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자본의 형성


어떤 거래에서든 통상 사회적 합의와 계약이 선행된 후 상호 간의 신뢰가 형성된다고 간주하나, 자본의 역사는 지배와 착취가 개시된 시점에서 폭력적 정당화에 기반한다. 18-19세기 산업 혁명기, 산업 자본가 간의 경쟁 심화로 급박한 화폐 수요가 발생하자 상인들은 대부업에 기반한 타인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갈취하는 수단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자본의 운동은 인류의 지배 역사만큼 진행되었으나, 본격적인 자본주의적 형태는 15-16세기라는 막연한 시점보다는 18-19세기에 등장한 신생 자본의 확립기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


산업 자본이 노동자에게 자본을 지급하며 이윤 창출에 몰두할 때, 상업 자본은 경제 불황을 기회 삼아 타인의 자본을 흡수할 기제를 강구한다. 은행의 설립은 바로 이러한 동인에서 기인한다. 국가가 화폐 순환을 관리하고 이자율을 통제하기까지는 수많은 은행업자의 시행착오가 수반되었다. 은행이 강조하는 '개인의 신용'은 자산 보호라는 표면적 의무보다, 타인의 자본을 유치하여 은행 자체의 신뢰도를 높이고 갈취적 구조를 은폐하려는 전략적 홍보 수단에 가까우며, 이전에 유럽 중심의 선진 금융 산업은 미국의 금융 패권으로 이전되어 그 계보를 잇고 있다.


피식민지 국가에 설립된 식민지 은행과 이후 등장한 공·사립 은행들의 자본 축적 비결은 식민지 수탈과 전쟁의 전유물이라는 점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식민지 주축 은행들이 이를 간과하는 이유는, 경제적 불안전성을 정치적 지도자나 시장 담당자의 역량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국가적 착각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고착화됨에 따라 은행 자본은 과잉 생산된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신용 안정도를 별도의 상품으로 변모시켰으며, 주식 시장의 출현 또한 이러한 강제적인 기제에 근간한다. 


금과 은에 의존하던 이전과 달리, 현대의 화폐 기준은 유가 증권과 실물 화폐를 대체하는 각종 수단으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발전 잠재력은 동시에 '자체의 부정'이라는 내재적 위험을 수반한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공황의 원인을 인플레이션 등 표면적 현상에 국한하여 진단하는 것은 '자본 시장의 안정화'라는 강박에 매몰된 결과이며, 제도의 본질적인 모순을 도외시한 분석에 불과하다.  


통화주의 


금융 제도의 발달과 수익 창출의 과정에서 통화주의 이론은 핵심적인 위치를 점한다. 유럽은 이전 인민의 과도한 투기 열풍으로 인한 수요 급증과 공급 수축, 그리고 국가의 미흡한 대처가 맞물리며 수차례의 경제 공황을 겪었다. 특히 이자율 산정 및 제어의 실패는 시장의 혼란을 가중시켰고, 시장 거래 비율이 끊임없이 변동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이러한 통화량 조절 기제를 사익 편취에 이용하려는 상업 자본가들의 존재에 있다. 이들은 안전한 투자처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소생산자이자 자본 확장의 주체로 거듭났으며, 이는 곧 '소부르주아' 계급이 형성되는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현대 은행업의 기틀을 마련한 영국에서는 오브스톤과 존 스튜어트 밀 등이 잉글랜드 은행법의 기초를 다지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학문적 명성과 공적에도, 통화주의적 이론은 경제 공황으로 심화된 구조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하지 못했다는 명확한 이론적 한계를 드러낸다. 이는 통화량 조절이라는 기술적 방법론이 자본주의 내재적 모순을 덮는 임시방편에 불과했음을 시사한다. 


통화주의는 자유주의 경제 시장에서 통화량을 조절하면서 시장을 안정화할 수 있다는 전제를 전파하여 자본주의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국가가 자유 시민의 자산을 관리한다는 명분은 '부르주아 국가'의 결속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하지만, 그 이면에는 노동 착취를 은폐하는 기제가 작동한다. 산업 현장에서 발생하는 산재 노동자의 보험 비용이나 노동자가 기여한 생산적 가치는 통화 정책이라는 합법적 형식 내에서 자본가 계급으로 이전된다. 결국 통화주의는 절대적인 국가 통제의 실현을 향한 막연한 이상과 결합할 때 가장 위험한 양상을 띤다. 자본가들의 결정에 따른 정책적 결실이 전 국민의 이익으로 둔갑하는 과정에서 정작 노동자들은 경제적 위기를 실감하지 못한 채 구조적 위협에 노출된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성을 직시하는 경제학자는 극히 드물며, 대다수는 실무적 현실을 배제한 채 추상적 수준에서 문제를 진단하는 데 그치고 만다.


자본주의의 발달: 금융업과 대출업의 밀접한 관계


국가 간의 전쟁의 심화 원인은 다각적일 수 있으나, 그 기저에는 화폐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고찰이 필수적이다. 유가와 증시의 급격한 변동은 국가가 시장 제어에 난항을 겪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과정에서 식민지는 상품 수입 확대를 요구받으며, 생산국은 수출 과세를 충당하기 위해 자본을 선대받아 지불하는 구조에 놓인다. 이전 정부가 축적한 국가적 채무는 단순한 계약 이행으로 해소되지 않으며, 실질적으로는 인민의 가중된 비용 부담으로 전가된다. 이러한 객관적 조건을 파악할 때 비로소 자본주의의 착취적 속성이 비로소 드러난다. 이러한 경제적 위기는 노동자의 생활과 가장 밀접하게 결착되어 있으나, 모순적으로 대체로 노동자들은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방해 공작에 가장 취약하게 노출된다. 특히 증시 변동과 대부 산업이 은행과 결합한 현대 사회에서는 '국민의 채무가 곧 국가의 채무'라는 동일시 기제가 작동한다. 이러한 전제에 매몰되는 한 자본주의 제도의 본질적인 모순을 해결하기란 난망하다.  


경제적 문제는 국가가 제시한 통계적 소득 평균치로 단순히 산정될 수 없다. 실제로는 자본 계급의 변동 기준에서 산출되는 잉여 가치와, 그 채무 부담의 원천인 이자율 및 고정 비율에 따라 결정된다. 국가의 시장 통제가 강화될수록 투자의 불안전성은 심화되고, 반대로 규제가 완화될수록 투기적 요소는 극대화된다.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국가의 결정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구조적 관계에 놓여 있음을 증명한다. 은행이 내세우는 자산 가치 보호 및 재화·용역 제공이라는 명분은 실상 자산을 증식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은행은 이러한 기제로부터 이윤을 극대화시키는 자본 수단들을 점유하고 있다. 감가상각을 제외한 이러한 자본 관계의 모순은, 이후 상술한 지대 문제와 결합하며 더욱 심화된 양상으로 전개된다. 오히려 재화와 용역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기본 상식에 기초하여서도, 더욱 자산을 불리는 수단들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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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자본주의 이전의 관계

 

이자 낳는 자본과 그 원형인 고리대 자본은 상인 자본과 더불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확립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 온 노아의 대홍수 이전의 자본 형태다. 이러한 자본 형태는 자본주의 이전의 제반 경제적 사회 구성체에서 보편적으로 포착된다. 고리대 자본이 성립하기 위한 객관적 조건은 적어도 생산물의 일부가 상품으로 전환되는 것, 그리고 상품 유통의 진전과 함께 화폐의 각종 기능적 체계를 갖추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고리대 자본의 전개는 상품 거래 및 화폐 거래 자본을 포괄하는 상인 자본의 발달, 특히 화폐 거래 자본의 분화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일례로 고대 로마의 경우, 공화정 후기 이래 수공업 수준이 고대 세계의 평균적 지표를 하회하였음에도, 상인 자본과 화폐 거래 자본, 그리고 고리대 자본은 고대적 형태가 허용하는 한계 내에서 최고 수준의 발달 단계에 도달하였다.

 

화폐 퇴장의 발생 기제는 이미 고찰한 바와 같으나, 직업적 화폐 퇴장자가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존재로 부각되는 시점은 그가 화폐 대부자로 전환될 때부터다.

 

상인이 화폐를 차입하는 목적은 이를 자본으로 투하하여 이윤을 창출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초기 단계에서도 화폐 대부자와 상인의 관계는 현대 자본주의적 관계와 부합한다. 이러한 특수한 경제적 관계는 당대 가톨릭 대학 측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된 바 있다.

 

실제로 알칼라, 살라만카, 인골슈타트,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 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대학들은 상업 대부에 수반되는 이자의 합법성을 순차적으로 승인하였다. 이 중 최초 5개 대학의 승인 기록은 리옹시의 영사 기록에 보존되어 있으며, 브류이제 폰투스의 저서 고리와 이자에 관한 논문(리옹) 부록에도 수록되어 있다.’ (오지에 1842: 206).

 

가부장적 노예제가 아닌 고전 고대의 노예제와 같이, 화폐가 노예나 토지 매입을 매개로 타인의 노동을 사유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하는 모든 사회 구성체에서 화폐는 자본적 증식과 이자 산출의 기제가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이전의 고리대가 취하는 특징적인 현상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여기서 특징적이라는 표현은 해당 형태들이 자본주의적 체제하에서도 종속적으로 잔존하나, 이자 낳는 자본의 본질적 성격을 규정하는 지위는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첫째는 토지 소유자를 중심으로 한 낭비적 귀족층에 대한 고리대이다.

 

둘째는 자기 소유의 노동 조건을 보유한 소생산자에 대한 고리대이다.

 

소생산자의 경우 수공업자도 포함하나, 특히 빈농층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이는 자본주의 이전의 조건 아래 소규모 자립 생산이 허용되는 구조에서는 빈농 계급이 인구의 대다수를 구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리대가 부유한 토지 소유자를 파멸시키고 소생산자를 빈곤화하는 과정은 거대한 화폐 자본의 형성과 집적을 가속한다. 다만 이러한 과정이 근대 유럽의 사례처럼 낡은 생산 양식을 철폐하고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을 확립할지 여부는, 전적으로 해당 사회의 역사적 발전 단계와 그에 수반되는 객관적 조건들에 규정된다.

 

이자 낳는 자본의 전형적 형태인 고리대 자본은 소농과 소규모 수공업 장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소규모 생산 양식에 대응한다. 고도화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같이 생산 조건과 노동 생산물이 이미 자본의 형태로 노동자와 대립하는 구조에서, 노동자는 생산자의 자격으로 화폐를 차입할 필요가 없다. 이 경우의 차입은 전당포 이용과 같은 개인적 필요에 국한될 뿐이다. 반면,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 조건과 생산물의 현실적 또는 명목적 소유자인 경우, 그는 생산자로 화폐 대부자의 자본과 관계를 맺으며 이때 자본은 고리대 자본으로 노동자와 대면한다.

 

F 뉴먼은 은행가가 부자에게, 고리대금업자가 빈자에게 대부하기 때문에 전자는 존경받고 후자는 증오와 멸시를 받는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는 문제의 본질을 오히려 무의미한 형태로 제기한 것이다. (1851: 44) 그는 이 사안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사회적 생산 양식 및 그에 상응하는 사회 질서 간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음을 간과하였으며, 이를 단순히 빈부 격차의 대비로 치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실제로 소생산자를 빈곤화하는 고리대는 부유한 토지 소유자를 파멸시키는 고리대와 병행하여 진행된다. 일례로 고대 로마 귀족의 고리대가 소농민 계급을 완전히 몰락시키자, 이러한 착취 형태는 종결되고 순수 노예제 경제가 소농 경제를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고리대금업자는 생산자의 재생산에 필수적인 생존 수단 (향후 임금의 형태로 규정될 부분)을 초과하는 잉여 (향후 이윤과 지대로 규정될 부분)를 이자 형태로 점유한다. 따라서 국가 공제분을 제외한 잉여 가치 전체가 이자로 수렴되는 이 단계의 이자율 수준을, 잉여 가치의 일부분만을 구성하는 근대적 이자율과 비교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이러한 비교는 임금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이윤·이자·지대를 포함한 잉여 가치 전체를 생산하여 양도한다는 본질적 사실을 간과한다. 캐리는 이와 같은 비논리적 대비에 근거하여 자본의 발달과 이자율의 하락이 노동자에게 지대한 이득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나, 이는 명백한 오류다.

 

고리대금업자가 피취득자의 잉여 노동 수탈에 그치지 않고 토지나 가옥 등 소유권을 취득하여 노동 조건 자체를 지속적으로 수탈해 나갈지라도, 노동자로부터 노동 조건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결과가 아닌 그 출발점이자 전제 조건임을 명시해야 한다. 임금 노동자는 그 계급적 규정으로 인해 생산자로 채무 노예가 될 수 없으며, 오직 소비자의 자격으로만 채무 관계에 종속될 뿐이다.

 

고리대 자본은 기존의 생산 방식을 보존한 채 직접적 생산자의 모든 잉여 노동을 흡수한다. 생산자에 기인한 노동 조건의 소유와 점유에 기반한 분산적 소규모 생산을 존립 근거로 삼기에, 고리대 자본은 노동을 직접적으로 종속시키거나 산업 자본의 형태로 노동과 대립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고리대 형태는 생산 양식을 퇴보시키고 생산력의 발전을 저해하며,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 발달 없이 생산자의 빈곤만을 영속화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고리대는 한편으로 봉건적 부와 소유 구조를 해체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자가 생산 수단을 직접 소유하는 소농민적·소부르주아적 생산 양식을 약화시키고 파멸시킨다.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아래에서 노동자는 더 이상 토지나 원료와 같은 생산 조건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발생하는 생산자로부터의 생산 조건 소외 (분리)는 생산 방식 자체의 근본적인 변혁에 대응하는 필연적 과정이다.

 

, 분산되어 있던 노동자들이 대규모 작업장으로 결집하여 분업과 협업 체계에 포섭되고, 전통적 도구가 기계로 대체되면서 생산 방식은 더 이상 소규모 소유의 생산 도구 분산이나 노동자의 고립을 허용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 체제에서 고리대는 생산 조건을 노동자로부터 분리시키는 기제로 작용할 수 없다. 그 물리적·경제적 분리가 이미 생산 양식의 전제 조건으로 완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산 수단이 분산된 구조에서 고리대는 화폐 자산을 집중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 고리대는 기존의 생산 방식을 변혁하지 않은 채 기생적으로 고착되어 생산 체계를 빈곤화한다. 이는 생산 방식의 골수를 잠식하여 동력을 약화시키고, 재생산 과정이 점차 열악한 조건 속에서 수행되도록 강제한다. 고대 세계에서 고리대에 대한 인민적 증오가 극에 달했던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당시 생산자가 생산 조건을 직접 소유한다는 것은 단순한 경제적 보유를 넘어, 해당 사회의 정치적 관계와 공민적 자립성을 담보하는 실질적 토대였기 때문이다.

 

노예제가 지배하거나 봉건 영주와 봉건 관료층 (가신단)이 잉여 생산물을 소비하는 체제 아래에서는, 노예 소유주나 영주가 고리대의 희생양이 된다 하더라도 생산 방식 자체는 변모하지 않으며 도리어 노동자에 대한 수탈만이 가중된다. 채무 관계에 놓인 노예 소유주나 봉건 영주는 자신의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피지배층으로부터 더 많은 생산물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고리대금업자는 기존 지배층의 지위를 찬탈하여 고대 로마의 기사 계급처럼 스스로 새로운 착취자로 부상한다. 이 과정에서 가부장적 성격이 짙고 정치적 권력 유지가 주된 목적이었던 전통적 착취자 대신, 오직 금전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냉혹한 신흥 부유층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적 교체에도, 사회의 근간이 되는 생산 방식 그 자체는 여전히 종래의 상태를 유지한다.

 

고리대가 자본주의 이전의 생산 양식에 혁명적 영향을 미치는 국면은, 고리대가 정치 제도의 안정적 기반인 기존의 소유 형태를 해체하고 분해할 때에만 국한된다. 정치적 재생산의 필수 요건인 기존 소유 체제가 고착된 아시아적 (소유) 형태 내에서 고리대는, 체제 변혁 없이 경제적 쇠퇴와 정치적 부패만을 야기하며 장기간 존속할 뿐이다. 반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여타 객관적 조건들이 성숙한 지점과 시기에 이르러서야, 고리대는 (봉건 영주와 소생산자를 몰락시키는 동시에 노동 조건을 집중시키면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을 형성하는 주요 동인 중 하나로 기능하게 된다.

 

중세에는 국가 전역에서 통용되는 보편적 이자율이 부재하였다. 교회가 이자를 수반하는 모든 거래를 원칙적으로 금지한 가운데, 법과 사법 제도가 대부 계약을 충분히 보장하지 못함에 따라 개별 거래의 이자율은 극도로 높게 형성되었다. 화폐 유통량은 미미했으나 대부분의 지불이 현금으로 강제되었고, 특히 어음 제도의 미비로 인해 경제 주체들의 화폐 차입 수요는 상시 존재하였다.

 

이에 따라 (시대와 장소에 따른) 이자율 및 고리대의 개념적 범주 또한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카롤링거 왕조의 카를 대제 시기 (768-814)에는 100%의 이자율을 고리대로 규정한 반면, 1344년 린다우 암 보덴제에서는 216 2/3%의 이율이 실현되기도 하였다. 취리히 시의회는 43 1/3%를 법정 이자율로 확정하였으며, 이탈리아의 경우 12-14세기에 통상 20%를 상회하지 않았으나 간혹 40%에 육박하는 사례도 확인되었다. 베로나는 12 1/2%를 법정 이자율로 설정하였고,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유태인에 한해 10%의 이자율로 정하였으나 기독교도에 대해서는 별도의 규정을 두지 않았다. 한편 13세기 독일 라인 지방에서는 이미 10%의 이자율이 일반적인 수준으로 정착되었다 (휠만, 중세의 도시 제도2: 55-57).

 

고리대 자본은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을 결여하고 있음에도, 자본의 착취 기제는 온전히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기만적 특성은 현대 부르주아 경제 내에서도 낙후한 산업 부문이나 근대적 생산 체제로의 전환에 저항하는 분야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영국의 이자율을 인도와 같은 국가의 이자율과 대조할 때, 단순히 잉글랜드 은행의 공정 이율을 지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가내 공업 형태의 소생산자에게 소규모 설비를 임대하며 부과하는 실질적인 고수익 이자율을 비교의 준거로 채택해야 마땅하다.

 

고리대는 소비에 침잠하는 부와 달리, 그 자체가 자본을 생성하는 동학적 과정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고리대 자본과 상인 재산은 토지 소유로부터 분리된 독립적 화폐 자산의 형성을 가속화한다. 생산물의 상품적 성격이 미분화되고 생산 체계가 교환 가치에 완전히 장악되지 않은 단계일수록, 화폐는 사용 가치로 표상되는 부의 제한적 형태에 대립하여 부 그 자체이자 절대적 부의 체현으로 부각된다. 화폐 퇴장 현상은 바로 이러한 논리적 근거에 기반한다.

 

세계 화폐나 퇴장 화폐로의 성격을 차치하더라도, 화폐는 지불 수단이라는 특수한 형태를 매개로 상품의 절대적 가치 척도로 군림한다. 특히 지불 수단으로의 화폐 기능은 이자 체계와 화폐 자본의 발달을 촉진하는 핵심 동인이 된다. 사치와 퇴폐적 소비에 필요한 화폐는 구매와 채무 이행을 위한 절대적 수단으로 요구되며, 소규모 생산자 역시 지불 의무의 이행을 위해 화폐를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주와 국가에 대한 부역 및 현물 납부가 화폐 지대와 화폐 조세로 전환된 사실은 화폐의 기능적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두 경우 모두 화폐 그 자체가 자기 목적적 존재로 요구된다. 반면 퇴장 화폐는 고리대 관계에 포섭되면서 비로소 경제적 현실성을 획득하고 그 잠재적 동기를 실현한다. 퇴장 화폐의 소유자가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기능적 자본이 아닌 화폐로서의 화폐그 자체이나, 이자 수취를 매개로 이 퇴장 화폐를 자본으로 전격 전환시킨다. , 그가 이자를 매개로 타인의 잉여 노동 전부 또는 일부를 사유화하며, 생산 조건이 명목상 타인의 소유로 남아 있음에도, 실질적으로는 이를 지배하는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다.

 

고리대는 (에피쿠로스의 신들이 세계 사이의 틈새에 거주하듯), 기존 생산 체제의 간극 속에서 기생한다. 상품 형태가 생산물의 보편적 양식으로 확립되지 않을수록 화폐의 희소성은 증대되며, 이에 따라 고리대금업자는 차입자의 지불 능력이나 저항 능력이라는 외재적 한계 외에는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는 절대적 착취자로 군림한다.

 

소농민적 및 소부르주아적 생산 양식에서 화폐가 구매 수단으로 절실해지는 시점은, 생산 수단을 점유한 노동자가 예기치 못한 재해나 우연한 사고로 인해 생산 조건을 상실하거나 일반적인 재생산 과정이 차단될 때다. 생활 수단과 원료는 이러한 생산 조건의 핵심적 구성 요소이나, 가격 등귀로 인해 생산물의 판매 대금이 보충 비용을 하회하거나 흉작으로 인해 종자용 곡물을 현물로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역사적으로 고대 로마의 귀족은 전쟁을 매개로 평민층을 몰락시켰다. 귀족은 평민에게 병역 의무를 강제하면서 그들이 자신의 노동 조건을 재생산할 기회를 박탈하고 빈곤화를 초래하였다. 이때 전쟁을 매개로 획득한 전리품인 구리 (화폐)는 귀족의 금고에 축적되었다. 귀족은 평민에게 필요한 실물 상품 (곡물, 가축 등)을 직접 제공하는 대신, 자신들에게 잉여 자산이었던 화폐를 대부하면서 고율의 이자를 수취하고 평민을 채무 노예로 전락시켰다. 카를 대제 치하의 프랑스 농민들 역시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파산을 겪으며, 채무 관계를 기점으로 농노의 지위로 전락되는 경로를 밟았다.

 

로마 제국에서는 기근으로 인해 자유민이 자신의 자녀를 부유층에 노예로 매도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였다. 이는 계급적 토대의 일반적 전락 과정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세밀히 고찰하면 소생산자의 생산 조건 유지 여부는 수많은 우연적 상황에 종속되어 있으며, 이러한 우연에서 비롯된 상실은 곧 빈곤화로 직결되어 고리대라는 기생적 기제가 개입할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다. 농민의 경우, 가축 한 마리의 폐사만으로도 종전 규모의 재생산 구조가 와해될 수 있다. 이처럼 취약한 기반 위에서 일단 고리대의 착취 연쇄에 고착되면, 그는 경제적 예속 상태를 벗어나 자유를 복원할 기회를 영구히 상실하게 된다.

 

고리대의 핵심적이고 독보적인 활동 기반은 지불 수단으로의 화폐 기능에 존재한다. 지대, 이자, 공납, 조세 등 특정 기일에 이행해야 하는 모든 화폐적 채무는 필연적으로 화폐 지불의 필요성을 수반한다. 이러한 경제적 배경으로 인해 고리대는 고대 로마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징세 청부업자의 기능과 밀접하게 결합하여 왔다. 상업이 발달하고 상품 생산이 보편화됨에 따라 구매와 지불 사이의 시차는 더욱 확대되며, 화폐는 정해진 기일에 반드시 인도되어야 하는 강제성을 띤다. 근대의 화폐 공황은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화폐 자본가와 고리대금업자가 단일한 실체로 통합될 수 있음을 실증한다.

 

나아가 고리대 그 자체가 지불 수단으로의 화폐 수요를 증폭시키는 주요 동인이 된다. 고리대는 생산자를 채무의 굴레에 심화시켜 구속할 뿐만 아니라, 가중되는 이자 부담으로 인해 원활한 재생산을 저해하면서 생산자가 상시적 지불 수단을 보유할 여력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고리대는 지불 수단으로의 화폐 기능에서 발원하여, 자신의 가장 고유한 활동 토대인 바로 그 기능을 스스로 확장해 나가는 모순적 구조를 형성한다.

 

신용 제도는 고리대에 대한 반작용으로 발전하나, 이를 이자 자체에 대한 도덕적·종교적 반대라는 관점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고대 저술가나 교회 교부, 루터 및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견지했던 이자 금지론과는 논리적 기반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용 제도의 발전이 의미하는 본질은, 이자 낳는 자본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부과하는 객관적 조건과 요구 체계에 전적으로 종속된다는 사실에 있다.

 

근대 신용 제도하에서 이자 낳는 자본은 대체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객관적 조건에 수렴하며 재편된다. 이 과정에서 고리대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속하며,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종전의 입법이 부과했던) 규제로부터 자유로워지기도 한다.

 

다만 이자 낳는 자본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부합하는 차입이 차단되거나 그러한 기제가 작동하지 않는) 대상 및 조건하에서는 여전히 고리대 자본의 형태를 유지한다. 구체적으로는 전당포 이용과 같은 개인적 필요에서 비롯된 차입, 부유한 낭비자의 사치적 소비를 위한 차입 등, 그리고 이와는 달리 소농민이나 수공업자 등과 같이 직접적 생산자가 여전히 자신의 생산 조건을 소유하고 있는 비자본주의적 생산 영역이 이에 해당한다. 아울러 자본주의적 생산자라 할지라도 그 사업 규모가 극도로 영세하여 스스로 노동하는 생산자와 실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경우, 이자 낳는 자본은 고리대 자본으로의 성격을 견지하게 된다.

 

이자 낳는 자본을 고리대 자본과 구별하는 본질적 차이는 자본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그것이 기능하는 객관적 조건과 화폐 대부자에 대립하는 차입자의 사회적 성격이 변화했다는 점에 있다.

 

무산자가 산업가나 상인으로 신용을 획득하는 경우, 이는 그가 자본가로 기능하며 차입 자본을 매개로 미지불 노동을 점유할 것이라는 기대에 근거한다. , 그는 잠재적 자본가로 신용 체계에 포섭된다. 재산은 없으나 역량과 사업 수완을 갖춘 개인이 자본가로 상승할 수 있다는 사실은 경제학적 변호론자들에게 상찬받아 왔다. 이러한 기제는 기존의 개별 자본가들에게는 위협적인 경쟁자들을 끊임없이 양산하는 측면이 있으나, 자본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그 토대를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는 사회 하층으로부터 새로운 역량을 부단히 충원하면서 그 지속성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구조적 특징을 보여준다.

 

이는 중세 가톨릭 교회가 신분, 출신, 재산에 구애받지 않고 피지배 계급의 우수한 인재들을 등용해 위계 질서를 구축하면서 사제 계급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 세속인을 압제했던 이치와 같다.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의 탁월한 인물들을 흡수하는 역량이 뛰어날수록, 그 지배 체제는 더욱 안정화되는 동시에 피지배층에게는 한층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근대 신용 제도의 창설자들은 이자 낳는 자본 일반을 부정하거나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공공연히 승인하는 지점에서 출발하였다.

 

본고에서는 빈민을 고리대로부터 보호하고자 설립된 몽 드 피에테와 같은 초기 자선 전당포 (1350년 프랑쉬콩테, 15세기에 설립된 이탈리아 페루지아 및 사보나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상술하지 않겠다.

 

이러한 기관들이 주목받는 이유는 오직 경건한 선의가 그 정반대의 결과로 전도되는 역사의 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빈민 보호를 기치로 내건 기관들은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고리대금업을 수행하는 주체로 변질되었으며, 오늘날 영국의 노동자 계급은 그 후에 격인 전당포에 최소 100%에 달하는 고율의 이자를 지불하고 있다. 아울러 17세기 말 챔블랜이나 브리스코 등이 토지 자산을 담보로 지폐를 발행하여 귀족층을 고리대에서 구제하고자 했던 토지 은행식의 신용 착각에 대해서도 논의를 생략하기로 한다.

 

12세기와 14세기 베네치아 및 제노바에 설립된 신용 조합은 해상 무역과 도매 상업이 구태의연한 고리대의 지배 및 화폐 거래 독점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려는 실무적 요구에 힘입어 탄생하였다. 이들 도시 공화국에 세워진 진정한 의미에서 은행들은 공공 신용 기관의 역할을 겸하며 (국가에 조세 담보 대부를 제공하였는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핵심은 신용 조합을 설립한 상인 계급이 당대 사회의 중추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정부와 자신들을 고리대의 압박에서 구출하는 동시에, 국가 기구를 자신들에게 더욱 공고히 종속시키는 데 전략적 이해관계를 가졌다.

 

이러한 정치적 구도 속에서 (1694) 잉글랜드 은행 설립 당시 토리당은 은행의 정치적 성격을 문제 삼으며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들은 은행을 본질적으로 공화주의적 기관으로 규정하며, 베네치아, 제노바, 암스테르담, 함부르크와 같이 번영하는 은행이 존재하는 곳은 모두 공화국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반면, 전제 군주정인 프랑스나 스페인에서는 은행이라는 존재를 찾아볼 수 없다는 논거를 들어 신용 제도의 확산을 배격하였다.

 

(1609년 설립) 암스테르담 은행과 (1619년 설립) 함부르크 은행은 근대적 신용 제도의 비약적 발달을 이끈 선구적 형태라기보다, 단순한 예금 은행의 기능에 충실하였다. 이들 은행이 발행한 수표는 실질적으로 예탁된 귀금속의 영수증에 불과하였으며, 오직 수치인의 이서를 거처서야만 비로소 유통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에서는 상업과 제조업의 발달로 상업 신용과 화폐 거래가 고도화되었고, 이러한 발전 과정 속에서 이자 낳는 자본은 점차 산업 자본과 상업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었다. 이와 같은 종속 관계는 당시의 낮은 이자율 수준에서 명확히 입증된다. 17세기의 네덜란드는 현재의 영국과 마찬가지로 경제 발전의 전형으로 평가받았으며, 그 경제적 고도화에 따라 피취득자의 빈곤을 전제로 하던 낡은 고리대의 독점 체제는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18세기 전반에 걸쳐 (영국에서는) 네덜란드를 전형으로 삼아 이자율의 강제 인하를 촉구하는 여론이 고조되었고, 입법 방향 역시 이에 부응하였다. 이러한 요구의 본질적 목적은 이자 낳는 자본을 산업 자본 및 상업 자본의 논리에 완전히 종속시키는 데 있었다.

 

이 움직임의 선구적 인물은 영국 개인 은행업의 시조인 차일드였다. 그는 기성복 제조 업체인 모제즈 앤드 선개인 봉제업자의 독점 체제를 공격했듯이, 고리대금업의 독점적 지위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차일드는 영국 증권 매매업의 초석이자 동인도 회사의 지배자로, 모순적으로 무역의 자유를 명분 삼아 해당 회사의 독점권을 옹호하기도 하였다.

 

차일드는 만리의 저작 오해받는 화폐 이자(1668)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논리를 전개한다.

 

비겁하고 전전긍긍하는 고리대금업자들의 대변인인 그는 논리 중 가장 취약한 지점을 공격하고 있다. 그는 낮은 이자율이 부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그것을 단순히 부의 결과물이라 단언한다.’ (상업에 관한 연구(1669), 번역판, 암스테르담과 베를린, 1754년 판: 120).

 

상업이 국가를 부유하게 하고 이자율 인하가 상업을 진흥시킨다면, 이자의 인하 또는 고리대의 제한은 국가의 부를 창출하는 결정적 원인임에 틀림없다. 특정 사안이 상황에 따라 원인이 되기도 하고 결과가 되기도 한다는 주장은 결코 불합리하지 않다.’ (상업에 관한 연구(1669): 155).

