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자본주의 이전의 관계
이자 낳는 자본과 그 원형인 고리대 자본은 상인 자본과 더불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확립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 온 ‘노아의 대홍수 이전’의 자본 형태다. 이러한 자본 형태는 자본주의 이전의 제반 경제적 사회 구성체에서 보편적으로 포착된다. 고리대 자본이 성립하기 위한 객관적 조건은 적어도 생산물의 일부가 상품으로 전환되는 것, 그리고 상품 유통의 진전과 함께 화폐의 각종 기능적 체계를 갖추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고리대 자본의 전개는 상품 거래 및 화폐 거래 자본을 포괄하는 상인 자본의 발달, 특히 화폐 거래 자본의 분화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일례로 고대 로마의 경우, 공화정 후기 이래 수공업 수준이 고대 세계의 평균적 지표를 하회하였음에도, 상인 자본과 화폐 거래 자본, 그리고 고리대 자본은 고대적 형태가 허용하는 한계 내에서 최고 수준의 발달 단계에 도달하였다.
화폐 퇴장의 발생 기제는 이미 고찰한 바와 같으나, 직업적 화폐 퇴장자가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존재로 부각되는 시점은 그가 화폐 대부자로 전환될 때부터다.
상인이 화폐를 차입하는 목적은 이를 자본으로 투하하여 이윤을 창출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초기 단계에서도 화폐 대부자와 상인의 관계는 현대 자본주의적 관계와 부합한다. 이러한 특수한 경제적 관계는 당대 가톨릭 대학 측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된 바 있다.
‘실제로 알칼라, 살라만카, 인골슈타트,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 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대학들은 상업 대부에 수반되는 이자의 합법성을 순차적으로 승인하였다. 이 중 최초 5개 대학의 승인 기록은 리옹시의 영사 기록에 보존되어 있으며, 브류이제 폰투스의 저서 『고리와 이자에 관한 논문』 (리옹) 부록에도 수록되어 있다.’ (오지에 1842: 206).
가부장적 노예제가 아닌 고전 고대의 노예제와 같이, 화폐가 노예나 토지 매입을 매개로 타인의 노동을 사유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하는 모든 사회 구성체에서 화폐는 자본적 증식과 이자 산출의 기제가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이전의 고리대가 취하는 특징적인 현상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여기서 ‘특징적’이라는 표현은 해당 형태들이 자본주의적 체제하에서도 종속적으로 잔존하나, 이자 낳는 자본의 본질적 성격을 규정하는 지위는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첫째는 토지 소유자를 중심으로 한 낭비적 귀족층에 대한 고리대이다.
둘째는 자기 소유의 노동 조건을 보유한 소생산자에 대한 고리대이다.
소생산자의 경우 수공업자도 포함하나, 특히 빈농층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이는 자본주의 이전의 조건 아래 소규모 자립 생산이 허용되는 구조에서는 빈농 계급이 인구의 대다수를 구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리대가 부유한 토지 소유자를 파멸시키고 소생산자를 빈곤화하는 과정은 거대한 화폐 자본의 형성과 집적을 가속한다. 다만 이러한 과정이 근대 유럽의 사례처럼 낡은 생산 양식을 철폐하고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을 확립할지 여부는, 전적으로 해당 사회의 역사적 발전 단계와 그에 수반되는 객관적 조건들에 규정된다.
이자 낳는 자본의 전형적 형태인 고리대 자본은 소농과 소규모 수공업 장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소규모 생산 양식에 대응한다. 고도화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같이 생산 조건과 노동 생산물이 이미 자본의 형태로 노동자와 대립하는 구조에서, 노동자는 생산자의 자격으로 화폐를 차입할 필요가 없다. 이 경우의 차입은 전당포 이용과 같은 개인적 필요에 국한될 뿐이다. 반면,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 조건과 생산물의 현실적 또는 명목적 소유자인 경우, 그는 생산자로 화폐 대부자의 자본과 관계를 맺으며 이때 자본은 고리대 자본으로 노동자와 대면한다.
F 뉴먼은 은행가가 부자에게, 고리대금업자가 빈자에게 대부하기 때문에 전자는 존경받고 후자는 증오와 멸시를 받는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는 문제의 본질을 오히려 무의미한 형태로 제기한 것이다. (1851: 44) 그는 이 사안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사회적 생산 양식 및 그에 상응하는 사회 질서 간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음을 간과하였으며, 이를 단순히 빈부 격차의 대비로 치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실제로 소생산자를 빈곤화하는 고리대는 부유한 토지 소유자를 파멸시키는 고리대와 병행하여 진행된다. 일례로 고대 로마 귀족의 고리대가 소농민 계급을 완전히 몰락시키자, 이러한 착취 형태는 종결되고 순수 노예제 경제가 소농 경제를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고리대금업자는 생산자의 재생산에 필수적인 생존 수단 (향후 임금의 형태로 규정될 부분)을 초과하는 잉여 (향후 이윤과 지대로 규정될 부분)를 이자 형태로 점유한다. 따라서 국가 공제분을 제외한 잉여 가치 전체가 이자로 수렴되는 이 단계의 이자율 수준을, 잉여 가치의 일부분만을 구성하는 근대적 이자율과 비교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이러한 비교는 임금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이윤·이자·지대를 포함한 잉여 가치 전체를 생산하여 양도한다는 본질적 사실을 간과한다. 캐리는 이와 같은 비논리적 대비에 근거하여 자본의 발달과 이자율의 하락이 노동자에게 지대한 이득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나, 이는 명백한 오류다.
고리대금업자가 피취득자의 잉여 노동 수탈에 그치지 않고 토지나 가옥 등 소유권을 취득하여 노동 조건 자체를 지속적으로 수탈해 나갈지라도, 노동자로부터 노동 조건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결과가 아닌 그 출발점이자 전제 조건임을 명시해야 한다. 임금 노동자는 그 계급적 규정으로 인해 생산자로 채무 노예가 될 수 없으며, 오직 소비자의 자격으로만 채무 관계에 종속될 뿐이다.
