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읽은 이택광의 <버지니아 울프 북클럽>은 좀 실망스러웠는데, 이번에 읽은 알렉산드라 해리스의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는 아주 좋았다. 짧은 분량이 아쉬울 뿐이었으니.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적인 소설과 에세이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책들과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듯. 다 좋은 책들이었다.

올해에는 읽다 만 <막간>이나 <제이콥의 방>, 그리고 아직 구하지 못한 허마이오니 리의 버지니아 울프 전기를 읽고 싶다.

 

 

 

 

 

 

 

 

 

 

 

 

 

 

 

 

 

 

 

 

 

 

 

 

 

 

 

 

 

 

 

 

 

 

 

 

 

 

 

 

 

 

 

 

 

 

 

 

 

 

 

 

 

 

 

 

 

 

독창적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줄거리였지만(출항), 울프는 이 흔한 소재를 가지고 모종의 아스라하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엮어냄으로써 뚜렷한 형태로 구체화되기를 거부하는 어떠한 의미를 가리켜보였다.

...이 침묵 속에는 여자들에게 주입되어 있는 수동성에 대한 울프의 맹렬한 비난이 깃들어 있지만, 그런 맹렬함이 터져 나올 만한 직접적 통로는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테렌스는 아무도 대변해주지 않는 여자들의 시각을 떠올리면서 "피가 끓지 않습니까?" 라고 묻지만, 독자의 귀에 들리는 것은 레이첼이 마음속에 떠올리는 막연한 대답과 레이첼이 겨우 꺼내놓는 양보와 타협의 몇 마디 뿐이다. 67

 

 

 

 

 

 

 

 

 

 

 

 

 

 

 

 

<밤과 낮>은 이행의 순간들에 주목하는 소설이자 "관습적 문체"가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하고 불확실한 것들로 가득한 소설이자 마구 뻗어나가던 책 전체를 끝부분에서 하나의 단순하면서도 비전의 속성을 띠는 이미지로 압축하는 소설이다. 캐서린이 랠프와 함께 환한 가로등길을 걷는 장면이다.

"불가사의한 수수께끼가 풀린 느낌, 어려운 문제가 해결된 느낌이었따. 우리가 혼돈과 혼란으로부터 평생을 바쳐서 다듬어내고자 하는 비뚤어짐 없는, 모자람 없는, 허술함 없는 유리구슬을 캐서린은 아주 짧은 순간 두 손에 담은 느낌이었다."

울프의 이후 소설들이 지향하는 선명한 비전을 미리 일별할 수 있는 순간이다. 77-78

 

 

 

 

 

 

 

 

 

 

 

 

 

<밤과 낮>은 울프의 전시 소설이다 (1918년 가을에 전쟁이 끝나면서 이 소설도 완성되었다). <밤과 낮>을 쓰는 동안 바람결에 실려 오는 소리들 중에는 프랑스 북부의 포탄소리도 있었다. 낮게 우르릉거리는 죽음의 소리는 약했고, 멀었고, 어떤 일상과도 잘 어우러지지 않았다.

나중에 <등대로>에서 울프는 앤드류 램지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꺽쇠 괄호에 넣게 된다. 그래서 전쟁이 비현실적이고 먼 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전사가 충격적인 죽음, 개죽음이라는 느낌은 그만큼 더 강해진다.

혹자는 울프가 자기 시대의 대규모 분쟁들을 직접 다루지 않은 작가라고 비판하지만, 울프의 모든 전후 소설들은 우리가 전쟁으로 무엇을 잃어버렸나를 간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작품들이다. 79

 

 

 

울프에게 일기는 소설과 마찬가지로 삶의 덧없음에 저항하는 방법들 중 하나였다. 하루하루가 기록도 없이 그냥 흘러간다는 생각이 울프에게는 상실감의 원천이었다.

"삶이라는 수돗물이 그냥 허비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울프였다.

 

버지니아가 기록하고 싶어 하는 일 중에는 외적으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들도 있었다. 버지니아에게 더없이 행복한 하루는 더없이 조용한 하루인 경우가 많았다. 버지니아와 레너드는 일과표를 준수함으로써 모종의 생산성을 확보하는 하루하루에서 커다란 기쁨을 느꼈다.

