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통화주의와 영국의 1844년 은행법

 

(엥겔스: 리카도의 화폐 이론에 따르면, 금속 화폐의 가치는 본질적으로 투하된 노동 시간에 따라 결정되나, 실제 유통 과정에서의 가치 규정은 유통되는 화폐량과 상품 총액 사이의 양적 비율에 종속된다. 화폐량이 적정 수준을 초과할 경우 화폐 가치는 하락하고 상품 가격은 상승하며, 반대로 화폐량이 부족할 경우 화폐 가치는 상승하고 상품 가격은 하락한다. 이러한 불일치는 금의 수출입과 상품의 유통에 기반한 세계적 수급 환류 과정을 거치며 수렴된다.

 

주화나 금덩이뿐만 아니라 태환 은행권 역시 유통 수단 총량의 변동에 따라 가치 표상으로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은행권이 금으로의 태환성을 유지하여 명목 가치와 실질 가치가 일치하더라도, ‘금속 화폐와 태환 은행권이 결합된 총통화량이 상품 유통에 필요한 객관적 수준을 상회하거나 하회할 경우 통화 전체의 가치는 필연적으로 변동한다. 리카도가 정립한 이 유통 수단 총량의 가치 변동 법칙은 이후 오브스톤 학파에게 계승되었으며, 1844년과 1845년 필의 은행 입법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이론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1859, CW 29: 404.)

 

리카도 이론의 내적 모순에 대한 논증은 기고된 저술에서 이미 완결되었으므로, 본 고의 논점은 필 은행법의 입법자들이 리카도의 이론을 어떠한 방식으로 전유하고 가공하였는가에 집중된다.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1825년과 1836년에 발생한 19세기의 대규모 상업 공황은 리카도 통화 이론의 지평을 새로운 실천적 적용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당시의 핵심적 과제는 흄이 고찰했던 16-17세기의 귀금속 가치 하락이나 리카도가 직면했던 18-19세기 초의 지폐 가치 변동과 같은 국지적 현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부르주아 생산 양식의 제반 요소들이 격돌하며 분출되는 세계 시장의 주기적 파국이었다. 이러한 위기의 원인과 대책을 공황의 가장 표면적이고 추상적인 범주인 통화 영역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지속되었다. 이른바 통화학파 (일명 경제예측학파)는 리카도가 순수 금속 유통의 보편 법칙을 확립했다는 확신을 이론적 토대로 삼았다. 그들에게 남겨진 과제는 신용 화폐 내지 은행권의 유통 기제를 리카도가 설정한 금속 유통의 법칙 체계 속에 강제적으로 포섭시키는 것뿐이었다.

 

상업 공황의 가장 현저한 전조는 지속적인 가격 상승 이후 발생하는 급격한 일반적 상품 가격 하락이다. 이는 모든 상품에 대한 화폐의 상대적 가치 상승으로 규정될 수 있으나, 이러한 정의는 현상에 대한 기술일 뿐 그 내적 원인에 대한 설명력을 갖지 못한다. 리카도의 화폐 이론은 동어 반복적 논리에 인과율의 외양을 부여하면서 정당성을 획득하려 했다. , 물가의 주기적 등락 원인을 화폐 가치의 주기적 변동에서 찾으면서, 결과적으로 가격의 변동은 가격의 변동 때문이다.’라는 순환 논리에 매몰된 것이다.

 

리카도는 상품 가격의 상승을 화폐의 내재적 가치와 상품량에 준하여 규정되는 적정 수준을 초과한 통화량의 과잉으로, 반대로 가격의 하락을 통화량의 부족으로 설명하였다. 설령 상품 가격 상승이 통화량 감소와 병행되는 실증적 반례가 제시되더라도, 그는 검증 결여한 유통 상품량의 변동을 가정하여 통화량의 상대적 과잉이나 부족을 주장하면서 논리적 정합성을 강변하였다. 이러한 기제는 순수 금속 유통 체제 하에서 귀금속의 유출입을 경유한 자생적 수급 환류 과정으로 상쇄된다고 간주되었다.

 

그러나 공황이라는 격렬한 형태의 가격 변동은 신용 제도의 발달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은행권의 발행이 금속 유통의 법칙에 부합하지 못함을 시사한다. 이에 따라 통화주의자들은 은행이 금속 유통의 법칙을 인위적으로 준용하여 금의 유입 시에는 은행권 발행을 확대하고, 유출 시에는 이를 환수하면서 환율과 귀금속 추이에 따라 통화량을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금의 증감이 곧 유통 통화량의 변동과 물가 등락으로 직결된다는 리카도의 이론적 가설은, 결국 국내 금 보유량과 주화 유통량을 연동시키려는 현실적 기획으로 이전되었다. 존스 로이드 (오브스톤), 토렌즈, 노먼, 클래이, 아버스노트 등 통화주의 학파가 주도한 이 이론은 1844년과 1845년의 필 은행법에 입각하여 국가적 입법 원칙으로 확립되었다. 그러나 거대한 규모로 단행된 이 시도가 이론적·실천적으로 처참한 실패를 맞이하게 된 경위는 향후 신용론의 체계 내에서 엄밀히 규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1859. CW 29: 412-414).

 

통화주의에 대한 이론적 비판은 투크, 윌슨 (이코노미스트, 1844-1847), 풀라턴 등을 필두로 하여 전개되었다. 비록 이들 비판가 역시 제28장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금의 본질적 성격이나 화폐와 자본 간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1857년 하원 위원회의 필 은행법 조사 회의록 (은행법, 1857)에 수록된 몇 가지 증언을 검토하고자 한다.)

 

잉글랜드 은행의 이전 총재 허바드의 증언.

 

금 수출의 영향은 일반 상품 가격과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 금의 유출은 상품 가격보다는 이자 낳는 증권의 가격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다. 이는 이자율의 변동이 해당 수익권을 내포한 자산 가치에 필연적으로 강력한 파급 효과를 미치기 때문이다 (2400).’

 

이러한 기제는 통화량 변동이 즉각 물가로 이전된다는 통화주의적 가설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허바드는 1834-1843년과 1845-1856년을 포괄하는 두 개의 통계 자료를 제시하며, 주요 15개 품목의 가격 변동이 금의 유출입이나 이자율의 향방과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갖지 않음을 증명하였다. 반면, 해당 자료들은 사실상 투자처를 모색하는 국내 자본의 대표물이라 할 수 있는 금의 유출입과 이자율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련성이 존재함을 시사한다.

