 농기구 분포도에서도 V.V. 보론초프에 따르면, 농민 농업에서 발전 추세를 정했었다. 농기구에서 매우 공정한 분포로는 사마라 구베르니아에서, 노보우젠스크 지역으로부터, 전체 가구에서 1/5를 차지하는 부유한 가구가 100개의 농기구 가운데 73개를 소유했었지만, 가구 절반을 차지하는 빈곤 가구는 100개 농기구 가운데, 3개만을 가졌었다. 여러 지역에서도 농민 분화 정도를 비교해봤다. 표에서 두 유형 지역과 관련해서 더욱 명확하게 나타났다. 타우리다, 사마라, 사라토프, 페름 주에서는 농업 농민 분화가 오렐, 보로네시, 니즈니노브고로드 주 보다도 현저히 심했었다. 처음 네 개 구베르니아 곡선은 붉은색 평균선 아래로 나타났던 반면에, 마지막 세 개 구베르니아 곡선은 평균선보다 위에 있었다. 따라서 부유한 소수 민족 수중에서는 농업이 덜 집중됐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첫 유형 지역에서는 토지가 매우 풍부해서, 엄격한 농업에 종사했으며, 페름 주에서는 군(위예즈드) 단위의 농업 지역이 채택되면서, 조업이 이뤄졌다. 조업의 특성으로부터, 농업에서는 농민 분화가 보다 쉽고, 명확하게 드러났다. 두 번째 유형지에서는 반대로, 자료에서는 나타내지 않는 상업 농업 발전, 오렐 구베르니아에서는 대마 파종이 이뤄졌다. 산업 부문에서는 자돈스크, 보로네시 구베르니아에서 행해진 고용 노동과 니즈니노브고로드 구베르니아에서 이뤄진 비농업 직종 모두 나타났다. 두 가지 상태는 농업, 농민 분화에서도 매우 중요했다. 고용 노동에서는 각 지여게 따른 많은 상업, 농업 형태와 농업 발전에 대해서 농업 발전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었으며, 비농업 직종에서는 산업 역할들이 명백해졌다. 특정 지역에서는 농민들 대부분이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산업 임금 노동자이거나, 토지 소유 경우로는, 농업 농민에 따른 차별화는 매우 미약했다. 그러나 적절한 생각으로는 농촌 무산층에서 전형적인 대표자들을 농민 부유층들에서 젆여적인 대표자들과 비교했다. 잡일을 찾아서 남쪽으로 향하는 농민들은 폭 넓은 토지를 경작하던 타우리다 농민들과 비교됐다. 칼루가, 니즈니노브고로드, 야로슬라블 목수들은 우유 등을 판매하고자, 젖소를 키우던 야로슬라블, 모스크바 지역에서 채소 재배자 농부들과도 비교됐다. 따라서 한 지역에서 농민들 대부분은 제조업에서 종사했으며, 할당된 토지는 생계 수단에서도 일부만을 제공했으며, 농업 농민들에게 있어서는 분화된 자료가 산업에 종사하는 농민 분화층 요인에 대한 자료로도 보완될 수 있어야만 했다.

 

약간의 오차를 수반한 방법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제보다 미분값이 작게 나타났다. 상위 집단에서는 평균값을 추가했으며, 다음 집단에서는 상위 구성원을 추가하지는 않았다.


하위 집단에서는 평균값을 추가했으며, 다음 집단에서는 하위 구성원을 추가하지는 않았다. 집단이 커질수록, 집단 수가 줄어들수록, 오차 범위는 분명하게 커질 수 밖에는 없었다.


