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젬스트보 통계 및 군마 인구 조사 결과
농민들의 상·하층 관계는 농촌 부르주아와 농촌 프롤레타리아와 관계된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많은 지역과 많은 조건을 가진 지역에서도 비슷하다. 심지어 전체 작물 재배 면적에 따른 해당 농민층엣도 차지하는 비율, 가축 수 등과 같은 수치들조차도 비교적 작은 범위 내에서 변동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많은 지역에서 농민층 간 관계 통계를 사용해서, 전반적으로, 당시에 러시아 농민층들이 어떻게 나뉘었는지를 얼마나 파악하거나, 활용할 수 있을까. 또한 어떤 결과로부터, 전체 러시아 농민층에서 상층과 하층 구성과 상호 관계를 판단하는가. 당시에 러시아에서는 전국에서 모든 작물 재배 농장을 등록하는 농업 인구 조사를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고가 거의 없었다. 농민들이 어떤 경제 집단으로부터 나뉘었는지를 판단하는 유일한 자료가, 젬스트보 통계와 군마 인구 조사 보고였다. 보고서에서는 농가 내 짐을 나르던 가축 분포도를 볼 수 있다. 물론 매우 부족한 자료로부터, 대략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는 없었다. 특히 가축을 많이 소유한 농민과 적게 소유한 농민 간 비율은 이미 분석됐고, 많은 지역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블라고베셴스키, 「잼스트보 주택 별 인구 조사 경제 수익」(1893)에 따르면, 젬스트보 인구 조사는 22개 구베르니아에서, 12개 군 단위 지역(위예즈드)를 대상으로 삼아, 2,983,733가구 농민과 남녀 인구를 합친 17,996,317명의 인구를 기록했다. 그러나 가계 분포도에 따른 자료만으로는 모든 구베르니아에서 동일하지는 않았으므로, 3개 구베르니아에서, 4개 집단 가구가 아닌, 3개 집단으로 분류된 11개 군을 제외해야만 했었다. 따라서 21개 시(구베르니아)로부터, 나머지 112개 군에 대한 인구 1,500만명, 약 250만 가구를 포함한 통합 수치를 얻을 수 있었다.
해당 자료만으로는 유럽 러시아에서 총 농민 가구 수에 따른 1/4보다도 적은 양을 포괄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 각료 위원회 총리실에서 발행했었떤, 「유럽 러시아 농촌 인구에서 경제적 지위에 대한 종합 통계 자료」(1894)는 유럽, 러시아에서만 50개 구베르니아에서, 11,223,962가구가 볼로스트 구역에 있었고, 10,589,967가구는 농민 가구였다. 러시아 전체 통계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실시했었던 「러시아 제국 통계, 1888년 군마 인구 조사」(1891)와 「1891년, 군마 인구 조사」(1894)가 있다. 두 보고서에서는 농민 사이에서 가축 분포도 가운데, 말에 대한 통계를 보유했다. 「러시아 제국 통계, 1888년, 군마 인구 조사」에서는 1888년에 수집된 41개 구베르니아 시에서, 당시에 폴란드 왕국이었던, 10개 구베르니아를 합해서, 통계 분석을 실시했었으며, 「러시아 제국 통계, 1891년 군마 인구 조사」에서는 유럽 러시아에서 18개 구베르니아 시, 코카서스, 칼미크 대초원, 돈 군사 지역에 대한 통계 분석을 포함했다. 유럽 러시아에서는 49개 구베르니아를 골라내더라도, 돈 지역 통계는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1888년, 1891년 통계를 결합했을 때, 마을 공동체에서 농민들이 소유한 가축 총 수에 따른 분포도를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전역에서 농민들 사이에서 마차마 분포도로는 평균 분화 정도에 해당한다. 실제로는 분열이 훨씬 심각했었다. 전체 가구 1,020만 가구 가운데 220만 가구에 해당한 22%는 1,700만 마리의 가축 가운데에서도 950만 마리, 그러니까 전체 가축 수에서 56.3%를 소유했었다. 정작 280만 가구라는 엄청난 규모 면에서는 가축을 소유하고 있지도 않았으며, 290만 가구에서는 전체 가구 수의 17.2%만을 소유했었다. 따라서 확립된 집단 간 관계에서도 규칙을 바탕으로, 자료를 파악했다. 가구에서 1/5은 전체 가축 가운데에서도 절반을 소유했었다면, 전체 농업 농민 생산량으로는 절반 이상이 농촌 부르주아지들의 수중에 있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었다. 생산 집중도에 따른, 부농들은 매입 토지, 농민들의 임대 토지(할당, 비할당 토지 모두 포함했을 때), 그리고 지역 마을 공동체에 따른 부농의 형성 과정을 고려해봤을 때, 대부분을 수중에 쥐고 있었다.
토지 매매에서는 특히 부유한 소수 집단에게는 할당 토지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하물며 매우 '좋은' 시기에도, '평균적인' 농민들은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평균보다 상당히 나은 형편에서 부유한 소수 집단은 자영농업으로 모든 지출들을 충당시킬 수 있었으며, 더군다나 초과분에 따른 '잉여금'을 회득했다. 그리고 상품 생산자가 되어, 판매를 위해 농산물 재배에 더욱 종사했다. 더 나아가, 비교적 대규모로 형성된 농작물 농장, 상업 및 산업(체) 기업들을 결합시켜서, 농촌 사회에서도 충분히 부르주아지들로 변모해갔다. 따라서 여기서 산업이란 당시 러시아에서도, 제아무리 진취적인 농민들일지라도, 전형적일 수밖에는 없었다. 설령 가족 규모가 매우 크거나, 많은 가족 노동자들을 보유했으므로, 당시로는 부농들의 특징이었고, 전체 가구에서 1/5은 인구의 큰 비중으로 둘 때도 대략 3/10을 차지했다. 그러므로 부유한 소수는 정규직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를 더 많이 고용할 수밖에는 없었다. 왜냐하면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는 러시아 농촌 사회에서도 총 수 대비 가운데 상당 수가 부유한 소수들로부터 농장이기 때문이다. 앞선 분석에서도, 부유한 소수들로부터 대표하는 인구 비율, 농업 전반에서도, 일어난 총 역축(사역 가축) 가구 수, 경작 면적에 따라 차지하는 비율을 비교할 때만 결론이 도출된다. 부유한 소수 집단들은 또한 농업 농민에서 발전 추세에서도 꾸준하게 참가해서 관여하고, 개입할 수 있었다. 소수 집단들에 따른, 나머지 농민 간 관계 면에서도 농업 조건, 제도 체계, 상업적인 농업이라는 형태의 차이에 따라서도, 다른 형태와 방식이 나타났다. 농민층 분화 요인에서 주요한 추세는 하나였고, 지역적인 조건에 따라서는 형태가 또 다르게 변형되거나, 변경될 수 밖에는 없었다.
무마 농민, 일마 농민의 상태는 정반대였다. 앞서 젬스트보 통계학자들은 계산을 산정했을 때, 농촌 무산층 범주도 포함시켰었다. 따라서 대략적인 계산마저, 농촌 무산층 비율 범주에 속했었던 모든 무마 농민과 일마 농민의 최대 전체 가구로 보자면, 약 절반 가량, 3/4을 과장해서 포함시켰다. 토지 할당으로는 매우 열악한 농민일수록, 농기구, 종자 등 물자가 부족해서,
가끔 자신들의 토지를 임대했기 때문이다. 농민이 임대한다거나, 매입한 토지 가운데 정작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는 척박했다. 왜냐하면 농장에서 생계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을만큼의 수확량을 내지도 못했으며, 하물며 주요한 생계 수단들이 기껏해야 노동력 판매에 따른 '산업 고용'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토지 할당제로부터 부여 받았었던, 모든 임금 노동자,
정규직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비숙련 노동자, 건설 노동자 등이 이뤄졌다.
- 사라토프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5개 지역으로, 사마라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5개, 베사라비아 구베르니아에서는 1개였다.
- 농민들 사이에서는 가축 분포는 <러시아 제국 통계, 1893-1894>에서도 판단할 수 있었다. 1893-1894년, 유럽 러시아에서는 39개 구베르니아 시에서 8,288,987가구가 있었고, 이 가운데 무마 가구로는 2,641,754가구로 31.9%였다. 일마 가구는 31.4%, 이마 가구는 20.2%, 삼마 가구는 8.7%, 사마 가구는 7.8%였다. 농민들이 소유한 말은 총 11,560,358가구였으며, 그 가운데 22.5%가 일마 농민이었으며, 28.9%는 이마 농민들이었다. 삼마 농민들은 18.8%였으며, 다마 농민들은 29.8%였다. 따라서 농민들의 16.5%는 곧 부유층에서 전체 말로 볼 때, 48.6%를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낙농업 지역에서는 말의 수가 아니라, 소의 수에 따라 분류하는 게 훨씬 더 정확했다. 시장형 농경이 우세한 곳에서는 두 지표 모두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군마 인구 조사에 따름녀, 동원 시 군 복무에 적합한 가축 수를 등록을 차르 러시아에서는 6년마다 실시했었다.
첫 번째 인구 조사로는 1876년, 러시아 서부에서 33개 구베르니아 시를 대상으로 실시했었다. 두 번째 인구 조사는 1882년에 실시했으며, 유럽 러시아 전체를 대상으로, <1882년 말 인구 조사>(1884)로 출판됐다. 1888년에는 41개 구베르니아 시를 대상으로 인구 조사를 실시했었으며, 1891년에는 나머지 18개 구베르니아 시와 코커서스 구역를 대상으로 인구 조사를 실시했었다. 수집된 통계는 중앙 통계 위원회에서 수행했었고, 초록으로도 출판됐다.
