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잉여 가치가 자본으로 전환
24-1. 확대 재생산과 소유 법칙에서 자본주의적 취득 법칙으로의 전환
잉여 가치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연구했다면, 이제는 자본이 잉여 가치로부터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고찰한다. 잉여 가치를 자본으로 사용하는 것, 곧 잉여 가치를 자본으로 재전환하는 것이 바로 자본 축적이다. 이 과정을 먼저 개별 자본가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예를 들어, 어떤 방적업자가 10,000원의 자본을 투하하는데, 이 중 4/5(8,000원)는 면화나 기계 등 불변 자본으로, 나머지 1/5(2,000원)는 임금 등 가변 자본으로 사용했다고 가정한다. 이 투하로, 매년 12,000원의 가치를 지닌 240,000파운드의 실을 생산한다. 잉여 가치율이 100%이므로, 잉여 가치는 총생산물의 1/6을 차지하는 40,000파운드의 실, 곧 잉여 생산물에 포함되며, 이는 판매 시 2,000원의 가치를 실현한다. 2,000원은 화폐액 그 자체이므로, 겉으로 보아서는 그것이 잉여 가치인지 알 수 없다. 그 가치가 잉여 가치라는 사실은 그 가치가 소유자의 수중에 들어간 경로를 알기 때문일 뿐, 그 사실 자체가 가치나 화폐의 성질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새로 취득한 2,000원의 금액을 자본으로 전환하려면, 방적업자는 다른 조건이 불변일 경우, 이 중 4/5(1,600원)를 면화 등의 구입에, 그리고 1/5(400원)를 새로운 방적공 고용에 투하해야 한다. 이 추가 노동자는 방적업자로부터 지급받은 가치에 상응하는 생활 수단을 시장에서 확보하게 된다. 이렇게 전환된 2,000원의 새로운 자본은 방적 공장에서 작동하여 다시 400원의 잉여 가치를 창출한다.
자본 가치는 최초에 화폐 형태로 투하된다. 그러나 잉여 가치는 처음부터 총생산물의 일정 부분의 가치로 존재한다. 이 총생산물이 판매되어 화폐로 전환되면, 자본 가치는 다시 최초의 형태를 되찾으며 (잉여 가치 역시 상품 형태에서 화폐 형태로 전환됨), 이 시점부터 자본 가치와 잉여 가치는 모두 화폐액이 된다. 이들의 자본으로의 재전환은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자본가는 이 모든 화폐액을 상품(생산 수단과 노동력) 구매에 지출하며, 이는 자본가로 하여금 자신의 생산물 생산을 확대된 규모로 재개할 수 있도록 한다. 다만, 이러한 상품을 구매하려면 그것이 이미 시장에 존재해야 한다. 자신의 실이 유통하는 것은 (다른 자본가들이 각자의 상품을 시장에 내놓듯) 그 역시 자신의 연간 생산물을 시장에 내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상품들은 시장에 진입하기 전에 이미 연간 총생산물의 일부였으며, 이는 개별 자본들의 총액, 곧 사회적 총자본이 1년 동안 생산한 각종 상품의 총량이다.
시장의 모든 거래는 이 연간 총생산물의 개별 구성 부분들의 상호 교환을 실현시켜 그것들을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옮길 뿐, 연간 총생산물을 증가시키거나 생산된 상품의 성질을 변경시키지는 못한다. 따라서 연간 총생산물의 사용 방식은 그 유통이 아니라, 연간 총생산물 자체의 구성에 의존한다. 연간 생산물은 먼저 1년 동안 소비된 자본의 물적 구성 부분을 대체할 수 있는 모든 물건(사용 가치)을 제공해야 한다. 이것을 공제하고 남은 부분이 잉여 가치가 포함된 순생산물, 곧 잉여 생산물이다. 그렇다면 이 잉여 생산물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이것이 전적으로 자본가 계급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물건, 곧 그들의 소비재원에 속하는 물건들로만 이루어진다면, 잉여 가치는 남김없이 탕진된다. 이 경우, 오직 단순 재생산만이 진행된다.
축적을 위해서는 잉여 생산물의 일부를 자본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적 없이 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 과정에 사용될 수 있는 물건들, 곧 생산 수단과 노동자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물건들, 곧 생활 수단뿐이다. 따라서 연간 잉여 노동의 일부는 투하된 자본의 대체를 넘어서는 추가적 생산 수단과 추가적 생활 수단의 생산에 충당되어야 한다. 요컨대, 잉여 가치가 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잉여 생산물(이것의 가치가 잉여 가치임)이 새로운 자본의 물적 요소로 이미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구성 요소들이 실제로 자본으로 기능하려면 자본가 계급은 추가적 노동을 필요로 한다. 기존 노동자들의 착취를 외연적, 내포적으로 더는 증대시킬 수 없다면, 추가 노동력을 고용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기구는 이미 노동자 계급을 임금에 의존하는 계급으로 재생산하며, 이들의 평상시 임금은 계급 자체의 유지뿐 아니라 그 증가(차세대)까지 보장한다.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각종 연령의 추가 노동력이 매년 공급되므로, 자본은 단순히 이것을 연간 생산물에 이미 포함된 추가적 생산 수단과 결합시키기만 하면 된다. 이로부터, 잉여 가치의 자본으로 전환이 완성된다. 구체적으로 고찰하면, 자본의 축적은 누진적으로 증가하는 규모로 자본이 재생산된다. 단순 재생산의 순환은 그 형태를 바꾸어 시스몽디의 표현대로, 하나의 나사선으로 전환된다.
이제 우리의 예로 다시 돌아간다. 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는 식의 계보와 같다. 최초 자본 10,000원은 2,000원의 잉여 가치를 산출하고, 이 잉여 가치는 자본화된다. 2,000원의 새로운 자본은 다시 400원의 잉여 가치를 가져오며, 이 잉여 가치는 또다시 자본화되어 제2의 추가 자본으로 전환된다. 이것은 다시 80원의 새로운 잉여 가치를 낳는다는 식으로, 이 과정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는 잉여 가치 중 자본가 자신이 소비하는 부분은 무시한다. 또한 추가 자본이 최초 자본과 결합하는지, 또는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기능하는지, 축적된 추가 자본을 자본가가 직접 이용하는지 아니면 타인의 수중으로 넘어가는지 등의 문제 역시 지금은 고찰 대상이 아니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새로 형성된 자본과 함께 최초 자본도 자신의 재생산과 잉여 가치의 생산을 지속한다는 사실이며, 이는 축적된 모든 자본과 그것으로부터 형성된 추가 자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최초 자본 10,000원은 투하로부터 형성되었다. 그 소유자는 이 자본을 어떻게 회득했는가. 정치경제학의 대변자들은 한결같이 “자기 자신의 노동과 자기 선조들의 노동으로부터다.”라고 대답한다. 실제로 그들의 이러한 가정은 상품 생산의 법칙과 일치하는 유일한 가정으로 보인다. 추가 자본 2,000원에 관해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그 발생 과정은 아주 정확하게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자본화된 잉여 가치, 곧 잉여 가치가 자본으로 전환된 것이다. 여기에는 처음부터 남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에서 나오지 않는 가치라고는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추가 노동력이 결합되는 생산 수단도, 추가 노동력이 유지되기 위한 생활 수단도, 잉여 생산물, 곧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에게서 매년 빼앗은 공물의 구성 부분에 불과하다. 자본가 계급이 이 공물의 일부로 추가 노동력을 사들일 경우, 그것이 비록 완전한 가격으로부터고, 따라서 등가물과 등가물끼리의 교환일지라도, 이는 결국 (피정복장에게서 약탈한 화폐로 피정복자 자신의 상품을 구매하는) 정복자의 낡은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추가 자본이 자신을 낳은 동일한 노동자를 고용한다면, 이 노동자는 최초 자본을 계속 가치 증식시켜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이 바친 이전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의 생산물(추가 자본)에 대해서도 노동을 추가해야만 한다. 이것을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의 거래로 보더라도, 이전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으로 추가 노동자들이 고용된다 해도, 문제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 자본가는 추가 자본을 기계로 전환시켜, 이 기계가 추가 자본의 생산자를 거리로 내쫓고, 그 대신 몇 명의 아동을 고용할 수도 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노동자 계급은 금년의 자기 잉여 노동으로 다음 해에 추가 노동을 고용한 자본을 생산한다. 이것이 이른바 ‘자본으로 자본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제1의 추가 자본 2,000원의 축적은 (자본가의 ‘시초 노동’으로부터 자기 것이 된, 그리고 그로부터 투하된) 10,000원의 가치액을 전제한다. 반면, 제2의 추가 자본 400원은 오직 이전의 축적 2,000원만을 전제할 뿐이며, 이것이 낳은 잉여 가치가 자본으로 전환된 것이 바로 제2의 추가 자본 400원이다. 과거 지불받지 않은 노동의 소유가 이제는 끊임없이 증대되는 규모의 살아 있는 지불받지 않는 노동의 취득을 위한 유일한 조건이 된다. 자본가가 이미 축적한 것이 많을수록, 그만큼 그는 더 많이 축적할 수 있다. 제1의 추가 자본을 이루는 잉여 가치가, 최초 자본의 일부가 노동력을 구매한 결과이며, 이 구매가 상품 교환의 법칙에 순응하는 한, 그리고 법률적 관점에서 이 구매가 노동자 측에서는 자기 노동력에 대한, 화폐 또는 상품 소유자 측에서는 자기가 가진 가치에 대한 자유로운 처분권을 전제할 따름인 한, 또 제2, 제3 등의 추가 자본이 제1의 추가 자본의 단순한 결과이며, 최초 관계의 결과인 한, 더욱이 각 개별 거래가 상품 교환의 법칙에 따라 진행되어, 자본가는 항상 노동력을 구매하고, 노동자는 항상 그것을 판매하며, 이 매매가 노동력의 진정한 가치대로 이루어지는 한, 상품 생산과 상품 유통에 기초를 둔 취득의 법칙, 곧 사적 소유의 법칙은 자기 자체의 내부적인 불가피한 변증법으로부터 그 정반대로 전환된다는 점은 명백하다.