다음 구획(섹션)에서는 취한 집단 비율이 가구 당 가축 수에 따라서 나뉘어진 러시아 농민들에게 해당하는 전체 집단 비율과도 매우 가깝다. 다루고 있는 자료만으로는 절대적인 수치가 아니라, 농민 상층과 하층 간 관계였다. 따라서 농장 노동자를 고용하는 가구 수 또는 고용한 가구 수를 주어진 집단에서는 가구 수에 대한 백분율이 아니라, 군 단위 지역(위예즈드)에서 농장 노동자를 고용한 가구 수 또는 고용한 가 수에서 총 수에 따른 백분율로 간주한다. 각 집단에서 임금 노동을 고용하는 정도 또는 노동력 판매에 의존하는 정도가 아니라, 임금 노동 고용, 노동력 판매에 따른 고용 참가와 관련해서, 상층과 하층 간 관계일 뿐이다. 농민 분화 요인을 연구하고자, 분배에 따른 분류만으로는, 도표에서도 쓸모 없었으며, 카리셰프는 임대에 있어서도 산업적 특성은 없이, 젬스트보 통계와 모순됐고, W. 로쳬(W.Roscher) 등에서 차용했었던 지대 이론을 내세웠다. 서유럽 자본주의로부터 농부들의 열망과 필요한 농민 토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장기 임대(리스), 소작인이 임금, 이자, 투자 자본 상환, 고용주 이익 등을 충당하고자, 적절한 임대료를 '과학적'이라고 얼버무리면서 제공했다. 카리셰프 역시나 인민주의자들의 처방이었던, '회피'했으며 자본주의 농업 이론을 자연스럽게 내세웠다. 근본적인 모순을 더욱 부각시키면서, 인민주의자들의 모든 편견과, 시스몽디와 같은 소부르주아, 고전적인 이론가들에게 공감을 표하면서도, 다른 쪽으로는 토지 임대가 농민층 분화 요인에 대한 추진력을 부여했으며, 상층이 빈민층을 몰아내도록, 농업 관계 발전에서도 임금 노동에 따른 농업으로 이어지게 했다. 전체 시설 따른 약 1/5도 과장된 수치였으며, 파종하지도 않고, 가축을 보유하지도 않았던 농민, 적어도 한 마리는 기른 농민들의 범주에서도, 농업 노동자, 비숙련 노동자 등은 농사를 짓지 않던 사람들인 상인, 장인 등과 함께 포함시켰다. 오렐, 보로네시 등과 같은 중부 흑토 주에서는 토지 빈곤, 과중한 세금, 노동 서비스 제도로 인한 폭 넓은 보급으로부터, 농민 차별화는 실제로도 훨씬 더 미약했으며, 모든 상태에서도, 차별화를 지연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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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자본주의 발전

 

1. 나로드니크 경제학자 오류 분석

 

1-1. 사회적 분업

 

상품 경제 기반은 사회적 분업이다. 원자재 산업에서 떨어져 나온 제조업은 특정 제품을 상품으로 생산하고, 다른 모든 산업 부문에서 교환해서 소규모 및 하위 산업으로 세분화된다. 상품 경제 발전은 개별적이고, 독립적이다. 이전에 자연 경제 사회는 가부장적 농민 가족, 원시 촌락 공동체, 봉건 영지 등 다수의 동질적인 경제 단위였으며, 많은 종류의 원자재를 자체적으로 사용하고자 모든 경제 활동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상품 경제가 발전하면서 개별 경제 부문의 수가 증가했으며, 동일한 경제 단위의 수는 감소했다. 사회적 노동은 분업으로부터 발전했으며,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상품, 사용가치, 교환가치, 화폐로 구체화된다. 또한 소외로부터 사용가치를 생산물로 전환하고, 상품 시장은 사회적인 분업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생산적 노동에서 분업은 개별적인 생산물을 상품의 등가물로 전환시키며, 시장 역할을 하도록 한다. 사회적 분업으로 제조업과 원자재 산업 뿐만 아니라, 제조업과 농업을 분리하는 산업으로 전환하고, 경제 상품을 생산하도록 만든다. 많은 제품 · 제조를 분리해서 더욱 많은 산업 부문을 만들도록 하는 전문화 과정은 농업 지구 · 단지를 형성하고, 자본주의 및 상업적인 농업의 전문화는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세계적인 노동 분업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사회적인 분업은 상품 경제와 자본주의 발전의 전체 과정의 기초이며, 인위적인 조치에 따른 결과이다. 나로드니키와 같은 인민주의자들은 모든 상품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적 분업을 인위적이라고 널리 알리면서부터 발전했다. 이를테면 이반 스테부트, 농작물 농업의 원리와 이반 스크보르초프, 증기 수송이 농업에 미치는 영향에서는 농업 체계를 작물 재배, 가축 · 사육, 산업 농업이라는 세 가지로 구분하며, 이에 따라 주요 생산물은 기술적 가공 과정을 거친 농산물이 된다고 지적한다.