<러시아 제국 통계, 1888년 군마 인구 조사>(상트페테르부르크, 1894년), <러시아 제국 통계, 1891년 군마 인구 조사>(상트페테르부르크, 1894), 다음 인구 조사로는 1893-1894년 사이에 실시했었으며, 유럽 러시아에서는 38개 구베르니아를 대상으로, <러시아 제국 통계>로 출판됐다. <1893-1894년 군마 인구 조사>(상트페테르부르크, 1896)과 <1899-1901년 군마 인구 조사> 자료로는, 유럽 러시아에서 43개 구베르니아, 1개 코카서스 구역, 구베르니아 시, 특히 아스트라한 구베르니아에서 칼미크 초원을 대상으로 실시했었다. 군마 인구 조사는 모든 농촌을 포괄한 조사였으며, 농민층 분화 과정에서도, 인구 조사 자료로 검토해서 활용했다.
2-2-1. 1888-1891년, 1896-1900년 군마 인구 조사 비교
5개 남부 구베르니아(1896)과 나머지 43개 구베르니아(1899-1900)을 결합했을 때, 유럽 러시아에서는 49개 구베르니아에 대한 통계를 얻을 수 있다. 1888-1891년까지는 49개의 구베르니아에 대한 통계를 인용했다. 그러나 구베르니아 시 하나만으로는 부족했다. 1888-1891년까지 동일한 48개 구베르니아를 얻을 수 있었다. 1888-1891년과, 1896-1900년을 비교해봤을 때, 농민들에 대한 수탈은 심화됐다. 가구 수도 거의 백만 가구나 증가했었다. 가축 수는 비록 미미했었지만 감소했다. 가축이 없던 가구 수로는 특히 빠르게 증가하면서 비율로는 27.3%-29.2%로 상승했다. 빈농들은 560만 가구에서 660만 가구로 늘어났다. 가구 수 증가는 모두 빈농 수를 늘리는 데 사용됐다. 가축을 많이 소유한 가구 비율은 감소했었다. 가축을 많이 소유한 가구는 220만 가구에서 200만 가구로 줄어들었다. 중산층과 부유층 가구에서는 거의 변동이 없었다. 1888-1891년 사이에는 4,465,000가구, 1896-1900년에는 4,508,000가구였다. 따라서 농민 빈곤과 수탈은 심화됐다.
농민 상층과 하층 관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가구에서 50%를 차지하는 하층 가구에서 20%를 차지하는 상층을 이뤘을 때, 1888-1891년 가구에서 50%를 차지하는 빈곤층은 가축의 13.7%를 소유했다. 가구에서 20%를 차지하는 부유층은 가축의 56.2%를 소유했다. 1896-1900년에는 가구 50%를 차지하는 빈곤층은 농민 소유 가축에서 13.7%를 소유했었지만, 가구에서 20%를 차지하는 부유층은 가구에서 53.2%를 소유했었다. 따라서 두 층 간의 관계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농민 전체로는 가축 사육이 더욱 어려워졌다. 여러 가축들을 키우는 가구 수와 비율들도 모두 감소했었다. 유럽 러시아에서는 전반적으로, 소농들이 쇠퇴했따. 러시아에서는 농업에 종사하는 가축 수가 경작 면적에 비하면,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비록 소규모 농민 국가에서는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가축 수 감소가 어느 정도인지는 농민 부유층 계급 사이에서, 짐승 가축 수와 경작지 면적 사이에서 '정상적인 비율'로 '회복', V.V. 보론초프는 진단했었다. 비힐라예프, 「러시아 농업 현실 묘사(스케치)」, 농부(Khozyain)지와 체르넨코프, 『농업 농민 특성화』도 참조해보자. 그들 모두 농민들 사이에서 가축 분포에 대한 수치가 많다는 점에 매료된 나머지, 경제적 분석을 통계적인 작업으로 바꿔놨다. 또한 농민 농장 유형에서 일용직 노동자, 중농, 기업가 등을 연구하는 대신에, 산술적 열정만으로 수치 열만 셀 줄 아는 초보자와 같이 연구했다. 특히 체르넨코프는 오로지 그런 수치 조작 덕분에 차별화에 대해 어떤 낡지 않고, 새로운 현상으로 보았으며, 완전히 자본주의적인 현상으로 해석하는 편견이 있다고 반박했었다. 그러나 체르넨코프는 경제학을 잊었으며, 그저 통계로부터 결론을 도출했었고, 가축 수 분포가 단순한 변화만을 증명한다고 지적했었지만, 정작 농민층 분화 요인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토지 임대, 토지 매수, 기계, 외부 고용, 상업 농업의 성장, 임금 노동 등 전체적인 그림을 살펴볼 줄 알아아만 하지만, 체르넨코프는 이마저도 낡지 않고 그저 새롭다고만 한다거나, 자본주의적인 현상도 아니라고 오히려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2-2-2. 농민 예산에 관한 젬스트보 통계
젬랸스크, 자돈스크, 코로토야크, 니즈네데비츠 지역를 대상으로 한 1889년, 보로네시, 「농민 토지 소유권에 대한 평가 수익」에는 「전형적인 농장 구성 및 예산 통계 유형」이 있었다.
67개 예산 가운데에서, 14번 코로토야크 지역을 제외하고는 가축 별 6개 집단으로 나눌 수 있었다.
a: 무마농
b: 일마농
c: 이마농
d: 삼마농
e: 사마농
f: 오마농 이상
그러나 이와 같은 분류로는 해당 지역에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상하층 모두 경제에서 산업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고려해봤을 때, 예산 통계를 검토하는 호별 인구 통계 조사와 비교하고, 분류했기 때문이었다. 비교하자면, 농민 집단으로 나눌 수 있었지만, '일반적이고', '전체적인' 평균은 순전히 '허구'였다. 여기서 평균 예산 수치는 늘 평균 이상의 유형 농장을 특징지었다. 예산으로는 최소 한도 내에서 균형 잡힌 농장들만 전제로 삼았었다. 이전 농장들은 빈곤층에서도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가금류를 기준으로, 가구 예산 및 기타 통계를 분류하고, 비교해봤을 때, 예산 수치로는 먼저 각 농민 집단에서 평균값을 구해야만 했다. (A)에서는 일반 예산, (B) 작물 재배, (C) 생활 수준으로, 세 가지 항목이었따. 지출과 수입 규모 면에서는 많은 집단에서 예산 규모가 매우 다를 수밖에는 없었다. 극단적인 집단을 제외하더라도, (E)의 예산은 (B)보다 5배가 넘었지만, (E)에서 가족 규모는 (B)보다 3배 미만이었다.
지출 분포도에서는 각 집단에 따른 총 지출과 비교한 농장 지출로는 무산층과 지주 모두 있었다. a 집단에서 농장 지출은 14%에 불과했었지만, f집단에서는 61%였다. 농장 지출에서 절대 수치도 마찬가지였다. 지출 면에서는 무마 농민뿐만이 아니라, 한 마리 가축을 모는 농민에게도 해당했으며, 한 마리 가축을 모는 농민들은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일반적인' 유형이었으며, 농장 노동자와 일용직 노동자에 더 가까웠다. 식량에 대한 지출 비율 면에서는 a 집단보다 두 배 정도로,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높은 비율로 낮은 생활 수준이 드러났으며, 지주, 노동자 예산을 극명하게 구분했다. 소득 항목에서 지출에 따른 상업 소득은 두 극단 집단인 무마농, 농촌 기업가로 인해 농업 총소득을 초과했다. 최하층 농민 집단에서 개인 산업이란 주로 고용 노동이었으며, 토지 임대 소득은 잡소득에 해당하는 항목이었다. 자영농 집단에서는 토지 임대 소득이 농업 총소득보다 미미한 수준의 사람들을 포함했다.
무마농은 농업 총소득이 당시로는 61.9루블이었으며, 토지 임대 소득은 40루블이었다. 다른 무마농에게도 농업 총소득은 31.9루블이었으며, 토지 임대 소득은 40루블이었다. 토지 임대 소득, 농장 노동 소득은 농민들에게는 개인적인 필요만을 충족시켰다. 농업 총소득에서 농장 운영에 대한 지출을 공제해야만 했다. 추론으로 미뤄봤을 때, 무마농들에게 농업 순소득은 41.99루블로, 산업 순소득은 59.04루블이었고, 한 마리 가축을 소유한 농민 순소득은 69.37루블, 49.22루블로 나란하게 비교하자면, 생계비 일부를 충당하는 임금으로 줄어든 몫을 가진 농업 노동자 유형들이 있었다. 농민을 지주 산업과 혼동한다는 건, 과학적인 연구를 무시하는 짓이었다.
시골 반대쪽에서는 자영농, 상업 및 산업 활동을 병행하는 자영농들은 상당한 수입을 올렸었고, 수입은 수백 루블에 달했다. 개인 사업이 명확하게 정의되지도 않았으며, 상하층 간 차이를 은폐했으며, 개인 사업에서 발생하는 소득 규모 자체가 드러났다. 참고로 보로네시 통계에서는 개인 사업으로는 구걸, 농업 노동, 집사, 관리 등이 있었다. 순소득 규모로는 무마농, 일마 농민들이 두드러졌으며, 1-2루블에 해당하는 비참한 잔액, 화폐 적자까지 기록했었다. 농민들의 자원은 임금 노동자들의 자원과 비슷했다. 이마농은 적어도 몇십 루블에 달하는 순소득과 잔액을 보유했었다. 부농들의 순소득은 120-170루블에 달했으며, 당시에 러시아 노동 계급 수준보다도 훨씬 상회했다.