 

달걀이 암탉의 원인이고 암탉이 달걀의 원인이다. 이자율의 인하는 부의 증대를 일으키며 증대된 부는 다시 이자율을 더욱 하락시킨다.’ (상업에 관한 연구(1669): 156).

 

근면의 가치를 옹호하는 반면, 반대자는 나태를 비호하고 있다.’ (상업에 관한 연구(1669): 179).

 

이처럼 고리대에 대항하여 이자 낳는 자본을 산업 자본에 종속시키려 했던 격렬한 투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필수 전제 조건을 근대적 은행 제도의 형태로 구축하려는) 유기적 창출 활동의 서곡이었다. 근대적 은행 제도는 모든 유휴 화폐 예비금을 집적하여 화폐 시장에 투입하면서 고리대 자본의 독점력을 와해시키는 한편, 신용 화폐를 창출하면서 귀금속 자체가 지녔던 독점적 지위를 제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차일드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이르는 영국의 은행 제도 관련 문헌들은 고리대에 대한 반대와 더불어 고리대의 예속으로부터 상업, 산업, 국가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일관된 요구를 담고 있다. 이 시기에는 신용이 발휘하는 경이로운 효과나, 귀금속의 독점적 지위를 해체하고 이를 지폐로 대체하면서 얻게 될 파급력에 대한 장밋빛 전망이 공존하였다. 잉글랜드 은행과 스코틀랜드 은행의 창립자인 패터슨 (1658-1719)은 이러한 지평 위에서 존 로 (1671-1729)의 선구적 인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당시 잉글랜드 은행의 설립에 반대하여,

 

모든 금세공업자와 전당포 주인들은 격렬한 분노의 함성을 터뜨렸다.’ (매콜리, 1855: 499).

 

잉글랜드 은행은 설립 초기 10년 동안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였다. 외부의 강력한 적대에 직면했을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은행권은 명목 가치를 크게 하회하는 수준에서 통용되었다. 귀금속 거래를 매개로 원시적 은행 업무를 독점하던 금세공업자들은 잉글랜드 은행을 극도로 시기하였다. 자신들의 사업 영역이 축소되고 할인율이 저하되었으며, 무엇보다 정부와의 독점적 거래권이 경쟁 상대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프란시스, 1848: 73).

 

잉글랜드 은행 설립 이전인 1683년에도 이미 국립 신용 은행에 관한 계획이 수립되었으며, 그 주요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대량의 상품을 보유한 사업가들이 시장 상황이 불리할 때 손실을 감수하며 매도하는 대신, 은행의 위탁을 받아 상품을 예탁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이 재고 자산을 담보로 신용을 확보하면서 노동자를 고용하고 사업을 지속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프란시스, 1848: 39-40).

 

이러한 구상은 각고의 노력 끝에 (런던) 비숍스게이트 스트리트의 데본셔 하우스에서 실현되었다. 해당 은행은 산업가와 상인들에게 예탁 상품 가치의 3/4까지 어음 대부를 실행하였다. 어음의 유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각계 인사들이 협동 기구를 결성하였으며, 은행 어음 소지자는 누구나 조합 내에서 현금과 동일한 효력으로 상품을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난해한 운영 체계와 상품 가치 하락에 따른 높은 위험 부담으로 인해 이 은행은 큰 번창을 거두지 못하였다.

 

(영국의 근대적 신용 제도 형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촉진했던) 저술들의 실질적 내용을 고찰하면, 거기에는 이자 낳는 자본과 대부 가용 생산 수단 전반을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필수 전제 조건으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요구만이 일관되고 있음을 포착하게 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사용된 논리나 표현들은 생시몽주의자들이 피력했던 은행 및 신용에 관한 추상적 관념과 (단어 하나하나까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중농주의자들에게 경작자가 토지를 실제로 경작하는 사람이 아닌 대규모 차지 농업가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시몽의 근로자는 단순 노동자가 아닌 산업 자본가와 상업 자본가를 지칭하며 이러한 용어법은 그의 제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통용된다.

 

근로자는 조수와 보조자, 육체 노동자를 필요로 하며, 영리하고 능숙하며 성실한 인재를 구한다. 그는 그들을 지휘하여 일하게 하며, 그들의 노동은 그의 하에서 비로소 생산적 성격을 띤다.’ (앙팡탕, 생시몽파의 종교, 1831: 104).

 

생시몽이 그의 유작인 신기독교(1825)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노동자 계급의 대변자로 자처하며 이들의 해방을 최종 목표로 선언했다는 사실은 간과될 수 없다. 그 이전의 저작들은 본질적으로 봉건 사회와 대비되는 근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찬미였으며, 나폴레옹 시대의 군인이나 입법자와 대조되는 산업가 및 은행가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데 치중하였다. 이는 동시대 오언의 저술들과는 선을 긋는 지점이다! 생시몽주의자들에게 산업 자본가는 여전히 가장 탁월한 형태의 근로자로 간주되었다.

 

생시몽의 저작를 비판적으로 고찰한다면, 신용과 은행에 관한 그의 공상이 1852년 생시몽주의자 페레르가 주도하여 설립된 크레디 모빌리에 (Crédit Mobilier)’로 실현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신용 은행은 (신용 제도나 대규모 산업이 근대적 수준에 미치지 못했던) 프랑스와 같은 국가에서만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형태였으며,

 

영국과 미국에서는 성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크레디 모빌리에의 싹은 이미 생시몽의 학설(1831)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 은행업자가 일반 자본가나 고리대금업자보다 낮은 이율로 대부할 수 있음은 자명한데, 이는 은행업자가,

 

차입자의 신용을 평가하는 데 있어 지주나 개인 자본가들보다 오판의 위험이 적어 산업가에게 더욱 저렴한 비용으로 생산 수단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

 

저자 자신은 주석에서 다음과 같은 지적을 덧붙이고 있다.

 

유휴 자산가와 근로자 (산업 자본가) 사이를 은행업자가 매개하면서 발생하는 이익은, 무질서한 사회 구조가 이기주의 (각종 사기와 기만의 형태로 발현되는)에 제공하는 기회들로 인해 상쇄되거나 소멸되기도 한다. 은행업자는 양자 사이에 개입하여 때로는 양측 모두를 착취하면서 사회적 해악을 야기한다.’

 

여기서 근로자산업 자본가를 지칭한다. 그러나 근대적 은행 제도가 운용하는 자금을 단순히 유휴 자산가의 자금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오류이다.

 

첫째, 해당 자금에는 산업가와 상인이 일시적 유휴 화폐 형태로 보유하는 자본, 곧 화폐 예비금이나 차기 투자 대기 자본이 포함된다. 이는 유휴 자본일 뿐 자산가의 도식적 자본과는 성격이 다르다.

 

둘째, 은행 자금에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수입과 저축 중 영구적 또는 일시적으로 축적을 위해 예치된 부분이 포함된다.

 

이 두 요소야말로 은행 제도의 본질을 구성하는 핵심 동력이다.

 

그럼에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지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귀금속 형태의 화폐는 여전히 체제의 토대를 이루며, 신용 제도는 본질적으로 이 토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둘째, 신용 제도는 사회적 생산 수단이 (자본과 토지 소유권의 형태로) 사적 개인에게 독점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 신용 제도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내재적 형태인 동시에, 이 생산 양식을 그 최고이자 최후의 단계로 밀어붙이는 결정적 추진력이다.

 

영국의 이자에 관한 약간의 고찰(저자 미상, 1697)에서 이미 지적된 바와 같이, 은행 제도는 그 조직적 구성과 집중도 측면에서 볼 때,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창출한 가장 인위적이며 정교한 산물이다. 비록 상업과 산업의 실질적 운동이 잉글랜드 은행의 궤도 외부에 존재하고 은행이 그 운동에 대해 전적으로 수동적인 입장을 견지할지라도, 잉글랜드 은행과 같은 기관이 상업과 산업 전반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아가 은행은 비록 형식적 범주일지라도 사회적 규모에서 생산 수단의 일반적 부기를 담당하고 그 분배의 형태를 제공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개별 자본가 (또는 특정 개별 자본)의 평균 이윤은 해당 자본이 직접 착취하는 잉여 노동이 결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총자본이 착취하는 총 잉여 노동에 규정되며, 총 잉여 노동에서 각 개별 자본은 총자본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만큼 배당을 수취할 뿐이다. 자본이 지닌 이러한 사회적 성격은 신용 및 은행 제도가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비로소 매개되고 완전히 실현된다.

 

나아가 신용 및 은행 제도는 사회 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본과 아직 능동적으로 기능하지 않는 잠재적 자본까지 산업 자본가 및 상업 자본가의 처분에 맡긴다. 이 과정에서 자본의 대부자나 사용자는 더 이상 해당 자본의 소유자나 생산자가 아니게 된다. 이처럼 신용 및 은행 제도는 자본의 사적 성격을 철폐하면서, 자본 자체의 부정을 내재적으로 포함한다. 은행 제도는 자본의 분배권을 사적 자본가와 고리대금업자로부터 회수하여 하나의 특수한 업무이자 사회적 기능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은행과 신용은 자본주의적 생산을 체제 내부의 한계 너머로 몰아붙이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되는 동시에, 공황과 사기를 촉발하는 가장 유효한 동인 중 하나가 된다.

 

나아가 은행 제도는 화폐를 각종 형태의 유통 신용으로 대체하면서, 화폐란 본질적으로 노동과 그 생산물이 지닌 사회적 성격을 특수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함을 드러낸다. 동시에 이러한 사회적 성격은 사적 생산이라는 토대와 대립하기에, 필연적으로 여타 상품과 병존하는 하나의 사물 또는 특수한 상품의 형상으로 자신을 구체화할 수밖에 없음을 명시한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협동적 노동의 생산 양식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신용 제도가 강력한 지렛대 역할을 수행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신용 제도는 생산 양식 전반의 대규모 유기적 변혁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기능할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신용 및 은행 제도의 전능한 위력을 맹신하는 허상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그 파생 형태로의 신용 제도에 대한 완전한 무지에서 기인한다. 생산 수단이 자본으로 전환되기를 멈추고 (사적 토지 소유가 폐지되는 즉시), 신용 체계는 그 존립 근거를 상실하는데, 이는 이미 생시몽주의자들도 간파했던 바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존속하는 한 이자 낳는 자본은 해당 양식의 필수적 형태로남으며 신용 제도의 근간을 이룬다. 상품 생산을 유지하면서 화폐만을 폐지하고자 했던 프루동과 같은 선동적 저술가만이 소부르주아적 염원을 현상한 무이자 신용이라는 형용 모순적 괴물을 몽상할 수 있었을 뿐이다. (마르크스, 철학의 빈곤(CW 6: 105-212);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CW 29: 323)).

 

생시몽파의 종교(45)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용의 목적은 산업 도구를 소유하고 있으나 이를 운용할 의사나 능력이 없는 집단으로부터, 노동 도구는 없으나 그 사용 방법을 숙지한 근면한 집단으로 생산 수단을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전시키는 데 있다. 이러한 정의에 입각할 때, 신용 제도는 본질적으로 특정한 소유 구성 방식에서 기인하는 결과물이다.’

 

따라서 소유 구조의 변화와 함께 그 존립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나아가 같은 책 98쪽에서는 현대 은행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오늘날의 은행은 자신의 통제 영역 밖에서 발생하는 경제 거래의 사후적 추종에 머무를 뿐, 거래 자체를 선도적으로 자극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다시 말해, 은행은 자본을 대부받는 근로자 (산업 자본가)에 대하여 단순히 자본가로의 기능적 임무를 수행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은행이 경제 전반의 지휘권을 확보하고 자신이 융자하는 기업과 추진하는 사업의 규모 및 유용성’ (101)에 힘입어 그 두각을 나타내야 한다는 사상 속에는 이미 크레디 모빌리에의 싹이 있다. 마찬가지로 페케르 또한 은행, 곧 생시몽주의자들이 일컫는 일반적 은행 제도생산 전반을 지배할것을 요구한다. 페케르는 비록 그 성향이 훨씬 급진적일지라도, 본질적으로는 생시몽주의의 궤적에 놓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페케르는 신용 기관이 국민적 생산 운동 전체를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국민적 신용 기관을 창설하여 재능과 능력을 겸비한 무산자들에게 자금을 대부하면서도, 그 차입자들을 생산과 소비의 긴밀한 연대성 속에 강제로 결합시키지 않은 채 그들이 무엇을 생산하고 교환할지를 개인의 재량에 맡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결과는 기존의 개인 은행들이 이미 초래하고 있는 무정부 상태, 곧 생산과 소비의 불일치, 일방의 갑작스러운 몰락과 타방의 급격한 치부일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용 기관은 누군가의 불행을 상쇄하는 정도의 요행을 생산하는 데 그칠 것이며, 결국 지원을 받은 임금 노동자들에게 현재의 자본가적 고용주들이 행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호 경쟁의 수단을 제공하는 꼴이 되고 만다.’ (페케르, 1842: 433, 434).

 

기존의 분석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상인 자본과 이자 낳는 자본은 자본의 가장 고전적인 형태에 속한다. 특히 이자 낳는 자본이 인민에게 가장 전형적인 자본의 모습으로 각인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상인 자본의 경우 그것이 기만이든 노동이든 일정한 매개 활동을 전제로 하는 반면, 이자 낳는 자본은 자본의 자기 증식적 성격과 잉여 가치 생산 능력을 순전히 물신적 속성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산업 자본의 발달이 미비한 국가에서는 (: 프랑스) 경제학자들조차 이자 낳는 자본을 자본의 기본 형태로 규정하며, 지대마저 그 변형된 일종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는 대부 형태의 우세함에 매몰되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내적 구성을 완전히 오해한 결과이며, 토지가 자본과 마찬가지로 오직 자본가에게 대부된다는 본질을 간과한 것이다.

 

물론 화폐 대신 기계나 업무용 건물 등 현물 형태의 생산 수단이 대부될 수도 있으나, 이들은 결국 일정한 화폐액을 표상할 뿐이다. 이때 이자 외에 마멸분에 대한 추가 비용이 지불되는 것은 해당 자본 요소가 지닌 고유한 사용 가치와 현물 형태에 기인한다. 여기서 핵심적으로 구별해야 할 지점은 생산 수단이 직접적 생산자에게 대부되는가, 아니면 산업 자본가에게 대부되는가 하는 문제다. 전자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부재를, 후자는 그 존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개인적 소비를 위한 가옥 대부 등을 이 논의에 포함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무의미하다. 노동자 계급이 주거 형태에서 극심한 기만을 당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나, 이는 노동자 계급에게 생활 수단을 공급하는 소매상들의 착취와 같은 현상일 뿐이다. , 이는 (생산 과정 내부에서 직접적으로 발생하는) 1차적 착취와 나란히 진행되는 제2차적 착취에 해당한다. 여기서 판매와 대부의 형식적 차이를 본질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현실적 연관 구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소치에 불과하다.

 

 

 고리대는 (상업과 마찬가지로) 기존에 주어진 생산 방식을 전제로 기능할 뿐, 새로운 생산 방식을 창출하지 않으며 외부로부터 그 체계와 관계를 맺는다. 고리대는 자본의 증식을 목적으로 기존 생산 방식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이용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해당 방식을 직접적으로 유지하려 노력한다.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 고리대는 본질적으로 고수적이며, 기존 생산 방식을 혁신하기보다 생산 조건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생산 요소들이 상품의 형태로 생산 과정에 유입되거나 유출되는 비중이 낮을수록, 화폐를 매개로 생산 요소를 전환하는 행위는 더욱 예외적이고 특수한 성격을 띠게 된다. , 사회적 재생산 구조 내에서 유통이 수행하는 기능적 중요성이 낮을수록, 고리대 자본은 더욱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며 번창하게 된다.

 

화폐 재산이 특수한 형태의 자산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고리대 자본이 자신의 모든 청구권을 화폐적 권리로 보유하게 됨을 의미한다. 특히 생산의 주요 영역이 현물 지급과 같은 사용 가치 중심의 교환에 국한되어 있을수록, 해당 경제 체제 내에서 고리대 자본의 지배력은 더욱 공고해진다.

 

고리대는 이중의 작용을 매개로 산업 자본이 형성될 수 있는 결정적 전제 조건들을 마련하는 강력한 지렛대가 된다.

 

첫째, 고리대는 상인 자본과 나란히 독립적인 화폐 자산을 축적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둘째, 고리대는 전통적인 생산 수단 소유자들을 경제적으로 몰락시키면서 그들로부터 노동 조건을 박탈한다.

 

중세의 이자

 

중세 사회의 주민은 순수하게 농업에 종사하였다. 봉건 제도와 같은 통치 체제 아래에서는 교역이 극히 제한되었으므로, 이윤 또한 거의 발생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중세의 고리대 금지법은 정당성을 지녔다. 더욱이 농업 중심 국가에서 화폐 차입은 대개 극심한 빈곤이나 위급 상황에 직면했을 때에만 제한적으로 발생하였다.

 

영국 역사에서 헨리 8(재위 기간: 1509-1547)는 이자율을 10%로 제한하였으며, 이후 제임스 1(재위 기간: 1603-1625)8%, 찰스 2(재위 기간: 1660-1685)6%, 앤 여왕 (재위 기간: 1702-1714)5%로 그 상한을 점진적으로 낮추었다. 당시의 대부업자들은 법률상 독점자는 아니었으나 사실상의 독점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므로, 여타 독점권과 마찬가지로 그들에 대한 규제는 불가피한 조치였다.

 

현대 경제에서는 이윤율이 이자율을 규제하지만, 그 당시에는 반대로 이자율이 이윤율을 규제하는 구조였다. 화폐 대부자가 상인에게 높은 이자율을 부과하면 상인은 상품 가격에 이를 전가하여 높은 이윤율을 붙일 수밖에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막대한 규모의 화폐가 구매자의 수중에서 화폐 대부자의 수중으로 이전되는 결과를 낳았다.’ (길바트, 은행업의 역사와 원리: 163, 164, 165).

 

보고된 바에 따르면, (100굴덴을 대부하고) (일 년에 세 번 열리는) 라이프치히 장날마다 10굴덴씩을 수취하여 연간 총 30굴덴의 이자를 챙기는 사례가 있다. 심지어 노이엔부르크 장날까지 추가하여 100굴덴당 40굴덴을 취하는 자들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행태가 일반화될 경우 초래될 결과는 자명하다.

 

라이프치히에서 100플로린을 소유한 자는 매년 40플로린을 거두어들이면서 농민이나 소생산자 한 명의 생계를 잠식한다. 자본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 폐해는 가속화되어, 1,000플로린 소유자는 매년 400플로린을 수취하며 기사나 부유한 귀족의 몫을, 10,000플로린 소유자는 매년 4,000플로린으로 부유한 백작의 자산을 집어삼킨다. 나아가 100,000플로린을 굴리는 대규모 고리대금업자는 매년 40,000플로린을 챙겨 위대한 왕자의 부를, 1,000,000플로린을 보유한 자는 매년 400,000을 받아 일국의 왕에 버금가는 부를 매년 강탈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고리대금업자는 어떠한 신체적 위험이나 상품 손실의 부담을지지 않은 채, 노동 없이 난로 앞에 앉아 안락을 누릴 뿐이다. 이 비열한 약탈자가 가만히 집에 앉아 타인의 노동 결실을 가로채는 구조가 지속된다면, 그는 단 10년 안에 세계 전체를 집어삼키게 될 것이다.’ (루터, 목사들에게, 고리대에 반대해 설교할 것(1540), 루터 저작집, 비텐베르크, 1589, 6: 312)

 

‘15년 전 고리대에 반대하는 글을 집필하였으나, 당시에도 이미 고리대는 광범위하게 만연해 있어서 어떠한 개선도 바랄 수 없었다. 그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리대는 더욱 오만해져서, 이제는 스스로를 죄악이나 악행, 또는 수치로 여겨기기는커녕 도리어 타인에게 기독교적 봉사를 베푸는 순수한 덕행이자 명예라고 자찬하고 있다. 이처럼 수치가 명예로 둔갑하고 악행이 덕행으로 변모한 상황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루터, 목사들에게, 고리대에 반대해 설교할 것).

 

유대인과 롬바드 거리의 사람들, 고리대금업자, 그리고 이른바 흡혈귀라 불리던 자들이 초기 은행업과 화폐 거래를 주도하였으며, 그들의 평판은 극도로 악명 높았다. 런던 금세공업자들 역시 이들과 한패였다. 결과적으로 초기 은행업자들의 실체는 탐욕스러운 고리대금업자이자 냉혹한 흡혈귀였으며, 본질적으로 악한들의 집단에 불과하였다.’ (하드카슬, 은행과 은행업자: 19, 20)

 

베네치아가 제시한 은행 설립의 선례는 곧 주변국으로 빠르게 확산하였다. 독립적인 지위와 상업적 역량으로 명성을 떨친 모든 해안 도시들은 앞다투어 독자적인 은행을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선박의 귀항이 장기간 지연되는 해상 무역의 특성상 신용 제공은 필연적인 관습으로 정착하였으며, 이러한 경향은 아메리카 대륙의 개척과 그에 따른 무역 확대를 기점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중요한 지적이다.)

 

대규모 선박을 전세 내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의 대부가 요구되었는데, 이는 이미 고대 아테네와 그리스에서도 확인되는 현상이었다. 이처럼 해상 무역과 신용 제도의 밀접한 연관성 속에서, 1308년 한자 동맹의 주요 도시인 브뤼즈에는 이미 보험 회사가 존재하고 있었다.’ (오지에, 1842: 202, 203).

 

17세기 최후의 3분기, (곧 근대적 신용 제도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이전까지) 영국에서조차 토지 소유자에 대한 대부와 부유층의 일반적 소비를 위한 대부가 얼마나 지배적이었는지는 노스의 저술에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노스는 영국의 일류 상인이자 당대 가장 선구적인 경제 이론가 중 한 명으로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이 나라에서 이자를 목적으로 대부되는 화폐 중 사업가들의 운영 자금으로 투입되는 비중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 자금의 대부분은 사치품 구입에 충당되거나, 자신의 토지 수익보다 과도한 지출을 일삼으면서도 토지를 매각하는 대신 저당 잡히는 대토지 소유자들의 소비를 뒷받침하는 데 활용될 뿐이다.’ (1691: 6-7).

 

18세기 폴란드의 경제적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바르샤바에서는 어음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나, 이는 실질적인 상업 활동보다는 주로 은행업자의 고리대 행위와 그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였다. 은행업자들은 방탕한 귀족들에게 8% 이상의 고율로 자금을 대부하기 위해 해외로부터 백지 어음 신용을 입수하였다. 이 어음은 상품 거래라는 실체적 근거 없이 발행되었음에도, 외국의 어음 인수인은 대금 환류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이를 인수하였다. 그러나 결국 테퍼를 비롯한 바르샤바의 일류 은행업자들이 연쇄적으로 파산함에 따라, 이들의 어음을 인수했던 외국 금융업자들은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었다.’ (뷔슈, 1808: 232, 233).

 

이자 금지가 교회에 준 이익

 

교회는 이자 수취를 금지하였으나, 빈곤 구제를 목적으로 재산을 매각하는 행위는 허용하였다. 또한 화폐 대부자에게 (대부금 상환 시까지) 재산권을 이전하는 관행 역시 규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따라 화폐 대부자는 담보권을 확보함은 물론, 해당 재산의 운용 수익을 기반으로 대부에 대한 보상을 취득할 수 있었다. 교회와 산하 종교 단체 및 자선 단체들은 이러한 관행 속에서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으며, 특히 십자군 전쟁 시기 (11-13세기)에 그 세가 절정에 달하였다.

 

이자 금지 규정은 종교 단체에 기부된 재산의 양도를 영구히 제한하는 법규와 결합하여, 국부의 상당 부분을 교회의 영구적 소유로 귀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들은 교회에 귀속된 부동산을 담보로 삼는 것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었기에 세력 확장에 제약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이자 금지라는 종교적 규율이 없었더라면, 교회와 수도원은 결코 그토록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뷔슈, 1808: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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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귀금속과 환율

 

. 금준비의 변동

 

화폐 핍박기에 발생하는 은행권 퇴장은 원시적 사회 혼란기에 나타난 귀금속 퇴장 현상과 일치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1844년 은행법은 국내의 모든 귀금속을 유통 수단으로 전환하고자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 정책적 효과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해당 법안은 금 유출 시 유통 수단을 감축하고, 반대로, 금 유입 시에는 유통 수단을 확대하면서 대응하려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와 상반된 결과가 증명되었다. 유일한 예외적 상황을 제외하면, 1844년 이래 잉글랜드 은행권의 실제 유통량은 법정 최고 발행 한도에 도달한 사례가 없다. 반면 1857년 공황은 특정한 상황에서 설정된 최고 발행 한도가 명백히 불충분함을 입증했다.

 

실제 18571113일부터 30일 사이, 1844년 은행법 효력이 정지된 직후의 통계에 따르면 법정 최고 한도를 매일 평균 488,830파운드 초과한 금액이 유통되고 있었다 (은행법, 1858: xi). 당시 법정 최고 발행 한도는 1,4475천 파운드에 잉글랜드 은행의 금속 준비금을 합산한 금액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귀금속의 유입 및 유출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제반 사항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은 비생산국 간의 금속 이동은 금·은 생산지로부터 각국으로의 유입 및 그에 따른 국가 간 분배 과정과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러시아, 캘리포니아, 오스트레일리아의 금광이 본격적인 영향을 미치기 이전인 19세기 초기까지의 귀금속 공급량은 마멸된 주화의 보충, 사치품 제조, 그리고 대()아시아 은 수출 수요를 충당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후 미국과 유럽의 아시아 무역 규모가 팽창함에 따라 아시아로의 은 유출이 급격히 증대되었다. 유럽에서 유출된 은의 공백은 대체로 유입된 금 공급으로 보전되었으며, 유입된 금의 상당 부분은 국내 화폐 유통 체계로 흡수되었다. 실제로 1857년까지 영국 국내 유통량에 추가된 금의 규모는 약 3,0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1844년 이래 유럽과 미국의 주요국 중앙은행의 금속 준비금 평균 규모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이와 같은 국내 화폐 유통량의 증가는 공황 이후의 경기 침체기에 이례적 현상을 야기한다. , 통화 부문에서 밀려난 대규모의 금화가 퇴장하면서 은행의 준비금이 비약적으로 급증하는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아울러 새로운 금광 개발 이후 부가 축적됨에 따라 사치품 제조를 위한 귀금속 소비 또한 꾸준한 증가세를 보였다.

 

둘째, 귀금속은 비생산국들 사이에서도 부단히 이동하며, 동일 국가 내에서 금의 유입과 유출이 동시에 병행되기도 한다. 최종적인 순유출입 여부는 양방향의 운동성 중 어느 쪽이 우우세한가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는 통상 교차하거나 평행하는 운동들이 상당 부분 상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론적 접근은 유출과 유입이라는 두 기제가 상호 평행하며 끊임없이 작동한다는 본질적 사실을 은폐할 위험이 있다. 일반적으로 귀금속의 과잉 수입 또는 수출은 단순히 상품 무역 수지의 결과물로만 간주되는 경향이 있으나, 실상 이는 상품 교역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귀금속 고유의 수급 관계 또한 내포하고 있다.

 

셋째, 귀금속 수지에서 수출과 수입 중 어느 쪽이 우세한가는 통상 중앙은행 금속 준비금의 증감 현황으로 가늠할 수 있다. 이러한 측정의 정확성은 우선적으로 은행 제도의 집중도에 달려 있는데, 이는 국립 은행에 비축된 귀금속이 국가 전체의 보유량을 대변하는 정도가 해당 제도의 집중 정도와 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측정법 역시 절대적으로 정확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특정 상황에서는 귀금속의 추가 수입분이 국내 유통 체계에 흡수되거나 사치재용 수요 증대로 전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귀금속의 추가 수입이 전무하더라도 국내 유통을 위한 금화 인출이 발생할 수 있으며, 이 경우 귀금속 수출의 실질적 증가 없이도 금속 준비금의 감소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넷째, 귀금속 수출이 실질적인 유출의 형태를 취하는 것은 금속 준비금의 감소세가 장기간 지속되어 일반적 경향으로 고착화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국립 은행의 금속 준비금이 상시적인 평균 수준을 크게 하회하여 법적 또는 관습적으로 설정된 최저 한도에 도달했을 때를 지칭한다. 다만, 이 최저 한도는 은행권 태환 보증 등에 관한 각국 법령에 따라 상이하게 규정되므로, 다소 임의적인 성격을 갖는다. 영국 내 귀금속 유출이 도달할 수 있는 양적 한계와 관련하여 뉴마치는 은행법, 1857(1494)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실증적 근거에 입각하여 볼 때, 대외 거래 변동으로 인한 귀금속 유출액이 300만 내지 400만 파운드를 초과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실제 사례를 검토하면, 18471023일 잉글랜드 은행의 금 준비금은 당해 최저 수준을 기록했는데, 이는 18461226일 대비 5198,156파운드 감소한 수치이며, 1847년 내 최고치였던 829일과 비교하면 6453,748파운드가 급감한 결과였다.

 

다섯째, 국립 은행 금속 준비금의 기능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다만 준비금의 규모는 이 기능들만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국내 사업 및 대외 거래의 침체에 따른 유입으로도 확대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1. 대외적 지불을 위한 준비금, 곧 세계 화폐로의 예비적 기능.

 

2. 국내 금속 유통량의 팽창과 수축에 대응하기 위한 완충 기능.

 

3. 예금 지급 및 은행권 태환을 보증하기 위한 지불 준비 기능 (이는 은행 고유의 기능으로, 단순한 화폐 기능과는 구별된다).

 

따라서 금속 준비금은 상기 세 가지 기능 중 어느 하나에 따라서도 변동될 수 있다. 대외적 준비금으로는 지불 차액의 향방에 따라, 국내 유통 준비금으로는 통화량의 수축과 팽창에 따라 그 규모가 결정된다.

 

특히 세 번째 기능인 지급 보증 준비금으로의 역할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운동성을 갖지는 않으나 준비금 전체에 이중적 영향을 미친다. 은행권이 국내 유통에서 금속 화폐를 대체하여 발행된다면, 국내 유통 완충이라는 두 번째 기능은 소멸된다. 이 경우 해당 목적에 기여하던 귀금속 중 일부는 영구히 해외로 유출되며, 국내 유통을 위한 금속 주화 인출이나 유통 중인 금속의 비화폐화에 따른 환류를 매개로 한 일시적 준비금 확충 기제 또한 사라진다.

 

나아가 예금 지급과 은행권 태환을 위해 어떠한 사정에서도 유지해야 할 최소 한도의 금속 준비금 설정은 금의 유입과 유출 결과에 특수한 방식으로 관여한다. 이는 금속 준비금 중 은행이 반드시 보유해야 할 필수분과 불필요하여 처분하고자 하는 잉여분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순수 금속 유통 체제와 집중화된 은행 제도 하에서 은행은 금속 준비금을 예금 지급을 위한 핵심 보증 자산으로 간주해야 하며, 이 경우 금속 유출은 1857년 함부르크 사례와 같은 심각한 공황을 야기하는 도화선이 된다.

 

여섯째, 1837년의 예외적 사례를 제외하면, 현실의 공황은 항상 환율이 호전되고 귀금속 수입이 수출을 상회하기 시작한 시점에 본격화되었다.