우리가 시작했던 최초의 작업인 등가물과 등가물 사이의 교환은 완전히 달라져 오직 외관상의 교환으로 변질되었다. 첫째, 교환으로부터 노동력을 얻는 자본 그 자체가 등가물 없이 취득한 타인 노동의 생산물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 자본을 노동자가 대체해야 할 뿐 아니라 잉여물을 첨가하여 대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교환 관계는 유통 과정에 속하는 단순한 겉모습일 따름이며, 거래 자체의 내용과는 관계가 없고 도리어 그것을 모호하게 할 뿐인 단순한 형태에 불과하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노동력의 매매는 단순한 형태이며, 그 내용은 자본가가 이미 대상화된 타인 노동의 일부를 아무런 등가물도 지불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취득하고, 그것을 더 많은 양의 살아 있는 타인 노동과 끊임없이 교환한다는 점이다.
최초에는 소유권이 한 인간 자신의 노동에 토대를 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이와 같이 가정해야 했다. 시장에서는 오로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상품 소유자들이 서로 마주하며, 남의 상품을 취득하는 수단은 오직 자기 자신의 상품을 양도하는 것뿐이고, 이 자기 자신의 상품을 얻는 유일한 길은 노동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유는 이제 자본가 측에서는 타인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 또는 그 생산물을 취득하는 권리로 변모하며, 노동자 측에서는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취득하지 못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로부터 노동과 소유의 분리는 노동과 소유의 동일성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는 법칙의 필연적 결과가 된다.
[엥겔스: 이하는 마르크스가 불어판에 넣은 내용을 바탕으로 엥겔스가 제4독어판에 추가한 내용이다. CW 35(Progress Publishers, 1996년)에는 이 추가분 전체가 CW 편집자의 실수로 빠져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취득 방식은 아무리 상품 생산의 최초 법칙들과 모순되는 듯 보이더라도, 이 취득 방식은 결코 이 법칙들을 위반한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들을 적용한 데서 나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축적을 중점으로 하는 운동의 순차적 국면들을 간단히 돌이켜보면서 이 점을 다시 한번 명백하게 한다. 처음에 우리가 보았듯이, 일정한 가치액이 자본으로 최초로 전환한 것은 교환 법칙에 따라 완전히 수행되었다. 한쪽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다른 쪽은 그것을 구매한다. 전자는 자기 상품의 가치를 받으며 그 상품의 사용 가치, 곧 노동을 후자에게 양도한다. 그러면 후자는 이미 자신이 소유하던 생산 수단을 (역시 그의 소유 하에 있는) 이 노동으로부터 새로운 생산물로 전환시키는데, 이 새로운 생산물도 역시 법적으로 그의 것이다.
이 생산물의 가치는 첫째로, 소모된 생산 수단의 가치를 포함한다. 유용 노동은 이 생산 수단의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하지 않고서는 이 생산 수단을 소모할 수 없다. 그런데 노동력이 판매되려면 그것을 사용하게 될 공업 부문에 유용 노동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새로운 생산물의 가치는 노동력 가치의 등가와 잉여 가치를 포함한다. 그 이유는 일정한 기간(하루, 한 주 등) 판매된 노동력의 가치는 그 기간에 이 노동력의 사용으로부터 생산된 가치보다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력의 교환 가치를 지불받았고, 그에 따라 그 사용 가치를 양도했는데, 이 점은 다른 모든 매매에서와 마찬가지이다.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이 (노동을 제공하며 따라서 가치를 생산하는) 독특한 사용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은 상품 생산의 일반 법칙에 결코 저촉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임금으로 투하된 가치액이 생산물에 단순히 재현될 뿐 아니라 잉여 가치만큼 증식되어 나타난다면, 이것은 판매자가 사기를 당했다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판매자는 자기 상품의 가치를 실제로 받았음), 오로지 구매자로부터 이 상품이 소비되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교환 법칙은 서로 교환되는 상품들의 교환 가치의 평등만을 요구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것들의 사용 가치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며, 그것들의 소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소비는 거래가 완전히 끝나고 집행된 뒤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따라서 화폐가 자본으로 최초로 전환하는 일은 상품 생산의 경제 법칙 및 이 법칙에서 나오는 소유권과 가장 정확하게 일치하여 수행된다. 그럼에도, 그 전환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1. 생산물은 노동자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에게 속한다.
2. 이 생산물의 가치에는 투하 자본의 가치 외에 잉여 가치가 포함되는데, 이 잉여 가치의 생산을 위해 노동자는 노동을 했으나 자본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잉여 가치는 자본가의 합법적 소유가 된다.
3.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유지했으므로, 구매자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을 다시 판매할 수 있다.
단순 재생산은 이 첫 번째 활동의 주기적 반복에 불과하며, 그때마다 화폐는 새로이 자본으로 전환된다. 그래서 여기서는 법칙이 위반되지 않고 도리어 계속 작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시스몽디가 언급한대로,
‘몇 번의 순차적인 교환 행위들은 최후의 교환이 최초의 교환을 표현하도록 했을 따름이다.’
또 그럼에도, 단순 재생산은 이 첫 번째 활동을 고립된 과정으로 고찰하지 않는 한, 그것에 전혀 다른 성격을 충분히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본 바 있다.
‘국민 소득의 분배에 참여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한쪽(노동자들)은 매년 새로운 노동을 수행하면서 자기들 몫에 대한 새로운 권리를 얻으며, 다른 한쪽(자본가들)은 시초의 노동으로부터 자기들 몫에 대한 영원한 권리를 이미 획득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노동의 영역은 예수가 이 기적을 행하는 유일한 영역은 아니다.
단순 재생산이 확대된 규모의 재생산, 곧 축적으로 교체되어도 사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전자의 경우, 자본가는 잉여 가치 전부를 탕진하지만, 후자의 경우, 잉여 가치의 일부만을 소비하고, 나머지는 화폐로 전환시키면서(보유하면서) 자신의 부르주아적 미덕을 입증한다.