노동자와 고용주를 하나로 통합해서, 평균 예산을 편성한다는 건, 적당한 자립과 순소득만을 보여줄 뿐이다. 수입에서 491로블, 지출 443루블, 잔액 48루블과 (C) 현금 18루블을 포함했을 때, 이러한 평균은 완전한 허구였다. 하위층으로는 a, b에서 66개 예산 가운데 30개 예산에 속하는 농민들에게는 극심한 빈곤을 은폐했다. 가구 당 총소득 120-180이라는 적은 루블 수입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어려워서, 정기적으로 농장 노동, 일용직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따라서 현금 및 현물 수입, 지출들을 정확하게 계산한다면 농민, 시장 간 차별화 관계를 파악하며, 문제되는 현금 수입 지출에서 각 부문 별 예산 가운데 현금 지출이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파악했다. 현금 소득, 지출 비율은 중간 집단에서 지출이 특히 규칙적으로 증가해서, 극단적인 집단으로 볼 수 있었다. 농업에서는 가축을 보유하느냐, 보유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뚜렷한 상업적인 성격을 띠어갔다. 두 경우 모두 상품을 판매해서 생활하더라도, 상품은 노동력이고, 다른 경우로는 상품은 판매를 위해 생산된 재화이므로, 상당한 임금 노동과 자본 형태를 취하는 생산물이 사용됐다. 예산 면에서는 농민들의 차별화는 농민들을 농장 노동자로, 소규모 상품 생산자, 소부르주아지들로 전환하면서 자본주의를 위한 국내 시장을 창출해갔다.
중요한 추론으로는 모든 농민 집단에서는 농업이 매우 폭 넓게 상업화됐고, 시장에 의존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소득이나 지출 면에서는 현금 부분이 40%미만으로 감소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비율 면에서도 높았다. 이렇듯 소작농 총 소득에서는 짚이나 겨 등과 같은 가축 유지비도 포함됐었다. 중아 흑토 지대에서 농민들은 화폐 경제가 전반적으로는 산업 지대 외곽 대평원보다 미약하게 발달한 곳조차, 매매 없이는 존재할 수는 없었고, 시장에서는 화폐 힘에 이미 의존해갔다. 인민주의자들은 자연 경제에 대한 동정만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일수록, 판매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으며, 상품 생산에서 발전을 지연시킨다면, 생산자 조건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 마르크스는 농민에 대해서도 자본주의 생산 양식으로는 불완전한 발전에서 생겨난 흠점들과 일치할 수밖에는 없으며, 농민들에게도 자신들의 제품을 상품으로 생산하는 조건 없이 상인이자, 산업가가 된다는 점을 지적했었다. 예산 자료가 세금에서 상품 생산 발전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견해를 반박했으며, 지대와 세금은 교환 발전에서는 중요했었지만, 상품 경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세금은 부차적으로 전락했다. 농민들에게는 총 현금 지출, 세금 및 관세 지출을 비교한 비율로는 15.8%에 달했다.
a: 24.8%
b: 21.9%
c: 19.3%
d: 18.8%
e: 15.4%
f: 9%
따라서 세금 지출에서 최대치는 사회 경제로부터 농민들이 불가피하게 부담한 나머지 현금 지출로는 1/3이었다. 그러나 교환 발전에서는 세금 역할을 고려하지도 않았으며, 소득 대비로 보자면, 비율이 지나치게 높았다. 개혁 이전 시대에서는 농민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했으며, 소농 토지를 소유한 농장 노동자들에게는 총 지출에서 1/7을 차지하는 세금의 존재가 두드러졌다. 더군다나 마을 공동체 내 세금 분배는 불균등했다. 농민들의 형편이 좋을수록, 총 지출에서 세금으로 들어가는 비중이 줄어들게 됐다. 가축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농민들은 소득에 비례해서, 가축들을 많이 보유한 농민들보다 세 배나 많은 세금을 납부했다. 마을 공동체 내 세금 분배에 대해서라면, 토지에서 데시아틴 당 세금, 공과금을 계산했을 때, 균일하게 나타났다. 불균형한 마을 공동체가 의무적, 봉건적인 성격에서는 불가피했다. 농민들은 소유 토지에 따라 모든 세금들을 공유했었다. 세금 몫, 토지 몫이 결합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농민층 분리는 현대 농촌 사회에서도 양극으로부터 할당지 역할들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보유한 할당지에 따른 세금 배분은 부농에서 빈농으로, 세금 부담을 전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마을 공동체 내에서 빈농들에게는 더욱 해로운 결과가 생겨났다. 농촌 농업에서 농장은 토지 임대 및 임차, 가구 규모 및 경작 면적, 농장 노동자 고용 등, 각 집단 간 관계로는 예산 자료 및 대량 자료를 검토한 관계에서도 동일했다. 이 뿐만이 아니라, 각 집단에서 경제적인 절대 수치 또한 전체 군 단위(위예즈드) 통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가구에 따라서는 무마농과 일마농들은 동일했으며, 예산 통계에서도 충분히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농민 농장에 따른 재산과 농기구에 대한 자료에서도, 많은 집단에서 도구, 가축을 제공받는 정도 차이를 통계표로 볼 수 있었다. 앞서 대량 통계를 기반으로 언급하자면, 여기서 많은 집단들에서는 재산을 소유한 정도가 완전하게 달랐다. 빈농 가축보다도, 부농 가축과 매우 달랐다. 가축의 1/4가 아니라, 가축의 5/27이었기 때문이다. 가축이 아예 하나도 없거나, 적어도 한 마리만 기르는 농민들의 농장은 비참하고, 또 열악했다. 농민들은 농장에다 수백 루블을 쓰면서, 농기구를 개량하고,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대규모로 토지를 매수하고는 연간 50,100,200루블의 임대료를 받는 소수의 농민들과 묶어낸 방식은 매우 잘못됐다. 그런데도 가축 하나 없는 농민들은 일용직 노동에서 높은 지출을 차지한다는 말은, 통계학자들이 다음과 같은 항목에서 완전하게 다른 두 가지를 하나로 포함시켰기 때문이었다. 첫째로는, 고용주로부터 농기구로 일하는 노동자를 고용해서,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한다거나, 둘째로는 자신들의 농기구로부터 고용주 토지들을 경작해야만 하는 이웃 농민들을 고용하는 경우였다. 따라서 여기서 고용이란 정반대로, 서로 엄격하게 구분됐다. V. 올로브(V.Orlov), 「구베르니아 시 통계 수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농업 소득과 관련해서는 통계가 매우 부족했다. 수확량 문제가 검토되지도 않았고, 각 특정 구역에 따른 농산물 판매 현황, 판매 조건에 대한 통계마저 기입되지 않았다. 상위 집단에서는 농업 현금 소득 비율이 매우 감소했고, 농업에서는 매우 넓은 면작들을 경작했다. 따라서 매우 큰 규모로 농업은 매우 큰 자연 경제였다.
농업과 기업가적 성격은 산업 사이에서도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같은 유형으로 산업은 많은 가축들을 소유한 농민 예산에서도 특히 중요했다. 검토 중인 통계에서는 지역 농민 부르주아지들에게 전형적으로는 농업, 상업 및 산업 기업을 결합하는 경향이었다. 같은 유형으로는 농부를 경작자와 비교한 건 농업을 자연 경제로만 다루었기 때문에 잘못됐다. 농업에서는 농산물들의 기술적인 가공에서 제분, 착유, 감자 전분 제조, 증류 등과 결합되어, 농업에서 발생하는 금전적인 소득은 농업이 아닌 산업 시설 소득으로 귀속됐다. 실제로 농업은 더 이상 자연 경제가 아닌 상업 경제였다. 대량 농산물은 농장 노동자와 산업 기업(우편 운송)에서 고용된 가축 생계를 위해 현물로 소비된 농장에서도 같았다. 최상위 집단에 속하는 같은 유형 농장에서도, 코로토야크 지역에서 예산 1위는 가족이 18명이었고, 노동자 4명, 농장 노동자 5명, 가축 20마리였으며, 농업 소득은 1,294루블, 산업 기업 소득은 2,675루블이었다. 자연 경제 농촌에서도 평균을 달성하고자, 무마 농장, 한 마리 가축을 기르는 농장들과 결합됐다. 농업 활동 규모, 유형 분류에 따라 산업 활동 규모, 유형 분류를 결합하는 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농민 생활 수준에서는 현물 식량 지출은 불완전하게 제시됐다. 농산물, 육류에서도, 무마농, 한 마리 가축만을 기르는 농민을 합쳤을 때 나머지하고 대조는 옳다는 점이다. 농민 집단에서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식량이 부족해서, 품질이 낮았다. 특히 감자 생산에서 그랬다. 한 마리 가축만을 기르는 농민 식량은 무마농보다도 더 열악했다. 여기서도 평균 문제는 허구였고, 농민 대중들에게도 부족한 영향 상태는 부농들의 만족스러운 영양 상태 아래로 가려졌다. 부농들은 빈농들보다 1.5배 더 많은 농산물, 3배나 많은 육류를 소비했다. 생산량에 따라 농민 식량 통계들도 뒷받침할 수 있었다. 세 집단으로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최하위 집단, 중간 집단, 최상층 집단이었다. 특히 최상층 집단에서는 최하위 집단보다 식량 품질이 두 배나 더 우수했다. '평균'이란 두 극단 집단을 모두 압도했기 때문이다. 식량에서 현금 지출은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두 극단 집단에서 농촌 무산층과 농촌 부유층에서 매우 높았다. 농촌 무산층에서는 중농보다도 더 많이 구매했었지만, 소비는 적었다. 필수적인 농산물을 구매하더라도, 농산물은 부족했다. 농촌 부유층에서는 더 많이 소비하기 때문에, 특히 비농산물 소비가 증가해서, 더 많이 구매했다.