 

실례로 1825년의 실질적 공황은 금 유출이 중단된 이후 발생했으며, 1839년에는 금 유출이 진행되었음에도 공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847년의 경우 금 유출은 4월에 멈췄으나 공황은 10월에 이르러서야 나타났고, 1857년 역시 국외 금 유출이 11월 초에 중단된 뒤 11월 하순에 본격적인 공황이 도래했다.

 

이러한 경향은 1847년 공황에서 특히 극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금 유출은 상대적으로 경미한 예비적 공황을 야기한 후 4월에 이미 종료되었으며, 진정한 의미의 상업 공황은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난 10월에야 비로소 발발하였다.

 

1848년 상원 특별 위원회에서 제기된 상업 공황에 관한 투크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상업 불황, 1848-1857).

 

투크의 증언.

 

‘18474월의 금융 핍박은 실질적으로 금융 공황의 양상을 띠었으나, 지속 기간이 비교적 짧았으며 유의미한 상업적 파산을 동반하지는 않았다. 반면 10월에 발생한 금융 핍박은 4월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전례 없는 규모의 상업적 파산을 야기했다 (2996).

 

4월에는 대미 환율을 비롯한 제반 여건으로 인해 이례적인 대규모 수입 대금을 결제하고자 막대한 양의 금을 수출해야 했다. 이에 잉글랜드 은행은 비상 대책을 강구하여 금 유출을 저지하고 환율 인상을 도모했다 (2997).

 

이후 환율은 10월에 이르러 영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2998).

 

이러한 환율의 반전은 이미 4월 셋째 주부터 시작되었다 (3000).

 

환율은 7월과 8월 사이의 변동을 거쳐 8월 초 이후로는 지속적으로 영국에 유리한 상태를 유지했다 (3001).

 

따라서 8월에 발생한 금 유출은 대외 거래가 아닌 국내 유통 수요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3003).’

 

잉글랜드 은행 총재 모리스의 증언에 따르면, 18478월 이후 환율이 영국에 유리하게 형성되어 금 유입이 발생했음에도 잉글랜드 은행의 금속 준비금은 오히려 감소하는 양상을 보였다.

 

220만 파운드의 금이 국내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시중으로 유출되었다 (137).’

 

이러한 현상의 원인으로는 철도 건설 가속화에 따른 노동자 고용 증대와 더불어,

 

공황 위험에 대비하여 개별 은행들이 자체적인 금 준비금을 확보하려 했다 (147).’

 

1811년부터 이사로 재직한 전 총재 파머의 증언.

 

‘18474월 중순부터 1844년 은행법 효력이 정지된 18471025일까지의 전 기간에 걸쳐 환율은 영국에 유리하였다 (684).’

 

결과적으로 18474월 화폐 공황의 촉발 요인이 된 금속 유출은 통상적인 공황의 전조 현상이었을 뿐이며, 공황이 본격적으로 발발하기 전에 이미 그 추세가 반전되어 있었다. 이는 1839년 심각한 불황 속에서 곡물 대금 결제 등을 위해 상당량의 금속 유출이 발생했음에도, 실질적인 공황이나 화폐 위기로까지는 번지지 않았던 사례와도 일치한다.

 

일곱째, 일반적 공황이 수습되고 안정 상태로 복귀하면, 생산국으로부터의 새로운 유입분을 제외한 금과 은은 각국의 기존 금 준비금 보유 비율에 따라 재분배된다. 기타 조건이 동일하다면, 각국 금속 준비금의 상대적 규모는 세계 시장에서 해당 국가가 점하는 기능적 비중에 따라 결정된다. 이에 따라 귀금속은 적정 분배 몫을 초과 보유한 국가로부터 부족분 국가로 유입되며, 이러한 유출입 운동은 국가 간 준비금의 초기 분배 상태를 복원하는 과정으로 귀결된다.

 

다만 이러한 재분배 과정은 환율과 관련된 제반 변수들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일단 적정 분배가 확립되면 그 기점으로부터 다시 준비금의 증대와 유출이 반복되는 순환 구조가 나타난다. (엥겔스: 이 마지막 문장은 세계 화폐 시장의 중심지인 영국에 한하여 유효함이 명백하다.)

 

여덟째, 금속 유출은 통상 대외 무역 조건이 변동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전조이며, 이는 경제 상황이 다시금 공황 국면에 근접하고 있다는 선행적 경고의 성격을 띤다.

 

아홉째, 지불 차액은 아시아 시장에 대해서는 흑자를 기록할 수 있는 반면, 유럽과 미국 시장에 대해서는 적자 양상을 보일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귀금속의 수입은 주로 다음의 두 시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한다.

 

(1) 첫째, 공황 직후의 낮은 이자율 국면으로, 이는 생산 활동의 축소를 실증한다.

 

둘째, 이자율이 점진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하나 아직 그 평균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국면이다. 이 두 번째 국면에서는 귀금속이 유입되고 자본의 환류가 활발하며 상업 신용이 풍부하게 제공되므로, 생산 규모의 확대에도, 대부 자본에 대한 수요는 그에 비례하여 급격히 증가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대부 자본이 상대적으로 과잉 상태에 놓이는 이 두 시기 동안, 주로 대부 자본의 형태로 기능하는 귀금속의 대량 유입은 시중 이자율을 하락시키며, 나아가 경제 전반의 사업적 분위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2) 자본의 환류가 지체되고 시장 내 상품 공급 과잉이 심화되는 가운데 신용에 힘입은 외형적 번영이 유지될 때, 곧 대부 자본에 대한 강력한 수요로 인해 이자율이 평균 수준에 도달한 시점부터 귀금속의 지속적이고 급격한 유출이 나타난다.

 

귀금속 유출에 집약된 이러한 경제 상황 하에서, 가용 대부 자본의 직접적 형태인 귀금속이 외부로 지속 소진되는 것은 시장에 지대한 타격을 입힌다. 이는 필연적으로 이자율 상승을 견인하며, 이때의 이자율 상승은 신용 거래를 진정시키기보다 오히려 신용 재원을 극한으로 활용하여 신용 팽창을 가속화한다. 따라서 이 시기는 공황 또는 경제적 파국이 도래하기 직전의 전조 단계라 할 수 있다.

 

뉴마치의 증언 (은행법, 1857)은 다음과 같다.

 

질문자: 유통하는 어음의 금액은 할인율의 상승과 함께 증가하는가.

 

뉴마치: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1520).’

할인율의 상승과 시중 어음 유통 총액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뉴마치는 이자율 상승 시기에 어음 유통액이 도리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1520).

 

평상시에는 은행 계좌를 매개로 한 결제가 주요 교환 수단으로 기능하나, 잉글랜드 은행의 할인율 인상과 같은 경제적 곤란이 발생하면 거래 형식이 자연히 어음 발행에 의존하게 된다. 이는 어음이 이미 이루어진 거래애 대한 법적 증거로 유용할 뿐만 아니라, 타처에서의 물품 구매 및 특히 자본 차입을 위한 신용 수단으로 탁월한 편의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1522).’

 

나아가 위기 국면에서 잉글랜드 은행이 할인율을 인상할 경우, 어음의 유통 기간 단축 전망과 추가적인 할인율 인상에 대한 시장의 우려가 동시에 확산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로 인해 투기 세력 (특히 신용 투기꾼들)을 포함한 경제 주체들은 장래의 어음 (선물)을 앞당겨 할인하면서 가용한 신용 수단을 최대한 확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상의 논의가 시사하는 바는 단순히 귀금속의 절대적인 수출입량 자체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귀금속의 이동이 파급력을 갖는 이유는,

 

첫째, 그것이 화폐 형태의 자본이라는 고유한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둘째, 미세한 수급 불일치만으로도 체제의 평형이 무너질 수 있는 임계 상황에 귀금속의 이동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이는 평형을 유지하던 저울에 깃털 하나가 더해지면서 급격한 기울기가 발생하는 원리와 같다.)

 

이러한 기제를 배제한다면, 종전의 실증적 최대치인 500만 내지 800만 파운드 규모의 금 유출이 어떻게 그토록 심대한 충격을 유발하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이 정도의 자본 증감은 영국 내 평균 금 유통액인 7,000만 파운드와 비교해도 미미한 수준이며, 영국의 총생산 규모에 비하면 사실상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극소한 수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용 및 은행 제도의 고도화는 한편으로 모든 화폐 자본을 생산 과정에 투입하거나 화폐 수입을 자본으로 전환하도록 강제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산업 순환의 특정 국면에서 금속 준비금을 그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운 최소 한도까지 축소시킨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제도의 발달은 경제 유기체 전체를 과도하게 민감한 상태로 몰아넣는다.

 

생산 발전의 단계가 낮았던 시기에는 금 준비금이 평균치에서 다소 변동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매우 심각한 수준의 금 유출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산업 순환의 결정적 시기와 맞물리지 않는 한 상대적으로 미미한 영향만을 미쳤을 뿐이다.

 

상기 논의에서는 흉작 등으로 초래되는 예외적 금속 유출의 경우는 배제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생산 안정성에 급격하고 중대한 단절을 야기하며,

 

금 유출은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적 표현일 뿐이므로, 해당 파급 효과를 재차 부연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러한 생산의 단절이 과잉 팽창기에 발생할수록 금속 유출이 경제 전반에 미치는 충격의 강도는 더욱 증폭된다.

 

아울러 금속 준비금이 지니는 은행권 태환 보증 기능 및 신용 제도 전반의 회전축으로의 역할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중앙은행이 신용 제도의 핵심 축이라면, 금속 준비금은 다시 중앙은행을 지탱하는 회전축으로 기능한다.

 

신용 제도가 화폐 제도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은 이미 제권 제3장 제3(b)의 지불 수단 논의에서 규명된 바 있다. 투크와 오브스톤 역시 결정적인 위기 국면에서 금속 토대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부의 막대한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공히 인정하고 있다.

 

논쟁의 핵심은 해당 기제가 실질적으로 정 (+)의 효과를 산출하는가 또는 부 (-)의 효과를 초래하는가에 있으며, 나아가 불가피한 경제적 현상을 타개함에 있어 어떠한 방식이 더 합리적인가에 국한된다. 전체 생산 규모와 대조할 때 지극히 미미한 양에 불과한 귀금속이 신용 제도의 결정적인 회전축으로 공인됨에 따라, 공황기에는 이러한 회전축으로의 성격이 공황에서 전율할 정도로 발현될 뿐만 아니라 이론적 이원론마저 표면화된다. , 자칭 계몽된 경제학은 자본일반을 논할 때는 금·은을 가장 부차적이고 무용한 자본 형태로 경멸하는 태도를 취하면서도, ‘금융의 영역에 들어서는 순간 태도를 급변하여 이를 가장 우월한 자본으로 격상시킨다. 결국 이 배타적 자본을 보존하기 위해 여타의 모든 자본 형태와 노동은 희생되어야만 하는 모순적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다면 귀금속은 여타의 부와 어떠한 원리로 구별되는가. 이는 가치의 절대적 크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귀금속의 가치 크기 역시 그 안에 대상화된 노동량에 따라 규정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귀금속이 갖는 차별성은 그것이 부의 사회적 성격을 독립적으로 체현하는 표상이자 표현이라는 점에서 도출된다.

 

(엥겔스: 사회적 부는 개별 사적 소유자들의 부로 구성되며, 이들이 각자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질적으로 상이한 사용 가치들을 상호 교환하면서 사회적 성격을 획득한다. 자본주의 생산 양식 하에서 이러한 교환은 오직 화폐를 매개로만 수행될 수 있으며, 따라서 개인의 부는 화폐를 매개로 비로소 사회적 부로 실현된다. 결과적으로 부의 사회적 성격은 화폐라는 특정한 사물에 체현된다.)

 

이러한 부의 사회적 존재, 곧 화폐나 귀금속은 사회적 부를 구성하는 실물적 요소들과 병행하면서도 그 외부에 존재하는 독립적인 사물·대상·상품으로, 이른바 배타적 지위를 점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생산 활동이 원활히 전개되는 국면에서 부의 사회적 성격은 망각되기 마련이다. 부의 또 다른 사회적 형태인 신용은 화폐를 유통 영역에서 축출하고 그 지위를 대체한다. 이때 생산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신뢰는 생산물의 화폐적 형태를 단지 일시적이고 관념적인 현상으로 치부하게 만든다.

 

그러나 근대 산업 순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신뢰의 동요가 발생하면, 모든 실물적 부를 즉각적으로 현실 화폐인 귀금속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요구가 대두된다. 이는 성립될 수 없는 비논리적 요구임에도 체제 자체의 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하는 필연적 현상이다. 결국 이러한 거대한 전환 수요를 충당해야 할 귀금속의 실체는 잉글랜드 은행 금고에 보관된 수백만 파운드 스털링이라는 지극히 제한된 규모에 불과하다는 한계에 직면한다.

 

금 유출은 그 파급 효과를 매개로 생산이 사회적 성격을 띠면서도 실제로는 사회적 통제 아래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과, 부의 사회적 형태인 화폐가 실물적 부와 나란히 독립된 사물로 존재한다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현상은 상품 거래와 사적 교환을 기초로 하는 모든 이전의 생산 체제에서도 유효하나, 자본주의 체제에 이르러 비로소 그 불합리한 모순과 역설이 가장 첨예하고 기괴한 형태로 발현된다. 그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생산자 자신의 직접적인 사용 가치를 위한 생산이 사실상 폐지되었으며, 그 결과 부는 오직 생산과 유통이 유기적으로 맞물린 사회적 과정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둘째, 자본주의적 생산은 신용 제도의 발달에 힘입어 부와 그 운동에 대한 귀금속이라는 물적·관념적 한계를 부단히 극복하려 시도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그 한계에 다시 부닥치기 때문이다.

 

결국 공황 국면에서는 유통되는 모든 어음과 유가 증권, 상품이 일시에 은행 화폐로 전환되어야 하며, 나아가 그 모든 은행 화폐가 다시 금으로 태환될 수 있어야 한다는 성립될 수 없는 요구가 분출된다.

 

. 환율

 

(엥겔스: 화폐 금속의 세계적 이동을 나타내는 지표는 환율이다. 가령 영국이 독일에 지불해야 할 채무가 독일이 영국으로부터 받을 채권보다 많을 경우, 런던 시장에서 파운드 스털링으로 표시된 마르크화의 가격은 상승하며, 반대로 함부르크나 베를린 시장에서 마르크화로 표시된 파운드 스털링의 가격은 하락한다. 이러한 영국의 대독 지불 채무 초과 상태가 독일의 영국 물품 구매 등으로 상쇄되지 않고 지속될 경우, 독일 앞으로 발행된 마르크 표시 어음의 스털링 가격은 영국에서 독일로 어음 대신 금속 (금화 또는 금덩이)을 보내는 것이 유리해지는 지점까지 상승하게 된다. 이것이 세계적 자금 결제와 금속 이동이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과정이다.)

 

귀금속 유출이 대규모로 장기간 지속될 경우, 영국의 은행 준비금은 축소되며 잉글랜드 은행을 필두로 한 영국 화폐 시장은 방어 기제를 가동하게 된다. 이러한 보호 조치의 핵심은 이자율 인상이다. 막대한 금 유출이 발생하면 화폐 시장의 유동성이 고갈되며, 화폐 형태의 대부 자본에 대한 수요가 공급을 압도함에 따라 이자율은 자연스럽게 상승한다. 잉글랜드 은행이 공표하는 할인율은 이러한 시장 상황에 대응하여 실효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금속 유출이 통상적인 상거래 외적 요인, 곧 외국 정부에 대한 차관 제공이나 해외 자본 투자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경우, 런던 화폐 시장의 자생적 조건만으로는 이자율의 실질적 인상을 정당화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때 잉글랜드 은행은 이른바 공개 시장에서 대규모 차입을 단행하여 화폐를 인위적으로 흡수하면서’, 이자율 인상을 뒷받침하거나 강제할 수 있는 수급 불일치 상태를 창출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시장 개입은 금융 여건의 변화에 따라 매년 그 난이도가 높아지는 추세에 있다.)

 

이자율 인상이 환율에 미치는 구체적인 영향은 은행법, 1857에 수록된 존 스튜어트 밀의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증언.

 

경제 사정이 악화되면 유가 증권의 가격이 급격히 하락한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외국인들은 저평가된 영국의 철도 주식을 매입하려 하고, 해외 철도 주식을 보유한 영국인들은 이를 현지에서 매각하여 자금을 회수한다. 이러한 자본의 유입은 결과적으로 국내 금의 해외 유출을 완화하는 효과를 낸다 (2176).’

 

또한 각국 간 이자율 차이와 상업적 압박을 평준화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은행업자와 증권업자들은 향후 가격 상승이 예측되는 증권 매집에 항상 주력한다. 이들이 증권을 집중적으로 구매하는 지점은 다름 아닌 금 유출이 발생하고 있는 국가다 (2182).’

 

실제로 이러한 방식의 자본 투자는 1847년에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졌으며, 당시 금 유출의 충격을 상당 부분 완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2184).’

 

잉글랜드 은행의 전 총재이자 1838년부터 이사로 재직한 허바드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유럽 각국의 화폐 시장에는 대규모의 증권이 유통되고 있으며, 특정 시장에서 증권 가격이 1-2%만 하락해도 이를 즉시 매입하여 가격이 유지되고 있는 타국 시장으로 이전시키는 거래가 활발히 일어난다 (2545).’

 

영국 상인들에 대한 외국의 채무 규모는 매우 방대한 수준이다 (2565).’

 

질문자: 그렇다면 단순히 이러한 외국에 대한 채권의 회수만으로도, 영국 내에 그토록 거대한 자본이 축적되는 현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허바드: 그렇다. 1847년의 사례가 이를 실증한다. 당시 미국과 러시아가 영국으로부터 차입했던 수백만 파운드 스털링의 채권을 회수하는 과정에 힘입어, 영국의 지불 수지는 궁극적으로 개선될 수 있었다. , 거대한 자본 축적의 배경에는 위기 시 가동되는 이러한 대외 채무의 정리 및 회수 기제가 작용하고 있다 (2566).’

 

(엥겔스: 당시 영국은 해당 국가들로부터 수입한 곡물 대금으로 인해 역으로 수백만 파운드 스털링의 부채를 지고 있었으나, 영국 채무자들이 연쇄 파산함에 따라 그 상당액을 실제로지불하지 않았다.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제30장 말미에 인용된 은행법, 1857을 참조하라.)

 

‘1847년 당시 영국의 대()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환율은 매우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었다. 잉글랜드 은행이 법적 발권 한도를 초과하여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도록 (금속 준비 없이 발행되는 정액 발행 한도인 1,400만 파운드를 초과하여) 허용한 정부 서한이 공개되었을 때, 그 전제 조건은 할인율을 8%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금리 상황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런던으로 금을 수송한 뒤, (금 구매를 위해 발행된) 3개월 만기 어음의 기간 동안 해당 자금을 8%의 이율로 대부하는 것이 오히려 수익성 높은 거래로 평가되었다 (2572).’

 

모든 금 거래에 있어서는 다각적인 검토가 요구된다. , 단순히 환율의 동향뿐만 아니라 금 거래를 매개로 발행된 어음의 만기 시점까지 적용되는 화폐 대부 이자율을 반드시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2573).’

 

아시아에 대한 환율

 

상기 논점들이 지닌 중요성은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 도출된다.

 

첫째, ()아시아 환율이 영국에 불리하게 형성될 경우, 영국이 (아시아로부터의 수입 결제를 자국 상인을 경유하여 처리하는) 타국들로부터 그 손실을 어떠한 방식으로 보전하려 하는지 규명해주기 때문이다.

 

둘째, 윌슨이 귀금속 수출이 환율에 미치는 영향과 자본 일반의 수출이 환율에 미치는 영향을 동일시하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수출은 단순한 구매나 지불 수단의 이전만이 아니라,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 투하로의 성격을 띤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명한 사실은 인도의 철도 건설 투자를 위해 막대한 자본을 투입할 때, 그 수단이 귀금속이든 철도 자재이든 이는 단지 형태상의 차이일 뿐이며 어느 경우에나 동일한 가치의 자본이 이전된다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이전은 일반적인 상업 거래와 달리, 수출국인 영국이 당장의 반대 급부 대신 해당 투자로부터 발생할 장래의 연간 순익만을 기대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 자본 수출이 귀금속 형태로 이뤄진다면, 귀금속은 그 자체로 직접 대부 가용 화폐 자본이자 화폐 제도 전체의 토대이기에 수출국의 화폐 시장과 이자율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런던 화폐 시장에 공급된 인도 앞 어음이 특별 송금 수요를 충당하지 못해 귀금속을 현물로 수송해야 할 경우, 이 귀금속의 수출은 환율에도 직접적인 파급력을 갖는다.

 

이때 인도 앞 어음에 대한 수요가 공급을 압도하면서 영국의 환율은 일시적으로 불리해지는데, 이는 영국이 인도에 실제 채무를 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대규모 자금을 인도 측으로 송부해야 하는 상황 자체에 기인한다. 장기적 관점에서 이러한 귀금속 수출은 인도의 유럽 상품 소비 능력을 간접적으로 제고하면서, 결과적으로 영국 상품에 대한 인도의 수요를 증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반면, 자본이 철도 자재와 같은 현물 형태로 수출될 경우, 인도는 이에 대한 (즉각적인) 지불 의무가 없으므로, 환율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과정은 화폐 시장에도 직접적인 파급력을 갖지 않는다. 윌슨은 이러한 특별 투자가 화폐 융통에 대한 추가 수요를 유발하여 이자율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보았으나, 이를 필연적 현상으로 단정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철도 자재의 수출은 단지 해당 분야에서 영국 내 생산 활동이 확장되었음을 의미할 뿐이다.

 

생산 규모의 증대가 반드시 이자율 인상을 수반해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신용 거래를 포함한 화폐 융통액은 증가하더라도 이자율은 불변일 수 있으며, 이는 1840년대 영국의 철도 건설 열풍 당시 이자율이 상승하지 않았던 사례로 증명된다. 현실적 자본, 곧 상품이 문제되는 한 그것이 해외 수출용이든 국내 내수용이든 화폐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동일하다.

 

다만 영국의 대외 자본 투자가 지불 및 (화폐) 환류를 전제로 하는 통상적인 상업적 수출을 제한하거나, 해당 투자가 이미 신용의 과도한 팽창 및 투기적 책동의 개시를 알리는 전조로 작용할 때에 한하여 유의미한 차별성이 발생할 뿐이다.

 

윌슨의 질의에 대한 뉴마치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질의 (윌슨): 은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여 동양으로 끊임없이 거액의 귀금속이 송부되었음에도, 인도와의 환율이 영국에 유리하게 유지되었다는 주장의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해 달라.

 

답변 (뉴마치): 그 근거는 영국의 대()인도 상품 수출액과 인도 하우스 어음의 규모를 합산한 총 수출 가치에서 명확히 증명된다. 우선 1851년의 통계를 살펴보면, 인도에 대한 영국 상품 수출의 현실 가치는 742만 파운드였으며, 여기에 런던의 인도 하우스 (런던 동인도 회사 본사)가 자체 경비 지출을 위해 발행한 어음 금액인 (곧 동인도 회사가 본사 경비를 충당하고자 인도 정부로부터 인출할 금액)320만 파운드를 추가해야 한다. 따라서 그해 인도에 대한 영국의 실질적인 총 수출액은 1,062만 파운드에 달했다.

 

이러한 수출 증대 추세는 1855년에 더욱 뚜렷해졌다. 당시 영국 상품의 인도 수출 현실 가치는 1,035만 파운드로 늘어났고, 인도 하우스의 어음 금액 또한 370만 파운드로 증가함에 따라 영국의 총 수출액은 1,405만 파운드를 기록하였다.

 

반면, 1851년의 수치는 확인할 수 없으나, 1854년과 1855년의 통계는 존재한다. 1855년 인도가 수입한 영국 상품의 총 현실 가치는 1,267만 파운드에 머물렀다. 이를 영국의 총 수출액인 1,405만 파운드와 비교해 보면, 영국은 인도와의 직접 무역에서만 138만 파운드의 흑자를 달성한 셈이 된다. 결과적으로 인도로 막대한 양의 귀금속이 유입되었음에도, 무역 수지와 금융 채권 (어음)의 우위로 인해 환율은 여전히 영국에 유리한 국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1786).’

 

윌슨은 이러한 진술에 대해 환율이 간접 무역을 매개로 하여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가령 인도가 오스트레일리아나 북아메리카로 수출하는 재화의 대금 결제가 런던 앞 어음을 거쳐 이루어진다면, 이는 인도가 영국에 직접 상품을 수출하는 경우와 동일한 환율 변동 효과를 야기한다. 나아가 인도와 중국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어 고찰할 경우 영국의 무역 수지는 적자로 돌아선다. 중국은 인도에 막대한 아편 대금을 지급해야 하는 채무국이며, 영국은 중국에 각종 상품 대금을 지급해야 하는 상황에서 해당 자금이 이러한 우회로를 거쳐 최종적으로 인도에 집결되기 때문이다 (1787, 1788).

 

1791호에서 윌슨은 자본의 수출이 철도 자재와 기관차의 형태로 이루어지든 금속 화폐의 형태로 이루어지든환율에 미치는 영향은 동일하지 않은가에 대해 질의한다. 이에 대한 뉴마치의 답변은 매우 타당하다. , 최근 인도의 철도 건설을 위해 송부된 1,200만 파운드는 (인도가 영국에 정기적으로 지불해야 할) 연금 증권을 구매한 것과 동일한 경제적 기능을 수행한다.

 

다만 귀금속 시장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의 측면에서 고찰할 때, 해당 1,200만 파운드의 투자는 오직 현실적인 화폐 결제를 목적으로 귀금속이 직접 수출되어야 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웨겔린의 질의) ‘이 철도 자재에 대한 즉각적인 대금 결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환율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는가. 투자액 중 상품 형태로 송부된 부분은 환율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본다. 양국 간 환율은 일방에서 제시되는 채무액 (또는 어음액)과 상대국에서 제시되는 그것 사이의 상호 비교를 토대로 결정되며, 이것이 환율의 논리적 핵심이다. 1,200만 파운드의 자본 수출을 가정할 때, 해당 자금은 먼저 본국에서 모집된다. 1,200만 파운드 전액이 귀금속 형태로 캘커타, 봄베이 (현 뭄바이), 마드라스 (현 첸나이)에 투하되어야 한다면, 이러한 급격한 수요는 은 가격과 환율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는 동인도 회사가 어음 발행액을 익일부터 300만 파운드에서 1,200만 파운드로 증액하겠다고 통보하는 상황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1,200만 파운드의 절반은 영국 내에서 철도 자재, 목재 등 제반 재료를 구입하는 데 지출된다. 이는 인도로 송부할 특정 상품의 구매를 위해 영국 자본을 국내에서 소비하는 것에 불과하다 (1797).’

 

(웨겔린) ‘다만 철도 건설에 필요한 철이나 목재 등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외국산 원자재의 대량 소비가 수반된다면, 그로 인해 간접적으로 환율이 영향을 받지 않겠는가. 그 점은 분명히 타당하다 (1798).’

 

이후 윌슨은 철의 생산이 주로 노동력에 의존하며, 해당 노동자들에게 지급되는 임금의 상당 부분이 수입 상품 소비로 이어진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1799). 이어 그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일반적으로 수입 원자재를 투입하여 생산한 상품을, 그에 상응하는 현물 대가 없이 수출하게 된다면 결국 환율은 자국에 불리하게 형성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원리는 (1845) 영국의 대규모 철도 투자 시기에 명확히 드러났다. 당시 3-5년에 걸쳐 철도 건설에 투하된 3,000만 파운드의 자본은 거의 전액 임금으로 지출되었다. 3년 동안 철도와 기관차, 차량 및 역사 건설에 투입된 노동 인구는 전체 공업 지대의 노동자 수를 상회할 정도였다. 이들은 임금을 차, 설탕, 주류 등 외국산 수입 상품 소비에 지출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막대한 지출이 발생했음에도, 실제 환율은 거의 변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당시 귀금속의 유출은 발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유입되는 양상을 보였다 (1801).’

 

윌슨은 영국과 인도 사이의 무역 수지가 평형 상태를 이루고 환율이 화폐의 금속 평가 수준에 있을 때, 철도 자재와 기관차의 특별 수출이 단행된다면 이는 인도와의 환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뉴마치는 철도 자재가 자본 투자의 형태로 수출되고 인도가 이에 대한 (즉각적인) 결제 의무를 지지 않는 한, 해당 견해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한 나라가 모든 무역 상대국에 대하여 장기간 불리한 환율을 유지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특정 국가와의 거래에서 발생하는 불리한 환율은 반드시 타국과의 거래에서 유리한 환율을 형성하면서 상쇄되기 마련이다 (1802).’

 

이에 대해 윌슨은 다음과 같은 통상적인 반론을 제기한다.

 

자본이 어떠한 형태로 수출되든 자본 이전이라는 실체는 동일한 것이 아닌가. 채무 관계가 형성되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자명하다 (1803).’

 

그렇다면 귀금속을 수출하든 현물 원자재를 수출하든, 인도의 철도 건설이 영국의 화폐 시장에 미치는 영향 또한 동일해야 하지 않는가. 이전되는 금액 전액이 귀금속으로 수출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투하된 자본의 가치만큼 국내 자본의 희소성을 높여 그 가치를 증대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1804).’

 

철도 자재의 가격이 상승하지 않았다면, 이는 최소한 해당 재화에 집약된 자본가치가 증대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증거다. 그러나 본 논의의 핵심은 자본 일반이 아닌 화폐 자본의 가치, 곧 이자율에 있다. 윌슨은 화폐 자본과 자본 일반을 동일시하려 하나, 현상의 실체는 이와 다르다.

 

우선 인도의 철도 건설을 위해 영국 내에서 1,200만 파운드를 공개 모집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환율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자금의 구체적 용도 또한 화폐 시장의 관점에서는 본질적인 고려 대상이 아니다. 화폐 시장이 안정적인 상태라면 1844년과 1845년의 영국 철도주 공모 사례와 마찬가지로, 이번 공모 역시 화폐 시장에 유의미한 충격을 주지 않을 것이다.

 

설령 화폐 시장이 이미 어느 정도 수급 불일치 상태에 놓여 있어 이자율이 인상되더라도, 이는 윌슨의 이론적 논리에 따르더라도 오히려 환율을 영국에 유리하게 형성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 이자율 상승은 귀금속의 해외 유출 경향을 제어하며, 설령 인도에 대한 수출이 지속되더라도 최소한 타국에 대한 귀금속 유출은 저지하는 효과를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윌슨은 논리적 일관성 없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비약하고 있다. 1802호에서는 환율의 변동을 논하다가 제1804호에 이르러서는 자본의 가치를 거론하는데, 이 둘은 엄연히 별개의 영역이다. 이자율과 환율은 상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관계이나, 어느 한쪽이 변동하더라도 다른 한쪽은 불변일 수 있는 독립성을 지닌다.

 

그럼에도 윌슨은 해외로 수출되는 자본의 형태, 곧 그것이 화폐 형태를 취하느냐 아니냐가 미치는 결정적 차이를 부정한다. 이는 자본의 형태적 특수성을 중시하는 자칭 계몽된 경제학의 모든 경향 전반에 배치되는 태도다.