고리대 자본은 기존의 생산 방식을 보존한 채 직접적 생산자의 모든 잉여 노동을 흡수한다. 생산자에 기인한 노동 조건의 소유와 점유에 기반한 분산적 소규모 생산을 존립 근거로 삼기에, 고리대 자본은 노동을 직접적으로 종속시키거나 산업 자본의 형태로 노동과 대립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고리대 형태는 생산 양식을 퇴보시키고 생산력의 발전을 저해하며,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 발달 없이 생산자의 빈곤만을 영속화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고리대는 한편으로 봉건적 부와 소유 구조를 해체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자가 생산 수단을 직접 소유하는 소농민적·소부르주아적 생산 양식을 약화시키고 파멸시킨다.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아래에서 노동자는 더 이상 토지나 원료와 같은 생산 조건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발생하는 생산자로부터의 생산 조건 소외 (분리)는 생산 방식 자체의 근본적인 변혁에 대응하는 필연적 과정이다.
곧, 분산되어 있던 노동자들이 대규모 작업장으로 결집하여 분업과 협업 체계에 포섭되고, 전통적 도구가 기계로 대체되면서 생산 방식은 더 이상 소규모 소유의 생산 도구 분산이나 노동자의 고립을 허용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 체제에서 고리대는 생산 조건을 노동자로부터 분리시키는 기제로 작용할 수 없다. 그 물리적·경제적 분리가 이미 생산 양식의 전제 조건으로 완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산 수단이 분산된 구조에서 고리대는 화폐 자산을 집중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 고리대는 기존의 생산 방식을 변혁하지 않은 채 기생적으로 고착되어 생산 체계를 빈곤화한다. 이는 생산 방식의 골수를 잠식하여 동력을 약화시키고, 재생산 과정이 점차 열악한 조건 속에서 수행되도록 강제한다. 고대 세계에서 고리대에 대한 인민적 증오가 극에 달했던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당시 생산자가 생산 조건을 직접 소유한다는 것은 단순한 경제적 보유를 넘어, 해당 사회의 정치적 관계와 공민적 자립성을 담보하는 실질적 토대였기 때문이다.
노예제가 지배하거나 봉건 영주와 봉건 관료층 (가신단)이 잉여 생산물을 소비하는 체제 아래에서는, 노예 소유주나 영주가 고리대의 희생양이 된다 하더라도 생산 방식 자체는 변모하지 않으며 도리어 노동자에 대한 수탈만이 가중된다. 채무 관계에 놓인 노예 소유주나 봉건 영주는 자신의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피지배층으로부터 더 많은 생산물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고리대금업자는 기존 지배층의 지위를 찬탈하여 고대 로마의 기사 계급처럼 스스로 새로운 착취자로 부상한다. 이 과정에서 가부장적 성격이 짙고 정치적 권력 유지가 주된 목적이었던 전통적 착취자 대신, 오직 금전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냉혹한 신흥 부유층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적 교체에도, 사회의 근간이 되는 생산 방식 그 자체는 여전히 종래의 상태를 유지한다.
고리대가 자본주의 이전의 생산 양식에 혁명적 영향을 미치는 국면은, 고리대가 정치 제도의 안정적 기반인 기존의 소유 형태를 해체하고 분해할 때에만 국한된다. 정치적 재생산의 필수 요건인 기존 소유 체제가 고착된 아시아적 (소유) 형태 내에서 고리대는, 체제 변혁 없이 경제적 쇠퇴와 정치적 부패만을 야기하며 장기간 존속할 뿐이다. 반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여타 객관적 조건들이 성숙한 지점과 시기에 이르러서야, 고리대는 (봉건 영주와 소생산자를 몰락시키는 동시에 노동 조건을 집중시키면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을 형성하는 주요 동인 중 하나로 기능하게 된다.
중세에는 국가 전역에서 통용되는 보편적 이자율이 부재하였다. 교회가 이자를 수반하는 모든 거래를 원칙적으로 금지한 가운데, 법과 사법 제도가 대부 계약을 충분히 보장하지 못함에 따라 개별 거래의 이자율은 극도로 높게 형성되었다. 화폐 유통량은 미미했으나 대부분의 지불이 현금으로 강제되었고, 특히 어음 제도의 미비로 인해 경제 주체들의 화폐 차입 수요는 상시 존재하였다.
이에 따라 (시대와 장소에 따른) 이자율 및 고리대의 개념적 범주 또한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카롤링거 왕조의 카를 대제 시기 (768-814년)에는 100%의 이자율을 고리대로 규정한 반면, 1344년 린다우 암 보덴제에서는 216 2/3%의 이율이 실현되기도 하였다. 취리히 시의회는 43 1/3%를 법정 이자율로 확정하였으며, 이탈리아의 경우 12-14세기에 통상 20%를 상회하지 않았으나 간혹 40%에 육박하는 사례도 확인되었다. 베로나는 12 1/2%를 법정 이자율로 설정하였고,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유태인에 한해 10%의 이자율로 정하였으나 기독교도에 대해서는 별도의 규정을 두지 않았다. 한편 13세기 독일 라인 지방에서는 이미 10%의 이자율이 일반적인 수준으로 정착되었다 (휠만, 『중세의 도시 제도』 제2권: 55-57).
고리대 자본은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을 결여하고 있음에도, 자본의 착취 기제는 온전히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기만적 특성은 현대 부르주아 경제 내에서도 낙후한 산업 부문이나 근대적 생산 체제로의 전환에 저항하는 분야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영국의 이자율을 인도와 같은 국가의 이자율과 대조할 때, 단순히 잉글랜드 은행의 공정 이율을 지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가내 공업 형태의 소생산자에게 소규모 설비를 임대하며 부과하는 실질적인 고수익 이자율을 비교의 준거로 채택해야 마땅하다.
고리대는 소비에 침잠하는 부와 달리, 그 자체가 자본을 생성하는 동학적 과정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고리대 자본과 상인 재산은 토지 소유로부터 분리된 독립적 화폐 자산의 형성을 가속화한다. 생산물의 상품적 성격이 미분화되고 생산 체계가 교환 가치에 완전히 장악되지 않은 단계일수록, 화폐는 사용 가치로 표상되는 부의 제한적 형태에 대립하여 부 그 자체이자 절대적 부의 체현으로 부각된다. 화폐 퇴장 현상은 바로 이러한 논리적 근거에 기반한다.