 

‘1847년의 사례를 보면, 거액의 미국 및 러시아 증권이 해당 국가로 반송되었으며, 기타 유럽 증권들 또한 곡물 수입국들로 이전되는 양상을 보였다.’

 

허바드가 분석 대상으로 삼은 15개 핵심 종목은 면화, 면사, 면직물, 양모, 모직물, 아마, 아마포, 인디고, 선철, 주석, 구리, 짐승 기름, 설탕, 커피, 생사 등으로, 이들 품목의 가격 추이는 통화주의적 가설과는 불일치하는 독자적인 운동 법칙을 보여준다.

 

허바드는 제시된 통계 자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1834-1843년의 추이와 마찬가지로, 1844-1853년 기간에도 잉글랜드 은행의 금 보유고 변동은 할인을 거쳐 선대되는 화폐액의 증감과 연동되는 양상을 보였다. , 금 보유고의 증가는 화폐 선대액의 감소를, 금 보유고의 감소는 화폐 선대액의 증가를 동반하였다. 그러나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 역시 상품 가격의 추이는 잉글랜드 은행의 금 보유고 변동으로 대변되는 유통 화폐량의 변화와 어떠한 상관관계도 형성하지 않았다.’ (은행법 1857, 2, 290-291).

 

<1> 1834-1843년 금 보유고 및 할인율과 상품 가격 변동

 

 

조사 시점

금속 준비금 ()

시장 할인율 (%)

15개 중 가격 상승

15개 중 가격 하락

15개 중 가격 불변

1834. 03. 01.

9,104

2 3/4

-

-

-

1835. 03. 01.

6,274

3 3/4

7

7

1

1836. 03. 01.

7,918

3 1/4

11

3

1

1837. 03. 01.

4,077

5

5

9

1

1838. 03. 01.

10,471

2 3/4

4

11

0

1839. 09. 01.

2,684

6

8

5

2

1840. 06. 01.

4,571

4 3/4

5

9

1

1841. 12. 01.

3,642

5 3/4

7

6

2

1842. 12. 01.

4,873

5

3

12

0

1843. 12. 01.

10,603

2 1/2

2

13

0

1841. 06. 01.

1,566

2 1/4

1

14

0

 

 

<2> 1844-1853년 필 은행법 발효 이후의 변동 현황

 

조사 시점

금속 준비금 ()

시장 할인율 (%)

15개 중 가격 상승

15개 중 가격 하락

15개 중 가격 불변

1844. 03. 01.

16,162

2 1/4

-

-

-

1845. 12. 01.

13,237

4 1/2

11

4

0

1846. 09. 01.

16,366

3

7

8

0

1847. 09. 01.

9,140

6

6

6

3

1850. 03. 01.

17,126

2 1/2

5

9

1

1851. 06. 01.

13,705

3

2

11

2

1852. 09. 01.

21,853

1 3/4

9

5

1

1853. 12. 01.

15,093

5

14

0

1

 

 

상품의 시장 가격을 규제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해당 상품의 수급 관계다. 따라서 오브스톤이 할인율로 대변되는 대부 가용 화폐 자본에 대한 수요를 현실적 자본에 대한 수요와 동일시하는 것은 명백한 이론적 오류다. 상품 가격이 통화량 변동에 규제된다는 기존의 주장은, 이제 할인율의 변동이 화폐적 자본과 구별되는 현실적 자본의 수요 변동을 대변한다는 궤변적 문구 뒤로 은폐된다. 노먼과 오브스톤은 은행법 위원회에서 이러한 논리를 집요하게 주장하였으나, 특히 오브스톤이 동원한 조악한 기만술은 논리적 일관성을 결여한 채 결국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26).

 

금량의 변동이 국내 유통 화폐량을 증감시켜 필연적으로 상품 가격의 등락을 초래한다는 가설은 실증적 근거가 결여된 허구적 가설에 불과하다. 통화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금의 유출입은 유입국과 유출국 양측의 물가 수준을 일률적으로 변동시켜야 한다. , 금 수입국은 통화량 증대로 인해 상품 가격이 등귀하고, 반대로 금 수출국은 통화량 감소로 가격 하락을 수반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금량의 변동은 상품 가격에 직접 작용하기보다 단순히 이자율의 변동 (금량 감소 시 이자율 상승, 금량 증대 시 이자율 저하)을 야기할 뿐이다. 따라서 이자율의 변동이 상품의 비용 가격 산정이나 실질적인 수급 구조에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하지 않는 한, 상품 가격은 화폐적 요인으로부터 독립적인 궤적을 유지하게 된다.

 

동일한 보고서에서 인도 무역 상사의 대표 알렉산더는 1850년대 중엽 인도와 중국으로 단행된 대규모 은 유출의 실상을 증언하고 있다. 당시 은 유출은 1850-1864년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한 영국산 직물의 대()중국 수출 정지와 유럽의 누에병 창궐에 따른 이탈리아·프랑스의 생사 생산 격감이라는 요인에 기인하였다.

 

질문: 은 유출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가. 중국인가, 아니면 인도인가.

 

답변: 은은 먼저 인도로 보내진다. 그 은의 대부분으로 아편을 구매하며, 이 아편은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생사를 구매하는 자금이 된다. 당시 인도의 시장 상황은 상인들이 직물이나 기타 제품을 수출하는 것보다, 비록 그곳에 은이 축적되어 있을지라도 은 자체를 보내는 것이 훨씬 유리한 구조였다 (4337).’

 

질문: 우리가 (인도와 중국으로 보낼) 그 막대한 은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로부터의 대규모 은 유출 때문이 아니었는가.

 

답변: 그렇다 (4338).’

 

질문: 현재 영국의 생사 수급 상황은 어떠한가.

 

답변: 우리는 더 이상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생사를 가져오지 않는다. 오히려 벵골과 중국에서 들여온 생사를 그곳 (유럽 대륙)으로 대량 수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4344).’