.... 1922년 어느 목요일의 하루 일과를 완수한 버지니아는 그 날을 가리켜 "아름다운 서랍들을 아름답게 조립해서 만든 완벽한 캐비닛 같은" 날이었다고 했다. 버지니아에게 깊은 만족감을 안겨운 하루였다. 84

 

 

 

 

 

 

 

 

 

 

 

 

 

 

"삶이라는 수돗물"은 그렇게 울프의 일기와 편지를 채워나갔다. 87

 

 

 

 

과거와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울프의 머릿속에 문득 소설 한 편의 형태가 떠오른 것은 평소처럼 타비스톡 스퀘어를 산책하던 1925년 봄의 어느 날이었다. 울프의 다른 많은 소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떠오른 형태가 끝까지 유지되었다. 울프는 산책에서 돌아오자마자 노트에 "H" 모양을 그렸다. ("두 개의 직사각형이 한개의 선으로 연결된 모양")

과거, 중간 휴지, 다시 이어지는 이야기, 이렇게 세 부분이었다. 이 단순한 구조가 <등대로>의 플롯이자 요점이었다.

울프 자신도 인정했듯이 <등대로>는 가족력의 유령들을 잠재우는 작업이었다. 121

 

 

 

 

 

 

 

 

 

 

 

 

 

 

 

바로 이런 단순한 사실에 감정적 무게를 실을 수 있다는 것이 울프의 특징이자 강점이다. 울프는 어떤 면에서는 복잡미묘한 작가지만, 울프가 늘 추구하는 것은 아무 군더더기 없는 더없이 단순한 문장이다.

완성을 앞둔 릴리에게 남은 일은 화폭의 중심에 선 하나를 긋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 선은 바로 그 선이어야 한다.

"계단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고 그림은 아직 어렴풋했다. 갑자기 맹렬한 기세로, 마지 그 선이 한순간 눈앞에 나타나기라도 한 듯, 릴리는 거기에, 중심에 한 선을 그었다."

울프는 이런 분명함의 경험들을 설명할 수 있는 모종의 철학을 마련하고자 애쓰고 있었다. 어렴풋했던 것들이 아주 잠시 분명해지는 충격적이거나 계시적인 순간들을 울프는 살면서 계속 경험해오고 있었다. 129

 

 

 

 

 

자신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은 울프에게 깊은 만족의 원천이었고, 자신의 돈이 삶의 질을 높여 주는 물건들로 번역된다는 사실은 울프 자신에게 바람직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상상력의 산물들을 꽃병이나 의자로 바꾸어놓는 돈의 연금술 앞에서 울프는 항상 경이로워했다.

<댈러웨이 부인>으로 번 돈은 몽크스 하우스에서 욕실 하나와 화장실 두 개로 바뀌었고 (그 중 하나의 이름은 '댈러웨이 부인 화장실'이었다.)

<등대로>로 번 돈은 자동차로 바뀌었다. 자동차는 정신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점에서 <자기만의 방>에서의 고급 런치와 같은 기능을 한다 (좋은 글은 정신의 풍요로움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울프 부부의 싱어 자동차 (애칭은 '등대')가 울프의 정신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주었는지는 <올랜도>의 문장 속에서도 감지된다. 장면이 휙휙 바뀌고 세상이 활짝 열린다.

.... <올랜도>로 번 돈은 몽크스 하우스에 울프의 새 침실을 마련하는 데 들어갔다. 146-148

 

 

 

 

 

 

 

 

 

 

 

 

 

 

 

 

 

 

 

실제로 울프는 <세월> 곳곳에는 사실들에게 극도의 아름다움을 허용함으로써 자신이 일상의 것들을 미학적 쾌감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세월>은 어른거리는 물그림자 같은 작품, 정확히 포착할 수 없는 중요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고, <세월>의 등장인물들은 "또 다른 삶", "또 다른 세상"에 대한 막연한 비전을 어떻게든 표현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세월>에서도 이면의 패턴을 찾는 일이 걔속된다는 뜻이다.