세계 화폐나 퇴장 화폐로의 성격을 차치하더라도, 화폐는 지불 수단이라는 특수한 형태를 매개로 상품의 절대적 가치 척도로 군림한다. 특히 지불 수단으로의 화폐 기능은 이자 체계와 화폐 자본의 발달을 촉진하는 핵심 동인이 된다. 사치와 퇴폐적 소비에 필요한 화폐는 구매와 채무 이행을 위한 절대적 수단으로 요구되며, 소규모 생산자 역시 지불 의무의 이행을 위해 화폐를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주와 국가에 대한 부역 및 현물 납부가 화폐 지대와 화폐 조세로 전환된 사실은 화폐의 기능적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두 경우 모두 화폐 그 자체가 자기 목적적 존재로 요구된다. 반면 퇴장 화폐는 고리대 관계에 포섭되면서 비로소 경제적 현실성을 획득하고 그 잠재적 동기를 실현한다. 퇴장 화폐의 소유자가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기능적 자본이 아닌 ‘화폐로서의 화폐’ 그 자체이나, 이자 수취를 매개로 이 퇴장 화폐를 자본으로 전격 전환시킨다. 곧, 그가 이자를 매개로 타인의 잉여 노동 전부 또는 일부를 사유화하며, 생산 조건이 명목상 타인의 소유로 남아 있음에도, 실질적으로는 이를 지배하는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다.
고리대는 (에피쿠로스의 신들이 세계 사이의 틈새에 거주하듯), 기존 생산 체제의 간극 속에서 기생한다. 상품 형태가 생산물의 보편적 양식으로 확립되지 않을수록 화폐의 희소성은 증대되며, 이에 따라 고리대금업자는 차입자의 지불 능력이나 저항 능력이라는 외재적 한계 외에는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는 절대적 착취자로 군림한다.
소농민적 및 소부르주아적 생산 양식에서 화폐가 구매 수단으로 절실해지는 시점은, 생산 수단을 점유한 노동자가 예기치 못한 재해나 우연한 사고로 인해 생산 조건을 상실하거나 일반적인 재생산 과정이 차단될 때다. 생활 수단과 원료는 이러한 생산 조건의 핵심적 구성 요소이나, 가격 등귀로 인해 생산물의 판매 대금이 보충 비용을 하회하거나 흉작으로 인해 종자용 곡물을 현물로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역사적으로 고대 로마의 귀족은 전쟁을 매개로 평민층을 몰락시켰다. 귀족은 평민에게 병역 의무를 강제하면서 그들이 자신의 노동 조건을 재생산할 기회를 박탈하고 빈곤화를 초래하였다. 이때 전쟁을 매개로 획득한 전리품인 구리 (화폐)는 귀족의 금고에 축적되었다. 귀족은 평민에게 필요한 실물 상품 (곡물, 가축 등)을 직접 제공하는 대신, 자신들에게 잉여 자산이었던 화폐를 대부하면서 고율의 이자를 수취하고 평민을 채무 노예로 전락시켰다. 카를 대제 치하의 프랑스 농민들 역시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파산을 겪으며, 채무 관계를 기점으로 농노의 지위로 전락되는 경로를 밟았다.
로마 제국에서는 기근으로 인해 자유민이 자신의 자녀를 부유층에 노예로 매도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였다. 이는 계급적 토대의 일반적 전락 과정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세밀히 고찰하면 소생산자의 생산 조건 유지 여부는 수많은 우연적 상황에 종속되어 있으며, 이러한 우연에서 비롯된 상실은 곧 빈곤화로 직결되어 고리대라는 기생적 기제가 개입할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다. 농민의 경우, 가축 한 마리의 폐사만으로도 종전 규모의 재생산 구조가 와해될 수 있다. 이처럼 취약한 기반 위에서 일단 고리대의 착취 연쇄에 고착되면, 그는 경제적 예속 상태를 벗어나 자유를 복원할 기회를 영구히 상실하게 된다.
고리대의 핵심적이고 독보적인 활동 기반은 지불 수단으로의 화폐 기능에 존재한다. 지대, 이자, 공납, 조세 등 특정 기일에 이행해야 하는 모든 화폐적 채무는 필연적으로 화폐 지불의 필요성을 수반한다. 이러한 경제적 배경으로 인해 고리대는 고대 로마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징세 청부업자의 기능과 밀접하게 결합하여 왔다. 상업이 발달하고 상품 생산이 보편화됨에 따라 구매와 지불 사이의 시차는 더욱 확대되며, 화폐는 정해진 기일에 반드시 인도되어야 하는 강제성을 띤다. 근대의 화폐 공황은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화폐 자본가와 고리대금업자가 단일한 실체로 통합될 수 있음을 실증한다.
나아가 고리대 그 자체가 지불 수단으로의 화폐 수요를 증폭시키는 주요 동인이 된다. 고리대는 생산자를 채무의 굴레에 심화시켜 구속할 뿐만 아니라, 가중되는 이자 부담으로 인해 원활한 재생산을 저해하면서 생산자가 상시적 지불 수단을 보유할 여력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고리대는 지불 수단으로의 화폐 기능에서 발원하여, 자신의 가장 고유한 활동 토대인 바로 그 기능을 스스로 확장해 나가는 모순적 구조를 형성한다.
신용 제도는 고리대에 대한 반작용으로 발전하나, 이를 이자 자체에 대한 도덕적·종교적 반대라는 관점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고대 저술가나 교회 교부, 루터 및 초기 사회주의자들이 견지했던 이자 금지론과는 논리적 기반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용 제도의 발전이 의미하는 본질은, 이자 낳는 자본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부과하는 객관적 조건과 요구 체계에 전적으로 종속된다는 사실에 있다.
근대 신용 제도하에서 이자 낳는 자본은 대체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객관적 조건에 수렴하며 재편된다. 이 과정에서 고리대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속하며,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종전의 입법이 부과했던) 규제로부터 자유로워지기도 한다.
다만 이자 낳는 자본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부합하는 차입이 차단되거나 그러한 기제가 작동하지 않는) 대상 및 조건하에서는 여전히 고리대 자본의 형태를 유지한다. 구체적으로는 전당포 이용과 같은 개인적 필요에서 비롯된 차입, 부유한 낭비자의 사치적 소비를 위한 차입 등, 그리고 이와는 달리 소농민이나 수공업자 등과 같이 직접적 생산자가 여전히 자신의 생산 조건을 소유하고 있는 비자본주의적 생산 영역이 이에 해당한다. 아울러 자본주의적 생산자라 할지라도 그 사업 규모가 극도로 영세하여 스스로 노동하는 생산자와 실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경우, 이자 낳는 자본은 고리대 자본으로의 성격을 견지하게 된다.
