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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잉여 가치가 자본으로 전환

 

24-1. 확대 재생산과 소유 법칙에서 자본주의적 취득 법칙으로의 전환

 

잉여 가치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연구했다면, 이제는 자본이 잉여 가치로부터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고찰한다. 잉여 가치를 자본으로 사용하는 것, 곧 잉여 가치를 자본으로 재전환하는 것이 바로 자본 축적이다. 이 과정을 먼저 개별 자본가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예를 들어, 어떤 방적업자가 10,000원의 자본을 투하하는데, 이 중 4/5(8,000)는 면화나 기계 등 불변 자본으로, 나머지 1/5(2,000)는 임금 등 가변 자본으로 사용했다고 가정한다. 이 투하로, 매년 12,000원의 가치를 지닌 240,000파운드의 실을 생산한다. 잉여 가치율이 100%이므로, 잉여 가치는 총생산물의 1/6을 차지하는 40,000파운드의 실, 곧 잉여 생산물에 포함되며, 이는 판매 시 2,000원의 가치를 실현한다. 2,000원은 화폐액 그 자체이므로, 겉으로 보아서는 그것이 잉여 가치인지 알 수 없다. 그 가치가 잉여 가치라는 사실은 그 가치가 소유자의 수중에 들어간 경로를 알기 때문일 뿐, 그 사실 자체가 가치나 화폐의 성질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새로 취득한 2,000원의 금액을 자본으로 전환하려면, 방적업자는 다른 조건이 불변일 경우, 이 중 4/5(1,600)를 면화 등의 구입에, 그리고 1/5(400)를 새로운 방적공 고용에 투하해야 한다. 이 추가 노동자는 방적업자로부터 지급받은 가치에 상응하는 생활 수단을 시장에서 확보하게 된다. 이렇게 전환된 2,000원의 새로운 자본은 방적 공장에서 작동하여 다시 400원의 잉여 가치를 창출한다.

 

자본 가치는 최초에 화폐 형태로 투하된다. 그러나 잉여 가치는 처음부터 총생산물의 일정 부분의 가치로 존재한다. 이 총생산물이 판매되어 화폐로 전환되면, 자본 가치는 다시 최초의 형태를 되찾으며 (잉여 가치 역시 상품 형태에서 화폐 형태로 전환됨), 이 시점부터 자본 가치와 잉여 가치는 모두 화폐액이 된다. 이들의 자본으로의 재전환은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자본가는 이 모든 화폐액을 상품(생산 수단과 노동력) 구매에 지출하며, 이는 자본가로 하여금 자신의 생산물 생산을 확대된 규모로 재개할 수 있도록 한다. 다만, 이러한 상품을 구매하려면 그것이 이미 시장에 존재해야 한다. 자신의 실이 유통하는 것은 (다른 자본가들이 각자의 상품을 시장에 내놓듯) 그 역시 자신의 연간 생산물을 시장에 내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상품들은 시장에 진입하기 전에 이미 연간 총생산물의 일부였으며, 이는 개별 자본들의 총액, 곧 사회적 총자본이 1년 동안 생산한 각종 상품의 총량이다.

 

시장의 모든 거래는 이 연간 총생산물의 개별 구성 부분들의 상호 교환을 실현시켜 그것들을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옮길 뿐, 연간 총생산물을 증가시키거나 생산된 상품의 성질을 변경시키지는 못한다. 따라서 연간 총생산물의 사용 방식은 그 유통이 아니라, 연간 총생산물 자체의 구성에 의존한다. 연간 생산물은 먼저 1년 동안 소비된 자본의 물적 구성 부분을 대체할 수 있는 모든 물건(사용 가치)을 제공해야 한다. 이것을 공제하고 남은 부분이 잉여 가치가 포함된 순생산물, 곧 잉여 생산물이다. 그렇다면 이 잉여 생산물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이것이 전적으로 자본가 계급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물건, 곧 그들의 소비재원에 속하는 물건들로만 이루어진다면, 잉여 가치는 남김없이 탕진된다. 이 경우, 오직 단순 재생산만이 진행된다.

 

축적을 위해서는 잉여 생산물의 일부를 자본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적 없이 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 과정에 사용될 수 있는 물건들, 곧 생산 수단과 노동자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물건들, 곧 생활 수단뿐이다. 따라서 연간 잉여 노동의 일부는 투하된 자본의 대체를 넘어서는 추가적 생산 수단과 추가적 생활 수단의 생산에 충당되어야 한다. 요컨대, 잉여 가치가 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잉여 생산물(이것의 가치가 잉여 가치임)이 새로운 자본의 물적 요소로 이미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구성 요소들이 실제로 자본으로 기능하려면 자본가 계급은 추가적 노동을 필요로 한다. 기존 노동자들의 착취를 외연적, 내포적으로 더는 증대시킬 수 없다면, 추가 노동력을 고용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기구는 이미 노동자 계급을 임금에 의존하는 계급으로 재생산하며, 이들의 평상시 임금은 계급 자체의 유지뿐 아니라 그 증가(차세대)까지 보장한다.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각종 연령의 추가 노동력이 매년 공급되므로, 자본은 단순히 이것을 연간 생산물에 이미 포함된 추가적 생산 수단과 결합시키기만 하면 된다. 이로부터, 잉여 가치의 자본으로 전환이 완성된다. 구체적으로 고찰하면, 자본의 축적은 누진적으로 증가하는 규모로 자본이 재생산된다. 단순 재생산의 순환은 그 형태를 바꾸어 시스몽디의 표현대로, 하나의 나사선으로 전환된다.

 

이제 우리의 예로 다시 돌아간다. 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는 식의 계보와 같다. 최초 자본 10,000원은 2,000원의 잉여 가치를 산출하고, 이 잉여 가치는 자본화된다. 2,000원의 새로운 자본은 다시 400원의 잉여 가치를 가져오며, 이 잉여 가치는 또다시 자본화되어 제2의 추가 자본으로 전환된다. 이것은 다시 80원의 새로운 잉여 가치를 낳는다는 식으로, 이 과정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는 잉여 가치 중 자본가 자신이 소비하는 부분은 무시한다. 또한 추가 자본이 최초 자본과 결합하는지, 또는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기능하는지, 축적된 추가 자본을 자본가가 직접 이용하는지 아니면 타인의 수중으로 넘어가는지 등의 문제 역시 지금은 고찰 대상이 아니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새로 형성된 자본과 함께 최초 자본도 자신의 재생산과 잉여 가치의 생산을 지속한다는 사실이며, 이는 축적된 모든 자본과 그것으로부터 형성된 추가 자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최초 자본 10,000원은 투하로부터 형성되었다. 그 소유자는 이 자본을 어떻게 회득했는가. 정치경제학의 대변자들은 한결같이 자기 자신의 노동과 자기 선조들의 노동으로부터다.”라고 대답한다. 실제로 그들의 이러한 가정은 상품 생산의 법칙과 일치하는 유일한 가정으로 보인다. 추가 자본 2,000원에 관해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그 발생 과정은 아주 정확하게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자본화된 잉여 가치, 곧 잉여 가치가 자본으로 전환된 것이다. 여기에는 처음부터 남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에서 나오지 않는 가치라고는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추가 노동력이 결합되는 생산 수단도, 추가 노동력이 유지되기 위한 생활 수단도, 잉여 생산물, 곧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에게서 매년 빼앗은 공물의 구성 부분에 불과하다. 자본가 계급이 이 공물의 일부로 추가 노동력을 사들일 경우, 그것이 비록 완전한 가격으로부터고, 따라서 등가물과 등가물끼리의 교환일지라도, 이는 결국 (피정복장에게서 약탈한 화폐로 피정복자 자신의 상품을 구매하는) 정복자의 낡은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추가 자본이 자신을 낳은 동일한 노동자를 고용한다면, 이 노동자는 최초 자본을 계속 가치 증식시켜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이 바친 이전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의 생산물(추가 자본)에 대해서도 노동을 추가해야만 한다. 이것을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의 거래로 보더라도, 이전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으로 추가 노동자들이 고용된다 해도, 문제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 자본가는 추가 자본을 기계로 전환시켜, 이 기계가 추가 자본의 생산자를 거리로 내쫓고, 그 대신 몇 명의 아동을 고용할 수도 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노동자 계급은 금년의 자기 잉여 노동으로 다음 해에 추가 노동을 고용한 자본을 생산한다. 이것이 이른바 자본으로 자본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1의 추가 자본 2,000원의 축적은 (자본가의 시초 노동으로부터 자기 것이 된, 그리고 그로부터 투하된) 10,000원의 가치액을 전제한다. 반면, 2의 추가 자본 400원은 오직 이전의 축적 2,000원만을 전제할 뿐이며, 이것이 낳은 잉여 가치가 자본으로 전환된 것이 바로 제2의 추가 자본 400원이다. 과거 지불받지 않은 노동의 소유가 이제는 끊임없이 증대되는 규모의 살아 있는 지불받지 않는 노동의 취득을 위한 유일한 조건이 된다. 자본가가 이미 축적한 것이 많을수록, 그만큼 그는 더 많이 축적할 수 있다. 1의 추가 자본을 이루는 잉여 가치가, 최초 자본의 일부가 노동력을 구매한 결과이며, 이 구매가 상품 교환의 법칙에 순응하는 한, 그리고 법률적 관점에서 이 구매가 노동자 측에서는 자기 노동력에 대한, 화폐 또는 상품 소유자 측에서는 자기가 가진 가치에 대한 자유로운 처분권을 전제할 따름인 한, 또 제2, 3 등의 추가 자본이 제1의 추가 자본의 단순한 결과이며, 최초 관계의 결과인 한, 더욱이 각 개별 거래가 상품 교환의 법칙에 따라 진행되어, 자본가는 항상 노동력을 구매하고, 노동자는 항상 그것을 판매하며, 이 매매가 노동력의 진정한 가치대로 이루어지는 한, 상품 생산과 상품 유통에 기초를 둔 취득의 법칙, 곧 사적 소유의 법칙은 자기 자체의 내부적인 불가피한 변증법으로부터 그 정반대로 전환된다는 점은 명백하다.

 

우리가 시작했던 최초의 작업인 등가물과 등가물 사이의 교환은 완전히 달라져 오직 외관상의 교환으로 변질되었다. 첫째, 교환으로부터 노동력을 얻는 자본 그 자체가 등가물 없이 취득한 타인 노동의 생산물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 자본을 노동자가 대체해야 할 뿐 아니라 잉여물을 첨가하여 대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교환 관계는 유통 과정에 속하는 단순한 겉모습일 따름이며, 거래 자체의 내용과는 관계가 없고 도리어 그것을 모호하게 할 뿐인 단순한 형태에 불과하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노동력의 매매는 단순한 형태이며, 그 내용은 자본가가 이미 대상화된 타인 노동의 일부를 아무런 등가물도 지불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취득하고, 그것을 더 많은 양의 살아 있는 타인 노동과 끊임없이 교환한다는 점이다.

 

최초에는 소유권이 한 인간 자신의 노동에 토대를 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이와 같이 가정해야 했다. 시장에서는 오로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상품 소유자들이 서로 마주하며, 남의 상품을 취득하는 수단은 오직 자기 자신의 상품을 양도하는 것뿐이고, 이 자기 자신의 상품을 얻는 유일한 길은 노동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유는 이제 자본가 측에서는 타인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 또는 그 생산물을 취득하는 권리로 변모하며, 노동자 측에서는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취득하지 못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로부터 노동과 소유의 분리는 노동과 소유의 동일성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는 법칙의 필연적 결과가 된다.

 

[엥겔스: 이하는 마르크스가 불어판에 넣은 내용을 바탕으로 엥겔스가 제4독어판에 추가한 내용이다. CW 35(Progress Publishers, 1996)에는 이 추가분 전체가 CW 편집자의 실수로 빠져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취득 방식은 아무리 상품 생산의 최초 법칙들과 모순되는 듯 보이더라도, 이 취득 방식은 결코 이 법칙들을 위반한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들을 적용한 데서 나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축적을 중점으로 하는 운동의 순차적 국면들을 간단히 돌이켜보면서 이 점을 다시 한번 명백하게 한다. 처음에 우리가 보았듯이, 일정한 가치액이 자본으로 최초로 전환한 것은 교환 법칙에 따라 완전히 수행되었다. 한쪽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다른 쪽은 그것을 구매한다. 전자는 자기 상품의 가치를 받으며 그 상품의 사용 가치, 곧 노동을 후자에게 양도한다. 그러면 후자는 이미 자신이 소유하던 생산 수단을 (역시 그의 소유 하에 있는) 이 노동으로부터 새로운 생산물로 전환시키는데, 이 새로운 생산물도 역시 법적으로 그의 것이다.

 

이 생산물의 가치는 첫째로, 소모된 생산 수단의 가치를 포함한다. 유용 노동은 이 생산 수단의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하지 않고서는 이 생산 수단을 소모할 수 없다. 그런데 노동력이 판매되려면 그것을 사용하게 될 공업 부문에 유용 노동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새로운 생산물의 가치는 노동력 가치의 등가와 잉여 가치를 포함한다. 그 이유는 일정한 기간(하루, 한 주 등) 판매된 노동력의 가치는 그 기간에 이 노동력의 사용으로부터 생산된 가치보다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력의 교환 가치를 지불받았고, 그에 따라 그 사용 가치를 양도했는데, 이 점은 다른 모든 매매에서와 마찬가지이다.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이 (노동을 제공하며 따라서 가치를 생산하는) 독특한 사용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은 상품 생산의 일반 법칙에 결코 저촉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임금으로 투하된 가치액이 생산물에 단순히 재현될 뿐 아니라 잉여 가치만큼 증식되어 나타난다면, 이것은 판매자가 사기를 당했다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판매자는 자기 상품의 가치를 실제로 받았음), 오로지 구매자로부터 이 상품이 소비되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교환 법칙은 서로 교환되는 상품들의 교환 가치의 평등만을 요구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것들의 사용 가치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며, 그것들의 소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소비는 거래가 완전히 끝나고 집행된 뒤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따라서 화폐가 자본으로 최초로 전환하는 일은 상품 생산의 경제 법칙 및 이 법칙에서 나오는 소유권과 가장 정확하게 일치하여 수행된다. 그럼에도, 그 전환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1. 생산물은 노동자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에게 속한다.

 

2. 이 생산물의 가치에는 투하 자본의 가치 외에 잉여 가치가 포함되는데, 이 잉여 가치의 생산을 위해 노동자는 노동을 했으나 자본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잉여 가치는 자본가의 합법적 소유가 된다.

 

3.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유지했으므로, 구매자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을 다시 판매할 수 있다.

 

단순 재생산은 이 첫 번째 활동의 주기적 반복에 불과하며, 그때마다 화폐는 새로이 자본으로 전환된다. 그래서 여기서는 법칙이 위반되지 않고 도리어 계속 작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시스몽디가 언급한대로,

 

몇 번의 순차적인 교환 행위들은 최후의 교환이 최초의 교환을 표현하도록 했을 따름이다.’

 

또 그럼에도, 단순 재생산은 이 첫 번째 활동을 고립된 과정으로 고찰하지 않는 한, 그것에 전혀 다른 성격을 충분히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본 바 있다.

 

국민 소득의 분배에 참여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한쪽(노동자들)은 매년 새로운 노동을 수행하면서 자기들 몫에 대한 새로운 권리를 얻으며, 다른 한쪽(자본가들)은 시초의 노동으로부터 자기들 몫에 대한 영원한 권리를 이미 획득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노동의 영역은 예수가 이 기적을 행하는 유일한 영역은 아니다.

 

단순 재생산이 확대된 규모의 재생산, 곧 축적으로 교체되어도 사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전자의 경우, 자본가는 잉여 가치 전부를 탕진하지만, 후자의 경우, 잉여 가치의 일부만을 소비하고, 나머지는 화폐로 전환시키면서(보유하면서) 자신의 부르주아적 미덕을 입증한다.