 

뉴마치 역시 윌슨의 질의에 일면적인 답변으로 일관하며, 윌슨이 타당한 근거 없이 환율에서 이자율로 논의를 급격히 비약한 점을 지적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제1804호에 대한 뉴마치의 답변은 논리적 불확실성과 동요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1,200만 파운드의 자금을 모집할 때, 이를 귀금속으로 송부하든 원자재로 송부하든 일반 이자율의 관점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점은 자명하다. 그러나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기점으로 논의의 방향을 완전히 뒤집는다.) 이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또 이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도대체 이런 궤변적인 논리가 어디에 있는가!)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600만 파운드가 즉시 환류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그 환류 속도가 지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600만 파운드가 국내에서 지출되느냐 또는 전액 국외로 수출되느냐에 따라 어느 정도의 (도대체 이런 임의적인 규정이 어디에 있는가!) 차이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뉴마치는 중요하지 않다는 전제 뒤에 곧바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라는 형용 모순적 결론을 내놓고 있다. 또한 그 차이의 정도를 어느 정도약간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규정하면서 논리적 완결성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600만 파운드가 즉시 환류한다는 주장의 실체를 규명해야 한다. 이 자금이 영국 내에서 지출되어 철도 자재나 기관차 등의 현물로 변환되었다면, 해당 가치는 인도로 송부되어 고정 자본화되며, 감가상각을 거쳐서야 비로소 극히 완만하게 환류될 뿐이다. 반면 600만 파운드가 귀금속 형태로 인도에 송부되었다면, 그 귀금속은 무역 결제 경로를 매개로 오히려 더 신속하게 영국으로 환류할 개연성이 크다.

 

영국 내에서 지출된 600만 파운드가 임금으로 지급되었다면 이는 소비로 소멸되나, 투하된 화폐 자체는 국내 유통 영역에 머물며 준비금을 형성하거나 철도 자재 생산자의 이윤 및 불변 자본 보충분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뉴마치가 환류라는 모호한 표현을 동원한 것은 화폐가 국내에 잔류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함에 다름 아니다. 화폐가 대부 가용 자본으로 존재하는 한, (유통 영역에 더 많은 금속 화폐가 흡수되었을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차이란 단지 그 화폐가 B가 아닌 A의 계좌에서 지출된다는 사실뿐이다.

 

(자본이 귀금속이 아닌 상품 형태로 타국에 이전되는) 투자가 환율 (단순히 피투자국과의 환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경로는, 수출용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타국으로부터 원자재를 추가로 수입해야 하는 경우뿐이다. 비록 이 생산 활동이 수입액을 즉각 상쇄하기 위한 목적은 아닐지라도, 신용에 기반한 수출이나 자본 투자는 통상의 상업적 거래와 마찬가지로 수입 수요를 자극한다. 다만 이러한 추가 수입은 결과적으로 영국 상품에 대한 해외 시장 (식민지나 미국 등)의 연쇄적인 수요 증대를 유발하는 반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뉴마치는 앞서 제1786호에서 영국의 대()인도 수출액이 동인도 회사의 어음 발행으로 인해 인도로부터의 수입액을 상회한다고 진술하였다. 이에 대해 우드는 해당 현상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심문한다. 영국의 수출액이 인도로부터의 수입액을 초과한다는 사실은, 실상 영국이 등가물을 지불하지 않은 채 인도로부터 재화를 수입하면서 발생한 결과다. , 동인도 회사 (현 인도 정부)가 발행하는 어음은 본질적으로 인도로부터 수탈한 공물에 다름 아니다.

 

일례로 1855년 영국의 대인도 수입액은 1,267만 파운드였으나 상품 수출액은 1,035만 파운드에 불과했다. 수치상으로는 인도가 영국에 대해 225만 파운드 (2 1/4백만 파운드)의 무역 흑자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나나, 이는 동인도 회사의 행적적·정치적 결제 수단인 어음을 매개로 상쇄되어 실질적인 자본 동태상으로는 영국의 우위로 전환된 것이다.

 

무역 관계만을 고려한다면, 발생한 225만 파운드의 차액은 어떤 형태로든 인도로 송부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때 인도 하우스 (동인도 회사 본사)는 인도의 각 행정 구역을 지급인으로 하는 325만 파운드 규모의 어음 발행을 공고한다.’

 

(엥겔스: 이 금액은 동인도 회사의 런던 내 운영 경비 및 주주 배당금 충당을 목적으로 징수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어음 결제를 매개로 영국은 무역 수지에서 발생한 225만 파운드의 영국 적자를 청산함은 물론, 도리어 100만 파운드의 흑자를 달성하게 된다.’ (1917).

 

(엥겔스: 우드) ‘그렇다면 인도 하우스의 어음 발행은 인도로 향하는 실물 상품의 수출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만큼 감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인가 (1922).’

 

(엥겔스: 엄밀히 말하자면, 인도로부터의 수입 대금을 실물 수출로 결제해야 할 필요성을 해당 금액만큼 소멸시키는 것 아니냐고 물어야 한다.)

 

이에 대해 뉴마치는 영국이 인도에 선의의 정부’ (총독부)를 제공한 대가로 해당 370만 파운드를 수취하는 것이라 강변한다 (1925).

 

인도 담당 장관인 우드는 영국이 수출했다는 그 선의의 정부의 실체를 누구보다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기에, 다음과 같이 정당하면서도 풍자적인 반론을 제기한다 (1926).

 

결국 동인도 회사의 어음 형식을 빌려 실현된다는 수출의 실체는 생산물의 수출이 아니라, 다름 아닌 선의의 정부라는 무형 자산의 수출인 셈이다.’

 

영국은 막대한 규모의 선의의 정부뿐만 아니라 방대한 대외 자본 투자를 병행하여 수출하면서 일반적인 상업 거래와는 무관한 특수한 수입 구조를 형성한다. 이러한 수입은 본질적으로 수출된 선의의 정부에 대한 공납이거나 식민지 등에 투하한 자본의 수익이기에 영국은 이에 상응하는 등가물을 지불할 의무가 없다. 따라서 영국이 별도의 수출 없이 이 공납을 소비하더라도 환율은 변동하지 않는다.

 

또한 명백한 점은 영국이 수취한 공물을 국내에 재투자하지 않고 해외에 생산적 또는 비생산적으로 재투자하는 경우에도 환율은 여전히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1853년부터 1856년까지의 크림 전쟁 기간 중 해외로 군수품을 충당하는 데 해당 자금을 사용하는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나아가 해외 수입품이 영국의 수입 항목에 포함되는 한, 그것이 (등가 지불이 필요 없는) 공물이든 공물과의 교환을 매개로 하여 획득한 것이든 또는 통상 무역 거래의 결과물이든 영국은 이를 소비하거나 다시 자본으로 전환하여 투자할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환율은 불변의 상태를 유지하나 윌슨은 이러한 역학 관계를 간과하고 있다. 수입의 구성 요소가 국내 생산물이든 외국 생산물이든 (후자의 경우 단지 양자 간의 교환 과정이 추가될 뿐이며), 그 수입의 소비가 (생산적 또는 비생산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생산 규모 자체에는 영향을 미칠지언정 환율에는 어떠한 파급 효과도 미치지 않는다. 후술할 발췌 내용 역시 이러한 경제적 실상 하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우드는 크림반도로의 군수품 송부가 터키와의 환율에 어떠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질의한다. 이에 대해 뉴마치는 군수품의 단순한 이전이 환율에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고 보기 어려우며, 오직 귀금속의 실질적 이전만이 환율 변동을 야기할 것이다 (1934).’라고 답변한다. (이는 화폐 형태의 자본과 기타 현물 자본이 지닌 차별적 성격을 구분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윌슨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상품을 대량 수출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수입을 행하지 않는다면,’

 

(엥겔스: 윌슨은 영국이 막대한 수입을 지속하면서도 선의의 정부나 이전의 자본 투자를 제외하면) 그에 대응하는 실물 수출을 수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이러한 수입은 일반적인 무역 거래의 범주를 벗어난다. 가령 (인도로부터 유입된 수입품은) 미국산 재화와 교환될 수 있으며, 설령 이 미국산 재화가 대응하는 수입 없이 (타국으로) 수출된다 하더라도, (미국으로부터) 들여온 수입품의 가치가 등가의 해외 유출 없이 소비될 수 있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 수입품은 수출의 대가로 취득한 것이 아니기에 무역 수지에 산입되지 않고도 소비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으로 인해 발생한 대외 채무를 변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엥겔스: 그러나 해당 수입에 대해 이미 이전에 (제공한 대외 채권 등으로) 이미 결제를 마친 상태라면, 수입으로 인한 신규 채무는 발생하지 않으며 이 문제는 대외 수지와 무관해진다. (결국 쟁점은 소비된 생산물의 국적과 관계없이) 그 지출이 생산적인가 또는 비생산적인가 하는 점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대응하는 수입 없이 (군수품을 크림반도로 수출하면서) (미국에 대한) 대외 채무를 이행하지 않는 이 거래 방식은 결국 환율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는 모든 국가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일반적 원리다 (1935).’

 

윌슨의 논거는 대응하는 수입을 동반하지 않는 수출이 필연적으로 대응하는 수출을 동반하지 않는 수입이라는 점에 귀착한다. , 외국 상품이 수출 상품의 생산 공정에 투입된다는 이유로 모든 수출은 대외 채무에 기반한 수입을 전제하거나 새로운 채무를 야기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다음 두 가지 실증적 상황으로 인해 부정된다.

 

첫째, 영국은 인도로부터 유입되는 일부 수입품을 무상으로 획득하며 이에 대한 등가물을 지불하지 않는다. 영국은 이 무상 수입품을 미국산 재화와 교환한 뒤, 해당 재화를 대응하는 수입 없이 타국에 수출할 수 있다. 가치적 측면에서 볼 때, 영국은 비용을 전혀 들이지 않은 자산을 수출한 셈이다.

 

둘째, 영국은 (이전의 대인도 투자 수익 등을 활용하여) 추가 자본을 형성하는 (미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의 대금을 이미 선결제했을 수 있다. 이 수입품이 (군수품과 같이) 비생산적으로 소비되더라도, 이는 미국에 대한 신규 부채를 형성하지 않으며 양국 간 환율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뉴마치는 제1934호와 제1935호에 걸쳐 자기모순을 드러내며, 우드는 제1938호에서 이 지점을 지적하고 있다. ‘대가를 받지 않고 보내는 수출품 (군수품)의 제조에 투입된 원자재가 수취국으로부터 공급된 것이 아니라면, 해당 국가와의 환율이 변동할 이유가 무엇인가. 터키와의 무역 수지가 평형 상태일 때, 크림반도로의 군수품 수출이 어떠한 기제로 영국과 터키 사이의 환율이 개입하겠는가.’

 

이 지점에서 뉴마치는 논리적 일관성을 상실한다. 그는 제1934호에서 이미 스스로 제시했던 정당한 답변을 망각한 채, ‘현실적 쟁점을 벗어나 형이상학적 논의로 빠져들고 있다.’는 군색한 변명으로 일관한다.

 

 

 (엥겔스: 윌슨은 (귀금속이든 상품이든 형태와 관계없이) 자본의 이전은 반드시 환율에 영향을 미친다는 자신의 주장을 변칙적으로 제시한다. 윌슨은 환율이 국가 간 이자율의 (특히 거래 당사국 간의 이자율 대비) 상대적 격차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을 물론 알고 있다. 따라서 자본 일반의 과잉, 다시 말해 (귀금속을 포함하는 제반 상품의 과잉이) 이자율 결정에 개입한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데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된다. 자본의 상당 부분을 타국으로 이전하는 행위는 양국의 이자율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변화시키며, 결과적으로 양국 간 환율의 변동을 초래한다는 논리다.)

 

윌슨은 1847이코노미스트에서 자본 과잉과 이자율 및 상품 가격 간의 상관관계를 네 가지 명제로 체계화한다 (1847: 574).

 

귀금속을 포함한 각종 상품의 대규모 재고로 발현되는 자본 과잉은 필연적으로 상품 일반의 가격 하락뿐만 아니라 자본의 사용의 대가인 이자율의 하락을 유도한다’ (1명제).

 

특정 국가가 향후 2년 동안의 수요를 충족할 만큼 충분한 상품 재고를 보유하고 있다면, 해당 상품에 대한 일정 기간의 처분권 획득 비용인 이자율은 2개월 분량의 재고만 있는 경우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에서 형성된다’ (2명제).

 

모든 형태의 화폐 대부는 본질적으로 상품 처분권을 이전하는 행위이기에, 상품의 풍요는 낮은 이자율을, 상품의 희소는 높은 이자율을 수반한다’ (3명제).

 

상품 공급이 직접 소비량을 초과하여 풍부해지면 판매자 간의 경쟁은 심화되며, 상품량이 직접적 소비에 필요한 수준을 초과함에 따라 그 상당 부분이 장래의 사용을 위해 재고 축적이 강제된다. 이러한 공급 과잉 국면에서 상품 소유자는 몇 주 이내에 재고의 신속한 회전이 지체됨에 따라, 결국 이전보다 불리한 조건의 외상 또는 신용 판매를 수용하게 된다’ (4명제).

 

윌슨의 제1명제와 관련하여 간과할 수 없는 지점은 귀금속의 대규모 유입이 생산 축소와 병행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공황 직후 국면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후 단계에서는 주로 귀금속 생산국으로부터의 유입이 주를 이룬다. 이 시기 일반 상품의 수입은 대체로 수출로 인해 상쇄되며,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22장 참조) 이자율은 저점을 유지하다가 완만하게 상승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낮은 이자율 현상이 각종 상품의 대규모 재고라는 변수를 개입시키지 않고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는 점이다. 대규모 재고가 어떻게 이자율을 저하시키는가. 예컨대 면화 가격의 하락이 방적업자의 이윤을 증대시킬 수는 있으나, 이것이 곧바로 이자율 저하의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자율은 낮은가.

 

낮은 이자율은 차입 자본에 기반한 기대 이윤이 높아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경제 상황상 대부 자본에 대한 수요가 이윤 규모에 비례하여 증가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다시 말해 대부 자본의 운동 법칙은 산업 자본의 운동과 서로 다른 운동 법칙을 따름에도, 이코노미스트는 양자의 운동이 동일하다는 전제하에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2명제는 상품 시장의 공급 과잉을 전제한다. (우리가 ‘2년 치 재고라는 윌슨의 불합리한 가정을 논의될 수 있는 수준으로 축소해 본다면) 이 경우 상품 가격은 하락할 것이며, 면화 한 상자를 구매할 때 지불하는 비용 역시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상품 가격이 낮아졌다고 해서, 그 구매 자금을 빌리는 비용 (차입 비용)까지 낮아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문제는 전적으로 화폐 시장의 수급 상황에 달려 있다.

 

화폐를 더 저렴하게 차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상업 신용의 활성화로 인해 은행 신용에 대한 의존도가 평소보다 낮아졌기 때문이지, 단순히 상품 재고의 과다나 귀금속의 유입 여부와는 본질적으로 무관하다. 시장을 범람하는 저렴한 생산 수단과 생활 수단은 산업 자본가의 이윤을 증대시킨다. 산업 자본의 풍부함과 화폐 융통 수요를 동일시한다면, 낮은 가격이나 높은 이윤이 어떻게 이자율을 저하시키는지 설명할 수 없다. 상인이나 산업가들이 서로 신용을 원활하게 공여할 수 있는 상황, 곧 상업 신용이 풍부한 상태에서는 은행 신용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진다. 이처럼 대부 자본에 대한 수요 자체가 감소하기 때문에 이자율이 낮게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낮은 이자율은 귀금속의 유입과는 전혀 무관하다. 비록 이 이자율 저하와 귀금속 유입이 병행할 수 있고, 수입품 가격을 낮추는 요인들이 귀금속의 과잉 유입을 유발할 수도 있으나, 현실적으로 수입품 시장이 공급 과잉이라면 이는 곧 수입 수요의 감소를 의미한다. 그런데 낮은 가격 상태에서의 수요 감소는 국내 산업 생산의 축소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생산 축소가 낮은 가격에 따른 수입 과잉이라는 조건과는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결국 온갖 불합리한 주장이 속출하는 이유는 가격 하락이 곧 이자율 하락이라는 것을 억지로 증명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두 현상은 서로 나란히 발생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은 산업 자본의 운동과 대부 가용 화폐 자본의 운동이 동일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가진 차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3명제에 관련하여, 상품 과잉 상태에서 왜 화폐 이자가 반드시 낮아져야 하는지는 앞서 전개된 장황한 설명에서도 전혀 규명되지 않고 있다. 가령 상품 가격이 하락할 경우, 자본가는 종전과 동일한 양의 상품량을 구매하는 데 2,000이 아닌 1,000만을 지출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는 여전히 2,000을 차입·투자하여 이전보다 두 배의 상품량을 구입하면서 사업 규모를 확장할 수 있다. 이 경우 자본가의 지출 총액은 이전과 동일한 2,000이므로, 화폐 시장에서의 수요 또한 변함이 없다 (비록 상품 시장에서의 수요는 상품 가격 하락에 따라 실질적으로 증대했을지라도 말이다).

 

반대로, 상품 시장에서 수요가 감소한다는 것, 곧 상품 가격이 하락함에도 생산 확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코노미스트가 내세운 모든 법칙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상황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대부 가용 화폐 자본에 대한 수요는 이윤이 증가하더라도 오히려 감소하게 되는데, 본래 이윤의 증가는 대부 자본에 대한 수요를 자극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한편, 저렴한 상품 가격이 형성되는 원인은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저렴한 상품 가격이 형성되는 세 가지 경로를 고찰하면 그 논리적 허점이 더욱 명확해진다.

 

첫째, 수요의 부족에 따른 가격 하락이다. 이때의 낮은 이자율은 상품 가격 자체 때문이 아니라 생산 마비의 결과이며, 낮은 상품 가격은 단지 이러한 경제적 정체로 나타날 뿐이다.

 

둘째, 공급 과잉에 따른 시장 범람이다. 이는 공황을 야기하는 국면으로, 오히려 높은 이자율과 병행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셋째, 상품 가치가 저하되어 동일한 수요가 낮은 가격에 충족되는 경우이다. 이 상황에서 이자율은 왜 저하해야 하는가. 이윤이 증대함에도 이자율이 저하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단지 동일한 생산 자본이나 상품 자본을 구매하는 데 필요한 화폐 자본량이 감소했기 때문이라면, 이는 결국 이윤과 이자가 서로 반비례 관계에 있음을 증명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이코노미스트의 일반 명제는 타당성을 결여한다. 상품의 낮은 화폐 가격과 낮은 이자율이 반드시 병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양자가 필연적으로 결합한다면, 생산물의 화폐 가격이 가장 낮은 가난한 나라에서 이자율이 가장 낮아야 하며, 농산물의 화폐 가격이 가장 높은 부유한 나라에서 이자율이 가장 높아야 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이코노미스트역시 시인하는 바와 같이) 화폐 가치의 하락은 이자율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화폐 100105의 가치를 낳을 때, 원금 100의 가치가 하락하면 수익 5의 가치 또한 동일하게 하락하므로, 그 비율인 이자율은 원금 가치의 증감과 무관하게 유지된다.

 

가치의 관점에서 보면, 일정한 상품량은 일정한 금액의 화폐와 등가를 이룬다. 상품 가치가 증대하면 더 큰 화폐액과 대응되고, 가치가 감소하면 그 반대이다. 따라서 상품 가치의 변동은 이를 매개하는 화폐액의 규모를 변화시킬 뿐, 이자율이라는 비율 자체를 변경시키지는 않는다. 가령 상품 가치가 2,000일 때의 5%100이고, 1,000일 때의 5%50으로 산출될 뿐이다. 이 논의에서 타당한 지점은 오직 하나, 동일한 상품량을 구매하는 데 필요한 화폐가 2,000일 때가 1,000일 때보다 더 큰 화폐 융통이 요구된다는 사실뿐이다. 결국 이 대목이 드러내는 것은 윌슨의 의도와 달리, 상품 가치 하락 (이윤 증대 상황)임에도 이자율이 낮게 유지되는 이윤과 이자 사이의 반비례 관계일 뿐이다.

 

이는 불변 자본과 가변 자본의 비용 하락이 이윤을 증대시키고 이자는 감소시키는 이윤과 이자 사이의 반비례 관계를 시사할 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상이한 양상이 빈번히 발생한다. 가령 면화 가격이 낮은 이유는 면사와 직물에 대한 수요 부재 때문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면공업의 높은 이윤 기대가 원료 수요를 자극하여 가격이 상승할 수도 있다. , 면화 가격이 낮게 유지될 때 오히려 산업가의 이윤은 극대화될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허바드의 통계 (34: 707-708)가 증명하듯, 이자율과 상품 가격은 완전히 독립적으로 운동한다. 이자율의 운동은 상품 가격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금속 준비의 상태 및 환율의 운동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코노미스트상품의 풍부가 필연적으로 낮은 이자율을 수반한다.’고 주장하나, 실제 공황기의 양상은 이와 정반대로 나타난다. 공황기에는 상품이 과잉 상태임에도 화폐로의 전환이 차단됨에 따라 이자율은 오히려 고공 행진을 이어간다. 반면, 경제 순환의 다른 국면에서는 상품 수요가 급증하여 환류가 원활해지고 상품 가격이 상승함에도, 자금 회수의 용이성으로 인해 이자율은 낮은 수준을 유지한다. 또한 상품 부족이 높은 이자율을 낳는다.’는 주장 역시 공황 이후의 침체기 상황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이 시기에는 상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함에도 대부 자본에 대한 수요가 위축되어 이자율은 도리어 낮은 상태에 머물게 된다.

 

4명제와 관련하여, 시장이 범람할 때 상품 소유자가 재고의 신속한 처분이 불투명할 때 판매 가격을 인하하리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어떠한 기제로 이자율 하락을 견인하는가는 논리적으로 명확히 규명되지 않는다.

 

수입 상품의 시장 범람 시, 상품 소유자가 상품의 즉각적인 시장 투입을 유예하고 투매를 방지하기 위해 대부 자본을 추가로 확보하려 한다면 오히려 이자율이 상승할 수 있다. 반면, 상업 신용의 가용성이 높아 은행 신용에 대한 수요가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상황이라면 이자율은 하락할 수도 있다. , 이자율의 향방은 단순히 상품의 수급이나 가격 변동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신용 체계 내의 역학 관계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1847년 이자율 상승과 화폐 시장의 압력이 환율에 미친 즉각적인 영향에 주목한다. 그러나 환율의 상승 전환에도 금 유출은 4월 말까지 지속되었으며, 5월 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유입으로 반전되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184711일 기준 잉글랜드 은행의 금속 준비금은 1,5066,691파운드, 이자율은 3.5%였으며, 3개월짜리 환율은 파리 앞 25.75, 함부르크 앞 13.10, 암스테르담 앞 12.325를 기록하였다. 이후 35, 금속 준비금이 1,1595,535파운드로 급감함에 따라 이자율은 4%로 인상되었고, 환율 또한 파리 앞 25.665, 함부르크 앞 13.0925, 암스테르담 앞 12.25로 하락하였다. 그럼에도 금 유출은 멈추지 않았으며, 상세한 변동 추이는 다음 표와 같다

   

날짜 (1847)

금속 준비금 (파운드)

화폐 시장 상황 및 할인율

파리 환율 (3개월)

함부르크 환율 (3개월)

암스테르담 환율 (3개월)

320

11,231,630

은행 할인율 4%

25.675

13.0975

12.25

403

10,246,410

은행 할인율 5%

25.80

13.10

12.35

410

9,867,053

심한 화폐 부족

25.90

13.103

12.45

417

9,329,841

은행 할인율 5.5%

26.025

13.1075

12.55

424

9,213,890

화폐 핍박 국면

26.05

13.12

12.6

501

9,337,716

화폐 핍박 증대

26.15

13.1275

12.65

508

9,588,759

화폐 핍박 최대치

26.275

13.155

12.775

 

 

18473월부터 5월 초까지의 통계적 수치는 잉글랜드 은행의 금속 준비금 감소와 그에 따른 화폐 시장의 압박, 그리고 환율 변동의 상관관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3201,1231,630파운드였던 금속 준비금은 4249213,890파운드까지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이 과정에서 잉글랜드 은행의 할인율은 4%에서 5.5%로 인상되었으며, 화폐 시장은 단순한 부족 상태를 넘어 극심한 핍박 국면에 진입했다. 특히 58일에는 준비금이 9588,759파운드로 소폭 반등하며 유입세로 전환되었음에도, 화폐 시장에 가해진 화폐 핍박은 정점에 달했다.

 

이 기간 환율은 금속 준비금의 추이와 밀접하게 연동되었다. 파리 앞 환율은 32025.675에서 5826.275, 함부르크 앞 13.0975에서 13.155, 암스테르담 앞 12.25에서 12.775로 각각 상승하며 최고 수준을 경신했다. 1847년 영국의 귀금속 총수출액은 8602,597파운드에 달했으며, 구체적인 행선지별 내역은 다음과 같다.

 

행선지

수출액 (파운드)

미국

3,226,411

프랑스

2,479,892

독일 (한자 도시)

958,781

네덜란드

247,743

합계

6,912,827

 

 

1847년 영국의 귀금속 주요 수출 행선지별 내역은 최대 수출국인 미국이 3226,411파운드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프랑스가 2479,892파운드로 그 뒤를 이었다. 이어 독일의 한자 도시들은 958,781파운드, 네덜란드로 247,743파운드가 각각 유출되었다.

 

3월 말 환율의 방향이 전환되었음에도 금 유출은 이후 한 달간 지속되었으며, 그 주요 행선지는 미국으로 추정된다. 이코노미스트(1847: 954)는 이와 관련하여 이자율 인상과 그에 따른 화폐 핍박이 불리한 환율을 시정하고 귀금속을 재유입시키는 데 미친 신속한 영향력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자율 인상과 그에 따른 화폐 핍박이 불리한 환율을 시정하고 귀금속의 환류를 다시 영국으로 되돌리는 데 얼마나 신속하고 적절한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효과는 무역 수지의 변동과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발생했다. 우선 이자율 인상은 국내외 유가 증권의 시세를 하락시키면서 외국인 자본을 매개로 한 대규모 증권 매수를 유도했고, 이는 곧 영국 발행 어음의 공급 증대로 이어졌다. 반면, 고금리와 화폐 입수의 곤란함으로 인해 어음 공급은 늘어난 데 반해 그에 대한 수요는 오히려 감퇴하였다. 동일한 원인으로 수입 주문은 취소되었으며, 영국의 해외 투자 자본은 현금화되어 국내 투자를 위해 회수되었다.

 

실례로 510일자 리오 데 자네이로 가격표영국 자본이 투입된 브라질 국채가 대량 매각되고 그 대금이 영국으로 송금되면서 브라질 외환 시장에 압박이 가해졌으며, 결과적으로 대영 환율이 더욱 하락했다.’고 보고한다. , 영국의 저금리 기조 속에서 외국 유가 증권에 투입되었던 영국 자본이 영국 이자율 상승에 반응하여 본국으로 급격히 회귀한 것이다.’

 

영국의 무역수지

 

인도 한 곳만으로도 영국은 선의의 정부에 대한 공물과 영국 자본에 대한 이자 및 배당금 명목으로 매년 500만 파운드에 달하는 막대한 수익을 거두고 있다. 이 수치에는 관리들의 급여 저축액이나 상인들의 이윤 중 일부로 영국 내 투자를 위해 송금되는 자금은 포함되지 않았으나, 이러한 성격의 송금은 모든 영국 식민지에 상시적으로 유입되고 있다.

 

실제로 오스트레일리아, 서인도 제도, 캐나다의 금융 기관 대부분이 영국 자본으로 설립되었으며, 그에 따른 배당금은 고스란히 본국으로 귀속된다. 나아가 영국은 외국 정부, 곧 유럽과 북아메리카·남아메리카 정부가 발행한 채권 및 채무 증서를 대량으로 보유하여 막대한 이자 수익을 거둘 뿐만 아니라, 외국의 철도·운하·광산 등 주요 기간 시설에 직접 출자하면서 지속적인 배당금을 수취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모든 항목의 송금액은 영국의 총 수출액을 초과하는 (잉여) 생산물의 형태로 본국에 유입되는 반면, 영국 유가 증권을 보유한 외국 소유자나 해외 거주 영국인의 소비를 위해 국외로 유출되는 금액은 지극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

 

무역 수지와 환율에 미치는 영향은 특정 시점의 시각적 격차에 달려 있다.’ ‘현실적으로 영국은 장기 신용으로 수출하는 반면 수입 대금은 현금으로 결제하는데, 이러한 결제 방식의 차이는 특정 순간 환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가령 1850년과 같이 수출이 급격히 신장하는 시기에는 영국 자본의 (해외) 투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기 마련이다. 이 경우 1849년에 수출한 상품의 대금은 1850년에 이르러서야 회수된다. 1850년의 수출액이 전년 대비 600만 파운드 증가했다면, 그 실질적 효과는 당해 연도에 환류된 금액보다 600만 파운드 더 많은 화폐가 국외로 유출된 셈이 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자금 유출입은 환율 상승과 이자율 변동을 초래한다.

 

반대로, 상업 공황 이후 경기가 침체하여 수출이 대폭 축소될 때는 양상이 달라진다. 지난 몇 해 동안 집행된 대규모 수출에 대한 대금 회수가 당기의 수입 결제액을 크게 상회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해외로부터의) 자금 유입이 가속화되면서 환율은 자국에 유리하게 형성되고, 국내 자본 축적이 급격히 이루어짐에 따라 이자율은 하락하게 된다.’ (이코노미스트, 1851111)

 

환율 변동의 주요 기제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에 달려 있다.

 

첫째, 당면한 지불 차액의 발생이다. 이는 발생 원인과 관계없이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 순수한 무역상의 격차뿐만 아니라 해외 자본 수출, 또는 (해외 현금 지불을 수반하는) 전쟁 비용 등 국가적 지출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 화폐 가치의 하락이다. (금속 화폐든 지폐든) 자국 화폐의 실질 가치가 감소할 경우 발생하는 환율 변동은 순수하게 명목적인 성격을 띤다. 가령 1파운드가 표상하는 가치가 종전의 절반으로 하락한다면, 환율 역시 25프랑에서 12.5프랑으로 수렴된다.

 

셋째, 금 본위제 국가와 은 본위제 국가 간의 교환 비율 변동이다. 두 금속의 상대적 가치 변화는 양국 화폐의 교환 비율을 직접적으로 변경시킨다. 일례로 1850년 영국의 수출이 대폭 증가했음에도 환율이 영국에 불리하게 형성된 사례가 있다. 당시 금 유출이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금 대비 은의 가치가 일시적으로 상승했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 18501130일 참조).