 

1-2. 나로드니키의 특징과 산업 인구의 형성

 

상품 경제의 발전은 산업의 일정한 부문에서 농업이 순서대로 분리되는 형태이다. 저개발 국가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농업에 의존한다. 뿐만 아니라, 농산물을 가공하며, 교환과 분업이 거의 나타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품 경제의 발전에 따라 증가하는 인구의 일부는 농업에서 분리된다. 자본주의 생산의 본질은 농업 인구를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인구에 견주어 꾸준하게 감소시키며, 농업 인구를 희생시키면서 산업 인구를 증가하도록 만든다.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생산 기관이라는 불변 자본을 증가시킨 노동력이라는 가변 자본을 희생시키고, 가변 자본이 상대적으로 감소하한다. 반면에, 농업 부문에서는 특정한 토지를 착취하면서, 가변 자본이 절대적으로 감소한다. 새로운 토지가 경작될수록 늘어나지만, 다시 비농업 인구 수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업, 산업에 대한 증가는 농업 인구를 희생시키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으며,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매우 명백하다. 산업 중심지, 수적인 발전에 따른 인구 원인으로는 농촌 체계에도 매우 심각한 영향을 끼치며, 자본주의 상업과 농업의 발전을 초래한다. 그러나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은 이와 같은 법칙을 모두 무시했으며, 시스 몽디주의자와 같은 경제적 낭만주의와 동일한 태도를 가졌다.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생산수단의 소유자, 노동력의 판매자인 임금 노동자가 있다. 소규모 생산자가 임금 노도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토지, 작업 도구, 작업장 등을 잃었다는 건, 빈곤해지거나, 파산했다고 전제를 둘 수 있다. 자본 파산은 인구의 구매력을 약화시키고, 자본주의에서 국내 시장을 약화시킨다. 자본주의 생산에서 소규모 생산자가 몰락함에 따라, 국내 시장이 위축된다는 점은 인민주의자들의 낭만적인 편견으로 완전하게 틀렸다. 왜냐하면 생산자 가운데 한 계급이 생산 수단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생산 수단이 수중에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 자본으로 전화된다는 점을 간과하고 만다. 이와 같은 새로운 생산 수단의 소유자들은 이전에 생산자가 지불했던 제품을 상품으로 생산해서 국내 시장을 확대하기 때문이다. 생산을 확대하고, 새로운 생산 수단의 소유자들은 새로운 도구, 원자재, 운송 수단 등과 소비재에 대한 수요를 제시한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생산자의 안부가 아니라 화폐의 소유에 있다는 점이다. 자연 경제에서 가부장적이던 농민의 복지 감소는 화폐량의 증가와 양립한다. 농민이 더욱 파산할수록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하며, 생계 수단의 몫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농민의 토지의 일부를 수탈하고 쫓아내면서, 식량 수단과 노동력 구매를 위한 가변 자본이라는 물질적 조건, 노동자의 생계 수단 및 노동 재료는 노동력 구매에 사용되는 산업 자본으로 전환되며, 국내 시장이 창출된다. 따라서 이전의 소규모 생산자들이 몰락하면, 국내 시장이 위축된다는 주장은 추상적이며, 내용적으로도 공허할 뿐이다.

 

자본주의 생산에서 생산물 가치는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로, 불변 자본은 이전에 존재하던 원자재 및 보조재, 기계 및 생산 도구 등으로 가치를 대체하고, 특정 부분에서 완제품으로 재생산된다. 둘째로, 가변 자본은 노동자의 생계를 보장하는 가치로 대체한다. 셋째로, 자본가에게 귀속되는 초과 가치이다. 불변 자본은 생산으로 들어가고, 가변 자본은 노동계급의 구매로 들어간다. 그러나 자본가가 초과 가치를 완전하게 소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외국 시장의 획득에서 초과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다. 국내 시장은 농민의 몰락과 해외 시장이 없어 초과 가치를 획득할 수 없어서 위축되고 있다고 내세운다. 인민주의자들은 모두 생산물구현 문제를 초과 가치 실현으로 축고했으며, 불변 자본 구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생산물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불변 자본이 반드시 투입되어야만 하며, 생산 수단으로 구성된 생산물을 가진 자본의 경우에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변 자본의 생산물이 소비재인 경우로는 직접 생산에 투입될 수는 없다. 생산 수단과 소비재의 사회적 생산 간 교환이다.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축적 목적을 소비 문제로 제시한다. 불가코프도 자본주의 생산 하의 시장에서 같은 문제가 있었다. 단지 외국 시장에서 생산물 구현 문제만이 아니라, 가치와 물질적 형태에 따라서도 자본주의적 생산물에서 각 부분에 대한 시장에서 대체하는 생산물의 다른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외국 시장에서 생산물 판매 자체로는 판매되는 생산물에 해당하는 등가물을 찾고, 처음 부분을 대체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물의 다른 부분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국 시장, 외국 무역은 전적으로 버려져야만 하며, 해외 무역에 의존해서, 매년 재생산되는 제품 가치를 분석해봤자, 문제의 기여보다 혼란만 커질 뿐이다. 또한 자본주의 모순에서 발생하는 위기 등은 단지 초과가치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물 모든 부분에서도 발생하며, 필연적이다. 분배가 고르지 못하므로, 따라서 가변 자본과 불변 자본, 생산물과, 소비재, 생산 수단으로 구성된 생산물에서도 나타난다. 경제적인 위기가 발생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이 존재할 수가 없으며, 고립된 생산자들은 해외 시장을 위해서도 생산할 수 없게 된다.