엘리노어는 이렇게 자문해보기도 한다.

"그 패턴을 만드는 건 누구일까? 그 패턴을 생각해내는 건 누구일까?" 183-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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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이긴 하지만 미국의 화가 엘스워스 켈리도 1950년대 후반부터 일상적인 세계에서 발견한, 작지만 감동적인 것들을 그렸다는 면에서 피핀과 유사하다. 건물에 드리운 햇살이나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책상의 모서리, 납작하게 눌린 버터 덩어리 등 일상의 꾸밈없는 사실들에서 아주 단순한 형태를 걸러내어 현기증이 날 정도의 색들을 칠했다. 이들을 보면 그림의 원천이 된 일상의 매력들이 궁금해진다. 그의 그림들은 미묘한 시각적 차이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캔버스 크기의 1인치 차이나 이들을 벽에 건 위치의 작은 차이조차 거의 윤리적인 선택같이 느껴진다.

 

 

 

 

 

 

 

 

 Austin church - Ellsworth Kelly's Temple for Light

 

 

 

 

 

 

 

 

 

켈리의 작품들은 우리들도 그런 미묘한 차이를 알아볼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다. 작품들은 마치 "당신은 영리하군요. 왜냐하면 단순함이 쉽지 않다는 걸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라고 말하는 듯하다. 실제로 단순함은 쉽지 않다. 켈리의 그림들은 세상이 그런 작은 기적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해 준다. 그림의 기본적인 메시지는 민주적이다. 그것이 뭉그러진 버터 덩어리가 됐든 펄럭이는 깃발이 됐든 우리만 준비가 되면 언제든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286-287

 

 

 

 

 

 

 

 

 

 

 

 

 

 

 

 

 

이것이 바로 평범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기리는 모든 위대한 예술의 공통적인 메시지다. 이들은 차분하게 기다리라고 한다. 미켈란젤로나 피카소 같은 영웅적인 예술가들은  신들과 영웅과 신화적인 세상을 불러내 우리를 현실로부터 잠시 멀어지게 하고 감정을 격앙시켜서 좀 더 높은 영역으로 들어올린다. 하지만 에두르는 예술가들이야말로 한 박자 늦추고 마음을 가라앉혀 우리가 보지 못하던 현실을 보게 하는 능력이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도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화가들은 외부 세계에 대해 배우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고 했는데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이 바로 그런 예였다. 287 

 

 

 

샤르댕은 그가 스스로 정한 영역에서 가장 훌륭한 화가였고 그 영역은 말할 수 없이 좁았다. 파리에서 반세기에 걸쳐 작품 활동을 하는 동안 샤르댕은 3-4피트(1미터 안팎) 안에 있는 코앞의 것들에 집중하면서 보냈다. 그는 똑같은 오지그릇, 과일, 달걀, 죽은 토끼를 그리면서 때로 하녀들이나 아이들과 섞어 그렸는데 이들은 차분하고 움직임이 거의 없어서 주변 정물과 잘 어울렸다. 288

 

 

 

 

 

 

 

 

 

 

 

인물들은 얀 베르메르의 그림 속 인물들처럼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멈추어 버린 것 같다. 그래서 더 견고하고 진짜같다. 베르메르가 그린 인물들은 이 세상 사람들 같지 않아서 거의 신성해보이기까지 한다. 신비로운 대기를 채우기 위한 빛의 사물이랄까.

 샤르댕의 인물들은 하녀와 학교 선생과 주부들인데 언제나 뭔가에 열중하고 있어 우리의 존재는 안중에 없는 듯하다. 그들의 이런 몰입은 샤르댕 작품의 가장 본질적인 정서이다. 엄마가 보닛을 고쳐 쓰는 동안 소녀는 거울을 보고 있기도 하고, 간호사가 냄비의 기다란 손잡이를 팔로 받치고 삶은 달걀을 까고 있기도 하다. 이런 그림에서 샤르댕은 짧은 순간들을 영원으로 늘이고 있다. 289

 

 

 

 

 

 

 

 

 

 