 

잉여 가치는 자본가의 소유이며 다른 누구에게도 속한 일이 없다. 그가 그것을 생산에 투하한다면, 그는 (시장에 처음 나타난 날에 한 바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재원에서 투하한다. 이 경우, 그의 재원이 노동자들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사태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노동자 A가 생산한 잉여 가치로 노동자 B에게 지불하더라도, 첫째로, A는 자기 상품의 정당한 가격을 한푼도 에누리 없이 전부 받고 이 잉여 가치를 제공했기 때문이며, 둘째로, 이 사실은 노동자 B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B가 요구하는 것은, 또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은, 오직 자본가가 자기에게 노동력의 가치를 지불해야 한다는 점뿐이다.

 

그래도 이 둘은 이익을 보았다. 노동자가 이익을 본 것은 자기의 노동이 수행되기 전, 곧 열매를 맺기 전에 자기의 노동 (다른 노동자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의 열매가 자기에게 지불되었기 때문이고, 고용주가 이익을 본 것은 이 노동자의 노동이 그의 임금보다도 더 값어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의 가치보다도 더 많은 가치를 생산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을 그 갱신의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고찰하고, 개별 자본가와 개별 노동자 대신 그들의 총체, 곧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서로 마주한다고 고찰한다면, 사태가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우리는 상품 생산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기준을 적용하는 셈이 된다.

 

상품 생산에서는 상호 독립적인 판매자와 구매자가 서로 마주한다. 그들 간의 모든 관계는 그들이 체결한 계약의 만기일이 되면 중단된다. 거래가 반복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전의 계약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새로운 계약으로부터 반복되며, 그 새로운 계약에서 동일한 구매자와 동일한 판매자가 다시 만나는 일은 우연에 불과하다. 상품 생산 또는 이에 속하는 과정을 자체적인 경제 법칙에 따라 판단하려면, 개별 교환 행위를 전후 교환 행위들과의 모든 관련을 제외하고 개별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매매는 오직 특정 개인들 사이에서만 진행되므로, 거기에서 전체 사회 계급들 사이의 관계를 찾는 일은 허용될 수 없다.

 

현재 기능하고 있는 자본이 통과해 온 주기적 재생산과 그것에 선행하는 축적의 계열들이 아무리 길다 하더라도, 이 자본은 언제나 자기 시초의 순수성을 보존한다. 교환 법칙이 (개별적으로 본) 각각의 교환 행위에서 준수되는 한, 취득 방식은 상품 생산에 상응하는 소유권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고 완전히 변혁될 수 있다. 이 동일한 소유권은 시초에도 그리고 자본주의 시대에도 효력을 보존하는데, 시초에는 생산물이 생산자에게 속하며, 생산자는 등가물과 등가물을 교환하고 자기 자신의 노동으로부터만 부유해질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대에는 점점 더 많은 사회적 부가 (타인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을 끊임없이 새로 취득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소유로 된다. 이러한 결과는 노동자 자신이 노동력을 상품으로 자유로이 판매하게 되자마자 불가피하게 된다. 바로 이 순간부터 비로소, 상품 생산은 보편화되며 전형적인 생산 형태로 자리 잡는다. , 이때부터 모든 생산물은 처음부터 판매를 위해 생산되며, 생산되는 부 전체가 유통 영역을 통과한다. 임금 노동이 상품 생산의 토대로 될 때에야 비로소, 상품 생산은 자신을 전체 사회에 강요하며, 그때에 비로소 자기의 잠재력을 전부 발휘한다.

 

임금 노동의 개입이 상품 생산을 불순하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상품 생산이 불순하게 되지 않으려면 발전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상품 생산이 그 자체의 내재적 법칙으로부터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전환되는 정도에 따라, 상품 생산의 소유 법칙은 변증법적 역전을 겪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자본주의적 취득 법칙으로 전환된다. 단순 재생산의 경우에도, 모든 자본은 그 최초 기원과 무관하게 축적된 자본 (곧 자본화한 잉여 가치)으로 전환된다는 점을 보았다. 그러나 생산의 홍수 속에서 최초의 총 투하 자본은 직접적으로 축적된 자본 (곧 자본으로 재전환된 잉여 가치 또는 잉여 생산물)과 비교하면 극소량이다. 이것은 최초 투하 자본이 그 축적자의 수중에서 기능하든 타인의 수중에서 기능하든 마찬가지다. 따라서 정치경제학은 자본 일반을 가리켜 잉여 가치의 생산을 위해 다시 사용될 축적된 부’ (전환된 잉여 가치 또는 수입)라고 말하며, 자본가를 잉여 가치의 소유자라고 말한다. 현존하는 자본 전체를 축적된 또는 자본화된 이자라고 보는 견해는 동일한 견해를 다른 형식으로 표현할 뿐이다. 이자는 잉여 가치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4-2. 확대 재생산에 관한 정치경제학의 잘못된 견해

 

축적(곧 잉여 가치가 자본으로 재전환하는 것)에 관한 더 깊은 연구에 앞서, 고전파 경제학이 도입한 하나의 모호한 점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자본가가 잉여 가치의 일부로 자기 자신의 소비를 위해 구매하는 상품이 자신의 생산 수단이나 가치 증식 수단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천성적·사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구매하는 노동도 생산적 노동이 아니다. 자본가는 그런 상품과 노동을 구매하면서 잉여 가치를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잉여 가치를 수입으로 소비하거나 지출한다. (헤겔이 적절하게 말했듯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소비해 버리는’, 특히 몸종 고용의 사치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옛 봉건 귀족들의 일상적 생활 방식에 반대하여, 부르주아 경제학이 자본의 축적을 시민의 첫째 의무라고 선포하고, 추가적인 생산적 노동자들 (이들은 투입 비용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을 고용하는 데 수입의 상당 부분을 지출하지 않고 자기 수입을 전부 소비하는 사람은 축적할 수 없다고 끈기 있게 설교한 일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다른 한편으로, 부르주아 경제학은 자본주의적 생산을 퇴장 화폐의 형성과 혼동하는, 따라서 축적된 부를 현재의 현물 형태가 파괴되지 않은 부(곧 소비되지 않은 부) 또는 유통에 들어가지 않은 부라고 여기는 세속적인 편견과 투쟁해야 했다. 화폐를 유통에서 배제하는 일은 화폐가 자본으로 가치 증식하는 일을 배제하며, 상품을 퇴장시켜 축적하는 일은 완전히 무의미한 일이다. 사실상 대량의 상품 축적은 유통의 정체 또는 과잉 생산의 결과이다.

 

위와 같은 세속적 편견은 한편으로, 부자들이 점차적으로 소비하기 위해 쌓아 둔 재화의 양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생산 양식에 공통적인 재고의 형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이에 관해서는, 유통 과정을 분석할 때 다시 언급한다. 따라서 고전파 경제학이 비생산적 노동자가 아니라 생산적 노동자가 잉여 생산물을 소비하는 일을 축적 과정에서 특징적 계기로 강조하는 것은 매우 정당하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오류도 시작된다. 애덤 스미스는 축적을 단순히 잉여 생산물을 비생산적 소비 대신 생산적 노동자 고용에 사용하는 과정으로 묘사한다. 곧 이러한 관점은 잉여 가치의 자본화를, 단순히 잉여 가치를 노동력으로 전환하는 행위와 동일시하여 설명한다. 예를 들어, 리카도,정치경제학 및 과세 원리의 말을 들어보자.

 

한 나라의 모든 생산물들은 소비된다. 하지만 그 생산물이 추가적 가치를 재생산하는 주체로부터 소비되는지, 아니면 가치 재생산에 전혀 기여하지 않는 주체로부터 소모되는지가 가장 중대한 결과를 결정한다. 수입이 저축되어 자본에 추가된다는 것은, 해당 수입 부분이 비생산적 노동자가 아닌 생산적 노동자로부터 소비된다는 의미다. 자본이 소비하지 않음으로 증가한다는 가정보다 더 큰 오류는 없다.’

 

리카도와 그 뒤의 모든 정치경제학자들이 애덤 스미스를 따라 되풀이하는 주장, 수입 중 자본에 추가되는 부분은 생산적 노동자로부터 소비된다.’는 주장보다 더 큰 오류는 없다. 이 관념에 따르면, 자본으로 전환되는 전체 잉여 가치는 가변 자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 역시 시초에 투하된 가치와 마찬가지로 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 곧 생산 수단과 노동력으로 분할된다.

 

노동력은 가변 자본이 생산 과정에서 취하는 형태이다. 이 생산 과정에서 노동력 자체는 자본가로부터 소비되며, 생산 수단은 노동력의 기능(곧 노동)으로부터 소비된다. 동시에 노동력의 구매에 지출된 화폐는 생활 수단으로 전환되는데, 이 생활 수단은 생산적 노동이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 노동자가 소비한다.

 

애덤 스미스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자신의 분석으로부터, 각 개별 자본은 불변적 구성 부분과 가변적 구성 부분으로 분할되지만, 사회의 자본(전체)은 전적으로 가변 자본으로만 분해될 수 있으며, 따라서 사회의 자본은 전부 임금으로만 지출된다는 엉터리 결론에 이른다. 예를 들어, 직물 공장주가 2,000원을 자본으로 전환시킨다고 가정한다. 그는 이 화폐의 일부를 직조공의 고용에 지출하고, 나머지를 실, 기계 등의 구입에 지출한다. 그런데 그에게 실과 기계를 판매한 사람도 판매 대금의 일부를 다시 노동에 지불한다. 이렇게 소급해 가면, 결국 2,000원 전부가 임금으로만 지출된다. 2,000원이 대표하는 생산물 전부가 생산적 노동자로부터 소비된다. 보는 바와 같이, 이 논증의 핵심은, “이렇게 소급해 가면이라는 말 한 마디에 있는데, 이 말은 논리가 순환한다. 사실 애덤 스미스는 연구가 곤란하게 되기 시작한 바로 그 곳에서 연구를 중단한다.

 

연간 총생산물만 고찰할 경우, 연간 재생산 과정은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연간 생산물의 모든 구성 부분이 상품으로 시장에 나와야 하며, 난점은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개별 자본이나 개인 수입의 운동은 하나의 일반적 위치 교대 (곧 사회적 부의 유통) 속에서 교차되고 뒤섞여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사람들을 혼동시키고, 해결해야 할 매우 복잡한 문제를 연구 과제로 제기한다. 필자는 제2권 제3편에서 전체 체계가 실제로 어떻게 상호 관련을 맺는지를 분석한다. 중농주의자들이 그들의경제표에서 연간 생산을 (유통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 처음 묘사하려고 시도한 일은 그들의 큰 공적이다. 또한 정치경제학이, 순생산물 중 자본으로 전환되는 부분은 전부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소비된다는 애덤 스미스의 명제를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위해 활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24-3. 잉여 가치 분할과 절욕설

 

기존 논의는 잉여 가치 또는 잉여 생산물을 자본가의 개인적 소비 재원 또는 축적 재원 중 어느 한 측면에서만 다루었다. 그러나 잉여 가치는 이 두 측면을 동시에 포괄하는 개념이다. 잉여 가치의 특정 부분은 자본가의 수입으로 전환되어 소비되며, 잔여 부분은 자본으로 투입되어 축적된다. 이 두 부분 중 하나가 적을수록, 다른 부분은 그만큼 더 커진다. 이는 잉여 가치의 양이 일정할 때 성립하는 관계다.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이 분할의 비율이 축적의 크기를 결정한다. 이 분할은 잉여 가치 소유자, 곧 자본가의 의지 행위로 이루어진다. 그가 거두어들인 공물(잉여 가치) 중 축적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가 그것을 소비하지 않고 자본가로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며 스스로 부를 늘려가기에 절약한다고 표현한다.

 

자본가는 인격화된 자본으로만 역사적 가치와, 리히노브스키의 실언(‘인명해설참조)을 빌려 유효 기간이 없는 것은 아닌역사적 생존권을 지닌다. 오직 이러한 측면에서만, 그의 일시적 존재의 필연성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더 높은 사회로 이행할 필연성에 포함된다. 자본이 인격화된 존재인 한, 그의 활동 동기는 사용 가치의 획득과 향락이 아니라 교환 가치의 획득과 증식이다. 그는 가치 증식을 열광적으로 추구하며, 인류에게 무자비하게 생산을 위한 생산을 강요한다. 따라서 자본가는 사회 생산력의 발전과, (각 개인에게 최대한의 자유로운 발달을 기본 원칙으로 삼는) 더 높은 사회 형태의 유일한 현실적 토대로 될 수 있는, 물질적 생산 조건의 생산에 박차를 가한다. 자본의 인격화로만 자본가는 존경받으며, 이로 인해 절대적 치부욕을 수전노와 일치한다.

 

수전노의 경우는, 개인적 열광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자본가의 경우는 사회적 기구(여기서 자본가는 하나의 나사에 불과)의 작용으로 발현한다. 더욱이, 자본주의적 생산 발전은 개별 사업에 투하되는 자본액을 끊임없이 증대시키도록 강제하며, 경쟁은 이 생산 양식의 내재적 법칙을 각 자본가에게 외적인 강제 법칙으로 강요한다. 경쟁은 자본가로 하여금 자본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확대하도록 압박하며, 이는 오직 누진적 축적으로부터만 달성된다.

 

자본가의 모든 행동은 (그에게 의지와 의식을 부여받은) 자본의 기능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자신의 개인적 소비는 자기 자본 축적에 대한 약탈로 간주된다. 이는 복식부기에서 자본가의 사적 지출이 자본의 반대편(차변)에 기입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축적은 사회적 부의 세계를 정복하고, 착취당하는 인간의 수를 확대하며, 동시에 자본가의 직접적·간접적 지배를 확장하는 행위다. 그러나 원죄는 도처에서 작용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발전하고 축적과 부가 증대함에 따라, 자본가는 자본의 단순한 화신이 아니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아담(욕망)에 대해 인간적 공감을 느끼기 시작하며, 교육으로부터 금욕주의에 대한 이전의 열정을 고루한 수전노의 편견으로 치부할 수 있게 된다. 고전적 자본가는 개인적 소비를 신성한 직분에 어긋나는 죄악이자 축적을 끊는 것으로 낙인찍지만, 근대적 자본가는 축적을 향락의 절제로 여길 수 있다.

 

아아. 그대의 가슴에는,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그런데 그들은 항상 떨어지려 하고 있구나.’

 

[ 괴테,파우스트]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역사적 새벽, 벼락부자가 된 개별 자본가는 이 단계를 개별적으로 통과하는 동안 치부욕과 탐욕이 지배적인 열정이 된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향락의 세계를 창조할 뿐 아니라, 투기와 신용 제도의 형태의 많은 벼락부자 원천을 개발한다. 일정한 수준의 발전에 이르면, 어느 정도의 낭비는 부의 과시와 신용 획득 수단이 되며, ‘운이 나쁜자본가에게는 사업상의 필요로까지 변한다. 사치는 자본의 교제비에 포함된다. 더욱이 자본가는 수전노처럼 자신의 개인적 노동이나 소비 삭감에 비례해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노동력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짜내는지, 그리고 노동자에게 생활상의 모든 쾌락 포기를 얼마나 강요하는지에 비례해 부유해진다. 따라서 자본가의 낭비는 호탕한 봉건 영주의 낭비가 지닌 솔직한 성격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그 이면에는 언제나 가장 더러운 탐욕과 세심한 타산이 숨어 있다. 그럼에도, 자본가의 낭비는 그의 축적을 방해하지 않고, 축적의 증대와 더불어 증대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자본가의 심중에는 축적욕과 향락욕 사이의 파우스트적 갈등이 전개된다.