 

증언 (4337, 4338, 4344)에 따르면, 영국은 은을 인도로 보내 아편을 구입하고, 이를 다시 중국에 투입하여 생사를 확보하는 자금으로 활용하였다. 상인들이 상품 대신 은을 수출한 것은 인도의 시장 상황상 직물 수출보다 은의 투입이 상대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며, 이 과정에서 소요된 은은 프랑스로부터의 대규모 유출을 매개로 충당되었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생사를 의존하는 대신 벵골과 중국산 생사를 확보하여 유럽 시장에 재공급하는 구조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상품 대신 화폐 금속인 은이 아시아로 유입된 실질적 이유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는 생산국인 영국의 물가 앙등 때문이 아니라, 수입국 시장의 상품 과잉으로 인한 가격 하락에 대응하기 위한 차선책이었다. 통화주의적 가설을 적용한다면 은 유출국인 영국의 물가는 하락하고 은 유입국인 인도와 중극의 물가는 등귀해야 했으나, 현실의 경제 역학은 이러한 이론적 예측을 무색하게 하였다.

 

리버풀의 유력 상인 와일리의 상원 위원회에서의 증언 (상업 불황, 1848-1857)은 실제 시장의 동학이 통화주의적 가설과 얼마나 불일치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845년 말, 영국 면방적업은 전례 없는 호황을 구가하고 있었다. 당시 양질의 면화 재고는 풍부했으며 파운드당 가격 또한 4펜스에 불과했다. 여기에 방적 비용 4펜스 (우등2호 뮬연사 제40번수 기준)를 더한 총생산비가 8펜스였던 반면, 완성된 면사는 18459-10월경 파운드당 10 1/2-11 1/2펜스에 거래되었다. 이는 방적업자들이 면화 구입 가격에 맞먹는 막대한 이윤을 남기며 최고의 수익성을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94).’

 

면방적업은 1846년 초까지도 계속해서 유리한 상황이었다 (1996).’

 

‘184433일의 면화 재고 (627,042상자)184837일의 재고 (301,070상자)보다 두 배 이상 많았음에도, 가격은 재고가 훨씬 풍부했던 1844년 당시에 오히려 파운드당 1 1/4펜스만큼 더 비쌌다. , 1848년의 면화 가격인 5펜스에 비해 1844년의 가격은 6 1/4펜스에 달했던 것이다 (2000).’

 

제품 가격의 폭락은 더욱 심각했다. 우등 2호 뮬연사 제40번수는 파운드당 11 1/2-12펜스에서 1847109 1/2펜스로, 동년 12월 말에는 7 3/4펜스까지 급락했다. 결과적으로 면사 가격이 그 원료인 면화의 구입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방적업의 수익성은 완전히 무너졌다 (상업 불황, 1848-1857, 2021호 및 제2022).

 

이러한 사태는 자본의 부족이 화폐를 비싸게만든다는 오브스톤 학파의 이론적 기만을 폭로한다. 잉글랜드 은행의 이자율은 1844333%에서 공황기인 184710-118%-9%까지 치솟았다가, 184837일 다시 4%로 하락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면화 가격의 폭락은 통화주의적 가설이 상정한 통화량 과잉에 따른 물가 등귀와는 정반대의 현상이었다.

 

그러나 실제 가격 하락을 주도한 것은 판매 정체와 금융 핍박에 따른 고율 이자 부담이 초래한 강제적 투매였다. , 면화 가격은 공급 규모에 상응하는 적정가보다 훨씬 낮은 수준으로 추락했으며, 이로 인해 1848년 영국의 수입 격감과 미국의 생산 감소가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그 결과 1849년에 이르러서야 면화 가격은 다시 등귀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현실은 가혹한 공급 위축과 수요 붕괴의 역학을 보여주었으나, 오브스톤은 여전히 국내에 화폐가 너무 많아 상품 가격이 지나치게 비싸졌다는 고정 관념에 매몰되어 있었다.

 

최근 면공업의 상황이 악화된 근본 원인은 원료 부족에 있지 않다. 원료 재고가 현저히 감소했음에도, 그 가격은 오히려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2002).’

 

와일리의 증언 (2002)처럼 당시 면공업의 악화는 단순히 원료 부족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원료 재고는 감소했으나 가격 자체가 이례적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는 국내 통화량이 과잉되어 상품 가격이 지나치게 높았다는 오브스톤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결국 가격 변동의 실질적 원인은 통화량의 경직된 증감이 아니라, 신용 붕괴와 그로 인한 시장의 실물적 정체에 있다.

 

오브스톤은 상품의 가격 (내지 가치)과 화폐의 가치 (이자율)를 자의적으로 등치시키는 오류를 범하였다. 이에 대해 리버풀의 상인 와일리는 제2026호 답변에서, 1844년 은행법의 정당성을 강변했던 18475월 당시 카드웰과 재무 장관 우드의 입장에 반박하며 통화주의 전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총괄적 평가를 내렸다.

 

이 통화주의는 화폐에 인위적으로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반면, 모든 실물 상품에는 파멸적일만큼 낮은 가치를 강요하는 속성을 지닌다.’ (이러한 정책적 기조는 일반적인 산업 및 상업 활동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특히 (1847) 사례에서 보듯, (대미 수출용 상품 구매를 위해 공업 도시에서 상인과 은행업자 앞으로 발행되던 통상적인) 4개월짜리 어음조차 막대한 손실 없이는 할인이 차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같은 해 1025일의 정부의 (은행법의 정지) 조치가 시행되어 어음 할인이 재개될 때까지, 실물 경제에서의 주문 이행은 극심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2097).

 

은행법의 일시 정지는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 경제 또한 구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난 (1847) 10월 당시 영국 상품을 취득하던 미국 구매자들은 주문량을 극도로 축소하였으며, 영국의 고금리 상황이 본국에 전달되자 새로운 주문을 전면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2102).’

 

다만 밀과 설탕의 경우, 통화적 요인보다는 수확 예상치나 막대한 재고량 등 품목 고유의 수급 조건을 바탕으로 가격이 결정되는 특수성을 보였다 (2134).’

 

당시 영국의 대미 채무는 위탁 상품의 강제 매각이나 연쇄적인 파산을 거쳐 파괴적인 방식으로 청산되었다 (2163).’

 

특히 184710월 증권 거래소의 이자율이 70%에 육박했다 (2196).’

 

이는 당시 금융 압박의 파괴적 수준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엥겔스: 이러한 파국은 1837년의 장기 공황과 1842년의 일반 공황을 거치면서도 과잉 생산의 위험성을 부정해 온 상공업자들의 이기적 맹목성에서 기인하였다. 속류 경제학자들의 허항된 장밋빛 전망과 결합된 이러한 집단적 판단 마비는 통화주의 학파로 하여금 그들의 가설을 국가적 규모에서 실천할 기회를 제공하였고, 그 결과 1844년과 1845년의 은행법이라는 모순적인 입법 체제가 구축되기에 이르렀다.

