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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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레오는, 강제수용소로의 이유를 "돌에도 눈이 달린 고무같은 소도시를 벗어나고 싶다"는 자의적 의지로 시작하고 있다. 헤르타 뮐러로 인해 소설화 된 오스카 파스티오르의 수용소 체험담은 여전히 오스카 파스티오르의 언어로 쓰여있다. 수용소에서 돌아 온 레오의 가방안에 담긴 배고픔의 언어들은 헤르타 뮐러라는 여과기를 거쳐도 여전히 물리적  손상을 입지 않았다. 그리고 여과기를 거친 배고픈 연대기는 시詩를 걸치고 있다. 수용소에서의 생활에 대한 소설적 회고록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감상적 사색이 가능한 이유이기도하다.

할머니의 한 마디 "너는 돌아올 거야",로 인해 그는 돌아왔으므로 말 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는 걸.  수용소에서 ’배고픈 천사’의 적수가 될 수 있게 했던 레오의 상상 언어들은,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모든 상황들에 대한 삽질이었다. 그는 자신을 살리기도 할 수많은 말들에 둘러싸여 있기를 원했고, 그렇게 했다. 그러나 가장 아래에 숨겨둔 마지막 ’인간성’마저도, 배고픈 천사는 상처를 내고만다. 누군가의 죽음에도 슬픔이라는 감정을 이끌어내지 못할 만큼, 레오의 언어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지 못한다. 인간 감정의 마비를 가져 온 시대적 아픈 현실은 오로지 인간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내 배고픔은 심장삽을 필요로 한다. 나는 심장삽이 내 연장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심장삽은 내 주인이다. 
연장은 나다. 심장삽은 나를 지배하고 나는 굴복한다. 나는 어쩔수 없이 삽을 좋아해야 했다. 나는 비굴하다." /96 



나는 레오의,  이 고백이 무척 아팠다.  저항을 허락하지 않는 배고픔에 굴복당하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비굴하다는 레오의 고백이 가슴 아프다. 인간을 굴복시키는 수많은 다른 모습의 ’배고픔’들. 우리는 그것들에 항거한다. 스스로 수용소 생활에서 돌아 온 레오가 평생 핥아내도 아물지 않던 상처. 인간 내면을 잠식하며 사고성을 박탈함과 동시에 감정을 부식시키는 것에 대한 굴복. 레오의 굴복을 인정할 수 밖에 없어서 고통스럽다. 이제는 잊혀졌거나, 이 시대 어디에도 닿아있지 않은 연장선상의 이 이야기를 우리는 알아야한다.   왜? 다시 시작해야하니까. 굴복에 의한 자괴감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하기 때문이다. 기억을 깨고 나와야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입기 위해 묵은 것을 벗어 던져야 하기 때문이기도하다.  우리가 ’배고픔’ 과 이외의 것들에게 굴복당했던 기억을 뽑아내고 새로운 희망을 다시 심어야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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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칼랭
로맹 가리 지음, 이주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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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너무나 현실적으로 피부를 긁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아니, 1974년의 그로칼랭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이미터 이십센티미터짜리 비단뱀과의 동거가 그리 비현실적이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단순히 시간적 괴리감에서 오는 현실, 비현실감이 아니라는 점에서,  감정의 폭발적 반응에 비해 이성이 합리적 해석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무슨 말이 이렇게 꼬이는걸까. 이 책을 읽는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두 번을 연거푸 읽는대도 그랬다. 마침표와 쉼표의 경계까지 구분지어가며 읽는대도 분명 빠르게 읽혀졌고 지루하거나 난해하지 않았다. 최소한 로맹 가리의 언어들은 순진하리만큼 정직했다. 그렇지만  반복적으로 문장을 되뇌일때마다 매번 다른 글자들의 조합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 번의 해석이 탈피하고 또 다른 글자의 조합을 이해했다, 싶으면 또 허물을 벗어 던진다. 한 마디로 말해, 느낌을 표현하기가 까탈스럽고 정리가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로맹 가리 교주를 신봉하는 장 프랑수아 앙구에의 고무적인 선동(?)과 지나치리만큼 친절한 작품 해설이 소설보다 더 소설스럽게 구성되어 있다. 느낌을 정리하고 말 것도 없을만큼, 내가 읽은 그로칼랭에 선명한 종지부를 대신 찍어주었다. 이게 문제다. 소설의 이해를 위해 읽었던 머리말이, 뱀의 머리가 되어버려서 몸뚱아리를 지 맘대로 흔들어 대는 것 말이다. 서론이 길다. 뜸을 오래 들인탓에 밥이 눌렀다. 그러나 덕분에 눌린 누룽지가 아주 그럴싸한 맛이 나는게 와드득거린다. 그럼 이쯤에서 누룽지 얘기를 해 볼까.