그 과정에서 그는 뭔가 사소한 것을 보았다는 느낌, 그리고 기억에 남을 뭔가 인상적인 것을 보았다는 것을 보았다는 느낌을 동시에 전달한다. 감각적인 기억은 기억하고 있는 대상의 중요성을 한껏 높이는 신기한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어떤 냄새나 음악의 곡조, 한 줄기 바람은 즐거웠던 여행이나 어린 시절 놀던 일, 죽은 사촌 등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은 거기서 기억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프루스트가 샤르댕을 그토록 좋아한 건 당연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당신은 이미 무의식적으로 경험을 했다. 일상생활과 정물을 보면서 어떤 즐거움을 느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샤르댕이 울림 있는 강한 어조로 기억을 불러내더라도 마음속에 그런 정서가 일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의 의식은 스스로 돌이키기엔 너무 게으르고, 샤르댕이 와서 이를 붙잡아 의식 속으로 불러내기 전까지 그 기억은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온건하고 부드러운 색조의 샤르댕의 그림이 '울림 있는 강한 어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샤르댕은 이미 거기 있는 것을 보여 줄 뿐 아니라 단순한 현실 속의 더 깊은 진실까지 밝힌다고,  그리고 삶에서처럼 그림에서도 진실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다시 말해 색과 형태의 상호작용과 조화로운 기하학을 통해 그 밑에 깔려 있는, 세상을 이루는 기본 질서가 드러나고 이는 우리에게 엄청난 위안을 준다. 290

 

 

 

 

 

샤르댕의  다른 그림처럼 이 그림은 익숙하고 개인적인 느낌을 주면서 편안하고 가정적인 성격을 지닌다. 은색 컵과 크리스털 술병, 구리 잔들은 모두 타원형이어서 화면 전체에서 서로서로 호응을 이룬다. 완벽한 평화와 균형을 이룬 그림이다.

예술은 컵에도 접시에도 거리에도 있다. 291 

 

 

 

 

오늘날의 우리는 그가 진솔했기에, 심오한 예술가이기에, 또는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예술가로서 좋아한다. 드니 디드로가 샤르댕을  좋아했던 가장 큰 이유가 그거였다. 그의 그림 속에는 건방짐도 속물근성도 섹스도 없다. 양파는 양파가 양파였다.

회화에 대한 이렇게 정숙하고 겸허한 접근 방법이 서양미술사를 통해 가장 선정적이고 화려하고 수사학적으로도 거창했던 시대에 나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로코코는 샤르댕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프랑수아 부셰의 탁월한 기량으로 대표되던 시대였다. 샤르댕의 예술은 대부분의 로코코 예술과 대조적으로 섹스가 아니라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그림 속에서 침대보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림 속에 에로티시즘이 있다면 그건 그가 '사랑스레' 만진 물감을 볼 때이다. 고들여 칠하고 또 칠한 물감은 굉장히 관능적일 수 있다. 294

 

 

 

 

 

무슨 이유에선지 샤르댕은 음식을 그려도 신에 대한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내 생각에 그 이유는 그림의 고요함이 지니는 어떤 특별한 성격 때문인 것 같다. 그의 그림들은 평범한 사물들이 지닌 존엄성에 대해, 그런 사물들을 표현할 수 있는 회화의 힘에 대해, 그리고 이를 오래도록 바라보는 관객이 경험할 '고양됨'에 대해 특별한 종류의 조용한 경의를 표한다.

샤르댕의 그림을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예를 들어 그림 속의 체리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쩜 이렇게 투명해 보일까를 궁금해하다가는, 체리의 수까지 세게 된다. 체리는 ㅅ다섯 알인데, 이는 복숭아 두 개와 파란 사과 하나, 갈라진 살구의 두 부분의 총합과 일치하여 그림에 완벽한 균형감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별거 아닌 관찰일지 몰라도 발견하게 되면 놀랍다. 삶에 있어 사소한 사실들이 더 큰 진실을 푸는 열쇠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미술사 속에서 샤르댕의 작품들은 이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의 가치를 기록하는, 작은 사실들을 집대성한 편찬물이라 할 수 있다.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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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술관에서 아우라를 내뿜는 원본 모나리자와 많은 사람들이 소유하고 즐길 수 있는 모나리자 엽서. 나(데이미언 허스트)는 그 두 가지가 모두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42

 

 

 

 

 

 

 

 

 

데이미언 허스트의 스핀 페인팅

 

 

 

 

 

 

 

 

데이미언 허스트의 도트 페인팅 

 

 

 

 

 

 

 

 

 

 

 

데이미언 허스트의 포르말린 시리즈 

 

 

 

 

 

 

 

 

 

 

 

데이미언 허스트, 실제 나비를 사용한 나비 시리즈, 그 앞에 선 작가.