 

1844년 은행법은 잉글랜드 은행의 기능을 발권부와 은행부로 엄격히 분리하였다. 발권부는 1,400만 파운드의 국채 중심 보증 준비와 총 금속 준비 (이 중 은은 최대 1/4까지 허용)를 보유하며, 이 두 합계액에 상응하는 은행권을 발행한다. 발행된 은행권 중 시중에 유통되지 않은 분량은 은행부에 예치되어, 상시적인 거래를 위한 소액 주화 (1백만 파운드)와 함께 은행부의 현금 준비금을 구성한다. 발권부는 경제 주체들을 상대로 금과 은행권의 교환 업무만을 수행하며, 그 외 모든 금융 거래는 은행부가 전담한다.

 

1844년 은행권 발행권을 보유했던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사립 은행들은 그 발행 권한을 인정받았으나, 발행 규모는 엄격히 할당된 한도 내로 제한되었다. 개별 사립 은행이 발행을 중단할 경우, 잉글랜드 은행은 해당 할당액의 2/3에 해당하는 금액만큼 무보증 은행권을 추가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에 의거하여 잉글랜드 은행권의 무보증 발행 한도는 1892년까지 초기 1,400만 파운드에서 1,645만 파운드로 점진적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잉글랜드 은행의 금 준비금에서 5파운드의 금이 유출될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5파운드의 은행권이 발권부로 환수되어 폐기되며, 반대로 5소브린의 금화가 금 준비금에 유입될 때마다 새로운 5파운드 은행권이 유통 체계로 진입한다. 이는 은행권의 유통을 금속 유통의 법칙에 엄격히 종속시키려 했던 오브스톤의 이론적 이상이 실무적으로 구현된 형태다. 통화주의자들은 이러한 산술적 제어 방식을 발판 삼아 통화 가치의 안정성을 확보하면서, 경제적 파국인 공황을 영구적으로 방지할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현실적으로 잉글랜드 은행을 두 개의 독립된 부서로 분할한 조치는 이사회가 결정적인 위기 국면에서 은행의 가용 총자산을 유연하게 운용할 권한을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로 인해 발권부가 수백만 파운드 스털링의 금과 1,400만 파운드의 유가 증권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정작 실무를 담당하는 은행부는 파산 위기에 직면하는 모순적 사태가 가시화되었다.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은 공황기마다 반복되는 격심한 해외 금 유출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대외 결제를 위한 금 유출은 주로 잉글랜드 은행의 금 준비금에 의존하여 보존되어야 했으나, 발권부의 엄격한 분리로 인해 은행부는 가용 자산의 접근이 차단된 채 급격한 유동성 고갈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해외로 5파운드의 금이 유출될 때마다 국내 유통 영역에서 동일한 액수의 은행권이 회수됨에 따라, 유통 수단의 공급 그것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에 오히려 축소된다. 결과적으로 1844년의 은행법은 공황 발발 시 사업계 전체로 하여금 은행권 퇴장 현상을 자극하여 위기를 심화시키고 가속화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이 법은 화폐 공급이 급감하는 국면에서 지불 수단에 대한 수요를 인위적으로 팽창시키면서 이자율을 살인적인 수준까지 끌어올린다. 이처럼 1844년 은행법은 공황을 제어하기는커녕 격화시켜, 실물 경제 전반 또는 법령 자체 중 하나가 파괴되어야만 하는 극단적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실제로 18471025일과 18571112, 공황이 이러한 파국적 절정에 도달했을 때 정부는 1844년의 은행법 효력을 정지하고 잉글랜드 은행의 은행권 발행 제한을 해제하면서 위기를 타개하였다. 1847년의 경우, 우량 유가 증권을 담보로 은행권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주관적 확신만으로도 퇴장되었던 400-500만 파운드의 자금이 즉시 시장으로 환류되었다. 또한 1857년에는 법정 한도를 초과하여 발행된 은행권이 100만 파운드 미만에 불과하였고 그 기간 역시 매우 단기적이었음에도, 법 정지 조치 만으로도 시장의 공포를 진정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1844년 은행법의 기저에는 19세기 초반 약 20년간 지속된 잉글랜드 은행의 태환 정지와 그에 따른 은행권 가치 하락의 잔재가 깊게 각인되어 있다. 이 법안은 은행권에 대한 경제 주체들의 신용이 상실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과도하게 체현하고 있으나, 이는 실제 시장의 역학에 대조해 볼 때 지나친 우려에 불과하다. 이미 1825년 공황 당시, 통용이 정지되었던 구권 1파운드 은행권의 퇴장분을 재발행하는 것만으로도 위기가 수습되었던 사례는 매우 시사적이다. 이는 전반적이고 격심한 불신이 팽배한 시기조차 잉글랜드 은행권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음을 뒷받침한다.

 

이처럼 국가 전체의 신용이 지지하는 가치 표상으로 잉글랜드 은행권은 그 자체로 공고한 지위를 점하고 있으며, 따라서 은행법이 상정하는 신용 붕괴의 위협은 역사적 실재와 배치되는 가공의 우려라 할 수 있다.

 

이제 1844년 은행법의 영향력에 관한 주요 증언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은 해당 은행법이 과잉 투기를 억제하는 데 기여했다고 확신하였다. 공교롭게도 그가 이와 같은 안이한 견해를 피력한 시점은 대공황이 발생하기 불과 4개월 전인 1857612일이었다. 당시 그는 은행 이사들과 상인 일반상업 공황의 본질과 과잉 투기가 초래하는 막대한 손실을 이전보다 훨씬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며 이를 치하하였다. (은행법, 1857, 2031).

 

밀의 이론적 가설에 따르면, 1파운드권 은행권이 제조업자 등의 임금 지불용 대부로 발행될 경우, ‘해당 은행권은 소비 주체들의 수중에 들어가 실질적인 상품 수요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필연적으로 수요 팽창을 유발하며, 결과적으로 상품 가격을 일시적으로 등귀시키는 경향을 띠게 된다.’는 것이 그의 논리적 요지였다. (2066).

 

밀의 주장은 몇 가지 근거 없는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 그는 제조업자가 임금을 금 대신 지폐로 지급할 때 더 높은 임금을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인가. 제조업자가 100파운드 고액권을 대부받아 이를 금으로 환전하여 임금을 지급한다면, 그 임금이 1파운드 소액권으로 직접 지급될 때마다 상품 수요를 덜 형성한다고 믿는 것인가.