 

1파운드에 대한 법정 금 평가는 파리에서 25프랑 20상팀, 함부르크에서 13마르크 방코 10.5실링, 암스테르담에서 11플로린 97센트로 규정된다. ()파리 환율이 기준점인 25.20을 상회하여 상승할 경우, 프랑스에 영국 채무자가 있거나 프랑스 상품을 수입하는 영국측 당사자들은 더 적은 파운드화로 동일한 결제 대금을 충당할 수 있게 되어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반면, 귀금속 수급이 용이하지 않은 원격지 국가들의 경우, 영국으로의 송금 수요에 비해 환어음 공급이 부족해지면 현지 생산물의 가격이 동반 상승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는 환어음을 대체하여 영국에 송금할 실물 자산을 확보하려는 수요가 집중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제는 인도 시장에서 빈번하게 확인되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영국 내 화폐 공급이 과잉 상태에 이르러 이자율이 하락하고 유가 증권 가격이 상승할 경우, 환율은 자국에 불리하게 형성되며 이는 금 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

 

실례로 1848년 영국은 인도로부터 대량의 은을 수취하였다. 이는 1847년 발생한 공황과 인도 무역에 대한 신용 경색으로 인해 우량 어음이 고갈되고 일반 어음의 인수마저 거절된 결과였다. 이렇게 유입된 은은 (당시 혁명의 여파로 화폐 퇴장 현상이 심화되었던) 유럽 대륙으로 즉시 유출되었다. 그러나 1850년에 이르러 환율 조건이 반전되자, 해당 은의 상당 부분은 다시 인도로 환류하였다. 이는 환율 변동이 귀금속의 대외적 향방을 결정하는 핵심 기제로 작용함을 보여준다.

 

 

 금속에 기반한 화폐 제도가 가톨릭적 성격을 띤다면, 신용 제도는 본질적으로 프로테스탄트적이다. ‘스코틀랜드인은 금을 싫어한다.’는 경구처럼, 지폐 체제하에서 상품의 화폐적 존재는 순전히 사회적 존재일 뿐이다. ‘여기서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거한다.’ (신약성서 마가복음 16-16) , 상품에 내재된 영혼으로의 화폐 가치에 대한 신뢰, 생산 양식과 그 예정된 질서에 대한 확신, 그리고 자기 증식하는 자본의 인격화된 대리인으로 개별 생산자에 대한 신용이 핵심이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교가 가톨릭교라는 역사적 토대 위에서 발흥했듯, 신용 제도 역시 화폐 제도라는 근원적 토대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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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통화주의와 영국의 1844년 은행법

 

(엥겔스: 리카도의 화폐 이론에 따르면, 금속 화폐의 가치는 본질적으로 투하된 노동 시간에 따라 결정되나, 실제 유통 과정에서의 가치 규정은 유통되는 화폐량과 상품 총액 사이의 양적 비율에 종속된다. 화폐량이 적정 수준을 초과할 경우 화폐 가치는 하락하고 상품 가격은 상승하며, 반대로 화폐량이 부족할 경우 화폐 가치는 상승하고 상품 가격은 하락한다. 이러한 불일치는 금의 수출입과 상품의 유통에 기반한 세계적 수급 환류 과정을 거치며 수렴된다.

 

주화나 금덩이뿐만 아니라 태환 은행권 역시 유통 수단 총량의 변동에 따라 가치 표상으로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은행권이 금으로의 태환성을 유지하여 명목 가치와 실질 가치가 일치하더라도, ‘금속 화폐와 태환 은행권이 결합된 총통화량이 상품 유통에 필요한 객관적 수준을 상회하거나 하회할 경우 통화 전체의 가치는 필연적으로 변동한다. 리카도가 정립한 이 유통 수단 총량의 가치 변동 법칙은 이후 오브스톤 학파에게 계승되었으며, 1844년과 1845년 필의 은행 입법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이론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1859, CW 29: 404.)

 

리카도 이론의 내적 모순에 대한 논증은 기고된 저술에서 이미 완결되었으므로, 본 고의 논점은 필 은행법의 입법자들이 리카도의 이론을 어떠한 방식으로 전유하고 가공하였는가에 집중된다.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1825년과 1836년에 발생한 19세기의 대규모 상업 공황은 리카도 통화 이론의 지평을 새로운 실천적 적용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당시의 핵심적 과제는 흄이 고찰했던 16-17세기의 귀금속 가치 하락이나 리카도가 직면했던 18-19세기 초의 지폐 가치 변동과 같은 국지적 현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부르주아 생산 양식의 제반 요소들이 격돌하며 분출되는 세계 시장의 주기적 파국이었다. 이러한 위기의 원인과 대책을 공황의 가장 표면적이고 추상적인 범주인 통화 영역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지속되었다. 이른바 통화학파 (일명 경제예측학파)는 리카도가 순수 금속 유통의 보편 법칙을 확립했다는 확신을 이론적 토대로 삼았다. 그들에게 남겨진 과제는 신용 화폐 내지 은행권의 유통 기제를 리카도가 설정한 금속 유통의 법칙 체계 속에 강제적으로 포섭시키는 것뿐이었다.

 

상업 공황의 가장 현저한 전조는 지속적인 가격 상승 이후 발생하는 급격한 일반적 상품 가격 하락이다. 이는 모든 상품에 대한 화폐의 상대적 가치 상승으로 규정될 수 있으나, 이러한 정의는 현상에 대한 기술일 뿐 그 내적 원인에 대한 설명력을 갖지 못한다. 리카도의 화폐 이론은 동어 반복적 논리에 인과율의 외양을 부여하면서 정당성을 획득하려 했다. , 물가의 주기적 등락 원인을 화폐 가치의 주기적 변동에서 찾으면서, 결과적으로 가격의 변동은 가격의 변동 때문이다.’라는 순환 논리에 매몰된 것이다.

 

리카도는 상품 가격의 상승을 화폐의 내재적 가치와 상품량에 준하여 규정되는 적정 수준을 초과한 통화량의 과잉으로, 반대로 가격의 하락을 통화량의 부족으로 설명하였다. 설령 상품 가격 상승이 통화량 감소와 병행되는 실증적 반례가 제시되더라도, 그는 검증 결여한 유통 상품량의 변동을 가정하여 통화량의 상대적 과잉이나 부족을 주장하면서 논리적 정합성을 강변하였다. 이러한 기제는 순수 금속 유통 체제 하에서 귀금속의 유출입을 경유한 자생적 수급 환류 과정으로 상쇄된다고 간주되었다.

 

그러나 공황이라는 격렬한 형태의 가격 변동은 신용 제도의 발달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은행권의 발행이 금속 유통의 법칙에 부합하지 못함을 시사한다. 이에 따라 통화주의자들은 은행이 금속 유통의 법칙을 인위적으로 준용하여 금의 유입 시에는 은행권 발행을 확대하고, 유출 시에는 이를 환수하면서 환율과 귀금속 추이에 따라 통화량을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금의 증감이 곧 유통 통화량의 변동과 물가 등락으로 직결된다는 리카도의 이론적 가설은, 결국 국내 금 보유량과 주화 유통량을 연동시키려는 현실적 기획으로 이전되었다. 존스 로이드 (오브스톤), 토렌즈, 노먼, 클래이, 아버스노트 등 통화주의 학파가 주도한 이 이론은 1844년과 1845년의 필 은행법에 입각하여 국가적 입법 원칙으로 확립되었다. 그러나 거대한 규모로 단행된 이 시도가 이론적·실천적으로 처참한 실패를 맞이하게 된 경위는 향후 신용론의 체계 내에서 엄밀히 규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1859. CW 29: 412-414).

 

통화주의에 대한 이론적 비판은 투크, 윌슨 (이코노미스트, 1844-1847), 풀라턴 등을 필두로 하여 전개되었다. 비록 이들 비판가 역시 제28장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금의 본질적 성격이나 화폐와 자본 간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1857년 하원 위원회의 필 은행법 조사 회의록 (은행법, 1857)에 수록된 몇 가지 증언을 검토하고자 한다.)

 

잉글랜드 은행의 이전 총재 허바드의 증언.

 

금 수출의 영향은 일반 상품 가격과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 금의 유출은 상품 가격보다는 이자 낳는 증권의 가격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다. 이는 이자율의 변동이 해당 수익권을 내포한 자산 가치에 필연적으로 강력한 파급 효과를 미치기 때문이다 (2400).’

 

이러한 기제는 통화량 변동이 즉각 물가로 이전된다는 통화주의적 가설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허바드는 1834-1843년과 1845-1856년을 포괄하는 두 개의 통계 자료를 제시하며, 주요 15개 품목의 가격 변동이 금의 유출입이나 이자율의 향방과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갖지 않음을 증명하였다. 반면, 해당 자료들은 사실상 투자처를 모색하는 국내 자본의 대표물이라 할 수 있는 금의 유출입과 이자율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련성이 존재함을 시사한다.

 

‘1847년의 사례를 보면, 거액의 미국 및 러시아 증권이 해당 국가로 반송되었으며, 기타 유럽 증권들 또한 곡물 수입국들로 이전되는 양상을 보였다.’

 

허바드가 분석 대상으로 삼은 15개 핵심 종목은 면화, 면사, 면직물, 양모, 모직물, 아마, 아마포, 인디고, 선철, 주석, 구리, 짐승 기름, 설탕, 커피, 생사 등으로, 이들 품목의 가격 추이는 통화주의적 가설과는 불일치하는 독자적인 운동 법칙을 보여준다.

 

허바드는 제시된 통계 자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1834-1843년의 추이와 마찬가지로, 1844-1853년 기간에도 잉글랜드 은행의 금 보유고 변동은 할인을 거쳐 선대되는 화폐액의 증감과 연동되는 양상을 보였다. , 금 보유고의 증가는 화폐 선대액의 감소를, 금 보유고의 감소는 화폐 선대액의 증가를 동반하였다. 그러나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 역시 상품 가격의 추이는 잉글랜드 은행의 금 보유고 변동으로 대변되는 유통 화폐량의 변화와 어떠한 상관관계도 형성하지 않았다.’ (은행법 1857, 2, 290-291).

 

<1> 1834-1843년 금 보유고 및 할인율과 상품 가격 변동

 

 

조사 시점

금속 준비금 ()

시장 할인율 (%)

15개 중 가격 상승

15개 중 가격 하락

15개 중 가격 불변

1834. 03. 01.

9,104

2 3/4

-

-

-

1835. 03. 01.

6,274

3 3/4

7

7

1

1836. 03. 01.

7,918

3 1/4

11

3

1

1837. 03. 01.

4,077

5

5

9

1

1838. 03. 01.

10,471

2 3/4

4

11

0

1839. 09. 01.

2,684

6

8

5

2

1840. 06. 01.

4,571

4 3/4

5

9

1

1841. 12. 01.

3,642

5 3/4

7

6

2

1842. 12. 01.

4,873

5

3

12

0

1843. 12. 01.

10,603

2 1/2

2

13

0

1841. 06. 01.

1,566

2 1/4

1

14

0

 

 

<2> 1844-1853년 필 은행법 발효 이후의 변동 현황

 

조사 시점

금속 준비금 ()

시장 할인율 (%)

15개 중 가격 상승

15개 중 가격 하락

15개 중 가격 불변

1844. 03. 01.

16,162

2 1/4

-

-

-

1845. 12. 01.

13,237

4 1/2

11

4

0

1846. 09. 01.

16,366

3

7

8

0

1847. 09. 01.

9,140

6

6

6

3

1850. 03. 01.

17,126

2 1/2

5

9

1

1851. 06. 01.

13,705

3

2

11

2

1852. 09. 01.

21,853

1 3/4

9

5

1

1853. 12. 01.

15,093

5

14

0

1

 

 

상품의 시장 가격을 규제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해당 상품의 수급 관계다. 따라서 오브스톤이 할인율로 대변되는 대부 가용 화폐 자본에 대한 수요를 현실적 자본에 대한 수요와 동일시하는 것은 명백한 이론적 오류다. 상품 가격이 통화량 변동에 규제된다는 기존의 주장은, 이제 할인율의 변동이 화폐적 자본과 구별되는 현실적 자본의 수요 변동을 대변한다는 궤변적 문구 뒤로 은폐된다. 노먼과 오브스톤은 은행법 위원회에서 이러한 논리를 집요하게 주장하였으나, 특히 오브스톤이 동원한 조악한 기만술은 논리적 일관성을 결여한 채 결국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26).

 

금량의 변동이 국내 유통 화폐량을 증감시켜 필연적으로 상품 가격의 등락을 초래한다는 가설은 실증적 근거가 결여된 허구적 가설에 불과하다. 통화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금의 유출입은 유입국과 유출국 양측의 물가 수준을 일률적으로 변동시켜야 한다. , 금 수입국은 통화량 증대로 인해 상품 가격이 등귀하고, 반대로 금 수출국은 통화량 감소로 가격 하락을 수반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금량의 변동은 상품 가격에 직접 작용하기보다 단순히 이자율의 변동 (금량 감소 시 이자율 상승, 금량 증대 시 이자율 저하)을 야기할 뿐이다. 따라서 이자율의 변동이 상품의 비용 가격 산정이나 실질적인 수급 구조에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하지 않는 한, 상품 가격은 화폐적 요인으로부터 독립적인 궤적을 유지하게 된다.

 

동일한 보고서에서 인도 무역 상사의 대표 알렉산더는 1850년대 중엽 인도와 중국으로 단행된 대규모 은 유출의 실상을 증언하고 있다. 당시 은 유출은 1850-1864년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한 영국산 직물의 대()중국 수출 정지와 유럽의 누에병 창궐에 따른 이탈리아·프랑스의 생사 생산 격감이라는 요인에 기인하였다.

 

질문: 은 유출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가. 중국인가, 아니면 인도인가.

 

답변: 은은 먼저 인도로 보내진다. 그 은의 대부분으로 아편을 구매하며, 이 아편은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생사를 구매하는 자금이 된다. 당시 인도의 시장 상황은 상인들이 직물이나 기타 제품을 수출하는 것보다, 비록 그곳에 은이 축적되어 있을지라도 은 자체를 보내는 것이 훨씬 유리한 구조였다 (4337).’

 

질문: 우리가 (인도와 중국으로 보낼) 그 막대한 은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로부터의 대규모 은 유출 때문이 아니었는가.

 

답변: 그렇다 (4338).’

 

질문: 현재 영국의 생사 수급 상황은 어떠한가.

 

답변: 우리는 더 이상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생사를 가져오지 않는다. 오히려 벵골과 중국에서 들여온 생사를 그곳 (유럽 대륙)으로 대량 수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4344).’

 

증언 (4337, 4338, 4344)에 따르면, 영국은 은을 인도로 보내 아편을 구입하고, 이를 다시 중국에 투입하여 생사를 확보하는 자금으로 활용하였다. 상인들이 상품 대신 은을 수출한 것은 인도의 시장 상황상 직물 수출보다 은의 투입이 상대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며, 이 과정에서 소요된 은은 프랑스로부터의 대규모 유출을 매개로 충당되었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생사를 의존하는 대신 벵골과 중국산 생사를 확보하여 유럽 시장에 재공급하는 구조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상품 대신 화폐 금속인 은이 아시아로 유입된 실질적 이유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는 생산국인 영국의 물가 앙등 때문이 아니라, 수입국 시장의 상품 과잉으로 인한 가격 하락에 대응하기 위한 차선책이었다. 통화주의적 가설을 적용한다면 은 유출국인 영국의 물가는 하락하고 은 유입국인 인도와 중극의 물가는 등귀해야 했으나, 현실의 경제 역학은 이러한 이론적 예측을 무색하게 하였다.

 

리버풀의 유력 상인 와일리의 상원 위원회에서의 증언 (상업 불황, 1848-1857)은 실제 시장의 동학이 통화주의적 가설과 얼마나 불일치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845년 말, 영국 면방적업은 전례 없는 호황을 구가하고 있었다. 당시 양질의 면화 재고는 풍부했으며 파운드당 가격 또한 4펜스에 불과했다. 여기에 방적 비용 4펜스 (우등2호 뮬연사 제40번수 기준)를 더한 총생산비가 8펜스였던 반면, 완성된 면사는 18459-10월경 파운드당 10 1/2-11 1/2펜스에 거래되었다. 이는 방적업자들이 면화 구입 가격에 맞먹는 막대한 이윤을 남기며 최고의 수익성을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94).’

 

면방적업은 1846년 초까지도 계속해서 유리한 상황이었다 (1996).’

 

‘184433일의 면화 재고 (627,042상자)184837일의 재고 (301,070상자)보다 두 배 이상 많았음에도, 가격은 재고가 훨씬 풍부했던 1844년 당시에 오히려 파운드당 1 1/4펜스만큼 더 비쌌다. , 1848년의 면화 가격인 5펜스에 비해 1844년의 가격은 6 1/4펜스에 달했던 것이다 (2000).’

 

제품 가격의 폭락은 더욱 심각했다. 우등 2호 뮬연사 제40번수는 파운드당 11 1/2-12펜스에서 1847109 1/2펜스로, 동년 12월 말에는 7 3/4펜스까지 급락했다. 결과적으로 면사 가격이 그 원료인 면화의 구입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방적업의 수익성은 완전히 무너졌다 (상업 불황, 1848-1857, 2021호 및 제2022).

 

이러한 사태는 자본의 부족이 화폐를 비싸게만든다는 오브스톤 학파의 이론적 기만을 폭로한다. 잉글랜드 은행의 이자율은 1844333%에서 공황기인 184710-118%-9%까지 치솟았다가, 184837일 다시 4%로 하락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면화 가격의 폭락은 통화주의적 가설이 상정한 통화량 과잉에 따른 물가 등귀와는 정반대의 현상이었다.

 

그러나 실제 가격 하락을 주도한 것은 판매 정체와 금융 핍박에 따른 고율 이자 부담이 초래한 강제적 투매였다. , 면화 가격은 공급 규모에 상응하는 적정가보다 훨씬 낮은 수준으로 추락했으며, 이로 인해 1848년 영국의 수입 격감과 미국의 생산 감소가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그 결과 1849년에 이르러서야 면화 가격은 다시 등귀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현실은 가혹한 공급 위축과 수요 붕괴의 역학을 보여주었으나, 오브스톤은 여전히 국내에 화폐가 너무 많아 상품 가격이 지나치게 비싸졌다는 고정 관념에 매몰되어 있었다.

 

최근 면공업의 상황이 악화된 근본 원인은 원료 부족에 있지 않다. 원료 재고가 현저히 감소했음에도, 그 가격은 오히려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2002).’

 

와일리의 증언 (2002)처럼 당시 면공업의 악화는 단순히 원료 부족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원료 재고는 감소했으나 가격 자체가 이례적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는 국내 통화량이 과잉되어 상품 가격이 지나치게 높았다는 오브스톤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결국 가격 변동의 실질적 원인은 통화량의 경직된 증감이 아니라, 신용 붕괴와 그로 인한 시장의 실물적 정체에 있다.

 

오브스톤은 상품의 가격 (내지 가치)과 화폐의 가치 (이자율)를 자의적으로 등치시키는 오류를 범하였다. 이에 대해 리버풀의 상인 와일리는 제2026호 답변에서, 1844년 은행법의 정당성을 강변했던 18475월 당시 카드웰과 재무 장관 우드의 입장에 반박하며 통화주의 전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총괄적 평가를 내렸다.

 

이 통화주의는 화폐에 인위적으로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반면, 모든 실물 상품에는 파멸적일만큼 낮은 가치를 강요하는 속성을 지닌다.’ (이러한 정책적 기조는 일반적인 산업 및 상업 활동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특히 (1847) 사례에서 보듯, (대미 수출용 상품 구매를 위해 공업 도시에서 상인과 은행업자 앞으로 발행되던 통상적인) 4개월짜리 어음조차 막대한 손실 없이는 할인이 차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같은 해 1025일의 정부의 (은행법의 정지) 조치가 시행되어 어음 할인이 재개될 때까지, 실물 경제에서의 주문 이행은 극심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2097).

 

은행법의 일시 정지는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 경제 또한 구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난 (1847) 10월 당시 영국 상품을 취득하던 미국 구매자들은 주문량을 극도로 축소하였으며, 영국의 고금리 상황이 본국에 전달되자 새로운 주문을 전면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2102).’

 

다만 밀과 설탕의 경우, 통화적 요인보다는 수확 예상치나 막대한 재고량 등 품목 고유의 수급 조건을 바탕으로 가격이 결정되는 특수성을 보였다 (2134).’

 

당시 영국의 대미 채무는 위탁 상품의 강제 매각이나 연쇄적인 파산을 거쳐 파괴적인 방식으로 청산되었다 (2163).’

 

특히 184710월 증권 거래소의 이자율이 70%에 육박했다 (2196).’

 

이는 당시 금융 압박의 파괴적 수준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엥겔스: 이러한 파국은 1837년의 장기 공황과 1842년의 일반 공황을 거치면서도 과잉 생산의 위험성을 부정해 온 상공업자들의 이기적 맹목성에서 기인하였다. 속류 경제학자들의 허항된 장밋빛 전망과 결합된 이러한 집단적 판단 마비는 통화주의 학파로 하여금 그들의 가설을 국가적 규모에서 실천할 기회를 제공하였고, 그 결과 1844년과 1845년의 은행법이라는 모순적인 입법 체제가 구축되기에 이르렀다.

 

1844년 은행법은 잉글랜드 은행의 기능을 발권부와 은행부로 엄격히 분리하였다. 발권부는 1,400만 파운드의 국채 중심 보증 준비와 총 금속 준비 (이 중 은은 최대 1/4까지 허용)를 보유하며, 이 두 합계액에 상응하는 은행권을 발행한다. 발행된 은행권 중 시중에 유통되지 않은 분량은 은행부에 예치되어, 상시적인 거래를 위한 소액 주화 (1백만 파운드)와 함께 은행부의 현금 준비금을 구성한다. 발권부는 경제 주체들을 상대로 금과 은행권의 교환 업무만을 수행하며, 그 외 모든 금융 거래는 은행부가 전담한다.

 

1844년 은행권 발행권을 보유했던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사립 은행들은 그 발행 권한을 인정받았으나, 발행 규모는 엄격히 할당된 한도 내로 제한되었다. 개별 사립 은행이 발행을 중단할 경우, 잉글랜드 은행은 해당 할당액의 2/3에 해당하는 금액만큼 무보증 은행권을 추가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에 의거하여 잉글랜드 은행권의 무보증 발행 한도는 1892년까지 초기 1,400만 파운드에서 1,645만 파운드로 점진적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잉글랜드 은행의 금 준비금에서 5파운드의 금이 유출될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5파운드의 은행권이 발권부로 환수되어 폐기되며, 반대로 5소브린의 금화가 금 준비금에 유입될 때마다 새로운 5파운드 은행권이 유통 체계로 진입한다. 이는 은행권의 유통을 금속 유통의 법칙에 엄격히 종속시키려 했던 오브스톤의 이론적 이상이 실무적으로 구현된 형태다. 통화주의자들은 이러한 산술적 제어 방식을 발판 삼아 통화 가치의 안정성을 확보하면서, 경제적 파국인 공황을 영구적으로 방지할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현실적으로 잉글랜드 은행을 두 개의 독립된 부서로 분할한 조치는 이사회가 결정적인 위기 국면에서 은행의 가용 총자산을 유연하게 운용할 권한을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로 인해 발권부가 수백만 파운드 스털링의 금과 1,400만 파운드의 유가 증권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정작 실무를 담당하는 은행부는 파산 위기에 직면하는 모순적 사태가 가시화되었다.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은 공황기마다 반복되는 격심한 해외 금 유출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대외 결제를 위한 금 유출은 주로 잉글랜드 은행의 금 준비금에 의존하여 보존되어야 했으나, 발권부의 엄격한 분리로 인해 은행부는 가용 자산의 접근이 차단된 채 급격한 유동성 고갈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해외로 5파운드의 금이 유출될 때마다 국내 유통 영역에서 동일한 액수의 은행권이 회수됨에 따라, 유통 수단의 공급 그것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에 오히려 축소된다. 결과적으로 1844년의 은행법은 공황 발발 시 사업계 전체로 하여금 은행권 퇴장 현상을 자극하여 위기를 심화시키고 가속화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이 법은 화폐 공급이 급감하는 국면에서 지불 수단에 대한 수요를 인위적으로 팽창시키면서 이자율을 살인적인 수준까지 끌어올린다. 이처럼 1844년 은행법은 공황을 제어하기는커녕 격화시켜, 실물 경제 전반 또는 법령 자체 중 하나가 파괴되어야만 하는 극단적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실제로 18471025일과 18571112, 공황이 이러한 파국적 절정에 도달했을 때 정부는 1844년의 은행법 효력을 정지하고 잉글랜드 은행의 은행권 발행 제한을 해제하면서 위기를 타개하였다. 1847년의 경우, 우량 유가 증권을 담보로 은행권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주관적 확신만으로도 퇴장되었던 400-500만 파운드의 자금이 즉시 시장으로 환류되었다. 또한 1857년에는 법정 한도를 초과하여 발행된 은행권이 100만 파운드 미만에 불과하였고 그 기간 역시 매우 단기적이었음에도, 법 정지 조치 만으로도 시장의 공포를 진정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1844년 은행법의 기저에는 19세기 초반 약 20년간 지속된 잉글랜드 은행의 태환 정지와 그에 따른 은행권 가치 하락의 잔재가 깊게 각인되어 있다. 이 법안은 은행권에 대한 경제 주체들의 신용이 상실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과도하게 체현하고 있으나, 이는 실제 시장의 역학에 대조해 볼 때 지나친 우려에 불과하다. 이미 1825년 공황 당시, 통용이 정지되었던 구권 1파운드 은행권의 퇴장분을 재발행하는 것만으로도 위기가 수습되었던 사례는 매우 시사적이다. 이는 전반적이고 격심한 불신이 팽배한 시기조차 잉글랜드 은행권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음을 뒷받침한다.

 

이처럼 국가 전체의 신용이 지지하는 가치 표상으로 잉글랜드 은행권은 그 자체로 공고한 지위를 점하고 있으며, 따라서 은행법이 상정하는 신용 붕괴의 위협은 역사적 실재와 배치되는 가공의 우려라 할 수 있다.

 

이제 1844년 은행법의 영향력에 관한 주요 증언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은 해당 은행법이 과잉 투기를 억제하는 데 기여했다고 확신하였다. 공교롭게도 그가 이와 같은 안이한 견해를 피력한 시점은 대공황이 발생하기 불과 4개월 전인 1857612일이었다. 당시 그는 은행 이사들과 상인 일반상업 공황의 본질과 과잉 투기가 초래하는 막대한 손실을 이전보다 훨씬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며 이를 치하하였다. (은행법, 1857, 2031).

 

밀의 이론적 가설에 따르면, 1파운드권 은행권이 제조업자 등의 임금 지불용 대부로 발행될 경우, ‘해당 은행권은 소비 주체들의 수중에 들어가 실질적인 상품 수요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필연적으로 수요 팽창을 유발하며, 결과적으로 상품 가격을 일시적으로 등귀시키는 경향을 띠게 된다.’는 것이 그의 논리적 요지였다. (2066).

 

밀의 주장은 몇 가지 근거 없는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 그는 제조업자가 임금을 금 대신 지폐로 지급할 때 더 높은 임금을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인가. 제조업자가 100파운드 고액권을 대부받아 이를 금으로 환전하여 임금을 지급한다면, 그 임금이 1파운드 소액권으로 직접 지급될 때마다 상품 수요를 덜 형성한다고 믿는 것인가.

 

또한 그는 특정 광산 지역에서 임금이 실제 지방 은행의 은행권으로 지급되며, 여러 명의 노동자가 5파운드권 한 장을 공동으로 수령하는 관행이 존재함을 간과하고 있다. 이러한 지급 방식의 차이가 실질적인 수요 증대를 유발한다는 논리는 성립하기 어렵다. 결국 그의 가설은 은행업자가 소액권으로 대부할 때 고액권보다 더 용이하거나 더 막대한 규모의 자금을 공급하게 된다는 자의적인 판단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엥겔스: 1파운드 은행권에 대한 밀의 이례적인 우려는 그의 경제학 체계 전반이 모순을 개의치 않는 절충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설명된다. 그는 투크의 견해를 상당 부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상품 가격이 유통 화폐량에 규정된다는 화폐수량설의 신념을 고수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1파운드 은행권이 발행될 때 그에 상응하는 소브린 금화가 잉글랜드 은행의 준비금으로 환류된다는 화폐 유통의 기본 원리를 신뢰하지 않는다. 대신 은행권의 추가 발행이 유통 수단의 양적 팽창과 그에 따른 화폐 가치 하락을 초래하여, 결국 상품 가격을 인상시킬 것이라는 막연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밀이 제기한 모든 우려의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이론적 모순이 자리 잡고 있다.)

 

투크는 상업 불황, 1848-1857에서 잉글랜드 은행의 부서 분할과 은행권 태환 보증을 위한 과잉 조치의 폐해를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1847년 발생한 극심한 이자율 변동은 1837년이나 1839년의 사례와 대조적이며, 이는 전적으로 잉글랜드 은행이 발권부와 은행부로 이원화된 구조적 결함에 기인한다 (3010).

 

은행권의 근본적인 안전성은 1825년은 물론 1837년과 1839년의 위기 속에서도 결코 훼손된 적이 없다 (3015).

 

특히 1825년의 금 수요는 대외 결제용이 아니라, 지방 은행권에 대한 불신으로 발생한 유통 공백을 메우기 위한 내부적 필요에 불과하였다. 이 공백은 1797년 발행되고 1821년 중지되었다가, 1825년 말 유통 수단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잉글랜드 은행이 1파운드권 발행을 재개하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금으로 보전되었을 뿐이었다 (3022).

 

182511월과 12월에는 실질적인 수출용 금 수요는 전무하였다 (3023).

 

잉글랜드 은행에 대한 국내외 불신 문제를 고찰할 때, 국채 이자나 예금의 지불 정지는 은행권의 태환 정지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사안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3028).

 

상업 공황기에 은행권의 태환성을 위협할 만한 제반 사정들이 반드시 새로운 심각한 곤란을 야기할 것이라는 주장은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3035).’

 

‘1847년 위기 당시에 발권부의 은행권 발행을 탄력적으로 증대시켰다면, 이는 1825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오히려 잉글랜드 은행의 금 준비금을 보충하고 안정화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3058).’

 

뉴마치는은행법, 1857위원회에 출석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며 은행법의 구조적 결함을 지적한다.

 

잉글랜드 은행을 두 부서로 분할하고 그에 따라 준비금을 이원화한 조치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낳았다. 이 나라의 상업과 직결된 은행 업무 전반이 종전 준비금의 절반에 불과한 자금으로 운영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할 구조로 인해 은행부의 준비금이 미세하게 감소하기만 해도 잉글랜드 은행은 즉각적으로 할인율을 인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준비금의 인위적인 분할이 할인율의 빈번하고도 발작적인 변동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 (1357).’

 

실제로 1844년 은행법 발효 이후 18576월까지 할인율 변동 횟수는 약 60회에 달하였다. 이는 동일한 기간인 1844년 이전의 변동 횟수가 12회 정도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할 때 이례적으로 높은 수치다 (1358).’

 

1811년부터 잉글랜드 은행 이사 및 총재를 역임한 파머의 상원 위원회 증언 (상업 불황, 1848-1857)1844년 은행법의 실효성에 대해 매우 유의미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182512월 잉글랜드 은행의 금 준비금이 약 110만 파운드에 불과했던 당시, 현행 은행법 (1844년 은행법)이 존재했더라면 잉글랜드 은행은 필연적으로 파산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잉글랜드 은행은 매주 500-600만 파운드의 은행권을 과감히 발행하면서 공황의 충격을 완화할 수 있었다 (828).’

 

‘1837228일 역시 은행법이 적용되었다면 체제가 붕괴되었을 첫 번째 시기 (182571일 이래)로 꼽힌다. 당시 금 보유액이 390-400만 파운드 수준이었음을 고려할 때, 법정 산식에 따른 은행권 준비액은 고작 65만 파운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동성 부족 상태는 1839년에도 재차 발생하여, 79일부터 125일까지 지속되었다 (825).’