 

1795년 애이킨이 발표한 저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맨체스터의 공업은 네 시기로 구분한다. 1기에 공장주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노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주로 도제의 부모(공장주에게 자기 아동들을 맡기며 큰 금액의 수업료를 지불한)를 강탈해 치부했으며, 물론 도제들은 굶주렸다. 다른 한편으로, 평균 이윤이 낮았기 때문에 축적하려면 대단한 절약이 필수였다. 그들은 수전노와 마찬가지로 생활했으며, 심지어 자기 자본에 대한 이자까지도 소비하지 않았다.

 

2기에는 그들이 약간의 재산을 얻기 시작했으나, 이전처럼 열심히 노동했으며 (이는 노예 감시자들이 아는 것처럼 노동을 직접 착취하는 데 노고가 들기 때문), 이전처럼 검소하게 생활했다. 3기에는 사치가 시작되었고, 사업은 영국 내 모든 상업 도시로 주문을 받기 위해 말을 탄 사람을 파견하며 확대되었다. 1690년 이전에는 공업에서 획득한 자본이 3,000파운드 내지 4,000파운드에 달한 적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대략 이 시기 또는 이보다 조금 늦게, 공장주들은 이미 화폐를 축적했고, 목조 가옥이나 토담집 대신 근대적 벽돌집을 짓기 시작했다.’

 

18세기 초에도 맨체스터의 한 공장주는 손님들에게 1파인트(0.57리터)의 외국제 포도주를 대접했다는 이유로, 모든 이웃에게 혹평과 비난을 받았다. 기계제 생산 출현 이전, 공장주들이 저녁에 만나는 술집에서 지출하는 비용은 펀치주 한 잔 값인 6펜스, 잎담배 한 봉지 값인 1페니를 넘지 않았다. 획기적인 해인 175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실제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 중 자기 자신의 마차를 가진 사람이 단 한 명 목격되었다. 18세기 마지막 30년인 4기는 유럽 전체에 걸친 사업 확장으로 인한 대단한 사치와 낭비의 시기였다.’ 선량한 애이킨이 다시 살아나 오늘날의 맨체스터를 본다면, 그는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이며, 예언자들이다! (가장 중요한 계율이다!) ‘근면은 재료를 제공하고, 절약은 그것을 축적한다.’ 그러므로 절약하라, 절약하라! 다시 말해, 잉여 가치 또는 잉여 생산물 중 최대한의 부분을 자본으로 재전환하라! 축적을 위한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 이 공식으로, 고전파 경제학은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표현했다.

 

고전파 경제학은 부의 출산 진통이 무엇인지 한 순간도 잘못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필연성이기에, 한탄한들 소용없다. 고전파 경제학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기계의 의의밖에 없다면, 자본가 또한 이 잉여 가치를 추가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기계의 의의밖에 없다. 고전파 경제학은 자본가의 역사적 기능을 진지하게 취급한다.

 

자본가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향락욕과 치부욕 사이의 불행한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1820년경 맬더스는, 축적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생산에 종사하는 자본가가 담당하고, 낭비하는 일은 잉여 가치 분배에 참여하는 기타 사람들, 곧 토지 귀족이나 관리, 목사 등이 담당하는 분업을 제창했다. 그는 지출욕과 축적욕을 분리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미 오래전에 향락가이자 사교가가 되어버린 자본가들은 불평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대변자인 리카도 학파의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맬더스가 높은 지대, 높은 세금 등을 설교하는 것은 근면한 사람들에 대한 비생산적 소비자들의 압력으로부터 그들의 근면을 계속 자극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생산, 끊임없이 확대된 규모의 생산을 구호로 내걸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방식으로는 생산이 촉진되기는커녕 오히려 저해된다. 또한 다른 이들을 자극하기 위해, 상당수의 사람들, 그들의 성격상 일을 잘 해낼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일단의 사람들을 무위도식하게 만드는 일은 전혀 공정하지 못하다.’

 

그러나 그는 산업 자본가들의 빵에서 버터를 빼내면서 그들에게 축적에 대한 자극을 주는 일은 불공정하다고 보면서도, ‘노동자를 근면하게 만들기 위해임금을 최저 한도까지 억누르는 일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또한 이윤 획득의 비밀이 지불받지 못한 노동의 취득에 있다는 것을 조금도 감추지 않는다.

 

노동자 측의 수요가 증가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들이 자신들의 생산물 중 자신들을 위해서는 더 적은 몫을, 고용주에게는 더 큰 몫을 제공하려는 의향 이외의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경우, 노동자들의 소비 감소로부터 공급 과잉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공급 과잉은 높은 이윤과 동의어일 뿐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노동자들에게 탈취한 획득물을 산업 자본가와 무위도식하는 토지 소유자 사이에 어떻게 분배해야 축적에 유익할지 논하는 학문적 다툼은 7월 혁명(1830)에 직면해 잠잠해졌다. 그 직후, 리옹의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의 경종을 울렸고, 영국의 농촌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장과 곡식 더미에 불을 질렀다.

 

해협 이편에서는 오언주의가, 저편에서는 생시몽주의·푸리에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속류 경제학의 시기가 도래했다. 맨체스터에서 시니어가 자본에 대한 이윤(이자를 포함)‘12시간 노동 중 최후의 한 시간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을 발견한 바로 1년 전, 그는 또 다른 발견을 세상에 공표했다. 그는 거만하게,

 

나는 (생산 도구로 여겨지는) 자본이라는 말을 절욕이라는 말로 바꾼다.’

 

고 말했다. 이야말로, 속류 경제학 발견의 기막힌 견본이다!

 

속류 경제학은 경제학적 범주를 아첨꾼의 문구로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시니어는,

 

야만인이 활을 만든다면, 그는 하나의 근로에 종사하는 것이지 절욕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한다. 이는 초기 사회 상태에서 노동 수단이 자본가의 절욕 없이어떻게 그리고 왜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하려는 시도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사회는 그만큼 더 절욕을 요구한다.’는 그의 주장은, 곧 타인의 근로와 생산물을 취득하는 것이 본업인 사람들의 절욕을 그만큼 더 요구한다는 의미다. 이로부터 노동 과정을 위한 모든 조건들은 그때부터 자본가의 그만한 수의 절욕 행위로 전환된다. 곡물이 식량으로 모두 소비되지 않고 일부가 종자로 파종될 수 있는 것조차 자본가의 절욕 때문이라는 것이다.

 

포도주가 발효를 위해 일정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 역시 자본가의 절욕 때문이다. 자본가가 생산 도구를 노동자에게 대부할 때(!), 다시 말해, 증기 기관, 면화, 철도, 비료, 역축 등을 소비해 버리지 않고 (또는 속류 경제학자의 유치한 표현대로, ‘그것들의 가치를 사치품 등의 소비재에 탕진하지 않고), 그것들을 노동력과 결합시켜 자본으로 그 가치를 증식시킬 때, 자본가는 자기 자신을 수탈한다는 것이다. 자본가 계급이 이 과정을 어떻게 실현하는지는 이제까지 속류 경제학이 해명하기를 완강히 거부한 수수께끼다. 여하튼, 세계는 오직 비슈누 신의 현대적 속죄자인 자본가의 자기 고행으로부터 굴러가고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축적뿐 아니라 단순한 자본의 유지조차도 그것을 소비하려는 유혹에 저항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인간의 도리가 명령하는 것은 자본가를 이러한 희생과 유혹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조지아 주의 노예 소유자가 노예제 폐지로부터, 흑인 노예에게 채찍으로 짜낸 잉여 생산물 전부를 샴페인으로 마셔버릴 것인지, 아니면 그 일부를 더 많은 흑인와 토지로 재전환시킬 것인지에 대한 고통스러운 고뇌로부터 해방된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가 된다.

 

사회의 경제적 구성이 아무리 다르더라도, 단순 재생산뿐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확대 재생산은 발생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 많이 생산되고, 더 많이 소비되며, 따라서 더 많은 생산물이 생산 수단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노동자의 생산 수단, 그의 생산물, 그의 생활 수단이 자본의 형태로 그와 대립하지 않는 한, 자본의 축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따라서 자본가의 기능으로도 나타나지 않는다. 헤일리베리 대학 (인도 파견 관리를 양성하는 대학) 정치경제학 교수직에서 맬더스의 후계자였던 수년 전에 세상을 떠난 리처드 존스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에 비추어 이 점을 명확히 설명한다.

 

인도 국민의 대다수는 자작농이므로, 그들의 생산물, 노동 수단, 생활 수단은 결코 타인의 수입으로부터 절약된 재원, 따라서 축적이라는 선행 과정을 통과한 재원의 형태를 띠지 않는다. 다른 한편, 영국의 지배가 낡은 제도를 가장 적게 해체시킨 지방들에서는, ()농업 노동자들이 농업 잉여 생산물의 일부를 공물 또는 지대 형태로 거두어들이는 대영주들에게 직접 고용된다. 이 생산물 일부는 현물 형태로 대영주들이 소비하고, 다른 일부는 노동자들로부터 영주들을 위한 사치품과 기타 소비재로 전환되며, 나머지 부분은 (자기 노동 도구를 소유한) 노동자들의 임금을 이룬다. 이처럼 인도에서는 생산과 확대된 규모의 재생산이 그 기묘한 성인이며, 근심에 잠긴 기사인 절욕하는자본가에게 아무런 개입 없이 진행된다.

   

24-4. 잉여 가치율, 생산성, 자본 구조 및 규모

 

잉여 가치의 자본 및 수입으로 분할 비율이 주어질 경우, 축적 자본의 규모는 잉여 가치 절대량에 명백하게 의존한다. 가령 80%가 자본화되고, 20%가 소비된다고 가정한다면, 잉여 가치 총액이 3,000원인지 1,500원인지에 따라, 축적 자본은 각각 2,400원 또는 1,200원이 된다. 따라서 잉여 가치량을 결정하는 모든 요인은 축적 크기를 결정하는 데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본 장에서는 이 요인들이 축적에 대하여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범위 내에서만 재차 총괄하고자 한다.

 

우리가 상기하듯, 잉여 가치율은 무엇보다 노동력의 착취도에 의존한다. 정치경제학은 이 사실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흔히 노동 생산성 향상으로부터 축적 촉진과 노동자 착취 강화로부터 축적 촉진을 동일시한다. 잉여 가치 생산에 관한 논의에서 우리는 항상 임금이 최소한 노동력의 가치와 같다고 전제해왔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가치 이하로 임금을 강제 삭감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므로, 이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필수적이다. 일정한 한계 내에서 이러한 임금 삭감은 실제로 노동자의 필요 소비 재원을 자본 축적 재원으로 전환시킨다. 존 스튜어트 밀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임금은 어떤 생산력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생산력에 대한 가격일 뿐이다. 임금이 노동 자체와 더불어 상품 생산에 기여하지 못하는 것은, 기계 가격이 기계 자체와 더불어 생산에 기여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동이 구매될 필요 없이 획득될 수 있다면, 임금은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공기만으로 생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어떤 가격으로도 그들을 고용할 수는 없다. (이는 그들이 자본가의 지배를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 비용이 0이라는 점은 수학적 의미에서 극한이며, 끊임없이 접근할 수는 있으나 결코 도달할 수는 없는 지점이다. 자본의 끊임없는 경향은 이 노동 비용을 0의 수준까지 하락시킨다.

 

필자가 자주 인용하는 18세기 저술가인상공업에 관한 논문의 저자는, 영국의 역사적 사명이 영국 노동자들의 임금을 프랑스나 네덜란드 수준까지 떨어뜨리는 것이라 선언하면서, 영국 자본의 내밀한 비밀을 폭로한다. 그는 특히 순진하게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빈민들 (노동자들을 지칭하는 용어)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려 한다면, 그들의 노동 가치는 필연적으로 높게 책정될 수밖에 없다. 제조업 노동자들이 소비하는 브랜디, , , 사탕, 외국산 과일, 강한 맥주, 날염 직물, 담배 등과 같은 그 막대한 사치품들은 주목할 만하다.’

 

이어서 저자는 노샘프턴셔의 한 공장주가 경건한 태도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개탄하는 글을 인용 제시한다.

 

프랑스의 노동 가치가 영국보다 1/3이나 낮은 이유는, 프랑스 빈민들이 열심히 노동하면서도 음식과 의복에서 검소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된 식량은 빵, 과일, 야채, 풀뿌리, 건어 등이다. 그들이 고기를 먹는 일은 매우 드물며, 밀 값이 비쌀 때는 빵마저도 아주 적게 먹는다.’

 

이 공장주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마시는 것은 물 또는 소량의 술에 불과하며, 결과적으로, 지출이 매우 적다. 물론 이러한 상황을 조성하기란 쉽지는 않으나,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므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20년 후, 미국의 사기꾼이자 작위를 수여받은 미국 출신 벤자민 톰슨 (통칭 럼포드 백작)은 동일한 박애주의적 노선을 따르며, 신과 인간에게 큰 만족감을 주었다. 그의평론집은 노동자들의 값비싼 통상적인 음식물을 값싼 대용품으로 대체하는 각종 요리법으로 가득 찬 요리 책이다. 이 경탄할 만한 철학자의 특히 뛰어난 요리법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7.5펜스의 보리 5파운드, 6.25펜스의 옥수수 5파운드, 3펜스의 청어, 1페니의 소금, 1페니의 식초, 2펜스의 후추와 양념을 합산한 총 20.75펜스로, 64명분의 수프를 만들 수 있다. 보리와 옥수수의 평균 가격을 적용할 경우, 1인당 비용은 20온스, 수프 한 그릇당 0.25페니로 낮아진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하면서 식품의 불량화가 심화되었고, 결국 톰슨이 제안했던 이러한 이상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첫 십 년 동안, 잉글랜드의 차지 농업가와 지주들은 농업 노동자들에게 생계 최저 한도 이하의 임금을 지급하고, 그 부족분을 교구의 구호금 형태로 보충하며 절대적인 최저 임금 수준을 실행했다. 당시 잉글랜드의 독베리들 (오만한 상류층)이 임금 수준을 합법적으로제정했을 때 발생한 조롱거리의 한 예는 다음과 같다.

 

‘1795년 버크셔의 지주들이 스핀햄랜드에서 임금 수준을 정하고 있을 때, 그들이 점심 식사를 하는 중이었음에도, 노동자들에게는 점심 같은 것이 필요 없다고 판단했음이 명백하다. 그들은 8파운드 11온스짜리 빵 한 덩어리 값이 1실링일 때, 성인 1인당 주급은 3실링이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후 빵 한 덩어리 값이 1실링 5펜스에 달할 때까지는 임금 수준을 규칙적으로 높일 것이며, 빵 값이 그 이상으로 올라 2실링이 될 때까지는 임금 수준을 규칙적으로 감소시켜, 노동자들의 빵 소비가 종전보다 1/5 감소되도록 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큰 차지 농업가이자 치안 판사, 구빈원 관리자, 그리고 임금 조정 위원인 베네트는 1814년 상원 조사 위원회 앞에서 심문을 받았다.

 

노동자의 하루 노동 가치와 교구의 구호금 사이에 어떤 비율이 준수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렇다. 각 가족의 주당 소득은 1인당 1갤론의 빵 (8파운드 11온스)3펜스에 도달하도록 되어 있다. (명목 임금이 이에 미달하면 그 차액은 교구가 보충한다.) 1갤론의 빵은 1주일 동안 생활을 유지하기에 충분하다고 우리는 판단한다. 3펜스는 의복용으로 지급되며, 교구가 직접 의복을 제공하는 경우에는 이 3펜스를 제외한다. 이러한 관행은 윌트셔 서부 일대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듯하다. 당대의 어떤 부르주아 저술가는 다음과 같이 부르짖는다. “몇 년간 차지 농업가들은 존경할 만한 농촌 사람들이 구빈원을 찾을 수밖에 없게 만들면서 그들을 타락시키고 있다. 차지 농업가는 자신의 이득을 증대시키면서, 노동자에게는 그 어떤 (소비 재원의) 축적도 하지 못하게끔 방해했다.’