두 극단 집단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일수록, 개인 소비재에 따른 러시아 시장 형성 과정을 알 수 있었다. 나머지 지출 항목에서는 남녀 한 사람 당으로만, 계산한다는 건 부정확했다. 왜냐하면 연료비, 조명비, 가정용품 등 비용들은 가족 구성원 수에 따라 비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민 생활 수준에 따라서도 세 가지 다른 집단은 구분됐다. 모든 개인 소비 지출에서는 현금 부분들이 하위 집단에서는 매우 높게 나타났다. a 집단에서는 지출 약 절반이 현금이었다. 상위 집단에서는 현금 지출이 증가하지는 않았으며, 약 1/3에 불과했었다. 양 극단 집단에서는 현금 비율이 증가한다는 점은 어떻게 균형을 이뤘을까. 상위 집단에서는 현금 지출들이 주로 생산적인 소비에 따른 농장 지출로 들어갔지만, 하위 집단에서는 개인 소비로만 나타났다. 따라서 농민들은 농촌 무산층들로 변모할수록, 주로 소비재 시장을 창출했었지만, 농촌 부유층들로 변모하면, 주로 생산 수단 시장을 창출한다. 따라서 두 가지 변하는 모습에서 모두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국내 시장을 창출하는 과정으로까지 확장된다.
엥겔스는 1891년 기근에 대해서도 자본주의가 국내 시장을 창출한다고 말했으며, 농민 몰락을 단지 가부장적인 경제에 따른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변모가 아니라, 인민 생산에 따른 쇠퇴로만 보던 인민주의자들을 알 수는 없었다. 인민주의자들은 농민층 분화 요인에서도 국내 시장 형성을 매우 간과했었다. 「국가 수입 증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Novoye Slavo, 1896), 미국 노동자 소득 표에서는 소득이 낮을수록, 식량 지출은 상대적으로 더 컸다. 따라서 식량 소비가 감소하면, 다른 생산물 소비에서도 훨씬 더 크게 감소한다고 내세웠다. 당시에 러시아에서는 빵과 보드카 소비는 감소했었다. 따라서 다른 생산물 소비도 감소했으며, 농민 부유층 소비 증가에 따른 대중 소비 감소는 상쇄됐지만, 이러한 주장은 오류를 전제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노동자로만 대체되어 노동자와 고용주가 창출되는 과정이며, 농민들을 노동자로 대체하면서부터 모든 소비를 개인적 소비로만 축소시키거나 생산적 소비에 따른 생산 수단 시장의 형성을 잊는다. 농민층에서 차별화되는 과정은 자연 경제만으로는 상품 경제를 대체하는 과정이라는 점 또한 잊었다. 따라서 시장이란 소비를 단지 늘려서 창출되는 게 아니라, 현물 소비를 현금으로, 지불 소비로부터 전환할 때만 창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무마 농민들은 중농보다 소비는 적었지만, 개인 소비재를 더 많인 구매할 수밖에는 없었으며, 더욱 가난해지고, 더 많은 돈을 벌어도, 더 많이 지출할 수 밖에는 없었다. 따라서 두 가지 모두 자본주의에서는 필수적이었다. 예산 수치 활용 면에서는 농민과 농촌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 면에서는 개인 소비 규모를 1인 당이 아닌, 성인 노동자 1인 당으로 계산했을 때, 니즈니 통계청에 근거했을 때 도표를 얻을 수 있었다.
농촌 노동자 생활 수준 통계에서 노동 평균 가격을 취했다. 1881-1891, 10년 사이에 보로네시 구베르니아 시에서 고용된 농장 노동자들의 연간 평균 급여는 57루블이었으며, 유지비를 포함하면 99루블이었고, 유지 비용은 42루블이었다. 농장을 소유한 농장 노동자와 일용직 노동잗르의 개인 소비 금액은 노동 평균 가격보다도 낮았다. 가족 유지 비용 총액에 따라 4인 가족에서 가축 하나 없는 농부들은 78루블이었고, 적어도 가축 한 마리를 가진 5인 가족 농부들은 98루블에 불과했으며, 농장 노동자들의 유지 비용보다도 적었다. 농장 지출, 세금 및 과세를 제외하고는 지역 토지는 세금 액수보다 낮지 않은 가격으로 임대됐따. 토지에 묶여진 노동자들의 처지는 비교적 자유로운 노동잗르의 처지보다도 더 나빴다. 농장 노동자들의 현금 지출은 가축 한마리를 보유한 농민과 무마농들의 개인 소비에 대한 현금 지출보다도 훨씬 높았다. 따라서 사람들을 하나로 토지에 묶는다는 건 국내 시장 성장을 오히려 저해할 뿐이다. 농장 노동자 소비에서는 젬스트보 통계를 활용할 수 있었다. 「오렐 구베르니아」(1892) 통계 보고서에서는 카라체프 지역 자료가 있었다. 당시에 해당 자료에서는 농업 임금 노동에 대한 158건에 대한 자료에 기반했다. 월 배급량을 1년 배급량으로 환산해볼 수 있었다.
호밀에 따라서는 한 가축을 보유한 농민, 무마농들의 생활 수준으로는 농장 노동자의 생활 수준보다도 높지는 않았으며, 농장 노동자들의 최저 생활 수준이었다. 농민 최하층에서는 농업에서 이들을 몰아내는 다른 집단과의 관계 면, 가족 부양에 따른 지출액을 차지하는 농업 규모 면, 노동력 판매에 따른 생계 수단 및 생활 수준 면에, 해당 집단에서 배정지를 소유한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에 속했다. 농민 예산에서 젬스트보 통계에 대해서, 수확과 곡물 가격 등의 영향력 아래에서도, 사브리나, 「반품 평가 보고서」(Evaluation Returns)로부터 예산 통계를 처리하고자 검토했다. 사브리나는 마르크스 이론을 사용했다고 말했으나, 정작 적극적으로 왜곡하고는 불변 자본, 가변 자본의 차이점을 고정 자본, 순환 자본의 차이점과 혼동했으며, 보다 선진적인 자본주의 용어, 범주를 농민 농업에서 무의미하고, 무분별하게 남용하고는 적용시켰다. 예산 수치를 처리했을 때 평균 규모를 남용했기 때문에, 모든 평가 보고서가 평균화 농민과 관련됐다. 4개 군(위예즈드)에 대해 계산된 토지 소득은 농장 수로도 나뉘었다. 무마농들은 소득이 가구 당 약 60루블, 부농들은 약 700루블이었다. 농장 당 불변 자본 규모에 따라, 전체 재산 가치가 결정됐다. 도구로는 평균 가치, 상업 및 산업 시설에서 평균 가치는 농장 당 15루블로 결정됐다. 사브리나는 부유한 소수로부터 사유 재산이라는 세부 사항을 무시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된다고 말했으며, 토지 임대에서도 평균 지출을 결정했다. 한 마리 가축만을 소유한 농민들은 60루블이었고, 부농들은 100-200루블이므로, 이를 모두 더해서 단지 농장 수로만 나뉘었다. 심지어 수도, 수리에 대한 평균 지출도 결정했다. 그것이 단지 도구, 가축 보충 및 수리를 말한다면, 수치는 무마농 지출로 보자면, 농장 당 8코페이카였고, 부농들은 75루블이었다. 사르비나는 「오스트로고즈스크 지역 보고서」에서 훌륭하게 적용했었던 '평균 수요 법칙'을 얻었다. 그리고 틀린 법칙으로부터 농민들은 최소 수요를 충족시키는 게 아니라, 평균 수준을 충족할 따름이었다. 소농업에서는 특수한 발전 유형이라는 결론을 매우 쉽게 도출했다. 농촌 무산층과 농촌 부유층을 균등화하는 이러한 교묘한 장치 속에는 익숙한 분배에 따른 분류가 더욱 강화됐다. 예산 통계를 적용했다면, 농민들을 한 집단으로 결합시켰다. 한 가족 당 15-25데시에 따른 대규모 할당을 받은 범주에 속한 농민들에게는, 23.5데시 할당을 임대해서, 1.3데시 작물을 재배했으며, 개인 산업으로부터 생계를 유지한 남녀 10명 당 190루블 소득을 확보한 사람, 코로토야크 지역 예산 10번을 추가로 14.7데시를 임대해서, 23.7데시 작물을 재배하고는 농장 노동자를 고용해서, 남녀 10명 당 1,400루블을 확보한 사람들, 자돈스크 지역에서는 예산 2번에 따라,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들의 농장에서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민, 농장을 더하고는 합계를 추가된 항목 수로 나누어 특수한 유형으로 개발이 이뤄진다고 말했으며, 농민 농업 분야에서도, '평균 통계'만이 규칙적이고, 배타적으로, 농민들에 대한 차별화를 모든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사르비나는 『수확의 영향력』에서 기사에 실린 방법을 대대적으로 채택했었다. 당시에 러시아 농민 전체 예산을 계산하고자 노력을 기울였지만, 똑같이 시험된 평균값을 적용시켜버렸다. 러시아 경제에서 문학적인 미래 역사가는 인민주의적인 편견으로 인해 경제 통계에서조차 기본적인 요구 사항, 임금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에서 엄격하게 구분해야만 하는 요구 사항마저 잊었으며, 그들을 묶은 토지 소유권에 따른 형태, 중개 유형들이 얼마나 많았고, 또 복잡한지에 관계 없이 이뤄져야만 했었다.