잉여 가치는 자본가의 소유이며 다른 누구에게도 속한 일이 없다. 그가 그것을 생산에 투하한다면, 그는 (시장에 처음 나타난 날에 한 바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재원에서 투하한다. 이 경우, 그의 재원이 노동자들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사태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노동자 A가 생산한 잉여 가치로 노동자 B에게 지불하더라도, 첫째로, A는 자기 상품의 정당한 가격을 한푼도 에누리 없이 전부 받고 이 잉여 가치를 제공했기 때문이며, 둘째로, 이 사실은 노동자 B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B가 요구하는 것은, 또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은, 오직 자본가가 자기에게 노동력의 가치를 지불해야 한다는 점뿐이다.
‘그래도 이 둘은 이익을 보았다. 노동자가 이익을 본 것은 자기의 노동이 수행되기 전, 곧 열매를 맺기 전에 자기의 노동 (다른 노동자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의 열매가 자기에게 지불되었기 때문이고, 고용주가 이익을 본 것은 이 노동자의 노동이 그의 임금보다도 더 값어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의 가치보다도 더 많은 가치를 생산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을 그 갱신의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고찰하고, 개별 자본가와 개별 노동자 대신 그들의 총체, 곧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서로 마주한다고 고찰한다면, 사태가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우리는 상품 생산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기준을 적용하는 셈이 된다.
상품 생산에서는 상호 독립적인 판매자와 구매자가 서로 마주한다. 그들 간의 모든 관계는 그들이 체결한 계약의 만기일이 되면 중단된다. 거래가 반복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전의 계약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새로운 계약으로부터 반복되며, 그 새로운 계약에서 동일한 구매자와 동일한 판매자가 다시 만나는 일은 우연에 불과하다. 상품 생산 또는 이에 속하는 과정을 자체적인 경제 법칙에 따라 판단하려면, 개별 교환 행위를 전후 교환 행위들과의 모든 관련을 제외하고 개별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매매는 오직 특정 개인들 사이에서만 진행되므로, 거기에서 전체 사회 계급들 사이의 관계를 찾는 일은 허용될 수 없다.
현재 기능하고 있는 자본이 통과해 온 주기적 재생산과 그것에 선행하는 축적의 계열들이 아무리 길다 하더라도, 이 자본은 언제나 자기 시초의 순수성을 보존한다. 교환 법칙이 (개별적으로 본) 각각의 교환 행위에서 준수되는 한, 취득 방식은 상품 생산에 상응하는 소유권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고 완전히 변혁될 수 있다. 이 동일한 소유권은 시초에도 그리고 자본주의 시대에도 효력을 보존하는데, 시초에는 생산물이 생산자에게 속하며, 생산자는 등가물과 등가물을 교환하고 자기 자신의 노동으로부터만 부유해질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대에는 점점 더 많은 사회적 부가 (타인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을 끊임없이 새로 취득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소유로 된다. 이러한 결과는 노동자 자신이 노동력을 상품으로 자유로이 판매하게 되자마자 불가피하게 된다. 바로 이 순간부터 비로소, 상품 생산은 보편화되며 전형적인 생산 형태로 자리 잡는다. 곧, 이때부터 모든 생산물은 처음부터 판매를 위해 생산되며, 생산되는 부 전체가 유통 영역을 통과한다. 임금 노동이 상품 생산의 토대로 될 때에야 비로소, 상품 생산은 자신을 전체 사회에 강요하며, 그때에 비로소 자기의 잠재력을 전부 발휘한다.
임금 노동의 개입이 상품 생산을 불순하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상품 생산이 불순하게 되지 않으려면 발전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상품 생산이 그 자체의 내재적 법칙으로부터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전환되는 정도에 따라, 상품 생산의 소유 법칙은 변증법적 역전을 겪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자본주의적 취득 법칙으로 전환된다. 단순 재생산의 경우에도, 모든 자본은 그 최초 기원과 무관하게 축적된 자본 (곧 자본화한 잉여 가치)으로 전환된다는 점을 보았다. 그러나 생산의 홍수 속에서 최초의 총 투하 자본은 직접적으로 축적된 자본 (곧 자본으로 재전환된 잉여 가치 또는 잉여 생산물)과 비교하면 극소량이다. 이것은 최초 투하 자본이 그 축적자의 수중에서 기능하든 타인의 수중에서 기능하든 마찬가지다. 따라서 정치경제학은 자본 일반을 가리켜 ‘잉여 가치의 생산을 위해 다시 사용될 축적된 부’ (전환된 잉여 가치 또는 수입)라고 말하며, 자본가를 ‘잉여 가치의 소유자’라고 말한다. 현존하는 자본 전체를 축적된 또는 자본화된 이자라고 보는 견해는 동일한 견해를 다른 형식으로 표현할 뿐이다. 이자는 잉여 가치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4-2. 확대 재생산에 관한 정치경제학의 잘못된 견해
축적(곧 잉여 가치가 자본으로 재전환하는 것)에 관한 더 깊은 연구에 앞서, 고전파 경제학이 도입한 하나의 모호한 점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자본가가 잉여 가치의 일부로 자기 자신의 소비를 위해 구매하는 상품이 자신의 생산 수단이나 가치 증식 수단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천성적·사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구매하는 노동도 생산적 노동이 아니다. 자본가는 그런 상품과 노동을 구매하면서 잉여 가치를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잉여 가치를 수입으로 소비하거나 지출한다. (헤겔이 적절하게 말했듯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소비해 버리는’, 특히 몸종 고용의 사치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옛 봉건 귀족들의 일상적 생활 방식에 반대하여, 부르주아 경제학이 자본의 축적을 시민의 첫째 의무라고 선포하고, 추가적인 생산적 노동자들 (이들은 투입 비용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을 고용하는 데 수입의 상당 부분을 지출하지 않고 자기 수입을 전부 소비하는 사람은 축적할 수 없다고 끈기 있게 설교한 일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다른 한편으로, 부르주아 경제학은 자본주의적 생산을 퇴장 화폐의 형성과 혼동하는, 따라서 축적된 부를 현재의 현물 형태가 파괴되지 않은 부(곧 소비되지 않은 부) 또는 유통에 들어가지 않은 부라고 여기는 세속적인 편견과 투쟁해야 했다. 화폐를 유통에서 배제하는 일은 화폐가 자본으로 가치 증식하는 일을 배제하며, 상품을 퇴장시켜 축적하는 일은 완전히 무의미한 일이다. 사실상 대량의 상품 축적은 유통의 정체 또는 과잉 생산의 결과이다.
위와 같은 세속적 편견은 한편으로, 부자들이 점차적으로 소비하기 위해 쌓아 둔 재화의 양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생산 양식에 공통적인 재고의 형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이에 관해서는, 유통 과정을 분석할 때 다시 언급한다. 따라서 고전파 경제학이 비생산적 노동자가 아니라 생산적 노동자가 잉여 생산물을 소비하는 일을 축적 과정에서 특징적 계기로 강조하는 것은 매우 정당하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오류도 시작된다. 애덤 스미스는 축적을 단순히 잉여 생산물을 비생산적 소비 대신 생산적 노동자 고용에 사용하는 과정으로 묘사한다. 곧 이러한 관점은 잉여 가치의 자본화를, 단순히 잉여 가치를 노동력으로 전환하는 행위와 동일시하여 설명한다. 예를 들어, 리카도,『정치경제학 및 과세 원리』의 말을 들어보자.
‘한 나라의 모든 생산물들은 소비된다. 하지만 그 생산물이 추가적 가치를 재생산하는 주체로부터 소비되는지, 아니면 가치 재생산에 전혀 기여하지 않는 주체로부터 소모되는지가 가장 중대한 결과를 결정한다. 수입이 저축되어 자본에 추가된다는 것은, 해당 수입 부분이 비생산적 노동자가 아닌 생산적 노동자로부터 소비된다는 의미다. 자본이 소비하지 않음으로 증가한다는 가정보다 더 큰 오류는 없다.’
리카도와 그 뒤의 모든 정치경제학자들이 애덤 스미스를 따라 되풀이하는 주장, 곧 ‘수입 중 자본에 추가되는 부분은 생산적 노동자로부터 소비된다.’는 주장보다 더 큰 오류는 없다. 이 관념에 따르면, 자본으로 전환되는 전체 잉여 가치는 가변 자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 역시 시초에 투하된 가치와 마찬가지로 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 곧 생산 수단과 노동력으로 분할된다.