쿠쟁은 그로칼랭(열렬한 포옹이라는 뜻)을 통해 자신의 지독한 외로움을 해결받고자 한다. 쿠쟁이 반려동물로 비단뱀을 선택한 이유는 책에 이러쿵저러쿵 써있다. 그러나 내 개인적 견해는, 변화를 갈망하는 자신의 탈피를 대신해 줄 대물로서의 선택이 아니었나싶다. 그것은 자신의 방황하는 희망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쿠쟁이 말했듯, 희망은 공포와 동행한다. 비단뱀을 선택함으로 쿠쟁이 감수해야 했던 것은 공포다.  물론 생태학적 외관상의 혐오스런 공포가 아님을 말해둔다. 비단뱀의 먹이를 해결하는 것과 그와의 동거로 인해 빚어지는 사회적 조롱과 편견에 대한 불합리한 시선에 대한 공포다. 그러나 쿠쟁은 그로칼랭을 통해 인간 세상을 다시 본다. 아니, 그로칼랭이 되어 인간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로칼랭이 됨으로써 인간 쿠쟁을 벗어던진다고 볼 수 있다.

로맹가리는 쿠쟁의 입을 통해 "변신은 내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가장 아름다운 일" 이라고 내뱉는다. 앞에서도 말했듯 그렇기에 탈피동물을 반려동물로 선택했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러나 작가 로맹가리는,  ’용감’을 필요로 하는 변신을 한다. 자기 자신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그는 에밀 아자르를 통해 변신을 꾀하고 있다. 물론 비난의 총대도 함께 건냈다. 그로칼랭으로의 생태학적 변이가 포함되고 아니고간에 세간의 오인 소지를 피하기 위해 이 작품을 고아로 만들어 버린 오류가 범해진 것은 아닐까. 로맹가리가 이 작품을 통해 완전한 변신이 가능했는지, 아니면  또 하나의 탈피에 불과했는지를 확인하기위해서라도 로맹 가리의 이전 작, <하늘의 뿌리>를 읽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다시 본론으로,


"그들은 내가 외부의 결핍 때문에 괴로워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내부의 잉여 때문에도 괴롭다." /164   

  
쿠쟁의 변신을 종용하는 내부적 소용돌이의 원인은 ’잉여’다. 잉여의 괴로움은 여지껏 건재하다.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면서, 두루 여행을 다니며 경험을 쌓아가며 우리는 축적한다. 끊임없는 축적이 이미 도달을 지나 잉여의 고통을 수반함에도 우리는 계속 쌓아가기만 한다. 그것들은 비대한 몸집으로 오히려 스스로를 덮치기에 이르른 것이다.  코르셋을 단단히 조여 비대해진 몸을 잘록하게 감추려는 거짓처럼,  두 팔이 있는 것처럼 속이는 것은,  인간의 옷을 입고 행세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인간이 거짓과 위선의 옷을 입고 자신을 숨기는 일에 얼마나 숙련되어 있는지의 조롱이다. 철저히 자기 자학적이다. 왜 이런 결말에 이른 것일까. 본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론 지금 입고 있는 모든 형태의 옷들이 불편하게, 과장되게, 혹은 부당하게 느껴질 때가 있음에도 쉽게 벗어 던질 수 없을 때, 그때가 정말 괴롭다. 그래서 내 안에 축적된 괴로움은 벗어날 구멍이 없다.  이 작품에서 쿠쟁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외로움의 극복이 아니다.  회복이다. 파괴된 자신의 세계를, 벗어 던진 허물의 일부를 되찾고 싶은 것이다. 궁극적 변신 말이다.  국한된 안간 사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자신만의 사고적 공간을 자유롭게 부유하는 것, 나 또한 두 팔이 없어도 자유로울 수 있는 그로칼랭이고 싶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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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강탈자 - 당신의 심장은 나의 것
딘 R. 쿤츠 지음, 김진석 옮김 / 제우미디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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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과 함께 스릴러 소설의 양대 산맥’ 이라구? 누구? 딘 쿤츠가?
딘 쿤츠의 작품은 처음이다. 그래서 다른 작품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심장강탈자>에 붙이기에는 과분한 수식어다. 이 작품에 국한된 것이라고 분명히 한다. <살인예언자> 나 <검은 비밀의 방> 은 그때 가서 얘기 할 일.