 

 

 

 

 

 

 

 

 

 데이미언 허스트의 조각 The Miraculous Journey  - 카타르, 도하 전시

 

 

 

 

 

 

 

왜 곡선에 집착하나.

- 정지해 있지 않고 열정적이니까. 마치 여체처럼. 나는 비행기, 자동차 같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빠른 '움직임'을 건축에 반영하고 싶었다. 영국박물관의 '엘긴 마블스'를 본 적이 있나. 거기 방패를 든 전사들이 새겨져 있다. 그 조각에서는 방패의 '무게'가 느껴진다. 내(프랭크 게리)가 건축에 반영하고 싶은 건 그런 거다. 126

 

 

미생물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에도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 미국 소설가 헨리 제임스가 "창의성이란 우물에 작대기를 넣어 휘휘 저었을 때, 그 끝에 걸려 나오는 어떤 아름다움" 이라고 했다. '창의성'이란 예상치 못한 어떤 '발견'이다. 건축에서의 '창의성'과 자연과학의 인간 유전자 발견 같은 건 같은 이슈라고 생각한다. 암 억제 세포와 내 작품의 모양이 신기하게도 닮았더라. 130

 

 

 

 

 

프랭크 게리, 구겐하임 빌바오

 

 

 

 

 

 

프랭크 게리, 댄싱 맨션 인 프라하

 

 

 

 

 

 

프랭크 게리, 뉴욕 레지덴셜

 

 

 

 

 

 

프랭크 게리, 메종 루이비통 인 서울

 

 

 

 

 

 

프랭크 게리, 와인 시티 인 리오하

 

 

 

 

 

 

 

 

 

 

 

 

앙리 르롤, 오르간 리허설

 

 

 

 

 

 

 

 

 

 

 

하나의 화면을 여러 개로 분할해 연관 없어 보이는 여러 이미지들을 뒤섞어 보여주는 기법으로 주목받았다. 왜 그렇게 그렸나.

- 우리의 삶이란 게 그런 식으로 움직이니까. 수많은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게 인생 아닌가. 그림이 '눈의 경험'이라는 관점에서도 그렇게 그리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한 화면에 여러 사건이 펼쳐질 때, 눈은 세계의 복잡성을 경험하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인다. 그게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179 데이비드 살리

 

 

데이비드 살리, 피에로

 

 

 

 

 

데이비드 살리, 애쉬튼

 

 

 

 

 

 

데이비드 살리, comedy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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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래피라는 말이 처음 생긴 것은 19세기였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지적한 것처럼, 빅토리아 시대에 섹슈얼리티를 분석하고 억압하는 데 집착한 것이 오히려 이를 더 강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문란을 방지하는 법안이 바쁘게 통과되고 있을 때 시장에는 외설물이 넘쳐 났다. 새롭게 등장한 사진과 영화가 더 발달하게 된 것도 어떤 면에서는 빅토리아 시대에 누드 사진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시각적 도덕성의 다양한 정도를 즐기면서 점잖음과 음탕함의 동침을 꾀했다. 그래서 화가들은 자극을 원하는 관객들을 위해 겉으로는 진지한 그림처럼 가장해서 역사적인 주제로 꾸민 누드를 그렸다. 이를테면 혹사를 당한 듯한 젊은 처녀들이 바위나 기둥에 사슬로 묶여 있거나 천을 두르고 배에서 있거나 또는 옷을 벗은 젊은 노예들이 고대 로마의 원형 대경기장에서 사자에게 먹히기 전 영웅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림들이다. 욕탕에 몸을 담근 고대 로마인들 옆에서 볼이 발그레한 영국 소녀들이 요염한 자세를 취하고 있거나, 자기들이 그리스인이라도 되는 양 벌거벗은 채 해변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소년들의 그림도 있다. 이런 그림들은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는 것 같다. 하지만 당시엔 그 경계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225