노동력은 가변 자본이 생산 과정에서 취하는 형태이다. 이 생산 과정에서 노동력 자체는 자본가로부터 소비되며, 생산 수단은 노동력의 기능(곧 노동)으로부터 소비된다. 동시에 노동력의 구매에 지출된 화폐는 생활 수단으로 전환되는데, 이 생활 수단은 ‘생산적 노동’이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 노동자’가 소비한다.
애덤 스미스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자신의 분석으로부터, 각 개별 자본은 불변적 구성 부분과 가변적 구성 부분으로 분할되지만, 사회의 자본(전체)은 전적으로 가변 자본으로만 분해될 수 있으며, 따라서 사회의 자본은 전부 임금으로만 지출된다는 엉터리 결론에 이른다. 예를 들어, 직물 공장주가 2,000원을 자본으로 전환시킨다고 가정한다. 그는 이 화폐의 일부를 직조공의 고용에 지출하고, 나머지를 실, 기계 등의 구입에 지출한다. 그런데 그에게 실과 기계를 판매한 사람도 판매 대금의 일부를 다시 노동에 지불한다. 이렇게 소급해 가면, 결국 2,000원 전부가 임금으로만 지출된다. 곧 2,000원이 대표하는 생산물 전부가 생산적 노동자로부터 소비된다. 보는 바와 같이, 이 논증의 핵심은, “이렇게 소급해 가면”이라는 말 한 마디에 있는데, 이 말은 논리가 순환한다. 사실 애덤 스미스는 연구가 곤란하게 되기 시작한 바로 그 곳에서 연구를 중단한다.
연간 총생산물만 고찰할 경우, 연간 재생산 과정은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연간 생산물의 모든 구성 부분이 상품으로 시장에 나와야 하며, 난점은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개별 자본이나 개인 수입의 운동은 하나의 일반적 위치 교대 (곧 사회적 부의 유통) 속에서 교차되고 뒤섞여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사람들을 혼동시키고, 해결해야 할 매우 복잡한 문제를 연구 과제로 제기한다. 필자는 제2권 제3편에서 전체 체계가 실제로 어떻게 상호 관련을 맺는지를 분석한다. 중농주의자들이 그들의「경제표」에서 연간 생산을 (유통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 처음 묘사하려고 시도한 일은 그들의 큰 공적이다. 또한 정치경제학이, 순생산물 중 자본으로 전환되는 부분은 전부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소비된다는 애덤 스미스의 명제를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위해 활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24-3. 잉여 가치 분할과 절욕설
기존 논의는 잉여 가치 또는 잉여 생산물을 자본가의 개인적 소비 재원 또는 축적 재원 중 어느 한 측면에서만 다루었다. 그러나 잉여 가치는 이 두 측면을 동시에 포괄하는 개념이다. 잉여 가치의 특정 부분은 자본가의 수입으로 전환되어 소비되며, 잔여 부분은 자본으로 투입되어 축적된다. 이 두 부분 중 하나가 적을수록, 다른 부분은 그만큼 더 커진다. 이는 잉여 가치의 양이 일정할 때 성립하는 관계다.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이 분할의 비율이 축적의 크기를 결정한다. 이 분할은 잉여 가치 소유자, 곧 자본가의 의지 행위로 이루어진다. 그가 거두어들인 공물(잉여 가치) 중 축적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가 그것을 소비하지 않고 자본가로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며 스스로 부를 늘려가기에 절약한다고 표현한다.
자본가는 인격화된 자본으로만 역사적 가치와, 리히노브스키의 실언(‘인명해설’ 참조)을 빌려 ‘유효 기간이 없는 것은 아닌’ 역사적 생존권을 지닌다. 오직 이러한 측면에서만, 그의 일시적 존재의 필연성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더 높은 사회로 이행할 필연성에 포함된다. 자본이 인격화된 존재인 한, 그의 활동 동기는 사용 가치의 획득과 향락이 아니라 교환 가치의 획득과 증식이다. 그는 가치 증식을 열광적으로 추구하며, 인류에게 무자비하게 생산을 위한 생산을 강요한다. 따라서 자본가는 사회 생산력의 발전과, (각 개인에게 최대한의 자유로운 발달을 기본 원칙으로 삼는) 더 높은 사회 형태의 유일한 현실적 토대로 될 수 있는, 물질적 생산 조건의 생산에 박차를 가한다. 자본의 인격화로만 자본가는 존경받으며, 이로 인해 절대적 치부욕을 수전노와 일치한다.
수전노의 경우는, 개인적 열광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자본가의 경우는 사회적 기구(여기서 자본가는 하나의 나사에 불과)의 작용으로 발현한다. 더욱이, 자본주의적 생산 발전은 개별 사업에 투하되는 자본액을 끊임없이 증대시키도록 강제하며, 경쟁은 이 생산 양식의 내재적 법칙을 각 자본가에게 외적인 강제 법칙으로 강요한다. 경쟁은 자본가로 하여금 자본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확대하도록 압박하며, 이는 오직 누진적 축적으로부터만 달성된다.
자본가의 모든 행동은 (그에게 의지와 의식을 부여받은) 자본의 기능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자신의 개인적 소비는 자기 자본 축적에 대한 약탈로 간주된다. 이는 복식부기에서 자본가의 사적 지출이 자본의 반대편(차변)에 기입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축적은 사회적 부의 세계를 정복하고, 착취당하는 인간의 수를 확대하며, 동시에 자본가의 직접적·간접적 지배를 확장하는 행위다. 그러나 원죄는 도처에서 작용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발전하고 축적과 부가 증대함에 따라, 자본가는 자본의 단순한 화신이 아니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아담(욕망)에 대해 인간적 공감을 느끼기 시작하며, 교육으로부터 금욕주의에 대한 이전의 열정을 고루한 수전노의 편견으로 치부할 수 있게 된다. 고전적 자본가는 개인적 소비를 신성한 직분에 어긋나는 죄악이자 축적을 ‘끊는 것’으로 낙인찍지만, 근대적 자본가는 축적을 향락의 ‘절제’로 여길 수 있다.
‘아아. 그대의 가슴에는,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그런데 그들은 항상 떨어지려 하고 있구나.’
[ 괴테,『파우스트』]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역사적 새벽, 벼락부자가 된 개별 자본가는 이 단계를 개별적으로 통과하는 동안 치부욕과 탐욕이 지배적인 열정이 된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향락의 세계를 창조할 뿐 아니라, 투기와 신용 제도의 형태의 많은 벼락부자 원천을 개발한다. 일정한 수준의 발전에 이르면, 어느 정도의 낭비는 부의 과시와 신용 획득 수단이 되며, ‘운이 나쁜’ 자본가에게는 사업상의 필요로까지 변한다. 사치는 자본의 교제비에 포함된다. 더욱이 자본가는 수전노처럼 자신의 개인적 노동이나 소비 삭감에 비례해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노동력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짜내는지, 그리고 노동자에게 생활상의 모든 쾌락 포기를 얼마나 강요하는지에 비례해 부유해진다. 따라서 자본가의 낭비는 호탕한 봉건 영주의 낭비가 지닌 솔직한 성격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그 이면에는 언제나 가장 더러운 탐욕과 세심한 타산이 숨어 있다. 그럼에도, 자본가의 낭비는 그의 축적을 방해하지 않고, 축적의 증대와 더불어 증대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자본가의 심중에는 축적욕과 향락욕 사이의 파우스트적 갈등이 전개된다.
1795년 애이킨이 발표한 저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맨체스터의 공업은 네 시기로 구분한다. 제1기에 공장주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노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주로 도제의 부모(공장주에게 자기 아동들을 맡기며 큰 금액의 수업료를 지불한)를 강탈해 치부했으며, 물론 도제들은 굶주렸다. 다른 한편으로, 평균 이윤이 낮았기 때문에 축적하려면 대단한 절약이 필수였다. 그들은 수전노와 마찬가지로 생활했으며, 심지어 자기 자본에 대한 이자까지도 소비하지 않았다.