 

당시 은행권 준비액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95일에는 준비액이 합계 20만 파운드가 부족한 상태였으며, 115일에 이르러서는 그 부족액이 약 100-150만 파운드까지 확대되었다 (826).’

 

특히 1844년의 은행법은 1837년 당시 잉글랜드 은행이 수행했던 대미 무역 금융 지원을 원천적으로 차단했을 공산이 크다 (830).’

 

당시 미국과 거래하던 주요 상사들이 연쇄 도산 위기에 처했으나, 잉글랜드 은행의 구제 금융이 없었다면 생존할 수 있었던 상사는 극소수에 불과했을 것이다 (831).’

 

비록 1837년의 화폐 핍박이 미국 무역에 국한되어 1847년의 전면적 공황과는 성격이 달랐다 (836).’

 

그 위기 타개책을 둘러싼 정책적 논쟁은 매우 치열했다.

 

18376월 잉글랜드 은행 이사회 내부에서는 이자율을 인상해 상품 가격을 강제로 인하하면서 화폐 가치를 높이고 상품 가치를 떨어뜨려 해외 채무를 변제해야 한다는 이른바 원칙론적의견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838).’

 

잉글랜드 은행의 실질적 금 보유액이라는 자연적 한계 대신, 1844년 은행법이 도입한 인위적 제한은 불필요한 경제적 곤란을 야기하며 상품 가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향이 있다 (906).’

 

현행법 체제 아래에서는 잉글랜드 은행의 금 준비액을 950만 파운드 이하로 감축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되며, 이러한 경직성은 물가와 신용 전반에 강한 압박을 가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압박은 환율을 인상시켜 금 수입을 강제로 증대시키면서 그만큼 발권부의 금 보유액을 인위적으로 보충하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968).’

 

또한 잉글랜드 은행은 현재의 제약으로 인해 환율 안정에 필수적인 은을 적시에 운용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996).’

 

잉글랜드 은행의 은 준비를 전체 금속 준비의 1/5로 제한하는 규정은 그 정책적 목적조차 불분명하며, 오히려 통화 운용의 유연성만을 저해하고 있다 (999).’

 

해당 규제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화폐 가치를 인위적으로 높이는 데 있었다. 통화주의적 기조와 별개로, 잉글랜드 은행의 부서 분할이나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 은행들에 대한 초과 발행분 금 보유 강제 조치는 모두 동일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국가 전체의 금속 준비가 분산됨에 따라, 불리한 환율을 시정해야 할 잉글랜드 은행의 중앙집권적 역량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자율의 과도한 등귀를 유발하는 핵심 기제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금 준비 없이는 1,400만 파운드를 초과하는 은행권 발행을 금지한 규정이다.

 

둘째, 은행부가 일반 시중 은행처럼 화폐 과잉기에는 이자율을 인하하고 화폐 부족기에는 이자율을 인상하도록 강제한 구조적 설정이다.

 

셋째, 대륙 및 아시아와의 환율 시정에 필수적인 은 준비액을 제한한 조치다.

 

마지막으로, 수출용 금 수요가 전무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은행들에 대해 실효성 없는 은행권 태환성 유지를 구실로 금 보유를 강요한 규정 등이다. (이는 실상 허구에 불과한 명분일 뿐이었다.)

 

실제로 1844년 은행법은 1857년 스코틀랜드 은행들에 대한 최초의 금 인출 소동 (뱅크런)을 야기하는 도환선이 되었다.

 

또한 현행 은행법은 경제적 영향이 판이한 해외 금 유출과 국내 금 유출을 구분하지 않은 채 시장 이자율의 극심하고도 상시적인 변동을 초래하고 있다.

 

은의 운용과 관련하여 파머는 잉글랜드 은행이 은행권으로 은을 매입할 수 있는 시점은 오직 환율이 영국에 유리하여 은의 과잉이 존재하는 경우로 한정된다고 지적하였다 (992, 994). 그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금속 준비의 상당 부분을 은으로 보유하는 유일한 목적은 환율이 영국에 불리한 시기에 대외 지불을 원활히 하기 위함이다 (1003).’

 

은은 세계 전역에서 화폐로 통용되므로, 대외 지불에 가장 적합한 상품이며, 최근 금 본위제를 채택한 미국은 극히 제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1004).’

 

파머의 견해에 따르면, 불리한 환율로 인해 금이 해외로 유출되는 상황이 아닌 한, 잉글랜드 은행은 경제 핍박기에도 이자율을 종전 수준인 5% 이상으로 인상할 필요가 없었다. 1844년 은행법의 제약이 없었다면, 모든 우량 어음은 종전과 마찬가지로 적정 이자율 하에서 아무런 곤란 없이 할인되었을 것이다 (1018-1020).

 

그러나 1844년 은행법이 강제하는 구조와 184710월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잉글랜드 은행이 설정하는 이자율이 아무리 가혹하더라도 신용 있는 상사들은 채무 이행를 위해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1022).

 

이와 같은 고금리의 유도가 바로 해당 법령의 본질적인 목적이었다. 파머는 귀금속에 대한 대외 수요가 이자율에 미치는 영향과, 국내 경제의 불신이 팽배한 시기에 잉글랜드 은행의 대규모 금 인출 사태를 방어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이자율을 인상하는 행위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1029).’고 강조한다.

 

‘1844년 은행법이 도입되기 이전에는 환율 여건이 유리하고 공황의 전조가 보일 때 은행권을 무제한으로 발행하면서 유동성을 공급하였으며, 오직 이러한 대응만이 경제적 핍박 상태를 실효적으로 완화할 수 있었다 (1023).’

 

39년간 잉글랜드 은행 이사직을 수행한 파머의 증언에 이어, 1801년 이래로 스푸너 애트우드 상사의 공동 출자자로 활동해 온 사립 은행업자 트웰즈의 증언은 더욱 구체적이다.

 

그는 은행법, 1857위원회의 증인 중 국내 경제의 현실적 모순을 간파하여 공황의 도래를 예측한 유일한 인물이었으나, 이론적으로는 버밍엄 학파의 소실링론자이자 애트우드 형제의 추종자라는 한계를 지닌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CW 29: 319 참조).

 

질문자: 증인은 1844년의 은행법이 어떻게 작용하였다고 보는가.

 

트웰즈: 은행업자의 처지에서 말한다면, 그 법은 아주 훌륭하게 작용하였다고 말하고 싶다. 그 법은 모든 종류의 은행업자와 (화폐) 자본가에게 큰 이득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법은 성실하고 근면한 사업가들에게는 매우 나쁘게 작용하였다. 그들은 사업을 확신을 가지고 운영하기 위해 할인율의 안정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 법은 화폐 대부를 (은행업자에게만) 매우 유리한 사업으로 만들었다 (4488).’

 

트웰즈는 1844년 은행법의 작용에 대해 은행업자의 관점에서 극히 냉소적인 평가를 내린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해당 법안은 화폐 자본가와 은행업자들에게는 막대한 이득을 안겨준 훌륭한장치였으나, 사업의 확신을 위해 할인율의 안정을 필요로 하는 성실한 실업가들에게는 치명적인 악법으로 작용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법은 생산적 투자보다 화폐 대부 자체를 훨씬 유리한 사업으로 변질시켰다 (4488).

 

질문자: 1844년의 은행법은 런던의 주식 은행들로 하여금 주주들에게 20-22%의 배당을 보장하는가.

 

트웰즈: 어제 한 주식 은행은 18%를 배당하였고, 다른 한 은행은 20%를 배당한 것 같다. 그러니 그들이 1844년의 은행법을 매우 강력하게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 (4489).’

 

실제로 이 시기 런던의 주식 은행들은 주주들에게 18%에게 20%를 상회하는 고율의 배당을 시행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초과 이득 구조로 인해 은행권은 1844년 은행법을 강력히 지지할 수밖에 없는 이해관계에 놓여 있었다 (4489).

 

반면, 대자본을 보유하지 못한 소규모 사업가와 상인들은 극심한 경제적 압박에 직면하였다. 이들의 영세한 인수 어음 (20-100파운드 규모) 중 상당수가 결제되지 못한 채 부도로 처리되어 지방 각지로 반환되는 현상은, 당시 소상공인들이 처한 파괴적인 경제적 위기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지표가 되었다 (4490).’

 

트웰즈는 제4494호에서 당시 실물 경기가 심각한 침체 국면에 진입했음을 강조한다. 그의 증언은 타인들이 간과했던 공황의 잠재적 파괴력을 정확히 간파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런던의 주요 상품 거래소인 민싱 레인의 상황에 대해, 그는 상품의 명목 가격은 유지되고 있으나 실제 거래는 전무한 상태이며 그 어떤 가격으로도 매각이 무망한 마비 상태에 빠졌다 (4494).’

 

이러한 유동성 고갈의 전형적인 사례로 그는 한 프랑스 상인의 거래를 제시한다 (4495).

 

해당 상인은 3,000파운드 상당의 상품을 지정가에 판매하고자 민싱 레인의 중개인 (브로커)에게 위탁했으나, 시장 침체로 인해 지정가를 확보할 수 없게 된다. 자금 압박을 받던 상인은 상품을 담보로 중개인을 지급인으로 하는 3개월짜리 환어음을 발행하여 1,000파운드를 선대받는다. 그러나 3개월 뒤 어음의 만기가 도래했음에도 상품은 여전히 매각되지 않고, 중개인은 3,000파운드라는 충분한 담보물을 보유하고도 이를 현금화하지 못한 채 어음 결제 불능이라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이처럼 실물 자산의 유동화가 차단되면서 개별 경제 주체들이 연쇄적으로 파멸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공황의 기제가 가시화되었다.

 

국내 경기가 극심한 침체에 빠질 때 모순적으로 대규모 수출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4496).’

 

질문자: 국내의 소비가 감소하였다고 판단하는가.

 

트웰즈: 매우 크게. 거대하게. 감소하였다. 이 파괴적인 위축은 현장에서 인민들을 직접 만나는 소매상들이 누구보다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다 (4497).’

 

그는 현재 국내 소비가 소매 시장에서 체감될 만큼 거대하게 위축되었다고 진단한다 (4497).

 

비록 통계상 수입액이 크게 나타나고 있으나, 이는 왕성한 소비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판매되지 못한 채 창고에 쌓여 있는 재고의 증대에 불과하다. 앞서 언급한 3,000파운드 규모의 수입 상품이 시장에서 매각되지 못하고 묶여 있는 사례가 이를 뒷받침한다 (4498).’

 

질문자: 화폐가 비쌀 때, 곧 금리가 치솟고 유동성이 고갈될 때 상대적으로 자본의 가치는 싸진다고 보는가.

 

트웰즈: 그렇다. 화폐의 희소성이 극에 달할수록, 실물 자본은 제값을 받지 못한 채 헐값에 던져지기 마련이다 (4514).’

 

특히 그는 화폐가 앙등할 때, 자본은 폭락한다고 증언한다 (4514).

 

트웰즈의 증언은 높은 이자율과 자본의 가치 (가격)를 동일시하는 오브스톤의 통화주의적 견해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화폐 대부 비용인 이자율이 치솟는 공황기에, 정작 실물 자본과 상품의 가치는 파멸적인 수준으로 하락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사업의 운영 실태에 관해 트웰즈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많은 경제 주체들이 자기 자본의 한계를 도외시한 채 막대한 규모의 수출입 거래를 강행하고 있다. 이들은 단 한 번의 운수 좋은 거래로 거액의 수익을 올려 모든 채무를 청산하겠다는 투기적 동기에 의존하여 사업을 지속한다. 비록 한 차례의 선적에서 20% 내지 40%에 달하는 막대한 손실을 보더라도, 차기 거래에서 이를 만회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 하에 무리한 행보를 이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쇄적 도박이 실패로 귀결될 경우, 해당 상사들은 단 한 푼의 자산도 남기지 못한 채 처참하게 파산하며, 최근 이러한 사례는 빈번하게 목격되고 있다 (4616).’

 

지난 10년간의 저금리 기조는 은행업자에게 표면적으로는 불리해보일 수 있으나, 실질적인 이윤 구조는 이전보다 공고해졌다. 은행권의 과잉 발행으로 이자율이 낮아지면 예금 유입량이 증대되며, 반대로 이자율이 고공 행진할 때는 은행 측에 직접적인 폭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4791).’

 

, 저금리 시기에는 화폐 수요의 증가로 대부 규모를 확장하여 수익을 보전하고, 고금리 시기에는 대부 금리와 예금 금리의 격차 (예대 마진)를 인위적으로 확대하면서 정당한 수준 이상의 이익을 취득하게 된다 (4794).’

 

결과적으로 1844년 은행법이 초래한 이자율의 변동성은 은행업자들에게 어떤 국면에서든 초과 이윤을 보장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4794).

 

이미 본 바와 같이, 모든 금융 전문가는 잉글랜드 은행권에 대한 경제 주체들 간의 신뢰가 확고부동하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그럼에도 1844년 은행법은 약 900-1,000만 파운드에 달하는 막대한 금을 잉글랜드 은행권 태환 보증이라는 명목하에 절대적으로 동결시키고 있다. 이러한 금 준비금에 대한 물신주의적 집착은 이전의 전형적인 화폐 퇴장자들보다 더욱 극단적인 양상을 띤다. 리버풀의 브라운은 당시 발권부가 보유했던 금속 준비의 비경제성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상업 불황, 1848-1857, 2311).

 

해당 자금은 은행법을 위반하지 않고서는 단 한 푼도 유통시킬 수 없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바다에 내버린 것과 다를 바 없는 무용지물이었다 (2311).’

 

런던의 근대적 건축업 실태를 증언했던 건축업자 캡스 (권 제12)1844년 은행법의 본질에 관해 다음과 같이 폭로한다.

 

질문자: 그렇다면 전체로 보아 현재의 제도 (1844년 은행 입법)는 산업의 이윤을 주기적으로 고리대금업자의 주머니로 옮겨놓기 위한 매우 교묘한 제도라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캡스: 그렇게 생각한다. 적어도 건축업에서는 정확히 그렇게 작용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5508).’

 

현행 은행 입법 제도는 산업 자본이 창출한 이윤을 주기적으로 고리대금업자의 수중으로 이전시키기 위해 고안된 매우 치밀한 기제다. 적어도 건축업 분야에서 이 법은 명백히 그러한 약탈적 방식으로 작용해 왔다 (5508).

 

이와 더불어 1845년 제정된 은행법은 스코틀랜드의 은행들까지 잉글랜드와 비슷한 제도적 틀 안으로 편입시켰다. 이에 따라 스코틀랜드의 개별 은행들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법적 발행 한도를 초과하는 은행권에 대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금을 보유해야만 하는 제약에 직면하게 되었다.

 

1845년 은행법이 초래한 실질적인 영향은상업 불황, 1848-1857에 수록된 증언들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스코틀랜드 은행 이사인 케네디의 증언.

 

질문자: 1845년의 은행법 이전에 금의 유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스코틀랜드에 있었는가.

 

케네디: 전혀 없었다 (3375).’

 

질문자: 그 뒤 (법 제정 이후) 금의 유통이 증가되었는가.

 

케네디: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금을 싫어한다 (3376).’

 

1845년 은행법 제정 이전 스코틀랜드에는 금 유통이라 부를 만한 현상이 전무하였으며, 법 제정 이후에도 경제 주체들 간의 금 기피 성향으로 인해 실질적인 금 유통의 증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3375, 3376).

 

1845년 이래 스코틀랜드 은행들이 의무적으로 보유해야 하는 약 90만 파운드의 금은 어떠한 생산적 기능도 수행하지 못한 채, ‘자본의 상당 부분을 무익하게 흡수하는 폐단만을 낳고 있다 (3450).’

 

유니언 뱅크 오브 스코틀랜드의 이사 앤더슨의 증언.

 

질문자: 스코틀랜드의 은행들이 잉글랜드 은행에 금을 요구한 유일한 이유는 외환 부족 때문이었는가.

 

앤더스: 그렇다. 그리고 이것은 에든버러에 금을 보유하는 것만으로는 완화되는 것이 아니다 (3588).’

 

스코틀랜드 은행들이 잉글랜드 은행에 금을 요구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대외 외환 부족에 기인하며, 이는 에든버러에 금을 물리적으로 비축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3588).

 

또한 스코틀랜드의 은행들은 잉글랜드 금융권 (구체적으로는 잉글랜드의 사립 은행들)에 이전과 동일한 규모의 유가 증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잉글랜드 은행으로부터 금을 인출할 수 있는 실질적인 영향력은 이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3590).’

 

결국 1845년 은행법은 유통 구조의 개선 없이 자본의 유동성만을 동결하는 형식적인 규제에 불과하다.

 

끝으로, 이코노미스트의 윌슨이 집필한 논설에서 1845년 은행법의 실질적인 폐단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본래 스코틀랜드의 은행들은 유휴 자금을 런던 대리점에 예탁하고, 대리점은 이를 다시 잉글랜드 은행에 예탁하는 체계를 유지해 왔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스코틀랜드 은행들은 예치금 한도 내에서 잉글랜드 은행의 금속 준비를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었으며, 대외 지불이 필요한 시점마다 금은 최적의 장소인 런던에 상시 대기 상태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45년 은행법은 이 경제적인 체계를 파괴하였다.

 

해당 법안의 영향으로 인해 최근 잉글랜드 은행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잠재적인 수요에 대비한다는 명목하에 대규모 금화 유출이 발생하였으나, 정작 스코틀랜드 현지에서 그러한 수요가 실현된 적은 없다. 결과적으로 막대한 양의 금이 스코틀랜드에 무익하게 묶여 있게 되었으며, 나머지 금 자산은 런던과 스코틀랜드 사이를 의미 없이 왕복하는 비생산성을 초래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은행들은 은행권 수요 증가가 예상될 때마다 런던에서 금 상자를 수송해 오지만, 해당 시기가 지나면 상자를 개봉조차 하지 않은 채 다시 런던으로 반송하는 소모적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 18471023).

 

(엥겔스: 은행법의 입안자이자 통화주의의 거물인 은행업자 사뮤엘 존스 로이드 (일명 로드 오브스톤)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리를 견지한다.

 

그는 상업 불황에 관한 1848년 상원 위원회에서 가용 자본의 부족으로 발생하는 화폐 핍박과 고금리 현상은 은행권의 추가 발행만으로는 결코 완화될 수 없다 (1514).’고 거듭 강변하였다. 그러나 이는 18471025, 정부가 은행권 발행 증액을 허가한 조치만으로도 공황의 격렬함이 즉각 진정되었던 실증적 사실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오브스톤은 여전히 이자율의 급등과 제조업의 불황은 상공업에 투입될 물적 자본이 감소함에 따라 나타난 필연적 결과 (1604).’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시 수개월간 지속된 제조업의 불황이 증명하는 실체는 그의 주장과 다르다. 실제로는 실물 상품 자본이 창고에 묶여 판매 불능 상태였으며, 이로 인해 과잉 생산을 방지하고자 소재적 생산 자본이 전면적 또는 부분적으로 유휴화되는 공급 과잉의 국면이었기 때문이다.

 

오브스톤은 1857년 은행법 위원회에 출석하여 다음과 같이 자찬한다. ‘1844년 은행법의 원칙을 엄격하고 즉각적으로 준수한 결과, 모든 경제 질서는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으며 화폐 제도는 확고부동한 안정성을 확보하였다. 이 나라의 번영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본 법의 현명함에 대한 국민적 신뢰 또한 날로 증대하고 있다. 위원회가 은행법의 건전성과 유익한 결과에 대한 실례를 요구한다면, 그 대답은 자명하다. 당신의 주위를 살펴보라. 작금의 사업 상태와 모든 계급이 누리는 부와 번영, 그리고 국민적 만족도를 목도하라. 이를 목도한 후에야 위원회는 이토록 흡족한 결과를 도출한 법의 존속 여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은행법, 1857, 4189).

 

그러나 1857714일 위원회에서 행한 오브스톤의 이러한 열렬한 찬사는 불과 몇 개월만에 냉혹한 현실에 직면한다. 같은 해 1112, 영국 정부는 파국으로 치닫는 경제 상황에서 최소한의 자산이라도 보전하기 위해 기적을 행한다1844년 은행법의 효력을 전격 정지시키는 서한을 잉글랜드 은행 이사회에 송부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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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신용 제도 아래의 유통 수단


통화 유통 속도를 규정하는 핵심 기제는 신용이며, 화폐 시장의 심각한 핍박은 통상 유통속도의 급격한 가속과 병행한다.’ (통화 이론 검토: 65)

 

해당 명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우선 유통 수단 (통화)을 절약하는 제반 방법이 신용 체계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가령 5,000단위의 은행권을 전제할 때, A가 어음 대금 지불을 위해 B에게 이를 양도하고, B는 이를 다시 은행에 예탁하며, 은행은 C의 어음 할인을 지원하기 위해 해당 자금을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어음 중개업자에게 대부하는 일련의 연쇄 과정이 발생한다. 이때 은행권의 유통 속도, 곧 구매 및 지불 수단으로의 기능 빈도는 해당 화폐가 예금과 대부의 형태를 취하며 경제 주체 간에 이전되는 속도에 규정된다.

 

유통 수단의 절약이 가장 고도화된 형태는 어음 교환소에서 나타난다. 이곳에서 만기 어음은 상호 상계되어 정리되며, 화폐는 오직 최종 차액을 결제하기 위한 지불 수단으로만 기능한다. 그러나 이러한 결제 기제는 산업가와 상인 간의 상호 신용을 전제로 성립한다. 따라서 신용이 위축되면 어음, 특히 장기 어음의 발행량이 감소하게 되며, 이는 결과적으로신용에 기반한 결제 방식의 경제성을 저하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절약은 거래 체계에서 실물 화폐를 배제하며, 전적으로 신용에 기반한 화폐의 지불 수단적 기능에 의존한다. 지불 집중 기술의 발달 정도를 차치할 때, 이러한 절약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동일 은행 내에서 어음이나 수표로 대변되는 상호 채권을 계좌 간 이전으로 결제하는 방식이다.

 

둘째, 서로 다른 은행들이 상호 결제를 수행하는 방식이다.

 

특히 오브렌드 거니 상사와 같은 어음 중개업자에게 막대한 규모의 어음을 집중시키는 행위는 지방 단위의 상호 결제 규모를 확장하는 핵심 기제로 작용했다. 이러한 절약 기제는 최종 차액 결제에 필요한 유통 수단의 양을 최소화하면서 그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다른 한편으로, 유통 수단으로 화폐의 유통 속도 또한 매매의 순환이나 지불 연쇄의 원활함에 규정되는데, 여기서도 신용은 유통 속도를 매개하고 가속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화폐의 이전이 신용의 개입 없이 단순한 현실적 매매에 국한될 경우, 화폐는 개별 주체의 수중에 비교적 장기간 정체하게 되어 제한적인 거래만을 성사시킨다.

 

그러나 예금과 어음 할인 등의 신용 활동이 개입되면 상황은 반전된다. 판매자가 대금을 은행에 예탁하고, 은행이 이를 다시 타인에게 대출하거나 어음 할인에 운용하면서 화폐는 실물 거래의 매개 없이도 소유주를 신속히 변경하게 된다. , 신용 활동은 화폐의 물리적 이동만이 아니라 소유권을 빠르게 이전시키면서, 주어진 시간 내에 성사시킬 수 있는 실물 거래의 횟수를 비약적으로 증폭시킨다.

 

결국 동일한 은행권이 여러 은행의 예금을 형성할 수 있으며, 단일 은행 내에서도 반복적인 예입과 대출 과정을 거쳐 다수의 예금을 창출하는 것이 성립된다. 예컨대 특정 주체가 예금한 은행권이 타인의 어음 할인에 사용되고, 이것이 다시 상거래를 거쳐 동일 은행에 재예치되는 순환 과정을 거쳐 화폐의 유통 경제와 신용 창출 효과는 극대화된다.

 

 

 단순 화폐 유통에 관한 이전의 고찰 (권 제32)에서 밝힌 바와 같이, 현실적인 화폐 유통량은 유통 속도와 지불 절약 기제가 고정적일 때 상품 가격 및 거래 총량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화폐 유통의 법칙은 은행권 유통 영역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 1844-1857년 잉글랜드 은행권 권종별 연평균 유통액 및 구성비 추이

 

(단위: 천 파운드, %)

 

연도

5-10파운드 (소액권)

20-100파운드 (중액권)

200-1,000파운드 (고액권)

총 유통액

1844

9,263 (45.7%)

5,735 (28.3%)

5,253 (26.0%)

20,241

1845

9,698 (46.9%)

6,082 (29.3%)

4,942 (23.8%)

20,722

1846

9,918 (48.9%)

5,778 (28.5%)

4,590 (22.6%)

20,286

1847

9,591 (50.1%)

5,498 (28.7%)

4,066 (21.2%)

19,155

1848

8,732 (48.3%)

5,046 (27.9%)

4,307 (23.8%)

18,085

1849

8,692 (47.2%)

5,234 (28.5%)

4,477 (24.3%)

18,403

1850

9,164 (47.2%)

5,587 (28.8%)

4,646 (24.0%)

19,398

1851

9,362 (48.1%)

5,554 (28.5%)

4,557 (23.4%)

19,473

1852

9,839 (45.0%)

6,161 (28.2%)

5,856 (26.8%)

21,856

1853

10,699 (47.3%)

6,393 (28.2%)

5,541 (24.5%)

22,653

1854

10,565 (51.0%)

5,910 (28.5%)

4,234 (20.5%)

20,709

1855

10,628 (53.6%)

5,706 (28.9%)

3,459 (17.5%)

19,793

1856

10,680 (54.4%)

5,645 (28.7%)

3,323 (16.9%)

19,648

1857

10,659 (54.7%)

5,567 (28.6%)

3,241 (16.7%)

19,467

 

자료: 은행법, 1858: xxvi.

 

1844년부터 1857년 사이 영국의 수출입 거래액은 두 배 이상 급증했으나, 잉글랜드 은행권의 총 유통액은 오히려 절대적으로 감소하는 양상을 보였다. 권종별 추이를 살펴보면, 5파운드 및 10파운드권의 소액권 유통량은 18449263천 파운드에서 18571,0659천 파운드로 증가하며 당시의 금 유통 확대와 추세를 같이했다. 반면, 2001,000파운드 대의 고액권은 18525856천 파운드에서 18573241천 파운드로 급감하며 250만 파운드 이상의 감소세를 기록했다. 이러한 고액권 유통의 급감은 지불 체계의 제도적 변화에 기인한다.

 

‘185468, 런던의 개인 은행업자들이 주식 은행들을 어음 교환소에 참여시키고 최종 결제를 잉글랜드 은행으로 단일화하면서 결제 방식의 근본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 매일 발생하는 대규모 결제가 각 은행이 잉글랜드 은행에 보유한 계좌 간 이체 방식으로 대체됨에 따라, 종래의 은행 간 상호 결제를 위해 필수적이었던 고액 은행권의 수요가 소멸하였기 때문이다.’ (은행법, 1858: v)

 

도매 상업에서 화폐 사용이 극도로 제어된 양상은 런던의 거대 도매상인 모리슨 딜론 상사가 은행법 위원회에 제출한 자료 (권 제3장 주54)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뉴마치의 증언 (은행법, 18571741)에 따르면, 1페니 우편제, 철도, 전신 등 교통 및 통신 수단의 혁신적 개선 역시 유통 수단의 절약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러한 기술적 발달 덕분에 잉글랜드 은행은 이전과 동일한 수준의 은행권 유통액만으로도 기존보다 약 5-6배에 달하는 방대한 거래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의 근저에는 10파운드 이상의 고액권이 실물 유통 영역에서 사실상 축출된 변화가 자리한다.

 

반면, 1파운드 소액권이 병행 유통되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은행권 유통액이 약 31% 증가한 것은 지불 수단 구성의 차이에 기인한 필연적 결과라 할 수 있다 (1747). 당시 영국 전역의 은행권 총 유통액은 1파운드권을 포함해 3,700만 파운드 (1749), 금 유통액은 7,000만 파운드 규모였으며 (1750), 스코틀랜드의 경우 1834312, 1844302, 1854405만 파운드로 집계되었다 (1752).

 

이러한 통계적 사실은 은행권이 금속 화폐와 상시 태환될 수 있는 체제하에서 은행권 유통량의 증감을 결정하는 주체가 발권 은행이 아님을 입증한다. , 은행권 유통량은 은행의 자의가 아니라 경제적 거래의 필요와 신용 체계의 발달 정도에 따라 규정된다.

 

(엥겔스: 여기서 고찰되는 대상은 불환 지폐가 아니다. 불환 은행권이 일반적 유통 수단으로 기능하는 것은 러시아의 사례와 같이 국가의 공신력을 바탕으로 지탱되는 특수 상황에 한정되며, 이 경우 제권 제32c에서 규명한 주화. 가치의 표상으로의 불환 국가 지폐 법칙을 따르게 된다.)

 

은행권 유통량은 실재하는 거래상의 필요에 철저히 순응하며, 유통 과정에서 과잉된 은행권은 지체 없이 발행자에게 회수된다. 잉글랜드 은행권이 유일한 법정 통화로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는 영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지방 은행권의 미미한 국지적 유통은 분석에서 배제해도 무방하다.

 

1858년 은행법 위원회에 출석한 잉글랜드 은행 총재 니브의 증언은 이러한 화폐 유통의 원리를 명확히 뒷받침한다.

 

질문자: 어떠한 통화 정책적 조치를 취하더라도 경제 주체들이 보유하는 은행권의 양은 일정하게 유지된다고 보는데, 그 규모가 대략 2,000만 파운드 수준인가.

 

니브의 답변: 통상적인 시기에 경제 주체들이 필요로 하는 통화량은 약 2,000만 파운드이며, 연중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특수 시기에는 100-150만 파운드 가량 일시적으로 증가한다. 경제 주체들은 추가적인 통화 수요가 발생할 경우 언제든 잉글랜드 은행으로부터 이를 충족할 수 있다. (947).’

 

질문자: 화폐 시장의 핍박기에는 경제 주체들이 은행권 보유량을 축소시키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

 

니브의 답변: 공황기나 긴축기에는 경제 주체들이 가용할 수 있는 은행권을 확보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따라서 잉글랜드 은행에 채권 (예금 등)이 존재하는 한, 경제 주체들은 해당 채권에 근거하여 은행으로부터 은행권을 인출하면서 통화량을 유지하려 한다. (948).’

 

질문자: 그렇다면 약 2,000만 파운드 규모의 법화가 상시 필요하다고 판단하는가.

 

니브의 답변: 경제 주체들이 실질적으로 보유하는 통화량은 상황에 따라 1,850만 파운드에서 2,100만 파운드 사이를 변동하지만, 평균적으로는 1,900-2,000만 파운드 선에서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949).’

 

이러한 증언은 은행권의 유통 규모가 발행 주체의 자의적 결정이 아니라, 시장의 화폐적 예비 및 지불 수요라는 객관적 요인으로부터 규정됨을 시사한다.

 

상업 불황에 관한 상원 위원회에서 투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상업 불황, 1848-1857, 3094).

 

잉글랜드 은행은 경제 주체들이 보유하는 은행권 유통량을 임의로 증대시킬 권능이 없다. 반면, 이를 축소할 수는 있으나, 이는 매우 강압적이고 극단적인 조치를 수반할 때에만 실현된다.’