 제목이 너무 많은걸 얘기해 버렸다. 표지도 덩달아.
주인공 라이언은 처음부터 심장 이상을 호소한다. 그리고 어줍잖은 상상력을 발휘해 공포를 쥐어짠다. 사실 하나도 공포스럽지도 않을 뿐더러 그의 히스테리컬한 모습에 은근히 짜증스러웠다. 사탕 달라고 보채는 아이처럼 자꾸 봐달란다.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주위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가며 자신의 심장 질환이 약물 중독이니, 독살 음모니, 하며 떠들어댄다. 아...이것도 눈 뜨고 못 봐주겠는데 오자는 왜 그리 많은지. 몇 군데 체크하다가 그만 뒀다. 책 읽다가 성질 나빠졌다는 말은 하기 싫으니까. 그래도 약간의 스릴까지 없었다고는 못하겠다.

사만다와 릴리가 일란성 쌍둥이라는 전제로 사건의 공통점으로 부각되면서부터 (소설의 거의 후반부라서) 시작된 흥미는 활활 타오르지도 못하고 그냥 바로 꺼졌다. 선천적 심장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심장 이식 수술을 받은 후부터가 흥미의 시작이라면, 앞의 부질없는 서론이 너무 길다. 물론 라이언의 의심을 살만하기에 충분할만큼 주변 인물들은,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지만 말이다. 주인공, 조연의 명 연기에도 드라마가 빛을 발하지 못한다면 그건 분명 시나리오의 문제다. 이 소설은 문제는 플롯이다. 너무 빈약하다.  그러나 돈의 무게를 벗어 던지고 홀가분하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대미를 장식한 라이언의 마지막 모습에는 그런대로 호응해 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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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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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칼랭>을 읽고 로맹 가리란 작가의 글력에 이끌려 이 책을 들었다. 16편이나 되는 단편들은 퍼즐 조각처럼 분명히 각각의 모양이 있었는데 아무리 조합하려 해도 그림이 완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했다. 작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읽을 수 있는게 단편인가, 단편으로 미루어 작가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는가에 대해 헷갈렸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보다 더 난해하다. 그의 사고와 철학적 울타리를 넘어 가기엔 내 다리가, 머리가 조금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장편들로 충분히 로맹 가리를 이해한 후였다면 달라졌을까? 



<몰락위선과 거짓에 대한 이야기다.
진실이란 것들이 실은 왜곡된 것일수도 있다는, 아니 진실은 없다  어디에도 없다, 라고 말하는 듯하다. 헐리우드 영화에서처럼 현실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영웅’이 등장한다.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영웅은 만들어진것이라고 믿기에는 우리가 영웅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너무 크다. 인간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가짜.>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 <어떤 휴머니스트> 자신이 맹신하는 철학적 근거에 균열을 일으키는 작품들이다. 진품에 대한 분명한 소유욕과 안목을 과신하는 S,  순수에 목말라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솔물적 근성에 묶여 자, 그리고 무모하리만큼 낙천적 믿음을 간직한 칼뢰비는 각각의 작품들 속에서 스스로의 굴레에 발목이 붙들린다. 이들이 가진, 독단적이며 우회하지 못하는 고집스러움에 대해 경고한다. 이 세 작품은 분명 경고이지 비난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들은 작가의, 인간에 대한 연민이다.  