‘제2기에는 그들이 약간의 재산을 얻기 시작했으나, 이전처럼 열심히 노동했으며 (이는 노예 감시자들이 아는 것처럼 노동을 직접 착취하는 데 노고가 들기 때문), 이전처럼 검소하게 생활했다. 제3기에는 사치가 시작되었고, 사업은 영국 내 모든 상업 도시로 주문을 받기 위해 말을 탄 사람을 파견하며 확대되었다. 1690년 이전에는 공업에서 획득한 자본이 3,000파운드 내지 4,000파운드에 달한 적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대략 이 시기 또는 이보다 조금 늦게, 공장주들은 이미 화폐를 축적했고, 목조 가옥이나 토담집 대신 근대적 벽돌집을 짓기 시작했다.’
18세기 초에도 맨체스터의 한 공장주는 손님들에게 1파인트(0.57리터)의 외국제 포도주를 대접했다는 이유로, 모든 이웃에게 혹평과 비난을 받았다. 기계제 생산 출현 이전, 공장주들이 저녁에 만나는 술집에서 지출하는 비용은 펀치주 한 잔 값인 6펜스, 잎담배 한 봉지 값인 1페니를 넘지 않았다. 획기적인 해인 175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실제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 중 자기 자신의 마차를 가진 사람이 단 한 명 목격되었다. 18세기 마지막 30년인 ‘제4기는 유럽 전체에 걸친 사업 확장으로 인한 대단한 사치와 낭비의 시기였다.’ 선량한 애이킨이 다시 살아나 오늘날의 맨체스터를 본다면, 그는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이며, 예언자들이다! (가장 중요한 계율이다!) ‘근면은 재료를 제공하고, 절약은 그것을 축적한다.’ 그러므로 절약하라, 절약하라! 다시 말해, 잉여 가치 또는 잉여 생산물 중 최대한의 부분을 자본으로 재전환하라! 축적을 위한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 이 공식으로, 고전파 경제학은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표현했다.
고전파 경제학은 부의 출산 진통이 무엇인지 한 순간도 잘못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필연성이기에, 한탄한들 소용없다. 고전파 경제학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기계의 의의밖에 없다면, 자본가 또한 이 잉여 가치를 추가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기계의 의의밖에 없다. 고전파 경제학은 자본가의 역사적 기능을 진지하게 취급한다.
자본가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향락욕과 치부욕 사이의 불행한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1820년경 맬더스는, 축적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생산에 종사하는 자본가가 담당하고, 낭비하는 일은 잉여 가치 분배에 참여하는 기타 사람들, 곧 토지 귀족이나 관리, 목사 등이 담당하는 분업을 제창했다. 그는 ‘지출욕과 축적욕을 분리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미 오래전에 향락가이자 사교가가 되어버린 자본가들은 불평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대변자인 리카도 학파의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절규한다. 맬더스가 높은 지대, 높은 세금 등을 설교하는 것은 근면한 사람들에 대한 비생산적 소비자들의 압력으로부터 그들의 근면을 계속 자극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생산, 끊임없이 확대된 규모의 생산을 구호로 내걸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방식으로는 생산이 촉진되기는커녕 오히려 저해된다. 또한 다른 이들을 자극하기 위해, 상당수의 사람들, 그들의 성격상 일을 잘 해낼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일단의 사람들을 무위도식하게 만드는 일은 전혀 공정하지 못하다.’
그러나 그는 산업 자본가들의 빵에서 버터를 빼내면서 그들에게 축적에 대한 자극을 주는 일은 불공정하다고 보면서도, ‘노동자를 근면하게 만들기 위해’ 임금을 최저 한도까지 억누르는 일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또한 이윤 획득의 비밀이 지불받지 못한 노동의 취득에 있다는 것을 조금도 감추지 않는다.
‘노동자 측의 수요가 증가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들이 자신들의 생산물 중 자신들을 위해서는 더 적은 몫을, 고용주에게는 더 큰 몫을 제공하려는 의향 이외의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경우, 노동자들의 소비 감소로부터 공급 과잉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공급 과잉은 높은 이윤과 동의어일 뿐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노동자들에게 탈취한 획득물을 산업 자본가와 무위도식하는 토지 소유자 사이에 어떻게 분배해야 축적에 유익할지 논하는 학문적 다툼은 7월 혁명(1830년)에 직면해 잠잠해졌다. 그 직후, 리옹의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의 경종을 울렸고, 영국의 농촌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장과 곡식 더미에 불을 질렀다.
해협 이편에서는 오언주의가, 저편에서는 생시몽주의·푸리에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속류 경제학의 시기가 도래했다. 맨체스터에서 시니어가 자본에 대한 이윤(이자를 포함)은 ‘12시간 노동 중 최후의 한 시간’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을 발견한 바로 1년 전, 그는 또 다른 발견을 세상에 공표했다. 그는 거만하게,
‘나는 (생산 도구로 여겨지는) 자본이라는 말을 절욕이라는 말로 바꾼다.’
고 말했다. 이야말로, 속류 경제학 ‘발견’의 기막힌 견본이다!
속류 경제학은 경제학적 범주를 아첨꾼의 문구로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시니어는,
‘야만인이 활을 만든다면, 그는 하나의 근로에 종사하는 것이지 절욕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한다. 이는 초기 사회 상태에서 노동 수단이 자본가의 ‘절욕 없이’ 어떻게 그리고 왜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하려는 시도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사회는 그만큼 더 절욕을 요구한다.’는 그의 주장은, 곧 타인의 근로와 생산물을 취득하는 것이 본업인 사람들의 절욕을 그만큼 더 요구한다는 의미다. 이로부터 노동 과정을 위한 모든 조건들은 그때부터 자본가의 그만한 수의 절욕 행위로 전환된다. 곡물이 식량으로 모두 소비되지 않고 일부가 종자로 파종될 수 있는 것조차 자본가의 절욕 때문이라는 것이다.
포도주가 발효를 위해 일정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 역시 자본가의 절욕 때문이다. 자본가가 ‘생산 도구를 노동자에게 대부’할 때(!), 다시 말해, 증기 기관, 면화, 철도, 비료, 역축 등을 소비해 버리지 않고 (또는 속류 경제학자의 유치한 표현대로, ‘그것들의 가치’를 사치품 등의 소비재에 탕진하지 않고), 그것들을 노동력과 결합시켜 자본으로 그 가치를 증식시킬 때, 자본가는 자기 자신을 수탈한다는 것이다. 자본가 계급이 이 과정을 어떻게 실현하는지는 이제까지 속류 경제학이 해명하기를 완강히 거부한 수수께끼다. 여하튼, 세계는 오직 비슈누 신의 현대적 속죄자인 자본가의 자기 고행으로부터 굴러가고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축적뿐 아니라 단순한 ‘자본의 유지’조차도 그것을 소비하려는 유혹에 저항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인간의 도리가 명령하는 것은 자본가를 이러한 희생과 유혹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조지아 주의 노예 소유자가 노예제 폐지로부터, 흑인 노예에게 채찍으로 짜낸 잉여 생산물 전부를 샴페인으로 마셔버릴 것인지, 아니면 그 일부를 더 많은 흑인와 토지로 재전환시킬 것인지에 대한 고통스러운 고뇌로부터 해방된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가 된다.
사회의 경제적 구성이 아무리 다르더라도, 단순 재생산뿐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확대 재생산은 발생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 많이 생산되고, 더 많이 소비되며, 따라서 더 많은 생산물이 생산 수단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노동자의 생산 수단, 그의 생산물, 그의 생활 수단이 자본의 형태로 그와 대립하지 않는 한, 자본의 축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따라서 자본가의 기능으로도 나타나지 않는다. 헤일리베리 대학 (인도 파견 관리를 양성하는 대학) 정치경제학 교수직에서 맬더스의 후계자였던 수년 전에 세상을 떠난 리처드 존스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에 비추어 이 점을 명확히 설명한다.
인도 국민의 대다수는 자작농이므로, 그들의 생산물, 노동 수단, 생활 수단은 결코 ‘타인의 수입으로부터 절약된 재원, 따라서 축적이라는 선행 과정을 통과한 재원의 형태’를 띠지 않는다. 다른 한편, 영국의 지배가 낡은 제도를 가장 적게 해체시킨 지방들에서는, 비(非)농업 노동자들이 농업 잉여 생산물의 일부를 공물 또는 지대 형태로 거두어들이는 대영주들에게 직접 고용된다. 이 생산물 일부는 현물 형태로 대영주들이 소비하고, 다른 일부는 노동자들로부터 영주들을 위한 사치품과 기타 소비재로 전환되며, 나머지 부분은 (자기 노동 도구를 소유한) 노동자들의 임금을 이룬다. 이처럼 인도에서는 생산과 확대된 규모의 재생산이 그 기묘한 성인이며, 근심에 잠긴 기사인 ‘절욕하는’ 자본가에게 아무런 개입 없이 진행된다.