이자 낳는 자본을 고리대 자본과 구별하는 본질적 차이는 자본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그것이 기능하는 객관적 조건과 화폐 대부자에 대립하는 차입자의 사회적 성격이 변화했다는 점에 있다.
무산자가 산업가나 상인으로 신용을 획득하는 경우, 이는 그가 자본가로 기능하며 차입 자본을 매개로 미지불 노동을 점유할 것이라는 기대에 근거한다. 곧, 그는 ‘잠재적 자본가’로 신용 체계에 포섭된다. 재산은 없으나 역량과 사업 수완을 갖춘 개인이 자본가로 상승할 수 있다는 사실은 경제학적 변호론자들에게 상찬받아 왔다. 이러한 기제는 기존의 개별 자본가들에게는 위협적인 경쟁자들을 끊임없이 양산하는 측면이 있으나, 자본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그 토대를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는 사회 하층으로부터 새로운 역량을 부단히 충원하면서 그 지속성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구조적 특징을 보여준다.
이는 중세 가톨릭 교회가 신분, 출신, 재산에 구애받지 않고 피지배 계급의 우수한 인재들을 등용해 위계 질서를 구축하면서 사제 계급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 세속인을 압제했던 이치와 같다.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의 탁월한 인물들을 흡수하는 역량이 뛰어날수록, 그 지배 체제는 더욱 안정화되는 동시에 피지배층에게는 한층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근대 신용 제도의 창설자들은 이자 낳는 자본 일반을 부정하거나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공공연히 승인하는 지점에서 출발하였다.
본고에서는 빈민을 고리대로부터 보호하고자 설립된 ‘몽 드 피에테’와 같은 초기 자선 전당포 (1350년 프랑쉬콩테, 15세기에 설립된 이탈리아 페루지아 및 사보나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상술하지 않겠다.
이러한 기관들이 주목받는 이유는 오직 경건한 선의가 그 정반대의 결과로 전도되는 역사의 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빈민 보호를 기치로 내건 기관들은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고리대금업을 수행하는 주체로 변질되었으며, 오늘날 영국의 노동자 계급은 그 후에 격인 전당포에 최소 100%에 달하는 고율의 이자를 지불하고 있다. 아울러 17세기 말 챔블랜이나 브리스코 등이 토지 자산을 담보로 지폐를 발행하여 귀족층을 고리대에서 구제하고자 했던 ‘토지 은행’ 식의 신용 착각에 대해서도 논의를 생략하기로 한다.
12세기와 14세기 베네치아 및 제노바에 설립된 신용 조합은 해상 무역과 도매 상업이 구태의연한 고리대의 지배 및 화폐 거래 독점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려는 실무적 요구에 힘입어 탄생하였다. 이들 도시 공화국에 세워진 진정한 의미에서 은행들은 공공 신용 기관의 역할을 겸하며 (국가에 조세 담보 대부를 제공하였는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핵심은 신용 조합을 설립한 상인 계급이 당대 사회의 중추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정부와 자신들을 고리대의 압박에서 구출하는 동시에, 국가 기구를 자신들에게 더욱 공고히 종속시키는 데 전략적 이해관계를 가졌다.
이러한 정치적 구도 속에서 (1694년) 잉글랜드 은행 설립 당시 토리당은 은행의 정치적 성격을 문제 삼으며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들은 은행을 본질적으로 공화주의적 기관으로 규정하며, 베네치아, 제노바, 암스테르담, 함부르크와 같이 번영하는 은행이 존재하는 곳은 모두 공화국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반면, 전제 군주정인 프랑스나 스페인에서는 은행이라는 존재를 찾아볼 수 없다는 논거를 들어 신용 제도의 확산을 배격하였다.
(1609년 설립) 암스테르담 은행과 (1619년 설립) 함부르크 은행은 근대적 신용 제도의 비약적 발달을 이끈 선구적 형태라기보다, 단순한 예금 은행의 기능에 충실하였다. 이들 은행이 발행한 수표는 실질적으로 예탁된 귀금속의 영수증에 불과하였으며, 오직 수치인의 이서를 거처서야만 비로소 유통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에서는 상업과 제조업의 발달로 상업 신용과 화폐 거래가 고도화되었고, 이러한 발전 과정 속에서 이자 낳는 자본은 점차 산업 자본과 상업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었다. 이와 같은 종속 관계는 당시의 낮은 이자율 수준에서 명확히 입증된다. 17세기의 네덜란드는 현재의 영국과 마찬가지로 경제 발전의 전형으로 평가받았으며, 그 경제적 고도화에 따라 피취득자의 빈곤을 전제로 하던 낡은 고리대의 독점 체제는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18세기 전반에 걸쳐 (영국에서는) 네덜란드를 전형으로 삼아 이자율의 강제 인하를 촉구하는 여론이 고조되었고, 입법 방향 역시 이에 부응하였다. 이러한 요구의 본질적 목적은 이자 낳는 자본을 산업 자본 및 상업 자본의 논리에 완전히 종속시키는 데 있었다.
이 움직임의 선구적 인물은 영국 개인 은행업의 시조인 차일드였다. 그는 기성복 제조 업체인 ‘모제즈 앤드 선’이 ‘개인 봉제업자’의 독점 체제를 공격했듯이, 고리대금업의 독점적 지위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차일드는 영국 증권 매매업의 초석이자 동인도 회사의 지배자로, 모순적으로 무역의 자유를 명분 삼아 해당 회사의 독점권을 옹호하기도 하였다.
차일드는 만리의 저작 『오해받는 화폐 이자』 (1668)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논리를 전개한다.
‘비겁하고 전전긍긍하는 고리대금업자들의 대변인인 그는 논리 중 가장 취약한 지점을 공격하고 있다. 그는 낮은 이자율이 부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그것을 단순히 부의 결과물이라 단언한다.’ (『상업에 관한 연구』 (1669), 번역판, 암스테르담과 베를린, 1754년 판: 120).