 

또한 그는 특정 광산 지역에서 임금이 실제 지방 은행의 은행권으로 지급되며, 여러 명의 노동자가 5파운드권 한 장을 공동으로 수령하는 관행이 존재함을 간과하고 있다. 이러한 지급 방식의 차이가 실질적인 수요 증대를 유발한다는 논리는 성립하기 어렵다. 결국 그의 가설은 은행업자가 소액권으로 대부할 때 고액권보다 더 용이하거나 더 막대한 규모의 자금을 공급하게 된다는 자의적인 판단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엥겔스: 1파운드 은행권에 대한 밀의 이례적인 우려는 그의 경제학 체계 전반이 모순을 개의치 않는 절충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설명된다. 그는 투크의 견해를 상당 부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상품 가격이 유통 화폐량에 규정된다는 화폐수량설의 신념을 고수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1파운드 은행권이 발행될 때 그에 상응하는 소브린 금화가 잉글랜드 은행의 준비금으로 환류된다는 화폐 유통의 기본 원리를 신뢰하지 않는다. 대신 은행권의 추가 발행이 유통 수단의 양적 팽창과 그에 따른 화폐 가치 하락을 초래하여, 결국 상품 가격을 인상시킬 것이라는 막연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밀이 제기한 모든 우려의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이론적 모순이 자리 잡고 있다.)

 

투크는 상업 불황, 1848-1857에서 잉글랜드 은행의 부서 분할과 은행권 태환 보증을 위한 과잉 조치의 폐해를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1847년 발생한 극심한 이자율 변동은 1837년이나 1839년의 사례와 대조적이며, 이는 전적으로 잉글랜드 은행이 발권부와 은행부로 이원화된 구조적 결함에 기인한다 (3010).

 

은행권의 근본적인 안전성은 1825년은 물론 1837년과 1839년의 위기 속에서도 결코 훼손된 적이 없다 (3015).

 

특히 1825년의 금 수요는 대외 결제용이 아니라, 지방 은행권에 대한 불신으로 발생한 유통 공백을 메우기 위한 내부적 필요에 불과하였다. 이 공백은 1797년 발행되고 1821년 중지되었다가, 1825년 말 유통 수단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잉글랜드 은행이 1파운드권 발행을 재개하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금으로 보전되었을 뿐이었다 (3022).

 

182511월과 12월에는 실질적인 수출용 금 수요는 전무하였다 (3023).

 

잉글랜드 은행에 대한 국내외 불신 문제를 고찰할 때, 국채 이자나 예금의 지불 정지는 은행권의 태환 정지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사안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3028).

 

상업 공황기에 은행권의 태환성을 위협할 만한 제반 사정들이 반드시 새로운 심각한 곤란을 야기할 것이라는 주장은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3035).’

 

‘1847년 위기 당시에 발권부의 은행권 발행을 탄력적으로 증대시켰다면, 이는 1825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오히려 잉글랜드 은행의 금 준비금을 보충하고 안정화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3058).’

 

뉴마치는은행법, 1857위원회에 출석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며 은행법의 구조적 결함을 지적한다.

 

잉글랜드 은행을 두 부서로 분할하고 그에 따라 준비금을 이원화한 조치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낳았다. 이 나라의 상업과 직결된 은행 업무 전반이 종전 준비금의 절반에 불과한 자금으로 운영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할 구조로 인해 은행부의 준비금이 미세하게 감소하기만 해도 잉글랜드 은행은 즉각적으로 할인율을 인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준비금의 인위적인 분할이 할인율의 빈번하고도 발작적인 변동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 (1357).’

 

실제로 1844년 은행법 발효 이후 18576월까지 할인율 변동 횟수는 약 60회에 달하였다. 이는 동일한 기간인 1844년 이전의 변동 횟수가 12회 정도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할 때 이례적으로 높은 수치다 (1358).’

 

1811년부터 잉글랜드 은행 이사 및 총재를 역임한 파머의 상원 위원회 증언 (상업 불황, 1848-1857)1844년 은행법의 실효성에 대해 매우 유의미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182512월 잉글랜드 은행의 금 준비금이 약 110만 파운드에 불과했던 당시, 현행 은행법 (1844년 은행법)이 존재했더라면 잉글랜드 은행은 필연적으로 파산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잉글랜드 은행은 매주 500-600만 파운드의 은행권을 과감히 발행하면서 공황의 충격을 완화할 수 있었다 (828).’

 

‘1837228일 역시 은행법이 적용되었다면 체제가 붕괴되었을 첫 번째 시기 (182571일 이래)로 꼽힌다. 당시 금 보유액이 390-400만 파운드 수준이었음을 고려할 때, 법정 산식에 따른 은행권 준비액은 고작 65만 파운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동성 부족 상태는 1839년에도 재차 발생하여, 79일부터 125일까지 지속되었다 (825).’

 

당시 은행권 준비액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95일에는 준비액이 합계 20만 파운드가 부족한 상태였으며, 115일에 이르러서는 그 부족액이 약 100-150만 파운드까지 확대되었다 (826).’

 

특히 1844년의 은행법은 1837년 당시 잉글랜드 은행이 수행했던 대미 무역 금융 지원을 원천적으로 차단했을 공산이 크다 (830).’

 

당시 미국과 거래하던 주요 상사들이 연쇄 도산 위기에 처했으나, 잉글랜드 은행의 구제 금융이 없었다면 생존할 수 있었던 상사는 극소수에 불과했을 것이다 (831).’

 

비록 1837년의 화폐 핍박이 미국 무역에 국한되어 1847년의 전면적 공황과는 성격이 달랐다 (836).’

 

그 위기 타개책을 둘러싼 정책적 논쟁은 매우 치열했다.

 

18376월 잉글랜드 은행 이사회 내부에서는 이자율을 인상해 상품 가격을 강제로 인하하면서 화폐 가치를 높이고 상품 가치를 떨어뜨려 해외 채무를 변제해야 한다는 이른바 원칙론적의견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838).’

 

잉글랜드 은행의 실질적 금 보유액이라는 자연적 한계 대신, 1844년 은행법이 도입한 인위적 제한은 불필요한 경제적 곤란을 야기하며 상품 가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향이 있다 (906).’