 

노동자의 필수 소비 재원을 직접적으로 약탈하는 일이 오늘날 잉여 가치 형성 및 자본 축적 재원 형성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예를 들어, 이른바 가내 공업을 고찰할 때 이미 확인한 바와 같다 (15, 8, 를 참조). 더 많은 사실들은 이후에 논의된다.

 

어느 산업 부문에서든 불변 자본 중 노동 수단으로 구성된 부분은 일정 수의 취업 노동자들에게 충분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취업 노동자 수에 비례하여 증대할 필요는 없다. 가령 어떤 공장에서 100명의 노동자가 하루 8시간 노동하여 800시간의 노동을 제공한다고 가정하자. 자본가가 총 노동 시간을 1.5배 증대시키고자 한다면, 50명의 노동자를 추가로 고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그는 임금 지급뿐만 아니라 노동 수단 구입을 위해서도 더 많은 자본을 투하해야 한다. 이와 달리, 그는 기존의 100명 노동자를 8시간이 아닌 12시간 노동시킬 수 있으며, 이때에는 기존의 노동 수단만으로도 충분하다. 물론 노동 수단이 더 빨리 마모되겠지만, 노동력의 더 큰 발휘로부터 얻어진 추가 노동은 불변 자본의 상응하는 증대 없이도 축적의 실체인 잉여 생산물과 잉여 가치를 증대시킬 수 있다.

 

채취 산업 (: 광업)의 경우, 원료 (노동 대상)는 투하 자본의 구성 부분이 아니다. 이 노동 대상은 과거 노동의 생산물이 아닌 자연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금속 광석, 광물, 석탄, 석재 등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 불변 자본은 거의 전적으로 노동 수단으로 구성되며, 이 노동 수단은 증대된 양의 노동 (: 노동자의 주야 교대제 도입)을 매우 효과적으로 흡수할 수 있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생산물의 양과 가치는 지출된 노동량에 정비례하여 증가한다. 이 산업에서는 생산이 시작된 때와 마찬가지로, 생산물을 생산하는 본원적 두 요인인, 인간과 자연이 자본의 물질적 요소들을 생산하는 요인으로 함께 협력한다. 노동력의 신축성 덕분에, 축적 크기는 불변 자본 규모의 사전적 확대 없이도 확장될 수 있다.

 

농업에서는 종자와 비료의 추가 투하가 없으면 경작지를 확대할 수 없다. 그러나 일단 이들의 투하가 이루어지면, 토지는 순전히 내재적 기능만으로도 생산량을 놀라울 만큼 증대시킨다. 따라서 종전과 같은 수의 노동자가 수행하는 더 많은 양의 노동은 (노동 수단에 대한 새로운 투하 없이도) 토지의 산출량을 증가시킨다. 이것 역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직접적 작용이며, 어떠한 새로운 자본의 개입 없이도 축적을 증대시키는 직접적 원천이 된다. 최종적으로, 진정한 제조업에서는 추가적인 노동이 이에 상응하는 원료에 대한 추가 지출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노동 수단에 대한 추가 지출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채취 산업과 농업이 제조업에 원료와 노동 수단의 원료를 공급하므로, (자본의 추가 지출 없이) 생산된 채취 산업과 농업의 추가적 생산물은 제조업에도 유리하게 작용한다. 일반적 결론은 다음과 같이 도출된다.

 

자본은 부의 두 본원적 생산 요소인 노동력과 토지를 자기와 결합하면서 팽창력을 획득한다. 이 팽창력은 외관상 자본 자신의 크기, 곧 이미 생산된 생산 수단의 가치량으로부터 설정된 한계를 넘어서도록 한다. 결과적으로, 자본은 자신의 축적 요소들을 증대시킨다. 자본 축적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사회적 노동의 생산성 수준이다. 노동 생산성의 상승에 따라 일정한 가치 (곧 일정한 크기의 잉여 가치)를 체화하는 생산물의 양은 증가한다. 잉여 가치율이 불변일 때 (또는 노동 생산성의 상승 속도보다 완만하게 하락할 때조차도), 잉여 생산물의 양은 증대한다. 따라서 잉여 생산물이 수입과 추가 자본으로 분할되는 비율이 불변이라면, 자본가의 소비는 축적 기금의 감소 없이도 증가할 수 있다.

 

자본가에게 있어 축적 재원의 상대적 크기는 소비 재원의 희생 위에서 증대될 수 있으며, 상품 가격 하락 덕분에 종전과 동일하거나 더 많은 양의 소비품을 향유하게 된다. 이미 확인했듯이, 노동 생산성 향상은 노동자의 가치를 하락시키고, 결과적으로, 잉여 가치율을 상승시킨다. 이는 실질 임금이 높아지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실질 임금은 결코 노동 생산성에 비례하여 증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동일한 가변 자본 가치는 더 많은 노동력을, 따라서 더 많은 노동을 착취한다. 동시에 동일한 불변 자본 가치는 더 많은 양의 생산 수단 (노동 수단, 노동 재료, 보조 재료)으로 표현되며, 이는 노동을 흡수하는 요소들을 더 풍부하게 제공한다. 그러므로 추가 자본의 가치가 불변이거나 감소하는 경우에도 축적은 촉진된다. 재생산 규모가 물질적으로 확대될 뿐 아니라, 잉여 가치의 생산은 추가 자본의 가치보다 더욱 급속하게 증대한다.

 

노동 생산성의 증가는 이미 생산 과정에 투입된 최초 자본에도 영향을 미친다. 기능하는 불변 자본의 일부는 기계 등 노동 수단으로 이루어지며, 이는 장기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완전히 소비되거나 대체된다. 그러나 이 노동 수단의 일부는 매년 마멸하여 생산적 기능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매년 주기적 재생산 단계 또는 동종의 신품으로 대체해야 할 단계에 놓인다. 이 노동 수단을 생산하는 부분에서 노동 생산성이 증가한다면 (과학과 기술 발전에 따라 생산성은 끊임없이 증가함), 낡은 기계, 공구, 장치 따위 대신에 더 효율적이면서 (그 증가한 효율성에 비해) 더 값싼 새로운 것들이 도입된다. 현재 사용되는 노동 수단에 대한 끊임없는 세부 개량을 제외하더라도, 낡은 자본은 더 생산적인 형태로 대체된다. 불변 자본의 다른 부분, 곧 원료와 보조 재료는 일 년 중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농업에서 생산되는 재료들은 대부분 일 년에 한 번씩 재생산된다. 따라서 개량된 방법의 도입은 추가 자본과 이미 기능하는 자본에 거의 동시적으로 작용한다.

 

화학의 발전은 유용 물질의 수와 이미 알려진 물질의 유용한 응용을 다양하게 하며, 자본의 증대와 함께 그 투하 분야를 확장시킬 뿐 아니라, 생산 및 소비 과정의 배설물을 재생산 과정 속으로 재투입하면서 자본의 사전 지출 없이 새로운 소재를 창출한다. 노동력의 발휘 강화만으로 자연적 부의 개발이 증대되듯이, 과학과 기술은 자본가에게 (현재 기능하는 자본의 크기와는 관계없이) 확대 능력을 부여한다. 과학과 기술은 또한 갱신 단계에 들어선 최초 자본의 부분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 자본 부분은 새로운 형태를 취하면서 (그 옛 형태가 마모되던 동안 진행된) 사회적 발전을 무상으로 이용한다. 물론 생산성이 이렇게 발전하면, 기능하는 자본의 가치는 부분적으로 감소한다. 경쟁에서 이 가치 감소를 절실히 느끼게 될 경우, 그 주요한 부담은 노동자에게 전가되는데, 이는 자본가가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면서 자신의 손실을 메우려 하기 때문이다.

 

노동은 소비된 생산 수단의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일정한 노동량이 사용하는 생산 수단의 가치와 양은 노동 생산성의 증대에 따라 증가한다. 따라서 동일한 노동량이 그 생산물에 언제나 동일 금액의 새로운 가치만을 첨가하더라도, 생산물에 이전되는 옛 자본 가치는 노동 생산성의 증대에 따라 증가한다. 예를 들어, 영국인 방적공과 중국인 방적공이 동일한 강도로 동일한 시간 노동한다면, 그들은 일주일에 동일한 가치를 생산한다. 그러나 이러한 동등성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자동 장치를 사용하는 영국인의 주 생산물 가치와 물레만을 가진 중국인의 주 생산물 가치 사이에는 막대한 차이가 존재한다. 중국인이 면화 1파운드를 방적하는 동일한 시간에, 영국인은 수백 파운드를 방적한다. 수백 배나 큰 액수의 옛 자본 가치가 영국인 생산물의 가치를 팽창시키는데, 이 옛 자본 가치는 이 생산물에서 새로운 유용한 형태로 재생산되어 자본으로 새롭게 기능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영국 노동 계급의 상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1782년에는 그전 3년 동안 거두어들였던 양모가 (영국에서) 노동자 부족으로 모두 그냥 쌓여 있었는데, 마침 새로 발명된 기계가 그 양모를 처리하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그대로 쌓여 있었을 것이다.’

 

기계 형태로 대상화된 노동은 물론 단 한 명의 새로운 노동자도 직접 생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는 더 적은 수의 노동자로 하여금, 비교적 더 적은 추가적 노동으로 양모를 생산적으로 소비하여 양모에 새로운 가치를 첨가했을 뿐 아니라, 털실 등의 형태로 양모의 옛 가치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결과적으로, 기계는 양모의 확대 재생산을 유도하고 자극했다. 새로운 가치를 첨가하면서 옛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살아 있는 노동의 자연적 속성이다. 따라서 생산 수단의 효율성, 규모, 가치의 증대에 따라, 곧 노동 생산성의 발전과 함께하는 축적에 따라, 노동은 끊임없이 증대되는 자본 가치를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로 유지하고 영원한 것으로 만든다.

 

노동의 이 자연적 능력은 (노동이 결합되어 있는) 자본의 자기 보존 능력으로 비친다. 이는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이 자본의 내재적 속성으로 보이고, 자본가가 잉여 노동을 끊임없이 취득하는 것이, 자본의 끊임없는 자기 증식으로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상품의 모든 가치 형태가 화폐 형태로 외부에 나타나듯, 노동의 모든 힘은 자본의 힘으로 외부에 나타난다. 자본의 증대에 따라, 사용되는 자본과 소비되는 자본 사이의 차액이 커진다. 이는 건물, 기계, 배수관, , 각종 장치와 같은 노동 수단 (장기간에 걸쳐 반복되는 생산 과정에서 기능하거나 특정한 유용 효과를 얻는 데 봉사하는 것들)의 가치량 및 소재량이 증가함을 의미한다. 이 노동 수단들은 점진적으로 마멸되고, 가치를 조금씩 상실하며, 그 가치를 조금씩 생산물로 이전하게 된다. 이 노동 수단들이 생산물에 가치를 첨가하지 않으면서 생산물 형성에 참여하는 정도, 곧 그것들이 전체적으로 사용되면서도, 부분적으로만 소비되는 정도에 따라, 이들은 물, 증기, 공기 등 자연력과 마찬가지로 무료로 봉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살아 있는 노동이 장악하여 활기를 띠게 만든 과거 노동의 이 무료 봉사는 축적의 규모가 증대됨에 따라 증대한다.

 

과거 노동은 언제나 자본으로 변장하며, 예를 들어, 노동자 A, B, C 등의 노동에 대한 부재가 비()노동자 X의 자산으로 변장한다. 이 때문에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과거의 죽은 노동의 봉사를 온갖 말로 찬양하며, 스코틀랜드의 천재 매컬록은 과거 노동에 이자, 이윤 등의 형태로 일정한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결국 생산 수단의 형태로 과거 노동이 살아 있는 노동 과정에 제공하는 끊임없이 증대하는 지원은, 노동자 자신으로부터 착취한 과거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이 취한 형태, 곧 과거 노동의 자본주의적 형태 그 자체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실무자들과 그들의 사상적 대변인들은, 노예 소유자가 노동자 그것을 노예라는 그 성격과 분리시켜 생각할 능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산 수단을 그것이 오늘날 쓰고 있는 적대적인 사회적 가면과 분리시켜 생각할 능력이 없다.

 

노동력의 착취도가 일정하다면, 잉여 가치량은 동시에 착취당하는 노동장의 수로부터 결정되며, 이 노동자 수는 (완전한 정비례 관계는 아니나) 자본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지속적인 축적으로 자본이 증대할수록 (소비 재원과 축적 재원으로 분할되는) 가치량 역시 증대한다. 그러므로 자본가는 더 사치스럽게 소비하면서도 동시에 더 절욕할 수 있다. 결국, 투하 자본량에 따라 생산 규모가 확대될수록, 생산의 모든 추진력은 그만큼 더욱 탄력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24-5. 노동 기금

 

이 연구 과정에서 명확히 되었듯, 자본은 고정적 크기가 아닌, 잉여 가치가 수입 및 추가 자본으로 어떻게 분할되는지에 따라 끊임없이 변동하는 사회적 부의 탄력적인 일부이다. 나아가, 기능하는 자본 규모가 일정할지라도, 자본에 결합된 노동력, 과학, 토지 (토지는 자연이 인간 개입 없이 제공하는 모든 노동 대상을 의미)는 자본의 탄력적 힘을 형성하여, 일정한 한계 내에서 자본 자체의 크기와 무관하게 그 작용 범위를 확대한다. 다만, 동일한 자본량을 상이한 정도로 작용시키는 유통 과정의 제반 사정(: 자본 회전 시간의 단축)은 논의에서 제외하였다. 더불어, 순전히 자연 발생적으로 발달·발전한 사회적 생산 과정인 자본주의적 생산의 한계성을 전제하면서, 현존하는 생산 수단과 노동력을 가지고 직접적·계획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보다 합리적인 온갖 결합 또한 논의에서 제외하였다.

 

고전파 경제학은 항상 사회적 자본을 고정된 능률을 지닌 고정적 크기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편견은 19세기 천박한 부르주아적 지성, 곧 무미건조하고, 현학적이며, 수다스러운 철학자 제레미 벤담으로부터 비로소 하나의 교리로 확립되었다. 벤담이 철학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마틴 터퍼가 시인들 사이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같으며, 두 인물 모두 영국에서만 배출될 수 있었다. 벤담의 교리로는 생산 과정의 갑작스러운 확장과 수축, 그리고 축적과 같은 가장 평범한 현상들조차 전혀 설명할 수 없다. 이 교리는 벤담 자신을 비롯하여, 맬더스, 제임스 밀, 매컬록 등이 변호론적 목적, 특히 가변 자본(노동력으로 전환될 수 있는 자본)을 자본의 일부인 동시에 고정된 크기로 묘사하기 위해 악용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교리로부터, 가변 자본의 소재적 존재(, 가변 자본이 노동자들을 위해 나타내는 생활 수단의 양) 또는 이른바 노동 기금은 사회적 부 중 자연 법칙으로부터 고정되어 변경될 수 없는 특수 부분으로 격상되었다.

 

불변 자본(소재적 형태로는 생산 수단)으로 기능해야 할 사회적 부의 일부분을 가동시키기 위해서는 생산 기술로부터 규정되는 일정량의 살아 있는 노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노동량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노동자의 수는 개별 노동력에 대한 착취도의 변화에 따라 변동하므로 일정하지 않다. 또한 이 노동력의 가격 역시 대단히 탄력적인 최저 한도만 정해져 있을 뿐 일정하지 않다. 따라서 그 교리가 의거하는 사실들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한편으로, 노동자들은 사회적 부를 (비노동자들을 위한) 향락 수단과 생산 수단으로 분할하는 과정에 개입할 권리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는 운수가 좋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부자들의 수입을 희생하여 이른바 노동 기금을 확대할 수 있다. 노동 기금의 자본주의적 한계를 그것의 성질에 따른 사회적 한계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무의미한 동어 반복에 불과한지 포세트의 예는 명확히 보여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한 나라의 유동 자본은 그 나라의 노동 기금이다. 따라서 각 개별 노동자가 받는 평균 화폐 임금을 계산하려면, 이 자본을 노동자의 수로 나누기만 하면 된다.’