‘상업이 국가를 부유하게 하고 이자율 인하가 상업을 진흥시킨다면, 이자의 인하 또는 고리대의 제한은 국가의 부를 창출하는 결정적 원인임에 틀림없다. 특정 사안이 상황에 따라 원인이 되기도 하고 결과가 되기도 한다는 주장은 결코 불합리하지 않다.’ (『상업에 관한 연구』 (1669): 155).
‘달걀이 암탉의 원인이고 암탉이 달걀의 원인이다. 이자율의 인하는 부의 증대를 일으키며 증대된 부는 다시 이자율을 더욱 하락시킨다.’ (『상업에 관한 연구』 (1669): 156).
‘근면의 가치를 옹호하는 반면, 반대자는 나태를 비호하고 있다.’ (『상업에 관한 연구』 (1669): 179).
이처럼 고리대에 대항하여 이자 낳는 자본을 산업 자본에 종속시키려 했던 격렬한 투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필수 전제 조건을 근대적 은행 제도의 형태로 구축하려는) 유기적 창출 활동의 서곡이었다. 근대적 은행 제도는 모든 유휴 화폐 예비금을 집적하여 화폐 시장에 투입하면서 고리대 자본의 독점력을 와해시키는 한편, 신용 화폐를 창출하면서 귀금속 자체가 지녔던 독점적 지위를 제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차일드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이르는 영국의 은행 제도 관련 문헌들은 고리대에 대한 반대와 더불어 고리대의 예속으로부터 상업, 산업, 국가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일관된 요구를 담고 있다. 이 시기에는 신용이 발휘하는 경이로운 효과나, 귀금속의 독점적 지위를 해체하고 이를 지폐로 대체하면서 얻게 될 파급력에 대한 장밋빛 전망이 공존하였다. 잉글랜드 은행과 스코틀랜드 은행의 창립자인 패터슨 (1658-1719)은 이러한 지평 위에서 존 로 (1671-1729)의 선구적 인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당시 잉글랜드 은행의 설립에 반대하여,
‘모든 금세공업자와 전당포 주인들은 격렬한 분노의 함성을 터뜨렸다.’ (매콜리, 1855: 499).
‘잉글랜드 은행은 설립 초기 10년 동안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였다. 외부의 강력한 적대에 직면했을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은행권은 명목 가치를 크게 하회하는 수준에서 통용되었다. 귀금속 거래를 매개로 원시적 은행 업무를 독점하던 금세공업자들은 잉글랜드 은행을 극도로 시기하였다. 자신들의 사업 영역이 축소되고 할인율이 저하되었으며, 무엇보다 정부와의 독점적 거래권이 경쟁 상대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프란시스, 1848: 73).
잉글랜드 은행 설립 이전인 1683년에도 이미 국립 신용 은행에 관한 계획이 수립되었으며, 그 주요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대량의 상품을 보유한 사업가들이 시장 상황이 불리할 때 손실을 감수하며 매도하는 대신, 은행의 위탁을 받아 상품을 예탁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이 재고 자산을 담보로 신용을 확보하면서 노동자를 고용하고 사업을 지속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프란시스, 1848: 39-40).
이러한 구상은 각고의 노력 끝에 (런던) 비숍스게이트 스트리트의 데본셔 하우스에서 실현되었다. 해당 은행은 산업가와 상인들에게 예탁 상품 가치의 3/4까지 어음 대부를 실행하였다. 어음의 유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각계 인사들이 협동 기구를 결성하였으며, 은행 어음 소지자는 누구나 조합 내에서 현금과 동일한 효력으로 상품을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난해한 운영 체계와 상품 가치 하락에 따른 높은 위험 부담으로 인해 이 은행은 큰 번창을 거두지 못하였다.
(영국의 근대적 신용 제도 형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촉진했던) 저술들의 실질적 내용을 고찰하면, 거기에는 이자 낳는 자본과 대부 가용 생산 수단 전반을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필수 전제 조건으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요구만이 일관되고 있음을 포착하게 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사용된 논리나 표현들은 생시몽주의자들이 피력했던 은행 및 신용에 관한 추상적 관념과 (단어 하나하나까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중농주의자들에게 ‘경작자’가 토지를 실제로 경작하는 사람이 아닌 대규모 차지 농업가를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시몽의 ‘근로자’는 단순 노동자가 아닌 산업 자본가와 상업 자본가를 지칭하며 이러한 용어법은 그의 제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통용된다.
‘근로자는 조수와 보조자, 육체 노동자를 필요로 하며, 영리하고 능숙하며 성실한 인재를 구한다. 그는 그들을 지휘하여 일하게 하며, 그들의 노동은 그의 하에서 비로소 생산적 성격을 띤다.’ (앙팡탕, 『생시몽파의 종교』, 1831: 104).
생시몽이 그의 유작인 『신기독교』 (1825)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노동자 계급의 대변자로 자처하며 이들의 해방을 최종 목표로 선언했다는 사실은 간과될 수 없다. 그 이전의 저작들은 본질적으로 봉건 사회와 대비되는 근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찬미였으며, 나폴레옹 시대의 군인이나 입법자와 대조되는 산업가 및 은행가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데 치중하였다. 이는 동시대 오언의 저술들과는 선을 긋는 지점이다! 생시몽주의자들에게 산업 자본가는 여전히 가장 탁월한 형태의 ‘근로자’로 간주되었다.
생시몽의 저작를 비판적으로 고찰한다면, 신용과 은행에 관한 그의 공상이 1852년 생시몽주의자 페레르가 주도하여 설립된 ‘크레디 모빌리에 (Crédit Mobilier)’로 실현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신용 은행은 (신용 제도나 대규모 산업이 근대적 수준에 미치지 못했던) 프랑스와 같은 국가에서만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형태였으며,
영국과 미국에서는 성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크레디 모빌리에의 싹은 이미 『생시몽의 학설』 (1831)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 은행업자가 일반 자본가나 고리대금업자보다 낮은 이율로 대부할 수 있음은 자명한데, 이는 은행업자가,
‘차입자의 신용을 평가하는 데 있어 지주나 개인 자본가들보다 오판의 위험이 적어 산업가에게 더욱 저렴한 비용으로 생산 수단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
저자 자신은 주석에서 다음과 같은 지적을 덧붙이고 있다.