- 자료에서 매우 큰 결함은 많은 지표에 따른 분류가 부족했으며, 표 채택에 따른 농장 자료가 부족했다. 비농업 직종에서도 모든 종류로부터 고용 통계가 매우 부적절하게 처리됐다.
- 여러 구획 지역, 수공예 산업 조사 등과 같은 예산에서는 많은 농민 집단을 설명하기에는 다른 예산과 비교해본다면 유리할 수는 있다. 해당 보고서에서는 식량을 제외한 개인 및 농장 필수품 지출을 가축 유지에 대한 지출 비용에서 모두 분리했으며, 조명 및 임대료 지출 등을 나란하게 제시했다는 점에서 따라서 명백하게 잘못됐다. 개인적 소비와 농장에 따른 생산적 소비를 분리했으며, 생산적 소비 항목에서는 타르, 밧줄, 말굽질, 건물 수리, 도구, 마구 등에 대한 지출, 노동자 및 작업 노동자, 목축업자, 토지 임대, 가축 및 가금류 유지 지출 항목도 포함됐다. 전년도에 따른 잔액 항목에서는 곡물(현물)과 현금으로부터 총 지출 수입을 다뤘으며, 현금과 현물에서도 총 수치를 제공했었다. 산업과 관련된 네 가지 열에서는 다른 자료에서 반환해서, 복사했다. 특히 e 집단에서는 분명히 산업 시설 항목 아래에 둬야한다는 점에 유의했다. 두 구성원은 각각 250루블 소득을 얻었으며, 한 명은 농장 노동자를 고용했다.
- 41루블에서 큰 적자를 기록했었던 e 범주를 예외로, 대출로 충당됐다. 범주에 속한 5가구 가운데, 3가구에서는 혼인 비용으로만 20루블을 썼다. 5가구의 총 적자는 206루블, 90코펙이었다. 따라서 집단 식량 외에도 개인 소비 지출은 남녀 모두 1인당 10루블 41코펙이라는 매우 높은 수치로 증가했다. f 범주에서 부유층을 제외한다면, 다른 어떤 집단에서도 지출은 6루블이 채 미치지도 못했었다. 따라서 적자는 빈농 적자와는 성격이 완전하게 달랐다. 최소 요구 사항을 충족하지 못해서 발생한 게 아니라, 해당 연도 소득에 비해 요구 사항이 과도하게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가축 유지에 대한 지출은 전적으로 현물 지출이었다. 66가구 가운데 가축 유지 항목에 지출했었던 총 6,316,21루블 가운데 1,535,2루블만이 현금으로 지출됐으며, 금액 가운데 1,102,5루블은 산업용으로 사용된 20마리 가축을 기르는 농부 기업가로부터 지출됐다. 특히 1897년에는 곡물 가격 하락 토론이 있었는데, 오류가 자주 있었다.
- 스톨리핀은 마을 공동체를 해체하면, 빈농들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부농들은 절대주의 절대주의를 강화시켜서, 약탈해갔기 때문이다. 독일 농업 문헌에서는 드레슬러가 쓴 여러 논문들이 있었는데, 많은 집단에서 농부들이 소유한 소의 무게에 대한 통계가 있었고, 통계는 소유 토지 면적에 따라 분류됐다. 통계로부터 당시에 러시아 젬스트보 통계보다 두드러졌던 소농이 소유한 소 품질에 비한다면, 낮은 수준이었다. 농민들의 많은 집단에서도 건물, 도구 및 가축 가치에 대한 예산 기준으로는 유럽 러시아에서 49개 군에 대한 통계를 적용하자면, 농민 가구에 따른 1/5은 나머지 농민 전체보다 많은 양의 생산 수단들을 소유했다. 가축 유지에서 지출은 대부분 현물 지출이었으며, 나머지 농장 지출은 화폐 지출이었다. 진취적인 농민들에게는 장기 임대(리스), 낮은 임대료, 개선 보상 등에 따르면 카리셰프의 '임대료론'도 얼머나 필요할까. 가축이 없는 12명 농민들 가운데 산업 시설, 사업체로부터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마농 18명 가운데, 한 명이 수입을 얻었고, 삼마농 9명 가운데, 3명이 수명을 얻었으며, 사마농 5명 가운데, 2명이 수입을 얻었고, 사마농 이상 있는 5명 가운데 4명이 수입을 얻었다.
- 러시아 수공예 산업 조사 위원회에서 이후에 거래 내역은 1879-1887년까지 수시로 발행된 16권 묶음이었다. 러시아 수공예 산업 조사 위원회는 1870년에 열린 제1차 전 러시아 공장 및 작업장 소유자 대회 요청에 따른 무역 및 제로 후원으로부터, 1874년에 설립됐다. 위원회에서는 재무부, 내무부, 국유 재산부, 러시아 지리학회, 자유경제학회, 모스크바 농업 학회,
러시아 기술 학회, 러시아 산업 및 무역 진흥 협의회 대표가 포함됐다. 수공예 위원회는 거래 내역에 제시한 귀중한 자료로는 주로 지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관리 작업 결과였다. 위원회에서 자세한 연구에서 거래 내역은 러시아 수공예 산업에서 자본주의적인 관계 발전들을 보여준 수 많은 사실과 수치를 도출했다. 과일 재배, 가축 사육 소득도 포함시켰다.
- 당시에 러시아에서는 곡물 가격 논문으로는 1897년 3월, 자유경제학회, A.I. 슈퍼로브(Chuprov)에게서 논의됐다. 당시 러시아 자유경제학회(FES)는 1765년 설립된, 특권적인 과학 단체였으며, 농산업에서도 유익한 정보 보급이 목적이었다. 주로 자유주의 귀족, 부르주아 계급 과학자들은 FES 회원이었다. 학회는 설문조사로부터 조사를 실시했으며, 국가 경제로부터 많은 분야와 전국 각지를 연구하고자 탐험대를 파견했다. 학회에서는 정기적으로 FES 보고서를 발행했었는데, 집단적인 책임으로는 각 마을 공동체(미르) 농민들은 국가와 지주들에게 제때에 전액을 지불하고, 각종 용역(서비스)(세금 납부, 토지 상환금 납부, 군 징집병 모집 등)을 제공할 집단적인 책임을 져야만 했었다. 같은 형태로 예속은 러시아에서 농노제가 폐지된 뒤에도 여전히 지속됐으며, 1906년에 폐지됐다.
- 1891년 기근은 유럽 러시아에서 동부 및 남동부 지방에서 특히 심각한 영향을 미쳤으며, 규모는 나라에 닥친 모든 비슷한 재난을 능가했다. 기근은 수 많은 농민들을 파멸시켰지만, 러시아 국내 시장 형성과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엥겔스도 <독일 사회주의>, (1891, 10/29), (1892, 3/15), (1892, 6/18), 니콜라이온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3. 농민층 분리화에 대한 결론.
현대 러시아 농민들이 처했었던 사회 경제적 상태는 상품 경제에서 주로 나타났다. 중부 농업 지대, 남동부 국경지, 산업 주베르니아에 비하면 낙후됐음에도, 농민들은 시장에 종속됐으며, 개인 소비 농업, 세금 납부에서도 시장에 의존했다. 농민 및 농업 및 촌락 공동체 사이에서 존재하는 사회 경제적 관리 쳬게는 모든 상품 경제와 모든 자본주의 질서로부터 내재된 모든 모순을 보여준다. 경쟁, 경제적 독립 투쟁, 토지 매매 및 임대 탈취, 소수 생산 집중 및 독점, 다수의 무산 계급화, 강제 편입 및 시도, 상인 자본과 농장 노동자 고용으로부터 경제적 소수에 의한 착취 둥이다. 농민들 사이에서는 모순적인 형태를 띠지 않는 경제적인 현상이 단 하나도 없다. 자본주의에서는 이해 관계에서부터 투쟁과 대립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유리하거나, 다른 이들에게는 불리한 상태를 뜻하지도 않는다. 토지 임대, 매수, 정반대 유형에서는 산업이고, 농업에 따른 기술적인 발전 역시나 마찬가지다. 비단 러시아의 자본주의 뿐만이 아니라, 인민주의 교리에서도 중대해진다. 같은 모순들은 공동체 마을로부터 경제 관리 체계가 특수한 인민 생산 등을 구성하는 경제 형태가 아니라, 일반적인 소부르주아적인 형태일 뿐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에도 널리 퍼진 이론임에도, 러시아 공동체 농민들은 자본주의 적대자가 아니라, 자본주의로부터 가장 깊은 경제적 토대였기 때문이다. 가장 깊은 토대였기 때문에, 인위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서, 자본주의 발전을 제한하는 제도임에도, 마을 공동체 내에서도 자본주의적인 요소들을 형성해나갈 수 있었다. 농업 전반에서는 과거 전통으로부터, 특히 가부장적인 전통 아래에서 무겁게 짓눌러졌다. 따라서 생산 관계 발전에 따른 모든 사회 관계로부터 변화 등으로 인한 자본주의 변형 효과가 점진적으로 생겨났다. 이러한 농민들 사이에서 모든 경제적 모순을 종합했을 때, 농민들에게 '농민화'라는 용어는 시의적절하다. 낡은 가부장적인 농민들의 완전한 해체, 농민 주민들의 창출을 뜻하기 때문이다. 발뤼예프 위원회(Valuyev) 작업에서 바실리코프(Vasilchikov)는 당시 러시아에서 농촌 무산층들이 형성되어, 농민 사회층에서도 차별화됐었지만, 체계적으로 연구하려는 시도는 전무했으며, 「젬스트보 호별 인구 조사」가 제공됐음에도, 적절한 자료들이 부족했었다. 농민 분열을 단지 재산 불평등, 인민주의 전반과 카리셰프의 용어로부터 단순하게나마 차별화로 간주하곤 했었다. 카리셰프의 임대에 관한 저작 중에는, 「러시아의 재산」(Russkoye Bogatstvo)(루스코예 보가츠보)에 실린 기사를 참조할 때도, 재산 불평등이 출현하는 전체 과정에서도, 재산 차별화에만 국한되지는 않았었다. 기존 농민들은 차별화됐을 뿐만이 아니라, 완전하게 해체되어, 존재할 수조차 없었으며, 새로운 유형 아래에서 농촌 주민, 상품 경제, 자본주의적인 생산이 지배하는 사회 기반 유형들로 축출됐다. 따라서 농촌 무산층, 농업에서 상품 생산자는
엄연한 계급이며, 농업 임금 노동자 계급이었다.