 

현행법 체제 아래에서는 잉글랜드 은행의 금 준비액을 950만 파운드 이하로 감축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되며, 이러한 경직성은 물가와 신용 전반에 강한 압박을 가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압박은 환율을 인상시켜 금 수입을 강제로 증대시키면서 그만큼 발권부의 금 보유액을 인위적으로 보충하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968).’

 

또한 잉글랜드 은행은 현재의 제약으로 인해 환율 안정에 필수적인 은을 적시에 운용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996).’

 

잉글랜드 은행의 은 준비를 전체 금속 준비의 1/5로 제한하는 규정은 그 정책적 목적조차 불분명하며, 오히려 통화 운용의 유연성만을 저해하고 있다 (999).’

 

해당 규제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화폐 가치를 인위적으로 높이는 데 있었다. 통화주의적 기조와 별개로, 잉글랜드 은행의 부서 분할이나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 은행들에 대한 초과 발행분 금 보유 강제 조치는 모두 동일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국가 전체의 금속 준비가 분산됨에 따라, 불리한 환율을 시정해야 할 잉글랜드 은행의 중앙집권적 역량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자율의 과도한 등귀를 유발하는 핵심 기제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금 준비 없이는 1,400만 파운드를 초과하는 은행권 발행을 금지한 규정이다.

 

둘째, 은행부가 일반 시중 은행처럼 화폐 과잉기에는 이자율을 인하하고 화폐 부족기에는 이자율을 인상하도록 강제한 구조적 설정이다.

 

셋째, 대륙 및 아시아와의 환율 시정에 필수적인 은 준비액을 제한한 조치다.

 

마지막으로, 수출용 금 수요가 전무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은행들에 대해 실효성 없는 은행권 태환성 유지를 구실로 금 보유를 강요한 규정 등이다. (이는 실상 허구에 불과한 명분일 뿐이었다.)

 

실제로 1844년 은행법은 1857년 스코틀랜드 은행들에 대한 최초의 금 인출 소동 (뱅크런)을 야기하는 도환선이 되었다.

 

또한 현행 은행법은 경제적 영향이 판이한 해외 금 유출과 국내 금 유출을 구분하지 않은 채 시장 이자율의 극심하고도 상시적인 변동을 초래하고 있다.

 

은의 운용과 관련하여 파머는 잉글랜드 은행이 은행권으로 은을 매입할 수 있는 시점은 오직 환율이 영국에 유리하여 은의 과잉이 존재하는 경우로 한정된다고 지적하였다 (992, 994). 그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금속 준비의 상당 부분을 은으로 보유하는 유일한 목적은 환율이 영국에 불리한 시기에 대외 지불을 원활히 하기 위함이다 (1003).’

 

은은 세계 전역에서 화폐로 통용되므로, 대외 지불에 가장 적합한 상품이며, 최근 금 본위제를 채택한 미국은 극히 제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1004).’

 

파머의 견해에 따르면, 불리한 환율로 인해 금이 해외로 유출되는 상황이 아닌 한, 잉글랜드 은행은 경제 핍박기에도 이자율을 종전 수준인 5% 이상으로 인상할 필요가 없었다. 1844년 은행법의 제약이 없었다면, 모든 우량 어음은 종전과 마찬가지로 적정 이자율 하에서 아무런 곤란 없이 할인되었을 것이다 (1018-1020).

 

그러나 1844년 은행법이 강제하는 구조와 184710월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잉글랜드 은행이 설정하는 이자율이 아무리 가혹하더라도 신용 있는 상사들은 채무 이행를 위해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1022).

 

이와 같은 고금리의 유도가 바로 해당 법령의 본질적인 목적이었다. 파머는 귀금속에 대한 대외 수요가 이자율에 미치는 영향과, 국내 경제의 불신이 팽배한 시기에 잉글랜드 은행의 대규모 금 인출 사태를 방어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이자율을 인상하는 행위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1029).’고 강조한다.

 

‘1844년 은행법이 도입되기 이전에는 환율 여건이 유리하고 공황의 전조가 보일 때 은행권을 무제한으로 발행하면서 유동성을 공급하였으며, 오직 이러한 대응만이 경제적 핍박 상태를 실효적으로 완화할 수 있었다 (1023).’

 

39년간 잉글랜드 은행 이사직을 수행한 파머의 증언에 이어, 1801년 이래로 스푸너 애트우드 상사의 공동 출자자로 활동해 온 사립 은행업자 트웰즈의 증언은 더욱 구체적이다.

 

그는 은행법, 1857위원회의 증인 중 국내 경제의 현실적 모순을 간파하여 공황의 도래를 예측한 유일한 인물이었으나, 이론적으로는 버밍엄 학파의 소실링론자이자 애트우드 형제의 추종자라는 한계를 지닌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CW 29: 319 참조).

 

질문자: 증인은 1844년의 은행법이 어떻게 작용하였다고 보는가.

 

트웰즈: 은행업자의 처지에서 말한다면, 그 법은 아주 훌륭하게 작용하였다고 말하고 싶다. 그 법은 모든 종류의 은행업자와 (화폐) 자본가에게 큰 이득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법은 성실하고 근면한 사업가들에게는 매우 나쁘게 작용하였다. 그들은 사업을 확신을 가지고 운영하기 위해 할인율의 안정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 법은 화폐 대부를 (은행업자에게만) 매우 유리한 사업으로 만들었다 (4488).’

 

트웰즈는 1844년 은행법의 작용에 대해 은행업자의 관점에서 극히 냉소적인 평가를 내린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해당 법안은 화폐 자본가와 은행업자들에게는 막대한 이득을 안겨준 훌륭한장치였으나, 사업의 확신을 위해 할인율의 안정을 필요로 하는 성실한 실업가들에게는 치명적인 악법으로 작용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법은 생산적 투자보다 화폐 대부 자체를 훨씬 유리한 사업으로 변질시켰다 (4488).

 

질문자: 1844년의 은행법은 런던의 주식 은행들로 하여금 주주들에게 20-22%의 배당을 보장하는가.

 

트웰즈: 어제 한 주식 은행은 18%를 배당하였고, 다른 한 은행은 20%를 배당한 것 같다. 그러니 그들이 1844년의 은행법을 매우 강력하게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 (4489).’

 

실제로 이 시기 런던의 주식 은행들은 주주들에게 18%에게 20%를 상회하는 고율의 배당을 시행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초과 이득 구조로 인해 은행권은 1844년 은행법을 강력히 지지할 수밖에 없는 이해관계에 놓여 있었다 (4489).