1-3. 국민소득

 

정치경제학에서 전적으로 잘못된 이론을 기초로 놓았다. 애덤 스미스는 상품 가격을 임금이라는 가변 자본과 초과 가치 두 부분으로만 구분했다. 연간 사회적인 총생산물도 같은 부분으로, 사장 및 지주라는 두 사회 계층의 수입에서 직접 할당했다. 애덤 스미스도 불변 자본을 생략했다. 곡물 가격에서 지주의 지대, 생산에 고용된 노동자, 가축의 임금이나 생계를 지불하며, 농부의 이윤을 지불한다. 또한 생산 과정에서 농부의 재고와 가축 및 기타 농업 도구의 마모도 보상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농업 도구에서는 가격 자체도 지대, 이윤, 임금으로 이뤄진다. 따라서 곡물 가격은 말의 가격과 생계비를 충당하지만, 전체 가격은 지대, 노동, 이윤이라는 동일한 세 부분으로 분해된다. 농기구를 제작하는 데 사용되는 생산 수단 가격도 포함된다. 이후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생산물 가격에서 자본의 불변 자본을 제외시킨 것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축적의 개념을, 생산의 확대, 초과 가치에서 자본의 전환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이를 지적했었다. 가치 분석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추상 노동과 기존 가치를 유용한 생산물의 새로운 형태로 재생산하는 구체적인 유용 노동으로 구분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민 소득 문제는 총사회자본의 재생산, 순환 과정에 대한 설명이 필수적이다. 애덤 스미스는 한 국가의 모든 주민들의 총수입은 그들의 토지와 노동을 전체 연간 생산물로 포함한다. 순수입은 유지 비용을 공제하면 남는다. 고정 자본, 순환 자본들은 자본으로부터 즉각적인 소비를 위해 비축한 재고, 생계, 편의, 오락으로 쓰인다. 애덤 스미스는 국가 총생산물에서 자본을 제외하면서, 자본은 임금, 이윤, 지대로부터 순수입으로 분해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회에서 들어가는 총수입을 자본에다 포함시키고는, 소비재와 분리해서 순수입으로 계산했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생산물에 자본이 없다면 수입에도 자본이 있을 수 있겠냐고 반박했다. 따라서 총생산물의 가치에는 가변 자본, 초과 가치뿐만 아니라, 불변 자본도 들어간다. 애덤 스미스는 고정 자본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사회에서 순수입으로 제외했다. 애덤 스미스는 유용 기계, 무역 도구, 수익성을 띠는 건물 드을 지탱하는 자재나 자재틀을 적절한 형태로 제작하는 데 필요한 노동 생산물은 일부가 될 수 없으며, 노동 가격의 일부로 나타나며, 고용된 일꾼들은 임금의 전체 가치를 소비를 위해 비축한 재고로 바로 넣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다른 노동에서는 가격과 생산물이 모두 재고로 돌아가며, 가격은 일꾼의 가격, 생산물은 다른 사람들의 가격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순수입에 들어가는 소비재를 생산하는 노동과 유용 기계, 무역 도구, 건물 등으로 개인적인 소비로 사용될 수 없는 품목을 생산하는 노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적 소비와 생산적 소비라는 두 가지 형태의 지출로 구분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를 바로 잡았다. 다른 경제학자들은 수입을 혼란스럽게 이해했고, 리카도, 세이, , 맬서스, 시스몽디, 찰머스, 키르히만 등은 상품에서 전반적인 초과 생산 논쟁을 애덤 스미스의 잘못된 이론으로 고수했었고, 불가코프도 잘못된 전제, 문제 자체로 인식했기 때문에 잘못된 공식화로 논쟁이 벌어졌고, 투간과 바라노프스키 간의 산업 위기 논쟁에서도 공허하고, 학문적인 말장난만 반복했다고 문제를 지적 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자본주의 국가에서 총생산물은 개인 생산물과 마찬가지로, 불변 자본, 가변 자본, 초과 가치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두 가지의 주요한 부분으로 구분한다.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두 가지 주요한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생산 수단에서 생산이라는 생산 품목과 자본으로부터 지출하는 품목 생산에서 소비품 생산, 곧 개인적 소비 품목이라는 생산이다. 불가코프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구분했으며, 개인적인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 분석에서는 완전히 생략했으며, 사회·자본에 따른 재생산을 분석하고자 했었다