농업 자본주의 형성에서 순수한 이론적 분석이 소규모 생산자들로부터 차별화가 이뤄지는 요인임을 지적한다는 건 교훈적이고, 시사적이다. 『자본』 3권에서도, 자본주의적인 지대 발생을 염두했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노동 지대'를 언급했다. 직접 생산자는 실제적이고, 법적으로도 자신에게 속한 노동 도구(쟁기, 소 등)을 사용하여, 일주일 가운데 일부 시간 동안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소유한 토지를 경작할 수 있었고, 나머지 시간에는 봉건 영주들의 영지로부터 아무런 보상 없이 노동했다. 다음 형태의 지대에서는 직접 생산자가 자신들이 착취한 토지로부터 전체 생산물을 생산했고, 초과 생산물 전체를 토지 소유자들에게 현물로 제공하는 현물 지대였다. 생산자들은 여기서부터 더욱 '독립적'으로, 자신들의 노동으로부터 필수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생산물의 양 외에도, 특정한 초과분(잉여분)를 획득했다. 이와 같은 형태는 지대에서도 개별적이고, 직접 생산자들로부터 경제적인 지위에서도 더 큰 차이를 초래했다. 적어도, 그러한 차별화가 존재했으며 직접 생산자들은 경제적 지위에서도 더 큰 차이를 초래해갔다. 그러한 차별화에 따라 직접적인 생산자들은 차례로 다른 노동자들을 직접 착취할 수단들을 획득해갔다. 따라서 자연 경제관이 우세할 때는 종속 농민들의 독립이 처음으로 확대되어, 차별화에 대한 맹아가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맹아는 현물 지대 형태에서는 단순한 변화를 나타낸 다음 형태 지대로는, 화폐 지대에서만 발전할 수 있다. 직접 생산자는 토지 소유자에게 생산물이 아닌, 생산물 가격을 제공하게 된다. 같은 유형에 따른 지대 기초로는 동일하며, 직접 생산자는 토지의 전통적인 소유자이면서도, 같은 유형으로는 지대의 해체로 보다 접근하게 된다.
화폐 지대에서는 상업, 도시 산업, 상품 생산 및 화폐 순환에 따른 발전을 전제로 한다. 종속 농민, 토지 소유자 간 전통적인 일반 법 관계는 순전히 현금 기반 계약으로 변환된다. 관계 면에서도 기존 농민들에 대한 수탈로부터, 농민들은 자신들의 토지와 자유를 매수 당한다. 현물 지대에서 화폐 지대로 전환되면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결과이며, 심지어는 돈을 위해서 고용된 무산 일용직 노동 계급을 형성한다. 새로운 계급의 발생은 산발적이지만, 지대 지불로부터 예속된 부농들 사이에서는 농업 임금 노동자를 자신들의 이익에 맞추어 착취하는 관습으로까지 발전시킨다. 그들은 점차적으로 일정량의 부를 획득하고자, 축적하며, 먼 미래에도 자본가로 변모한다. 따라서 토지의 옛 자영업자들은 자본주의적인 소작인들을 위한 유치한 노예 동물원을 만들어내고, 자본주의적인 발전은 시골을 넘어, 이와 같은 자본주의적인 생산 발전으로 조건지어진다.
중농을 희생시켜, 극단층을 발생하도록 만드는 농민 분화에서는 두 가지 새로운 유형으로부터, 농촌 주민들을 찍어낸다. 공통적으로는 경제적 상품화, 화폐적 성격이다. 경제적 상품화에서는 농촌 부르주아지들인, 부농들이다. 많은 형태로 상업적인 농업을 수행하는 자영농도 여기에 포함된다. 다음으로는 상업 및 산업 시설에서 실소유주, 상업 기업에 따른 기업 소유주 등이 있다. 상업적인 농업과 산업체 기업 간의 결합은 부농들에게만 특수한 농업과 산업 기업(체)의 결합이다. 부농들 사이에서는 자본주의적인 농민층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곡물 판매를 위한 농촌 지역에서 토지 임대는 농장에서도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며, 토지 분배보다도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부분 농장 규모로는 가족에서 소용하는 것보다도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농장 노동자 집단, 더 많은 일용직 노동자 집단은 부농 존재에게도 필요한 조건이다. 농민들이 순소득으로 얻은 여유 자금들은 농촌 지역에서도 과도하게 개발된 상업적 활동, 고리대금업을 투자하거나, 유리한 조건 아래에서 토지 구매, 농장 개선 등에 투자된 소규모 농업 종사자이다. 수적으로도 농민 부르주아지는 농민들 가운데에서도 소수이며, 총 인구 수에서 약 3/10이며, 가구 수로는 1/5를 넘지 않는다. 비율로는 지역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농민 농업 총량, 농민 소유 생산 수단 총량, 농민들이 생산한 총 생산물량에 따른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자면, 농민 부유층은 여전히 우세하며, 현대 농촌에서도 여전히 주인이라는 점이다.
농촌 무산층들은, 토지를 소유한 임금 노동 계급들이다. 토지를 전혀 소유하지 않은 빈농을 포함하지만, 러시아 농촌 무산층들의 전형적인 대표자는 토지를 소유한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미숙련 노동자, 건설 노동자, 기타 토지 소유 노동자들이다. 한 구획의 토지에서도 보잘 것 없는 농사를 짓거나, 황폐해진 토지 임대로 입증된 농장과 노동력 판매 없이는 도무지 생존할 수조차 없는 절박한 빈농 산업 상태를 보노라면, 극도로 낮은 생활 수준은 뚜렷해진다. 전체 농가 가운데 절반 이상 인구의 약 4/10은 농촌 무산층이고, 무마 농민, 상당 수는 일마 농민으로 분류한다. 농민층들의 상당 부분은 이미 농촌 무산층에 속하는 근거는 이미 제시됐다. 자본주의는 자유롭고, 토지가 없는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고정 관념적인 이해 역시나 자주 포함된다. 주요한 추세로도, 자본주의 농업에서는 매우 느리고, 매우 많은 형태로 농촌 사회에서도 충분히 침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촌 노동자들에게는 토지 할당이 가끔 농촌 고용주 자신들의 이익에도 부합하기 때문에, 토지를 소유한 농촌 노동자들은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국가마다 다른 형태를 띠지만, 영국 별장농은 프랑스, 라인 지방 소작농과 같지도 않으며, 오히려 라인 지방은 독일 프로이센, 크네히트와도 같지 않다. 각각 특정한 농업 체계로부터, 특정한 농업 관계사에 따른 흔적을 지니지만, 경제학자들은 모두 한 유형으로 묶어내어, 농업 무산층을 분류하기를 막지 못한다. 토지에 대한 권리에서도 법적 근거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소작농에게 토지는 온전한 재산인지, 지주, 영주권자 (Rittergutsbesitzer)로부터 사용이 허가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로는 대러시아 농민 공동체 구성원으로, 소유하는지에 대한 여부가 중요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빈농을 농촌 무산층에 할당한는 건 전혀 새롭지 않다. 인민주의 경제학자들만이 농민층을 반자본주의적이고, 농민 대중들은 이미 자본주의 생산에서도 일반적인 체계 속에서 농업 및 산업 임금 노동자로 그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을 외면할 뿐이다. 러시아 내 마을 공동체(미르)와 농민을 유지하는 농업 체계를 칭찬만 한다거나, 자본주의적인 농업 조직을 갖춘 '오스트제' 체계와도 비교하기를 긍정했을 뿐이다. 따라서 오스트제 지역에서는 농업 인구가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층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오스트제 구베르니아에서도 농민들은 별도로 25-50데시 큰 토지, 3-10데시 토지의 별장 거주자, 토지를 무소유한 농민층으로 나뉜다.
S. 코롤렌코도 지적했었지만, 별장 거구자는 중부 구베르니아 시에서 러시아 농민과 매우 비슷하다. 일자리를 구하고, 토지를 경작해서, 끊임없이 시간을 나눌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농장 노동자의 경제적 지위이다. 지주들은 임금 때문에 토지를 할당하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1. 오스트제 농장 노동자들에게도 소유물은 토지 2데시(lottstelle를 dessiante로 환산했을 때, 1 Lottstelle = 1/3dess이다). 남편은 1년에만 275일을 일하고, 아내는 50일을 일해서,
하루 임금은 25코펙이다.
2. 2와 2/3데스 토지에서 농장 노동자는 가축(말) 한 마리, 소 세마리, 양 세 마리, 돼지 두 마리를 기른다.