‘유휴 자산가와 근로자 (산업 자본가) 사이를 은행업자가 매개하면서 발생하는 이익은, 무질서한 사회 구조가 이기주의 (각종 사기와 기만의 형태로 발현되는)에 제공하는 기회들로 인해 상쇄되거나 소멸되기도 한다. 은행업자는 양자 사이에 개입하여 때로는 양측 모두를 착취하면서 사회적 해악을 야기한다.’
여기서 ‘근로자’는 ‘산업 자본가’를 지칭한다. 그러나 근대적 은행 제도가 운용하는 자금을 단순히 유휴 자산가의 자금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오류이다.
첫째, 해당 자금에는 산업가와 상인이 일시적 유휴 화폐 형태로 보유하는 자본, 곧 화폐 예비금이나 차기 투자 대기 자본이 포함된다. 이는 유휴 자본일 뿐 자산가의 도식적 자본과는 성격이 다르다.
둘째, 은행 자금에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수입과 저축 중 영구적 또는 일시적으로 축적을 위해 예치된 부분이 포함된다.
이 두 요소야말로 은행 제도의 본질을 구성하는 핵심 동력이다.
그럼에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지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귀금속 형태의 화폐는 여전히 체제의 토대를 이루며, 신용 제도는 본질적으로 이 토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둘째, 신용 제도는 사회적 생산 수단이 (자본과 토지 소유권의 형태로) 사적 개인에게 독점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곧, 신용 제도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내재적 형태인 동시에, 이 생산 양식을 그 최고이자 최후의 단계로 밀어붙이는 결정적 추진력이다.
『영국의 이자에 관한 약간의 고찰』 (저자 미상, 1697)에서 이미 지적된 바와 같이, 은행 제도는 그 조직적 구성과 집중도 측면에서 볼 때,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창출한 가장 인위적이며 정교한 산물이다. 비록 상업과 산업의 실질적 운동이 잉글랜드 은행의 궤도 외부에 존재하고 은행이 그 운동에 대해 전적으로 수동적인 입장을 견지할지라도, 잉글랜드 은행과 같은 기관이 상업과 산업 전반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아가 은행은 비록 형식적 범주일지라도 사회적 규모에서 생산 수단의 일반적 부기를 담당하고 그 분배의 형태를 제공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개별 자본가 (또는 특정 개별 자본)의 평균 이윤은 해당 자본이 직접 착취하는 잉여 노동이 결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총자본이 착취하는 총 잉여 노동에 규정되며, 총 잉여 노동에서 각 개별 자본은 총자본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만큼 배당을 수취할 뿐이다. 자본이 지닌 이러한 사회적 성격은 신용 및 은행 제도가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비로소 매개되고 완전히 실현된다.
나아가 신용 및 은행 제도는 사회 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본과 아직 능동적으로 기능하지 않는 잠재적 자본까지 산업 자본가 및 상업 자본가의 처분에 맡긴다. 이 과정에서 자본의 대부자나 사용자는 더 이상 해당 자본의 소유자나 생산자가 아니게 된다. 이처럼 신용 및 은행 제도는 자본의 사적 성격을 철폐하면서, 자본 자체의 부정을 내재적으로 포함한다. 은행 제도는 자본의 분배권을 사적 자본가와 고리대금업자로부터 회수하여 하나의 특수한 업무이자 사회적 기능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은행과 신용은 자본주의적 생산을 체제 내부의 한계 너머로 몰아붙이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되는 동시에, 공황과 사기를 촉발하는 가장 유효한 동인 중 하나가 된다.
나아가 은행 제도는 화폐를 각종 형태의 유통 신용으로 대체하면서, 화폐란 본질적으로 노동과 그 생산물이 지닌 사회적 성격을 특수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함을 드러낸다. 동시에 이러한 사회적 성격은 사적 생산이라는 토대와 대립하기에, 필연적으로 여타 상품과 병존하는 하나의 사물 또는 특수한 상품의 형상으로 자신을 구체화할 수밖에 없음을 명시한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협동적 노동의 생산 양식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신용 제도가 강력한 지렛대 역할을 수행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신용 제도는 생산 양식 전반의 대규모 유기적 변혁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기능할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신용 및 은행 제도의 전능한 위력을 맹신하는 허상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과 그 파생 형태로의 신용 제도에 대한 완전한 무지에서 기인한다. 생산 수단이 자본으로 전환되기를 멈추고 (사적 토지 소유가 폐지되는 즉시), 신용 체계는 그 존립 근거를 상실하는데, 이는 이미 생시몽주의자들도 간파했던 바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존속하는 한 이자 낳는 자본은 해당 양식의 필수적 형태로남으며 신용 제도의 근간을 이룬다. 상품 생산을 유지하면서 화폐만을 폐지하고자 했던 프루동과 같은 선동적 저술가만이 소부르주아적 염원을 현상한 ‘무이자 신용’이라는 형용 모순적 괴물을 몽상할 수 있었을 뿐이다. (마르크스, 『철학의 빈곤』 (CW 6: 105-212);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CW 29: 323)).
『생시몽파의 종교』 (45)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용의 목적은 산업 도구를 소유하고 있으나 이를 운용할 의사나 능력이 없는 집단으로부터, 노동 도구는 없으나 그 사용 방법을 숙지한 근면한 집단으로 생산 수단을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전시키는 데 있다. 이러한 정의에 입각할 때, 신용 제도는 본질적으로 특정한 소유 구성 방식에서 기인하는 결과물이다.’