<지상의 주민들>은 씁쓸하면서도 성냥팔이 소녀를 보는 듯, 조금 시린 얘기다. 세상에 대해 눈을 감아버린 소녀와 도붓장수 아돌프의 방랑, 여기서 아돌프는 자신을 태워준 운전사에게 봇물처럼 독백을 쏟아낸다. 로맹 가리는 외로움과 늘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그의 일생이 그를 외로움과 동행하게 했다. 그래서 이 작품 속에서 아돌프의 끝도 없는 독백은 로맹 가리의 말처럼 들린다. 굳게 입을 다물고 세상과는 소통되지 못하는 고독에 비관하면서 작품을 통해 무언가를 계속 쏟아내는 그, 그를 닮았다. 지상의 주민들은 어쩐지 슬프다. 그리고 외롭다.    


드문히 이해 되지않는, 그러니까 표제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비롯한  <본능의 기쁨> <고상함과 위대함> 등의 작품을  제외하고 다른 단편들에서 로맹 가리가 주로 사용하는 언어들은 낙천적(스스로 너무 강조한 나머지 비관적으로 보이는), 그리고 인간에 대한 조소와 연민이다. 마지막의 조소는 타인을 향한, 연민은 자신을 향한 마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는 지독한 외로움이다. 그 언어들로 조합된, 인간에 대한 쓸쓸한, 로맹 가리의 생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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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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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내겐 처음인 작가다.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되더라도 보통은 작가의 다른 장편을 먼저 읽는다. 나만의 우매한지도 모르는 이 고집스러움을 깨뜨린데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김영하니까, 그래도 괜찮겠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복잡한거야?", 라며
은근히 내 속에 있던 집요한 생각들을 핀잔하는 듯한 그의 단편들은,
그러나, 될대로 되라는 식의 우격다짐은 절대 아니다. 체념적이지도, 그렇다고 낙관적이지만도 않다. 
이런 표현조차 거추장스러울만큼, 그의 단편들은 신선하고 깔끔하다. 그 신선함은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앳된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변성기를 거치고도 맑은 목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맑은 목소리라는 것에, 그의 글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느낌상일뿐이므로. 실력있는 언더그라운드 가수의 탄탄한 보컬이라고 해야할까, 암튼, 그의 글을 읽는 동안 그런 느낌을 받았다. 섬세한 문체나 수식어구의 미려함도 없고,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스토리도 아니지만
마음에 묵직하게 무언가 들어앉는다.  
    

"무슨 일이?"
<로봇>, <퀴즈쇼>에서 묻는다. 
오래된 연인에게서만 움트는게 사랑일까, 스치듯 만나는, 우연처럼 찾아오는 갑작스런 느낌, 연민..이런 것들에 대한 채색이다. 분홍빛, 선홍빛이 아니더라도 어쩌면 빛 바랜 갈색이거나 우울한 회색처럼, 혹은 로봇의 차가운 금속성이라도 어쩌면 사랑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걸 사랑이 아니라면 달리 무어라 불러야 할지..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영하 작가는 ’사랑따윈...’이라는 묘한 여운을 남긴다. 사랑따윈 아무렇게나, 아무렇지도, 가 아니라 ’사랑’따윈...’사랑’이란 단어에 의존하지 말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의 글에 대한 느낌을 단어로 표현하기가, 그래서 어렵다.


"내가 뭘 어쨌는데?"
보편적 사랑에 뒤이어 이별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흔한 얘기, 옛 사랑을 두고 다른 사람과의 또 다른 사랑을 찾아가는, 그래서 남겨진 사랑을 아프다, 라는 식상한 테마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새롭다.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얘기도 아닌데 그럴 수 있다고 느끼는건 김영하식 시니컬이다. 그러나 작가 이전에 남자 김영하는 여자를 충분히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듯한...원망에 가까운 미련을 품고, 또 뱉어낸다. 어떻게 그럴수 있지? 여자는..?  
그리고 <약속>에서 짧게 덧붙인다. 내가 뭘?      


"그의 이름만으로도 이미 소름이 돋았을 독자들이 널리고 널렸을 테니까" 
라고 소설가 박인규는 추천사에 언급한다. 글쎄...아직은 소름이 돋지 않는걸 보니 김영하 작가의 다른 작품을 곧 다시 만나야 할듯하다.   <악어>의 노래를, 김영하의,  소름이 돋을만큼의 노래를 듣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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