특히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생산물의 자연적인 형태에 또 다른 근거를 도입하고자 했는데, 개인 자본의 생산 분석에서는 생산물 판매와 노동자들의 소비재, 자본가들의 생산물 구매처에 대해서는 정작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으며, 관련마저도 분석하지 않았다. 생산에서 개별 가치와 생산 결과에 따른 가치 문제를 부각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본가와 노동자는 소비재를 어디에서 얻으며, 자본가는 생산 수단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또한 완제품에 대한 모든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거나, 생산을 확대시킬 수는 있을까.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가치 부분에서 대체제 뿐만이 아니라, 물질 부분에서도 대체제도 있다고 거론했었다. 따라서 사회·경제 과정에서도 전적으로 다른 역할을 하는 생산물들을 구분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사회적 생산물에서 단순 재생산이란, 이전 규모에 따른 생산 과정이 반복되고, 축적이 부재한다면 부문에서 개별 자본과 소비재 형태를 띠는 초과 가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초과 가치 전체로 지불되며, 자본으로부터 전환되지 않는다는 전제를 가진다. 부문에서 생산 수단 형태에 따른 가변 자본과 초과 가치는 생산 수단의 생산에 종사하는 자본가와 노동자를 위해 소비재와 교환된다. 반면 부문에서 불변 자본은 다시금 생산에 투입되고자, 생산 수단과 교환된다. 따라서 생산 수단에 따른 가변 자본과 초과 가치를 소비재 형태를 띠는 불변 자본과 교환된다. 자본가는 생산물을 처분하는 방식으로 불변 자본을 획득한다. 단순 재생산에서는 교환되는 부분들이 동일해야 하므로, 생산 수단에 따른 가변 자본과 초과 가치의 합은 불변 자본과도 같다. 반면에,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규모 면에서는 축적으로부터 재생산을 가정하면, 첫 규모가 둘째 규모보다 더 크다. 왜냐하면 추가 생산에 따른 초과적인 생산 수단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불변 자본은 각 부분에서 자본가들 간에 다른 생산물과의 교환으로부터, 재료 또는 도구 역할을 담당하며, 직접 생산으로 투입되면서부터 구체화된다.

 

축적 부문에서는 자본가들의 초과 가치에 따라 추출되어 초과된 생산 수단이 나타나며, 소비재에서 떨거져 나온 초과 가치 일부를 자본으로 전환하게 된다. 국내 시장에서도 자본주의적 생산이란 소비재보다는 생산 수단으로부터 성장한다. 생산 수단 증가는 소비재 증가를 앞지른다. II 부문에서 소비재, 불변 자본은 I 부문에서 생산 수단에 따른 가변 자본 + 초과 가치와 교환된다. 그러나 자본주의적인 생산에 따른 일반 법칙에 따르면, 불변 자본은 가변 자본보다 더 빠르게 성장한다. 소비재에서 불변 자본은 가변 자본과 소비재에 따른 초과 가치보다 더 빠르게 증가하지만, 생산 수단에서 불변 자본은 생산 수단에서 가변 자본 + 초과 가치 증가와 소비재 부문에서 불변 자본 증가를 모두 앞지르며, 매우 빠르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국내 시장에 따른 발전이란 어느 정도는 개인 소비 발달과는 독립적이며, 주로 생산적 소비로부터 이뤄지게 된다. 여기서 '독립적'이란 생산적 소비와 개인적 소비가 분리됐다는 말은 아니며, 마르크스는 이와 관련해서, 불변 자본들 사이에서는 주기적인 순환이 일어난다는 점을 지적했다. 처음에 불변 자본은 개인 소비와도 무관하며, 불변 자본에 따른 소비 형태는 분명하게 제한될 수밖에는 없다. 불변 자본 자체를 생산되는 게 아니라, 마르크스에게 생산물은 개인 소비에 따른 생산 영역에서 더 많은 자본을 필요로 하면서 생산된다고 지적했다.

