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칼랭
로맹 가리 지음, 이주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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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너무나 현실적으로 피부를 긁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아니, 1974년의 그로칼랭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이미터 이십센티미터짜리 비단뱀과의 동거가 그리 비현실적이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단순히 시간적 괴리감에서 오는 현실, 비현실감이 아니라는 점에서,  감정의 폭발적 반응에 비해 이성이 합리적 해석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무슨 말이 이렇게 꼬이는걸까. 이 책을 읽는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두 번을 연거푸 읽는대도 그랬다. 마침표와 쉼표의 경계까지 구분지어가며 읽는대도 분명 빠르게 읽혀졌고 지루하거나 난해하지 않았다. 최소한 로맹 가리의 언어들은 순진하리만큼 정직했다. 그렇지만  반복적으로 문장을 되뇌일때마다 매번 다른 글자들의 조합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 번의 해석이 탈피하고 또 다른 글자의 조합을 이해했다, 싶으면 또 허물을 벗어 던진다. 한 마디로 말해, 느낌을 표현하기가 까탈스럽고 정리가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로맹 가리 교주를 신봉하는 장 프랑수아 앙구에의 고무적인 선동(?)과 지나치리만큼 친절한 작품 해설이 소설보다 더 소설스럽게 구성되어 있다. 느낌을 정리하고 말 것도 없을만큼, 내가 읽은 그로칼랭에 선명한 종지부를 대신 찍어주었다. 이게 문제다. 소설의 이해를 위해 읽었던 머리말이, 뱀의 머리가 되어버려서 몸뚱아리를 지 맘대로 흔들어 대는 것 말이다. 서론이 길다. 뜸을 오래 들인탓에 밥이 눌렀다. 그러나 덕분에 눌린 누룽지가 아주 그럴싸한 맛이 나는게 와드득거린다. 그럼 이쯤에서 누룽지 얘기를 해 볼까.

쿠쟁은 그로칼랭(열렬한 포옹이라는 뜻)을 통해 자신의 지독한 외로움을 해결받고자 한다. 쿠쟁이 반려동물로 비단뱀을 선택한 이유는 책에 이러쿵저러쿵 써있다. 그러나 내 개인적 견해는, 변화를 갈망하는 자신의 탈피를 대신해 줄 대물로서의 선택이 아니었나싶다. 그것은 자신의 방황하는 희망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쿠쟁이 말했듯, 희망은 공포와 동행한다. 비단뱀을 선택함으로 쿠쟁이 감수해야 했던 것은 공포다.  물론 생태학적 외관상의 혐오스런 공포가 아님을 말해둔다. 비단뱀의 먹이를 해결하는 것과 그와의 동거로 인해 빚어지는 사회적 조롱과 편견에 대한 불합리한 시선에 대한 공포다. 그러나 쿠쟁은 그로칼랭을 통해 인간 세상을 다시 본다. 아니, 그로칼랭이 되어 인간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로칼랭이 됨으로써 인간 쿠쟁을 벗어던진다고 볼 수 있다.

로맹가리는 쿠쟁의 입을 통해 "변신은 내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가장 아름다운 일" 이라고 내뱉는다. 앞에서도 말했듯 그렇기에 탈피동물을 반려동물로 선택했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러나 작가 로맹가리는,  ’용감’을 필요로 하는 변신을 한다. 자기 자신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그는 에밀 아자르를 통해 변신을 꾀하고 있다. 물론 비난의 총대도 함께 건냈다. 그로칼랭으로의 생태학적 변이가 포함되고 아니고간에 세간의 오인 소지를 피하기 위해 이 작품을 고아로 만들어 버린 오류가 범해진 것은 아닐까. 로맹가리가 이 작품을 통해 완전한 변신이 가능했는지, 아니면  또 하나의 탈피에 불과했는지를 확인하기위해서라도 로맹 가리의 이전 작, <하늘의 뿌리>를 읽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다시 본론으로,


"그들은 내가 외부의 결핍 때문에 괴로워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내부의 잉여 때문에도 괴롭다." /164   

  
쿠쟁의 변신을 종용하는 내부적 소용돌이의 원인은 ’잉여’다. 잉여의 괴로움은 여지껏 건재하다.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면서, 두루 여행을 다니며 경험을 쌓아가며 우리는 축적한다. 끊임없는 축적이 이미 도달을 지나 잉여의 고통을 수반함에도 우리는 계속 쌓아가기만 한다. 그것들은 비대한 몸집으로 오히려 스스로를 덮치기에 이르른 것이다.  코르셋을 단단히 조여 비대해진 몸을 잘록하게 감추려는 거짓처럼,  두 팔이 있는 것처럼 속이는 것은,  인간의 옷을 입고 행세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인간이 거짓과 위선의 옷을 입고 자신을 숨기는 일에 얼마나 숙련되어 있는지의 조롱이다. 철저히 자기 자학적이다. 왜 이런 결말에 이른 것일까. 본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론 지금 입고 있는 모든 형태의 옷들이 불편하게, 과장되게, 혹은 부당하게 느껴질 때가 있음에도 쉽게 벗어 던질 수 없을 때, 그때가 정말 괴롭다. 그래서 내 안에 축적된 괴로움은 벗어날 구멍이 없다.  이 작품에서 쿠쟁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외로움의 극복이 아니다.  회복이다. 파괴된 자신의 세계를, 벗어 던진 허물의 일부를 되찾고 싶은 것이다. 궁극적 변신 말이다.  국한된 안간 사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자신만의 사고적 공간을 자유롭게 부유하는 것, 나 또한 두 팔이 없어도 자유로울 수 있는 그로칼랭이고 싶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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