3. 쿠를란트 주 바우스카 지역의 6데스 토지의 농장 노동자는 말 한 마리, 소 세마리, 양 세마리, 돼지 여러 마리를 기른다. 일주일에 3일 일해서,
아내는 1년에 35일 일한다.
4. 쿠를란트 주에서는 하센포트 지역에서 8데스 토지의 농장 노동자들은 무료로 밀가루를 빻으며, 무료 의원 지원과 진료를 받으며, 자녀들은 학교에도 다닌다.
따라서 인민주의자들은 농장 노동자들의 소유지, 농업 규모 면으로는 농민들을 자본주의 생산에 해당하는 유럽 농업 체계와 구분되는 조건들에서 모든 예시를 결합시켰다. 10명의 농장 노동자는 평균 31.5데시 토지를 소유했으며, 노동자 한 명 당 평균값이다. 농장 노동자들은 1년 가운데 적은 기간 동안 지주를 위해서 농민들은 일하며, 남편은 1년의 절반, 아내는 35-50일과 2-3마리의 소나 한 마리의 말을 기르는 농민들도 포함한다. 그렇다면 마을 공동체(미르)와 오스트제 농장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오스트제 지방에서는 사물을 고유한 이름으로 부르지만, 러시아에서는 농장 노동자들이 부농과 결합하여, '평균적인' 사람들이 파업을 벌이고, '공동체 정신', '노동 원칙', '인민 생산', '농민과 산업의 결합' 따위의 감상적인 말만 늘어놓는다.
개혁 이후로는 중농들이 결합된다. 중농은 상품 생산에서도 매우 드물었다. 중농들은 '독립적인' 농업 노동만으로도 충분히 생계를 유지했으며, 매우 좋으며, 유리한 시기와 조건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대부분 중농들은 대출에 의존하며, 노동 용역(서비스)로 상환하고, 부업으로는 보조 일자리를 찾지 않고서는, 생계를 도저히 유지할 수는 없다. 일자리에서는 노동력 판매 등이 부분적으로 포함된다. 흉년 때마다 중농 대중들은 무농층으로 전락하게 된다. 사회적인 관계에 따라서도 중농층들은 상위층으로 이동할 수도 있지만, 기껏해야 운 좋은 소수만이 상위층으로 진입하며, 하위층들은 사회 발전에서도, 최하위층으로 밀려나게 된다. 농촌 사회에서도 부유층들은 농민의 최하층만이 아니라, 중농층까지 밀어낼 수 있으며, 자본주의적인 경제 특징으로 부상한다. 따라서 중산층들은 몰락하고, 극단층들은 강화된다. 농민화 과정은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
농민 분화는 자본주의를 위한 국내 시장들을 창출한다. 하위층들은 시장을 형성하면서도, 개인 소비 시장에서 소비재로부터 이뤄진다. 농촌 무산층들은 중농에 비해 소비량이 적으며, 품질이 떨어지는 빵 대신 감자를 더 많이 소비하며, 또 구매한다. 농민 부유층들의 형성과 발전은 이중적으로 중첩되어, 시장을 창출한다. 주로 생산적인 소비 시장에서 생산 수단으로부터 시장을 창출하며, 부농들은 곤궁한 처지에 있는 지주와 파산 직전의 농민들로부터 수집한 생산 수단들을 자본으로부터 전환시키고자 한다. 부농들의 수요 증가로부터 개인 소비에 다른 시장이 형성된다. 농민들의 분화 진행 여부와 속도에서는 비교할 수 있는 통계는 부족하다. 농민 분화 통계를 체계적으로 발생하는 형태로 나타내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촌 지역에서 경제 통계에서는 분화가 중단 없이 빠르게 증가해갔다. 농민들은 토지를 매각하고, 임대해서 가축이 아예 없는 농민 수도 늘어났으며, 농민은 도시로 이주했다. 반면에 농업에서 발전 추세마저 같은 방향으로만, 농민들은 토지를 매수한다거나, 농장을 개량하고, 철제 쟁기를 도입해서, 풀 재배와 낙농업 등을 개발한다. 빈농들도 여기에 참가하게 된다.
더군다나 이주 운동은 특히나 농업 농민 분화에 추진력을 제공한다. 농민 이주는 농업 구베르니아 시이지만, 공업 구베르니아 시 이주에서는 미미한 수준이며, 노동 용역이 활발하며, 농민 분화를 저해하는 인구 밀도가 높은 중부 구베르니아 시에서 주로 이뤄진다. 이주 지역을 떠나는 중농들과 거주 지역에서 남는 극빈층들이 있다. 따라서 이주는 이주 지역에 따른 농민 차별화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차별화된 요소를 새로운 장소로 가져온다. 시베리아 정착민들의 첫 시기에서, 농업 임금 노동에서도, 이주와 농민 차별화 간 연관으로는, I. 호로비치(I. Hourwich), 『시베리아 농업 이주』(1888)에서도 잘 나타난다. 인민주의 출판사에서 끈질기게 은폐하려고 했었던 바로 그 책이다. 농촌 지역에서는 상인 자본, 고리대금업 자본은 큰 역할을 담당한다. 그렇다면 농촌 사회에서 상인 자본, 고리대금업 자본들은 농민층 분화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많은 농민 집단 간 관계, 농민 채권자와 농민 채무자 간 관계 사이에서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고리대금업은 계급(계층)을 분화시키는 요인이자, 원동력인가. 아니면 계급 분화를 지연시키는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을 분석할 때, 상인 자본과 고리대금업자 자본에서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마르크스는 상인 자본, 고리대금업 자본, 산업 자본(투자 자본)과 같은 단일한 경제 현상을 나타내며, 일반적인 공식이 포괄된다. 이익을 내서 판매하고자, 상품을 구매하기 때문이다. 상인 자본과 고리대금업 자본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산업 자본 형성 과정에서도, 필요한 전제였다. 그러나 상인 자본, 고리대금업 자본 자체만으로는 자본주의적인 생산 발전에 따른 산업 자본 발상으로는 충분한 전제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언제나 낡은 생산 양식을 해체해서, 자본주의적인 생산 양식으로 대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인 생산 양식의 형성은 언제나 전적으로, 역사적인 발전 단계에 따른 그 상태에 달렸다. 상인 자본, 고리대금업 자본이 무역 자본, 금융자본으로 옮겨가는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도, 어느 정도까지 낡은 생산 양식들을 해체시킬 수 있는지는 견고도와 내부 구조에 따라 달려 있다. 해체되는 과정에서도, 새로운 생산 양식들의 부상은 낡고, 오래된 생산 양식을 대체하는지가 상업적인 성격이 아니라, 오히려 낡은 생산 양식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격에 달려 있다. 따라서 상인 자본에 따른 독자적인 발전도는 자본주의 생산 발전 정도에 따라 반비례한다. 상인 자본과 고리대금업 자본 발전이 클수록, 자본주의적인 생산 발전에 따른 산업 자본의 발전은 작아질 수밖에는 없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상인 자본과 대부(고리대금업) 자본은 산업 자본과도 연계될 때는 과연 어떤 식일까. 상업과 대부업(고리대금업)은 낡은 생산 양식을 붕괴시키면서도,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나, 다른 체제로 대체되는가. 러시아 국민 경제에서도 답해야만 하는 문제이다. 농민 경작에서는 '쿨락', '진취적인 농민'이 동일한 경제적 현상으로부터 두 가지 형태가 아니라, 완전히 연결되지도 않았고, 반대되는 유형의 현상일 뿐이라고, 일반적인 인민주의자들의 견해는 전혀 근거가 없었다. 아무도 정확한 경제 통계 분석으로부터 증명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계는 그 반대이다. 농민들이 생산 확대를 목적으로 노동자를 고용하든, 토지나 식료품을 거래하든, 대마, 건초, 가축 등을 거래하든, 돈을 거래하든, 단일한 경제 유형만을 나타낼 뿐이며, 하나의 동일한 경제 관계에 이르게 된다. 더 나아가 마을 공동체(미르)에서는 자본 역할들이 속박과 대부(고리대금)에만 국한되지는 않으며, 자본 생산으로도 투자되며, 부농들은 농장 개량, 토지 매수 및 임대, 개량 도구 취득, 노동자 고용 등에도 돈을 투자하기 때문에, 무역소와 사업에만 투자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시골에서는 자본들이 속박과 대부(고리대금) 외에는 무엇도 생산할 수 없다면, 생산 통계들로부터 농민층 분화, 농촌 부유층과 농촌 무산층을 형성하는 데 확립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농민 전체로는 가난에 시달리는 경작자들의 상당히 고른 유형들을 대표하며, 고리대금업자들만이 두드러져, 소유한 화폐 규모에 따라서만 구분될 뿐이며, 농업 생산 규모와 조직에 있어서는 구분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농촌 사회에서는 상인 자본과 대부업(고리대금업)에 따른 독립적인 발전들이 농업 생산 발전에서도 지연시킨다는 점이 중요하다. 농민층 분화에서도 상업은 더욱 발전하여, 농촌과 도시가 더 가까워지고, 원시적이던 농촌 시장은 사라지며, 마을 상인들의 독점이 약화될수록, 유럽 기준에 부합하는 신용 형태가 더욱 발전하고, 마을 대부업(고리대금업)들을 대체할수록 농민층들의 분화도 더욱 심화된다. 소상업과 대부업(고리대금업)으로부터 쫓겨난 부농 자본은 이미 생산으로 흘러들기 시작한 자본보다도 더욱 풍부하게 생산으로 다시 투입된다.