 

불변 자본에서 지출되는 소비는 생산력 발전에서 더 높은 단계이며, 교환 가치로 표현된다. 생산 수단은 대규모 기계 생산을 위한 온갖 부속품으로 구성되어, 자본주의적 생산은 사회적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대규모 생산에 따른 기계 산업을 창출해서 사회적인 부과로부터 특정 부문을 확장시킨다는 특징을 가진다. 오래 전 경제학자였던, 시니어도 야만인들은 때때로 수입을 소비재로부터 분해될 수 있는 생산물을 얻지 못한다거나, 노동에 따른 지출하는 특권 따위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었다. 이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력의 더 많은 부분들을 생산 수단이라는 불변 자본으로부터 생산에다 투입해서 사용된다. 생산 수단은 임금 및 초과 가치에 따른 수익으로부터 늘 분해될 수는 없으며, 자본으로부터만 분해된다.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할수록, 물신 숭배도 생겨나며, 비축된 생산 수단으로부터 인간의 사회적 관계는 생산물 관계로 제시된다. 모든 생산물들은 구매자를 위해 생산되며, 시장에서는 상품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시중에 볼 수 있는 모든 제품이란 바로 상품으로부터 둔갑된 형태를 지니며, 수입을 생기로독 만든다. 국내 시장에서도 생산 수단 발전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모순'이다. 목적으로부터 생산은, 소비로부터 지불된 형태로 자본주의적인 생산을 더욱 확대시킨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본질은 사회 경제 체제에 따른 모순이며, 구매(소비)의 확대 없이 생산만 확대시키려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사회적인 본능과도 같은 구조에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는 사회 생산력이 발전하며, 사회적으로는 기술적인 성과에 따른 사람들에게 기여한다거나, 활용할 수 있는 기회마저 배제시킨다. 자본주의는 생산 확장에 따른 추진력으로 밀어붙이며, 제한된 구매에 따른 모순이 존재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도 자본주의 생산에서, 상품 구매자로부터 노동자는 시장에 따른 자신의 상품이자, 판매자로, 최저 가격으로 유지된다고 지적했다. 마찬가지로 보다 구체적인 조건 속에서 많은 생산 부문과 사회적인 구매력에 따른 비례 관계들은 제한되므로, 생산력이 더욱 발전할수록, 구매 조건에서 기반하는 토대는 더욱 불균등하며, 따라서 고르지 못하다. 생산자들의 수탈과 가난에 기반한 자본 가치 보존과 자신들의 확장으로부터 단독적인 한계를 보이는데, 자본이 목적을 위해서 일으키는 생산 방식과 끊임 없이 충돌과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생산 방식으로는 무제한적으로 기반을 확장시키고자 하며, 목적 자체로는 생산, 사회적인 노동 생산으로부터 무조건적인 발전을 일으킨다.

 

자본주의적인 생산 방식들은 생산에 따른 물질적인 힘을 발전시켜, 세계 시장을 창출하는 역사적인 수단으로부터, 역사적인 과제와 사회적인 관계들 사이에서 끊임 없이 충돌과 갈등을 일으킨다는 점을 지적했다. 늘 많은 사람들은 가난과 제한된 구매력으로부터 외적인 한계를 이루면서, 자본주의 생산에 따른 추진력과 개발 면에서 대조적으로 밀려나게 된다. 생산만을 확대하려는 추진력, 제한된 구매 사이에는 모순 이외에는 무엇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초과 가치가 구체화된다는 지적만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경제 위기를 단지 과소 소비로만 기인했다고 보거나, 섣불리 결론 짓고 말았다. 그러나 불변 자본들 사이에서도 개인적인 구매는 제한될 수 있다는 점을 마르크스는 <자본>에서도 증명했다. 구매품에 따른 소비재는 국내 시장에서는 미미하거나, 자본주의 모순에 대해서 섣불리 결론 내리기도 한다. 생산에 따른 무한한 확장을 할 수 있다는 추진력과 제한적인 구매력 사이에서 생겨나는 모순은 자본주의에서만 나타나는 유일무이한 모순이 아니다. 특히 자본주의 모순은 역사적인 무의미한 덧 없음과 붕괴로부터, 더 높은 형태로 변형하는 조건과 원인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따른 모순의 심각성은 이전의 사회 경제 체제에 따라서도 더욱 진보적인 성격을 갖추려고 든다


여러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을 비롯한 경제적 낭만주의자들은 불가코프 <산업위기>, 스크보르초프, <정치경제학 기초>에서도 전반적인 축적, 구매 품목에 따른 소비재 필수품, 사치품, 화폐 순환, 고정 자본, 마모 등 자세한 조사를 이뤄냈지만, 이윤과 지대에 대한 잘못된 견해, 특히 로드베르투스, 베른슈타인은 무의미한 절충주의와 총 초과 생산물 증가에 따른 부유층 증가와 자본가들로부터 초과 생산물 전체를 '소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노동자의 생활 수준이 충분히 향상될 수 있다고만 해석했다. 투간, 바르노프스키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생산적 구매(소비)와 개인적 구매(소비)를 구분하며, 구체적으로 조사했고, 또 분석했다. 베른슈타인 <사회주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 과제>(1899)가 당시로는 부르주아 개량주의로 수정된 기회주의 견해로 불렸던 이유였다.