 

반면, 대자본을 보유하지 못한 소규모 사업가와 상인들은 극심한 경제적 압박에 직면하였다. 이들의 영세한 인수 어음 (20-100파운드 규모) 중 상당수가 결제되지 못한 채 부도로 처리되어 지방 각지로 반환되는 현상은, 당시 소상공인들이 처한 파괴적인 경제적 위기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지표가 되었다 (4490).’

 

트웰즈는 제4494호에서 당시 실물 경기가 심각한 침체 국면에 진입했음을 강조한다. 그의 증언은 타인들이 간과했던 공황의 잠재적 파괴력을 정확히 간파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런던의 주요 상품 거래소인 민싱 레인의 상황에 대해, 그는 상품의 명목 가격은 유지되고 있으나 실제 거래는 전무한 상태이며 그 어떤 가격으로도 매각이 무망한 마비 상태에 빠졌다 (4494).’

 

이러한 유동성 고갈의 전형적인 사례로 그는 한 프랑스 상인의 거래를 제시한다 (4495).

 

해당 상인은 3,000파운드 상당의 상품을 지정가에 판매하고자 민싱 레인의 중개인 (브로커)에게 위탁했으나, 시장 침체로 인해 지정가를 확보할 수 없게 된다. 자금 압박을 받던 상인은 상품을 담보로 중개인을 지급인으로 하는 3개월짜리 환어음을 발행하여 1,000파운드를 선대받는다. 그러나 3개월 뒤 어음의 만기가 도래했음에도 상품은 여전히 매각되지 않고, 중개인은 3,000파운드라는 충분한 담보물을 보유하고도 이를 현금화하지 못한 채 어음 결제 불능이라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이처럼 실물 자산의 유동화가 차단되면서 개별 경제 주체들이 연쇄적으로 파멸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공황의 기제가 가시화되었다.

 

국내 경기가 극심한 침체에 빠질 때 모순적으로 대규모 수출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4496).’

 

질문자: 국내의 소비가 감소하였다고 판단하는가.

 

트웰즈: 매우 크게. 거대하게. 감소하였다. 이 파괴적인 위축은 현장에서 인민들을 직접 만나는 소매상들이 누구보다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다 (4497).’

 

그는 현재 국내 소비가 소매 시장에서 체감될 만큼 거대하게 위축되었다고 진단한다 (4497).

 

비록 통계상 수입액이 크게 나타나고 있으나, 이는 왕성한 소비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판매되지 못한 채 창고에 쌓여 있는 재고의 증대에 불과하다. 앞서 언급한 3,000파운드 규모의 수입 상품이 시장에서 매각되지 못하고 묶여 있는 사례가 이를 뒷받침한다 (4498).’

 

질문자: 화폐가 비쌀 때, 곧 금리가 치솟고 유동성이 고갈될 때 상대적으로 자본의 가치는 싸진다고 보는가.

 

트웰즈: 그렇다. 화폐의 희소성이 극에 달할수록, 실물 자본은 제값을 받지 못한 채 헐값에 던져지기 마련이다 (4514).’

 

특히 그는 화폐가 앙등할 때, 자본은 폭락한다고 증언한다 (4514).

 

트웰즈의 증언은 높은 이자율과 자본의 가치 (가격)를 동일시하는 오브스톤의 통화주의적 견해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화폐 대부 비용인 이자율이 치솟는 공황기에, 정작 실물 자본과 상품의 가치는 파멸적인 수준으로 하락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사업의 운영 실태에 관해 트웰즈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많은 경제 주체들이 자기 자본의 한계를 도외시한 채 막대한 규모의 수출입 거래를 강행하고 있다. 이들은 단 한 번의 운수 좋은 거래로 거액의 수익을 올려 모든 채무를 청산하겠다는 투기적 동기에 의존하여 사업을 지속한다. 비록 한 차례의 선적에서 20% 내지 40%에 달하는 막대한 손실을 보더라도, 차기 거래에서 이를 만회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 하에 무리한 행보를 이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쇄적 도박이 실패로 귀결될 경우, 해당 상사들은 단 한 푼의 자산도 남기지 못한 채 처참하게 파산하며, 최근 이러한 사례는 빈번하게 목격되고 있다 (4616).’

 

지난 10년간의 저금리 기조는 은행업자에게 표면적으로는 불리해보일 수 있으나, 실질적인 이윤 구조는 이전보다 공고해졌다. 은행권의 과잉 발행으로 이자율이 낮아지면 예금 유입량이 증대되며, 반대로 이자율이 고공 행진할 때는 은행 측에 직접적인 폭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4791).’

 

, 저금리 시기에는 화폐 수요의 증가로 대부 규모를 확장하여 수익을 보전하고, 고금리 시기에는 대부 금리와 예금 금리의 격차 (예대 마진)를 인위적으로 확대하면서 정당한 수준 이상의 이익을 취득하게 된다 (4794).’

 

결과적으로 1844년 은행법이 초래한 이자율의 변동성은 은행업자들에게 어떤 국면에서든 초과 이윤을 보장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4794).

 

이미 본 바와 같이, 모든 금융 전문가는 잉글랜드 은행권에 대한 경제 주체들 간의 신뢰가 확고부동하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그럼에도 1844년 은행법은 약 900-1,000만 파운드에 달하는 막대한 금을 잉글랜드 은행권 태환 보증이라는 명목하에 절대적으로 동결시키고 있다. 이러한 금 준비금에 대한 물신주의적 집착은 이전의 전형적인 화폐 퇴장자들보다 더욱 극단적인 양상을 띤다. 리버풀의 브라운은 당시 발권부가 보유했던 금속 준비의 비경제성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상업 불황, 1848-1857, 2311).

 

해당 자금은 은행법을 위반하지 않고서는 단 한 푼도 유통시킬 수 없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바다에 내버린 것과 다를 바 없는 무용지물이었다 (2311).’

 

런던의 근대적 건축업 실태를 증언했던 건축업자 캡스 (권 제12)1844년 은행법의 본질에 관해 다음과 같이 폭로한다.

 

질문자: 그렇다면 전체로 보아 현재의 제도 (1844년 은행 입법)는 산업의 이윤을 주기적으로 고리대금업자의 주머니로 옮겨놓기 위한 매우 교묘한 제도라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캡스: 그렇게 생각한다. 적어도 건축업에서는 정확히 그렇게 작용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5508).’