 

먼저 실제로 지급된 모든 개별 임금액을 합산하고, 그 합계가 신과 자연의 은총으로 허락된 노동 기금의 총가치라고 주장하며, 최종적으로, 이 총액을 노동자 수로 나누어 개별 노동자에게 평균적으로 지급될 수 있는 금액을 재차 산출한다. 이것은 매우 교활한 수법이지만, 포세트는 서슴없이 논지를 계속한다.

 

영국에서 매년 저축되는 전체 부는 두 부분, 곧 공업 유지를 위한 자본과 외국으로 수출되는 부분으로 나뉘며, 이 나라에서 저축되는 부 중 극히 일부만이 우리 자신의 공업에 투자될 뿐이다.’

 

결과적으로, 영국 노동자들로부터 등가물의 지급 없이 착복되는 매년 증가하는 잉여 생산물의 대부분은 영국이 아닌 외국에서 자본으로 활용된다. 이와 같이 수출된 추가 자본과 더불어, 신과 벤담이 발명한 노동 기금의 일부 역시 외국으로 유출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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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자본의 축적 과정

 

23장. 단순 재생산

 

생산 과정의 사회적 형태와 관계없이, 생산 연속적인 흐름이며 주기적으로 동일한 국면들을 끊임없이 관통한다. 사회가 소비를 중단할 수 없듯, 생산 역시 중단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사회적 생산 과정을 연속된 전체, 곧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흐름으로 고찰할 때, 이는 동시에 재생산 과정이다.

 

생산의 조건은 곧 재생산의 조건이다. 어떤 사회든 생산물의 일정 부분을 지속적으로 생산 수단이나 새로운 생산 요소로 재전환하지 않고서는 생산을 지속할 수 없다. 다른 사정의 변화가 없다면, 사회가 자기 부를 기존 규모로 유지하거나 재생산하기 위해 연간 소비된 생산 수단(노동 수단, 원료, 보조 재료)은 같은 양의 신품으로 보충되어야 한다. 이에 해당하는 양은 연간 생산량에서 분리되어 다시 생산 과정으로 투입된다. 따라서 연간 생산물의 특정량은 생산 자체를 위한 것이다. 처음부터 생산적 소비로 예정된 이 부분은 생산물 성질상 개인적 소비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은 현물 형태로 존재한다.

 

생산이 자본주의적 형태를 취하면, 재생산 또한 같은 형태를 취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서 노동 과정이 가치 증식 과정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듯, 재생산 역시 투하된 가치를 자본, 곧 가치 증식하는 가치로 재생산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이가 자본가라는 경제적 임무를 맡는 것은 오직 그가 가진 화폐가 끊임없이 자본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00원의 화폐액이 금년에 자본으로 전환되어 20원의 잉여 가치를 생산했다면, 이는 내년에도, 그 후년에도 동일한 활동을 반복해야 한다. 자본 가치의 주기적 증가분이거나 과정 진행 중인 자본의 주기적 열매인 잉여 가치는 자본에서 생기는 수입의 형태를 취한다. 이 수입이 자본가에게 소비 재원으로만 이용되어 손에 들어오는 대로 주기적으로 소비된다면, 다른 조건이 같은 경우 단순 재생산이 일어난다. 단순 재생산은 이전과 같은 규모에서 생산 과정이 반복되는 것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단순한 반복성 또는 연속성은 생산 과정에 새로운 특징을 부여하거나, 고립된 과정인 듯 보이던 외관상의 일부 특징을 소멸시킨다.

 

일정한 기간의 노동력 구매는 생산 과정에서 준비 행위이며, 이는 노동력을 구매한 기간, 곧 일정한 생산 기간(: 한 주나 한 달)이 지나면 끊임없이 갱신된다. 그러나 노동자는 노동력을 지출해 노동력 가치와 잉여 가치를 상품 형태로 실현한 뒤에야 임금을 지급받는다. 따라서 노동자는 잉여 가치(일단 자본가의 개인적 소비 재원으로 간주)뿐 아니라 가변 자본(노동자 임금 재원)까지도, 그것이 임금 형태로 자신에게 돌아오기 전에 생산하고 있다. 그는 그 가변 자본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동안에만 고용된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노동자의 임금을 생산물 자체의 한 몫으로 보는 경제학자들의 공식(잉여 가치/생산물 가치)이 도출된다. 노동자에게 임금 형태로 되돌아오는 것은 그가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생산물의 일부이다. 자본가는 이 상품 가치를 화폐로 지급하지만, 이 화폐는 노동자 노동 생산물의 전환된 모습에 불과하다. 노동자가 생산 수단의 일부를 생산물로 전환하는 동안, 그의 이전 생산물 일부는 화폐로 전환된다. , 노동자의 이번 주 또는 금년 노동력에 대한 지급은 그의 지난 주 또는 작년의 노동인 셈이다.

 

화폐 형태 때문에 생기는 이러한 환상은, 개별 자본가와 노동자 대신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을 전체적으로 고찰하면 곧 사라진다. 자본가 계급은 노동자 계급이 생산하고 자신들이 취득하는 생산물의 일정 부분에 대한 청구서를 화폐 형태로 끊임없이 노동자 계급에게 제공한다.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은 이 청구서를 끊임없이 자본가 계급에게 되돌려 주고, 그 대가로 자신들의 생산물 중 자기 몫으로 되는 부분을 받는다. 거래의 이러한 진정한 성격은 생산물의 상품 형태와 상품의 화폐 형태로부터 은폐되고 있다.

 

가변 자본은 노동자가 자신의 유지 및 재생산을 위해 필요로 하며, 어떤 사회적 생산 체제에서든 항상 생산하고 재생산해야만 하는 생활 수단 재원, 곧 노동 기금이 취하는 특수한 역사적 현상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 기금이 화폐(노동의 대가) 형태로 끊임없이 노동자의 수중으로 유입되는 것은, 노동자 자신의 생산물이 자본의 형태로 끊임없이 그로부터 이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 기금의 현상 형태는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것이 노동자 자신의 대상화된 노동이라는 근본 사실을 전혀 바꾸지 않는다.

 

자기 영주에게 강제로 부역하는 농민을 보자. 그는 자신의 생산 수단으로 자기 경작지에서 예를 들어, 1주일에 3일간 일한다. 나머지 3일은 영주의 토지에서 부역 노동을 한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노동 기금을 재생산하지만, 이 노동 기금은 노동에 대한 대가로 타인이 제공하는 화폐적 지불 형태를 취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영주를 위한 지불받지 않는 강제 노동도 결코 자발적인 지불받는 노동이라는 성격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영주가 어느 날 농민의 경지, 역축, 종자, 곧 생산 수단을 빼앗는다면, 농민은 자신의 노동력을 영주에게 판매할 수밖에 없게 된다. 기타 조건이 같다면, 그는 여전히 1주에 6일간, 곧 자신을 위해 3일간, 그리고 이제 임금을 지불하는 자본가로 변한 영주를 위해 3일간 노동하게 된다. 종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는 생산 수단을 생산 수단으로 소비하며 그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한다. 생산물의 일정한 부분은 여전히 재생산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부역 노동이 임금 노동의 형태로 변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농민 자신으로부터 여전히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노동 기금은 영주가 임금 형태로 농민에게 지급하는 자본 형태를 취하게 된다. (현상 형태와 그 속의 실체를 구별하지 못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는 오늘날에도 노동 기금이 지구상에서 예외적으로만 자본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을 그 끊임없는 갱신의 흐름 속에서 고찰하는 순간, 가변 자본이 자본가 자신의 재원에서 투하되는 가치라는 성격은 상실된다. 물론 이 과정은 어떤 종류의 시초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우리의 지금까지의 관점에서 볼 때, 자본가는 옛날 타인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진 어떤 형태의 시초 축적(본원적 축적)으로부터 화폐를 소유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노동력의 구매자로 시장에 나타날 수 있었다는 것이 개연성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찌 되었든,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의 단순한 연속, 곧 단순 재생산은 가변 자본뿐 아니라 총자본에 대한 관념까지도 뚜렷이 변화시킨다.

 

자본 1,000원의 사용으로부터 매년 200원의 잉여 가치가 생산되고, 이 잉여 가치가 매년 소비된다고 가정하자. 5년 동안 소비된 잉여 가치액은 200 × 5, 곧 최초 투하된 1,000원과 같아진다. 연간 잉여 가치의 일부(예를 들어 절반)만 소비된다면, 10년 뒤에는 100 × 10 = 1,000원으로 동일한 결과가 얻어진다. 일반 공식은, 투하된 자본 가치를 매년 소비되는 잉여 가치로 나누면, 최초 투하된 자본이 자본가로부터 소비되어 없어지는 데 걸리는 연수(또는 재생산 기간의 수)가 나온다. 자본가가 타인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의 생산물(잉여 가치)만을 소비하고, 최초의 자본 가치에는 손대지 않는다고 생각하더라도, 그의 생각은 이 사실을 조금도 변경시킬 수 없다. 일정한 연수가 경과하면, 그가 소유한 자본 가치는 그 동일한 연수 동안 대가 없이 취득한 잉여 가치액과 같아지며, 그가 소비한 가치 총액은 최초의 자본 가치와 같게 된다. 그의 수중에 있는 자본이 그 크기가 변하지 않았고, 이 자본의 일부(건물, 기계 등)가 사업 착수 당시에 이미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자본의 가치이지 물질적 구성 부분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전체 재산 가치와 같은 액수의 채무를 지면서 그 재산을 모두 소비해 버린다면, 그의 전체 재산은 그의 채무 총액을 나타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가가 자신의 최초 자본과 동일한 가치를 소비했다면,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자본의 가치는 그가 무상으로 취득한 잉여 가치 총액만을 대표할 따름이며, 거기에는 그의 최초 자본의 가치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축적을 완전히 무시하더라도, 생산 과정의 단순한 연속(단순 재생산)은 조만간 필연적으로 모든 자본을 축적된 자본, 곧 자본으로 된 잉여 가치로 전환시킨다. 그 자본이 (생산 과정에 투입될 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개인 재산이었고, 스스로 노동해서 번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는 조만간 어떤 등가도 없이 취득한 가치, 곧 타인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이 대상화된 것(화폐 형태든 다른 형태든)이 된다.

 

4-6장에서 보았듯이, 화폐를 자본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상품의 생산과 유통 그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곧 한편에는 가치 또는 화폐의 소유자가, 다른 한편에는 가치를 생산하는 실체의 소유자(노동력만의 소유자)가 서로 구매자와 판매자로 마주하는 것이 필요했다. 따라서 노동의 생산물과 노동 그 자체 사이의 분리, 객체적 노동 조건과 주체적 노동력 사이의 분리가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의 현실적 토대이자 출발점이었다. 최초에는 출발점에 불과했던 것이, 과정의 단순한 연속(곧 단순 재생산)으로부터 자본주의적 생산의 특징적인 결과, 끊임없이 갱신되고 영구화되는 결과로 된다. 한편으로, 생산 과정은 물질적 부를 자본으로, 그리고 자본가를 위한 가치 증식 수단과 향락 수단으로 끊임없이 전환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는 생산 과정에 들어갈 때와 언제나 같은 모습, 곧 부의 인적 원천이기는 하나 이 부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 모든 수단을 빼앗긴 모습으로 그 과정에서 나온다.

 

노동자가 생산 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자신의 노동이 노동력의 판매로부터 자신에게서 소외되고 자본가에게 취득되어 자본에 합체되었기 때문에, 그의 노동은 생산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타인의 생산물에 대상화된다. 생산 과정은 또한 자본가가 노동력을 소비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생산물은 끊임없이 상품으로 전환될 뿐 아니라 자본으로, 곧 노동자의 가치 생산력을 빨아먹는 가치로, 인간을 실제로 구매하는 생활 수단으로, 그리고 생산자를 사용하는 생산 수단으로 전환된다. 결국 노동자 자신은 객체적인 부를 자본(곧 자기를 지배하며 착취하는 외부의 힘)의 형태로 끊임없이 생산하며, 자본가는 노동력을 부의 주체적 원천의 특수한 형태(노동자의 신체 속에 있을 뿐이며, 자신을 대상화하고 실현할 모든 수단에서 분리되어 있는 추상적인 원천)로 끊임없이 생산한다. 간단히 말해, 자본가는 노동자를 임금 노동자로 생산한다. 노동자의 이러한 끊임없는 재생산 또는 영구화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필수 조건이다.

 

노동자는 두 가지 방법으로 소비한다.

 

1. 생산하는 동안, 그는 자기 노동으로부터 생산 수단을 소비하여, 그것을 투하 자본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 생산물로 전환시킨다. 이것이 그의 생산적 소비이며, 동시에 그의 노동력을 구매한 자본가가 노동력을 소비하는 것이다.

 

2. 노동자는 자기 노동력의 대가로 지급 받은 화폐를 생활 수단의 구매에 지출한다. 이것이 그의 개인적 소비다.

 

따라서 노동자의 생산적 소비와 개인적 소비는 완전히 분리된다. 전자의 과정에서 그는 자본의 동력으로 기능하며 자본가에게 속한다. 그러나 후자의 과정에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속하며 생산 과정 밖에서 생활상의 기능을 수행한다. 생산적 소비의 결과는 자본가의 생존이고, 개인적 소비의 결과는 노동자 자신의 생존이다.

 

노동 고찰할 때, 노동자가 자신의 개인적 소비를 생산 과정의 단순한 부수적 요소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사례(: 작업 중 식사)가 빈번하게 드러난다. 이때 노동자는 노동력을 활동 형태로 유지하고자 스스로 생활 수단을 공급하며, 이는 증기 기관에 석탄과 물을, 물레 방아에 기름을 공급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결과적으로, 노동자의 소비 수단은 생산 수단의 소비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그의 개인적 소비는 곧 직접적인 생산적 소비이다. 다만,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의 본질과는 무관한 악습인 양 표면적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개별 자본가나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을, 그리고 고립된 과정이 아닌 완전히 발달한 자본주의적 생산을 그 실제 사회적 규모에서 고찰하면, 사태의 면모는 달라진다. 자본가는 자기 자본의 일부를 노동력으로 전환하면서 총자본의 가치를 증식시킨다. 그는 하나의 돌로 두 마리의 새를 잡는다. 그는 노동자로부터 받는 것뿐 아니라 노동자에게 주는 것으로부터도 이익을 본다. 노동력과 교환으로 지출된 자본은 생활 수단으로 전환되고, 이것의 소비로부터 현존 노동자들의 근육, 신경, 골격, 뇌수가 재생산되며 새로운 노동자들이 탄생한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범위의 개인적 소비에 관해 말한다면, 노동자 계급의 개인적 소비는 노동력과 교환으로 자본이 넘겨준 생활 수단을 (자본이 다시 취득할 수 있는) 새로운 노동력으로 재전환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본가의 가장 필요 불가결한 생산 수단인 노동자 자신의 생산 및 재생산이다. 결국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는 작업장 내부에서 이루어지든 외부에서 이루어지든,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의 한 요소를 이룬다. 이는 기계의 청소가 (기계가 돌아가든 쉬고 있든)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의 한 요소인 것과 같다.