 

 

 

 

 

빅토리아 시대 화가인 Ernest Normand의 그림들

 

 

 

"시각적인 진실은 기존의 교과서적인 시각이 거짓이라는 걸 알려주지요. 세잔이 옳았어요. 탁자의 가장자리 선처럼 하나의 선은 테이블보 같은 물건에 의해 끊어지는데, 그 선은 테이블보를 가로지르는 논리적 연장선상에서 벗어난 다른 위치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 같아요.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그게 눈이 보는 방식이고 사실주의의 본질이에요." 230-231

 

 

 

이탈리아의 위대한 정물화가인 조르조 모란디는 볼로냐에서 은둔하듯 조용히 살았다. 어머니와 세 명의 미혼 누이들과 한 집에 살면서 침실을 작업실로 사용했다. 세상의 변하는 취향에 대해선 신경 쓰지도 흔들리지도 않고 평생 동안 병과 그릇과 비스켓 통 등을 그렸다. 섬세하고 작은 것을 천천히, 그리고 열심히 보라는 그의 메시지는 간단했지만 아주 풍성한 것이 되었다. 232 

 

 

 

 

 

 

 

 

조르조 모란디

 

 

 

 

 

벤야민의 예언처럼 원작에 대한 갈망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지난 세기 동안 우린 뭔가 잃어버리긴 했다. 미술 작품을 보기 위해 떠나는 순례 여행이 그것이다. 우리는 인터넷과 대중매체를 통해 도배된 작품 이미지에 노출되어 있고 미술관들은 작품을 여기로 보냈다가 저기로 보냈다가 한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이런 문화 때문에 직접 가서 보는 '고유한' 경험이 더 중요해졌다고 할 수 있다. 거기까지 가는 여행이 별로 힘들지 않더라도, 미술 작품을 보러 떠나는 순례 여행은 작품 감상에 있어 바람직하고 본질적인 요소인 '타자적' 환경을 제공해 준다. 삶에서 특별한 것을 표현하는 예술의 본래적 의미를 되찾게 해 준다. 236-237

 

 

모든 작품은 우리가 감상하는 그 순간, 주변 환경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는 장소 특정적 예술이 된다. 그게 붐비는 미술관이든, 친구의 거실이든, 또는 사람이 없는 성당이든 마찬가지인데, 특히 거기까지 간 이유가 그 작품을 보기 위해서였을 때는 더욱 그렇다. 238

 

 

 

 

나는 텔레비젼 프로그램 촬영 때문에 마파에서 하루를 보낸 적이 있었다. 육군 주둔지에 있는, 개조한 대포 격납고 두 채에 설치된 작품 촬영 때문이었다. 거대한 반원형 지붕의 격납고는 마치 쌍둥이 고딕 성당 같아 보였다. 격납고의 작품은 저드의 걸작이었다. 그는 작품이 공간을 단순히 채우는 것이 아니라 더욱 명료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격납고 안에는 41*51*72인치(약 104*130*183센티미터) 크기의 가공 알루미늄 상자 100개가 배열되어 있는데 각 상자의 내부는 모두 달랐다. 격납고 측면의 문들을 개조해서 만든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은빛 금속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이를 보면 그의 조각들이 다가가기 힘들고 무겁고 기계적이고 단조롭다는 선입견이 허물어진다. 미니멀리즘이 본질적으로 역설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순례를 통한 작품 감상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 또한 느끼게 된다. 작품을 찍은 사진만 봐서는 반사된 빛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알 수가 없다. 반짝이는 금속 표면에 얼굴이 거꾸로 비치고 격납고 건물 내부도 상자 표면에 끝없이 반사된다. 마치 베네치아 궁전의 고딕 세공이 대운하 수면에 반사되는 듯하다. 집착처럼 반복되는 상자의 형태가 변하는 햇살이 만드는 우연적인 효과와 공존했고,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금속 상자의 모서리가 부드러운 햇살의 파장으로 흐물거리는 것을 보는 감각적인 즐거움 또는 시각적인 놀라움 때문에 작품에 손대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잊을 수 있었다.