 

현행 은행 입법 제도는 산업 자본이 창출한 이윤을 주기적으로 고리대금업자의 수중으로 이전시키기 위해 고안된 매우 치밀한 기제다. 적어도 건축업 분야에서 이 법은 명백히 그러한 약탈적 방식으로 작용해 왔다 (5508).

 

이와 더불어 1845년 제정된 은행법은 스코틀랜드의 은행들까지 잉글랜드와 비슷한 제도적 틀 안으로 편입시켰다. 이에 따라 스코틀랜드의 개별 은행들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법적 발행 한도를 초과하는 은행권에 대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금을 보유해야만 하는 제약에 직면하게 되었다.

 

1845년 은행법이 초래한 실질적인 영향은상업 불황, 1848-1857에 수록된 증언들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스코틀랜드 은행 이사인 케네디의 증언.

 

질문자: 1845년의 은행법 이전에 금의 유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스코틀랜드에 있었는가.

 

케네디: 전혀 없었다 (3375).’

 

질문자: 그 뒤 (법 제정 이후) 금의 유통이 증가되었는가.

 

케네디: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금을 싫어한다 (3376).’

 

1845년 은행법 제정 이전 스코틀랜드에는 금 유통이라 부를 만한 현상이 전무하였으며, 법 제정 이후에도 경제 주체들 간의 금 기피 성향으로 인해 실질적인 금 유통의 증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3375, 3376).

 

1845년 이래 스코틀랜드 은행들이 의무적으로 보유해야 하는 약 90만 파운드의 금은 어떠한 생산적 기능도 수행하지 못한 채, ‘자본의 상당 부분을 무익하게 흡수하는 폐단만을 낳고 있다 (3450).’

 

유니언 뱅크 오브 스코틀랜드의 이사 앤더슨의 증언.

 

질문자: 스코틀랜드의 은행들이 잉글랜드 은행에 금을 요구한 유일한 이유는 외환 부족 때문이었는가.

 

앤더스: 그렇다. 그리고 이것은 에든버러에 금을 보유하는 것만으로는 완화되는 것이 아니다 (3588).’

 

스코틀랜드 은행들이 잉글랜드 은행에 금을 요구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대외 외환 부족에 기인하며, 이는 에든버러에 금을 물리적으로 비축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3588).

 

또한 스코틀랜드의 은행들은 잉글랜드 금융권 (구체적으로는 잉글랜드의 사립 은행들)에 이전과 동일한 규모의 유가 증권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잉글랜드 은행으로부터 금을 인출할 수 있는 실질적인 영향력은 이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3590).’

 

결국 1845년 은행법은 유통 구조의 개선 없이 자본의 유동성만을 동결하는 형식적인 규제에 불과하다.

 

끝으로, 이코노미스트의 윌슨이 집필한 논설에서 1845년 은행법의 실질적인 폐단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본래 스코틀랜드의 은행들은 유휴 자금을 런던 대리점에 예탁하고, 대리점은 이를 다시 잉글랜드 은행에 예탁하는 체계를 유지해 왔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스코틀랜드 은행들은 예치금 한도 내에서 잉글랜드 은행의 금속 준비를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었으며, 대외 지불이 필요한 시점마다 금은 최적의 장소인 런던에 상시 대기 상태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45년 은행법은 이 경제적인 체계를 파괴하였다.

 

해당 법안의 영향으로 인해 최근 잉글랜드 은행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잠재적인 수요에 대비한다는 명목하에 대규모 금화 유출이 발생하였으나, 정작 스코틀랜드 현지에서 그러한 수요가 실현된 적은 없다. 결과적으로 막대한 양의 금이 스코틀랜드에 무익하게 묶여 있게 되었으며, 나머지 금 자산은 런던과 스코틀랜드 사이를 의미 없이 왕복하는 비생산성을 초래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은행들은 은행권 수요 증가가 예상될 때마다 런던에서 금 상자를 수송해 오지만, 해당 시기가 지나면 상자를 개봉조차 하지 않은 채 다시 런던으로 반송하는 소모적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 18471023).

 

(엥겔스: 은행법의 입안자이자 통화주의의 거물인 은행업자 사뮤엘 존스 로이드 (일명 로드 오브스톤)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리를 견지한다.

 

그는 상업 불황에 관한 1848년 상원 위원회에서 가용 자본의 부족으로 발생하는 화폐 핍박과 고금리 현상은 은행권의 추가 발행만으로는 결코 완화될 수 없다 (1514).’고 거듭 강변하였다. 그러나 이는 18471025, 정부가 은행권 발행 증액을 허가한 조치만으로도 공황의 격렬함이 즉각 진정되었던 실증적 사실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오브스톤은 여전히 이자율의 급등과 제조업의 불황은 상공업에 투입될 물적 자본이 감소함에 따라 나타난 필연적 결과 (1604).’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시 수개월간 지속된 제조업의 불황이 증명하는 실체는 그의 주장과 다르다. 실제로는 실물 상품 자본이 창고에 묶여 판매 불능 상태였으며, 이로 인해 과잉 생산을 방지하고자 소재적 생산 자본이 전면적 또는 부분적으로 유휴화되는 공급 과잉의 국면이었기 때문이다.

 

오브스톤은 1857년 은행법 위원회에 출석하여 다음과 같이 자찬한다. ‘1844년 은행법의 원칙을 엄격하고 즉각적으로 준수한 결과, 모든 경제 질서는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으며 화폐 제도는 확고부동한 안정성을 확보하였다. 이 나라의 번영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본 법의 현명함에 대한 국민적 신뢰 또한 날로 증대하고 있다. 위원회가 은행법의 건전성과 유익한 결과에 대한 실례를 요구한다면, 그 대답은 자명하다. 당신의 주위를 살펴보라. 작금의 사업 상태와 모든 계급이 누리는 부와 번영, 그리고 국민적 만족도를 목도하라. 이를 목도한 후에야 위원회는 이토록 흡족한 결과를 도출한 법의 존속 여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은행법, 1857, 4189).

 

그러나 1857714일 위원회에서 행한 오브스톤의 이러한 열렬한 찬사는 불과 몇 개월만에 냉혹한 현실에 직면한다. 같은 해 1112, 영국 정부는 파국으로 치닫는 경제 상황에서 최소한의 자산이라도 보전하기 위해 기적을 행한다1844년 은행법의 효력을 전격 정지시키는 서한을 잉글랜드 은행 이사회에 송부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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