 

노동자가 개인적 소비 행위를 자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한다고 해서 사태가 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하는 가축(역축)이 사료를 소비하는 것도, 역축이 그것을 즐긴다고 해서 생산 과정에 필요한 요소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노동자 계급의 유지와 재생산은 언제나 자본의 재생산에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이 조건의 충족을 자본가는 안심하고 노동자의 자기 유지 본능과 생식 본능에 맡길 수 있다. 자본가가 마음을 쓰는 것은 오직 노동자들의 개인적 소비를 필요한 최소 한도로 축소하는 것뿐이다. 이 점에서 자본가의 태도는 (노동자들에게 영양분이 적은 음식물 대신 영양분이 많은 음식물을 먹도록 강요하는) 남아메리카 광산주들의 거친 태도와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자본가와 그의 이론적 대변자인 경제학자들은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 중 노동자 계급의 영구화에 필요한 부분, 따라서 자본가가 소비할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데 필요한 부분만을 생산적 소비로 본다. 그리고 노동자가 그 이상으로 자기 자신의 쾌락을 위해 소비하는 것은 모두 비생산적 소비로 간주한다. 자본의 축적이 자본으로부터 노동력 소비의 증대를 동반하지 않은 채, 단지 임금 인상과 소비 증대만을 일으킨다면, 추가 자본은 비생산적으로 소비되는 셈이다. 사실상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는 노동자 자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비생산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궁핍한 개인을 재생산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가와 국가에게는 생산적이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는 그들의 부를 생산하는 힘을 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자 계급은 심지어 직접적 노동 과정 밖에서까지도 (생명 없는 노동 도구와 마찬가지로) 자본의 부속물이다.

 

노동자들의 개인적 소비까지도 일정한 한계 안에서는 자본의 재생산 과정의 한 계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재생산 과정은 노동자들의 생산물을 끊임없이 노동자 쪽으로부터 그 반대되는 자본 쪽으로 옮겨 놓으면서, (의식을 가진 생산 도구인) 노동자들이 자본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못하도록 한다. 노동자들의 개인적 소비는, 한편으로는, 그들의 유지와 재생산을 보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활 수단을 끊임없이 없애버리면서 그들을 노동 시장에 계속 다시 나타나도록 만든다. 로마의 노예는 쇠사슬로 얽매여 있었지만, 임금 노동자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부터 그 소유자에게 얽매여 있다. 임금 노동자가 독립적 존재인 것처럼 보이는 겉모습은, 개별 고용주들이 끊임없이 바뀐다는 것과 계약이라는 법적 허구로부터 유지되고 있다.

 

과거에 자본은 자유로운 노동자에 대한 자기 소유권을 행사하기 위해 필요할 때마다 입법에 호소했다. 예를 들어, 1815년까지 영국 기계 제조 노동자들의 국외 이주는 무거운 형벌로 금지되었다. 노동자 계급의 재생산은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기술이 전달되고 축적되는 것을 포함한다. 자본가가 이러한 숙련 노동자 계급의 존재를 (자기가 소유하는) 생산 조건들 중 하나로 생각하고, 이 계급을 실제로 자기 가변 자본의 현실적 존재로 보는지는 공황으로 이 계급을 잃을 위험이 생길 때 특히 분명히 드러난다. 잘 알려져 있듯, 미국 남북 전쟁과 면화 기근으로 랭커셔 등지에서 많은 면공업 노동자들이 실직했다. 노동자 계급 자체뿐 아니라 다른 사회층에서도 영국 식민지나 미국으로 과잉노동자들을 이주시키기 위한 국가 원조나 국민 기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때(1863324)더 타임즈지는 맨체스터 상업 회의소의 전() 소장 에드먼드 포터의 편지를 게재했는데, 하원에서는 이를 적절하게도 공장주들의 선언이라 불렀다. 이 편지에서 노동력을 자본의 소유물로 보는 견해가 노골적으로 표명된 몇 개의 특징적인 구절을 인용한다.

 

(면공업 실업자)가 듣는 이야기는, 면공업 노동자들의 공급이 너무 많다는 것. 아마도 그 1/3은 감소되어야 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나머지 2/3에 대해서는 건전한 수요가 보장될 것이라는 것이다. 여론은 국외 이주를 주장하고 있다. 공장주는 자기의 노동 공급이 떨어져 나가는 데 대해 자발적으로 동의할 리 없다. 그는 아마도 이것이 불공평하며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공공의 자금이 국외 이주를 지원하는 데 쓰인다면, 공장주는 자기의 의견을 진술할, 그리고 아마도 항의할 권리를 가진다.’

 

포터는 면공업이 매우 유익하여, ‘의심할 바 없이 아일랜드와 농업 지대로부터 과잉 인구를 흡수했다고 지적한다. 면공업은 그 규모가 방대하여 1860년 영국 총 수출액의 5/13를 차지했으며, 수년 뒤에는 시장, 특히 인도 시장이 확대되고 파운드당 6펜스의 충분한 면화가 공급되면서 다시 확장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이 산업은 유지할 만한 값어치가 있는가. 기계(살아 있는 노동 기계를 두고 말한다)는 정비해 둘 만한 값어치가 있는가. 또 그것을 내버린다는 것은 최대의 어리석은 생각이 아닌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는 노동자들이 소유물이 아니며, 랭커셔와 공장주들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랭커셔와 공장주의 힘이다. 곧 그들은 한 세대 동안에는 대체될 수 없는 지적이고 훈련받은 힘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다른 기계들은 대부분 12개월 안에 유리하게 다른 것으로 대체되거나 심지어 개선까지 이루어진다. 노동력의 국외 이주가 장려되거나 허가(!)된다면 자본가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외침은 시종장 칼프를 생각나게 한다.) 핵심적인 노동자들을 떼어낸다면 고정 자본은 크게 감가할 것이며, 유동 자본이 불충분하게 공급되는 열등한 노동으로는 경쟁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들 자신이 국외 이주를 원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다. 그들 측에서 보면, 이것은 매우 당연하다. 노동력을 빼앗김으로부터, 또 그들의 임금 지출액을 가령 1/5, 5백만 파운드만큼 감소시키면서, 면공업을 축소시키고 압박한다면, 노동자들의 바로 위에 있는 계급인 소매상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지대는 어떻게 되며, 오두막집의 집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영향을 상층 계급에까지 추적해 보면, 소규모 차지 농업가들, 더 나은 층인 가옥 소유주들과 지주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가장 우수한 공장 노동자들을 수출해 이 나라의 가장 생산적인 자본과 부의 일부 가치를 파괴하면서 이 나라를 약화시키는 이 국외 이주 안보다 모든 계급들에게 더욱 자살적인 계획이 또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대출 기간이 2-3년이 되는 (500-600만 파운드의) 대출을 권고한다. 대출을 받는 사람들의 도덕적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종류의 노동을 강요하는 특별법의 규제 아래, 이 대출은 면공업 지방의 구빈국에 부설된 특별 위원회가 관리하면 될 것이다. 가장 우수한 노동자들을 잃어버리는 것, 그리고 (인력을 고갈시키는 대규모 이민과 한 지역 전체의 자본과 가치의 파괴로부터) 남아 있는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보다 토지 소유주들이나 공장주들에게 더 나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면공업 공장주들의 선발된 대변인인 포터는 두 가지 종류의 기계를 구별한다. 모두 자본가의 소유물이나, 하나는 공장 내부에 있는 죽은 기계이고, 다른 하나는 밤과 일요일에는 공장 밖 오두막집에 있는 살아 있는 기계다. 죽은 기계는 매일 마멸되고 감가될 뿐 아니라 끊임없는 기술 발전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낡아 수개월 내에 새로운 기계로 대체하는 것이 유리할 정도다. 이와는 반대로, 살아 있는 기계는 오래 갈수록, 수세대에 걸쳐 전달된 기술이 축적되는 데 비례하여 더욱더 개선된다.더 타임즈지는 이 대공장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포터는 면공장주들의 예외적이고 거대한 중요성에 감동한 나머지, 이 계급을 유지하고 그들의 사업을 영구화하기 위해 50만의 노동자를 그들의 의사와는 반대로 거대한 정신적 구빈원(면공업 지방)에 가두어 두려고 한다. “이 산업은 유지할 만한 값어치가 있는가라고 포터는 질문한다. “물론 있다. 모든 공정한 수단으로부터라고 우리는 대답한다. “기계는 정비해 둘 만한 값어치가 있는가.”라고 포터는 다시 질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답을 주저한다. 포터가 기계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 기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공장주의 절대적 소유로 보지 않는다고 단언하기 때문이다. 인간 기계를 정비해 두는 것, 곧 필요하게 될 때까지 그것을 가두어 두고 기름칠하는 것을 우리는 값어치가 있는 일이 아니며 또는 심지어 불가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기계는 아무리 기름칠을 하고 닦는다 하더라도 쓰지 않으면 녹이 슨다. 더욱이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인간 기계는 제멋대로 화를 내면서 우리 대도시 거리에서 마구 날뛸 수 있다. 포터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노동자들의 재생산에는 상당히 오랜 기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계 기술자와 자본가만 있으면 언제든지 우리는 검소하고 열성적이고 부지런한 사람들(노동자들)을 찾아낼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수보다 더 많은 공장주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포터는 1, 2, 아마 3년 안에 이 산업이 활기를 되찾을 것이라 말하고, 노동력의 국외 이주가 장려되거나 허가(!)되는 것을 막으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노동자들이 국외 이주를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50만 명의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 70만 명을 그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면공업 지방들에 가두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런 생각의 필연적인 결과로, 그는 또한 그들의 불만을 폭력으로 억누르고, 구호금을 나누어주면서 그들의 생존이 유지되도록 할 것을 제의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은 공장주들이 다시 그들을 필요로 하는 날이 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 노동력을 철, 석탄, 면화를 취급하듯이 취급하려는 사람들로부터 노동력을 구출하기 위해 이 나라의 위대한 여론이 무엇인가를 해야 할 때가 왔다.’

 

더 타임즈지의 논설은 지성의 장난에 불과했다. 사실상 위대한 여론은 공장 노동자란 공장의 움직이는 부속물에 불과하다는 포터의 의견과 같았다. 노동자들의 국외 이주는 저지되었으며, 그들은 정신적 구빈원인 면공업 지방에 갇혔고, 여전히 랭커셔 면 공장주들의 을 이루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그 진행 과정 자체로부터 노동력과 노동 조건 사이의 분리를 재생산하며, 이로부터 노동자를 착취하기 위한 조건을 재생산하고 영구화한다. 이는 노동자로 하여금 생존을 위해 노동력을 팔도록 끊임없이 강요하고, 자본가로 하여금 부유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동력을 살 수 있게 한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상품 시장에서 구매자와 판매자로 마주하는 것은 이제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생산 과정 자체가 노동자를 자신의 노동력 판매자로 끊임없이 다시 시장에 내던지며, 노동자 자신의 생산물을 타인(자본가)이 그를 구매할 수 있는 수단으로 끊임없이 전환시킨다. 사실상 노동자는 자신을 자본가에게 팔기 전에 이미 자본에 속해 있다. 노동자의 경제적 예속은 자발적 자기 판매의 주기적 갱신, 고용주의 변경, 노동력의 시장 가격 변동 등으로 매개되거나 은폐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은 연결된 전체 과정, 곧 재생산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상품이나 잉여 가치뿐 아니라 자본 관계 자체, 한편으로는 자본가를, 다른 한편으로는 임금 노동자를 생산하고 재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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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임금의 국민적 차이

 

17장에서 우리는 노동력 가치의 절대적 크기 또는 (잉여 가치에 대비한) 상대적 크기의 변동을 일으킬 수 있는 다양한 조합들을 고찰했으며, 또한 노동력의 가격이 구매하는 생활 수단의 양은 이 가격의 변동과는 독립적으로, 또는 이 가격의 변동과는 다르게 운동할 수 있다는 점을 알았다.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노동력의 가치(또는 가격)를 단순히 임금이라는 통속적인 형태로 해석해 버리면, 거기에서 지적된 모든 법칙들은 임금 변동의 법칙으로 전환된다. 임금 변동을 연구할 때, 일련의 상이한 조합으로 등장하던 것이 각국의 임금 수준을 비교할 때는 한 묶음으로 동시에 존재하는 차이로 나타난다. 따라서 서로 다른 나라들의 임금을 비교할 때는 노동력 가치의 크기 변동을 규정하는 모든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 (자연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발달한) 주요 생활 필수품의 범위와 가격, 노동자의 육성비, 여성 노동과 아동 노동의 역할, 노동 생산성, 노동의 외연적 · 내포적 크기 등이 그것이다. 가장 피상적인 비교를 위해서도 먼저 각국의 동일한 산업의 하루 평균 임금을 같은 길이의 노동일에 대해서 환원할 필요가 있으며, 하루의 임금을 조정한 다음, 시간급을 성과급으로 환산해야 한다. 성과급만이 노동 생산성이나 노동 강도에 대한 척도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과급으로의 환산 과정에도 불구하고, 임금 수준의 비교는 여전히 피상적 고찰에 머무를 위험이 따른다. 성과급이 노동 강도와 생산성의 척도일 수는 있어도, 이는 단지 노동력 가치의 표현 형태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진정한 비교는 각국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가치, 곧 생활 수단의 양과 가격으로부터 형성되는 노동력 가치의 절대적 크기와, 이로부터 도출되는 잉여 가치율의 차이를 근본적으로 파악해야 비로소 완성된다. 결국, 임금의 외연적 차이는 각국 자본주의 발전 단계의 특수성을 나타내는 동시에, 노동 착취의 일반 법칙이 관철되는 방식을 드러내는 하나의 지표이다.

 

개별 국가에서는 평균 강도보다 낮은 노동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시간을 초과하여 가치 측정을 변경하지 못하며, 오직 국민적 평균을 초과하는 강도만이 이를 초래한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세계 시장에서는 조건이 달라진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국민적 평균 노동 강도가 세계 노동 전체의 평균 강도를 기준으로 하는 하나의 등급을 형성한다. 그 결과, 강도가 더 높은 국민 노동은 동일한 노동 시간 내에 더 큰 가치를 창출하며, 이는 더 많은 화폐량으로 표출된다. 더욱이, 가치 법칙은 세계적 적용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사정으로 인해 수정된다. , 세계 시장 경쟁이 해당 국민의 상품 판매 가격을 그 가치 수준으로 하락시키도록 강제하지 않는 한, 노동 생산성이 높은 국민 노동 또한 강도가 높은 노동으로 간주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할수록, 특정 국가의 국민적 노동 강도와 생산성은 세계적 수준 이상으로 높아진다. 그 결과, 상이한 국가에서 동일한 노동 시간에 산출된 동종 상품은 서로 다른 세계 가치를 가지며, 이는 상이한 가격, 곧 세계 가치 차이에 따른 화폐액으로 표현된다. 다시 말해, 국민적 노동 강도와 생산성이 더 높은 나라의 한 시간 노동은 낮은 나라의 그것에 비해 더 큰 세계 가치를 가지며, 그 생산물은 더 많은 세계 화폐와 교환된다.

 

개별 상품의 교환 여부는 불명확하다. 이로 인해, 화폐의 상대적 가치, 화폐가 구매할 수 있는 노동 시간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발전한 나라가 덜 발전한 나라보다 더 작다. 이는 명목 임금, 화폐로 표현된 노동력의 등가는 전자 경우가 후자보다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는 곧 실질 임금, 곧 노동자가 실제로 처분할 수 있는 생활 수단의 양까지 더 크다는 의미는 아니다. 상이한 국가 간 화폐 가치의 상대적 차이를 도외시하더라도, 하루 또는 주 임금과 같은 명목 임금은 발전국이 저발전국보다 높다. 그럼에도, 노동의 상대적 가격, 잉여 가치나 생산물 가치에 대비한 노동의 가격은 저발전국이 발전국보다 더 높은 현상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1833, 공장 조사 위원회 위원인 카우엘이 방적업을 정밀 조사한 후, 내린 결론과 일치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잉글랜드의 임금은 유럽 대륙에 비해,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더 높을지 모르지만, 공장주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더욱 낮다.’