 저드는 여행을 하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곳에 작품을 두었고, 가서 볼 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관객인 우리에게 남겨 두었다. 동시에 그는 예술의 위엄을 회복시켰는데 그것은 도덕적 주장이자 또 어떻게 서로를 대해야 하는가, 즉 차근차근 참을성 있게 하자는 은유이기도 하다. 저드는 그의 추상 작품에 비유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걸 꺼렸지만, 멀고도 먼 길을 가서 그의 성소를 보고 나면 그걸 간과하기 힘들다. 259-261

 

 

 

 

 

 

호레이스 피핀의 그림들은 언젠가 코넬 웨스크가 말한 것처럼 "미국 예술 속에 있는 에머슨의 풍부한 전통을 잇는 것으로, 평범하고 흔해 빠진 일상의 삶 속에 숨겨진 영화로움에 초점을 두었다." 에머슨은 이렇게 썼다. "나는 이탈리아나 아랍, 그리스의 예술이나 프로방스의 음유시처럼 거창하고 멀리 있고 낭만적인 것을 원하는 게 아니다. 나는 평범함을 껴안고, 발밑의 익숙한 것들, 낮게 있는 것들을 탐색한다."

 

일요일 날 아침을 먹으려고 모인 젊은 흑인 가족, 시무룩한 손자와 앉아 도미노 게임을 하는 주부(아마도 밖에는 비가 오고 있는 것 같다.), 자기 구역을 도는 우유배달부, 길거리 모퉁이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중년의 남성 4중창단, 공원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긴 남자가 피핀이 그린 그림들이다.

대부분 1940년대 그려진 이 그림들은 일상생활의 아름다움에 조용히 천착하는데, 1890년대 삶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서려 있다. 284

 

 

 

 

 

 

 

 

 

 

 

 

 

 

 

 

 

피핀은 성경에 나오는 얘기나 역사적인 장면, 풍경들도 그렸지만 아무래도 평범한 가정생활을 그린 그림으로 가장 유명하다. 그의 그림은 순진하거나 토속적이라기보다는 진솔하고 설득력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림 속의 모든 것을 애정을 갖고 꼼꼼하게 그렸고, 보석상의 진열장에서처럼 어떤 것들은 우리가 더 잘 볼 수 있도록 화면 앞쪽으로 튀어나오게 그렸다. 그의 그림들은 웨스트의 지당한 표현대로 "인간으로 존재하는 방법"들을 보여 주고 있다.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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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반쯤 농담이었겠지만 아렌스버그는 한술 더 떠서 그 작품이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형태"라고까지 했다. 이 말은 뒤샹에게조차 놀라웠다. 나중에 뒤샹은 사람들이 그의 레디메이드, 즉 상점에서 산 변기나 병꽂이, 금속 빗, 자전거 바퀴, 눈 치우는 삽 같은 공산품을 아름답다고 칭송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난 미학이란 것에 반대한 거였어요." 그가 말했다. "그래서 병꽂이나 변기를 그들의 얼굴에 들이대며 덤빈 건데 이제 사람들은 그걸 두고 미적으로 아름답다니 황당하지요." 78

 

 

 

뒤샹의 작품은 조각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때까지 조각이란 어떤 대상을 재현한 것, 인간의 손으로 어떤 재료를 환영으로 변형시킨 것, 영적인 모험 등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레디메이드는 보는 그대로였다. 변기는 그냥 변기였다. 그것이 표상하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전통 조각가들의 경우처럼 차별적인 취향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뒤샹은 '차별의 예술'대신 '지정의 예술'을 들여놓은 것이다. "나는 이 눈 치우는 삽을 예술이라 선언한다."라고 뒤샹이 말하는 순간 삽은 예술이 되었다.