 

프루동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과 동일한 오류를 저질렀다. 프루동은 초과 가치와 불변 자본이 생겨나는 원인을 구체적으로 해명하지는 못했으며, 상품을 화폐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에게만 상품을 판매할 수 있다고 봤다. 정작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물이 구체화될수록, 원가에서 추가된 이자들로부터, 자신의 생산물을 다시 소비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포르가드, 로드베르투스도 상품 가격으로부터 임금을 넘은 이윤뿐만이 아니라, 불변 자본으로 대체하는 부분을 포함시켰다. 로드베스투스는 지대, 자본, 이윤, 임금을 소득이라고 지적했었지만, 정치경제학에서 소득 개념을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었다. 또한 국민 총 생산물 총 일부는 생산으로부터 소비되거나, 소모된 자본으로부터 대체해서 사용됐고, 다른 일부는 국민 소득으로부터 사회 구성원들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요구했다. 로드베스투스는 애덤 스미스와 동일한 오류를 남겼으며, 엥겔스도 지적했지만, 생산물에 따른 임금, 이윤, 지대라는 구분마저 소득 개념에서 기본적인 화폐를 국민 소득인지, 임금에 따른 자본 소득인지, 온갖 추측만 난무했다. 헤르크너, K. H , R. 마이어, A. 바그너와 같은 '고전적인' 경제학자들도, 수익과 소득 개념에서 생산물을 구분했었지만, 분배와 소비에 대한 관심으로 치중됐고, 사회 전반적으로도 자본에 따른 재생산 과정, 사회적 생산물에 따른 많은 구성 요소들을 대체할 수 있는 과정을 알지 않고서는 소비에 대해서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에서는 생산이 아니라, 생산에 따른 사회적 관계, 사회적 생산 체계이기 때문이다. 총소득량, 순소득량이란 총산출량, 순산출량과도 구분한다. 왜냐하면 총산출() 또는 총생산물은 재생산된 총생산물이다. 총소득은 총생산물 가운데 가치 일부와 총생산물 가운데에서 생산으로 투입된 양이며, 앞서 언급한 소비되는 불변 자본으로부터 대체하는 부분에서 차감된 남은 부분이다. 따라서 총소득은 임금(노동소득) + 이윤 + 지대로 계산한다. 반면 순소득은 초과가치, 임금을 차감하고 남는 초과 생산물이며, 자본으로 구체화되어, 지주로부터 분배된 초과 가치와 자본에 따라 측정된 초과 생산물이다. 총 소득에 따른 국민 소득이란 임금, 이윤, 지대가 있으며, 자본주의적인 생산에 따른 이윤과 지대로 분해한 소득만을 순 소득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추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참고로 사회적 생산물에 따른 '수입'은 마르크스, <자본> 3권에서도 명시했다.

 

1-4. 자본주의 국가 아래에서 외국 시장

 