 

30년간 노팅엄에서 은행업에 종사한 라이트 역시 지방 은행이 시장의 필요와 수요를 초과하여 은행권을 유통시키는 것은 불가함을 단언하며, 잉글랜드 은행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언하였다 (상업 불황, 1848-1857, 2844).

 

잉글랜드 은행권 발행 자체에는 별도의 제한이 없을지라도, 실질적인 유통 필요량을 초과하는 분량은 예금의 형태로 환류되어 다른 자산 형식을 취하게 된다.’

 

이러한 원리는 스코틀랜드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1파운드권 유통이 허용되고 금을 기피하는관습으로 인해 지폐 위주의 유통 체계를 갖춘 스코틀랜드에서, 은행 이사 케네디는 은행이 자의적으로 은행권 유통을 감축할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은행권이나 금을 매개로 하는 국내 거래가 존재하는 한, 은행업자는 예금자의 인출 요구든 여타의 방식이든 해당 거래에 수반되는 만큼의 통화를 공급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스코틀랜드의 은행들은 대충 등 자신의 업무 범위를 축소할 수는 있으나, 유통되는 통화량 자체를 직접 통제할 수는 없다.’ (상업 불황, 1848-1857, 3446, 3448).

 

이러한 제반 증언은 은행권의 유통 규모가 발행 기관의 공급 결정이 아니라, 경제 체제 내의 실질적인 화폐적 필요량에 따라 사후적으로 규정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유니온 뱅크 오브 스코틀랜드의 이사 앤더슨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상업 불황, 1848-1857, 3578).

 

질문자: 스코틀랜드 은행 간의 은행권 상호 교환 제도가 개별 은행의 과잉 발행을 억제하는가.

 

앤더스의 답변: 그렇다.’

 

(사실상 과잉 발행 억제와는 무관하며, 해당 제도는 각 은행권이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원활하게 통용되도록 보장하는 기능을 수행할 뿐이다.)

 

그러나 은행권 상호 교환 제도보다 강력한 과잉 발행 방지 기제는 스코틀랜드의 고유한 일반적인 은행 계좌 보유 관습이다. 소액의 화폐라도 보유한 주체는 은행 계좌를 거쳐 당장 불필요한 자금을 매일 예금한다. 결과적으로 영업 종료 시점에는 개인의 수중을 떠난 거의 모든 화폐가 은행으로 환류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아일랜드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된다. 아일랜드 은행 총재 맥도널과 프로빈셜 뱅크 오브 아일랜드의 이사 머리의 증언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은행권 유통량은 발행 기관의 공급 정책은 물론, 은행권의 태환을 보증하는 금 준비금의 규모와도 독립적으로 움직인다.

 

‘18469182,090만 파운드였던 잉글랜드 은행권 유통액은 금 준비금이 1,6273,000파운드에서 1,0246,000파운드로 급감한 184745일에도 2,0815,000파운드를 유지하였다. 이는 약 600만 파운드의 금이 유출되었음에도 국내 통화량에는 실질적인 감축이 발생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키니어, 1847: 5).

 

물론 이러한 결론은 영국의 현행 경제 여건과 은행권 발행액 및 금속 준비율에 관한 현행 입법이 유지되는 범위 내에서만 유효한 타당성을 지닌다.

 

유통 화폐, 곧 은행권과 금의 양을 결정하는 요인은 경제 활동 자체의 실질적 요구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주목해야 할 지표는 일반적인 경기 변동과는 무관하게 매년 반복되는 주기적인 유통 화폐량의 변동이다. 뉴마치의 증언 (은행법, 1857, 1650)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유통 화폐량은 특정 월에 팽창하고 다른 월에 수축하며 평균 수준으로 회귀하는 규칙적인 등락 과정을 거쳐 왔다.’

 

가령 매년 8월에는 수확기 비용 결제를 위해 수백만 파운드 스털링 (주로 금화)이 잉글랜드 은행에서 국내 유통 부문으로 방출된다. 이는 주로 농업 노동자의 임금 지불을 목적으로 하기에 잉글랜드 내 금융 중심지에서는 거의 소비되지 않으며, 연말에 이르러 다시 잉글랜드 은행으로 환류한다. 반면, 금화 대신 1파운드 은행권이 지배적으로 통용되는 스코틀랜드에서는 매년 5월과 11월에 은행권 유통액이 약 300-400만 파운드 가량 일시적으로 급증한다. 이러한 증가는 지극히 단기적인 현상으로, 14일 경과 시점부터 이미 환류가 시작되어 1개월 이내에 전액 회수되는 양상을 보인다 (상업 불황, 1848-1857, 3595-3600, 앤더슨의 증언).

 

이러한 주기적 변동은 화폐의 유통량이 발권 은행의 정책적 의도보다는 실물 경제의 계절적 수요와 지불 관습에 따라 철저히 규정됨을 입증한다.

 

잉글랜드 은행권의 유통 규모는 매 분기 국채 이자 지급 주기에 따라서도 일시적인 변동을 나타낸다. 초기에는 조세 징수 과정을 거쳐 은행권이 유통 부문에서 회수되나, 이후 이자 지급을 거치며 경제 주체들에게 다시 방출되며, 이 중 상당량은 신속히 은행으로 환류한다. 웨겔린은 이러한 주기에 따른 은행권 유통의 변동액을 약 250만 파운드 규모로 산출하였다 (은행법, 1857, 38). 반면, 악명 높은 오브렌드 거니 할인 상사의 챕만은 이 과정이 화폐 시장에 미치는 압박 정도를 훨씬 심대하게 평가하였다.

 

국채 이자 지급을 위해 유통 부문으로부터 600-800만 파운드에 달하는 막대한 조세가 환수될 경우, 실제 이자가 지급되기 전까지 발생하는 자금의 공백을 메울 대체적인 공급 수단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은행법, 1857, 5196).

 

이는 조세 징수와 재정 지출 사이의 시차에서 발생하는 화폐적 압박이 시장의 유동성 구조에 가시적인 충격을 가함을 시사한다.

 

가장 중요하고 지속적인 변동은 산업 순환의 각 국면에 따라 발생하는 유통 화폐량의 변화다. 이에 관해 오브렌드 거니 상사의 사뮤엘 거니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상업 불황, 1848-1857, 2645).

 

‘184710월 말 경제 주체들이 보유한 은행권은 2,080만 파운드에 달했으나, 당시 화폐 시장에서 은행권을 구하는 일은 극도로 어려웠다. 이는 1844년 은행법의 제약으로 인해 은행권을 입수하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가 확산된 결과였다. 반면, 공포가 사라진 현재 (18483)는 보유액이 1,770만 파운드에 불과함에도 필요 이상의 과잉 상태이며, 런던의 금융업자들은 활용되는 수준보다 훨씬 많은 은행권을 수중에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잉글랜드 은행 외부의 은행권 발행액이 상업적·신용적 상태를 배제한 채로는 실제 유통 상황을 가늠하는 지표로 불충분함을 시사한다 (2650).’

 

, 현재의 화폐액이 과잉이라 간주되는 것은 심각한 경기 침체 때문이며, 물가가 상승하고 거래가 활성화된다면 동일한 1,770만 파운드라도 턱없이 부족하게 평가될 것이다 (2651).’

 

(엥겔스: 경기가 호전되어 대부 환류가 원활하고 신뢰가 안정된 시기에는 유통 수단의 증감이 산업가와 상인의 실질적 필요에 따라 결정된다. 특히 도매 상업에서 금화가 배제되고 금 유통액이 장기간 일정하게 유지되는 잉글랜드의 경우, 은행권 유통액은 이러한 변동을 측정하는 정밀한 지표가 된다. 통상 공황 이후 침체기에는 유통액이 최저치를 기록하나, 경기 반등과 함께 수요가 증대하여 과잉 투기 국면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그러나 공황이 발발하는 순간, 어제까지 풍부했던 은행권은 시장에서 소멸하며 지불 불능의 위기가 도래한다. 모든 상품 소유자가 지불을 위해 은행권을 갈구하며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려는 절박한 시점에, 1844년 은행법은 오히려 은행권 유통액 감축을 강제하면서 위기를 심화시킨다. (상업 불황, 1848-1857, 2930)

 

은행업자 라이트가 지적했듯, ‘공포에 직면한 시기에는 금융 주체들의 화폐 퇴장 현상으로 인해 평상시보다 두 배 이상의 유통 수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공황이 발발하면 경제의 모든 관심은 오직 지불 수단의 확보로 수렴된다. 각 경제 주체는 지불 수단의 입수를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으나, 연쇄적인 지불 불능에 대한 공포로 인해 시장 내 가용 은행권을 선점하려는 격렬한 경합이 전개된다. 개별 주체들이 확보한 은행권을 금고에 퇴장시키면서, 시장 수요와는 상반되게도 은행권은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에 유통 부문에서 자취를 감춘다. 사뮤엘 거니는 184710월 공황 당시 약 400-5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은행권이 이러한 매점으로 인해 퇴장된 것으로 추산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1857년 은행법 위원회에서 행한 챕만의 증언은 화폐 부족 사태가 특정 거대 자본의 주도로 인위적으로 제어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유통 수단이 고갈된 시기에, 격심한 화폐 핍박을 유도하여 화폐 시장을 지배할 수 있는 개별 자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당하다. 현재 런던에는 단독으로 100-200만 파운드의 은행권을 유통에서 일시에 회수할 수 있는 자본가가 다수 존재한다 (4963).’

 

그의 증언에 따르면, 거대 투기 세력은 100-200만 파운드 규모의 콘솔 (영국 국채)을 일시에 매각하면서 시장의 화폐를 흡수할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제어는 실제로 최근 발생하여 심각한 화폐 핍박을 야기한 바 있다 (4965).’

 

비록 은행권을 수중에 사장시키는 행위 자체는 이자 수익 측면에서 비생산적이나, ‘투기꾼에게 이는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위적인 화폐 부족을 발판 삼아 증권 가격을 폭락시키는 데 있으며, 거대 자본은 이러한 시장 압박을 실행할 충분한 권능을 보유하고 있다 (4967).’

 

특정 사례를 빌려 이러한 시장 압박 과정을 구체화할 수 있다. 어느 날 아침 증권 거래소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막대한 화폐 수요가 발생하였다. 한 주체가 챕만에게 당시 시장 금리를 상회하는 7%의 이율로 5만 파운드의 대부를 요청하자, 챕만은 이례적인 고금리에 놀라면서도 이를 수락하였다. 그러나 직후 동일한 주체가 7.5%5만 파운드를, 이어 8%10만 파운드를 추가로 차입하였으며, 심지어 8.5%의 금리로도 대부를 희망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점에서 챕만은 극도의 위기감을 체감하였다. 사후적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는 거대 투기 세력이 시장의 유동성을 일시에 흡수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챕만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본인은 8%의 이율로 거액을 대부해주었으나, 향후 전개될 사태의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로 인해 그 이상의 추가 대부는 단행할 수 없었다.’

 

이는 인위적인 화폐 핍박이 금융 기관의 위기 수용 한계를 무너뜨리고 시장 전체의 신용 고갈을 어떻게 심화시키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경제 주체들이 보유한 1,900만 파운드-2,000만 파운드 규모의 은행권 총량은 겉보기에 일정할지라도, 실질적으로 유통되는 부분과 금융 기관에 유휴 준비금으로 예치된 부분 사이의 비율은 끊임없이 등락한다. 화폐 시장에서 화폐의 풍부함이나 유통액의 충분함으로 표현되는 상태는 대개 준비금의 비중이 높고 실질 유통액이 낮은 경우를 의미한다. 반대로, 준비금이 고갈되고 실질 유통액이 포화점에 도달한 상태는 화폐 부족으로 규정되며, 이는 대부 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는 유휴 화폐가 최소화되었음을 시사한다.

 

산업 순환의 총체적 순환과 별개로 발생하는 유통 화페액의 팽창과 수축은 주로 조세 징수나 국채 이자 지급과 같은 기술적 요인에 기인한다. 조세 납부 시기에는 막대한 양의 은행권과 금이 잉글랜드 은행으로 회수되며, 이는 실물 경제의 화폐적 필요와는 무관하게 유통 수단을 강제적으로 수축시킨다.

 

반면, 국채 이자 지급 시기에는 대규모 자금이 시장으로 방출되며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난다. 전자의 경우 경제 주체들은 부족한 유통 수단을 확보하기 위해 은행 차입에 의존하게 되며, 후자의 경우 준비금의 일시적 과잉으로 인해 시중 금리가 하락하는 양상을 보인다.

 

결국 이러한 변동은 유통 수단의 절대적인 총량 변화라기보다, 이를 운용하는 은행업자들의 대부 자본 양도 과정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은행업자는 이러한 자본의 유입과 유출을 매개하면서 이윤을 획득하며, 이 과정에서 화폐는 유통 수단인 동시에 대부 가용 자본으로의 성격을 명확히 드러낸다.

 

특정한 경우 유통 수단의 일시적인 위치 이동이 발생하며, 잉글랜드 은행은 이를 상쇄하기 위해 분기별 (3개월마다) 납세일과 국채 이자 지불일 직전에 저금리 단기 대부를 시행한다. 이때 발행된 추가 은행권은 조세 납부로 인한 통화 부족분을 우선적으로 충당하며, 이후 국채 이자 지급을 방편으로 경제 주체들에게 방출된 과잉 은행권이 대부 상환 과정에서 다시 잉글랜드 은행으로 환류하면서 시장의 안전성이 유지된다.

 

다른 측면에서 유통 수단의 부족이나 풍부는 실제 통화량의 변동보다는, 동일한 자본량이 실물 경제의 능동적 유통 영역과 금융 기관의 예금 (대부 자본) 영역 사이에서 분배되는 비율의 변화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금의 유입으로 인해 잉글랜드 은행권 발행이 증가하더라도, 해당 은행권은 시중 신용 기관의 할인 업무를 지원한 뒤 대부 상환을 위해 다시 잉글랜드 은행으로 환류된다. 따라서 유통되는 은행권의 절대량은 오직 일시적인 팽창을 보일 뿐이다.

 

실물 경제의 확장으로 인해 현실의 유통액이 증가할 경우, 비록 물가가 비교적 낮은 수준을 유지하더라도 이윤 증대나 새로운 투자 확대에 따른 대부 자본 수요 폭증으로 인해 이자율은 상승할 수 있다. 반대로 사업이 수축하거나 신용 공급이 원활해져 현실의 유통액이 감소한다면, 고물가 상황에서도 이자율은 오히려 하락하는 양상을 보일 수 있다. (허바드, 1843 참조).

 

유통 수단의 절대량이 이자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시점은 오직 화폐 핍박기에 국한된다. 이 시기에 발생하는 충분한 유통 수단에 대한 요구는, 화폐의 유통 속도 저하나 대부 자본으로의 전환 지체 현상을 배제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신용 위축에 대응하기 위한 퇴장 수단의 확보 요구와 맞닿아 있다. 일례로 1847년의 은행법 정지는 유통 수단의 실질적인 팽창을 야기하지는 않았으나, 금고에 퇴장되었던 은행권을 다시 끌어내어 능동적인 유통 부문으로 복귀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반면, 1857년의 은행법 정지는 실제 유통 수단의 양적 증가를 동반하며 실물 경제의 필요를 충족시켰다.

 

이러한 특수 국면을 제외하면 유통 수단의 절대량은 이자율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첫째, 유통 수단의 절약 기제와 속도가 일정할 때 화폐의 절대량은 상품 가격과 거래 총량에 따라 종속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설령 가격과 거래량이 변동하더라도 대개 반비례 관계를 형성하여 그 효과가 상쇄되며, 궁극적으로는 신용 상태가 통화량을 규정할 뿐 통화량이 신용 상태를 규정할 수는 없다. 둘째, 상품 가격의 등락과 이자율 사이에는 어떠한 필연적인 상관관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은행 제한법 (1797-1820) 시행기에는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잉글랜드 은행권의 금 태환이 정지되었으며, 당시 통화의 과잉 공급에도 이자율은 1821년 태환 재개 이후보다 항상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이후 이자율은 오히려 은행권 발행이 제한되거나 환율이 상승함에 따라 급격히 하락하는 양상을 보였다.

 

구체적인 시기별 추이를 살펴보면, 1822, 1823, 1832년에는 통화량이 적었음에도 이자율은 낮게 형성된 반면, 1824, 1825, 1836년에는 통화량의 증대와 함께 이자율이 오히려 상승하였다. 또한 1830년 여름에는 통화량이 풍부했음에도 이자율은 저점을 기록하였다. 캘리포니아와 호주의 금광 개발 이후 유럽 전역에서 화폐 유통액이 비약적으로 팽창하였으나 이자율이 동반 상승했다는 사실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는 이자율의 변동이 유통 화폐액의 절대량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입증한다. 이자율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동인은 통화의 양적 규모가 아니라, 산업 순환의 국면과 대부 자본에 대한 실질적 수요·공급의 상관관계에 있다.

 

유통 수단의 지출과 자본의 대부 사이의 본질적 차이는 현실의 재생산 과정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난다. 권 제3편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생산물의 각 구성 부분은 상호 교환을 매개로 순환한다. 가변 자본은 소재적으로 노동자의 생활 수단이자 노동자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의 일부이나, 형식적으로는 자본가를 거쳐 화폐 형태로 분할 지급된다. 자본가가 투하한 이 화폐가 신속히 회수되어 다음 주에 다시 새로운 가변 자본으로 지불될 수 있는지는 전적으로 신용 제도의 조직화 정도에 규정된다.

 

사회적 총자본의 상이한 구성 부분들, 예컨대 소비 수단과 생산 수단 사이의 교환 행위 역시 동일한 원리를 따른다. 상품 유통을 위한 화폐는 교환 당사자 중 일방 또는 쌍방을 매개로 투하되어야 하며, 해당 화폐는 유통 과정을 완수한 뒤 투하 주체에게 반드시 복귀한다. 이는 해당 화폐가 그가 운용하는 실물 산업 자본과는 별개로, 유통의 매개를 위해 추가로 투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권 제203절 참조).

 

신용 제도의 발달로 화폐가 은행에 집중되면, 화폐의 선대 주체는 명목상 은행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선대는 본질적으로 유통 과정에 있는 화폐와 관련된 것으로, 어음 할인과 같은 행위는 유통 수단의 선대일 뿐 그 자체가 자본의 선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 화폐가 유통 수단으로 수행하는 기능적 선대와 실물 자본으로의 대부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챕만의 증언 (은행법, 1857)은 공황기 화폐 유통의 특수성과 자금 순환의 구조적 원리를 명확히 규명한다.

 

은행권의 총량이 충분하더라도 경제 주체들의 수중에서 잠식되어 입수가 어려운 시기가 존재한다 (5062).’ 화폐는 공황 시기에도 물리적으로 존재하나, 경제 주체들이 이를 대부 가용 자본이나 화폐로 전환하기를 거부하고 현실적인 지불 수요에 대비해 퇴장시키기 때문이다.

 

질문자: 농촌 지방 은행들의 유휴 자금 처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챕만의 답변: 농촌 지방의 지방 은행들은 그들의 유휴 과잉 자금을 본인이나 다른 할인업자들에게 보낸다 (5099).’

 

질문자: 반대로, 랭커셔나 요커셔 같은 공업 지방의 상황은 어떠한가.

 

챕만의 답변: 그렇다. 그들 공업 지방은 사업 확장을 위해 필요한 자금의 할인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5100).’

 

질문자: 그렇다면 그러한 기제에 따라 국가 내 특정 지역의 과잉 화폐가 다른 지역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활용되는가.

 

챕만의 답변: 바로 그렇다 (5101).’

 

자금의 지역적 수급 불일치는 할인업자를 매개로 해소된다. 농촌 지역의 지방 은행들이 유휴 과잉 자금을 할인업자에게 송금하면 (5099), 랭커셔나 오크셔와 같은 공업 지대는 사업 운영에 필요한 어음 할인을 이들에게 요청한다 (5100). 이러한 기제에 따라 특정 지역의 과잉 화폐는 타 지역의 자금 수요를 충족시키는 사회적 자본으로 투입된다 (5105).

 

또한 챕만은 은행이 유휴 자본을 콘솔 (국채)이나 재무부 증권에 단기 투자하던 관습이 최근 수시불 대출’ (‘콜대출’)의 성행으로 급격히 감소했음을 언급한다. 그는 자산 유동성 확보 측면에서 단기 증권 매입보다 우량 어음 투자를 선호한다. 어음의 일부가 매일 만기에 도달함에 따라, 익일 운용 가용 유휴 화폐의 규모를 상시 파악하여 사업의 안정성을 제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5101-5105).

 

수출의 증대는 모든 국가, 특히 신용 공여국의 국내 화폐 시장에서 자금 수요의 증대로 발현되나, 이러한 압박이 가시화되는 시점은 주로 화폐 핍박기에 국한된다. 수출 팽창기에는 제조업자가 해외 위탁 판매를 목적으로 수출상을 수취인으로 하는 장기 환어음을 발행하는 것이 일반적 관행이다 (5126).

 

이와 관련하여 챕만은 해당 어음들의 갱신 여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질문자: 이러한 어음들을 주기적으로 갱신하기로 합의하는 관행이 흔하지 않은가.

 

챕만의 답변: 그러한 사실은 대개 할인업자에게 은폐되는데, 우리는 갱신 목적의 어음을 인수하지 않는다. 그러한 행태가 실재할 개연성은 농후하나, 본인이 확정적으로 진술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5127).’ (순진한 챕만)

 

이어 수출 급증에 따른 자본 수요의 상관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언하였다.

 

질문자: 지난 한 해처럼 수출액이 2,000만 파운드 규모로 폭증할 경우, 해당 거래를 매개하는 어음 할인을 위해 막대한 자본 수요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챕만의 답변: 전적으로 그러하다 (5129).’

 

질문자: 영국이 모든 수출품에 대해 대외 신용을 제공하고 있기에, 그에 상응하는 추가 자본이 일정 기간 요구되는 것이 아닌가.

 

챕만의 답변: 영국은 거대한 규모의 신용을 제공하고 있다. 다만 대외적으로 원료를 수입할 때는 역으로 신용을 제공받기도 한다. 예컨대 미국은 통상 60, 기타 지역은 90일 만기의 환어음을 우리 앞으로 발행한다. 반면, 우리가 독일에 상품을 수출할 때는 2-3개월의 신용 기간을 부여한다 (5130).’

 

결국 수출의 증대는 대외 신용 공여의 확대를 의미하며, 이는 국내 화폐 시장에서 어음 할인 형태의 대부 자본 수요를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요인이 된다.

 

1843이코노미스트의 창간자 윌슨은 수입 원료나 식민지 상품의 경우 선적과 동시에 영국을 수취인으로 하는 어음이 발행되며, 이 어음들이 선하 증권과 함께 도착하는 것이 아니냐고 질문한다 (5131). 챕만은 이를 시인하면서도 구체적인 상거래의 실무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영역이라며 답변을 유보한다. 또한 그는 미국 수출의 경우 상품이 수송 중에 증권화된다고 언급하는데 (5133), 이는 영국의 수출상이 수출 상품을 담보로 런던 소재 미국 전문 은행 앞으로 4개월짜리 어음을 발행하여 자금을 융통하고, 해당 은행이 추후 미국 현지에서 대금을 회수하는 구조를 의미한다.

 

원거리 무역의 자본 운용 방식에 관해 챕만은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질문자: 원거리 국가와의 거래는 일반적으로 상품이 최종 판매될 때까지 자본 회수를 기다리는 상인의 책임하에 수행되는가.

 

챕만의 답변: 자기 자본만으로 자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부유한 상인도 존재하나, 대다수는 유력 할인업자의 어음 인수를 매개로 한 선대 방식을 취한다 (5136).’

 

이러한 금융 기능을 수행하는 할인업자들은 주로 런던과 리버풀 등지에 포진해 있다 (5137).’

 

따라서 제조업자가 직접 자금을 지출하든, 할인업자로부터 선대를 받든 이는 모두 영국 내부에서 발생하는 자본 투하의 일환이다. 평시의 제조업자들은 자금 선대에 큰 우려를 개의치 않으나, (1847년 공황기와 같은 예외적 국면에서는 상황이 전적으로 반전되었다.) 통상적인 거래 구조를 예로 들면, 맨체스터의 공산품 상인은 상품을 매입하여 런던의 전문 상사를 매개로 해외로 수출한다. 거래 조건이 성립되면 맨체스터 상인은 인도나 중국 등지로 향하는 해당 상품을 근거로 런던 상사 앞으로 6개월짜리 어음을 발행하며, 은행업자가 이 어음을 할인하면서 금융적 매개가 완성된다. 결과적으로 맨체스터 상인은 원천 상품 대금을 지불해야 할 시점에 이미 어음 할인을 매개로 확보한 화폐를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5138).’

 

이러한 신용 체계는 실물 상품의 이동과 화폐적 자본의 순환 사이의 시차를 극복하게 하면서 영국의 거대한 대외 무역 규모를 지탱하는 핵심 기제로 작용한다.

 

질문자: 상인이 화폐를 수중에 넣었다 하더라도, 이는 본질적으로 은행업자가 선대한 것이 아닌가.

 

챕만의 답변: 은행업자는 어음을 구입하여 소유하게 된다. , 그는 자신의 은행 자본을 상업 어음 할인이라는 특정 형태로 운용하는 것이다 (5139).’ (엥겔스: 챕만은 어음 할인을 단순한 대부 행위가 아니라, 상품 매매와 비슷한 자산의 취득으로 간주하고 있다.)

 

질문자: 그렇다면 어음 할인은 런던 화폐 시장의 수요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가 아닌가.

 

챕만의 답변: 당연하다. 할인은 화폐 시장과 잉글랜드 은행의 가장 중추적인 업무다. 잉글랜드 은행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어음들을 확보하길 원하는데, 이는 그것이 매우 안정적이고 수익성 높은 투자처임을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5140).’

 

질문자: 결과적으로 수출이 팽창하면 화폐 시장에 대한 수요도 연동하여 증대하는가.

 

챕만의 답변: 국가적 번영이 확대됨에 따라 할인업자들 (챕만 세력) 역시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금융 수요의 이익을 수취하게 된다 (5141).’

 

질문자: 이러한 자본 활용처가 급격히 확대된다면, 이자율의 상승은 필연적인 결과가 아닌가.

 

챕만의 답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수순이다 (5142).’

 

한편, 챕만은 제5143호에서 수출이 이토록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지는 상황임에도, 왜 이처럼 막대한 양의 금이 별도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상품 수출에 기반한 채권 확보와 실물 화폐로의 금 수요 사이의 모순적인 불일치를 시사한다.

 

5144호에서 윌슨은 영국의 대외 신용 구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가 수출 시 공여하는 신용의 총량이 수입 시 수혜받는 신용보다 크지 않은가. 가령 인도로 발송된 맨체스터 공산품을 담보로 발행된 어음의 경우 인수 시로부터 그 만기가 10개월에 달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인도로부터 대금을 회수하기 훨씬 이전에, 우리는 이미 미국에 면화 수입 대금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타당하다). 그는 이러한 시차적 불일치가 실물 경제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규명하는 일이 매우 난망함을 토로한다.

 

이어지는 제5145호에서 그는 수출과 수입의 상관관계를 다음과 같이 고찰한다. ‘지난해처럼 공산품 수출이 2,000만 파운드 규모로 급증했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해당 제품 생산을 위한 방대한 원료 수입이 선행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가.’ (이러한 논리는 과잉 수출을 과잉 수입과, 과잉 생산을 과잉 거래와 동일시하는 관점을 내포한다.) 이에 대해 챕만은 전적으로 동의를 표한다.

 

5146호에서는 이러한 거래의 결과로 나타나는 대외 수지 및 금의 이동을 다룬다. ‘해당 기간 영국은 막대한 수입 차액을 지불해야 하므로, 일시적인 적자 상태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미국과의 환율은 영국에 유리하게 형성되어 왔으며, 실제로 오랜 기간 미국으로부터 상당량의 금을 지속적으로 수취하고 있다.’

 

이는 단기적 자금 압박에도 영국의 강력한 산업 경쟁력이 세계 결제 체제를 매개로 최종적으로는 금의 유입을 보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5148호에서 윌슨은 거대 고리대금업자인 챕만에게 고금리가 경제적 번영과 높은 이윤을 대변하는 지표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챕만은 이러한 아첨 섞인 질문에 동의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정직한 유보 조건을 덧붙인다.

 

어떤 이들은 선택의 여지 없이 청산해야 할 채무에 속박되어 있으며, 수익성 여부와 무관하게 그 의무를 이행해야만 한다. 다만 고금리의 지속은 전반적인 번영의 전조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두 인물은 1857년의 사례처럼 고금리가 신용 사기꾼들이 획책한 시장 왜곡의 산물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이들은 타인의 자산으로 이자를 충당하며 높은 이자율을 감수하고, 가공의 예상 이윤을 근거로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며 시장 전체의 이자율 상향을 압박한다. 이러한 투기적인 과열은 제조업자 등에게 일시적으로 유리한 사업 기회를 제공하는 듯 보이나, 선대 제도의 구조적 결함으로 인해 자본의 환류는 극도로 불투명해진다.

 

이는 고금리 시기에 오히려 할인액이 증대된다는 챕만의 설명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다만 이는 잉글랜드 은행의 사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잉글랜드 은행은 시장 금리가 치솟는 시기에 통상 시중 은행보다 낮은 이율로 어음을 할인하면서 시장의 최후 보루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챕만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본 상사의 할인액은 고금리 기조가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사상 최대 수준에 도달해 있다 (5156).’ (이는 공황이 본격적으로 발발하기 불과 수개월 전인 1857721일의 증언이다.)

 

반면, (이자율이 낮았던) 1852년의 경우’, ‘할인액은 현재와 같이 방대한 규모를 형성하지 않았다 (5157).’ (이는 당시의 산업 및 상업 활동이 현재보다 훨씬 더 건전한 토대 위에서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시장에 유동성이 풍부하고 잉글랜드 은행의 이자율이 낮은 수준을 유지할 때, 통상 어음 할인 수요는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1852년은 현재와 전혀 다른 국면이었으며, 당시의 수출입 규모 역시 작금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5159).’

 

결과적으로 현재의 높은 할인율에도 할인액 자체가 1854(당시 이자율 5-5.5%) 수준만큼 거대하게 유지되고 있다 (5161).’

 

이는 시장의 자금 수요가 이자 비용의 부담을 상회할 정도로 무분별한 팽창 국면에 진입했음을 반증한다.

 

챕만의 증언에서 특히 주목할 지점은 대형 할인업자들이 경제 주체들의 화폐를 사실상 자사 소유물로 간주하며, 자신들이 할인한 어음을 언제든 화폐로 태환할 권리가 있다고 확신한다는 점이다. 질문과 답변 과정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소박한 인식은 가히 경이적이다.

 

이들은 주요 할인업자가 인수한 어음의 유동성을 상시 보장하고,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잉글랜드 은행이 이들 어음 중개업자를 위해 재할인을 단행하도록 강제하는 것을 입법적 의무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오만한 확신이 무색하게도, 1857년 당시 대형 어음 중개업자 3개 사가 파산에 직면하였다. 그들의 부채 총액은 약 800만 파운드에 달했으나, 이를 뒷받침할 자기 자본은 지극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했다.

 

결국 이들은 극소의 자기 자본만으로 거대한 타인 자본을 운용하면서도, 위기 시에는 공공 기관인 중앙은행이 그 부실의 최종 책임을 전적으로 부담해야 한다는 기만적인 도덕적 해이를 보여준 셈이다.