따라서 소유 구조의 변화와 함께 그 존립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나아가 같은 책 98쪽에서는 현대 은행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오늘날의 은행은 자신의 통제 영역 밖에서 발생하는 경제 거래의 사후적 추종에 머무를 뿐, 거래 자체를 선도적으로 자극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다시 말해, 은행은 자본을 대부받는 근로자 (산업 자본가)에 대하여 단순히 자본가로의 기능적 임무를 수행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은행이 경제 전반의 지휘권을 확보하고 ‘자신이 융자하는 기업과 추진하는 사업의 규모 및 유용성’ (101)에 힘입어 그 두각을 나타내야 한다는 사상 속에는 이미 크레디 모빌리에의 싹이 있다. 마찬가지로 페케르 또한 은행, 곧 생시몽주의자들이 일컫는 ‘일반적 은행 제도’가 ‘생산 전반을 지배할’ 것을 요구한다. 페케르는 비록 그 성향이 훨씬 급진적일지라도, 본질적으로는 생시몽주의의 궤적에 놓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페케르는 신용 기관이 국민적 생산 운동 전체를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국민적 신용 기관을 창설하여 재능과 능력을 겸비한 무산자들에게 자금을 대부하면서도, 그 차입자들을 생산과 소비의 긴밀한 연대성 속에 강제로 결합시키지 않은 채 그들이 무엇을 생산하고 교환할지를 개인의 재량에 맡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결과는 기존의 개인 은행들이 이미 초래하고 있는 무정부 상태, 곧 생산과 소비의 불일치, 일방의 갑작스러운 몰락과 타방의 급격한 치부일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용 기관은 누군가의 불행을 상쇄하는 정도의 요행을 생산하는 데 그칠 것이며, 결국 지원을 받은 임금 노동자들에게 현재의 자본가적 고용주들이 행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호 경쟁의 수단을 제공하는 꼴이 되고 만다.’ (페케르, 1842: 433, 434).
기존의 분석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상인 자본과 이자 낳는 자본은 자본의 가장 고전적인 형태에 속한다. 특히 이자 낳는 자본이 인민에게 가장 전형적인 자본의 모습으로 각인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상인 자본의 경우 그것이 기만이든 노동이든 일정한 매개 활동을 전제로 하는 반면, 이자 낳는 자본은 자본의 자기 증식적 성격과 잉여 가치 생산 능력을 순전히 물신적 속성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산업 자본의 발달이 미비한 국가에서는 (예: 프랑스) 경제학자들조차 이자 낳는 자본을 자본의 기본 형태로 규정하며, 지대마저 그 변형된 일종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는 대부 형태의 우세함에 매몰되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내적 구성을 완전히 오해한 결과이며, 토지가 자본과 마찬가지로 오직 자본가에게 대부된다는 본질을 간과한 것이다.
물론 화폐 대신 기계나 업무용 건물 등 현물 형태의 생산 수단이 대부될 수도 있으나, 이들은 결국 일정한 화폐액을 표상할 뿐이다. 이때 이자 외에 마멸분에 대한 추가 비용이 지불되는 것은 해당 자본 요소가 지닌 고유한 사용 가치와 현물 형태에 기인한다. 여기서 핵심적으로 구별해야 할 지점은 생산 수단이 직접적 생산자에게 대부되는가, 아니면 산업 자본가에게 대부되는가 하는 문제다. 전자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부재를, 후자는 그 존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개인적 소비를 위한 가옥 대부 등을 이 논의에 포함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무의미하다. 노동자 계급이 주거 형태에서 극심한 기만을 당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나, 이는 노동자 계급에게 생활 수단을 공급하는 소매상들의 착취와 같은 현상일 뿐이다. 곧, 이는 (생산 과정 내부에서 직접적으로 발생하는) 제1차적 착취와 나란히 진행되는 제2차적 착취에 해당한다. 여기서 판매와 대부의 형식적 차이를 본질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현실적 연관 구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소치에 불과하다.
고리대는 (상업과 마찬가지로) 기존에 주어진 생산 방식을 전제로 기능할 뿐, 새로운 생산 방식을 창출하지 않으며 외부로부터 그 체계와 관계를 맺는다. 고리대는 자본의 증식을 목적으로 기존 생산 방식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이용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해당 방식을 직접적으로 유지하려 노력한다.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 고리대는 본질적으로 고수적이며, 기존 생산 방식을 혁신하기보다 생산 조건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생산 요소들이 상품의 형태로 생산 과정에 유입되거나 유출되는 비중이 낮을수록, 화폐를 매개로 생산 요소를 전환하는 행위는 더욱 예외적이고 특수한 성격을 띠게 된다. 곧, 사회적 재생산 구조 내에서 유통이 수행하는 기능적 중요성이 낮을수록, 고리대 자본은 더욱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며 번창하게 된다.
화폐 재산이 특수한 형태의 자산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고리대 자본이 자신의 모든 청구권을 화폐적 권리로 보유하게 됨을 의미한다. 특히 생산의 주요 영역이 현물 지급과 같은 사용 가치 중심의 교환에 국한되어 있을수록, 해당 경제 체제 내에서 고리대 자본의 지배력은 더욱 공고해진다.
고리대는 이중의 작용을 매개로 산업 자본이 형성될 수 있는 결정적 전제 조건들을 마련하는 강력한 지렛대가 된다.
첫째, 고리대는 상인 자본과 나란히 독립적인 화폐 자산을 축적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둘째, 고리대는 전통적인 생산 수단 소유자들을 경제적으로 몰락시키면서 그들로부터 노동 조건을 박탈한다.
중세의 이자
‘중세 사회의 주민은 순수하게 농업에 종사하였다. 봉건 제도와 같은 통치 체제 아래에서는 교역이 극히 제한되었으므로, 이윤 또한 거의 발생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중세의 고리대 금지법은 정당성을 지녔다. 더욱이 농업 중심 국가에서 화폐 차입은 대개 극심한 빈곤이나 위급 상황에 직면했을 때에만 제한적으로 발생하였다.
영국 역사에서 헨리 8세 (재위 기간: 1509-1547)는 이자율을 10%로 제한하였으며, 이후 제임스 1세 (재위 기간: 1603-1625)는 8%, 찰스 2세 (재위 기간: 1660-1685)는 6%, 앤 여왕 (재위 기간: 1702-1714)은 5%로 그 상한을 점진적으로 낮추었다. 당시의 대부업자들은 법률상 독점자는 아니었으나 사실상의 독점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므로, 여타 독점권과 마찬가지로 그들에 대한 규제는 불가피한 조치였다.
현대 경제에서는 이윤율이 이자율을 규제하지만, 그 당시에는 반대로 이자율이 이윤율을 규제하는 구조였다. 화폐 대부자가 상인에게 높은 이자율을 부과하면 상인은 상품 가격에 이를 전가하여 높은 이윤율을 붙일 수밖에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막대한 규모의 화폐가 구매자의 수중에서 화폐 대부자의 수중으로 이전되는 결과를 낳았다.’ (길바트, 『은행업의 역사와 원리』: 163, 164, 165).