 

그게 예술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말할 것인가? 같은 이유로 누군가 삽이 아름답다고 한다면 감히 누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78

 

 

 

 

 

아름다움은 그렇게 해서 공인된 비례를 따르는 이상적인 형태와 관련지어졌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단순히 수학적 공식을 따르는 일이라면 진부해지고 말 것이다. 오히려 정확히 그 반대여서, 뭔가 전형에서 벗어나고 예외를 세울 때 우리는 이를 두고 아름답다고 한다. 인체를 재현하는 예술에서 아름다움이란 유일한 공식을 따르는 게 아니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알브레헤트 뒤러의 누드는 미켈란젤로나 피카소와 다르며, 또 루카스 크라나흐의 것과도 다르다. 말하자면 이 예술가들은 모두 무언가 색다른3.

2 걸 창조하기 위해 고전적 비례를 왜곡시켰다.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말은 이를 잘 요약해 준다. "뛰어난 아름다움 중에 비례적으로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 경우는 없다." 81

 

 

 

 

 

또한 예술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보자마자 알 수 있는 질에 달려 있는 건 아니다. 그렇게 명백하다면 깊이가 전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이자 미술 비평가인 아서 단토는 아름다움이 그저 장식적인 것에 그치지 않으려면 예술 속에 더 깊은 근거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즉 예술의 본래적 의미와 관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91-92

 

 

 

 

 

 

예술은 어떤 차원에선 이미 마음의 상태이다. 물론 예술이란 우선 우리가 어느 순간 소통하는 물리적인 오브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작품을 보고 난 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기억 말고 또 뭐가 있을까? 기억은 생각이고 예술가가 심은 정신의 씨앗이다. 그리고 이는 작품을 보고 기억하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게 재현된다. 예술의 힘은 변하는 기억, 만질 수 없는 개념으로서 개개인의 의식을 거치며 번성한다는 데 있다. 114

 

 

 

 

 

케이지의 조용한 혁명 후에 이어진 예술 중에는 물론 실망스러운 것도 적지 않았지만 그 밑에 깔린 생각 자체는 잊어선 안 된다. 감각을 깨워라.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을 들어 올려라. 예술이란 고양된 자각의 상태에 관한 것이다. 일상을, 적어도 일상의 부분 부분들을 예술 작품 대하듯 하라. 118

 

 

 

 

렘브란트 같은 작가의 작품들은 예술이고 비싸니까 당연히 수집할 가치가 잇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힉스 씨가 증명하듯 수집가들이란 미적으로나 금전적으로 가치가 있건 없건 닥치는 대로 수집하는 경향이 있다. 예술에 있어 취향이 그런 것처럼 수집에 있어 가치란 수집가의 감식안에 있고 진정한 가치는 상징성이 있을 때 최대가 된다. 수집품들은 효용을 잃을 때 상징성을 띠게 된다. 133

 

 

 

 

"어떻게 그림을 그릴 것이냐를 고민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붓 자국을 없애는 거였어요. 선명한 붓질이야말로 추상 표현주의의 핵심이었으니까요. 그게 내가 배운 거였죠. 드 쿠닝은 붓질에 있어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라고 할 수 있어요. 굉장했죠.

빌렘 드 쿠닝, 무제

 

 

 

 

하지만 나(펄스타인)는 매끈하게 마감된 표면을 택했어요. 그래도 그림의 각 부분마다 고유한 질감이 있죠. 살은 살대로 트랙터는 트랙터대로. 그림이란 원래 완전히 평평할 수는 없어요.

 

 

필립 펄스타인, 두 모델과 같이 있는 무대의 꼭두각시 미키마우스, 점보제트기, 장난감 트랙터 

 

 

몬드리안의 그림도 자세히 보면 울퉁불퉁해요. 표면이 살아 있죠. 그는 고쳐 가며 오래도록 그림을 그렸는데, 선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때까지 그림을 오랫동안 쳐다보고 그림을 고쳤어요. 그게 몬드리안 그림이 지닌 시간적 요소예요. 나는 뉴욕 현대미술관에 있는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를 뚫어져라 쳐다보곤 하는데 단지 그림 속 형태들이 통통 튀는 걸 보기 위해서예요." 223

 

 

몬드리안,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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