 

[유어,공장 철학: 314]

 

영국 공장 감독관 레드그레이브의 18661031일자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 대륙 국가들의 노동은 영국에 비해 임금이 낮고, 노동일이 훨씬 길지만, 생산물 대비 가격은 오히려 영국보다 비싼 것으로 나타난다. 올덴부르크의 한 면방적 공장 영국인 경영자는 토요일을 포함하여 매일 아침 530분부터 저녁 8시까지 노동 시간이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영국인 감독관 감시 하의 생산량조차 영국 노동자의 10시간 생산량에 미치지 못하며, 독일인 감시관 하에서는 그 양이 훨씬 적다고 단언한다. 임금은 영국보다 50%까지도 훨씬 낮지만, 기계 설비 대비 노동자 수는 현저히 많아 일부 부문에서는 5:3 비율에 달한다.

 

레드그레이브는 또한 러시아 면방적 공장들에 대한 영국인 경영자의 상세 자료를 인용한다. 온갖 그릇된 행위가 만연한, 러시아에서는 영국 공장 제도의 유년기적 폐해가 전성기를 맞고 있으며, 현지 자본가가 공장 사업을 관리할 수 없어, 경영자들은 모두 영국인이다. 철야 작업 등 과도 노동에 보잘것없는 임금이 지급되지만, 러시아 제품은 외국 제품의 수입 금지로부터만 겨우 유지된다.

 

끝으로, 레드그레이브의 공장당 및 방적공 1인당 평균 방추 수에 대한 유럽 여러 나라 비교표는 비교의 의의를 지닌다. 이 수치는 수년 전 수집된 것이며, 이후, 영국 공장 규모와 노동자 1인당 방추 수는 증가했겠지만, 대륙 국가들에서도 대체로 같은 정도의 발전이 있었으리라는 가정 하에, 그 비교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

 

1공장당 평균 방추수 (단위: )

 

영국: 12,600

스위스: 8,000

오스트리아: 7,000

작센: 4,500

벨기에: 4,000

프랑스: 1,500

프러시아: 1,500

 

노동자 1인당 평균 방추수 (단위: )

 

프랑스: 14

러시아: 28

프러시아: 37

바이에른: 46

오스트리아: 49

벨기에: 50

작센: 50

독일의 작은 나라들: 55

스위스: 55

영국: 74

 

이 표에 대해 레드그레이브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 비교는 영국에 더욱 불리하다. 그 이유는, 영국에는 방적과 직조가 결합된 공장이 많아 직조공들이 표에서 제외되지 않았지만, 외국 공장은 주로 방적만을 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동일한 조건으로 비교한다면, 자신의 관할 구역에서 단 한 명의 노동자가 보조 노동자 2명을 데리고 2,200개의 방추를 가진 뮬 방적기를 조작하며, 매일 400마일 길이의 220파운드 방사를 생산하는 면방적 공장들을 수없이 제시할 수 있다.’

 

[공장 감독관 보고서, 18661030: 31-37 ]

 

동유럽과 아시아에서 철도 부설을 맡은 영국 회사들은 현지인과 함께 영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면서, 실무적 필요성에 따라 일급 지급에서 노동 강도의 국민적 차이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영국 회사는 전혀 손실을 입지 않았다. 그들의 경험이 입증하듯이, 임금 수준의 차이가 평균적 노동 강도의 차이와 대체로 일치할지라도, 노동의 상대적 가격, 생산물에 대비 노동 가격은 일반적으로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 노동 강도가 높으면 노동의 상대적 가격이 낮고, 노동 강도가 낮으면 노동의 상대적 가격이 높아진다.

 

캐리(미국의 보호무역론자)는 자신의 최초 경제학 저술인임금률에 관한 연구에서, 각국 임금 수준의 차이가 노동일 생산성의 정도에 정비례함을 증명하고, 이로부터, 임금이 일반적으로 노동 생산성에 비례하여 등락한다는 결론을 도출하려 한다. 그가 무비판적이고 피상적으로 통계 자료를 뒤섞지 않고, 자기 전제들을 증명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결론이 엉터리라는 점은 잉여 가치의 생산에 관한 우리의 분석 전체가 증명한다. 주목할 만하게도, 그는 현실이 자기 이론대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으며, 국가 간섭이 이 자연적 경제 관계를 왜곡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국민적 임금을 계산할 때, 임금 중 세금 형태로 국가 수중으로 들어가는 부분도, 노동자 자신이 받은 것이라고 가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캐리는 더 나아가, 국가 지출이 또한 자본주의 발전의 자연적 결과인지 아닌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그의 논리는 다음 부류의 사람에게 적합하다. , 먼저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를 자연과 이성의 영원한 법칙이라 선언하고, 이 법칙의 자유롭고 조화로운 작용은 국가 간섭으로부터만 저해된다고 단정한다, 그런 뒤, 세계 시장에 대한 영국의 사악한 영향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연 법칙에서 비롯되는 것 같지 않다) 때문에 국가 간섭, 곧 보호 무역 제도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의 논리다. 나아가, 캐리는 (현존하는 사회적 적대와 모순들이 정식화한) 리카도 등의 이론이 현실적 경제 운동의 산물이 아니며, 오히려 영국과 기타 국가의 자본주의적 생산이 낳은 현실적 적대 관계가 리카도 이론의 결과임을 발견한다. 그가 최종적으로 발견한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고유한 매력과 조화를 파괴하는 것이 결국 상업(또는 무역)이라는 점이다. 이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면, 그는 아마도 자본주의적 생산의 유일한 악이 자본 그 자체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다. 이처럼 놀라울 만큼 무비판적이고 가짜 학식을 가진 인물만이, 그의 보호무역주의적 이단에도 불구하고, 바스티아나 기타 모든 현대 자유무역주의적 낙관론자들의 조화론적 지혜의 은밀한 원천이 될 자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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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성과급

 

시간급이 노동력 가치(또는 가격)의 전환된 형태이듯, 성과급(개수 임금)은 시간급의 전환된 형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생산량 1단위당 임금 = [노동력의 하루 가치] / [평균적인 노동자의 하루 생산량] 성과급 제도는 자본가가 노동자에게서 구매하는 사용 가치가 노동력의 기능인 산 노동이 아니라 이미 생산물에 대상화된 노동인 것처럼 외양을 띤다. 나아가, 이 노동 가격은 시간급의 결정 공식 [노동력의 하루 가치] / [주어진 시간 수의 노동일]이 아닌, 오로지 생산자의 작업 능력으로부터 결정되는 것처럼 오인하게 한다.

 

이러한 겉모습을 진실로 확신하는 믿음은, 동일한 산업 부문 내에서 두 임금 형태가 동시에 병존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런던의 식자공들은 주로 성과급을 받으며 시간급은 예외적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방의 식자공들은 시간급이 보통이고, 성과급은 예외다. 마찬가지로, 런던 항구의 선대 목공들은 성과급을 받는 반면, 영국의 다른 모든 항구에서는 시간급을 받는다.’

 

런던의 동일한 마구(馬具) 제조 공장에서도, 같은 노동에 대해 프랑스인에게는 성과급이, 영국인에게는 시간급이 지급되는 경우가 흔하다. 성과급이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진정한 공장들조차도, 일부 특수한 작업은 기술적 이유로 성과급 계산에 부적합하여 시간급으로 지급된다. 따라서 임금 지급의 형태상의 차이는, 비록 한 형태가 다른 형태보다 자본주의적 생산 발전에 더 유리할지라도, 임금의 본질을 전혀 바꾸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보통 12시간 노동일 중, 6시간은 지불되고, 나머지 6시간은 지불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이 노동일의 가치 생산물은 6원이므로, 1시간 노동의 가치 생산물은 1/2원이다. 또한 평균적인 노동자가 12시간 동안 24개의 생산물을 만든다고 경험적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생산물은 개별 단위이든, 연속적 생산물의 계량된 부분이든 상관없다.) 이러한 조건에서 24개 생산물의 가치는, 불변 자본 부분을 제외하면 6원이며, 한 개의 가치는 1/4원이다. 노동자는 한 개당 1/8원을 받아, 12시간에 3원을 번다. 이는 시간급에서 노동자가 6시간은 자신을 위해, 6시간은 자본가를 위해 일하든, 또는 매시간 절반은 자신을 위해, 나머지 절반은 자본가를 위해 일하든 상관없는 것과 같다. 이 경우에도, 생산물 한 개당 절반은 지불되고, 절반은 지불되지 않는다고 말하든, 또는 12개의 가격은 노동력의 가치만을 대체하고, 나머지 12개의 가격에는 잉여 가치가 체화되어 있다고 말하든 본질적 차이는 없다.

 

성과급 형태는 시간급 형태와 마찬가지로 불합리하다. 우리의 예시를 보면, 상품 두 개는 1시간 노동의 생산물이며, 소비된 생산 수단 가치를 제외하면 1/2원의 가치를 갖는다. 하지만 노동자는 그 대가로 1/4원만을 받는다. 성과급은 사실상 어떤 가치 관계도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상품 한 개의 가치를 그 속에 체현된 노동 시간으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노동자가 수행한 노동을 그가 생산한 개수로 측정한다는 점이다. 시간급에서 노동은 직접적인 지속 시간으로 측정되지만, 성과급에서는 생산물의 양(일정한 지속 시간의 노동이 응결된 형태)으로 측정된다. 결국 노동 시간 자체의 가격은 하루 노동의 가치 = 노동력의 하루 가치라는 방정식으로부터 결정된다. 그러므로 성과급은 시간급의 변형된 형태에 불과하다. 성과급의 특징을 자세히 고찰하면, 노동의 질은 제품 자체로 통제된다. 노동자가 각 제품에 대해 완전한 보수를 받기 위해서는 해당 제품이 평균적 품질을 충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는 성과급이 자본가에게 임금 삭감과 속임수를 위한 가장 풍부한 원천이 되게 한다.

 

성과급은 자본가들에게 노동 강도를 측정할 가장 확실한 척도를 제공한다. 경험으로부터 고정되며 자본가가 미리 정한 일정한 양의 상품에 체현된 노동 시간만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으로 인정되며, 그만큼만 지급된다. 예를 들어, 런던의 비교적 큰 재봉 공장에서는 한 개의 조끼 같은 특정 제품을 한 시간’, ‘반 시간등으로 부르며, 한 시간1/2원으로 계산된다. 경험적으로 한 시간의 평균적인 생산물 개수가 결정된다. 새로운 유행 상품이나 수선 작업 등의 경우에는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에 특수 작업에 해당하는 시간 분쟁이 발생하지만, 이 또한 결국 경험으로부터 결정된다. 런던의 가구 공장 등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노동자가 평균적인 작업 능력을 갖추지 못해 하루에 일정한 최소 한도 제품을 제공하지 못하면 해고된다. 여기서는 노동의 질과 강도가 임금 형태 자체로 통제되므로, 대부분의 경우, 노동에 대한 감독이 필요 없게 된다. 결과적으로, 성과급은 이전에 서술된 근대적 가내 노동의 토대를 이루며, 나아가, 착취와 억압의 계급 체계의 토대가 된다. 이 체계에는 두 가지 기본 형태가 나타난다.

 

1. 성과급은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 사이에 기생충이 개입하는 일을 용이하게 하여 노동의 하청을 발생시킨다. 이 중개인(기생충)의 이득은 자본가가 지불하는 노동 가격과 그가 실제로 노동자에게 넘겨주는 부분 사이의 차액에서 전적으로 비롯된다. 영국에서는 이 제도를 그 특색을 살려 하청 제도(고한 제도)’라고 부른다.

 

2. 성과급은 자본가로 하여금 두목 노동자(공장제 수공업에서는 작업 조장, 광산에서는 채탄부, 공장에서는 실제 기계 취급 노동자 등)와 개당 얼마라는 계약을 체결하게 만든다. 이 가격으로, 두목 노동자는 자신의 보조 노동자들을 모집하고, 그들에게 임금을 지급한다. 결국 자본으로부터 노동자의 착취가, 여기에서는 노동자로부터 노동자의 착취로 실현된다.

 

성과급이 실시될 때, 노동자가 노동력을 최대한 집약적으로 발휘하는 것이 개인적 이익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자본가로 하여금 노동의 표준 강도를 더욱 쉽게 올릴 수 있게 만든다. 더욱이 노동일 연장 역시 노동자의 개인적 이익이 된다. 그로부터 일급 또는 주급이 증대하기 때문이다. 다만, 노동일의 연장은 성과급의 수준(단위당 지급액)이 불변인 경우조차도 노동 가격의 저하를 필연적으로 내포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는 시간급 고찰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저항을 일으킨다.

 

시간급의 경우, 예외를 제외하면 같은 종류의 작업에는 같은 임금이 지급된다. 그러나 성과급의 경우, 비록 1시간 노동의 가격이 생산물의 일정한 양으로 측정될지라도, 일급 또는 주급은 노동자들의 개인적 차이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노동자는 일정한 시간에 최소 한도를 생산하고, 다른 노동자는 평균량을, 또 다른 노동자는 평균량 이상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의 실제 소득은 개별 노동자들의 숙련, 체력, 정력, 지구력 등에 따라 큰 차이가 발생한다. 물론 이것이 자본과 임금 노동 사이의 일반적 관계를 바꾸지는 않는다.

 

1. 작업장 전체 보면, 이러한 개인적 차이는 상쇄된다. 그 결과, 전체 작업장은 일정한 노동 시간에 평균량의 생산물을 공급하며, 지급된 총임금은 해당 생산 부문의 평균 임금이 된다.

 

2. 임금과 잉여 가치의 비율은 변하지 않는다. 개별 노동자가 개인적으로 제공하는 잉여 가치량이 그의 개인적 임금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과급은 개성에 더 큰 활동의 여지를 제공하면서,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개성, 나아가, 그들의 자유감, 독립심, 자제심 등을 발달시킨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 상호 간에 경쟁심을 발달시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성과급은 개인적 임금을 평균 수준 이상으로 높이는 동시에, 이 평균 수준 자체를 저하시키는 경향을 가진다. 다만, 일정한 성과급 수준이 오랜 전통으로 고정되어 저하시키기 매우 곤란한 예외적인 경우에는, 고용주들은 때때로 성과급을 강제로 시간급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예를 들어, 1860년 코벤트리 리본 제조공들의 대파업이 바로 이 문제로 인해 발생했다. 결론적으로, 성과급은 앞에서 서술된 시간급 제도의 주요 버팀목들 중 하나다.

 

지금까지의 논의로, 성과급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임금 형태라는 것은 분명해진다. 성과급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시간급과 함께 14세기 프랑스와 영국의 노동 법령에 공식 규정), 이것이 폭넓은 부문에 처음 적용된 것은 진정한 공장제 수공업 시대의 일이다. 대공업의 격변기, 특히 1797년부터 1815년 사이에는 성과급이 노동일 연장과 임금 인하를 위한 지렛대로 이용되었다. 이 시기 임금 변동에 관한 매우 중요한 자료는 두 개의 정부 문서,곡물법 관계의 청원에 대한 특별조사위원회의 보고와 증언(1858) 곡물과 곡물법에 관한 보고(1814)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반()자코뱅 전쟁 개시 이래 노동 가격이 끊임없이 저하되었다는 문서상의 증거를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방적업에서는 성과급 수준이 크게 하락하여 노동일이 대폭 연장되었음에도, 하루 임금은 도리어 이전보다 낮아진 정도였다.

 

직조공의 실제 소득은 이전보다 훨씬 적다. 과거에는 직조공들 사이에서 노동자 소득 차이가 상당히 컸으나, 이제 그 차이는 거의 사라졌다. 실제로 숙련 노동과 보통 노동 사이의 임금 격차는 과거 어느 시기보다 훨씬 적다.’

 

성과급으로 인한 노동 강도 강화와 노동 시간 증가가 농촌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거의 이득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은 지주 및 차지 농업가 편의 저술에서 인용한 다음 구절에서도 드러난다.