농촌 경제에서는 농민 분화를 저해하는 또 다른 현상으로는 부역 경제, 노동 용역의 잔존이다. 노동 용역은 현물 노동에 대한 지불에 기반을 두며, 상품 경제에서도 저조한 발전에 기반한다. 노동 용역은 중농을 전제한다. 중농은 그다지 부유하지도 또 무산층도 아니기 때문에, 노동 용역을 수행하려면 자신들의 도구가 있어야만 하며, 어느 정도는 '건전한' 농민들이기 때문이다. 농민 부유층들은 현대 농촌 사회에서도 주인일 때, 차별화를 저해하는 요인들, 예속(속박), 고리대금, 노동 용역 등을 무시했다. 현대 농촌 사회에서 진정한 주인들은 농민 부유층들이 아니라, 이들의 대표자가 아니라, 마을 대부업자(고리대금업자), 이웃 지주인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무시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농민들 사이에서는 일어나는 내부 경제 관계 체계를 연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인민주의자들은 같은 절차를 사용했었지만, 도중에 멈추고는 자신들의 추론을 논리적 결론으로 이끌어내지는 않았다. V.V. 보론초프도 『자본주의 운명』에서 세금 부담 등을 언급했었지만, 마을 공동체(미르)에 대해서는 자연스러운 조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만 언급했었다. 그러나 핵심은 농촌 사회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자연적인 조건이란 무엇인가. 마을 공동체 내에 경제적 관계 체계를 연구하여, 시골에서 드러난 '자연적인 조건'을 가리는 이전 시대의 잔재를 청산하고, 제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물론 V.V 보론초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을 관계 체계는 농민의 절대적인 분화로 드러났다. 속박, 대부(고리대금), 노동 용역 등이 완전하게 없어질수록, 농민층 분화는 더욱 심화된다. 젬스트보 통계에서도 볼 수 있는 분화는 기정사실이며, 농민들은 완전하게 반대 집단으로 분열됐다.
- 'Otrabotki', 노동 용역은 지주를 위한 종속 농민 노동을 뜻한다.
- 화폐 지대, 자본주의적인 지대 사이에서는 엄격한 구분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적인 지대에서는 농업에서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가 존재한다고 전제하며, 화폐 지대에서는 종속 농민들이 존재한다고 전제한다. 자본주의적인 지대에서는 고용주 이윤을 공제한 뒤에 남은 초과 가치 일부이지만, 화폐 지대에서는 농민이 지주에게 지불하는 전체 초과 생산물 가격이다. 화폐 지대에서도 농민들은 지주들에게 지불하는 지대이다. 농민들은 현재에도 지불해야만 하는 세금들은 부분적으로는 화폐 지대를 나타낸다. 농민 토지 임대는 화폐 지대를 지불하는 식이며, 농민들은 토지에 대해서 지불해야만 하는 높은 지대란 빈약한 임금에 불과할 뿐이다.
- 임금 노동에서는 고용으로부터 소시민 계급의 본질적인 특징이 아니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자. 사회 경제 체계가 모순을 포함한 시장에서는 모든 독립적인 생산을 포괄하며, 특히 생산자 대중들은 임금 노동자로 전환되는 경우도 있다.
- 빈농들은 토지를 소유한 임금 노동 계급들로 배정하는 게 옳다는 점을 증명하려면, 농민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는 어떤 종류로 노동력을 판매하는지만이 아니라, 고용주들은 어떤 식으로, 어떠한 종류로 노동력을 구매하는지를 보여줘야만 한다.
- 코나드(Conard) 교수는 독일에서 참 농민 기준이 한 쌍의 짐마차를 끄는 가축을 소유한다고 생각했다.(Gespann bauernguter) 당시로는, 러시아에서는 기준이 더 높았다. 여기서 농민이란 고용 노동, 부수 산업에 종사하는 개인 또는 가구 비율이다. 스테부트 교수는 1882년, 농노제가 몰락한 이래로, 소규모 경제 단위를 가진 농민들은 곡물 재배에만 전념했으며, 주로 러시아 중부 흑토 지대에서 대부분은 장인,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였으며, 농업이란 단지 보조적인 직입이었을 뿐이었다. 『러시아 농업, 결함 및 개선을 위한 조치』(1883)에서
장인들은 건설 등 산업 시설에서 임금 노동자들을 포함했다. 용어 사용은 부정확하더라도, 경제 문학에서는 널리 퍼진 말이었다.
- 『토지 소유권과 농업』(1896)에서는 농업이 많은 유럽적인 형태로 형성된 임금 노동들을 살펴볼 수 있다. J.코나드(J.Conard)는 농민 소유물이 토지 없는 농민들이나, 시장 정원사의 토지, 소유주가 추가로 외부 직업과 고용을 찾는 부분과도 구분된다. 프랑스에서는 1881년 인구 조사에 따라 1,800만 명, 인구 절반보다 약간 적은 사람들이 농업에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다. 약 900만 명 토지 소유자, 500만 명 소작농과 반작물 농민들, 400만 명의 일용직 노동자, 소규모 토지 소유자, 임금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소작인 등이었다. 프랑스 농업 노동자에서 최소 75%는 자신들의 토지를 소유했었다. 독일 같은 경우로는 농촌 노동자에게는 토지를 소유한, 소작농, 별장 주인, 정원사(토지 농민)들로, 계약직과 일용직 노동자들도 토지를 소유했었고, 1년 중 특정 기간 동안에도 고용되어 노동했다. '3일 노동자'와 같은 계약직과 일용직 노동자들은 대규모 토지 재산이 지배적이었던 독일 지역에서 농업 노동자들의 대부분을 구성했다. 여기에는 임대 토지에서 농사를 짓던 농업 노동자로 포함됐다.
- 특히 농민층 분화로부터 국내 시장이 형성됐으며, 면직물 제조업은 개혁 이후로도 급속도로 성장했으며, 농민들의 대량 몰락까지 존재하는 국내 시장에서 큰 성장을 설명한다. 섬유 산업론에서 설명했었던 인민주의자들조차도, 모순을 전혀 설명하지는 못했었다.
- I 호로비츠, 『러시아 마을 경제』(1892)도 있다. 호로비츠는 젬스트보 통계 보고서에서 경제적 힘에 따른 농민 집단들의 결합된 표가 없었다.
- 이주 제한은 농민층 분화를 지연시켰다.
- 시베리아 이주로는 프리막(Preemak)의 그림 자료를 참고하자.
- V.V 보론초프는 『자본주의 운명』에서 상인 자본과 산업 자본 간 관계 사실을 조사하지 않았다. 정작 인민주의자들도 마르크스 이론의 충실한 추종자라고 말했었지만, 상인 자본을 모호하게만 '자본화', '소득 자본화'로만 대체해서 표기했었다. 그리고 모호한 덮개로만, 회피해갔다. 자본주의적인 생산의 전신은 러시아에서 상인 자본이 아니라, 그저 '인민 생산'일 따름이었다. V.V 보론초프는 『자본주의 운명』에서 저자는 정작 '자본주의 운명'은 다루지도 않았으며, 자본주의 자체도 없었고, 그저 세금을 부과하는 방법만을 다루었다. 또한 세금 부과 방식과 강제 노동 경제에서 잔재 사이에 따른 불가분한 관계를 전혀 파악하지도 못했으며, 이상화만 해댔다.
- 발루예프 위원회(Valuyev Commission)는 차르 장관이던 당시 P.A. 발루예프 위원장으로 활동했었던 '러시아 농업 상황 조사 위원회' 소속이었다. 1872년-1873년 사이에 위원회는 개혁 이후로 러시아 농업 상황을 다루는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었다. 주지사 보고서, 지주 진술 및 증언, 귀족 원수, 젬스트보 행정부, 볼로스트 지역 위원회, 곡물 상인, 마을 사제, 쿨라크, 통계 및 농업 협회, 농업 관련 기타 기관 증언들을 포함한다. 해당 자료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간된 「러시아 농업 상태 조사 위원회 보고서」(1873)에 게재됐다.
- 증여 토지 농민들은 1861년, 개혁 때 지주와 '합의'했으며, 상환할 필요가 없던 증여로부터 토지 분배를 받은 건 정작 지주 농민들이었다. 증여 토지 소유자들은 소위 '최상위', '법정' 분배로부터 해당 지역에 대해 법으로 정해진 분배에서 1/4에 해당하는 비참한 토지만 받았었다. 개혁 이전에는 농민 분배를 이뤘었던 나머지 모든 토지들은 지주들로부터 압류됐으며, 농노제가 폐지된 뒤에도, 증여 토지 소유자를 강제로 토지에서 몰아냈으며, 경제적인 속박 상태로 묶어뒀다.
- '3일 노동자'는 토지를 소유한 농업 임금 노동자이다. 빈곤선에서 소유한 토지로부터 농사를 짓는 '3일 노동자'는 곡물이나, 현금 20-30루블을 받는 대가로부터 노예 신분에 동의한다거나, 여름 내내 부지주 쿨라크 농장에서 일주일에 3일 노동해서, 빚을 갚는 일용직 노동자들이었다. 토지 소유 산업 노동자들은 제정 러시아 북서부 지역에서 특히 폭 넓게 나타났다.
- 오스트제 지역(Ostsee region)은 제정 러시아에서 발트해 지역이었으며, 에스틀란트, 쿠틀란트, 리플란디아 주를 포함한다. 해당 지역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연방 공화국 영토였다.
- 레닌은 인민주의 이론에서 '인민 생산'에 대해 『'인민의 벗'이란 무엇이며,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어떻게 싸우는가』에서도 신랄하게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