24-4. 잉여 가치율, 생산성, 자본 구조 및 규모
잉여 가치의 자본 및 수입으로 분할 비율이 주어질 경우, 축적 자본의 규모는 잉여 가치 절대량에 명백하게 의존한다. 가령 80%가 자본화되고, 20%가 소비된다고 가정한다면, 잉여 가치 총액이 3,000원인지 1,500원인지에 따라, 축적 자본은 각각 2,400원 또는 1,200원이 된다. 따라서 잉여 가치량을 결정하는 모든 요인은 축적 크기를 결정하는 데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본 장에서는 이 요인들이 축적에 대하여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범위 내에서만 재차 총괄하고자 한다.
우리가 상기하듯, 잉여 가치율은 무엇보다 노동력의 착취도에 의존한다. 정치경제학은 이 사실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흔히 노동 생산성 향상으로부터 축적 촉진과 노동자 착취 강화로부터 축적 촉진을 동일시한다. 잉여 가치 생산에 관한 논의에서 우리는 항상 임금이 최소한 노동력의 가치와 같다고 전제해왔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가치 이하로 임금을 강제 삭감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므로, 이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필수적이다. 일정한 한계 내에서 이러한 임금 삭감은 실제로 노동자의 필요 소비 재원을 자본 축적 재원으로 전환시킨다. 존 스튜어트 밀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임금은 어떤 생산력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생산력에 대한 가격일 뿐이다. 임금이 노동 자체와 더불어 상품 생산에 기여하지 못하는 것은, 기계 가격이 기계 자체와 더불어 생산에 기여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동이 구매될 필요 없이 획득될 수 있다면, 임금은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공기만으로 생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어떤 가격으로도 그들을 고용할 수는 없다. (이는 그들이 자본가의 지배를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 비용이 0이라는 점은 수학적 의미에서 극한이며, 끊임없이 접근할 수는 있으나 결코 도달할 수는 없는 지점이다. 자본의 끊임없는 경향은 이 노동 비용을 0의 수준까지 하락시킨다.
필자가 자주 인용하는 18세기 저술가인「상공업에 관한 논문」의 저자는, 영국의 역사적 사명이 영국 노동자들의 임금을 프랑스나 네덜란드 수준까지 떨어뜨리는 것이라 선언하면서, 영국 자본의 내밀한 비밀을 폭로한다. 그는 특히 순진하게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빈민들 (노동자들을 지칭하는 용어)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려 한다면, 그들의 노동 가치는 필연적으로 높게 책정될 수밖에 없다. 제조업 노동자들이 소비하는 브랜디, 진, 차, 사탕, 외국산 과일, 강한 맥주, 날염 직물, 담배 등과 같은 그 막대한 사치품들은 주목할 만하다.’
이어서 저자는 노샘프턴셔의 한 공장주가 경건한 태도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개탄하는 글을 인용 제시한다.
‘프랑스의 노동 가치가 영국보다 1/3이나 낮은 이유는, 프랑스 빈민들이 열심히 노동하면서도 음식과 의복에서 검소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된 식량은 빵, 과일, 야채, 풀뿌리, 건어 등이다. 그들이 고기를 먹는 일은 매우 드물며, 밀 값이 비쌀 때는 빵마저도 아주 적게 먹는다.’
이 공장주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마시는 것은 물 또는 소량의 술에 불과하며, 결과적으로, 지출이 매우 적다. 물론 이러한 상황을 조성하기란 쉽지는 않으나,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므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20년 후, 미국의 사기꾼이자 작위를 수여받은 미국 출신 벤자민 톰슨 (통칭 럼포드 백작)은 동일한 박애주의적 노선을 따르며, 신과 인간에게 큰 만족감을 주었다. 그의『평론집』은 노동자들의 값비싼 통상적인 음식물을 값싼 대용품으로 대체하는 각종 요리법으로 가득 찬 요리 책이다. 이 경탄할 만한 ‘철학자’의 특히 뛰어난 요리법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7.5펜스의 보리 5파운드, 6.25펜스의 옥수수 5파운드, 3펜스의 청어, 1페니의 소금, 1페니의 식초, 2펜스의 후추와 양념을 합산한 총 20.75펜스로, 64명분의 수프를 만들 수 있다. 보리와 옥수수의 평균 가격을 적용할 경우, 1인당 비용은 20온스, 수프 한 그릇당 0.25페니로 낮아진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하면서 식품의 불량화가 심화되었고, 결국 톰슨이 제안했던 이러한 이상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첫 십 년 동안, 잉글랜드의 차지 농업가와 지주들은 농업 노동자들에게 생계 최저 한도 이하의 임금을 지급하고, 그 부족분을 교구의 구호금 형태로 보충하며 절대적인 최저 임금 수준을 실행했다. 당시 잉글랜드의 독베리들 (오만한 상류층)이 임금 수준을 ‘합법적으로’ 제정했을 때 발생한 조롱거리의 한 예는 다음과 같다.
‘1795년 버크셔의 지주들이 스핀햄랜드에서 임금 수준을 정하고 있을 때, 그들이 점심 식사를 하는 중이었음에도, 노동자들에게는 점심 같은 것이 필요 없다고 판단했음이 명백하다. 그들은 8파운드 11온스짜리 빵 한 덩어리 값이 1실링일 때, 성인 1인당 주급은 3실링이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후 빵 한 덩어리 값이 1실링 5펜스에 달할 때까지는 임금 수준을 규칙적으로 높일 것이며, 빵 값이 그 이상으로 올라 2실링이 될 때까지는 임금 수준을 규칙적으로 감소시켜, 노동자들의 빵 소비가 종전보다 1/5 감소되도록 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큰 차지 농업가이자 치안 판사, 구빈원 관리자, 그리고 임금 조정 위원인 베네트는 1814년 상원 조사 위원회 앞에서 심문을 받았다.
‘노동자의 하루 노동 가치와 교구의 구호금 사이에 어떤 비율이 준수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렇다. 각 가족의 주당 소득은 1인당 1갤론의 빵 (8파운드 11온스)과 3펜스에 도달하도록 되어 있다. (명목 임금이 이에 미달하면 그 차액은 교구가 보충한다.) 1갤론의 빵은 1주일 동안 생활을 유지하기에 충분하다고 우리는 판단한다. 3펜스는 의복용으로 지급되며, 교구가 직접 의복을 제공하는 경우에는 이 3펜스를 제외한다. 이러한 관행은 윌트셔 서부 일대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듯하다. 당대의 어떤 부르주아 저술가는 다음과 같이 부르짖는다. “몇 년간 차지 농업가들은 존경할 만한 농촌 사람들이 구빈원을 찾을 수밖에 없게 만들면서 그들을 타락시키고 있다. 차지 농업가는 자신의 이득을 증대시키면서, 노동자에게는 그 어떤 (소비 재원의) 축적도 하지 못하게끔 방해했다.’
노동자의 필수 소비 재원을 직접적으로 약탈하는 일이 오늘날 잉여 가치 형성 및 자본 축적 재원 형성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예를 들어, 이른바 ‘가내 공업’을 고찰할 때 이미 확인한 바와 같다 (제15장, 8절, Ⅳ를 참조). 더 많은 사실들은 이후에 논의된다.
어느 산업 부문에서든 불변 자본 중 노동 수단으로 구성된 부분은 일정 수의 취업 노동자들에게 충분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취업 노동자 수에 비례하여 증대할 필요는 없다. 가령 어떤 공장에서 100명의 노동자가 하루 8시간 노동하여 800시간의 노동을 제공한다고 가정하자. 자본가가 총 노동 시간을 1.5배 증대시키고자 한다면, 50명의 노동자를 추가로 고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그는 임금 지급뿐만 아니라 노동 수단 구입을 위해서도 더 많은 자본을 투하해야 한다. 이와 달리, 그는 기존의 100명 노동자를 8시간이 아닌 12시간 노동시킬 수 있으며, 이때에는 기존의 노동 수단만으로도 충분하다. 물론 노동 수단이 더 빨리 마모되겠지만, 노동력의 더 큰 발휘로부터 얻어진 추가 노동은 불변 자본의 상응하는 증대 없이도 축적의 실체인 잉여 생산물과 잉여 가치를 증대시킬 수 있다.