 

농사일 대부분은 일급 또는 성과급제로 고용된 사람들이 수행한다. 이들의 주급은 대략 12실링이다. 성과급제로 일하는 노동자는 더 큰 노동 자극으로 인해 주급 노동자보다 1실링 또는 2실링 더 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총소득을 계산하면, 이렇게 더 번 금액보다 연중 일이 없어 생기는 손실이 훨씬 크다. 나아가, 일반적으로 이 (주급) 노동자들의 임금은 교구의 구호 없이 2명의 아동을 포함한 가족을 부양할 수도 있도록 필요한 생활 수단의 가격과 일정한 비례 관계를 가지도록 설정되어 있다.’

 

당시 맬더스는 의회로부터 공표된 사실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는 성과급의 관행이 폭넓게 보급되는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을 고백한다. 하루에 12-14시간 또는 그보다 더 긴 시간의 고된 노동은 사실 어떤 사람에게나 지나친 것이다.’

 

공장법의 적용을 받는 작업장에서는 자본이 노동일을 단지 내포적으로만 확대할 수 있기 때문에, 성과급이 통례로 자리 잡았다.

 

노동 생산성의 변동에 따라 동일한 생산물량이 표현하는 노동 시간도 달라지므로, 성과급의 수준 역시 달라진다. 성과급이 (생산물 한 개당 생산에 소요되는) 노동 시간의 가격 표현이기 때문이다. 앞선 예시에서, 24개의 생산물이 12시간에 생산되었고, 12시간 가치 생산물은 6, 노동력의 하루 가치는 3, 1시간 노동 가격은 1/4, 한 개당 임금은 1/8원이었다. 생산물 한 개 속에는 1/2시간의 노동이 체화되어 있었다. 이제 노동 생산성이 2배로 증가하여 동일한 노동일에 24개가 아닌 48개의 생산물이 제공되고, 다른 모든 조건은 불변이라면, 성과급의 수준은 1/8원에서 1/16원으로 하락한다. 이제 한 개의 생산물이 1/2시간이 아닌 단지 1/4시간의 노동만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계산: 1/8× 24= 3원이고, 1/16 × 48= 3원이다.)

 

다시 말해, 성과급의 수준은 동일한 시간에 생산되는 개수가 증가하는 것과 같은 비율로, 따라서 같은 한 개에 드는 노동 시간이 감소하는 것과 같은 비율로 저하한다. 이러한 성과급 수준 변동은, 그 자체로는 순전히 명목적이지만,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끊임없는 투쟁을 야기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본가가 노동 가격을 실제로 인하하기 위한 구실로 성과급 수준을 인하하기 때문이다. 노동 생산성 증대가 노동 강도의 증대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성과급의 겉모습(노동력이 아닌 생산물에 대해 지급받는다는 외양)을 진실이라 믿고, 상품 판매 가격 인하가 수반되지 않는 임금 인하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원료 가격과 제품 가격을 주의 깊게 파악하여, 고용주들의 이윤을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다.’

 

자본이 이러한 저항을 임금 노동의 성질에 대한 매우 그릇된 생각이라고 배격하는 일은 당연하다. 자본은 산업의 발전에 과세하려는 이런 건방진 시도에 대해 분노를 표하며, 노동 생산성은 노동자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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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시간급

 

임금에서 두 가지 기본 형태는 시간 임금과 성과 임금이다. 시간 임금은 노동의 지속 시간을, 성과 임금은 생산된 제품의 수량을 임금의 크기를 결정하는 직접적인 기준으로 삼는다. 이 방식들은 노동력의 가치를 보상하는 가장 기본적 형태이며, 서로 보완적으로 사용되거나, 특수한 조건에 따라 상호 번형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일급은 곧 노동력의 일일 차기를 노동일의 전형적 길이로 환산한 형태이다. 따라서 시간 임금은 그 자체가 하루 노동력의 가치를 노동 시간으로 나눈 몫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가는 이 일급을 불변으로 두고, 노동 시간을 연장하는 데서 직접적 이익을 얻으며, 이는 시간 임금을 하락시켜 연장된 노동 시간에 상응하는 잉여 가치의 증대를 실현하는 가장 명료한 수단이다.

 

시간 임금의 형태는 노동력의 가치를 노동 시간의 길이와 독립된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 노동일의 연장은 노동력의 시간당 가격, 곧 시간급을 감소시키지 않는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그러나 노동일이 길어질수록, 노동자는 더 적은 임금으로 더 많은 노동 시간을 제공하게 되며, 이는 하루 일당이 불변일 때도, 시간급은 하락함을 의미한다. 결국, 시간 임금은 노동일의 길이에 대한 자본가의 무제한적 착취 여지를 은폐하는 기본 형태이다. 시간 임금이 노동일의 길이와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형태는, 노동자가 일정한 노동량에 대해 실제 받는 노동의 가격을 모호하게 한다. 노동자는 노동일의 길이에 관계없이 동일한 일급을 받더라도, 이 일급이 실제로는 노동력의 가치를 노동 시간으로 나눈 몫, 곧 시간당 노동 가격을 나타낸다는 점이 중요하다. 자본가는 이 측정 단위를 활용하여, 노동력의 가치 자체를 변경하지 않으면서도 노동일의 연장으로부터 잉여 가치를 증대시킨다. 따라서 시간 임금의 분석은 명목 임금과 실질 임금, 그리고 임금 총액과 노동 가격을 구별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분석은 명목 임금이 불변일지라도, 실질적인 노동 가격은 하락할 수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노동일이 연장될 경우, 일급은 그대로 유지되더라도, 시간당 노동 가격은 분모인 노동 시간의 증가로 인해 필연적으로 감소한다. 반대로, 노동의 내포적 또는 외연적 크기가 증대하면, 노동의 가격에는 변도이 없거나 하락하더라도, 일급은 오히려 상승할 수 있다. 이처럼 명목적인 일급 또는 주급의 움직임은 노동의 가격, 곧 노동력의 가치를 지불하는 실제 비율과는 독립적이거나 역행하는 현상을 보일 수 있으며, 이는 임금 지불 형태가 잉여 가치 창출을 은폐하는 기제로 작용함을 입증한다. 결론적으로, 일급이나 주급의 총액은 두 가지 변수로부터 결정된다.

 

1. 노동 가격 자체, 곧 노동력의 가치 변동이나 그로부터 편차에 따른 시간당 지불액이다.

 

2. 노동의 가격이 고정되어 있다면, 실제로 노동자가 제공한 하루 또는 일주일의 노동량에 의존한다.

 

결국, 임금의 현상 형태인 일급은 노동 가격과 노동 시간이라는 두 가지 요소의 결합된 결과이며, 이 둘 중 어느 하나의 변화도 임금 총액의 변동을 초래한다.

 

시간 임금 방식은 노동일의 평균 길이에서 노동력의 가치를 보상하고자 필요한 필수 노동 시간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노동자에게 불완전 취업의 고통을 야기한다. 노동력의 하루 가치가 6시간의 노동 생산물로 정해지고, 시간당 노동 가격이 1/4원으로 계산되더라도, 노동자가 12시간 미만을 일하게 되면, 그는 노동력의 가치에 상응하는 임금을 벌지 못한다. , 그는 필수 노동 시간인 6시간의 가치 생산물(3)을 완전히 취득하지 못하게 되어, 노동의 과도 연장이 낳는 파괴적 결과와 더불어, 불완전 취업이 초래하는 생계 곤란의 또 다른 원인이 된다.

 

시간 임금이 정해지면 자본가는 일정한 일급이나 주급을 지급할 의무 없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노동자를 임의의 시간만큼만 고용하고 해당 시간만큼만 지불하게 된다. 이 경우, 본래 시간 임금의 측정 단위였던 [노동력의 하루 가치] / [평균 노동일의 시간 수]의 비율은 노동일의 표준이 사라지면서 그 의미를 상실한다. 이로 인해, 지불받는 노동과 지불받지 않는 노동 사이의 관계는 단절되며, 자본가는 노동자의 생존 유지에 필요한 노동 시간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잉여 노동을 착취할 수 있다.

 

자본가는 고용의 규칙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의 순간적 이익에 따라 혹독한 과도 노동과 상대적 · 절대적 작업 중단을 교대로 강요하며, ‘표준적인 노동 가격을 지급한다는 구실로 노동일의 무분별한 연장을 정당화한다. 따라서 런던의 건설 노동자들이 이러한 형태의 시간 임금 도입에 반대하여 봉기(1860)한 일은 노동일의 무제한적 착취를 막으려는 정당한 조치였다. 노동일의 법적 제한은 고용 감소 자체를 막지는 못하지만, 이러한 해로운 초과 노동 관행에 종지부를 찍는다.

 

일급이나 주급은 상승하더라도, 노동의 시간당 가격은 명목상 불변이거나 오히려 하락할 수 있으며, 이는 노동일이 관습적인 길이를 초과하여 연장될 때 발생한다. 분수 [노동력의 하루 가치] / [노동일]에서,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 시간의 증가에 비례하여 증가하나, 노동력 소모의 심화로 인해, 그 증가 속도는 노동 시간의 증가보다 더 빠르다. 그럼에도, 시간 임금이 지배하는 산업 부문에서는 노동일의 법적 제한이 없을 때, 10시간과 같은 특정 시점까지만을 표준 노동일로 간주하는 관습이 자생적으로 형성되었다. 이 표준 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은 추가 임금을 요구하는 근거가 되며, 이는 장시간 노동에 따른 노동력의 급격한 가치 상승에 대한 자연스러운 대응이다.

 

표준 한계를 넘어서는 노동 시간은 시간외 노동으로 간주되어, 흔히 그 크기가 미미할지라도 초과 임금이라는 더 나은 시간 임금을 받게 된다. 이 경우, 표준 노동일은 현실적 노동일의 한 부분으로만 존재하며, 현실적 노동일은 연간으로 볼 때, 표준 노동일보다 긴 경우가 빈번하다. 노동일의 연장에 따른 노동 가격의 증대는 영국 일부 산업 부문에서 노동자가 표준 시간 내의 낮은 임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초과 임금을 받기 위한 시간외 노동에 강제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노동일의 법적 제한은 이러한 기만적이고, 착취적인 특별 임금 관행을 근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장시간 노동이 일반적인 산업 부문일수록 임금 수준이 더 낮다는 사실은 널리 인정된다. 공장 감독관 레드그레이브의 20년간(1839-1859)의 비교 연구는 이를 입증하는데, 10시간 공장법의 적용을 받는 공장들에서는 임금이 상승한 반면, 하루 14시간에서 15시간 작업하는 공장들에서는 임금이 오히려 저하했다. 이는 노동일의 무제한적 연장이 노동력의 시간당 가격을 떨어뜨리고, 노동자에게 과도한 노동 시간을 강요하여 생계 유지를 위해 더 낮은 임금을 수용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적 착취 기제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노동의 가격이 낮을수록, 노동자는 비참한 수준의 평균 임금이라도 얻고자 더 큰 노동량을 투입해야 하며, 이는 곧 노동일의 연장을 의미한다. 이 조건에서 노동의 낮은 가격은 노동 시간을 연장시키는 직접적인 동기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 시간의 연장은 오히려 노동력의 소모를 심화시켜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결과적으로, 노동 가격을 더욱 하락시켜 일급이나 주급의 추가적인 저하를 초래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노동 가격은 [노동력의 하루 가치] / [주어진 시간 수의 노동일]로 결정되므로, 노동일의 연장은 그 자체로 노동 가격을 하락시킨다. 장기적으로, 자본가가 노동일을 연장할 수 있는 동일한 조건은 그가 증대된 노동 시간의 총 가격, 곧 일급이나 주급이 저하될 때까지 노동 가격을 낮출 수 있게 하며, 실제로 그렇게 실행된다.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발생하는데, 한 노동자가 1.5명 또는 2명분의 노동을 수행하면, 시장에서 노동력의 공급은 일정하더라도 노동의 공급은 증가한다. 이는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심화시켜 자본가로 하여금 노동 가격을 저하시킬 수 있게 만들고, 이 노동 가격의 저하는 다시 노동 시간을 더욱 연장하는 원인이 된다. 더 나아가, 이처럼 비정상적이고 지불받지 않는 노동량(사회적 평균을 초과하는 잉여 노동)을 임의로 이용할 수 있는 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본가 자신들 사이의 경쟁의 원천으로 된다.

 

상품 가격의 일부는 노동 가격으로 구성되지만, 지불되지 않는 노동(잉여 노동)의 가격은 상품 가격 계산에서 제외될 수 있으며, 자본가는 이를 구매자에게 일종의 선물로 제공한다. 이것이 경쟁이 촉발하는 첫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 경쟁은 노동일 연장으로 창출된 초과된 잉여 가치의 적어도 일부를 상품 판매 가격에서 제외하도록 만든다. 결과적으로, 초과적으로 낮아진 상품 판매 가격이 형성되는데, 이는 처음에는 간헐적으로 발생하다가 점차 고착화된다. 이 낮은 판매 가격은 이제 거꾸로 과도한 노동 시간에 대한 비참한 임금을 확립하는 토대가 된다. 경쟁의 역동성에 대한 상세 분석은 여기서 다루지 않으나, 이러한 운동의 존재를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잠시 자본가 자신의 논리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버밍엄 공장주들의 말은, 극심한 경쟁으로 인해 고용주로 수치스러운 행동을 감행할 수밖에 없으며, 그럼에도 수익은 증가하지 않고 오직 대중들만이 이득을 본다는 현실을 시사한다.’

 

이는 과도한 노동 시간으로부터 잉여 가치 창출이 상품 가격 인하를 초래하고, 결국 경쟁이라는 이름 아래 모두에게 불리한 조건을 만든다는 점을 명백히 한다. 이와 관련하여, 런던의 빵 제조업자 중 표준 가격을 고수하는 이들은, 헐값에 빵을 파는 경쟁자들을 의회 조사 위원회 앞에서 다음과 같이 고발한다.

 

헐값 판매자들은 첫째, 상품의 불량화로부터 대중을 기만하고, 둘째, 노동자들에게 12시간 임금을 지불하면서 18시간의 노동을 착취하면서 생존한다. 이는 지불받지 않는 노동을 기반으로 경쟁을 수행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빵 제조업자들 사이의 경쟁은 야간 노동의 폐지를 어렵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밀가루 가격 변동에 따른 생산비 이하의 헐값 판매자는 직공들로부터 더 많은 노동량을 짜내어 자신의 손실을 보상한다. 경쟁자가 18시간 또는 20시간을 착취한다면, 12시간 노동만을 시키는 판매자는 상품의 판매 가격에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이 과도 노동에 대한 정당한 지급을 요구할 수 있다면, 이러한 문제들은 해결될 것지만, 헐값 판매자에게 고용된 대다수의 노동자는 외국인이나 아동들로, 이들은 어떤 임금이든 수용할 수밖에 없는 취약한 처지에 놓여 있다.’

 

이러한 자본가의 탄식은 생산 관계의 피상적인 모습만이 그의 의식에 반영됨을 보여준다. 자본가는 표준적인 노동 가격조차도 이미 일정한 양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을 포함하고 있으며, 바로 이 잉여 노동이 표준적인 이윤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표준 노동일에 대해 일급을 완전히 지급했다고 여기기 때문에, 잉여 노동 시간이라는 범주 자체가 그에게는 부재하다. 다만, 일반적인 노동 가격에 알맞은 한계를 넘는 노동일의 연장, 곧 시간외 노동만이 그에게 의미를 갖는다. 그는 심지어 헐값으로 파는 경쟁자들에게 시간외 노동에 대한 추가 임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하면서도, 이 추가 임금 역시 보통의 노동 시간 가격과 마찬가지로 지불받지 않는 노동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12시간 노동일에서 1시간 가격이 1/4원이고, 시간외 노동 1시간의 가격이 1/3원이라고 할 때, 자본가는 첫 번째 경우, 1시간 노동 중 절반(1/2), 두 번째 경우에도 여전히 1/3을 무상으로 취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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