 

질문자: 그렇다면 베어링이나 로이드 상사가 인수한 어음들이, 잉글랜드 은행권이 금과 법적으로 태환되는 것처럼 언제든 할인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지녀야 한다고 보는가.

 

챕만의 답변: 해당 어음들이 할인되지 못하는 상황은 매우 개탄할 만한 일이다. 스미스 페인이나 존스 로이드 같은 명망 있는 상사의 어음을 보유하고도 할인을 받지 못해 지불 정지에 이른다는 것은 금융 체계의 심각한 모순이다 (5177).’

 

질문자: 베어링 상사의 인수는 결국 어음 만기 시 특정 금액을 지불하겠다는 확정적 채무가 아닌가.

 

챕만의 답변: 그렇다. 하지만 베어링 상사를 비롯한 모든 인수 상사는 이러한 채무를 인수할 때, 그것을 실제 금화로 지불해야 하리라고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들은 어음 교환소를 경유한 장부상 결제만으로 충분할 것이라 신뢰한다 (5178).’

 

질문자: 경제 주체들이 어음 만기 전이라도 언제든 할인을 매개로 화폐를 선취할 수 있는 제도를 고안해야 한다는 뜻인가.

 

챕만의 답변: 아니다. 어음 인수자에게 직접 그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와 같은 중개업자들이 상업 어음을 재할인의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면, 현행 금융 조직의 근간을 완전히 재편해야만 할 것이다 (5180).’ (5177-5180).

 

질문자: 그렇다면 상업 어음 역시 잉글랜드 은행권이 금으로 전환되는 것과 동일하게 화폐로의 전환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뜻인가.

 

챕만의 답변: 일정한 조건하에서는 분명히 그러해야 한다 (5182).’

 

질문자: 건실한 어음이라면 은행권과 마찬가지로 즉각적인 화폐 (금속 화폐) 태환이 담보되도록 통화 규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인가.

 

챕만의 답변: 그렇다 (5184).’

 

질문자: 잉글랜드 은행을 포함한 모든 경제 주체가 법적으로 어음을 화폐와 교환해 줄 의무를 지게 해야 한다는 것인가.

 

챕만의 답변: 통화 관련 법령을 제정할 때, 국내 어음이 건전하고 정당한 한 그것이 화폐로 전환되지 못하는 사태를 원천적으로 방지할 규정을 명시해야 한다는 의미다 (5185).’

 

이는 은행권의 태환성에 비견되는 상업 어음의 태환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 신용 자산이 화폐와 동일한 유동성을 법적으로 보장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다름아니다.

 

이 나라의 화폐 거래업자들은 사실상 경제 주체들의 이해관계를 대표할 뿐이다 (5190).’

 

챕만은 이후 185811월 열린 데이비슨 사기 사건의 순회 재판에서도 이와 동일한 논리를 펼쳤다 (런던 금융 시장 대사기 사건, , 1869 참조). 이는 금융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사적 이익 추구 행위를 공공의 이익이나 경제 주체들의 권리로 교묘히 포장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매 분기 ‘3개월마다’ (국채 이자가 지불되는 시기에) ‘우리가 잉글랜드 은행에 의존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피하다. 이자 지불을 위해 조세 명목으로 600-700만 파운드의 화폐가 유통 부문에서 회수될 경우, 그 공백기 동안 해당 금액을 공급할 주체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5196).’

 

(엥겔스: 이 국면에서 핵심은 자본이나 대부 자본의 공급이 아닌, 순수한 화폐그 자체의 공급이다.)

 

상업 부문의 실태를 숙지하는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 재무부 증권의 매각이 불발되고 동인도 회사의 채권이 무용지물되며 우량 상업 어음의 할인조차 차단되는 사태가 발생하면, 경제 주체들의 요구에 따라 법정 유통 수단을 지불해야 할 의무가 있는 은행업자들은 극도의 곤혹에 직면한다. 그 결과 모든 은행은 자기 준비금을 평소의 두 배로 확충하려 시도하게 된다. 전국의 지방 은행업자 약 500명이 각자의 거래 은행에 고작 5,000파운드씩의 은행권을 요구한다고 전제해 보라. 이 최소한으로 잡은 추산만으로도 총 250만 파운드의 화폐가 유통 부문에서 즉시 증발하게 되는데, 이 막대한 결손을 대체 무엇으로 보충할 수 있겠는가 (5169).’

 

결국 세입 징수라는 기술적 요인과 개별 은행들의 자기 보존적 화폐 퇴장이 결합될 때, 시장의 유동성 위기는 산술적인 계산을 상회하여 증폭된다.

 

화폐를 보유한 개인 자본가들은 이자율이 아무리 높게 형성되더라도 화폐를 시장에 내놓지 않는다. 챕만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그들은 다음과 같은 태도를 견지한다.

 

우리가 정작 필요할 때 화폐를 구하지 못할 상황을 우려하느니, 차라리 이자를 전혀 받지 않고 화폐를 퇴장시키는 편이 낫다 (5195).’

 

우리의 금융 체계는 3억 파운드에 달하는 거대한 부채 위에 세워져 있으며, 이 부채는 이론적으로 어느 순간에나 법정 주화로의 지불이 요구될 수 있다. 그러나 가용 법정 주화는 전량을 합산해도 고작 2,300만 파운드 수준에 불과하다. 이러한 취약한 구조는 상시적인 전율과 공포의 근원이 된다 (5173).’

 

따라서 공황기에 진입하면 방대하게 확장되었던 신용 제도는 돌연 협소한 화폐 제도로 그 본 모습을 드러낸다.

 

국내의 특수한 공황 국면을 제외한다면, 화폐량의 본질적인 문제는 오직 금속 화폐, 곧 세계 화폐의 동향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챕만은 이러한 세계 화폐의 역할을 도외시한 채, 오직 2,300만 파운드라는 제한된 은행권 유통량만을 문제의 핵심으로 삼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챕만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18474월과 10) ‘화폐 시장 동요의 제1차적 원인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당해의 막대한 수입으로 인해 환율을 방어하는 데 투입된 방대한 화폐량에 있었다 (‘5218’).’

 

당시 상황을 분석하면 두 가지 핵심 요인이 도출된다.

 

첫째, 세계 시장 화폐인 귀금속의 준비금이 최소 한도로 감소하고 있었다.

 

둘째, 이 귀금속 준비금은 동시에 신용 화폐인 은행권의 태환 보증이라는 이중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능적 결합은 화폐의 본질적 성격에서 기인한다. 진정한 의미의 화폐는 언제나 세계 시장 화폐로 존재하며, 모든 신용 화폐는 결국 이 세계 시장 화폐를 그 존립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1847년에 1844년 제정된 은행법의 효력을 정지시키지 않았더라면, ‘결제 체계의 중추인 어음 교환소는 마비되었을 것이다 (5221).’

챕만은 1857년 당시에도 닥쳐올 공황을 직감하고 있었다.

 

화폐 융통이 극도로 어려워져 잉글랜드 은행의 구제에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현재 화폐 시장의 국면은 이미 그러한 상황에 진입해 있다) (5236).’

 

‘18471019(화요일), 20(수요일), 22(금요일)에 우리가 잉글랜드 은행으로부터 인출한 금액을 고려할 때, 우리는 차주 수요일에 해당 어음들을 회수할 수만 있어도 다행이라 여겼다. 그러나 공황이 타개되자마자, 퇴장되었던 화폐는 즉각 우리에게로 환류하기 시작했다 (5239).’ 1023(토요일)에 은행법 정지 조치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법적 강제력이 일시적으로 제거되면서 신용 체계가 복구되고, 마비되었던 화폐 순환이 재개되는 과정은 자본주의 금융 기제의 취약성과 그 해법의 모순적 성격을 동시에 보여준다.

 

챕만의 추산에 따르면, 런던 시내에서 유통되는 상업 어음의 규모는 상시 약 1억 파운드에서 2억 파운드에 달하며, 여기에는 지방 도시 간 거래되는 어음은 포함되지 않는다 (5274).

 

‘185610월 당시 경제 주체들이 보유한 은행권은 2,1155,000파운드라는 상당한 규모였음에도, 화폐 융통은 극도로 어려운 상태였다. 경제 주체들의 수중에 충분한 통화가 존재함에도 금융 기관이 이를 전혀 확보할 수 없었다 (5287).’ 그 이유는 동년 3월 이스턴 뱅크의 (18563) 금융 위기로 촉발된 주관적인 공포가 시장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화폐 공황이 일단 해소되면 이자 수익을 본업으로 삼는 모든 은행업자는 즉각 유휴 화폐를 운용하기 시작하며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한다 (5290).’

 

한편, 챕만은 은행 준비금 감소 시 발생하는 동요의 본질을 예금 지불 불능에 대한 공포가 아닌, 재할인 경로의 차단 관점에서 설명한다. 거액의 지불 의무를 지닌 경제 주체들은 화폐 시장이 핍박받는 극한의 상황에서 잉글랜드 은행을 최후의 보루로 삼을 수밖에 없음을 간파하고 있다.

 

중앙은행의 준비금이 희소해질 경우, 은행이 중개업자의 어음 재할인 요청을 거절하게 된다 (5302).’는 사실 자체가 시장의 근원적인 공포를 야기하는 것이다.

 

준비금이 소멸하는 구체적인 기제를 규명하는 것은 매우 유의미한 일이다. 시중 은행은 통상적인 업무 수행을 위해 최소한의 준비금을 설정하며, 이를 자체 보유하거나 일부는 잉글랜드 은행에 예치한다. 반면, 어음 중개업자들은 시중 은행과 달리 별도의 준비금 없이 오직 전국의 유휴 은행 자금에만 의존하여 운영된다. 잉글랜드 은행 또한 예금 채무에 대한 준비금으로 은행업자 등의 예치금이나 정부 예금 등을 보유할 뿐이며, 이 준비금이 최저 수준 (200만 파운드)까지 급감하도록 방치하는 경향이 있다.

 

결과적으로 이 미미한 규모의 은행권을 제외한다면, 전체 신용 (사기) 제도는 화폐 핍박기에 금속 준비 () 외에는 어떠한 실질적인 완충 장치도 갖지 못하게 된다. 특히 핍박기에는 금 유출에 대응하여 환류하는 은행권이 법규에 따라 폐기되어야 하므로, 은행권 준비금은 더욱 축소된다. 따라서 금 유출로 인한 금속 준비의 감소는 유동성 고갈을 유발하여 공황을 극단적으로 격화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어음 교환소의 차액 결제에 필요한 법정 화폐가 고갈된다면, 결국 경제 주체들이 합의하여 재무부 인수인 어음이나 스미스 페인 상사 발행 어음 등과 같은 최우량 어음으로 직접 결제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5306).’

 

질문자: 정부가 충분한 유통 수단을 공급하지 못할 경우, 민간 부문에서 스스로 새로운 유통 수단을 창출하겠다는 의미인가.

 

챕만의 답변: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겠는가. 경제 주체들이 은행으로부터 유통 수단을 대거 인출해 가는 상황에서, 우리 수중에는 결제에 사용할 화폐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5307).’

 

질문자: , 화폐 부족 시 어음 자체가 유통 수단으로 기능하는 맨체스터의 관행을 런던 금융 시장에서도 실행하겠다는 것인가.

 

챕만의 답변: 전적으로 그러하다 (5308).’ (5306-5308)

 

이처럼 법정 화폐의 공급이 차단된 극한의 공황기에는 신용 자산인 어음이 실물 화폐의 지위를 대신하게 되며, 이는 금융 제도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민간 자생적 결제 수단에 의존하게 됨을 의미한다.

 

오브스톤의 추상적인 자본 개념에 대해, 캐일리 (버밍엄 학파)가 제기한 질문을 바탕으로 챕만은 실무적 관점에서 해답을 제시한다.

 

질문자: 1847년과 같은 공황기에 경제 주체들이 갈구하는 것은 화폐가 아니라 자본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한 견해는 어떠한가.

 

챕만의 답변: 본인은 그러한 주장을 이해할 수 없다. 금융 현장에서 우리는 오직 화폐만을 거래할 뿐이다. 질문의 요지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5315).’

 

이어 챕만은 자본과 신용의 실질적 관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개인이 사업에 투입하는 자기 자본이란, 실상 은행업자 등을 매개로 경제 주체들로부터 제공받는 방대한 신용에 비하면 지극히 미미한 파편에 불과하다 (5316).’

 

질문자: 우리가 은행권의 태환을 정지시키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 국가적 부의 부족 때문인가.

 

챕만의 답변: 결코 그렇지 않다. 이는 부의 부족이 아니라 지극히 인위적인 제도적 결함에 기인한다. 통화 수요가 폭증할 때 제도적 제약이 그 공급을 차단한다면, 국가 전체의 상업 활동과 통화 순환이 마비되는 파국을 맞이하게 될 뿐이다 (5339).’

 

챕만은 은행권의 태환 유지와 국가 산업의 보존 중 무엇이 우선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주저 없이 산업의 유지를 선택해야 한다 (5338).’고 피력한다.

 

또한, ‘화폐 핍박을 의도적으로 심화시켜 부당 이익을 취하려는 (5358)’ 화폐 퇴장 행위가 단 세 개의 대형 은행만으로도 충분히 실현될 수 있음을 증언한다.

 

결국, 자본가들이 공황이라는 극한의 위기를 기회 삼아 희생자들의 파멸로부터 막대한 불로 소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런던 금융 시장의 구조적 원리를 직시할 때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명한 진실이다 (5383).’

 

우리는 챕만의 증언이 지닌 실증적 가치에 무게를 둘 수 있다. 비록 그 자신이 희생자들의 파멸로부터 막대한 이윤을취하려 획책하다가 결국 상업적 실패를 면치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그의 동업자인 거니가 시장의 모든 변동은 사정에 능통한 자들에게는 도리어 유리한 기회라고 피력했을 때, 챕만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사회의 개별 부문은 다른 부문의 내부 사정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하다. 예컨대 유럽 대륙으로 상품을 수출하거나 원료를 수입하는 제조업자는 금덩이를 거래하는 금융업자의 원리를 알지 못한다.’ (5046).

 

결국 이러한 지식의 파편화와 상호 불신 속에서, 거니와 챕만 자신들조차 시장의 거대한 기제에 능통하지못했음이 증명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확신했던 신용의 올가미에 스스로 걸려들어, 끝내 불명예스러운 파산을 맞이하며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전의 논의에서 확인했듯, 은행권의 발행은 반드시 자본의 선대를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1848년 상원 상업 불황 위원회에서 투크가 행한 증언은, 설령 자본의 선대가 새로운 은행권 발행의 형태로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이 은행권 유통량의 절대적 증대로 직결되지는 않음을 실증한다.

 

질문자: 잉글랜드 은행이 은행권의 추가 발행 없이도 대부 규모를 대폭 확장하는 일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는가.

 

투크의 답변: 이를 입증할 사례는 충분하다. 가장 극명한 예는 1835년으로, 당시 잉글랜드 은행은 서인도 예금과 동인도 회사의 차입금을 활용해 민간 부문의 대부를 확대했으나, 경제 주체들의 보유 은행권 총액은 오히려 감소했다. 1846년 철도 예금이 유입될 당시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할인과 예탁을 매개로 한 유가 증권 보유액이 약 3,000만 파운드까지 급등했음에도, 시중의 은행권 유통량에는 유의미한 변화가 없었다 (3099).’

 

그러나 도매 상업의 영역에는 은행권을 상회하는 제2의 핵심 유통 수단인 어음이 존재한다. 챕만은 우량 어음이 어떠한 극한의 상황에서도 지불 수단으로 수용되는 것이 자본주의 사업의 원활한 진행을 위한 필수 전제임을 피력한 바 있다. ‘유태의 율법 해석서 (타우스페스 욘토프)조차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면 대체 무엇이 구원이 되겠는가. 제발 도와주소서!’ (하이네, 종교 논쟁)라는 경구처럼, 신용의 붕괴 앞에서는 그 어떤 제도적 장치도 무력해진다. 그렇다면 화폐로의 은행권과 신용으로의 어음, 이 두 유통 수단은 과연 어떠한 유기적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가.

 

길바트는 은행권과 어음의 대체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1840: 31).

   

은행권 유통액의 감소는 필연적으로 어음 유통액의 증가를 수반한다. 이러한 어음은 상업 어음과 은행업자 어음의 두 유형으로 분류된다. 화폐 공급이 원활하지 않을 때 화폐 대부업자들은 차입자에게 본인 앞으로 어음을 발행하면 이를 인수하겠다는 방식을 제안한다. 또한 지방 은행업자가 고객의 어음을 할인할 때, 현금을 지급하는 대신 런던 대리인 앞으로 발행된 21일 만기 어음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해당 어음들은 실질적인 유통 수단의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뉴마치의 증언으로 더욱 분명하게 확인된다 (은행법, 1857, 1426).

 

어음 유통액과 은행권 유통액의 변동 사이에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규칙적으로 확인되는 현상은, 할인율 상승으로 대변되는 화폐 시장의 핍박이 발생할 때마다 어음 유통량이 현저히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화폐 시장이 완화될 경우에는 어음 유통량 또한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결국, 법정 화폐인 은행권의 공급이 위축될수록 경제 주체들은 신용에 기반한 어음을 유통 수단으로 더욱 활발히 매개하며, 이는 화폐 시장의 압박이 신용 팽창을 강제하는 자기모순적 구조를 형성한다.

 

화폐 핍박기에 발행되는 어음은 길바트가 언급한 단기 은행 어음과는 성격이 판이하다. 대다수는 실질적인 상품 거래를 수반하지 않는 융통 어음이거나, 오직 어음 발행 자체를 목적으로 급조된 허위 거래를 기반으로 한다. 윌슨은 이코노미스트에서 은행권과 어음의 안정성을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일람불 은행권은 태환 요구를 거쳐 은행으로 상시 환류하므로 시장에 과잉 보유될 수 없다. 반면, 2개월 만기 어음은 만기 도래 전까지 발행을 제어할 수단이 전무하며, 만기 시에도 또 다른 어음으로 대체되어 유통을 지속할 수 있기에 막대한 과잉 발행의 소지가 다분하다. 이처럼 결제가 원거리의 기한으로 유예되는 어음의 안전성은 확신하면서도, 즉시 지불이 보장되는 은행권의 안전성을 의심하는 태도는 극히 모순적이다.’ (이코노미스트, 1847: 575)

 

어음 유통액 또한 은행권 유통액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는 거래상의 필요에 준하여 규정된다. 1850년대 영국의 평시 유통 구조를 보면, 3,900만 파운드의 은행권 배후에 약 3억 파운드 (런던 결제분 1-12,000만 파운드 포함)에 달하는 방대한 어음 체계가 존재했다. 평상시 어음 유통량은 은행권 유통량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않으나, 화폐 핍박기에 이르면 어음의 수량적 증가와 질적 저하가 동시에 진행되며 시장의 동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최종적으로 공황의 정점에 이르면 어음 유통은 전면 중단된다. 모든 경제 주체가 오직 현금 결제만을 요구함에 따라 지불 약속으로의 어음은 효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극한의 상황에서 유일하게 유통력을 유지하는 것은 은행권뿐이다. 이는 경제 주체들이 국가의 총체적 부를 담보로 잉글랜드 은행의 공신력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회적 신용에 근거한다.

 

 

 1857년 화폐 시장의 실권자였던 챕만조차 런던 금융권의 소수 거대 화폐 자본가들이 행사하는 막강한 영향력에 대해 강력히 성토한 바 있다. 이들은 특정 시점에 화폐 시장 전체를 인위적인 혼란에 빠드리면서 중소 규모의 화폐 거래업자들을 무자비하게 수탈하는 지배력을 행사한다.

 

실제로 일부 대규모 화폐 자본가들은 100-200만 파운드 규모의 콘솔 (영국 국채)을 일시에 매각하고, 그에 상응하는 막대한 은행권을 시장에서 회수하면서 가용 대부 자본을 고갈시킨다. 이러한 행위는 이전의 화폐 핍박 사태를 극단적으로 악화시키는 도화선이 된다. 이 과정에서 세 곳의 대형 은행이 결탁한다면, 유동성 부족 상태를 파국적인 화폐 공황으로 비화시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런던에서 가장 압도적인 자본력을 보유한 주체는 단연 잉글랜드 은행이나, ()국가 기관이라는 공적 지위로 인해 여타 거대 자본가들처럼 노골적이고 잔인한 방식으로 지배권을 행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1844년 은행법 제정 이후, 잉글랜드 은행은 자신의 이익을 수호하고 시장에 영향력을 관철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충분히 확보하게 되었다.

 

현재 잉글랜드 은행은 1,4553,000파운드의 자본금을 기반으로, 300만 파운드의 잉여금 (미배당 이윤)’과 조세 등으로 징수되어 지출 전까지 예치되는 정부 자금을 전방위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여기에 평상시 약 3,0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기타 예금액과 금 준비 없이 발행되는 은행권 규모까지 합산한다면, 뉴마치가 제시한 평가치 (은행법 위원회 증언록, 1857, 1889)는 실제 영향력에 비해 상당히 과소평가되었다.

 

런던 화폐 시장에 상시 투하되어 있는 자금 총액을 약 12,000만 파운드로 추산하며, 이 중 약 15%에서 20%에 달하는 상당한 비중을 잉글랜드 은행이 지배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1889).’

 

잉글랜드 은행이 금속 준비로 보증되지 않는 은행권을 발행하는 한, 이는 단순한 가치 표상의 창출을 상회한다. 이는 해당 은행권이 단순한 유통 수단에 머물지 않고 명목 가치만큼 추가 자본을 은행에 제공하는 결과로 이어지며, 비록 가공적인 성격일지라도 은행에 실질적인 추가 이윤을 창출하는 원천이 된다. 은행법 위원회 증언록, 1857에서 윌슨과 뉴마치 사이의 문답은 이러한 기제를 명확히 규명하고 있다.

 

윌슨의 질문: 은행이 발행하여 인민이 평균적으로 보유하는 은행권 유통액은 해당 은행의 유효 자본에 대한 추가분인가.

 

뉴마치의 답변: 그렇다 (1563).’

 

윌슨의 질문: 그렇다면 은행이 그 유통액을 매개로 획득하는 이윤은 전적으로 신용에 기반한 것이며, 은행이 실질적으로 소유한 자본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가.

 

뉴마치의 답변: 전적으로 그러하다 (1564).’

 

이러한 논리는 은행권을 발행하는 사립 은행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뉴마치는 사립 은행이 은행권 발행액의 1/3만을 금속 준비로 보유하고 나머지 2/3는 금속 화폐를 절약하면서 그만큼의 자본 창출을 이룬다고 분석한다 (1866-1868). 은행업자의 개별 이윤율이 타 자본가에 비해 반드시 높지 않더라도, 그들이 금속 화폐의 사회적 절약을 매개로 사적 이윤을 취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사회적 절약이 사적 이윤으로 전환되는 현상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에게 결코 경이로운 일이 아니다. 이윤의 본질 자체가 이미 인민 노동의 사적 점유에 있기 때문이다. 그 극단적인 사례로 1797년에서 1817년 사이의 잉글랜드 은행을 들 수 있다. 당시 국가의 공신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잉글랜드 은행은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권한, 곧 은행권이라는 종이 조각을 화폐로 전환하여 이를 다시 국가에 국채 형태로 대부하는 권한에 대해 국가로부터 국채 이자라는 명목으로 보상을 받았다. 이보다 더 기만적이고 기괴한 금융적 전도는 상정하기 어렵다.

 

은행은 은행권 발행 외에도 자본을 창출하는 여타 수단을 운용한다. 뉴마치에 따르면 지방 은행들은 잉글랜드 은행권과 같은 과잉 자금을 런던의 어음 중개업자들에게 송금하는 대신, 그들로부터 이미 할인된 어음을 취득한다. 지방 은행들은 이렇게 확보한 할인 어음을 자사 고객들에게 제공하면서 신용 중개를 수행한다.

 

지방 고객들의 세부적인 사업 활동이 해당 지역 사회에 누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방 은행들은 고객으로부터 직접 수취한 어음을 다시 시장에 내놓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대신 런던으로부터 인수한 어음을 런던 내 결제가 필요한 고객에게 발행하거나, 지방 은행의 이서를 거쳐 신용을 보증하면서 지역 내 지불 결제 수단으로 활용한다. 이러한 방식은 매우 경제적이어서, 랭커셔 지역의 경우 이들 어음이 지방 은행권 전체와 잉글랜드 은행권 대부분을 유통 시장에서 축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은행법, 1857, 1568-1574).

 

결과적으로 은행이 신용과 자본을 창출하는 구체적인 경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 자기 자신의 은행권을 발행하여 직접적인 통화 공급력을 확보한다.

 

둘째, 현금을 수취하는 대가로 21일 만기 런던 앞 어음을 발행하여 단기 유동성을 창출한다.

 

셋째, 이미 할인된 어음에 자사의 이서를 부기하여 재사용하면서 해당 지방의 신용을 바탕으로 한 유통 수단을 제공한다.

 

잉글랜드 은행의 위력은 시장 이자율을 규제하는 권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경제 활동이 안정적인 궤도에 있는 시기에는 잉글랜드 은행이 할인율을 인상하더라도 금속 준비의 완만한 금 유출을 완전히 저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이는 지불 수단에 대한 수요가 지난 30년간 막강한 자본력을 축적한 사립 주식 은행과 어음 중개업자들을 매개로 상당 부분 충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국면에서 잉글랜드 은행은 이자율 운용 외의 다른 보조적 수단을 강구해야만 한다. 그러나 시장이 공황 국면에 진입하게 되면 상황은 급변한다. 글린, 밀즈, 커리 상사의 은행업자 글린이 상업 불황, 1848-1857에서 증언한 바와 같이, 위기 시에는 잉글랜드 은행의 절대적인 지배력이 다시금 관철된다.

 

국내 금융 시장의 핍박이 극심한 상황에서는 잉글랜드 은행이 이자율을 완전히 장악한다 (1709).’

 

격심한 위기로 인해 사립 은행이나 어음 중개업자의 할인 업무가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시기에는, 모든 할인 수요가 잉글랜드 은행으로 집중된다. 따라서 잉글랜드 은행은 시장 이자율을 결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게 된다 (1710).’

 

다만 잉글랜드 은행은 정부의 보호와 특권을 부여받은 공공 기관으로, 이러한 지배력을 사기업처럼 무분별하게 휘두르지는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은행법, 1857에서 허바드의 증언은 이를 뒷받침한다.

 

질문자: 할인율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잉글랜드 은행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저렴하고, 반대로 할인율이 최저일 때는 어음 중개업자를 찾는 것이 이득이지 않은가.

 

허바드의 답변: 항상 그러하다. 잉글랜드 은행은 시장 경쟁자들만큼 파격적으로 이자율을 낮추지 않으며, 동시에 이자율이 정점에 달했을 때도 그들만큼 극단적으로 인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2844).’

 

그러나 잉글랜드 은행이 시장 핍박기에 이른바 나사못 죄기를 단행하여 이미 고점인 이자율을 추가로 인상하기 시작하면, 산업 부문은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잉글랜드 은행의 긴축이 시작되는 즉시 해외 수출을 위한 구매 활동은 전면 중단된다. 수출업자들은 상품 가격이 저점에 도달할 때까지 관망세를 유지하며, 실제 구매는 가격이 최저점에 이른 후에야 재개된다. 하지만 이 시점은 이미 금 유출이 멈추고 환율이 반전된 이후이기에 실익이 적다. 상품 수출에 따른 상품 매입이 해외로 유출된 금의 일부를 회수할 수는 있으나, 금의 유출 자체를 방지하기에는 그 시기가 너무 늦기 때문이다.’ (길바트, 1840: 35).

 

결국 환율 변동에 따른 유통 수단의 규제는 핍박기에 이자율을 폭등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길바트, 1840: 40).

 

환율 수습 과정에서 발생하는 제반 비용은 고스란히 국내 생산 부문이 부담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잉글랜드 은행은 더 적은 귀금속 준비금만으로도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어 오히려 이윤이 증대되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길바트, 1840: 52).

 

한편, 사뮤엘 거니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이자율의 격심한 변동이 은행업자와 화폐 거래업자에게 최적의 이익 기회를 제공한다. 시장의 모든 변동성은 시장 동향에 능통한 내부자들에게는 수익 창출의 비옥한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거니를 필두로 한 투기 세력이 상업 공황의 전개 과정에서 막대한 이권을 독점할 때, 잉글랜드 은행 또한 비록 공적 제약 아래 있을지라도 거대한 이윤을 축적한다. 전반적인 사업 상황을 장악할 수 있는 중역들의 개인적 수탈을 제외하더라도, 1817년 상원 위원회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잉글랜드 은행은 1797년부터 1817년까지 이어진 태환 정지라는 비상시적인 국면을 이용해, 기초 자본금 1,1642,400파운드 대비 2,928만 파운드라는 막대한 총이윤을 축적했다 (하드카슬, 1843: 120). 이러한 이윤 창출의 구조는 1797년에 역시 태환을 정지한 아일랜드 은행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그 구체적인 수치는 다음과 같다.

 

잉글랜드 은행 및 아일랜드 은행 이윤 현황 (1797-1817)

 

구분

잉글랜드 은행 (단위: 파운드)

아일랜드 은행 (단위: 파운드)

배당 및 상여금

7,451,136

5,991,085

신주 분배 및 자산 증가

7,276,500

1,214,800

자본 가치 증가

14,553,000

4,185,000

이윤 합계

29,280,636

11,360,885

기초 자본금

11,642,400

3,000,000

 

 

해당 수치는 기초 자본금 300만 파운드에 대해 발생한 이윤을 산출한 것이다. (하드카슬, 1843: 363-364).

 

집중에 대해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러한 지표는 이른바 국립 은행과 그 주위를 둘러싼 대규모 화폐 대부업자 및 고리 대금업자들이 형성한 신용 제도의 가공할 만한 집중력을 보여준다. 이 불로 소득 계급 (기생 계급 )은 생산 현장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산업 자본가들을 주기적으로 파멸시키고 실물 생산 과정에 가장 위험천만하게 간섭할 수 있는 지배력을 보유하고 있다.

 

1844년과 1845년의 은행 법령들은 금융업자와 주식 투기꾼을 포함한 이들 약탈적 세력의 권력이 제도적으로 공고화되고 있음을 입증하는 물적 증거다.

 

이른바 존경받는 이 도둑들이 국내외의 생산 현장을 수탈하는 행위가 오직 생산자와 피착취자들의 공익 증진을 위한 것이라는 감언이설에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는다면, 은행 자본가 집단이 스스로 설파하는 고도의 도덕적 궤변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은행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신념을 구현하는 기관이다. 젊은 상인들이 소란스럽고 방탕한 무리들과 어울리는 것을 포기하는 이유는 대개 자신이 거래하는 은행업자의 매서운 질책과 눈초리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은행으로부터 우호적인 평가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시도한다. 이때 은행업자의 냉담한 표정은 동료들의 어떠한 야유나 만류보다 강력한 구속력을 발휘한다. 자금 융통이 제한되거나 중단되는 파국을 피하기 위해, 이들은 아주 사소한 기만이나 실수조차 범하지 않으려 전전긍긍한다. 결과적으로 상인들에게 은행업자의 충고는 성직자의 조언보다 훨씬 절실하고 가치 있는 지침이 된다.’ (, 스코틀랜드의 은행 이사, 1840: 46,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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