채취 산업 (예: 광업)의 경우, 원료 (노동 대상)는 투하 자본의 구성 부분이 아니다. 이 노동 대상은 과거 노동의 생산물이 아닌 자연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금속 광석, 광물, 석탄, 석재 등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 불변 자본은 거의 전적으로 노동 수단으로 구성되며, 이 노동 수단은 증대된 양의 노동 (예: 노동자의 주야 교대제 도입)을 매우 효과적으로 흡수할 수 있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생산물의 양과 가치는 지출된 노동량에 정비례하여 증가한다. 이 산업에서는 생산이 시작된 때와 마찬가지로, 생산물을 생산하는 본원적 두 요인인, 인간과 자연이 자본의 물질적 요소들을 생산하는 요인으로 함께 협력한다. 노동력의 신축성 덕분에, 축적 크기는 불변 자본 규모의 사전적 확대 없이도 확장될 수 있다.
농업에서는 종자와 비료의 추가 투하가 없으면 경작지를 확대할 수 없다. 그러나 일단 이들의 투하가 이루어지면, 토지는 순전히 내재적 기능만으로도 생산량을 놀라울 만큼 증대시킨다. 따라서 종전과 같은 수의 노동자가 수행하는 더 많은 양의 노동은 (노동 수단에 대한 새로운 투하 없이도) 토지의 산출량을 증가시킨다. 이것 역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직접적 작용이며, 어떠한 새로운 자본의 개입 없이도 축적을 증대시키는 직접적 원천이 된다. 최종적으로, 진정한 제조업에서는 추가적인 노동이 이에 상응하는 원료에 대한 추가 지출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노동 수단에 대한 추가 지출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채취 산업과 농업이 제조업에 원료와 노동 수단의 원료를 공급하므로, (자본의 추가 지출 없이) 생산된 채취 산업과 농업의 추가적 생산물은 제조업에도 유리하게 작용한다. 일반적 결론은 다음과 같이 도출된다.
자본은 부의 두 본원적 생산 요소인 노동력과 토지를 자기와 결합하면서 팽창력을 획득한다. 이 팽창력은 외관상 자본 자신의 크기, 곧 이미 생산된 생산 수단의 가치량으로부터 설정된 한계를 넘어서도록 한다. 결과적으로, 자본은 자신의 축적 요소들을 증대시킨다. 자본 축적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사회적 노동의 생산성 수준이다. 노동 생산성의 상승에 따라 일정한 가치 (곧 일정한 크기의 잉여 가치)를 체화하는 생산물의 양은 증가한다. 잉여 가치율이 불변일 때 (또는 노동 생산성의 상승 속도보다 완만하게 하락할 때조차도), 잉여 생산물의 양은 증대한다. 따라서 잉여 생산물이 수입과 추가 자본으로 분할되는 비율이 불변이라면, 자본가의 소비는 축적 기금의 감소 없이도 증가할 수 있다.
자본가에게 있어 축적 재원의 상대적 크기는 소비 재원의 희생 위에서 증대될 수 있으며, 상품 가격 하락 덕분에 종전과 동일하거나 더 많은 양의 소비품을 향유하게 된다. 이미 확인했듯이, 노동 생산성 향상은 노동자의 가치를 하락시키고, 결과적으로, 잉여 가치율을 상승시킨다. 이는 실질 임금이 높아지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실질 임금은 결코 노동 생산성에 비례하여 증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동일한 가변 자본 가치는 더 많은 노동력을, 따라서 더 많은 노동을 착취한다. 동시에 동일한 불변 자본 가치는 더 많은 양의 생산 수단 (노동 수단, 노동 재료, 보조 재료)으로 표현되며, 이는 노동을 흡수하는 요소들을 더 풍부하게 제공한다. 그러므로 추가 자본의 가치가 불변이거나 감소하는 경우에도 축적은 촉진된다. 재생산 규모가 물질적으로 확대될 뿐 아니라, 잉여 가치의 생산은 추가 자본의 가치보다 더욱 급속하게 증대한다.
노동 생산성의 증가는 이미 생산 과정에 투입된 최초 자본에도 영향을 미친다. 기능하는 불변 자본의 일부는 기계 등 노동 수단으로 이루어지며, 이는 장기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완전히 소비되거나 대체된다. 그러나 이 노동 수단의 일부는 매년 마멸하여 생산적 기능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매년 주기적 재생산 단계 또는 동종의 신품으로 대체해야 할 단계에 놓인다. 이 노동 수단을 생산하는 부분에서 노동 생산성이 증가한다면 (과학과 기술 발전에 따라 생산성은 끊임없이 증가함), 낡은 기계, 공구, 장치 따위 대신에 더 효율적이면서 (그 증가한 효율성에 비해) 더 값싼 새로운 것들이 도입된다. 현재 사용되는 노동 수단에 대한 끊임없는 세부 개량을 제외하더라도, 낡은 자본은 더 생산적인 형태로 대체된다. 불변 자본의 다른 부분, 곧 원료와 보조 재료는 일 년 중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농업에서 생산되는 재료들은 대부분 일 년에 한 번씩 재생산된다. 따라서 개량된 방법의 도입은 추가 자본과 이미 기능하는 자본에 거의 동시적으로 작용한다.
화학의 발전은 유용 물질의 수와 이미 알려진 물질의 유용한 응용을 다양하게 하며, 자본의 증대와 함께 그 투하 분야를 확장시킬 뿐 아니라, 생산 및 소비 과정의 배설물을 재생산 과정 속으로 재투입하면서 자본의 사전 지출 없이 새로운 소재를 창출한다. 노동력의 발휘 강화만으로 자연적 부의 개발이 증대되듯이, 과학과 기술은 자본가에게 (현재 기능하는 자본의 크기와는 관계없이) 확대 능력을 부여한다. 과학과 기술은 또한 갱신 단계에 들어선 최초 자본의 부분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 자본 부분은 새로운 형태를 취하면서 (그 옛 형태가 마모되던 동안 진행된) 사회적 발전을 무상으로 이용한다. 물론 생산성이 이렇게 발전하면, 기능하는 자본의 가치는 부분적으로 감소한다. 경쟁에서 이 가치 감소를 절실히 느끼게 될 경우, 그 주요한 부담은 노동자에게 전가되는데, 이는 자본가가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면서 자신의 손실을 메우려 하기 때문이다.
노동은 소비된 생산 수단의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일정한 노동량이 사용하는 생산 수단의 가치와 양은 노동 생산성의 증대에 따라 증가한다. 따라서 동일한 노동량이 그 생산물에 언제나 동일 금액의 새로운 가치만을 첨가하더라도, 생산물에 이전되는 옛 자본 가치는 노동 생산성의 증대에 따라 증가한다. 예를 들어, 영국인 방적공과 중국인 방적공이 동일한 강도로 동일한 시간 노동한다면, 그들은 일주일에 동일한 가치를 생산한다. 그러나 이러한 동등성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자동 장치를 사용하는 영국인의 주 생산물 가치와 물레만을 가진 중국인의 주 생산물 가치 사이에는 막대한 차이가 존재한다. 중국인이 면화 1파운드를 방적하는 동일한 시간에, 영국인은 수백 파운드를 방적한다. 수백 배나 큰 액수의 옛 자본 가치가 영국인 생산물의 가치를 팽창시키는데, 이 옛 자본 가치는 이 생산물에서 새로운 유용한 형태로 재생산되어 자본으로 새롭게 기능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영국 노동 계급의 상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1782년에는 그전 3년 동안 거두어들였던 양모가 (영국에서) 노동자 부족으로 모두 그냥 쌓여 있었는데, 마침 새로 발명된 기계가 그 양모를 처리하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그대로 쌓여 있었을 것이다.’