‘보고된 바에 따르면, (100굴덴을 대부하고) (일 년에 세 번 열리는) 라이프치히 장날마다 10굴덴씩을 수취하여 연간 총 30굴덴의 이자를 챙기는 사례가 있다. 심지어 노이엔부르크 장날까지 추가하여 100굴덴당 40굴덴을 취하는 자들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행태가 일반화될 경우 초래될 결과는 자명하다.
라이프치히에서 100플로린을 소유한 자는 매년 40플로린을 거두어들이면서 농민이나 소생산자 한 명의 생계를 잠식한다. 자본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 폐해는 가속화되어, 1,000플로린 소유자는 매년 400플로린을 수취하며 기사나 부유한 귀족의 몫을, 10,000플로린 소유자는 매년 4,000플로린으로 부유한 백작의 자산을 집어삼킨다. 나아가 100,000플로린을 굴리는 대규모 고리대금업자는 매년 40,000플로린을 챙겨 위대한 왕자의 부를, 1,000,000플로린을 보유한 자는 매년 400,000을 받아 일국의 왕에 버금가는 부를 매년 강탈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고리대금업자는 어떠한 신체적 위험이나 상품 손실의 부담을지지 않은 채, 노동 없이 난로 앞에 앉아 안락을 누릴 뿐이다. 이 비열한 약탈자가 가만히 집에 앉아 타인의 노동 결실을 가로채는 구조가 지속된다면, 그는 단 10년 안에 세계 전체를 집어삼키게 될 것이다.’ (루터, 『목사들에게, 고리대에 반대해 설교할 것』 (1540년), 『루터 저작집』, 비텐베르크, 1589, 제6부: 312)
‘15년 전 고리대에 반대하는 글을 집필하였으나, 당시에도 이미 고리대는 광범위하게 만연해 있어서 어떠한 개선도 바랄 수 없었다. 그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리대는 더욱 오만해져서, 이제는 스스로를 죄악이나 악행, 또는 수치로 여겨기기는커녕 도리어 타인에게 기독교적 봉사를 베푸는 순수한 덕행이자 명예라고 자찬하고 있다. 이처럼 수치가 명예로 둔갑하고 악행이 덕행으로 변모한 상황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루터, 『목사들에게, 고리대에 반대해 설교할 것』).
‘유대인과 롬바드 거리의 사람들, 고리대금업자, 그리고 이른바 ‘흡혈귀’라 불리던 자들이 초기 은행업과 화폐 거래를 주도하였으며, 그들의 평판은 극도로 악명 높았다. 런던 금세공업자들 역시 이들과 한패였다. 결과적으로 초기 은행업자들의 실체는 탐욕스러운 고리대금업자이자 냉혹한 흡혈귀였으며, 본질적으로 악한들의 집단에 불과하였다.’ (하드카슬, 『은행과 은행업자』: 19, 20)
‘베네치아가 제시한 은행 설립의 선례는 곧 주변국으로 빠르게 확산하였다. 독립적인 지위와 상업적 역량으로 명성을 떨친 모든 해안 도시들은 앞다투어 독자적인 은행을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선박의 귀항이 장기간 지연되는 해상 무역의 특성상 신용 제공은 필연적인 관습으로 정착하였으며, 이러한 경향은 아메리카 대륙의 개척과 그에 따른 무역 확대를 기점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중요한 지적이다.)
‘대규모 선박을 전세 내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의 대부가 요구되었는데, 이는 이미 고대 아테네와 그리스에서도 확인되는 현상이었다. 이처럼 해상 무역과 신용 제도의 밀접한 연관성 속에서, 1308년 한자 동맹의 주요 도시인 브뤼즈에는 이미 보험 회사가 존재하고 있었다.’ (오지에, 1842: 202, 203).
17세기 최후의 3분기, (곧 근대적 신용 제도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이전까지) 영국에서조차 토지 소유자에 대한 대부와 부유층의 일반적 소비를 위한 대부가 얼마나 지배적이었는지는 노스의 저술에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노스는 영국의 일류 상인이자 당대 가장 선구적인 경제 이론가 중 한 명으로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이 나라에서 이자를 목적으로 대부되는 화폐 중 사업가들의 운영 자금으로 투입되는 비중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 자금의 대부분은 사치품 구입에 충당되거나, 자신의 토지 수익보다 과도한 지출을 일삼으면서도 토지를 매각하는 대신 저당 잡히는 대토지 소유자들의 소비를 뒷받침하는 데 활용될 뿐이다.’ (1691: 6-7).
18세기 폴란드의 경제적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바르샤바에서는 어음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나, 이는 실질적인 상업 활동보다는 주로 은행업자의 고리대 행위와 그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였다. 은행업자들은 방탕한 귀족들에게 8% 이상의 고율로 자금을 대부하기 위해 해외로부터 백지 어음 신용을 입수하였다. 이 어음은 상품 거래라는 실체적 근거 없이 발행되었음에도, 외국의 어음 인수인은 대금 환류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이를 인수하였다. 그러나 결국 테퍼를 비롯한 바르샤바의 일류 은행업자들이 연쇄적으로 파산함에 따라, 이들의 어음을 인수했던 외국 금융업자들은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었다.’ (뷔슈, 1808: 232, 233).
이자 금지가 교회에 준 이익
‘교회는 이자 수취를 금지하였으나, 빈곤 구제를 목적으로 재산을 매각하는 행위는 허용하였다. 또한 화폐 대부자에게 (대부금 상환 시까지) 재산권을 이전하는 관행 역시 규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따라 화폐 대부자는 담보권을 확보함은 물론, 해당 재산의 운용 수익을 기반으로 대부에 대한 보상을 취득할 수 있었다. 교회와 산하 종교 단체 및 자선 단체들은 이러한 관행 속에서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으며, 특히 십자군 전쟁 시기 (11-13세기)에 그 세가 절정에 달하였다.
이자 금지 규정은 종교 단체에 기부된 재산의 양도를 영구히 제한하는 법규와 결합하여, 국부의 상당 부분을 교회의 영구적 소유로 귀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들은 교회에 귀속된 부동산을 담보로 삼는 것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었기에 세력 확장에 제약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이자 금지라는 종교적 규율이 없었더라면, 교회와 수도원은 결코 그토록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뷔슈, 1808: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