자본주의에서 생산물로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분석의 시작은, 대외 무역이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수입과 수출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을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초과 가치를 해외 시장으로부터 환원시키면서 설명하는데, 주어진 이론으로만 해석하고는 자본주의가 국내 시장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을 회피한다. 특히 자본주의 국가일수록 해외 시장은 초과 가치나, 사회적 생산물이 아니라, 상품 유통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대외 무역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인민주의자들은 초과 가치를 소비할 수 없다고만 '진부하게' 생각한다. 해외 시장 문제를 다루려면, 외국 무역 발전사, 상품 유통 발전사를 살펴봐야만 한다. 예전에는 사회적 생산에 따른 각 부문 가치와 자연적 형태 간의 일치가 돋보여서, 사회 자본에 따른 재생산이 필연적이었지만, 여러 연속적이고, 변동된 평균 크기로만 확립됐었다는 특징을 지닌다. 해외 시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도 시장 역할은 많은 산업 분야에서도 균등하게 발전하지 않는다면, 서로를 경쟁하고, 앞지르면서 발전되기 때문이다. 인민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초과 가치를 구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많은 산업 발전에서도 비례하거나, 고르지도 않았다. 자본이 한 산업 분야를 처분하고, 다른 산업 분야로 옮겨갈 때는, 산업 분야에서 나오는 경제 위기를 막고자 한다. 이전의 자본주의 생산 법칙에 따른 기술적 토대 위에서 생산을 반복한다. 지주 부역 경제에서도, 농민들의 자연 경제, 산업가의 수공업 생산 등과는 반대로 자본주의 생산 법칙에서는 생산 양식의 변화와 생산 규모 면에서도 무제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충분한 기반 및 시설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생산 양식 아래에서는 경제 단위 성격으로나, 규모 면에서는 큰 변화 없이도, 소규모로 형태로, 지주의 영지, 농촌 마을, 농촌 수공업자, 소규모 산업가(수공예인) 위주로도 존재했었지만, 자본주의적인 기업이 출현하면서, 마을 공동체, 지역 시장, 국경 단위를 넘나들며 성장하게 됐다. 국가적인 고립은 일찌감치 무너진지 오래이고, 모든 자본주의 산업의 추세들은 해외 시장을 모색해간다. 자본주의에 따른 '진보적인' 역사적인 과업들은 실제로는 경제 체계에서도 오래된 고립을 파괴하거나, 세계의 모든 국가와 국경을 경제 전체 단위 하나로 연결해서 묶는다. 따라서 해외 시장을 조사하거나, 분석하고자 한다면 역사적 성격에 따른 각 산업 분야에서 개별적인 발전 과정, 국내 발전 과정, 자본주의 산업으로 전환 과정을 두루 살펴봐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국내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모든 점들을 잘 살펴봐야만 한다는 말이다.

 

1-5.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의 이론적 오류 정리.

 

국내 시장에서 상품 생산과 자본주의 발전 과정은 사회적인 분업을 띤다. 많은 형태로 된 원자재 가공에서도 농업 부문에서는 차례대로 분리되어, 독립적인 산업 부문으로부터, 각 산업 부문에 따른 생산물이자 상품으로 농산물과도 교환된다. 따라서 농업 자체에서도 상품을 생산하는 산업이 일어나게 된다. 자본주의 경제에 따른 모든 발전하는 상품 경제는 상업 및 비농업 인구로는 농민 인구보다 빠르게 증가하며, 더 많은 인구는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전환된다. 직접 생산자와 생산 수단을 분리하면서 단순 상품 생산에서, 자본주의적인 생산으로 전환시켜, 국내 시장을 창출하면서 수탈이 이뤄진다. 소규모 생산자에서 벗어난 생산 수단은 새로운 소유자 수중에서 자본으로 전환되어, 생산된 상품을 다시 시중에 상품으로 전환한다. 단순 재생산에 따른 생산 수단에서도 구매가 필요하며, 시장에 따른 생산 수단으로부터 생산물은 상품으로 전환된다. 반면에, 소규모 생산자에 따른 생계 수단은 가변 자본에 따른 물질적인 요소, 고용주 등은 노동자를 고용하고자, 금액을 지출하며, 이러한 소비재에 따른 국내 시장은 생계 수단을 상품으로 전환시킨다.

 

자본주의에 따른 생산물로부터 초과 가치가 구체화되는 과정 속에서 사회적 생산물은 개인적 생산물로 전환되는 과정으로, 기존의 가변 자본 + 초과 가치 구분에서 불변 자본 + 가변 자본 + 초과 가치라는 부분으로 분해되고, 사회적 생산물은 생산 수단과 소비재로 구분된다. 자본주의 생산에서 생산물은 초과 가치에 따라서가 아니라, 해외 시장에서 구체화된다는 문제로만 접근하는 방식은 잘못됐다고 마르크스는 충분히 지적했다. 마르크스는 구체화된 논의로, 국민 지출(소비)와 소득 문제를 다뤘고, 국내 시장을 상품 경제로도 다뤘다. 전적으로, 상품 경제 발전에 따라 창출된 사회적 분업은 어느 정도 분화되는지에 따라 발전 수준이 결정되며, 상품 생산에서 제품이라는 노동력으로 확장되며, 국내 시장을 창출하면서도 확장된다. 노동력은 상품으로 전환하는 정도에 따라 비례해서 자본주의는 국가 전체 생산을 포괄하며, 생산 수단을 중심으로 발전한다. 국내 시장에 따른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창출되고, 사회적 분업을 심화시킨 직접 생산자는 자본가와 노동자로 분리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따른 국내 시장이 발전하는 정도는 해당 국가에서도 자본주의 발전 정도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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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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