기계 형태로 대상화된 노동은 물론 단 한 명의 새로운 노동자도 직접 생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는 더 적은 수의 노동자로 하여금, 비교적 더 적은 추가적 노동으로 양모를 생산적으로 소비하여 양모에 새로운 가치를 첨가했을 뿐 아니라, 털실 등의 형태로 양모의 옛 가치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결과적으로, 기계는 양모의 확대 재생산을 유도하고 자극했다. 새로운 가치를 첨가하면서 옛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살아 있는 노동의 자연적 속성이다. 따라서 생산 수단의 효율성, 규모, 가치의 증대에 따라, 곧 노동 생산성의 발전과 함께하는 축적에 따라, 노동은 끊임없이 증대되는 자본 가치를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로 유지하고 영원한 것으로 만든다.
노동의 이 자연적 능력은 (노동이 결합되어 있는) 자본의 자기 보존 능력으로 비친다. 이는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이 자본의 내재적 속성으로 보이고, 자본가가 잉여 노동을 끊임없이 취득하는 것이, 자본의 끊임없는 자기 증식으로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상품의 모든 가치 형태가 화폐 형태로 외부에 나타나듯, 노동의 모든 힘은 자본의 힘으로 외부에 나타난다. 자본의 증대에 따라, 사용되는 자본과 소비되는 자본 사이의 차액이 커진다. 이는 건물, 기계, 배수관, 둑, 각종 장치와 같은 노동 수단 (장기간에 걸쳐 반복되는 생산 과정에서 기능하거나 특정한 유용 효과를 얻는 데 봉사하는 것들)의 가치량 및 소재량이 증가함을 의미한다. 이 노동 수단들은 점진적으로 마멸되고, 가치를 조금씩 상실하며, 그 가치를 조금씩 생산물로 이전하게 된다. 이 노동 수단들이 생산물에 가치를 첨가하지 않으면서 생산물 형성에 참여하는 정도, 곧 그것들이 전체적으로 사용되면서도, 부분적으로만 소비되는 정도에 따라, 이들은 물, 증기, 공기 등 자연력과 마찬가지로 무료로 봉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살아 있는 노동이 장악하여 활기를 띠게 만든 과거 노동의 이 무료 봉사는 축적의 규모가 증대됨에 따라 증대한다.
과거 노동은 언제나 자본으로 변장하며, 예를 들어, 노동자 A, B, C 등의 노동에 대한 부재가 비(非)노동자 X의 자산으로 변장한다. 이 때문에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과거의 죽은 노동의 봉사를 온갖 말로 찬양하며, 스코틀랜드의 천재 매컬록은 과거 노동에 이자, 이윤 등의 형태로 일정한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결국 생산 수단의 형태로 과거 노동이 살아 있는 노동 과정에 제공하는 끊임없이 증대하는 지원은, 노동자 자신으로부터 착취한 과거의 지불받지 않는 노동이 취한 형태, 곧 과거 노동의 자본주의적 형태 그 자체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실무자들과 그들의 사상적 대변인들은, 노예 소유자가 노동자 그것을 노예라는 그 성격과 분리시켜 생각할 능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산 수단을 그것이 오늘날 쓰고 있는 적대적인 사회적 가면과 분리시켜 생각할 능력이 없다.
노동력의 착취도가 일정하다면, 잉여 가치량은 동시에 착취당하는 노동장의 수로부터 결정되며, 이 노동자 수는 (완전한 정비례 관계는 아니나) 자본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지속적인 축적으로 자본이 증대할수록 (소비 재원과 축적 재원으로 분할되는) 가치량 역시 증대한다. 그러므로 자본가는 더 사치스럽게 소비하면서도 동시에 더 ‘절욕’할 수 있다. 결국, 투하 자본량에 따라 생산 규모가 확대될수록, 생산의 모든 추진력은 그만큼 더욱 탄력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24-5. 노동 기금
이 연구 과정에서 명확히 되었듯, 자본은 고정적 크기가 아닌, 잉여 가치가 수입 및 추가 자본으로 어떻게 분할되는지에 따라 끊임없이 변동하는 사회적 부의 탄력적인 일부이다. 나아가, 기능하는 자본 규모가 일정할지라도, 자본에 결합된 노동력, 과학, 토지 (토지는 자연이 인간 개입 없이 제공하는 모든 노동 대상을 의미)는 자본의 탄력적 힘을 형성하여, 일정한 한계 내에서 자본 자체의 크기와 무관하게 그 작용 범위를 확대한다. 다만, 동일한 자본량을 상이한 정도로 작용시키는 유통 과정의 제반 사정(예: 자본 회전 시간의 단축)은 논의에서 제외하였다. 더불어, 순전히 자연 발생적으로 발달·발전한 사회적 생산 과정인 자본주의적 생산의 한계성을 전제하면서, 현존하는 생산 수단과 노동력을 가지고 직접적·계획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보다 합리적인 온갖 결합 또한 논의에서 제외하였다.
고전파 경제학은 항상 사회적 자본을 고정된 능률을 지닌 고정적 크기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편견은 19세기 천박한 부르주아적 지성, 곧 무미건조하고, 현학적이며, 수다스러운 철학자 제레미 벤담으로부터 비로소 하나의 교리로 확립되었다. 벤담이 철학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마틴 터퍼가 시인들 사이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같으며, 두 인물 모두 영국에서만 배출될 수 있었다. 벤담의 교리로는 생산 과정의 갑작스러운 확장과 수축, 그리고 축적과 같은 가장 평범한 현상들조차 전혀 설명할 수 없다. 이 교리는 벤담 자신을 비롯하여, 맬더스, 제임스 밀, 매컬록 등이 변호론적 목적, 특히 가변 자본(노동력으로 전환될 수 있는 자본)을 자본의 일부인 동시에 고정된 크기로 묘사하기 위해 악용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교리로부터, 가변 자본의 소재적 존재(곧, 가변 자본이 노동자들을 위해 나타내는 생활 수단의 양) 또는 이른바 노동 기금은 사회적 부 중 자연 법칙으로부터 고정되어 변경될 수 없는 특수 부분으로 격상되었다.
불변 자본(소재적 형태로는 생산 수단)으로 기능해야 할 사회적 부의 일부분을 가동시키기 위해서는 생산 기술로부터 규정되는 일정량의 살아 있는 노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노동량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노동자의 수는 개별 노동력에 대한 착취도의 변화에 따라 변동하므로 일정하지 않다. 또한 이 노동력의 가격 역시 대단히 탄력적인 최저 한도만 정해져 있을 뿐 일정하지 않다. 따라서 그 교리가 의거하는 사실들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한편으로, 노동자들은 사회적 부를 (비노동자들을 위한) 향락 수단과 생산 수단으로 분할하는 과정에 개입할 권리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는 운수가 좋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부자들의 ‘수입’을 희생하여 이른바 ‘노동 기금’을 확대할 수 있다. 노동 기금의 자본주의적 한계를 그것의 성질에 따른 사회적 한계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무의미한 동어 반복에 불과한지 포세트의 예는 명확히 보여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한 나라의 유동 자본은 그 나라의 노동 기금이다. 따라서 각 개별 노동자가 받는 평균 화폐 임금을 계산하려면, 이 자본을 노동자의 수로 나누기만 하면 된다.’
먼저 실제로 지급된 모든 개별 임금액을 합산하고, 그 합계가 신과 자연의 은총으로 허락된 ‘노동 기금’의 총가치라고 주장하며, 최종적으로, 이 총액을 노동자 수로 나누어 개별 노동자에게 평균적으로 지급될 수 있는 금액을 재차 산출한다. 이것은 매우 교활한 수법이지만, 포세트는 서슴없이 논지를 계속한다.
‘영국에서 매년 저축되는 전체 부는 두 부분, 곧 공업 유지를 위한 자본과 외국으로 수출되는 부분으로 나뉘며, 이 나라에서 저축되는 부 중 극히 일부만이 우리 자신의 공업에 투자될 뿐이다.’
결과적으로, 영국 노동자들로부터 등가물의 지급 없이 착복되는 매년 증가하는 잉여 생산물의 대부분은 영국이 아닌 외국에서 자본으로 활용된다. 이와 같이 수출된 추가 자본과 더불어, 신과 벤담이 발명한 ‘노동 기금’의 일부 역시 외국으로 유출되는 사태가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